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5월

싸라리리 2026. 1. 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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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정축

옥당이 한재(旱災)로 인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3건의 쇄환은 왕정(王政)에 있어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나 형세에 쫓겨 어쩔 수가 없었는데, 하늘의 노여움이 누그러지지 않고 한발이 이토록 심한 것이 이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원통한 상황에서 또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있었을 것인데, 다시 구별하지 않고 속속 들여보낸 나머지 울부짖는 소리가 옥중에 그치지 않다가 이제야 거의 그치게 되었습니다.
내수사를 설치한 것이 조종조의 고사라고는 하나 본래 선왕들의 아름다운 제도가 아닌데, 간세(奸細)한 자들이 죄를 범하고 도망쳐 숨는 소굴이 되어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겨 온 지 또한 오래입니다. 전하께서 존귀하기로는 천승(千乘)의 국군(國君)이요 부유하기로는 일국의 백성을 소유하였는데, 하필 여기에 구구한 마음을 두십니까. 지난번 경연에서의 하교를 삼가 듣건대 궐내에서 쓰이는 것은 역시 부득이한 점이 있으니 비록 혁파할 수 없다 하더라도 1 년 동안 받아들일 것을 특별히 없애서 눈앞에 있는 기민(飢民)을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대군이 궁궐을 나간 뒤에 한 채의 집을 짓는 것은 참으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노여움이 한창 심하여 온 나라가 허둥대는데, 공사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아 지나가는 자가 한탄하고 듣는 자가 한숨짓고 있습니다. 공역의 비용이 비록 회부(會付)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 내수사의 재물도 역시 국가의 재물인데, 군상(君上)께서는 어찌 개인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라고 해명하십니까. 신들은 우선 역사를 중지시켰다가 가을철을 기다려 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깁니다. 그리고 죄인을 심리하는 일은 반드시 억울해 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제 풀려나는 자는 장오죄(贓汚罪)를 지은 한 명의 무부(武夫)뿐이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외람스럽게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근년 이래로 일찍이 경연에 입시하여 상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늘 성상께서 몸조리하는 사이에 의복과 음식이 어떠하며 평소 한가할 때 지내시기가 어떠한지를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내전(內殿)에 거처하시고 외신(外臣)을 드물게 접하시면서 하교하실 때나 혹은 일을 처리하실 때에 사기(辭氣)에 불평함이 있고 행동에 온당치 못함이 있으니 신들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마음을 고요히 하면 오래도록 박후(博厚)하고, 스스로 힘써 쉬지 않으면 견실하고 정명(精明)해지며, 본 마음을 잡아 간직하면 혈기가 순행하여 혼란스럽지 않으며, 거두어 들이면 정신이 안으로 굳건하여 들뜨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경(敬)하는 방도이며 수(壽)하는 이치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심신을 잘 길러 중화(中和)에 순응시키고, 청명한 날과 고요한 밤에 신료들을 인대(引對)하여 정치의 도리를 자문하고 고금 역사를 상고하며 흥망의 사실을 논란하소서. 그리하여 어둡게 가려진 기운과 답답한 생각이 구름과 안개가 걷히듯 바다의 조수(潮水)가 물러가듯 사라지게 하소서. 그러면 조섭하고 보호하는 도리에도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가언(嘉言)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마음에 새겨 채택해 행하겠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근래의 상소나 차자가 모두 가언(嘉言)과 당론으로서 현재의 병폐를 잘 지적하고 있는데 한번도 시행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린 것도 형식적인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하늘을 감동시켜 재변을 누그러뜨리려 한다면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지난번 죄수를 심리하던 날에 친히 형관과 함께 가깝게 앉아 따져 결정하였고 다시 심리한 사형수도 혹 석방되었으니, 이 마음을 미루어 간다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을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더욱 멀어 들어 주지 않으니,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한 채 혹 원한이 맺혀 풀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말에 ‘상홍양(桑弘羊)010)  을 삶아 죽이니 하늘이 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나는 죄 있는 자를 용서없이 죽이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빈궁한 자를 구휼하는 것이 곧 옛날에 재난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국가가 무사할 때도 선발하여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오늘날이겠는가. 