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10월

싸라리리 2026. 1. 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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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갑술

제주 목사 유정익(柳廷益)이 치계하기를,
"정의현(旌義縣)의 세공선(歲貢船)이 추자도(楸子島)에 도착하였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되어 공물(貢物)을 싣고 가던 아전 강응길(康應吉) 등 30인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10월 3일 을해

번개가 쳤다.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中殿)에게 문안하였다.

 

상이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대간이 지금 이석룡의 고변한 일을 논하면서 배대승 등을 잡아다 추문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배대승의 초사(招辭)로 관찰하면 이석룡이 역적 모의를 배대승에게 말한 것은 서로 상의한 것이며 배대승에게 협박당하여 발설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는 바도 이와 같다. 다만 이석룡의 고변이 윤형각보다 뒤였는데도 유동수가 이석룡을 맨 먼저라고 하였으며, 또 유동수의 초사가 당초의 별록과도 다르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요즈음 모두들 말하기를 잔얼(殘孼)을 섬멸한 것이 어찌 녹공까지 할 만한 일이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모두 필부(匹夫)로서 마침내 진(秦)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며 명(明)나라의 유적(流賊)은 마침내 천하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저 당(唐)나라의 안록산(安祿山)이나 우리 나라의 이괄(李适) 같은 역적이 된 연후라야 대적(大賊)이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녹훈을 도로 거두고 잡아다 추문하면 아마도 이로부터 상변하는 자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유동수는 공은 있지만 그의 잘못도 없지 않다. 그리고 또 윤문거는 변고를 들었으면 곧바로 관아에 나아가 말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하고 즉시 직접 고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고변했다는 이름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나 일이 매우 중대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는가. 그도 역시 힘을 다하지는 않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팔도의 성지(城池)가 날마다 점점 무너져가고 있다. 지난번 호서(湖西)의 역변(逆變)에 감사도 몸을 감출 곳이 없었으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다. 청나라 역시 무너진 데를 수축하는 것을 어찌 그르다고 하겠는가. 청나라에 요청해서라도 형세로 보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수령은 무너지는 대로 즉시 수축하는 것이 당연하며 반드시 조정에 아뢰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의 수령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평시에도 오히려 늦추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구나 지금처럼 어렵고 위태로운 때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에게는 단지 나오느냐 들어가느냐의 두 길이 있을 뿐이니, 만약 나와서 벼슬한다면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며 벼슬하지 않는다면 또한 물러나서 산림(山林)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의 사대부는 잠깐 나왔다가 바로 들어가며 저것은 사양하고 이것은 받으며, 정사(呈辭)와 상소가 날마다 소란스럽기만 하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가 없다. 전조(銓曹)는 어찌하여 이런 무리를 물리치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이를 거두어 기용하지 않으며, 대신은 또 어찌하여 가볍게 보아 넘기고 바로잡지 않는가? 변성(邊城) 중에 믿을 만한 곳이 없고 정신(廷臣) 중에 국가에 몸을 바칠 사람이 없으니 밤중에 생각하면 혼자서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요즈음 대관(臺官)이 고의로 일을 저질러 체직을 당하는 풍습도 역시 한심스러운 일이다. 전계(前啓)를 진달하지 않고 이튿날 인피하여 체직당하니, 이는 마음가짐에 관계되는 것이다. 일부러 범하는 사람은 일체 다시 임명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옛날에는 대간이 된 자는 6, 7년 동안이나 있었는데 오늘날의 대간은 6, 7일도 있지 않는다."
하였다. 이조 참판 이기조(李基祚)가 대죄하기를,
"요즈음 조신(朝臣)은 추문을 받는 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가려서 의망하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어찌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분변하지 않고 뒤섞어서 의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하는 바는 뒤섞어서 의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침체되어 있는 자 중에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번 과거 제목에 대한 일은 어떠한가? 곽태후(郭太后)가 궁비(宮婢)에게 모함당하여 정당하게 죽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여 오늘날에 비교하였으니, 그 의도가 흉칙하지 않은가. 【 일소의 표제(表題)는 곽태후의 일인데, 위에 보였다.】 강가(姜哥)를 신구(伸救)한 자를 당인(黨人)에 비교하고 【 이소의 논제(論題)는 황보규(皇甫規)가 당인(黨人)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었다.】 이경여(李敬輿)를 요숭(姚崇)에게 비교하였는데, 【 일소의 논에 옛 임금과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제목을 삼았는데, 요숭(姚崇)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경여도 눈물을 흘렸다는 것인가? 그러나 혹 그 문제가 어리석고 망령된 데서 나왔을 수도 있겠기에 더 따져 다스리지 않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번 옥당의 차자에 ‘지금 누가 강씨(姜氏)를 위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도 이응시(李應蓍)의 일에 이르러서는 온 힘을 다해 구원하였다. 대저 이응시가 누구를 위하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기필코 이응시를 죄주려고 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필코 이 길을 열려고 하여 구원하고 비호하지 않음이 없다. 몇 해를 다투어 간한다 하더라도 결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심하고 멀리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국가의 일이 어떻게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정한 뒤부터 언제나 붕당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염려하였기 때문에 내가 타파하려고 하였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붕당을 짓는 폐단이 요즈음 더욱 심하여 나랏일이 이미 구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이시백이 아뢰기를,
"상께서 매번 사람들이 어떠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시는데 아마도 임금이 말할 만한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나라를 일으키거나 나라를 잃는 것은 임금의 한마디 말에 달려 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강석기(姜碩期)와 서로 친했다고 하여 번번이 그가 강가(姜哥)를 신구한다고 의심한다면, 지금의 사대부는 모두 장유(張維)와 서로 절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인데 감히 강가를 위하여 이렇게 위를 업신여기는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자점이 또 시관의 일을 분변하여 진달하여 마지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대제학이 만약 출제하였다면 참시관이 어떻게 감히 어기겠는가. 이식(李植)의 죄는 오늘날의 일뿐이 아니다. 당초 세자를 세우던 때에 시험삼아 원손(元孫)의 사람됨을 하문하였더니, 감히 영매(英邁)하다는 것으로 칭찬하였다. 그 아이의 지혜롭지 못함을 이식이 어찌 몰라서 이와 같이 칭찬했겠는가. 다른 사람의 자식이라도 감히 임금 앞에서는 속이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그 손자를 그 할아버지 앞에서 속이려 한단 말인가."
하였다.

