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갑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천추절(千秋節)의 전문(箋文)이 뜨락을 지나갈 때 미처 국궁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전원 인혐하고서 물러갔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전교하였다. "모후(母后)의 관복(冠服)에 대해 주청한 것을 특별히 성천자의 은명을 받아 이미 윤허를 받았으므로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이 역시 경들이 온 힘을 다하여 주선한 덕분이다.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듣건대, 중국 조정의 이부(吏部)와 공부(工部)의 당상관들이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 나올지 기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날로 더욱 간절히 나오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경들의 노자 역시 반드시 다 떨어졌을 것이다. 이에 은자(銀子) 1천 냥을 보내니 경들은 이를 수령해서 각 아문에 잘 주선하여 관복(冠服) 등의 물품을 속히 받아서 즉시 돌아오라.’고 주청사(奏請使)에게 하유하라."
"모후(母后)의 관복(冠服)에 대해 주청한 것을 특별히 성천자의 은명을 받아 이미 윤허를 받았으므로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이 역시 경들이 온 힘을 다하여 주선한 덕분이다.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듣건대, 중국 조정의 이부(吏部)와 공부(工部)의 당상관들이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 나올지 기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날로 더욱 간절히 나오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경들의 노자 역시 반드시 다 떨어졌을 것이다. 이에 은자(銀子) 1천 냥을 보내니 경들은 이를 수령해서 각 아문에 잘 주선하여 관복(冠服) 등의 물품을 속히 받아서 즉시 돌아오라.’고 주청사(奏請使)에게 하유하라."
5월 2일 을축
사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 대간이 있음은 사람에게 이목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목은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니 대간을 어떻게 잠시라도 비워둘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간에 궐원이 있을 경우 즉시 정사를 하여 차출하였고, 인혐하였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즉시 처치하였으니, 사체가 중하여서입니다. 지난 29일 오전에 양사의 관원이 모두 피혐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옥당을 심상하게 보아 나 몰라라 내버려 둔 채 긴긴날이 다가도록 처치하지 않고는, 그 다음날 늦게서야 비로소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직무에 태만하고 대간을 멸시한 잘못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일회(一會)에 응당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자를 제외하고, 즉시 처치하지 않은 홍문관의 관원을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승문원의 문서는 말단 관원이 반드시 여러 당상들에게 두루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해져 온 규례입니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정양필(鄭良弼)은 천추사 행차의 문서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부제조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하인에게 허물을 돌려 착오가 나게 한 잘못을 가리우고자 하여, 정직하지 못한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나이 어린 신진(新進)의 관원에게 이 조짐을 키워주어서는 안됩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국가에 대간이 있음은 사람에게 이목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목은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니 대간을 어떻게 잠시라도 비워둘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간에 궐원이 있을 경우 즉시 정사를 하여 차출하였고, 인혐하였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즉시 처치하였으니, 사체가 중하여서입니다. 지난 29일 오전에 양사의 관원이 모두 피혐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옥당을 심상하게 보아 나 몰라라 내버려 둔 채 긴긴날이 다가도록 처치하지 않고는, 그 다음날 늦게서야 비로소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직무에 태만하고 대간을 멸시한 잘못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일회(一會)에 응당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자를 제외하고, 즉시 처치하지 않은 홍문관의 관원을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승문원의 문서는 말단 관원이 반드시 여러 당상들에게 두루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해져 온 규례입니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정양필(鄭良弼)은 천추사 행차의 문서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부제조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하인에게 허물을 돌려 착오가 나게 한 잘못을 가리우고자 하여, 정직하지 못한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나이 어린 신진(新進)의 관원에게 이 조짐을 키워주어서는 안됩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국죄인(庭鞫罪人) 이계명(李啓明)·이언호(李彦豪)가 원정(元情)한 뒤, 의논해 아뢰었다.
전교하였다. "나의 병이 아직까지도 낫지 않아서 이번달의 거둥도 친히 행하기가 어렵다. 영정이 전주에서 떠나는 날짜를 8월 8일로 정하는 일을 일관(日官)에게 물어서 결정해서 아뢰라. 그리고 승지와 예관 이하는 모두 올라오게 하여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하라. 또 상호(上號)하는 것은 9월 초순 뒤로 날짜를 다시 정해 물려서 거행하라."
"나의 병이 아직까지도 낫지 않아서 이번달의 거둥도 친히 행하기가 어렵다. 영정이 전주에서 떠나는 날짜를 8월 8일로 정하는 일을 일관(日官)에게 물어서 결정해서 아뢰라. 그리고 승지와 예관 이하는 모두 올라오게 하여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하라. 또 상호(上號)하는 것은 9월 초순 뒤로 날짜를 다시 정해 물려서 거행하라."
5월 3일 병인
전교하였다. "시문용(施文用)이 올라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 물어서 아뢰지 않고 있다. 수일 안으로 도제조 이하가 속히 회동하여 살펴보고 상세히 물어서 아뢰라. 이상의 일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시문용(施文用)이 올라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 물어서 아뢰지 않고 있다. 수일 안으로 도제조 이하가 속히 회동하여 살펴보고 상세히 물어서 아뢰라. 이상의 일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이궁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을 일일이 서계하고 철거한 집에 대해 값을 보상해 주는 일을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속히 살펴서 거행하게 하라."
"이궁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을 일일이 서계하고 철거한 집에 대해 값을 보상해 주는 일을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속히 살펴서 거행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서울에 있는 공장이들을 일일이 오게 해서 사환시키고 재목 역시 일일이 상세하게 살펴서 남김없이 가지고 오며, 나무 주인에게는 가물(價物)로 치뤄주라. "
"서울에 있는 공장이들을 일일이 오게 해서 사환시키고 재목 역시 일일이 상세하게 살펴서 남김없이 가지고 오며, 나무 주인에게는 가물(價物)로 치뤄주라. "
전교하였다. "이궁에 짓는 각 아문의 칸수를 지금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는데, 속히 써서 들이라. 그리고 승문원의 내주방(內酒房)도 아울러 짓는가? 속히 의논하여 조처하라."
"이궁에 짓는 각 아문의 칸수를 지금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는데, 속히 써서 들이라. 그리고 승문원의 내주방(內酒房)도 아울러 짓는가? 속히 의논하여 조처하라."
사헌부가 아뢰기를, "포도 종사관(捕盜從事官) 이수백(李守白)은 본디 음란하고 패려하여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추잡스런 행실이 드러나서 갇혀 있는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방자하게 나쁜 짓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포도청의 위세를 빙자하여 수절하고 있는 과부를 겁탈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형적이 드러나서 일이 성공치 못함에 미쳐서는 은밀히 죄인 정인형(鄭仁馨)을 사주해서 그로 하여금 과부의 아들 한여신(韓汝信)을 역당(逆黨)에 끌어들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씀이 흉패스럽기가 극심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들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워둘 수가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포도 종사관(捕盜從事官) 이수백(李守白)은 본디 음란하고 패려하여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추잡스런 행실이 드러나서 갇혀 있는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방자하게 나쁜 짓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포도청의 위세를 빙자하여 수절하고 있는 과부를 겁탈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형적이 드러나서 일이 성공치 못함에 미쳐서는 은밀히 죄인 정인형(鄭仁馨)을 사주해서 그로 하여금 과부의 아들 한여신(韓汝信)을 역당(逆黨)에 끌어들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씀이 흉패스럽기가 극심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들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워둘 수가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4일 정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회답사(回答使)의 행차를 또 뒤로 물렸습니다. 만약 시기를 놓쳐서 열흘이나 보름을 늦출 경우에는 바다를 건너는 날짜가 무더운 장마철을 만나게 되어 육로를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으로, 배가 정박해 있을 곳이 없어서 바다에서 지체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러 차례 보내기를 독촉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따질 것이 없으나,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보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보낸다면 질질 끌 필요가 없습니다. 전에 정한 날짜에 속히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병이 나으면 면대하여 유시하고서 보내고자 한다. 그러니 비록 20일 이후에 출발하더라도 방해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회답사(回答使)의 행차를 또 뒤로 물렸습니다. 만약 시기를 놓쳐서 열흘이나 보름을 늦출 경우에는 바다를 건너는 날짜가 무더운 장마철을 만나게 되어 육로를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으로, 배가 정박해 있을 곳이 없어서 바다에서 지체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러 차례 보내기를 독촉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따질 것이 없으나,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보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보낸다면 질질 끌 필요가 없습니다. 전에 정한 날짜에 속히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병이 나으면 면대하여 유시하고서 보내고자 한다. 그러니 비록 20일 이후에 출발하더라도 방해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홍주 목사(洪州牧使) 윤의립(尹義立)은 명화적(明火賊)인 중 경율(景栗)을, 신천 군수(信川郡守) 임석령(任碩齡)은 명화적인 중 굉간(宏侃)을, 창원 부사(昌原府使) 신지제(申之悌)는 명화적 정대립(鄭大立)을 마음을 다해 체포하였으니 몹시 가상합니다. 논상하는 일을 상께서 재결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모두 가자하였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윤의립(尹義立)은 명화적(明火賊)인 중 경율(景栗)을, 신천 군수(信川郡守) 임석령(任碩齡)은 명화적인 중 굉간(宏侃)을, 창원 부사(昌原府使) 신지제(申之悌)는 명화적 정대립(鄭大立)을 마음을 다해 체포하였으니 몹시 가상합니다. 논상하는 일을 상께서 재결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모두 가자하였다.
5월 5일 무진
전교하였다. "경상 좌병사가 단오절(端午節)에 봉진한 부채가 너무 거칠어서 전혀 외방의 신하로서 위를 받드는 정성이 없는바, 불경스러움이 심하다. 각별히 추고하여서 뒷사람을 경계시키라."
"경상 좌병사가 단오절(端午節)에 봉진한 부채가 너무 거칠어서 전혀 외방의 신하로서 위를 받드는 정성이 없는바, 불경스러움이 심하다. 각별히 추고하여서 뒷사람을 경계시키라."
5월 6일 기사
전교하였다. "이처럼 재정이 고갈된 때에 각 도감을 한꺼번에 설치하면 그 폐단이 작지 않다. 더구나 그럭저럭 날짜만 끌면서 오래도록 역사를 끝내지 않고 있다. 주자 도감(鑄字都監)과 보루 도감(報漏都監) 두 도감을 우선 검독(檢督)해서 올해 안으로 속히 역사를 마치게 하라."
"이처럼 재정이 고갈된 때에 각 도감을 한꺼번에 설치하면 그 폐단이 작지 않다. 더구나 그럭저럭 날짜만 끌면서 오래도록 역사를 끝내지 않고 있다. 주자 도감(鑄字都監)과 보루 도감(報漏都監) 두 도감을 우선 검독(檢督)해서 올해 안으로 속히 역사를 마치게 하라."
전교하기를,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를 짓는 공사를 이미 시작하였다고 한다.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공사를 도와서 속히 공사를 마치게 하라는 뜻으로,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이 때에 서울에서 궁궐을 짓는 역사가 막 일어났는데, 또 외방에서 누대(樓臺)를 짓고 있으니, 토붕와해될 형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부사(府使)는 박엽(朴燁)이었는데, 극도로 공교롭고 호화스럽게 하여 임금의 뜻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먼저 감사에 제수되는 명을 받았다.】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를 짓는 공사를 이미 시작하였다고 한다.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공사를 도와서 속히 공사를 마치게 하라는 뜻으로,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이 때에 서울에서 궁궐을 짓는 역사가 막 일어났는데, 또 외방에서 누대(樓臺)를 짓고 있으니, 토붕와해될 형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부사(府使)는 박엽(朴燁)이었는데, 극도로 공교롭고 호화스럽게 하여 임금의 뜻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먼저 감사에 제수되는 명을 받았다.】
임건(林健)을 필선으로, 곽천호(郭天豪)를 강린(姜繗)를 장령으로, 남이준(南以俊)을 집의로, 남이웅(南以雄)을 교리로, 한희(韓暿)를 수찬으로, 서국정(徐國楨)을 부수찬으로, 조유선(趙裕善)을 홍문관 저작으로, 박종윤(朴宗胤)을 검열로, 유약(柳瀹)·기준격(奇俊格)을 예조 좌랑으로, 김세렴(金世濂)을 사서로, 홍요검(洪堯儉)을 지평으로, 유택(柳澤)을 봉상시 정으로, 윤인(尹訒)을 분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경오
사헌부가 아뢰기를, "사예(司藝) 박수서(朴守緖)는 사람됨이 거칠어서 전에 성균관의 관원이 되어서나 뒤에 도감의 낭청이 되어서 비루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는바, 외람되이 사유(師儒)의 직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영산 현감(靈山縣監) 유용(柳溶)은 본래 경력이 없는데 갑자기 수령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랍게 여깁니다. 그런데다가 사람됨이 용렬하여 관직에 앉아 정사를 함에 있어서 인사를 살피지 못합니다. 현풍 현감(玄風縣監) 박신(朴信)은 사람됨이 잗달아서 도임한 뒤에 관속들이 수령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지난번에 차출되어 상경할 때에는 하인들이 그를 버려두고 먼저 갔습니다. 무시당함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관사를 처리하겠습니까.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사예(司藝) 박수서(朴守緖)는 사람됨이 거칠어서 전에 성균관의 관원이 되어서나 뒤에 도감의 낭청이 되어서 비루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는바, 외람되이 사유(師儒)의 직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영산 현감(靈山縣監) 유용(柳溶)은 본래 경력이 없는데 갑자기 수령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랍게 여깁니다. 그런데다가 사람됨이 용렬하여 관직에 앉아 정사를 함에 있어서 인사를 살피지 못합니다. 현풍 현감(玄風縣監) 박신(朴信)은 사람됨이 잗달아서 도임한 뒤에 관속들이 수령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지난번에 차출되어 상경할 때에는 하인들이 그를 버려두고 먼저 갔습니다. 무시당함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관사를 처리하겠습니까.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8일 신미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각 아문의 칸 수를 참작해 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당초에 분병조에 이문하여 목수(木手)와 편수[邊首]를 시켜서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그곳 아문의 칸 수를 헤아린 다음 대강 마련해 보니, 무려 6백여 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6백 칸을 지을 재목을 마련하라는 뜻으로 그 당시에 이미 명을 내렸습니다. 승문원과 내주방(內酒房)은, 평상시 창덕궁에 이어할 때 승문원과 내주방이 그대로 경복궁에 있었다고 하니, 지금도 이궁(離宮) 안에다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감히 성상의 재결을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각 아문을 몇 칸씩으로 하였는가를 기록해 아뢰라. 내주방은 더 지을 곳이 있으면 그대로 이궁의 성안에 짓고 더 지을 곳이 없으면 경복궁의 옛터에 지으라. 그리고 승문원은 경복궁의 옛터에 짓게 하라." 하였다.
"각 아문의 칸 수를 참작해 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당초에 분병조에 이문하여 목수(木手)와 편수[邊首]를 시켜서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그곳 아문의 칸 수를 헤아린 다음 대강 마련해 보니, 무려 6백여 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6백 칸을 지을 재목을 마련하라는 뜻으로 그 당시에 이미 명을 내렸습니다. 승문원과 내주방(內酒房)은, 평상시 창덕궁에 이어할 때 승문원과 내주방이 그대로 경복궁에 있었다고 하니, 지금도 이궁(離宮) 안에다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감히 성상의 재결을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각 아문을 몇 칸씩으로 하였는가를 기록해 아뢰라. 내주방은 더 지을 곳이 있으면 그대로 이궁의 성안에 짓고 더 지을 곳이 없으면 경복궁의 옛터에 지으라. 그리고 승문원은 경복궁의 옛터에 짓게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형조의 수도단자(囚徒單子)를 가져다가 보니, 그 가운데에는 혹 몇 달 몇 년이나 갇혀 있는 자도 있고, 혹 백여 차례나 형신을 받고서도 그대로 갇혀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옥정(獄情)이 확실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속히 결단하기 곤란한 경우는 참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죄범이 명백하여 응당 사형시켜야 할 자에 이르러서는, 끝까지 캐묻고 엄하게 형신해서 기어코 사형에 처하는 것이, 바로 여러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한 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을 제대로 적용치 않은 채 질질 끌어 옥사를 결단할 기약이 없어서, 죄를 진 자가 모면하기를 도모하고 죄를 범하는 자가 더욱 늘어나서, 왕자(王者)의 다스림을 돕는 도구가 도리어 헛된 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 이후로는 본조로 하여금 날마다 좌기하여 엄명하게 신문하게 해서 석방할 자는 석방하고 죄줄 자는 죄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두 조사해 처리해서 적체된 죄수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라도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서 즉시 판결하지 않아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차지 낭청은 파직하고 색리(色吏)는 각별히 가두고서 중하게 다스리는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신칙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수령들이 논박을 받았을 경우, 천천히 결정짓는 동안에 행공(行公)하면서 출입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공론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지난해 10월에 본부에서 북청 판관(北靑判官) 정운호(鄭雲湖)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상황을 논계하였는데, 상께서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랬으면 정운호는 마땅히 엎드려 있으면서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감히 승차(承差)되어 상경해서 태연스레 출입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바, 대간의 논의를 무시하고 경망스레 멋대로 군 죄가 큽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감사는 사체를 생각지 않고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보내었으니, 역시 잘못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아울러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전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나머지 일은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형조의 수도단자(囚徒單子)를 가져다가 보니, 그 가운데에는 혹 몇 달 몇 년이나 갇혀 있는 자도 있고, 혹 백여 차례나 형신을 받고서도 그대로 갇혀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옥정(獄情)이 확실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속히 결단하기 곤란한 경우는 참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죄범이 명백하여 응당 사형시켜야 할 자에 이르러서는, 끝까지 캐묻고 엄하게 형신해서 기어코 사형에 처하는 것이, 바로 여러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한 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을 제대로 적용치 않은 채 질질 끌어 옥사를 결단할 기약이 없어서, 죄를 진 자가 모면하기를 도모하고 죄를 범하는 자가 더욱 늘어나서, 왕자(王者)의 다스림을 돕는 도구가 도리어 헛된 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 이후로는 본조로 하여금 날마다 좌기하여 엄명하게 신문하게 해서 석방할 자는 석방하고 죄줄 자는 죄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두 조사해 처리해서 적체된 죄수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라도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서 즉시 판결하지 않아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차지 낭청은 파직하고 색리(色吏)는 각별히 가두고서 중하게 다스리는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신칙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수령들이 논박을 받았을 경우, 천천히 결정짓는 동안에 행공(行公)하면서 출입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공론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지난해 10월에 본부에서 북청 판관(北靑判官) 정운호(鄭雲湖)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상황을 논계하였는데, 상께서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랬으면 정운호는 마땅히 엎드려 있으면서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감히 승차(承差)되어 상경해서 태연스레 출입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바, 대간의 논의를 무시하고 경망스레 멋대로 군 죄가 큽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감사는 사체를 생각지 않고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보내었으니, 역시 잘못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아울러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전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나머지 일은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5월 9일 임신
전교하였다. "이궁의 궁호(宮號)를 먼저 여러 가지로 써서 아뢰라고 대제학에게 말하라."