숨어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침울한 탄식이 없게 한다면 인심이 기뻐하고 하늘의 노여움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한재로 인하여 절약할 일을 품지(稟旨)하였는데, 백관의 감봉(減俸)을 차등있게 하고, 훈국(訓局)의 군기 만드는 역사를 중지하게 하며, 병조의 장관(將官)들의 전마(戰馬)에 대한 요(料)를 감하게 하고,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조(租) 5천 석을 내어 경비를 보조토록 하였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신이 작년 가을인가 겨울 쯤에 박지영(朴之英)이 올린 꿈에 관한 글을 보았고, 또 본도의 여러 사부(士夫)들이 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혹 고인들이 말한 별도의 도리라는 것에 가까운 점도 있으니, 먼저 선입견을 가지고 무턱대고 물리쳐 버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설령 그것이 실제로는 허탄한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祖先)을 위하는 성상의 도리에 있어서는 이렇게 해서는 또한 안 될 듯합니다.
신이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송 인종(宋仁宗)이 승하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혼(魂)을 돌아오게 하는 술(術)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태종 황제(太宗皇帝)와 옥경(玉京)에서 함께 모란을 구경하느라 내려올 뜻이 없으시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 말이 허망한 줄을 알았으나 죄주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영묘(英廟)011)  의 상(喪)에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있어 먼저 다른 사인(死人)에게 시험케 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그만두었는데, 역시 죄주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조정이 청명하고 유술(儒術)이 성행하였는데, 어찌 좌도(左道)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내 그르게 여긴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신하의 정리란 실로 지극함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원평(新垣平)이나 공손경(公孫卿)012)   등의 일과 똑같은 예로 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척(三陟)의 능침(陵寢)에 남이 몰래 장사를 지냈다는 말이 여염에 퍼진 것은 오래 전부터입니다. 조종조에서도 일찍이 여러번 찾았으나 끝내 확실한 곳을 알 수 없었으니 이는 실로 천고의 유한(遺恨)입니다. 이번 지영의 말에 갖다 붙이고 끌어다 넣은 점이 있는 듯하긴 하나 주된 의도가 전적으로 능침을 위해 한 말이고 보면, 나머지 말들이야 모두 덮어두고 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幽明)의 이치는 진실로 쉽게 말할 수는 없으나 몽조(夢兆)로 서로 감응되는 것에 간혹 징험이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래 그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전연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의 말대로 한번 찾아보게 하여 다행히 징험이 있다면 실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휴경(休慶)이 될 것이며 비록 징험이 없더라도 허물의 종류로써 그 사람의 인(仁)을 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혹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것으로 의문을 삼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정릉(靖陵)의 변고를 처리했던 전례도 있으니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감히 지영의 말을 꼭 믿을 만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지극히 중대한 일이라서 도리상 가벼이 거부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조종의 정령(精靈)이 남에게 꿈으로 감응하여 투장(偸葬)의 일을 말해 주었다는 것을 듣고 어떻게 조정에서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살펴 조사하지 않고는 도리어 죄주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설령 그것이 무망(誣妄)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처치할 수는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고 만에 하나라도 방불한 것이라면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오르내리면서 오늘의 일에 대해 어찌 의아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모호한 감이 있어 갑자기 중요하게 처리할 수는 없으니, 한 장의 호령을 내려 해도(該道)에서 처치토록 분부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그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능침의 막대한 일을 십분 헤아려 처리하지 않을 수 없고 유명(幽明)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 또한 모호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으니, 대신의 진달은 깊은 생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종조의 구례에 의거하여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해마다 봉심(奉審)하도록 하고, 구동(舊洞)의 유허(遺墟)도 민간의 문견(聞見)을 널리 채집할 경우 만일의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거듭 밝혀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4일 무인

