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을사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필성(畢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회맹단(會盟壇)에 행차하였는데 아침에 제례(祭禮)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9월 3일 병오
상이 신구 공신(新舊功臣) 및 자손(子孫)을 거느리고 영국 회맹제(寧國會盟祭)를 행하였다. 밤 삼경에 유사가 행사하기를 청하니, 예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찬례(贊禮)하였다. 상이 단하(壇下)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손 씻기를 마친 뒤 준소(樽所)에 나아갔으며, 이어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세 번 향(香)을 올리고 술잔을 드린 뒤 동계(東階)로부터 내려와 다시 배위에 나아가 꿇어앉아 삽혈한 뒤에 맹서문을 읽고 상이 사배례를 행하니, 찬례가 예를 마쳤음을 아뢰었다. 상이 막차(幕次)에 나아갔다가 그대로 궁궐로 돌아왔다.
헌부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행제(行祭)할 때에 필선 유준창(柳俊昌)이 술에 취하여 의절에 실수를 하였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이석룡(李碩龍)이 훈열(勳列)에 참여한 것은 지나치게 외람되며, 이름이 3등의 훈열에 있으니 항오(行伍)의 미천한 신분으로 갑자기 당상관에 승진시킨 것은 상(賞)으로 갚아주는 은전으로는 또한 너무 후합니다. 그런데 해조가 계품하여 가선 대부를 제수하는 데 이르렀으니, 물의가 놀라고 이상하게 여길 뿐만이 아니고 크게 법례(法例)를 어겼습니다. 국가의 금석(金石) 같은 전례(典例)를 어찌 한 사람 때문에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가자(加資)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또 해조가 사리를 모르고 계품하면서 마치 전례대로 거행한 것처럼 하였으니 너무나 잘못되었습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석룡은 이미 봉군(封君)되었고 또 대제(大祭)를 거쳤는데 지금에 와서 논계(論啓)하는 것은 너무나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대간이 간쟁하기를 그만두지 않자 상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9월 4일 정미
유성이 북극성 아래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으며, 또 소미성(少微星) 위에서 나와 간방으로 들어갔다.
9월 5일 무신
상이 문과 별시(文科別試)의 초시(初試) 일소와 이소의 방방(放榜)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병자년의 중시(重試)와 별시 대거(別試對擧)에 역적 안익신(安益信)을 토벌한 경사(慶事)를 합하여 내외의 많은 선비를 모두 모아 시험보여 6백 명을 뽑았다. 상호군 이경증(李景曾), 부제학 여이징(呂爾徵), 형조 참의 유황(兪榥) 등이 일소의 공거(貢擧)를 맡아 ‘한나라 시랑 왕장이, 위현성을 후하게 양육하여 그 뜻을 굽히지 말도록 청하다.[漢侍郞王章請優養韋玄成勿枉其志]’로 표문(表文)의 제목을 삼고 ‘옛날의 임금과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리다.[流涕別舊君]’로 논문(論文)의 제목을 삼았었다. 대제학 이식(李植), 병조 참판 윤순지(尹順之), 병조 참의 채유후(蔡𥙿後) 등은 이소의 공거를 맡아 ‘당나라 예부 시랑 왕호가 곽후를 경릉에 부장하도록 바라다.[唐禮部侍郞王皡請以郭后祔葬景陵]’로 표문의 제목을 삼고 ‘황보규가 당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皇甫規恥不與黨人]’로 논문의 제목을 삼았었다. 그러자 상이 일소와 이소의 글 제목에 모두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이 있다고 하여 하교하기를,
"이 일소와 이소의 논문과 표문의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승지들은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승지 이시해(李時楷)·홍전(洪瑑)·김익희(金益熙)·이원진(李元鎭) 등이 아뢰기를,
"무릇 시소(試所)에서 글 제목을 상고하여 낼 때에는 서책을 찾아 열람하여 그 만나는 곳에 따라 제목을 삼는 것이 전례입니다. 이번의 글 제목도 우연하게 나온 듯하며 신들은 무슨 뜻이 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번의 글 제목이 옳은가, 그른가? 그대들은 공정하게 진계하고 사사로움을 따라 그른 것을 무마하려고 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시해는 일을 핑계하여 먼저 나가고, 홍전 등이 또 아뢰기를,
"양소(兩所)의 논문과 표문의 제목이 대체로 타당하지 않습니다만 이것은 전대(前代)의 일을 우연히 제출한 듯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회계하였습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파방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일소와 이소의 시관(試官)이 옛것을 인용하여 지금과 비교하면서 위에 있는 사람을 비난하고 업신여기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그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상시관(上試官)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고, 차시관(次試官)은 모두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래(李䅘)가 아뢰기를,
"참시관(參試官)과 감시관(監試官)은 어떻게 조처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같은 벌을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식·이경증 등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고, 여이징·윤순지·채유후·유황·양만용(梁曼容)·성이성(成以性)·이해창(李海昌)·이석(李晳)·서상리(徐祥履)·김식(金鉽)·홍처윤(洪處尹)·권오(權悟)·이척연(李惕然)·권령(權坽)·조형(趙珩)·유거(柳椐) 등은 아울러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도록 하였다.
