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4월

싸라리리 2026. 1. 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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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축

상이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을 명초하여 하문하기를,
"적도(賊徒)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소신이 이들 적도를 근심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해 공청도의 토적(土賊)들은 보통 좀도적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도적떼가 들어오면 그 집은 쑥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이 절도사 조후량(趙後亮)으로 하여금 극력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전후 사로잡힌 자가 1백 30여 명이었습니다. 이들 적도는 아마 그 무리일 것입니다. 이 적도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전주(全州)를 먼저 깨뜨릴 목적으로 이미 군사를 일으킨 흔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백∼2백 명으로 전주를 격파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조 이몽학(李夢鶴)의 반란 때에도 초기에는 마치 아이들 장난과 같았는데 오히려 난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의 적도들은 포(砲)를 소지한 자가 태반인데, 전주가 웅부(雄府)라고는 하지만 어찌 격파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공주(公州)의 초군(哨軍)도 태반이 적도에게 붙었다 하는데, 어찌 너무도 염려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갱생(李更生)이 나주(羅州)를 다스리고 있을 때 어떤 도적이 기치(旗幟) 한 상자를 도적질해 갔는데, 이는 좀도둑의 짓이 아닙니다.
또 신의 군관이 올 2월에 신창(新昌)과 덕산(德山)의 경계를 지나다가 밤에 미륵당(彌勒堂) 다리 옆에 도착하였을 때 인마(人馬)의 소리를 듣고 몸을 숨겨 엿보았더니, 적도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진형(陣形)을 갖추고 좌정한 뒤 전령(傳令)을 불러 모으고, 또 그들 무리 중에 점을 잘 치는 자를 시켜 점을 쳐보게 하더랍니다. 이때 점을 친 자가 말하기를 ‘이 주위에서 분명히 두 사람이 엿듣고 있으니, 찾아내 죽이도록 하라.’ 하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앞으로 큰일을 일으킬 것인데, 어찌 이렇듯 소소하게 살육하는 짓을 행하겠는가.’ 하고 군사를 이끌고 떠났는데, 소리로 보아 죽산(竹山)으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년에 있었던 충주(忠州)의 옥사(獄事) 때 공청 병사(公淸兵使)가 사람을 시켜 몰래 엿듣게 하였더니, 적도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경상도와 전라도의 친구들이 어찌해서 구원하러 오지 않을까.’ 하였답니다. 이로써 추측해 본다면 삼남의 적도들이 많이들 결탁한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기마병을 출동시켜 공주(公州)의 직로(直路) 11개 참(站)에 나누어 파견함으로써 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충주(忠州)의 영장(營將)에게도 앞서 영을 전해 기찰을 강화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경기는 양주(楊州)로 하여금 동로(東路)를 기찰토록 하고, 장단(長湍)으로 하여금 서로(西路)를 기찰토록 하고, 수원(水原)과 죽산(竹山)으로 하여금 전라도와 경상도 두 길을 기찰토록 하는 한편, 각 곳의 관진(關津)에도 모두 망보는 자를 두어 불로 서로 신호하게 하되 남산(南山)은 수원과 신호하고 아차산(峩嵯山)은 양주와 신호하게 하면서 관군을 나누어 배치해서 서로 신호하여 응하게 했으면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마병을 급히 출동시켜 보내라. 양남(兩南)의 관진은 모두 기찰토록 하되 서로(西路)는 우선 놔두어라."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병가(兵家)에 동쪽을 치는 척하면서 서쪽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으니, 서쪽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군관 중에서 말을 가진 자로 하여금 기찰토록 하라."
하였다.

 

김자점(金自點)과 구인후(具仁垕)가 청대(請對)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를 문경(聞慶)으로 와서 머무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장수를 임명하여 가서 진압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전라 병사를 서울과 가까운 지방으로 조금 나오게 하고, 외방의 어영군도 모두 서울로 집결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총융사를 호남과 가까운 경기 고을로 나가 주둔하게 하여 위아래에서 접응하도록 했으면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자, 두 사람이 모두 윤당(允當)하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총융사 이시백을 불러들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신의 아병(牙兵)이 5백여 인이고 또 군영의 포수(砲手)를 불러 모으면 1천여 인은 될 것인데, 얼마나 거느리고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군대를 출동시키게 되었는데, 군량 조달이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뱃길로 운송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단기(單騎)로 달려 가고 군졸들은 약속 날짜에 진위(振威)로 모이게 하며, 편의대로 이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영남에 보낼 장수를 의논해 정해야 합니다."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권정길(權井吉)이 적합한데 제가 이번에 데리고 갑니다. 김체건(金體乾)도 적합합니다만, 듣건대 병을 앓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인후가 아뢰기를,
"최만득(崔晩得)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장사입니다만, 대임(大任)을 맡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인후를 불러 이르기를,
"누가 장수에 적합한지 경이 한번 생각해 보라."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김운해(金運海)가 어떻겠습니까?"
하자, 자점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명성이나 지위가 본래 미약해서 제대로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오직 변사기(邊士紀)가 이 책임을 감당할 만한데, 지금 훈국 중군(訓局中軍)이라서 지방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끝내 적임자를 얻지 못한 채 파하였는데, 나가려 할 때 상이 인후에게 이르기를,
"이 적도들의 정상이 염려스럽기 그지없으니, 경은 동영(東營)010)  에 와 머물면서 다른 변고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충청 감사의 장계가 이틀이나 이르지 않자, 조정이 적도들의 세력이 이미 치성하여 길이 끊긴 것으로 생각하고 근심하였는데, 이날 늦게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탁(柳濯)은 이산(尼山)에서 체포되고 권대용(權大用)은 전주(全州)에서 체포되었는데, 장계 중에 적도가 이미 고산현(高山縣) 마흘치(磨屹峙)에 모여 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장수의 임명을 더욱 급히 하였다. 그런데 적도의 괴수 안익신(安益信)이 겨우 50여 인을 거느리고 먼저 약속 지점에 왔다가 유탁이 중로에서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흩어져 떠났다고 하였다.

 

총융사 이시백이 군사 5백 인을 거느리고 경기 진위현(振威縣)에 출진(出鎭)하자, 내구마 1필을 하사하고 보냈다.

