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진
전라도 생원 양시익(楊時益) 등이 상소하여 조식(曺植)을 문묘(文廟)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어진이를 높이는 뜻을 가상하게 여긴다.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는 문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그대들은 돌아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상소를 살펴보고 어진이를 높이는 뜻을 가상하게 여긴다.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는 문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그대들은 돌아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정귀(李廷龜)가 차자를 올리기를, "진강 유격(鎭江遊擊)이 예단을 재차 보내 왔으니, 회답할 말을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예물은 경이 수령하도록 하고, 답례는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말[馬]을 무역하는 일은 대신들과 상의하여 말을 잘 엮어 회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강 유격(鎭江遊擊)이 예단을 재차 보내 왔으니, 회답할 말을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예물은 경이 수령하도록 하고, 답례는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말[馬]을 무역하는 일은 대신들과 상의하여 말을 잘 엮어 회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대옥(大獄)을 아직 완결짓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 다음해로 연기시키고 결말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별일이 없는 날에 대신과 추관(推官)을 불러서 속히 추국을 마치고 파하도록 하라."
"대옥(大獄)을 아직 완결짓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 다음해로 연기시키고 결말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별일이 없는 날에 대신과 추관(推官)을 불러서 속히 추국을 마치고 파하도록 하라."
관학 유생 유의남(柳義男)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조식을 문묘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어진이를 높이는 성의에 대하여 잘 알았다.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상소를 보고 어진이를 높이는 성의에 대하여 잘 알았다.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10월 2일 계사
관학 유생 유의남 등이 재차 상소하니, 답하기를, "나의 의견은 이미 유시하였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나의 의견은 이미 유시하였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정준(鄭遵)을, 숙직을 빠뜨렸다는 이유로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았다. 왕이 재위한 지 10여 년 동안 경연을 연 것이 겨우 며칠이었으므로 옥당은 한가한 곳이 되어 버렸다. 정사가 문란해진 이후로 이 벼슬에 임명된 사람들은 대부분 다 무뢰배였으니, 평상시에 입는 옷차림으로 드나드는 것을 마치 개인집과 같이 하였으며, 숙직을 빠뜨리는 자들도 빈번하였다. 왕이 특명으로 하교하여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았으나, 역시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사시에 태백이 남방에 나타났다.
10월 3일 갑오
전교하였다. "중국에 가는 원역(員役)으로서 진사를 데리고 간 전례가 있는지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중국에 가는 원역으로서 진사를 구전(口傳)하는 것은 근래에 그런 규례가 없었으며, 군관(軍官)에 관한 일은 병조에서 주관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알았다. 중국에 가는 원역으로서 진사를 데리고 가는 것은 아주 부당하니, 동지 상사(冬至上使)와 부사(副使)를 추고하라. 그리고 대체로 중국에 가는 사신이 매번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때 의주의 관노(官奴)로 바꾸어 데리고 가곤 하는데 매우 부당한 일이다. 앞으로 분명히 탈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바꾸어 데리고 가지 말게 하라. 생원과 진사, 유생일 경우는 자제들을 제외하고는 데리고 가지 말도록 신칙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중국에 가는 원역(員役)으로서 진사를 데리고 간 전례가 있는지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중국에 가는 원역으로서 진사를 구전(口傳)하는 것은 근래에 그런 규례가 없었으며, 군관(軍官)에 관한 일은 병조에서 주관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알았다. 중국에 가는 원역으로서 진사를 데리고 가는 것은 아주 부당하니, 동지 상사(冬至上使)와 부사(副使)를 추고하라. 그리고 대체로 중국에 가는 사신이 매번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때 의주의 관노(官奴)로 바꾸어 데리고 가곤 하는데 매우 부당한 일이다. 앞으로 분명히 탈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바꾸어 데리고 가지 말게 하라. 생원과 진사, 유생일 경우는 자제들을 제외하고는 데리고 가지 말도록 신칙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평안도에 있는 행영(行營)과 삭주(朔州)의 무기가 불에 탄 변고가 있었고, 근래에는 또 본 군영의 무기가 불에 타는 재해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2백 년 동안 비축해 왔던 것이므로 비변사에서 병사(兵使)를 붙잡아다 신문하고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사의 공사(公事)를 보니 ‘서울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를 덜어내어 내려 보낸다.’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중앙과 지방의 경중이 현저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일의 체모로 보아도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근래에 7, 8년 동안 팔도의 수령들과 변방 장수들이 별도로 마련한 무기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다 각각 그 고을의 수량 외의 물건들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옮겨간다면 본 고을에는 아무런 손해를 주지 않고 관서(關西)에는 무기의 저축이 예전과 같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도의 감사에게 글을 보내서 기한을 정하고 수송하도록 해서 서울의 무기를 나누어 보내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지난번 알성시(謁聖試)에서 급제한 자들이 시가지를 돌 때에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한정국(韓正國)이 길에서 새로 급제한 어떤 사람을 만나 전임자로서의 고풍(古風)을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겸 선전관 강진백(姜進伯)과 초관 김우(金宇) 등이 뒤따라와서는 그것을 기어이 빼앗으려는 속셈으로 정국에게 욕설을 해대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탄 말에서 내려 정국의 옷소매를 붙잡고 끌어내렸습니다. 