 

10월 4일 병자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오준(吳竣)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오준은 본래 재능과 식견이 없었는데 젊어서 한호(韓濩)의 필법(筆法)을 익혀 자획(字劃)이 매우 정교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비지(碑誌)를 여러 번 써서 번번이 자급이 더해졌다. 정언황(丁彦璜)을 우부승지로, 홍명하(洪命夏)를 헌납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유경창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단아하여 들뜨거나 조급한 습관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인정하였다.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판윤 이상과 함께 빈청(賓廳)에 와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전부터 대제학을 권점할 때에는 반드시 전 대제학으로 하여금 천망하게 하였습니다. 선조조(宣祖朝) 기해년에 대제학을 권점하라는 명이 있었을 때에 고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전임 대제학으로서 좌의정에서 체임되어 마침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그 당시 사유를 갖추어 계청하여 사관을 이항복의 집에 보내어 천망하여 오도록 하였으며, 계해년038)  에는 상신 이정귀(李廷龜)가 전전 대제학으로서 천망하였으며, 정축년039)  에는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 역시 전전 대제학으로서 천망하였고, 지난번에는 대신 가운데 이경석(李景奭)이 막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역시 천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 대제학 이식(李植)은 죄를 지어 지방에 있고, 전전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은 병이 위중하여 전남도(全南道)에 있습니다. 대신 가운데는 이경석이 막 대제학을 거쳤으니 전례대로 천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오늘 우의정이 마침 병이 들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대제학을 권점할 때 대신 한 사람이 혼자 참여하여 권점한 사례는 없습니다. 우의정이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불러다 권점하도록 명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판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하여 사양하기를,
"신은 이제 막 체임된 자가 아닙니다. 전전에 이미 거친 자로 말한다면 노성한 두 대신이 있습니다. 【 김류와 최명길을 가리킨다.】  만약 두 대신에게 명하여 함께 의논하게 한다면 사림(詞林)의 철장(哲匠)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전례대로 천망하게 하여 조경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10월 5일 정축

화성이 목성에 합쳐졌다.

