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7월

싸라리리 2026. 1. 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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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병자

유성이 북극성 위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들어갔다.

 

평안도에 홍수가 나서 대동강(大同江)이 넘쳤는데, 물이 평양성 문까지 들어왔다.

 

7월 3일 정축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송도(松都)의 전례대로 본도에도 별도의 승보(陞補)를 베풀어 많은 원방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을 계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평안도에 홍수가 나서 물이 대동문(大同門)까지 들어왔다고 하는데, 성벽의 높이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성벽이 그다지 높지 않으니 물이 들어온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성(錦城)의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해 걱정이 된다. 대신들은 들은 일이 있는가?"
하니,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신들도 들은 일이 없습니다만, 심양에서도 매우 염려하여 그들의 군병을 모두 출동시켜 내보냈다고 합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전 참판 정온(鄭蘊)은 폐조(廢朝) 때부터 평소 명절(名節)이 드러났었고, 금상 때에도 여러번 총탁(寵擢)을 입어 재신(宰臣)의 반열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듣건대 갑자기 죽었다 하니 상께서 별도로 부의(賻儀)하여 표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부제학 김영조(金榮祖)가 나아가 아뢰기를,
"옛날부터 임금이 현자(賢者)를 세움에는 구별없이 하였으나, 법도에 있어서는 꼭 지켜서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홍무적(洪茂績)을 특별히 사간으로 제수하신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석기가 아뢰기를,
"이것은 우리 나라 이백 년 동안에 없었던 일로서 언사(言事)의 신하가 논한 것이 옳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수현(金壽賢)도 이와 같이 논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이튿날에 연계(連啓)하니, 상이 따랐다.

 

7월 5일 기묘

전 사간 홍무적을 특별히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치화(鄭致和)를 사간으로, 권억(權澺)을 장령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명수(鄭命壽)의 어미에게 정부인(貞夫人)을 추증(追贈)하였는데, 명수의 직질(職秩)을 따른 것이다. 비국 당상 이경증(李景曾)이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정역(鄭譯)의 아우 정명춘(鄭命春)이 그의 어미를 장사지낼 때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에게 와서 묻기를 ‘명정(銘旌)에 뭐라고 써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추증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정역이 동지(同知)가 된 이상 그의 부모도 추증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7월 10일 갑신