영병장(領兵將) 유림(柳琳)이 금주위(錦州衛)에 도착하여 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주(星州)의 군사 김득평(金得平)은 대포를 쏘아 맞히지 못했고, 이사룡(李士龍)은 탄환을 제거한 채 공포(空砲)를 쏘았는데, 감호(監胡)가 알고 매우 노하여 이사룡은 참수하고 김득평은 장형(杖刑)에 처했다고 한다.

 

대사헌 이경석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번의 심한 가뭄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어떤 일과 어떤 정치의 응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상께서 염려하시고 유사에게 명하여 사형수를 석방하는 등 재난을 막는 도리에 지극하지 않으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노여움은 그치지 않아 우리의 소망을 들어줄 기미는 더욱 멀어지고만 있습니다. 이는 아마 구구하게 드리는 기도나 소소하게 사유(赦宥)하는 정사로는 하늘의 깊은 꾸지람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지난번 비국이 아뢰며 선왕조에서 대한(大旱)을 만났을 때 중외의 죄수를 모두 석방하였던 일을 들어 전하에게 깊이 희망을 걸었던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소인들의 요행이 될 뿐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이라고 염려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엔 석연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여론을 들어보건대 이른바 사형수를 복계(覆啓)하는 대상 중에 몽매하여 제대로 사실을 밝히지 못한 자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기타 유배된 자들 중에도 법을 남용한 경우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감히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은택을 베푼 뒤에도 미처 살피지 못한 경우가 오히려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더 석방시켜 특별히 은전을 베푸시는 동시에 중외에 명하여 즉시 평결(平決)하게 하소서.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이야 본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나, 태장(笞杖)을 차등있게 시행하도록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어찌 감히 시행의 경중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상께서 반역죄를 국문할 때 형장(刑杖)으로 죄인이 그 자리에서 죽는 일을 특히 염려하시어 분수(分數)를 감하게 하셨고, 지난번에 비국에서도 남형(濫刑)의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진계(陳啓)하고 팔도에 행회(行會)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외방의 일을 듣건대, 감사·병사로부터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형장을 화풀이하는 도구로 삼는데, 장(杖)으로도 부족하여 혹 대추(大椎)를 쓰기도 하므로 두어 번 내려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는 경우까지 있다고 합니다. 군법(軍法)도 아니고 죽을 죄인도 아닌데 각기 사람을 죽이는 권한을 쥐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수족을 편히 둘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의 형부(刑部)는 곧 옛날의 정위(廷尉)로서 죄인을 형벌하고 죽이는 것이 본디 법전에 실려 있는데, 어찌 감히 법으로 하지 않고 엄혹(嚴酷)하게 하는 것만을 숭상하겠습니까. 그런데 형부에서 죄수를 다스리는 일을 들어볼 것 같으면 한 번의 형신(刑訊)으로 죽는 자도 있다고 하는데, 비록 그 죄가 매우 중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성상의 흠휼(欽恤)하시는 도리를 체득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궁중과 정부는 일체로서 서로 다를 수가 없는데, 내수사에서 옥사를 국문함은 무엇 때문에 설치한 것입니까. 듣건대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는 자가 즐비하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해가 더욱 심한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폐습을 혁파하시고 계금(戒禁)을 거듭 밝혀 형장의 법이 남용되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의지할 곳 없는 궁민(窮民)들을 왕정(王政)이 제일 먼저 구휼해야 하는데, 순직했거나 수자리에 나간 집은 더욱 괄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부가 전날의 차자에서도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아직 은전을 거행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미 시행된 것을 신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매우 곤란하고 혹독했던 참상은 3건의 쇄환과 관련된 자들보다 더 심한 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부모 처자로서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특별히 더 구휼해야 할 것인데, 그중에는 반드시 매우 노약하고 고단한 자들이 있을 것이니, 밝게 구별해서 구호미를 별도로 더 준다면,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속히 봉행토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군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대신(臺臣)들의 쟁론이 간간이 있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필시 ‘이 공역(工役)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는 것도 아니고 공용의 경비를 쓰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일텐데, 이런 때에 이런 역사를 한다는 것은 공구 수성하시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뉘우치시고 우선 정지시킴으로써 몸을 닦는 한 방편으로 삼으소서.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몇 년 이래로 한가하신 여가에 술의 해로움을 조심하지 않는 때가 있었고 곁에서 모시는 궁녀들도 혹 멀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난해부터 불편하신 가운데 조섭(調攝)한 효력이 즉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뒷뜰에 못을 파서 작은 배를 띄우는가 하면 별도로 높은 망루를 짓고 나무를 조각하여 꾸몄다는 말이 외간에 전파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소문이야 얼토당토 않은 것이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어찌 크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몸소 맹성(猛省)하시어 자질구레한 오락을 끊어 버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뙤약볕 속의 혹독한 가뭄은 곧 천지가 교통(交通)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늘날 국사가 와해되는 것도 상하가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일찍이 이를 경계하시지 않았겠으며 서로 믿게 하려고 하시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오히려 비색하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과오가 있을 때 일에 따라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고인과 같이 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허물을 듣고 거리낌없이 바로 버리기를 고인과 같이 하신 일이 있습니까? 이런 일이 들리지 않으니 비색이 또한 극에 달하였다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옛날 임금에게 충간했던 자는 모두 하정(下情)을 가능한 한 다 털어놓았던 것인데, 하정을 다 털어놓게 하는 것은 오직 임금이 허탄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혀 사람들의 착한 말이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고인들의 감응은 빛과 소리보다 빨랐습니다. 그래서 천리에 내리는 비도 육책(六責)에서 말미암았고 형혹을 물리침도 한 마디의 말에서 말미암은 것013)  이니, 이 이치는 환한 것입니다. 상께서는 재변을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며 혹시라도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인견하셨을 때에도 가벼운 비단옷을 물리치고 베옷을 입고 앉아 ‘이번의 재변은 모두 나의 죄이다.’고 하교하셨으니, 성상의 한 마디 말로 말미암아 오늘이라도 비가 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남한 산성에서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때 전하께서는 큰눈이 내리는데도 노천에서 기도하면서 사졸들과 괴로움을 같이 하셨는데, 아무리 사나운 사졸이라도 감읍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항오(行伍)의 천한 병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주상의 뜻이 남한 산성에 있을 때와 같이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대부들이 외방에서 듣고 전한 말인데, 오늘 신들이 감히 전하를 위해 외워드립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5월 6일 경진

문학 남노성(南老星)이 심양으로 갔다.