 

전남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누락된 전지(田地) 2만 5천 결을 찾아서 아뢰었다.

 

10월 6일 무인

정시(庭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 오핵(吳翮) 등 7인을, 무과(武科)에 신경로(辛景輅) 등 162인을 뽑았다.

 

10월 7일 기묘

상이 평안 감사 임담(林墰)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난번 역적의 변고가 일어났을 적에 경이 힘을 다하여 초멸하고 체포하여 종묘 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경의 충성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니, 임담이 대답하기를,
"신은 변고가 일어난 초기에 미리 알지 못하였고 일이 끝난 뒤에도 잘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죄할 겨를도 없는데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하유가 정도에 지나치니 더욱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 연후에야 흉도(凶徒)가 시키고 유인하는 말을 따르게 된다. 양안(量案)이 양남(兩南)보다 지나친 것이 아닌가? 요역이 다른 도보다 무거운 게 아닌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그전부터 영남과 호서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간의 물정(物情)을 대략이나마 들어서 압니다. 원래 정해진 호서의 공역(貢役)은 다른 도보다 훨씬 무겁고 영남은 호서와 비교하여 매우 가볍지만 토질이 척박하고 주민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래도 지탱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수축하는 것은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니, 내가 경에게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있음을 알았다. 그 성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성이 직로(直路)의 길목에 있어 지리상으로 험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요충지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감사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 성 안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들으니, 유근(柳根)이 감사일 때에 쌓은 것인데 폐기하고 수축하지 않은 지가 이미 40여 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병(軍兵)은 몇 사람이면 지킬 수 있겠는가?"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5인으로 한 곳의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한다면 5천 명은 써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새로 맡은 직임은 국가의 막중한 임무이다. 무슨 진달할 말이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걱정되는 것은 북경(北京)에 왕래하는 고마(雇馬)에 대한 역(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인(淸人)이 벌써 북경으로 들어갔으니 우리 나라로서는 눈앞에 급박함은 없는 듯하지만 요즈음 재앙과 이변이 너무 심하여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미리 대비해놓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할 수 없으니, 감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까지 양서(兩西)에는 모두 한 시대의 재능과 명망이 있는 이를 기용하였는데, 그들이 하는 바를 관찰해 보니 모두 착실하지 않았고 성지(城池)에 이르러서는 무너지도록 버려 두었으니 만약 사변이 있다면 앞으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기묘년에 신이 서로(西路)에 사명을 받들고 여러 곳의 성지를 낱낱이 관찰하였을 때에는 심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무너진 곳이 넓고 커서 한꺼번에 역사를 일으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백성들이 심양(瀋陽)에 수응(酬應)하는 역사로 모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감사의 직책은 오직 출척을 분명히 하는 것이니,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서쪽 지방의 인심은 본래 순박하다고 일컬어졌는데, 정축년부터 청나라와 관계를 맺었으며, 조정에서 이 무리들이 주선하는 힘에 의지하였다 하여 대우하기를 은혜로 하였기 때문에 점차로 거스르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또 관향(管餉)하는 데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매우 많아 억제시키면 원망이 생기고 내버려두면 폐단이 일어나 번갈아가며 서로 이익을 다투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서쪽 지방 백성들의 원망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과 결탁하여 심복이 된 자들이 대부분 관리를 업신여긴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최득남(崔得男)을 죽일 때 정유성(鄭維城) 한 사람만이 아주 분명하게 조사하였다. 그 당시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는 자들도 겁내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사람으로서 담(膽)이 크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였다. 임담이 또 서쪽 지방의 공물에 대한 폐단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도에 가서 일의 형편을 상세히 헤아려 계문하라."
하였다.

