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사
돈녕 도정(敦寧都正) 김극효(金克孝)가 옛 집터의 섬돌과 주춧돌을 도감에 바치니, 전교하기를, "동지(同知)에 제수하고 아울러 그 대가에 상응하는 물품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동지(同知)에 제수하고 아울러 그 대가에 상응하는 물품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4일에 새로 짓고 있는 궁궐의 시사전(視事殿)의 기둥을 세울 때에 도제조 이하는 모두 모여서 함께 둘러 보게 할 일을 도감에 말하라."
"4일에 새로 짓고 있는 궁궐의 시사전(視事殿)의 기둥을 세울 때에 도제조 이하는 모두 모여서 함께 둘러 보게 할 일을 도감에 말하라."
주청 부사(奏請副使) 유간(柳澗)이 정사(正使) 이정귀(李廷龜)의 병이 심하다는 것을 장계(狀啓)하였는데,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이 서장(書狀)을 보건대, 이정귀는 국가의 중신으로서 국사를 위하여 여러 번 연경에 갔었는데, 지금 병이 심하다고 하니 매우 놀랍다. 내의(內醫)를 급히 보내 알맞는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이 서장(書狀)을 보건대, 이정귀는 국가의 중신으로서 국사를 위하여 여러 번 연경에 갔었는데, 지금 병이 심하다고 하니 매우 놀랍다. 내의(內醫)를 급히 보내 알맞는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죄인 최천건(崔天健)이 온양(溫陽)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최천건은 권흉(權凶) 황헌(黃憲)의 외손이다. 재주가 조금 있기는 하였으나 위인이 볼품이 없어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아 정사하는 반열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유영경이 집권하게 되자 천건이 제일 먼저 아부하였고, 영경에게 비밀 논의가 있을 때마다 천건이 참여하였던 까닭에 그를 끌어 올려 전장(銓長)이 되게 하였다. 무신년 초에 죄를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죽었다.】
8월 2일 갑오
의주 부윤의 서장(書狀)으로 인하여 전교하였다. "이번에 오는 차관은 저들의 재촉을 받고 곧바로 오대산(五臺山)으로 갈 염려가 없지 않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상의해서 미리 한 통의 자문을 만들어 진강(鎭江)으로 보내 뜻밖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걱정이 없게 하도록 하라. "
"이번에 오는 차관은 저들의 재촉을 받고 곧바로 오대산(五臺山)으로 갈 염려가 없지 않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상의해서 미리 한 통의 자문을 만들어 진강(鎭江)으로 보내 뜻밖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걱정이 없게 하도록 하라. "
사헌부가 아뢰기를, "말세의 공도(公道)는 단지 과거(科擧)에 있습니다. 근래에는 기강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몰염치한 무리들이 갖가지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더구나 선비들의 습성마저 구차스럽고 경박해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수백 마디를 해서 못하는 말이 없이 해대니 매우 한심합니다. 이번의 증광 별시(增廣別試)는 전에 없던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 것이므로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외방에서는 과장을 파탄시켰을 뿐만 아니라 출방(出榜)한 후에도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비방이 많았습니다. 서울로 말하면 사방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이소(二所)의 중장(中場) 응시자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시관(試官)에게 욕설을 하였고, 입장자(入場者)가 1천여 명 정도 되었으나 파장(罷場)을 놓고 지레 퇴장해 버려 과장에 남아 있던 자는 1백여 명뿐이었는데, 이 사람들에게만 그대로 제술(製述)을 실시하게 한 다음 구차하게 출방(出榜)을 하였습니다. 소란을 피운 자는 유생입니다마는 유생으로 하여금 소란을 피울 틈이 없게 할 자는 시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소란을 피운 죄는 유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고 시관도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을 경우 그 전에서부터 그 방(榜)을 그대로 둔 때가 없었습니다. 이소 시관(二所試官) 등은 우선 그들의 관직을 파하고 이어 그 방까지 혁파하라고 속히 명하소서. 그리고 일소 차비관(一所差備官)으로서 사기를 치고 꾀를 부린 죄는 박문명(朴文溟)이 가장 심하다고는 하나 어찌 저가 혼자서 저질렀겠습니까. 동참했던 관원들이 정녕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여 한편으로는 과거를 중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하소서. 근래에 인심이 극도로 악화되어 작은 혐의를 가지고 무고하는 자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느 누가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익명서(匿名書)의 경우는 부자간에도 서로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명률(大明律)》과 우리 나라 《대전(大典)》에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만, 근일에 나쁜 폐습을 만들어 전에 없던 폐단을 크게 열어 놓았으니 사람들이 매우 민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용(金涌)은 국가에서 이번에 서둘러 집을 짓는 날을 당하여 목재(木材)를 초관(哨官)에게 분담시켰습니다. 비록 청심루(淸心樓)를 짓는다고 핑계하였으나 사실 부득이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원망을 사서 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해정(金亥丁)이 정고(呈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만큼 이는 이름 없는 소장인데 심지어 치계(馳啓)까지 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으니, 그 마음씨가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일소(一所)에 동참했던 차비관은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말세의 공도(公道)는 단지 과거(科擧)에 있습니다. 근래에는 기강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몰염치한 무리들이 갖가지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더구나 선비들의 습성마저 구차스럽고 경박해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수백 마디를 해서 못하는 말이 없이 해대니 매우 한심합니다.
이번의 증광 별시(增廣別試)는 전에 없던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 것이므로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외방에서는 과장을 파탄시켰을 뿐만 아니라 출방(出榜)한 후에도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비방이 많았습니다. 서울로 말하면 사방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이소(二所)의 중장(中場) 응시자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시관(試官)에게 욕설을 하였고, 입장자(入場者)가 1천여 명 정도 되었으나 파장(罷場)을 놓고 지레 퇴장해 버려 과장에 남아 있던 자는 1백여 명뿐이었는데, 이 사람들에게만 그대로 제술(製述)을 실시하게 한 다음 구차하게 출방(出榜)을 하였습니다. 소란을 피운 자는 유생입니다마는 유생으로 하여금 소란을 피울 틈이 없게 할 자는 시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소란을 피운 죄는 유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고 시관도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을 경우 그 전에서부터 그 방(榜)을 그대로 둔 때가 없었습니다. 이소 시관(二所試官) 등은 우선 그들의 관직을 파하고 이어 그 방까지 혁파하라고 속히 명하소서. 그리고 일소 차비관(一所差備官)으로서 사기를 치고 꾀를 부린 죄는 박문명(朴文溟)이 가장 심하다고는 하나 어찌 저가 혼자서 저질렀겠습니까. 동참했던 관원들이 정녕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여 한편으로는 과거를 중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하소서.
근래에 인심이 극도로 악화되어 작은 혐의를 가지고 무고하는 자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느 누가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익명서(匿名書)의 경우는 부자간에도 서로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명률(大明律)》과 우리 나라 《대전(大典)》에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만, 근일에 나쁜 폐습을 만들어 전에 없던 폐단을 크게 열어 놓았으니 사람들이 매우 민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용(金涌)은 국가에서 이번에 서둘러 집을 짓는 날을 당하여 목재(木材)를 초관(哨官)에게 분담시켰습니다. 비록 청심루(淸心樓)를 짓는다고 핑계하였으나 사실 부득이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원망을 사서 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해정(金亥丁)이 정고(呈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만큼 이는 이름 없는 소장인데 심지어 치계(馳啓)까지 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으니, 그 마음씨가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일소(一所)에 동참했던 차비관은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주청사의 선래 역관(先來譯官) 권인원(權仁元), 군관 홍용해(洪龍海)·기통헌(奇通獻)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라."
"주청사의 선래 역관(先來譯官) 권인원(權仁元), 군관 홍용해(洪龍海)·기통헌(奇通獻)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라."
전교하였다. "왕차관(王差官) 접반관을 한편으로 엄선하여 차출하고 역관도 십분 잘 가려서 기다리게 하라."
"왕차관(王差官) 접반관을 한편으로 엄선하여 차출하고 역관도 십분 잘 가려서 기다리게 하라."
사간원이 아뢰기를, "과거법(科擧法)은 지극히 공정하고 엄격한 것인데 근래에는 선비들의 습성이 구차스럽고 경박해져 과장을 설치하기만 하면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현란케 하니, 선비들의 습성이 불미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못됩니다. 이번 증광시에서 이소(二所) 중장의 응시자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울타리를 걷고 지레 먼저 나가버린 것은 실로 2백 년 동안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관은 단지 남아있는 응시자들만을 데리고 밤이 늦도록 제술(製述) 시험을 보인 다음, 그대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였으니 구차하게 처리한 책임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소(一所)에서는 시관이 채점하여 뽑을 글을 차비관이 중간에 사정을 써서 원본을 바꾸었다는 말이 외부에 나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시관이 모를 리가 없는데 처치할 것을 계청하지 않았으니, 어찌 실책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서울은 사방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구차하고 함부로 하는 폐단이 이렇게까지 심합니다. 그리고 안변(安邊)에서 파장을 놓은 것과 경기 우도에서 부정을 저지른 것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소(二所)에서 소란을 피운 응시자를 속히 가려내고 시관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일소(一所) 차비관 박문명(朴文溟)과 정흔(鄭昕)을 잡아다가 사실을 밝혀 내고 시관도 아울러 추고하소서. 안변에서 소란을 피운 유생은 각별히 심문하고 경기 우도 시관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합격자 명단도 취소시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시관을 파직시키는 문제와 합격자 명단을 취소하는 문제는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과거법(科擧法)은 지극히 공정하고 엄격한 것인데 근래에는 선비들의 습성이 구차스럽고 경박해져 과장을 설치하기만 하면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현란케 하니, 선비들의 습성이 불미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못됩니다.
이번 증광시에서 이소(二所) 중장의 응시자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울타리를 걷고 지레 먼저 나가버린 것은 실로 2백 년 동안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관은 단지 남아있는 응시자들만을 데리고 밤이 늦도록 제술(製述) 시험을 보인 다음, 그대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였으니 구차하게 처리한 책임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소(一所)에서는 시관이 채점하여 뽑을 글을 차비관이 중간에 사정을 써서 원본을 바꾸었다는 말이 외부에 나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시관이 모를 리가 없는데 처치할 것을 계청하지 않았으니, 어찌 실책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서울은 사방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구차하고 함부로 하는 폐단이 이렇게까지 심합니다. 그리고 안변(安邊)에서 파장을 놓은 것과 경기 우도에서 부정을 저지른 것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소(二所)에서 소란을 피운 응시자를 속히 가려내고 시관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일소(一所) 차비관 박문명(朴文溟)과 정흔(鄭昕)을 잡아다가 사실을 밝혀 내고 시관도 아울러 추고하소서. 안변에서 소란을 피운 유생은 각별히 심문하고 경기 우도 시관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합격자 명단도 취소시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시관을 파직시키는 문제와 합격자 명단을 취소하는 문제는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8월 3일 을미
전교하였다. "지금 이 두 궁궐은, 반드시 내가 직접 가서 여러 번 상의하고 살펴본 연후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두 번 가서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光政殿)·홍정전(弘政殿) 두 궁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린 후에 내당과 외당 중 한 곳을 서둘러 먼저 지어놓으면 내가 수시로 거둥하여 직접 대내를 볼 것이니, 그리하면 분부하는 대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을 잘 알아서 되도록 빨리 조성할 일로 도감에 말하라."
"지금 이 두 궁궐은, 반드시 내가 직접 가서 여러 번 상의하고 살펴본 연후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두 번 가서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光政殿)·홍정전(弘政殿) 두 궁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린 후에 내당과 외당 중 한 곳을 서둘러 먼저 지어놓으면 내가 수시로 거둥하여 직접 대내를 볼 것이니, 그리하면 분부하는 대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을 잘 알아서 되도록 빨리 조성할 일로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귀양간 죄인이 죽었을 경우 관가에서 검시(檢屍)하는 일이 없는가? 이를 금부에 물어서 아뢰라."
"귀양간 죄인이 죽었을 경우 관가에서 검시(檢屍)하는 일이 없는가? 이를 금부에 물어서 아뢰라."
전교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본도에 관하여 의논할 일이 있거든, 감사와 병사가 내려가기 전에 방비할 일과 수어할 계책을 본사(本司)에서 상세하게 의논해 지시해서 보낼 일을 비변사에 말하라."
"북병사(北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본도에 관하여 의논할 일이 있거든, 감사와 병사가 내려가기 전에 방비할 일과 수어할 계책을 본사(本司)에서 상세하게 의논해 지시해서 보낼 일을 비변사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새로 지은 대궐 광정전(光政殿)의 상량문을 먼저 지어 올릴 일을 대제학에게 말하라."
"새로 지은 대궐 광정전(光政殿)의 상량문을 먼저 지어 올릴 일을 대제학에게 말하라."
전교하였다. "금부(禁府)가 좌아(坐衙)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다. 앞으로는 일차(日次)에 따라 규례대로 좌기(坐起)하여 옥사(獄事)를 결정하도록 하라."
"금부(禁府)가 좌아(坐衙)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다. 앞으로는 일차(日次)에 따라 규례대로 좌기(坐起)하여 옥사(獄事)를 결정하도록 하라."
전교하기를, "죄인 김해정(金亥丁)·윤은금(尹銀金)·윤흥복(尹興福)·윤은천(尹銀天)·윤은로(尹銀老)·이흥남(李興男) 등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여주(驪州)에서 발생한 익명서(匿名書)에 관한 옥사이다.
"죄인 김해정(金亥丁)·윤은금(尹銀金)·윤흥복(尹興福)·윤은천(尹銀天)·윤은로(尹銀老)·이흥남(李興男) 등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여주(驪州)에서 발생한 익명서(匿名書)에 관한 옥사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차비관(差備官)이 꾀를 부리고 사정을 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분명하여 감출 수가 없습니다. 박문명(朴文溟)은 이미 먼저 적발하여 사판에서 삭제시켰습니다. 동참했던 관원들도 그 죄가 균등하여 경중의 차이가 없는데, 어찌 파직시키는 데만 그치고 말겠습니까. 아울러 사판에서 삭제시켜 똑같은 벌을 내리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차비관(差備官)이 꾀를 부리고 사정을 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분명하여 감출 수가 없습니다. 박문명(朴文溟)은 이미 먼저 적발하여 사판에서 삭제시켰습니다. 동참했던 관원들도 그 죄가 균등하여 경중의 차이가 없는데, 어찌 파직시키는 데만 그치고 말겠습니까. 아울러 사판에서 삭제시켜 똑같은 벌을 내리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안변(安邊)에서 있었던 파장(罷場)에 관한 일은 비록 선비들의 습성이 불미스러운 데서 발생했다고는 하더라도, 본도의 수험생들이 다함께 시험장에 모여 모두 ‘정평 훈도(定平訓導)가 현재 방학 중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입문관(入門官)에게 말하니, 입문관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시관(試官)에게 통보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관은 ‘입장(入場)을 하고 나면 책임이 시관에게 있고 입장하기 전에는 책임이 입문관에게 있다.’고 하면서, 서로 미루기만 한 채 정당한 결정을 내려주지 않아서 선비들이 철수하여 돌아갔고 시관도 그대로 파장을 하였습니다. 잘못이 비록 입문관에게 있다 하더라도 시관이 어찌 여기에 대한 책임이 없겠습니까. 입문관은 파직하고, 시관은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안변(安邊)에서 있었던 파장(罷場)에 관한 일은 비록 선비들의 습성이 불미스러운 데서 발생했다고는 하더라도, 본도의 수험생들이 다함께 시험장에 모여 모두 ‘정평 훈도(定平訓導)가 현재 방학 중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입문관(入門官)에게 말하니, 입문관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시관(試官)에게 통보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관은 ‘입장(入場)을 하고 나면 책임이 시관에게 있고 입장하기 전에는 책임이 입문관에게 있다.’고 하면서, 서로 미루기만 한 채 정당한 결정을 내려주지 않아서 선비들이 철수하여 돌아갔고 시관도 그대로 파장을 하였습니다. 잘못이 비록 입문관에게 있다 하더라도 시관이 어찌 여기에 대한 책임이 없겠습니까. 입문관은 파직하고, 시관은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8월 4일 병신
전교하였다. "경운궁(慶運宮)의 담장이 비로 인하여 무너진 곳을 당연히 서둘러 보수했어야 하는데, 서로 미루고서 오랫동안 다시 보수하여 쌓지를 않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병조의 색낭청을 추고하고 지금 이후로 각별히 서둘러 거행할 일을 해조에 말하라."