승지 홍전·김익희(金益熙)·이원진(李元鎭)이 아뢰기를,
"이번에 시관의 출제는 참으로 미련하게 살피지 않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옛날의 일을 끌어다가 윗사람을 비난하고 풍자하는 것은 참으로 보통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신하의 분수와 의리로 보아 필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실정이 없는 일을 가지고 10여 명이나 관원을 파직시켜 내쫓는 것은 아마도 중도(中道)에 맞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상께서는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풀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펴서 용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관들이 세자를 비난하고 풍자하면서 강적(姜賊)을 몰래 비호하고, 여러 아랫사람들을 격동, 권장하며 선비들의 마음을 탐지, 시험했으니, 그 죄는 주벌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혹시라도 어리석고 망령된 데서 나왔을까 염려하여 말감(末減)해서 벌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대들은 놀랍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다고 여기니 그대들이 하는 짓도 매우 그르다."
하였다. 상의 뜻은 대체로 위현성의 일은 세자를 풍자한 것이고, 곽후를 부장하는 일은 강적(姜賊)을 몰래 비호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홍청도 홍주(洪州)·결성(結城)·보령(保寧) 등의 고을에 바람이 크게 불고 우박이 내려 벼가 손상되었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9월 6일 기유
천둥이 쳤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하문한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정원이 말을 꾸며서 회계하고 끝내 그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며, 시관들을 처벌하는 일에 대해서는 김익희(金益熙)가 동료들을 앞장 서서 인솔하여 거만하게 방계(防啓)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위를 업신여기고 당을 비호하는 풍습을 점점 자라게 할 수 없다. 김익희는 파직하고 동참한 승지는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매우 노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지들이 모두 황공하여 낯빛이 변하였으며 한 사람도 나와서 분변하는 자가 없었고 아뢰는 말도 모호하였는데, 김익희가 평소에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또 당론(黨論)에 준엄하였기 때문에 상이 김익희가 앞장 서서 인솔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예조가 파방에 대한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김자점이 의논드리기를,
"조정에 경사가 있어 과거를 베풀자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과거장에서 변고를 일으킨 일도 없고 또 외간(外間)에서 사사로움을 따랐다는 책망도 없으며, 방(榜)이 나온 지 여러 날 되었지만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 시관(試官)에 대한 일은 실정이 없는 데서 나왔으며 선비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 파방을 하기까지 한다면 아마도 옳은 일이 아닐 듯합니다. 지난날에, 시관에게 관계된 일인가 거자에게 관계된 일인가를 가지고 일이 관계된 데에 따라 처리하고 파방하지 말라고 한 분부가 이미 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경석, 우의정 남이웅의 의논도 대체로 영의정과 대략 같았다. 답하기를,
"윗사람을 비난하고 역적을 비호한 제목은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다. 만일 모두 혁파하기 어렵다면 일소와 이소의 방(榜)만 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일소와 이소의 글 제목 및 1등의 시권(試券)을 가져다 정원에서 불태우도록 명하였다. 시권을 불태우는 일은 고금에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승지 이시해·이래 등은 한마디 진달하여 성상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므로 비웃고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에 양소(兩所)의 시관이 모두 파출을 당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양사에서 반드시 도로 거두도록 청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김익희가 파직된 뒤부터 대간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발언하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와서 전계(前啓)를 전하자 승지 이시해가 대청(臺廳)에 글로 묻기를,
"오늘 새로 아뢸 것이 없는가?"