예로부터 점잖은 사대부에게 어찌 이런 변고가 있었겠습니까. 대낮이라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전에 없던 나쁜 습성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강진백과 김우 등을 아울러 사판에서 삭제시키소서. 신들이 윤충원(尹忠源)에게 내렸던 성명을 환수하기를 청한 것은 사실 명기(名器)를 아끼고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소중히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를 경기(京畿)의 읍으로 바꾸게 한다면 비록 넉넉하고 가난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같은 6품으로서 다 실직이고 수령입니다. 그의 아비가 어떠한 아비이며 그의 어미가 어떠한 어미입니까. 말을 하자면 말이 추해집니다. 예전에는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서 천고의 비난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흙 냄새와 돌 냄새가 난다는 말045) 이 또 전하의 세상에 나올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충원의 일은 조정에서 이미 허통(許通)시켜 주었고 수고에 보답하느라 관직을 제수한 것이니, 이것은 필사적으로 고집할 일이 아니다.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밖의 문제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충원을 처음에는 태천에 제수했었는데 사헌부가 논핵하자, 경기의 수령과 서로 바꾸라고 특명을 내렸기 때문에 다시 이 계사를 올린 것이다.】
[註 045] 예전에는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서 천고의 비난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흙 냄새와 돌 냄새가 난다는 말 : 구리 냄새가 난다는 것은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것을 말하며, 흙 냄새와 돌 냄새는 광해군이 집터와 돌을 받고 관직을 제수한 것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52 최식전(崔湜傳).
"국가가 불행하여 평안도에 있는 행영(行營)과 삭주(朔州)의 무기가 불에 탄 변고가 있었고, 근래에는 또 본 군영의 무기가 불에 타는 재해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2백 년 동안 비축해 왔던 것이므로 비변사에서 병사(兵使)를 붙잡아다 신문하고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사의 공사(公事)를 보니 ‘서울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를 덜어내어 내려 보낸다.’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중앙과 지방의 경중이 현저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일의 체모로 보아도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근래에 7, 8년 동안 팔도의 수령들과 변방 장수들이 별도로 마련한 무기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다 각각 그 고을의 수량 외의 물건들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옮겨간다면 본 고을에는 아무런 손해를 주지 않고 관서(關西)에는 무기의 저축이 예전과 같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도의 감사에게 글을 보내서 기한을 정하고 수송하도록 해서 서울의 무기를 나누어 보내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지난번 알성시(謁聖試)에서 급제한 자들이 시가지를 돌 때에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한정국(韓正國)이 길에서 새로 급제한 어떤 사람을 만나 전임자로서의 고풍(古風)을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겸 선전관 강진백(姜進伯)과 초관 김우(金宇) 등이 뒤따라와서는 그것을 기어이 빼앗으려는 속셈으로 정국에게 욕설을 해대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탄 말에서 내려 정국의 옷소매를 붙잡고 끌어내렸습니다. 예로부터 점잖은 사대부에게 어찌 이런 변고가 있었겠습니까. 대낮이라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전에 없던 나쁜 습성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강진백과 김우 등을 아울러 사판에서 삭제시키소서.
신들이 윤충원(尹忠源)에게 내렸던 성명을 환수하기를 청한 것은 사실 명기(名器)를 아끼고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소중히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를 경기(京畿)의 읍으로 바꾸게 한다면 비록 넉넉하고 가난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같은 6품으로서 다 실직이고 수령입니다. 그의 아비가 어떠한 아비이며 그의 어미가 어떠한 어미입니까. 말을 하자면 말이 추해집니다. 예전에는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서 천고의 비난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흙 냄새와 돌 냄새가 난다는 말045) 이 또 전하의 세상에 나올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충원의 일은 조정에서 이미 허통(許通)시켜 주었고 수고에 보답하느라 관직을 제수한 것이니, 이것은 필사적으로 고집할 일이 아니다.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밖의 문제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충원을 처음에는 태천에 제수했었는데 사헌부가 논핵하자, 경기의 수령과 서로 바꾸라고 특명을 내렸기 때문에 다시 이 계사를 올린 것이다.】
[註 045] 예전에는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서 천고의 비난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흙 냄새와 돌 냄새가 난다는 말 : 구리 냄새가 난다는 것은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것을 말하며, 흙 냄새와 돌 냄새는 광해군이 집터와 돌을 받고 관직을 제수한 것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52 최식전(崔湜傳).
