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무신
유성이 남두성(南斗星) 위에서 나와 허성(虛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다.
4월 5일 경술
유성이 여성(女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이식(李植)을 이조 참판으로, 김영조(金榮祖)를 부제학으로, 김시국을 대사성으로, 이도장(李道長)을 이조 정랑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정세규(鄭世規)를 전라 감사로 삼고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켜 보냈다.
4월 6일 신해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차하기를,
"신은 노쇠하고 정신이 혼미하여 하나의 직책도 감당할 수 없으니, 수사(修史)에 대한 일은 말씀드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 반정하신 당초에 이미 지휘를 내리셨으므로, 현재 본관(本館)에 있는 입장에서 봉행하고자 하는 뜻으로 감히 형편을 진달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밝게 헤아리시고,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특명을 내리셨으므로, 신은 실로 황공스럽고 감격하여 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윤허를 받은 교지를 보건대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의 헌의(獻議)로 인해 이 일을 전부 소신에게 맡겨 집에서 편집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신이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또 감당하여 맡을 일도 아닙니다. 신이 전에 차자를 올린 본의는 바로 인원과 비용이 많아져 별도의 늠료를 더해야 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당상과 낭청을 모두 실직(實職)으로 춘추관을 겸하도록 청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른바 국(局)과 고(庫)를 개설하자고 한 것도 꼭 실록청(實錄廳)의 규례처럼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조(本朝)의 사기는 결코 민가에 보관해 둔 채 사사로이 의논하여 산정할 일이 아니고 보면, 하나의 빈 관사(官舍)를 택하여 장소로 삼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이 《통감(通鑑)》을 수찬한 사례와 비교한다면 크게 다른 일이니, 그가 찬수한 것은 다만 전대의 역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별도로 서국(書局)을 개설하고 요속(僚屬)들을 임명한 뒤 각기 나누어 찬수하게 하였으니, 19년 동안 밥값으로 지급된 비용만도 매우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왕안석(王安石)의 무리들이 비방을 하였으므로 오계(五季)에 대한 편찬은 소홀하고 간략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역사의 일을 마치기란 이와 같이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필(史筆)을 보완하고 허다한 문자를 수습하여 사고(史庫)에 부장(附藏)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러니 감히 신과 같은 자가 홀로 담당하여 사사로이 저술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무턱대고 수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절충하여 필삭(筆削)을 가할 일은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의논하고 품재(稟裁)할 장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할 능력으로 말하더라도 신이 겸대한 예문관과 춘추관의 경우 이름은 융숭하나 가난하고 박하기가 비할 데 없어 평소에도 좌우 사관(史官)의 인원조차 갖출 수 없습니다. 이조의 낭관이 겨우 한두 명 있기는 하나 본조의 정사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고 춘추를 겸한 자가 드물며, 병조는 일이 바빠 낭관은 여가가 없을 뿐더러 춘추를 겸한 자가 있더라도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고 호조·형조·공조의 낭관은 으레 음관(蔭官)을 채용하므로 비록 한두 명의 문관이 있어도 곧바로 의비(擬比)되어 버리며, 기타 겸직한 자는 모두 가려 뽑은 자가 아니어서 전고(典故)나 문장에 관한 일을 결코 함께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편집할 권질(卷秩)의 수량이 많지는 않으나 소위 야언(野言)이나 가장(家藏)이라는 것이 궁벽한 시골에 흩어져 있어 이문(移文)하여 가져오려면 대단한 기력이 허비될텐데, 어찌 사마광이 어부(御府)의 서적을 전부 빌렸던 것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춘추를 겸한 당상들도 더욱 사고가 많아 근래 연례적으로 고적(考績)하는 일로 이틀 동안 개좌(開坐)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더구나 날마다 문사(文史)에 종사할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전번 차자에서 3, 4명의 인원을 정하여 실직으로서 춘추를 겸하도록 청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행의 허락을 모두 받지 못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이 미련한 몸으로는 쉽사리 해낼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음이 명백합니다.