하니, 정언 곽지흠(郭之欽)이 답하기를,
"더 풍파를 일으킬까 염려되므로 우선 며칠 기다리겠다."
하였다. 대각(臺閣)의 기풍이 이에 이르러 완전히 없어졌다.
9월 7일 경술
유성이 삼성(參星) 위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방의 거자로서 되돌아간 사람이 많지 않으면 정시(庭試)를 베풀도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의 수의(收議)로 일소와 이소의 방(榜)을 파하도록 명하셨는데, 초시(初試)의 원수(元數) 6백 명 중에서 이미 양소(兩所)의 방을 파했으니,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는 단지 2백 명으로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지금 정시(庭試)를 베풀라는 명이 있으니 차라리 삼소의 방을 아울러 파하여 정시로 사람을 뽑아 중시(重試)의 대거(對擧)로 삼는 것이 실제로 온편하겠습니다. 일찍이 병인년036) 에도 중시의 대거로 전시를 시행하였는데 이를 파방한 뒤에 역시 정시만 베풀고 그쳤으니, 이것이 전례가 될 듯합니다. 그러나 해조(該曹)가 감히 멋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예조의 계사를 옳다고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찬성에 추증된 고 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시호를 내렸다. 당시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최경회의 시호를 내려주도록 청하였는데,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이, 최경회는 진주(晋州)에서 사절(死節)하여 나라를 위해 죽은 충의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는데 이미 고경명(高敬命)과 일체로 증직(贈職)하였다면 시호 내리는 전례도 당연히 달리할 수 없다고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9월 9일 임자
비국이 아뢰기를,
"서리 고효선(高孝善)·전존양(田存穰) 등이 본사에 간직하고 있는 군기(軍器)를 훔쳐내다가 일이 발각되어 취복하였습니다. 즉시 효시하여 일벌 백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한 신구 공신(新舊功臣)의 적장(嫡長) 가운데 준직(準職) 이상과 실행(實行) 4품으로 나이 70세 된 자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유석(柳碩)을 동부승지로, 조경(趙絅)을 대사간으로, 원진명(元振溟)·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유경창(柳慶昌)을 헌납으로, 한진(韓縝)을 정언으로, 민성휘(閔聖徽)를 형조 판서로,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삼았다. 유동수(柳東秀)·윤형각(尹衡覺)·윤문거(尹文擧)에게 아울러 통정 대부의 자계(資階)를 더하였는데, 역적 안익신(安益信) 등을 고발한 공로 때문이었다.
9월 11일 갑인
중시(重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 강백년(姜栢年) 등 7인, 무과(武科)에 지기연(池旣涓) 등 6인을 뽑았다.