 

홍전(洪瑑)을 방어사로 삼아 경상도 문경현(聞慶縣)에 가서 진압하게 하였는데, 전마(戰馬) 1필과 갑옷과 투구 한 벌을 하사하였다. 홍전이 활과 말에 능하여 조정에서 그를 무재(武才)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등용한 것인데, 사람이 가볍고 조급하며 기국(器局)이 없었다.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 전라 병사 박경지(朴敬祉)와 경상 병사 양응함(梁應涵)에게 유시하여 각기 군관과 별장을 거느리고 중로에 진주(進駐)해 있다가 기회를 보아 적도를 토벌하게 하였다. 또 선전관을 보내 공청 병사(公淸兵使) 배시량(裵時亮)에게 유시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적의 소굴을 섬멸하게 하였다. 또 전라 감사 윤명은(尹鳴殷)과 경상 좌병사 이탄(李坦)에게 하유하여 더욱 엄히 기찰하게 하였다.

 

밤에 또 선전관을 보내 공청 감사 임담, 병사 배시량(裵時亮), 경상도 방어사 홍전, 전라 감사 윤명은(尹鳴殷), 병사 김응해(金應海)에게 유시하여 각기 도내의 군사를 출동시켜 앞으로 나아와 급히 습격하여 잡도록 하되, 경상도와 전라도는 가까운 고을의 군사들만 출동시키도록 하였다.

 

선전관을 보내 경기 감사 한흥일(韓興一)에게 유시하여 경기의 어영군을 출동시켜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조익(趙翼)을 이조 판서로 삼았는데, 조익이 아버지가 늙어 고향에 돌아가 봉양해야 한다면서 생전의 봉양을 마치기를 간절히 청하니, 마침내 임명하지 않았다.

 

4월 2일 무인

비국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은 동로(東路)의 요충에 해당하는 곳인 동시에 병장기와 군량을 저장해 둔 곳입니다.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 이시방(李時昉)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보내 소속 아병(牙兵)을 나누어 배속시키고 본주 방어사 홍진문(洪振文)과 함께 연합하여 변란에 대비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남한 산성의 미곡 2백 석과 강화의 미곡 5백 석을 이시백(李時白)의 군대에 운송하였다.

 

상이 비국 당상과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강명(剛明)하며 재략이 있는 자를 가려 어사(御史)라고 칭한 뒤 독전케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얻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총신(摠臣)011)  이 이미 떠났으나 군세(軍勢)가 미약하니, 다시 정예를 뽑아 충실하게 해 주고 싶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방(榜)을 내걸어 불러 모은다면 반드시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험삼아 행하여 인심을 살피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과거 이몽학(李夢鶴)이 갑자기 난을 일으켜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이 불의에 포박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관찰사는 이정암(李廷馣)이었는데, 병사 이시언(李時言)과 수사 최호(崔浩) 및 편장(褊將) 박명현(朴命賢) 모두 장사였습니다. 그때 명현이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그들의 형세를 꺾었기 때문에 바로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오늘날 적도의 세력이 몽학과는 다른데 또 제압할 만한 장수가 없으니, 큰 걱정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장재(將才)를 미리 선발하는 동시에 군사를 가려 각각 1백∼2백 인씩 거느리고 도성에 머물러 대기하게 했다가 차츰 형세를 보아가며 차례로 내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적이 만일 산골짜기로부터 생각지도 않고 있던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충주와 청주 사이에 장수 한 사람을 배치하여 변란에 대비케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건대 그럴 듯한 견해이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상의 앞에서 그 사람을 선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유철이 아뢰기를,
"민진익(閔震益)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망령된 사람입니다. 훈련 도감의 장관(將官) 중에서 유찬선(劉纘先) 같은 자는 보낼 만합니다."
하자, 자점이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장관은 밖에 내보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이직(李㮨)이 재능이 있습니다."
하니, 시방이 아뢰기를,
"어영(御營)의 중군(中軍)입니다."
하였는데, 끝내는 김운해(金運海)를 보냈다.

 

이때 적도가 거의 모두 체포되고 나머지 무리들도 이미 오래 전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아직 모르고 크게 걱정하였다. 그리고 상이 강씨(姜氏)의 변고 이래로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크게 의심한 나머지 적당이 도성 안에 굳게 결탁하고 있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팔도의 군사를 동원시키고 군사를 모아 들어와 호위하게까지 한 것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에서 상소하기를,
"신은 고향 마을에 묻혀 생을 마치는 것만으로도 분수에 흡족합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이렇게 새로운 명을 내리시면서 소명(召命)을 내리시니, 감격스럽고 놀라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조정에 선 지 50여 년 동안에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티끌만큼의 보답도 못한 채 죄와 잘못만 산처럼 쌓였는데, 너그럽게 용서해 주심을 입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쏟아 갚을 수만 있다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신은 본시 노둔한 자질로 나이가 팔순에 가깝습니다. 여러 차례의 환란을 겪으며 구사 일생하는 동안 정력이 이미 소진되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마비 상태이고 온갖 질병으로 시달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입니다. 어떻게 정승에 임명하는 명이 형편없는 신에게 내려질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신의 한 몸에만 관계되는 일입니다.
신이 전에 심양(瀋陽)에서 돌아올 때 가만히 듣건대 저들이 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오늘 놓아 보내는 것은 조선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종신토록 폐고(廢錮)시켜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근년에 한 대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심양에 들어갔을 때 심양 사람들이 힐책하기를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정승이 되어 여기에 왔는가.’ 하고는 마침내 해를 넘기도록 잡아 가두고 온갖 곤욕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이 저들에게 미움받는 것은 전날의 대신에 비해 백배 정도만 되는 것이 아닌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만일 신이 본직에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반드시 짐승처럼 날뛰며 잔뜩 노기를 품고서 조정을 책문할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른다면 신의 몸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으나 나라가 얼마나 치욕을 당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늙고 병들고 용렬한 정황을 살피시고 거듭 저들과 우리와의 형세를 생각하시어 속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때 힐책을 당한 사람은 모두 용서받았다. 경은 너무 염려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오늘날의 어려움을 구제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 정부 문서에 모두 순치(順治)012)   연호를 사용하면서 순치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은 정원에서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유독 상헌의 소차와 정사(呈辭)에는 간지(幹枝)만을 썼으나, 정원이 대신의 소장이라는 이유로 감히 물리치지 못했고 상도 불문에 붙였다.