신이 십분 헤아려서 편의한 계책을 두루 진달하였으나 말솜씨가 허술하여 다 밝히지 못하였는데, 최명길(崔鳴吉)이 또 범연히 보고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의논을 쉽게 말했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다시 더 살피시고, 전부 맡겨서 편집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하여 다시 의논하거나 혹은 후일을 기다려서라도 꼭 잘못된 역사를 영원히 없애서 인기(人紀)를 닦으소서. 그러면 신이 비록 병으로 면직되더라도 말한 것은 실행되는 것이니, 어찌 꼭 나 자신이 직접 담당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가지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오로지 태사(太史)에게 맡긴다면 역(役)이 번거롭지 않으면서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니, 실로 절실한 의논이긴 합니다. 그러나 선왕의 보전(寶典)을 다만 한 사람의 견해에 맡겨 사실(私室)에서 찬정하게 한다면, 그 다듬은 것이 비록 후세의 공론에 맞는다 하더라도 당사자인 신하로서야 어찌 미안스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수사(修史)의 막중한 일을 명한 뒤에 당사자의 사양으로 다시 고치는 것은 곤란한 것 같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신경진·강석기(姜碩期) 등이 아뢰기를,
"이식이 혼자 수사의 임무를 관장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 사정이 매우 절박할 뿐만 아니라 사세상 역시 곤란한 점이 있으니, 결코 한두 명의 사관과 함께 사실(私室)에서 필삭하고 결정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니 전에 찬수했던 대로 국(局)을 개설하되 모든 일을 간략하게 하도록 힘쓰고 늑장부리는 습관을 없앤다면, 사체에 마땅하고 공역이 쉽게 완결될 것입니다."
하고, 완성 부원군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 처음에는 선조(先朝)의 《실록》이 너무도 무함을 당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나 전례와 같이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찬집한다면 핑계대고 질질끌면서 경비만 허비할까 염려도 되는 동시에 시끄러운 사단이 야기될 걱정도 없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식이 전번 차자에서 진달한 바, 야언(野言)과 가록(家錄)을 수습하여 절충하고 필삭을 가하여 사고에 부장(附藏)해야 한다고 한 말이 오늘날의 형편에 매우 합당하였으므로 감히 한 사람에게 전임시켜야 한다는 말을 경솔하게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그가 이 일을 홀로 담당하려 하지 않는 것은 또한 이식의 처신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유(韓愈)의 문집을 살피면 그가 찬집한 《순종실록(順宗實錄)》 5권이 실려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한유의 손으로 된 것이나 그 속에서 또 일컫기를 ‘호원(狐垣)으로 하여금 사관(史館)에 있게 하여 《현종실록(玄宗實錄)》 1백 권을 수정하고 《대종실록(代宗實錄)》 30권을 찬집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당조(唐朝)의 사기 찬수도 모두 한 사람에게 맡겼음을 알 수 있으니, 사마광이 강목(綱目)을 찬수한 한 가지 일만을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번에 의논하는 일은 여항의 문견을 수습하여 사문(史文)의 소략함을 보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찬집이 완료되더라도 야사나 소설(小說)을 조금 갖춘 것에 불과하여 사기의 전례와는 본래 다르니, 이식이 꼭 사양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만약에 고열하는 일과 사환(使喚) 때문에 곤란하게 여긴다면, 해조가 참작하여 결정해서 찬집의 일에 대비케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최명길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4월 9일 갑인
대사간 이명한(李明漢) 등이 상차하기를,
"올봄도 가뭄이 들어 파종의 시기를 놓쳤으니, 절박한 재변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강약의 형세란 실로 어찌할 수가 없지만 인애(仁愛)스러운 하늘이 차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해야 한다는 것이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재변을 만나 진언하는 데 있어 이 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무슨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기양(祈禳)하는 등의 일을 으레 재변이 극심해진 뒤에야 행합니다만, 이는 제때에 행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그러나 시기의 늦고 빠름에 구애되겠습니까. 역시 유사에게 명하여 속히 거행토록 하소서.
