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을사
이명한(李明漢)을 대사헌으로, 박돈복(朴敦復)·강백년(姜栢年)을 장령으로 삼았다.
6월 3일 정미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요즈음 농사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비가 내린 뒤에 서속이 점차 무성해지고, 높고 건조한 밭에도 모두 파종했으니 앞으로 추수할 희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지난 봄 가뭄으로 논밭이 거북등처럼 갈라졌으니, 저번의 비로는 흡족하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지난번 유림(柳琳)의 장계를 보니 군량을 절약하고 있다는 말이 있긴 하였습니다마는 시일이 오래 걸리면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신은 걱정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유림의 장계에 알 수 없는 말이 많은데 금주성(錦州城)을 포위하였다는 말은 더욱 믿을 수 없다. 설사 포위하였더라도 졸지에 성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십왕(十王)이 전사하였는 말은 사실인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저들 중 날랜 장수들도 전망(戰亡)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어찌 십왕의 일이라고 해서 믿을 수 없겠습니까."
하고,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요토(要土)가 이미 죽었고 십왕도 죽었다면 저들은 한 쪽 팔이 잘린 격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봄부터 여름까지 한재가 너무도 심하였으니, 한번의 비로서는 매말랐던 논밭의 곡식이 소생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도 대신이 곧 풍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로, 우근(憂勤)해야 할 이때에 아첨만 떨었으니 앞으로 그런 정승을 어디에 쓸 것인가.
6월 6일 경술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동몽(童蒙)들의 교육이 잘못되고 사습(士習)이 투박해진 나머지 막중한 과거에서조차 왕왕 변고가 생겨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난번 공도회(公都會)의 과제(課製) 때 2, 3명의 유생이 서제(書題)로 인해 서로 쟁변하여 마침내 파장(罷場)까지 되는 바람에 수백여 명이 일시에 흩어져 나갔으니, 이야말로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동몽의 망령된 행위라고 하여 덮어두고 논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습관이 길러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이 이 모양이라면 외방이야 알 만하니,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수창자(首倡者)를 적발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시관(試官)도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중률(重律)에 따라 추고하소서. 또 6월 공도회와 외방의 공도회는 모두 정지시켰다가 풍년이 되거든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7일 신해
경상도에 가뭄이 들었다
이행우(李行遇)를 사간으로, 성초객(成楚客)·장응일(張應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9일 계축
황해도 안악(安岳) 땅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을 양전(量田)한 뒤에 전결(田結)이 증가하였으므로 5결마다 거두던 포(布)와 군수목(軍需木)·조례 가포(皁隷價布)를 모두 혁파하고 서량(西粮)만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서량을 당량(唐粮)이라고도 하고 모량(毛粮)이라고도 하는데, 정축년 이후로 명목을 고치지 않은 것은 실로 유사(有司)가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관서(關西) 지방에서 통용되는데다가 행해진 지도 오래되었고, 지금 비록 다른 명목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그 미곡은 일단 거두어야 하고 보면, 결국 끌어다 붙이는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대로 서량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김상(金尙)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에는 서량이라는 명목을 혁파하고 다른 명목으로 따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사가 살피지 못한 결과 백성들이 지목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처(議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호조가 이렇게 아뢴 것이다.
6월 10일 갑인
경기 풍덕(豊德)에 사는 임광(任光)의 아내가 젖 하나로 세쌍둥이 딸을 키웠는데, 상이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하여 물품을 주게 하였다.
