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묘
일식이 있었다.
김광욱(金光煜)을 도승지로, 김세렴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종2품의 사람을 호조 판서에 더 의망하라고 명하므로 비국이 세렴을 의망한 바 드디어 발탁하여 제수한 것이다.
12월 3일 신사
풍천(豊川) 업청강(業淸江) 가에 어떤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고 관찰사가 계문하였다.
부호군 김집(金集)이 소를 올려 다시 소명을 사양하였는데, 답하였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따뜻한 봄날을 기다려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전 청단 찰방(靑丹察訪) 이중형(李重馨)이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면서 영의정 김류의 죄상을 들었는데, 그 대략에,
"김류는 성품이 본시 탐욕스럽고 강퍅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반정 이후부터는 공을 믿고 교만해져서 망령되이 잘난 체하며 제 마음에 영합하는 자는 좋아하여 쓰고 제 뜻을 거스르는 자는 미워하여 배척하는가 하면, 무릇 혐원(嫌怨)이 있는 자는 어떤 일로든 무함하여 반드시 사지로 몰아넣었고, 웅장한 집과 토색질로 모은 재산은 유희분(柳希奮)이나 박승종(朴承宗)의 무리도 이보다 더할 수 없으며, 양계(兩界)의 수령과 변장을 모두 체찰사의 주영(駐營)에 배속시켜 놓고서 직급을 올리고 내리는 것을 오직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여 탐욕스럽고 사나운 무리들이 세 변경을 꽉 메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경징(慶徵)이 또 중간에서 술수를 부려 불의를 자행하자, 사류(士類)들에게 용납받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기필코 편당을 심어 도움을 받으려 하였으며, 병자 호란 때에는 자신이 장상(將相)을 걸머지고 있으면서 나라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몸을 보존하고 집을 보존할 계책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제 아들을 추천하여 중임을 맡겼다가 종사(宗社)를 패망시키고 생민을 도살하였으니,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그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하의 분의(分義)인데도 심기원(沈器遠)의 옥사를 태연히 제 공으로 돌리고 불법으로 원훈(元勳)을 차지하였으니, 공을 탐내고 방자한 모양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세자를 책봉한 일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일인데, 이처럼 어려운 시국을 당해서는 비록 성상께서 정해 놓은 계책이 없더라도 대신이 된 자로서는 오직 사직을 보호할 궁리만 하고 일신의 이해는 돌아볼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인대(引對)하던 날 앞뒤로 눈치만 보고 입을 다문 채 양쪽의 의견을 다 수긍하며 양쪽을 똑같이 기웃거리다가, 이미 결정이 난 뒤에는 마치 제가 담당하여 계책을 결정한 것처럼 행세하였으니, 더더욱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또,
"이경증(李景曾)의 탐욕스럽고 방자한 모양은 전하께서 환히 아는 바인만큼, 목을 베어도 안 될 것이 없고 귀양을 보내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결장(決杖)의 율로만 단죄하고 말았으니, 이것만도 이미 형정(刑政)을 잃은 처사입니다. 그들 역시 그 죄상을 알고 있으나, 단지 편당을 두둔하려는 의도로 결장의 벌을 감면해 주기 위하여, 귀양을 보내어도 안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놓고는, 귀양의 명이 내리자 다시 이는 우연히 나온 말이라고 하여 전하의 명령을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취급하여, 경중간에 모든 벌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하여 전하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강단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끝없는 화를 부른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전하처럼 심한 이는 아직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 민폐 10여 조항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중형의 상소를 보건대, 그가 전지에 응하여 상소한다는 핑계로 대신을 모함하려는 꼴이 너무도 놀랍고 참혹하다. 남의 사주를 받고 대신을 몰아낼 계획을 한 죄는 그 죄율이 어떠한가? 승지는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동부승지 정유성이 아뢰기를,
