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병오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명정전(明政殿)에서 진하하였는데, 역적을 토벌한 것을 하례한 것이다. 이어 종묘에 아뢰고, 중외에 대사(大赦)를 내리는 교지를 반포하기를,
"왕은 말한다. 못된 무리들이 변을 일으켜 감히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신인(神人)이 분개하여 바로 거리에 내다 주륙(誅戮)하게 되었다. 이에 유신(維新)하는 날을 맞았기에 교서를 반포한다. 돌아 보건대 덕없는 내가 백성을 다스리게 되어 위태하기가 마치 썩은 고삐로 말을 모는 것과 같았다. 내 몸처럼 생각하여 측은히 인정(仁政)을 행하고자 하였으나, 각자 딴 마음을 품어 어리석은 자들이 법을 범했으니 어찌하겠는가. 늘 도탄에 허덕이는 것을 마음 졸여 왔는데, 재앙이 엉뚱하게도 황지(潢池)017) 에서 발발하였다.
역적 안익신(安益信) 등은 시골 구석의 부랑배나 벼슬아치의 천첩(賤妾) 자손들로서 몇 고을을 속여 꾀어서는 황건적(黃巾賊)의 꾀를 본받고자 하였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선동해서 청독(靑犢)018) 의 무리처럼 패거리를 결성하였다. 용계(龍溪)019) 의 유치(杻峙)에 흉도를 불러 모으니 그 숫자가 헤일 수 없었고, 우곡(牛谷)의 고당(姑堂)을 집결지로 삼았는데 무리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도망자를 가장시켜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흉악하지 않으며, 완산(完山)을 도모하고 서울을 범하려 하였으니,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요행히 의리를 존중하는 한두 사람 덕택에 거의 무르익었던 기틀이 발각되었다. 혁혁한 소문을 듣고는 법을 범한 자들이 저절로 무너졌고, 물 샐 틈 없는 법망 속에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가슴 속의 흉모를 신문할 것도 없이 자복했고, 요괴들의 목과 허리가 잘려 사형에 처해졌는데도 변명치 못하였다.
두고두고 백성들이 상도를 어지럽히게 된 까닭을 생각하니, 진정 아둔한 내가 덕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항산(恒産)이 없어 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누구를 꼬집어 탓할 수 있겠는가. 큰 죄에 빠뜨린 다음 뒤따라 벌하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할 일이다. 그래서 연좌율은 시행치 말도록 하고 아울러 끝까지 체포하는 일도 속히 정지하게 하였다. 환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는 것이라서 나의 마음은 경계심으로 가득한데,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된다면 뭇 사람들도 모두 기꺼워하리라 기대된다. 이에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은전을 펴 한 나라에서 더불어 살고자 한다.
이미 역적 안익신·유탁(柳濯)·이지험·홍영진(洪榮振) 등은 모두 법대로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따라서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죄 가운데 모반 대역(謀反大逆), 모반(謀叛),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謀殺)하고 구타하고 욕설을 퍼부은 죄,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한 죄, 노비가 상전을 모살한 죄, 모의하여 고의로 살인한 죄, 저주하여 모해한 죄,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된 죄, 장오죄, 강도죄, 절도죄를 제외하고 기타 잡범으로 사죄·도죄(徒罪)·유죄(流罪)·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에 대해서는 이미 배소(配所)에 도착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이미 죄가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형벌이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간에 모두 용서하여 면제시킨다. 감히 용서하는 교서가 내려지기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소하여 말하는 자에게는 그 죄로 죄를 줄 것이다. 관원은 한 등급씩 가자(加資)하고 자궁(資窮)된 자는 대가(代加)토록 할 것이다. 아, 원근 모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큰 복록을 이어나가게 된 이때에 아무쪼록 중외(中外)가 서로 마음을 합하여 함께 일어나는 나라의 운세를 붙잡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는 바인데, 잘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하였는데, 예문관 제학 김광욱(金光煜)이 지어 올린 것이다.
공청도(公淸道) 공주목(公州牧)을 강등하여 공산현(公山縣)으로 삼고, 이산(尼山)·연산(連山)·은진(恩津)을 혁파하여 1개 현(縣)으로 합하여 은산현(恩山縣)이라고 하고, 공청도를 홍청도(洪淸道)로 바꾸고, 전남도 금산군(錦山郡)을 강등하여 현(縣)으로 삼았는데, 모두 역적의 출신지였기 때문이었다.
5월 2일 정미
명하여 강씨(姜氏)의 개인 소장인 은(銀) 1만 6백 50냥(兩)·황금 1백 60냥, 왜검(倭劍) 19자루를 호조에 귀속시켜 별도로 창고 하나에 비치해 두게 하고 소현의 여러 자녀가 혼인할 때 혼수(婚需)로 쓰도록 하였다.