이때 원근에 말이 와전되어 심양에 간 군병들이 전진(戰陣)에서 전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그 처자들이 울부짖고 원망하여 마지않았으며, 앞으로 가게 되어 있는 자들도 겁먹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 군병을 뽑는 통에 인정이 의구(疑懼)하고 있습니다만, 일찍이 유림(柳琳)의 장계를 살펴보니 죽은 자는 10명뿐이었습니다. 만약 해도로 하여금 그 가속들을 구휼하게 한다면, 죽은 자들의 집은 민휼(愍恤)의 은전을 받게 되고 와전된 말도 이로 인해 수그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6월 11일 을묘
경상도 영천(永川)에 황충이 생겨 이웃 고을까지 번졌다. 비국이 향축(香祝)을 보내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 물리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2일 병진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이경석(李景奭)을 이사(貳師)로, 심대부(沈大孚)를 이조 좌랑으로, 윤강(尹絳)을 응교로, 심동귀(沈東龜)를 교리로, 박종부(朴宗阜)를 헌납으로, 이재(李梓)를 검열로 삼았다.
6월 13일 정사
강원도 회양(淮陽) 등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의주 부윤 이민수(李敏樹)가 치계하기를,
"한선(漢船) 두 척이 바다에서 나와 해안에 정박하려고 하다가 이튿날 돛을 올려 장자도(獐子島)로 직행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전에 청인(淸人)이 말을 전하기를, "한선이 무수히 동쪽으로 향하여 갔으니 그대 나라는 먼저 방비하여 정박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조정이 이를 듣고 바야흐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민수의 보고가 들어오자 원근이 놀라면서 모두들 주사(舟師)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도순찰사 심연(沈演)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한선은 장차 무엇을 하려고 나오는 것인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대체로 그 의도는 필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오는 것일테니, 의심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용천 부사(龍川府使)와 미곶 첨사(彌串僉使)가 평안 병사에게 연명(聯名)으로 보낸 글을 평안 병사가 다시 신들에게 전해 왔습니다."
하고, 소매 속에서 그 글을 꺼내 올렸는데, 승지와 사관 모두 볼 수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난처하여 끝내 어찌될지 모르겠다. 중원(中原)의 형세로 말한다면 뒤를 치려고 하니 반드시 군대를 크게 일으켜야 할 형편이나, 이처럼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에 주사(舟師)를 크게 출동시켜 먼 바다를 건너온다는 것도 좋은 계책이 아닌 만큼 중원에서 필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약간의 병선만 보내어 사정을 탐지하는 한편 성세(聲勢)를 과장해 보여 오랑캐들로 하여금 서쪽을 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할 근심은 없을 듯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난해에 풀벌레가 바다에서 무수히 날아왔는데 이는 실로 비상한 이변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앞으로 전쟁의 근심이 없지 않을 듯하다."
하니, 심연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나온 한선의 숫자가 비록 적다고는 하지만 혹시라도 연속해 나와 상륙하고 서로 부딪칠 경우 전투를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싣고 온 우리 나라 사람들을 내려 놓으려 한다면 거절하고 받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니, 역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 지난해 임경업(林慶業)이 이주(易州)에 나갈 때 한 척의 배를 태풍에 실종되었다고 핑계하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보내었다. 이번에 한선이 나올 때 이 사람들 중에 따라 나온 자도 있다고 하였으므로 심연이 언급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륙하여 서로 부딪칠 경우에는 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심연이 아뢰기를,
"일이 만약 이 지경에 이른다면 심양의 군대도 당연히 나올 것인데, 반드시 우리를 핍박하여 싸우게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피하고 싶어도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미리 지휘하여 임기 응변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기가 아뢰기를,
"정축년에 한선이 나왔을 때 우리 나라에서 절박한 뜻을 사실대로 말하였더니 모두 즉시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도 이 전례를 적용하여 우리의 실정을 진정한다면 들어 주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나온 것에 큰 계획이 없는 바에야 비록 간절히 구걸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심양을 협공하려 하는 것이라면 어찌 우리가 잘 말한다고 하여 선뜻 철수하여 돌아가겠는가. 그들이 즉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청인이 반드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주사를 출동시켜 전쟁에 참여토록 할 것인데, 이는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니다."
하였다. 심연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에는 본래 주사가 없다는 것을 청국도 아니, 이로써 말한다면 저들이 혹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나라로 하여금 삼남(三南)의 주사를 조발(調發)하게 한다면 더욱 난처할 것입니다."
