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유
왕세자가 비로소 경덕궁(慶德宮)에 가 뵈었다. 중전이 거처를 옮기신 뒤로 세자가 병이 나서 가 뵙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가 뵌 것이다.
청나라가 표류해 온 왜인(倭人)을 내보냈다. 비국이 왜역(倭譯) 이형남(李亨男)으로 하여금 그 상황을 묻도록 하였는데, 왜인이 답하기를,
"저희들은 다 월전주(越前州) 【 일본 지명(地名).】 사람으로, 표류하다가 어떤 곳에 당도하였는데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자들이 화전(火箭)으로 우리 선박을 쏘아 불태우고는 우리를 모두 붙잡아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보니 모두가 산짐승 고기였고 곡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북경(北京)에 도착하자 의복과 양식을 주었습니다. 조선에 도착하니 거기서보다 더욱 더 후대해주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1월 3일 신해
청나라에서 왕세자를 책봉해 준 일로 인해 안팎에 큰 사면의 은전을 내리고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태양이 광채를 발휘하니 진실로 여정(輿情)에 흡족하였고 은택이 중국으로부터 내리어 책봉을 받았다. 단지 한 사람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실로 팔도가 함께 기뻐할 일이로다. 길이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큰 계획은 누구나 후사를 세우는 것으로 선무(先務)를 삼았다. 장차 어렵고 큰 왕업(王業)을 계승할 것이기에 선택(選擇)의 방도를 신중히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전례에 따라 하였는데, 오직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는 진실로 왕위를 계승할 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세자의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둘 수가 없기에 이미 사직의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봉전(封典)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우러러 엄하신 천자에게 호소하였다. 10행의 천자 칙서가 내리니, 이것은 왕위 계승의 중대함을 생각한 것이다. 천 리의 온 경내가 목을 늘여 기대하는 여망에 부응했고, 더구나 내가 병환이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다행히 오늘 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타고난 총명(聰明)과 효우(孝友)의 성품을 어찌 부자(父子)만 서로 알겠는가. 살피고 어루만질 책임을 줄 만한 어진이를 얻은 것은 또한 조종(祖宗)의 음덕(陰德)이다. 대개 어질다는 소문은 사제(私第)에 있을 때부터 일찍이 났고 지혜로운 생각은 어려운 환경에서 더욱 밝았다. 마땅히 끝없는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황제의 친고에 힘입은 것이다. 침소를 살피고 밥상을 살피게 되니 다시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는 의식을 펼치게 되었고, 새해가 되어 봄기운이 찾아드니 뭇 생명이 즐거움을 이루게 되었다. 어찌 편고(偏枯)001) 의 경계를 혐의할 것인가. 이에 크나큰 윤음을 반포한다. 아, 곤궁함이 극심한 우리 백성들이여, 그대들과 시작을 새롭게 하노라. 아, 액운이 극에 달하면 태평이 돌아오니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느끼면 통(通)하는 것이니 함께 생성(生成)의 덕화를 누리도록 하자."
하였는데,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글이다.
봉보 부인(奉保夫人)이 죽었는데, 상이 2품의 예로써 장사지내 줄 것을 예조에 명하였다. 부인은 상의 유모(乳母)이다.
궁인(宮人) 정렬(貞烈)·계일(戒一)·애향(愛香)·난옥(難玉)·향이(香伊)·천이(賤伊)·일녀(一女)·해미(奚美) 등을 내사옥(內司獄)에 하옥하고 내환(內宦)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세자빈 강씨(姜氏)를 미워해 오다가 드디어 여러 강씨를 귀양보내니 안팎이 의구(疑懼)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전복구이를 드시다가 독이 있자, 강빈(姜嬪)을 의심하여 그 궁인과 어주 나인(御廚內人)을 하옥시켜 심문한 것이다.