"곧장 율관(律官)을 불러다 율문을 상고해 보니, 상주문을 올리면서 사실대로 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대었을 경우 장 일백 도 삼년(杖一百徒三年)이 비율(比律)이라고 하였으나, 근사하지 않은 듯하고, 이 밖에는 다시 적용할 만한 조문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의 상소에 불손한 곳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수용하여 허물로 삼지 않겠다. 그러나 영상은 원훈의 대신으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다 바쳐 어지럽힌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감히 유희분이나 박승종에게 비기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세자를 간택하던 때에도 남들이 모두 앞뒤로 눈치만 보고 감히 뜻을 따르려는 자가 없었지만, 영상만은 방계(防啓)하지 않아 시종 담당하였으니, 대신의 풍도가 있다 할 만하다. 그런데도 저들이 감히 입을 다문 채 앞뒤의 눈치만 보고 양쪽의 의견을 다 수긍하여 이쪽과 저쪽에 똑같이 기웃거렸다고 하며 죄를 삼고 있는데, 이른바 저쪽이란 누구이며, 그렇다면 그때 반대 의사를 보인 자는 저들의 뜻에 맞았다는 말인가. 그 속셈을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생각건대 뜻을 잃은 간흉이 울분을 견디다 못해 이들을 꾀어서 이런 형편없는 짓을 한 것이다. 그의 마음씀이 너무도 놀랍고 참혹하므로 잡아다 국문하여 국법을 바로잡아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우선 캐묻지 말고 가벼운 쪽으로 벌을 주어서, 이중형만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에 유성이 또 여이재(呂爾載)와 함께 아뢰기를,
"중형의 상소에서 영상을 모욕한 것과 그 나머지 다른 말은 실로 패망스럽고 조리가 없어 신들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언로를 막는다는 혐의 때문에 감히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갑자기 무거운 벌을 내린다면, 언로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영상 역시 반드시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6월에 구언하는 전지를 내렸는데, 이제 와서 전지에 응하였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될 성싶은가."
하고, 회령(會寧)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간원도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 김류가 세자 책립에 대한 의논에 새로이 찬동하였기 때문에 상이 바야흐로 마음에 두고 등용하여 은총을 더해주고 있는 판이었는데, 이 소를 보자 심한 비난에 분노한 나머지 기어코 그 사람을 죄주려 한 것이다. 중형은 일찍이 고 승지 박지계(朴知誡)에게 사사하였고, 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 등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이때 김류가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하였더니 중형이 두표의 집에 가 있었다. 김류는 본시부터 두표와 유백증(兪伯曾)·홍무적(洪茂績) 등과 틈이 있는 터라 두표 등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고 매우 괴씸해 하였다.
12월 5일 계미
날씨가 몹시 추워서 전옥서(典獄署)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2월 6일 갑신
태백이 나타났다.
함경도를 복심(覆審)하니, 금년에 조세를 낼 전지가 밭이 4만 2천 9백 63결, 논이 2천 9백 68결이었다.
12월 7일 을유
이행원(李行遠)을 대사헌으로,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임한백(任翰伯)을 지평으로, 김시번(金始蕃)을 교리로, 김휘(金徽)를 정언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좌랑으로, 김시진(金始振)을 검열로, 허적(許積)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지사 이경증(李景曾)이 이중형의 상소 안에 자기를 비난한 내용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기를,
"말살된 종적이라 세상일에 끼어들지 않았는데, 곁에서 엿보던 자가 뜻밖에 횡액을 가해와 끝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을 면치 못하여, 성문에 난 불에 물고기가 타 죽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 되었으니, 신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중형의 패망한 말을 굳이 따질 것이 없다. 사피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영의정 김류가 상소하기를,
"이중형의 소에서 신의 죄를 하도 심하게 날조하여 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석 자나 솟구치고 모골이 송연하였습니다. 중형은 시골 사람이니 무슨 견문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았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첫번째에 나왔다가는 지난해의 재액을 만났고, 두 번째 나왔다가는 윤우태(尹遇泰)·이지연(李祉延)을 만났고, 오늘날에 와서는 또 중형이 나섰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신을 내치지 않고 도리어 중형에게 죄를 주신다면 아무리 좌우로 가리우고 시종 애써 보호해 주려 해도, 앞으로 다시 몇 명의 중형이 더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못난 신으로 인해서 진언한 사람이 죄를 얻어서, 승정원이 진계를 하고 간관이 논집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서 더더욱 큽니다."
하니, 답하기를,
"간흉들이 설혹 날마다 소를 올린다 해도 사람들이 그들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아무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큰 해가 있을 것이다. 경은 개의치 말고 안심하고 행공하라."
하였다.
12월 9일 정해
태백이 나타났다.
12월 10일 무자
태백이 나타났다.
12월 11일 기축
태백이 나타났다.