"경운궁(慶運宮)의 담장이 비로 인하여 무너진 곳을 당연히 서둘러 보수했어야 하는데, 서로 미루고서 오랫동안 다시 보수하여 쌓지를 않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병조의 색낭청을 추고하고 지금 이후로 각별히 서둘러 거행할 일을 해조에 말하라."
의금부가, 행패를 부린 유생 신집(愼㙫)·황몽린(黃夢麟)·이광부(李光傅)·송신길(宋信吉)·권익(權翼) 등을 잡아다 가두었다.
진사 고형(高逈)이 상소하여 휘호(徽號)를 추가하여 올리기를 청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일반적으로 귀양간 죄인이 죽을 경우 본도에서 법전에 의거하여 검시하고 사실을 규명하여 치계하는 것이 전해오는 규례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그러나 최천건(崔天健)은 검시하지 말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귀양간 죄인이 죽을 경우 본도에서 법전에 의거하여 검시하고 사실을 규명하여 치계하는 것이 전해오는 규례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그러나 최천건(崔天健)은 검시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양 역의 역말을 궐문 밖에다 대기시켜 두는 것은 불시에 왕명을 전할 것에 대비한 것으로, 왕명을 잠시라도 지체시키는 염려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임금의 수레를 담당하고 있는 낭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낭청이 감히 마음대로 말을 탈 수가 없는데, 모두 제멋대로 점유하여 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시급하게 사령을 내보낼 때에도 정원이 재촉을 해도 끝까지 말을 대기시키지 않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각별히 단속해서 다른 낭청 가운데 말을 타는 자는 남기율(濫騎律)과 같은 형벌을 적용시키도록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양 역의 역말을 궐문 밖에다 대기시켜 두는 것은 불시에 왕명을 전할 것에 대비한 것으로, 왕명을 잠시라도 지체시키는 염려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임금의 수레를 담당하고 있는 낭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낭청이 감히 마음대로 말을 탈 수가 없는데, 모두 제멋대로 점유하여 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시급하게 사령을 내보낼 때에도 정원이 재촉을 해도 끝까지 말을 대기시키지 않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각별히 단속해서 다른 낭청 가운데 말을 타는 자는 남기율(濫騎律)과 같은 형벌을 적용시키도록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8월 5일 정유
전교하였다. "예전부터 일반적인 차자(箚子)는 단지 아무 일로 차자를 올렸다는 것으로, 대강 줄거리만 조보(朝報)에 실었고, 차자 내용을 전부 베껴다가 조보에 실어서 돌려보게 했던 때는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일반적인 차자 내용을 모두 조보에 싣는다고 하니, 일의 체모가 온당치 못하다. 이는 필시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전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앞으로는 한결같이 구례에 따라 살펴서 할 것을 정원은 잘 알아서 거행하도록 하라."
"예전부터 일반적인 차자(箚子)는 단지 아무 일로 차자를 올렸다는 것으로, 대강 줄거리만 조보(朝報)에 실었고, 차자 내용을 전부 베껴다가 조보에 실어서 돌려보게 했던 때는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일반적인 차자 내용을 모두 조보에 싣는다고 하니, 일의 체모가 온당치 못하다. 이는 필시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전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앞으로는 한결같이 구례에 따라 살펴서 할 것을 정원은 잘 알아서 거행하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요즘 여러 도감에 필요한 것이 매우 많다. 우롱(雨籠)은 공홍도(公洪道)에서 30사(事), 양남에서 각각 60사를, 유선(油扇)은 양남에서 각각 3백 파(把)를 정교하게 만들어서 올려보낼 일로 삼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요즘 여러 도감에 필요한 것이 매우 많다. 우롱(雨籠)은 공홍도(公洪道)에서 30사(事), 양남에서 각각 60사를, 유선(油扇)은 양남에서 각각 3백 파(把)를 정교하게 만들어서 올려보낼 일로 삼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경기 감사 유희량(柳希亮)이 여주(驪州)에서 상변(上變)한 일로 장계를 올려 대죄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대역(大逆)에 관계되는데 허위든 사실이든 간에 방백 수령(方伯守令)이 어찌 덮어두고 계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도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일이 대역(大逆)에 관계되는데 허위든 사실이든 간에 방백 수령(方伯守令)이 어찌 덮어두고 계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도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사시에 태백이 남쪽에 나타났다.
8월 6일 무술
전교하였다. "경덕궁(慶德宮)의 정무 볼 전과 조하(朝賀)를 받을 전의 상량문을 규정에 따라 지어 올릴 일을 도감에 말하라."
"경덕궁(慶德宮)의 정무 볼 전과 조하(朝賀)를 받을 전의 상량문을 규정에 따라 지어 올릴 일을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경덕궁의 동쪽이 허술한 듯하니, 신순일(申純一)과 진산군(珍山君)의 집 근처에 누각 하나를 축조하고 큰 연못을 깊게 판 다음 가운데에다 한 개의 섬을 쌓아서 동방을 진압시키되, 아무 공망일(空亡日) 모여 지형을 살펴보고 여러 술관(術官)에게 상세히 물어서 아뢸 것을 도감에 말하라."
"경덕궁의 동쪽이 허술한 듯하니, 신순일(申純一)과 진산군(珍山君)의 집 근처에 누각 하나를 축조하고 큰 연못을 깊게 판 다음 가운데에다 한 개의 섬을 쌓아서 동방을 진압시키되, 아무 공망일(空亡日) 모여 지형을 살펴보고 여러 술관(術官)에게 상세히 물어서 아뢸 것을 도감에 말하라."
8월 7일 기해
전교하였다. "유대일(兪大逸)의 집터 7백여 칸과, 이중기(李重基)의 집터 4백여 칸이 경덕궁의 대내에 편입되었으며, 청계 부령(淸溪副令) 오(鰲)는 돌을 많이 납부하였다. 유대일은 가자하여 실직을 제수하고, 이중기는 당상직에 승진시키고, 오(鰲)에게는 도정(都正)을 제수하라."
"유대일(兪大逸)의 집터 7백여 칸과, 이중기(李重基)의 집터 4백여 칸이 경덕궁의 대내에 편입되었으며, 청계 부령(淸溪副令) 오(鰲)는 돌을 많이 납부하였다. 유대일은 가자하여 실직을 제수하고, 이중기는 당상직에 승진시키고, 오(鰲)에게는 도정(都正)을 제수하라."
전교하였다. "선조 대왕 옥책문 제술 책보 배진 예의사(宣祖大王玉冊文製述冊寶陪進禮儀使) 이이첨(李爾瞻)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선조 대왕 옥책문 서사관 제주관(宣祖大王玉冊文書寫官題主官) 오익(吳翊), 의인 왕후 옥책문 서사관 책보 배진 제주관(懿仁王后玉冊文書寫官冊寶陪進題主官) 심돈(沈惇), 책보 진수 승지(冊寶進受承旨) 대축(大祝) 이위경(李偉卿), 궁위령(宮闈令) 내관(內官) 김충영(金忠英)·최봉천(崔奉天)에게 모두 가자하고, 대축 김질간(金質幹)은 막 당상관에 올랐으니 숙마 1필을 대면하여 하사하고, 그밖의 상격(賞格)에 대해서는 모두 종묘에 부(祔)제사를 지냈을 때의 규례에 따라 자세히 살펴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고, 유희량(柳希亮)은 이미 가자하였으니 거듭 주지 말도록 하라."
"선조 대왕 옥책문 제술 책보 배진 예의사(宣祖大王玉冊文製述冊寶陪進禮儀使) 이이첨(李爾瞻)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선조 대왕 옥책문 서사관 제주관(宣祖大王玉冊文書寫官題主官) 오익(吳翊), 의인 왕후 옥책문 서사관 책보 배진 제주관(懿仁王后玉冊文書寫官冊寶陪進題主官) 심돈(沈惇), 책보 진수 승지(冊寶進受承旨) 대축(大祝) 이위경(李偉卿), 궁위령(宮闈令) 내관(內官) 김충영(金忠英)·최봉천(崔奉天)에게 모두 가자하고, 대축 김질간(金質幹)은 막 당상관에 올랐으니 숙마 1필을 대면하여 하사하고, 그밖의 상격(賞格)에 대해서는 모두 종묘에 부(祔)제사를 지냈을 때의 규례에 따라 자세히 살펴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고, 유희량(柳希亮)은 이미 가자하였으니 거듭 주지 말도록 하라."
홍문관 박사 조유선(趙裕善)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삼사(三司)가 하나가 되어 예로부터 서로 공경해온 것은 공론을 중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사의 관원은 옥당의 물의를 조금만 들어도 부끄럽게 여기고 자처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찌 수모를 참고서 억지로 버티고 있던 자가 있었겠습니까. 전일 장령 곽천호(郭天豪)는 동료를 처치하는 것을 꺼려, 억지로 인피하지 않아도 될 인피를 하면서 간원에게 떠넘겼으니, 이것이 어찌 대간의 풍채라고 하겠습니까. 예전부터 양사의 관원이 만일 무슨 일로 인피를 했을 경우 논의에 참석하지 않은 동료가 의례적으로 처치하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상(喪)을 당하여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처치하는 데에 무슨 혐의할 일이 조금이라도 있기에 잘못을 끌어대면서 자책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기회에 맞추어 교묘하게 책임을 면하려는 속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옥당이 그를 처치할 즈음에 처음에는 체차로 논하려 했다가 결국은 구차하게 출사하기를 청하였으니, 공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곽천호는 물론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금새 사직했다 금새 출사하여 길거리에서 크게 외치고 다니며 전혀 꺼려하지 않고 있으니, 삼사가 서로 공경한다는 의의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신이 당초에 자신의 견해를 강력하게 내세우지 못하여 곽천호로 하여금 지금 와서 명기(名器)에 오점을 남기게 하였으니, 신같은 자가 논사(論思)를 잘못한 죄입니다. 신의 관직을 전파(鐫罷)해서 삼사의 체면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신이 삼가 보건대, 삼사(三司)가 하나가 되어 예로부터 서로 공경해온 것은 공론을 중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사의 관원은 옥당의 물의를 조금만 들어도 부끄럽게 여기고 자처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찌 수모를 참고서 억지로 버티고 있던 자가 있었겠습니까.
전일 장령 곽천호(郭天豪)는 동료를 처치하는 것을 꺼려, 억지로 인피하지 않아도 될 인피를 하면서 간원에게 떠넘겼으니, 이것이 어찌 대간의 풍채라고 하겠습니까. 예전부터 양사의 관원이 만일 무슨 일로 인피를 했을 경우 논의에 참석하지 않은 동료가 의례적으로 처치하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상(喪)을 당하여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처치하는 데에 무슨 혐의할 일이 조금이라도 있기에 잘못을 끌어대면서 자책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기회에 맞추어 교묘하게 책임을 면하려는 속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옥당이 그를 처치할 즈음에 처음에는 체차로 논하려 했다가 결국은 구차하게 출사하기를 청하였으니, 공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곽천호는 물론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금새 사직했다 금새 출사하여 길거리에서 크게 외치고 다니며 전혀 꺼려하지 않고 있으니, 삼사가 서로 공경한다는 의의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신이 당초에 자신의 견해를 강력하게 내세우지 못하여 곽천호로 하여금 지금 와서 명기(名器)에 오점을 남기게 하였으니, 신같은 자가 논사(論思)를 잘못한 죄입니다. 신의 관직을 전파(鐫罷)해서 삼사의 체면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축(軸)을 받든 도승지 한찬남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축(軸)을 받든 도승지 한찬남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박자흥(朴自興)을 대사간으로, 임건(林健)을 집의로, 이유록(李綏祿)을 상의원 정으로, 유덕신(柳德新)을 돈녕 도정으로, 이잠(李埁)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8월 8일 경자
전교하였다. "고양 군수 홍매(洪邁)의 딸과 생원 윤홍업(尹弘業)의 딸을 우선 숙의(淑儀)로 책정하고, 그외 삼간 처녀(三揀處女)들은 모두 혼인을 허락하도록 하라."
"고양 군수 홍매(洪邁)의 딸과 생원 윤홍업(尹弘業)의 딸을 우선 숙의(淑儀)로 책정하고, 그외 삼간 처녀(三揀處女)들은 모두 혼인을 허락하도록 하라."
장령 곽천호(郭天豪)가 아뢰기를, "어제 홍문관 박사 조유선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논핵을 현저하게 받았으니 잠시라도 버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어제 홍문관 박사 조유선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논핵을 현저하게 받았으니 잠시라도 버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8월 9일 신축
사헌부가 아뢰기를, "장령 곽천호가 시시콜콜 변명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옥당의 관원이 차자를 올려 현저하게 배척을 하였으니, 대간인 자는 결코 그대로 재직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초의 처치와 그 뒤의 출입 문제에 관해서는 논의할 것이 없을 듯하니, 장령 곽천호를 체차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장령 곽천호가 시시콜콜 변명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옥당의 관원이 차자를 올려 현저하게 배척을 하였으니, 대간인 자는 결코 그대로 재직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초의 처치와 그 뒤의 출입 문제에 관해서는 논의할 것이 없을 듯하니, 장령 곽천호를 체차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광정전(光政殿) 상량문을 서둘러 지어 올리도록 하라."
"광정전(光政殿) 상량문을 서둘러 지어 올리도록 하라."
8월 10일 임인
전교하였다. "내전이 현재 중상(重喪)을 당하였으니, 휘호(徽號)를 올리고 잔치를 베푸는 등의 행사에 형편상 발인하기 전에는 친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고 소략하게 권정(權停)하는 것도 흠이 될 듯하니, 날짜를 조금 늦추었다가 발인한 후에 거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뜻을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내전이 현재 중상(重喪)을 당하였으니, 휘호(徽號)를 올리고 잔치를 베푸는 등의 행사에 형편상 발인하기 전에는 친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고 소략하게 권정(權停)하는 것도 흠이 될 듯하니, 날짜를 조금 늦추었다가 발인한 후에 거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뜻을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8월 11일 계묘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사대부의 상(喪)으로 말한다면 기년복(朞年服)이하는 출가한 부인인 경우, 의레 강복(降服)을 합니다. 기년복 이하부터는 제후들이 입지를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국모(國母)가 되어 사가(私家)의 종당(宗黨)을 위하여 기년복을 의논한다는 말입니까. 국무(國誣)를 변론한 이후로부터 중외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정도일 뿐만이 아닌데,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사람들은 몹시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늦추게 되면 엄동설한이 닥쳐올 터인데 이런 때에 상께서 친림하시게 되면 옥체를 손상시킬까 염려되며, 막중 막대한 경사를 어찌 이렇게까지 지연시킬수 있단 말입니까. 휘호를 올리는 대례를 늦추지 말아서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흔쾌히 답하소서. 신들의 직책이 근밀(近密)한데 있다보니 구구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사대부의 상(喪)으로 말한다면 기년복(朞年服)이하는 출가한 부인인 경우, 의레 강복(降服)을 합니다. 기년복 이하부터는 제후들이 입지를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국모(國母)가 되어 사가(私家)의 종당(宗黨)을 위하여 기년복을 의논한다는 말입니까.