9월 12일 을묘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 별시의 문과 초시는 이미 파방하였으니, 무과 초시만 파방하지 않은 것은 실로 근거가 없으며, 또 별도로 정시(庭試)를 마련하여 중시(重試)의 대거(對擧)로 삼는다면 문무의 과거는 당연히 일체로 시행해야 하니, 무과 초시도 다시 시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만약 다시 시취한다면 지방의 거자들이 반드시 오래 머물게 될 터이니, 앞서 판하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9월 13일 병진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이산(尼山)에서 고변(告變)한 공(功)은 선후의 구별이 있는데, 현감 유동수(柳東秀)가 드러나게 조작한 흔적이 있어 물의가 많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들으니, 이석룡(李碩龍)의 고변은 실제로 협박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산 호장(尼山戶長) 배대생(裵大生)·박국생(朴國生) 등이 도신(道臣)에게 정장(呈狀)하기를 ‘이석룡의 고변은 그의 본 마음이 아니고 우리 두 사람이 몰아붙여서 나온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석룡이 녹훈(錄勳)된 것은 이미 전혀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초자(超資)하여 봉군(封君)하기까지 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배대생과 박국생을 잡아다 추문하여 그 실상을 안 뒤에 다시 더 조사하여 유동수의 속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배대생의 일은 이럴 리가 없을 듯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청도 보령(保寧)의 유생 김영후(金榮後)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현명한 이를 가려 세자로 삼아 온 나라의 민심을 따르시고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왕세자는 훌륭한 자질이 일찍 드러나고 어진 소문이 일찍 전파되어 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하례드리지 않는 이가 없는데, 무릇 신료로서 누가 아끼며 떠받드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근래에 시험 제목을 잘못 출제한 일을 가지고 세자를 기롱하고 풍자했다고 여기시어 우레 같은 위엄을 크게 진동하여 비답하는 내용이 준엄해서 신하로서 차마 들을 바가 아닌 것이 있었습니다. 신은 큰 존재인 천지(天地)에 대해서도 역시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망하는 길이 한 가지뿐이 아니지만, 임금이 그 신하를 의심하고 신하가 그 임금을 의심하는 것을 위아래가 서로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위아래가 서로 해치는데도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가만히 관찰하건대 오늘날의 일은 천지가 막혀 통하지 않고, 군정(羣情)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그것이 사방에 전파되고 후세에 전해질 터인데, 어찌 이것이 자손을 위하는 계책이겠습니까. 가의(賈誼)가 이른바 ‘위를 편안히 하고 아래를 온전하게 하는 계책이 너무나 아니다.’라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성상께서는 안정된 마음으로 상세히 추구하고 이치를 살피시어 우레 같은 위엄을 거두시고 중화(中和)하는 복을 이룩하소서."
하였다. 당시 십수 명의 많은 관원이 과거 제목을 잘못 내었다는 것으로 모두 파출 당하였는데도 대신과 삼사가 한 마디의 말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고 답답하게 여겼는데, 유독 김영후만이 상소하여 그것을 말하였다.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이 상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어렵다는 기색을 지으며 청중(廳中)에 가부(可否)를 결정짓게 하니, 동부승지 유석(柳碩)이 먼저 부(否) 자를 썼다. 이에 승지들이 "요위(僚位)에서 먼저 부 자를 쓸 경우 입계할 수 없는 것이 전례이다." 하고 마침내 물리쳐버렸다.
9월 14일 정사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이산(尼山)에서 역적을 토벌할 때에 조정에서는 그 일의 상황을 상세히 모르고 단지 도신(道臣)이 올린 전후(前後)의 장계에만 의거하였는데, 도신의 장계는 모두 유동수(柳東秀)의 보고에 근거하였으니, 유동수가 속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윤문거·윤형각 등이 성(城)에 들어온 뒤에 물의가 많았는데, 모두들 ‘김충립이 형벌을 받아 멀리 귀양가고 이석룡이 녹훈되고 봉군되어 상벌이 전도되고 착오된 것은 모두 유동수가 속인 데서 연유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이 윤문거 등의 상소 내용을 가져다 보니 유동수가 속인 것이 구절마다 환히 나타났습니다. 이석룡의 고변은 윤형각이 유동수와 은밀하게 말한 뒤에 있었는데, 유동수가 처음에는 윤형각을 수공(首功)으로 삼았다가 마침내는 이석룡을 수공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첫번째로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김충립이 정말 협박을 당하여 고변하였다면 어째서 고변한 자의 대열에 함께 기록하였습니까. 김충립이 상을 받은 뒤에는 추가로 별도의 기록을 만들고 또 극죄(極罪)에 빠뜨렸으니, 이것이 두 번째 속인 것입니다. 