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6월

싸라리리 2026. 1. 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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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무인

청나라 사람이 임경업(林慶業)과 그의 종자(從者) 6인을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의 행차에 붙여 보내면서, 칙서를 내리기를,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한다. 조선이 귀순한 뒤에도 임경업은 이간질하여 선동하며 몰래 첩자를 보내 사사로이 다른 나라와 통했는가 하면, 주사(舟師)를 거느렸을 때는 고의로 책임을 미루어 군기를 그르치게 하였고, 신문받을 때에도 순순히 자복하지 않고 책임을 국왕에게 떠넘긴 채 앞질러 도망하였으며, 뒤에는 반역자들과 무리를 지어 본왕을 해치려 꾀했다가 일이 누설된 것을 스스로 알고서는 명나라 조정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으니, 죄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짐이 앞서 경업을 발송시켜 환국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본시 고식적인 계책에서가 아니라, 중원(中原)을 평정시킨 뒤 대사(大赦)의 은전을 베풀어 일체의 죄악을 법망(法網)에서 풀어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왕이 경업을 데려다가 환란의 싹을 다스리고자 하니, 사리에 합당하기에 바로 경업을 배신(陪臣)에게 내주어 돌려 보내면서, 특별히 유시한다."
하였다. 이경석 등이 경업을 압송해 돌아오다가 국경에 이르기 전에 그의 종자 한 사람을 잃었는데, 이경석 등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대왕의 【 죽은 한(汗) 홍태시(洪太始)의 형 귀영개(貴榮介)이다.】  사위인 몽고왕(蒙古王)이 심양(瀋陽)의 서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옛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래서 금년 5월 2일 청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십왕(十王)  【 죽은 한의 아우이다.】 으로 하여금 가서 치게 하였는데, 이날 홍광 황제(洪光皇帝)가 해를 입었고 한인(漢人)도 많이 피살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듣건대 ‘명나라 종실(宗室)인 당왕(唐王)이란 자가 절강(浙江)에서 즉위하였는데, 병마(兵馬)가 아주 많아 복건(福建)과 성세(聲勢)가 서로 엇비슷하고 또 유적(流賊)들과도 서로 통하며, 그가 신임하는 자 가운데 명나라 조정에서 이름이 있던 왕도직(王道直)이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쏠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주씨(朱氏)라는 어떤 사람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가 복수할 계책을 모의하고 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매우 걱정한다.’고 했습니다. 또 듣건대 ‘이자성(李自成)은 자체 내에서 난이 일어나 그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낭설은 아닌 듯하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또 《시헌력(時憲曆)》을 비밀히 사들이는 일로 널리 사람을 구하여 보았으나 얻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이른바 탕약망(湯若望)이란 자도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 나라의 일관(日官)인 이응림(李應林)의 아들 이기영(李奇英)이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법 산술(算術)에 통하고 중국말에 익숙하기에, 신이 그로 하여금 탕약망에게 역법(曆法)을 학습토록 하고 훗날 그의 아버지를 보내 배운 것을 전해 오게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또 백금(白金) 수십 냥을 주어 역법에 관한 책을 탕약망에게서 사들여서 훗날 가져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책은 모두 1백 40∼1백 50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시헌력》이란 서양(西洋) 사람 탕약망이 만든 것이다. 우리 나라 사신이 북경에 들어갔을 때 1본(本)을 구해 옛 역서(曆書)와 비교해 보게 하였더니 24절기가 드는 날들이 꽤나 달랐다. 탕약망이 북경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경석의 사행에 그 법을 구하게 했던 것인데 얻지 못하였다.