"이궁의 궁호(宮號)를 먼저 여러 가지로 써서 아뢰라고 대제학에게 말하라."
전교하였다. "대제학을 명초(命招)해서 교서를 기일에 앞서 지어 올리게 하라."
"대제학을 명초(命招)해서 교서를 기일에 앞서 지어 올리게 하라."
5월 10일 계유
전교하였다. "전라 감사에게 ‘전주(全州)의 영정이 형세상 장차 여름을 지나게 되었는바, 습기가 스며들 걱정이 있을 듯하니 자주 봉심하고, 혹 본부 관사의 온돌방에다 보관하되, 불조심을 하는 등의 일을 십분 늘 신칙하라. 그리고 듣건대 본도의 인심이 좋지 않다고 하는바, 염려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그러니 어루만져 주고 안심시켜서 잘 이끌어주는 방도와, 수상한 일을 기찰하는 등의 일 및 도망 중에 있는 역적과 죄인들을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는 일 등을 다시금 마음을 다해 착실하게 하라. 또 도내의 재목이 있는 곳에 대들보감의 대목(大木)을 곤수와 수령, 변장들 중에 혹 남벌하는 자가 있을 경우, 경은 계문하고서 엄히 금하라. 그리고 이미 베어낸 재목은 선수 도감 낭청이 이미 내려갔으니, 속히 끌어다가 배에 실어서 썩지 않도록 하라. 또 선수(繕修)에 관계되는 시급한 일은 즉시 유념해서 거행하라.’는 뜻으로 말해 보내라."
"전라 감사에게 ‘전주(全州)의 영정이 형세상 장차 여름을 지나게 되었는바, 습기가 스며들 걱정이 있을 듯하니 자주 봉심하고, 혹 본부 관사의 온돌방에다 보관하되, 불조심을 하는 등의 일을 십분 늘 신칙하라. 그리고 듣건대 본도의 인심이 좋지 않다고 하는바, 염려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그러니 어루만져 주고 안심시켜서 잘 이끌어주는 방도와, 수상한 일을 기찰하는 등의 일 및 도망 중에 있는 역적과 죄인들을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는 일 등을 다시금 마음을 다해 착실하게 하라. 또 도내의 재목이 있는 곳에 대들보감의 대목(大木)을 곤수와 수령, 변장들 중에 혹 남벌하는 자가 있을 경우, 경은 계문하고서 엄히 금하라. 그리고 이미 베어낸 재목은 선수 도감 낭청이 이미 내려갔으니, 속히 끌어다가 배에 실어서 썩지 않도록 하라. 또 선수(繕修)에 관계되는 시급한 일은 즉시 유념해서 거행하라.’는 뜻으로 말해 보내라."
5월 11일 갑술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이춘기(李春祺) 등을 사형에 처한 것을 축하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왕법(王法)이 거행되지 않아 오랫동안 형관(刑官)이 옥사를 지체시키는 것을 놓아두었는데 천망(天網)이 펼쳐져서 마침내 시가(市街)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이에 귀신과 사람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고, 조정과 재야가 다투어 기뻐하였다. 역적의 괴수인 이춘기는 임진 왜란이 일어난 처음에 사사로이 향병(鄕兵)을 모아서 스스로 진장(陣將)이 되었다. 그 뒤 군공(軍功)이 있다고 하면서 중한 상을 받고자 하였는데, 자기의 욕심에 차지 않자 도리어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 정유년 겨울에 조토리(趙吐里)·황학령(黃鶴齡)·개똥[介叱同] 등과 더불어 복심(腹心)이 되어 그 종적을 비밀스럽게 하고, 화살에 글을 묶어 쏘아넣어서 중국 무원(撫院)을 속였다. 그리하여 임금을 헐뜯고 조정을 비방하였는데, 흉악한 말과 패만스러운 내용은 그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중국 장수가 분노를 발하여 우리 대궐에다 전보(傳報)하였다. 조토리를 곧장 문초하자 먼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 이에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신속히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상형(常刑)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춘기는 이미 흉서(兇書)를 짓고 조토리를 사주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 이에 스스로 모면치 못할 줄을 알고서 압송해 오는 도중에 뇌물을 주고 몰래 도망쳤다. 황학령과 개똥은 모두 왕옥(王獄)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엄한 형신을 받았는데, 감옥의 울타리를 뚫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에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면서 팔도에 모두 알렸다. 지난 정미년에 황학령이 체포되고 이어 즉시 승복하였는데, 계복(啓覆)하는데 몇 년이 걸려 흉한 목숨이 붙어 있었다. 또 병진년 봄에는 이춘기와 개똥이 서로 잇달아 체포되었는데, 형추(刑推)하기도 전에 자신의 죄를 모두 불었다. 이에 병사(兵使)의 추안(推案)과 대장(大將)의 취초(取招)가 딱 맞아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금부(禁府)로 옮겨 가두고서 해당되는 율로 결단하였다. 황학령과 이춘기는 같은 날에 기시(棄市)하였고, 개똥은 지레 옥중에서 죽었기에 추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원근에 유시하였는바, 역적은 반드시 처벌된다는 옛말을 비로소 믿겠고, 이름이 서책에 실려 있으니 참으로 살아남기가 어렵다. 아, 죄인을 잡음에 선조(先朝)의 치욕이 비로소 씻겼고, 예전 습관이 일신됨에 오늘날의 덕형(德刑)이 함께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라." 하였다.
"왕법(王法)이 거행되지 않아 오랫동안 형관(刑官)이 옥사를 지체시키는 것을 놓아두었는데 천망(天網)이 펼쳐져서 마침내 시가(市街)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이에 귀신과 사람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고, 조정과 재야가 다투어 기뻐하였다.
역적의 괴수인 이춘기는 임진 왜란이 일어난 처음에 사사로이 향병(鄕兵)을 모아서 스스로 진장(陣將)이 되었다. 그 뒤 군공(軍功)이 있다고 하면서 중한 상을 받고자 하였는데, 자기의 욕심에 차지 않자 도리어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 정유년 겨울에 조토리(趙吐里)·황학령(黃鶴齡)·개똥[介叱同] 등과 더불어 복심(腹心)이 되어 그 종적을 비밀스럽게 하고, 화살에 글을 묶어 쏘아넣어서 중국 무원(撫院)을 속였다. 그리하여 임금을 헐뜯고 조정을 비방하였는데, 흉악한 말과 패만스러운 내용은 그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중국 장수가 분노를 발하여 우리 대궐에다 전보(傳報)하였다.
조토리를 곧장 문초하자 먼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 이에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신속히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상형(常刑)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춘기는 이미 흉서(兇書)를 짓고 조토리를 사주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 이에 스스로 모면치 못할 줄을 알고서 압송해 오는 도중에 뇌물을 주고 몰래 도망쳤다. 황학령과 개똥은 모두 왕옥(王獄)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엄한 형신을 받았는데, 감옥의 울타리를 뚫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에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면서 팔도에 모두 알렸다.
지난 정미년에 황학령이 체포되고 이어 즉시 승복하였는데, 계복(啓覆)하는데 몇 년이 걸려 흉한 목숨이 붙어 있었다. 또 병진년 봄에는 이춘기와 개똥이 서로 잇달아 체포되었는데, 형추(刑推)하기도 전에 자신의 죄를 모두 불었다. 이에 병사(兵使)의 추안(推案)과 대장(大將)의 취초(取招)가 딱 맞아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금부(禁府)로 옮겨 가두고서 해당되는 율로 결단하였다. 황학령과 이춘기는 같은 날에 기시(棄市)하였고, 개똥은 지레 옥중에서 죽었기에 추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원근에 유시하였는바, 역적은 반드시 처벌된다는 옛말을 비로소 믿겠고, 이름이 서책에 실려 있으니 참으로 살아남기가 어렵다.
아, 죄인을 잡음에 선조(先朝)의 치욕이 비로소 씻겼고, 예전 습관이 일신됨에 오늘날의 덕형(德刑)이 함께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라."
하였다.
사헌부가 연계하여, 정운호(鄭雲湖)를 파직하고 감사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 들어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사람들이 법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편함만 추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대소 아문에서 숙직하는 관원들이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사복(私服)을 입고 출입하여 보고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신칙하여 사복을 입고 출입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드러나는 대로 규핵(糾劾)하는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장악원 첨정 안담수(安聃壽)는 본디 용렬한 사람이며, 나이 또한 늙었습니다.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제대로 호령하지 못하여서 아랫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주 부사(竹州府使) 윤수(尹燧)는 몸에 중한 병이 있어서 도임한 뒤에는 좌아(坐衙)를 전폐하고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하리의 손에다 내맡기고 있습니다. 이에 관사(官事)가 해이해지고 민폐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바, 방어상 긴요한 지역을 무너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운호 등의 일은 이미 유시하였다. 우선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승전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안담수는 체차하라. 윤수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요즈음 들어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사람들이 법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편함만 추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대소 아문에서 숙직하는 관원들이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사복(私服)을 입고 출입하여 보고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신칙하여 사복을 입고 출입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드러나는 대로 규핵(糾劾)하는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장악원 첨정 안담수(安聃壽)는 본디 용렬한 사람이며, 나이 또한 늙었습니다.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제대로 호령하지 못하여서 아랫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주 부사(竹州府使) 윤수(尹燧)는 몸에 중한 병이 있어서 도임한 뒤에는 좌아(坐衙)를 전폐하고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하리의 손에다 내맡기고 있습니다. 이에 관사(官事)가 해이해지고 민폐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바, 방어상 긴요한 지역을 무너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운호 등의 일은 이미 유시하였다. 우선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승전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안담수는 체차하라. 윤수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인왕산 아래에 짓는 궁궐은 ‘신궐(新闕)’로 이름을 계하하니, 모든 계사 및 각처에 행회(行會)하는 문서에는 ‘신궐’로 말하라."
"인왕산 아래에 짓는 궁궐은 ‘신궐(新闕)’로 이름을 계하하니, 모든 계사 및 각처에 행회(行會)하는 문서에는 ‘신궐’로 말하라."
최호(崔濩)를 지평으로, 황뉴(黃紐)를 주서로 삼았다.
5월 12일 을해
전교하기를, "신궐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들에게 숫자를 헤아려서 값을 주는 일을 속히 마련하여 서계하라는 뜻으로 선수 도감에 말하라." 하였다. 도감이 회계하기를, "신궐 안 및 후원(後苑)의 집터가 거의 2백여 채나 되는데, 그 주인이 혹 외방에 있거나 혹 서울에 있으면서 제때에 오지 않아서 도감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단지 고로(故老)들이 가리켜주는 것에 따라서 집주인의 성명을 현록(懸錄)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자, 이 기별을 듣고는 다투어 와서 정장(呈狀)하는데, 혹 ‘우리 집터인데 잘못되어 다른 사람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거나, 혹 ‘내가 산 터인데 잘못되어 예전 주인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면서 고쳐 주기를 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처 서계하지 못한 자들 역시 많이들 와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에서는 그들의 정소(呈訴)에 대해 믿기가 어려워서 가지고 온 문서를 조사해 살펴보는 즈음에 저절로 지연되어 제때에 일일이 서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선 조사해 보아 분명한 자만 먼저 서계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세의 인심이 각박해서 갖가지로 간사한 짓을 하는바, 그 사이에 은상(恩賞)을 받기를 희망해서, 문서를 위조하여 몰래 다른 사람의 집터를 차지해 자기의 집터라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뒷날에 만약 드 러나는 자가 있을 경우 법사로 하여금 먼저 속인 죄를 다스리게 하고 그에게 준 상격(賞格)을 환수한 다음에야 분분하게 정소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혹 칸수의 다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상세히 살펴서 잘 처리하라." 하였다.
"신궐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들에게 숫자를 헤아려서 값을 주는 일을 속히 마련하여 서계하라는 뜻으로 선수 도감에 말하라."
하였다. 도감이 회계하기를,
"신궐 안 및 후원(後苑)의 집터가 거의 2백여 채나 되는데, 그 주인이 혹 외방에 있거나 혹 서울에 있으면서 제때에 오지 않아서 도감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단지 고로(故老)들이 가리켜주는 것에 따라서 집주인의 성명을 현록(懸錄)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자, 이 기별을 듣고는 다투어 와서 정장(呈狀)하는데, 혹 ‘우리 집터인데 잘못되어 다른 사람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거나, 혹 ‘내가 산 터인데 잘못되어 예전 주인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면서 고쳐 주기를 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처 서계하지 못한 자들 역시 많이들 와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에서는 그들의 정소(呈訴)에 대해 믿기가 어려워서 가지고 온 문서를 조사해 살펴보는 즈음에 저절로 지연되어 제때에 일일이 서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선 조사해 보아 분명한 자만 먼저 서계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세의 인심이 각박해서 갖가지로 간사한 짓을 하는바, 그 사이에 은상(恩賞)을 받기를 희망해서, 문서를 위조하여 몰래 다른 사람의 집터를 차지해 자기의 집터라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뒷날에 만약 드 러나는 자가 있을 경우 법사로 하여금 먼저 속인 죄를 다스리게 하고 그에게 준 상격(賞格)을 환수한 다음에야 분분하게 정소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혹 칸수의 다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상세히 살펴서 잘 처리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정운호(鄭雲湖)는 언제 논박을 받았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 17일에 헌부가 파직하라고 논계하였는데,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비답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처치가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운호는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라. 감사는 추고하라." 하였다.
"정운호(鄭雲湖)는 언제 논박을 받았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 17일에 헌부가 파직하라고 논계하였는데,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비답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처치가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운호는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라. 감사는 추고하라."
하였다.
지진이 있었다.
5월 13일 병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리고 거짓됨이 날로 불어나서 공을 노리고 상을 바라는 무리들이 전후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체포하고 도랑을 치고 제방을 쌓은 자들 및 군량과 군기를 마련한 하찮은 수고를 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자급과 차서가 뛰어올랐는바, 법도가 전혀 없어서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난번 정인경(鄭仁敬)은 단지 포도청의 일개 천인으로서 체포하는 즈음에 비밀히 뒤를 밟아 군사를 풀어서 포박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은 논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설령 공이 있다 하더라도, 체포할 당시에 먼저 체포한 자가 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포도청에서는 사정(私情)을 따라서 과장하여 떠벌렸으며, 심지어는 따라다니기만 한 자들까지도 성상께 거짓으로 아뢰어서 아울러 가자(加資)의 은전을 받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백 명의 도적을 체포하였더라도 그것은 포도청의 직분 안의 일인 것으로, 당초에 기록할 만한 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한 도적을 체포한 것을 가지고 어찌 5명이나 가자를 한단 말입니까. 정목(政目)이 한 번 내려지자 보고듣는 사람들이 놀랍고 분하게 여깁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린 뒤에는 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이나 부장(部將) 자리를 구하는 자들이 머리가 부서져라 다툴 것이어서, 반드시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해당 대장을 파직하소서. 그리고 먼저 체포한 공으로 가자받은 자 외에는 모두 조사해서 고치라고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근래에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리고 거짓됨이 날로 불어나서 공을 노리고 상을 바라는 무리들이 전후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체포하고 도랑을 치고 제방을 쌓은 자들 및 군량과 군기를 마련한 하찮은 수고를 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자급과 차서가 뛰어올랐는바, 법도가 전혀 없어서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난번 정인경(鄭仁敬)은 단지 포도청의 일개 천인으로서 체포하는 즈음에 비밀히 뒤를 밟아 군사를 풀어서 포박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은 논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설령 공이 있다 하더라도, 체포할 당시에 먼저 체포한 자가 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포도청에서는 사정(私情)을 따라서 과장하여 떠벌렸으며, 심지어는 따라다니기만 한 자들까지도 성상께 거짓으로 아뢰어서 아울러 가자(加資)의 은전을 받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백 명의 도적을 체포하였더라도 그것은 포도청의 직분 안의 일인 것으로, 당초에 기록할 만한 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한 도적을 체포한 것을 가지고 어찌 5명이나 가자를 한단 말입니까. 정목(政目)이 한 번 내려지자 보고듣는 사람들이 놀랍고 분하게 여깁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린 뒤에는 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이나 부장(部將) 자리를 구하는 자들이 머리가 부서져라 다툴 것이어서, 반드시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해당 대장을 파직하소서. 그리고 먼저 체포한 공으로 가자받은 자 외에는 모두 조사해서 고치라고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14일 정축
전교하였다. "신궐(新闕)의 각 아문을 배설한 곳에 오래된 집의 동산(東山)이 있으면 절대로 그곳의 나무를 자르지 말고 아무아무 집의 동산이 얼마만한지 일일이 살펴 아뢰되, 아울러 그림으로 그려서 들이라고 선수 도감에다 말해 주라."