광해군(光海君)이 이달 1일 을해(乙亥)에 제주(濟州)에서 위리 안치(圍籬安置)된 가운데 죽었는데 나이 67세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사흘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이때에 이시방(李時昉)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禮)로 염빈(斂殯)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르다고 하였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광해가 교동(喬桐)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이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참판 심액(沈詻)이다.】 "광해가 번번이 인심을 잃어 천명(天命)이 전하에게 돌아왔는데, 전하께서 광해를 독실히 염려하셨으니 은혜와 예의가 모두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손위(遜位)한 지 거의 20년에 천수(天壽)를 마칠 수 있었으니 전하의 성덕은 옛날에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천하 후세에 전해도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의리상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고 신민들의 요청에 쫓긴 나머지 폐출시키는 거사가 있긴 하였으나,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다른 종실과 비교하여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합니다. 상이 한번쯤 내정(內庭)에서 거림(擧臨)하시고 백관도 각 아문에서 변복(變服)하고 모여 곡하는 정도로 한다면 정리나 예의에 있어 유감이 없을 듯한데,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일단 광해가 천명을 스스로 배반하여 모든 신민들에게 버림을 받은 처지라고 한다면, 의금(衣衾)과 관곽(棺槨)을 구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골육에 대한 성상의 사은(私恩)을 다했다고 말하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대내(大內)의 거림과 백관이 상복을 입고 회곡(會哭)하는 등의 절목까지 아뢰다니, 해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광해의 상례는 다른 종실에 비해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하다는 말이 소견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광해가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스스로 천명을 끊고 종사와 신민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독실하게 친친(親親)의 의리를 생각하여 은혜와 예의를 다 갖추심으로써 마침내 천수(天壽)를 마치게 하였습니다. 상을 당한 소식을 들은 뒤에도 특별히 예관(禮官)과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셨으니, 성상께서는 광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없이 대하신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편찮으신 때가 아니라면 골육의 정리로 대내에서 한 번쯤 거림하시는 것이 하나의 도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백관들까지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등의 절목은 대의(大義)의 측면에서 볼 때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산(燕山)의 치상(治喪)에 이미 전규(前規)가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경진의 의논을 옳게 여겼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제주의 상사(喪事)는 강화(江華)와는 다릅니다. 【 문성 부인(文城夫人)이 강화에 있을 때 먼저 죽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초상의 관렴(棺斂) 등의 일은 이미 거행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바다 멀리 떨어진 일이라서 물품이 초라할 것이니, 반드시 성신(誠愼)해야 하는 도리에 흠이라도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만둘 수 없다면 관을 바꾸고 염을 다시 하되, 반드시 발인(發引)하여 올라온 뒤에 여러 관료들이 회동하여 널리 의논해서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초상에 소용되는 것은 일단 내려 보내지 말고 발인에 필요한 물건만 해조로 하여금 먼저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염과 초빈이 끝난 뒤에는 위리(圍籬) 안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관사의 정결한 곳에 출빈(出殯)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전헌(奠獻)하는 제물도 본 고을로 하여금 정결히 갖추어 예법대로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본도의 감사가 그곳에 나아가 모든 일을 검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채유후(蔡𥙿後)를 예조 참의로 삼아 중관(中官)과 함께 제주에 가서 호상하도록 하였다. 상이 7일 동안 소선(素膳)하려 하였는데, 약방과 정원의 여러 신하가 서로 잇따라 진달하여 아뢰기를, "예관의 청에 따라 조회를 정지시킨 것도 벌써 비례(非禮)에 속하는데, 더구나 옥체가 편찮으신 이때에 법도 밖의 예의를 행하심은 마땅치 않습니다. 조회의 정지 기간이 끝난 뒤에는 즉시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연산의 치상은 왕자(王子)의 예로써 장사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같은 예로써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산소 감역관도 가려서 보내도록 하고, 광해의 삼년상 뒤에 광해와 문성 부인의 가묘(家廟)와 묘제(墓祭)는 연산의 제례(祭禮)대로 그의 외손이 주관하게 하라." 하였다. 【 연산은 그의 외손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0면
