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8월

싸라리리 2026. 1. 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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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진

유정익(柳廷益)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도착하였다.

 

8월 3일 병오

북 병사(北兵使) 이언척(李言愓)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서변(西邊)에 일이 있은 뒤로 북로(北路)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경은 직책에 힘을 다해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염려하고 있다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언척이 나가자, 동부승지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대신들이 빈청(賓廳)의 좌기(坐起) 때문에 와서 모였습니다."
하니, 상이 인견을 명하였다. 좌의정 신경진에게 하문하기를,
"신성(新城)에 군량 운반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경진이 대답하기를,
"관서(關西)의 운량마(運粮馬)도 모두 병들었습니다. 만약 저쪽에서 미곡을 무역하게 한다면 군량을 이을 수도 있고 백성도 편리하겠으나, 그 대가를 변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백관에게 품은(品銀)을 거두어 군량을 돕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체에 부당하니 할 수가 없다. 세폐(歲幣)로 수송되는 것 외에 반드시 나머지가 있을 것인데, 이것은 경비 중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으로 은을 바꾸어 들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나아가 아뢰기를,
"광해의 예장(禮葬) 때 종실 한 사람을 시켜 호상관(護喪官)으로 칭하고 상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을 돌아보며 모두의 뜻이 어떤지 하문하자, 신경진이 아뢰기를,
"초상 때에 이미 주관하는 자가 없었으니 해조에서 직접 해야 합니다."
하였다. 현영이 또 아뢰기를,
"가을 추수 뒤에 정시(庭試)의 시행을 명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터전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가을 추수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이번 과유(科儒)들이 모일 때에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8월 4일 정미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8월 5일 무신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양주(楊州)로 돌아갔는데, 이는 일찍이 간원의 논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8월 7일 경술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장응일(張應一)을 정언으로, 이덕수(李德洙)를 이조 참의로, 김영조(金榮祖)를 이조 참판으로, 심대부를 이조 좌랑으로, 심재(沈𪗆)를 이조 정랑으로, 김시번(金始蕃)을 부교리로, 신석번(申碩蕃)을 대군 사부(大君師傅)로 삼았다.
당초에 용궁(龍宮)에 사는 전 부사(府使) 전이성(全以性)의 계모가 남편과 반목하였는데, 계모가 죽자 전이성은 그의 부명(父命)을 따라 복상(服喪)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그의 친구 정자(正字) 이원규(李元圭)가 그 논을 옹호하였는데, 신석번이 말하기를,
"모자 간의 의리는 그의 부친이 혼인한 날에 이미 정하여진 것인데, 어찌 상기(喪紀)를 스스로 폐할 수 있겠는가."
하고, 글을 지어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전이성을 옳다고 하는 자는 신석번을 공박하고, 석번이 옳다고 여기는 자는 이성을 공박하는 등 의논이 나뉘어져 마침내 서로 불화가 생겼다. 이때에 와서 장응일이 정언이 되어서, 석번의 문벌이 비천하여 사부(師傅)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였으나, 사간 윤강(尹絳)과 정언 성초객(成楚客) 등은 불화로 일이 빚어진 것이라고 하고 그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

 

8월 11일 갑인

제주(濟州)에서 바치는 세공마(歲貢馬) 1백 필(匹)을 이 해부터 1백 필을 더하여 상규로 삼았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이 30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8월 12일 을묘

유성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 위로 들어갔다.

 

홍서봉을 익녕 부원군(益寧府院君)으로, 이후원(李厚源)을 좌부승지로, 유경창(柳慶昌)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16일 기미

황해도 해주(海州)·황주(黃州)·재령(載寧)·수안(遂安) 등의 고을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서리가 눈같이 내렸다.

 

8월 17일 경신

서리가 내렸다.

 

8월 18일 신유

심연(沈演)을 도승지로, 이행원(李行遠)을 대사헌으로, 박돈복(朴敦復)을 장령으로, 이명한(李明漢)을 부제학으로, 조경(趙絅)을 전한으로, 임전(林)을 수찬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19일 임술

평안도 가산(嘉山)·곽산(郭山)·순천(順川)·삼등(三登)·중화(中和) 등의 고을에 서리가 눈같이 내렸다.

 

8월 20일 계해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북극성(北極星) 위로 들어갔다.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8월 21일 갑자

해질 무렵에 영두성(營頭星)이 떨어졌다. 밤에 유성이 북두성 위에서 나와 관색성(貫索星) 아래로 들어갔다.

 

8월 23일 병인

이척연(李惕然)을 장령으로, 최유해(崔有海)를 우부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사간으로, 박길응(朴吉應)을 지평으로, 이빈(李彬)·채성귀(蔡聖龜)를 정언으로, 신유(申濡)를 교리로, 이재(李梓)를 봉교로 삼았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한선(漢船) 11척이 나오고 또 9척이 연달아 나오는 등 바다의 사태가 종전과는 전연 다릅니다. 그들이 돛을 벌여 나올 때에 청인들도 반드시 보아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급히 심양(瀋陽)에 보고하여 훗날 해명할 근거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방비 등의 일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병사에게 신칙하여 해안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조정이 몰래 평안 감사로 하여금 한선에 사람을 보내 양찬(粮饌)을 갖다주고 또 우리 나라가 자유로이 할 수 없음을 말하게 하였다.

 

평안 감사 정태화가 치계하였다.
"한선이 가도와 신미도(身彌島) 사이에 오래 머물러 있어 반드시 청인의 힐책을 초래할 것이니, 사태가 걱정스러울 뿐만이 아닙니다. 신미도는 토지가 상당히 비옥하여 그전부터 들어가 살면서 경작하는 우리 백성들이 있습니다. 만약 한선이 이곳에 정박하여 머문다면 더욱 난처하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는 우리 백성들을 육지로 옮기도록 하소서."

 

8월 25일 무진

황해도 연안(延安)·배천(白川) 등 여러 고을에 큰 바람이 밤새도록 불고 서리가 내렸다.

 

이에 앞서 조정이 승려 독보(獨步)를 몰래 중국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고, 독보가 칙서를 받아 돌아왔다. 그런데 칙서 중에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기어코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비국의 신료들 중에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자도 있고, 혹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자도 있었는데, 그 일이 비밀에 부쳐져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8월 29일 임신

상이 승지를 보내어 광해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 전택(田宅)과 하인을 그의 외손에게 주어 제사를 받들게 하고, 시녀(侍女) 두 사람에게는 3년을 기한으로 늠료를 주게 하였다. 광해는 폐방(廢放)된 지 19년만에 마침내 천수를 마쳤고, 상장(喪葬)에 이르러서도 은례(恩禮)를 다 갖추어 주었으므로 나라에서 모두 상의 성덕에 감복하였다.

 

유경즙(柳景緝)을 집의로, 박종부(朴宗阜)를 헌납으로, 선약해(宣若海)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8월 30일 계유

함경 감사 여이징(呂爾徵)이 치계하기를,
"준원전(濬源殿)의 공사를 이미 마쳤습니다. 영정(影幀)을 재전(齋殿)에 다시 봉안할 때에는 이 지방 사람들을 위열(慰悅)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출제를 해서 선비들을 시험보여 흥기시키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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