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7월

싸라리리 2026. 1. 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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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사

태백이 나타났다.

 

7월 2일 병오

조경(趙絅)을 도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성으로, 이시만(李時萬)을 수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검열로 삼았다.

 

혹서기라서 전옥서(典獄署)의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7월 3일 정미

유성이 우성(牛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또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난번 풍재(風災)가 참혹했는데, 또 태백이 낮에 나타나는 경계를 보이니, 앞으로 무슨 사변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하니, 영의정 김자점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의 바람은 예전에 없던 재해였습니다. 삼남의 조운선(漕運船)이 전복되어 유실된 곡식이 거의 1만여 석에 이릅니다. 게다가 태백이 연일 낮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전쟁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니, 어찌 크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상하가 마음을 합해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때이니, 오직 원하건대 상께서는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극진히 다하시어 재해를 푸시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운선이 전복되어 잃은 곡식이야 그래도 다시 마련할 수 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너무 많으니, 내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하였다. 자점이 또 이르기를,
"백관이 융복(戎服)을 입은 지 벌써 10년입니다. 【 병자 호란 이후로 상하가 모두 융복을 입었다.】  혼란기라서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되었지만 복장에 구별이 없어 존비(尊卑)가 뒤섞이고 있는데, 흥망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체면만 깎이는 실정이니, 차라리 관대(冠帶) 차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가 천하의 옛 제도를 모두 바꾸었는데 지금 만일 명나라의 제도를 다시 시행한다면 안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점이 대답하기를,
"꼭 저들 나라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정명수(鄭命壽)에게 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정월부터 다시 시행하는 것이 옳겠다. 저들 나라에 물을 필요는 없다."
하였다. 자점이 또 아뢰기를,
"도성 안에서 사부(士夫)의 아내를 칼로 살해한 것도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하고, 【 이때 고 전적(典籍) 한의문(韓疑問)의 처가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 구인후(具仁垕)가 나아가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 사람이 평소 노복에게 인심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번에 살해된 것도 노복의 짓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적이 살인했다면 대수롭지 않은 변고이지만 종이 주인을 살해했다면 그 변고가 크니, 정원은 그 곡절들을 물어 보고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대간이 녹훈(錄勳)과 조후량(趙後亮)의 일 때문에 여러 날 논집(論執)하고 있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자점이 대답하기를,
"인심이 아름답지 않아 역옥(逆獄)이 여러 차례 발생했는데, 상변(上變)한 사람에게 반드시 두터운 상을 내려야만 때맞춰 고변케 할 수 있으니, 녹훈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고(誣告)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만 훗날의 폐단을 막을 수 있으니,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논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만일 친국하시는 일도 없이 혹독한 형신을 가한 나머지 거짓 자복한 자가 있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후량의 죄는 무고한 자와는 차이가 있고, 조시응(趙時應)이 그의 사주를 받았다고 한 말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만일 이로써 후량을 죽인다면 또한 원통하지 않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후량은 선비들의 집을 왕래했을 뿐만이 아니고 선동하는 말을 맨 먼저 꺼냈습니다. 시응이 형신을 받을 때 번번이 말하기를 ‘숙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시화(時和)도 무고한 자였는데 쉽게 정론(停論)된 것은 후량을 수모자(首謀者)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만일 후량을 수모자로 하여 시응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시응이 이미 죽었는데 하필 또 후량을 죽여야만 하는가?"
하니, 대사헌 여이징(呂爾徵)이 나아가 아뢰기를,
"후량을 법대로 처단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내가 어려워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미 형신을 받았고 또 정배(定配)하라고 명까지 내렸는데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대간이 이응시(李應時)의 일을 가지고 한 달을 넘기면서까지 간쟁하는데, 이는 무슨 의도에서인가. 옛사람이 자기 군주를 걸·주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말은 과격했어도 본시 해칠 목적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응시는 그렇지가 않다.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를 배척하면서 세상에 영합하여 좋은 벼슬을 구하려는 계책을 삼았다고 배척하였다. 만일 응시를 대간이라고 하여 죄주지 않는다면 편당이 날로 이루어져 앞으로 필시 지록위마(指鹿爲馬)하는 환란이 생겨날 것이다."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신들도 감히 응시의 말을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간의 신분으로서는 마음속의 생각을 반드시 아뢰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 광망(狂妄)하다 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지금 만일 환경이 나쁜 지역에 멀리 그를 안치(安置)시킨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대간이 논집(論執)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고, 이징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사가 간쟁하는 이유는 간신(諫臣)을 내쫓음으로 말미암아 전하의 성덕에 누가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의 일은 【 강씨(姜氏)에 대한 일이다.】  전고에 없던 변고였으니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청대(請對)하여 그 곡절을 물었어야 한다. 그런데 묻기는 커녕 도리어 나를 그르다 하여 응시의 소(疏)가 있게까지 하였다. 응시가 이행원(李行遠)·이기조(李基祚)·조경을 비부라고 한다면, 소위 정인(正人)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강씨를 사사(賜死)할 때 이행원은 대사헌으로 정계(停啓)하였고, 이기조는 부제학으로 입시해 있으면서 힘을 다해 제대로 간쟁하지 않았고, 조경은 대사간으로 지방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강씨의 패악(悖惡)한 죄상을 극력 언급하였다. 그런데 응시의 소 가운데, 신하가 아첨을 떨며 좋은 벼슬을 구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상이, 응시가 이들 무리를 가리켜 배척한 것으로 생각하고서 매번 응시의 죄를 말할 때면 번번이 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그런데도 우선 정배하는 율만 적용한 것은 또한 그가 간관이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번 사면령을 반포할 때 전남 감사 정유성(鄭維城)은 이경여(李敬輿)의 이름을 품질(稟秩)029)   속에 써 넣었다. 경여는 위리 안치된 죄인인데, 어떻게 감히 위리 안치된 죄인을 품질 속에 써 넣는단 말인가. 경여는 저사(儲嗣)를 가리는 날을 당해 ‘동요할 것이다.’고 대답했고, 빈청(賓廳)에 모였을 때도 앞장 서서 데리고 나가버렸다.030)   만일 그의 죄를 논한다면 어찌 대불경죄(大不敬罪)에만 해당되겠는가. 유성이 악인과 한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상의 노여워하는 기색 때문에 좌우가 모두 부복한 채 감히 유성을 위해 해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점이 아뢰기를,
"신은 정신이 날로 점점 쇠퇴해질 뿐만이 아닌데, 식견도 없으면서 영의정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어 아침 저녁으로 근심스럽고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평(延平)031)  이 일찍이 말하기를 ‘식견이 밝지 못하면 제 아무리 어질어도 일을 꾸려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경은 식견이 분명한데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식견이 밝지 못하면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사(邪)와 정(正)을 분간해 내지 못해 결국 어지러워지고 만다. 오늘의 환란은 식견이 밝지 못한 데 근심이 있다."
하였다. 【 대체로 상은 강씨(姜氏)를 구원하려는 것을 사특한 의논으로 생각하였는데, 강씨를 사사(賜死)할 때 자점이 그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난리를 치른 뒤로 해마다 흉년이 들고 또 청나라 사신의 왕래로 인해 다른 일을 살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에 관한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내버려두었다. 만일 위급한 사태라도 발생하면 무엇을 믿겠는가?"
하니, 이시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산성의 군기(軍器)와 군량은 근래에 제법 마련했으나 성을 지킬 군사들은 아직 어디에서 뽑아 채울 곳이 없습니다. 만일 사변이라도 발생한다면 그동안 쌓아놓은 군량과 군기들이 도리어 쓸모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최명길이 정승으로 있을 때 강원도와 충주(忠州)의 군사를 산성에 나누어 배속시켰다가 마침 염려스러운 기미가 있었기 때문에 끝내 그 일을 중지한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때맞춰 지휘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을 맡은 사람이 자세히 헤아려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4일 무신