"신궐(新闕)의 각 아문을 배설한 곳에 오래된 집의 동산(東山)이 있으면 절대로 그곳의 나무를 자르지 말고 아무아무 집의 동산이 얼마만한지 일일이 살펴 아뢰되, 아울러 그림으로 그려서 들이라고 선수 도감에다 말해 주라."
전교하였다. "신궐의 담장 안으로 들어간 민가의 주인 중 가자할 자와 6품에 천전(遷轉)할 자와 직책에 제수할 사람 및 추증(追贈)하거나 녹용(錄用)할 자, 허통(許通)시킬 서얼과 면천(免賤)시킬 공사천(公私賤)을 상세히 뽑아낸 다음, 일일이 서계하고 속히 상을 줄 일을 영건 도감(營建都監)에 말하라."
"신궐의 담장 안으로 들어간 민가의 주인 중 가자할 자와 6품에 천전(遷轉)할 자와 직책에 제수할 사람 및 추증(追贈)하거나 녹용(錄用)할 자, 허통(許通)시킬 서얼과 면천(免賤)시킬 공사천(公私賤)을 상세히 뽑아낸 다음, 일일이 서계하고 속히 상을 줄 일을 영건 도감(營建都監)에 말하라."
사간원이 아뢰기를, "감찰 김대곤(金大鵾)은 인물이 추하고 비루하며 문벌이 낮습니다. 이시웅(李時雄)은 처사가 전도되었고 망령스러우며 각사(各司)에게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권익중(權益中)은 사람됨이 교만하고 망령스러우며, 도처에서 탐학하였고 본직에 제수되어서는 백성들에게 긁어들여 자신의 배만 불렸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권익중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감찰 김대곤(金大鵾)은 인물이 추하고 비루하며 문벌이 낮습니다. 이시웅(李時雄)은 처사가 전도되었고 망령스러우며 각사(各司)에게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권익중(權益中)은 사람됨이 교만하고 망령스러우며, 도처에서 탐학하였고 본직에 제수되어서는 백성들에게 긁어들여 자신의 배만 불렸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권익중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5월 15일 무인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신궐의 조하받는 정전(正殿)을 15일에 터를 닦을 것입니다. 전에 창경궁의 경우에는 모두 옛터를 인하여서 지었으므로 상량(上樑)하는 날에 백관이 상회(商會)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금은 신궐의 터를 닦는 것이 실로 막중한 일이니, 2품 이상의 여러 재신(宰臣)이 모두 회동하여 참가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참관할 사람을 상세히 서계하라." 하였다.
"신궐의 조하받는 정전(正殿)을 15일에 터를 닦을 것입니다. 전에 창경궁의 경우에는 모두 옛터를 인하여서 지었으므로 상량(上樑)하는 날에 백관이 상회(商會)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금은 신궐의 터를 닦는 것이 실로 막중한 일이니, 2품 이상의 여러 재신(宰臣)이 모두 회동하여 참가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참관할 사람을 상세히 서계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방백은 한 도의 주인으로 직임이 막중하고 사무가 복잡한바, 참으로 하루도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됩니다. 평안 감사 김신국(金藎國)은 몸에 심한 병이 걸린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 관사(官事)를 전폐하고 직무를 돌보려는 뜻이 없습니다. 이에 서쪽 관문의 중요한 지역의 일이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속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그의 대임자를 속히 차출하여 내려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응당 처치할 것이니 번거롭게 논계하지 말라." 하였다.
"방백은 한 도의 주인으로 직임이 막중하고 사무가 복잡한바, 참으로 하루도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됩니다. 평안 감사 김신국(金藎國)은 몸에 심한 병이 걸린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 관사(官事)를 전폐하고 직무를 돌보려는 뜻이 없습니다. 이에 서쪽 관문의 중요한 지역의 일이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속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그의 대임자를 속히 차출하여 내려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응당 처치할 것이니 번거롭게 논계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대전(大典)」을 고강(考講)할 때 선공감 직장 이경민(李景閔)을 패초(牌招)하였는데 아무런 이유없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경민은 담장 밖의 집을 짓는 곳의 공사를 자리를 뜨지 않고 감독하고 있으니,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대전(大典)」을 고강(考講)할 때 선공감 직장 이경민(李景閔)을 패초(牌招)하였는데 아무런 이유없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경민은 담장 밖의 집을 짓는 곳의 공사를 자리를 뜨지 않고 감독하고 있으니,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인왕산 아래의 좌우 및 성첩(城堞)과 담장을 더 쌓을 때 산 위와 산 아래의 수목을 절대로 훼손시키지 말도록 하는 일을, 축장 감역관(築墻監役官)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하게 하라. "
"인왕산 아래의 좌우 및 성첩(城堞)과 담장을 더 쌓을 때 산 위와 산 아래의 수목을 절대로 훼손시키지 말도록 하는 일을, 축장 감역관(築墻監役官)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하게 하라. "
5월 16일 기묘
전교하였다. "절일(節日)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성절사(聖節使)의 행차에, 고라가(雇騾價) 및 왜정(倭情)을 주문(奏聞)할 때 인정(人情)으로 쓸 은자(銀子) 2백 냥을 품질이 좋은 은자로 속히 지급해 주라."
"절일(節日)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성절사(聖節使)의 행차에, 고라가(雇騾價) 및 왜정(倭情)을 주문(奏聞)할 때 인정(人情)으로 쓸 은자(銀子) 2백 냥을 품질이 좋은 은자로 속히 지급해 주라."
전교하였다. "동·서 양소(兩所)에서 떠낸 돌의 조각을 먼저 떠가지고 와서 어전(御前)에서 품질을 살펴보고 쓰라고 도감에 말해 주라."
"동·서 양소(兩所)에서 떠낸 돌의 조각을 먼저 떠가지고 와서 어전(御前)에서 품질을 살펴보고 쓰라고 도감에 말해 주라."
경상도 관찰사 윤훤(尹暄)이 장계하기를, "거제(巨濟)에 정배(定配)한 죄인 중 전후로 도망한 자가 무려 1백 68인이나 되는데, 나라에 기강이 없어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도내에 있는 사람은 기일을 정해 놓고 체포해서 배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서울과 다른 도에 있는 사람은 해당 지방으로 하여금 일일이 착실하게 체포해서 보내게 하소서." 하였다.
"거제(巨濟)에 정배(定配)한 죄인 중 전후로 도망한 자가 무려 1백 68인이나 되는데, 나라에 기강이 없어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도내에 있는 사람은 기일을 정해 놓고 체포해서 배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서울과 다른 도에 있는 사람은 해당 지방으로 하여금 일일이 착실하게 체포해서 보내게 하소서."
하였다.
5월 17일 경진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정전의 터를 닦을 때 술관(術官)들의 말이 차이가 있었는데,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터를 닦는 길일(吉日)을 헛되이 보내어서는 안되겠기에 신들이 회동하여서 부득이 두 곳에 터를 닦고서 성상의 재결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또 도감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해서 정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오늘 도감의 당상관 역시 네 사람이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터를 정하는 막중한 일을 널리 의논하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품 이상과 여러 재신 및 육조 전원과 삼사의 장관을 다시 회동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소견을 진술하게 한 다음 전지(傳旨)를 여쭈어서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재신들 가운데서 풍수(風水)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는가? 아는 자가 없을 것 같으면 이는 군국(軍國)의 대사(大事)가 아니니 널리 조정의 의논을 거둘 필요가 없다. 시문용(施文用)과 성지(性智)가 김일용(金馹龍) 등이 말한 곳에다가는 외정전(外正殿)·시사전(視事殿)·야대청(夜對廳)을 조성하며, 흥안군(興安君) 집의 빈 터가 몹시 넓으니, 전각(殿閣)을 두세 곳에 조성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도감에서 다시금 잘 조처하라. 시문용 등이 말한 곳이 무방하다면, 속히 돌을 다듬어서 초석(礎石)을 놓아, 호남의 재목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즉시 조성하라. 이상의 일을 살펴서 하라." 하였다.
"정전의 터를 닦을 때 술관(術官)들의 말이 차이가 있었는데,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터를 닦는 길일(吉日)을 헛되이 보내어서는 안되겠기에 신들이 회동하여서 부득이 두 곳에 터를 닦고서 성상의 재결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또 도감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해서 정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오늘 도감의 당상관 역시 네 사람이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터를 정하는 막중한 일을 널리 의논하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품 이상과 여러 재신 및 육조 전원과 삼사의 장관을 다시 회동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소견을 진술하게 한 다음 전지(傳旨)를 여쭈어서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재신들 가운데서 풍수(風水)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는가? 아는 자가 없을 것 같으면 이는 군국(軍國)의 대사(大事)가 아니니 널리 조정의 의논을 거둘 필요가 없다. 시문용(施文用)과 성지(性智)가 김일용(金馹龍) 등이 말한 곳에다가는 외정전(外正殿)·시사전(視事殿)·야대청(夜對廳)을 조성하며, 흥안군(興安君) 집의 빈 터가 몹시 넓으니, 전각(殿閣)을 두세 곳에 조성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도감에서 다시금 잘 조처하라. 시문용 등이 말한 곳이 무방하다면, 속히 돌을 다듬어서 초석(礎石)을 놓아, 호남의 재목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즉시 조성하라. 이상의 일을 살펴서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신궐의 터를 닦는 일은 일의 체모가 아주 중하여서 2품 이상이 모두 모이고 헌장(憲長) 역시 나가 참여하였는데, 간관(諫官)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나라의 크고작은 일에 대해서 양사가 모두 알아야만 하니, 뒷날에 정전(正殿)에 상량(上樑)할 때에는 삼사의 장관이 모두 나가서 참여하라. 이상의 일을 알려서 거행하게 하라."
"신궐의 터를 닦는 일은 일의 체모가 아주 중하여서 2품 이상이 모두 모이고 헌장(憲長) 역시 나가 참여하였는데, 간관(諫官)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나라의 크고작은 일에 대해서 양사가 모두 알아야만 하니, 뒷날에 정전(正殿)에 상량(上樑)할 때에는 삼사의 장관이 모두 나가서 참여하라. 이상의 일을 알려서 거행하게 하라."
대사간 정광성(鄭廣成)이 아뢰기를,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간관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교하시었습니다. 신은 황공하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감의 계사 가운데 ‘2품 이상의 여러 재신(宰臣)들이 참가해 보라.’는 말이 있었기에, 신은 ‘직이 3품이니 감히 2품 이상이 회동하는 데 참여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서 직무를 다하지 못한 결과를 빚었는바, 신의 죄가 큽니다.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간관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교하시었습니다. 신은 황공하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감의 계사 가운데 ‘2품 이상의 여러 재신(宰臣)들이 참가해 보라.’는 말이 있었기에, 신은 ‘직이 3품이니 감히 2품 이상이 회동하는 데 참여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서 직무를 다하지 못한 결과를 빚었는바, 신의 죄가 큽니다.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정도(鄭道), 헌납 한옥(韓玉), 정언 채승선(蔡承先)·황덕부(黃德符)가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보건대, 선수 도감의 계사 안에 ‘신궐의 터를 닦을 때 2품 이상이 회동하여 참관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본원의 관원은 모두 3품 이하의 관원이라 당초에 나아가 참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신들이 본원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한 사람도 가서 참관하지 않은 잘못이 대사간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대로 태연스레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신들이 일찍이 보건대, 선수 도감의 계사 안에 ‘신궐의 터를 닦을 때 2품 이상이 회동하여 참관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본원의 관원은 모두 3품 이하의 관원이라 당초에 나아가 참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신들이 본원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한 사람도 가서 참관하지 않은 잘못이 대사간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대로 태연스레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5월 18일 신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대사간 이하가 모두 인혐하고서 물러갔습니다. 터를 닦는 막중한 일을 신하된 자치고 그 누가 가서 참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도감의 계사 안에 2품 이상만 모두 회동하라고만 하고 양사의 장관은 참관하라는 말이 없었으니, 2품이 아니어서 나아가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형세가 참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이하의 관원이겠습니까. 모두 혐의할 바가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이하가 모두 인혐하고서 물러갔습니다. 터를 닦는 막중한 일을 신하된 자치고 그 누가 가서 참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도감의 계사 안에 2품 이상만 모두 회동하라고만 하고 양사의 장관은 참관하라는 말이 없었으니, 2품이 아니어서 나아가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형세가 참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이하의 관원이겠습니까. 모두 혐의할 바가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5월 19일 임오
전교하였다. "선수 도감에게 회의할 때에는 비록 예겸제조(例兼提調)일지라도 부지런히 나아가 참여해서 상의하여 아뢰라고 도감에 말하라."
"선수 도감에게 회의할 때에는 비록 예겸제조(例兼提調)일지라도 부지런히 나아가 참여해서 상의하여 아뢰라고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호남 지방의 각 섬과 변산(邊山)·완도(莞島)에 재목이 아주 많은데 난리를 겪은 뒤로 국법이 해이해져서 남벌하고 있다. 앞으로 법궁(法宮)을 중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지금부터는 산지기[山直]를 많이 정하여서 번갈아 가면서 지켜서 뒷날에 쓸 수 있게 하는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 그리고 지키는 산지기 역시 복호(復戶)시켜주고 잘 돌보아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잘 지키게 하라. 이상의 일을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호남 지방의 각 섬과 변산(邊山)·완도(莞島)에 재목이 아주 많은데 난리를 겪은 뒤로 국법이 해이해져서 남벌하고 있다. 앞으로 법궁(法宮)을 중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지금부터는 산지기[山直]를 많이 정하여서 번갈아 가면서 지켜서 뒷날에 쓸 수 있게 하는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 그리고 지키는 산지기 역시 복호(復戶)시켜주고 잘 돌보아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잘 지키게 하라. 이상의 일을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사헌부가 아뢰기를, "본부에서 4월 22일에는 풍천 부사(豊川府使) 변익성(邊翼星)과 여산 군수(礪山郡守) 신인각(愼仁慤)에 대해서, 이달 4일에는 포도 종사관(捕盜從事官) 이수백(李守白)에 대해서, 12일에는 죽산 부사(竹山府使) 윤수(尹燧)에 대해서, 13일에는 포도 대장에 대해서 파직하거나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논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은 공손히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뭇거리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신 지가 열흘이 넘고 있으니, 신들은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신들에게 언관의 직책을 맡겼는데, 신들의 말을 즉시 시행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것이 비록 신들의 성의가 모자란 탓에서이기는 하지만 물 흐르듯이 간언을 따라야 하는 성상의 도리에 있어서도 어긋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논계한 바가 알맞는 것이라고 여겨지면 시원스럽게 윤허하여도 되고, 풍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지면 윤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잠시 정지한 뒤에 가타부타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수령들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저들 스스로 논박을 받아서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체차되기 전에 더욱더 침탈을 자행하여 폐단을 끼침이 작지 않습니다. 탄핵하는 일은 본디 백성들을 위해 폐단을 제거해 주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해만 더 끼쳐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자가 징계되는 바가 없고 악한 짓을 한 자가 고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장차 상벌(賞罰)이 어긋나고 간람(奸濫)이 불어나며,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리고 공공의 의논이 사그라지게 되었는바, 국가 안위(安危)의 기틀이 ‘천천히 결정짓겠다.’는 데에서 판가름나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후로 천천히 결정짓겠다고 한 것에 대해 모두 속히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여서, 공의(公議)를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다. 응당 처치할 것이니, 우선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본부에서 4월 22일에는 풍천 부사(豊川府使) 변익성(邊翼星)과 여산 군수(礪山郡守) 신인각(愼仁慤)에 대해서, 이달 4일에는 포도 종사관(捕盜從事官) 이수백(李守白)에 대해서, 12일에는 죽산 부사(竹山府使) 윤수(尹燧)에 대해서, 13일에는 포도 대장에 대해서 파직하거나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논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은 공손히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뭇거리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신 지가 열흘이 넘고 있으니, 신들은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신들에게 언관의 직책을 맡겼는데, 신들의 말을 즉시 시행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것이 비록 신들의 성의가 모자란 탓에서이기는 하지만 물 흐르듯이 간언을 따라야 하는 성상의 도리에 있어서도 어긋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논계한 바가 알맞는 것이라고 여겨지면 시원스럽게 윤허하여도 되고, 풍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지면 윤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잠시 정지한 뒤에 가타부타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수령들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저들 스스로 논박을 받아서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체차되기 전에 더욱더 침탈을 자행하여 폐단을 끼침이 작지 않습니다. 탄핵하는 일은 본디 백성들을 위해 폐단을 제거해 주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해만 더 끼쳐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자가 징계되는 바가 없고 악한 짓을 한 자가 고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장차 상벌(賞罰)이 어긋나고 간람(奸濫)이 불어나며,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리고 공공의 의논이 사그라지게 되었는바, 국가 안위(安危)의 기틀이 ‘천천히 결정짓겠다.’는 데에서 판가름나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후로 천천히 결정짓겠다고 한 것에 대해 모두 속히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여서, 공의(公議)를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다. 응당 처치할 것이니, 우선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오시(午時)에 태백(太白)이 오지(午地)에 나타났다.
