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술
한선(漢船) 20여 척이 가도(椵島) 등지에 왕래하였는데 조정이, 청인이 따져 묻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사와 병사에게 엄중히 신칙하였다는 뜻으로 심양에 보고하였다.
말 3백 36필을 내어 군량을 금주(錦州)로 수송하였다.
9월 2일 을해
유성이 누성(婁星) 위에서 나와 천창성(天倉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4일 정축
전라도의 진산군(珍山郡)과 금산군(錦山郡) 등에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위로 들어갔다.
청인이 구연성(九連城)에서부터 압록강 하류에까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한선(漢船)의 동정을 살폈다.
9월 5일 무인
밤에 유성이 대릉성(大陵星) 아래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위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여러 궁가(宮家)가 법을 무시하고 사심을 부려 각읍에 도서(圖書)를 보내서는 노비를 추쇄(推刷)한다느니 혹은 빚을 징수한다느니 하면서 외방의 사람을 서울로 잡아와 갖가지로 침해를 가하므로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 수가 없습니다. 제도(諸道)의 수령으로 하여금 감사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아뢰어 처치하게 하거나 혹은 본도에서 엄중 조사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도서(圖書)라는 것은 궁가에서 사용하는 작은 인자(印子)이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2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한국고전번역원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이만(李曼)을 지평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응교로, 유경창(柳慶昌)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6일 기묘
한선 1척이 깃발을 많이 꽂고 신미도(身彌島)에서 나와 해안으로 접근하려 하자, 우리측 사람이 거절하여 마침내 물러가 가도로 향하였다. 비국이 밀계(密啓)하기를,
"한선이 아직도 철수하여 돌아갈 뜻이 없어 육지와 가까운 섬에 서성거리며 출몰하니, 반드시 청국이 문제를 삼을 단서가 될 것입니다. 무장(武將) 한 사람을 가려 순검사(巡檢使)로 삼아 보내어 후일 청인의 질문에 응답할 소지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이 어찌할 수 없다면 그전에 갔던 사람을 다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7일 경진
청인이 금주(錦州)를 포위하고 여러 번 한병(漢兵)과 교전하였으나 한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구왕(九王)이 한(汗)에게 구원병을 청하니, 한이 팔왕(八王)으로 하여금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청인이 우리 나라의 포수가 전력으로 싸우지 않는가 의심하여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한병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 탄환을 맞은 자가 열에 칠팔은 되었으므로 한인이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유감이 더욱 깊어졌다. 한(汗)은 한인의 구원병이 기세가 매우 강성하다는 말을 듣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용골대에게 3천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선봉대로 가게 하였으며, 마침내 우리의 세자와 대군(大君)을 함께 가자고 강요하여 빈객 최혜길(崔惠吉), 보덕(輔德) 조계원(趙啓遠) 등이 따라갔다. 이 당시 청인과 한병이 서로 팽팽히 맞서 봄부터 여름까지 끄는 동안 청국의 대장 세 사람이 항복하고 두 사람이 전사하였다. 한(汗)은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피를 토하고 마침내 심양의 장정을 모조리 징집하여 서쪽 금주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으로서 기회를 틈타 우리 나라로 나온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9월 8일 신사
심연(沈演)을 순찰사로 삼아 서쪽 한선(漢船)을 방비하였다.
비국이 밀계(密啓)하기를,
"세자와 대군이 뜻밖에 서쪽으로 갔는데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은 빈객과 보덕 이하 약간의 인원일 뿐입니다. 혹시 위급한 일이 일어날 경우 힘을 발휘해 호위할 사람이 따로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관질(官秩)의 고하를 막론하고 용력과 지모가 있는 무신 10인을 가려 보내게 하여 그중 7인은 세자를 배위(陪衛)하고 3인은 대군을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득은 없고 폐해만 있을 것이니 보내지 말라."
하였다.
9월 9일 임오
한형길(韓亨吉)을 도승지로, 심재(沈𪗆)를 부교리로 삼았다.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추위를 막을 도구들과 일상 사용할 잡물을 세자의 행중(行中)에 보낼 것을 명하였다.
9월 10일 계미
비국이 아뢰기를,
"한선이 섬에 출몰한 지가 거의 한 달이 가깝습니다. 만약 식량이 떨어지면 연해의 각처에 배를 대고 내려와 창고의 곡물을 약탈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마땅히 군병을 많이 모아 접근하기 어려운 형상을 보임과 동시에 또 사리를 아는 통역으로 하여금 피차가 다 이득이 없다는 뜻을 잘 말해 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심연(沈演)이 이제 내려가니 오직 사세를 보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비밀히 감사 정태화(鄭太和)로 하여금 한인에게 식량과 반찬거리를 주게 하였다.
9월 11일 갑신
집의 유경즙(柳景緝)과 장령 박돈복(朴敦復)·이척연(李惕然)을 체직하였다. 앞서 감시(監試)를 출방(出榜)한 뒤에 시권(試券)이 불에 탔다는 이야기가 중외에 퍼져 경즙 등이 이 일로 여러 날 논계하여 방을 파기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풍문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된 것이다.
황해 병사 김응해(金應海)가 치계하기를,
"국가가 번신(藩臣)을 크게 염려하여 이와 같이 병영을 옮기는 조처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녹사(綠沙)는 황주성(黃州城)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곳으로 장마철에는 늘 수재를 입어 주민들이 다 풍토병을 앓으며, 게다가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옮겨 설치하는 역사를 벌이면 그 폐해가 작지 않으니, 그전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그 말을 따라 결국 영을 옮기지 않았다.