이날 정사가 있었다. 상이 정청(政廳)에 하교하였다.
"장령 이응시는 우선 체차하라. 윤순지(尹順之)를 대사헌으로 삼고, 이척연(李惕然)을 장령으로 삼도록 하라."
5월 3일 무신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이응시의 상소를 경들은 보았는가?"
하니, 영상 김자점(金自點)과 우상 남이웅(南以雄)이 대답하기를,
"소본(疏本)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말한 내용은 대략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시의 사람됨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지난날 그가 비국랑(備局郞)으로 있을 때 보니, 옳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힘껏 간쟁하며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그 상소문을 내보이게 하고 이르기를,
"상소문의 내용이 어떠한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상소문의 어투가 지나칩니다. 그러나 간관이 일에 대해서 논쟁한 것을 가지고 죄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제 체직시킨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수긍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이 응시와는 친하지도 않고 오래 안 사이도 아닌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비호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시의 상소는 시론(時論)에 아부한 것인만큼 시배(時輩)들의 뜻으로는 꼭 뛰어올려 등용코자 하였을 것이니, 그의 체직에 대해 당연히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독약을 넣었다는 말을 꺼낸 조경과 끝까지 굳게 고집하지 않은 이행원(李行遠)을 응시가 감히 비부라고 지목하였다면, 약방 제조로서 끝내 문안하지 않은 자는 충신이란 말인가."
하니, 좌우가 입을 다문 채 잠잠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시의 상소문 가운데 포사·여희(驪姬)·비연(飛燕)·태진(太眞)을 들어 비유하였다. 이 중에 한 사람만 있어도 나라가 꼭 망할 것인데, 더구나 네 사람이 한꺼번에 있는 경우이겠는가. 포사는 정비(正妃)를 폐했고 여희는 태자를 살해하였고 비연은 미천한 사람이었으니 응시가 비유한 것이 그럴 듯하나, 태진은 어디에다 비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좌우가 또 입을 다문 채 잠잠하였다. 대사헌 이기조(李基祚)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응시와 본시 서로 알지 못하였으나 지난해 겨울 함께 북경(北京)에 가면서 그의 사람됨을 보니 우활한 점은 있는 듯하였으나 그 마음만은 대쪽 같았습니다. 말이 경망스럽기는 하지만 전하께서는 진정 수용해 받아들여서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한바탕 웃어버리고 말면 될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말들을 끄집어 내어 죄안을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응시에게 죄를 내리면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반드시 응시가 기피하고 감추는 것을 피하지 않고 궁궐을 지적해 배척한 까닭에 전하가 노여워하여 죄를 주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응시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면서 스스로는 간한 사람을 죄주었다는 이름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거듭 간절히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크게 간특한 인물이 서울에 잠복해 있으면서 이들 무리를 사주하여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자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머리를 못 들게 만든 다음에 큰일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삼척 동자라도 어찌 조경과 이행원을 불충한 신하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응시가 감히 비부라고 지목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적(姜賊)을 힘써 구원한 자야말로 군자란 말인가. 나는 응시가 나를 욕한 것을 노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충신을 가리켜 비부라고 한 것이 미운 것이다. 강적이 죽을 때 여러 자녀에게 글을 남기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부자 사이도 미처 돌볼 겨를이 없는데, 더구나 조손(祖孫)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 뜻이 반드시 복수하려고 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지금 응시가 조경과 이행원을 공격하는 뜻도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또 폐빈(廢嬪) 강씨의 재물이 매우 많으니 이것도 매우 염려된다. 어질지 못한 자가 재물로 유혹하면 그 누가 동요되지 않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임금의 말은 한 마디라도 온 세상이 보고 듣는 것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화풀이하는 말씀을 하십니까. 내버려두고 묻지 않으면 그 죄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나 만일 혹시라도 죄를 내린다면 도리어 그가 곧다는 명성만 드날리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어찌 전하의 신변에 관련시켜 한 말이 나쁜 것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간관의 직책은 일을 논하는 것이니, 결코 죄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또 재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덕으로 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덕으로 감화시킨다면 전날 강씨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반드시 선(善)에 감화될 것입니다. 임금의 도가 어찌 백성들에게 속임을 당하겠습니까. 덕을 펴 그들을 감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지목한 가운데에 들어 있다. 【 김류를 대신해 정승이 되었다.】 이기조도 부제학으로 정계(停啓)의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어떻게 비부란 호칭을 면하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설사 응시가 신을 죽이려고 했다 하더라도 신이 어찌 감히 사사로운 감정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상소문 중에 이른바 누가 어떤 논의로 어떤 벼슬을 얻었다는 등의 말을 신이 왜 모르겠습니까. 상소문에서 신까지도 비판하였으나 이 사람은 결코 남에게 사주를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기조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조그만 혐의를 회피하고자 하여 속마음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다시 극언(極言)하였다. 대사간 윤순지(尹順之)도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조금 거두도록 청하였으나, 상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이 낯빛이 안정된 다음에 이르기를,
"이시백(李時白)은 참으로 군신(君臣)의 의리를 아는 사람이다. 지난번 변란이 발발하였을 때 총융사로서 진위(振威)로 나가 진영을 차렸는데, 적병이 만일 짓쳐 들어왔다면 그 곳은 꼭 죽을 자리였다. 그런데도 시백은 마치 즐거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지난번 심기원(沈器遠)의 변란에 비록 운운하는 얘기들이 있었으나, 내 생각에 연평(延平)020) 의 아들은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따지지 않고 내버려 두었었다. 당시에 혹 의심을 하였더라면 나의 충신을 잘못 해칠 뻔하였다."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당시에 혹시라도 의심을 해서 죄를 내렸더라면 전하께서 오늘 뉘우쳐도 미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시고 또한 그런 마음으로 조정의 신료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또 상이 이르기를,
"이시백이야 말로 어진 인물이다. 이 같은 신하 몇 사람만 더 있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호조 참판 이시방은 시백의 아우였는데, 비국 당상으로 입대(入對)하였다가 일어나 절을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지난번 신의 형제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왔을 때 신들이 스스로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만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자제를 가르쳐 마음가짐을 공들처럼 갖게 하라."