 

4월 3일 기묘

비국이 적도에게 격문을 띄웠다.
"이번에 적당이 감히 흉계를 꾸며 군사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는 의당 용서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협박에 못 이겨 따른 부류들이나 혹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린 나머지 따른 부류들이나 혹 강제로 동원된 부류들이 지금 만약 생각을 바꾸어 스스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면, 경중에 따라 정해진 등급대로 상을 내릴 것이다.
괴수의 목을 베어 군전(軍前)에 바칠 경우,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그 자녀들까지 면천(免賤)시키고 당상의 실직(實職)을 제수할 것이며, 양인(良人)은 2품의 실직이나 쌀 1백 석이나 면포 1천 필 중 소원대로 상을 내릴 것이다. 무리를 잘 타일러 같이 귀순하는 경우, 2명 이상이면 우선 죽음을 면제해 주고, 사천은 면천해 주고 양인은 쌀 5섬이나 면포 50필을 상으로 줄 것이며, 3명 이상이면 각기 한 등급씩 높여 줄 것이다. 혹 탈출하여 도망쳐 돌아와 역적의 이름을 면한 자는 죽음을 면제해 줄 것이다. 적도에 포함된 승도(僧徒)에게도 똑같이 시행할 것이다. 자녀를 면천해 주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그가 스스로 원하는 대로 형제 자매의 친족 중에서도 허락해 줄 것이다. 적도의 수급을 베어 오는 자는 타일러 귀순시킨 자와 동일하게 상을 내릴 것이다.
앞으로 서북(西北)의 날랜 군사들이 며칠 안에 다 모여들 것이고 도성의 정예 포수(砲手)들이 구름같이 출정할 것이니, 보잘것없는 좀도둑들이 곧바로 엄청난 주륙(誅戮)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닯게 생각하는 것은 협박에 못 이겨 따른 무리도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리는 화를 면하기 어려우리라는 점이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 귀순한다면 어찌 죽음을 면하고 생을 온전히 누리는 것뿐이겠는가. 작상(爵賞)이 자연 등급대로 있게 될 것인데, 역순(逆順)에 따라 화복(禍福)이 정해질 것이다.
너희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고 천리(天理)가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역도가 되어 집안을 멸망시키는 것과 귀화하여 몸을 보전하는 그 사이의 길흉과 이해에 대해서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미망에 빠져 천벌을 재촉하지 말고 각자 힘써 노력하여 충효스런 사람이 되는 길을 잃지 말라."

 

4월 4일 경진

헌부가 아뢰기를,
"역당이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라의 큰 변고이니, 곤수가 된 자로서는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공청 병사 배시량(裵時亮)은 처음에 감사의 분부에 따라 군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간 뒤로 매번 기회를 보아 진격해 섬멸하겠다고 핑계대면서 군관의 무리만 보내 적도가 모인 곳을 엿보아 탐지케 하고 바로 진격하지 않았으며, 적도의 잔당 80여 명이 모여 있는 곳도 즉시 포위하여 체포하지 못한 채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기회를 잃고 적도를 놓아준 죄가 놀랍기 그지없으니, 잡아다 추국하여 죄를 정하소서.
전주 부윤 정세규(鄭世規)는 일단 토포(討捕)하는 책임을 겸한 이상 역적이 군대를 동원한 날을 당하여 책략을 세워 막아 끊는 것이 곧 그의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변고를 들은 뒤로 한 번도 치계하지 않았고, 적당이 이미 고산(高山)과 금산(錦山) 경내에 들어왔는데도 본부에서 변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하게 시기를 놓침으로써 기회를 그르치게 한 정상이 놀랍기 그지없으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를 논계하니, 모두에게 답하기를,
"적도가 아직 체포되지 않았으니, 우선 놔두어라. 정세규는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잡혀 오는 적도들이 줄을 이었는데, 모두가 김이나 매는 농사꾼들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잡혀와 국청에서 신문을 받을 때에도 혹 형벌을 받기도 전에 사실을 자복(自服)하는가 하면 스스로 말하기를 "실제로 적도를 따른 일은 없으나 임경업(林慶業)이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전갈만은 참여해 들었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역모에 참여해 들었다는 말이 승복(承服)하는 것이 되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수레에 실려 나가면서도 사형장으로 가는 것인 줄을 몰라 옥졸에게 "내가 어느 지역으로 귀양가는가."라고 하기도 하여 듣는 자가 가엾게 여겼다.
그 중에 예조 판서 정태화(鄭太和) 형제와 밀양 부사(密陽府使) 정태제(鄭泰齊)를 끌어대는 자도 있었는데, 상이 태화 형제는 불문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태제는 붙잡혀 왔으나 그런 사실이 없자 그대로 감옥에 구금시켰는데, 옥사(獄事)가 결말이 날 때 상이 태제를 완전히 석방시키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며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태제는 강석기(姜碩期)013)  의 사위였다.
이 옥사에서 사형을 받은 자는 안익신(安益信) 등 46명이고 장형(杖刑)을 받다 죽은 자가 12명이고 전라도에서 처형당한 자는 11명이고 공청도에서 처형당한 자는 22명이었다.

 

상이 비국의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적정(賊情)을 묻는 동시에 전남 감사 윤명은(尹鳴殷)과 공청 병사 배시량(裵時亮)의 적도를 놓아주고 기회를 잃은 죄를 언급하면서 대신에게 후임자를 가리라고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원두표(元斗杓)를 천거하면서 아뢰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호남에 있으면서 이미 위명이 드러났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 사람은 상(喪)을 치르느라 아직 안색이 초췌한데다 호남을 안찰(按察)한 것이 이제 세 차례입니다. 그런데 또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이시만(李時萬)을 천거하였는데, 시만은 당하관이었으나 평소 자점에게 빌붙었기 때문에 천거한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이 사람은 일찍이 수령을 지냈는데,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였다. 자점이 또 아뢰기를,
"홍전이 병사(兵事)에 익숙하고 정유성(鄭維城)도 요긴한 사람입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완(李浣)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막 체임되어 한산(韓山)에 어머니를 문안하러 가 있는데, 이 사람에게 병사를 맡길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강명(剛明)함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다."
하였다. 이완은 사람됨이 강퍅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으며 형장(刑杖)을 가혹하게 사용하였는데, 상은 그를 강명하다고 하여 임용하였다. 자점과 두표 등이 아뢰기를,
"현재 적도에 대한 보고가 점차 완화되고 있는데 경기의 어영군이 모두 들어와 호위하고 있고, 공청도의 어영군도 조만간 이를 것인데, 경창(京倉)의 군량으로는 지탱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농사철을 만나 때를 잃을 걱정도 있으니, 공청도에서 징발한 병사들을 파해 돌려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자점이 아뢰기를,
"요즈음 붙잡혀 온 적도는 다시 국문할 만한 정상도 없으니,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병장기를 들고 싸우러 나가다가 관인(官人)에게 붙잡혔다고는 하지만 죄없이 길가던 사람이 공훈을 바라는 자에게 붙잡혀 횡액을 당한 경우가 없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경들은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 5일 신사