국무(國誣)를 변론한 이후로부터 중외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정도일 뿐만이 아닌데,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사람들은 몹시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늦추게 되면 엄동설한이 닥쳐올 터인데 이런 때에 상께서 친림하시게 되면 옥체를 손상시킬까 염려되며, 막중 막대한 경사를 어찌 이렇게까지 지연시킬수 있단 말입니까. 휘호를 올리는 대례를 늦추지 말아서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흔쾌히 답하소서. 신들의 직책이 근밀(近密)한데 있다보니 구구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경강(京江)에 주사(舟師)를 설치하는 것은 그 저의가 중국에서 통주(通州)에 배를 정비하여 변란에 대처하는 뜻과 대략 같은 것으로, 원래 적들과 서로 전쟁하기 위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배가 20여 척이어서 격군을 대략 모집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원수가 5백 90명이나 됩니다. 지금 만약 배에 오를 사수와 격군 등을 준비하게 된다면 용이하게 마련해 내기 어려울 것이므로, 당초에 단지 주사(舟師)와 파총(把摠)만을 선출해서 배를 운행하는 연습을 주관하게 했으니, 이는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형편으로 볼 때, 전군(戰軍)과 격군(格軍)을 일시에 마련해 내는 일은 쉽지가 않은 문제이니 대장은 뽑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수전(水戰)에 대해 선조(先朝)에서는 비록 친림하여 시열(試閱)하지는 않았으나, 조종조 때부터 직접 행차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태평스러운 시기가 아니며 편할 때에도 위험을 잊지 않는 것은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강의 주사를 시열하는 것은 방해될 일이 없으니, 한결같이 조종조에서 선격군(船格軍)을 선출한 예에 의하여 뽑도록 하되, 파총을 먼저 뽑아 빈틈없이 잘 처리하게 하고 도감 제조로 하여금 담당해서 살피게 하라." 하였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경강(京江)에 주사(舟師)를 설치하는 것은 그 저의가 중국에서 통주(通州)에 배를 정비하여 변란에 대처하는 뜻과 대략 같은 것으로, 원래 적들과 서로 전쟁하기 위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배가 20여 척이어서 격군을 대략 모집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원수가 5백 90명이나 됩니다. 지금 만약 배에 오를 사수와 격군 등을 준비하게 된다면 용이하게 마련해 내기 어려울 것이므로, 당초에 단지 주사(舟師)와 파총(把摠)만을 선출해서 배를 운행하는 연습을 주관하게 했으니, 이는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형편으로 볼 때, 전군(戰軍)과 격군(格軍)을 일시에 마련해 내는 일은 쉽지가 않은 문제이니 대장은 뽑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수전(水戰)에 대해 선조(先朝)에서는 비록 친림하여 시열(試閱)하지는 않았으나, 조종조 때부터 직접 행차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태평스러운 시기가 아니며 편할 때에도 위험을 잊지 않는 것은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강의 주사를 시열하는 것은 방해될 일이 없으니, 한결같이 조종조에서 선격군(船格軍)을 선출한 예에 의하여 뽑도록 하되, 파총을 먼저 뽑아 빈틈없이 잘 처리하게 하고 도감 제조로 하여금 담당해서 살피게 하라."
하였다.
8월 12일 갑진
전교하였다. "첨지 안덕인(安德仁)의 대지(垈地) 3백 34칸, 전 현감 심종(沈悰)의 대지 1백 50칸, 전 사과 안설(安渫)과 전 만호 고득종(高得宗)의 대지 1백 30칸, 전 현감 조호(趙浩)와 전 판관 인홍진(印弘珍)의 대지 1백 20칸, 전 현감 안광선(安光善)의 대지 1백 12칸, 전 서윤 윤기헌(尹耆獻)의 대지 1백 5칸, 전 군수 이신원(李愼元)의 대지 99칸이 인경궁(仁慶宮)의 담장 안에 들어갔으니, 모두에게 가자하고 안덕인에게는 실직을 제수하라." 전교하였다. "정승택(鄭承澤)의 대지 1천 1백여 칸이 인경궁 후원에 들어갔으니 실직을 제수하라."
"첨지 안덕인(安德仁)의 대지(垈地) 3백 34칸, 전 현감 심종(沈悰)의 대지 1백 50칸, 전 사과 안설(安渫)과 전 만호 고득종(高得宗)의 대지 1백 30칸, 전 현감 조호(趙浩)와 전 판관 인홍진(印弘珍)의 대지 1백 20칸, 전 현감 안광선(安光善)의 대지 1백 12칸, 전 서윤 윤기헌(尹耆獻)의 대지 1백 5칸, 전 군수 이신원(李愼元)의 대지 99칸이 인경궁(仁慶宮)의 담장 안에 들어갔으니, 모두에게 가자하고 안덕인에게는 실직을 제수하라."
전교하였다.
"정승택(鄭承澤)의 대지 1천 1백여 칸이 인경궁 후원에 들어갔으니 실직을 제수하라."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공도(公道)는 찾아볼 수 없고 사정(私情)만 들끓고 있으며 염치는 간 곳이 없고 임시방편만 법전(法典)으로 삼고 있으니, 식견있는 사람들은 이미 한심하게 여겨 지붕만 쳐다보면서 한숨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겨울과 여름철에 실시하는 고과(考課)는 금석과 같은 옛 법규인데 수령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백성들이 고달픔에 시달리는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방백(方伯)이 비록 공도와 정직만을 행하고 사사로움을 전혀 용납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청렴하지 못한 자들이 그 사이에 끼일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의욕을 갖고 벼슬길을 맑혀보려는 기상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먼저 허위(虛僞)의 전철을 밟고있으니 말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장의 서장(書狀)으로 무능한 수령을 2, 3명, 또는 4, 5명 포폄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데, 하물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얼굴을 버젓이 들고 아뢰는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팔도에서 포폄(褒貶)을 실시하는데, 하등(下等)을 맞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백성들은 마땅히 편안한 삶을 영위하면서 생업을 즐겁게 여겨야 할 터인데, 곳곳에서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유랑자가 속출하고 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하등에 거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도의 감사는,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할 일을 각별히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또 수령과 변방 장수로써 군량과 군기 등의 물건을 마련했다는 이유로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전후하여 몇 사람이 되는지 모를 만큼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비축된 물품은 전혀 없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이야 거론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감사들까지 혹시라도 치계가 뒤늦을까 염려하고, 해조에서는 상을 줄 걱정을 하기에 겨를이 없어 안팎이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허위가 고질병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군량이든 군기이든 마련한 자가 있을 경우 어사를 파견하여 점검을 실시한 다음 수로(水路)가 가까운 곳이면 배로 실어다가 경창(京倉)에 채우게 하고, 수로가 가까운 곳이 아니면 시가에 따라 포목으로 바꾸어서 상납할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은 것처럼 명분이 엄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사은(私恩)으로 잠시나마 예의에 벗어난 일이 있게 되면, 그것이 규정으로 굳어질 뿐만 아니라 그 폐단은 장차 임금의 권위가 존엄하지 못하게 되고 신하가 분수를 넘보게 될 것이니, 관계되는 것이 어찌 중차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도정(都正) 유덕신(柳德新)이 죽었다는 이유로 이미 결정해 놓은 대례(大禮)의 날짜를 늦추라고 명하셨는데, 신들은 매우 놀랍기만 합니다. 선왕이 예법을 제정할 때 기년(朞年) 이하의 상복부터는 제후가 입지 않도록 하였으니, 단연코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사대부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당당한 성대(盛代)에 국가를 예절로 다스리는 시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비들이 미세한 차이를 놓고 애써 쟁변하는 것은 그 뜻이 심원합니다. 예관(禮官)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라는 하교를 정지하시고, 전에 결정해 놓았던 날짜를 늦추지 말라고 속히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례를 늦추도록 한 일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그밖의 다른 일들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근래에 공도(公道)는 찾아볼 수 없고 사정(私情)만 들끓고 있으며 염치는 간 곳이 없고 임시방편만 법전(法典)으로 삼고 있으니, 식견있는 사람들은 이미 한심하게 여겨 지붕만 쳐다보면서 한숨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겨울과 여름철에 실시하는 고과(考課)는 금석과 같은 옛 법규인데 수령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백성들이 고달픔에 시달리는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방백(方伯)이 비록 공도와 정직만을 행하고 사사로움을 전혀 용납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청렴하지 못한 자들이 그 사이에 끼일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의욕을 갖고 벼슬길을 맑혀보려는 기상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먼저 허위(虛僞)의 전철을 밟고있으니 말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장의 서장(書狀)으로 무능한 수령을 2, 3명, 또는 4, 5명 포폄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데, 하물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얼굴을 버젓이 들고 아뢰는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팔도에서 포폄(褒貶)을 실시하는데, 하등(下等)을 맞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백성들은 마땅히 편안한 삶을 영위하면서 생업을 즐겁게 여겨야 할 터인데, 곳곳에서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유랑자가 속출하고 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하등에 거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도의 감사는,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할 일을 각별히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또 수령과 변방 장수로써 군량과 군기 등의 물건을 마련했다는 이유로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전후하여 몇 사람이 되는지 모를 만큼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비축된 물품은 전혀 없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이야 거론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감사들까지 혹시라도 치계가 뒤늦을까 염려하고, 해조에서는 상을 줄 걱정을 하기에 겨를이 없어 안팎이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허위가 고질병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군량이든 군기이든 마련한 자가 있을 경우 어사를 파견하여 점검을 실시한 다음 수로(水路)가 가까운 곳이면 배로 실어다가 경창(京倉)에 채우게 하고, 수로가 가까운 곳이 아니면 시가에 따라 포목으로 바꾸어서 상납할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은 것처럼 명분이 엄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사은(私恩)으로 잠시나마 예의에 벗어난 일이 있게 되면, 그것이 규정으로 굳어질 뿐만 아니라 그 폐단은 장차 임금의 권위가 존엄하지 못하게 되고 신하가 분수를 넘보게 될 것이니, 관계되는 것이 어찌 중차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도정(都正) 유덕신(柳德新)이 죽었다는 이유로 이미 결정해 놓은 대례(大禮)의 날짜를 늦추라고 명하셨는데, 신들은 매우 놀랍기만 합니다. 선왕이 예법을 제정할 때 기년(朞年) 이하의 상복부터는 제후가 입지 않도록 하였으니, 단연코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사대부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당당한 성대(盛代)에 국가를 예절로 다스리는 시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비들이 미세한 차이를 놓고 애써 쟁변하는 것은 그 뜻이 심원합니다. 예관(禮官)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라는 하교를 정지하시고, 전에 결정해 놓았던 날짜를 늦추지 말라고 속히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례를 늦추도록 한 일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그밖의 다른 일들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충원(尹忠源)은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제수하고, 윤홍업(尹弘業)은 구례에 따라 사포(司圃)에 제수하고, 한순(韓諄)은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제수하라. 심즙(沈諿)을 사인으로, 윤인(尹訊)을 대사간으로, 정광경(鄭廣敬)을 겸보덕으로, 김호(金昈)를 겸문학으로, 유충립(柳忠立)을 응교로, 한영(韓詠)을 장령으로, 허경(許儆)을 지평으로, 곽천호(郭天豪)를 부교리로, 박자흥(朴自興)을 형조 참판으로, 이필달(李必達)을 검열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윤충원은 을사년 권간(權奸)인 윤원형의 천첩 소생인데, 이이첨이 천거하여 교수(敎授)가 되었다. 충원은 새 궁궐을 짓는데 대지(垈地)를 바치는 등 다분히 뇌물행각을 벌여 특별히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간신의 후손들이 대부분 등용되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자로는 이량(李樑)의 손자인 이충(李沖) 형제 두 사람, 정언각(鄭彦懿)의 증손인 정조(鄭造) 형제 네 사람, 한지원(韓智源)의 손자 한명욱(韓明勖), 황삼성(黃三省)의 손자 황덕부(黃德符), 이감(李戡)의 아들 이명남(李命男)과 이명남의 아들 이경익(李慶益)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선세의 하자 때문에 좋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자, 권세가에게 아부하여 진출하였기 때문에 더욱 선류(善類)들과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이첨도 연산조(燕山朝)의 간신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라고 한다. 허경은 허잠의 아들인데 숙의(淑儀) 허씨(許氏)의 아비란 이유로 등용되었다.】
"윤충원(尹忠源)은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제수하고, 윤홍업(尹弘業)은 구례에 따라 사포(司圃)에 제수하고, 한순(韓諄)은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제수하라. 심즙(沈諿)을 사인으로, 윤인(尹訊)을 대사간으로, 정광경(鄭廣敬)을 겸보덕으로, 김호(金昈)를 겸문학으로, 유충립(柳忠立)을 응교로, 한영(韓詠)을 장령으로, 허경(許儆)을 지평으로, 곽천호(郭天豪)를 부교리로, 박자흥(朴自興)을 형조 참판으로, 이필달(李必達)을 검열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윤충원은 을사년 권간(權奸)인 윤원형의 천첩 소생인데, 이이첨이 천거하여 교수(敎授)가 되었다. 충원은 새 궁궐을 짓는데 대지(垈地)를 바치는 등 다분히 뇌물행각을 벌여 특별히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간신의 후손들이 대부분 등용되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자로는 이량(李樑)의 손자인 이충(李沖) 형제 두 사람, 정언각(鄭彦懿)의 증손인 정조(鄭造) 형제 네 사람, 한지원(韓智源)의 손자 한명욱(韓明勖), 황삼성(黃三省)의 손자 황덕부(黃德符), 이감(李戡)의 아들 이명남(李命男)과 이명남의 아들 이경익(李慶益)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선세의 하자 때문에 좋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자, 권세가에게 아부하여 진출하였기 때문에 더욱 선류(善類)들과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이첨도 연산조(燕山朝)의 간신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라고 한다. 허경은 허잠의 아들인데 숙의(淑儀) 허씨(許氏)의 아비란 이유로 등용되었다.】
8월 13일 을사
영건 도감(營建都監)이 아뢰기를, "무겸 선전관 구인후(具仁垕)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2백 10개를, 전 부사 김첨(金瞻)은 집터가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을 모두 2백 79개를, 전 첨사 이문창(李文菖)은 집터가 창의문(彰義門)과 인경궁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 계단 돌과 주춧돌 모두 1백 70개를, 전 현감 황유중(黃裕中)은 집터가 자수궁(慈壽宮) 뒤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51개를, 군자감 봉사 신순(申楯)은 집터가 명례방동(明禮坊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20개를, 유학 김유(金瑜)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75개를, 전판관 민복룡(閔伏龍)은 집터가 경덕궁 근처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1백 58개를 도감에 자진 납부하여 국가의 비용에 협조하였습니다. 석역(石役)이 거대한 이때에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진 납부한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합니다. 그리고 행 부호군 정경신(鄭景信)은 별도로 정철(正鐵) 2백 근을 마련하여 자진 납부해 왔습니다. 각별히 포상하여 공사를 협조하는 길을 열어주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모두에게 가자하라. 신순은 6품직으로 옮기고, 김유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고, 정경신에게는 매 분기마다 녹봉을 주어서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무겸 선전관 구인후(具仁垕)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2백 10개를, 전 부사 김첨(金瞻)은 집터가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을 모두 2백 79개를, 전 첨사 이문창(李文菖)은 집터가 창의문(彰義門)과 인경궁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 계단 돌과 주춧돌 모두 1백 70개를, 전 현감 황유중(黃裕中)은 집터가 자수궁(慈壽宮) 뒤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51개를, 군자감 봉사 신순(申楯)은 집터가 명례방동(明禮坊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20개를, 유학 김유(金瑜)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백 75개를, 전판관 민복룡(閔伏龍)은 집터가 경덕궁 근처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1백 58개를 도감에 자진 납부하여 국가의 비용에 협조하였습니다. 석역(石役)이 거대한 이때에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진 납부한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합니다. 그리고 행 부호군 정경신(鄭景信)은 별도로 정철(正鐵) 2백 근을 마련하여 자진 납부해 왔습니다. 각별히 포상하여 공사를 협조하는 길을 열어주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모두에게 가자하라. 신순은 6품직으로 옮기고, 김유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고, 정경신에게는 매 분기마다 녹봉을 주어서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경덕궁의 역사를 느슨하게 진행하는 듯하다. 추운 계절이 머지 않아 닥쳐올 터이니 각별히 감독을 실시하여 신속하게 역사(役事)를 마치도록 할 것을 도감에 말하라."
