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2월

싸라리리 2026. 1. 4. 08:56
반응형

2월 1일 병오

사은사 신경진이 심양에서 돌아와 청국에서 보낸 마필(馬匹)과 은(銀)·초피(貂皮)를 올렸는데, 해조로 하여금 처리토록 하였다.

 

2월 3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자주 병란과 흉년이 잇따라 굶어 죽는 자가 즐비하다. 이는 내가 부덕한 때문이니, 이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그지없다. 불쌍한 우리 백성 중에 늙고 병든 자는 더욱 구휼해야 할 것이니, 경외의 남녀 가운데 나이 80 이상인 자와 중병을 앓는 자에게 등급을 나눠 미곡을 지급하여 위급함을 구제토록 하라."

 

이필행(李必行)을 사간으로, 유경즙을 장령으로, 이도장(李道長)을 헌납으로, 신민일(申敏一)을 동부승지로, 심대부를 부교리로, 남이웅(南以雄)을 이조 판서로, 심기원(沈器遠)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이때 대신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의천(議薦)하였는데, 이조 판서에 의망할 만한 자가 적다고 하여 종2품을 함께 의망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고, 이경석(李景奭)·이경증(李景曾)·이식(李植)을 의망하였으나, 상이 또 가망(加望)하도록 하였다. 당초에 대신들이 남이웅을 의망하려다가 이웅의 위인이 거칠고 본래 인망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영상 홍서봉(洪瑞鳳)이 병으로 참여하지 못한 가운데 좌상 신경진이 남이웅과 이명한(李明漢)을 가망하여 올리자 이웅이 임명된 것이다.

 

옥당이 천변(天變)으로 인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차하면서 시폐(時弊)를 낱낱이 진달하고, 보양관(輔養官)을 두어 원손(元孫)을 가르칠 것을 말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였다.

 

2월 4일 기유

간원이 아뢰기를,
"안산(安山)의 어전(魚箭)을 1년 기한으로 폐지시킨 뒤 작년에 다시 설치하려던 차에 비국과 정원의 계사로 인해 정지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해원(該院)에서 다시 설치하려 한다고 합니다. 지금 기읍(畿邑)의 기근이 더욱 심한데다 부역마저 전일보다 배나 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현재 도탄에 빠져 있으니, 이미 혁파된 어전을 다시 설치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들으니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저택 공사를 지금 시작한다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지금을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생이 곤경에 처해 있고 재난이 거듭되는 그야말로 상하가 걱정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대군을 위해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국조(國祚)가 공고해지기만 한다면 대군이 어찌 집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만 백성이 보전되지 못하고 국가가 불안하다면 어찌 대군 혼자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어전을 예전대로 혁파하고 집짓는 공사를 빨리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전의 설치를 해마다 막는다면 너무 박절하지 않겠는가. 대군의 집은 사재(私財)로 수선하는 것이니 폐단을 끼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버려 두라."
하였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라 명하였다.

 

2월 5일 경술

간원이 어전과 대군의 저택 문제로 연계(連啓)하니, 답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어전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일개 현감(縣監)만도 못하다면,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시습(時習)이 이와 같으니 계사대로 폐지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3건(件)의 쇄환할 사람으로 이미 들여보낸 자가 5백 44명이니 모자라는 수가 66명입니다. 그런데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자는 57명뿐으로 모두 들여보낸다 하더라도 6백 명의 숫자에는 차지 못합니다. 의주·안주(安州)·정주(定州)의 세 고을에 갇혀 있는 사람 중에 쇄환해야 할 자를 조사하여 들여보내 그 숫자를 채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필선 이원진(李元鎭)이 심양에 있는데 모상(母喪)을 당하였다. 비국이 속히 대임자를 차출하여 보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강원(講院)의 인원 수가 매우 많으니 3인으로 한계를 정하라."
하였는데, 끝내 차견(差遣)하지 않았다.

 

2월 7일 임자

윤득열(尹得說)을 동부승지로, 권우(權堣)를 정언으로 삼았다.