 

상이 명하여 내수사의 추안(推案)을 금부에 내리도록 하였는데, 금부에서 옥사가 너무 중대하니 추국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강씨(姜氏)의 외궁(外宮)의 계집종 종일(終一)·영옥(英玉)·극종(克終) 등 세 사람과 철원(鐵原) 보개산(寶盖山)의 비구니 혜영(惠英)이 내옥(內獄)에서 국청으로 옮겨졌다. 극종은 내옥에서 이미 네 차례의 형신을 받아 국청에 옮겨졌을 때에는 병신이 되어 말도 잘 못하더니 하룻밤 지나자 죽었다. 종일과 영옥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외궁에 있으면서 변경이 소란하다는 소식을 듣고 궁중의 은보(銀寶)가 너무 많아 모두 가져갈 수 없을 듯하여 섬돌의 흙을 파고서 그것을 묻었는데 마침 대내(大內)의 궁인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뒤에 변경의 소란이 조금 안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다시 파냈을 뿐입니다. 유서(遺書)에 대한 일은 전연 모르는 바입니다. 또 지난해 12월 25일에 강씨가 싸서 묶은 물건 하나를 내주었는데 길이가 한 자(尺) 남짓 되었습니다. 여승(女僧) 혜영에게 전해 주라고 하기에 저희들은 전해 주기만 했을 뿐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는 정말 모릅니다. 또 강씨가 불사(佛事)에 쓸 것이라고 하면서 황금을 혜영에게 준 것이 전후 2백여 냥이며 비단 등속도 많았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잇따라 형신을 가했으나 모두 다른 말이 없었다. 영옥은 마침내 죽고, 종일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혜영이 공초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해 12월 28일 강씨로부터 보퉁이에 싼 물건을 건네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물건인지 몰랐으나 뒤에 보니 갓난아기의 시체를 찢어진 옷으로 싼 것이기에 몰래 간직하고 길을 나서 양주(楊州)의 대탄(大灘)에 던졌습니다."
하였다. 또 승려 경성(敬成)과 본궁(本宮)의 고직(庫直) 등이 이 일을 안다고 끌어댔으나 상이 명하여 묻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사(中使)를 보내 금부랑(禁府郞)과 함께 혜영을 데리고 대탄으로 가서 던져버린 시체를 수색해 찾도록 하였다. 혜영이 대탄에 이르러 다시 말하기를,
"당초 시체를 던져버린 곳은 대탄이 아니다. 대탄에서 1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양주에서 대탄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내가 있는데,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금부랑이 이에 양주·마전(麻田)·적성(積城)·연천(漣川) 네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장정과 어부 70여 명을 시켜 투망하여 걸러내게 하는 한편, 사람들로 하여금 어깨동무하며 목이 닿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해보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찾았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다. 그 아래로 1리쯤 되는 곳이 바로 이른바 대탄이었는데, 그곳은 깊어서 측량할 수가 없었다. 금부랑이 돌아와 보고하니, 상이 혜영을 정배하도록 명하였는데, 조금 뒤에 하교하기를,
"방금 듣건대 이 역시 저주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반드시 함께 싼 물건과 글씨로 쓴 것이 있었을 것이다. 더 형추하여 캐물은 다음에 처치토록 하라."
하였다. 형신을 가하자 혜영은 단지 "아기 시체 이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고 또 글씨도 없었다."고만 말하였다. 그리고 매번 신장(訊杖)을 맞을 때마다 죽어도 더 할 말은 없다고 하였다. 국청이 이를 보고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대탄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시내에 던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찾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이 간사하다. 그때 데리고 갔던 마부를 추문토록 하라."
하였다. 국청이 그 마부를 잡아다가 물으니, 마부가 스스로 말하기를 "중도에서 돌아와 나중 일은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명하여 마부를 석방하고, 혜영을 더 형신하여 아기 시체에 함께 싼 물건과 써 있는 글을 다시 묻게 하였다. 이때 혜영이 며칠 동안 계속된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모두 으스러졌고 정신도 이미 흐릿해진 상태였는데, 이에 말하기를,
"아기 시체의 가슴 근처에 과연 글씨가 있었는데, 대체로 ‘용왕 수신은 애련히 여기시어 제도해 주소서.[伏願龍王水神 哀憐濟度]’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또 붉은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에 나비 모양을 새긴 패옥(佩玉)이 들어 있었고 이밖에 다른 물건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여 다시 더 형신하여 그 글 가운데의 긴요한 말과 시체를 던진 곳을 캐묻도록 하였으나, 혜영은 다시 더 할 말이 없다고만 말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이때 강씨의 궁인(宮人)으로서 강씨와 친근했던 사람은 전후의 옥사에서 모두 다 죽었으므로 자식을 낳았느냐의 허실을 물어볼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상은 또 낳은 자식을 살려 어딘가에 숨겼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번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혜영이 이미 죽은 지 며칠째 되던 날, 내옥에서 또 한 여인을 금부로 내보냈는데, 혜영이 고용한 삯군으로 이름은 연화(蓮花)였다. 그가 공초하기를,
"지난해 12월 혜영이 1단(端)의 무명베를 주면서 ‘며칠 동안 네 양식 거리로 하라.’ 하고는, 또 함께 가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말 등에 보퉁이에 싼 물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중간쯤 가다가 혜영이 그것을 펴 보고서는 크게 놀랐습니다. 저도 그 뒤에서 몰래 살펴보니 안에 어린 아이의 시체가 있었고, 또 붉은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가 있었는데 조각된 노리개 옥(玉)이 들어 있었습니다. 혜영이 곧바로 다시 싸 묶고는 스스로 대탄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저에게 말하기를 ‘이 일이 만약 새어 나가면 너와 내가 모두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홍청 감사 임담(林墰)에게 하유하여 해변의 어부 중에 잠수에 능한 자를 급히 징발하여 역마로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물에 들어가 샅샅이 찾아보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명하여 연화를 석방시켰다.
이때 보개산의 비구니 7명도 내옥에 잡아두고 혜영이 저지른 죄악의 자취를 증거토록 하였는데, 모두 원통하다며 자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이, 산중에 들어가 살면서 비구와 이웃해 있었으니 그 짓이 음란하고 패악스럽다며 형조에 명해 조율(照律)하여 죄를 정하라고 하였다. 전후의 옥사로 형륙(刑戮)을 당한 여인들이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는 세속과 인연을 끊고 깊은 산속에 사는 비구니들까지도 이 옥사와 임경업의 옥사에 걸려들어 삼목(三木)024)  과 머리에 쓰는 형구를 이고 대궐 뜰에 줄줄이 늘어섰으니, 또한 한 시대의 비상한 변고였다.