9월 12일 을유
비국이 아뢰기를,
"청국이 반드시 화약과 연환(鉛丸)을 요구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함경도에 저축해 둔 연철(鉛鐵) 2천 근을 평안도 병영(兵營)으로 직송하여 다급할 때의 용도에 대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3일 병술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벼농사는 이미 손상되었고 콩농사도 다 부실하다 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실농하여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백성의 일이 극히 염려스럽다. 그리고 경들은 심양의 형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경진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지구전으로 국력을 소모할 뿐 아니라 우리 나라도 지탱해 나갈 수 없으니, 군량을 계속 대줄 계책을 전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어제 미리 준비해 두자는 뜻으로 이미 계달하였습니다마는 1년 동안 소요되는 수천여 석을 반드시 여름 장마철이 되기 전에 진영으로 수송하여야 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또 군병을 늘린다면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청인이 혹시 패하여 물러날 리도 없지 않으나 내년 봄 식량을 우선 준비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14일 정해
월식이 있었다.
예조 참의 채유후(蔡𥙿後)가 체직되었다. 이 당시 유후가 광해(光海)의 상여(喪輿)를 따라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상여를 운반할 때 담군(擔軍)들이 다 백건(白巾)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시론(時論)이 비난하였기 때문에 유후가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대부의 상사(喪事)에 귀천을 막론하고 호상(護喪)하는 사람은 반드시 다 소복(素服)을 하는 이유는 대개 상례는 비록 친척이 아니더라도 길례를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서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폐군(廢君)의 상사는 그와 견주어 차이가 있는데다 또 그 담군을 조발한 것이 오로지 상여를 메기 위한 것이었다. 한때의 소중한 것이 이 상사에 있으니, 비록 그들에게 백건을 쓰게 하더라도 무슨 대단한 잘못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시론이 이를 비난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사대부의 상사(喪事)에 귀천을 막론하고 호상(護喪)하는 사람은 반드시 다 소복(素服)을 하는 이유는 대개 상례는 비록 친척이 아니더라도 길례를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서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폐군(廢君)의 상사는 그와 견주어 차이가 있는데다 또 그 담군을 조발한 것이 오로지 상여를 메기 위한 것이었다. 한때의 소중한 것이 이 상사에 있으니, 비록 그들에게 백건을 쓰게 하더라도 무슨 대단한 잘못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시론이 이를 비난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9월 15일 무자
경상도의 안음(安陰)·안동(安東)·청송(靑松)·영해(寧海)·봉화(奉化) 등 고을에 큰 기근이 들고, 흥해(興海)·울산(蔚山)·인동(仁同) 등지에 큰 바람이 불어 곡식을 손상하였다.
이행우(李行遇)를 집의로, 권억(權澺)·정시망(鄭時望)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17일 경인
유성이 벽성(壁星) 위에서 나와 누성(婁星) 아래로 들어갔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 지진이 있었다.
쌀 10석과 콩 5석 및 각종 찬물(饌物)을 광해군의 딸에게 주어 제수(祭需)를 갖추게 할 것을 명하였다.
한인(漢人) 8명이 오랑캐 땅에서 도망해 와서 우리 나라에 머물기를 원하였는데, 묘당이 후일에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잡아서 심양으로 보내니, 이를 들은 자들이 가슴 아파하였다.
9월 18일 신묘
유림(柳琳)이 금주(錦州)로부터 교체되어 돌아왔다. 지난해 청국이 징병해 갈 때 유림이 영병 대장(領兵大將)으로 금주에 갔다가 유정익(柳廷益)이 들어가자 돌아온 것인데, 청인이 소·양·말 등을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빈객 최혜길(崔惠吉)이 치계하였다.
"청인이 송산(松山) 밑에 진을 치고 사면을 포위하였으며 몽고병이 또 와서 그 곁에 진을 쳤는데 이는 대체로 오랫동안 송산을 포위하여 승패를 결판내자는 것인 듯합니다. 한인(漢人)의 포탄이 간혹 세자와 대군의 막차 근처에 떨어지므로 토담을 쌓아 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인이 적과 교전한 상황을 별지에 써서 보내왔는데 그 뜻은 대개 우리 나라에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 듯합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금주에서 전사한 군인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고, 운량마(運粮馬)가 돌아올 때 시신들을 의주(義州)로 실어와 그들 가족으로 하여금 거두어 장사지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9일 임진
유성이 군시성(軍市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9월 20일 계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홍석기(洪錫箕) 등 8인을 뽑았다.
9월 21일 갑오
대명(大明)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騎兵)은 도주하여 송산보(松山堡)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寧遠)과 행탑(杏塔) 등지에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祖大壽)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한(汗)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한 자가 20여 인, 죽은 말이 열에 팔구이며, 소비한 군량이 3천 3백여 석, 화약은 9백 70여 근, 연환(鉛丸)은 5만 3천 2백여 개였다.
9월 22일 을미
도순찰사(都巡察使) 심연(沈演)이 치계하기를,
"한선(漢船)이 철수해 돌아가 사태가 조금 평온해졌으니 양서(兩西) 연해의 파수하는 군사를 모두 해체하여 내보내고 약간 명만 남겨두어 동태를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4일 정유
윤의립(尹毅立)을 예조 판서로, 김육(金堉)을 좌승지로, 강백년(姜栢年)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지평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정언으로, 심재(沈𪗆)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9월 26일 기해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위로 들어갔고, 또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위로 들어갔다.
9월 27일 경자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대릉성(大陵星) 위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위를 비추었다. 또 구진성(鉤陳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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