5월 20일 계미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우는 옛터에다 그대로 지었으므로 임무를 부여받은 관원이 단지 역사만 감독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신궐을 창건하는 것이어서 사체가 막중한데, 단지 신 등 몇 명이서 담당할 경우, 논의할 즈음에 고루함을 면치 못하여 미진한 일이 있어서 뒷날에 후회를 끼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제조로 임명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넉넉하게 차출해서 함께 의논하고 힘을 합하여 큰 일을 함께 이루어야 마땅합니다. 신들은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그 일을 중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제조로 임명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대신과 의논한 다음 서계해서 낙점을 받아 그 일을 중하게 하라." 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우는 옛터에다 그대로 지었으므로 임무를 부여받은 관원이 단지 역사만 감독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신궐을 창건하는 것이어서 사체가 막중한데, 단지 신 등 몇 명이서 담당할 경우, 논의할 즈음에 고루함을 면치 못하여 미진한 일이 있어서 뒷날에 후회를 끼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제조로 임명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넉넉하게 차출해서 함께 의논하고 힘을 합하여 큰 일을 함께 이루어야 마땅합니다. 신들은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그 일을 중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제조로 임명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대신과 의논한 다음 서계해서 낙점을 받아 그 일을 중하게 하라."
하였다.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신궐의 두 침전(寢殿)의 터를 닦을 날짜를 관상감으로 하여금 가리게 하였더니, 두 침전의 터를 닦는 것은 이달 26일 묘시(卯時)가, 별당(別堂)의 터를 닦는 것은 이달 28일 묘시가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번의 이 신궐은 옛터에다 그대로 중건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정전(正殿)의 높이와 전 안의 넓이 및 침전의 제도에 대해서 일일이 상세히 의논한 다음, 그림으로 그려서 계품해서 결정지으라. 그리고 두 침전은 경춘전(景春殿)과 명광전(明光殿)의 규례에 의거해서 향배를 정해 짓는 것이 옳다. 그러니 다시금 시문용(施文用)과 성지(性智) 등에게 물어서 상세히 살펴 조성하라. 그리고 외침전(外寢殿)의 후원에다가는 환경전(歡慶殿)의 예에 의거해서 혹 당(堂) 한 채를 짓거나 각(閣) 한 채를 짓되, 지세가 좁으니 아무쪼록 잘 살펴 정하여서 지으라. 위에서 비록 여러 차례 가서 살펴보더라도 반드시 미진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도감에서 십분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잘 지으라." 하였다.
"신궐의 두 침전(寢殿)의 터를 닦을 날짜를 관상감으로 하여금 가리게 하였더니, 두 침전의 터를 닦는 것은 이달 26일 묘시(卯時)가, 별당(別堂)의 터를 닦는 것은 이달 28일 묘시가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번의 이 신궐은 옛터에다 그대로 중건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정전(正殿)의 높이와 전 안의 넓이 및 침전의 제도에 대해서 일일이 상세히 의논한 다음, 그림으로 그려서 계품해서 결정지으라. 그리고 두 침전은 경춘전(景春殿)과 명광전(明光殿)의 규례에 의거해서 향배를 정해 짓는 것이 옳다. 그러니 다시금 시문용(施文用)과 성지(性智) 등에게 물어서 상세히 살펴 조성하라. 그리고 외침전(外寢殿)의 후원에다가는 환경전(歡慶殿)의 예에 의거해서 혹 당(堂) 한 채를 짓거나 각(閣) 한 채를 짓되, 지세가 좁으니 아무쪼록 잘 살펴 정하여서 지으라. 위에서 비록 여러 차례 가서 살펴보더라도 반드시 미진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도감에서 십분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잘 지으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어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이것은 군국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다. 응당 처치할 것이니, 우선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의혹이 더욱더 심해집니다. 백성은 나라의 부리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슬픔과 기쁨은 수령이 어지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바, 탐오한 관리는 참으로 하루도 그 직책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논박을 받아서 응당 체직되어야 할 자이겠습니까. 만약 드러나는 대로 즉시 내쫓지 않고,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 직책에 있으면서 함부로 침탈하게 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편안치 못해 필시 위망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란하고 패려한 사람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풍교(風敎)와 관련이 있으며, 대장의 임무는 실로 군무(軍務)를 관할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 이 몇가지 일들은 모두 관계됨이 막중하고도 긴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국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질질 시간만 끌면서 아직까지 결정짓지 않고 있으니, 어느 때나 처치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다시금 아뢰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재삼 생각을 더하시어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간 역시 신하이다. 그러니 내가 조용히 조섭하는 동안에는 우선 재촉하지 말고 처치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어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이것은 군국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다. 응당 처치할 것이니, 우선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의혹이 더욱더 심해집니다.
백성은 나라의 부리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슬픔과 기쁨은 수령이 어지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바, 탐오한 관리는 참으로 하루도 그 직책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논박을 받아서 응당 체직되어야 할 자이겠습니까. 만약 드러나는 대로 즉시 내쫓지 않고,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 직책에 있으면서 함부로 침탈하게 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편안치 못해 필시 위망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란하고 패려한 사람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풍교(風敎)와 관련이 있으며, 대장의 임무는 실로 군무(軍務)를 관할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 이 몇가지 일들은 모두 관계됨이 막중하고도 긴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국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질질 시간만 끌면서 아직까지 결정짓지 않고 있으니, 어느 때나 처치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다시금 아뢰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재삼 생각을 더하시어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간 역시 신하이다. 그러니 내가 조용히 조섭하는 동안에는 우선 재촉하지 말고 처치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5월 21일 갑신
전교하였다. "선수 도감의 낭청 가운데 일로 인해 외방으로 나간 자가 많아서 내외의 전각(殿閣)을 지을 때 감독할 낭청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니 음관(蔭官) 가운데 일찍이 궁궐 영조 도감의 낭청을 지낸 자와 부지런하여 임무를 맡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낭청 3, 4명을 잘 가려 뽑아서 계하(啓下)받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서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
"선수 도감의 낭청 가운데 일로 인해 외방으로 나간 자가 많아서 내외의 전각(殿閣)을 지을 때 감독할 낭청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니 음관(蔭官) 가운데 일찍이 궁궐 영조 도감의 낭청을 지낸 자와 부지런하여 임무를 맡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낭청 3, 4명을 잘 가려 뽑아서 계하(啓下)받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서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신인각의 일에 대해 그 사(司)의 낭청으로 하여금 박자흥(朴自興)에게 물어서 아뢰게 하라. 그리고 양극(梁𧩦)의 일에 대해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근일에 논박을 받은 수령과 찰방에 대해서는 모두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서 아뢰게 하고, 박수서(朴守緖)의 일에 대해서는 성균관과 도감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신인각의 일에 대해 그 사(司)의 낭청으로 하여금 박자흥(朴自興)에게 물어서 아뢰게 하라. 그리고 양극(梁𧩦)의 일에 대해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근일에 논박을 받은 수령과 찰방에 대해서는 모두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서 아뢰게 하고, 박수서(朴守緖)의 일에 대해서는 성균관과 도감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판의금부사 박승종, 동지의금부사 이경함(李慶涵)·유몽인(柳夢寅)·윤수민(尹壽民)이 아뢰기를, "19일 아침에 신점(申漸)의 병이 중하다는 수본(手本)을 신들에게 와서 보이었는데, 거기에 ‘목숨이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가 지레 죽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어제 여러 도사(都事)들에게 모여서 적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8일에 고변한 자인 박문근(朴文謹)이 무단히 금부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나갔는데, 신점이 옥 안에 있으면서 소리소리 지르다가 그날 밤에 죽은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왕옥(王獄)의 사체는 지극히 엄한데 박문근이 어떻게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겠으며, 설령 하소연할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 하소연할 곳이 있는데, 지금 금부로 몰래 들어갔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리(書吏) 마응룡(馬應龍)은 신점을 꾸짖어서 그로 하여금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심문함에 미쳐서는 죽기를 작정하고 굳게 숨기니, 역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박문근이 금부에 들어오는 것은 신점의 입장에서는 두려워할 바가 아닌데, 원통하다고 소리질렀으니,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또 신점은 나이 어린 죄인이며 형신도 받지 않았는데 잠시 뒤에 죽었으니,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신점은 애당초 스스로 범한 자가 아니라 고변한 자의 사다리 역할만 한 자인 듯합니다. 가령 참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차분하게 엄히 국문하면 반드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억지로 죄에 빠뜨리고서 끝내 입을 막아버린 것이라면 백성들이 어떻게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평상시에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여서 이러한 일이 있게 하였는바,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함이 큽니다. 이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9일 아침에 신점(申漸)의 병이 중하다는 수본(手本)을 신들에게 와서 보이었는데, 거기에 ‘목숨이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가 지레 죽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어제 여러 도사(都事)들에게 모여서 적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8일에 고변한 자인 박문근(朴文謹)이 무단히 금부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나갔는데, 신점이 옥 안에 있으면서 소리소리 지르다가 그날 밤에 죽은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왕옥(王獄)의 사체는 지극히 엄한데 박문근이 어떻게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겠으며, 설령 하소연할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 하소연할 곳이 있는데, 지금 금부로 몰래 들어갔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리(書吏) 마응룡(馬應龍)은 신점을 꾸짖어서 그로 하여금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심문함에 미쳐서는 죽기를 작정하고 굳게 숨기니, 역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박문근이 금부에 들어오는 것은 신점의 입장에서는 두려워할 바가 아닌데, 원통하다고 소리질렀으니,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또 신점은 나이 어린 죄인이며 형신도 받지 않았는데 잠시 뒤에 죽었으니,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신점은 애당초 스스로 범한 자가 아니라 고변한 자의 사다리 역할만 한 자인 듯합니다. 가령 참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차분하게 엄히 국문하면 반드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억지로 죄에 빠뜨리고서 끝내 입을 막아버린 것이라면 백성들이 어떻게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평상시에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여서 이러한 일이 있게 하였는바,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함이 큽니다. 이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성균관 박사 남궁계(南宮楷)는 사람됨이 거칠고 미욱하며 집안에서 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많이 하였습니다. 부모상을 당한 뒤에, 여동생을 거느리고 살다가는, 나이가 30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늙고 병든 사람에게 시집가게 해서, 끝내 생과부로 만들고 말았으므로, 이 사실을 듣는 자들이 모두들 놀랍고 분하게 여깁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계종(李繼宗)은 하는 행동이 인륜에 어긋나고 무식하여서 선왕(先王)의 기일에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도내의 선비들이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해서 통문(通文)을 돌려 죄를 성토할 때, 중로에서 노리고 있다가 심부름꾼을 구타하고 통문을 찢어버렸습니다.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계종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성균관 박사 남궁계(南宮楷)는 사람됨이 거칠고 미욱하며 집안에서 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많이 하였습니다. 부모상을 당한 뒤에, 여동생을 거느리고 살다가는, 나이가 30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늙고 병든 사람에게 시집가게 해서, 끝내 생과부로 만들고 말았으므로, 이 사실을 듣는 자들이 모두들 놀랍고 분하게 여깁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계종(李繼宗)은 하는 행동이 인륜에 어긋나고 무식하여서 선왕(先王)의 기일에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도내의 선비들이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해서 통문(通文)을 돌려 죄를 성토할 때, 중로에서 노리고 있다가 심부름꾼을 구타하고 통문을 찢어버렸습니다.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계종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5월 22일 을유
의금부가 아뢰기를, "박문근이 함부로 금부 안으로 들어가서 수인(囚人)을 지레 죽게 한 죄와 서리인 마응룡이 함께 공모해서 속이고 가리운 정상에 대해서는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박문근이 함부로 금부 안으로 들어가서 수인(囚人)을 지레 죽게 한 죄와 서리인 마응룡이 함께 공모해서 속이고 가리운 정상에 대해서는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죄인 신점이 곤장 한 대 맞지 않았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으니, 일이 몹시 수상하다. 당해 도사와 월령의원(月令醫員)을 각별히 추고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죄인들을 각별히 구료(救療)하라. 이상의 일을 색승지는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각별히 살펴서 하라."
"죄인 신점이 곤장 한 대 맞지 않았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으니, 일이 몹시 수상하다. 당해 도사와 월령의원(月令醫員)을 각별히 추고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죄인들을 각별히 구료(救療)하라. 이상의 일을 색승지는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각별히 살펴서 하라."
정국죄인(庭鞫罪人) 정인형(鄭仁馨)을 형문(刑問)하고, 박문근과 마응룡에게 원정(元情)을 받았다.
5월 23일 병술
예조 판서 이이첨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병이 많고 재주가 없습니다. 이미 본 직책에 있으면서 본조의 임무를 관할하고 있어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겨를이 없는데, 전혀 두서가 없어서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수 도감에는 당상(堂上)으로 있으면서 회동하는 외에 일차(日次)의 좌기(坐起)에도 참여하지 못하여서, 헛되이 직명만 띠고 있는 채 직무는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신이 영선(營繕)하는 일에 재간이 부족하고 또 다른 임무를 겸하고 있어서 근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훈련 도감의 경우는, 군액(軍額)은 전에 비해 배나 되는데 군량미는 날로 부족해집니다. 이에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도 어찌할 계책이 없는바, 매번 재정(財政)이 고갈 되는 것은 사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훈련 도감의 제조(提調)는 당초에 번갈아 가면서 분장(分掌)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군량(軍糧)을 전적으로 관할한 지 지금 4, 5년이나 되었습니다. 직무에 능한 자가 오랫동안 맡는 것도 오히려 온당치 않은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부끄럽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국가에 일이 많은 때를 만나 관각(館閣)에서 제술(製述)하는 일이 항상 적체되고 있습니다. 이에 날마다 분주하느라 정신이 다 소진된 채 문묵(文墨)의 일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어 가끔씩 글을 짓더라도 대부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문형(文衡)의 중한 임무를 어찌 이와 같이 임시 변통으로 때우면서 구차스럽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저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선수 도감과 훈련 도감 두 도감의 당상의 직임을 먼저 삭제해 주어서 신으로 하여금 사한(詞翰)에만 전념함으로써 일에 당하여 허둥지둥하는 걱정을 면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른 당상이 있으니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고서 겸하여 살피라." 하였다.
"신은 본디 병이 많고 재주가 없습니다. 이미 본 직책에 있으면서 본조의 임무를 관할하고 있어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겨를이 없는데, 전혀 두서가 없어서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수 도감에는 당상(堂上)으로 있으면서 회동하는 외에 일차(日次)의 좌기(坐起)에도 참여하지 못하여서, 헛되이 직명만 띠고 있는 채 직무는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신이 영선(營繕)하는 일에 재간이 부족하고 또 다른 임무를 겸하고 있어서 근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훈련 도감의 경우는, 군액(軍額)은 전에 비해 배나 되는데 군량미는 날로 부족해집니다. 이에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도 어찌할 계책이 없는바, 매번 재정(財政)이 고갈 되는 것은 사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훈련 도감의 제조(提調)는 당초에 번갈아 가면서 분장(分掌)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군량(軍糧)을 전적으로 관할한 지 지금 4, 5년이나 되었습니다. 직무에 능한 자가 오랫동안 맡는 것도 오히려 온당치 않은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부끄럽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국가에 일이 많은 때를 만나 관각(館閣)에서 제술(製述)하는 일이 항상 적체되고 있습니다. 이에 날마다 분주하느라 정신이 다 소진된 채 문묵(文墨)의 일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어 가끔씩 글을 짓더라도 대부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문형(文衡)의 중한 임무를 어찌 이와 같이 임시 변통으로 때우면서 구차스럽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저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선수 도감과 훈련 도감 두 도감의 당상의 직임을 먼저 삭제해 주어서 신으로 하여금 사한(詞翰)에만 전념함으로써 일에 당하여 허둥지둥하는 걱정을 면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른 당상이 있으니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고서 겸하여 살피라."
하였다.
