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3월

싸라리리 2026. 1. 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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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기유

평안도 안주(安州) 지방에서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5일 동안 싸웠다.

 

3월 3일 경술

함경 감사 심연(沈演)이 죽었다. 이때 심연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정홍명(鄭弘溟)이 상소하여 대제학을 사직하니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고 답하였다.

 

3월 4일 신해

영의정 김류가 면직되었는데, 김류가 네 번째 정사(呈辭)하자 상이 허락한 것이다.

 

김신국(金藎國)을 판의금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우빈객으로, 박일성(朴日省)을 장령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5일 임자

큰비가 연일 내려 성안의 냇물과 도랑이 넘쳐 인가가 뜨거나 잠긴 곳이 있었다.

 

3월 6일 계축

이때 양사(兩司)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강씨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오랫동안 따르지 않자, 무식하고 비열한 대간들이 다 꺼리고 싫어하여 병이 났다고 핑계대는 자가 연달았다. 무릇 계사에 빠진 자는 관례에 응당 체직시키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일부러 이를 범하여 체직을 도모하였다. 장령 박안제(朴安悌)·임한백(任翰伯)은 다 계사에 빠졌다는 이유로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3월 7일 갑인

해에 교차된 햇무리가 지고 흰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으며, 좌우에는 창처럼 생긴 것이 있었다. 오른쪽 창의 곁에 창과 같은 검은 기운이 있었는데 길이가 20∼30척쯤 되었다.

 

3월 10일 정사

지평 이준구가 아뢰기를,
"신이 갑자기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를 만났으나 바쁘고 급한 나머지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법관(法官)이 된 몸으로 태연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고, 정언 기만헌(奇晩獻)도 길에서 호조 판서 민성휘(閔聖徽)를 만났으나 말에서 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와서 인피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체직되었다. 이때에 대간들이 이와 같이 고의로 범하여 인피하였다.

 

3월 11일 무오

안헌징(安獻徵)을 우부승지로, 양만용(梁曼容)을 집의로, 유거(柳椐)·김욱(金頊)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12일 기미

부제학 이기조(李基祚), 부응교 민응협(閔應協), 교리 남선(南翧), 부교리 강백년(姜栢年), 수찬 유경창(柳慶昌)·엄정구(嚴鼎耉)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살리시기를 좋아하는 덕은 전대에 비할 분이 없는데, 어찌 며느리의 친속에 대해서만 반드시 뭇사람의 의논을 배격하고 죽이고자 하십니까? 바로 강씨가 불효하고 불순하여 스스로 하늘과 끊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자비심을 끊고 사랑을 참아가며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사사(賜死)하라는 분부를 내리게 된 것이므로 유사(有司)는 진실로 받들어 이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상께서 인륜(人倫)의 변을 당하셨으니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다하여 그 죄를 너그럽게 다스려서 친한 이를 친애하는 정을 돈독히 하여 은혜와 의리가 둘 다 온전하게 하고 권도(權道)와 경도(經道)가 중도를 얻게 해야만 후세에 할 말이 있고 자손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 중에는 골육의 변을 당하여 급박하게 처리하다 보니 정의(情義)가 통하지 않아 결국은 후회를 자아내고 후세에 기롱거리를 남긴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당 덕종(唐德宗)은 이필(李泌)이 바로잡아 준 데 힘입어 태자로 하여금 목숨을 온전히 하게 하였습니다. 이번 일과는 조금 다르지만 조용히 변을 처리하여 후회를 면하게 된 점은 본받을 만합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애긍하게 여기시는 성상의 지극하신 덕을 우러러 체득하고 우리 임금을 진선 진미한 경지로 들여놓고자 하여 사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라고 한 달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고 청하여 위아래가 서로 견지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만 이는 실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정성이 충심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마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공평한 마음으로 아집(我執)이 없이 여러 사람들의 말을 살펴 받아들이고 ‘강씨가 비록 죄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일과는 다르고, 소현이 죽고 여러 고아들이 나이 어린데 또 그 어미를 죽이면 울어대는 소리를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시어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확대하고, 가볍게 처벌하는 법전을 시행하여 우선 그 목숨은 살려주고 서서히 그 단서를 구명한다면 필부(匹婦)의 마음이 큰 천지에 대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뭇 신하들의 여망에 굽혀 따르시어 사사하라는 분부를 조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13일 경신

유철을 도승지로, 정언황(丁彦璜)을 동부승지로, 이응시(李應蓍)를 장령으로, 원진명(元振溟)을 헌납으로, 남중회(南重晦)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응시는 굳세고 방정하며 곧은 기운이 있어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안정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지켰다. 이 때문에 출신(出身)한 지 10여 년이 되었으나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고 또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지도 못하였다. 부제학 이기조(李基祚)가 함께 청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서장(李書狀)은 참으로 청렴 강개한 선비인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하였다.