홍청도의 조운선이 돌아가다 홍주(洪州) 지경에 접어들어 바람을 만나 침몰되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다. 본도에서 보고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7월 6일 경술

태백이 나타났다.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을 사은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영의정 김자점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사대(事大)하는 도리는 정성과 믿음이 귀중합니다. 청나라가 이미 세공(歲貢)을 감해주고 또 경업을 보내주었으니, 사은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절사(節使)의 사행에 붙여 보내면 공경하고 조심하는 뜻에 크게 어긋날 것이니, 경상(卿相)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 별도로 사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안익신(安益信) 등의 옥사(獄事)를 처리한 공로로 상을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추관(推官) 민형남(閔馨男)·홍진도(洪振道)·유항(柳恒)·김광욱(金光煜), 형방 승지 여이재(呂爾載), 문사 낭청(問事郞廳) 김익희(金益熙)·남선(南翧)·박장원(朴長遠)은 각각 1등급씩 가자(加資)하고 양사 장관·금부 도사·사관(史官) 이하에게도 모두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낭청 조한영(曺漢英)은 형란(荊蘭)의 공초(供招)를 받을 때의 일로 상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이때 준직(准職)032)  의 제수만을 명하였다.

 

7월 8일 임자

김익희(金益熙)를 동부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간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부제학으로 삼고, 조위한(趙緯韓)·윤경(尹絅)·한명욱(韓明勗)은 모두 나이가 80이었기 때문에 자헌(資憲)으로 뛰어올렸다.