정렬 등 다섯 사람은 빈궁의 나인이고 천이 등 세 사람은 어주(御廚)의 나인이다. 드디어 후원(後苑)의 별당(別堂)에 빈궁을 유치(幽置)하여 놓고 그 문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 주게 하고 시녀(侍女)는 한 사람도 따라 가지 못하게 하니, 세자가 간하기를,
"강씨가 비록 불측한 죄를 짊어졌다 하더라도 간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죄지은 흔적이 분명하지도 않은데, 성급하게 이런 조치를 내리고 또 한 사람도 따라 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시녀 한 명을 따라가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대사간 조경(趙絅), 헌납 조한영(曺漢英), 정언 강호(姜鎬)·김휘(金徽)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어제 비로소 대내(大內)에서 나인들을 내옥(內獄)에 하옥하였다는 말을 들었고 조금 전에는 또 독을 넣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염에 떠도는 소문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는 역적이 수라를 맡은 궁인의 사이에 몰래 숨어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하찮은 일처럼 여기시고 대궐 안에 있는 사옥(私獄)에다 하옥하여 사사로운 사람을 치죄하듯 하십니까. 무릇 백성들의 죄가 조금이라도 강상(綱常)에 관계되었으면 반드시 의금부에 회부하고 대신으로 위관(委官)을 삼아 삼성(三省)이 함께 다스려 옥사의 체통을 무겁게 하는 것은 고칠 수 없는 조종(祖宗)의 영전(令典)인데, 더구나 임금을 해치려는 이러한 극악한 자이겠습니까. 공초를 전달하고 국문하여 죄상을 논해 보고하는 것은 결코 환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조속히 왕옥(王獄)002) 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일을 밝히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에 왕옥에 회부하지 않았다."
하였다. 대사헌 이행원(李行遠), 집의 김익희(金益熙), 장령 유심(柳𥳍)·이석(李晳), 지평 이재(李梓) 등이 또한 이 일로 논계(論啓)하였는데, 오래되어서야 따랐다. 드디어 대신 김류·이경석(李景奭)과 판의금(判義禁) 구인후(具仁垕) 등에게 명하여 수라에 독을 넣은 일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렬·유덕·계일·향이·천이·난옥·일녀는 다 자복하지 않았고 난옥은 먼저 죽었다. 정렬과 유덕은 강빈이 신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내통하여 독을 넣은 상황을 심문하면서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가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드디어 국청을 파하고 연루된 세 사람을 석방하였다.
1월 9일 정사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전 이조 판서 이식(李植)의 고신(告身) 삼등(三等)을 박탈하고 이조 참판 한흥일(韓興一)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식이 허서(許舒)를 부여(扶餘)에 의망하였는데 대론(臺論)으로 인하여 추고를 받았다. 이식의 함사에,
"능창 대군(綾昌大君)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고 오직 사위 하나만 있으니, 조정의 사체로 보아 또한 특별히 체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은진 현감(恩津縣監)을 차출할 때에 한흥일이 먼저 ‘허서를 의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에 신이 ‘외진 고을에다 시험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대간이 다만 신이 은진에다 차출하려는 것을 막았다는 말만 듣고 부여에다 의망한 것이 실은 신이 통의(通議)하였기 때문에 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갑자기 탄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료만 그 책임을 지게 하였는데, 이제 그에 대한 죄를 받게 되니 진실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한흥일 또한 추고하라."
하니, 한흥일의 함사에,
"사람들이 와서 허서를 은진 현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신은 반드시 판서의 허락을 얻어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사를 함에 미쳐서 판서가 허서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에 신은 빠뜨렸는가 염려하여 말하였더니, 판서가 말하기를 ‘이 고을은 큰길과 접해 있어 일이 많으니 잠시 외진 고을을 기다리자.’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 사람을 아는가?’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판서가 말하기를 ‘나도 모른다.’ 하였습니다. 대개 혐의스러운 즈음에 분명히 하고 신중히 하지 못하였으니, 과연 먼저 말한 혐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다 법률을 적용할 것을 명하였다. 헌부가 이식과 한흥일에게 다 고신(告身)을 박탈하는 법률을 적용하였는데, 상이 한흥일은 체직만 하라고 명하였다. 이식이 이로 말미암아 홀로 죄를 얻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흥일이 정직하지 못하다 하였다.
