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기사
【문신(文臣) 중시(重試)에서 이대엽(李大燁) 등 7명을 뽑았다. 【그 다음은 박정길(朴鼎吉), 유여각(柳汝恪), 최호(崔濩), 유윤(柳淪), 유혁(柳㴒), 양경우(梁慶遇)였는데, 모두 이이첨(李爾瞻)의 문객(門客)들이었다. 이대엽은 직제학으로서 당상으로 승진하였는데, 그의 표사(表詞)는 이재영(李再榮)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조반정 뒤에 소급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
11월 3일 경오
전교하였다. "최유함(崔有涵)을 보방(保放)하도록 하라."
"최유함(崔有涵)을 보방(保放)하도록 하라."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유성(柳惺)을 법률대로 처단하고 최천건(崔天健)과 허욱(許頊)과 성영(成泳)을 위리 안치시키고 서성(徐渻)과 박동량(朴東亮)과 신흠(申欽)과 한준겸(韓浚謙)을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가 형효갑(邢孝甲)의 일을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진이를 높이는 것은 구경(九經)024) 가운데의 하나이니,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이와 덕(德)이 모두 넉넉하기로 좌상 정인홍(鄭仁弘)만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초야에 물러나 지낸 지가 1년이 다 되도록 직명(職名)만 헛되이 띠고 있고 상께서도 거의 부르지 않았습니다. 곧바른 의논이 엄해도 사악한 의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역적 토벌이 엄해도 역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서둘러 정인홍을 불러들여서 보필을 다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형효갑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註 024] 구경(九經) : 정치를 하는 데에 필요한 아홉 가지 덕목(德目).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 《중용(中庸)》 20장 12절.
"어진이를 높이는 것은 구경(九經)024) 가운데의 하나이니,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이와 덕(德)이 모두 넉넉하기로 좌상 정인홍(鄭仁弘)만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초야에 물러나 지낸 지가 1년이 다 되도록 직명(職名)만 헛되이 띠고 있고 상께서도 거의 부르지 않았습니다. 곧바른
의논이 엄해도 사악한 의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역적 토벌이 엄해도 역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서둘러 정인홍을 불러들여서 보필을 다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형효갑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1월 4일 신미
사신을 보내어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면복(冕服)을 거듭 청하였다. 그 주문(奏文)에, "삼가 다시 간절한 마음을 진달하여 은명(恩命)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지난번 만력(萬曆) 43년025) 6월 12일에 사은사(謝恩使) 윤방(尹昉)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신의 생모(生母)인 김씨(金氏)를 추봉(追封)하는 고명(誥命)을 싸받들고 도착하였습니다. 삼가 저희 나라가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받들어 시행하였습니다. 다만 내리게 되어 있는 바의 관복(冠服)을 아직까지 하사받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두렵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못하여 다시 온 정성을 다한 글을 폐하께 진달하고 오로지 성지(聖旨)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폐하께서는 성명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에 부모와 같은 천자께 감히 다시 아뢰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추봉(追封)과 생봉(生封)은 똑같은 은전이요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은 본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니, 봉작(封爵)이 있으면 고명이 있고 고명이 있으면 관복이 있는 것입니다. 봉작을 받으면서 장복(章服)이 없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삼가 조사를 해보니, 지난 성화(成化) 11년026) 에 신의 선조 강정왕(康靖王) 신 아무가 그의 생부와 생모의 추봉을 청하여 삼가 헌종 황제(憲宗皇帝)의 준허(准許)를 받았는데 고명과 관복도 아울러 하사받았습니다. 그리고 성화 7년027) 에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 신 아무의 비(妃) 윤씨(尹氏)를 책봉하시고 아울러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뒤로도 열성(列聖)들께서 저희 나라에 봉전(封典)을 내린 거조가 대부분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나라가 대대로 물품을 갖추어 하사받은 것으로서 전후로 찬란하게 빛난 것입니다. 우리 황상(皇上)께서는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정성을 가련히 여기시고 효성을 장려하는 성인(聖人)의 마음을 독실히 미루어 먼저 칙서(敕書)를 내리고 이어서 고명을 내리시어 특별히 추봉을 준허하시고 흡족한 존호를 하사하셨으니, 특별한 성천자의 은총이 우리 나라에 가득 넘쳤습니다. 그러나 유독 관복만은 아직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감격스러워하면서도 도리어 옛 전례와 다름이 있음을 가지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식인 신의 간절함이야 여러 다른 사람들의 마음보다 어찌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의 이 추봉의 은총이 참으로 보통이 넘는 특별한 은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관복(冠服)에 대해서 부(部)·과(科)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으려고 함은 또한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뜻에 근본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시 황상께 입을 놀려 미진한 은전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신의 구구한 일념은 두터운 은총을 갖추어 받아 어버이를 드러내는 도리를 다하고, 선조들의 전례를 이어서 후손으로서 선조들이 물려주신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의상(衣裳)을 진설해 놓고 어버이가 옆에 계신 듯이 제사를 올려 정성을 다하고, 물품을 진열해 놓고 인륜(人倫)을 극진히 하는 제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이 하늘을 우러러 소망하며 애가 타도록 바라는 바입 니다. 근래에 삼가 들은 바에 의하면, 황조(皇朝) 내번(內藩)의 숭왕(崇王)이, 세종 황제(世宗皇帝)께서 형왕(荊王)의 모비(母妃)인 수씨(壽氏)의 책명(冊命)과 관복(冠服)을 준허하여 지급한 일을 인용하여, 그의 생모를 추봉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정상을 가련하게 여기어 책명과 관복을 준허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이신 강정왕(康靖王)의 생모에게 고명과 관복을 지급해 주셨던 것과 같은 성대한 은전입니다. 전후의 성인(聖人)이 그 법도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조(聖朝)에서 저희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것은 안팎의 차이를 두지 않으시어, 칙유(敕諭)를 내리실 때에 매양 ‘내복(內服)과 같이 본다.’고 하셨으며 또한 ‘짐이 바야흐로 은전을 내리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돌보아주시고 덮어 감싸주시며 구제해 주시고 생성시켜 주시는 융성한 은덕이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왕업을 이어받아 공손히 제후의 도리를 지켰으며 예물을 바치는 의례를 중국 안의 제후들보다 못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스로 성상의 교화가 미치는 전복(甸服)을 벗어나겠습니까. 이에 삼가 내번(內藩)에 견주고자 하여 형왕(荊王)과 숭왕(崇王)의 사례를 끌어다 신청하는 바이니, 정리로 보아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하며 예의로 보아 참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여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먼 나라 가까운 나라 할 것 없이 복종하는 나라들을 모두 포용하시니, 저희 나라를 품어주심에 또한 어찌 피차의 차별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감히 이전에 자주 내리셨던 은총을 믿고 앞으로도 그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고자, 번독스럽게 해드리는 죄를 피하지 아니하고 호소하는 주문(奏文)을 누차 거듭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마음을 두시고 신의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어, 멀리는 헌종황제께서 이미 시행하셨던 법식을 따르고 가까이는 형왕과 숭왕에게 베푼 전례를 비추어 해부(該部)에 특별히 명하여 곧바로 신의 어미의 관복을 아울러 지급하게 하소서. 그러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감격하고 기뻐할 것이니, 성상께서 옛 법식을 따르는 도리에 길이 신용이 있게 될 것이고 신이 근본에 보답하여 멀리 추모하는 예의에도 또한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정귀(李廷龜)와 유간(柳澗) 등을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올리게 합니다." 하였다. 【민형남(閔馨男)의 행차에 은(銀) 1만여 냥을 싸가지고 가서 고면(誥冕)을 겸하여 청하게 하였는데, 허균(許筠)이 그 절반을 도용(盜用)하였다. 예부(禮部)에서 뇌물이 적은 것을 혐의로 여겨 허락을 하지 아니했다. 이 때에 이르러 다시 1만 수천 냥을 가지고 갔는데, 모두 역관(譯官)의 무리들이 예부의 낭리(郞吏)들과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註 025] 만력(萬曆) 43년 : 1615 광해군 7년.[註 026] 성화(成化) 11년 : 1475 성종 6년.[註 027] 성화 7년 : 1471 성종 2년.
"삼가 다시 간절한 마음을 진달하여 은명(恩命)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지난번 만력(萬曆) 43년025) 6월 12일에 사은사(謝恩使) 윤방(尹昉)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신의 생모(生母)인 김씨(金氏)를 추봉(追封)하는 고명(誥命)을 싸받들고 도착하였습니다. 삼가 저희 나라가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받들어 시행하였습니다.
다만 내리게 되어 있는 바의 관복(冠服)을 아직까지 하사받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두렵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못하여 다시 온 정성을 다한 글을 폐하께 진달하고 오로지 성지(聖旨)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폐하께서는 성명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에 부모와 같은 천자께 감히 다시 아뢰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추봉(追封)과 생봉(生封)은 똑같은 은전이요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은 본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니, 봉작(封爵)이 있으면 고명이 있고 고명이 있으면 관복이 있는 것입니다. 봉작을 받으면서 장복(章服)이 없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삼가 조사를 해보니, 지난 성화(成化) 11년026) 에 신의 선조 강정왕(康靖王) 신 아무가 그의 생부와 생모의 추봉을 청하여 삼가 헌종 황제(憲宗皇帝)의 준허(准許)를 받았는데 고명과 관복도 아울러 하사받았습니다. 그리고 성화 7년027) 에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 신 아무의 비(妃) 윤씨(尹氏)를 책봉하시고 아울러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뒤로도 열성(列聖)들께서 저희 나라에 봉전(封典)을 내린 거조가 대부분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나라가 대대로 물품을 갖추어 하사받은 것으로서 전후로 찬란하게 빛난 것입니다.
우리 황상(皇上)께서는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정성을 가련히 여기시고 효성을 장려하는 성인(聖人)의 마음을 독실히 미루어 먼저 칙서(敕書)를 내리고 이어서 고명을 내리시어 특별히 추봉을 준허하시고 흡족한 존호를 하사하셨으니, 특별한 성천자의 은총이 우리 나라에 가득 넘쳤습니다. 그러나 유독 관복만은 아직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감격스러워하면서도 도리어 옛 전례와 다름이 있음을 가지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식인 신의 간절함이야 여러 다른 사람들의 마음보다 어찌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의 이 추봉의 은총이 참으로 보통이 넘는 특별한 은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관복(冠服)에 대해서 부(部)·과(科)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으려고 함은 또한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뜻에 근본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시 황상께 입을 놀려 미진한 은전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신의 구구한 일념은 두터운 은총을 갖추어 받아 어버이를 드러내는 도리를 다하고, 선조들의 전례를 이어서 후손으로서 선조들이 물려주신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의상(衣裳)을 진설해 놓고 어버이가 옆에 계신 듯이 제사를 올려 정성을 다하고, 물품을 진열해 놓고 인륜(人倫)을 극진히 하는 제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이 하늘을 우러러 소망하며 애가 타도록 바라는 바입 니다.