 

10월 8일 경진

전남도의 진휼곡 2천 석을 굶주린 제주(濟州)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진휼하도록 하였다. 제주 목사 유정익(柳廷益)이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모두 육지에서 빌어먹기를 바란다고 아뢰고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에 비국이 의논하여 곡식을 옮겨서 진휼하고 섬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국가에서 일찍이 매년 연말에 당상관의 아내로 나이 70세 이상인 자를 뽑아 세찬(歲饌)을 제급(題給)하였었는데, 난리를 겪은 이후로는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예조가, 내년에는 옛것을 회복하는 일이 많으니 과부를 돌보고 늙은이를 우대하는 법을 규례대로 다시 시행하도록 계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9일 신사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으며, 밤에는 유성이 북두성의 제5성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1일 계미

유성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헌납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것은 책임이 중대합니다. 더구나 왕세자의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조석으로 여는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할 관원을 가려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선 이위(李椲)가 일을 처리하는 국량이 있다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동궁을 보도하는 지위에는 합당하지 않으며 서연에서 개강(開講)하는 즈음에 구두(口讀)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체임을 논하려고 했는데 사간 이시만(李時萬)은 자기가 얼마 전에 요석(僚席)에서 떠났다는 것으로 혐의를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으니, 이는 모두 신이 가볍게 보인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이시만이 아뢰기를,
"동료가 필선 이위는 춘방(春坊)의 강관(講官)으로 적합하지 않으니 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막 춘방의 직임을 거쳤기에 합당하지 않은 혐의가 있고 보면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어느 여가에 남을 논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위는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지지만 진강을 잘하지 못한 것은 공죄(公罪)에 관계되니, 이위로 하여금 물의가 있음을 알도록 해서 스스로 처리하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동료가 가볍게 여김을 당했다고 인피하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홍명하는 출사시키고 이시만은 체차하도록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10월 12일 갑신

청나라 사람이 와서 배 2만 6천 6백 개, 감 6천 8백 개를 요구하므로 경기·홍청·황해·평안·함경도에다 나누어 배정하였다.

 

