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병자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곡읍성(哭泣星) 위로 들어갔다.
3월 2일 정축
유성이 견우성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우부빈객 윤지가 부친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3월 3일 무인
심연(沈演)을 도승지로, 김수현(金壽賢)을 부제학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우부빈객으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응교로, 박서(朴遾)를 수찬으로, 홍처량(洪處亮)·박수문(朴守文)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유림(柳琳)이 들어갈 때에 말[馬]이 적은 것을 염려하였는데, 어떻게 조치하였는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말 값이 뛰어올랐으므로 호조와 병조의 면포(綿布)로 평안도에 들여보낸 것이 2백 동(同)이며, 지금 또 1백 동을 서울에서 사들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림의 군사가 얼마나 멀리까지 출정하느냐는 저들에게 달렸는데, 만약 졸지에 멀리 나가게 될 경우 군량을 댈 일이 염려스럽다."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군량을 신성(新城)에 두었으니, 깊이 들어갈 뜻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3월 4일 기묘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3월 5일 경진
경기 감사 박로가 치계하기를,
"어전(漁箭)의 혁파는 대간의 계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선(物膳)의 봉진은 어공(御供)의 중요한 일인데, 오로지 폐단을 없애기 위함이라면 연해의 고을에 분정(分定)할 수 없고, 대가를 주어 무역하여 올리게 한다면 이는 날마다 으레 봉진하던 규례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영주인(營主人)들이 선혜청으로부터 대가를 받지 않으려 하면서 잇따라 모두 도피하여 흩어졌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간관이 어전의 정지를 청한 것은 대체로 안산(安山)의 전결(田結)이 많지 않음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군(本郡)은 이미 어전을 설치할 곳에 얼음을 저장하였고 어전 설치의 도구도 모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선혜청으로 하여금 본군에서 응당 상납해야 할 미곡 3백 10석을 덜어 지급하게 하여 어전의 설치와 태가(駄價)의 비용으로 삼게 하고, 서울의 영주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혁파하였다가 곧 다시 설치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 같을 뿐만 아니라 사체에도 구차스러울 듯하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3월 6일 신사
빈객(賓客) 윤지가 이미 체직된데다가 보덕 유심까지 모친의 병으로 소장을 올려 체직되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윤지와 유심이 젊은 나이로 조정에 올라 고관 미작(高官美爵)을 지푸라기 줍듯 쉽게 하였는데도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심양에 들어가야 할 관리가 되자 서로 잇따라 피할 궁리를 하여 기어코 체직되고 말았습니다. 인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윤지와 유심은 부모의 나이가 모두 칠팔십 세도 되지 않았는데, 혹 일시적으로 작은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가지고 사직하여 군신의 대의를 망각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내소서. 또 승지는 그 소장을 봉입(捧入)하였고, 전관(銓官)은 사정(私情)에 따라 회계하였으니, 모두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순천 부사(順天府使) 신계영(辛啓榮)이 전에 빈객이 되었을 때는 병을 핑계대고 교묘히 피하였는데, 지금은 풍요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그의 소원을 흡족하게 이루었습니다. 파직을 명하시어 그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조의 당상과 해당 승지는 추고하고, 신계영은 체차하라."
하였다. 윤지와 유심을 먼 곳에 유배하는 일을 여러번 아뢰니, 따랐다. 마침내 윤지는 부안(扶安)에, 유심은 흥해(興海)에 정배하였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김상헌이 구금된 뒤에 외부 사람과 절대로 통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지난번에 청나라 사람이 와서 그의 식량이 떨어졌다고 말하였으니, 식량을 대주어 구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도는 지금 태가도 이을 수 없을까 걱정하는 실정이니, 그의 집에서 양찬을 관중(舘中)에 들여 보내 인편을 통해 전해 주어 그의 다급함을 구제하게 해야만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번신(藩臣)이 간여하여 지휘할 일이 아니다."