하고, 석기가 아뢰기를,
"임경업이 신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만약 나를 보내 준다면 내 스스로 주선할 수 있다.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꼭 차출하여 보낼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의 사기(辭氣)를 살펴보건대 조금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심연이 아뢰기를,
"경업이 일찍이 청국에 죄를 지었으니 지금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갑자기 그를 차견(差遣)한다면 이 사실을 청국에 통지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심연이 아뢰기를,
"경업은 현재 직명(職名)이 없는데, 어떤 칭호를 주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순찰사의 군관이란 칭호로 백의 종군(白衣從軍)케 하라."
하자, 석기가 아뢰기를,
"별장(別將)이란 칭호가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장초(張超)가 등주(登州)에서 나오면 중국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 장초는 경업이 몰래 보냈던 사람이다.】 상이 이르기를,
"장초는 일에 익숙한 자인가?"
하자, 경진이 아뢰기를,
"장초는 본래 서로(西路)의 사람으로 한인(漢人)과 접촉이 잦은데다 위인이 영리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지난번 수령을 천거하도록 했던 일을 외간에서 많이들 비난한다고 하는데, 대간이 정지시킬 것을 청한 것은 실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천거한 것은 모두 청탁을 받아 한 것이기 때문에 외간에서 모두 비웃으며 천거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천거한 사람들이 모두 사정(私情)에 따랐겠는가. 공도(公道)로 참여된 자들도 있을 것인데, 모두 혁파시킨다면 너무 야박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혁파하도록 하고 우선은 전조(銓曹)에서 가려서 쓰게 하라."
하였다.
6월 14일 무오
영의정 홍서봉이 일곱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보살펴 주도록 하였다.
6월 16일 경신
최유해(崔有海)를 동부승지로, 정시성(鄭始成)을 검열로, 황집(黃緝)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6월 18일 임술
심양으로 가는 군병들을 모화관(慕華館)에서 호궤하게 하고 사신(史臣)을 보내 위유(慰諭)하였다. 이와 함께 병조가 전투 기금으로 면포를 주었는데, 어떤 군인은 이를 받아 땅에 내동댕이치면서 "이번에 내가 가면 죽을 것인데 이것을 받아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는데, 심연(沈演)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경증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소를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경증은 전후로 사명(使命)을 받들면서 업신여김을 받은 일이 한 번도 없으니, 이번에 응접하면서 어찌 관계가 나빠질 단서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얼굴이 안면을 익힌 사람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만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막중한 임무를 경솔히 교체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1일 을축
전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죽었다. 온은 안음(安陰) 사람으로 자(子)는 휘원(輝遠)이고 호(號)는 동계(東溪)이다. 젊어서 정인홍(鄭仁弘)을 스승으로 섬겼으나 뒤에 정인홍의 악함을 깨닫고 통렬하게 절교하였다. 광해조에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억울하게 죽은 실상을 상소하여 진달하고 정항(鄭沆)을 목벨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크게 노하여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하다가 마침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다. 반정(反正) 초에 즉시 석방되어 돌아와 여러 차례 관직을 역임하며 이조 참판과 대사헌에 이르렀다. 천성이 꾸밈 없고 곧으며 과감히 말하는 큰 절개가 있었는데, 남한 산성에 있을 때는 강화(講和)하자는 의논을 극력 배격하였다. 성을 나가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는 찬사(贊詞)를 지어 의대(衣帶)에 묶은 뒤,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배를 찔러 유혈이 자리에 낭자하였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구제하여 죽지 않았다. 또 상소를 올려 국새(國璽)를 바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기(辭氣)가 격렬하였으며, 성을 나온 뒤에 고향 집에 돌아가 있다가 죽었다.
6월 22일 병인
금주위(錦州衛)의 영병장(領兵將) 유정익(柳廷益)이 출발하였다.
박종부(朴宗阜)를 이조 좌랑으로, 김홍욱(金弘郁)을 교리로, 유경창(柳慶昌)을 부교리로, 정지화(鄭知和)를 수찬으로, 김진(金振)을 헌납으로 삼았다.