어려운 국가 형편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이런 때에는 오직 인심을 굳게 결집시키고 민력을 아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중외와 상하로 하여금 국가의 지극한 정성과 불쌍히 여기는 뜻을 환하게 알도록 하여 절박한 조짐을 누그러뜨리고 원대한 계책을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서로(西路)의 물력이 현재 운향(運餉)에 탕갈되어 마침내 남방에 책임을 떠맡겨야 하는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방의 힘도 이미 탕갈되었으며, 화란이란 항상 소홀히 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니, 남방의 일도 늦출 수가 없을 듯합니다.
바다가 울고 땅이 진동하며 재이(災異)가 거듭되는 등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국가가 어찌 남북의 백성에 대하여 일찍이 피차에 경중의 차이를 둔 적이 있었습니까. 다만 목전의 위급에 대응하기에 바빠 징발만 번거롭게 하였을 뿐 위로할 틈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야 어찌 국가의 부득이한 형편을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옛말에 ‘자고로 급할 때에 힘을 얻는 것은 인심의 향배(向背)에 있을 뿐 기계의 다소에 달린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설치하는 모든 일을 우선 정지시켜서 백성들이 본업에 전력하도록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라고 여러번 하교를 내리셨습니다마는, 팔도 주현(州縣)이 모두 적임자인 수령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암행 어사가 염찰(廉察)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일이나 출발하기도 전에 각 고을에서는 미리 탐지해 알게 되고 지나간 뒤에는 징외(懲畏)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 등의 생각엔 꼭 일시에 파견하지 말고 또 미리 치장(治裝)하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사를 언제 어디로 보낼지 임금의 뜻을 알기 어려워서 한 군데만 어사가 나타나도 팔도가 단속될 것이니, 자주 보내지 않더라도 그 효과는 같을 것입니다.
신 등이 진달한 바는 모두 자잘한 일들이니 오로지 성상의 마음씀을 구구하게 걱정할 뿐입니다. 요즈음은 희로의 모습이 쉽게 나타나고 화평의 기색이 점점 적어지십니다. 근일의 일로 말씀드린다면 어선(御膳) 감하기를 청한 의논은 비록 경솔하게 나온 것이긴 하지만 그 의도는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로 인해 사태가 발전하여 묘당에서 청한 것까지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서로 믿어야 할 군신 간에 어찌 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궁관(宮官)을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잇달아 내려졌습니다. 【 조계원과 남노성이다.】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감히 망령되게 헤아릴 수는 없으나, 강신(講臣) 선임은 원래 벌을 주기 위한 계제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좋아하고 미워함이 너무 노출되었고 조처도 온편하지 못하셨으니, 모쪼록 관용 베풀기에 힘쓰시고 편파적인 일을 없애서 화평의 복을 누리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며, 또 대사헌 이경석(李景奭) 등도 상차하기를,
"아, 오늘날의 사태는 위급하다 하겠습니다. 천만 가지의 재변이 이미 극에 이르렀는데, 사나운 한발이 어찌 또 이렇게 거듭 닥친단 말입니까. 많은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구학(溝壑)에 쓰러져 죽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사태가 정말 급하기만 합니다. 이런 때에 재변을 누그러뜨리고 천심을 회복시키는 일을 마치 불 끄는 것처럼 급히해야 하니, 혹시라도 감히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재변을 초래한 까닭이 어찌 한두 가지 뿐이겠습니까마는, 억울한 형옥(刑獄)이야말로 첫째가는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형옥을 신중하게 다루려는 뜻이 지극하십니다만, 구속되어 있는 자들 가운데 억울함을 안고 있는 무리들이 없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동안 뒤섞인 채 쇄송(刷送)된 무리들의 참혹상은 차마 말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추급(追及)하기 어렵습니다만, 지금 오래 지체되어 있는 죄수들은 이 시기에 심리하여 역시 너그러운 형벌로 단죄하고 가벼운 죄수들은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초여름에 접어들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심리하도록 명하여 너그러운 법을 크게 베푸소서.