5월 24일 정해
전교하였다.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 중에서 일찍이 수령을 지냈거나 일에 대해 상세히 잘 알며 늙지 않은 사람을 각별히 가려뽑아서 호남의 완도나 변산 등처에 보내어서, 재목을 끌어내리는 상황을 상세하게 척간하여 오게 하라. 그리고 수로(水路)에서는 십분 삼가서 전복되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일 및 이번에 더 베어내는 재목은 다시금 상세히 살펴서 대들보감이 되는 재목은 베어내지 말고 사대부의 집을 지을 만한 크기의 재목을 베어내어 속히 끌어내려서 싣고 올 일을 경차관(敬差官)에게 말하고서 배에 다 실은 뒤에 올라오라. 또 뒤에 베어서 싣고 오는 재목에 대해서는 단지 감사와 경차관에게 전유(傳諭)한 뒤 올라오며, 감사와 경차관에게도 이런 내용으로 상세하게 하유하라. 그리고 변산 근처에 감사가 속히 가서 검독(檢督)하되, 끌어내려 배에 실을 즈음에 각별히 신칙해서 부상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며, 한 배에 너무 많이 싣지 말도록 하는 일도 아울러 상세히 살펴서 하라는 뜻 역시 하유 안에다가 넣으라."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 중에서 일찍이 수령을 지냈거나 일에 대해 상세히 잘 알며 늙지 않은 사람을 각별히 가려뽑아서 호남의 완도나 변산 등처에 보내어서, 재목을 끌어내리는 상황을 상세하게 척간하여 오게 하라. 그리고 수로(水路)에서는 십분 삼가서 전복되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일 및 이번에 더 베어내는 재목은 다시금 상세히 살펴서 대들보감이 되는 재목은 베어내지 말고 사대부의 집을 지을 만한 크기의 재목을 베어내어 속히 끌어내려서 싣고 올 일을 경차관(敬差官)에게 말하고서 배에 다 실은 뒤에 올라오라. 또 뒤에 베어서 싣고 오는 재목에 대해서는 단지 감사와 경차관에게 전유(傳諭)한 뒤 올라오며, 감사와 경차관에게도 이런 내용으로 상세하게 하유하라. 그리고 변산 근처에 감사가 속히 가서 검독(檢督)하되, 끌어내려 배에 실을 즈음에 각별히 신칙해서 부상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며, 한 배에 너무 많이 싣지 말도록 하는 일도 아울러 상세히 살펴서 하라는 뜻 역시 하유 안에다가 넣으라."
5월 25일 무자
전교하였다. "반경(盤庚)의 천도(遷都)031) 가 삼대(三代) 때 있었는데도 오히려 근거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는 걱정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같이 인심이 불측한 때이겠는가. 신궐의 역사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나, 위에서는 항상 마음속이 편치 않다. 물력(物力)이 부족한 것이나 목석(木石)을 실어나르는 등의 일은 모두 족히 염려할 것이 못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합시키는 것이 실로 급선무이다. 비록 가가호호 유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궁성 안으로 들어간 집에 대해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혹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전후로 전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중사(中使)가 나갔을 때에도 여러 차례 말해 보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새로 들어간 소세양(蘇世讓) 등의 집터도 아울러서 속히 서계하고 이달 안으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주라. 이상의 일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註 031] 천도(遷都) : 반경은 중국 은(殷)나라의 임금. 서울인 경(耿)에 수해가 심하므로 박(亳)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는데, 신하와 백성들이 살던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이해시키고 박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상(商)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권5 반경(盤庚).
"반경(盤庚)의 천도(遷都)031) 가 삼대(三代) 때 있었는데도 오히려 근거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는 걱정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같이 인심이 불측한 때이겠는가. 신궐의 역사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나, 위에서는 항상 마음속이 편치 않다. 물력(物力)이 부족한 것이나 목석(木石)을 실어나르는 등의 일은 모두 족히 염려할 것이 못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합시키는 것이 실로 급선무이다. 비록 가가호호 유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궁성 안으로 들어간 집에 대해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혹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전후로 전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중사(中使)가 나갔을 때에도 여러 차례 말해 보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새로 들어간 소세양(蘇世讓) 등의 집터도 아울러서 속히 서계하고 이달 안으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주라. 이상의 일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우리 나라의 인심이 날이 갈수록 점차 나빠져서 개인 일을 앞세우고 공적인 일을 뒤로 하는 작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번의 이 신궐의 역사는 위에서 이어(移御)할 곳이 없어서 급히 조성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장이들은 모두 외방의 용렬한 무리들뿐이고, 서울에 사는 재주가 있는 공장이들은 모두 다 사대부의 집으로 들어가서 도감에서 부릴 수가 없다. 현재 시사전(視事殿)에 부역하고 있는 경목수(京木手)는 단지 절음발이 늙은 공장이 한 사람뿐이니, 몹시 한심스럽다. 그리고 도감의 제조도 사사로운 정분을 쫓아 이들을 나오도록 독촉하지 않고 있으니, 역시 그르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독촉하고 색출해서 사환(使喚)시키라. 그리고 사대부의 집은 우선 영선하는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공사를 시작하고, 예조나 사헌부와 같은 공해(公廨)는 일체 역사를 정지하였다가 신궐의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시 시작하라. 보루 도감(報漏都監)에도 목수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 5, 6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신궐에 보내어 부역시키라. 이상의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는 뜻으로 선수 도감에 말하라."
"우리 나라의 인심이 날이 갈수록 점차 나빠져서 개인 일을 앞세우고 공적인 일을 뒤로 하는 작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번의 이 신궐의 역사는 위에서 이어(移御)할 곳이 없어서 급히 조성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장이들은 모두 외방의 용렬한 무리들뿐이고, 서울에 사는 재주가 있는 공장이들은 모두 다 사대부의 집으로 들어가서 도감에서 부릴 수가 없다. 현재 시사전(視事殿)에 부역하고 있는 경목수(京木手)는 단지 절음발이 늙은 공장이 한 사람뿐이니, 몹시 한심스럽다. 그리고 도감의 제조도 사사로운 정분을 쫓아 이들을 나오도록 독촉하지 않고 있으니, 역시 그르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독촉하고 색출해서 사환(使喚)시키라. 그리고 사대부의 집은 우선 영선하는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공사를 시작하고, 예조나 사헌부와 같은 공해(公廨)는 일체 역사를 정지하였다가 신궐의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시 시작하라. 보루 도감(報漏都監)에도 목수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 5, 6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신궐에 보내어 부역시키라. 이상의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는 뜻으로 선수 도감에 말하라."
박자흥(朴自興)을 부제학으로, 조유도(趙有道)를 전한으로, 남이준(南以俊)을 응교로, 김질간(金質幹)을 집의로, 홍경찬(洪敬纘)을 문학으로, 안응형(安應亨)을 평안 감사로, 【사람됨이 미욱하고 사리판단을 못하였는데, 척리에게 연줄을 대어 방백의 직임에 제수되었다.】 이상항(李尙恒)을 【이창후(李昌後)의 아들이며 이이첨의 사위이다.】 수찬으로, 이지완(李志完)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5월 26일 기축
정원이 아뢰기를, "신궐 안으로 들어간 집의 집주인을 속히 상세히 살펴서 서계하여 일일이 값을 지급해 주는 일에 대해, 이달 2일과 11일, 21일에 잇달아 세 차례나 비망기를 내렸는데, 도감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아직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으니, 몹시 경악스럽습니다. 당해 낭청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색리(色吏)는 가두고서 치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추고하거나 가두고서 치죄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속히 살펴서 서계한 다음 값을 지급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궐 안으로 들어간 집의 집주인을 속히 상세히 살펴서 서계하여 일일이 값을 지급해 주는 일에 대해, 이달 2일과 11일, 21일에 잇달아 세 차례나 비망기를 내렸는데, 도감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아직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으니, 몹시 경악스럽습니다. 당해 낭청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색리(色吏)는 가두고서 치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추고하거나 가두고서 치죄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속히 살펴서 서계한 다음 값을 지급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7일 경인
전교하기를, "병오년에 회답사(回答使)가 배사(拜辭)할 때 선조(先朝)가 하교한 말 및 상사·부사·종사관에게 내려준 물품을, 그 당시에 사신으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으로 하여금 일일이 서계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여우길과 경섬에게 물어보니 ‘정미년 정월 12일에 배사할 때 빈청(賓廳)에서 술을 하사하였고, 세 사신에게는 모두 마장(馬粧) 각 1부씩과 정남침(定南針) 각 1부씩을 하사하였으며, 나머지 저들에게 가서 문답(問答)할 말 및 각 조항의 응당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묘당이 기일에 앞서 요리해서 품정(稟定)한 다음 알려주었으므로 배사하는 날에는 별로 하교한 말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사신과 종사관 외의 일행(一行) 원역(員役)에게는 모두 하사한 물품이 없었는가? 급히 다시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병오년에 회답사(回答使)가 배사(拜辭)할 때 선조(先朝)가 하교한 말 및 상사·부사·종사관에게 내려준 물품을, 그 당시에 사신으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으로 하여금 일일이 서계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여우길과 경섬에게 물어보니 ‘정미년 정월 12일에 배사할 때 빈청(賓廳)에서 술을 하사하였고, 세 사신에게는 모두 마장(馬粧) 각 1부씩과 정남침(定南針) 각 1부씩을 하사하였으며, 나머지 저들에게 가서 문답(問答)할 말 및 각 조항의 응당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묘당이 기일에 앞서 요리해서 품정(稟定)한 다음 알려주었으므로 배사하는 날에는 별로 하교한 말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사신과 종사관 외의 일행(一行) 원역(員役)에게는 모두 하사한 물품이 없었는가? 급히 다시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5월 28일 신묘
전교하기를, "선수 도감에 새로 차임한 감역관들은 반드시 생소할 것이다. 그러니 전각(殿閣)을 조성할 때에는 전에 낭청으로 있었던 자와 함께 나누어서 관장하게 하라. 그리고 일찍이 낭청을 지낸 자는 없는가? 본도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전각을 조성할 때에는 성상의 분부에 의거하여 전에 낭청으로 있었던 자들과 함께 나누어서 감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낭청을 지낸 자로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승형(李升亨) 같은 자는 아주 합당한 인물이나 이미 당상관으로 올라가 제조나 낭청에 모두 차하(差下)할 수가 없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거나, 외방에 있거나, 혹 다른 관사의 긴요한 직임에 차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일찍이 낭청을 지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 차임한 사람들은 모두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하기에 뽑아서 차임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승형은 창덕궁의 역사를 감독할 때 자못 부지런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부제조로 차하하여 대내(大內)의 후원(後苑)의 역사를 그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선수 도감에 새로 차임한 감역관들은 반드시 생소할 것이다. 그러니 전각(殿閣)을 조성할 때에는 전에 낭청으로 있었던 자와 함께 나누어서 관장하게 하라. 그리고 일찍이 낭청을 지낸 자는 없는가? 본도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전각을 조성할 때에는 성상의 분부에 의거하여 전에 낭청으로 있었던 자들과 함께 나누어서 감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낭청을 지낸 자로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승형(李升亨) 같은 자는 아주 합당한 인물이나 이미 당상관으로 올라가 제조나 낭청에 모두 차하(差下)할 수가 없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거나, 외방에 있거나, 혹 다른 관사의 긴요한 직임에 차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일찍이 낭청을 지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 차임한 사람들은 모두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하기에 뽑아서 차임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승형은 창덕궁의 역사를 감독할 때 자못 부지런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부제조로 차하하여 대내(大內)의 후원(後苑)의 역사를 그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회답사 오윤겸(吳允謙)과 박재(朴榟)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귤지정(橘智正)이 신들의 행차가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지레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직책을 받은 왜(倭)로서 교만을 떨며 공갈하고 조정을 가볍게 보는 정상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귤지정이 앞장서서 인도하여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바다를 건널 경우에는 아마도 체면을 손상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귤지정(橘智正)이 신들의 행차가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지레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직책을 받은 왜(倭)로서 교만을 떨며 공갈하고 조정을 가볍게 보는 정상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귤지정이 앞장서서 인도하여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바다를 건널 경우에는 아마도 체면을 손상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5월 29일 임진
032)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새 대궐의 남쪽 담장이 사직(社稷)의 담장과 연이어져 있어서 순라도는 길이 막혔습니다. 만약 사직을 궁궐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 창덕궁과 종묘(宗廟)의 제도와 같게 한다면, 사직 남쪽 담장 밖이 바로 대원군(大院君)033) 의 사우(祠宇)로, 사우를 이설하는 것 역시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당초 의논해 정할 때 부득이 사직의 북쪽 담장 안에다가 또다시 겹으로 담장을 쌓아서 순라길을 뚫기로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에 지금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간의 물의가 자자하여, 모두들 ‘나라에 사직이 있는 것은 조종께서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를 높여 받드는 의리가 아주 중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곳의 초목을 베어내고 그 토지를 침범하는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몹시 온당치 못하다. 그 땅을 침범하기보다는 차라리 대원군의 사우를 옮겨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혹자는 ‘사직의 담장은 예전대로 그대로 두고 신궐의 남쪽 담장을 조금 안쪽으로 들이어서 순라길을 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약 혹자가 말한 대로 궁궐 담장을 안쪽으로 들여 쌓는다면 정전(正殿)의 뒷편이 몹시 좁아서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들이 백 번 생각해 보아도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아서 속히 결정을 지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을 일이 아니다. 도감에서 다시금 상세히 의논해서 결정지어 하라." 하였다.
[註 032]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3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註 033] 대원군(大院君) :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말함.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새 대궐의 남쪽 담장이 사직(社稷)의 담장과 연이어져 있어서 순라도는 길이 막혔습니다. 만약 사직을 궁궐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 창덕궁과 종묘(宗廟)의 제도와 같게 한다면, 사직 남쪽 담장 밖이 바로 대원군(大院君)033) 의 사우(祠宇)로, 사우를 이설하는 것 역시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당초 의논해 정할 때 부득이 사직의 북쪽 담장 안에다가 또다시 겹으로 담장을 쌓아서 순라길을 뚫기로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에 지금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간의 물의가 자자하여, 모두들 ‘나라에 사직이 있는 것은 조종께서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를 높여 받드는 의리가 아주 중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곳의 초목을 베어내고 그 토지를 침범하는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몹시 온당치 못하다. 그 땅을 침범하기보다는 차라리 대원군의 사우를 옮겨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혹자는 ‘사직의 담장은 예전대로 그대로 두고 신궐의 남쪽 담장을 조금 안쪽으로 들이어서 순라길을 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약 혹자가 말한 대로 궁궐 담장을 안쪽으로 들여 쌓는다면 정전(正殿)의 뒷편이 몹시 좁아서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들이 백 번 생각해 보아도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아서 속히 결정을 지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을 일이 아니다. 도감에서 다시금 상세히 의논해서 결정지어 하라." 하였다.
[註 032]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3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註 033] 대원군(大院君) :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말함.
"새 대궐의 남쪽 담장이 사직(社稷)의 담장과 연이어져 있어서 순라도는 길이 막혔습니다. 만약 사직을 궁궐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 창덕궁과 종묘(宗廟)의 제도와 같게 한다면, 사직 남쪽 담장 밖이 바로 대원군(大院君)033) 의 사우(祠宇)로, 사우를 이설하는 것 역시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당초 의논해 정할 때 부득이 사직의 북쪽 담장 안에다가 또다시 겹으로 담장을 쌓아서 순라길을 뚫기로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에 지금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간의 물의가 자자하여, 모두들 ‘나라에 사직이 있는 것은 조종께서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를 높여 받드는 의리가 아주 중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곳의 초목을 베어내고 그 토지를 침범하는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몹시 온당치 못하다. 그 땅을 침범하기보다는 차라리 대원군의 사우를 옮겨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혹자는 ‘사직의 담장은 예전대로 그대로 두고 신궐의 남쪽 담장을 조금 안쪽으로 들이어서 순라길을 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약 혹자가 말한 대로 궁궐 담장을 안쪽으로 들여 쌓는다면 정전(正殿)의 뒷편이 몹시 좁아서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들이 백 번 생각해 보아도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아서 속히 결정을 지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을 일이 아니다. 도감에서 다시금 상세히 의논해서 결정지어 하라."
하였다.
034) 사간원이 아뢰기를, "고원 군수(高原郡守) 안대기(安大奇)는 사람됨이 거칠고 교활하며, 집안에서 패려한 행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도임한 뒤에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자신만을 살찌워서 사람을 가두고 풀어주는 것을 한결같이 뇌물의 다소에 따라서 하였습니다. 이에 온 경내가 원망하고 있으며 서로 잇달아 유망(流亡)하고 있습니다. 용천 군수(龍川郡守) 신성(申晟)은 본디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서 도임한 뒤에는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만을 일삼아서 지난번에 대간의 논박을 중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은 채 관고(官庫)의 물품을 공공연히 차지하여,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註 034]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4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고원 군수(高原郡守) 안대기(安大奇)는 사람됨이 거칠고 교활하며, 집안에서 패려한 행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도임한 뒤에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자신만을 살찌워서 사람을 가두고 풀어주는 것을 한결같이 뇌물의 다소에 따라서 하였습니다. 이에 온 경내가 원망하고 있으며 서로 잇달아 유망(流亡)하고 있습니다. 용천 군수(龍川郡守) 신성(申晟)은 본디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서 도임한 뒤에는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만을 일삼아서 지난번에 대간의 논박을 중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은 채 관고(官庫)의 물품을 공공연히 차지하여,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註 034]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4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고원 군수(高原郡守) 안대기(安大奇)는 사람됨이 거칠고 교활하며, 집안에서 패려한 행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도임한 뒤에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자신만을 살찌워서 사람을 가두고 풀어주는 것을 한결같이 뇌물의 다소에 따라서 하였습니다. 이에 온 경내가 원망하고 있으며 서로 잇달아 유망(流亡)하고 있습니다.