여이징(呂爾徵)을 이조 참판으로, 김시번(金始蕃)을 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부교리로 삼았다.
1월 10일 무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칙사 세 사람에게 각각 은(銀) 1천 냥, 명주 2백 필, 세마포(細麻布) 60필, 면포(綿布) 3백 필을 주었다. 그 중에서 정명수(鄭命壽)에게는 은 7백 냥을 관례에 따라 주고 은밀히 3천 냥을 주었으며 세자가 8백 냥을 주었다. 1등 두목(一等頭目) 열 사람에게는 각각 은 2백 냥, 명주 40필, 면포 1백 필을 주었고, 2등 두목(二等頭目) 여덟 사람에게는 각각 은 1백 50냥, 명주 26필, 면포 80필을 주었으며, 3등 두목(三等頭目) 열여섯 사람에게는 각각 은 70냥, 명주 20필, 면포 50필을 주었다. 기타 호랑이·표범 가죽 등의 물건을 이에 맞추어 주었다. 대통관(大通官) 한거원(韓巨源)에게는 은 2백 냥을 따로 하사하고 세자가 1백 냥을 하사했으며, 차통관(次通官) 이논선(李論善)에게는 은 1백 냥을 따로 하사하고 세자가 50냥을 하사하였다. 아역(衙譯) 최부귀(崔富貴)·김덕생(金德生)에게는 은 50냥을 따로 하사하고 세자가 30냥을 하사하였다.
1월 11일 기미
정명수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관반(館伴)에게 말하기를,
"예단(禮單) 가운데 유둔(油芚)·입모(笠帽)·채화(彩花)·전갑(箭匣)·전백(箭白)·납촉(蠟燭)·백반(白礬)·소목(蘇木)·공작미(孔雀尾)·연합(硯盒)·부용향(芙蓉香) 등의 물품은 각각 다 감하여 항식(恒式)으로 삼으라."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열 가지를 감해 주니 진실로 감사하다. 승지를 보내 사례하라."
하였다.
1월 12일 경신
간원이 아뢰기를,
"경상우도와 황해도의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들 중에 대체로 고관(考官)의 친척이 많은데, 국가에서 과거를 열어 선비를 취하는 법을 어찌 이렇게 파괴되게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무겁게 징계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도의 감시 초시는 파방하라 명하시고 고관도 아울러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풍문이 반드시 다 사실만은 아닐 것이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누차 아뢰자, 따랐다.
1월 15일 계해
유성(流星)이 달 곁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광채가 땅에 비쳤다.
숭례문(崇禮門)이 저절로 닫혔다.
김시국(金蓍國)을 대사간으로, 조경을 대사성으로, 남선(南翧)을 교리로, 임한백(任翰伯)을 지평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월 16일 갑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니 왕세자가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였다.
상이 강원에 하교하기를,
"세자의 경덕궁(慶德宮)에 대한 문안을 초하루와 보름에 드리도록 정례를 삼으라."
하였다.
1월 17일 을축
호조 판서 김세렴이 죽었다. 김세렴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신중하며 문장을 잘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존중하였다. 이에 이르러 호조 판서가 되어 청인(淸人)을 접대하니, 청인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단아하고 과묵하여 말마다 신뢰할 만하다." 하며 관중(館中)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자못 간소화하도록 해주었는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1월 18일 병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통제사(統制使) 이완(李浣)이 쌀 1만 석을 경강(京江)에다 실어다 놓고 치계하기를,
"서울에는 기근이 바야흐로 심각한데 본영(本營)에는 저축된 쌀이 자못 넉넉합니다. 쌀을 베와 바꿀 때에 비록 값을 낮추어 판매한다 하더라도 본영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도성 백성들은 지탱하여 살 수 있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해 결정하고 지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피차가 모두 유익하고 공사(公私)가 둘 다 편리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의관(醫官) 박태원(朴泰元)·이형익(李馨益)·유후성(柳後聖) 등을 급히 부르고, 또 어의(御醫) 최득룡(崔得龍) 등에게 하교하기를,
"이달 초부터 열이 가끔 위로 치밀어 가슴이 답답하더니 근래에 들어서 증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독을 먹은 데서 오는 증상인 것 같다."