 

상이 좌의정 김자점(金自點) 및 비국의 당상과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사헌 이행원(李行遠)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근일에 쟁집(爭執)하는 데 무슨 의견이 있는가?"
하니, 이행원이 아뢰기를,
"궁위(宮闈)에서 망측한 변이 발생하였으니, 신하의 마음에 누가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만 혼미하고 꽉 막힌 부인이라서 혹시 용서할 만한 일이 없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성상께서 법을 굽히고 은혜를 온전히 하여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다 하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부제학 이기조에게 묻기를,
"부제학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궁중의 일을 전하께서 상세히 알고 말씀하시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감히 구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전대 제왕이 변을 처리하면서 급하게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후회를 남긴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번 내간의 일은 외부 사람이 진실로 알 수 없지만 혹시 그 사이에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이런 막대한 일을 하자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국가가 보필하는 공경(公卿)의 신하를 두는 것은 일에 따라 바로잡아 우리 임금을 진선 진미한 경지에 들여 놓고자 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독을 넣은 일 이외에 어떤 다른 죄가 있는가?"
하니, 이행원·이기조가 다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처럼 하교하시니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전일에 야대할 때 상이 이르기를 "국문할 때 별로 자복한 사람이 없었고 저주한 변도 분명히 드러난 자취가 없으니 내 어찌 이것만으로 죄를 단정하고자 하겠는가."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런 하교가 있었다.】  상이 또 묻기를,
"아내와 며느리가 어느 쪽이 더 중한가?"
하니, 이기조가 아뢰기를,
"어찌 가볍고 무거운 구별이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며느리가 아내보다 더 중하단 말인가?"
하니, 이기조가 아뢰기를,
"친하고 먼 등급이 본디 같지 않으니 아내가 더 중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며느리가 아내보다 가볍다면 성묘(成廟)께서 연산(燕山)의 어머니를 사사(賜死)할 때 그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쟁집(爭執)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또 따라서 그렇게 하라고 청하였는데,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며느리가 시역하려던 죄에 대해서 죽음을 면해 줄 것을 청하니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경들은 호랑이를 키우면 우환이 된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을 면해 줄 것을 청하니, 진실로 이상한 일이다. 어제의 차자 【 옥당의 차자이다.】  가운데는 심지어 ‘여러 고아들’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이미 악독한 반역의 행위를 하였는데 울어대는 자식들을 위해서 용서해 준다면 이것은 부인의 구구한 사랑이다. 더구나 그 자식들에게 다 유모가 있는데 어찌 죽는 데 이르겠는가. 서인(西人)들 가운데 반드시 왕망(王莽)·동탁(董卓)과 같은 뜻을 품은 자가 있어 못난 무리들을 협박하여 이런 논의를 폈을 것인데, 경들처럼 관직이 높은 자들도 도리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니, 이것은 평소에 소망하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러한 논의를 편 자들은 근거없는 말을 조작하여 심지어 대순(大舜)·관숙(管叔)·채숙(蔡叔)·당 태종(唐太宗)의 일에 비유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견해인가."
하였는데, 상의 목소리와 기운이 모두 엄하자,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이행원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처럼 분부하시니 신들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도헌과 부제학이 특히 조화시키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시번(金始蕃)이 맨 먼저 정계(停啓)하자는 논의를 내놓았는데 도리어 시론(時論)이 두려워서 끝내는 실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서인의 위세가 막강하다 하겠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소북(小北)·남인(南人)들 중에 곁에서 고상한 의논을 펴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인·북인들은 비유하면 마치 수척한 말이 재갈의 견제를 받아 채찍을 맞으면서 오직 이끄는 대로만 따라가지 마음대로 못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얻은 벼슬을 잃어 버릴까 걱정하여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앞서 조정에서부터 큰 의논이 있게 되면 한쪽 사람들은 반드시 대립하고 나섰는데 지금 유독 그렇지 않는 것은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지 이미 20년이 지났으므로 기세가 두려워서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기조가 아뢰기를,
"대각이 논한 바는 단지 우리 임금을 과오가 없는 곳에 들여놓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당(黨)을 비호한다고 지목하시고 심지어는 서인·남인의 말로써 성상의 분부에 표현하기까지 하시니 위대하신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아서는 아니됩니다. 그리고 강씨의 죄가 비록 무겁기는 하지만 조금 자비심을 베풀어 한줄기 목숨만은 살려주시어 사사로운 은혜를 온전히 하소서. 그래도 여전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지 않은 뒤에 법을 시행한다면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이행원도 이러한 내용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성묘조(成廟朝) 때 연산(燕山)의 어머니는 투기한 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사(賜死)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요·순을 본받고자 하면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나는 성묘조의 고사를 본받고자 한다."
하고, 또 큰 소리로 말하기를,
"죄악이 가득 차서 후환이 우려되기 때문에 내가 처단하고자 한 것인데 누가 감히 저지하겠는가. 강씨가 큰 소리로 발악하기에 처음에는 몹시 이상하게 여겼으나 지금 와서 보니 필시 후원하는 당류가 많은 것을 믿고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경들이 이처럼 여러 날 동안 서로 논쟁을 벌이니, 만일에 역적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국가가 전복되어 멸망하기라도 한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사론(士論)이 이와 같고 조정이 이와 같아 임금의 나쁜 점을 드러내어 사방에다 퍼뜨리고 있으므로 일을 예측할 수 없는데도 돌이켜 생각할 줄 모르고 있으니, 이는 무슨 의도인가. 비록 불측한 화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고변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비록 시아비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다스리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상의 노여움이 심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망·동탁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바입니다. 지금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훈련 대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고 입직(入直)하게 하였다면 이것은 임금으로서 신하의 변란을 대비하는 것인데, 서인들이 방자하고 기탄함이 없이 태연히 그대로 논쟁하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행원과 이기조가 친히 명백한 하교를 들었는데 이 뒤에 어떻게 다시 논의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만일 대역(大逆)으로 논하여 단죄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이기조에게 말하기를,