상이 하교하였다.
"전남 감사 윤명은은 성품이 혼미하고 지혜가 모자라 적도들이 일어나게 하였고, 난리를 만나서는 변란을 대처하는 것도 보잘것이 없었다. 우선 먼저 파직시킨 뒤 추고하라. 공청 병사 배시량은 적이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끝내 급히 공격하지 않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적도에 대해서도 감히 한 걸음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찌 이런 곤수가 있단 말인가. 그 죄야말로 군율(軍律)을 범한 것이니, 붙잡아 국문해 처치하도록 하라."

 

좌부승지 정유성(鄭維城)을 전남 감사로, 이완을 공청 병사로 삼았다.

 

예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적도의 입에서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이유로 궐문 밖에서 대죄하였는데, 상이 듣고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총융사 이시백(李時白)에게 군사를 파하라고 유시하였다.

 

남한 산성의 파수군(把守軍)을 파하였다.

 

도성에 들어와 지키던 경기 어영군을 파하였다.

 

상이 양호(兩湖)의 감사에게 하유하였다.
"적도 중 사족(士族) 출신은 경옥(京獄)으로 붙잡아 올리고 기타 천민(賤民)은 본도에서 처분하되, 십분 자세히 살펴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리는 근심이 없게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에는 전주 부윤 정세규(鄭世規)가 본주의 계엄(戒嚴)에 급한 나머지 미처 이웃 고을의 적도를 차단할 여유가 없었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파직하여 추고할 것만 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적이 둔을 쳤던 마흘동(磨屹洞)은 바로 본주의 경내(境內)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제때에 포위하여 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파직하고 추고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역당이 도망쳐 숨을 즈음에 제대로 책략을 펴서 뒤따라 체포하였다면 반드시 적도의 수급 하나도 못 벨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산 현감(高山縣監) 홍종운(洪鍾韻)과 용담 현감(龍潭縣監) 이시필(李時苾)은 한결같이 두려워 몸을 움츠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 일을 논계하니, 모두에게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세규는 나가 공격하기가 어려웠을 듯하니, 다시 더욱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헌이 다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자세히 듣건대 국서(國書) 중에 ‘민성휘(閔聖徽) 등 네 사람은 세자가 등용시켜 줄 것을 원하기 때문에 우선 요청을 들어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서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합니다. 이른바 그 나머지 사람들 속에 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말로 볼 때 지극히 분명합니다. 지금 만일 똑같이 거두어 쓴다면 뒷날 책임을 추궁하면서 반드시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한번 나아간다 하더라도 유익한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국가에 욕을 끼치는 것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전후의 문서들을 살피게 하고 겸하여 변란을 겪은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소서. 그리하여 속히 신의 본직을 체직토록 명하시고 아울러 새로 내린 가자(加資)의 명도 거두시어 국가의 체면을 높이고 보잘것없는 신을 온전하게 해주소서."
하였다. 상이 그 상소를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살펴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칙서 중에 ‘파출(罷黜)된 관원인 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이명한(李明漢)·민성휘(閔聖徽) 등은 세자가 은전을 빌었기 때문에 우선 그 청을 따라주나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서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만, 최명길과 김상헌이 구금되었다가 풀려 돌아올 때 애당초 파관(罷官)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지난번 칙사가 왔을 때 영상 김류와 우상 이경석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정명수(鄭命壽)에게 최명길과 김상헌의 수용(收用) 여부를 묻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최명길 등에게 정승을 제수한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다만 상국에 봉사(奉使)하게는 하지 말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두세 차례 왕복했어도 대답은 정녕 그대로였습니다.
지금 좌상이 이렇듯 사직하면서 변란을 겪은 대신에게 물어보라는 말까지 하였기에, 신들이 사람을 보내 최명길에게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한 번 호되게 덴 충격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감히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이 좌상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거듭 상량해 보건대 김상헌이 사직을 청하는 것이 절박한 정황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난처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신(相臣)의 진퇴는 감히 가볍게 의논드릴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아뢴 말이 옳다."
하고,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4월 6일 임오

들어와 호위하던 호위청(扈衛廳) 군관을 파하였다. 당초 계해년 이후로 네 사람의 대장(大將)을 두고 훈척(勳戚) 중신으로 겸직케 하였는데, 모두 소속된 군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정하게 녹봉을 받는 자는 번(番)을 나누어 호위청에 직숙(直宿)하게 하고, 녹봉이 없는 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면서 집에서 변란에 대비케 하는 동시에 때때로 간혹 드나들며 못된 변괴를 기찰하게도 하였다. 이때 김류·김자점·구인후(具仁垕)·이시백(李時白)을 4장(四將)이라 하였는데, 변란 소식을 들은 초기에 모두 소속 군관을 대궐로 집결시켰다가 이때에 이르러 계청하여 해산시켜 보낸 것이다.