고변자의 초사를 받을 때 이산 현리(尼山縣吏)가 기꺼이 쓰지 않으므로 석성 현감 민진량(閔晋亮)이 그의 아전을 시켜 쓰게 하였는데, 유동수가 그 아전의 죄악을 엄폐하여 숨기고 민진량이 힘써 주선한 것은 모조리 없애버렸으니, 이것이 세 번째 속인 것입니다. 윤형각은 맨 먼저 고변한 공이 있으며, 윤문거와 민진량은 그 다음이고, 유동수는 죄만 있고 공은 없으며, 김충립은 먼저 단서를 발설한 공이 있으나 뒤에 머뭇거린 죄가 있습니다. 이석룡은 애당초 역적 모의를 함께 하고 군사를 대접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행장을 꾸려 시간을 기다리다가 술에 취하여 그의 집에 누워 있었는데 배대승 등이 낌새를 알고 구박한 연후에야 비로소 고변하였으니, 고변한 것은 실제로 본정(本情)이 아니었으며, 단지 유탁(柳濯)을 체포한 공로만 있습니다. 그러니 머리에 옥관자(玉貫子)를 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또한 이미 외람됩니다. 배대생·박국생 두 아전을 잡아다 추문하여 그 실상을 알지 않을 수 없으며, 이석룡의 고변이 정말 구박한 데서 나왔다면 진실로 훈적에서 삭제하여야 마땅하며, 두 사람의 아전에게는 상을 줄 만한 공이 없지 않고, 유동수의 속인 죄 또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배대생 등의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대신이, 대간이 아뢴 내용대로 잡아다 추문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마침내 배대생·박국생 등을 잡아다 추문하니, 배대생·박국생 등이 그 당시의 곡절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상이 유동수·배대승 등을 석방하고 민진량에게 통정 대부의 계자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심액(沈詻)을 대사헌으로, 남선(南翧)을 동부승지로, 홍중보(洪重普)를 검열로 삼았다.
9월 15일 무오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청인(淸人)과 중강(中江)에서 개시(開市)하였는데, 청인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9월 18일 신유
달이 필성(畢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는 7월에 서리가 내렸고 횡성(橫城)·고성(高城)·흡곡(歙谷)·원주(原州) 등의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려 벼를 손상하였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9월 19일 임술
상이 명정전에 나아가 영국 공신(寧國功臣) 김류 등의 교서축(敎書軸)을 반급하고 인해서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난리를 겪은 뒤로 종묘의 제향(祭享)과 대소의 하례(賀禮)에 모두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풍악을 연주하게 하려고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에게 하문하기를,
"오늘의 거동은 바로 훈신을 우대하는 의식인데 풍악을 연주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김광욱이 예조 판서 정태화와 상의하여 회계하기를,
"지난해 왕세자 책봉 때에도 종묘에서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권도를 따라 풍악을 연주하게 하여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하고, 마침내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역적을 토벌하고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막대한 경사인데, 반역하는 모의가 훈구 신하에게서 나오고 고변한 사람이 모두 악한 짓을 함께 한 무리였으니 공을 기록하고 교서축을 반포하는 것은 실제 어쩔 수 없는 거사이다. 종묘의 제향에도 오히려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세자를 책봉하는 날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못하였다. 교서축을 반포하는 거사가 왕세자를 세우는 경사와 경중(輕重)이 어떠한가. 대신(臺臣)과 간관(諫官)이 정내(庭內)에 입참(入參)하여 한 사람도 그것이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8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예술-음악(音樂)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역적을 토벌하고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막대한 경사인데, 반역하는 모의가 훈구 신하에게서 나오고 고변한 사람이 모두 악한 짓을 함께 한 무리였으니 공을 기록하고 교서축을 반포하는 것은 실제 어쩔 수 없는 거사이다. 종묘의 제향에도 오히려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세자를 책봉하는 날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못하였다. 교서축을 반포하는 거사가 왕세자를 세우는 경사와 경중(輕重)이 어떠한가. 대신(臺臣)과 간관(諫官)이 정내(庭內)에 입참(入參)하여 한 사람도 그것이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9월 20일 계해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위에서 나와 성성(星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21일 갑자
화성이 여귀성(輿鬼星)으로 들어갔다.