근래에 삼가 들은 바에 의하면, 황조(皇朝) 내번(內藩)의 숭왕(崇王)이, 세종 황제(世宗皇帝)께서 형왕(荊王)의 모비(母妃)인 수씨(壽氏)의 책명(冊命)과 관복(冠服)을 준허하여 지급한 일을 인용하여, 그의 생모를 추봉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정상을 가련하게 여기어 책명과 관복을 준허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이신 강정왕(康靖王)의 생모에게 고명과 관복을 지급해 주셨던 것과 같은 성대한 은전입니다. 전후의 성인(聖人)이 그 법도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조(聖朝)에서 저희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것은 안팎의 차이를 두지 않으시어, 칙유(敕諭)를 내리실 때에 매양 ‘내복(內服)과 같이 본다.’고 하셨으며 또한 ‘짐이 바야흐로 은전을 내리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돌보아주시고 덮어 감싸주시며 구제해 주시고 생성시켜 주시는 융성한 은덕이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왕업을 이어받아 공손히 제후의 도리를 지켰으며 예물을 바치는 의례를 중국 안의 제후들보다 못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스로 성상의 교화가 미치는 전복(甸服)을 벗어나겠습니까.
이에 삼가 내번(內藩)에 견주고자 하여 형왕(荊王)과 숭왕(崇王)의 사례를 끌어다 신청하는 바이니, 정리로 보아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하며 예의로 보아 참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여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먼 나라 가까운 나라 할 것 없이 복종하는 나라들을 모두 포용하시니, 저희 나라를 품어주심에 또한 어찌 피차의 차별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감히 이전에 자주 내리셨던 은총을 믿고 앞으로도 그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고자, 번독스럽게 해드리는 죄를 피하지 아니하고 호소하는 주문(奏文)을 누차 거듭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마음을 두시고 신의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어, 멀리는 헌종황제께서 이미 시행하셨던 법식을 따르고 가까이는 형왕과 숭왕에게 베푼 전례를 비추어 해부(該部)에 특별히 명하여 곧바로 신의 어미의 관복을 아울러 지급하게 하소서. 그러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감격하고 기뻐할 것이니, 성상께서 옛 법식을 따르는 도리에 길이 신용이 있게 될 것이고 신이 근본에 보답하여 멀리 추모하는 예의에도 또한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정귀(李廷龜)와 유간(柳澗) 등을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올리게 합니다."
하였다. 【민형남(閔馨男)의 행차에 은(銀) 1만여 냥을 싸가지고 가서 고면(誥冕)을 겸하여 청하게 하였는데, 허균(許筠)이 그 절반을 도용(盜用)하였다. 예부(禮部)에서 뇌물이 적은 것을 혐의로 여겨 허락을 하지 아니했다. 이 때에 이르러 다시 1만 수천 냥을 가지고 갔는데, 모두 역관(譯官)의 무리들이 예부의 낭리(郞吏)들과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註 025] 만력(萬曆) 43년 : 1615 광해군 7년.[註 026] 성화(成化) 11년 : 1475 성종 6년.[註 027] 성화 7년 : 1471 성종 2년.
11월 10일 정축
대사헌 남근(南瑾), 대사간 정조(鄭造), 사간 윤인(尹訒), 장령 금개(琴愷)·임건(林健), 헌납 한옥(韓玉), 지평 정준(鄭遵)·남궁경(南宮㯳), 정언 홍요검(洪堯儉)·채승선(蔡承先)이 아뢰기를, "역적 유성(柳惺)은 죄가 천지에 가득 찼고 악이 김대래(金大來)보다 크므로 이미 사사(賜死)하여 조금은 여론의 울분을 풀었습니다. 다만 양사가 율대로 처단하라고 달을 넘기면서 논집하고 있었으니 역적 토벌에 대한 계청이 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사사하라는 명이 내리던 날에야 옥당은 처음으로 차자를 한 번 올렸으니, 이는 신들의 논계를 성상의 뜻이나 받들어 따르고 마는 것으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한몸이 되어야 할 삼사(三司)가 과연 이러한 것이란 말입니까. 신들이 삼가 이전의 사사하는 법전을 보건대, 당시에는 반드시 근거할 만한 죄상을 가지고 시행한 것이었는데도 후세에 사람들이 그 실정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가지고 애매한 일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유성은 유영경(柳永慶)의 조카로서 궁액(宮掖)과 교통하고 양궁(兩宮)을 이간시켰으며 반드시 사류(士類)를 궐정 추국하여 어진 재신(宰臣)을 죽여서 끝에 가서는 그 반역의 계책을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유성의 죄악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누가 분하게 여기며 토벌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들로서 언론을 맡은 자리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한 시대의 공론으로 하여금 논사(論思)를 맡은 옥당의 의논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들이 나약하여 경시를 당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신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역적 유성(柳惺)은 죄가 천지에 가득 찼고 악이 김대래(金大來)보다 크므로 이미 사사(賜死)하여 조금은 여론의 울분을 풀었습니다. 다만 양사가 율대로 처단하라고 달을 넘기면서 논집하고 있었으니 역적 토벌에 대한 계청이 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사사하라는 명이 내리던 날에야 옥당은 처음으로 차자를 한 번 올렸으니, 이는 신들의 논계를 성상의 뜻이나 받들어 따르고 마는 것으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한몸이 되어야 할 삼사(三司)가 과연 이러한 것이란 말입니까.
신들이 삼가 이전의 사사하는 법전을 보건대, 당시에는 반드시 근거할 만한 죄상을 가지고 시행한 것이었는데도 후세에 사람들이 그 실정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가지고 애매한 일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유성은 유영경(柳永慶)의 조카로서 궁액(宮掖)과 교통하고 양궁(兩宮)을 이간시켰으며 반드시 사류(士類)를 궐정 추국하여 어진 재신(宰臣)을 죽여서 끝에 가서는 그 반역의 계책을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유성의 죄악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누가 분하게 여기며 토벌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들로서 언론을 맡은 자리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한 시대의 공론으로 하여금 논사(論思)를 맡은 옥당의 의논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들이 나약하여 경시를 당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신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조식(曺植)의 서원(書院)에 백운(白雲)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서원이 삼각산(三角山) 백운봉(白雲峰) 아래에 있기 때문이었다.
11월 11일 무인
평안도 관찰사 김신국(金藎國)이 치계하였는데, 지난달 29일 밤에 하늘 동남쪽에서부터 번갯불이 하늘에 가득하여 서남쪽에 가서야 그쳤고 우레가 크게 일어나 천지를 진동시켜 비상한 이변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전한 이창후(李昌後), 부응교 이정원(李挺元), 부수찬 황덕부(黃德符), 정자 조유선(趙裕善)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양사가 피혐한 것을 보니, ‘역적 유성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릴 때에 옥당은 단지 한 번 차자를 올렸으니, 이는 신들의 논계를 성상의 뜻이나 받들고 마는 것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몸이어야 할 삼사가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역적 유성(柳惺)은 유영경의 조카로서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궐정 추국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양궁(兩宮)을 교란시켰으므로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신령과 사람들이 모두 분통스러워 하였습니다. 무릇 혈기있는 자라면 누군들 목욕을 하고 토벌을 청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다만 근일에 동료가 유고가 있었기 때문에 늦어져 일의 형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공론을 흔쾌히 따라야 한다는 뜻은 전일의 처치하는 차자에서 다 말하였고 정형(正刑)을 분명하게 보이라는 계청은 실로 율대로 처단하라는 논계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공론이 과연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신들이 논사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드러나게 비난과 배척을 받았으니 매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황공함을 못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들이 삼가 양사가 피혐한 것을 보니, ‘역적 유성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릴 때에 옥당은 단지 한 번 차자를 올렸으니, 이는 신들의 논계를 성상의 뜻이나 받들고 마는 것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몸이어야 할 삼사가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역적 유성(柳惺)은 유영경의 조카로서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궐정 추국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양궁(兩宮)을 교란시켰으므로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신령과 사람들이 모두 분통스러워 하였습니다. 무릇 혈기있는 자라면 누군들 목욕을 하고 토벌을 청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다만 근일에 동료가 유고가 있었기 때문에 늦어져 일의 형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공론을 흔쾌히 따라야 한다는 뜻은 전일의 처치하는 차자에서 다 말하였고 정형(正刑)을 분명하게 보이라는 계청은 실로 율대로 처단하라는 논계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공론이 과연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신들이 논사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드러나게 비난과 배척을 받았으니 매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황공함을 못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재목(材木)을 몰래 베어내는 폐단을 각별히 엄하게 금지시킬 일로 전후로 하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점점 몰래 베어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각별히 거듭 밝혀 엄하게 금지하여, 만약 현장에서 잡히는 자가 있으면 계문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수령은 파직하고 변장(邊將)은 잡아다 추고할 일을 다시 통지하여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이런 뜻으로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글을 내려 보내라."
"재목(材木)을 몰래 베어내는 폐단을 각별히 엄하게 금지시킬 일로 전후로 하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점점 몰래 베어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각별히 거듭 밝혀 엄하게 금지하여, 만약 현장에서 잡히는 자가 있으면 계문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수령은 파직하고 변장(邊將)은 잡아다 추고할 일을 다시 통지하여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이런 뜻으로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글을 내려 보내라."