이규로(李奎老)를 지평으로 삼고, 특명으로 정제룡(鄭霽龍)을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삼았다. 제룡은 무인이다. 상소를 올려 경상도의 폐단과 고충을 진술하고, 또 칠곡 산성(漆谷山城)의 형세는 남한 산성(南漢山城)보다 백 배나 좋고 진주(晋州) 역시 영남의 승지이니, 미리 방어의 기구를 갖추어 두었다가 뒷날 위급할 때에 지킬 계책을 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가상하다고 칭찬해 주었으며, 얼마 뒤에 이조에 하교하여 그의 나이를 묻더니 이미 60세였는데도 특명으로 수령을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수익(金壽翼)이 치계하기를,
"칙사의 행차가 이미 봉성(鳳城)에 도착하였는데, 북도에서 잡힌 왜인 15명과 벽동(碧潼)에서 산삼을 캐던 사람 13명도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왜선 두어 척이 북도에 표류하였다가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 간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함께 데리고 나온 것이다.
사은사 김자점(金自點)이 치계하기를,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이 몰래 신에게 말하기를 ‘칙사를 접견하였을 때 상께서「임경업(林慶業)은 본국의 역적일 뿐만 아니라 상국(上國)에게도 역적이다. 인심이 좋지 못하여 역적의 변고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데, 뒷날 이를 본받는 자가 있으면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속히 내보내어 전형(典刑)의 본뜻을 분명히 보이게 해달라.」 하면 구왕이 혹 들어줄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 임경업이 청나라에 가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그의 재략이 아까워서 선뜻 내보내려 하지 않자, 명수가 경업이 뜻을 얻게 되면 반드시 자기에게 해가 될 것으로 보고 매우 꺼린 나머지 기어코 내보내어 죽음의 길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12월 12일 경인
필선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을 믿을 만하다고 보십니까. 백성의 마음을 믿을 만하다고 보십니까. 하늘로 말한다면 겨울철에 우레가 치고 태백성이 나타났으며, 백성으로 말한다면 원성이 자자하고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서로 다투기만을 일삼고 변방은 날로 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하여 이렇겠습니까. 기강이 이미 끊어지고 예의 염치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어찌 섬뜩할 만큼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보통 사람의 심정이란 자기를 책하는 데에 박하다고는 하지만 후회되는 마음이야 어찌 스스로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를 모르신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요, 알면서도 그렇게 하신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이며,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숨기고 있으시다면 이는 허물을 미화하는 처사요, 남들이 감히 말할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이는 간언을 거부하는 처사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자신은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종(祖宗)의 무거운 부탁마저도 생각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신이 듣건대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뜻이라고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그 뜻을 세우소서. 뜻이란 마음의 운용이자 만사의 근본입니다. 뜻이 서지 않았다면 무슨 일인들 해낼 수 있겠습니까. 뜻을 세우는 데에는 큰 근본이 있으니, 바로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지난 습관을 과감히 씻어버리고 오직 덕을 새롭게 닦되, 다 닦지 못할까 바빠하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억제하기 어려운 그 뜻을 경계하기를 마치 날카로운 창날이나 사나운 말처럼 하고, 막기 어려운 그 욕심을 두려워하기를 마치 찬 물이나 뜨거운 불처럼 하소서. 그러면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안배 포치하는 계책이 모두 내가 운용하는 그 뜻 속에 들어 있게 될 것이니, 이른바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을 무어 걱정하며, 예의 염치가 펼쳐지지 않는 것을 무어 염려하겠습니까. 하늘의 뜻도 믿을 수 있고 사람의 마음도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조정의 일이며, 변방의 수비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세자께서 막 임하시었는데 타고난 총명이 남다른만큼 조석으로 보도(輔導)하고 좌우에서 규계할 사람을 당연히 걸맞는 사람으로 가려서 앉혀야 합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12월 13일 신묘
영의정 김류가 또 상소하여 면직을 빌기를,
"무릇 권간이라는 명칭이 참으로 한 가지 유형만이 아니니, 사당(私黨)을 심거나 남을 모함하는 자라면 권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신은 외롭고도 약한 종적으로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종전에 모함을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느 한 사람이라도 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앞장 서서 글발을 올려 시비를 밝히기를 서로 무슨 보답이라도 하듯이 하는 자가 있었습니까. 신이 외로워서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원한과 울분이 쌓여서 늘 앙갚음을 할 뜻을 품고 있다가 사람을 사주하여 소를 올리도록 하여 음해할 계획을 감행하였다고 한 데에 있어서도, 신에게는 그러한 일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원(金垣)이 이미 초야의 사람으로서 앞에서 신을 공격하였고, 이중형(李重馨)이 또 초야의 사람으로서 뒤에서 신을 지척하였으니, 신의 죄악은 앞뒤로 잘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신에게는 죄를 주지 않고 도리어 진언한 자에게 죄를 주어서 직사(直士)의 사기를 꺾고 충간(忠諫)의 길을 막으시니, 조정을 욕되게 하고 성상을 저버린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참소의 말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경은 개의치 말고 끝까지 나를 보필하라."