"경덕궁의 역사를 느슨하게 진행하는 듯하다. 추운 계절이 머지 않아 닥쳐올 터이니 각별히 감독을 실시하여 신속하게 역사(役事)를 마치도록 할 것을 도감에 말하라."
영돈녕부사 정창연이 네 번째 정사(呈辭)하니, 전교하기를, "요즘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서 나도 병든 몸을 가누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려 한다. 경은 훈구 대신인데 어찌 한결같이 병들었다는 이유로 두문불출해서야 되겠는가.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행사에 참여하라." 하였다.
"요즘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서 나도 병든 몸을 가누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려 한다. 경은 훈구 대신인데 어찌 한결같이 병들었다는 이유로 두문불출해서야 되겠는가.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행사에 참여하라."
하였다.
8월 14일 병오
전교하였다. "관복을 맞이할 때에 무슨 교서(敎書)를 반포하는 등의 일이 있는가. 진하(陳賀)하는 문제를 이미 종묘에 고한 후에 행할 것으로 마련하여 계하(啓下)하였는데, 선교관 등은 지금 무엇 때문에 서계했는가? 예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관복을 맞이할 때에 무슨 교서(敎書)를 반포하는 등의 일이 있는가. 진하(陳賀)하는 문제를 이미 종묘에 고한 후에 행할 것으로 마련하여 계하(啓下)하였는데, 선교관 등은 지금 무엇 때문에 서계했는가? 예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라."
8월 15일 정미
전교하였다. "심희수(沈喜壽)와 조존성(趙存性)을 석방하라. 기협(奇協)도 집터를 경덕궁 대내(大內)에 바쳤으니, 석방하고 직첩을 돌려주도록 하라."
"심희수(沈喜壽)와 조존성(趙存性)을 석방하라. 기협(奇協)도 집터를 경덕궁 대내(大內)에 바쳤으니, 석방하고 직첩을 돌려주도록 하라."
사헌부가 연계(連啓)하여, 예관에게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라고 한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8월 16일 무신
사헌부가 아뢰기를, "대체로 대례(大禮)를 습의(習儀)할 때에는 한 번만 해서는 부족하여 두 번, 세 번 거듭하니, 그 이유는 백관으로 하여금 당일에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그 행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습의할 때 예모관(禮貌官)의 호창(呼唱)하는 소리가 하도 작아서 뜰에 있는 백관들로 하여금 자세히 들을 수 없게 하는 바람에 한 번 엎드린 후에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해당 예모관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추고만 하라고 답하였다.
"대체로 대례(大禮)를 습의(習儀)할 때에는 한 번만 해서는 부족하여 두 번, 세 번 거듭하니, 그 이유는 백관으로 하여금 당일에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그 행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습의할 때 예모관(禮貌官)의 호창(呼唱)하는 소리가 하도 작아서 뜰에 있는 백관들로 하여금 자세히 들을 수 없게 하는 바람에 한 번 엎드린 후에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해당 예모관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추고만 하라고 답하였다.
함경 감사 권진(權縉)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비변사에 내린 비망기를 보건대, 전후하여 내리신 성상의 유시가 정성스럽고 간절하였으며 밤낮없이 진념하신 것이 일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월등하시니, 묘당의 신하들은 필시 마음을 쏟아 계획을 세워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외적을 제어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본도는 태조께서 태어나 기업을 마련하신 고향이며 열성(列聖)이 경영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근래에는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식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장차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백성들이 다 죽게 되어 남쪽이나 북쪽이나 먼데나 가까운데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텅텅 비어 있고 백성들이 거리에 떠돌고 있다 하니, 듣기에 참담합니다. 오랑캐는 우리 국경에 인접하여 우리의 헛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재해가 이미 극심하고 물괴(物怪)가 또 계속되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하여 아침에 저녁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실정입니다. 이로 보아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떻게 될 것인지 환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조정이 만일 본도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으로 간주하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조발하여 수자리를 채우고 식량을 옮겨다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한시가 다급하게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외람되게도 보잘것없는 자질로 잘못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때마침 흉년으로 모든 것이 어수선한 때를 만났으니 밤낮으로 시름에 잠길 뿐,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지금 멀리 떠나기에 앞서 구구한 생각을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방비(防備)와 수어(守禦)에 대한 대책을 내려가기 전에 병사(兵使)와 함께 자세히 품달하여 처리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는 염려가 없게 하라." 하였다.
"신이 삼가 비변사에 내린 비망기를 보건대, 전후하여 내리신 성상의 유시가 정성스럽고 간절하였으며 밤낮없이 진념하신 것이 일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월등하시니, 묘당의 신하들은 필시 마음을 쏟아 계획을 세워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외적을 제어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본도는 태조께서 태어나 기업을 마련하신 고향이며 열성(列聖)이 경영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근래에는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식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장차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백성들이 다 죽게 되어 남쪽이나 북쪽이나 먼데나 가까운데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텅텅 비어 있고 백성들이 거리에 떠돌고 있다 하니, 듣기에 참담합니다. 오랑캐는 우리 국경에 인접하여 우리의 헛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재해가 이미 극심하고 물괴(物怪)가 또 계속되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하여 아침에 저녁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실정입니다. 이로 보아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떻게 될 것인지 환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조정이 만일 본도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으로 간주하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조발하여 수자리를 채우고 식량을 옮겨다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한시가 다급하게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외람되게도 보잘것없는 자질로 잘못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때마침 흉년으로 모든 것이 어수선한 때를 만났으니 밤낮으로 시름에 잠길 뿐,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지금 멀리 떠나기에 앞서 구구한 생각을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방비(防備)와 수어(守禦)에 대한 대책을 내려가기 전에 병사(兵使)와 함께 자세히 품달하여 처리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는 염려가 없게 하라."
하였다.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든 끝에 홍수가 잇따라 밀어닥쳐서 전답이 피해를 입는 바람에 추수할 가망이 전혀 없게 되자, 도내 각읍의 백성들이 대부분 떠나고 있다고 감사 이홍주가 치계하여 알려 왔다.
박승종(朴承宗)을 우찬성으로, 유희분(柳希奮)을 병조 판서로, 홍요검(洪堯儉)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7일 기유
사헌부가 아뢰기를, "하늘의 도리가 지극히 인자하여 하루종일 격렬한 천둥을 울리게 하는 경우가 없듯이 국가에는 영원히 귀양보내거나 끝까지 버려두는 신하가 드무니, 이것이 어찌 성군(聖君)의 큰 도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죄적(罪籍)에서 삭제시키는 문제는 결코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되며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문제도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무(辨誣)를 성사시킨 경사에 대해서 국내의 혈기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하며 성상께 그 공로를 돌렸으나, 성상께서는 그 공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조종(祖宗)에게 돌렸습니다. 따라서 사당에 고하고 휘호를 올리는 일을 서둘러 실시해야 했는데, 급제 심희수(沈喜壽)는 당시 대신으로 있으면서 홀로 간사한 논의를 올리면서 스스로 임금과의 관계를 끊고 성공(聖功)을 엄폐하기에 힘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작을 삭탈한 다음 성밖으로 내쫓았더라도 그 처벌은 오히려 가볍습니다. 더구나 종묘에 고하고 난 후에 휘호를 올리지 않았으니 큰 경사를 치르는 일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사론(邪論)을 주장한 사람을 갑자기 석방시킨다면, 어떻게 황상(皇上)의 남다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으며, 조종(祖宗)의 빛나는 업적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급제 조존성(趙存性)은 중국에 갈 때에 역적의 무리를 데려다가 군관(軍官)으로 삼았고 요망스런 시(詩)를 은밀히 기록하고도 즉시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죄이겠습니까. 성밖으로 출송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석방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급제 기협(奇協)은 유영경에게 빌붙은 자이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인데 도리어 훈적(勳籍)에 참여하였으며, 강도(江都)를 맡게 되어서는 역적 이의(李㼁)를 은밀히 보호하여 다른 날 공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삼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죄이겠습니까. 그의 집이 비록 1만 칸이나 되어 그것을 새로 짓는 궁궐에 모두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놀리는 땅으로 갚아주거나 값에 상응하는 물품으로 주어도 될 일인데 어찌 이것 때문에 그의 죄를 면제시켜 주고 또 직첩(職牒)까지 내려 준단 말입니까. 비록 말에 대한 약간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집을 궁궐에 들여놓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비호해 줄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중죄인 경우이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죄를 지은 자가 모두 궁궐에 가까운 대지를 사서 스스로 죄를 모면할 계책을 삼으려 할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내에 말들이 자자하고 사람들의 노여움이 격렬하니 모두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사면을 누차 거쳤으니, 석방하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늘의 도리가 지극히 인자하여 하루종일 격렬한 천둥을 울리게 하는 경우가 없듯이 국가에는 영원히 귀양보내거나 끝까지 버려두는 신하가 드무니, 이것이 어찌 성군(聖君)의 큰 도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죄적(罪籍)에서 삭제시키는 문제는 결코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되며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문제도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무(辨誣)를 성사시킨 경사에 대해서 국내의 혈기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하며 성상께 그 공로를 돌렸으나, 성상께서는 그 공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조종(祖宗)에게 돌렸습니다. 따라서 사당에 고하고 휘호를 올리는 일을 서둘러 실시해야 했는데, 급제 심희수(沈喜壽)는 당시 대신으로 있으면서 홀로 간사한 논의를 올리면서 스스로 임금과의 관계를 끊고 성공(聖功)을 엄폐하기에 힘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작을 삭탈한 다음 성밖으로 내쫓았더라도 그 처벌은 오히려 가볍습니다. 더구나 종묘에 고하고 난 후에 휘호를 올리지 않았으니 큰 경사를 치르는 일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사론(邪論)을 주장한 사람을 갑자기 석방시킨다면, 어떻게 황상(皇上)의 남다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으며, 조종(祖宗)의 빛나는 업적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급제 조존성(趙存性)은 중국에 갈 때에 역적의 무리를 데려다가 군관(軍官)으로 삼았고 요망스런 시(詩)를 은밀히 기록하고도 즉시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죄이겠습니까. 성밖으로 출송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석방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급제 기협(奇協)은 유영경에게 빌붙은 자이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인데 도리어 훈적(勳籍)에 참여하였으며, 강도(江都)를 맡게 되어서는 역적 이의(李㼁)를 은밀히 보호하여 다른 날 공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삼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죄이겠습니까. 그의 집이 비록 1만 칸이나 되어 그것을 새로 짓는 궁궐에 모두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놀리는 땅으로 갚아주거나 값에 상응하는 물품으로 주어도 될 일인데 어찌 이것 때문에 그의 죄를 면제시켜 주고 또 직첩(職牒)까지 내려 준단 말입니까. 비록 말에 대한 약간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집을 궁궐에 들여놓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비호해 줄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중죄인 경우이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죄를 지은 자가 모두 궁궐에 가까운 대지를 사서 스스로 죄를 모면할 계책을 삼으려 할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내에 말들이 자자하고 사람들의 노여움이 격렬하니 모두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사면을 누차 거쳤으니, 석방하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10월 9일에 휘호를 올리는 행사를 그대로 시행하고 물리지 말라."
"10월 9일에 휘호를 올리는 행사를 그대로 시행하고 물리지 말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심희수(沈喜壽)는 두 조정을 거친 노신(老臣)으로 훈부(勳府)에 참여했으면서, 임금을 망각하고 역적을 옹호하여, 정경세에게 사적으로 서찰을 보내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말까지 하더니, 변무(辨誣)와 추숭(追崇)하는 문제가 거론될 때에는 끝까지 반대하여 병들어 있는 사람을 사주하고 심지어 맞지도 않는 편석(扁石)의 비유까지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상의 공을 엄폐시키고 조정의 논의를 비방하기에 조금도 기탄없이 하였으니, 형법에 비추어 보면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성밖으로 내쫓는 것도 말감(末減)시켜준 것이라 하겠는데, 무슨 석방시켜 줄 일이 있다고 큰 경사를 마치기도 전에 지레 먼저 석방시킨단 말입니까. 기협(奇協)은 유영경에게 빌붙어 그의 문하에서 노예처럼 굴었는데, 반역을 꾀한 일이 발각된 후에 사형을 용서받고 공로가 기록된 것은 참으로 정론(正論)이 펼쳐지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역적 이의가 강도에 쫓겨가 있을 때 그 지역을 지킨 신하로서 임금을 망각하고 원수를 섬겨, 풍성한 반찬과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제공하면서 오히려 게을리하였는가 염려하였으니, 왕법(王法)으로 논하자면 만 번 죽어야 마땅할 죄입니다. 한 구역의 가옥을 궁궐 안에 들여 놓았다 하더라도 보상해줄 물품이 따로 있을 터인데, 어찌 역적과 한 패거리가 되어 역적을 비호한 자에게 석방시켜 주고 직첩까지 환급시켜 주는 은전을 받게 한단 말입니까. 조존성(趙存性)은 역적의 무리를 군관으로 삼았고 요망스런 시를 기록하고도 즉시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으니, 신하된 도리상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슨 속죄시켜줄 공이 있다고 도리어 석방시켜 주는 은전을 받게 하십니까. 이 세 사람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누차 대사면을 거쳤으니 석방시키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심희수(沈喜壽)는 두 조정을 거친 노신(老臣)으로 훈부(勳府)에 참여했으면서, 임금을 망각하고 역적을 옹호하여, 정경세에게 사적으로 서찰을 보내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말까지 하더니, 변무(辨誣)와 추숭(追崇)하는 문제가 거론될 때에는 끝까지 반대하여 병들어 있는 사람을 사주하고 심지어 맞지도 않는 편석(扁石)의 비유까지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상의 공을 엄폐시키고 조정의 논의를 비방하기에 조금도 기탄없이 하였으니, 형법에 비추어 보면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성밖으로 내쫓는 것도 말감(末減)시켜준 것이라 하겠는데, 무슨 석방시켜 줄 일이 있다고 큰 경사를 마치기도 전에 지레 먼저 석방시킨단 말입니까.
