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8월

싸라리리 2026. 1. 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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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술

유성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으로 들어갔다.

 

정태화(鄭太和)를 예조 판서로, 원두표(元斗杓)를 호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도승지로, 신천익(愼天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2일 을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졸하였다. 유백증은 사람됨이 우직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일을 만나면 극력 말하였다. 그렇지만 후처(後妻)에게 미혹되어 그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않아 미쳐서 도망하게 하고 간 곳을 몰랐었다. 죽을 때가 임박해서는 유서(遺書)에다 제사(祭祀)를 받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 처가 마침내 그 며느리를 쫓아버렸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분하게 여겼다.

 

전 대사헌 이목(李楘)이 졸하였다. 이목은 단아하고 자상하며 대범하고 중후하였으며, 일에 임해서는 정론(正論)을 유지하려고 힘썼다. 여러 번 벼슬이 떨어지고 물리침을 당했지만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8월 5일 무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남두성(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8월 6일 기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위에서 나와 천원성 아래로 들어갔다.

 

전남도 만경(萬頃)·부안(扶安)·고부(古阜) 등지에 큰비와 우박이 내려 화곡(禾穀)이 모두 손상되었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당시 재앙과 이변이 겹쳐서 나타나 백성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는데, 위아래가 편안히 지내며 보통 일로 여겼다. 심지어 대궐 안과 대신의 집안에서는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식견이 있는 자들은 우려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8월 7일 경진

목성(木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다.

 

8월 9일 임오

김익희(金益熙)를 우부승지로, 민응협(閔應協)을 사간으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이면하(李冕夏)를 정언으로, 양만용(梁曼容)을 부응교로, 김응조(金應祖)·엄정구(嚴鼎耉)를 수찬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응교로, 이이존(李以存)을 이조 정랑으로, 민광훈(閔光勳)을 교리로, 김련(金鍊)을 판결사로 삼았다. 김련은 김자점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재능과 이력이 없는데도 갑자기 송관(訟官)의 장(長)으로 임명하였으니, 전조(銓曹)가 의망한 것이 대체로 김자점에게 아부하는 뜻에서 나왔었다.

 