하였다. 김류가 누차 사직하였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4일 임진
흉년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12월 16일 갑오
태백이 나타났다.
지평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사피하지 말고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12월 17일 을미
태백이 나타났다.
12월 18일 병신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관상감 제조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황제(黃帝) 이래 옛 책력(冊曆)은 육가(六家) 이후 한 무제(漢武帝) 때에 이르러서 낙하굉(洛下閎)이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는데, 동한(東漢) 말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세 번이나 고쳐졌고, 위(魏)나라로부터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또 고쳐진 것이 열세 번이며, 당(唐)나라의 책력도 여덟 번이나 고쳐졌습니다. 또 오대(五代)의 책력은 여덟 종류가 있으며, 남북조(南北朝)와 양송(兩宋)은 책력을 열한 번이나 고쳤습니다. 이는 책력이 오래됨에 따라 시각(時刻)의 차가 나서 그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소견이 각기 정추(精粗)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책력의 개조가 이처럼 빈번하였던 것입니다.
원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곽수경(郭守敬)·허형(許衡) 등이 역법에 밝아서 시각의 차를 정한 것이 매우 정밀하여, 절기의 영축(盈縮), 지속(遲速), 가감(加減)에 따른 차를 두어서 지원(至元)246) 18년인 신사년을 역원(歷元)으로 삼았는데, 오늘날까지 행용하여 무려 3백 65년이나 되었지만 일식과 월식이 별로 착오가 없으니, 후세의 정교한 책력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천체의 운행이 매우 활발함에 따라 쌓인 차가 날로 더 많아져서, 초저녁과 새벽에 나타나는 별자리의 위치가 조금씩 틀립니다. 천체 운행의 수가 이미 다 찼으므로 당연히 책력을 고쳐야 하는데, 서양의 책력이 마침 이러한 시기에 나왔으니 이는 참으로 책력을 고칠 기회입니다. 다만 한흥일(韓興一)이 가지고 온 책은 의논만 늘어 놓고 작성은 하지 않아서 이 책을 지을 수 있는 자라야만 이 책을 제대로 알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10년을 탐구한다 해도 그 깊은 원리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이 병자·정축 연간에 이미 역법을 고쳤으니, 내년의 새 책력은 필시 우리 나라의 책력과 크게 다를 것입니다. 새 책력 속에 만약 잘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책력을 만드는 일은 중국에서 금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사람을 보내어 배움을 청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번 사행 때에 일관(日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역관을 시켜 흠천감(欽天監)에 탐문하여 보아서 근년의 책력 만드는 누자(縷子)를 알아내어 그 법을 따져보아 의심나고 어려운 곳을 풀어 온다면 거의 추측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금년의 역서를 우선 고찰하여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때에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247) 이라는 자가 청나라 흠천감이 되어 인무(印務)를 관장하면서 새 법을 만들어 옛 책력을 고치고 또 성도(星度)의 차수(差數)와 절기의 영축(盈縮)을 논하여 《신력효식(新曆曉式)》이라는 책을 펴내었는데, 한흥일이 북경에서 그 책을 얻어 가지고 왔다. 상이 일관에게 명하여 그 법을 따져 보라고 하였기 때문에 김육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사은사 겸 주청사 김자점(金自點)·홍진도(洪振道)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상이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에게 청나라 섭정왕(攝政王)의 예단(禮單)에서 비단 20여 필과 백금 2백 냥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주청사가 마침 새 책력을 얻어 가지고 왔기에 곧장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달의 크고 작음은 우리 나라의 책력과 서로 같으나 24절기는 같은 것이 적고 다른 것이 더 많아서 하루나 이틀씩 들쭉날쭉한 데가 있고, 하루는 옛 책력에는 1백 각(刻)으로 되어 있는데, 새 책력에서는 96각으로 정하였으며, 모든 절기를 넣는 것도 옛 책력에는 15일로 되어 있는데 새 책력에서는 16일이나 14일로 정하였기 때문에 한 달에 절기가 세 번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은 모두가 옛 책력과 같지 않은 점입니다. 《시헌력(時憲曆)》에 실린 글로서는 그 신묘한 곳을 연구할 수 없으니, 반드시 모든 법도를 알아 내어서 각년의 누자(縷子)를 세우고 나서야 책력 만드는 법을 알 수 있겠습니다. 산술에 능한 사람을 북경에 보내 배우게 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술업(術業)에 고명한 자를 잘 가려서 보내라."