용천 군수(龍川郡守) 신성(申晟)은 본디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서 도임한 뒤에는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만을 일삼아서 지난번에 대간의 논박을 중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은 채 관고(官庫)의 물품을 공공연히 차지하여,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035) 도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 "죄인 신점(申漸)이 죽은 것이 몹시 황당합니다. 지난해 역적 김기(金錡)가 형신을 많이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룻밤 사이에 지레 죽은 것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의혹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 경우는 형신을 받았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신점의 경우는 한 차례도 형신을 받지 않은 젊고 튼튼한 사람이며, 죽기 하루 전에도 음식 먹는 것이나 담소하는 것이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없이 밤 사이에 죽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신점이 만약 고민 끝에 자살하였다고 한다면, 신점은 바로 고변(告變)하는 데 사다리 역할을 한 자이니 고변한 사람과 그간의 허실을 따져보아서 일이 애매한 데 관계될 것 같으면 반드시 풀려날 길이 있을 것이며, 지난번에는 또 국청(鞫廳)의 의논이 있었는데, 신점이 만약 숙맥도 분간치 못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자살을 하여서 안신언(安愼言) 등이 입을 없애 무사하게 될 바탕을 마련해 주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일입니다. 이달 18일에 죄인 박문근(朴文謹)이 들어와서 도사 안전(安佺)을 만났는데 19일 4경 뒤에 신점이 죽었습니다. 만약 박문근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반드시 국문을 한 다음에야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이름은 비록 보방(保放)이라고 하지만 일개 고변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으로서 도사를 만나보기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도사 역시 어떻게 친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을 불러 보고서 옥사에 대해 사사로이 캐묻고서, 이어 문답한 말을 기록하여 금부 안에다가 보관하여, 마치 추관(推官)이 문안(文案) 하나를 만드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수백 년 이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손활(孫活)에게 협박당하여 함께 고변한 것을 원통하다고 한다면, 박문근은 현재 대궐 문 밖에 있어서,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서 옥에 수금되어 있는 자가 아니며, 한 글자도 알지 못하여서 상소문을 지을 수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원통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지고 정원에 상소를 올리지 않고, 가까운 길을 버려두고 먼 길을 취하여 사사로이 친근한 도사에게 고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상소를 올렸다면, 신이 해방승지(該房承旨)로 있으니,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신이 아무리 들이지 않고자 하더라도 동료가 반드시 그에 대해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애초에 무슨 마음으로 손활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고변하고, 뒤에는 무슨 마음으로 협박받았다고 한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국청(鞫廳)의 의계를 듣고서 반좌(反坐)될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 역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협박을 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이것은 신점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미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도리어 그를 살해한단 말입니까?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따질 것도 못 됩니다. 도사는 서생(書生)으로서 벼슬길에 처음 나갔으니, 반드시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체를 알지 못하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깊이 따질 것이 못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뒷날에 어떤 간사한 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도사에게 간청하고, 도사 중에 죄인과 서로 친한 자가 있어서 사사로이 힐문해서 송사(訟事)하는 사이에 스스로 원고와 피고의 상황을 만들고, 이어 그 말을 모두 기록해서 금부의 별도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뒷날 서로 싸우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게 한다면, 그 화가 헤아릴 수 없을 것으로, 크게 옥사의 체모를 엄중하게 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신점의 죽음에 대해서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이달 19일 아침에 도사 민진원(閔震遠)에게 힐문하니, 답하기를 ‘19일 4경 이전에 순찰을 도는 자가 매 경(更)마다 호명을 하니, 모두 아무 일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4경 이후에 호명을 하니 옥졸(獄卒)이 응답하는 소리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문을 열고서 응답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 신점이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진원은 18일에 비로소 입직(入直)하였는데, 입직하던 날 옥중을 적간해 보니 간직(間直)이 없고 단지 미욱한 졸개 하나만 있었습니다. 이에 간직이 없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간직의 숫자가 적어서 정해 보내지 않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중한 죄수를 가둔 곳에 간직이 없는 것은 금부의 일대 변고입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는 더욱더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경 이후에 응답하지 않았던 옥졸은 반드시 신점이 죽은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옥졸을 함께 잡아다가 캐물으소서. 신은 신점의 초사(招辭)에서 누차 이름이 거명되었는 바, 이 옥사에 대해 입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방승지로 있기에 구구한 저의 소견을 감히 끝까지 입다물고 있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쓴 채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의 이름이 이미 신점의 공초에서 나왔고, 또 박문근의 공초에서도 이끌어 들였습니다. 어찌 신하로서 죄인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고서도 태연스레 형방(刑房)이 되어 국문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황공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註 035]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5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도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 "죄인 신점(申漸)이 죽은 것이 몹시 황당합니다. 지난해 역적 김기(金錡)가 형신을 많이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룻밤 사이에 지레 죽은 것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의혹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 경우는 형신을 받았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신점의 경우는 한 차례도 형신을 받지 않은 젊고 튼튼한 사람이며, 죽기 하루 전에도 음식 먹는 것이나 담소하는 것이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없이 밤 사이에 죽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신점이 만약 고민 끝에 자살하였다고 한다면, 신점은 바로 고변(告變)하는 데 사다리 역할을 한 자이니 고변한 사람과 그간의 허실을 따져보아서 일이 애매한 데 관계될 것 같으면 반드시 풀려날 길이 있을 것이며, 지난번에는 또 국청(鞫廳)의 의논이 있었는데, 신점이 만약 숙맥도 분간치 못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자살을 하여서 안신언(安愼言) 등이 입을 없애 무사하게 될 바탕을 마련해 주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일입니다. 이달 18일에 죄인 박문근(朴文謹)이 들어와서 도사 안전(安佺)을 만났는데 19일 4경 뒤에 신점이 죽었습니다. 만약 박문근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반드시 국문을 한 다음에야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이름은 비록 보방(保放)이라고 하지만 일개 고변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으로서 도사를 만나보기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도사 역시 어떻게 친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을 불러 보고서 옥사에 대해 사사로이 캐묻고서, 이어 문답한 말을 기록하여 금부 안에다가 보관하여, 마치 추관(推官)이 문안(文案) 하나를 만드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수백 년 이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손활(孫活)에게 협박당하여 함께 고변한 것을 원통하다고 한다면, 박문근은 현재 대궐 문 밖에 있어서,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서 옥에 수금되어 있는 자가 아니며, 한 글자도 알지 못하여서 상소문을 지을 수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원통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지고 정원에 상소를 올리지 않고, 가까운 길을 버려두고 먼 길을 취하여 사사로이 친근한 도사에게 고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상소를 올렸다면, 신이 해방승지(該房承旨)로 있으니,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신이 아무리 들이지 않고자 하더라도 동료가 반드시 그에 대해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애초에 무슨 마음으로 손활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고변하고, 뒤에는 무슨 마음으로 협박받았다고 한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국청(鞫廳)의 의계를 듣고서 반좌(反坐)될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 역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협박을 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이것은 신점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미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도리어 그를 살해한단 말입니까?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따질 것도 못 됩니다. 도사는 서생(書生)으로서 벼슬길에 처음 나갔으니, 반드시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체를 알지 못하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깊이 따질 것이 못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뒷날에 어떤 간사한 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도사에게 간청하고, 도사 중에 죄인과 서로 친한 자가 있어서 사사로이 힐문해서 송사(訟事)하는 사이에 스스로 원고와 피고의 상황을 만들고, 이어 그 말을 모두 기록해서 금부의 별도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뒷날 서로 싸우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게 한다면, 그 화가 헤아릴 수 없을 것으로, 크게 옥사의 체모를 엄중하게 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신점의 죽음에 대해서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이달 19일 아침에 도사 민진원(閔震遠)에게 힐문하니, 답하기를 ‘19일 4경 이전에 순찰을 도는 자가 매 경(更)마다 호명을 하니, 모두 아무 일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4경 이후에 호명을 하니 옥졸(獄卒)이 응답하는 소리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문을 열고서 응답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 신점이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진원은 18일에 비로소 입직(入直)하였는데, 입직하던 날 옥중을 적간해 보니 간직(間直)이 없고 단지 미욱한 졸개 하나만 있었습니다. 이에 간직이 없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간직의 숫자가 적어서 정해 보내지 않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중한 죄수를 가둔 곳에 간직이 없는 것은 금부의 일대 변고입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는 더욱더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경 이후에 응답하지 않았던 옥졸은 반드시 신점이 죽은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옥졸을 함께 잡아다가 캐물으소서. 신은 신점의 초사(招辭)에서 누차 이름이 거명되었는 바, 이 옥사에 대해 입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방승지로 있기에 구구한 저의 소견을 감히 끝까지 입다물고 있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쓴 채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의 이름이 이미 신점의 공초에서 나왔고, 또 박문근의 공초에서도 이끌어 들였습니다. 어찌 신하로서 죄인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고서도 태연스레 형방(刑房)이 되어 국문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황공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註 035]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5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죄인 신점(申漸)이 죽은 것이 몹시 황당합니다. 지난해 역적 김기(金錡)가 형신을 많이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룻밤 사이에 지레 죽은 것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의혹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 경우는 형신을 받았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신점의 경우는 한 차례도 형신을 받지 않은 젊고 튼튼한 사람이며, 죽기 하루 전에도 음식 먹는 것이나 담소하는 것이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없이 밤 사이에 죽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신점이 만약 고민 끝에 자살하였다고 한다면, 신점은 바로 고변(告變)하는 데 사다리 역할을 한 자이니 고변한 사람과 그간의 허실을 따져보아서 일이 애매한 데 관계될 것 같으면 반드시 풀려날 길이 있을 것이며, 지난번에는 또 국청(鞫廳)의 의논이 있었는데, 신점이 만약 숙맥도 분간치 못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자살을 하여서 안신언(安愼言) 등이 입을 없애 무사하게 될 바탕을 마련해 주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일입니다.
이달 18일에 죄인 박문근(朴文謹)이 들어와서 도사 안전(安佺)을 만났는데 19일 4경 뒤에 신점이 죽었습니다. 만약 박문근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반드시 국문을 한 다음에야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이름은 비록 보방(保放)이라고 하지만 일개 고변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으로서 도사를 만나보기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도사 역시 어떻게 친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을 불러 보고서 옥사에 대해 사사로이 캐묻고서, 이어 문답한 말을 기록하여 금부 안에다가 보관하여, 마치 추관(推官)이 문안(文案) 하나를 만드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수백 년 이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손활(孫活)에게 협박당하여 함께 고변한 것을 원통하다고 한다면, 박문근은 현재 대궐 문 밖에 있어서,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서 옥에 수금되어 있는 자가 아니며, 한 글자도 알지 못하여서 상소문을 지을 수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원통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지고 정원에 상소를 올리지 않고, 가까운 길을 버려두고 먼 길을 취하여 사사로이 친근한 도사에게 고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박문근이 만약 상소를 올렸다면, 신이 해방승지(該房承旨)로 있으니,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신이 아무리 들이지 않고자 하더라도 동료가 반드시 그에 대해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문근은 애초에 무슨 마음으로 손활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고변하고, 뒤에는 무슨 마음으로 협박받았다고 한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국청(鞫廳)의 의계를 듣고서 반좌(反坐)될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 역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협박을 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이것은 신점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미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도리어 그를 살해한단 말입니까?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따질 것도 못 됩니다. 도사는 서생(書生)으로서 벼슬길에 처음 나갔으니, 반드시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체를 알지 못하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깊이 따질 것이 못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뒷날에 어떤 간사한 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도사에게 간청하고, 도사 중에 죄인과 서로 친한 자가 있어서 사사로이 힐문해서 송사(訟事)하는 사이에 스스로 원고와 피고의 상황을 만들고, 이어 그 말을 모두 기록해서 금부의 별도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뒷날 서로 싸우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게 한다면, 그 화가 헤아릴 수 없을 것으로, 크게 옥사의 체모를 엄중하게 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신점의 죽음에 대해서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이달 19일 아침에 도사 민진원(閔震遠)에게 힐문하니, 답하기를 ‘19일 4경 이전에 순찰을 도는 자가 매 경(更)마다 호명을 하니, 모두 아무 일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4경 이후에 호명을 하니 옥졸(獄卒)이 응답하는 소리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문을 열고서 응답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 신점이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진원은 18일에 비로소 입직(入直)하였는데, 입직하던 날 옥중을 적간해 보니 간직(間直)이 없고 단지 미욱한 졸개 하나만 있었습니다. 이에 간직이 없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간직의 숫자가 적어서 정해 보내지 않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중한 죄수를 가둔 곳에 간직이 없는 것은 금부의 일대 변고입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는 더욱더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경 이후에 응답하지 않았던 옥졸은 반드시 신점이 죽은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옥졸을 함께 잡아다가 캐물으소서.
신은 신점의 초사(招辭)에서 누차 이름이 거명되었는 바, 이 옥사에 대해 입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방승지로 있기에 구구한 저의 소견을 감히 끝까지 입다물고 있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쓴 채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의 이름이 이미 신점의 공초에서 나왔고, 또 박문근의 공초에서도 이끌어 들였습니다. 어찌 신하로서 죄인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고서도 태연스레 형방(刑房)이 되어 국문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황공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036) 【선수 도감(繕修都監)의 명칭을 영건 도감(營建都監)으로 바꾸었다.】
[註 036]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6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선수 도감(繕修都監)의 명칭을 영건 도감(營建都監)으로 바꾸었다.】
[註 036] : 이 기사는 정초본에 5월28일 6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5월 29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5월 30일 계사
전교하였다. "영건 도감의 제조가 아주 많으니, 3, 4일 간격으로 1원씩 교대로 돌을 떠내는 곳에 나가서 실어들이는 등의 일을 각별히 감독하여 운반하게 하라."
"영건 도감의 제조가 아주 많으니, 3, 4일 간격으로 1원씩 교대로 돌을 떠내는 곳에 나가서 실어들이는 등의 일을 각별히 감독하여 운반하게 하라."
무고죄인(誣告罪人) 정인형(鄭仁馨)을 군기시 앞길에서 처형하였다.
전교하였다. "신궐의 대내 및 후원에 들어간 집의 주인들 중에 종실(宗室) 및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되 자급이 차지 않았을 경우에는 당상으로 올리고 유생의 경우에는 아울러 직책을 제수하라. 그리고 소세양(蘇世讓)과 같이 작고한 재신(宰臣)에 대해서는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시임(時任)으로 6품에 오르지 못한 자는 천전(遷轉)시켜 주며, 공사천(公私賤)은 면천시켜 주라. 이 이외의 서얼과 사약(司鑰)·서리(書吏) 등은 모두 대신에게 의논하여 알맞는 상격(賞格)을 신속히 마련하여 착실하게 거행하라."
"신궐의 대내 및 후원에 들어간 집의 주인들 중에 종실(宗室) 및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되 자급이 차지 않았을 경우에는 당상으로 올리고 유생의 경우에는 아울러 직책을 제수하라. 그리고 소세양(蘇世讓)과 같이 작고한 재신(宰臣)에 대해서는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시임(時任)으로 6품에 오르지 못한 자는 천전(遷轉)시켜 주며, 공사천(公私賤)은 면천시켜 주라. 이 이외의 서얼과 사약(司鑰)·서리(書吏) 등은 모두 대신에게 의논하여 알맞는 상격(賞格)을 신속히 마련하여 착실하게 거행하라."
금부가 손활(孫活)을 잡아가두었다.