 

2월 8일 계축

헌부가 여러 궁가(宮家)에서 어염세(漁塩稅)를 거두는 폐단을 빠짐없이 진달하고, 각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엄금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0일 을묘

심양에 가는 어영군(御營軍)을 호궤할 것을 명하고, 이어 면포(綿布)를 하사하였다.

 

2월 11일 병진

윤지(尹墀)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최유연(崔有淵)을 좌부승지로, 조경(趙絅)을 응교로, 김경여(金慶餘)를 부응교로, 이만(李曼)·김홍욱(金弘郁)을 수찬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지평으로, 박종부(朴宗阜)를 정언으로, 이현영(李顯英)을 예조 판서로, 김영조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지난 겨울 용호(龍胡)가 의주에 도착하여 멋대로 논의했다는 이유로 김상헌 등을 내놓으라고 핍박하였을 때, 상과 대신이 모두 난처하게 여겼다. 그런데 김영조가 대사헌으로 입시하여 상이 속히 결단하기를 권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2월 12일 정사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차하기를,
"사기(史記)란 한 시대의 전장(典章)이며 만세의 귀감입니다. 이는 하늘이 내린 질서가 깃든 바요, 인심과 사론(士論)이 매인 바이니, 나라에 사기가 없다면 나라가 아니요, 사기가 공정하지 못하면 사기가 아닌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남도(南渡)하여 행도(行都)002)  도 정하지 못하고 화(和)·전(戰)마저 결정되지 않아 매우 혼란하였던 때에 원우 태후(元祐太后)가 제일 먼저 국사(國史)를 개수하여 선인 고황후(宣仁高皇后)003)  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변정할 것을 청하자, 고종이 즉시 사관(史官) 범충(范冲)에게 명하여 옛것에 의거하여 개수하게 하였으니, 이를 주묵사(朱墨史)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시의 대유(大儒) 장식(張栻)은 말하기를 ‘이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하는 대본(大本)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번째가 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나라 문물의 구비와 인재의 모임이 선조(宣祖) 시대보다 성대한 때가 없었습니다. 비록 의리를 지키다가 난을 만나 찬란한 문물이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천심(天心)이 흠향하여 강토가 다시 정해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인의 깊은 우려로 인도된 것 아님이 없고, 또 사기(事機)의 변화에 따라 임기 응변한 공적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 아님이 없으니, 간책(簡策)에도 이 시대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폐조(廢朝) 때에 간신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기자헌(奇自獻)이 총재(摠裁)가 되고 이이첨(李爾瞻)·박건(朴楗) 등이 찬수(撰修)의 일을 전담하여 구록(舊錄)을 몰래 삭제하고 스스로 무필(誣筆)을 가하였기 때문에 시비와 명실이 일제히 전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첨이 좋아하던 5, 6인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꾸며 미화하여 성현인 양 추켜세운 반면, 이 밖의 명신 석보(名臣碩輔)와 도학의 선비 및 그가 평소 미워하거나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추악한 내용으로 매도하면서 역사를 왜곡하였다는 죄를 덮어씌웠습니다. 심지어 그의 말년에 썼던 유영경(柳永慶)과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일은, 감히 일월의 밝음을 더럽히고 천지의 광대함을 엄폐시켜 마치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이 선인(宣仁)을 무함했던 것004)  과 간궤(姦軌)가 동일하니, 이는 더욱 신하로 서는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고(史庫)의 장서(藏書)를 외부 사람이 두루 살펴볼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전후로 실록을 상고할 때 사신(史臣)들이 직접 보고 서로 전한 것에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는데, 진실로 천고에 없던 사가(史家)의 큰 변고였습니다. 