관학 유생 유의남이 세 번째 상소하니, 답하기를, "나의 의견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에 열중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의 의견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에 열중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로 연계하여, 심희수(沈喜壽)·조존성(趙存性)·기협(奇協)에게 내린 성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논집하고 있으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렇게 논집하고 있으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4일 을미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아뢴 내용에 따라 여러 도의 각 고을에서 마련한 무기를 평안도 병영(兵營)에 수송하는 일로 윤허를 받고, 지금 여러 도에 하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경도와 같은 경우에는 방비가 긴급한 곳인데 이 도에도 역시 유시를 내려 보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유시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대간이 아뢴 내용에 따라 여러 도의 각 고을에서 마련한 무기를 평안도 병영(兵營)에 수송하는 일로 윤허를 받고, 지금 여러 도에 하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경도와 같은 경우에는 방비가 긴급한 곳인데 이 도에도 역시 유시를 내려 보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유시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강원도 삼척포(三陟浦)에서 닭이 병아리를 깠는데, 병아리 한 마리가 발이 네 개, 날개가 네 개였다.
유학 박몽준(朴夢俊)이 상소하여, 김제남의 처를 속히 전형(典刑)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사학(四學) 유생 남순(南㶷)·황정필(黃廷弼) 등이 글을 올려 조식(曺植)을 문묘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그대들의 현인을 존경하는 정성을 잘 알았다.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물러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상소를 보고 그대들의 현인을 존경하는 정성을 잘 알았다.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물러가서 글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5일 병신
전교하였다.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가 바친 돌을 도감으로 하여금 수량을 계산하여 아뢰게 하고, 두 궁궐에서 실어다가 사용한 물량도 아울러 계산하여 서계하게 하라."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가 바친 돌을 도감으로 하여금 수량을 계산하여 아뢰게 하고, 두 궁궐에서 실어다가 사용한 물량도 아울러 계산하여 서계하게 하라."
10월 6일 정유
사헌부가 아뢰기를, "선천 군수(宣川郡守) 권곤(權鵾)은 사람됨이 용렬한 데다 염치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일찍이 수령이 되었을 적에 탐욕을 부리면서 방자한 행동을 했는데, 본군에 옮겨 임명되자, 물정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관직 생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주(全州)의 기생은 일찍이 역적 김제남(金悌男)이 데리고 있었던 기생으로 인간 세상의 한 흉물이니 비록 평민일지라도 그를 첩으로 삼지 않을 것인데, 어찌 명색이 사대부인 자가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 끝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전후하여 탐욕을 부린 일도 대부분 이 기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대부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선천 군수(宣川郡守) 권곤(權鵾)은 사람됨이 용렬한 데다 염치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일찍이 수령이 되었을 적에 탐욕을 부리면서 방자한 행동을 했는데, 본군에 옮겨 임명되자, 물정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관직 생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주(全州)의 기생은 일찍이 역적 김제남(金悌男)이 데리고 있었던 기생으로 인간 세상의 한 흉물이니 비록 평민일지라도 그를 첩으로 삼지 않을 것인데, 어찌 명색이 사대부인 자가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 끝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전후하여 탐욕을 부린 일도 대부분 이 기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대부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평안 병사 성우길(成祐吉)은 본래 어리석은 데다가 탐욕스런 사람입니다. 난리에는 임금을 버림으로써 인륜에 죄를 지었는데 상관을 잘 섬겨 벼슬을 회복하자, 사람들이 다 더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곤수(閫帥)의 직임을 맡은 후로 탐욕을 일삼아, 전라도 병영(兵營)과 통영(統營)이 그의 손을 한 번 거치자 잇따라 결딴이 났기 때문에, 양남(兩南)의 백성들은 지금도 그의 살점을 씹어먹고 싶어했습니다. 본직에 제수되자 더욱 욕심을 부려 부임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날마다 백성들을 침해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사나운 첩한테 반하여 그가 말하는 대로 전부 들어주었고, 군사를 놓아주고 베를 거두며 장물을 받고 뇌물 행각을 벌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던 군사와 백성들이 그를 원수처럼 여긴 나머지 무기에 불을 질러 분풀이를 해서, 2백 년 동안 비축해 오던 무기가 하루아침에 전부 불타버렸으니 위급한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적에게 대응하겠습니까. 