6월 23일 정묘
경상도 함양군(咸陽郡)의 백성 원연(元連)이 곤궁하여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처자를 거느리고 옛 절터 옆에 토굴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원연에게 고하기를, "내가 마땅히 너에게 후하게 주리라." 하였는데, 이런 현상이 두세 차례 있었다. 원연이 마음 속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겨 그의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의 아내 역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땅을 파는데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파 보니 오래 된 하나의 항아리가 기와로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일천 년(一千年)’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대략 수십 개쯤 되어 보이는 황적색의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한 개의 표면에 ‘의춘 대길(宜春大吉)’이란 글자가 있었다. 그러나 원연은 그것이 금(金)인 줄은 몰랐는데, 같은 군(郡)에 사는 사람이 마음 속으로 금인 줄을 알고 원연에게 "이것은 주석[錫]이다."라고 속여 말하자, 원연이 그 말을 믿고 즉시 헐값을 받고 내주었다.
이에 그 사람은 말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호남(湖南) 땅으로 이사하였는데, 전주 부윤이 그의 행적을 의심하여 체포하려 하자,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십여 냥(兩)쯤 싸가지고 호조에 가서 말하기를, "듣건대 국용(國用)이 탕갈되어 세폐(歲幣)로 보낼 금을 마련할 계책이 없다고 하니 이것을 바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호조 판서 이명(李溟)이 입계(入啓)하여 논상하려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전주와 함안(咸安) 등의 고을에서 "그 사람이 기화(奇貨)를 탈취하였다가 자기의 죄를 모면하려고 약간의 금을 덜어내어 호조에 가서 바쳤으니 정상이 가증스럽다."고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을 의금부에 가두고 나머지 금을 모두 징수하니 1백 30냥이었는데, 그 사람이 모두 내어놓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오래도록 형신(刑訊)하는 중에 있었다. 이때 우승지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하늘이 지보(至寶)를 아껴 천 년 동안 은밀히 감추었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국가가 쓰도록 내어 놓았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휴징(休徵)이나 길조(吉兆)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공사간에 아무것도 없는 이때에 경비를 보충하고 민력을 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원연은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으로 그것을 쓸모없는 돌처럼 여겼는데, 간교한 백성이 그 가치를 알고는 염가로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시기를 틈타 이득을 독점하려고 먼저 호조에 바쳐 책임을 메우려고 하였으니, 교묘하게 남을 속인 정상은 실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매매할 때 교묘한 말로 기만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것은 장사치들의 일반적인 행태로서 시장 사람들 모두가 이런 부류들인데, 어찌 이것 때문에 중하게 죄줄 수 있겠습니까. 또 이 금은 사실 이 사람이 지레 바쳤기 때문에 국가의 소용이 될 수 있었고 보면 공로가 있다고 해도 될 것인데, 교묘하게 속인 죄 때문에 상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형벌만이라도 면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공가(公家)의 물건을 훔쳐낸 것도 아니고 먼 지방 백성들이 스스로 얻어 저들끼리 매매한 것이며, 국가에서 이미 값을 주고 금을 사용하였는데, 그 사람을 또 의금부에 가둔다면 억울하다는 원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왕정(王政)의 대체에도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신이 왕명 출납의 지위에 있으면서 해방(該房)의 일을 대신 살피다가 품은 생각이 있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사실이 발각된 뒤에 그 죄를 모면하려고 국가를 속였다. 계사 가운데 ‘지레 바쳤으니 공로가 있다.’는 등의 말은 모두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에 손상이 된다는 말은 옳다."
하고, 그날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상이 그 금을 청국에 보내자, 청국이 그 금을 되돌려 주었는데,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신라(新羅) 때의 오래된 황금이 이미 조선의 소득이 되었는데, 왕이 사사로이 갖지 않고 사람을 시켜 보내 왔으니, 사대(事大)의 정성을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의춘 대길(宜春大吉)’과 ‘일천 년(一千年)’ 등의 말은 상서(祥瑞)인 것 같은데, 왕이 얻은 것은 곧 짐이 얻은 것과 같다."