10월 13일 을유

간원이 아뢰기를,
"필선 이위는 비록 재능과 국량이 있다 하더라도 강관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이무(李袤)가 병으로 사양하며 오지 않고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대본(大本)과 급무(急務)가 있으니, 대본은 군심(君心)이고 급무는 태자(太子)를 보익(輔翼)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급무이기 때문에 신이 가만히 그 뜻을 가져다 머리를 삼고 다음으로 신의 생각 네 조목을 말씀드리려 하니, 곧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는 것과 군신(羣臣)을 신임하는 것과 언로(言路)를 개방하는 것과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청심(淸心)과 과욕(寡欲)은 가만히 묘도(妙道)와 합쳐지니, 전하께서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하지 않아서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천재 지변과 요사하고 괴이한 일들이 춘추 시대보다 배나 되어 자식으로서 부모를 죽이는 자도 있으며 신하로서 반역을 하는 자도 있는 등, 놀랄 만한 변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신이 차마 이름지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국가의 형세가 날로 가벼워지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립니다. 두렵게 여기도록 경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매우 인애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확실하게 무슨 일은 무슨 감응이 되었다고 지목할 수 없으니, 이는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원대한 지혜로 종묘 사직의 근본이 중요하다는 것과 시세가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어 일찍 세자를 정하여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셨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춘방(春坊)의 요원(僚員)들이 모두 한 시대에서 선발되고 과목(科目)을 거쳐 출사(出仕)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본래 학문(學問)의 실력이 없습니다. 산림(山林)에는 반드시 열심히 공부한 선비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신으로 하여금 전관(銓官)과 회동(會同)하여 널리 유일(遺逸)의 인사를 구하도록 해서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열록(列錄)하기를 한결같이 선묘조(宣廟朝)에서 육조(六條)를 구비한 규정과 같이 하여 임명, 보충하는 데 대비하소서. 그리하여 조석(朝夕)으로 함께 기거하면서 그로 하여금 날마다 바른 도를 강독하게 하고 날마다 바른 말을 진달하게 하며 고금의 득실을 논란(論難)하고 인효(仁孝)의 도리를 훈도(薰陶)하고 연마하게 한다면 성인(聖人)의 공을 수립할 수 있으며 국가의 근본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억만 년토록 길이 잘 다스려지느냐는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화란(禍亂)의 혹독함이 지난 날과 같은 적이 없는데 당초 절의(節義)의 신하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정온(鄭蘊) 등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의리로 순국하였으니, 이들이야말로 이른바 평시에는 과감히 말하고 난리에는 절개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아, 명나라 3백 년 천하가 하룻밤에 멸망하였으니, 구군(舊君)에게도 복(服)을 입고 인정과 의식을 반드시 지극히 해야 하며 한번 거애(擧哀)하는 것은 그만두지 못할 바인데도 그 당시 예(禮)를 담당한 관원이 겁을 내어 겨를이 없었으니, 이 네 신하가 아니었으면 우리 조선이 문자(文字)의 나라임을 천하 후세에 어찌 알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조종조에서 아름답게 양성하신 남은 은택이며 또한 전하께서 반정(反正)하신 대의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여러 충신을 생각하여 백세(百世)에 표준을 세우시어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며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향사(鄕社)에서 제사지내도록 한다면 충혼과 원백(冤魄)이 구원(九原) 아래에서 감읍할 것입니다. 다행히 살아 있는 이는 김상헌(金尙憲) 한 사람뿐인데 의정부에 배치하셨으니, 진실로 성심(聖心)이 과연 그러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설교(雪窖)에서의 풍상(風霜)040)  에 근력이 이미 다하였으니 만절(晩節)을 후하게 허락하여 대명(大名)을 온전히 하기를 한(漢)의 봉조청(奉朝請) 같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좌하고 조호(調護)하는 일을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국사를 말하는 신하가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번번이 온당치 못한 하교를 내린다고 합니다. 상과 형벌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이 이 어떤 죄명인데 성지(聖旨)를 몽롱하게 하여 마치 말세의 임금이 권간(權奸)에게 협박당하여 감히 배척하여 말하지 못하는 듯이 한단 말입니까. 전하의 총명과 예지로 어찌 신하들의 간사하고 정직함을 모르시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지난번에 이경여(李敬輿)를 섬에다 가두고 홍무적(洪茂績)을 바닷가에 귀양보내고 심로를 먼 남쪽에다 유배시키고 이응시를 북쪽의 불모지에다 추방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신이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리로 미루어 보면 이렇습니다. 이경여는 대신(大臣)이며 대사를 계획하고 결정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결정한 대사는 당연히 대신으로 하여금 받들어 행하도록 하면 되지만 만약 소견을 묻는다면 명위(名位)가 결정되기 전에는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견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명위가 결정된 뒤에 조금이라도 옳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처벌하여야 옳으며 어찌 강등만 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규(子糾)에게 전하게 하고자 소백(小白)을 쏜 자는 관중(管仲)인데도 제(齊)나라의 중부(仲父)가 되었으며041)  , 건성(建成)에게 권하여 태종(太宗)을 죽이도록 한 자는 위징(魏徵)인데도 당인(唐人)의 귀감이 되었으니042)  , 충성을 옮겨서 이르는 곳에는 그 이치가 한가지인 것입니다. 홍무적은 언관(言官)으로 자신이 발탁되었으며, 심로는 낮췄다높였다하며 연계(連啓)하였고, 이응시는 어리석고 망령되게 소를 올렸으니 더러 과격함이 있어 전하께서 많은 노여움을 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간신(諫臣)은 심지어 그 임금을 폭군(暴君)에다 비교하였어도 처벌하지 않았었습니다. 저 홍무적 등이 벌써 정직하다는 이름을 얻었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집집마다 깨우칠 수 없는데, 모두들 언관이 죄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홍무적 등에게는 다행이며 전하에게는 재액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식 등이 시험의 출제를 잘못하여 중한 벌을 받기까지 하였는데, 신이 듣고서 간담이 저절로 떨어졌습니다. 이식 등은 전하와 휴척(休戚)을 함께한 신하로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그도 사람인데 어찌 임금을 비방하는 것이 하나의 대벽(大辟)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서 사리에 어둡게 많은 선비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출제하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겠습니까. 알고서 고의로 범하였다면 삭출(削黜)한 것은 가벼운 것이 되지만 모르고서 망령되게 했다면 파직시킨 것은 무겁습니다. 국가의 밝은 법으로 경중(輕重)의 중도를 상실한 것이 아닙니까. 전후(前後)로 죄를 결정한 것이 모두 독단에서 나왔으니, 인심이 의심하고 미혹됨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그의 관직을 체임하였다.