도승지 한찬남이 비밀히 계사를 올려서 정인형(鄭仁馨)을 처형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대마도(對馬島)의 왜(倭) 귤지정(橘智正)이 관백(關白)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수호(修好)를 요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로 보내었으며, 인하여 천조(天朝)에 주문(奏聞)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은 왜정(倭情)에 관계된 일로 삼가 주문합니다. 올 정월 22일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 황여일(黃汝一)이 정문(呈文)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왜(對馬島倭) 귤지정이 일본국왕(日本國王) 원수충(源秀忠)의 차견(差遣)을 인하여 장차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배를 타고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모두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치계를 받고서 원수충의 서계가 도착하였기에 펼쳐보니, 거기에 쓰기를 ‘일본 국왕 원수충은 조선 국왕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해마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에게 명하여 귀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인호(鄰好)가 도탑고 인의(仁義)가 중함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평의성이 고하기를 「조선의 신사(信使)가 바다를 건너서 다시금 인호의 도타움과 인의의 중함을 보게 되었으니, 몹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대마 도주 평의성의 서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대마 도주 평의성이 예조에 글을 보내었습니다. 평의성은 바로 평의지(平義智)의 아들로 본명이 정광(貞光)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 서계(書契)에 쓰기를 ‘신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우리 전하께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해마다 저희 대마도에 조서를 내려주신 것을 생각하시어, 예전에는 잘못 되었고 지금은 올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되도록 속히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맞이해 오기 위하여 귤지정을 차견하여 대기하게 하는 외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귤지정이 모두 말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글을 받고서 의정부가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부터 대마 도주 평의지 등이 와서 성의를 보이면서 서계를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가강(家康)의 지시를 받고서 통호(通好)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전후로 간절하게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해조 및 변방의 신하들이 번번이 「해상(海上)의 크고 작은 일들을 으레 날마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왔는바, 이번의 이 신사에 대한 한 조항은 더욱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핑계로 늦추어 온 지 이미 몇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 원수충이 가강의 뒤를 이어 그의 여세를 빙자해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신을 맞아오고자 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대마도에 책임지웠습니다. 평의성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로서 대마 도주의 직임을 승급받았는바,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일본에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만력(萬曆)을묘년037)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정성을 보이고 귤지정이 와서 간청함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각자 말하기를 「대판(大坡)에 근거를 둔 평수뢰(平秀賴)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본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하께서 이를 말미암아서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본 전역을 태산(泰山)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은 일본과 잘 지내고 있는데 어찌 신사를 차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사가 만약 오지 않으면 대마도가 끝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의홍(義弘)과 장정(長政)이 때를 틈타 동요하여서 우리 섬을 빼앗아 점거한다면 귀국에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 또 「본도의 존망은 신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에서 만약 신사에 대한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고해 온 바를 근거하고 정적(情迹)으로 참작해 볼 때, 지금 만약 한결같이 물리치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은 어쩔 방도가 없어서 반드시 점점 더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지난 만력 30년038) 에 대마도 왜가 재차 포로로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면서 와서 말하기를 「가강(家康)이 화친을 빨리 성사시키라고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차를 갖추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예부와 병부 및 경략군문(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사정에 익숙한 자인 전계신(全繼信) 등을 차임하여 앞서서 본도(本島)에 들여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2년에는 대마도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에 대해 말하였는데 오랫동안 분명하게 통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강이 화를 내어서 각 주(州)로 하여금 군장을 꾸리게 해 장차 출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갔던 자인 김광(金光)이 구두로 보고하기를 「가강이 이미 삼위(三衛)의 왜장(倭將)을 확정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나오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자문을 보내어 전보(轉報)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생각해보니 섬오랑캐의 실정을 탐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승인(僧人) 송운(松雲)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귤지정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4년에는 가강이 서신을 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저들의 속사정이야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이미 그의 편지가 왔으니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우길(呂祐吉) 등을 차임해 보내어서 가강에게 회답하였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전항(前項)의 사례에 의거해서 별도로 원역(員役)을 차임해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들여보내어, 원수충이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보내준 데 대해 보답해 주고 이어 그들의 사정을 기찰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상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장계를 받고 신이 지난 만력 42년 11월에 의정부가 장계한 것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경상도 관찰사 장만(張晩)이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인 귤지정이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해서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서계 안에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삼가 예조에 아룁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일로 귤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본도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조선과 일본간의 일에 있습니다.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할 경우 끝내 본도의 화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는 해진관사(海鎭官司)로 하여금 본왜(本倭)에게 칙유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의리에 입각하여 회답 서신을 보내게 하는 외에,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력 43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對馬島倭)가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예조에 바치는 서계를 싸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이번에 귤지정을 파견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귤지정과 함께 우리 전하를 만나보니, 변치 않고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사가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 저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바,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끝내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신사만을 보내 주시어 저에게 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받고 이어 역관(譯官)을 시켜서 귤지정과 문답하게 하였습니다. 역관이 「이번의 이 서계 안에서 말한 바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가강이 국내의 분란을 평정하고 원수충이 국사를 전담하면서 귀국과 통호(通好)하여 신사를 맞이해 와서 그 덕을 볼 계획을 하였다. 도주는 아비의 직책을 승습받았으므로 가강의 뜻을 그대로 떠맡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오로지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다시 힐문하기를 「본국의 기무(機務)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일체를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너희 섬에서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이미 죽었고 평정광(平貞光)은 나이가 어리다. 전에는 평의지가 양쪽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서 스스로 미봉한 것이 많았다. 현재의 상황은 지난날과 달라서 귀국에서 반드시 잘 참작해서 조처해 주어야만 뒷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보고에 근거하여 귤지정이 가강을 빙자하여 한 말을 조사해 보니, 말뜻이 몹시 교활하여 자못 공갈하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이의 정적이 몹시 불측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진강유부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대마도에서 쇄환한 우리 나라의 포로인 신경난(辛景鸞) 등을 풀어보낸 연유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의정부의 여러 배신(陪臣)들이 회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문하였는데, 본인이 공초(供招)하기를 ‘일명 신경란(辛景鸞)이라 하고 나이는 40세이며,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사람이다. 이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란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들은 사실입니다. 평수뢰(平秀賴)가 총애하는 장수의 이름이 편동시정(片桐市正)이라고 하는데 가강이 몰래 그와 결탁해서 평수뢰를 독살하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편동시정은 그의 형제 세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강에게 귀의해서는 큰 군사를 끌어모아서 평수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강측이 패배하여서 정병(精兵) 3만 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당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은 힘이 부족해서 항복을 하고는 손가락을 잘라서 부처께 맹세하고 하늘에 사죄하였으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66주를 모두 들어 수뢰에게 바치고 식읍(食邑)을 보전하고 모자(母子)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가강은 문득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평수뢰에게 고하기를 「내가 늙어서 잘못 헤아리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지금 비록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앞으로 무슨 얼굴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대판(大坡)의 성곽을 대략 무너뜨려서 마치 내가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꾸민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무너진 곳은 내가 그날 즉시 공사를 벌려 수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수뢰가 승리한 기분에 도취되어 그가 말한 바를 믿고서 본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강이 평수뢰의 외숙(外叔)임을 인연하여 그대로 풀어주어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다음해 3월에 수뢰가 한 여자를 가강에게 보내어서 축성하는 역사를 무슨 이유로 지연시키는가에 대해 캐물으니, 가강이 거짓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듣기에 수뢰가 이미 스스로 성참(城塹)을 다 수축하고서 다시 싸우고자 한다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답하기를 「그 말은 헛된 말이다. 대판의 성참은 아직까지 수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맹약한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평수뢰가 싸우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응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일검(一劍)으로 사생(死生)을 결판짓겠다.」고 하고는, 이어 여러 곳의 군사를 불러모았는데, 먼저 헛말을 퍼뜨려서 아무아무 고을 아무아무 장수는 8월에 군사를 이끌고 모이기 바란다고 두루 고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장소에서 심복의 여러 장수들을 모이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킬 기일을 앞당겨서, 4월에 군사들을 통합하고 5월 1일에 수뢰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뒤 2일·3일·4일·5일·6일에 잇달아서 크게 싸웠습니다. 마침 평수뢰의 성 안에 간첩이 있어 안에서 호응하여서 먼저 화약을 쌓아둔 곳에 가서 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드디어 패하여서 그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마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마침 일본에 갔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가강이 일본을 평정하고는 조선의 신사를 맞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평정광을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또 귤지정을 불러서 조선에 신사를 힘껏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일본에 머물러 있는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신사가 들어오면 우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 왕래하는 관역(官譯)들이 물은 데 대해 각 왜인들이 말한 일본 내의 사정도 역시 신경란이 공초한 것과 대략 같았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또 만력 44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이 치계한 데 의거해 보건대, 거기에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정문을 보내었는데, 거기에 「대마도왜 귤지정이 항구에 도착해서 역학(譯學) 형언길(邢彦吉)을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면서 본대마도에다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주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귀국에서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나 역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본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치계에 근거해서 시행하던 사이에, 또 11월에 대마도에서 차임해 보낸 귤지정이 서계를 싸가지고서 왔는데, 그 서계에 ‘평의성은 삼가 예조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 강호(江戶)에서 물러나와 늦가을인 9월에 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귤지정을 차임해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해 봄에 신사를 차임해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삼가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전과 같이 유시하도록 보내는 한편 절차를 갖추어서 진강유부(鎭江遊府)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대마 도주가 예조에 서계(書契)를 보내었는데, 그 안에 말하기를 ‘지금 빠른 배를 태워 귤지정을 다시금 차임해 보내면서 이처럼 급급해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개 본도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준수하면서 번리(藩籬)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불행스럽게도 명이 짧아서 죽었는데, 저는 지금 나이가 어려서 아마도 우리 전하께서 보전해 주기를 도모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난해에 신사가 나온 영광을 잊지 못하여서 전부터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조(貴曹)에서는 비단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일이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아마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만약 우리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례를 생각하건대, 귀국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를 보냈었는데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였습니다. 또 기유년039) 에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었는데 지금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귀국에서는 이와 같이 보답하는 예가 없으니, 이것은 예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지금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하는 것은 인의(仁義)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사세를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사를 보내도록 허락하여 포로들을 쇄환해 가 생령(生靈)들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양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급함을 알리는 것은 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시금 덕음(德音)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전례대로 출발시켰는데, 그 뒤에 또 부호군 정신도(鄭信道)가 아뢰었습니다. 그 대략에 ‘저의 친척인 전이생(全以生)과 박괘동(朴卦同) 등이 일찍이 왜적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었는데, 지난번에 대마도 왜인 편을 통하여 글을 보내 왔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가 살마주(薩摩州)에 가서 보니, 그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총(鳥銃)과 창검을 쓰는 재주를 잘 익혔으며, 모두 본국으로 쇄환되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지금 전의 사항들에 대해서 이미 정부에서 상의해 확정지워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세히 따져보건대, 지난해에 가강이 소방(小邦)에 먼저 성의를 보일 때 일찍이 말하기를 ‘풍신 수길이 귀국을 침범할 때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어서 나의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 귀국으로 간 자가 없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풍신 수길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포로로 잡아간 남녀들을 쇄환하였고, 계속해서 선왕(先王)들의 묘(墓)를 파헤친 도적들을 잡아보내면서 성의를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소방에서는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천조에다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였으며, 이어 원역(員役)을 차임해 보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강이 대판을 병탄하고 수충(秀忠)이 여러 섬들을 평정하여 형세를 키우고 점차 강성해져 스스로 소방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사이에 신사를 청하는 사신이 날마다 오고 있는데, 대개 그의 본심은 신사의 위세를 빌려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교활한 정상은 아마도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에는 법도대로 할 것과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 있고, 때에는 편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는 법으로, 전에 원역(員役)들을 차임해 보낸 전례에 의거해서 그 편에 보답해 주어 기미(羈糜)하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이어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시금 정부의 배신들을 신칙해서 좋은 쪽으로 별도로 시행하는 외에, 왜정(倭情)의 사리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합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註 037] 을묘년 : 1615 광해군 7년.[註 038] 만력 30년 : 1602 선조 35년.[註 039] 기유년 : 1609 광해군 원년.
"조선국왕은 왜정(倭情)에 관계된 일로 삼가 주문합니다. 올 정월 22일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 황여일(黃汝一)이 정문(呈文)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왜(對馬島倭) 귤지정이 일본국왕(日本國王) 원수충(源秀忠)의 차견(差遣)을 인하여 장차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배를 타고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모두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치계를 받고서 원수충의 서계가 도착하였기에 펼쳐보니, 거기에 쓰기를 ‘일본 국왕 원수충은 조선 국왕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해마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에게 명하여 귀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인호(鄰好)가 도탑고 인의(仁義)가 중함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평의성이 고하기를 「조선의 신사(信使)가 바다를 건너서 다시금 인호의 도타움과 인의의 중함을 보게 되었으니, 몹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대마 도주 평의성의 서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대마 도주 평의성이 예조에 글을 보내었습니다. 평의성은 바로 평의지(平義智)의 아들로 본명이 정광(貞光)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 서계(書契)에 쓰기를 ‘신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우리 전하께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해마다 저희 대마도에 조서를 내려주신 것을 생각하시어, 예전에는 잘못 되었고 지금은 올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되도록 속히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맞이해 오기 위하여 귤지정을 차견하여 대기하게 하는 외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귤지정이 모두 말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글을 받고서 의정부가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부터 대마 도주 평의지 등이 와서 성의를 보이면서 서계를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가강(家康)의 지시를 받고서 통호(通好)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전후로 간절하게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해조 및 변방의 신하들이 번번이 「해상(海上)의 크고 작은 일들을 으레 날마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왔는바, 이번의 이 신사에 대한 한 조항은 더욱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핑계로 늦추어 온 지 이미 몇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 원수충이 가강의 뒤를 이어 그의 여세를 빙자해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신을 맞아오고자 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대마도에 책임지웠습니다. 평의성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로서 대마 도주의 직임을 승급받았는바,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일본에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만력(萬曆)을묘년037)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정성을 보이고 귤지정이 와서 간청함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각자 말하기를 「대판(大坡)에 근거를 둔 평수뢰(平秀賴)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본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하께서 이를 말미암아서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본 전역을 태산(泰山)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은 일본과 잘 지내고 있는데 어찌 신사를 차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사가 만약 오지 않으면 대마도가 끝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의홍(義弘)과 장정(長政)이 때를 틈타 동요하여서 우리 섬을 빼앗아 점거한다면 귀국에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 또 「본도의 존망은 신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에서 만약 신사에 대한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고해 온 바를 근거하고 정적(情迹)으로 참작해 볼 때, 지금 만약 한결같이 물리치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은 어쩔 방도가 없어서 반드시 점점 더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지난 만력 30년038) 에 대마도 왜가 재차 포로로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면서 와서 말하기를 「가강(家康)이 화친을 빨리 성사시키라고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차를 갖추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예부와 병부 및 경략군문(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사정에 익숙한 자인 전계신(全繼信) 등을 차임하여 앞서서 본도(本島)에 들여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2년에는 대마도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에 대해 말하였는데 오랫동안 분명하게 통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강이 화를 내어서 각 주(州)로 하여금 군장을 꾸리게 해 장차 출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갔던 자인 김광(金光)이 구두로 보고하기를 「가강이 이미 삼위(三衛)의 왜장(倭將)을 확정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나오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자문을 보내어 전보(轉報)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생각해보니 섬오랑캐의 실정을 탐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승인(僧人) 송운(松雲)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귤지정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4년에는 가강이 서신을 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저들의 속사정이야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이미 그의 편지가 왔으니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우길(呂祐吉) 등을 차임해 보내어서 가강에게 회답하였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전항(前項)의 사례에 의거해서 별도로 원역(員役)을 차임해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들여보내어, 원수충이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보내준 데 대해 보답해 주고 이어 그들의 사정을 기찰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상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장계를 받고 신이 지난 만력 42년 11월에 의정부가 장계한 것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경상도 관찰사 장만(張晩)이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인 귤지정이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해서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서계 안에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삼가 예조에 아룁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일로 귤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본도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조선과 일본간의 일에 있습니다.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할 경우 끝내 본도의 화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는 해진관사(海鎭官司)로 하여금 본왜(本倭)에게 칙유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의리에 입각하여 회답 서신을 보내게 하는 외에,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력 43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對馬島倭)가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예조에 바치는 서계를 싸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이번에 귤지정을 파견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귤지정과 함께 우리 전하를 만나보니, 변치 않고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사가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 저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바,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끝내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신사만을 보내 주시어 저에게 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받고 이어 역관(譯官)을 시켜서 귤지정과 문답하게 하였습니다. 역관이 「이번의 이 서계 안에서 말한 바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가강이 국내의 분란을 평정하고 원수충이 국사를 전담하면서 귀국과 통호(通好)하여 신사를 맞이해 와서 그 덕을 볼 계획을 하였다. 도주는 아비의 직책을 승습받았으므로 가강의 뜻을 그대로 떠맡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오로지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다시 힐문하기를 「본국의 기무(機務)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일체를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너희 섬에서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이미 죽었고 평정광(平貞光)은 나이가 어리다. 전에는 평의지가 양쪽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서 스스로 미봉한 것이 많았다. 