11월 12일 기묘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과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유성은 이미 사사하였으니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유성은 이미 사사하였으니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합계하기를, "근래에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의 옥사가 잇따라 일어났는데, 죄수들이 한 해가 넘도록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자는 죽음을 면하고 죄가 없는 자는 감옥에서 오래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상께서 죄수들을 처리하는 데 대해 진념하시어 의논하여 아뢰라는 명을 여러 차례 내려 대신과 추관들이 반복하여 상세하고 극진하게 의논을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시기를 끌고 달을 늦추어 죄수들을 심리할 기약이 없으니, 죄가 있는 자들에게는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죄가 없는 자들에게는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추위가 이미 극심하므로 갇혀 있는 많은 죄수들이 모두 얼어죽을 형편이어서 장차 억울하게 죽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으로 옥사를 결단하라는 명을 속히 내리시어 죄가 있는 자는 죽이고 죄가 없는 자는 석방을 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적의 옥사를 가까운 시일 안에 처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근래에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의 옥사가 잇따라 일어났는데, 죄수들이 한 해가 넘도록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자는 죽음을 면하고 죄가 없는 자는 감옥에서 오래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상께서 죄수들을 처리하는 데 대해 진념하시어 의논하여 아뢰라는 명을 여러 차례 내려 대신과 추관들이 반복하여 상세하고 극진하게 의논을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시기를 끌고 달을 늦추어 죄수들을 심리할 기약이 없으니, 죄가 있는 자들에게는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죄가 없는 자들에게는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추위가 이미 극심하므로 갇혀 있는 많은 죄수들이 모두 얼어죽을 형편이어서 장차 억울하게 죽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으로 옥사를 결단하라는 명을 속히 내리시어 죄가 있는 자는 죽이고 죄가 없는 자는 석방을 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적의 옥사를 가까운 시일 안에 처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시험 문제의 취지와는 아주 엉뚱하게 동문서답을 하였으니, 미리 답안을 작성하여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데도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간사함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시험 문제의 취지와는 아주 엉뚱하게 동문서답을 하였으니, 미리 답안을 작성하여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데도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간사함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무부(武夫)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조정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상 수사(慶尙水使) 신경징(申景澄)이 감히 그의 아비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외람되이 상소를 해서, 바꾸어 차임하라는 명을 받기까지 한 것은 이미 매우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병사(南兵使) 현즙(玄楫)의 상소를 보니 대개 연안(延安) 땅에 소분(掃墳)을 하러 가겠다는 일이었는데, 역말을 지급하라는 명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무신(武臣) 가운데 늙은 아비나 부모의 분묘(墳墓)가 없는 자가 누가 있었겠습니까만,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국법(國法)과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하여 그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시대의 무사들이 모두 이러한 풍습을 본받는다면, 왕명을 받아 길에 오르면 목숨을 바쳐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더구나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 누가 자기 몸을 버리고 적에게 달려나가 나라를 위해 방어하려 하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장래의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듯합니다. 신경징과 현즙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관계되는 상소는 봉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인정에 끌려 요청을 따라서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전후의 색승지를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천천히 결정을 내리겠다. 승지는 굳이 추고할 것 없다." 하였다.
"근래에 무부(武夫)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조정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상 수사(慶尙水使) 신경징(申景澄)이 감히 그의 아비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외람되이 상소를 해서, 바꾸어 차임하라는 명을 받기까지 한 것은 이미 매우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병사(南兵使) 현즙(玄楫)의 상소를 보니 대개 연안(延安) 땅에 소분(掃墳)을 하러 가겠다는 일이었는데, 역말을 지급하라는 명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무신(武臣) 가운데 늙은 아비나 부모의 분묘(墳墓)가 없는 자가 누가 있었겠습니까만,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국법(國法)과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하여 그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시대의 무사들이 모두 이러한 풍습을 본받는다면, 왕명을 받아 길에 오르면 목숨을 바쳐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더구나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 누가 자기 몸을 버리고 적에게 달려나가 나라를 위해 방어하려 하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장래의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듯합니다. 신경징과 현즙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관계되는 상소는 봉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인정에 끌려 요청을 따라서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전후의 색승지를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천천히 결정을 내리겠다. 승지는 굳이 추고할 것 없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변산(邊山)·완도(莞島)·안면곶(安眠串)·장산곶(長山串) 등지의 재목을 멋대로 몰래 베어간다고 하니, 누차 하유한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양호(兩湖) 및 해서(海西)의 감사·병사·수사를 모두 추고하고, 경계하고 신칙할 일을 다시 하유하여 착실히 엄금하게 하라."
"변산(邊山)·완도(莞島)·안면곶(安眠串)·장산곶(長山串) 등지의 재목을 멋대로 몰래 베어간다고 하니, 누차 하유한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양호(兩湖) 및 해서(海西)의 감사·병사·수사를 모두 추고하고, 경계하고 신칙할 일을 다시 하유하여 착실히 엄금하게 하라."
11월 13일 경진
양사가 전계를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과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미책봉(未冊封)이라는 세 글자를 허욱(許頊)이 지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위리 안치까지 시킬 필요는 없다. 최천건(崔天健) 등은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미책봉(未冊封)이라는 세 글자를 허욱(許頊)이 지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위리 안치까지 시킬 필요는 없다. 최천건(崔天健) 등은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것은 따를 만한 일이 아니다.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따를 만한 일이 아니다.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이첨이 아뢰기를, "조식(曺植)의 서원(書院)을 짓고 액호(額號)를 정하는 데에 모두 은명(恩命)이 있었으니, 위판(位板)을 봉안한 뒤에는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하사하는 것이 도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법전에 합당합니다. 날짜를 정하여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봄과 가을 두 차례의 정일(丁日)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은, 다른 서원의 예에 의거하여, 근처에 있는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의 고을에 배정하여 돌아가며 준비해 보낼 일로 경기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조식(曺植)의 서원(書院)을 짓고 액호(額號)를 정하는 데에 모두 은명(恩命)이 있었으니, 위판(位板)을 봉안한 뒤에는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하사하는 것이 도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법전에 합당합니다. 날짜를 정하여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봄과 가을 두 차례의 정일(丁日)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은, 다른 서원의 예에 의거하여, 근처에 있는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의 고을에 배정하여 돌아가며 준비해 보낼 일로 경기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1월 14일 신사
예조가 아뢰기를, "성종조의 왕비 친잠(王妃親蠶) 의주(儀註)는 예조가 의논해서 아뢰었습니다. 《예기》 월령(月令) 주(註)에 ‘국의(鞠衣)는 옷의 색이 노란 국화와 같은 것이니 대개 뽕나무 잎이 처음 생겨날 때의 색을 본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황색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침향 단자(沈香段子)가 이와 비슷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의원(尙衣院)에서 흰 실을 뽕나무를 끓인 물에 염색하여 사용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복색에 대해서 만약 근거할 만한 명확한 조문이 없다면 유청(柳靑)을 사용하거나 적의(翟衣)를 사용할 일을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성종조의 왕비 친잠(王妃親蠶) 의주(儀註)는 예조가 의논해서 아뢰었습니다. 《예기》 월령(月令) 주(註)에 ‘국의(鞠衣)는 옷의 색이 노란 국화와 같은 것이니 대개 뽕나무 잎이 처음 생겨날 때의 색을 본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황색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침향 단자(沈香段子)가 이와 비슷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의원(尙衣院)에서 흰 실을 뽕나무를 끓인 물에 염색하여 사용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복색에 대해서 만약 근거할 만한 명확한 조문이 없다면 유청(柳靑)을 사용하거나 적의(翟衣)를 사용할 일을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11월 16일 계미
양사가 전계를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 및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전계를 아뢰었는데, 형효갑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허위가 풍습이 되어 사람들이 염치가 없습니다. 세상 풍조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신들이 전라 감사 이덕형(李德泂)의 장계를 가져다 보니,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승형(李升亨)이, 호랑이가 사람을 죽이는 근심스러운 일에 대해서 과장해 말하고 이어서 함정을 설치하여 호랑이를 잡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고 겨우 호랑이 한 마리 잡은 일을 가지고 호랑이 걱정이 영원히 없어졌다고 하였으며 덩치가 커서 운반하기가 어렵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자신과 관련된 일의 혐의를 피하지 아니하고 감히 논상의 곡절에 대해서 진달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방백도 감히 못하는 일인데 더구나 수령이 한단 말입니까. 이승형은 본래 사대부 가운데 일개 공인(工人)으로서, 같은 반열에 있는 자들이 그와 나란히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당상까지 올랐는데 여전히 만족할 줄을 모르고 또 은혜를 바라는 마음을 내어 이렇게 극도로 감사에게 거짓 보고를 하였으니, 마음씀씀이가 참으로 형편없는 자입니다. 이승형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가자를 개정하소서. 전라 감사 이덕형은 본도에 있은 지가 이미 한 해가 지났으므로 이승형의 형편없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호랑이 걱정이 이토록 극심하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한결같이 그의 보고대로 하여, 호랑이 잡는 일에 관계도 없었던 겸관에게 그 공을 돌려서 사실보다 지나치게 계달하였으니, 매우 그릅니다. 추고하고 가자를 개정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을 내리겠다고 답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허위가 풍습이 되어 사람들이 염치가 없습니다. 세상 풍조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신들이 전라 감사 이덕형(李德泂)의 장계를 가져다 보니,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승형(李升亨)이, 호랑이가 사람을 죽이는 근심스러운 일에 대해서 과장해 말하고 이어서 함정을 설치하여 호랑이를 잡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고 겨우 호랑이 한 마리 잡은 일을 가지고 호랑이 걱정이 영원히 없어졌다고 하였으며 덩치가 커서 운반하기가 어렵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자신과 관련된 일의 혐의를 피하지 아니하고 감히 논상의 곡절에 대해서 진달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방백도 감히 못하는 일인데 더구나 수령이 한단 말입니까.
이승형은 본래 사대부 가운데 일개 공인(工人)으로서, 같은 반열에 있는 자들이 그와 나란히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당상까지 올랐는데 여전히 만족할 줄을 모르고 또 은혜를 바라는 마음을 내어 이렇게 극도로 감사에게 거짓 보고를 하였으니, 마음씀씀이가 참으로 형편없는 자입니다. 이승형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가자를 개정하소서.
전라 감사 이덕형은 본도에 있은 지가 이미 한 해가 지났으므로 이승형의 형편없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호랑이 걱정이 이토록 극심하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한결같이 그의 보고대로 하여, 호랑이 잡는 일에 관계도 없었던 겸관에게 그 공을 돌려서 사실보다 지나치게 계달하였으니, 매우 그릅니다. 추고하고 가자를 개정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을 내리겠다고 답하였다.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이 연차(連箚)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과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또 차자를 올리기를,"형효갑을 과방에서 삭제하지 마소서."하니, 이미 양사에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선농단(先農壇)과 친경대(親耕臺)를 잠단(蠶壇)의 예에 의거하여 예조 당상과 예방 승지가 중사(中使)와 함께 일이 없는 날에 가서 살펴서 옛 전례대로 수축하도록 하라."
"선농단(先農壇)과 친경대(親耕臺)를 잠단(蠶壇)의 예에 의거하여 예조 당상과 예방 승지가 중사(中使)와 함께 일이 없는 날에 가서 살펴서 옛 전례대로 수축하도록 하라."
선수 도감 제조 이충(李沖)과 심돈(沈惇)에게 담비 가죽으로 만든 모엄(帽掩)을 하나씩 하사하고, 낭청 남이웅(南以雄)과 감역(監役) 김명남(金命男) 등에게는 쥐 가죽으로 만든 모엄을 각각 하나씩 하사하였다.