하자, 시방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여 마지않았다. 자점이 이어 영의정을 사직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누구보다도 뛰어난데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이 억지로라도 나와 주어 내가 매우 기뻤는데 금방 다시 병을 핑계하여 내가 매우 서운했다. 지난날 청나라 걸음에서의 굳건한 지조와 청결한 행동을 보건대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웃 나라로 하여금 조선에 이 같은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어찌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가 정부에 누워서라도 도(道)를 말해 주기를 내가 깊이 바라는데, 좌상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였다. 남이웅(南以雄)도 늙고 병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이 늙고 병들었어도 출사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더구나 정신과 기력이 좌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경이겠는가."
하였다. 이웅이 아뢰기를,
"신은 전연 학식도 없고 말도 어눌하여 이응시의 일 같은 것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말씀드려 전하의 마음을 깨닫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이기조가 한 말이 매우 적절하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명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그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이날 상이 매우 노하여 좌우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 원평군(原平君) 원두표(元斗杓), 병조 참판 허계(許啓)와 이시방·이래 등이 모두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
5월 4일 기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등용하고 사직시키고 주고 빼앗는 것은 인주(人主)의 큰 권병(權柄)이고 임금을 사랑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큰 의리이다. 부호군 이응시는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분의(分義)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사특한 논의로 강씨(姜氏)를 보호하려 한 무리를 구원하고 악을 미워한 신하를 모욕함으로써 군상으로 하여금 제재를 받아 꼼짝 못하게 하고 어진 신하로 하여금 형세가 두려워 몸을 움츠리게 하려 했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정말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들 무리가 혹은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거나 혹은 강씨를 위해 보복하여 훗날의 배경으로 삼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비부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자신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대신을 구원해 보호하고 충량(忠良)한 신하를 욕보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북쪽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승지 이래·여이재(呂爾載)·이시해(李時楷) 등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보고 신들은 서로들 돌아보며 경악하여 어떻게 진달드려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응시가 망령되어 전하의 밝으심을 믿고 외람되이 소장을 올렸으나 그의 마음은 오직 정성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엄한 꾸지람을 받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 강씨는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이미 나라의 법에 따라 복주(伏誅)되었습니다. 조정의 신료가 정말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강씨를 위해 전하를 저버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가령 응시의 뜻이 보복하여 훗날의 배경으로 삼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면 신들도 그의 죄를 성토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아끼거나 비호하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말이 비록 엉뚱해도 그 참람되고 광기어린 말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곧 옛 제왕들의 훌륭한 덕에 해당하는 일들이었습니다. 말 때문에 죄를 얻는다면 널리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천둥과 같은 위엄을 거두시어 이응시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날 내비(內批)가 처음 내렸을 때 여러 승지가 달려가 전지를 받들고서는 저물녘에야 비로소 진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5월 5일 경술
헌부가 아뢰기를,