 

맹인(盲人) 박시현(朴時顯)이라는 자가 상변(上變)하여 이천 현감(伊川縣監) 이유식(李有植)이 모역한 죄상을 알렸다. 승지 이시해(李時楷)와 이래(李䅘) 등이 정원으로 불러들여 은밀히 그 상황을 묻자, 시현이 말하기를,
"오늘 두 사람이 와서 점을 치겠다고 청하기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천 현감 이유식이 보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점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을미생(乙未生)인 사람의 명운(命運)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달과 날짜와 생시(生時)가 주상의 사주(四柱)와 서로 합치되기에, 소인이 ‘이는 금상의 운수인데 그대가 어찌하여 묻는가?’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주상이 새로 큰 적도를 잡았으니 금년 운수가 반드시 크게 길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인이 말하기를 ‘종사(宗社)의 복록이 한없이 무궁하니, 주상의 1년 운수는 말할 것도 없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이 사주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올해에 큰 공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소인이 말하기를 ‘사람의 운명이란 각자 태어난 곳에 따라 분복(分福)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쉽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또 말하기를 ‘만일 사방 어디에서든 일이 있게 된다면 어느 쪽이 길하겠는가.’ 하기에, 소인이 놀랍고 당혹스러워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이웃 사람을 부르자니 통지할 만한 이웃 사람이 없고 한 집에 사는 사람을 부르자니 기거(起居)하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그 사람이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소경이 어찌해 볼 수 없어 단지 들은 바대로 아뢸 따름입니다."
하였다. 시해 등이 그 말을 보고하니, 이유식을 잡아오라고 명하고, 또 구인후(具仁垕)를 시켜 유식의 종제(從弟) 이유재(李有材)에게 물어보게 하였는데, 유재가 말하기를,
"유식이 을미생이란 것만 알 뿐이고 달이나 날짜나 시(時)는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형문(刑問)을 엄히 하도록 명하였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또 유식의 아우 이유삼(李有森)과 이유빈(李有彬)을 이천(利川)에서 잡아다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가형(家兄)이 과연 만력(萬曆) 을미년 11월 7일 유시(酉時)에 태어났습니다."
하였다. 유식은 잡혀오자 겁에 질려 어찌할 줄 모른 채 많이 횡설수설하였는데, 시현과 대질 신문을 하자 상당히 말이 군색하였다. 상이 엄히 형벌하여 국문하라 명하였는데, 장(杖)을 맞다 죽었다. 그런데 이번 옥사에 대해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꾸며낸 것으로 의심하였다.

 

4월 7일 계미

상이 상변(上變)한 이석룡(李碩龍)과 김충립(金忠立)을 당상으로 올리고 수령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4월 8일 갑신

상이 하교하였다.
"강씨(姜氏)를 반혼(返魂)하는 곳은 본궁(本宮) 곁의 사가(私家)로 정하도록 하라."

 

4월 9일 을유

달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특명으로 응모군(應募軍) 김정진(金廷進)을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삼았다. 정진은 일찍이 병자 호란 때 자원하여 변방을 지켰고 이번에도 또 응모하였으므로 상이 충의가 가상하다고 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좌의정 김상헌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이 이른바 부끄럽고 욕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듯하다. 굳이 사직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 지극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4월 10일 병술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의 역당 가운데 사람을 꾀고 주장한 자는 실로 이지험(李之馦)·권대용(權大用)·홍영진(洪榮振)·안익신(安益信) 등으로서 이들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못할 짓 없이 흉악한 꾀와 비밀스런 계책을 꾸미다가 도당이 뿔뿔이 흩어진 뒤에는 지험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안익신과 나극룡(羅克龍)을 괴수라고 지목하여 관가에 알려 체포되도록 함으로써 자기의 공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 적의 흉역(凶逆)스러운 죄상은 다른 적도에 비해 특히 심합니다. 죄를 자복한 다른 적도는 모두 이미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 적만 홀로 같은 패거리 두 사람을 고발하여 체포케 했다는 공으로 아직까지 집행을 늦추고 있습니다. 흉측한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가도록 용납할 수도 없고 여론을 오랫동안 답답하게 할 수 없으니, 속히 전형(典刑)을 보여 천벌을 바르게 하소서.
새로 제수된 고산 현감 김정진은 한때 응모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령에 특별히 제수되기까지 하였는데, 고금 천하에 응모한 군인을 수령으로 삼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지험은 공이 없지 않고, 김정진은 충의가 가상하다. 죽음을 면케 해주고 벼슬에 제수한다고 해서 모두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간원도 지험을 법대로 처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지험이란 자는 은진(恩津) 사람으로 권대용(權大用) 등과 앞장 서서 모반을 꾀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한패거리인 안익신(安益信)·나극룡(羅克龍)과 용담(龍潭)의 산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그 뒤 조정에서 현상금을 내걸고 급히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스스로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알고 두 사람을 체포해 본현에 고발했는데, 상이 그의 죽음을 면제해 주려 했기 때문에 대간이 논한 것이다.

 

전남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사조(辭朝)하였다. 상이 불러서 보고 이르기를,
"지방에 화적떼가 매우 성하다. 호서의 도적 패거리가 이미 일어났고 보면 호남에서도 상응(相應)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경은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호남은 큰 도적떼가 곳곳에 패거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신은 무인 출신의 수령에게 조방장(助防將)이나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를 부여해 기찰시키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따로 조방장이란 명칭을 만드는 일은 가볍게 시행하기 힘들 듯하다. 토포사 두 사람을 더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남녘은 학업에 힘쓰지 않으니 경이 이번에 가거든 반드시 먼저 학교를 일으켜 풍속을 변화시키고, 한편으로는 잔당을 제거하도록 하라."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옛날 조광한(趙廣漢)이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을 때 항통(缿筩)을 만들어 도적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지금 말하는 밀봉(密封)입니다. 지금 밀봉법을 쓰지 않으면 도적떼를 잡아 낼 수 없는데, 또 한편으로는 혐의로 인해 무고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이 점이 매우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신이 부임한 뒤 도적떼가 가장 성한 지역에는 계략이 있고 물정을 아는 수령을 가려서 편리한 대로 잘 처리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또 각 고을로 하여금 그 곳 향리의 재략이 있는 무사(武士)를 가리게 한 뒤 조방(助防)과 토포(討捕)의 책임을 맡겨 오로지 기찰하여 체포케 하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량한 백성이 혹 잘못 죽기라도 하면 애달픈 일이다. 그러나 도적이 혹 요행히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형벌의 실수가 어디에 있겠는가. 경은 가서 공경히 처리하여 모름지기 실제적인 일에 힘쓰고 소요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금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김자점에게 이르기를,
"안익신(安益信)은 바로 관노(官奴)로서 속신(贖身)된 자인데, 어떻게 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필시 원흉이 도성 안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권대용(權大用)이 필시 자세히 알고 있었을텐데 앞질러 죽여버렸으니, 형리와 나졸 및 직숙(直宿) 군사들을 엄히 형벌하여 끝까지 캐묻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지험의 죄를 어떻게 논해야 할 것인지 하문하였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이 적은 반역을 제일 먼저 모의하였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난 선묘조(宣廟朝)에 고 지평 길회(吉誨)의 아들 길운절(吉雲節)이 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제주로 들어가 섬 백성들을 꾀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이때 관기(官妓)였던 그의 첩이 제주 목사에게 고하려고 하였는데, 운절이 이럴 걱정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미리 상변(上變)하는 글을 초하여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서 스스로 목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나아가 고변하였습니다. 윤문이 그 고변서를 올리자 선묘(宣廟)가 운절을 용서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안 된다고 간쟁하여 마침내 형신(刑訊)을 가한 뒤 당사자만 죽이고 연좌시키고 적몰하는 법은 감해 주도록 하였는데, 선묘가 목을 베기 전에 형률을 감해 준 뜻을 알려 주도록 명하였습니다. 지금 이지험의 사정이 그와 서로 비슷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사(獄事)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그 뒤 결국 김류의 의견을 따랐다.