사간 윤인(尹訒)을 동부승지로, 형조 판서 이충(李沖)을 호조 판서로, 응교 오여온(吳汝穩)을 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7일 갑신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 및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봉상시가 아뢰기를, "이번에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을 하는 일은 본시가 오로지 맡아서 담당하고 있는데, 아문의 품계가 낮아서, 각사(各司)가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을 태만히 하여 시행하지 않으니, 온갖 절목들이 쉬이 이루어지지 못할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옛 전례에는 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친경 도감(親耕都監)을 설치해서 점검하고 감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제기(祭器), 제복(祭服), 공인 의복(工人衣服), 내전(內殿)의 친잠(親蠶)에 관계되는 필요한 물건들을 일일이 상세히 살펴 만들어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번에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을 하는 일은 본시가 오로지 맡아서 담당하고 있는데, 아문의 품계가 낮아서, 각사(各司)가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을 태만히 하여 시행하지 않으니, 온갖 절목들이 쉬이 이루어지지 못할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옛 전례에는 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친경 도감(親耕都監)을 설치해서 점검하고 감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제기(祭器), 제복(祭服), 공인 의복(工人衣服), 내전(內殿)의 친잠(親蠶)에 관계되는 필요한 물건들을 일일이 상세히 살펴 만들어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문무과 방방(放榜)을 반드시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린 뒤에 시행하자면 앞으로 기한이 아득하다. 외방의 수령으로서 등과(登科)한 자들을 모두 내려보내어 임무를 살피게 하라. 방방은 내년 봄에 시행하도록 하라."
"문무과 방방(放榜)을 반드시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린 뒤에 시행하자면 앞으로 기한이 아득하다. 외방의 수령으로서 등과(登科)한 자들을 모두 내려보내어 임무를 살피게 하라. 방방은 내년 봄에 시행하도록 하라."
11월 18일 을유
공홍도(公洪道) 제천(堤川)에 사는 유생 장우추(張宇樞)가 상소하였는데, 대개는 첫째 동서남북 붕당의 화를 그치게 할 것, 둘째 기강을 세울 것, 셋째 세금을 줄일 것, 넷째 장수의 권위를 엄하게 할 것, 다섯째 언로를 열 것, 여섯째 인심을 얻을 것 등이었다.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 및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헌부가 형효갑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방방을 물려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방방을 물려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해주(海州)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고대관(高大觀)·최유함(崔有涵)·성문협(成文浹)은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밝혀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대관은 가형하고 최유함과 성문협은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신효업(申孝業)과 순경(順慶)의 옥사에 대하여 좌우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기자헌이 아뢰기를, "신효업의 일은 정충남(鄭忠男)을 면질시킨 뒤라야 그 허실을 알 수 있고, 순경의 일은 고대관이 공초에 말한 교노(校奴)를 잡아다 추문한 뒤라야 그 말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다." 하고,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정승의 자리에 들어온 지가 오래지 않아, 문서를 보긴 했으나 곧바로 잊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의논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순경의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의논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박승종(朴承宗)이 아뢰기를, "신효업의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의 의견과 같습니다. 순경의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의논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이경함(李慶涵)·유몽인(柳夢寅)·윤수민(尹壽民)·남근(南瑾)·정조(鄭造)의 의논도 모두 같았다.
"고대관(高大觀)·최유함(崔有涵)·성문협(成文浹)은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밝혀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대관은 가형하고 최유함과 성문협은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신효업(申孝業)과 순경(順慶)의 옥사에 대하여 좌우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기자헌이 아뢰기를,
"신효업의 일은 정충남(鄭忠男)을 면질시킨 뒤라야 그 허실을 알 수 있고, 순경의 일은 고대관이 공초에 말한 교노(校奴)를 잡아다 추문한 뒤라야 그 말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다."
하고,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정승의 자리에 들어온 지가 오래지 않아, 문서를 보긴 했으나 곧바로 잊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의논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순경의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의논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박승종(朴承宗)이 아뢰기를,
"신효업의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의 의견과 같습니다. 순경의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의논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이경함(李慶涵)·유몽인(柳夢寅)·윤수민(尹壽民)·남근(南瑾)·정조(鄭造)의 의논도 모두 같았다.
11월 19일 병술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과 유성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다. 논계를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다. 논계를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형효갑 한 사람을 과방에서 삭제하는 데에 무슨 대단히 논집할 일이 있기에 이토록 강하게 쟁론하는가. 너무 번거롭게 하지 말라. 방방에 대한 일은, 길일(吉日)에 시행할 수도 없고 내년 봄에 시행할 수도 없다면 진퇴양난이 아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형효갑 한 사람을 과방에서 삭제하는 데에 무슨 대단히 논집할 일이 있기에 이토록 강하게 쟁론하는가. 너무 번거롭게 하지 말라. 방방에 대한 일은, 길일(吉日)에 시행할 수도 없고 내년 봄에 시행할 수도 없다면 진퇴양난이 아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11월 20일 정해
양사가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 및 유성에 대한 일을 합계하니,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었는데, 따르지 않았다.
전교하였다. "죄인들이 오래도록 처결되지 않고 있다. 월령 의원을 가려 정하여 약물과 죽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 구료하게 할 일을 색승지는 더욱 살펴 거행하라."
"죄인들이 오래도록 처결되지 않고 있다. 월령 의원을 가려 정하여 약물과 죽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 구료하게 할 일을 색승지는 더욱 살펴 거행하라."
도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 "상께서 ‘좌상이 옥사를 의논한 일이 무슨 일인지를 살펴서 아뢰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좌의정 정인홍이 이현문(李顯門)의 일 및 김제남의 아내를 처치할 일에 대하여 새롭게 아뢰었는데, 아직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어진이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이니 그 말을 채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매여 있습니다. 좌상이 한 말에 대하여 아직도 채용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간신(諫臣)이 그렇게 말한 것인데, 참 공론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상께서 ‘좌상이 옥사를 의논한 일이 무슨 일인지를 살펴서 아뢰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좌의정 정인홍이 이현문(李顯門)의 일 및 김제남의 아내를 처치할 일에 대하여 새롭게 아뢰었는데, 아직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어진이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이니 그 말을 채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매여 있습니다. 좌상이 한 말에 대하여 아직도 채용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간신(諫臣)이 그렇게 말한 것인데, 참 공론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세 역적과 네 흉도의 일 및 유성의 일에 대하여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참작하여 죄를 정하였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형효갑의 과방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간사한 일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세 역적과 네 흉도의 일 및 유성의 일에 대하여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참작하여 죄를 정하였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형효갑의 과방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간사한 일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1일 무자
강원도 관찰사 박정현(朴鼎賢)이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의 올해의 흉년은 근고에 없던 바이니, 긴급하지 않은 비용은 우선 줄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각 고을의 훈도(訓導)는 대부분 용렬하고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로 구차하게 충당을 하여 봉록이나 받아먹게 하고 있는데, 조금도 교회(敎誨)하는 공효는 없고 한갓 공공의 곡식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강릉(江陵)·원주(原州)·춘천(春川) 등 고을의 교수와 훈도 이외에 기타 각 고을의 훈도들은 한 해 동안 방학(放學)하게 하여 비용만 축내는 폐단을 제거하소서."
"도내 각 고을의 올해의 흉년은 근고에 없던 바이니, 긴급하지 않은 비용은 우선 줄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각 고을의 훈도(訓導)는 대부분 용렬하고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로 구차하게 충당을 하여 봉록이나 받아먹게 하고 있는데, 조금도 교회(敎誨)하는 공효는 없고 한갓 공공의 곡식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강릉(江陵)·원주(原州)·춘천(春川) 등 고을의 교수와 훈도 이외에 기타 각 고을의 훈도들은 한 해 동안 방학(放學)하게 하여 비용만 축내는 폐단을 제거하소서."
왕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대사헌 남근(南瑾)이 아뢰기를, "전좌(殿坐)를 하신 뒤에 대신·판의금·추관들의 입시가 매우 늦었습니다. 추고를 명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전좌(殿坐)를 하신 뒤에 대신·판의금·추관들의 입시가 매우 늦었습니다. 추고를 명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대사간 정조(鄭造)가 아뢰기를, "대론(大論)이 있는 때에는 삼사(三司)가 정고(呈告)를 하지 않는 것이 전례인데도 근래에는 서로 잇따라 어지러이 정고를 하고 있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는 혹 면하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상황을 살펴 피하려는 자취가 있는 듯합니다. 양사와 홍문관의 정고한 관원을 파직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대론(大論)이 있는 때에는 삼사(三司)가 정고(呈告)를 하지 않는 것이 전례인데도 근래에는 서로 잇따라 어지러이 정고를 하고 있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는 혹 면하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상황을 살펴 피하려는 자취가 있는 듯합니다. 양사와 홍문관의 정고한 관원을 파직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대사헌 남근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대론이 있으면 대간은 정고를 하지 않는 것이 전례입니다. 근래에는 대간들이 날마다 정고를 하니, 대사간이 파직을 청한 것은 옳은 일입니다. 소신도 또한 세 차례나 정사(呈辭)를 하였는데, 비록 급유(給由)를 더하라는 허락을 받고 출사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대론이 발론된 뒤의 일입니다. 소신에게 수창(首倡)한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파직하라 하소서." 하니, 왕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대론이 있으면 대간은 정고를 하지 않는 것이 전례입니다. 근래에는 대간들이 날마다 정고를 하니, 대사간이 파직을 청한 것은 옳은 일입니다. 소신도 또한 세 차례나 정사(呈辭)를 하였는데, 비록 급유(給由)를 더하라는 허락을 받고 출사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대론이 발론된 뒤의 일입니다. 소신에게 수창(首倡)한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파직하라 하소서."
하니, 왕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소신의 의막(依幕)이 가까이 있지 않은데다 하인이 즉시 와서 고하지 않아서, 영의정이 이미 들어간 뒤에 판의금으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황공하고 황공합니다." 하니, 왕이 황공해 하지 말라고 하였다.
"소신의 의막(依幕)이 가까이 있지 않은데다 하인이 즉시 와서 고하지 않아서, 영의정이 이미 들어간 뒤에 판의금으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황공하고 황공합니다."
하니, 왕이 황공해 하지 말라고 하였다.