 

이명한(李明漢)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석(李晳)·이행원(李行源)을 정언으로, 박의(朴漪)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7일 신사

춘추관이 아뢰기를,
"잘못을 바로잡아 사기를 수찬하는 것은 막대한 일이니, 이식(李植)이 감히 집에서 홀로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여 이렇게 사양하고 회피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한 군데 빈 관사에서 동료들과 회의하여 산정(刪定)한다 해도 비용이 더 들지는 않으니, 그의 차자 내용대로 가능한 한 편의를 제공해 속히 완수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팔도 감사에게 유시하여 일찍이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들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사초(史草)와 야사(野史)를 각 고을에서 수집하여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5월 8일 임오

중신을 목멱산 등지에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수령을 천거하는 규정을 보건대 연례로 할 경우에는 입사(入仕)하여 아직 수령을 지내지 않은 자를 천거합니다마는, 혹 신명(申明)하는 때를 당하면 이미 수령을 지낸 자를 함께 천거했던 전규(前規)도 있습니다. 또 의망할 때에는 그 이름 밑에 천거한 자의 이름을 반드시 써야 하는데, 여러번 수령을 지냈으면서도 일찍이 천거자가 없는 사람이 많으니, 천거자의 이름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임(時任) 수령 외에 산관(散官)에 있는 자들도 의당 일체 천거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신축년 무렵에 선조(宣祖)께서 특별히 분부하시어 연례적으로 수령을 천거할 때는 물론이고 특별히 선택할 경우에도 잡스럽게 하지 말 것이며 단자를 받은 뒤에는 전관(銓官)이 천거자의 수효와 그 인품의 고하(高下)에 따라 수령의 망(望)에 주의(注擬)토록 하되 각기 이름 밑에 천거자의 성명을 기록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토록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성조(聖祖)께서 수령의 선발을 신중하게 하여 천거한 보증인을 연좌(連坐)시킨 법이었습니다. 문무관에 있어서는 그 당시에 별로 천거한 일이 없었으나 오늘날 어느 정도로 고쳐서 준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수령을 천거하는 일은 이미 선조 때에 행한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출신(出身)인 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천거했던 일이 없었으나 오늘날 어느 정도로 고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수령을 지내지 않은 출신들도 의당 가려서 천거하라. 그리고 천거하는 관원은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으로 한정하라."
하였다.

 