【분류】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한국고전번역원
"광해가 번번이 인심을 잃어 천명(天命)이 전하에게 돌아왔는데, 전하께서 광해를 독실히 염려하셨으니 은혜와 예의가 모두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손위(遜位)한 지 거의 20년에 천수(天壽)를 마칠 수 있었으니 전하의 성덕은 옛날에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천하 후세에 전해도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의리상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고 신민들의 요청에 쫓긴 나머지 폐출시키는 거사가 있긴 하였으나,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다른 종실과 비교하여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합니다. 상이 한번쯤 내정(內庭)에서 거림(擧臨)하시고 백관도 각 아문에서 변복(變服)하고 모여 곡하는 정도로 한다면 정리나 예의에 있어 유감이 없을 듯한데,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일단 광해가 천명을 스스로 배반하여 모든 신민들에게 버림을 받은 처지라고 한다면, 의금(衣衾)과 관곽(棺槨)을 구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골육에 대한 성상의 사은(私恩)을 다했다고 말하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대내(大內)의 거림과 백관이 상복을 입고 회곡(會哭)하는 등의 절목까지 아뢰다니, 해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광해의 상례는 다른 종실에 비해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하다는 말이 소견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광해가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스스로 천명을 끊고 종사와 신민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독실하게 친친(親親)의 의리를 생각하여 은혜와 예의를 다 갖추심으로써 마침내 천수(天壽)를 마치게 하였습니다. 상을 당한 소식을 들은 뒤에도 특별히 예관(禮官)과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셨으니, 성상께서는 광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없이 대하신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편찮으신 때가 아니라면 골육의 정리로 대내에서 한 번쯤 거림하시는 것이 하나의 도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백관들까지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등의 절목은 대의(大義)의 측면에서 볼 때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산(燕山)의 치상(治喪)에 이미 전규(前規)가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경진의 의논을 옳게 여겼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제주의 상사(喪事)는 강화(江華)와는 다릅니다. 【 문성 부인(文城夫人)이 강화에 있을 때 먼저 죽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초상의 관렴(棺斂) 등의 일은 이미 거행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바다 멀리 떨어진 일이라서 물품이 초라할 것이니, 반드시 성신(誠愼)해야 하는 도리에 흠이라도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만둘 수 없다면 관을 바꾸고 염을 다시 하되, 반드시 발인(發引)하여 올라온 뒤에 여러 관료들이 회동하여 널리 의논해서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초상에 소용되는 것은 일단 내려 보내지 말고 발인에 필요한 물건만 해조로 하여금 먼저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염과 초빈이 끝난 뒤에는 위리(圍籬) 안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관사의 정결한 곳에 출빈(出殯)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전헌(奠獻)하는 제물도 본 고을로 하여금 정결히 갖추어 예법대로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본도의 감사가 그곳에 나아가 모든 일을 검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채유후(蔡𥙿後)를 예조 참의로 삼아 중관(中官)과 함께 제주에 가서 호상하도록 하였다. 상이 7일 동안 소선(素膳)하려 하였는데, 약방과 정원의 여러 신하가 서로 잇따라 진달하여 아뢰기를,
"예관의 청에 따라 조회를 정지시킨 것도 벌써 비례(非禮)에 속하는데, 더구나 옥체가 편찮으신 이때에 법도 밖의 예의를 행하심은 마땅치 않습니다. 조회의 정지 기간이 끝난 뒤에는 즉시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연산의 치상은 왕자(王子)의 예로써 장사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같은 예로써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산소 감역관도 가려서 보내도록 하고, 광해의 삼년상 뒤에 광해와 문성 부인의 가묘(家廟)와 묘제(墓祭)는 연산의 제례(祭禮)대로 그의 외손이 주관하게 하라."
하였다. 【 연산은 그의 외손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0면
【분류】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한국고전번역원