"부제학은 학문을 한 선비이므로 고사(故事)를 많이 알 것이다. 순(舜)은 상(象)을 죽이지 않고 주공(周公)은 관숙·채숙을 죽였는데,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이기조가 사의(謝意)를 표하며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옛사람이 이미 정해 놓은 의논이 있으므로 신이 감히 별도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듣건대 말소리와 기세가 너무 엄하십니다. 임금의 말씀은 이와 같아서는 아니됩니다."
하자, 상이 다시 큰 소리로 이르기를,
"혹자는 ‘여러 고아들이 울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 조경의 상소에 한 말임.】  혹자는 ‘이것은 임금을 사랑한 것이다.’고 하는데, 비록 세 살 난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순이 상(象)을 죽이지 않은 것은 후환이 없기 때문이었고 주공이 관숙과 채숙을 죽인 것은 후환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성묘께서 연산의 어머니를 죽인 것 또한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옛날 성인이 후환에 대해 깊이 염려하였다고 하겠다. 오늘의 일이 무슨 옳지 못한 점이 있기에 헛된 논의를 마구 벌여 이처럼 쟁집한단 말인가.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대신이 적발하여 본보기를 밝게 보여야 할 것이다. 이경여 외에도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경여는 반드시 이럴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멀리 외딴섬에 있지 않습니까. 최명길은 병들어 틀어박혀 있고 김류는 밖에 있으니, 어찌 주장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반드시 관직이 있는 자만 주장하겠는가. 비록 관직이 없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뒤에 숨어서 주장할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홍무적(洪茂績)은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혼조(昏朝)에서 소를 올려 항변하였고 근년에 와서도 과감히 말하기에 나는 그에게 취할 점이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에 이르러서 보니 옛날에 그가 한 일은 간사한 꾀가 아님이 없었다. 홍무적은 강씨의 신하가 아닌데도 ‘신을 죽여야만 강빈을 죽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법전을 참고하고 고사를 상고해 보면 강씨가 살아 남을 리가 없는데도 논의가 이와 같으니 진실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행원 등이 직접 이 하교를 들었으니 어찌 정계(停啓)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김자점에게 이르기를,
"조정 신하들이 내 말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니 내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승지와 사관이 모두 여러 차례 입시하여 직접 하교를 들었으니 반드시 그 실상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구인후(具仁垕)에게 이르기를,
"진실로 사변이 있다면 비록 대장이 입직한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는 입직하지 말라. 나라의 흥망은 내 마땅히 하늘에 맡길 것이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서남(西南)·소북(小北)에 대한 이야기가 성상의 하교에서 나오니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동인·서인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었는데 오늘 갑자기 이 말을 하게 되었다. 옛말에 ‘권력이 신하에게로 돌아가니 쥐새끼가 호랑이로 변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거듭 두렵지 않겠는가."
하니, 좌우가 모두 조용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김시번은 이랬다저랬다하는 소인이다. 장부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소견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반성해 보아 옳다고 여겨지면 비록 천만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어찌 변경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그의 아비 김신국(金藎國)이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자식의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신국도 죄가 있다. 아비가 어찌 자식이 하는 바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김신국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개탄하면서 이르기를,
"승평(昇平)008)  은 원훈(元勳)·수상(首相)으로서 어찌 감히 이와 같이 일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라가 나라답게 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손수 만들어 놓고는 도리어 뒤엎고자 하니, 그 사람은 시비는 따지지 않고 한갓 들뜬 의논에 동요된 자이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빈청(賓廳)에서 분부를 받을 때에 신이 ‘육경 중에 호조 판서 민성휘(閔聖徽)와 공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에게 자문해야 한다.’고 하였더니, 모두 ‘대신과 의사가 같다.’ 하였습니다. 또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대신이 처치하는 데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억지로 권하기를 ‘소견이 같지 않으면 비록 이의를 제기해도 안 될 것이 없다.’ 하면서 세 번이나 묻자 ‘대신과 의사가 같다.’ 하였으니, 육경의 뜻이 진실로 이의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대신이 분부를 받은 뒤에 물러가서 뒷말을 한 자가 두 사람이나 되는데 【 이경석·최명길이다.】  육경 가운데도 어찌 다른 마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이행원이 상의 노여움이 심한 것을 보고 강씨의 논의를 정계(停啓)하고자 이기조에게 물으니, 이기조가 말하기를,
"상이 이처럼 노여워하고 있으니 장차 무슨 말로 연이어 계사를 올리겠는가."
하였다. 허계(許啓)가 이행원의 곁에 엎드려 있다가 중지하기를 극력 권하며 말하기를,
"이 논의에 대해 어찌 감히 연이어 계사를 올리겠는가. 그리고 장령 박일성(朴日省)이 바야흐로 정고(呈告) 중에 있어서 미처 인피하지 못하였으나 먼저 아뢰어 체직시킨다면 동료에게 간통(簡通)을 내어 가부를 물어볼 일이 없을 것이고 정계하는데도 사세가 매우 순조롭고 편할 것이다."
하니, 이행원이 그렇게 여겼다. 드디어 나아가 아뢰기를,
"정언 기만헌(奇晩獻), 헌납 채충원(蔡忠元)이 혹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칭탁하기도 하고 혹은 까닭없이 계사에 빠지기도 하였으니 규피한 듯한 자취가 있습니다. 체차하소서. 장령 박일성도 이런 과실이 있으니, 미처 인피하지는 못했지만 또한 체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울러 파직하라."
하였다. 이에 강씨에 대한 논의를 정계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요즈음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간관의 자리를 피하려고 꾀하는 자들은 채충원의 예(例)에 따라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이에 김시번(金始蕃)·임선백(任善伯)·유심(柳𥳍)·소동도(蘇東道)·남노성(南老星)·임한백(任翰伯)·이준구(李俊耉)·이규로(李奎老) 등 여덟 사람이 모두 파직되었다. 이날 이조가 보덕(輔德)의 수망(首望)에 남노성을 의망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강씨를 위해 절의를 지킨 사람을 이조가 버젓이 의망하니 몹시 놀랍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은 좌파(坐罷)되고 낭청은 가관(假官)만 있었기 때문에 상이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신유