아, 환과 고독은 천하의 곤궁한 백성들이니 명철한 임금이 어진 정치를 베풀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일찍이 여기에 유념하여, 중외의 노인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우로(雨露)의 성은을 입었으며 전후에 걸쳐 나라를 위해 죽은 자들의 자식들도 잇달아 의관(衣冠)의 반열에 올랐으니, 뉘라서 기뻐하며 마음을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진휼한 일도 그 방도를 다하였다고 하겠습니다만, 각 고을에서 봉행하는 자들이 구휼곡(救恤穀)의 수량을 사정(私情)에 따라 주고 가감을 교묘하게 하여 자못 균평하게 하려는 국가의 덕의(德意)를 잃게 한 것은 한탄할 일입니다.
아, 백성이 부족한 생활을 하면 누구와 족하게 지내겠습니까. 부족한 것도 구휼해야 하는데, 더구나 굶주려 죽는 경우이겠습니까. 도성(都城)은 국가의 근본이요 기전(畿甸)은 복심(腹心)이니, 교화를 먼저 받는 곳에 더 우휼(優恤)하는 것이 이치상 당연합니다. 삼가 듣건대 나라 창고에서 묵고 썩는 곡식이 많다 하니, 다시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고루 성택(聖澤)을 받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어 팔도에 윤음(綸音)을 선포하여 먼저 의지할 데 없는 자들에게 손쓰기를 더욱 힘쓰게 하고, 제사(諸司)에서 받아들일 물품도 모두 본도(本道)에 면제해 지급하는 한편, 감영·병영·수영에 유치되어 있는 재물도 곤경을 구제하는 일에 쓰게 하소서.
이와 함께 병란 때에 전사한 자와 지난해에 서쪽으로 향하다가 배의 침몰로 죽은 자와 금년에 육군(陸軍)으로 역(役)에 나간 자들의 집에도 모두 호조로 하여금 별도로 식량을 주게 하소서. 그러면 소비량은 비록 많더라도 이익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란 이른바 적은 저축을 풀어서 큰 저축을 이루고 작은 보물을 덜어서 큰 보물을 굳건히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덕음(德音)을 크게 펴시어 특별히 혜택을 베푸소서.
아, 충직한 말은 인신(人臣)의 이익이 아니라 곧 국가의 복입니다. 임금으로서 그 누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어긋나는 일이 많은 까닭은 그런 말이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신하들의 말 중에 공정한 말이 있으면 과연 언제고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따르고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거리에 떠도는 말에 ‘간쟁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없다.’고까지 하니, 신들은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일의 시종신(侍從臣) 대부분이 먼 시골로 자취를 감추고서, 대각(臺閣) 보기를 마치 함정을 피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아래에 있는 자들이 도리를 제대로 다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긴 합니다만, 그들이 조정에 서기를 원하지 않는 것도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예의와 정성으로 우대하시고 언책(言責)에 있는 자로 하여금 주장한 말이 행해지는 것을 알게 하신다면, 앞으로 모두 밝은 낯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자신을 살피고 새로움을 도모하여 충간(忠諫)이 이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전일에 하신 말씀이나 행동은 사기(辭氣)가 너무 노출되고 편벽된 점이 있어 자못 대성인의 탕탕 평평(蕩蕩平平)한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궁관(宮官)의 직임을 일단 잘 가려 택하라고 한 이상, 벌로써 제수해 보내는 것은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배척해서 내쫓아야 될 것이며, 잘 가려 택해야 하는 직임을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편벽을 미워하다가 도리어 편벽에 빠지고 공평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공평을 해롭게 한 것이어서 대소 신료들이 모두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데,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넓고 깊숙한 궁중에만 계시고 가슴이 타는 깊은 근심에 잠긴 나머지 마음을 잡고 자신을 살피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 발로하는 것이 화평을 얻지 못해 그런 듯합니다."
하니, 상이 양사의 차자에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내용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마음에 새겨 시행하겠다."
하였다.
4월 10일 을묘
형혹성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4월 11일 병진
형혹성이 동정성으로 들어갔다.
문학 남노성(南老星)이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어 그의 모친을 원주(原州)에서 이별하고 돌아올 때에 그의 외조부 김상용(金尙容)의 묘소에 전배(展拜)하려고 하자, 그의 모친이 막으면서, "네가 정축년 이후로 조정에 벼슬하였으니 이미 선인의 뜻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 직사(職事)로 인해 심양으로 들어가면서 선인의 묘소에 배알할 경우, 선령(先靈)이 알면 반드시 기뻐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가지 말아라."고 하였다.