하였다.
6월 24일 무진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6월 25일 기사
황해도 옹진(瓮津)·은율(殷栗)·곡산(谷山) 등의 고을에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이시백(李時白)을 총융사로 삼았다. 총융사의 직임이 비어 있은 지 오래였는데, 군의(群議)가 모두 시백이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고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월과(月課)에 세 차례 잇따라 제술(製述)하지 않은 자는 파직하라고 처음으로 명하였다. 국초(國初)부터 나이 40이하인 문관을 뽑아 각체(各體)의 문사(文詞)를 제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3개월마다 9수(首)로 한정하고 전혀 제술하여 올리지 않는 자는 추고하여 조율(照律)토록 하면서 현직(現職)을 해임시키는 데 그쳤으므로 제술하지 않는 자가 매우 많았다. 그래서 파직을 명한 것이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이후원(李厚源)을 우승지로, 박길응(朴吉應)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6일 경오
상이 전라 병사 황집(黃緝)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경은 어떻게 이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고 이서(李曙)의 편비(偏裨)가 되었는데, 이서가 신을 쓸만하다고 하였으므로 지금에 이르러 다행히도 총탁(寵擢)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서가 아니었다면 신이 어찌 이 지위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서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경이 그 사람처럼 잘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낼 수 없겠는가. 요즈음 호남에 재이가 매우 많다. 경은 모쪼록 군졸들을 무휼하여 윗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상관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28일 임신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와 기성(箕星) 아래로 들어갔다.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전라도 영광(靈光)에 사는 전 현감 이희웅(李喜熊)이 상소하여 치평책(治平策) 16조목을 바쳤는데, 1. 실덕(實德)을 닦아 천심(天心)에 맞게 할 것, 2. 현상(賢相)을 두어 천직(天職)을 함께 할 것, 3.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기를 것, 4. 언로(言路)을 넓혀 물정이 통하게 할 것, 5. 학교를 높여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것, 6. 사유(師儒)를 중히 여겨 도학(道學)을 밝힐 것, 7. 교화를 펴 풍속을 변화시킬 것, 8. 전선(銓選)을 공평하게 하여 서관(庶官)을 가려 임용할 것, 9. 천거의 제도를 설치하여 현재(賢才)가 나아오게 할 것, 10. 고과(考課)를 엄히 하여 명실상부하게 할 것, 11. 민생을 보호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12. 형옥(刑獄)을 살펴 억울한 것이 풀리게 할 것, 13. 상하를 분변하여 국가의 형세를 안정되게 할 것, 14. 장수를 잘 뽑아 내외가 편안해지게 할 것, 15. 기강을 바로하여 정치의 대체를 확립할 것, 16. 마정(馬政)을 닦아 육지의 교통이 소통되게 할 것 등이었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칭찬하여 장려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이 사람은 나이가 80이나 되었는데도 나라를 향한 정성은 쇠하지 않았다. 또 좋은 계책을 진달하여 내가 유념하기를 바라니, 그의 알뜰한 충성은 옛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다. 늙은 사람의 좋은 말에 대해서는 예의상 숭보(崇報)해야 마땅하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당상에 승진시키도록 하라."
6월 29일 계유
특명으로 전 사직(司直) 홍무적(洪茂績)을 사간으로 삼았다. 간원의 관리는 반드시 문신이라야 되는데 무적은 과제(科第)를 거치지 않고 진출했으므로 이조가 전례를 들면서 계품(啓稟)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격적으로 제수한 것은 그의 정직함을 표창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무적은 남의 장단점을 논하기를 좋아했지만 임금의 잘못을 바로 지적하지는 못하였다. 이른바 정직하다고 한 것은 이름뿐이었으니, 숭상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6월 30일 갑술
유성이 분묘성(墳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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