"신하는 하기 어려운 말을 한 뒤에야 곧다고 이를 수 있고 임금은 듣기 싫은 간쟁을 들은 뒤에야 잘못을 고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피해야 될 일과 관계된다고 하여 침묵만을 일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정성이 아니고, 광망(狂妄)한 말이라고 하여 번번이 위엄과 노여움을 보이는 것은 신하를 대하는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응시가 치세(治世)를 걱정하고 명주(明主)를 바르게 하려 하여 감히 상소를 올렸으니, 이는 간쟁을 수용해 주는 전하의 도량을 믿고서 군주를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화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궁금(宮禁)에 대한 일은 전하가 마음을 화평하게 가지고 살펴보아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내버려두면 될 뿐 진실로 개의할 것이 못 됩니다. 전하께서 그의 광망한 말을 용서치 않고 대번에 무거운 형벌을 내려 인정에 벗어나는 말씀으로 배척하셨는데, 성명의 시대에 이토록 지나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성덕에 손상되고 언로에 방해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니, 이응시를 멀리 귀양보내란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가 언로(言路)를 여는 것은 사람의 혈맥을 통하게 하는 것과 같은데, 말을 하도록 유도하여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임금이 말을 듣는 방법입니다. 전 장령 이응시가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으면서 강경하게 상소하여 경망한 실수를 면치 못한 나머지 천둥과 같은 전하의 위엄을 스스로 범했습니다만, 성명의 시대에 말 때문에 귀양가는 일이 발생하다니, 엄한 비답이 한번 내려지자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강씨(姜氏)의 죄는 사람마다 원수처럼 미워하는 바입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자라면 어찌 강씨를 옹호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옛날의 직신(直臣)들 중에는 혹 성주를 바르게 하려 하고 치세를 걱정한 나머지 걸·주에 비기고 단주(丹朱)처럼 되지 말라는 등의 말까지도 하였으나, 당시의 군주가 그에 대해 죄주지 않았고 후세에서도 그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성묘조(成廟朝)에 현석규(玄錫圭)가 이조 판서가 되자 대신(臺臣) 김언신(金彦辛)이 그를 노기(盧杞)와 이임보(李林甫)에 빗대기까지 하였으므로 성묘가 크게 노여워하여 국청에 내려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언신이 항변을 중지하지 않자 성묘가 바로 위엄을 거두고 술을 내려 위로하면서 ‘그대는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구나. 석규는 어진 신하이다. 모욕을 가하려 하지 말고 더불어 나랏일을 이뤄 나가도록 하라.’ 했다 하였습니다. 흔쾌히 받아들인 대성인의 미덕을 지금도 눈과 귀로 접하는 듯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요·순을 본받고자 하거든 조종조를 본받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포용하는 도량을 크게 넓히시어 이응시를 멀리 귀양보내라 한 명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도 상차하여 양사의 청을 따르도록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신도 상차하여 이응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번에 내린 벌은 인륜을 밝히고 환란을 막으려는 데에 뜻이 있다. 경들도 의당 이점을 생각하여 세상 여론에 동요되지 말라."
하였다. 이로부터 삼사가 여러 달을 두고 논집(論執)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김상헌이 상차하기를,
"신은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니, 감히 늠록(廩祿)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분의(分義)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도리어 공역(公役)을 거듭 번거롭게 하면서 거만스레 앉아 받는 꼴이 되었으니, 분의가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월름(月廩)을 실어다 주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그리고 신이 조보(朝報)를 보건대 전 장령 이응시가 일을 논하다 죄를 얻었다고 했는데, 신은 당혹스럽습니다. 국가가 이미 말하는 책임을 주어 맡겼으니, 이는 그에게 말을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이미 말을 하도록 시키고서 말을 하자 죄를 준다면 누가 감히 다시 말을 하려 하겠습니까. 예로부터 어지러워지고 망하는 길이 하나가 아니나, 말한 자에게 죄를 주어 화를 재촉하게 된 것이 서적에 즐비하게 기록되어 있어 낱낱이 지적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변괴가 여기저기서 발생하여 사람마다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재앙이 조만간에 닥칠 것만 같으니, 조정의 거조를 하나하나 더욱 근신하여 인심을 진정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 갑작스런 위엄과 노여움을 보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거듭 놀라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녹봉을 실어 보내주는 일은 예로부터의 관례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또 이응시는 말이 간사하고 마음씀이 아름답지 못하니, 귀양 보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5월 6일 신해
화성(火星)·토성(土星)·금성(金星) 세 별이 위성(胃星)에서 합쳐졌다.
홍전(洪瑑)을 우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수찬으로 삼았다. 홍전은 활과 말타는 재능으로 이시백(李時白)에게 발탁되어 외람되게 당상에 올랐는데, 승지에 임명되기까지 하자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5월 7일 임자
좌의정 김상헌이 열두 번째 사직 상소를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는데, 상헌이 굳이 사양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 조경이 어미의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아산(牙山)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조경이 맨 먼저 독약을 넣었다는 말을 발설하자 상이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여러 차례 남다른 총애를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응시로부터 배척을 받자 조경이 부끄러워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간 것이다.
소현 세자묘 수묘관 능산 도정(綾山都正) 이희(李僖) 등에게 각기 한 자급을 올려주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소상(小祥)을 지낸 뒤 으레 내리는 은전이었다.