 

6월 4일 기묘

지평 이기발(李起浡)이 전주(全州)에 머물면서 병을 핑계로 이르지 않았다. 기발은 전주 사람으로 형 이흥발(李興浡), 아우 이생발(李生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기발은 처음에 침착하지 못하고 가볍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정축년025)  이후로는 마침내 나와 벼슬하지 않았다.

 

6월 7일 임오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의 민가에서 염소가 새끼 한 마리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 몸이 둘, 귀가 넷, 발이 여덟 개였으며, 가슴 이하로는 둘로 나뉘어져 따로 몸뚱이를 이루고 있었다.

 

6월 9일 갑신

경기·황해도·공청도 등지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곡식이 모두 손상되었다.

 

6월 10일 을유

좌의정 김상헌이 상차하기를,
"신이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30회에 걸쳐 피눈물을 머금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은이 융숭하고 두터워 청을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신은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온갖 질병이 몸을 감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부지런히 반열에 나아갈 수 없음이 조정에 서서 벼슬할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노쇠하여 생각이 흐리멍덩해져서 사물을 헤아리고 정사를 도모할 수 없음이 조정에 서서 벼슬할 수 없는 둘째 이유입니다. 채택될 만한 말을 못하고 신임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못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드리는 말씀이 전하의 귀에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하면 세속에 물든 견해가 걸핏하면 진퇴(進退)할 때마다 의심을 사고 있음이 조정에 서서 벼슬할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관부(官府)의 문서마다 번번이 구애됨이 있어 의리를 따르든 형세를 따르든 둘 다 마땅한 바가 없음이 조정에 서서 벼슬할 수 없는 네째 이유입니다.
신에게 네 가지 불가한 점만 있고 한 가지도 그럴 듯한 것이 없는데, 아직까지 은총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무턱대고 자리를 차지한 채 구차하게 날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치세(治世)의 사대부들에게 부끄러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심정과 형세를 살피시고 신의 늙고 병든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속히 되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말년을 보전케 해주소서. 그러면 보잘것없는 신하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전하의 조정에서 신하를 예(禮)로 대하는 도리에도 크게 영광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굳이 사직하지 말고 조정에 누워서라도 도(道)를 논해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헌이 처음에 일단 마지못해 출사하였는데, 이응시(李應蓍)를 구원하여 풀어주려 하였을 때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관부의 문서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 스스로 벼슬에 있을 수 없음을 헤아리고, 사직서를 올려 면직을 청한 것이 모두 30여 차례였으나, 상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근래 대신들이 면직을 청하면 10여 일을 넘기지 않고 면직을 허락하였는데, 상헌에 대해서만은 예모를 제법 중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슴에 두고서 잊지 못하는 정성스런 뜻은 없었다.