 

대사간 이덕수(李德洙), 헌납 김진(金振), 정언 이천기(李天基) 등이 아뢰기를,
"어제 예조의 계사를 보건대, 그 중에 백관이 변복(變服)하고 회곡(會哭)해야 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고, 표현상에 주된 의도를 확실히 드러내지 못한 채 잘 살피지 못한 나머지, 물의를 일으키고 이목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해당 예관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함사(緘辭)로 아뢰기를,
"신은 본래 학식이 없는 터에 갑자기 변례(變禮)를 당하여 경솔히 의계(議啓)함으로써 물의를 초래하였으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은태자(隱太子)015)  와 해릉왕(海陵王)016)  을 개장(改葬)할 때에 의춘문(宜春門)에서 매우 슬프게 곡하였고, 송 태조(宋太祖)도 주왕(周王)과 정왕(鄭王)의 죽음에 소복을 입고 발애(發哀)하였으며 10일 간 조회를 중지시켰는데, 그 의리는 같을지라도 사정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에 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광해의 상사를 일단 왕자(王子)의 상례로 간주한 이상, 왕자와 종척(宗戚)에 대해 거애(擧哀)하는 예문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기 때문에 신은 옥체가 편찮아 지금 조섭(調攝) 중임을 생각지 못하고 망령스럽게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형제는 내가 사당에서 곡하고, 부친의 벗은 내가 사당 문 밖에서 곡하고, 스승은 침문(寢門)에서 곡하고, 붕우는 침문 밖에서 곡하고, 아는 사람이면 나는 들에서 곡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사대부들이 원근 친구의 부음을 들으면 변복하고 한 번 곡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정리나 예의상 당연한 것입니다. 공자는 옛 관인(館人)의 상사에도 들어가 슬프게 곡하였습니다. 광해가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신민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대의상으로는 죄인으로 여겨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관 뚜껑을 덮은 뒤에 있어서는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이 어찌 옛 관인에 대한 것보다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곡을 하려면 반드시 소복을 해야 되기 때문에 변복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손위(遜位)라는 말을 한 것은, 이 말이 《춘추》에 처음 나온 뒤로 쫓겨나 폐위된 임금의 경우를 흔히 손위로 표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쫓겨나 폐위되었다는 말을 직접 거론하고 싶지 않아서 손위라고 했던 것이지 폐위된 임금을 존칭하려는 목적에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광해에 대한 성상의 대우가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셨으므로, 어리석고 얕은 소견에 그저 성덕을 진선 진미(盡善盡美)하게 해 드리려고 한 나머지 경솔하게 꺼내었던 것인데,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덮어두고 묻지 않았다. 뒤에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예관의 계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계사에 ‘광해가 계속 인심을 잃어 천명이 전하에게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아, 광해가 폐위를 당한 것이 단지 인심을 잃었기 때문입니까. 스스로 윤기(倫紀)를 버리고 종사에 죄를 지은 것은 모두 없애버린 채 단지 ‘적실 인심(積失人心)’이라는 넉자만 계사 속에 넣어 사방에 전파시킨 것은 또한 무슨 의도입니까.
손위(遜位)라는 두 글자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신이 삼가 《춘추》의 호전(胡傳)을 살펴보건대, 손위라는 말은 손양(遜讓)한다는 말입니다. 노(魯)나라 문강(文姜)이 경보(慶父)017)  의 찬탈하고 시해(弑害)하는 음모에 가담하였는데, 희공(僖公)이 대를 이어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때 기록하기를 ‘부인 강씨가 제(齊)에 손(遜)하고 주(邾)에 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문강과 희공은 또한 모자(母子)의 의리가 있었기 때문에 손피(遜避)하였다는 말을 씀으로써, 자식에게 축출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하여 은혜를 온전히 보전시키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혼란을 바로잡아 반정(反正)하신 것인데, 예관이 손위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함사로 또 아뢰기를,
"《춘추》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전하의 반정은 청천 백일과 같은데, 숨길 만한 것이 무엇이 있어 손위라고 한단 말입니까. 광해의 죄악은 걸·주와 같을 뿐만이 아니니, 반정의 의거가 탕(湯)·무(武)보다 더 빛납니다. 신은 일개 필부인 주를 주벌하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걸·주가 손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 만약 예관의 말과 같다면, 탕·무의 신하인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같은 분들이 어찌 손위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 사씨(史氏)가 추방하였다고 썼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윤과 주공과 사씨의 견해가 도리어 오늘날의 예관보다 못했다는 말입니까.
한편으로는 손위라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변복하고 회곡해야 한다고 하면서 반드시 성신(誠愼)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한번 이런 의논이 나오게 되면, 외방에서 의논하는 자들이 혹 ‘옛 임금 상구(喪柩)의 상여꾼에게 백건(白巾)을 씌워야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상여꾼의 백건은 국상(國喪)에 쓰는 것인데, 어찌 광해의 상사에 쓸 수 있겠습니까. 이미 손위라고 한데다가 옛 임금의 상여꾼에게 백건을 씌우고 반드시 성신으로 해야 하며 백관이 회곡해야 한다면, 이것은 왕의 상사로 대우하는 것이니, 오늘의 이 일이 실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말을 깨뜨리지 않으면 나라는 나라가 될 수 없고 임금은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재상은 전하의 고굉(股肱)인데 재상이 이를 말하지 않고, 대간은 전하의 이목(耳目)인데 대간이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전하는 위에 고립되어 있고 군신들은 아래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은 외부의 모욕을 당할까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더욱 통탄하는 것은 전 참판 심액이 외람되게 예관의 아열(亞列)에 있으면서 대의의 소재를 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패리(悖理)의 논리를 떠들어 광해의 옛 은혜 갚기를 도모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심액의 사람됨이야 굳이 책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현영(李顯英)이 종백(宗伯)인 중신의 신분으로 그 의논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그 글을 인용하였는가 하면, 급기야 추감(推勘)을 당하자 자신이 나서면서 온화하신 유지(諭旨)가 거듭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부름에 나오지 않은 채 거취(去就)를 다투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 무슨 짓입니까. 아, 전하의 조정에 서서 눈으로 전하의 반정을 보고도 오히려 손위하였다고 말했으니 그 사이에 깊은 의도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찌 추고(推考)에 그칠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예관을 국문하여 국시(國是)를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헤아리건대 그의 의도는 후덕하게 대해 주자는 것이지, 단연코 다른 생각은 없다."
하였다.