기협(奇協)은 유영경에게 빌붙어 그의 문하에서 노예처럼 굴었는데, 반역을 꾀한 일이 발각된 후에 사형을 용서받고 공로가 기록된 것은 참으로 정론(正論)이 펼쳐지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역적 이의가 강도에 쫓겨가 있을 때 그 지역을 지킨 신하로서 임금을 망각하고 원수를 섬겨, 풍성한 반찬과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제공하면서 오히려 게을리하였는가 염려하였으니, 왕법(王法)으로 논하자면 만 번 죽어야 마땅할 죄입니다. 한 구역의 가옥을 궁궐 안에 들여 놓았다 하더라도 보상해줄 물품이 따로 있을 터인데, 어찌 역적과 한 패거리가 되어 역적을 비호한 자에게 석방시켜 주고 직첩까지 환급시켜 주는 은전을 받게 한단 말입니까.
조존성(趙存性)은 역적의 무리를 군관으로 삼았고 요망스런 시를 기록하고도 즉시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으니, 신하된 도리상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슨 속죄시켜줄 공이 있다고 도리어 석방시켜 주는 은전을 받게 하십니까.
이 세 사람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누차 대사면을 거쳤으니 석방시키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일 정사(政事)에는 시강원의 궐원을 모두 차출토록 하라."
"내일 정사(政事)에는 시강원의 궐원을 모두 차출토록 하라."
중국에서 돌아온 주청사 이정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질병이 쾌차된 것을 알고 나니 내 마음이 매우 위로된다. 경이 힘껏 주선해서 황명(皇命)을 받아옴으로 해서 어버이를 드러나게 하고자 했던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노고를 치하하는 은전은 보답이 되기에 부족한데, 어찌 그리 사양만 하는가. 그리고 의관(醫官)을 데리고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먼저 보내기까지 하였는가. 황공해 하지 말라는 것으로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상소를 보고 경의 질병이 쾌차된 것을 알고 나니 내 마음이 매우 위로된다. 경이 힘껏 주선해서 황명(皇命)을 받아옴으로 해서 어버이를 드러나게 하고자 했던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노고를 치하하는 은전은 보답이 되기에 부족한데, 어찌 그리 사양만 하는가. 그리고 의관(醫官)을 데리고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먼저 보내기까지 하였는가. 황공해 하지 말라는 것으로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8월 18일 경술
홍씨(洪氏)와 윤씨(尹氏)를 숙의로 삼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계하여 심희수·조존성·기협에게 내린 성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후로 양사가 매일 연계하였다.
이유록(李綏祿)을 판교로, 황익중(黃益中)을 사복시 정으로, 유효립(柳孝立)을 군자감 정으로, 김덕함(金德諴)을 군기시 정으로, 정광경(鄭廣敬)을 상의원 정으로, 이순민(李舜民)을 내섬시 정으로, 강홍중(姜弘重)을 필선으로, 박자응(朴自凝)을 직강으로, 강수(姜𢢝)를 장악원 첨정으로, 유일(柳𦨙)을 사복시 첨정으로, 김준룡(金俊龍)을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변흡(邊潝)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김홍원(金弘遠)을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삼았다. 【김홍원은 천첩의 소생이다. 그는 마음씨가 간교한데다 집안이 넉넉하였으므로 재물로 출세하였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잘 섬기고 궁금(宮禁)에까지 서로 통하더니, 이 큰 고을의 수령 자리를 얻어냈다.】
8월 19일 신해
왕이 진시에 모화관 막차에 거둥하여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관복(官服)을 맞이하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올 때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잠시 수레를 쉬면서 예조 판서 이이첨에게 묻기를, "관복은 정문(正門)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나는 협문(夾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동협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관복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대궐로 돌아오기 앞서 이이첨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관복을 인정전에다 봉안하였으니, 내가 교자(轎子)를 타는 것은 거북스럽다. 걸어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교외에 거둥하셨으니 옥체가 수고로울 뿐만 아니라 일의 체모상 걸어서 들어가는 것은 부당합니다. 불가불 교자를 타셔야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대로 교자를 타고 들어갔다. 왕이 나와서 황은(皇恩)에 감사하니, 백관들이 하례를 올렸다.
"관복은 정문(正門)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나는 협문(夾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동협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관복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대궐로 돌아오기 앞서 이이첨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관복을 인정전에다 봉안하였으니, 내가 교자(轎子)를 타는 것은 거북스럽다. 걸어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교외에 거둥하셨으니 옥체가 수고로울 뿐만 아니라 일의 체모상 걸어서 들어가는 것은 부당합니다. 불가불 교자를 타셔야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대로 교자를 타고 들어갔다. 왕이 나와서 황은(皇恩)에 감사하니, 백관들이 하례를 올렸다.
사시에 태백이 남쪽에 나타났다.
8월 20일 임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져 명령은 행해지지 않고 모든 일은 대강 처리하며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실시해보겠다는 의욕이 없으니, 자신만 편하겠다는 습성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례(大禮)를 거행할 때에 관패와 의상은 의장 제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므로 그것을 제대로 갖추어 찬란하게 하려 한 것은 보기에만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상께서 기일 전에 각별히 주의를 주어 비망기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조복(朝服) 한 벌 정도는 값이 비싸서 마련하기 어려운 물건도 아니니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어찌 마련할 길이 없었겠습니까. 어제 백관들이 뜰에 가득 모였을 때에 송산군(松山君) 김위(金渭)만은 흑의(黑衣)를 착용하고 재신(宰臣)들의 반열에 끼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으니, 오만 무례함이 막심합니다. 조복을 어찌 마련하기가 어려워서 그랬겠습니까. 이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교만 방자하며 제멋대로 하려는 마음을 가진 소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류들에 대해서 일찍이 그 실책으로 인해 혹 논계(論啓)하거나 혹 공함(公緘)을 곧 발하기도 했지만 매번 추고하는 정도에 그치고 전혀 한 사람도 파직당한 사람이 없었으니, 저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괴이하게 여길 일도 아닙니다만, 김위는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자입니다.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업신여긴 죄를 만일 단단히 다스리지 않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우선 추고만 하라고 답하였다.
"근래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져 명령은 행해지지 않고 모든 일은 대강 처리하며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실시해보겠다는 의욕이 없으니, 자신만 편하겠다는 습성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례(大禮)를 거행할 때에 관패와 의상은 의장 제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므로 그것을 제대로 갖추어 찬란하게 하려 한 것은 보기에만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상께서 기일 전에 각별히 주의를 주어 비망기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조복(朝服) 한 벌 정도는 값이 비싸서 마련하기 어려운 물건도 아니니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어찌 마련할 길이 없었겠습니까.
어제 백관들이 뜰에 가득 모였을 때에 송산군(松山君) 김위(金渭)만은 흑의(黑衣)를 착용하고 재신(宰臣)들의 반열에 끼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으니, 오만 무례함이 막심합니다. 조복을 어찌 마련하기가 어려워서 그랬겠습니까. 이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교만 방자하며 제멋대로 하려는 마음을 가진 소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류들에 대해서 일찍이 그 실책으로 인해 혹 논계(論啓)하거나 혹 공함(公緘)을 곧 발하기도 했지만 매번 추고하는 정도에 그치고 전혀 한 사람도 파직당한 사람이 없었으니, 저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괴이하게 여길 일도 아닙니다만, 김위는 그 중에서도 특히 심한 자입니다.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업신여긴 죄를 만일 단단히 다스리지 않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우선 추고만 하라고 답하였다.
홍문관 교리 이잠(李埁), 수찬 남명우(南溟羽)·채승선(蔡承先), 부수찬 서국정(徐國楨)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 죄를 주는 법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만, 죄를 용서해 주는 법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면시켜 줄 수 없는 죄가 있고 용서해 줄 수 없는 악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면시켜 줄 수 없는 경우에 사면시켜 주고 용서해 줄 수 없는데 용서해 준다면, 적용하는 법이 엄격하지 못하게 되어 죄를 범한 자가 징계로 삼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양사가 심희수·기협·조존성의 죄를 용서하라고 내린 명을 환수하라는 일로 여러날 동안 논열했는데도 성상의 비답은 한결같이 완고하게 거절만 하시니, 신들은 삼가 이 점에 대해 의혹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심희수의 임금을 망각하고 국가를 저버린 행위와 기협의 은밀히 역적이 이의(李㼁)를 보호한 행위와 조존성이 사적으로 요망스런 시(詩)를 감추어 둔 행위는, 참으로 종묘 사직과 국가에 관계되는 죄악입니다. 당초에 죄를 정할 때 너무 가벼운 형률을 적용하여 단지 관작을 삭탈하고 성밖으로 쫓아내는 정도에만 그쳤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울분이 오래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는데 석방시키라는 명을 갑자기 오늘 내리시니, 신들은 삼가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어서 이 용서해 주기 어려운 죄를 용서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성상의 공덕을 엄폐하고 스스로 임금과의 의리를 끊었는데 심희수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역적과 한패가 되고 역적을 비호하여 전후로 죄가 끝없는데 기협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요망스런 시를 은밀히 기록해 두고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는데 조존성의 죄를 사면시켜 준단 말입니까. 더구나 집터를 궁궐에 들여놓은 경우에 대해서는 보상해 줄 수 있는 법이 있는데, 직첩을 주는 은전을 어찌 이런 일을 가지고 특별히 베풀어 준단 말입니까.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흔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사면을 누차 지났는데 석방시키고 직첩을 주는 것이 어찌 안 된다는 말인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 죄를 주는 법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만, 죄를 용서해 주는 법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면시켜 줄 수 없는 죄가 있고 용서해 줄 수 없는 악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면시켜 줄 수 없는 경우에 사면시켜 주고 용서해 줄 수 없는데 용서해 준다면, 적용하는 법이 엄격하지 못하게 되어 죄를 범한 자가 징계로 삼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양사가 심희수·기협·조존성의 죄를 용서하라고 내린 명을 환수하라는 일로 여러날 동안 논열했는데도 성상의 비답은 한결같이 완고하게 거절만 하시니, 신들은 삼가 이 점에 대해 의혹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심희수의 임금을 망각하고 국가를 저버린 행위와 기협의 은밀히 역적이 이의(李㼁)를 보호한 행위와 조존성이 사적으로 요망스런 시(詩)를 감추어 둔 행위는, 참으로 종묘 사직과 국가에 관계되는 죄악입니다. 당초에 죄를 정할 때 너무 가벼운 형률을 적용하여 단지 관작을 삭탈하고 성밖으로 쫓아내는 정도에만 그쳤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울분이 오래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는데 석방시키라는 명을 갑자기 오늘 내리시니, 신들은 삼가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어서 이 용서해 주기 어려운 죄를 용서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성상의 공덕을 엄폐하고 스스로 임금과의 의리를 끊었는데 심희수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역적과 한패가 되고 역적을 비호하여 전후로 죄가 끝없는데 기협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요망스런 시를 은밀히 기록해 두고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는데 조존성의 죄를 사면시켜 준단 말입니까. 더구나 집터를 궁궐에 들여놓은 경우에 대해서는 보상해 줄 수 있는 법이 있는데, 직첩을 주는 은전을 어찌 이런 일을 가지고 특별히 베풀어 준단 말입니까.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흔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사면을 누차 지났는데 석방시키고 직첩을 주는 것이 어찌 안 된다는 말인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사시에 태백이 남쪽에 나타났다.
8월 21일 계축
전교하였다. "모후(母后)의 관복을 삼가 내리셨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의 그지없는 크나큰 은혜이다. 은혜에 사례하는 방물(方物)을 잘 가려서 봉송(封送)해야 할 것이니, 해조에 말해서 각별히 잘 거행하도록 하라."
"모후(母后)의 관복을 삼가 내리셨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의 그지없는 크나큰 은혜이다. 은혜에 사례하는 방물(方物)을 잘 가려서 봉송(封送)해야 할 것이니, 해조에 말해서 각별히 잘 거행하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북쪽 변방의 방비문제가 더욱 긴요한데, 권반(權盼)은 강직하고 명민하며 군사에 관한 일을 잘 알고 있으니 권반을 함경도 순검사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북쪽 변방의 방비문제가 더욱 긴요한데, 권반(權盼)은 강직하고 명민하며 군사에 관한 일을 잘 알고 있으니 권반을 함경도 순검사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8월 22일 갑인
북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아뢰어, 군관(軍官) 6명, 포수·살수 각 2명과 군기(軍器)에 쓰이는 어교(魚膠)와 활시위·화살대 등의 물건을 청하니, 따랐다.
8월 23일 을묘
전교하였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세초연(洗草宴)의 행사를 내년 봄에 다시 날을 받아 거행하도록 하라."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세초연(洗草宴)의 행사를 내년 봄에 다시 날을 받아 거행하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날씨는 추워지고 있는데 죄인이 오랫동안 적체되어 있다. 영상(領相)더러 속히 조리하고 출사해서 옥사(獄事)를 완결짓도록 하라."
"날씨는 추워지고 있는데 죄인이 오랫동안 적체되어 있다. 영상(領相)더러 속히 조리하고 출사해서 옥사(獄事)를 완결짓도록 하라."
함경도에서는 8월 4일에 서북쪽에서부터 광풍(狂風)과 우박이 몰아쳐 동남쪽으로 지나갔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다. 별안간 1백여 리에 내리다가 얼마 후에 그쳤는데, 산야의 풀과 나무들의 가지와 잎사귀가 다 꺾였으며, 곡식들도 손상을 입어서 낱알갱이 하나도 수확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박을 맞은 민가의 병아리가 다 죽었다. 이 사실을 감사 유공량(柳公亮)이 치계(馳啓)하여 알려 왔다.
사시에 태백이 남쪽에 나타났다.