 

한진(韓縝)을 지평으로,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윤익형(尹益亨)을 정언으로, 강백년(姜栢年)을 교리로 삼았다.

 

6월 12일 정해

평안도의 안주(安州)·순안(順安)·강동(江東)·개천(价川)·중화(中和)·상원(祥原)·맹산(孟山)·박천(博川)·숙천(肅川)·삼등(三登)·양덕(陽德)·강서(江西)·삼화(三和)·영유(永柔)·의주(義州)·삭주(朔州)·창성(昌城)·벽동(碧潼)·영원(寧遠)·덕천(德川)·운산(雲山) 등 21개 고을에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6월 14일 기축

좌의정 김상헌이 34회째 사직서를 올려 체직되자 바로 양주(楊州)로 돌아갔다. 상헌이 조정에 머문 것은 7일 동안이었고, 정고(呈告)한 것은 모두 50여 일이었다.

 

여이징(呂爾徵)을 대사헌으로, 신상(申恦)·강백년(姜栢年)을 장령으로, 정언벽(丁彦璧)을 검열로, 양만용(梁曼容)을 응교로, 이해창(李海昌)을 부수찬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정언으로, 김충립(金忠立)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삼았다. 김충립은 상변(上變)한 자인데, 사람됨이 어리석어 콩팥을 분별하지 못했다.

 

6월 15일 경인

개기 월식(皆旣月蝕)이 있었다. 유성이 우성(牛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6월 17일 임진