상이 하교하기를,
"홍무적(洪茂績)은 자신을 알아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역적을 비호하려 꾀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큰 죄악을 진 사람을 구제하려고 하였으며, 심노(沈𢋡)는 강씨를 위해 충성을 다하여 합계(合啓)를 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니, 【 처음에 심로가 합계하려고 하였는데 홍무적이 따르지 않았다.】  모두 외딴 섬으로 귀양보내어 간사하고 불충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알게 하라. 이경여의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을 것 같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홍무적을 정의(旌義) 로, 심로를 남해(南海)로 귀양보냈다. 이때 헌부는 이미 탑전에서 정계하였으나 간원은 미처 정계하지 않았는데, 상의 이 조처는 대개 위엄을 보여 간원으로 하여금 감히 연이어 계사를 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으로서 정언 남중회(南重晦)가 드디어 강씨에 대한 논의를 정계하였다. 이에 우승지 이래(李䅘)가 아뢰기를,
"강씨의 일은 양사(兩司)가 이미 정계하였으니, 폐출(廢出)과 사사(賜死)는 의당 선후의 절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사에 대한 승전(承傳)을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살펴서 거행하면 된다. 별로 취품(取稟)할 일은 없다."
하였다.

 

좌부승지        여이재(呂爾載)가 아뢰기를,
"강씨를 사사할 때 예조에서 거행할 절목이 많이 있을 것이니, 본조의 당상을 명초(命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본조에서 자연 참작하여 품처할 것이니 굳이 명초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예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먼저 대궐에 나왔었는데, 이에 아뢰기를,
"빈(嬪)으로 책봉할 때 내렸던 교명책(敎命冊)·인(印)·장복(章服) 등의 물품을 마땅히 도로 거두어 처리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내(大內)에서 거두어 정원에 내려 불사르고 부숴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대신들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마땅히 종묘에도 이 일을 고해야 될 것 같은데, 종묘에 고하는 일과 사사하는 일의 선후에 대해서는 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사사한 뒤에 종묘에 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강씨의 죄목은 외부에서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교서를 반포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다 따랐다.

 

3월 15일 임술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순천(順天)에서 동작진(銅雀津)에 도착하여, 양사(兩司)가 이미 강씨의 논의를 정계하고 이날 사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을 몰아 달려오니 수행원들이 다 뒤에 처졌다.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아가다가 길에서 좌의정 김자점을 만나 말에서 내려 서 있었는데, 김자점이 민응형인 줄을 모르고 예(禮)를 표하지 않고 지나갔다. 뒤에야 알고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고 또 사례하니, 민응형이 답하기를,
"나라의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중간에서 물에 가로막혀 이제 비로소 들어왔으니 이것은 다 늙은 것의 죄이다."
하였다. 사은하고 나서 뵙기를 청하니, 상이 그가 반드시 간할 줄을 알고 하교하여 묻기를,
"대간이 만나보려고 하는 뜻은 무슨 의도에서인가?"
하니, 민응형이 아뢰기를,
"신의 허다한 소회는 한 장의 계사로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강씨를 처치하는 것은 실로 전하의 지나친 우려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절대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신이 이점을 진달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정원이 그의 말로써 입계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교하기를,
"하유한 뒤로 많은 날짜가 경과했는데, 공의가 이미 결정된 뒤에 이제야 비로소 올라와서 이런 신구하는 태도를 보이니, 사대부의 마음가짐과 행사하는 것이 이와 같이 바르지 못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다. 민응형이 궁중의 문을 밀치고 들어가고자 승지를 청하였으나 승지가 가지 않았다. 민응형이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이에 계사의 초안을 정원에 보내기를,
"지금 강씨의 숱한 죄악을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데, 만일 먼저 유시를 반포하지 않고 곧바로 죽인다면 멀리 외방에 있는 백성들이 반드시 전하더러 죄없는 골육(骨肉)을 죽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잠시 사사하라는 분부를 정지하고 신을 불러 등대(登對)한 뒤에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이래가 또 이것으로 아뢰기를,
"이는 간장(諫長)의 말이기에 부득불 진달합니다."
하였다. 민응형이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나아갈 것인지 물러갈 것인지를 기다리니, 상이 강씨를 사사하라는 전지(傳旨)를 먼저 내리고, 한참 있다가 답하기를,
"말이 너무나 터무니없으니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소현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하고 교명 죽책(敎命竹冊)·인(印)·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吳以奎)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 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 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오늘의 일은 윤리를 밝히고 후환을 막는 데 의도가 있다. 만일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차마 단연(斷然)히 법을 집행하여 여러 아이들로 하여금 날마다 울부짖으며 의탁할 곳이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적은 일을 인내하지 못하며 큰 계획을 어지럽힌다.’고 하였다. 법이란 한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되는 것이니, 내가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즐겨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비록 무겁지만 은례(恩禮)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 예에 따라 장사지내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량을 헤아려 지정해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예에 따라 장사지낼 등수를 여쭈니, 상이 2등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계해

대사간 민응형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미천한 신하가 잘못한 죄가 산처럼 쌓였는데 성상의 바다와 같은 은혜를 입어 바닷가 고을에서 대죄하고 있었습니다. 상을 영원히 뵙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포기하였는데 천만 뜻밖에도 간관의 장으로 특별히 부르시니 놀랍고 두려워 감읍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삼가 하유(下諭)를 받은 뒤에도 늙고 병든 사람이라 빨리 올 수 없는데다 또 큰비를 만나 순창(淳昌)에서 물에 막혔고 또 전주(全州)에서 물에 막혀 날짜를 많이 허비하여 사은을 지체한 결과를 초래하고 대론(臺論)이 정지하기 전에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어제 뵙기를 청한 일은 이미 지나간 뒤에 다시 들추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만, 말하고 싶은 것을 못한 바가 있었습니다. 근래에 위아래 사이에 의심과 막힘이 너무 심하여 미안한 하교가 전후 연달아 내리고, 궁궐에 입직하게 한 조처는 듣는 이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신과 간관을 잇달아 귀양보내고 내쫓는 데에 있어서는 비록 말을 실수하여 정도에 지나친 죄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어제 경덕궁(慶德宮)에 사은 숙배하고 나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미처 대궐에 나오지 못하고 이제 비로소 와서 인피하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17일 갑자

간원이 민응형을 출사하게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의 노여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아 체직하라 명하였다.