5월 9일 계미

승문원 부정자 이완(李)이 성지(聖旨)에 응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대개 크게 변통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곧 공부(貢賦)의 개정과 쓸데없는 관원의 감원과 군제(軍制)의 확립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크게 진작시켜야 할 것이 네 가지이니, 곧 군율을 엄숙히 하는 것과 장법(贓法)을 엄히 하는 것과 붕당을 깨트리는 것과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소위 공부의 개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삼공(三公)의 자제로부터 하인이나 천인에 이르기까지 관작이 없거나 생원 진사가 아닐 경우 15세 이상은 모두베 1필(匹)씩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는다면 각 사람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베가 1백여만 필이 될 것이고 결(結)로 거두어들이는 쌀도 60만 석에 가까울 것이니, 이것이 당(唐)나라에서 실시한 조용(租庸)의 법입니다. 제향(祭享)과 어공(御供) 및 백사(百司)의 공물을 일체 혁파하는 대신 모두 이 미포(米布)로 변통하고 백관과 수령들의 봉급도 모두 이것으로 준다면, 백성은 역에 응하는 번거로움이 없게 되고 국용(國用)은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관원의 감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백 명의 관원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당(唐)·우(虞)는 천자의 나라인데도 백 명으로 정치를 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훨씬 작은데도 관원은 당·우의 십 배나 됩니다. 이 때문에 각사의 관원이 많은 곳은 십여 명씩 되어 서로 일을 미루고 하리(下吏)에게 전부 맡기는데, 만약 직무에 뜻을 두는 자가 있으면 일마다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는 일을 망치게 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긴요치 않은 관사를 모두 혁파하고 각사의 관원으로는 당상 1명과 낭료(郞僚) 한두 명만 두어 늠록(廩祿)을 넉넉히 주되 과한(科限)을 정해 책임지고 성취하도록 위임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군제의 확립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장정이 백여 만을 밑돌지 않는데, 군오(軍伍)에 있는 자에게 모두 보인(保人) 10여 명씩을 주어 자기들의 부모와 처자를 봉양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람마다 재력을 저축하고 기계를 예리하게 하여 군오에 들어오려고 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 지원자들을 각기 재능을 시험해 선발한다면 십여만 명의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주현(州縣)에 모아 날마다 말타고 사냥하는 것으로 일삼게 하고 각기 잡은 짐승은 그들이 갖게 하되,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한결같이 군법대로 시행하고 낙오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군율로 처단한다면 정예로 훈련되어 국가의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군율이 엄하지 않으면 임금이 장수를 부릴 수 없고 장수는 군졸을 부릴 수 없게 되는데,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산골에 들어가 피난했던 수신(帥臣)들 거의 모두가 복관(復官)되었고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던 군졸들에게는 면포(綿布)만 징수했을 뿐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군율을 범한 자가 있으면 장수와 군졸을 막론하고 모두 군율을 엄하게 적용하여 군졸된 자는 장수를 두려워할 줄만 알고 적을 두려워할 줄은 모르게 하며, 장수된 자는 임금을 두려워할 줄만 알고 자신을 돌아볼 줄은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법(贓法)을 엄히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장죄(贓罪)를 범하고도 형벌을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수령이 무엇을 꺼려 침어(侵漁)를 자행하지 않겠습니까. 기종헌(奇宗獻)의 탐장(貪贓)한 흔적이 매우 분명한데도 주륙을 면하였으니 역시 실형(失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탑전에서 심리할 때에 어떤 대신 한 사람이 극력 변호하면서 기필코 석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아, 음양을 섭리하고 치도를 논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대신의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재이(災異)를 만나면 면직되었고 건백(建白)하는 일이 없으면 면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신은 섭리를 잘하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같은 난세를 만나 건백하는 일도 없이 편안히 정승의 자리에 앉아 하는 일이라곤 그저 탐리(貪吏)를 구제하려는 일뿐이니, 앞으로 그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여러 신료들 가운데 그가 구제하려고 꾀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신은 통탄하는 바입니다. 한 광무(漢光武)는 장죄에 대해 용서가 없었으므로 사관이 특별히 기록하여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장죄에 대해 신중히 하셔서 용서함이 없도록 하소서.
붕당을 깨뜨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동서(東西)로 분당된 후로는 조정에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지목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쪽에 현재(賢才)가 있어도 저쪽에서 득세를 하게 되면 반드시 배척하여 쓰지 않으며, 저쪽에 현재가 있어도 이쪽에서 득세하게 되면 역시 배척하여 쓰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천거하게 되면 꼭 말하기를 ‘이 사람은 누구의 당이기 때문에 누가 천거했다.’고 하며, 한 사람을 반박하면 또 ‘이 사람은 누구의 당이기 때문에 누가 반박했다.’고 하면서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공정한 사람이 전조(銓曹)나 대각에 있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서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날마다 신료들을 접하여 조용히 토론하신다면, 붕당하는 자와 공정한 자, 어진 자와 사특한 자들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속 같은 전하의 판단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사특한 자는 쫓아내고 어진 자는 승진시키소서. 그리고 세속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여 색목(色目)에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 전형(銓衡)의 권병(權柄)을 맡긴다면, 당론을 깨뜨릴 수 있으며 조정을 숙정(肅靖)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기강의 확립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기강은 국가의 원기인데, 원기가 허약해지면 사지의 병이 극성스러워지는 법이니, 역시 급한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기강으로는 비록 태평 무사한 때도 쉽사리 진작시키지 못할까 두려운데, 더구나 이렇게 급급하고 조석을 보전키 어려운 날을 당하여서 어찌 위태함을 부지하고 위망이 만회될 리가 있겠습니까. 고인들의 말에 ‘덕교(德敎)는 태평 시대를 일으키는 영양분이고, 형벌은 난세를 치료하는 침과 약이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난망(亂亡)이 이미 극도에 달했고 보면 형벌이 아니고는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형벌이란 위수(渭水) 가에서 죄수를 논하던 류014)  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죄 지은 자를 용서없이 죽이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법령이 행해질 것이며, 법령이 행해지면 기강이 진작될 것이며, 기강이 진작되면 모든 국가 시책에 어긋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기강을 진작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때의 엄함을 위주로 했던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5월 10일 갑신

전라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오늘은 국기일(國忌日)이라서 인견할 수 없는 날이나 일찍이 남한 산성에 있을 때 경이 치민(治民)에 매우 익숙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않고 만나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호남은 땅이 넓고 일이 많은 곳인데 요즈음 재이가 거듭 나타나니 경은 일에 따라 선처하라."
하였다. 대답하기를,
"흉년이 들면 백성이 궁해지고 백성들이 궁핍하면 도적이 되지 않는 자가 드무니, 좌도와 우도에 토포사(討捕使)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11일 을유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에 유성(流星)이 대낮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사라졌는데, 색깔이 불과 같고 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의주부(義州府)에 서리가 내렸다.