그래서 계해년 반정(反正) 초기에 연신(筵臣) 이수광(李睟光)·임숙영(任叔英) 등이 즉시 수정하기를 청하여 성지(聖旨)의 윤허를 받았고, 이듬해 봄에도 상신 윤방(尹昉)과 재신(宰臣) 서성(徐渻) 등이 잇따라 신청하여 모두 윤허를 받아 속히 거행토록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일을 중요시하는 성상의 뜻은 더할 나위가 없었는데도 국가에 일이 많고 유사(有司)가 비용을 아낀 나머지 《광해일기(光海日記)》조차 소홀하게 일을 마쳐 겨우 관각(館閣)에 내놓을 정도였고, 대소 신료들도 시무(時務)에 얽매여 문사(文事)에 손쓸 틈이 없어 우물쭈물하다가 잊어버린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늘 변란을 겪게 되었고 보면 사고의 유문(遺文)과 야록(野錄) 및 가전(家傳)의 서적들이 거의 다 인멸되었는데, 또 지금은 그 일에 노련한 신하들이 죽거나 흩어져 조정에 남은 자는 한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다시 수년이 지나면 신과 같은 무리도 필시 점차 죽어 없어져, 눈 귀로 보고 들은 바가 다른 시대의 일이 되어 버려서 잘못된 사기가 마침내 사실이 될 것입니다. 대체로 국가는 멸망해도 역사만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고금의 지론(至論)인데, 지금은 국가는 망하지 않았는데도 역사가 먼저 망한 실정입니다. 더구나 무망(誣罔)한 붓끝이 성미(盛美)를 더럽혔는데 천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영원히 씻겨질 희망이 없고 보면, 이 어찌 우리 나라 신하로서 죽을 때까지 한없는 슬픔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상신(相臣) 2, 3인과 이 일을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서울에 국(局)을 설치하고 각처의 장본(藏本)을 모아 한꺼번에 수정하게 되면 몇 달이 못 되어 마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더니, ‘이 어려운 때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큰 문제인데다 많은 《실록》을 오래도록 서울에 두었다가 뜻밖의 일이라도 생길 경우 모두 잃게 될까 두렵다.’고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야언(野言)과 가록(家錄)을 수습하여 절충하고 필삭(筆削)을 가한 뒤 사고(史庫)에 보관하는 것도 주묵사(朱墨史)의 유의(遺意)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곤란하게 여기는 자들은 그렇게 할 경우 크게 씻어버리지 못하고 조금 보충하는 정도로 그치게 되는 것을 또 불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도 공연히 말만 하고 생각만 했을 뿐 스스로 과감히 맡아 힘쓰지도 못한 채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나이는 늙고 뜻을 잃어 만사가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 일념만은 마음에 새겨 잊지 않으면서도, 어느날 갑자기 죽어 한을 품은 채 땅속에 들어가게 되지나 않을까 늘 두렵게 느껴지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한 가지 방법을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국력이 고갈되고 시세가 불안하여 구본(舊本)을 수정하는 일을 착수하기가 실로 어렵지마는, 그래도 해 볼 만한 방법은 있습니다. 지금 야언이나 가록이 모두 없어지지는 않았으니, 문학에 박고(博故)한 당상과 당하 3, 4명을 선정하여 모두 실직(實職)으로 춘추관(春秋官)을 겸하게 하고 특별히 대신이 그 일을 지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국(局)과 고(庫)를 개설하여, 해조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대어주게 하는 동시에 산원(算員)을 정하여 날마다 꼭 쓸 것을 계획하여 낭비가 없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또 각사에 남아도는 서리(書吏)와 사령(使令)을 가려내어 돌아가며 인원 수를 정해 사환(使喚)과 수직(守直)의 일을 맡겨서 별도로 늠료(廩料)를 허비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사필(史筆)을 비장(秘藏)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니, 서사(書寫)하는 모든 일 역시 글씨 잘 쓰는 이배(吏背)들을 뽑아 분담시켜 쓰게 하면 또한 더 드는 비용이 없을 것입니다.