 

장생전(長生殿)에 남아 있는 널판자 일부와 석회(石灰) 2백 석을 내수사(內需司)에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혹자는 "강씨의 상(喪)에 쓰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강씨를 어느 곳에다 장사 지내는 것이 좋겠는가. 예조에 문의하여 아뢰어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강씨가 이미 죄로써 폐출, 사사되었으니 소현(昭顯)의 묘소 곁에 묻는 데에 대해서는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강씨의 집안 산에 장사지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이행원(李行遠)이 처음 정사(呈辭)하자, 조리하여 출사하라고 답하였는데 대개 특별한 대우였다.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가 세 번째 정사하자, 체직하였다. 이때 외척(外戚) 홍진도(洪振道) 등이 다 상의 뜻에 영합하여 독을 넣은 일로 옥사가 처음 일어났을 적에 사람들에게 말을 퍼뜨리기를 ‘이것은 강빈이 한 짓이니 속히 법을 시행해야 된다.’고 하였다. 오직 구인후만 처음부터 억울하다고 하면서 강씨에게 실은 죽을 만한 죄가 없다고 하였는데, 상이, 그가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알고 자못 소외시키려는 뜻을 보인 것이다.

 

3월 18일 을축

이시백(李時白)을 병조 판서로, 허휘(許徽)를 공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이행원(李行遠)을 이조 참판으로, 신익량(申翊亮)을 우부승지로, 남선(南銑)을 대사간으로, 서상리(徐祥履)를 사간으로, 이순암(李純馣)·노문한(盧文漢)을 지평으로, 이석(李晳)을 헌납으로, 신홍망(申弘望)을 정언으로, 유석(柳碩)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유석은 일찍이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되었을 때 별도로 준비하는 미곡의 수량을 과장하여 통정(通政)에 올랐다.

 

비국이 강도(江都)의 쌀 3백 석으로 부평(富平)·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교하(交河)·인천(仁川) 등 고을의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구제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3월 19일 병인

이날 강씨를 폐출, 사사한 일로 종묘와 숙녕전(肅寧殿)에 고하였다. 종묘에 고한 글에,
"국가가 불행하여 변고가 대궐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강의 죄가 커서 가릴 수 없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위호(位號)를 외람되이 칭하였고 위적(褘翟)을 미리 만들었으며, 흉한 물건을 파묻어 악한 짓을 하였고 독을 넣어 역심(逆心)을 드러내 떳떳한 윤리를 어지럽히고 없앴으니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우며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였습니다. 죄가 종사에 관련되는데 사사로운 은혜를 어찌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의리에 따라 처단하고 그 연유를 감히 고합니다."
하였다. 숙녕전(肅寧殿)에 고한 글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시대마다 간혹 있기는 하지만 궁위(宮闈)의 변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폐출된 강이 역모를 자행하여 그 악이 가득 찼습니다. 비단 적의(翟衣)를 미리 만들었으니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이미 극에 달하였고,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었으니 화가 또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죽여야 된다고 말하니 하늘의 처벌을 회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의리로써 처단하니 계책이 후환을 염려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고하니 신께서도 함께 분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령 박안제(朴安悌)가 지어 올렸다. 【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을 것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68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한국고전번역원

 

백관들을 명정전(明政殿)에 모아 놓고 교서를 선포하여 알리고 또 팔도에 반포하였는데, 그 교서에,
"반역하는 형상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군친(君親)을 해치고자 하기에 왕법을 부득불 시행하여 윤기를 밝혔다. 이에 크게 알리어 나의 깊은 마음을 보이노라. 내가 부족하고 어두운 자질로 거듭 어려운 시기를 만났다. 마음을 주고 믿는 데에는 수족과 같은 신하들에게도 그렇게 하였고, 예(禮)를 돈독히 하고 은혜를 베푸는 데에는 골육(骨肉)을 어루만지며 더욱 돈독히 했다. 보호하고 기르는 데에 항상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궁중에서 갑자기 변이 발생했다. 역부(逆婦) 강은 타고난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몸가짐이 거칠어서 오랫동안 대궐 안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섬기는 유순한 예의를 크게 상실하였고, 심양(瀋陽)에 당도하여서는 곧바로 왕위를 바꾸려는 흉측한 꾀를 꾸몄으며 전(殿)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하였으니,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분노를 빙자해 큰 소리로 부르짖어 어길 수 없는 위엄을 감히 범하였고 원망을 더욱 깊이 품어 문안하는 예(禮)를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비록 극진히 위해 주고 싶지만 하늘을 스스로 끊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궁중에 흉한 물건을 파묻었으니 이미 매우 참혹하고 수라에 독을 넣었으니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돌아보건대,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만, 이러한 악독한 역적은 옛날에도 있지 않았다. 지난 역사에 증험하니 윤리를 파멸할까 경계하였고 오늘날로 논하건대 간악을 키울까 우려된다. 천지의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데 어찌 하루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있겠으며, 강상(綱常)에 관계된 죄는 삼척(三尺)009)  의 장정(章程)이 진실로 엄하다. 그렇지만 본가(本家)에 나가서 죽도록 하고 다시 물품을 주어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미 역부(逆婦)인 강을 잡아 사사(賜死)하였다. 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인용하건대 시역의 마음만 품어도 반드시 처형해야 하고 국가의 떳떳한 법을 들추면 그 죄는 더구나 용서할 수 없다. 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또한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하였다. 병조 참의 채유후(蔡𥙿後)가 지은 글이다. 이때에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은 밖에 있었고 두 제학은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유후가 지제교(知製敎)로서 지어 올렸다. 좌의정 김자점이, 채유후가 문장을 잘한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가 강씨를 구하자는 논의를 주장하였는가 의심하여 반드시 그의 손으로 짓게 하려고 예문관으로 하여금 채유후에 분배하게 하였으므로 채유후가 부득이 지은 것이다. 채유후는 젊어서 장원 급제하여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자못 물망이 있었으나, 중년에 상이 그가 술을 즐기는 것으로 인해 멀리하였는데, 이로부터 다시 중용되었다.