하니, 약방(藥房)이 아뢰기를,
"내간(內間)에서 발생한 흉역(兇逆)의 변고는 지난 역사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여러 날 죄를 신문하였으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신들은 통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는데, 방금 의관에게 내리신 분부를 듣고 보니, 마음이 떨리고 모골이 송연하여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조속히 약을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형익 등으로 하여금 들어와 병을 살피게 하였다. 이형익 등이 독을 제거하는 처방을 올리니, 상이 복용하였다.
1월 19일 정묘
황해도 장연부(長淵府)에 있는 돌이 스스로 이동하였다.
1월 20일 무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운미 차사원(運米差使員)인 영원 군수(寧遠郡守) 안필면(安必勉), 양덕 현령(陽德縣令) 전택(全澤), 은율 현감(殷栗縣監) 안인건(安仁健), 용매 만호(龍媒萬戶) 최응봉(崔應鳳) 등을 붙잡아다 가두고 쌀을 실은 선박이 침몰한 상황을 조사하여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고, 선박을 인솔한 자인 송천경(宋天擎)을 국경에서 효시하여 청나라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
1월 21일 기사
정태화(鄭太和)를 호조 판서로, 목성선(睦性善)을 대사간으로, 민응협(閔應協)을 사간으로, 심노(沈𢋡)를 헌납으로 삼았다.
1월 24일 임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이 죽었다. 심열은 사람됨이 명민하고 재주와 국량이 있어 젊어서부터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 폐모(廢母)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였고 함경 감사가 되어서는 은쟁반을 만들어 올리면서 그 위에 자기의 이름을 새겼다. 반정의 뒤에 궐내의 기물을 모조리 호조로 보냈는데 그 은쟁반도 그 가운데 있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나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폐기되지 않고 드디어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최명길(崔鳴吉)이 정권을 잡자 끌어다 재상으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죽었다.
1월 26일 갑술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이때 우리 나라는 명나라의 존망을 알지 못하였다. 일본의 정관(正官) 평성통(平成統)이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갑병(甲兵) 5천을 보내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일본이 명나라와는 본래 외교의 의리가 없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하지 않고자 한다. 그 사신이 말하기를 ‘북경(北京)·하남(河南)·남경(南京)과 회서(淮西)의 절반 및 절강(浙江)의 절반은 청나라 사람이 차지하였고, 산동(山東)·하서(河西)·호광(湖廣)·귀주(貴州)·사천(四川)·운남(雲南)·산서(山西)·섬서는 이자성(李自誠)이 차지하였고, 명나라는 단지 복건(福建)·광동(廣東)·광서(廣西)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니, 동래 부사 황감(黃㦿)이 이 일을 아뢰었다. 비국이 청나라에 통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오부(五部) 방(坊) 안의 굶주린 백성과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의 환자 숫자를 모두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은 1천 3백 80명이고 환자는 1백 4명입니다. 2월 1일부터 진제청을 설치하여 진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7일 을해
태백이 나타났다.
세자 책봉을 주청한 상사(上使) 김자점(金自點)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 노비(奴婢) 4명, 전(田) 15결을 하사하고, 부사(副使) 홍진도(洪振道), 서장관(書狀官) 조수익(趙壽益), 당상 역관(堂上譯官) 이형장(李馨長)·박경생(朴庚生)은 각각 한 자급씩 올려 주고, 홍진도에게는 노비 3명, 전 10결을 하사하고, 조수익에게는 노비 2명, 전 7결을 하사하고, 이형장 등과 기타의 원역(員役)에 대해서도 상을 차등이 있게 내렸다.
1월 28일 병자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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