 

4월 12일 무자

좌의정 김상헌이 입조(入朝)하였다.

 

4월 13일 기축

평안도 의주(義州)에 서리가 내려 보리가 죽었다. 삭주(朔州)에 우박이 내렸다.

 

상이 비국에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탓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이 원망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적도를 따른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지금 승복한 적당들이 매우 많은데, 연좌될 것을 생각하니 매우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 중 상한(常漢)에게는 연좌와 적몰의 법을 적용시키지 말고 아울러 찾아 체포하는 일도 정지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하라."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 보고 듣는 사람으로서 감읍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던 자들에게 듣게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바꾸고 마음을 편안히 할 것입니다. 신들이 다시 의논드릴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원이 이를 가지고 삼남(三南)의 감사에게 하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 공청 감사 임담(林墰)이 치계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기를,
"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특별히 연좌하는 법을 감해 주셨으나, 흉역의 남은 종자들을 보통 백성들과 똑같이 고향에서 편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꼭 사면해 주고자 하신다면 섬으로 옮겨 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4일 경인

강원도 양구현(楊口縣)에 서리가 내렸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감(黃㦿)이 치계하기를,
"왜인이 서계(書契) 중의 ‘귀대군(貴大君)’ 세 글자를 맨윗줄보다 한 글자 더 높여 써 달라고 청하고, 또 《무경칠서직해(武經七書直解)》 1질을 얻고자 합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일을 의논하도록 내리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저들이 기필코 ‘귀대군’ 세 글자를 한 층 높이기를 원한다면 ‘아전하(我殿下)’ 세 글자도 한 줄에 함께 써야 할 것입니다. 이 뒤로 왕래하는 서계 중에 만일 반드시 대군이란 글자를 써야 할 경우가 생기면 역시 전하란 글자를 꼭 쓰는 것으로 항식(恒式)을 삼는 것이 권도에 합치될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4월 15일 신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겹 햇무리가 졌는데 바깥쪽 햇무리 아래에 이(履)가 있었다.

 

4월 16일 임진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의 정승명(鄭承明) 등 34인과 무과의 예용주(芮用周) 등 29인을 뽑았다.

 

4월 17일 계사

헌부가 내옥(內獄)의 죄인을 국청에 내줄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궁인(宮人) 의정(義貞)·향이(香伊)·정옥(貞玉)·인숙(仁淑)·형란(荊蘭)·정숙(貞淑)·예화(禮化) 등 7인이 내옥에서 국청으로 옮겨졌다. 이때 유탁(柳濯) 등의 옥사(獄事)로 국청을 궐내의 병조에 설치하였다. 의정 등이 국청에 와서도 원통하다고 하면서 불복하자, 추관(推官)이 묻기를,
"너희들이 내옥에서 이미 흉측한 짓을 저지른 죄상을 자복했는데, 지금 다시 굳이 피하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수사 별제 홍충서(洪忠恕)와 중관(中官)들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를 ‘죄를 자복하면 죽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말을 믿고 거짓으로 자복하였던 것입니다."
하므로, 국청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며 크게 놀라워하였다. 다시 더 형신(刑訊)하여 실상을 얻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자복한 죄수를 더 형신하여 앞질러 죽게 한다면 너무도 실형(失刑)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고, 이어 다시 신문하지 말고 바로 죄안을 결정하는 공초만 받으라고 명하였다. 국청이 이에 내옥의 문서를 가져다 죄안을 결정하는 문안을 초록(抄錄)하였다. 의정·향이·정숙 3인은 정형(正刑)에 처하고 형란·예화·정옥·인숙 4인은 참수(斬首)하였다. 정숙과 예화는 대전(大殿)의 비자(婢子)였고 나머지는 모두 소현(昭顯)의 궁인이었다. 소현의 궁인이 전후에 걸쳐 많이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끝이 났다. 의정 등과 연좌된 자들을 다스릴 때 그 중 한 사람이 아비가 분명하지 않아 그 어미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함경도 모읍(某邑)에 사는 한모(韓某)이다."
하였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젊은 시절 서울에서 일할 때 남의 첩살이하는 계집 하나와 몰래 간통하였으나 자식을 두었는지는 몰랐고 소식이 끊긴 지도 또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죄인의 아비라고 하여 연좌시킨다면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도신(道臣)이 보고하자, 금부가 복계(覆啓)하기를,
"이들 부자간의 진위를 분명하게 밝힐 수 없습니다만, 그 어미가 일단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상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충주(忠州)의 김조(金𥶏)란 자가 후모(後母)를 간음하여 삼성(三省)에서 국문 중이었고, 양주(楊州)의 강세민(姜世民)이란 자가 조부의 첩을 간음하였으므로 붙잡아 올려 수금하였고, 연안(延安)의 장운(張雲)이란 자가 칼을 빼들고 아비를 다치게 한 일로 옥사가 일어나 이미 자복을 받았으나 아직 정형(正刑)에 처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와 함께 이산(尼山)의 유탁(柳濯)과 이천(伊川)의 이유식(李有植) 및 의정의 내옥(內獄)까지 겹쳐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여섯 건의 큰 옥사가 동시에 발생하였으므로 감옥이 꽉 차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이행원(李行遠)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처음 강씨(姜氏)에게 아직 사사(賜死)하지 않았을 때, 양사가 달을 넘기며 논집(論執)하였는데, 행원이 대사헌이 되자 바로 그 논의를 정지시켰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중상(重賞)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판(吏判) 자리가 비자 상이 종2품으로 의망(擬望)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이 자리에 제수된 것이다. 행원이 한 번 거짓으로 사양하는 체하고서 바로 출사하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비웃으려면 마음대로들 비웃어라. 나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014)  .’고 한 말은 행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고 하였다. 행원은 풍채가 훤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나 용렬하고 비루한데다 식견이 없었으며 세속에 따라 아첨하였다. 또 후처에게 빠져 잠시도 차마 떠나지 못해 빈객이 문에까지 와서도 그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친척 중에 상사(喪事)가 있어도 가서 조문하지 않았으며 종가(宗家)의 제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채 주야로 그의 후처와 어울려 술마시며 즐길 뿐이었다.