8월 24일 병진
사헌부가 아뢰기를,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은 대단히 방대한 규모여서 완공을 볼 기약이 없습니다. 부득이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겨우 두서를 잡았습니다만, 목재나 석재 같은 잡물을 만일 잇대기가 어려우면 유사(有司)가 생각을 다 짜내어 별도로 과목을 세워서 물자가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무리들이 국가에 일이 많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망령스레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사로이 물품을 바치곤 합니다. 종실의 감(監)이나 령(令)들이 돌덩이만 약간 헌납하여도 번번이 가물(價物)을 보상으로 주고 또 자급까지 올려 주어 심지어는 도정(都正)까지 제수하니, 도정은 곧 정 3품의 당상직(堂上職)입니다. 1년에 네 분기 녹을 받는 것도 꽤 많은 녹봉인데 한때 석재(石材)를 헌납해서 평생동안 후한 녹을 받아 편하게 살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행운을 잡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도 끝도 없는 국가의 경비로 치면 이것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대개 전세(田稅)로 거두어 들이는 1년 수입은 고정적으로 10만 석을 밑도는데 후한 녹을 받는 자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지탱해 갈 수 있는 방도이겠습니까. 비단 이해가 확연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일의 원칙으로 보아도 전혀 터무니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을 일체 허락하지 말고, 일찍이 도정직에 제수되었던 자들에게서도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 그리고 대지를 헌납했거나 가옥을 헌납했거나 한 자들에 대하여 문벌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따지지 않고 동반직(東班職)을 제수하고 있는데, 문벌은 비록 사족일지라도 그 사람됨이 용렬하고 그 행실이 선비같지 않으면 결코 관직을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전후하여 관직을 제수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해조에게 일일이 조사하여 도태시키게 하소서. 가령 사람의 됨됨이는 일반 집사(執事)에나 어울리는데 집터를 헌납했다는 이유로 의관의 반열에 들어서게 한다면, 비단 동료들만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아전들까지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터인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임무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명기(名器)가 혼탁해지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심지어 염치라고 전혀 없는 자들은 후하게 받은 값의 절반으로 궁궐과 가까운 터를 사서 감투쓸 계기로 삼고 있으니, 당당한 성상의 조정에서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일찍이 관직에 제수되었던 자들을 아울러 도태시키라고 명하여 벼슬길을 맑히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은 대단히 방대한 규모여서 완공을 볼 기약이 없습니다. 부득이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겨우 두서를 잡았습니다만, 목재나 석재 같은 잡물을 만일 잇대기가 어려우면 유사(有司)가 생각을 다 짜내어 별도로 과목을 세워서 물자가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무리들이 국가에 일이 많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망령스레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사로이 물품을 바치곤 합니다. 종실의 감(監)이나 령(令)들이 돌덩이만 약간 헌납하여도 번번이 가물(價物)을 보상으로 주고 또 자급까지 올려 주어 심지어는 도정(都正)까지 제수하니, 도정은 곧 정 3품의 당상직(堂上職)입니다. 1년에 네 분기 녹을 받는 것도 꽤 많은 녹봉인데 한때 석재(石材)를 헌납해서 평생동안 후한 녹을 받아 편하게 살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행운을 잡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도 끝도 없는 국가의 경비로 치면 이것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대개 전세(田稅)로 거두어 들이는 1년 수입은 고정적으로 10만 석을 밑도는데 후한 녹을 받는 자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지탱해 갈 수 있는 방도이겠습니까. 비단 이해가 확연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일의 원칙으로 보아도 전혀 터무니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을 일체 허락하지 말고, 일찍이 도정직에 제수되었던 자들에게서도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
그리고 대지를 헌납했거나 가옥을 헌납했거나 한 자들에 대하여 문벌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따지지 않고 동반직(東班職)을 제수하고 있는데, 문벌은 비록 사족일지라도 그 사람됨이 용렬하고 그 행실이 선비같지 않으면 결코 관직을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전후하여 관직을 제수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해조에게 일일이 조사하여 도태시키게 하소서. 가령 사람의 됨됨이는 일반 집사(執事)에나 어울리는데 집터를 헌납했다는 이유로 의관의 반열에 들어서게 한다면, 비단 동료들만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아전들까지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터인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임무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명기(名器)가 혼탁해지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심지어 염치라고 전혀 없는 자들은 후하게 받은 값의 절반으로 궁궐과 가까운 터를 사서 감투쓸 계기로 삼고 있으니, 당당한 성상의 조정에서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일찍이 관직에 제수되었던 자들을 아울러 도태시키라고 명하여 벼슬길을 맑히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8월 25일 정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함경 감사 권진(權縉)이 아뢴 내용을 보니, 그가 열거한 내용들은 모두 북로(北路)의 현재 다급한 일들입니다. 권진이 이런 때에 임무를 맡았으니 우려하는 마음이 필시 일반 사람들보다 배나 될 것입니다. 군사를 조발하여 수자리를 늘리고 군량을 옮겨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대책과 탐관오리의 침해, 유민을 쇄환하는 일 등을 언급하고 있는 각항의 절목에는 심오한 안목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계사의 내용에 따라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착실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탐관오리에 관한 문제는, 혼탁한 세상의 도의와 인심을 맑게 하는 것이 감사의 직임이니, 그곳에 도착한 후에 출척을 엄격하게 밝혀 군민(軍民)을 못살게 구는 무리들로 하여금 멀리서 모습만 보고도 떠나게 해서, 한 지역의 백성들을 소생하게 하고 조종이 태어난 고장을 보존하게 한다면, 진실로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북도에는 염려스러운 일들이 많으니 각별히 신경을 써서 조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함경 감사 권진(權縉)이 아뢴 내용을 보니, 그가 열거한 내용들은 모두 북로(北路)의 현재 다급한 일들입니다. 권진이 이런 때에 임무를 맡았으니 우려하는 마음이 필시 일반 사람들보다 배나 될 것입니다. 군사를 조발하여 수자리를 늘리고 군량을 옮겨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대책과 탐관오리의 침해, 유민을 쇄환하는 일 등을 언급하고 있는 각항의 절목에는 심오한 안목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계사의 내용에 따라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착실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탐관오리에 관한 문제는, 혼탁한 세상의 도의와 인심을 맑게 하는 것이 감사의 직임이니, 그곳에 도착한 후에 출척을 엄격하게 밝혀 군민(軍民)을 못살게 구는 무리들로 하여금 멀리서 모습만 보고도 떠나게 해서, 한 지역의 백성들을 소생하게 하고 조종이 태어난 고장을 보존하게 한다면, 진실로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북도에는 염려스러운 일들이 많으니 각별히 신경을 써서 조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관작(官爵)에는 직질의 고하가 있으며 격등(隔等)인 경우에는 그 구별이 더욱 엄격합니다. 이것이 만일 문란해진다면 여마(輿馬)와 복식(服飾)의 현저한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서장관은 의레 당하관에서 나왔으므로, 그전부터 중국에 가는 사신들은 교자를 타고 서장관은 말을 탔으니, 어찌 분수를 넘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 사과(司果) 정홍원(鄭弘遠),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 신의립(辛義立)은 중국에 갈 때에 버젓이 교자를 타고 가서 전혀 거리낌없이 굴어 중국 사람들이 상하를 구별하지 못해 의아하게 여기며 비웃었으니, 그 모욕이 우리 나라에 미쳤습니다. 이와 같이 참람하고 망령스런 행동을 한 죄에 대해서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관작(官爵)에는 직질의 고하가 있으며 격등(隔等)인 경우에는 그 구별이 더욱 엄격합니다. 이것이 만일 문란해진다면 여마(輿馬)와 복식(服飾)의 현저한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서장관은 의레 당하관에서 나왔으므로, 그전부터 중국에 가는 사신들은 교자를 타고 서장관은 말을 탔으니, 어찌 분수를 넘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 사과(司果) 정홍원(鄭弘遠),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 신의립(辛義立)은 중국에 갈 때에 버젓이 교자를 타고 가서 전혀 거리낌없이 굴어 중국 사람들이 상하를 구별하지 못해 의아하게 여기며 비웃었으니, 그 모욕이 우리 나라에 미쳤습니다. 이와 같이 참람하고 망령스런 행동을 한 죄에 대해서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8월 26일 무오
전교하였다. "실록청은 선온(宣醞)에 참석한 뒤 제조와 낭청을 낱낱이 서계하라. 30일에는 거둥이 있을 것이니, 9월 4일에 선온을 하라."
"실록청은 선온(宣醞)에 참석한 뒤 제조와 낭청을 낱낱이 서계하라. 30일에는 거둥이 있을 것이니, 9월 4일에 선온을 하라."
전교하였다. "비가 이렇게 내리고는 있지만 절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내일 배표(拜表)하는 일을 또 물릴 수는 없다. 하루 종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상황에 따라 권정례로 거행하도록 하라."
"비가 이렇게 내리고는 있지만 절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내일 배표(拜表)하는 일을 또 물릴 수는 없다. 하루 종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상황에 따라 권정례로 거행하도록 하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비밀리에 내리신 비망기를 보건대, 인경궁(仁慶宮)에 가서 보고 그대로 유숙하시겠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대단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쉽사리 거둥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백접(白蝶)과 태백(太白)의 이변이 거듭 발생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는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를 해야지 거둥할 때는 더욱 아닙니다. 낮이라고 해도 안 될 일인데 가서 밤까지 지내신단 말입니까. 이번에 만일 가서 밤을 지내신다면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까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일의 원칙으로 헤아려 보아도 심히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밤을 지내시겠다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삼가 비밀리에 내리신 비망기를 보건대, 인경궁(仁慶宮)에 가서 보고 그대로 유숙하시겠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대단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쉽사리 거둥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백접(白蝶)과 태백(太白)의 이변이 거듭 발생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는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를 해야지 거둥할 때는 더욱 아닙니다. 낮이라고 해도 안 될 일인데 가서 밤까지 지내신단 말입니까. 이번에 만일 가서 밤을 지내신다면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까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일의 원칙으로 헤아려 보아도 심히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밤을 지내시겠다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8월 27일 기미
사신이 가는 길에 배신(陪臣)의 관복 제도(冠服制度)에 대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올렸다.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전례(典禮)에 따라 번사(蕃使)의 장복(章服)을 바로잡을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예조 장계에 의거하건대,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경의 한계야 있지만 실제로는 내외의 구별이 없으므로 문명의 교화를 유독 많이 받았고 관상(冠裳)의 제도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열조(列祖)의 보살핌과 성황(聖皇)의 총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우리 나라 배신(陪臣)이 일로 인하여 중국에 가서 매번 조천궁(朝天宮)에서 의식을 연습할 때와 반열을 따라 예식에 참가할 때에 더그레와 깃이 둥근 검은 옷 등을 착용하고 참석하여 반열에 나아가는데, 법전을 상고해보면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배신이 어느 때에 예절과 법도를 버리고 임시방편으로 편리함만 추구하여 예에 맞지도 않는 이런 의복을 착용했는지 모르겠으며, 그후로 계속 잘못된 풍습을 답습하면서 그것을 살필 줄을 모르고 잠자코 따르는 습성에 젖어 중국의 교화 밖으로 자처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망령스런 그들이 전후하여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 할 줄을 몰랐던 것은 책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조의 예부에서는 오전(五典)을 두텁게 펴서 만국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나라 배신(陪臣)의 잘못된 예절에 대해서 그 잘못을 그대로 두고서 일찍이 바로잡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궁벽진 외국이라고 핑계하여 비루하게 여기고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대명집례(大明集禮)》의 번사조공의(蕃使朝貢儀)에는 「주변 국가의 사신이 봉천전(奉天殿)에서 조현(朝見)할 때에 품계에 의한 조복을 입고 예를 행한다.」 하였고, 또 번사매세상공의(蕃使每歲常貢儀)의 주석에서는 「사신과 백관은 각각 조복을 갖추고서 자리에 나아간다.」 하였고, 또 번사폐사의(蕃使陛辭儀)의 주석에는 「번사는 조복을 입고 들어와서 대궐의 서남쪽에 서 있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번사가 입공(入貢)·상조(常朝)·폐사(陛辭) 등의 예에 모두 조복을 착용하고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집례(集禮)》란 책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절충한 것이고 세조 숙황제(世祖肅皇帝)께서 간행하여 반포한 것으로 어제 서문(御製序文)에 「진실로 만세의 법이 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널리 선포해서 우리 황조의 법제를 드러나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고황제가 백왕의 법전을 참작하여 한 시대의 회전(會典)을 편수하셨고 숙황제께서는 물려주신 법을 크게 드러내서 중외에 반포하셨으니, 전성과 후성이 법을 세우고 기강을 세워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물을 법에 맞게 하신 뜻이, 이루어 놓은 업적위에 우뚝하고 그 문장도 빛납니다. 근자에 중국에 가는 배신들이 황조(皇朝)와 문화가 같은 성문법을 폐기하고 법에 어긋난 하국(下國)의 잘못된 유적을 답습하여 그대로 세월만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놀랍기만 합니다. 끝까지 원상복구하지 못한 실책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어쩔 수가 없지만, 만일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았다면 신속하게 개정해서 정당한 데로 귀결되게 해야지, 어찌 잠시라도 태만히 해서 그전 잘못을 더 무겁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옥(玉)을 받드는 예절에서 높낮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도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바라볼 때 허리띠를 주시하지 않아도 경계를 받는데, 더구나 예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품위를 잃게 되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상의 사연을 갖추어 가지고 자문으로 예부에 청하기를 「이제부터 앞으로는 본국에서 중국에 가는 배신들에게는 《집례(集禮)》의 조례에 의하여 조복을 입고 반열을 따르게 해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게 해준다면 좀더 나은 수준으로 발돋움해 가려는 소원을 이루게 되어 진실로 유익할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장계에 의거하여 당직이 참조하건대, 우리 나라가 비록 멀리 동떨어져 있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마는, 대체로 모든 문화와 제도는 다 황조(皇朝)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홍무 2년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대훈(大訓)을 소상하게 게시하여 배신의 조복입는 의식까지 정하셨고, 계속해서 가정(嘉靖) 9년에는 성황제께서 깊이 보관해 두었던 책을 널리 간행하여 배포하게 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배신들도 모두 조복을 착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가 공경히 받들어 지금까지 2백 년 동안이나 어기지 않고 시행해 왔습니다. 대체로 절일(節日)·망궐(望闕)·배표(拜表)·영조(迎詔) 등의 예절에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다 조복을 갖추어 입고 삼가 일을 진행하는데, 유독 이 중국에 가는 배신(陪臣)들만은 회동할 때 단지 외국의 사조(私朝)에서만 조복을 입고 천자의 공정(公庭)에서는 입지 않으니 어찌 예의가 심히 문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조장(朝章)에 속하고 의의가 국헌(國憲)에 관련되니, 예조가 조사해서 계청한 것은 과연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행정부의 책령으로 지금 가는 배신들이 중국에 도착하는 대로 귀부(貴部)에 품달해서 조복을 착용하고서 예를 연습하고 예를 시행해서, 혹시라도 그전처럼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지 않도록 함은 물론, 자문을 갖추어 보내오니, 귀부는 앞의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고 《집례(集禮)》에 상세하게 정해 놓은 성대한 제도에 비추어서, 소방의 배신(陪臣)이 조복을 입고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런 일이 없겠습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전례(典禮)에 따라 번사(蕃使)의 장복(章服)을 바로잡을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예조 장계에 의거하건대,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경의 한계야 있지만 실제로는 내외의 구별이 없으므로 문명의 교화를 유독 많이 받았고 관상(冠裳)의 제도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열조(列祖)의 보살핌과 성황(聖皇)의 총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우리 나라 배신(陪臣)이 일로 인하여 중국에 가서 매번 조천궁(朝天宮)에서 의식을 연습할 때와 반열을 따라 예식에 참가할 때에 더그레와 깃이 둥근 검은 옷 등을 착용하고 참석하여 반열에 나아가는데, 법전을 상고해보면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배신이 어느 때에 예절과 법도를 버리고 임시방편으로 편리함만 추구하여 예에 맞지도 않는 이런 의복을 착용했는지 모르겠으며, 그후로 계속 잘못된 풍습을 답습하면서 그것을 살필 줄을 모르고 잠자코 따르는 습성에 젖어 중국의 교화 밖으로 자처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망령스런 그들이 전후하여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 할 줄을 몰랐던 것은 책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조의 예부에서는 오전(五典)을 두텁게 펴서 만국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나라 배신(陪臣)의 잘못된 예절에 대해서 그 잘못을 그대로 두고서 일찍이 바로잡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궁벽진 외국이라고 핑계하여 비루하게 여기고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대명집례(大明集禮)》의 번사조공의(蕃使朝貢儀)에는 「주변 국가의 사신이 봉천전(奉天殿)에서 조현(朝見)할 때에 품계에 의한 조복을 입고 예를 행한다.」 하였고, 또 번사매세상공의(蕃使每歲常貢儀)의 주석에서는 「사신과 백관은 각각 조복을 갖추고서 자리에 나아간다.」 하였고, 또 번사폐사의(蕃使陛辭儀)의 주석에는 「번사는 조복을 입고 들어와서 대궐의 서남쪽에 서 있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번사가 입공(入貢)·상조(常朝)·폐사(陛辭) 등의 예에 모두 조복을 착용하고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집례(集禮)》란 책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절충한 것이고 세조 숙황제(世祖肅皇帝)께서 간행하여 반포한 것으로 어제 서문(御製序文)에 「진실로 만세의 법이 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널리 선포해서 우리 황조의 법제를 드러나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고황제가 백왕의 법전을 참작하여 한 시대의 회전(會典)을 편수하셨고 숙황제께서는 물려주신 법을 크게 드러내서 중외에 반포하셨으니, 전성과 후성이 법을 세우고 기강을 세워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물을 법에 맞게 하신 뜻이, 이루어 놓은 업적위에 우뚝하고 그 문장도 빛납니다. 근자에 중국에 가는 배신들이 황조(皇朝)와 문화가 같은 성문법을 폐기하고 법에 어긋난 하국(下國)의 잘못된 유적을 답습하여 그대로 세월만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놀랍기만 합니다. 끝까지 원상복구하지 못한 실책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어쩔 수가 없지만, 만일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았다면 신속하게 개정해서 정당한 데로 귀결되게 해야지, 어찌 잠시라도 태만히 해서 그전 잘못을 더 무겁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옥(玉)을 받드는 예절에서 높낮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도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바라볼 때 허리띠를 주시하지 않아도 경계를 받는데, 더구나 예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품위를 잃게 되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상의 사연을 갖추어 가지고 자문으로 예부에 청하기를 「이제부터 앞으로는 본국에서 중국에 가는 배신들에게는 《집례(集禮)》의 조례에 의하여 조복을 입고 반열을 따르게 해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게 해준다면 좀더 나은 수준으로 발돋움해 가려는 소원을 이루게 되어 진실로 유익할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장계에 의거하여 당직이 참조하건대, 우리 나라가 비록 멀리 동떨어져 있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마는, 대체로 모든 문화와 제도는 다 황조(皇朝)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홍무 2년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대훈(大訓)을 소상하게 게시하여 배신의 조복입는 의식까지 정하셨고, 계속해서 가정(嘉靖) 9년에는 성황제께서 깊이 보관해 두었던 책을 널리 간행하여 배포하게 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배신들도 모두 조복을 착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가 공경히 받들어 지금까지 2백 년 동안이나 어기지 않고 시행해 왔습니다. 대체로 절일(節日)·망궐(望闕)·배표(拜表)·영조(迎詔) 등의 예절에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다 조복을 갖추어 입고 삼가 일을 진행하는데, 유독 이 중국에 가는 배신(陪臣)들만은 회동할 때 단지 외국의 사조(私朝)에서만 조복을 입고 천자의 공정(公庭)에서는 입지 않으니 어찌 예의가 심히 문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조장(朝章)에 속하고 의의가 국헌(國憲)에 관련되니, 예조가 조사해서 계청한 것은 과연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행정부의 책령으로 지금 가는 배신들이 중국에 도착하는 대로 귀부(貴部)에 품달해서 조복을 착용하고서 예를 연습하고 예를 시행해서, 혹시라도 그전처럼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지 않도록 함은 물론, 자문을 갖추어 보내오니, 귀부는 앞의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고 《집례(集禮)》에 상세하게 정해 놓은 성대한 제도에 비추어서, 소방의 배신(陪臣)이 조복을 입고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런 일이 없겠습니다."