 

지평 한진(韓縝)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7월 9일 계축

태백이 나타났다.

 

7월 10일 갑인

태백이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경상도 금산군(金山郡)에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승려가 벼락을 맞아 죽었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7월 11일 을묘

강원도와 전남도에 큰물이 졌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이식(李植)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대사간으로, 김시국(金蓍國)을 대사성으로, 임전(林)을 부응교로 삼았다.

 

7월 12일 병진

태백이 나타났다. 함경도에 황충의 피해가 발생하고 큰물이 졌는데, 감사가 보고했다.

 

7월 13일 정사

호조 참판 이시방이 공물(貢物) 제도를 변통할 일로 차자를 올려 진달하니, 상이 호조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참판이 공물에 대한 제도를 변통했으면 하는데 판서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호조 판서 민성휘(閔聖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도 좋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참의 유성증(兪省曾)이 나아가 아뢰기를,
"반정(反正)한 뒤에 바로 대동법(大同法)에 대한 의논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양전(量田)한 뒤에야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집의로 있으면서 이러한 뜻으로 대신에게 물었더니, 그때 대신이 권반(權盼)이 정한 공안(貢案)을 시행하려다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시양(金時讓)이 호조 판서가 되면서 비로소 양전하기를 청했으나 대동법에 대한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결국 결행치 못하였는데, 김기종(金起宗)도 일찍이 이 일을 언급하면서 늘 혼자서 개탄했습니다. 신은 이제 노쇠하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만, 대동법만은 꼭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시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충청도를 전라도에 비교하면 민결(民結)이 훨씬 뒤지는데, 공물(貢物)은 배나 많습니다. 만일 통계를 내어 내게 한다면 부담을 고르게 할 수 있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의논하기를 ‘만일 변통하려면 차라리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너무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신의 소견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적은데 남는 것이 많을 리는 없을 듯하다."
하고, 이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했는데, 결국에는 중지되고 말았다.

 

7월 14일 무오

태백이 나타났다.

 

이식(李植)을 대제학으로, 김광욱(金光煜)을 도승지로 삼았다.

 

강원 감사 홍득일(洪得一)이 치계하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 심택(沈澤)은 덕정(德政)을 펴 한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고, 원주 목사(原州牧使) 이성연(李聖淵)은 강유(强柔)를 조화시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은혜를 느낀 나머지 여러 해 묵은 포흠(逋欠)을 하루아침에 모두 청산하였으니, 포상하여 장려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호조에 명하여 그 공안(貢案)의 납부된 숫자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두 고을의 포흠이 다른 고을에 비해 가장 많았다. 정원이 감사가 사사로운 정에 끌려 지나치게 칭찬했다는 이유로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5일 기미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을 문안하였다.

 

7월 18일 임술

제주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가옥이 쓰러졌는데, 목사가 보고하였다.

 

보덕 조빈(趙贇)이 상소하여 세 가지를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았다. 첫째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고, 셋째는 세자를 보양(輔養)하는 것이라고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모두 아름답고 지극한 의논이다. 내가 가슴에 새겨 노력하겠다."
하였다. 조빈은 병자 호란 이전부터 여러 차례 화의(和議)의 잘못을 배척했는데, 정축년에 이르러 이로 인해 쫓겨났다. 그 뒤에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오랑캐의 사신이 국경에 이르자 조빈이 감사에게 알리기를,
"조정에서 호차(胡差)를 천사(天使)라고 하고 접대소(接待所)를 영접 도감(迎接都監)이라고 하니, 이 어찌 선비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벼슬을 버리고는 물러가 양근(楊根)에서 살았다. 이때에 이르러 보덕으로 부르자 나아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갔다.

 