 

7월 12일 병술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아우와 함께 금주성(錦州城)에 들어가 수비하였는데 청인(淸人)이 포위하였다. 조대수가 나성(羅城)을 잃자 항복했던 몽고(蒙古) 사람들을 의심하여 한인(漢人)을 시켜 감시하게 하였는데, 몽고인들이 성을 나가 투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 조정이 10만의 군대를 발동시켜 일곱 명의 총병(摠兵)이 거느리게 하여 금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우진왕(右眞王)이 대대적으로 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나라의 포수(砲手) 4백 명을 선봉으로 삼아 남산(南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군대를 두 대(隊)로 나누어 일대는 탑산(塔山)의 귀로를 방비하게 하고 일대는 금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며, 진중(陣中)에 기와집을 지어 오래 머무를 계획임을 보였다. 이때 우리 군대는 이미 여러 달을 노숙(露宿)하여 병들고 부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7월 13일 정해

겸춘추(兼春秋) 20명을 증원하여 누락된 사기(史記)를 보충하게 하였는데, 윤강(尹絳)·정치화(鄭致和)·신익전(申翊全)·김진(金振)·김홍욱(金弘郁)·정지화(鄭知和)·신유(申濡)·박장원(朴長遠)·홍처량(洪處亮)·조복양(趙復陽)·이행우(李行遇)·이척연(李惕然)·심동귀(沈東龜)·정유성(鄭維城)·심지한(沈之漢)·이태운(李泰運)·장응일(張應一) 등이 참여하였다. 당초 금상(今上) 때의 일기를 강도(江都)에 보관하였는데, 병자호란에 산실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이때에 와서 18명을 증원하여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열람하고 야사(野史)로 비장(秘藏)된 것을 거둬 들여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편집토록 하였다.

 

윤강을 사간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대사성으로, 정치화를 부응교로, 목성선(睦性善)을 우승지로, 채성귀(蔡聖龜)를 지평으로, 나윤소(羅允素)를 황해 병사로 삼았다.

 

7월 15일 기축

함경도 종성(鍾城)에 황충의 해가 있었다.

 

7월 16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의 해유법(解由法)은 매우 엄중하여 반드시 문서를 상고해서 흠결(欠缺)이 없어야만 판서가 허락하고 그 뒤에 참의가 성첩(成帖)하여 주는 것이 곧 옛날부터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참판 허계(許啓)는 휴가를 받아 나갈 즈음에 무인(武人) 양응함(梁應涵)의 해유건으로 해리(該吏)를 불러 인신(印信)을 가져 오도록 시켜 궐하(闕下)에서 사사로이 성첩하여 주었으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법을 무시한 정상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응함의 부탁한 죄상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7월 19일 계사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남하성(南河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숭문전(崇文殿)에 나아가 말을 검열하였다. 이에 앞서 점마관(點馬官)을 제도(諸道)에 나눠 보내 목장의 말을 가려 끌고 오도록 명하였으므로 상이 친히 숭문전에 나아가 일일이 검열한 것이다. 이때 상이 경연을 폐한 지 벌써 2년이나 되어 옥당의 유신들이 임금을 볼 수 없었는데, 어인(圉人)과 태복(太僕)만을 옆에 있게 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심양에서 재신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지난번 정명수(鄭命壽)를 보고 말하기를 ‘근래 무변 중에 장령(將領)으로 쓸 만한 자가 아주 적으므로 대장을 교체하여 이미 통제사로 이차(移差)하여 보내왔는데, 이번 한선(漢船)을 방비할 장수는 더욱 합당한 자가 없다. 임경업(林慶業)이 비록 대국의 명령으로 인해 지금 죄폐(罪廢) 중에 있으나 이 같은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다. 조정에서는 백의 종군을 시켜 스스로 힘써 공을 세울 터전을 만들어 주려고 하나 황제의 명으로 파직된 자를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다.’ 하였더니, 정명수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한 뒤에 말하기를 ‘이것을 용장(龍將)에게 통의(通議)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나, 지금 내가 모친상을 당했으므로 의논해 보지 못해 그의 뜻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다. 대체로 경업은 일찍이 의주(義州)에 있을 때 한인(漢人)을 후대하였고, 지난해엔 주사 상장(舟師上將)으로서 힘써 싸우지도 않고 몰래 세 척의 배를 보냈으며, 이주(伊州)의 전투에서는 말(馬)이 없다고 칭탁하였다. 이 네 가지의 큰 죄목이 있었어도 실상을 캐지 못해 다만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한선(漢船)을 방비할 곳에 위임한다면 혹 이쪽에서 본국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한인들과 접촉한다고 의심만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큰 일이 생길 것이니, 내 생각에는 경업을 서로(西路)에 절대로 써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습니다. 명수가 본국에 대해 상당히 힘을 바쳐 우리 나라의 대소사를 환히 알지 않는 것이 없는데, 만약 경업이 서로(西路)에 와 있는 줄을 알게 된다면 의심을 살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연해의 방비를 일단 도순찰사와 평안 감사에게 귀속시킨 이상, 경업이 서로에 머물러 있어도 무익할 듯하니 속히 소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흥일(韓興一)을 우승지로, 이명한(李明漢)을 대사성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장령으로, 이도장(李道長)을 교리로, 허적(許積)을 수찬으로, 이무(李袤)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0일 갑오