김육(金堉)을 좌승지로, 윤강을 집의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조석윤(趙錫胤)을 교리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수찬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3일 무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현재 한재(旱災)가 극심하여 백성의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양사의 차자에서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3건과 관련하여 이미 쇄송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아직도 갇혀 있는 자가 많으니, 실로 매우 참담합니다. 떨어져 남은 가속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휼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지금 대신과 모든 재신(宰臣)들이 다 모였으니 전하께서 두루 좋은 방법을 찾아 하늘에 순응하고 재변을 누그러뜨리는 실체를 도모하소서."
하니, 상이 모든 신료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각기 생각하는 바를 진달하라."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이 아뢰기를,
"죄수를 심리하자는 대신의 청이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평소 사면령 이전의 죄인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자와 이번 3건의 일 때문에 갇힌 죄인도 모두 심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심리하라. 경이 대신 및 해관과 함께 다시 조사하여 사실이 매우 명백한 자는 방면시키는 항목에 기록하고 혹 의문시되는 자는 품처할 항목에 기록하면, 내가 대신과 형관 및 경과 함께 확정하여 처리하겠다. 이것이 문서로 논핵하는 것보다 실로 나을 것이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널리 탕감해 주는 은전을 보이려고 한다면 어찌 경중을 가리겠습니까. 꼭 낱낱이 다 살피시려고 한다면 크게 베푸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심리한다고 하는 것은 무죄인 것을 살펴서 석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만약 경중을 막론하고 석방해 주기만 힘쓴다면 범법자들이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사면령이 있을 것이고 사면령을 만나면 반드시 면죄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간사한 무리들을 어떻게 징치(懲治)하겠는가. 제전(帝典)007) 에 이른바 ‘믿는 데가 있어 다시 죄를 저지르는 자는 사면을 허락치 않고 반드시 형벌을 가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4월 14일 기미
공조 판서 윤휘(尹暉)를 운향사(運餉使)로 삼았다.
4월 16일 신유
큰 가뭄 때문에 재차 기우제를 행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경옥(京獄)의 죄수와 정배(定配)된 죄인은 모두 대신과 의논하여 서계(書啓)하였습니다. 외방의 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경우는 일체 심리하라는 뜻을 팔도의 감사와 개성부·강화부에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대신 및 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인견하고 친히 수안(囚案)을 열람하며 하문하였다. 판의금부사 심기원(沈器遠)이 아뢰기를,
"최수인(崔守仁)은 관물(官物)을 훔쳤는데, 그 수량이 적은데다 형벌을 벌써 많이 받았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혹 용서할 만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범한 바가 어찌 적은가. 난리 중에 법을 지킬 수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혹 모르지만 억울하다고 한다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형벌을 많이 받았으니 정배(定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조정립(趙廷立)은 죄가 비록 중하나 이미 많은 형벌을 받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범한 죄에 경중이 있는데 어찌 구금되어 있었던 기간을 따지겠는가. 아무리 대사면을 베푸는 때라 하더라도 장리(贓吏)는 사면시킬 수 없다."