소현 세자묘 수묘관 능산 도정(綾山都正) 이희(李僖) 등에게 각기 한 자급을 올려주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소상(小祥)을 지낸 뒤 으레 내리는 은전이었다.
5월 8일 계축
유성이 입성(立星) 위에서 나와 심성(心星) 위로 들어갔다.
5월 9일 갑인
평안도 맹산현(孟山縣)에 서리가 눈처럼 내려 양맥(兩麥)이 말라죽고, 태천(泰川)·영변(寧邊)·평양(平壤) 등 고을에 많은 우박이 쏟아져 벼가 손상되었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경기 연천(漣川)·금천(衿川) 등 고을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5월 11일 병진
영두성(營頭星)이 남쪽 하늘가에서 나왔는데, 꼬리 길이는 20여 장(丈)쯤 되고 넓이는 1척(尺)쯤 되었으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다.
이조 판서 이행원(李行遠)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자, 조리하여 출사하라고 답하였다. 행원이 이응시의 기롱과 배척을 받자 그 자리에 불안을 느껴 정고(呈告)하였는데, 곧바로 출사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5월 12일 정사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이석(李晳)을 장령으로, 남선(南銑)을 좌부승지로, 유경창(柳慶昌)을 헌납으로 삼았다.
5월 13일 무오
김진(金振)을 부교리로 삼았다.
가뭄이 오래가므로 향(香)과 축(祝)을 여러 도에 보내 비를 빌게 하였다.
5월 14일 기미
전남도의 노령(蘆嶺) 이하의 지역에 태풍이 불어 바닷가 여러 고을의 전선(戰船)과 조운선(漕運船)이 매우 많이 부서졌으며 80여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5월 15일 경신
연안(延安)에 살던 장운(張雲)이란 자가 남의 빚을 지고 평안도 가산(嘉山) 지역으로 피해 살았다. 그의 아비가 찾아가 꾸짖고 이어 그의 재산을 정리하여 돌아가 빚을 갚으려 하자, 장운이 그의 의자(義子)와 칼을 지니고 뒤를 밟다가 중로에 이르러 그 아비 대신에 말[馬]을 잘못 찔러 아비가 죽음을 면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삼성(三省)이 번갈아 심문하였는데, 장운이 자복하여 마침내 정형(正刑)에 처해졌다.
5월 16일 신유
성이성(成以性)을 집의로,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김중일(金重鎰)·이기발(李起浡)을 지평으로, 임전(林)·이해창(李海昌)을 수찬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정언으로, 목행선(睦行善)을 교리로, 이석룡(李碩龍)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삼았다. 석룡은 역모(逆謀)를 고변한 사람이라서 상이 특별히 제수한 것인데, 사람됨이 어리석어 바라보아도 벼슬할 인물 같지가 않았다.
좌의정 김상헌이 열여덟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안익신(安益信)과 권대용(權大用) 등이 시세를 틈타 시골로 내려가 흉악한 무리들을 속여서 꾀어 냈는데, 그들의 꾀가 이루어졌더라면 재앙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석룡(李碩龍) 등이 몸을 잊고 고변하였고, 감사와 수령이 정성을 다해 토포(討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국가를 다시 안정시켰으니, 그 공이 중차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고변한 자와 감사를 녹훈(錄勳)하여 그 충성을 포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라."
하였는데, 대신이 포상하고 녹훈하는 법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또 홍청 감사 임담(林墰)에게 명하여 올라와 훈공을 감정하여 등급을 매기라고 하자, 임담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답하기를,
"황지(潢池)의 흉악한 죄인들을 경이 신속하게 소탕했으므로 경들의 공로를 내가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안심하고 감정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뒤에 양사가 다투어 논집하였으므로 마침내 훈공을 감정하는 일을 중지하고, 단지 이석룡을 영국 훈적(寧國勳籍)의 끝에 부록(附錄)하였다.
동지 이기조(李基祚), 승지 남선(南銑), 역관 한원(韓瑗)·한지언(韓之彦), 군관 이정윤(李廷尹) 등을 한 자급씩 올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번에 사신들이 잘 주선한 덕분에 보미(補米)를 감량(減量)받아 백성들이 크게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 당시의 사신·서장관·원역(員役) 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를 경중에 따라 논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기조와 남선은 모두 자급이 올랐으나 서장관 이응시는 죄를 얻고 있어서 혼자서만 끼이지 못하였다.
5월 18일 계해
황해도 해주(海州)·황주(黃州)·평산(平山)·봉산(鳳山) 등 지역에 우박이 내렸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평안도 정주(定州)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가옥이 쓰러지는가 하면 많은 우박이 쏟아졌고, 삭주(朔州)·영변(寧邊)·운산(雲山)·희천(熙川) 등 고을에 태풍이 불고 우박이 내렸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5월 20일 을축
홍청도 공주(公州) 지역의 민가에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 둘에 귀가 둘이고 눈이 넷이었다.