 

4월 18일 갑오

밤에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심성(心星) 위로 들어갔다.

 

4월 19일 을미

달에 겹무리가 졌는데, 안쪽 달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좌의정 김상헌이 상차하여 양주(楊州)로 되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이 어려움을 널리 구제해 줄 것을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고 병을 조리하면서 도(道)를 논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다. 상헌이 출사하자 조야가 크게 기대를 걸었는데, 한두 번 국문에 참여했을 뿐 한 가지도 건백(建白)함이 없이 갑자기 병을 칭탁하자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4월 20일 병신

국청이 아뢰기를,
"나인(內人) 등은 모두 이미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생(辛生)은 이름이 제적(諸賊)의 공초에 중요한 사람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밤을 틈타 담장을 넘어 대내(大內)를 넘나들며 나인들과 결탁하여 흉악한 짓을 저지르고 은밀히 정탐한 죄상이 낭자합니다. 국청에 회부하여 숨겨진 사실을 신문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형벌을 바르게 세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문할 처음에 바로 정직하게 아뢴 까닭에 이미 죽음을 면케 했으니, 그냥 놔두어라."
하였다.

 

4월 21일 정유

상이 내옥(內獄) 죄인 형란(荊蘭)의 결안(決案) 가운데에 빠뜨린 말이 있다는 이유로 그때의 당상과 낭청(郞廳)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대신 김자점과 남이웅(南以雄)도 대궐에 나와 대죄하였고, 국청에 참여한 대관(臺官) 김남중(金南重)과 채유후(蔡𥙿後) 등도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형란의 공초는 바로 문사 낭청(問事郞廳) 조한영(曺漢英)이 기초한 것이었다. 상이 한영을 잡아다 신문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윽고 그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놓아주었다. 대체로 형란이 공초한 말 가운데 "원손(元孫)은 성질이 민첩치 못하고 또 보존될 것인지도 기필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유서(遺書)를 여러 왕손에게 전하라."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내옥의 문서에 기록된 것이었다. 그런데 단안(斷案)을 초록(抄錄)하면서 한영이 "원손을 보전할 수 없다."는 말을 차마 바로 쓰지 못해 삭제했던 것인데, 그 말이 조보(朝報)에 나와 상이 그것을 보고 알게 된 까닭에, 한영이 마침내 죄를 얻은 것이다.

 

4월 22일 무술

유성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4월 23일 기해

간원이 아뢰기를,
"나인 신생(辛生)이 밤을 틈타 담을 넘나들면서 결탁하여 흉악한 짓을 저지른 죄상이 제적(諸賊)의 공초에 낭자하고, 당초 하문하셨을 때 이미 곧이곧대로 아뢰었다면, 그야말로 승복한 죄인으로서 조금도 용서해 줄 만한 의리가 없습니다. 속히 국청에 내주어 나라의 형벌을 바르게 하소서."
하고, 헌부도 이를 논계하니, 모두에게 답하기를,
"신생을 이미 살려주라고 명했는데, 이제 와서 법을 적용한다면 이런 길이 영원히 끊길 것이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4일 경자

조경(趙絅)을 이조 참판으로, 김광욱(金光煜)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기조(李基祚)를 대사헌으로, 남선(南銑)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조경이 전날 강빈(姜嬪)이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말을 맨 먼저 꺼냈기 때문에 마침내 총애를 받아 발탁된 것이다. 조경은 언젠가 말하기를 "나이 60세가 넘어 간직해야 할 것은 염치 두 글자뿐이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껑충 뛰어 발탁됨으로써 남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사 조정에 나올 면목이 없게 되자 제배될 때마다 번번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5일 신축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사방이 10여 장(丈)쯤 되고 깊이는 5장 남짓 되었다. 해주 지역에 해충이 발생해 곡식에 해를 끼쳤다.

 

4월 26일 임인

공청 감사 임담이 치계하기를,
"역적 유탁(柳濯)의 처 수정(壽貞)이 상을 범하는 못된 말들을 마구 내뱉고 있습니다. 무지한 여인네라지만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이괄(李适) 처자의 예대로 처참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29일 을사