 

3월 21일 무진

비국이 아뢰기를,
"강씨가 죄로써 폐출되어 죽은 것은 국가의 큰 변이므로 심양(瀋陽)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알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먼저 물어오게 된다면 우리측에서 먼저 말하는 것만 못하게 될 것이니, 죄악을 낱낱이 진술하여 제때에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주문을 지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의 사행에 추가로 부치도록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희 나라가 복이 없어 변이 궁중에서 발생하였기에 전후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여 우러러 황제께 아룁니다. 의정부에서 올린 장계에 ‘삼가 전지(傳旨)를 받드니 「죽은 세자의 빈 강씨가 항상 그 형제가 죄를 짓고 멀리 귀양간 것을 분하게 여겨 일찍이 내가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이르러 성냄을 빙자해 큰 소리를 지르고, 그 뒤로는 문안마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이어서 흉한 물건을 가져다가 궁중에다 묻었는데 발견된 것이 많았고, 또 수라에 독을 넣어 나로 하여금 독을 입어 통증이 생기게 하여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시녀들이 물린 수라를 먹고 광기를 일으키거나 쓰러졌으며, 나도 한달이 넘게 치료하여 겨우 다시 소생하였다. 또 그 형제들과 더불어 몰래 왕위를 바꾸고자 꾀하였고, 붉은 비단으로 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하였는데, 흉계를 꾸민 실상이 일시에 발각되었다. 그의 형 강문성(姜文星)·강문명(姜文明) 등이 비록 형신을 받다가 죽었으나 강씨가 범한 죄도 용서하기 어렵다. 너희 부서가 의금부와 더불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강이 분노를 빙자해 크게 고함을 지르고 문안드리는 것도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왕위를 바꾸려고 은밀히 도모하고 적의를 미리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한 등의 사항은 이미 훤히 드러났습니다. 이중 한 가지 행위만 있어도 진실로 용서하기가 어려운데, 궁중에다 흉한 물건을 파묻고 수라에다 독을 넣는 등 간사하고 흉측한 짓을 갈수록 더욱 부리어 전후 범한 죄가 분명해 숨길 수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금 천하에도 없었던 변입니다. 왕상께서 비록 극진하게 보전해 주고자 하시지만 그들의 매우 흉악한 죄는 천지의 사이에 하루도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왕법(王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율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조속히 일의 전말을 황제께 아뢰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강씨는 성품이 올빼미와 같고 마음에 음험하고 사악한 생각을 쌓아 천속(天屬)의 지극한 정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시역의 참혹한 계획을 품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자취가 실패하여 드러나자 여론이 들고 일어나기에 부득이 공론을 애써 따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율을 감하여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덕이 천박함으로 말미암아 옳은 방향으로 훈도하지 못해 이런 종전에 없던 망극한 변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자신을 돌이켜 자책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강씨를 폐출하여 사사한 것 이외에 위의 일들을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3월 22일 기사

이날 상이 원(苑) 중에서 환관들에게 활쏘기를 연습하도록 명하여 구경하고 외부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상이 왕위에 계신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춘추(春秋)도 점차 높아진데다 항상 옥체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회를 보는 일을 전폐하였고, 백관이 일을 아뢸 적에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 글로 적어서 계달(啓達)하였으며, 긴급한 변방의 계책이나 신하를 죄책하는 일이 있지 않으면 일찍이 대면하지 않고 자못 후원에 토목 공사를 일삼아 대나무로 정자를 짓고 기둥을 조각하였는데 몹시 기묘하였다.
요금문(曜金門)은 창덕궁(昌德宮)의 서북쪽 문인데 후원에 가까워 인적이 드물었다. 매양 12 월에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자문관(紫門官)이 정원에게 요금문을 열 것을 아뢰어 주라고 요청하여 얼음을 운반해 들인다. 그러므로 상이 은밀히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자문관에게 넌지시 말하여 문을 닫는 시기를 늦추어 청하게 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 들였다. 그리하여 내간 나무와 돌의 토목 공사가 거의 쉬는 날이 없었으나 외부 사람은 아는 이가 적었고 비록 아는 이가 있더라도 또한 정원에 관련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감히 다 말을 하지 못하였다.

 

호조가 강씨의 3년상 안에 지급할 제물의 수량을 적어 올리니, 상이 하교하기를,
"제물의 수량이 광해(光海)의 상(喪)에 비하여 자못 지나친 듯하니, 그 가운데 줄일 수 있는 것은 알아서 줄이라."
하였다. 호조가 줄여 정해 올리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그 가운데 유밀(油蜜)만 절반쯤 줄이라."
하였다.