5월 21일 병인
경상도 대구(大丘) 지역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삼성(三省) 죄인 김진(金搢)의 종 후복(厚福)이 감옥에서 도망쳤습니다. 해당 도사(都事)의 추고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당시에 법의 기강이 해이해져 왕옥(王獄)도 이처럼 엄숙하지 않았다.
전 홍청 병사 배시량(裵時亮)을 금부에 내렸다가 곧 이어 삭직시켜 내보냈다. 처음에 상이, 시량이 변란에 임해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고 중한 형벌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임담이 조사하여 아뢰면서 "시량이 영을 듣고 3일 만에 군사를 거느리고 전남도의 경계에까지 이르므로써 길에 연한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의지할 바가 있게 되었고, 산골짜기에 분산되어 있던 적도들이 감히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이는 모두 시량의 힘이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상이 단지 삭직만 시키고 석방하라고 명한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국청의 체면은 지극히 엄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죄인 정감(鄭瑊)을 가형(加刑)할 때 지의금 홍진도(洪振道)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외막(外幕)에 나가 있으면서 승전(承傳)이 있게 하려고 사사로이 만나 대화하였으니, 크게 조정의 체면을 잃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5월 22일 정묘
유성이 미성(尾星) 위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다.
좌의정 김상헌이 병으로 물러가려면서 면직을 요청한 사직 단자가 모두 20회에 이르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상헌이 상차하여 시사(時事)를 진달하면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그 차자에,
"오늘날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을 보건대, 대체로 모두가 ‘하늘이 변괴를 내려 경고하며 사람들이 원망하고 고달파하고 있는 것이 두렵고, 군비(軍備)는 방치되고 경비는 고갈된 것이 염려스럽고, 기강이 문란하고 풍속이 무너진 것이 놀랍다.’는 것들입니다. 이 모두가 절박한 근심거리로서 구제하기 어려운 병이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은 이보다 급하게 걱정해야 할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채납한다면 나라를 보전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수고한 나머지 재액(災厄)이 한꺼번에 몰리는 운세를 만났는데, 궁궐에서 변고가 생겨나자 성심(聖心)을 상한 결과 처음에는 한 사람을 노여워하더니 결국에는 온 조정을 의심하게끔 되셨습니다. 대신은 전하의 복심(腹心)인데 전하께서는 그들을 의심하고, 대간은 전하의 이목(耳目)인데 전하께서는 그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가 복심을 내버리고 이목을 막고서 윗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니, 혈맥이 안으로 막히고 음사(陰邪)가 밖에서 침범하여 사지(四肢)를 움직이려 해도 사지가 말을 듣지 않고 음사를 물리치려 해도 음사가 도리어 왕성해지는 형편입니다. 이 지경이 된 뒤에는 유부(兪跗)021) 와 편작(扁鵲)022) 의 묘기가 있다 하더라도 바라보고는 달아날 뿐 다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말한 국가를 보전시킬 수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강씨(姜氏)는 공손치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해 군부에게 죄를 얻었으니 천하에 용납되지 못할 사람입니다. 이와는 달리 대신과 대간은 모두 전하가 배양한 신임하는 자들로서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지만 정리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말을 주고받을 때에 잘못 저지른 실수가 많을지라도 그 마음을 캐 본다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차분히 전하를 등지고 다른 사람에게 향할 리가 있겠습니까.
설령 강씨가 지금 살아 있다 하더라도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은 이미 죽은 몸으로 싸늘하게 식어 재가 되었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군자는 의(義)에 밝으니 처음부터 사사로이 비호할 이치가 없고, 소인은 이익되는 것을 잘 아니 뒷날을 바라는 싹을 끊었을 것이니, 그를 위해 보복할 리는 만무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이런 전교를 내리지 마시고 여러 신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백발이 된 신의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데, 어찌 감히 간사한 마음을 품고 성명(聖明)을 속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결단코 지금부터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펴 해와 달같은 밝음을 회복하고, 하늘과 땅같은 도량을 넓히고, 천둥과 번개같은 위엄을 거두소서. 그리하여 친히 덕음(德音)을 발하시어 원근에 밝게 유고하시고, 전후로 말을 하다가 죄를 얻은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시며 기왕의 잘못들을 사면해 줌으로써 앞으로 공을 세우게 하소서.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 기뻐할 것이고 나라의 형세도 영원히 공고해질 것입니다.