대마도주 평의성(平義成)이 어머니 상(喪)을 당한 뒤에 강호(江戶)에서 대마도로 나오려 하자, 봉행(奉行) 등이 사서(私書)로 위문하는 사신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봉행 등의 글에,
"도주(島主)가 상(喪)을 당한 뒤에 오래도록 강호(江戶)에 머물면서 말미를 받지 못했으나 응당 9월 안으로는 대마도로 돌아옵니다. 종전에는 도주가 강호에서 한 해를 보내고 대마도로 돌아오면 조정에서 역관(譯官)을 보내어 위로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어머니 상을 당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역관을 보내어 그가 오래도록 강호에 있었음을 위로하고 그의 어머니 상사(喪事)에 조문(弔問)하게 한다면 도주는 이 사실을 대군(大君)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군은 틀림없이 조정에서 도주를 후대(厚待)한다고 여길 것이므로 반드시 도주가 강호에다 생색을 낼 수 있을 것이니 도주의 감격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비국에 하문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난날 평경직(平景直)이 죽은 뒤에 우리 나라에서 역관을 보내어 치부(致賻)하였더니, 그의 아들 평조흥(平調興)이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은사(恩賜)를 허비할 수 없어 새로 조그마한 집을 지었으니 편액(扁額)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해조가 유방원(流芳院) 세 글자를 써 주었습니다. 그런데 임술년037) 국왕(國王)의 사신이 나올 때에 평조흥이 또 이미 원당(願堂)을 얻었으니 전례대로 사송선(使送船) 1척을 보내어 향화(香火)하는 자본을 갖추어 주기를 청하면서 갖가지로 간절히 진달하므로 어쩔 수 없어 특별히 1척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의성이 잇달아 청하기를 ‘평조흥의 아비 평경직이 사소한 공으로 이미 도서(圖書)를 받아 사송선이 왕래하는데 저의 아비 평의지(平義智)는 평경직보다 공이 뛰어난데도 홀로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어찌 유감이 없겠습니까.’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1척을 주어 만송원(萬松院)이라 일컫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접대하는 비용이 한이 없습니다. 유방원과 만송원의 폐단은 모두 한 차례 위문한 데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관백(關白)이나 도주(島主)의 상(喪)에 역시 조제(吊祭)하는 예(禮)나 위부(慰賻)한 일이 없었으니, 지금 잘못된 전례를 따라서 또 뒤폐단을 끼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찍이 병자년 난리 전에 도주가 오래도록 강호에 있다가 되돌아온 뒤에 홍희남(洪喜男)을 보내서 위문하게 했다고 하니, 지금도 여기에 의거하여 일을 아는 역관(譯官)을 차견(差遣)하여 그가 왕래한 노고를 위로하고 도주가 상(喪)을 당한 일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주가 오래도록 강호(江戶)에 있지 않았으니 난리 전의 규례(規例)와는 다른 듯하다. 보내지 말라."
하였다.
9월 24일 정묘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25일 무진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9월 27일 경오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삼기성(參旗星) 위로 들어갔다.
9월 28일 신미
응교 김진(金振), 부교리 홍명하(洪命夏), 수찬 김응조(金應祖), 부수찬 엄정구(嚴鼎耉) 등이 상차하기를,
"지극히 높은 것은 하늘이며 지극히 낮은 것은 땅입니다. 음양의 기운이 감응이 되면 하늘과 땅이 교통하여 만물이 형통하게 되고 음양의 기운이 어긋나면 하늘과 땅이 교통되지 않아 만물이 통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비태(否泰)가 나뉘어지는 까닭인 것입니다. 아, 군신(君臣) 또한 하나의 하늘과 땅입니다. 높고 낮은 지위가 현격하고 위아래의 분수가 엄정하지만, 서로 기다려 함께 다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응하여 화합하게 되면 형통해지고 어긋나서 막히면 비색하게 되니, 이것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이 나뉘어지는 까닭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군신이 서로 함께 함을 귀하게 여긴 것은 성의(誠意)를 서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의를 서로 믿지 못하면 위에서는 그 아래를 의심하게 되고 아래에서는 그 힘을 다하지 않게 되니, 무슨 일을 말하겠으며 무슨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위와 아래가 막히고 가리어 혼란과 멸망이 따르게 되는 경우를 지난날의 문헌을 낱낱이 상고하면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오늘날 나라 일이 불행하게도 그것과 가깝습니다. 가만히 요즈음의 군신 상하를 관찰하건대 정의(情意)가 서로 막혀 일마다 번번이 의심을 하여 신하들이 두려워하고 분위기가 삭막하니, 이것이 어찌 평소 신민(臣民)들이 성세(聖世)에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우선 요즈음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응시(李應蓍)의 말은 망령된 점은 있습니다만 국사를 말했다가 죄를 얻은 것은 성세의 일이 아닙니다. 이응시는 성상만을 믿고 마음에 품은 것을 다 진달하려는 생각으로 망령되게 소장(疏章)으로 진술하다가 문득 우레와 같은 위엄에 저촉되어 먼 지역에 귀양가 영원히 나라를 떠난 혼(魂)이 되었으니, 하늘과 땅처럼 포용하는 덕(德)에 있어서 어찌 손상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아마도 대성인(大聖人)의 가엾게 여기는 어진 마음에 유감이 있을 듯합니다.