양사가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 대한 일이었다.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성영(成泳)은 멀리 귀양보내라. 위리 안치할 것까지는 없다. 허욱(許頊)과 박동량(朴東亮)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중도 부처하라. 최천건 등은 이미 죄를 정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서성 이하에 대해서 처음에는, ‘아뢴 대로 하라. 박동량은 원하는 곳에 부처하라.’고 비답을 내렸었는데, 전지를 들였을 때에 특별히 ‘서성은 멀리 귀양보내고 박동량 이하는 부처하라.’고 고쳐서 판하하였다.】 】
"아뢴 대로 하라. 성영(成泳)은 멀리 귀양보내라. 위리 안치할 것까지는 없다. 허욱(許頊)과 박동량(朴東亮)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중도 부처하라. 최천건 등은 이미 죄를 정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서성 이하에 대해서 처음에는, ‘아뢴 대로 하라. 박동량은 원하는 곳에 부처하라.’고 비답을 내렸었는데, 전지를 들였을 때에 특별히 ‘서성은 멀리 귀양보내고 박동량 이하는 부처하라.’고 고쳐서 판하하였다.】 】
헌부가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논계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미 하유하였다. 논계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11월 22일 기축
서학생(西學生) 박경준(朴慶俊) 등이 상소하였다. "궁궐을 짓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양곡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이는 신하된 자가 통곡을 할 일입니다. 국가의 양곡이 부족한 것은 놀고 먹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지지 않는 것은 입산(入山)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중이라고 하는 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쌀을 훔쳐 먹는 하나의 도적입니다.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아 가지며 백성들의 자제를 그물질해다 기릅니다. 세상에서 군역(軍役)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중이 되기를 원하니, 백성들에게 비교해 볼 때 그 숫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죽이자니 다 죽일 수도 없고 그대로 두자니 그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추쇄하여 성책(成冊)을 하였으므로 중이 되는 폐단이 적었는데, 지금은 국가의 정령이 해이해져서 군역을 도피하는 자들은 살피지 아니하고 한갓 백성들만 부리고 있으니 군역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중이 됩니다. 신들의 계책으로는, 추쇄하여 성책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더라도, 한가롭고 부유한 많은 중들에게서 한 사람에 한 필씩의 베를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중들이 바치는 것은 가벼우나 국가의 용도에는 아주 요긴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궁궐을 지을 때에 그 거둔 베를 다시 일꾼으로 들어온 중들에게 지급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많은 백성들이 쉴 수가 있고 집짓는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궁궐을 짓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양곡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이는 신하된 자가 통곡을 할 일입니다. 국가의 양곡이 부족한 것은 놀고 먹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지지 않는 것은 입산(入山)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중이라고 하는 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쌀을 훔쳐 먹는 하나의 도적입니다.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아 가지며 백성들의 자제를 그물질해다 기릅니다. 세상에서 군역(軍役)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중이 되기를 원하니, 백성들에게 비교해 볼 때 그 숫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죽이자니 다 죽일 수도 없고 그대로 두자니 그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추쇄하여 성책(成冊)을 하였으므로 중이 되는 폐단이 적었는데, 지금은 국가의 정령이 해이해져서 군역을 도피하는 자들은 살피지 아니하고 한갓 백성들만 부리고 있으니 군역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중이 됩니다.
신들의 계책으로는, 추쇄하여 성책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더라도, 한가롭고 부유한 많은 중들에게서 한 사람에 한 필씩의 베를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중들이 바치는 것은 가벼우나 국가의 용도에는 아주 요긴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궁궐을 지을 때에 그 거둔 베를 다시 일꾼으로 들어온 중들에게 지급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많은 백성들이 쉴 수가 있고 집짓는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유영경은 죄가 천지에 가득차 이미 정형을 시행하였는데, 허욱·최천건·성영은 그의 복심으로서 마땅히 이 율에 복죄되어야 함에도 삭직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여 아직도 율문대로 형벌을 다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울분이 9년 동안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형률을 더하자는 계청을 삼사가 모두 발론한 것은 공론에서 함께 나온 것이니, 임금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형률을 올리고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허욱은 원하는 곳에 부처하였고 최천건은 시골로 추방하였으며 성영은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세 역적의 죄가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도 성상께서 형률을 쓴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르니,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더구나 최천건이 위란을 도모한 죄상은 참으로 김대래(金大來)보다도 크므로 지금 마땅히 형률을 더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성영의 아래에 있으니, 인심을 장차 어떻게 승복시킬 것이며 난역을 장차 어떻게 징계시킬 것입니까. 네 흉도의 죄에 이르러서도 또한 다름이 없는데, 서성은 귀양을 보냈지만 나머지 세 흉도는 부처시켰으니, 악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지금 무신년 계축년의 여러 역적들이 복죄되어 화란이 안정을 찾아, 중흥한 성대한 공렬을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었는데, 어찌 그 사이에 잔당들을 살려두겠습니까. 신들이 역적의 토벌을 강력하게 논계하여 흉악한 잔당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군신의 의리를 밝히고 역순(逆順)의 이치를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왕법으로 결단을 내리소서. 허욱·최천건·성영은 모두 먼 변방에 위리 안치하고, 신흠·박동량·한준겸은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여, 형장(刑章)을 흔쾌히 시행하여 사람들의 울분을 풀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디 갔다가 9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논계를 하는가? 이미 깊이 요량하여 처리하였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유영경은 죄가 천지에 가득차 이미 정형을 시행하였는데, 허욱·최천건·성영은 그의 복심으로서 마땅히 이 율에 복죄되어야 함에도 삭직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여 아직도 율문대로 형벌을 다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울분이 9년 동안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형률을 더하자는 계청을 삼사가 모두 발론한 것은 공론에서 함께 나온 것이니, 임금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형률을 올리고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허욱은 원하는 곳에 부처하였고 최천건은 시골로 추방하였으며 성영은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세 역적의 죄가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도 성상께서 형률을 쓴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르니,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더구나 최천건이 위란을 도모한 죄상은 참으로 김대래(金大來)보다도 크므로 지금 마땅히 형률을 더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성영의 아래에 있으니, 인심을 장차 어떻게 승복시킬 것이며 난역을 장차 어떻게 징계시킬 것입니까. 네 흉도의 죄에 이르러서도 또한 다름이 없는데, 서성은 귀양을 보냈지만 나머지 세 흉도는 부처시켰으니, 악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지금 무신년 계축년의 여러 역적들이 복죄되어 화란이 안정을 찾아, 중흥한 성대한 공렬을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었는데, 어찌 그 사이에 잔당들을 살려두겠습니까. 신들이 역적의 토벌을 강력하게 논계하여 흉악한 잔당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군신의 의리를 밝히고 역순(逆順)의 이치를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왕법으로 결단을 내리소서. 허욱·최천건·성영은 모두 먼 변방에 위리 안치하고, 신흠·박동량·한준겸은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여, 형장(刑章)을 흔쾌히 시행하여 사람들의 울분을 풀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디 갔다가 9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논계를 하는가? 이미 깊이 요량하여 처리하였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과방에서 빼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과방에서 빼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가 보건대, 기축년에 친국을 할 때에 크고 작은 탑전에서의 계사와 비답을 일체 조보(朝報)에 내지 않았으니, 대개 친국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탑전에서의 계사를 모두 조보에 내고 있으니, 실상을 잃고 잘못 전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옛 전례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해당 주서(注書)를 추고하라. 지금 이후로는 한결같이 옛 전례를 따라서 절대 조보에 내지 말 일을 정원은 살펴 시행하라."
"내가 보건대, 기축년에 친국을 할 때에 크고 작은 탑전에서의 계사와 비답을 일체 조보(朝報)에 내지 않았으니, 대개 친국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탑전에서의 계사를 모두 조보에 내고 있으니, 실상을 잃고 잘못 전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옛 전례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해당 주서(注書)를 추고하라. 지금 이후로는 한결같이 옛 전례를 따라서 절대 조보에 내지 말 일을 정원은 살펴 시행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예기》를 살펴 보니, ‘계동(季冬)의 달에 천자가 이에 국의(鞠衣)를 선제(先帝)께 올린다.’라고 하고, 그 주석에 ‘국의는 옷 색깔이 노란 국화와 같다. 황상(黃桑)의 복색이 국진(鞠塵)과 같은 것이니, 뽕나무 잎이 처음 피어날 때의 색깔을 본뜬 것이다. 선제는 선대의 목덕(木德)의 임금이다. 이 옷을 신(神)에게 바쳐 누에치기가 잘 되도록 기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는 것도 마땅할 듯하나, 조종조에서는 반드시 국의를 사용하여 이 예를 행하였습니다. 적의(翟衣)는 사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복색에 유청을 사용하고 명부(命婦)의 복색에 아청(鴉靑)을 사용한다면 방해로움이 없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삼가 《예기》를 살펴 보니, ‘계동(季冬)의 달에 천자가 이에 국의(鞠衣)를 선제(先帝)께 올린다.’라고 하고, 그 주석에 ‘국의는 옷 색깔이 노란 국화와 같다. 황상(黃桑)의 복색이 국진(鞠塵)과 같은 것이니, 뽕나무 잎이 처음 피어날 때의 색깔을 본뜬 것이다. 선제는 선대의 목덕(木德)의 임금이다. 이 옷을 신(神)에게 바쳐 누에치기가 잘 되도록 기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는 것도 마땅할 듯하나, 조종조에서는 반드시 국의를 사용하여 이 예를 행하였습니다. 적의(翟衣)는 사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복색에 유청을 사용하고 명부(命婦)의 복색에 아청(鴉靑)을 사용한다면 방해로움이 없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오시에 왕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11월 23일 경인
양사가 세 역적과 세 흉도에 대한 일을 합계하니,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24일 신묘
의주 부윤 이극신(李克信)이 장계를 올렸다. "광녕(廣寧)에 자문(咨文)을 갖다 올렸던 역관(譯官) 이민성(李民省)이 문보(文報)하기를, ‘지난 9월 24일에 달자 8천여 기(騎)가 의주위(義州衛)의 대안보(代安堡) 지방에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총병(總兵) 이광영(李光榮)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12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백 70필을 노획하였습니다. 요군(遼軍)은 죽거나 다친 자가 1백 30여 명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광녕(廣寧)에 자문(咨文)을 갖다 올렸던 역관(譯官) 이민성(李民省)이 문보(文報)하기를, ‘지난 9월 24일에 달자 8천여 기(騎)가 의주위(義州衛)의 대안보(代安堡) 지방에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총병(總兵) 이광영(李光榮)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12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백 70필을 노획하였습니다. 요군(遼軍)은 죽거나 다친 자가 1백 30여 명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죄인 김현(金鉉)·오극일(吳克一)·박흥빈(朴興贇)·윤여익(尹汝翼)은 가형하고, 이원(李源)은 형추하였다. 한찬남이 아뢰기를, "유시영(柳時英)은 역적 최기(崔沂)의 외손(外孫)으로서, 서울에 들어와 거처하지 못하게 하라고 전교하셨는데, 석방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니, 석방하라고 전교하였다.