장령 이응시(李應蓍)가 상소하기를,
"신이 한유(漢儒)의 말을 듣건대 ‘인군(人君)은 하늘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땅을 어머니처럼 받들며 백성을 아들처럼 길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인군이 된 입장에서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난 것은 오늘날 아버지가 노여워한 것이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구른 것은 오늘날 어머니가 노여워한 것이며, 해마다 주리고 흉년이 드는데도 갖가지 명목으로 거두어들여 떠도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고 굶주려 죽은 시체가 구렁에 가득한 것은 오늘날 자식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꾸짖는 뜻을 알리고 자식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면, 요(堯)임금처럼 조심하고 순(舜)임금처럼 두려워하고 주 선왕(周宣王)처럼 위태롭게 여기며 반성한다 하더라도 위로 하늘의 마음을 합당하게 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까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허물 듣기를 싫어하면서 시변(時變)을 천수(天數)로 돌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치지도외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직접 중흥의 일을 담당하시며 어두운 정치를 개혁할 뜻을 세우셨습니다. 비록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지치(至治)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국세(國勢)를 유지시키고 시정(時政)의 기강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는 또한 크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점점 처음만 같지 않으십니까. 이번에 세 신하를 귀양보낸 일에 대해 원근을 막론하고 그 누가 보고 듣고서 놀라워하지 않겠습니까. 인군의 거조(擧措)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경여(李敬輿)는 불쑥 나가버린 잘못은 있지만 조금도 주장한 일이 없고, 심노(沈𢋡)는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일마다 논열하였는데 그 마음가짐은 결코 딴 생각이 없고, 홍무적(洪茂績)은 가장 신임을 받아 직간하기로 자임하였고 전하께서도 늘 충성스럽고 곧은 말 하는 사람으로 지목하였습니다만 한 마디 말이 전하의 뜻을 거역하자 너무도 심히 견책하셨습니다. 몇 년 사이에 똑같은 사람이 현인이 되었다가 망령된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이다지도 변덕스러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바람 불고 천둥 치고 벼락이 떨어져 산악이 진동하다가도 시원하게 한번 개이면 우주가 함께 즐거워하고, 일식과 월식으로 하늘과 땅이 캄캄하다가도 원래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면 모든 백성이 다 그 밝음을 우러르게 되는 법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군자의 허물을 머물려 두지 마시고015)   세 신하의 귀양을 속히 풀어주소서. 그러면 성덕에 빛이 되는 것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아, 하늘은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능히 덮어주고 땅은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능히 실어주고 해와 달은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능히 비추어주고 인주(人主)는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세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요(堯)·순(舜)은 천하에 공도(公道)를 창도하여 천하가 다스려졌고 걸(桀)·주(紂)는 사사로움으로 천하를 이끌었으므로 천하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사사롭게 하는 것이 사람과 나라에 화가 되어 온 것이 오래입니다.
사사롭게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면 기쁨과 노여움이 빗나가고, 사사롭게 형정(刑政)을 실시하면 형정이 문란해지고, 사사롭게 임명하면 비적임자가 관직을 차지하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오직 현인을 관직에 앉히고 유능한 자에게 일을 맡기라.’고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그 관직에 합당한 인물을 선발해야지 어떤 사람을 위해 그 관직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적임자를 관직에 앉히는 일이야말로 인주의 큰 책임이니,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도구를 한때 사사로이 수작(酬酌)하는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임금이 마음을 공정하게 가지면 아래서 따르는 자들도 공정해져서 곧고 바른 도리가 행해지지만, 임금이 마음을 사사롭게 가지면 아래서 따르는 자들도 사사로워져서 요행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하가 정색하고 바른말을 하지는 못한 채 뜻을 굽혀 아첨이나 하여 좋은 벼슬을 얻으려 하거나, 임금이 어진이를 벼슬자리에 앉히지 못하고 명기(名器)를 함부로 내주어 은혜를 베풀려 한다면, 이는 임금이 좋은 벼슬을 미끼로 삼는 것이 되고 신하가 아첨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염치없이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온갖 꾀를 써서 뚫고 올라오려 할 것이니, 공자가 말한 ‘비부(鄙夫)’와 맹자가 말한 ‘자기 한 몸의 이익만 생각하는 자[何以利吾身者]’들이 전하의 조정에 넘치게 되어 끝내는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임명할 때와 인물을 진퇴시킬 때에 공정함을 유지하여 공도를 넓히고 아첨하는 사람을 통렬히 억제하소서. 그러면 기강을 세우고 염치를 북돋는 방법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옛날 어진 성군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랐다.’고 했고 반드시 ‘간쟁하는 말을 따라주고 어기지 않았다.’고 했으며, 위란(危亂)하게 한 임금에 대해서는 반드시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은 모자라게 여겼다.’고 했고 반드시 ‘사람을 천리 밖에서 못 오게 막았다.’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간쟁하는 말을 따르다가 망한 나라가 있지 않으며, 간쟁하는 말을 따라주지 않고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전하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근래에 대각을 대하는 것은 어찌 이다지도 야박하십니까. 한 마디 겨우 아뢰면 준엄한 비답이 뒤따라 내려 그를 협박하고 그 말을 꺾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하니, 이것이 어찌 전하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대체로 사람들의 성품을 보건대 곧은 자는 적고 겁쟁이들은 많습니다. 따라서 기쁜 낯빛으로 책임 추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비워 남의 말을 채택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혹 말을 아니할까 염려되고 또 하더라도 다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하를 바보 취급하고 곧은 말을 뒷조사나 한 것으로 말하여 인정에 벗어난 전교로 배척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위엄을 보인다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은 옛날에 이른바 ‘성문은 열렸는데 언로(言路)는 막혔다.’는 말이 불행히도 다시 오늘날과 흡사하게 되는 듯하여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몇 가지는 모두 인간이 실수할 수 있는 것들이나 천지에 감응되어 재앙과 이변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이들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단지 전하가 어떻게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신이 듣건대 포사(褒姒)가 주(周)나라를 망쳤고 여희(驪姬)가 진(晋)나라를 어지럽혔다고 했는데, 사랑받는 계집이 나라를 망친 역사가 오래입니다. 한 성제(漢成帝)와 당 명황(唐明皇)016)   역시 보통의 군주는 된다고 할 것인데, 요염한 계집에게 마음이 고혹되어 여자의 말만 듣다가 결국에는 한(漢)나라의 왕업을 쇠퇴시키고 당(唐)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하였습니다. 옛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총명과 지혜는 한과 당의 군주보다 훨씬 높으시니, 신이 진실로 이럴 이치가 절대 없을 것으로 아나 임석(袵席) 사이에서는 푹 빠지는 일이 보통 많습니다. 옛 성인들도 이를 경계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고 보면 신이 전하에게 어찌 조바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전하는 지금 조용히 조섭하는 중이니, 섭생하는 도리로 보아도 더욱 여색(女色)을 멀리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채납(採納)하소서."
하였다. 이 상소가 도착하였을 때, 정원에는 여러 승지들이 이미 나가버리고 우부승지 이시해(李時楷)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 상소문을 보고서는 혀를 내두르며 감히 입계하지 못했다가 이튿날 아침 여러 사람이 의논한 뒤에야 입계하였다. 응시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어울리는 자가 적었으며 교유를 힘쓰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훌륭함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 장령에 임명되자 숨김없이 모두 털어 놓고 말하였으므로 듣고서 탄복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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