 

10월 14일 병술

상이 하교하기를,
"자식에게 아비의 죄를 증거대도록 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지난해에 이미 하교하여 금지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포도청에서 딸에게 아비의 죄를 증거대도록 하니 매우 잘못되었다."
하였다. 당시 포도청이 장흥고(長興庫) 고지기인 강승(姜承)이 방물(方物)로 쓰는 유둔(油芚)과 채석(彩席)을 훔친 죄로 그의 딸을 추문하여 증거를 작성하고 효시하도록 계달하였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10월 15일 정해

우박이 내리고 쌍무지개가 동방에 나타났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부름을 받고 와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임금이 윗자리에서 아래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그 한 마음을 바로잡는 데 달려 있으니, 그 마음이 올바르면 허심 탄회하게 아주 공변되어 만물이 순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즐거워할 때를 당하여 즐거워하며 노여워할 때를 당하여 노여워하고 남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며 남들이 미워하는 바를 미워하면 천리(天理)를 따라 행동하게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이 복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즐거워하고 노여워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심정이 더러 뭇 백성들이 바라는 것과 어긋나니, 아마도 전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가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신이 우선 그 큰 것을 들어 말하겠습니다.
이응시·조후량(趙後亮) 등의 일은 사람들이 다 말하는 것인데도 쟁론할수록 더욱 굳게 거절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전하께서는 기필코 죄를 주려고 하며 사람들이 모두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전하께서는 기필코 용서하려고 하시니,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항상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을 굳이 어기십니까. 조후량이 무고(誣告)한 흉악하고 참혹한 정상은 성상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닌데도 단지 염려를 지나치게 하시어 기필코 주벌해야 할 죄를 굽혀서 용서하시니, 왕법(王法)이 한번 무너지면 간흉(奸凶)이 저절로 방자해져 마침내는 반드시 난(亂)을 부르게 된다는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응시에 대한 일은 여러 신료들이 모두 말하였습니다.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려고 하였으니, 자신을 잊고 임금을 사랑한 충성은 가상하게 여길 만한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아주 심하게 의심하고 아주 무겁게 죄를 주셨습니다. 이는 모두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응시가, 귀양간 신하를 용서하도록 주청하고 제배에 관한 실수에 대해 심하게 배척한 것은 그의 마음이 공정했을 뿐이며 진실되어 딴 마음이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죄인을 비호하고 사론(邪論)에 아부한다고 여기셨습니다. 이응시가 바른 선비라면 이와 같이 형편없는 짓을 했을 리가 없고 이응시가 간사한 사람이라면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영리(營利)를 탐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기꺼이 대항하여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고 스스로 대죄에 빠지겠습니까. 성인(聖人)은 남이 나를 속이리라고 미리 헤아리지 않고, 남이 나를 믿지 않으리라고 억측하지 않는데도 진실과 거짓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마음이 바르고 이치가 분명해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치로 사물을 관찰하지 않으시고 오직 억측과 미리 헤아리는 것으로만 명철함을 삼아, 신하들이 언제나 애매한 죄를 입게 되면서도 감히 아뢰지 못하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상소 끝부분에서 진달한 바에 이르러서는, 가만히 여항의 말을 듣고 성상을 위하여 깊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염려함이 충애(忠愛)의 지극이 아님이 없는데, 어떻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문득 위엄스런 노여움을 더할 수 있습니까. 대저 신하가 그 임금을 경계함에 있어서 말이 격렬하고 절실한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禹)가 순(舜)에게 경계하기를 ‘단주(丹朱)처럼 거만하며 게으르게 놀기만을 좋아하지 마소서.’ 하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상왕 수(商王受)가 미란(迷亂)하여 주덕(酒德)에 빠진 것처럼 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순과 성왕이 어찌 이런 일이 었었겠습니까. 후세에서도 그 임금을 걸·주 및 환왕(桓王)과 영왕(靈王)에다 비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만 당시의 군주가 그를 처벌하지 않아 후세의 미담이 되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 섬기는 도리가 부인이나 환관이 하는 충성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 옛날부터 아무리 무도한 시대라 하더라도 일찍이 간하는 자를 죽이지는 않았으니, 간하는 자를 죽이고서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금 이응시가 차가운 바람과 서리를 덮어쓰고 먼 불모지로 쫓겨가다가 도로에서 쓰러진다면 이는 성조(聖朝)에서 갑자기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허심 탄회하게 사리를 관찰하며 노여움을 잊고 정상을 헤아리시면 반드시 바로 깨닫고 환히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요즈음 고관(考官)이 처벌 받은 데 대하여 더욱 탄식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양소(兩所)의 출제를 의도를 가지고 보면 모두 혐의스러운 데 가까운 듯하지만 침착한 마음으로 천천히 캐어보면 그 실정은 저절로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분수와 의리는 매우 엄격하여 임금에게 과실이 있으면 앞에서 바로 쟁론하는 것이 진실로 그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감히 다른 일을 빌려서 은연중에 비방하는 마음을 두었다는 것은 인정과 천리로 따져보더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비록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쓴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못할 바인데, 더구나 명지(明旨)를 받들어 많은 선비를 시험보이는 것이 이 어떤 일이기에 방자하게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는 실정없이 우연히 나온 일로서 사리에 어두워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중죄(重罪)를 가하셨을 뿐만 아니고 심지어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 의심하고 멀리함이 날마다 심해져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될까 염려됩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떤 시대로 보십니까? 하늘은 위에서 노여워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곤궁하여 인심은 이미 떠나고 나라의 형세는 위태로우니, 외구의 침략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위태롭게 망해가는 화가 임박하였습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을 합해서 서로 가다듬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임금의 위엄은 날마다 치솟고 선비들의 기세는 날마다 꺾여 사람마다 두려워하면서 나아갈 곳을 모르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신이 밤중에 생각하여도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겠는데, 전하께서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은 내가 의당 유념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잘 헤아려서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무자