 

대사간 이명한(李明漢) 등이 상차하기를,
"예로부터 난세를 평정한 임금은 반드시 덕을 같이하는 한두 명의 신하를 심복으로 삼아 의지하였습니다. 만약 윗사람에게 위임하는 정성이 없고 아랫사람에게 담당하려는 뜻이 없으면, 군국(軍國)의 모든 일이 다 독단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신하가 편안하고 임금이 수고로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요(堯)·순(舜)과 같은 성인이라도 어찌 매사를 기의(機宜)에 모두 합치시킬 수 있겠습니까. 혹시 상하가 질질 끌어서 시일만 넘긴다면 필경에는 누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임금이 일단 어느 신하가 의지할 만하고 도와줄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전부 맡기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신하도 신명을 바쳐 심력(心力)과 모획(謀劃)을 다할 것이며, 남이 난처하게 여기는 일을 처리하고 남이 말하기 어려워 하는 일도 말할 것이니, 이것이 소위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비를 논하는 신하의 경우도 반드시 일의 권의(權宜)를 헤아려서 할 것이며 큰소리치는 것으로 직무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확실히 일의 불가함을 알았다면 극구 간쟁해야 할 것이나 일단 실수한 점을 들었으면 평온한 마음으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묘당과 대각은 서로 견제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기(事機)의 변화란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시행하고 혁파할 것인지의 여부를 한 자리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인데, 서로가 귀띔하고 깨우쳐야 할 위치에서 어찌 이미 아뢰어 시행되는 일을 우선 정지시켜야 한다고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위임하는 정성과 담당하려는 뜻이 없어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습니다. 임금은 신하 보기를 아비가 자식 보는 것처럼 하여 비록 악한 행동을 죄주더라도 불쌍한 마음이 뒤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도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하여 비록 위엄을 두려워하더라도 애모(愛慕)의 정성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인간 본연의 상성(常性)으로서 천지 간에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송 인종(宋仁宗)은 당개(唐介)가 면전에서 탄핵하자 화를 내었는데, 문언박(文彦博)이 당개를 폄출(貶黜)시켜 영주 별가(英州別駕)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인종은 당개가 도중에서 죽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곧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행(護行)하도록 하였습니다. 노한 것도 공심(公心)이고 염려한 것도 공심이니, 당개가 비록 만 번의 죄를 받더라도 어찌 감히 자애스런 임금에게 원망을 품겠습니까. 군신의 사이란 본래 이런 것입니다.
전에 차천로(車天輅)가 과장(科場)에서 대술(代述)한 죄로 북쪽 변경에 찬배되었습니다. 그때 그 곳의 감사가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으므로 천로가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감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사조(辭朝)할 때에 선조(宣祖)께서 특별히 하교하여 「천로의 문재(文才)가 아까우나 내가 쉽사리 법을 무시하고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굶어 죽기라도 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하자, 천로가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말을 듣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경연에서 강정(講定)한 말을 듣건대, 인재를 가려 천거하도록 하였다 하니, 진실로 오늘날의 절실한 일입니다.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되 사사롭게 조작하지 않는다면, 유현(遺賢)이 묻혀 있지 않을 것이고 숨은 인재가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천거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적임자를 얻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존비(尊卑)를 막론하고 친소(親疎)에 관계없이 여러 신료들이 천거한 사람들을 한가하신 때에 특별히 이것저것 물어 보시어 한가(漢家)에서 아침에 아뢴 사람을 저녁 때에 불러들인 고사(故事)처럼 하소서. 그러면 현우(賢愚)와 능졸(能拙)이 전하의 명감(明鑑)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무지(魏無知)의 천거를 한 고조(漢高祖)가 어찌 믿었겠으며 위상(魏尙)의 어짊을 문제(文帝)가 어찌 알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신(聖神)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5월 12일 병술

경상도 거창현(居昌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의성(義城)과 안동(安東)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상의원 정 박계영(朴啓榮)이 전에 보덕으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노새를 샀습니다. 그런데 지난 봄에 왕세자가 심양에서 출발할 때 관문(館門)에서 노새를 못가져 가도록 저지를 당하자 마침내 세자에게까지 진달하여 가지고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비루하고 외람된 짓으로 모욕을 당하고 국가에 욕을 끼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정해

충청도 목천(木川)·옥천(沃川) 등의 고을에 눈처럼 서리가 내렸다.