하였다. 기원이 이민구(李敏求)의 이름을 지적하고 미처 진품(陳稟)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늘 심리하는 속에 들어 있는데, 대신들은 그 죄가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민구가 군대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겁을 먹고 지켜내지 못한 것이니, 군사(軍事)를 담당하여 군율을 어긴 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민구의 위인을 살펴보면 매우 재능이 없는 사람이니 당초에 뽑아 썼던 것이 조정의 허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재능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위해 쓰지 않으려고 하였다면 이는 진실로 큰 죄이니 다시 논의할 것도 없다. 아무리 재능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주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일이 지난 뒤에는 마땅히 종묘 사직 곁에서 죽어야 하는데, 민구는 이런 계책도 내지 못하고 스스로 살기만을 도모하였다. 민구 같은 자가 석방된다면 김경징(金慶徵)이 지하에서 원통해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석지형(石之珩)의 죄는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형은 마음대로 나라의 곡식을 들어내어 임의로 남에게 주었으니 무죄라고 할 수 없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최만길(崔晩吉)의 죄는 어떻습니까?"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만길은 용렬하기 짝이 없는데 실제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개(金介)가 그 집에 숨어 있은 지가 십 년이었다. 그런데 만길이 어찌 김개가 적당(賊黨)이었음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김개가 성명을 바꿔 안 첨지(安僉知)라고 하였으므로 만길은 실제로 그가 김개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얼속(孼屬)의 남편이라고 하였다는데 어찌 그의 성이 안가가 아님을 몰랐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김개의 극악함은 이괄(李适)과 같다는 것을 도성 안에서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최가의 집안에 출입하면서 얼속이라고 칭탁하였는데도 만길이 즉시 발고(發告)하지 않은 것은 사실 위인이 사리에 어두운 탓으로 왕법의 지엄함을 모르고 차마 절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연 몰랐다고 하는 것은 근사하지 못한 말입니다."
하니, 석기가 아뢰기를,
"최가의 형제 중에는 만길보다 훌륭한 자가 많았는데도 금지하지 못했으니, 만길을 벌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기종헌(奇宗獻)의 죄는 어떠합니까?"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종헌이 직권을 남용한 죄는 있으나 사실은 피난민들을 구제한 일입니다. 그리고 산성이 위급하던 날에 미약한 군사를 이끌고 만사(萬死)를 무릅쓴 채 여러 겹의 포위를 뚫고 들어와 호위하였습니다. 심리할 때마다 꼭 구제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 생각건대 형벌을 받아 원배(遠配)되어 왕법이 이미 행해졌으니, 지금쯤은 석방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직권을 남용하는 자는 백성을 학대하기 마련이고, 백성을 학대하면 반드시 백성이 원망한다. 만약 작은 공로 때문에 용서한다면 모든 유공자들이 더욱 가벼이 범법 행위를 할테니, 어떻게 뒷사람을 징계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이극화(李克華)가 장죄(贓罪)에 걸려 정배되었는데, 어사의 장계(狀啓) 중에는 허다하게 사용(私用)한 사실이 없고 다만 견사(繭絲)를 무역해 취한 일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용서해 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지달기(池達沂)·남응해(南應海)·안성길(安成吉)·남두일(南斗一) 등 4명은 모두 그들의 부하들이 국경을 넘어 삼(蔘)을 캔 일로 죄를 받았는데, 변방의 고을에서 채삼(採蔘)을 금지시키는 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금지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稅)를 거두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 죄가 크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서우신(徐佑申)의 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서봉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봉이 대답하기를,
"남한 산성에서 함부로 싸운 것은 죄가 더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다른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경진이 아뢰기를,
"우신이 오늘까지 살아 남은 것은 실로 군율이 엄하지 못한 탓입니다."
하고, 석기는 아뢰기를,
"현재 화란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군율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기원이 아뢰기를,
"김수인(金壽仁)의 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의 용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발탁하여 썼기 때문에 일찍이 그의 공초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나는 근래 수령들이 사재(私財)를 내어 공용(公用)에 보충하였다는 말을 일찍이 듣지 못했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죄인 중에 석방되는 자가 매우 적은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서봉이 다시 기종헌의 용서할 만한 정상을 진달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헌은 4백 석의 관곡을 남용하였는데 어찌 석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외방 사람들은 심리(審理)하라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큰 은택을 바라고 있는데, 용서받는 자가 적으니 좋은 말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한탄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지금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일찍이 옛말을 듣건대 ‘옥문이 열리니 하늘이 곧 비를 내렸다.’고 하였으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 있는 자를 석방하여 하늘을 감동시키는 그런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기종헌의 일은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용서해 주라."