 

3월 23일 경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성난 기색으로 대하면서 이르기를,
"요즘 도성의 인심이 어떠한가?"
하니, 김자점(金自點)이 안정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씨를 비호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일찍이 경으로 하여금 살피도록 하였는데, 경은 그 사람을 찾아내었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것은 들뜬 의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주장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강씨가 이미 사사되니 여염에도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향리에서도 진실로 어른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어려워하여 감히 나쁜 짓을 못하는 것인데, 지금은 신하가 임금을 너무나 멸시하고 있다. 이러한 습관이 만일 커진다면 반드시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이다. 신하의 형세가 매우 강성하여 오늘 말한 것을 내일 변경하고 내일 말한 것을 또 그 다음날 변경하고 있으며, 임금이 포상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천시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면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니, 반드시 이를 주장하는 사람을 적발하여 부도(不道)의 법률로 다스려야만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할 것이다. 지난번에 대신이 곧바로 나갔던 일은 비록 옛적의 강한 번방 신하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심한 자는 있지 않았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비록 단서가 없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다섯 가지 죄에 【 왕위를 바꾸고자 꾀하고, 적의를 만들고, 내전(內殿)이라 칭하고, 성을 내 고함을 지르고, 문안을 폐한 것.】  대해 명백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범연히 사형을 면해주기를 청한 것은 몹시 무리한 짓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자를 반드시 구원하려고 하면서 ‘나는 임금을 사랑한다. 나는 임금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니,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반드시 뒷날 그 독에 피해를 입어야만 바야흐로 그 마음이 통쾌하겠는가. 그리고 지난번에 대각의 신하들이 혹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핑계대고 혹은 병이 심하게 났다고 하고 혹은 고의로 계사에 빠져 반드시 체직되고야 말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대각에 제수하려 하니 전형(銓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강적(姜賊)이 죽지 않았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다섯 장의 종이에 써서 그 자식에게 유언(遺言)하고 시비(侍婢)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그 시비를 국문하였더니, 그런 일이 과연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나 끝내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니, 구인후(具仁垕)가 아뢰기를,
"한문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 언문(諺文)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언문인데 간혹 한문을 섞었다고 한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글 가운데 말한 바는 무슨 뜻이었다고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글의 뜻은 대체로 ‘소숙(小叔)과 조씨(趙氏)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 너희들이 성장하여 반드시 이 원수를 갚으라.’ 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한 시비가 공초한 말은 이보다 더욱 참혹하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소숙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마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유서를 숨겨 놓은 사람을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내옥(內獄)에서 국문하였으니 밖으로 내보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남중이 재차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행원이 또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밖으로 내보내면 외부 사람이 다 유서의 말을 들을 것이니, 바로 그의 술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이 일제히 아뢰기를,
"일의 실마리가 드러났으니 비록 내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부 사람이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예(禮)로 말한다면, 부모에게 불순하면 버리는 법입니다. 더구나 왕위를 바꾸려고 은밀히 도모하고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참람되게 칭호를 사용하고 독을 넣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각의 의논에까지 나왔으니, 사대부들이 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당초에 약방(藥房)이 그 즉시 계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러 상세히 알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사형을 면해주자는 논의는 처음에 못난 무리들한테서 나왔는데 점차로 공공의 의논으로 형성되고 말았으니, 상의 하교에 이른바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어찌 매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당(黨)을 비호하는 논의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데 대해서는 비록 자복한 사람은 없으나 반드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궁중에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란 강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외부 사람의 의논도 강씨를 의심하는 자가 열에 아홉을 차지하고, 어른들의 의논 또한 모두 이와 같습니다. 듣건대, 김상헌(金尙憲)의 생각도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고 여긴다 합니다."
하니, 상의 안색이 조금 풀리었다.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김상헌이 정승될 조짐이 지금 보인다."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김상헌이 이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원두표가 상헌의 중망을 빌어다 그의 말을 증거했다."고 하였다. 허계(許啓)가 아뢰기를,
"궁중의 일을 외부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초에 대간의 무리가 목숨을 살려 주자는 청을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불끈 성내며 이르기를,
"이것은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의 말을 어찌 감히 믿을 수 없다고 하는가."
하자, 허계가 매우 두려워서 독을 넣은 일로 인한 옥사를 끝까지 다스려서 기어코 그 단서를 찾아낼 것을 다시 청하였는데, 대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고 한 것이다. 상이 답하지 않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속으로 비웃었다.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강을 동궁(東宮)에서 딴 데로 옮겨 놓을 적에 쌓아 놓았던 보화(寶貨)를 하루 내내 실어가고 단지 텅 빈 행랑 안에 대여섯 개의 보따리만 남겨 두고 갔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어떤 사람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그 비단들을 다 흐트러뜨려서 땅에 어수선하게 늘어 놓았다. 또 종이로 싼 비단 서너 필을 담장 사이에 꽂아 두었고 또 그 중에 백납(白蠟) 몇 덩이를 꺼내서 뒷간에 던져 놓았는데, 그곳은 도둑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고 또 도둑이 한 짓도 아닌 듯하였기 때문에 나는 몹시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그 뒤에 건양문(建陽門)의 군영(軍營) 곁에 당첩(唐楪)에다 백반(白飯)을 담아 던진 자가 있어 중사(中使)가 그것을 알고 고하였다. 강의 시종을 국문하였더니, 한 시비가 스스로 말하기를 ‘비단을 흐트러뜨려 놓은 일은 내가 하였고 그 뒤에 또 와서 소식을 염탐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비단을 흐트러뜨려 놓은 계획은 대전(大殿)의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고, 당첩을 던진 계획은 외간과 내통하려고 한 것이다."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강씨가 별도로 유치된 곳은 반드시 깊고 은밀하였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간사한 짓을 하였단 말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이 유치당해 있을 때 외간의 일을 못 들은 것이 없었다. 강문성(姜文星)의 무리가 붙잡혀 올 때에도 사사로운 편지를 전해 들였고 정계(停啓)하였다는 내용 또한 알았었다고 한다."
하였다.