당시 양사가 이응시의 일을 연계한 지가 벌써 6개월이 되었으나 그치지 않으므로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간원에 의논하지도 않고 갑자기 먼저 정론(停論)하자, 대사간 조석윤이 아뢰기를,
"이응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을 신이 극력 진달하자마자 헌부가 도로 명을 거두도록 하는 주청을 어제 벌써 정지하였습니다. 무릇 대간이 일을 논하는 것은 한 때의 공의(公議)에서 나오는 것이니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경솔하게 정지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이응시의 일은 실로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와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관계되니, 한해가 다 지나간다 하더라도 결단코 중지할 수 없습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신하된 도리로는 당연히 힘써 성의를 쌓아 상세하게 진달하고 분변하여 감동시켜 돌이키도록 기약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입니다. 만약 서로 버티는 것이 보탬이 없고 임금을 귀찮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으로 핑계대어 갑자기 사람들을 거느리고 물러난다면 임금을 무능하게 여기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군자는 남을 사랑하되 덕(德)으로 하며 당장 편한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면서 덕으로 하지 않고 당장 편한 것으로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양사가 함께 내놓은 의논이 오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합계(合啓)하여 힘껏 간하는 것이 바로 논사(論事)하는 체통인데, 몇 달이 되도록 끌면서 끝내 이런 일은 하지 않고 간략한 문자로 전례대로 연계(連啓)만 하였으니,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바로잡지 못하고 마침내 허망하게 되어버린 것도 당연합니다.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사리로 말하더라도, 양사가 함께 내놓은 의논은 그것을 정지시키는 것도 서로 함께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신이 겨우 지방에서 와서 바야흐로 명을 기다리는 중에 있는데도 헌부의 정계가 꼭 이때에 있었으니, 신이 비록 보잘것없는 자이기는 하나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지금 신이 사람됨은 보잘것없고 말은 무게가 없어서 외롭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앞으로 어떻게 공론을 유지시키고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겠습니까. 결코 외람되게 언관의 지위에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대사간 조석윤이 피혐한 일은 바로 온 나라의 공론인데도 뜻밖에 지금 아뢴 대로 하라는 명이 예외에서 나왔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간신(諫臣)을 대우한 도리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푸시고 침착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례가 없지 않으니 그대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전지를 받듦에 이르러서는 파직하지 말고 그의 관직만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7일 기축