애당초 김충립(金忠立)이 적정(敵情)을 전 현감 윤문거(尹文擧)에게 말하니, 윤문거가 그를 시켜 급히 관가에 가서 고발하도록 하고 자신은 즉시 석성(石城)으로 가서 현감 민진량(閔晋亮) 및 전 군수 윤형각(尹衡覺)과 함께 상의하여 상변(上變)하려고 하였다. 가는 길에 우연히 윤형각을 만나 김충립에게 들은 바를 말하였는데, 윤형각이 즉시 밀서(密書)를 방백(方伯) 임담(林墰)에게 보내고 말을 달려 이산현(尼山縣)으로 갔다. 가서 보니, 윤문거의 형 윤상거(尹商擧)가 벌써 이산현에 도착하여 김충립의 말을 현감인 유동수(柳東秀)에게 모두 말하였는데, 김충립은 그때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불러들이니 김충립이 비로소 관문(官門)에 도착하여 그 상세한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그런데 역당(逆黨)인 이석룡(李碩龍)이 당시 이산현의 초관(哨官)이 되어 김충립이 벌써 고발하였음을 듣고 밤에 유동수를 찾아가 적변(賊變)을 고발하니, 유동수는 ‘김충립의 고변(告變)은 처음에 윤문거를 인해서인데 윤문거가 또 윤형각과 함께 방백에게 알렸으니 고변한 공(功)은 전적으로 윤문거와 윤형각에게 있고 자신은 참여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석룡의 고발을 김충립보다 먼저한 것으로 해서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여 이에 감사에게 치보하기를 "김충립은 머뭇거리며 오지 않다가 사람을 시켜 협박한 뒤에야 비로소 와서 고발하였으며, 이석룡은 본래 상변하려고 오후부터 관부에 와 있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충립이 은폐한 정상이 있다고 하여 마침내 형신하여 온성(穩城)에다 유배시키고 이석룡을 수공(首功)으로 삼으니, 호서(湖西)의 사람들이 김충립이 처벌받은 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문거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3월 25일에 김충립의 딸을 산골로 들여보내는 일을 김충립에게 말하였는데 【 김충립의 딸은 바로 윤문거의 아우인 윤선거(尹宣擧)의 첩이었다. 윤선거가 당시 금산(錦山)에 있었기 때문에 김충립의 딸을 윤선거의 처소에 보내려고 하였다.】  27일 오전에 김충립이 와서 말하기를 ‘어제 하교를 받았습니다만, 곧 큰 변고가 일어날 터인데 듣지 못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고 하자, 김충립이 말하기를 ‘들으니 서울 사람 권대용(權大用)이란 자가 연산(連山)의 교생(校生) 이지험(李之馦)과 함께 모의하기를 「임경업(林慶業)이 실제로는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바야흐로 큰 역모를 거행하려 한다.」 하고, 인해서 이지험의 매부(妹夫) 홍영진(洪英振)을 시켜 유탁(柳濯) 등을 속이고 유인하게 하였다. 위아래의 사람들이 믿고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오는 27일에 용담(龍潭)에서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이 몹시 놀라 말하기를 ‘그대가 실제로 상세한 것을 아는가?’ 하니 ‘한때 위아래의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앞장 서서 말하였으며, 요즈음에는 군장(軍裝)을 구하고 짚신을 사들이는 자가 근처의 마을에 가득 찼으며, 방자하기가 극도에 달하였는데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급히 관가에 들어가 알리도록 하라.’ 하였더니, 김충립이 말하기를 ‘들으니 본현(本縣)의 아전과 관속(官屬)이 모두 적당(賊黨)에 들어갔다고 하니, 반드시 일을 미처 꺼내지도 못하고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어떻게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나도 관가에 들어갈 터이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하였더니, 김충립이 대답하고 떠났습니다. 지금 유동수(柳東秀)의 별록(別錄) 가운데에 있는 이런저런 말들은 실상을 그릇되게 속여 마치 김충립이 애당초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핍박하여 재촉한 뒤에야 비로소 말한 것처럼 하였으며, 기타 여러 가지 일의 정황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조작하고 변경시켜, 모두가 신이 김충립과 말한 내용이 아니며 또한 신이 다른 사람과 말한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동수는 신과 서로 만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한 번도 묻지 않았으니,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으며, 어느 곳에서 들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충립이 즉시 관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의 죄이거니와, 신에게 있지도 않았던 일을 가지고 공을 삼게 된다면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차지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김충립을 보내고 나서 생각하기를,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눈앞에 닥쳤는데 자신이 오활하고 완만하며 또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신이 현(縣)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결단코 난(亂)을 그치게 할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평소 윤형각(尹衡角)과 민진량(閔晋亮)이 굳세고 과감하여 갑작스런 변고에 대응하는 재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두 사람과 함께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곧장 말을 달려 석성(石城)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윤형각을 만나 김충립에게 들은 바를 모두 알리니 윤형각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민진량은 차사원으로 이미 은진(恩津)으로 떠났으니 오늘 이산(尼山)에 당도할 것이오. 내가 가서 일을 같이하는 것이 적당하겠소. 또 한편으로는 방백 및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에게 알리겠소.’ 하고, 즉시 말을 달려 떠났습니다. 신이 그제야 놀랐던 정신이 조금 안정되어 뒤따라 돌아오니 신의 형 윤상거(尹商擧)도 벌써 관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신이 이러한 즈음에 일의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공을 따지는 혐의로움만 생각하여 끝내 관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관가에 들어간 뒤의 일은 윤형각에게 달려 있는데 신이 무슨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에게 죄가 있고 공이 없음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숨길 수 없습니다. 대저 유동수가 별도로 써올린 것 가운데 다른 것은 감히 알지 못하겠으나 신을 논한 한 대목만은 실제의 자취와는 상당히 상반되기에 신은 삼가 의심스럽습니다. 이는 설왕설래하며 늘리고 보탠 말을 주워모아서 그 사이에서 주거나 빼앗기를 마음대로 하는 바가 있어 이렇게 공과 죄가 서로 섞이도록 한 것에 불과합니다. 최근에 조정에서 이미 김충립이 즉시 관가에 들어가 고하지 않은 죄를 다스렸습니다. 신은 또한 김충립보다 뒤에 관가에 들어갔으니, 어찌 감히 죄를 공으로 만들어 분주하게 힘껏 주선한 사람의 반열에 외람되이 끼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그대의 뜻과 그대의 공로를 갖춰 알고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대는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인해서 김충립을 중도(中道)로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다.

 

8월 10일 계미

간원이 아뢰기를,
"판결사 김련(金鍊)은 비록 정훈(正勳)이기는 하나 재능과 명망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본직에 임명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할 리가 조금도 없으니 우선 가한가 시험해 보는 것이 옳다."
하였다.

 

8월 12일 을유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민성휘(閔聖徽)를 형조 판서로, 이석룡(李碩龍)을 가선 대부 경양군(慶陽君)으로 삼았다.

 

8월 13일 병술

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14일 정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홍청 감사 임담을 평안 감사로, 남선(南銑)을 홍청 감사로, 곽지흠(郭之欽)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15일 무자