 

3월 24일 신미

이때 천문(天文)의 변이 없는 날이 없었다.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한 지 이미 반 년이 되었는데도 일관(日官)이 아뢰지 않기도 하고 조정에서도 보통으로 생각하였다. 별의 변괴 중에서 몹시 참혹한 것은 일관이 숨기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 적었다.

 

3월 25일 임신

헌부가 아뢰기를,
"나인들이 이미 폐출된 강씨가 남긴 유서의 일을 발설해 놓고는 끝까지 굳이 숨기니, 이것이 어찌 내옥(內獄)에서 추치(推治)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의금부로 내보내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밝혀내소서."
하고, 간원에서도 이 내용으로 논하여 아뢰니, 답하기를,
"내옥에서 추치하여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대개 지난해부터 내옥에서 날마다 강씨의 궁인들을 국문하였는데, 겨울에 상이 언문 편지로 척리(戚里)에게 보내 강씨의 수십 가지 죄를 나열하여 세었다. 그 가운데는 "내옥에서 옥사가 낭자하게 벌어졌는데도 조정에 한 사람도 의금부로 끌어낼 것을 청하는 자가 없으니, 온 조정의 사람이 모두 강씨의 당(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진신들이 이를 보고 다 두려워하였다. 2월에 독을 넣은 변이 발생했을 때 대사간 조경이 끌어내다 국문하자는 청을 맨 먼저 하여 총애의 발탁을 입었기 때문에 양사(兩司)의 논의는 대개 역시 상의 의사를 염탐한 것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두 대장이 김자점(金自點)·구인후(具仁垕) 지난번에 전교로 인하여 수십 일 동안 입직하였는데 그 노고가 염려된다. 각각 내구마 한 필씩을 하사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라."

 

3월 26일 계유

평안 감사 박서(朴遾)가 치계하기를,
"연안(延安) 사람 장운(張雲)이라는 자가 큰어머니를 구타하였고 생모의 상(喪)에 가지 않았으며, 그의 아비 천계(天繼)가 그가 사는 집에 찾아가 보려고 하자, 장운이 자기의 양자와 함께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칼을 뽑아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가 다행히 벗어나 도망치자, 장운이 그의 아비가 타던 말과 동자 종을 빼앗아 가지고 갔습니다. 지금 정주(定州)에 붙잡혀 있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전 장령 이위(李椲)를 보내 조사하여 의금부로 보냈다. 옥사가 성립되자 사형시키고 연안부(延安府)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들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예조 참의 김시번(金始蕃)이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 전후 말을 변경한 상황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므로 신들이 누누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파직된 뒤에도 특별히 가자(加資)한 것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 몹시 근거가 없습니다. 김시번의 당상 자급(資級)을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재상은 헛되이 자리나 지키고 있는 직책이 아니고 정부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본직과 겸임한 직위를 체면해 주어 공사간에 편리하도록 해 주소서."
하니, 상이 계(啓)자를 찍어서 내렸다. 대신의 상소에 계자를 찍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3월 27일 갑술

상이 좌의정 김자점을 명초하여 복상(卜相)하였다. 김자점이,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으로 의망(擬望)하여 올리니, 김상헌과 남이웅이 모두 재상이 되었다. 이때 김상헌은 양주(楊州) 선영의 아래에 물러나 있었는데, 봉교 홍명하(洪命夏)를 보내어 가서 하유(下諭)하게 하였다. 승지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대신에 대한 하유는 범연히 할 수 없으니 교서를 지어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역말을 타고 올라 오라고만 명하였다. 남이웅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호협한 기가 있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 폐조(廢朝) 때에 궁궐 도감 도청(宮闕都監都廳)으로 당상에 올랐는데, 반정(反正) 당시에는 이로 인해 드러나게 쓰이지 못하였다. 빈객(賓客)이 되어 심양(瀋陽)에 왕래한 뒤로부터 연이어 발탁되어 이조 판서를 세 번이나 지냈으며 드디어 의정(議政)에 임명되었다.

 

3월 28일 을해

강원도의 열네 고을에 큰물이 졌다.

 

공청 감사 임담(林墰)이 비밀리에 치계하기를,
"이산현(尼山縣) 초관(哨官) 이석룡(李碩龍)이 고변하기를 ‘고을 사람인 유탁(柳濯)이 서울에 사는 진사 권대용(權大用) 등과 반역을 공모하여, 임경업(林慶業)이 대장이 되었다고 사칭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인하고 군사를 몰래 모아 장차 4월 1일에 거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형방 승지 여이재(呂爾載)가 급히 대신을 불러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삼경에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이석룡이 고변한 말을 보건대, 몹시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병기를 가지고 모여들다가 관원에게 체포당하였다 합니다. 고변한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자들은 도사를 나누어 보내 붙잡아 오도록 하고, 또 선전관을 보내 표신(標信)을 가지고 가서 경상·전라 두 도와 공청도의 감사·병사에게 하유하여 엄하게 살피도록 하고 군사를 풀어 뒤쫓아 붙잡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라·경상 두 도는 살피게만 하라."
하였다. 대개 이석룡이 고변한 가운데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는 적의 당류들이 동시에 함께 일어날 것이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대신이 지나치게 우려하여 세 도의 군사를 아울러 징발하기를 청하였던 것인데, 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3월 29일 병자

우의정 남이웅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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