하였다. 상이 형조의 수안(囚案)을 가지고 구인후(具仁垕)에게 보도록 하였는데, 인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국경을 넘어 삼을 캐었던 이기승(李起承) 등은 이미 복죄(服罪)하였으니 사면을 청할 수는 없으나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으므로 개록(開錄)하여 올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을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답습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후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절도(絶島)에 정배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인후가 아뢰기를,
"박정길(朴廷吉)의 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서봉에게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복수(復讐)의 설은 선유(先儒)들도 말하였고, 왕법에 있어서도 상명(償命)008) 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비가 주륙을 당하였다고 하여 그 아들이 모두 복수를 한다면, 누가 국사에 진력하였다가 칼날에 찔리는 화를 자초하려 하겠는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라."
하였다. 상이 다시 수안(囚案)을 가져다 친히 보면서 이르기를,
"사형수 중에 인경궁(仁慶宮)의 철전(鐵箭)을 훔친 자와 군보(軍堡)를 훼손시켜 없앤 자들은 모두 감사(減死)로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김기운(金起雲)은 이미 복죄(服罪)하였습니다만, 그의 동생까지 사율(死律)을 적용한다면, 신의 생각엔 과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인후를 돌아보며 하문하였는데, 대답하기를,
"기운 형제는 모두 왜인의 소식을 함부로 전파한 일로 죄를 받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형제가 함께 죽는다면 매우 불쌍한 일이다. 감사(減死)로 조율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포도 대장 정응성(鄭應星)은 노쇠한데다가 형장(刑杖)을 함부로 쓰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8일 계해
김상(金尙)을 좌승지로,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정언으로, 엄정구(嚴鼎耉)를 교리로, 목행선(睦行善)을 수찬으로, 유영을 응교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이 모두 청선(淸選)입니다만, 옥당이 더욱 중요합니다. 유영은 술을 즐긴 나머지 병을 얻어 이제 막 보덕(輔德)에서 체직되었는데 갑자기 응교에 제수하니, 인사 행정에 근거가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4월 20일 을축
대제학 이식(李植)이 사관(史官)의 《일기(日記)》를 보려고 하자, 사관이 옛날에 이런 전례가 없었다고 재삼 거절하니, 이식이 말하기를,
"사관이 근래 기사(記事)에 힘쓰지 않아 책 장수의 다소를 보아 그 근만(勤慢)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고칠 곳이 있으면 부첨(付籤)하여 보이라."
하였는데, 식자들은 이러한 통로가 한번 열릴 경우 반드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4월 21일 병인
헌부가 아뢰기를,
"가뭄의 참상이 불에 타는 듯하여 보리를 수확할 희망이 이미 끊어진데다가 파종한 곳도 아주 드물어 얼굴이 누렇게 뜬 백성들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전 심리할 적에 곡진하게 하문하시어 최선을 다하셨으나 인애스런 하늘이 우리의 소원을 더욱 들어주지 않으니, 혹시 일월 같은 성덕이 그늘에 가려진 자들에게 미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응어리 맺힌 원통함이 쌓인 지 오래되어 쉽게 풀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입니까.
이번 기도하는 제전(祭典)을 순차대로 설행(設行)하였으나 다만 상례적인 법식이 있어 점점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재변이 이미 혹심한데 어찌 예전의 법식에 얽매여서 형식적으로 횟수만 채우려는 듯이 할 수 있습니까. 신들의 생각엔 지금까지 전해오던 규례에 구애됨이 없이 경건한 기도를 별도로 행한다면 혹 만일의 희망이 없지도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지금 옥체가 편치 않아 직접 기도하기는 어려우니 대신이 대행하여 꼭 이 시기에 하도록 하고 제문은 대제학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소서. 또 나머지 영추(靈湫)와 신악(神嶽) 등처의 제관은 모두 중신이나 시신(侍臣)을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세자가 문학 조전소(趙全素)를 보내 문안드렸다.
4월 23일 무진
기우제를 행하였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한재(旱災)로 인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전하께서 군신(群臣)을 대우하는 것을 삼가 보건대 마음을 비워 의심없이 대하지를 못하십니다. 신하들의 말이 꼭 다 틀린 것이 아닌데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마음으로 헤아리십니다. 그리하여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더라도 성심(聖心)이 혹시라도 한번 굳어지면 끝내 용납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사기(辭氣)에까지 불쾌함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하를 섬기는 신하들이 또한 스스로 의심하여 진달할 만한 말이 이따금 있더라도 품은 생각을 다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상하의 정의(情意)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지가 교역되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교통되어 그 뜻이 같아진다.’고 하였으니, 뜻이 같으면 서로 돕고 조절하여 성취의 공효를 이룩할 수 있고, 화목을 이루고 재변을 누그러뜨리는 방도에 있어서도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은 잘 보았다. 내가 경건히 허물을 듣고 마음 닦을 바를 알겠다."