 

형조 정랑 차달원(車達遠)이 유지에 응하여 진소(陳疎)하였는데, 소장의 끝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우(禹)임금이 미워하던 것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탕(湯)임금이 가까이 하지 않던 것을 가까이 하시어, 용지(龍池)에 배가 있고 꽃나무가 숲을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달원을 불러 하문하기를,
"궁금(宮禁)의 일을 그대가 어떻게 들었는가."
하니, 달원이 매우 자세하게 대답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고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5월 14일 무자

옥당이 아뢰기를,
"월과(月課)로 제술(製述)하는 인원 가운데 연이어 세 차례 수석을 차지하면 그전부터 자계(資階)를 올려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부사직 안헌징(安獻徵)은 연이어 세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으니, 전례대로 상을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5일 기축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 서리가 내렸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상차하기를,
"신은 혼미하여 사세의 가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번 인견하여 심리(審理)하던 날, 기종헌(奇宗獻)이 포위를 뚫고 들어와 호위했던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할 수 없었던 일인만큼 심리하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용서하는 예를 따르도록 외람되게 진달한 것은, 또한 충의를 권장하고 퇴폐한 풍속을 격려시키려는 한 가지 방법이었지 종헌은 죄가 없으니 용서하자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일 전에 삼가 듣건대 가주서(假注書) 이완(李)이 상소를 올려 장리(贓吏)를 옹호한 신의 죄를 논척(論斥)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완은 본래 그때 함께 입시하였던 신료로서 신이 진달한 말을 듣고는 이치에 맞지 않음에 놀란 나머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 사람의 심성이란 그다지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가령 이완이 산성에 들어가 있으면서 당시 종헌의 활약상을 직접 보았더라면 신이 오늘날 말한 논의와 부합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조치는 반드시 법에 의거하여 처리해야 뒷날의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이완이 진달한 말이야말로 방파제같이 바뀔 수 없는 큰 원칙인 반면, 신이 진달한 것은 일시의 임시 변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실로 형정(刑政)에 관계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신의 노망한 소견 때문에 이렇듯 착오를 저질렀으니 뒤따라 후회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근래 오래 병을 앓았는데 틈을 내어 사직하는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구구한 마음을 앙달하게 되었으니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실 밖의 말에 개의할 필요가 없다. 경은 안심하고 출근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전에 운송한 군량이 몇 달은 충분히 지탱할 것이기에 우리 백성이 숨을 조금 쉴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교체해야 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백성들이 장차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각도 감영의 아병(牙兵) 가운데 정예가 많으니 의당 그들 중에서 가려 보내고 어영군(御營軍)도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감영에 아병이 있다는 것을 저들이 모르고 있으니 먼저 말하지 말라. 어영군과 속오군(束伍軍)을 반반씩 조발하여 보내라."
하였다.

 

유정익(柳廷益)을 영병 대장(領兵大將)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사간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5월 16일 경인

한형길(韓亨吉)을 도승지로, 이확(李廓)을 통제사로, 이행우(李行遇)를 응교로, 조중려(趙重呂)를 수찬으로, 신경진(申景珍)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5월 17일 신묘

충청 병사 신경진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보고 일렀다.
"장수된 자가 평소에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싸움터에서 먼저 도주한다면, 군병들이 이산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다. 경은 모름지기 군무에 마음을 다 쏟아 죄를 그저 사졸에게 돌리지 말고 조정에 전가하지도 말라."

 

5월 19일 계사

심양에서 재신(宰臣) 이행원(李行遠)이 치계하였다.
"용골대(龍骨大)와 범문정(范文程) 등이 와서 세자를 배알하고 은밀히 말하기를 ‘이번에 다시 들으니 한선(漢船)이 조선을 향해 간다고 하는데, 혹 해도(海島)를 점거하거나 해안에 상륙하면 반드시 난처한 우환이 있게 될 것이다. 단지 표류한 본국의 뱃사람들을 돌려주려는 것뿐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문서를 통하거나,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식량을 주거나 한다면 본국은 서로 내통했다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니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즉시 치계하여 감사와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궁관(宮官)을 파견토록 하라. 그리하여 양서(兩西)에 분부하여 주사(舟師)를 빨리 출동시켜 모든 섬을 먼저 점거케 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막고 혹시라도 어기거나 그릇됨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세자가 답하기를 ‘이 일을 즉시 알리겠다. 그러나 군대를 발동시키는 일은 반드시 표신(標信)이 있어야 하니 형세상 마음대로 하기 어렵고, 주사(舟師)는 삼남에 있어서 시기에 맞추어 징발하기가 또한 어려울 것이니, 궁관을 파견하더라도 실제로는 분부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용골대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본국이 일은 성실하게 하지 않고 오직 말로 얼버무리려고만 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지 않으나 이번의 사태는 정말 긴급하니 전일처럼 행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가 금주(錦州)의 외성(外城)을 차지한 뒤로 저들의 형편이 급박해졌기 때문에 주사를 동쪽으로 가게 하여 뒤를 칠 계책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본국이 힘을 다하여 방비하지 않는다면 저들과 더불어 내통하는 자취를 가릴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헌부가 아뢰기를,
"통제사 이확(李廓)은 지나치게 형벌을 쓰고 마구 거둬들여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게 하였으니, 통제사의 직임이 어찌 이런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제수 명단이 한번 발표되자 모두 놀라고 있으니, 먼 지방 백성들의 실망을 역시 상상할 수 있습니다. 파직시켜 서용하지 마시고 대임자를 엄밀히 가려 차송(差送)하소서."
하였는데, 여러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20일 갑오