지난번 양소(兩所)의 시관(試官)이 출제를 잘못했다는 것으로 모두 파출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아, 위를 업신여기고 역적을 비호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데 전하께서는 18명이나 되는 많은 관원에게 갑자기 그 죄를 씌우십니까. 그들이 출제할 때에 혹시라도 그 사이에 의도가 있었다면 그 죄는 참으로 주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어떻게 파출만하고 말 뿐이겠습니까. 우연히 고사(故事)를 열거한 것이 전혀 실정이 없는 데서 나왔다면 신하된 자가 이 죄명을 지고 하늘과 땅 사이에 살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전하께서는 아직도 다소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왕세자의 영명(英明)하고 인효(仁孝)함이 고금에 뛰어나 위호(位號)가 한번 바르게 되자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경하하며 인심이 흡족하게 여겨 조야(朝野)가 함께 경사스러워하고 심지어 심산 궁곡에서도 기뻐하며 서로 하례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누가 감히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진실로 의논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해(利害)로써 말하더라 자신을 아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들이 속으로 위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이미 죽어 뼈만 남은 강적(姜賊)을 몰래 비호하며 뜻을 문자(文字)에 붙여 중앙과 지방에 전파하면서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주벌의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것은 의도가 있었던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실정이 없었던 데서 나온 것임을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실정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은 바로 살피지 않았음을 말함이니 살피지 않은 것으로 처벌한다면 가하겠지만, 부도(不道)의 죄로 신하들의 죄안을 만드는 데 이르렀으니 또한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 강적을 처단한 일은 국론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군신 사이에 의심하고 멀리하는 풍조가 아직도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마침내 온 조정이 의심하는 데 이르렀으니, 국가의 불행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옥후(玉候)가 불편하신 뒤로는 오래도록 경석(經席)을 폐하고 신료를 드물게 접견하시니, 상하의 심정을 소통하면서 치평(治平)의 도리를 강론할 방법이 없습니다. 신들이 감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전하께서 한가하게 계실 때에는 무슨 일을 유념하며 무슨 책을 열람하십니까?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한 자질로 구구한 글공부를 취할 필요는 없겠으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할 수 없으며 정치를 하는 근원은 깨끗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전혀 폐하고 세월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옥후가 화평한 때에 가끔 편전에 나아가 신료들을 만나 경학(經學)을 강론하시되, 더욱 본원(本源)에 뜻을 두고 득실(得失)을 물어 미치지 못하는 점을 가다듬으신다면 위에서는 의심하는 바가 없고 아래서는 숨기는 바가 없게 되어 군신 사이에 의심하고 멀리하는 기풍이 환하게 풀리고 조정에 화기가 가득해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상하가 서로 믿게 되고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융성하지 않겠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모두 알았다. 차자 끝 부분에 진달한 것은 의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차사는 홍명하(洪命夏)의 글이었다.
9월 29일 임신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이시만(李時萬)을 사간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11월 (0) | 2026.01.06 |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10월 (0)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8월 (1)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7월 (1)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6월 (1)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