편집하는 범례에 있어서는, 먼저 사대부 집안에 소장된 기록을 찾아 들이는 한편, 외방은 각도의 도사(都事)로 춘추관을 겸하게 하여 민간에서 널리 찾아 모아 올려 보내도록 한 연후에, 대신들에게 품재(稟裁)하여 시비와 명실에 잘못이 없는 것을 골라 한 부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 명신과 선사(善士)들의 비지(碑誌)와 장전(狀傳)을 골라 각기 사마광(司馬光)의 《백관표(百官表)》와 주자의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모방하여 한 부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수집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리겠지만 산정하는 일은 불과 몇 달이면 완결될 것입니다. 또 선조(先朝)의 명신 대유의 문집으로서 전장(典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조종조에서 당시의 제술(題述)을 사고에 함께 보관했던 전례에 의거하여 모두 같이 전하게 한다면, 거의 한 시대의 전형(典刑)이 되는 것은 물론, 후세에도 징험이 될 것입니다.
옛날 저술에 힘쓴 선비 중에는 필부의 힘으로 수백 권의 책을 모아 완성시킨 자도 있었으며, 전고(前古)의 사지(史志) 중에는 전쟁으로 혼란한 때에 만들어진 것이 더욱 상세하고 명확한 것이 있었으니, 범충(范冲)의 사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중원(中原)은 오로지 문헌을 일삼았고 군상(君上)도 그것을 중요시하여, 꼭 한두 사신(史臣)에게 위촉한 뒤 그 뜻을 펴게 하고 그 사업을 마치게 하였으므로, 역대의 사기가 저같이 성대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외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건대 선조(先朝)의 잘못된 사기가 대의에 관계되는 이상, 그냥 범연히 여긴 채 망극한 점욕(玷辱)이 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신이 꺼리지 않고 외람되게 품은 정성을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묘당에 내려 자문을 구하시고 속히 재처(裁處)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성구(李聖求)만은 경솔히 거론할 수 없다고 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은 이 일을 이식에게 전담시켜 수정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상이 최명길의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잘못된 사기를 개수하는 일은 막중하고도 급한 일이니, 의당 춘추관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사기의 일을 속히 완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초 《선조실록(宣祖實錄)》이 기자헌(奇自獻)과 이이첨(李爾瞻)의 손에서 이루어져서 한결같이 애증(愛憎)에 따라 포폄(褒貶)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선정(先正) 유현(儒賢)인 이이(李珥)·성혼(成渾) 같은 분과 당대의 명신인 박순(朴淳)·정철(鄭澈)·유성룡(柳成龍) 같은 인사들을 모두 없는 일을 날조하여 극구 모함하였고, 기타의 사류로서 조금이라도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비방과 배척을 당하여 한 사람도 면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당비(黨比)로서 이산해(李山海) 같은 무리들은 내용을 꾸며대어 극구 찬미하여 마지 않았다. 기축년005)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의 경우, 그 흉모와 모반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상변(上變)한 사유나 옥정(獄情)의 전말을 모두 없애버렸다. 일일이 엄호하면서 교묘하게 말을 꾸미고 정철(鄭澈)이 얽어 만들어낸 것으로 오로지 돌리면서 기묘·을사 사림들의 화와 같은 점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속임수로 혼란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이이첨이 선조 말년에 죄를 얻은 까닭에 그의 사사로운 한을 풀려고 감히 멋대로 비방하는가 하면 못할 말없이 허위와 속임수로 내용을 채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겼다. 그래서 반정한 당초부터 개수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착수하지 못하고 지연되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식이 차자를 올려 청하였다.