지난달 15일 경원(慶源)에 눈이 내렸다. 29일에 삼수(三水)에 큰눈이 내리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이나 참새알만 하였으며 땅에 세 치나 쌓였다. 이달 3일에는 서리가 내려서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이 사실을 감사가 보고하였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재신의 이문(移文)을 보았는데, 만약 한병(漢兵) 1천 명이 나와 해도(海島)를 점거하거나 해안에 오르게 된다면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기를,
"과연 일이 급박하게 되었으니, 대답하게 하기를 ‘군대를 발동하는 일은 번신(藩臣)이 감히 마음대로 못하는 일이기에 조정에 급히 아뢰어서 이미 허락을 받았다. 일대를 엄중하게 지켜 비록 한선(漢船)이 나타나더라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양서(兩西)에는 원래 주사(舟師)가 없으니 각도(各島)를 나누어 지키기란 형세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날랜 배를 즉시 지정하고 출몰하여 여기저기 출몰시켜 정탐해서 방비의 터전으로 삼겠다.’고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1일 을미

간원이 논하기를,
"당상 선전관 황익(黃瀷)은 집안의 행실이 패려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순하다고 모든 친척들이 말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지 않는 것을 길거리에서도 다 아니, 윤상(倫常)의 죄를 지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국법대로 행한다면 형장(刑章)을 면치 못할 것인데도 세도가에 빌붙은 인연으로 아직도 사판(仕版)에 있으니, 조정을 부끄럽게 하고 명기(名器)를 욕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여러번 아뢰었으나 체직만을 명하였다.

 

5월 22일 병신

이조 참판 이식(李植)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번에 심양에서 나온 궁관(宮官)의 말을 대체로 듣건대, 지난달 초에 정명수(鄭命壽)가 관소(舘所)에 와서 신료들에게 말하기를 ‘조신(朝臣) 중에 이식이란 자가 김 판서 등을 옹호하고, 회은군(懷恩君)에게 주문(奏文)을 주어 파견하기를 청하여 우리들을 모함하려고 꾀하였다. 이 사람이 조정에 있는 한 좋지 않은 일을 만들 것이니 반드시 철쇄를 씌워 북관(北舘)에 구류시킨 뒤에야 걱정을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답니다. 이에 궁관이 대답하기를 ‘이식은 상(喪)을 당하여 고향에 가 있다.’고 하니, 명수가 ‘대사헌이 되기도 하고 이조 참판으로서 비변사를 겸하고 있기도 한데, 어떻게 숨길 수 있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처럼 와서 말하는 것은 이 일을 당장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라에 전파되어 있으나 다행히 여러 왕(王)들은 듣지 못하고 있으니, 이후로는 조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뒤에 이사(貳師)가 들어갔을 때도 그 의도를 탐문한 결과 역시 전의 말과 같았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정역(鄭譯)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조정에서 신의 말을 믿고 들어주는 것에 유감을 품고 먼저 공갈을 하여 신을 정사에 참여치 못하게 하는 한편 훗날 물고 늘어져 겁을 줄 계책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보잘것없는 목숨이야 결코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체통으로 볼 때 어찌 전날과 같은 모양이 다시 있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심양의 말을 듣건대 의신(議臣)을 잡아 매두는 것이 동궁이나 대군을 구류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그들이 교묘하고 음험한 생각을 품고 더욱 방자하게 헐뜯는 실태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만약 한 건의 일이라도 지체되거나 한 마디의 말이라도 잘못된다면 신이 박황(朴潢)처럼 붙들려 갈 것은 뻔한 일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신의 본직과 겸대하고 있는 문형·경연·비국 당상의 직임을 모두 파면시켜 한산직(閑散職)에 둠으로써 흔적을 없애고 화기(禍機)가 풀어지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기를,
"이식이 사직을 청한 말은 염려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본직과 문형은 체직시킬 수 없으나 본사의 당상을 겸대할 것까지는 없을 듯하니, 우선 감하(減下)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5월 23일 정유

평안도 벽동(碧潼)·양덕(陽德)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5월 26일 경자

심연(沈演)을 양서 도순검사(兩西都巡檢使)로 삼았는데, 비국의 추천을 따른 것이다. 이때 한선(漢船)이 동쪽으로 많이 향하고 있는데도 본국에서 즉시 보고하지 않는다고 청나라 사람들이 여러번 말하였으므로, 조정이 심연을 보내 양서의 연해를 순력하게 한 것이다.

 

이덕수(李德洙)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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