하고, 정태화를 추고할 것을 명하여, 결국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3월 7일 임오
이천(利川)에 사는 충의위(忠義衛) 이운(李雲)이 그의 처조(妻祖)의 첩을 간음하였다고 본군 사람이 발고(發告)하였으므로 옥(獄)에 내렸는데 자복하였다. 이에 《대명률(大明律)》과 금제조(禁制條)에 따라 장 일백 도 삼 년에 처하고,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녹안(錄案)하였다.
3월 8일 계미
전 보덕 유영이 술주정 때문에 체직되고 황감이 대신하였는데, 그 뒤에 정명수에게 미움을 받아 역시 체직되었다.
3월 9일 갑신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병이 들었으므로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왕진하게 하였다.
3월 15일 경인
유철을 우부승지로, 박서를 집의로 삼았다.
3월 16일 신묘
개기 월식(皆旣月食)이 있었다.
3월 18일 계사
심양의 재신(宰臣)이 치계하기를,
"정명수(鄭命壽)가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서행(西行)하는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으나 4월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세자와 대군도 의당 따라가 필시 별처(別處)에 있게 될 것이니, 배위(陪衛)하는 군사가 없을 수 없다. 본국에서 정예 포수 50∼60명을 조발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기에, 신 등이 사소한 군병으로는 필시 힘이 될 리도 없고 조발하여 보내는 폐단만 본국에 끼칠 뿐이라고 말하였으나, 정명수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양식과 장막은 관중(館中)에서 수레를 사 운반해야 하겠지만, 배종할 원역(員役)들이 타고갈 말이 또한 70필을 밑돌지 않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미리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정예 포수 50명은 평안도로 하여금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고, 타고 갈 말 70필은 5도의 각역에 분담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먼 도의 말은 혹 기한에 미치지 못할테니, 평안도 양역(兩驛)의 인마(人馬)를 미리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예 포수의 숫자를 줄이고, 역마는 양서(兩西)에 분담시켜라."
하였다.
3월 21일 병신
이명한(李明漢)을 대사헌으로, 김시국을 대사간으로, 박종부(朴宗阜)를 헌납으로 삼고, 특명으로 조계원(趙啓遠)을 보덕으로 삼았다. 계원이 일찍이 사간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을 극력 비난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월 22일 정유
이조 판서 남이웅이 조계원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붕비(朋比)의 습속이 근일에 더욱 심해졌는데, 주의(注擬)할 즈음에 문득 시의(時議)에 거슬려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저들이 권세를 다투는 작태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하였다.
경상도에 가뭄이 들었다.
3월 25일 경자
유성이 저성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강백년(姜栢年)과 이척연(李惕然)을 장령으로 삼고, 특명으로 이조 정랑 남노성(南老星)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전 문학 신익전(申翊全)이 정명수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여 상소하고 체직을 청하니, 비국이 황감의 전례대로 할 것을 청하여 체직시켰다. 이때 노성이 이조에 있었는데, 남이웅의 소장 중에 ‘춘방(春坊)과 대각(臺閣)의 관원을 주의(注擬)할 때에 압력을 면치 못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미워하여 이렇게 제수한 것이다.
3월 27일 임인
이경석(李景奭)을 대사헌으로,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김광욱(金光煜)을 황해 감사로, 윤강(尹絳)을 교리로, 신유(申濡)를 부교리로, 이래(李䅘)를 정언으로 삼았다.
3월 29일 갑진
유성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비국이 평안도의 영속(營屬) 삼천 명을 대상으로 1인당 두 말의 쌀을 가지고 이주(伊州)로 수송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비록 국가에는 이로운 일이지만 백성에게 해가 있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3월 30일 을사
전라도에 찬비가 내려 보리가 얼어 죽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5월 (1) | 2026.01.04 |
|---|---|
|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4월 (1) | 2026.01.04 |
|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2월 (0) | 2026.01.04 |
|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1월 (0) | 2026.01.04 |
| 인조실록41권, 인조 18년 1640년 12월 (0) | 2026.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