상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임경업(林慶業)을 친국하였다. 이에 앞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에서 황익(黃瀷) 등이 아뢰기를,
"심기원이 말하기를 ‘경업이 망명할 때 승려의 복장을 가져다 주어 그로 하여금 배를 타고 중원으로 들어가 명조(明朝)의 군사를 청해 의지할 세력으로 삼으려 했다.’ 하였으니, 그의 모역과 흉계를 경업이 사실상 참여해 알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 점을 경업에게 물었는데, 경업이 공초하기를,
"본래 초야의 신분에서 성조(聖朝)에 몸을 일으켜 벼슬이 정2품에 이르렀으므로 혼자서만 받은 성은(聖恩)을 나라에 보답하여 갚으려고만 기약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동궁과 대군이 호랑이 소굴 속에 함께 잡혀가 있었으므로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런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일단 승려를 명나라 조정에 들여보내 우리 나라의 실정을 진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군사를 청해 마침내 의주(義州)의 길을 막아 끊어 버릴 수만 있다면 저들이 두려워 움츠리면서 우리 세자를 돌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늘 이 한 생각만을 골똘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임오년026)   겨울에 이르러 심양으로부터 붙잡아 들이라는 일이 발생해 길을 나서려는데 기원이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하여 헛되이 죽음의 땅으로 가려 하는가.’ 하면서 신에게 도망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에 신이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잡아 보내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임금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최상(崔相)027)  이 대처하는 바를 보아서 대처하겠다.’ 하였더니, 기원이 마침내 은(銀) 7백 냥을 주고 또 한 보따리에 승려의 옷과 머리 깎을 칼을 싸 보내주었습니다.
금교(金郊)에 이르렀을 때 청나라 사람들의 추국과 신문이 매우 혹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헛되이 죽는 것은 의(義)가 아니다.’고 여겨 마침내 도망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뒤 양구(楊口)의 조그만 절에 숨어 있다가 영동과 관서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와 경강(京江)에 이르러 배 한 척을 빌려 계미년 5월 26일에 마포(麻浦)에서 출발하여 해서(海西)를 통해 바다로 들어갔는데, 칼을 빼들고 뱃사람들을 협박하기를 ‘내가 바로 임 병사(林兵使)이다. 중원으로 가려 하는데 너희가 만일 따르지 않으면 이 칼로 결단을 내겠다.’ 하였더니, 모두가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에 녹도(鹿島)로 갔다가 이해 가을에 해풍도(海豊島)로 옮겼으며 명나라 장수 진영에 구금되었다가 마침내는 중국 장수 황비(黃飛)·송길(宋吉)과 함께 군사를 내어 의주를 막아 끊을 방법을 모색하면서 대군(大君)을 우리 나라로 귀환시킬 계책을 세우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기원(器遠)의 모역에 참여했다는 일은 정말 얼토당토하지도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낙안(樂安)의 수령이 되었을 때 기원의 뜻에 거슬려 이미 틈이 벌어졌는데, 어찌 그가 기꺼이 역모를 알려주겠으며, 만일 신이 과연 역모에 참여하였다면 하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타국으로 도망쳤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여러 신료에게 하문하기를,
"경업이 역모에 참여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
하니,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이미 백금(白金)을 주고 승려 복장까지 보내주어 망명토록 하였습니다. 그가 공초한 말을 가지고 보더라도 의심할 점이 많습니다."
하고,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승려 복장을 보내주고 망명토록 유도했다면 그들이 얼마나 친했는지를 알 만합니다."
하고, 추관(推官) 모두가 경업의 형적이 의심스러우니 반드시 숨기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형신하기를 똑같이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다면 형추(刑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두 차례 형신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만일 흉모(凶謀)에 참여하지 않았고 마포에 도착하였을 때 서로 만난 사람이 없었다면, 기원의 무리가 어떻게 너의 승선(乘船) 날짜를 알았겠느냐?"
하니, 경업이 아뢰기를,
"신이 배를 타는 날 무금(無金)의 처(妻)에게 말하기를 ‘사또에게 바로 아뢰기는 어려울지라도 선달(先達)에게 내가 들어간다는 뜻을 말하면 사또가 알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경업이 일찍이 편비(褊裨)로 김자점의 막하(幕下)에 따라다녔던 까닭에 자점을 사또라고 한 것인데, 선달은 바로 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이었다. 경업의 첩 매환(梅環)은 바로 자점의 계집종이었는데, 이른바 무금은 매환의 남동생 효원(孝元)이란 자였다. 자점이 바로 탑전(榻前)에 대죄하고 이어 무금의 처를 붙잡아다 신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세 있는 자를 끌어넣으려는 죄인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래(李䅘)가 아뢰기를,
"경업이 배를 타고 들어간다는 뜻을 무금의 처에게 말했다고 하니, 붙잡아다 신문하소서."
하니, 상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끝내 묻지 않았다. 다음날 상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대신·추관·양사의 장관을 불러 이르기를,
"이번의 옥사는 단서가 잡히지 않으니 혹 원통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경업이 중국에 들어간다는 뜻을 기원에게는 말한 적이 없고 효원의 처를 시켜 선달에게만 말해 신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신이 밖에서 명을 기다리려 하나 탑전에 입시하였으므로 감히 물러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 신료들에게 물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남이웅이 아뢰기를,