 

2월 13일 무오

상이 유림(柳琳)을 인견하였는데, 이때 유림이 대장(大將)으로 심양(瀋陽)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야춘(也春)의 호인(胡人) 20여 명이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기근을 호소하였는데, 조정이 1백여 곡의 곡식으로 위급함을 구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5일 경신

전라도 전주(全州)·여산(礪山)·금구(金溝)·김제(金堤) 등의 고을에 연일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지평 김지남(金地南)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은 천성이 허탄하고 행실이 조잡한데, 평소 일삼은 것이라고는 술에 취하고 여색을 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불길한 무리들과 결탁하고 권간(權奸)의 집에 드나들었으므로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지 오래입니다. 일찍이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어서는 오로지 일을 가혹하게 처리하여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으로 능사를 삼았으므로 당시에 이를 두고 말하기를 ‘조 중사(趙中使)와 강 도청(姜都廳)과 남 도청(南都廳)은 똑같다.’고들 하였는데, 혼자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반정한 뒤에 방백에 제수되어서도 역시 대평(臺評)을 당하였고, 헌장(憲長)에 제수된 것도 그의 종형 남이공(南以恭)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라서 물의가 자자하였는데 그대로 있었으며, 종백(宗伯)006)  이 되었을 때도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하였는데 태연히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더구나 이 같은 총재(冡宰)의 직임을 이웅이 어떻게 감당해내겠으며 전하께서 어떻게 헛되이 제수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오늘 이 일로 발간(發簡)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서로 어긋나 신용없는 말이 되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오늘 동료가 남이웅을 탄핵하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총재의 직임이란 헛되이 제수할 수도 없지만 또한 경솔히 논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웅의 본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함께 본 일이고 그의 결점과 좋은 점에 대해서는 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전장(銓長)의 지위에 있는 것이 합당하지는 않으나 이미 청화(淸華)의 직책을 역임하고 지금 예조의 장관으로 이 명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사실 등급이 쉽게 뛰어오른 것은 아닙니다. 사체로 헤아리건대 별안간 탄핵을 가해서는 안 되니, 천천히 정사(政事)의 득실을 보아가며 다시 물의를 채집하여 반박하고 바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결정하기 곤란하게 여겼을 따름이지 동료의 말이 전연 옳지 않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김지남(金地南)이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신이 전에는 묵묵히 말하지 않은 죄가 있었고 뒤에는 이견을 갖고 소란을 일으킨 실수가 있게 되었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고, 장령 유경즙(柳景緝)과 권령(權坽)도 이 일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김영조(金榮祖)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남이웅은 훈구(勳舊)의 신하로서 어려운 고비를 다 겪으면서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하고 종백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번 총재로의 의망도 묘당의 천거로 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김지남이 신진의 대관(臺官)으로서 혐의스러운 자취도 피하지 않고 갑자기 탄핵의 의논을 발하였으니, 동료들이 곤란하게 여긴 것은 실로 신중한 일이었습니다. 김지남은 체차하고 이식 이하는 출사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6일 신유

장령 권령이 직임에 나온 뒤에 아뢰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니, 백관을 규정(糾正)하는 것이 곧 그 직분입니다. 지남이 새로 언지(言地)에 들어와 큰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그가 들은 대로 숨김없이 과감히 말하자 대각이 숙연하였으니 그 풍채가 가상합니다. 따라서 공의(公議)로 헤아리건대 체직을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남이 피혐하면서 적막하기 그지없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보면, 대각에 있는 자로서 그 누군들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대사간 김영조는 의당 피혐해야 하는데도 피혐하지 않고 감히 쓸데없는 말로 처치하였으니, 보고 듣는 자가 누군들 괴이하게 여기며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김지남의 의논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누구는 체직되고 누구는 체직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인피하는 내용에 비록 체직을 청하는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상께서는 반드시 사직하지 말라고 하교하시고 공론의 처치를 기다리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제 장령 권령의 인피하는 말에는 아뢴 대로 하라고 곧바로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신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인데,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례가 없지 않으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2월 17일 임술

대사간 김영조(金榮祖)가 권령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는데, 정언 권즙(權諿)이, 당초의 계사 중에 누구는 체직시키고 누구는 체직시키지 않았으니 현저히 마음 쓴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영조의 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갑자기 출사하여 장관(長官)을 배격한 것은 그 마음의 소재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그리고 김영조는 별로 실수한 것이 없으니 체직하지 말라."

 

2월 21일 병인

대사헌 이식(李植)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이 탄핵을 당한 후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조계원(趙啓遠)을 사간으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목장흠(睦長欽)을 도승지로, 이척연을 지평으로, 권우를 정언으로, 김영조(金榮祖)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24일 기사

유성이 북두성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종실인 진양군(珍陽君) 이담령(李聃齡)이 겁간(刦奸)의 죄에 걸려 옥에 갇혀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해남(海南)으로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2월 26일 신미

홍청도(洪淸道) 서천(舒川)·임천(林川)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2월 28일 계유

이시만(李時萬)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9일 갑술

유성이 자미성(紫微星) 서원(西垣)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2월 30일 을해

유성이 섭제성(攝提星) 아래에서 나와 심성(心星) 위로 들어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