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16일 기축

유거(柳椐)를 정언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경기의 일자 오결(一字五結)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진실로 빠진 전결을 찾고 백성들의 부담을 고르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양전(量田)과 다름이 없어 경기 백성들의 소요가 끝이 없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該曹)가 이른바 일자(一字)의 진기전(陳起田)을 모두 조사하여 찾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병자년035)  의 결부(結負)를 그래도 보충할 수 있다고 한 것 또한 이럴 리가 없습니다. 금년에는 각읍에 엄중히 신칙하여 가기전(加起田)을 넉넉히 찾아 결복(結卜)의 수를 보충하도록 하고 우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고쳐서 바로잡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균전(均田)에 대한 일은 이미 해조를 시켜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당시 경기 감사 한흥일(韓興一)이 난리를 겪은 뒤에 전적(田籍)이 모조리 유실되어 민간에 누락된 것이 많아 상고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이에 조정에 계문하여 금년 가을부터 민전(民田)을 개량(改量)하여 일자 오결의 법을 만들도록 청했었는데, 이른바 일자 오결이란 전지(田地) 오결을 묶어 일자(一字)를 만드는 것이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 등이 회계하기를,
"경기의 전결(田結)은, 병자년 전에 행용(行用)하던 수는 평시(平時)에 비교하여 그래도 절반은 찾았지만 지금의 결수(結數)는 병자년 전에 비교하여 겨우 3분의 1만 남았습니다. 전야(田野)의 개간은 임진년 전과 거의 서로 같은데 전결이 줄어든 것은 도리어 병자년 전의 것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번에 일자 오결로 진기(陳起)한 수를 기필코 적발하려는 것은 대체로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일자 오결 가운데 진기전(陳起田)을 모두 조사해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병자년 당시에 일군 결수는 그래도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도록 하였다. 김자점 등이 아뢰기를,
"일자 오결을 거행하는 것은 양전(量田)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이렇게 해마다 흉년이 든 때에 온편한지의 여부를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시행한다면, 부담이 균일해지기를 기필하지도 못하고 피해가 반드시 먼저 이를 것이니, 천천히 백성들의 생활이 조금 소복(蘇復)되기를 기다려 고쳐 바로잡는 일을 의논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7일 경인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8월 18일 신묘

전 대사간 홍호(洪鎬)가 졸하였다. 홍호는 경상도 함창 사람이다. 술마시기를 좋아하고 술이 거나하게 되면 번번이 발광(發狂)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본래 청렴하고 소탈하여 영욕(榮辱)과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인정해주는 자가 있었다.

 

8월 19일 임진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으며, 밤에는 목성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8월 20일 계사

번개가 쳤다.

 

8월 21일 갑오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中殿)에게 문안하였다.

 

8월 23일 병신

달무리가 동성(東星)으로 들어갔다.

 

평안도 벽동(碧潼)·이산(理山)·위원(渭原)·양덕(陽德)·강계(江界) 등의 고을에 7월에 서리가 내렸으며, 의주(義州)·구성(龜城)·운산(雲山) 등의 고을에는 바람이 크게 불고 우박이 내렸으며, 평양부(平壤府)에는 큰 우박이 내렸는데 더러는 사람의 모양과 같았다. 감사가 아뢰었다.

 

8월 26일 기해

이명(李溟)을 형조 판서로, 여이징(呂爾徵)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8월 28일 신축

우레와 번개가 쳤다.

 

상이, 난리를 겪은 뒤에 묘악(廟樂)을 오래도록 폐지한 것으로 예조에 하교하여 내년 춘향(春享)부터는 다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김광욱(金光煜)을 도승지로, 이면하(李冕夏)를 부수찬으로, 사간 민응협(閔應協)을 동래 부사로, 김원립(金元立)을 사간으로 삼았다.

 

8월 29일 임인

유성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각도성(閣道星) 아래로 들어갔다. 이때에 태백성이 낮에 보이고 가을철의 우레가 여러 번 경고하고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날마다 발생하는데도 위아래가 직무를 게을리하며 수양하고 반성하는 뜻이 없으므로 식견 있는 자들이 우려하였다.

 

함경 감사 윤이지(尹履之)가 치계하기를,
"청인 부락(淸人部落)의 억송아(億宋阿)가 본래는 경흥(慶興)의 건너편 야춘(也春) 지방에 살았었는데, 수년 동안 내려오면서 경원(慶源)의 건너편 후춘강(厚春江) 가로 옮겨서 살았으며, 그 숫자는 1천 4, 5백인데, 우지개(于知介)의 종족이 과반수이고 그들의 성질은 매우 사납습니다. 억송아가 추장(酋長)이라고는 하지만 통제할 수 없으며 후춘은 토지가 기름져 생활이 매우 넉넉하니 만약 미리 방비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점점 퍼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앞으로의 방략(方略)에 대해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진계해서 채택하여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남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기대승(奇大升)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에서 회계하기를,
"기대승의 학문과 문장은 세상에서 추중합니다. 많은 선비들이 추모하기를 마지 않으며, 이미 사우를 세우고서 사액하는 은전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는 이와 같은 일은 모두 특별한 은전에서 나왔습니다. 오직 상께서 재결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경솔하게 허락하기 어려우니 우선 시행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30일 계묘

의주 부윤 김수익(金壽翼)이 치계하였다.
"역관(譯官) 조효신(趙孝信)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중강 개시(中江開市)는 청인(淸人)이 단지 봉황성(鳳凰城) 근처의 세 보(堡)에서만 무역하도록 허락하고 북경의 장사치는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또 청병(淸兵)이 남경(南京)에서 크게 패배하고 이자성(李自成)에게 유리함을 빼앗겼는데, 군마(軍馬)가 더러 살아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모두 극도로 피곤하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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