"경업은 관서(關西)에 있을 적에 공로가 제법 많았는데, 옥사를 보아도 역모를 하였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타국에 몸을 의탁하고 망명한 죄는 있습니다."
하고, 민형남(閔馨男)이 아뢰기를,
"경업은 정상이 의심스러운데도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니 엄히 국문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경업이 떠날 때 역적 심기원이 정형(鄭蘅)으로 하여금 승려 복장과 7백 금(金)을 몰래 갖다 주게 하고 그를 꾀어 도망치게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그가 함께 역모를 통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자점이 아뢰기를,
"율문(律文)에 본국을 등지고 몰래 타국에 들어간 것은 반역과 같다 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개진한 바도 대체로 형에 처하기를 청하는 뜻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헤아려 보건대 경업은 보통 무사가 아니다. 기원이 스스로 반역을 도모하면서 꾀어 들여보낸 것은 일이 이루어진 뒤에 불러다 등용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와 함께 일을 벌였다면 심복 대장을 어찌 멀리 보낼 수 있겠는가. 이는 대체로 경업이 보통 때 큰소리치기를 좋아했던 까닭에, 기원이 생각하기를 ‘임경업을 중국에 들여보내 군사를 청해 오게 하여 세력이 커질 계기로 삼으면 우리 나라 사람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배를 타고 들어간 것은 서로 통지하였을 듯하나, 함께 반역을 꾀한 것에 대해서는 그 자취가 불분명한데, 천하에는 이치에 벗어나는 일은 없는 법이다. 나의 뜻은 이와 같다. 또 심기원의 흉모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경업을 들여보낸 뒤에 이를 가지고 도당을 유인해 세력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인데, 만일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이 또한 실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가령 역적 심기원이 세력의 발판으로 삼으려 이용했다 하더라도 역적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업이 역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적 심기원 단독으로 구실을 삼은 것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시해(李時楷)가 나아가 아뢰기를,
"경업이 이미 죽었습니다."
하니, 상이 측은해 하며 이르기를,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따라다닌 사람들은 그 죄가 가벼운 듯하기는 하나 그 중 죄가 중한 자를 잡아 죄를 줌으로써 후세의 폐단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효원(孝元)의 정상은 더욱 간사하기 짝이 없으니, 그대로 형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업이 이미 죽었는데 지금 무얼 하자고 다시 효원을 따지겠는가. 단지 망명한 것만을 죄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마침내 효원을 복주(伏誅)시키고 지명(智明)을 절도(絶島)에 유배시켰으며, 나머지 승려와 뱃사람들은 모두 석방하였다.
경업은 충원(忠原)028)   사람이다. 본시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무과로 발신(發身)하자, 상신(相臣) 김류가 그의 초일(超逸)한 재주를 사랑하여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를 제수하였다. 그 지역은 가도(椵島)와 심양 사이에 끼여 있었는데 제법 일을 잘 무마하였으며, 오랫동안 서쪽 국경에 있으면서 인심을 많이 얻었다. 형신을 받게 되자 그가 크게 부르짖기를,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불쌍해 하지 않음이 없었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사대(事大)는 반드시 성의껏 해야 합니다. 이번에 청나라가 경업을 보내주고 또 선량(船糧)을 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 일이 많지만 만일 절사(節使)를 통해 그 은혜에 사례한다면 소홀하게 될 듯하니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도 사신을 자꾸 보내면 접대하는 것을 귀찮게 여길 것이다. 오래지 않아 사행(使行)이 돌아올 것이니, 그쪽의 사정을 물어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1일 병신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이기조(李基祚)를 이조 참판으로, 김익희(金益熙)를 집의로, 정언원(丁彦瑗)을 지평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사간으로, 이석(李晳)을 장령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김진(金振)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6월 23일 무술

태백이 나타났다.

 

유성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6월 24일 기해

태백이 나타났다.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또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6월 26일 신축

강원도 평창(平昌)·홍천(洪川)·춘천(春川)·양구(楊口) 등지에 큰물이 졌다.

 

6월 27일 임인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북극성 아래에서 나와 직녀성(織女星) 아래로 들어갔다. 또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6월 28일 계묘

태백이 나타났다.

 

6월 29일 갑진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또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건성(建星) 위로 들어갔다. 또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오거성 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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