금부의 죄인 조정립(趙廷立)이 사람을 시켜 격쟁(擊錚)케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금부도 정립의 사건은 억울한 일이라 하여 그 죄를 풀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정원에 하문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정립은 일찍이 해남(海南)의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물(公物)을 훔쳐 내어 한 척의 배에 가득 실어다 영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주었습니다. 홍무적(洪茂績)이 장령이 되어 그의 범장(犯贓)을 논핵하여 금부에 가두었는데, 형신을 받은 것이 백여 차례에 이릅니다. 지금 홍무적이 승지가 되어서도 그를 석방할 수 없음을 말하니, 정립의 범죄는 범연하게 풍문 정도가 아닙니다. 미곡과 잡물을 훔쳐내었던 문서가 이미 법부(法府)에 폭로되었고 또 금부에도 전달되었고 보면, 형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정법(正法)에 복죄(伏罪)되었어야 마땅한데도, 여러 해를 지연시키며 약간의 형신만 가하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인심을 불복케 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사노(私奴)를 유인하여 격쟁케 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증스러워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관리도 그 죄를 용서해 주도록 청하였으니, 법이 제구실을 못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성왕(聖王)은 장률(贓律)에 대해서 조금도 용서없이 금석같이 굳게 하였는데, 이 어찌 호생(好生)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해당 당상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교리 이만(李曼)이 지어 올린 전 참판 정온(鄭蘊)의 제문 내용에 찬미한 말이 많이 있었으므로 상이 개찬(改撰)하도록 명하였다.

 

7월 22일 병신

함경도에 큰물이 졌다.

 

7월 23일 정유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성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집의로, 엄정구(嚴鼎耉)를 교리로, 박서(朴遾)를 수찬으로, 박종부(朴宗阜)를 이조 좌랑으로, 김시번(金始蕃)을 정언으로, 이필영(李必榮)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상이 비국 당상과 삼사(三司)의 장관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금년의 농사는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금년에 비록 가뭄이 들었으나 밭 곡식은 상당히 좋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밭 곡식이 비록 좋다고는 하나 아직 가을철이 되지 않았으니 어찌 반드시 잘 익을 것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장령(將領)을 의천(議薦)함에 있어 별도의 처치가 있어야겠습니다. 비록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가려 뽑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7월 24일 무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7월 26일 경자

간원이 아뢰기를,
"종묘의 제향(祭享)은 국가의 대사이니 비록 난리를 겪은 뒤라도 응당 행할 예절은 빈틈없이 해야 합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난리를 겪은 뒤로 종묘의 제복과 기명(器皿)을 미처 개비(改備)하지 못하여 흑의(黑衣)로 대신하고 연기(燕器)로 보충하여 쓴다고 합니다. 지난해에 개비하라는 하교가 계셨는데도 해조에서는 물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들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경중으로 논한다면 이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 성교(聖敎)가 내려졌는데도 오래 중지하여 행하지 않았으니,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묘관(廟官)과 해조로 하여금 쓰임새를 헤아려 기한을 정하여 조성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7일 신축

유성이 천시원(天市垣) 안에서 나와 실성(室星) 아래로 들어갔다. 또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7월 28일 임인

충청도에 큰물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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