"유시영(柳時英)은 역적 최기(崔沂)의 외손(外孫)으로서, 서울에 들어와 거처하지 못하게 하라고 전교하셨는데, 석방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니, 석방하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기를, "정충남(鄭忠男)의 앞뒤 공초한 사연이 매우 흉악스럽고 해괴하였다. 그가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면 효시를 하고서도 또 남는 죄가 있다. 다만 신효업(申孝業)은 해서(海西) 죄인이니, 또한 어찌 반역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신효업은 곧 박계운(朴啓運)의 지친이니 아주 억울할 이치는 없을 듯하다. 이 옥사는 참으로 처리하기가 어렵다. 대신과 추관은 부화뇌동하지 말고 각각 소견을 진달하여 다시 더욱 충분하게 의논하여 잘 처리해서, 흉도가 법망을 빠져나가고 죄없는 자가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 박승종이 아뢰기를, "박이문(朴而文)의 일은 지난날에 이미 의논을 아뢰었습니다만, 예로부터 제왕은 상형(常刑) 이외에 또 처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상께서 처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한찬남이 아뢰기를, "박이문의 일은 대신·추관·양사가 모두 이미 의논을 아뢰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당초에 별도로 처치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의계하였으니, 이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덕이지만 박이문이란 자는 다섯 역적 가운데에서도 심한 자이니 유사(有司)로서는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내일 속히 처치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정충남(鄭忠男)의 앞뒤 공초한 사연이 매우 흉악스럽고 해괴하였다. 그가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면 효시를 하고서도 또 남는 죄가 있다. 다만 신효업(申孝業)은 해서(海西) 죄인이니, 또한 어찌 반역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신효업은 곧 박계운(朴啓運)의 지친이니 아주 억울할 이치는 없을 듯하다. 이 옥사는 참으로 처리하기가 어렵다. 대신과 추관은 부화뇌동하지 말고 각각 소견을 진달하여 다시 더욱 충분하게 의논하여 잘 처리해서, 흉도가 법망을 빠져나가고 죄없는 자가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 박승종이 아뢰기를,
"박이문(朴而文)의 일은 지난날에 이미 의논을 아뢰었습니다만, 예로부터 제왕은 상형(常刑) 이외에 또 처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상께서 처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한찬남이 아뢰기를,
"박이문의 일은 대신·추관·양사가 모두 이미 의논을 아뢰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당초에 별도로 처치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의계하였으니, 이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덕이지만 박이문이란 자는 다섯 역적 가운데에서도 심한 자이니 유사(有司)로서는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내일 속히 처치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양사가 합계로 세 역적과 세 흉도에 대한 일을 아뢰고, 헌부와 간원이 형효갑의 일을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임진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세 역적과 세 흉도에 대한 일과 형효갑의 일을 아뢰었는데,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최기(崔沂)의 조(祖)·부(父)·형(兄)·제(弟)를 예전 규례에 따라 모두 삭탈 관작하고 연좌시켜라. 이 일을 금부에 말하라."
"최기(崔沂)의 조(祖)·부(父)·형(兄)·제(弟)를 예전 규례에 따라 모두 삭탈 관작하고 연좌시켜라. 이 일을 금부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김흠(金欽)은 박이빈을 죽이려고 도모했을 때에 어찌 반역을 도모한 일이 없었겠는가. 이미 역적의 입에서 거론되었는데도 엄하게 국문하지 아니하고 단지 연좌의 율만을 시행하였으니, 실형(失刑)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모두 추가로 전형(典刑)을 시행하라."
"김흠(金欽)은 박이빈을 죽이려고 도모했을 때에 어찌 반역을 도모한 일이 없었겠는가. 이미 역적의 입에서 거론되었는데도 엄하게 국문하지 아니하고 단지 연좌의 율만을 시행하였으니, 실형(失刑)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모두 추가로 전형(典刑)을 시행하라."
전교하였다. "김상(金鏛)은 김현(金鉉)의 동생으로서, 흉모 밀계와 추대한 사람에 대해 반드시 모를 리가 없다. 상세히 엄하게 국문하라."
"김상(金鏛)은 김현(金鉉)의 동생으로서, 흉모 밀계와 추대한 사람에 대해 반드시 모를 리가 없다. 상세히 엄하게 국문하라."
왕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11월 26일 계사
양사가 합계(合啓)로 세 역적과 세 흉도에 대한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허욱은 선왕 때의 대신으로서 별로 현저하게 지은 죄가 없으니, 중도 부처를 한 것도 이미 과중하다. 최천건은 기록할 만한 정성이 드러나게 있었으니, 논핵하는 바가 지나치다. 성영은 이미 멀리 귀양보냈으니 위리 안치할 것까지는 없다. 신흠·박동량·한준겸은 먼 곳에 귀양보내기까지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다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허욱은 선왕 때의 대신으로서 별로 현저하게 지은 죄가 없으니, 중도 부처를 한 것도 이미 과중하다. 최천건은 기록할 만한 정성이 드러나게 있었으니, 논핵하는 바가 지나치다. 성영은 이미 멀리 귀양보냈으니 위리 안치할 것까지는 없다. 신흠·박동량·한준겸은 먼 곳에 귀양보내기까지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다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한찬남이 아뢰기를, "역적 유성을 한결같이 역적 김대래의 예에 의거하여 추형을 하자면 그 아들을 마땅히 연좌시켜야 하는데, 지금 유성의 배소(配所)에 있다고 하니, 도망갈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급히 도사(都事)를 보내어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잡아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역적 유성을 한결같이 역적 김대래의 예에 의거하여 추형을 하자면 그 아들을 마땅히 연좌시켜야 하는데, 지금 유성의 배소(配所)에 있다고 하니, 도망갈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급히 도사(都事)를 보내어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잡아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왕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전교하기를, "정문익(鄭文翼)에 대해서 어찌하여 의논해 아뢰지 않는가?" 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전일에 정문익이 옥당의 관원으로 있을 때에 소신을 힘껏 공박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비록 무식하기는 하더라도 어찌 이러한 일을 하였겠습니까. 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고변한 사람인 박이빈(朴而彬)이 이미 죽었으니 따져 물어볼 자취가 없습니다. 상께서 요량하소서." 하고, 한효순은 아뢰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다만 그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으니, 상께서 요량하소서." 하고, 판의금이 아뢰기를, "소신은 해주 옥사에 대해서 황공하여 감히 소견을 바로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고, 대사헌 남근은 아뢰기를, "흉서에 참여된 사람들을 이미 분간하였습니다. 흉서를 없앴으니 다시 물어볼 일이 없는데, 죄명이 매우 무거우니 아래에서 의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정조는 아뢰기를, "추대(推戴)당한 이름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아래에서 의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남근이 아뢰기를, "옥사를 신중히 하여 다시 하문하셨으니 참으로 성상의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위복(威福)은 에 있는 것이어서 아래에서 의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위에서 어찌 옥사의 실정을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뒷날 명백하게 헌의(獻議)하도록 하라." 하였다. "별로 다른 뜻은 없고, 위복은 에 있다는 뜻을 여쭙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큰 옥사를 어찌 의계하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아래에 하문하시는 뜻이 지극히 마땅합니다만, 결단은 상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정문익(鄭文翼)에 대해서 어찌하여 의논해 아뢰지 않는가?"
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전일에 정문익이 옥당의 관원으로 있을 때에 소신을 힘껏 공박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비록 무식하기는 하더라도 어찌 이러한 일을 하였겠습니까. 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고변한 사람인 박이빈(朴而彬)이 이미 죽었으니 따져 물어볼 자취가 없습니다. 상께서 요량하소서."
하고, 한효순은 아뢰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다만 그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으니, 상께서 요량하소서."
하고, 판의금이 아뢰기를,
"소신은 해주 옥사에 대해서 황공하여 감히 소견을 바로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고, 대사헌 남근은 아뢰기를,
"흉서에 참여된 사람들을 이미 분간하였습니다. 흉서를 없앴으니 다시 물어볼 일이 없는데, 죄명이 매우 무거우니 아래에서 의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정조는 아뢰기를,
"추대(推戴)당한 이름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아래에서 의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남근이 아뢰기를,
"옥사를 신중히 하여 다시 하문하셨으니 참으로 성상의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위복(威福)은 에 있는 것이어서 아래에서 의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위에서 어찌 옥사의 실정을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뒷날 명백하게 헌의(獻議)하도록 하라."
하였다.
"별로 다른 뜻은 없고, 위복은 에 있다는 뜻을 여쭙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큰 옥사를 어찌 의계하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아래에 하문하시는 뜻이 지극히 마땅합니다만, 결단은 상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11월 27일 갑오
양사가 합계로 세 역적과 세 흉도에 대한 일을 아뢰니,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헌부가 형효갑의 일을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전교하였다. "정문익은 역적의 입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으니 마땅히 국문을 해야 하겠으나, 다만 정문익을 추대하였다는 말은 십분 명백하지가 않은 듯하니 지금 우선 외딴 섬에 위리 안치하라."
"정문익은 역적의 입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으니 마땅히 국문을 해야 하겠으나, 다만 정문익을 추대하였다는 말은 십분 명백하지가 않은 듯하니 지금 우선 외딴 섬에 위리 안치하라."
한찬남이 아뢰기를, "갇혀 있는 호인(胡人) 박여적(朴汝赤)을 구료할 일을 신이 명을 받들어 십분 신칙하였습니다만, 호인은 성질이 급하고 옷도 얇은 홑옷만 입고 있어서 이 엄동설한에 잇따라 죽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데도 병으로 죽으면 실형(失刑)이 심한 것이고 죄가 없는데도 옥중에서 죽게 되면 반드시 향화(向化)할 마음을 잃을 것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는 공초에 들어 있고 죽일 것인가 석방할 것인가는 의계에 상세한데, 이토록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성상께서 결단하시어 속히 처단하소서." 하니, 정배(定配)하라고 전교하였다.
"갇혀 있는 호인(胡人) 박여적(朴汝赤)을 구료할 일을 신이 명을 받들어 십분 신칙하였습니다만, 호인은 성질이 급하고 옷도 얇은 홑옷만 입고 있어서 이 엄동설한에 잇따라 죽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데도 병으로 죽으면 실형(失刑)이 심한 것이고 죄가 없는데도 옥중에서 죽게 되면 반드시 향화(向化)할 마음을 잃을 것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는 공초에 들어 있고 죽일 것인가 석방할 것인가는 의계에 상세한데, 이토록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성상께서 결단하시어 속히 처단하소서."