대사헌 김남중, 지평 곽지흠이 아뢰기를,
"이응시의 일로 논집(論執)한 지가 이미 몇 달이 지났습니다. 날마다 번독하고 소요스럽게 하였지만 천청은 더욱 멀기만 하여 위로는 전하의 과실만 보태고 아래로는 대각(臺閣)의 체면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지하는 것이 옳다는 의논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있었으며 애당초 합계(合啓)하지 않았으므로 간원과 의논할 필요가 없을 듯싶어 본부에서만 의논을 정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사간 조석윤이 이것을 그르다고 하며 인피하기까지 했는데, 말의 뜻이 준절(峻截)하고 드러내어 비난과 배척을 하였습니다. 신들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민첩하지 못하여 오직 번독하고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미안한 줄만 알고 많은 불충한 일이 모여 신들의 죄안(罪案)이 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론(停論)하던 날에 조석윤의 상소 내용을 미처 보지 못하였으니, 이응시의 일을 극력 진달하는 여부(與否)를 어떻게 먼저 알고 함께 상의하겠습니까. 한 해가 다 간다 하더라도 결코 정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진실로 당당한 정론(正論)인데, 신들이 사리에 어둡고 경솔하게 한 실수로 또 한바탕 시끄러운 단서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간장(諫長)을 특별히 체임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이 또한 성명(聖明)의 허물입니다. 그러니 결코 편안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사간 조석윤이 이응시의 일을 성의를 다하여 봉장(封章)하였는데 헌부의 관원이 공론을 돌보지 않고 앞질러 먼저 정계하였으니, 조석윤이 피혐한 것은 사리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뢴 대로 하라는 전교가 내려져 대각이 기가 꺾이고 언로가 막혔으니, 그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전 대사간 조석윤을 체차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양사가 함께 내놓은 의논을 간원에 통보하지도 않고 앞질러 먼저 정계하였으니, 대사헌 김남중, 지평 곽지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응시가 강적(姜賊)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시세에 아첨하여 총애를 받으려 하였으니, 그의 마음 둔 바가 실로 음흉한데도 그대들은 공론을 빌려 사사로움을 추구하며 반드시 세상에 아첨하는 자로 하여금 즐겁게 따르도록 하려고 하니, 이와 같이 무리를 지어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대사헌 김남중 등은 조금도 잘못이 없는데 이응시를 위해서 기필코 배척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꺼리는 바가 없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헌납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응시에 대하여 도로 거두도록 한 주청은 바로 나라의 공론인데, 삼사(三司)가 논열한 것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이응시의 입장을 위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전 대사간 조석윤이 지방에서 들어와 막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헌부의 관원이 앞질러 먼저 정계하였으니, 공론을 가지고 논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비답을 받으니 심지어 한 무리를 지어 무엇을 하려는가 하며 그대들은 꺼림이 없다는 등의 말로 전교를 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군신 사이에 성의(誠意)가 서로 막혀 사건을 따라 논열(論列)하면 번번이 전하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신의 죄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원립(金元立)을 사간으로, 김욱(金頊)을 지평으로, 이시만(李時萬)을 부교리로, 이항(李杭)을 검열로 삼았다.

 

10월 18일 경인

간원이, 대사간 조석윤을 체차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도록 연계(連啓)하고, 또 대사헌 김남중, 지평 곽지흠을 체차하고 헌납 홍명하를 출사시키도록 청하자, 상이 홍명하의 출사만 허락하고, 조석윤·김남중 등의 일은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10월 21일 계사

달이 형혹성을 범하였다.

 

10월 22일 갑오

청나라 차인(差人)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배[梨]와 감[柿] 수만 개와 화피(樺皮) 수만 장과 사냥개 10마리를 바치도록 급히 독촉하였므로, 사고 실어나르느라 주현(州縣)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김남중을 면직시켰다.

 

달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범하였다.

 

10월 23일 을미

헌납 홍명하가 처음으로 정사(呈辭)하자, 즉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4일 병신

심액(沈詻)을 대사헌으로, 조경을 대사간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응교로, 정언원(丁彦瑗)을 지평으로,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이무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무는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이고 이경전(李慶全)의 아들인데 사람들이 성각(騂角)043)  으로 일컬었으니, 그의 지론(持論)이 아주 올바르기 때문이었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10월 25일 정유

유성이 벽성(璧星) 아래에서 나와 묘성(昴星) 위로 들어갔다.

 

예조가, 내년부터 각도의 삭선(朔膳) 및 경각사(京各司) 공상(供上) 등의 물품을 모두 그전대로 회복하도록 청하니, 상이 처음으로 허락하였는데, 대체로 정축년044)   이후로 모두 줄였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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