전교하였다. "이 관복(官服)을 하사해 주신 것은 전에 없었던 큰 경사이다. 태묘에 직접 고하는 예를 이미 실시하였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문묘(文廟)에도 전알(展謁)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20일 이후로 좋은 날을 택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휘호를 올리는 문제는 10월 20일로 다시 잡아 거행할 것을 해조에 말하라. 그리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각도에 급히 하유하게 하라."
"이 관복(官服)을 하사해 주신 것은 전에 없었던 큰 경사이다. 태묘에 직접 고하는 예를 이미 실시하였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문묘(文廟)에도 전알(展謁)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20일 이후로 좋은 날을 택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휘호를 올리는 문제는 10월 20일로 다시 잡아 거행할 것을 해조에 말하라. 그리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각도에 급히 하유하게 하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임금의 행동 하나하나를 좌우에 있는 사관이 모두 기록하는데, 기록한 사실이 모범적이지 못한 내용이라면 이는 여간 잘못이 아닙니다. 이달 30일에 경덕궁에, 다음달 3일에는 인경궁에 거둥하셔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시겠다는 명을 내리셨는데,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소고(召誥)와 낙고(洛誥)를 살펴보아도 주공(周公)이 와서 집터를 보았다는 글은 있지만 성왕(成王)이 직접 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후세의 역대 왕들에게서도 임금이 직접 대궐 터를 둘러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에 없던 이변과 참혹한 재앙이 지금 한창 극심하니, 어찌 임금이 거둥할 때이겠습니까. 더구나 하룻밤을 지내는 문제는 더욱 타당치 않습니다. 비록 먼 곳에 있는 능을 참배하더라도 반드시 새벽에 출발하였다가 저녁이면 돌아오곤 하는데, 궁궐 터를 보는 문제는 원래 근거로 삼을 만한 것도 없는데 만약 또 밤까지 지낸다면 어찌 너무나 근거할 데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덕궁과 인경궁에 몸소 거둥하시겠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몸소 거둥하여 궁궐 터를 둘러보는 것은 조종(祖宗)들이 실시해온 구례이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자고 오는 문제는 헤아려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의 행동 하나하나를 좌우에 있는 사관이 모두 기록하는데, 기록한 사실이 모범적이지 못한 내용이라면 이는 여간 잘못이 아닙니다. 이달 30일에 경덕궁에, 다음달 3일에는 인경궁에 거둥하셔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시겠다는 명을 내리셨는데,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소고(召誥)와 낙고(洛誥)를 살펴보아도 주공(周公)이 와서 집터를 보았다는 글은 있지만 성왕(成王)이 직접 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후세의 역대 왕들에게서도 임금이 직접 대궐 터를 둘러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에 없던 이변과 참혹한 재앙이 지금 한창 극심하니, 어찌 임금이 거둥할 때이겠습니까. 더구나 하룻밤을 지내는 문제는 더욱 타당치 않습니다. 비록 먼 곳에 있는 능을 참배하더라도 반드시 새벽에 출발하였다가 저녁이면 돌아오곤 하는데, 궁궐 터를 보는 문제는 원래 근거로 삼을 만한 것도 없는데 만약 또 밤까지 지낸다면 어찌 너무나 근거할 데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덕궁과 인경궁에 몸소 거둥하시겠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몸소 거둥하여 궁궐 터를 둘러보는 것은 조종(祖宗)들이 실시해온 구례이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자고 오는 문제는 헤아려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28일 경신
실록청(實錄廳)이 아뢰기를, "《실록(實錄)》을 이미 인출하여 정장까지 하였습니다. 아직 나누어 보관하지는 못했지만 세초(洗草)를 먼저 거행하였던 전례가 있습니다. 만약 명년 봄까지 기다렸다가 하게 되면 시일이 너무 늦어지게 되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오는 9월 4일 선온(宣醞)을 실시할 때 세초연까지 실시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음달에는 잇따라 거둥할 일이 있다. 국가에 일이 많으니 세초연은 내년 봄에 날을 받아 실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니, 앞서 내린 분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실록(實錄)》을 이미 인출하여 정장까지 하였습니다. 아직 나누어 보관하지는 못했지만 세초(洗草)를 먼저 거행하였던 전례가 있습니다. 만약 명년 봄까지 기다렸다가 하게 되면 시일이 너무 늦어지게 되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오는 9월 4일 선온(宣醞)을 실시할 때 세초연까지 실시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음달에는 잇따라 거둥할 일이 있다. 국가에 일이 많으니 세초연은 내년 봄에 날을 받아 실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니, 앞서 내린 분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연계하여, 경덕궁과 인경궁에 거둥하는 문제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두 궁궐의 공사는 사실 변을 만나 부득이한 일에서 나온 것이지 내가 좋아서 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 짓는 궁궐 터와 공사 규모 등을 직접 가서 살펴보아야만 미진한 일이 없을 것이다. 옛날 조종조에도 궁궐을 건립할 때에는 열성들이 모두 일찍이 직접 거둥하신 예가 있었으니,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밤을 지내고 올 지의 여부는 그때 가서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지금 이 두 궁궐의 공사는 사실 변을 만나 부득이한 일에서 나온 것이지 내가 좋아서 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 짓는 궁궐 터와 공사 규모 등을 직접 가서 살펴보아야만 미진한 일이 없을 것이다. 옛날 조종조에도 궁궐을 건립할 때에는 열성들이 모두 일찍이 직접 거둥하신 예가 있었으니,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밤을 지내고 올 지의 여부는 그때 가서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사간원이 연계하여, 두 궁궐에 거둥하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인경궁(仁慶宮)을 건립하는 곳은 내외의 형세를 하루 안에 두루 살펴볼 수가 없을 듯하고, 더구나 그곳에는 잘 만한 방이 있으니, 하룻밤쯤 자는 것은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뢰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처리하겠다. 다만 계사 중에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거듭 발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경계를 삼아 이런 때에 거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애써 진달하였는데, 그 뜻은 좋다. 이번에 실시하는 두 궁궐의 공사는 실로 변고를 만나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친히 가서 살펴보겠다는 것도 놀이삼아 가려는 것이 아니니, 어찌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한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조금도 불가한 일이 아니다. 변이(變異)가 저와 같아서 경계를 엄하게 해야 하니, 휘호를 올리는 대례를 경외심을 가져야할 날에 거행하기는 결코 어려울 듯하다. 나의 견해가 이와 같으므로 언급하였다." 하였다.
"인경궁(仁慶宮)을 건립하는 곳은 내외의 형세를 하루 안에 두루 살펴볼 수가 없을 듯하고, 더구나 그곳에는 잘 만한 방이 있으니, 하룻밤쯤 자는 것은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뢰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처리하겠다. 다만 계사 중에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거듭 발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경계를 삼아 이런 때에 거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애써 진달하였는데, 그 뜻은 좋다. 이번에 실시하는 두 궁궐의 공사는 실로 변고를 만나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친히 가서 살펴보겠다는 것도 놀이삼아 가려는 것이 아니니, 어찌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한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조금도 불가한 일이 아니다. 변이(變異)가 저와 같아서 경계를 엄하게 해야 하니, 휘호를 올리는 대례를 경외심을 가져야할 날에 거행하기는 결코 어려울 듯하다. 나의 견해가 이와 같으므로 언급하였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일 오시(午時)에 함경 감사와 병사를 불러들여 인견한 후에 내려가게 하라."
"내일 오시(午時)에 함경 감사와 병사를 불러들여 인견한 후에 내려가게 하라."