하니, 정배(定配)하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한 해의 세입(稅入)이 한 해의 경비를 대지 못하니, 이는 반드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고 경작을 잘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각도에 하유하여, 전최(殿最)를 할 때에 전야를 개간한 것의 다소를 상세히 살펴 빙고하여 포폄을 하도록 하고 각별히 권장하도록 할 일을 해조에 말하라."
"한 해의 세입(稅入)이 한 해의 경비를 대지 못하니, 이는 반드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고 경작을 잘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각도에 하유하여, 전최(殿最)를 할 때에 전야를 개간한 것의 다소를 상세히 살펴 빙고하여 포폄을 하도록 하고 각별히 권장하도록 할 일을 해조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침의(針醫) 허임(許任)·유대명(柳大鳴)·김귀상(金龜祥) 등은 여러해 동안 침을 맞을 때에 입시하였으니 모두 자급을 더해 주라. 김귀상은 상의원 판관에 올려 제수하라."
"침의(針醫) 허임(許任)·유대명(柳大鳴)·김귀상(金龜祥) 등은 여러해 동안 침을 맞을 때에 입시하였으니 모두 자급을 더해 주라. 김귀상은 상의원 판관에 올려 제수하라."
정도(鄭道)를 장령으로, 유여각(柳汝恪)을 헌납으로, 한희(韓暿)를 정언으로, 오여온(吳汝穩)을 필선으로, 정준(鄭遵)을 겸사서로, 이입(李苙)을 설서로, 남명우(南溟羽)를 홍문관 정자로, 이경전(李慶全)을 겸동지춘추관사로, 이지완(李志完)을 형조 판서로, 심종도(沈宗道)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삼았다.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 하는 것은 인재(人才)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에 달려 있으며, 인재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는 과거(科擧)가 공정한지 공정하지 못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에서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취하는 것은, 3년마다 대비(大比)가 있고 경사스런 일을 만나면 별거(別擧)가 있으며, 혹 정전에 나아가 책문으로 시험보이기도 하고 혹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나라를 빛내고 대국을 섬기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왕도를 돕는 계책이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에서 법을 처음 만들 때에, 나중에 사사로움이 성행할까를 염려하여 할봉(割封)하고 역서(易書)하는 규정을 두었고, 간사하고 외람된 일로 폐단을 일으킬까를 염려하여 차술(借述)과 협서(挾書)를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가고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졌는데도 오직 과거라는 한 가지 일만은 공도(公道)를 조금이나마 보존하여 오늘날까지 2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사풍(士風)이 더욱 투박해지고 시습(時習)이 크게 변하여, 거자(擧子)들은 학업을 닦지는 않고 오직 분경(奔競)이 유리하다는 것만을 알며, 고관(考官)들은 공도는 버려둔 채 오직 요직을 차지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들만을 뽑습니다. 시험을 보이라는 명이 한번 내리면 명사(名士) 문앞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시험을 보일 날이 되면 시험장에 들어갈 고시관의 집에는 청탁이 무더기로 밀려옵니다. 가까운 친척들은 출제될 제목의 뜻을 미리 알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손을 빌려 반드시 합격하기를 바라는데 마치 좌계(左契)를 지닌 것과 같이 합격이 보장됩니다. 경위(京圍)·향시(鄕試)·회시(會試)·초시(初試)가 모두가 그러합니다. 2백 년 이래로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더러 학문의 수준은 구두(句讀)나 분별할 줄 아는 정도인데 단지 경서(經書) 칠대문(七大文)을 강송(講誦)하여 순통(純通)이라는 좋은 점수를 얻는 자도 있으니, 이는 얻은 바의 자표(字標)를 시관에게 몰래 통하여 시관으로 하여금 강지(講紙)에다 강송할 칠대문을 적어넣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러 문장을 한 줄도 엮지 못하면서 오직 뇌물을 써서 글을 잘 짓는 사람과 교결할 줄만 알아서, 그의 좋은 작품을 얻어 시권(試券)에다 적어 넣어 마침내 높은 점수로 급제하는 자도 있으니, 이는 대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로서 시험의 제목 뜻을 미리 알고 지어오거나 시험장에서 남의 글을 빌려 내면서, 편두(篇頭)나 편말(篇末)에 표식이 되는 문자를 적어서 고시관과 서로 짜고서 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난 식년시의 강경 시험을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시를 지어 붙이기를,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항에서 조롱거리로 항상 읊조리는 글입니다. 전시(殿試) 복시(覆試)에 이르러서는 상께서 친림을 하시는데도, 미리 지어온 글로 급제를 할 뿐만 아니라, 두사(頭辭)에 표식을 함으로써 시관과 서로 응하는 자도 있고, 글제를 벗어난 글로써 서로 약속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정운(定運)의 미미한 공로’라고 한 것은 형효갑의 책문의 두사였고, ‘명예를 훔친 낙양(洛陽)의 소년’이라는 것은 권의(權誼)의 책문의 두사였습니다. 혹은 행적(行跡)으로 표식을 하기도 하고 혹은 명자(名字)로 표식을 하기도 하니, 참으로 매우 간교합니다. 어찌 거자가 혼자서 간교함을 부리고 고시관은 상응하지 않고서 이러한 일을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성균관에 나아가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에도 미리 출제(出題)를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길에 떠도는 소문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저것과 이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또한 이렇게 했을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미리 글을 지어와서 과거를 도둑질한 형효갑을 과방에서 뽑아버리게 하셨고, 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다.’고 분부를 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참으로 이미 깊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간으로 있는 자는 마땅히 따라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형효갑을 비호하느라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고시관이 정밀하게 선발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밀하게 선발한다는 것이, 두사에 표식을 하여 서로 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라고 하는데, 그 지공무사라는 것이, 미리 지어오거나 글제를 벗어난 글을 뽑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성상의 전교 안에 있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부는 상께서 다 보고 통촉하신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의 말씀이 한번 내려지자 뭇 사람들이 모두 탄복을 하였는데, 도리어 ‘상께서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계신다.’고 하니, 그 말이 참으로 참담하지 않습니까. 아, 대간이 을 속이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헌사(憲司)가 풍문을 듣고 변헌(卞獻)과 이진(李進) 등을 체포해 가두었는데 그들이 차작(借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의 장옥(場屋)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도 시험을 실시하기 전에 차작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이 바로 제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지공무사하였다고 하고, 그들이 글을 판 일에는 화를 내며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하니, 이것이 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왕부(王府)로 이송하여 공초를 받아 보면 전후로 몰래 사사로움을 부린 종적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국가가 대간을 두는 것은 귀와 눈의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귀와 눈이 이와 같고, 국가가 인재를 뽑는 것은 뒷날 등용하려고 하는 것인데 공정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면, 신은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함께 정치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재를 뽑는 공도(公道)는 고시관의 책임인데 고시관이 사사로움을 부리는 것이 이와 같고, 고시관이 공정하지 못한 것은 대간이 논핵을 해야 하는데도 대간이 곡진하게 비호해 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차라리 공도가 없어지더라도 자기 당파를 심는 것을 좋게 여기고 차라리 전하를 저버리더라도 자기 무리를 비호하는 데에 힘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문한(文翰)을 가지고서 했는데 오늘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권세를 가지고 하고 있으며, 옛날의 선비들은 이치를 궁구하고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의 선비들은 시론(時論)에 빌붙기만 합니다. 시배(時輩)들의 자제나 족당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독서가 무슨 일인 줄을 알지 못하고 젖냄새 나는 어린 것들이 먼저 외과(嵬科)에 급제를 합니다. 그리하여 일에 임해서 붓을 잡으면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주고받는 글을 쓸 때에 문장의 격식을 모르는 자도 있습니다. 뒷날 나라를 빛내고 중국에 보낼 글을 전하께서는 누구에게 부탁할 것이며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아, 과거 한 가지 일로 임금을 속이는 조짐이 언론의 책임을 맡은 관원에게서 나왔으니, 이는 국가의 불행이지 어찌 과거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더없이 큰 공공(公共)의 과거를 사문(私門)의 은혜를 파는 도구로 만들어서,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과제(科第)를 그대로 존속시켜 은혜를 파는 바탕이 되게 할 바에는 차라리 과거를 혁파하고 선법(選法)으로 고쳐 만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신하 전휘(錢徽)와 양여사(楊汝士)가 지공거(知貢擧)로서, 요직을 차지한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를 사사로이 뽑았는데, 그 당시에 특명으로 복시(覆試)를 실시하자 처음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이 끝내 시험 답안을 한 줄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담(鄭覃) 등 10명을 내치고 전휘 등을 좌천시켰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 사심을 가지고 뽑은 자가 어찌 10명뿐이겠습니까. 복시를 실시하여 내치고 좌천시키는 법전을 오늘날 다시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 하는 것은 인재(人才)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에 달려 있으며, 인재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는 과거(科擧)가 공정한지 공정하지 못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에서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취하는 것은, 3년마다 대비(大比)가 있고 경사스런 일을 만나면 별거(別擧)가 있으며, 혹 정전에 나아가 책문으로 시험보이기도 하고 혹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나라를 빛내고 대국을 섬기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왕도를 돕는 계책이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에서 법을 처음 만들 때에, 나중에 사사로움이 성행할까를 염려하여 할봉(割封)하고 역서(易書)하는 규정을 두었고, 간사하고 외람된 일로 폐단을 일으킬까를 염려하여 차술(借述)과 협서(挾書)를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가고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졌는데도 오직 과거라는 한 가지 일만은 공도(公道)를 조금이나마 보존하여 오늘날까지 2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사풍(士風)이 더욱 투박해지고 시습(時習)이 크게 변하여, 거자(擧子)들은 학업을 닦지는 않고 오직 분경(奔競)이 유리하다는 것만을 알며, 고관(考官)들은 공도는 버려둔 채 오직 요직을 차지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들만을 뽑습니다. 시험을 보이라는 명이 한번 내리면 명사(名士) 문앞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시험을 보일 날이 되면 시험장에 들어갈 고시관의 집에는 청탁이 무더기로 밀려옵니다. 가까운 친척들은 출제될 제목의 뜻을 미리 알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손을 빌려 반드시 합격하기를 바라는데 마치 좌계(左契)를 지닌 것과 같이 합격이 보장됩니다. 경위(京圍)·향시(鄕試)·회시(會試)·초시(初試)가 모두가 그러합니다. 2백 년 이래로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더러 학문의 수준은 구두(句讀)나 분별할 줄 아는 정도인데 단지 경서(經書) 칠대문(七大文)을 강송(講誦)하여 순통(純通)이라는 좋은 점수를 얻는 자도 있으니, 이는 얻은 바의 자표(字標)를 시관에게 몰래 통하여 시관으로 하여금 강지(講紙)에다 강송할 칠대문을 적어넣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러 문장을 한 줄도 엮지 못하면서 오직 뇌물을 써서 글을 잘 짓는 사람과 교결할 줄만 알아서, 그의 좋은 작품을 얻어 시권(試券)에다 적어 넣어 마침내 높은 점수로 급제하는 자도 있으니, 이는 대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로서 시험의 제목 뜻을 미리 알고 지어오거나 시험장에서 남의 글을 빌려 내면서, 편두(篇頭)나 편말(篇末)에 표식이 되는 문자를 적어서 고시관과 서로 짜고서 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난 식년시의 강경 시험을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시를 지어 붙이기를,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항에서 조롱거리로 항상 읊조리는 글입니다.