오늘날 선비의 기개가 꺾인 것이 꼭 겨울을 지낸 초목과 같습니다. 크게 온화하고 따스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어 잘 자라게 하는 방도를 극진하게 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쉽게 성취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선비의 기개가 떨쳐지느냐의 여부에 따라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가 결정되니,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삼가 옛 인군들을 보건대, 학문에 마음을 두고 치세(治世)의 도리를 강론하여 상벌을 내리는 것이 모두 하나같이 중정(中正)하게 하고자 하였으면서도, 실제 상황에 부닥쳐 변고를 만나기라도 하면 감정의 부림을 받은 나머지 한 시대에 후회를 남기고 후세의 본보기가 되는 예가 많았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이른바 학문을 강한다는 것이 단지 글만 익히는 것으로 끝나고 도(道)를 논한다는 것이 심상한 말단의 일들에 지나지 않아 본원(本原)을 함양하는 일에는 힘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대로 이 도를 밝힌다면 마음의 근원이 빈 거울이나 명경지수처럼 맑고 깨끗해져 옳지 않은 말이 마음을 미혹하지 못하여 발해 나오는 감정이 모두 중정해질 것입니다. 어찌 한 가지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겠습니까.
전하가 즉위한 이래로 경연에 부지런히 납시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니, 진전되고 도움되는 힘을 얻은 것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전하께서는 날로 교만해지기만 하고 신하는 날로 낮아져 위아래가 믿지 못한 나머지 인심이 뿔뿔이 흩어져 다시 해볼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전하가 평소 기약한 바이겠습니까. 전하께서 고요히 생각해 보신다면 반드시 마음속으로 개연히 여기며 탄식하게 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세도(世道)가 날로 타락되는 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지 마시고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실추되려는 하늘의 명을 맞아서 잇도록 하소서. 옛날 위 무공(衛武公)은 나이 90세에도 억(抑)이란 경계하는 시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외우도록 함으로써 깨우쳐 도움받는 밑바탕으로 삼았는데, 이는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한(漢)나라의 신하 가의(賈誼)는 늘 시무(時務)를 안다고 자임하였는데, 그가 정성을 쏟아 논의드린 것은 바로 태자를 보익(輔翼)하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지금 훌륭한 원량(元良)을 얻어 온 백성이 목을 빼고 기대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덕을 확충시키고 행동을 닦게 할 때입니다. 기회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중하겠습니까. 현재의 궁료(宮僚) 중에도 반드시 많은 명류(名流)와 어진 선비들이 많아 각기 맡은 직책을 잘 수행하겠지만, 다시 방정(方正)하고 학문에 독실하여 명성과 실상이 이미 드러난 사람을 널리 뽑되, 과목(科目)의 한정을 두지 말고 별도로 벼슬 이름을 붙여 세자의 공부를 위해 출입시킨다면,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클 것입니다."
하고, 이어 면직시켜 공사(公私)의 의리를 온전히 해 주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차자로 아뢴 것들은 모두가 군주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마음에 새기고 채납하여 시행하겠다.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널리 뽑아야 한다고 한 한 조목은 이조가 적합한 선비를 정밀히 가려 그 임무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벼슬 이름은 대략 송(宋)나라의 옛일을 모방하여 당상은 찬선(贊善), 당하는 익선(翊善), 참하(參下)023) 는 자의(咨議)로 칭하고, 강학할 때에는 찬선을 보덕(輔德)의 위로, 익선은 문학(文學)의 다음으로, 자의는 설서(說書)의 아래로 차례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3일 무진
유성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여성(女星) 위로 들어갔다.
서산(瑞山) 사람 조시응(趙時應)이 정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기를,
"서산에 사는 유학(幼學) 국성유(鞠聖兪)와 그의 아들 국진호(鞠震虎)가 홍주(洪州)와 덕산(德山) 등지의 한량 및 서얼 10여 명과 역모를 함께 모의하여 3월 27일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그때 경성의 숙위(宿衛)가 매우 삼엄하다는 소식을 들은 까닭에 날짜를 물려서 가을을 기다렸다 다시 거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니, 정원이 입계하였다. 상이 대신과 금부 당상 및 양사의 장관들을 명초(命招)하여 대궐 뜰에서 추국하게 하고, 금부 도사를 보내 국성유 등을 체포케 하는 한편, 별도로 중사(中使) 1인을 보내 그 집안의 문서를 수색해 가져오도록 하였다.
5월 25일 경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이기조(李基祚)를 부제학으로, 김원립(金元立)을 사간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삼고, 고 대사간 기대승(奇大升)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대승은 선묘조(宣廟朝)의 대유(大儒)로 세상에서 고봉 선생(高峰先生)이라고 일컬었다.
5월 26일 신미
남선(南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27일 임신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방성(房星) 위로 들어갔다.