8월 29일 신유
오시에 왕이 선정전에 나아가서 함경 감사 권진(權縉)과 북병사 이수일(李守一)을 인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북쪽 변방의 일 중에 염려되는 것이 많다. 병력도 부족하고 인심도 흉흉하여 나는 밤낮으로 우려하고 있으니, 경들이 잘 상의해서 처리하여 북쪽을 염려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풀어달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소신이 그전에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상께서는 이미 보잘것없는 신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이번에 이 중임을 맡게 되었으니, 마치 모기가 태산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막은 전에 구황 문제(救荒問題)와 유민을 쇄환하는 문제를 아뢰는 계사 중에 대략 진달하였으니, 상께서는 필시 통찰하고 계실 것입니다. 방어하는 등의 일은 신이 그곳에 도착한 다음 요리하여 처리하겠습니다. 10년 전에 인재가 부족한 나머지 제가 어사가 되어 본도에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북쪽 변방의 일을 대강은 압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형세는 전과는 다릅니다. 금년에는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군량미도 바닥이 났습니다. 이수일은 노련한 장수로 세 번이나 본도의 병사가 되었으니 군민(軍民)의 실정과 토지의 형세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며 그가 듣고 본 것도 다른 장수들과는 다를 것이니, 신들이 내려간 뒤에 한마음으로 협력하겠습니다마는, 신같이 어리석은 자가 아무래도 책임완수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묘당의 대신들이 모두 천거했기 때문에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니, 경은 마음을 다하여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수일에게 이르기를, "경이 북로의 일을 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아는가?"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소신이 재차 병사가 된 지도 이미 7년이 지났습니다. 근래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오늘날의 형세가 그전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육진(六鎭)에 번호(藩胡)가 살고 있을 때는 적의 왕래를 사실대로 알려 주었는데, 노추(老酋)가 일단 번호를 철수시키고 난 후부터는 적들의 출입을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온성(穩城) 근처 번호인 인필(仁弼)의 무리들은 믿을 만하다는 것을 신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밖의 번호들은 욕심이 많기 때문에 선물을 주게 되면 그들은 필시 호인(胡人)들의 실정을 성심으로 알려 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줄 선물을 조정에서 마련하여 내려 보내 주소서. 근래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대부분 유랑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진작부터 곡식을 운반해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백성들을 구제하고는 있습니다만, 수령과 변장을 각별히 잘 뽑아 보내야만 한 지방의 백성들의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인심이 좋지 않으니 우선적으로 기강을 바로 세운 뒤에라야만 국가의 호령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진이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흉년은 근고에 없을 만큼 심각하여 열읍에서 바치는 환자곡과 조세를 전혀 거두어 들일 수가 없고 백성들도 굶주림에 시달려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 있는데, 속수무책으로 구제하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하니, 듣기에도 한심한 일입니다. 북방은 춥고 토지가 척박한 지역이므로 풍년일지라도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개가죽을 입거나 말언치를 두르기도 하고 풀 열매나 겨를 먹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다른 지역으로 떠난 후에 본토로 돌아갈 뜻이 없기 때문에 유랑민들의 짐보따리가 길에 이어져 필시 도내가 텅텅 비고 난 후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어찌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듣기에는 금년 농사가 조금은 여물었다고 하더니, 이달 초에 함흥(咸興) 이남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이 심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갑산 등처에는 생계가 아득했는데, 이번에 또 우박의 재해를 당하여 들에는 수확할 것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며 변방 수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전에는 구황 정책을 너무 늦게 실시하여 전적으로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영남과 영동 일대에서 곡식을 운반할 대책이 하루가 급한데, 설사 두 곳 감사에게 간곡히 하유한다 하더라도 지금같이 일이 많은 때에 다른 도를 지원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착실하게 거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위풍있게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어사로 차출하여 영남과 영동 등처에 내려보내서 안변(安邊)으로 서둘러 운반하게 하고, 안변 이북의 지역은 마상선(馬尙船)으로 운반해 주어서 다 죽어가는 북로의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한다면 이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구황 어사를 해조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권진에게 묻기를, "구황 어사를 본도에 보내야 하는가?"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본도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습니다. 경상도와 강원도에 보내서 감독하여 운반하게 해야 합니다. 신이 드릴 말씀은 이렇습니다. 본도에는 그전부터 본래 사대부가 없고 단지 우직하고 성질 사나운 백성들만 있어서 일을 논의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나간 일로 보면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열읍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고 임진년(壬辰年) 변란 때에도 왕자와 재신을 결박하여 적들에게 넘겨 주었으니, 인심이 패악스럽다는 것은 이것을 갖고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에서 그전부터 북쪽의 백성들을 다른 도와 달리 대우해 왔습니다. 옷감을 지급하거나 휼전을 실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었으니, 백성들이 국가에 대하여 무슨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겠습니까. 다만 변방 장수와 수령이 한도 끝도 없이 침해하고 못살게 굴고 있어도 조정이 너무 멀어서 혜택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변방에 일이 생기면 백성들이 모두 무기를 거꾸로 들고 윗사람을 질시하곤 하는데, 이것이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소보(小堡)의 변장은 비록 모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진(主鎭)의 관원만은 제대로 선출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탐학한 무리가 있으면 신은 고가 평정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청할 것이니, 조정에서는 무거운 율로 다스려서 그 죄악을 징계하소서. 이러한 뜻으로 역시 전조(銓曹)에 신칙해서 각별히 선출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주진의 관원은 전조에서 의망한 것이 아니라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천거했는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권진이 아뢰기를, "해사(該司)에서야 당초에 어찌 정밀하게 살펴서 뽑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부임한 후에는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신중을 기해서 선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주진(主鎭)의 수령은 어느어느 곳인가?"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명천(明川)·길주(吉州) 등이 주진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것을 내가 유념하겠다.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적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단지 번호(藩胡)가 와서 일러주는 말에만 의존할 뿐, 그 허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으니, 짐승같은 적들이 어찌 우롱할 마음이 없겠는가. 앞으로는 오랑캐의 지역 근처에다 복병을 두어 잡인들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오랑캐의 실정을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번호 가운데 직첩을 받고 귀순해 오는 자가 지금도 있으며 병사(兵使)가 그전부터 알고 있는 자가 많다고 하니, 이번에 내려가면 행영(行營)에 가서 잘 찾아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벌이고 있는 거대한 역사(役事)에 대하여 대소 신민들 가운데 누가 마음을 다해 공사에 협력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번에 조공목(助工木)을 각도에 분부하자 남북의 병사(兵使)들이 방어하는 일을 면제시켜 주고 베를 거두어 들여 전에 없던 규례를 만들어 놓았으니, 일이 몹시 한심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들이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권진이 아뢰기를, "조정의 의도는 본래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들로 하여금 군역을 면제시켜 주고 베를 거두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내려간 뒤에 일체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노비(內奴婢)들도 역시 나의 백성인데 변장과 수령이 심하게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경이 내려가면 각별히 돌봐 주도록 하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만일 이런 폐단이 있으면 신이 듣는대로 죄주기를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노추(老酋)에게 일을 잘 아는 영리한 사람을 보내서 적의 실정을 정탐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전 병사 김경서(金景瑞)가 사람을 보내 정탐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가볍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신충일(申忠一)이 그전에는 오랑캐의 소굴에 왕래하였으므로 적들의 실정을 다소 알 수 있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상세히 탐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적합한 사람이 있어서 보낸다면 적의 동정을 알 수 있겠지만,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적의 동정을 상세히 알지도 못하고 반대로 군사 기밀만 누설하는 염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을 아는 영리한 사람을 각별히 가려 보내 오랑캐의 동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도망 중에 있는 역적도 겸하여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육진의 유민을 즉시 쇄환하지 않는다면 외구(外寇)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도 텅텅 빈 곳이 되어서 조종조께서 태어나신 고향을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신은 민망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시급히 쇄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경들도 본도에 내려가거든 각별히 신경써서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도망 중에 있는 역적 죄인들을 각별히 신경써서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도록 하라."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그전부터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니, 최선을 다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갑옷·투구 등의 무기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경들이 가지고 가서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북쪽 변방의 일 중에 염려되는 것이 많다. 병력도 부족하고 인심도 흉흉하여 나는 밤낮으로 우려하고 있으니, 경들이 잘 상의해서 처리하여 북쪽을 염려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풀어달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소신이 그전에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상께서는 이미 보잘것없는 신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이번에 이 중임을 맡게 되었으니, 마치 모기가 태산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막은 전에 구황 문제(救荒問題)와 유민을 쇄환하는 문제를 아뢰는 계사 중에 대략 진달하였으니, 상께서는 필시 통찰하고 계실 것입니다. 방어하는 등의 일은 신이 그곳에 도착한 다음 요리하여 처리하겠습니다. 10년 전에 인재가 부족한 나머지 제가 어사가 되어 본도에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북쪽 변방의 일을 대강은 압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형세는 전과는 다릅니다. 금년에는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군량미도 바닥이 났습니다. 이수일은 노련한 장수로 세 번이나 본도의 병사가 되었으니 군민(軍民)의 실정과 토지의 형세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며 그가 듣고 본 것도 다른 장수들과는 다를 것이니, 신들이 내려간 뒤에 한마음으로 협력하겠습니다마는, 신같이 어리석은 자가 아무래도 책임완수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묘당의 대신들이 모두 천거했기 때문에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니, 경은 마음을 다하여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수일에게 이르기를,
"경이 북로의 일을 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아는가?"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소신이 재차 병사가 된 지도 이미 7년이 지났습니다. 근래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오늘날의 형세가 그전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육진(六鎭)에 번호(藩胡)가 살고 있을 때는 적의 왕래를 사실대로 알려 주었는데, 노추(老酋)가 일단 번호를 철수시키고 난 후부터는 적들의 출입을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온성(穩城) 근처 번호인 인필(仁弼)의 무리들은 믿을 만하다는 것을 신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밖의 번호들은 욕심이 많기 때문에 선물을 주게 되면 그들은 필시 호인(胡人)들의 실정을 성심으로 알려 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줄 선물을 조정에서 마련하여 내려 보내 주소서.
근래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대부분 유랑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진작부터 곡식을 운반해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백성들을 구제하고는 있습니다만, 수령과 변장을 각별히 잘 뽑아 보내야만 한 지방의 백성들의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인심이 좋지 않으니 우선적으로 기강을 바로 세운 뒤에라야만 국가의 호령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진이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흉년은 근고에 없을 만큼 심각하여 열읍에서 바치는 환자곡과 조세를 전혀 거두어 들일 수가 없고 백성들도 굶주림에 시달려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 있는데, 속수무책으로 구제하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하니, 듣기에도 한심한 일입니다. 북방은 춥고 토지가 척박한 지역이므로 풍년일지라도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개가죽을 입거나 말언치를 두르기도 하고 풀 열매나 겨를 먹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다른 지역으로 떠난 후에 본토로 돌아갈 뜻이 없기 때문에 유랑민들의 짐보따리가 길에 이어져 필시 도내가 텅텅 비고 난 후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어찌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듣기에는 금년 농사가 조금은 여물었다고 하더니, 이달 초에 함흥(咸興) 이남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이 심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갑산 등처에는 생계가 아득했는데, 이번에 또 우박의 재해를 당하여 들에는 수확할 것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며 변방 수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전에는 구황 정책을 너무 늦게 실시하여 전적으로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영남과 영동 일대에서 곡식을 운반할 대책이 하루가 급한데, 설사 두 곳 감사에게 간곡히 하유한다 하더라도 지금같이 일이 많은 때에 다른 도를 지원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착실하게 거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위풍있게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어사로 차출하여 영남과 영동 등처에 내려보내서 안변(安邊)으로 서둘러 운반하게 하고, 안변 이북의 지역은 마상선(馬尙船)으로 운반해 주어서 다 죽어가는 북로의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한다면 이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구황 어사를 해조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권진에게 묻기를,
"구황 어사를 본도에 보내야 하는가?"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본도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습니다. 경상도와 강원도에 보내서 감독하여 운반하게 해야 합니다. 신이 드릴 말씀은 이렇습니다. 본도에는 그전부터 본래 사대부가 없고 단지 우직하고 성질 사나운 백성들만 있어서 일을 논의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나간 일로 보면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열읍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고 임진년(壬辰年) 변란 때에도 왕자와 재신을 결박하여 적들에게 넘겨 주었으니, 인심이 패악스럽다는 것은 이것을 갖고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에서 그전부터 북쪽의 백성들을 다른 도와 달리 대우해 왔습니다. 옷감을 지급하거나 휼전을 실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었으니, 백성들이 국가에 대하여 무슨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겠습니까. 다만 변방 장수와 수령이 한도 끝도 없이 침해하고 못살게 굴고 있어도 조정이 너무 멀어서 혜택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변방에 일이 생기면 백성들이 모두 무기를 거꾸로 들고 윗사람을 질시하곤 하는데, 이것이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소보(小堡)의 변장은 비록 모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진(主鎭)의 관원만은 제대로 선출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탐학한 무리가 있으면 신은 고가 평정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청할 것이니, 조정에서는 무거운 율로 다스려서 그 죄악을 징계하소서. 이러한 뜻으로 역시 전조(銓曹)에 신칙해서 각별히 선출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주진의 관원은 전조에서 의망한 것이 아니라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천거했는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권진이 아뢰기를,
"해사(該司)에서야 당초에 어찌 정밀하게 살펴서 뽑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부임한 후에는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신중을 기해서 선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주진(主鎭)의 수령은 어느어느 곳인가?"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명천(明川)·길주(吉州) 등이 주진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것을 내가 유념하겠다.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적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단지 번호(藩胡)가 와서 일러주는 말에만 의존할 뿐, 그 허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으니, 짐승같은 적들이 어찌 우롱할 마음이 없겠는가. 앞으로는 오랑캐의 지역 근처에다 복병을 두어 잡인들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오랑캐의 실정을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번호 가운데 직첩을 받고 귀순해 오는 자가 지금도 있으며 병사(兵使)가 그전부터 알고 있는 자가 많다고 하니, 이번에 내려가면 행영(行營)에 가서 잘 찾아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벌이고 있는 거대한 역사(役事)에 대하여 대소 신민들 가운데 누가 마음을 다해 공사에 협력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번에 조공목(助工木)을 각도에 분부하자 남북의 병사(兵使)들이 방어하는 일을 면제시켜 주고 베를 거두어 들여 전에 없던 규례를 만들어 놓았으니, 일이 몹시 한심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들이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권진이 아뢰기를,
"조정의 의도는 본래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들로 하여금 군역을 면제시켜 주고 베를 거두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내려간 뒤에 일체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노비(內奴婢)들도 역시 나의 백성인데 변장과 수령이 심하게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경이 내려가면 각별히 돌봐 주도록 하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만일 이런 폐단이 있으면 신이 듣는대로 죄주기를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노추(老酋)에게 일을 잘 아는 영리한 사람을 보내서 적의 실정을 정탐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전 병사 김경서(金景瑞)가 사람을 보내 정탐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가볍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신충일(申忠一)이 그전에는 오랑캐의 소굴에 왕래하였으므로 적들의 실정을 다소 알 수 있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상세히 탐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적합한 사람이 있어서 보낸다면 적의 동정을 알 수 있겠지만,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적의 동정을 상세히 알지도 못하고 반대로 군사 기밀만 누설하는 염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을 아는 영리한 사람을 각별히 가려 보내 오랑캐의 동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도망 중에 있는 역적도 겸하여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육진의 유민을 즉시 쇄환하지 않는다면 외구(外寇)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도 텅텅 빈 곳이 되어서 조종조께서 태어나신 고향을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신은 민망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시급히 쇄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경들도 본도에 내려가거든 각별히 신경써서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도망 중에 있는 역적 죄인들을 각별히 신경써서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도록 하라."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그전부터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니, 최선을 다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갑옷·투구 등의 무기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경들이 가지고 가서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숙위하는 장수들에 대해서 감사와 병사가 감히 계청하여 영장(營將)으로 삼지 못했던 것은 내지를 중하게 여기고 외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권진은 오위 장(五衛將) 유림(柳琳)을 중군(中軍)으로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만약 번신의 계청으로 인하여 보내는 것을 윤허한다면, 일의 원칙상 온당치 못할 뿐 아니라 뒤폐단이 끝없이 열릴 것입니다. 다른 한산인(閑散人)으로 바꾸어 스스로 천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권진은 잔인하고 행실이 천박하여 인륜에 죄를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난리 중에 죽었는데 20여 년 동안이나 타향에다가 임시로 묻어 놓은 채 지위가 대신의 반열에 이르렀는데도 반장(返葬)할 뜻이 없더니, 결국 무덤을 파헤쳐 뼈를 불사르는 변을 야기시켰다.】
"숙위하는 장수들에 대해서 감사와 병사가 감히 계청하여 영장(營將)으로 삼지 못했던 것은 내지를 중하게 여기고 외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권진은 오위 장(五衛將) 유림(柳琳)을 중군(中軍)으로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만약 번신의 계청으로 인하여 보내는 것을 윤허한다면, 일의 원칙상 온당치 못할 뿐 아니라 뒤폐단이 끝없이 열릴 것입니다. 다른 한산인(閑散人)으로 바꾸어 스스로 천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권진은 잔인하고 행실이 천박하여 인륜에 죄를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난리 중에 죽었는데 20여 년 동안이나 타향에다가 임시로 묻어 놓은 채 지위가 대신의 반열에 이르렀는데도 반장(返葬)할 뜻이 없더니, 결국 무덤을 파헤쳐 뼈를 불사르는 변을 야기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권진은 잔인하고 행실이 천박하여 인륜에 죄를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난리 중에 죽었는데 20여 년 동안이나 타향에다가 임시로 묻어 놓은 채 지위가 대신의 반열에 이르렀는데도 반장(返葬)할 뜻이 없더니, 결국 무덤을 파헤쳐 뼈를 불사르는 변을 야기시켰다.】
8월 30일 임술
묘시(卯時) 정각에 왕이 경덕궁에 거둥하여 건축 현장을 두루 살펴보고 유시(酉時)에 환궁하였다.
영의정 기자헌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다 알았다. 황공해 하면서 굳이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여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다 알았다. 황공해 하면서 굳이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여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집터를 납부하고 공로를 요구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람됨은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만, 태천 현감(泰川縣監) 윤충원(尹忠源)은 이미 당상직의 가자를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과분한 은전인데, 심지어 실직을 제수하고 또 수령으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길가는 사람도 지적하여 비웃고 하급관리들도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윤원형(尹元衡)에 대해서 모두가 권간(權奸)이라고 하고 아직도 죄적에 있으므로 비록 적자(嫡子)라 하더라도 탁월한 재능이 없으면 벼슬길에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천첩의 소생인데다 사람마저 주정뱅이인 경우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먼저 문벌을 따집니다. 출신이 비천하다는 것이 이렇게 분명한데 어찌 직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참작해서 제수한 것인데 어찌 감당하지 못하기까지 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집터를 납부하고 공로를 요구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람됨은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만, 태천 현감(泰川縣監) 윤충원(尹忠源)은 이미 당상직의 가자를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과분한 은전인데, 심지어 실직을 제수하고 또 수령으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길가는 사람도 지적하여 비웃고 하급관리들도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윤원형(尹元衡)에 대해서 모두가 권간(權奸)이라고 하고 아직도 죄적에 있으므로 비록 적자(嫡子)라 하더라도 탁월한 재능이 없으면 벼슬길에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천첩의 소생인데다 사람마저 주정뱅이인 경우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먼저 문벌을 따집니다. 출신이 비천하다는 것이 이렇게 분명한데 어찌 직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참작해서 제수한 것인데 어찌 감당하지 못하기까지 하겠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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