전시(殿試) 복시(覆試)에 이르러서는 상께서 친림을 하시는데도, 미리 지어온 글로 급제를 할 뿐만 아니라, 두사(頭辭)에 표식을 함으로써 시관과 서로 응하는 자도 있고, 글제를 벗어난 글로써 서로 약속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정운(定運)의 미미한 공로’라고 한 것은 형효갑의 책문의 두사였고, ‘명예를 훔친 낙양(洛陽)의 소년’이라는 것은 권의(權誼)의 책문의 두사였습니다. 혹은 행적(行跡)으로 표식을 하기도 하고 혹은 명자(名字)로 표식을 하기도 하니, 참으로 매우 간교합니다. 어찌 거자가 혼자서 간교함을 부리고 고시관은 상응하지 않고서 이러한 일을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성균관에 나아가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에도 미리 출제(出題)를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길에 떠도는 소문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저것과 이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또한 이렇게 했을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미리 글을 지어와서 과거를 도둑질한 형효갑을 과방에서 뽑아버리게 하셨고, 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다.’고 분부를 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참으로 이미 깊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간으로 있는 자는 마땅히 따라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형효갑을 비호하느라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고시관이 정밀하게 선발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밀하게 선발한다는 것이, 두사에 표식을 하여 서로 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라고 하는데, 그 지공무사라는 것이, 미리 지어오거나 글제를 벗어난 글을 뽑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성상의 전교 안에 있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부는 상께서 다 보고 통촉하신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의 말씀이 한번 내려지자 뭇 사람들이 모두 탄복을 하였는데, 도리어 ‘상께서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계신다.’고 하니, 그 말이 참으로 참담하지 않습니까.
아, 대간이 을 속이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헌사(憲司)가 풍문을 듣고 변헌(卞獻)과 이진(李進) 등을 체포해 가두었는데 그들이 차작(借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의 장옥(場屋)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도 시험을 실시하기 전에 차작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이 바로 제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지공무사하였다고 하고, 그들이 글을 판 일에는 화를 내며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하니, 이것이 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왕부(王府)로 이송하여 공초를 받아 보면 전후로 몰래 사사로움을 부린 종적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국가가 대간을 두는 것은 귀와 눈의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귀와 눈이 이와 같고, 국가가 인재를 뽑는 것은 뒷날 등용하려고 하는 것인데 공정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면, 신은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함께 정치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재를 뽑는 공도(公道)는 고시관의 책임인데 고시관이 사사로움을 부리는 것이 이와 같고, 고시관이 공정하지 못한 것은 대간이 논핵을 해야 하는데도 대간이 곡진하게 비호해 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차라리 공도가 없어지더라도 자기 당파를 심는 것을 좋게 여기고 차라리 전하를 저버리더라도 자기 무리를 비호하는 데에 힘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문한(文翰)을 가지고서 했는데 오늘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권세를 가지고 하고 있으며, 옛날의 선비들은 이치를 궁구하고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의 선비들은 시론(時論)에 빌붙기만 합니다. 시배(時輩)들의 자제나 족당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독서가 무슨 일인 줄을 알지 못하고 젖냄새 나는 어린 것들이 먼저 외과(嵬科)에 급제를 합니다. 그리하여 일에 임해서 붓을 잡으면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주고받는 글을 쓸 때에 문장의 격식을 모르는 자도 있습니다. 뒷날 나라를 빛내고 중국에 보낼 글을 전하께서는 누구에게 부탁할 것이며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아, 과거 한 가지 일로 임금을 속이는 조짐이 언론의 책임을 맡은 관원에게서 나왔으니, 이는 국가의 불행이지 어찌 과거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더없이 큰 공공(公共)의 과거를 사문(私門)의 은혜를 파는 도구로 만들어서,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과제(科第)를 그대로 존속시켜 은혜를 파는 바탕이 되게 할 바에는 차라리 과거를 혁파하고 선법(選法)으로 고쳐 만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신하 전휘(錢徽)와 양여사(楊汝士)가 지공거(知貢擧)로서, 요직을 차지한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를 사사로이 뽑았는데, 그 당시에 특명으로 복시(覆試)를 실시하자 처음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이 끝내 시험 답안을 한 줄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담(鄭覃) 등 10명을 내치고 전휘 등을 좌천시켰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 사심을 가지고 뽑은 자가 어찌 10명뿐이겠습니까. 복시를 실시하여 내치고 좌천시키는 법전을 오늘날 다시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11월 28일 을미
실록청이 아뢰기를,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실록을 봉안(奉安)하는 일 및 세초(洗草)하는 일 등의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계목(啓目) 뒤에다 기록하였습니다.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이것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연(賜宴)하는 여러 가지 일에 전후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서계하여 모두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실록을 봉안(奉安)하는 일 및 세초(洗草)하는 일 등의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계목(啓目) 뒤에다 기록하였습니다.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이것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연(賜宴)하는 여러 가지 일에 전후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서계하여 모두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9일 병신
영의정 기자헌이 차자를 올렸다. "지금 대신이 원임(原任)도 있고 시임(時任)도 있는데, 원임 대신은 행공은 하지 않더라도 그 정신(精神)은 반드시 수응(酬應)을 잘 할 수가 있고 시임 대신은 입시할 때에 피곤한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숨이 차고 기운이 없어서 겨우 몸을 이끌고 행공하고 있으니, 신의 훈련 도감 도제조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소서. 또한 신이 삼가, 좌상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고 지위와 명망이 대단하므로 일찍 영상의 자리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흔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만, 신이 마침 일이 많고 또 대례(大禮)가 앞에 닥쳤는지라 감히 정고(呈告)를 하여 양보하지를 아직 못했습니다. 대례를 마친 뒤에는 부득이 좌상처럼 떠나가 온수(溫水)에 가서 목욕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례도 몇 달 뒤에 있고 신이 없더라도 거행할 수가 있는데 신이 태연히 있으면서 물러나지 않으면 염치없는 사람이 되겠기에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에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성상께서는 신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소서. 일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났는데도 연(燕)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028) 더구나 한 해에 재변이 누차 일어나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변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이는 신과 같은 형편없는 사람이 오래도록 영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섭리(燮理)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어질고 덕을 갖춘 자로 다시 영상을 뽑아서 하늘의 꾸중에 답하소서."
[註 028] 연(燕)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 :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도망해 돌아와서는 진나라에 복수를 하려고 위(衛)나라의 현인 형가(荊軻)를 모셔다가 이 일을 시켰다. 형가가,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장군 번오기(樊於期)의 머리와 연나라의 옥토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진나라 왕을 만나러 갔는데, 역수(易水)에 이르렀을 때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흰 무지개는 왕이 병란을 당할 조짐이기 때문에 연나라 사람들이 두렵게 여겼다. 형가는 지도 속에 감추어두었던 비수로 진나라 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진나라에서 죽었다. 진나라 왕이 노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쳤는데 연나라에서는 태자 단의 목을 베어서 진나라에 바쳤다. 연나라는 그뒤 3년 만에 진나라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攷)》 권1 춘추 전국(春秋戰國) 연(燕).
"지금 대신이 원임(原任)도 있고 시임(時任)도 있는데, 원임 대신은 행공은 하지 않더라도 그 정신(精神)은 반드시 수응(酬應)을 잘 할 수가 있고 시임 대신은 입시할 때에 피곤한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숨이 차고 기운이 없어서 겨우 몸을 이끌고 행공하고 있으니, 신의 훈련 도감 도제조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소서.
또한 신이 삼가, 좌상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고 지위와 명망이 대단하므로 일찍 영상의 자리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흔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만, 신이 마침 일이 많고 또 대례(大禮)가 앞에 닥쳤는지라 감히 정고(呈告)를 하여 양보하지를 아직 못했습니다. 대례를 마친 뒤에는 부득이 좌상처럼 떠나가 온수(溫水)에 가서 목욕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례도 몇 달 뒤에 있고 신이 없더라도 거행할 수가 있는데 신이 태연히 있으면서 물러나지 않으면 염치없는 사람이 되겠기에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에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성상께서는 신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소서.
일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났는데도 연(燕)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028) 더구나 한 해에 재변이 누차 일어나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변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이는 신과 같은 형편없는 사람이 오래도록 영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섭리(燮理)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어질고 덕을 갖춘 자로 다시 영상을 뽑아서 하늘의 꾸중에 답하소서."
【전 의정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이 세상을 떠났다. 【윤승길은 강개하여 의견이 맞는 사람이 적었으므로 벼슬길이 순탄치 않다가 관리의 능력이 드러나 구성 부사(龜城府使)가 되었다. 임진년 난리 때에 군기를 수선하고 물자를 마련한 것이 서로(西路)에서 최고였다. 이원익(李元翼)을 이어서 평안 감사가 되었는데 치적이 거의 비등하였고, 문벌을 이루어 경재(卿宰)에 이르렀다. 동생 윤승훈(尹承勳)은 당론(黨論)을 주장하여 빈객이 많았는데 윤승길은 교제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사위가 바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었는데도 윤승길은 한번도 궁금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선조(宣祖)께서 일찍이 공(珙)에게 이르기를, "너의 장인은 바로 내가 즉위할 때에 사신(史臣)이었다. 그는 사람이 교만하고 너무 강직한 것이 병통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은택이 다른 인척들에 비해서 매우 박하였다. 그러나 광해 이래로 누차 변란을 겪으면서도 윤승길의 집안은 초연히 궁가의 화를 면하였으니, 그가 고요히 지내며 몸가짐을 바르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세상을 뜨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다. 부인 박씨도 음식을 먹지 않아 죽으니 세상에서 또한 그 정렬(貞烈)을 칭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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