평안도 철산(鐵山)·가산(嘉山)·선천(宣川)·구성(龜城)·정주(定州)·순천(順川)·태천(泰川)·희천(熙川)·증산(甑山)·자산(慈山)·성천(成川) 등 11개 고을에 해충이 발생해 곡식을 해쳤다.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의 백성 박망남(朴望男)의 처가 한꺼번에 딸 셋을 낳아 감사가 보고하였는데, 상이 쌀과 고기를 넉넉히 주라고 명하였다.
5월 28일 계유
금성(金星)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국성유(鞠聖兪) 등 11인을 친국하였다. 성유가 공초(供招)하기를,
"조시응(趙時應)과 시응의 아비 조후열(趙後說), 시응의 숙부 전 병사(兵使) 조후량(趙後亮)과 한동네에 살고 있는데, 매번 후량 등에게 전답을 빼앗겼으므로 이로 인해 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하는 태도에 조금도 굽히는 점이 없어 좌우가 모두 시응의 무고라고 의심하였다. 상이 김자점 등에게 11명의 죄수를 문초하게 하였는데, 대답이 모두 똑같았다. 상이 국성유 등과 시응을 면질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시응이 말이 궁해지자, 성유를 윽박지르며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3백여 명을 얻어 왜인 복장을 착용케 한 뒤 곧바로 경성을 범하면 온나라가 곧 와해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틀리는가?"
하니, 성유가 말하기를,
"네가 무고하여 공을 차지하려고 이토록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여 전하를 속이려 드느냐."
하였다. 상이 마음속으로 시응의 거짓을 알고서, 명하여 시응에게 묻게 하기를,
"성유가 왜인 복장을 하고서 동래(東萊)에서부터 쳐들어 오려 하였는가, 아니면 내륙에서부터 일어나려 하였는가?"
하니, 시응이 말하기를,
"통제사에게 한 장의 패문(牌文)을 차용하려 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미 무고임을 알고는 대신과 추관(推官) 등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하문하기를,
"경들이 보기에는 옥정(獄情)이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성명께서 직접 국문에 참여하셨으니 반드시 진위 여부를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으나, 이치상으로 보건대 조후열은 벼슬이 부사(府使)까지 이르렀고 후량은 곤수까지 지냈고 보면 한 고을의 큰 집안입니다. 성유 등이 본시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고 칼로 겁주었을 리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자점이 아뢰기를,
"시응의 고변은 후량이 시킨 것입니다. 후량이 직질이 높은 무신으로서 어찌 감히 낭설로 고변하였겠습니까. 또 듣건대 후량이 외간에 많이 말을 하기를 ‘국성유가 처음에는 3월에 대궐을 침범하려 했는데, 어떤 조관(朝官) 한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글을 보내 만류하기를 「도성에 지금 막 계엄이 발생했다.」고 하였으므로 중지하고 거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중사(中使)가 수색해 온 성유 집안의 문서 중에 과연 이 편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김류가 반박해 아뢰기를,
"조종조 이래로 익명서로 옥사를 결단한 적이 없었으니, 지금 그 편지가 있고 없는 것은 물을 성질이 못 됩니다."
하였다. 남이웅(南以雄) 이하 모두가 옥사가 의심스럽다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모두 대답하지 않고, 이어 하교하기를,
"죄인 김정일(金廷一)이 스스로 말하기를 ‘정월부터 4월까지 감포관(監捕官)으로 섬의 어량(漁梁)에서 고기잡이하였다.’ 했는데, 조시응은 ‘집에 있으면서 역모를 꾀했다.’고 했다. 이 일을 조사한다면 이 옥사를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니, 본부의 낭청을 가려 보내 조사토록 하라."
하였다. 도사 이시억(李時億)이 떠나려 할 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히 하라고 당부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시억이 후량의 간계에 속을까 염려해서였다. 이어 국성유 등을 수금하고 대기하였다. 시억이 되돌아와 보고했는데 정일이 고기잡이를 감독한 것이 과연 사실이었으므로 시응이 무고한 자취가 마침내 드러났다. 이에 상이 명하여 성유 등 11인을 석방하고 시응의 무고한 죄상을 국문케 하였는데, 시응이 과연 혐의를 인해 꾸며내 무고했음을 자복하면서 그의 숙부 후량을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상이 시응의 말은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문에 부치도록 명하여 시응만을 목베었다. 후일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후량을 고신(栲訊)하자, 최명길(崔鳴吉)과 이시백(李時白)이 모두 상차하여 극력 구원하니, 상이 먼 지역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5월 29일 갑술
황해도의 해주(海州)·서흥(瑞興)·황주(黃州) 세 고을에 황충이 발생했다.
5월 30일 을해
전남도 남원(南原)·능주(綾州)·장흥(長興)·보성(寶城)·낙안(樂安)·흥양(興陽)·남평(南平) 등 노령(蘆嶺) 이하의 여러 고을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가옥이 쓰러졌으며, 5일 동안 큰비가 내려 벼와 곡식이 모두 상하였다고 감사가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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