하였다.
12월 19일 정유
유심(柳淰)을 응교로, 민응협(閔應協)을 교리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수찬으로, 유심(柳𥳍)을 장령으로, 이재(李榟)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20일 무술
태백이 나타났다.
이에 앞서 의금부가 열흘마다 도수도 단자(都囚徒單子)를 올렸는데, 상이 이를 보고 나서 하교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의논을 거친 다음 가벼운 죄수는 석방해 주어서 얼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12월 21일 기해
태백이 나타났다.
12월 22일 경자
경상 감사 유철이 치계하기를,
"도내의 기근이 너무 극심합니다. 고개 아래의 각 고을의 금년치 전세(田稅)를 신사년의 예에 따라 베로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서 기민의 눈앞의 불이라도 꺼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에 내렸다. 호조가 아뢰기를,
"세입은 감축되고 경비는 고갈되어 백관의 요(料)를 지급할 길이 없는 판입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다시 참작해서 처리하여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호조가 이에 고개 아래의 고을로서 재해가 극심한 곳을 골라서 3분의 1만 베로 바치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3일 신축
주청사의 서장관 조수익(趙壽益)이 북경에서 보고 들은 일을 서계하기를,
"홍광 황제(弘光皇帝)는 바닷가로 도망하였다가 청나라 사람에게 붙잡혀서 어느 한 곳에 갇혀 있고, 제왕(諸王) 및 총병(摠兵) 이하의 대소 장관 가운데 항복한 자만도 1백여 명이나 되며, 한인(漢人)들이 말하기를 ‘홍광 황제가 즉위한 뒤로 음란하기가 날로 더 심하여져 15 세 이상의 양가집 딸을 모두 궁중으로 선발하여 들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고, 홍광의 아우는 나이가 20세 남짓인데 남변(南邊)에서 황제라 일컫고 있으며, 장현충(張顯忠)과 이자성(李子成)은 섬서(陝西)·사천(四川) 등지를 점거하고 있는데, 현충의 병세(兵勢)가 자성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지난해 홍광제가 진홍범(陳弘範)과 좌모제(左毛弟)를 청나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청나라가 허락하지 않아서 홍범은 돌아오고 좌모제는 억류되었는데, 남경(南京)이 함락되자 청나라 사람이 좌모제에게 말하기를 ‘지금 남경이 항복하여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너만이 굴복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좌모제가 답하기를 ‘내가 대명의 신하로서 어떻게 원수를 임금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부디 나를 속히 죽여 달라.’ 하고 욕설을 퍼부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이해(利害)로 달래어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자, 한인들 중에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종자(從者) 네 사람 역시 굴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하고, 또,
"지난 가을에 청나라 사람이 황성(皇城)에서 과거를 보여 1백여 명에게 급제(及第)를 주었는데, 원근에서 응시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다.
12월 24일 임인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미성(尾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12월 25일 계묘
태백이 나타났다.
연산군 묘제(墓祭)의 제물을 정축년 이후에 임시로 줄였는데, 이때 와서 묘지기가 예조에 고하자 예조가 계문하니, 상이 본 고을에서 이전대로 내어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갑진
윤강(尹絳)을 이조 참의로, 이진(李𥘼)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8일 병오
청사(淸使) 기충격(祈充格) 및 정명수(鄭命壽) 등이 세자를 책봉한 칙서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상이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고 치사한 다음, 이어 말하기를,
"임경업(林慶業)은 우리 나라의 역적이고, 또 망명한 죄인으로서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남조(南朝)로 들어갔으며, 또 역적 심기원(沈器遠)과 공모하여 대국을 범하였으니, 그 죄상이 환히 드러난 이상 만약 내보내지 않는다면 역적 무리들이 앞으로 징계되지 않을 것이오."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경업의 죄상이 용서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대사면을 받아 이미 죽이지 않기로 허락하였기 때문에 내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과인의 이 말을 돌아가서 황제와 섭정왕(攝政王)에게 고하시오."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삼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12월 30일 무신
이석(李晳)을 장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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