현재의 상황은 지난날과 달라서 귀국에서 반드시 잘 참작해서 조처해 주어야만 뒷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보고에 근거하여 귤지정이 가강을 빙자하여 한 말을 조사해 보니, 말뜻이 몹시 교활하여 자못 공갈하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이의 정적이 몹시 불측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진강유부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대마도에서 쇄환한 우리 나라의 포로인 신경난(辛景鸞) 등을 풀어보낸 연유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의정부의 여러 배신(陪臣)들이 회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문하였는데, 본인이 공초(供招)하기를 ‘일명 신경란(辛景鸞)이라 하고 나이는 40세이며,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사람이다. 이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란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들은 사실입니다. 평수뢰(平秀賴)가 총애하는 장수의 이름이 편동시정(片桐市正)이라고 하는데 가강이 몰래 그와 결탁해서 평수뢰를 독살하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편동시정은 그의 형제 세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강에게 귀의해서는 큰 군사를 끌어모아서 평수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강측이 패배하여서 정병(精兵) 3만 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당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은 힘이 부족해서 항복을 하고는 손가락을 잘라서 부처께 맹세하고 하늘에 사죄하였으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66주를 모두 들어 수뢰에게 바치고 식읍(食邑)을 보전하고 모자(母子)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가강은 문득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평수뢰에게 고하기를 「내가 늙어서 잘못 헤아리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지금 비록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앞으로 무슨 얼굴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대판(大坡)의 성곽을 대략 무너뜨려서 마치 내가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꾸민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무너진 곳은 내가 그날 즉시 공사를 벌려 수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수뢰가 승리한 기분에 도취되어 그가 말한 바를 믿고서 본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강이 평수뢰의 외숙(外叔)임을 인연하여 그대로 풀어주어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다음해 3월에 수뢰가 한 여자를 가강에게 보내어서 축성하는 역사를 무슨 이유로 지연시키는가에 대해 캐물으니, 가강이 거짓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듣기에 수뢰가 이미 스스로 성참(城塹)을 다 수축하고서 다시 싸우고자 한다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답하기를 「그 말은 헛된 말이다. 대판의 성참은 아직까지 수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맹약한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평수뢰가 싸우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응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일검(一劍)으로 사생(死生)을 결판짓겠다.」고 하고는, 이어 여러 곳의 군사를 불러모았는데, 먼저 헛말을 퍼뜨려서 아무아무 고을 아무아무 장수는 8월에 군사를 이끌고 모이기 바란다고 두루 고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장소에서 심복의 여러 장수들을 모이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킬 기일을 앞당겨서, 4월에 군사들을 통합하고 5월 1일에 수뢰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뒤 2일·3일·4일·5일·6일에 잇달아서 크게 싸웠습니다. 마침 평수뢰의 성 안에 간첩이 있어 안에서 호응하여서 먼저 화약을 쌓아둔 곳에 가서 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드디어 패하여서 그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마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마침 일본에 갔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가강이 일본을 평정하고는 조선의 신사를 맞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평정광을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또 귤지정을 불러서 조선에 신사를 힘껏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일본에 머물러 있는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신사가 들어오면 우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 왕래하는 관역(官譯)들이 물은 데 대해 각 왜인들이 말한 일본 내의 사정도 역시 신경란이 공초한 것과 대략 같았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또 만력 44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이 치계한 데 의거해 보건대, 거기에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정문을 보내었는데, 거기에 「대마도왜 귤지정이 항구에 도착해서 역학(譯學) 형언길(邢彦吉)을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면서 본대마도에다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주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귀국에서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나 역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본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치계에 근거해서 시행하던 사이에, 또 11월에 대마도에서 차임해 보낸 귤지정이 서계를 싸가지고서 왔는데, 그 서계에 ‘평의성은 삼가 예조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 강호(江戶)에서 물러나와 늦가을인 9월에 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귤지정을 차임해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해 봄에 신사를 차임해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삼가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전과 같이 유시하도록 보내는 한편 절차를 갖추어서 진강유부(鎭江遊府)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대마 도주가 예조에 서계(書契)를 보내었는데, 그 안에 말하기를 ‘지금 빠른 배를 태워 귤지정을 다시금 차임해 보내면서 이처럼 급급해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개 본도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준수하면서 번리(藩籬)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불행스럽게도 명이 짧아서 죽었는데, 저는 지금 나이가 어려서 아마도 우리 전하께서 보전해 주기를 도모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난해에 신사가 나온 영광을 잊지 못하여서 전부터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조(貴曹)에서는 비단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일이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아마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만약 우리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례를 생각하건대, 귀국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를 보냈었는데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였습니다. 또 기유년039) 에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었는데 지금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귀국에서는 이와 같이 보답하는 예가 없으니, 이것은 예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지금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하는 것은 인의(仁義)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사세를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사를 보내도록 허락하여 포로들을 쇄환해 가 생령(生靈)들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양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급함을 알리는 것은 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시금 덕음(德音)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전례대로 출발시켰는데, 그 뒤에 또 부호군 정신도(鄭信道)가 아뢰었습니다. 그 대략에 ‘저의 친척인 전이생(全以生)과 박괘동(朴卦同) 등이 일찍이 왜적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었는데, 지난번에 대마도 왜인 편을 통하여 글을 보내 왔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가 살마주(薩摩州)에 가서 보니, 그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총(鳥銃)과 창검을 쓰는 재주를 잘 익혔으며, 모두 본국으로 쇄환되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지금 전의 사항들에 대해서 이미 정부에서 상의해 확정지워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세히 따져보건대, 지난해에 가강이 소방(小邦)에 먼저 성의를 보일 때 일찍이 말하기를 ‘풍신 수길이 귀국을 침범할 때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어서 나의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 귀국으로 간 자가 없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풍신 수길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포로로 잡아간 남녀들을 쇄환하였고, 계속해서 선왕(先王)들의 묘(墓)를 파헤친 도적들을 잡아보내면서 성의를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소방에서는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천조에다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였으며, 이어 원역(員役)을 차임해 보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강이 대판을 병탄하고 수충(秀忠)이 여러 섬들을 평정하여 형세를 키우고 점차 강성해져 스스로 소방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사이에 신사를 청하는 사신이 날마다 오고 있는데, 대개 그의 본심은 신사의 위세를 빌려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교활한 정상은 아마도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에는 법도대로 할 것과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 있고, 때에는 편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는 법으로, 전에 원역(員役)들을 차임해 보낸 전례에 의거해서 그 편에 보답해 주어 기미(羈糜)하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이어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시금 정부의 배신들을 신칙해서 좋은 쪽으로 별도로 시행하는 외에, 왜정(倭情)의 사리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합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註 037] 을묘년 : 1615 광해군 7년.[註 038] 만력 30년 : 1602 선조 35년.[註 039] 기유년 : 1609 광해군 원년.
올 정월 22일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 황여일(黃汝一)이 정문(呈文)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왜(對馬島倭) 귤지정이 일본국왕(日本國王) 원수충(源秀忠)의 차견(差遣)을 인하여 장차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배를 타고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모두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치계를 받고서 원수충의 서계가 도착하였기에 펼쳐보니, 거기에 쓰기를 ‘일본 국왕 원수충은 조선 국왕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해마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에게 명하여 귀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인호(鄰好)가 도탑고 인의(仁義)가 중함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평의성이 고하기를 「조선의 신사(信使)가 바다를 건너서 다시금 인호의 도타움과 인의의 중함을 보게 되었으니, 몹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대마 도주 평의성의 서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대마 도주 평의성이 예조에 글을 보내었습니다. 평의성은 바로 평의지(平義智)의 아들로 본명이 정광(貞光)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 서계(書契)에 쓰기를 ‘신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우리 전하께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해마다 저희 대마도에 조서를 내려주신 것을 생각하시어, 예전에는 잘못 되었고 지금은 올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되도록 속히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맞이해 오기 위하여 귤지정을 차견하여 대기하게 하는 외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귤지정이 모두 말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글을 받고서 의정부가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부터 대마 도주 평의지 등이 와서 성의를 보이면서 서계를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가강(家康)의 지시를 받고서 통호(通好)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전후로 간절하게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해조 및 변방의 신하들이 번번이 「해상(海上)의 크고 작은 일들을 으레 날마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왔는바, 이번의 이 신사에 대한 한 조항은 더욱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핑계로 늦추어 온 지 이미 몇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 원수충이 가강의 뒤를 이어 그의 여세를 빙자해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신을 맞아오고자 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대마도에 책임지웠습니다. 평의성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로서 대마 도주의 직임을 승급받았는바,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일본에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만력(萬曆)을묘년037)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정성을 보이고 귤지정이 와서 간청함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각자 말하기를 「대판(大坡)에 근거를 둔 평수뢰(平秀賴)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본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하께서 이를 말미암아서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본 전역을 태산(泰山)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은 일본과 잘 지내고 있는데 어찌 신사를 차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사가 만약 오지 않으면 대마도가 끝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의홍(義弘)과 장정(長政)이 때를 틈타 동요하여서 우리 섬을 빼앗아 점거한다면 귀국에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 또 「본도의 존망은 신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에서 만약 신사에 대한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고해 온 바를 근거하고 정적(情迹)으로 참작해 볼 때, 지금 만약 한결같이 물리치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은 어쩔 방도가 없어서 반드시 점점 더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지난 만력 30년038) 에 대마도 왜가 재차 포로로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면서 와서 말하기를 「가강(家康)이 화친을 빨리 성사시키라고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차를 갖추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예부와 병부 및 경략군문(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사정에 익숙한 자인 전계신(全繼信) 등을 차임하여 앞서서 본도(本島)에 들여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2년에는 대마도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에 대해 말하였는데 오랫동안 분명하게 통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강이 화를 내어서 각 주(州)로 하여금 군장을 꾸리게 해 장차 출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갔던 자인 김광(金光)이 구두로 보고하기를 「가강이 이미 삼위(三衛)의 왜장(倭將)을 확정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나오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자문을 보내어 전보(轉報)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생각해보니 섬오랑캐의 실정을 탐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승인(僧人) 송운(松雲)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귤지정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4년에는 가강이 서신을 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저들의 속사정이야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이미 그의 편지가 왔으니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우길(呂祐吉) 등을 차임해 보내어서 가강에게 회답하였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전항(前項)의 사례에 의거해서 별도로 원역(員役)을 차임해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들여보내어, 원수충이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보내준 데 대해 보답해 주고 이어 그들의 사정을 기찰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상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장계를 받고 신이 지난 만력 42년 11월에 의정부가 장계한 것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경상도 관찰사 장만(張晩)이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인 귤지정이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해서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서계 안에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삼가 예조에 아룁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일로 귤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본도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조선과 일본간의 일에 있습니다.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할 경우 끝내 본도의 화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는 해진관사(海鎭官司)로 하여금 본왜(本倭)에게 칙유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의리에 입각하여 회답 서신을 보내게 하는 외에,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력 43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對馬島倭)가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예조에 바치는 서계를 싸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이번에 귤지정을 파견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귤지정과 함께 우리 전하를 만나보니, 변치 않고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사가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 저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바,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끝내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신사만을 보내 주시어 저에게 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받고 이어 역관(譯官)을 시켜서 귤지정과 문답하게 하였습니다. 역관이 「이번의 이 서계 안에서 말한 바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가강이 국내의 분란을 평정하고 원수충이 국사를 전담하면서 귀국과 통호(通好)하여 신사를 맞이해 와서 그 덕을 볼 계획을 하였다. 도주는 아비의 직책을 승습받았으므로 가강의 뜻을 그대로 떠맡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오로지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다시 힐문하기를 「본국의 기무(機務)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일체를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너희 섬에서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이미 죽었고 평정광(平貞光)은 나이가 어리다. 전에는 평의지가 양쪽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서 스스로 미봉한 것이 많았다. 현재의 상황은 지난날과 달라서 귀국에서 반드시 잘 참작해서 조처해 주어야만 뒷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보고에 근거하여 귤지정이 가강을 빙자하여 한 말을 조사해 보니, 말뜻이 몹시 교활하여 자못 공갈하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이의 정적이 몹시 불측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진강유부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대마도에서 쇄환한 우리 나라의 포로인 신경난(辛景鸞) 등을 풀어보낸 연유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의정부의 여러 배신(陪臣)들이 회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문하였는데, 본인이 공초(供招)하기를 ‘일명 신경란(辛景鸞)이라 하고 나이는 40세이며,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사람이다. 이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란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들은 사실입니다. 평수뢰(平秀賴)가 총애하는 장수의 이름이 편동시정(片桐市正)이라고 하는데 가강이 몰래 그와 결탁해서 평수뢰를 독살하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편동시정은 그의 형제 세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강에게 귀의해서는 큰 군사를 끌어모아서 평수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강측이 패배하여서 정병(精兵) 3만 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당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은 힘이 부족해서 항복을 하고는 손가락을 잘라서 부처께 맹세하고 하늘에 사죄하였으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66주를 모두 들어 수뢰에게 바치고 식읍(食邑)을 보전하고 모자(母子)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가강은 문득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평수뢰에게 고하기를 「내가 늙어서 잘못 헤아리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지금 비록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앞으로 무슨 얼굴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대판(大坡)의 성곽을 대략 무너뜨려서 마치 내가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꾸민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무너진 곳은 내가 그날 즉시 공사를 벌려 수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수뢰가 승리한 기분에 도취되어 그가 말한 바를 믿고서 본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강이 평수뢰의 외숙(外叔)임을 인연하여 그대로 풀어주어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다음해 3월에 수뢰가 한 여자를 가강에게 보내어서 축성하는 역사를 무슨 이유로 지연시키는가에 대해 캐물으니, 가강이 거짓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듣기에 수뢰가 이미 스스로 성참(城塹)을 다 수축하고서 다시 싸우고자 한다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답하기를 「그 말은 헛된 말이다. 대판의 성참은 아직까지 수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맹약한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평수뢰가 싸우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응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일검(一劍)으로 사생(死生)을 결판짓겠다.」고 하고는, 이어 여러 곳의 군사를 불러모았는데, 먼저 헛말을 퍼뜨려서 아무아무 고을 아무아무 장수는 8월에 군사를 이끌고 모이기 바란다고 두루 고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장소에서 심복의 여러 장수들을 모이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킬 기일을 앞당겨서, 4월에 군사들을 통합하고 5월 1일에 수뢰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뒤 2일·3일·4일·5일·6일에 잇달아서 크게 싸웠습니다. 마침 평수뢰의 성 안에 간첩이 있어 안에서 호응하여서 먼저 화약을 쌓아둔 곳에 가서 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드디어 패하여서 그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마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마침 일본에 갔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가강이 일본을 평정하고는 조선의 신사를 맞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평정광을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또 귤지정을 불러서 조선에 신사를 힘껏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일본에 머물러 있는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신사가 들어오면 우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 왕래하는 관역(官譯)들이 물은 데 대해 각 왜인들이 말한 일본 내의 사정도 역시 신경란이 공초한 것과 대략 같았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또 만력 44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이 치계한 데 의거해 보건대, 거기에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정문을 보내었는데, 거기에 「대마도왜 귤지정이 항구에 도착해서 역학(譯學) 형언길(邢彦吉)을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면서 본대마도에다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주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귀국에서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나 역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본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치계에 근거해서 시행하던 사이에, 또 11월에 대마도에서 차임해 보낸 귤지정이 서계를 싸가지고서 왔는데, 그 서계에 ‘평의성은 삼가 예조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 강호(江戶)에서 물러나와 늦가을인 9월에 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귤지정을 차임해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해 봄에 신사를 차임해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삼가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전과 같이 유시하도록 보내는 한편 절차를 갖추어서 진강유부(鎭江遊府)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대마 도주가 예조에 서계(書契)를 보내었는데, 그 안에 말하기를 ‘지금 빠른 배를 태워 귤지정을 다시금 차임해 보내면서 이처럼 급급해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개 본도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준수하면서 번리(藩籬)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불행스럽게도 명이 짧아서 죽었는데, 저는 지금 나이가 어려서 아마도 우리 전하께서 보전해 주기를 도모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난해에 신사가 나온 영광을 잊지 못하여서 전부터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조(貴曹)에서는 비단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일이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아마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만약 우리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례를 생각하건대, 귀국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를 보냈었는데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였습니다. 또 기유년039) 에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었는데 지금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귀국에서는 이와 같이 보답하는 예가 없으니, 이것은 예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지금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하는 것은 인의(仁義)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사세를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사를 보내도록 허락하여 포로들을 쇄환해 가 생령(生靈)들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양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급함을 알리는 것은 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시금 덕음(德音)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전례대로 출발시켰는데, 그 뒤에 또 부호군 정신도(鄭信道)가 아뢰었습니다. 그 대략에 ‘저의 친척인 전이생(全以生)과 박괘동(朴卦同) 등이 일찍이 왜적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었는데, 지난번에 대마도 왜인 편을 통하여 글을 보내 왔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가 살마주(薩摩州)에 가서 보니, 그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총(鳥銃)과 창검을 쓰는 재주를 잘 익혔으며, 모두 본국으로 쇄환되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지금 전의 사항들에 대해서 이미 정부에서 상의해 확정지워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세히 따져보건대, 지난해에 가강이 소방(小邦)에 먼저 성의를 보일 때 일찍이 말하기를 ‘풍신 수길이 귀국을 침범할 때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어서 나의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 귀국으로 간 자가 없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풍신 수길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포로로 잡아간 남녀들을 쇄환하였고, 계속해서 선왕(先王)들의 묘(墓)를 파헤친 도적들을 잡아보내면서 성의를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소방에서는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천조에다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였으며, 이어 원역(員役)을 차임해 보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강이 대판을 병탄하고 수충(秀忠)이 여러 섬들을 평정하여 형세를 키우고 점차 강성해져 스스로 소방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사이에 신사를 청하는 사신이 날마다 오고 있는데, 대개 그의 본심은 신사의 위세를 빌려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교활한 정상은 아마도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에는 법도대로 할 것과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 있고, 때에는 편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는 법으로, 전에 원역(員役)들을 차임해 보낸 전례에 의거해서 그 편에 보답해 주어 기미(羈糜)하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이어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시금 정부의 배신들을 신칙해서 좋은 쪽으로 별도로 시행하는 외에, 왜정(倭情)의 사리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합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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