하였다.
4월 24일 기사
윤지(尹墀)와 유심(柳淰) 등이 배소(配所)에 도착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국법이 이미 행해졌으니 석방하라."
4월 25일 경오
대신을 보내어 사직과 종묘에 기우(祈雨)하였는데, 헌부의 청을 따른 것이다.
4월 26일 신미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
정명수(鄭命壽)가 관소(館所)에 말을 전하였다.
"양국이 이미 한 집안이 되었으므로 당초에 구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하니 길이 멀어서 왕래에 폐단이 있겠고 원고(怨苦)의 근심도 없지 않아 특별히 정지하게 하였다. 전일에 등록된 처자(處子)들은 본국에서 처치하도록 하라."
4월 27일 임신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4월 28일 계유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 팔도에 크게 닥친 가뭄의 재변이 삼 년 동안의 흉년 뒤에 잇따랐고 밀과 보리가 이미 말라 죽어 온 들이 붉게 물들었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큰 재변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비상한 재변은 비상한 정치로 대응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큰 이변을 만나면 반드시 천하에 큰 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는 그중에 가증스러운 범죄의 진범이 있는 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진실로 민심을 움직여 정치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답답하게 맺힌 기운을 흔쾌하게 푸는 일을 허술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왕조(先王朝)에서 혹 중외의 죄인을 모두 석방한 일이 있었는데, 그 결과 역시 오래지 않아 비가 내린 효험이 있었습니다. 전일 중죄인을 심리할 때 친결(親決)까지 하셨으니 구휼하신 은혜가 역시 지극하다고 신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석방된 자가 너무 적었으니, 그중에 위로 천화(天和)를 범하기에 족할 정도로 지극한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꼭 없을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이러한 때에는 상께서 불쌍히 여기는 일념으로 덕음(德音)을 넓게 펴시어 비상한 재변에 대응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중외에 저축된 미곡도 이제 고갈될까 걱정입니다. 만약 이런 시기에 크게 절약하여 조금이라도 저축하지 않고서 졸지에 다 없어지게 하면, 경비를 장차 어디에 요구하여 대게 하겠습니까. 의당 해부(該部)로 하여금 상의해 계품(啓稟)하여 대소의 공역과 늠료(廩料)의 허비를 모두 정지시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외의 공사(公私) 간에 저축된 미곡은 비록 회부(會付)009) 와 관계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수량을 계산하여 저축해 두도록 하소서.
그리고 바라건대 상께서는 거듭 유념하시어 모든 궁실의 내수(內需)와 관련된 비용도 항상 절약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국중(國中)에 있는 현재의 곡물은 모두 위급함을 구제하고 연명시키는 밑천으로만 쓰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위 비상한 정치라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하므로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듯하다."
하였다.
4월 29일 갑술
이기조(李基祚)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호조 좌랑 이목(李穆)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듣건대 비국이 대대적으로 사면하여 비를 오게 하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신이 망령되이 생각해 보건대, 이번의 큰 가뭄이 어찌 용서할 수 없는 죄인들이 부른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엉뚱하게 사면하여 도리어 소인들의 복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3건의 쇄환은 저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라서 진실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그들의 부모 처자의 경우는 잡역을 감해 주고 별도로 구휼해 주어 성상께서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보이시면, 또한 비를 비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칠국(七局) 출신(出身)과 각청(各廳) 군관이 한달에 받는 늠료가 9백여 석에 이르니, 모두 적당히 줄여 구휼의 비용에 보충케 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쇄환되는 자들의 부모 처자에게 잡역을 감해 주는 일은 의당 상소의 내용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칠국과 군관의 늠료를 감하는 일은 경솔히 의논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군관의 늠료도 적당히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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