7월 19일 계해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일찍이 계해년 무렵에 고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삼도(三道)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맨 먼저 꺼냈는데, 이서(李曙)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극력 찬성하여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갑자년의 변 【 이괄(李适)의 난.】 을 겪은 뒤로 그 법을 모두 시행할 수 없자, 양을 줄여서 거둔 쌀로 공물의 값을 제공하게 하였는데, 이에 민간이 소란스러워지며 ‘반쪼가리 대동법[半大同]’이라고들 하자, 이상(李相)033)  도 더 이상 굳이 고집하지 못하고 상차하여 파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당시에 본청의 유사 당상으로 있었기에 그간 민정(民情)의 편리 여부와 사세(事勢)의 난이(難易)에 대해 아직까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반정(反正) 초기에는 전하의 정사가 새로워지기를 뭇 백성들이 눈을 씻고 바라볼 때였으니 뭔가 해 볼 수 있는 시기였는데도 이 법을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 뒤인데다가 가뭄과 황충의 피해가 잇따라 발생해 백성들이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며 역적의 변고가 줄을 이어 국가의 맥이 한 올의 실낱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만 원망하고 탄식해도 원기(元氣)를 상하기에 충분한 터에 금방 실시했다가 금방 그친다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만 깎이니, 지금 실시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신은 삼가 근심이 됩니다.
다만 듣건대 해조가 양서(兩西)의 공물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이런 부득이한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일을 시작할 때에는 우선 근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계해년에 대동법을 실시했을 때는 그 의도가 부담을 고르게 하려는 데에 있었는데도 백성들의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대동법 실시의 목적이 경비(經費)를 염출하기 위한 것인만큼 처음부터 그 뜻이 이미 미진한데 어떻게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양서의 관향(管餉)은 본래 서쪽 변경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인데, 서쪽의 일이 지금은 이미 조금 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우선 양서 백성들의 소출을 임시로 공물에 대한 부담으로 대체시킨다면, 말하기도 매우 편하고 재력도 자연 넉넉해질 것입니다.
반정 초기에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라서 의심하고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도 상당히 남아있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중신(重臣)들이 각기 군관을 대동하고 궐내에 숙직하며 비상의 변고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정묘 호란 뒤에는 지방의 무사들을 모집해 어영군(御營軍)이라 일컫고 삼동(三冬)에 번(番)을 서게 해서 방추(防秋)의 뜻을 부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도 달라졌고 일도 변하였으니 스스로 변통하여 낭비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어영군의 군관은 원래 숙직하는 일이 없으니 더욱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영군도 만일 상번(上番)하지 않는다면 번거롭게 꼭 장관(將官)을 두어 쓸데없이 늠료(廩料)를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7국(七局)의 출신(出身)034)  들을 묶어 대오를 편성한 것은 초군(哨軍)이나 다름이 없으니, 무사를 대접하는 도리가 결코 아닙니다. 그 가운데 대오에 들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다시 억지로 편입시키려 하지 말고, 혹 죽은 사람이 생기더라도 다른 출신으로 채워 보충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그 밖에도 규정 이외에 무비(武備)에 관련되어 나라의 재력을 축내는 것들은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없애거나 줄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본국의 인심은 중국과 달라 문교(文敎)로 인도하면 순순히 쉽게 따르지만 무력으로 인도하면 도리어 교활한 행동이 늘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변방의 일은 이미 안정되었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으니 무비(武備)를 참으로 소홀히 할 수는 없으나, 또한 차츰 줄여 나가면서 백성들에게 효제 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치고 농사에 힘쓰고 근본에 노력하는 방향으로 인도함으로써 조종조에서 예의로 사양하던 풍속을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뜻이 저절로 안정되고 국가의 형세가 저절로 굳건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하께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이때 호조가 공안(貢案)을 변통하고자 청했으나 상이 중대한 일이라며 난색을 표해 의견이 결정되지 않고 있었는데, 명길이 차자를 올려 그 잘못을 논술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상의 뜻을 헤아리고 한 짓이라고 기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이 한 말 중에 채납할 만한 것이 많았던 까닭에 상이 상당히 채용하였다.

 

7월 20일 갑자

태백이 나타났다.

 

오정일(吳挺一)을 이조 정랑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지평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1일 을축

태백이 나타났다.

 

유성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삼성(參星) 위로 들어갔다.

 

전 현령 권칙(權侙)에게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권칙은 서얼의 신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영평 현령(永平縣令)을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8잠(八箴)을 지어 바쳤는데, 1. 경천(敬天), 2. 휼민(恤民), 3. 수신(修身), 4. 정심(正心), 5. 납간(納諫), 6. 용인(用人), 7. 성의(誠意), 8.신종(愼終)이었다.

 

7월 25일 기사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직녀성(織女星) 위로 들어갔다.

 

심액(沈詻)을 대사헌으로, 조경(趙絅)을 대사간으로, 임전(林)을 사간으로, 이척연(李惕然)을 장령으로, 이명전(李明傳)·김중일(金重鎰)을 지평으로, 강백년(姜栢年)을 교리로, 조형(趙珩)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27일 신미

태백이 나타났다.

 

7월 29일 계유

호조 판서 민성휘(閔聖徽)가 체직되었다. 이때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호조가 소미(小米)를 도감군(都監軍) 병사들의 급료로 보충해 지급하자 군사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에 대장 구인후(具仁垕)가 그것을 말하니, 성휘가 노하여 소를 올려 변명하였는데, 도제조 김류도 소를 올려 대죄하자, 성휘가 스스로 불안해서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체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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