일이 군율에 관계되어 죄를 용서하기 어려우니, 병사(兵使) 성우길(成祐吉)·차지 군관(次知軍官)·창고지기 등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여 화재가 난 원인을 기필코 사실대로 밝혀내소서.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경최(李景崔)는 행실이 패악스러워 전처(前妻)를 가두어 죽였고 자기의 스승을 모함했으므로, 일찍이 정거(停擧)를 당하였고 공론에도 버림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는 본직에 제수되자 침해를 일삼으면서 대동법(大同法)에 의하여 거둔 베를 공공연히 차지하니, 온 경내가 마치 물과 불 속에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평안 병사 성우길(成祐吉)은 본래 어리석은 데다가 탐욕스런 사람입니다. 난리에는 임금을 버림으로써 인륜에 죄를 지었는데 상관을 잘 섬겨 벼슬을 회복하자, 사람들이 다 더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곤수(閫帥)의 직임을 맡은 후로 탐욕을 일삼아, 전라도 병영(兵營)과 통영(統營)이 그의 손을 한 번 거치자 잇따라 결딴이 났기 때문에, 양남(兩南)의 백성들은 지금도 그의 살점을 씹어먹고 싶어했습니다. 본직에 제수되자 더욱 욕심을 부려 부임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날마다 백성들을 침해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사나운 첩한테 반하여 그가 말하는 대로 전부 들어주었고, 군사를 놓아주고 베를 거두며 장물을 받고 뇌물 행각을 벌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던 군사와 백성들이 그를 원수처럼 여긴 나머지 무기에 불을 질러 분풀이를 해서, 2백 년 동안 비축해 오던 무기가 하루아침에 전부 불타버렸으니 위급한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적에게 대응하겠습니까. 일이 군율에 관계되어 죄를 용서하기 어려우니, 병사(兵使) 성우길(成祐吉)·차지 군관(次知軍官)·창고지기 등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여 화재가 난 원인을 기필코 사실대로 밝혀내소서.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경최(李景崔)는 행실이 패악스러워 전처(前妻)를 가두어 죽였고 자기의 스승을 모함했으므로, 일찍이 정거(停擧)를 당하였고 공론에도 버림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는 본직에 제수되자 침해를 일삼으면서 대동법(大同法)에 의하여 거둔 베를 공공연히 차지하니, 온 경내가 마치 물과 불 속에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유학 박길항(朴吉恒)이 상소하여, 녹훈(錄勳)을 공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이 상소문은 녹훈을 실시할 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 상소문은 녹훈을 실시할 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포도 대장이 비밀리에 전교를 받고 유문(留門)으로 나갔다.
10월 7일 무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말세에 공신(功臣)이 많은 것도 매우 불행한 일인데, 그 사이에서 염치없고 막된 무리들은 요행수를 바라 갖은 방법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혹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서 혹 남을 사주하여 글을 올리는 자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원은 퇴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이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으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처사입니다. 대체로 공신록에 기록되는 사람은 현저한 공로가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감히 한두 사람이 한 말을 가지고 훈록(勳錄)에 참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피를 마시면서 함께 맹세를 하고 옥책(玉冊)에 새겼는데 만일 추후로 기록되는 자가 있게 되면, 완결을 볼 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행수를 바라는 길을 열어주게 되고 실상을 잃게 되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전날 공훈을 감정할 때 자기 집에 있으면서 나랏일을 근심하고 천정을 쳐다보며 한탄한 정도를 가지고 정훈(正勳)에 참여하여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날 이끗을 탐하는 자들이 서로 기대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실지로 공로가 있었다면 온 세상 사람이 어느 누가 그를 모르겠습니까. 실지로 공로가 있었는데 당초에 누락되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설사 녹훈에 참여할 만한데 참여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추후하여 기록하기로 한다면, 국초(國初)에 공신에 참여하지 못한 자의 자손이 자기 조상을 위해서 글을 올려 하소연할 경우에 그것을 청리(聽理)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공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말하는 자는 따져볼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구나 조금도 기록할 만한 일이 없는데 교묘한 말을 꾸며대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요즘 이런 폐단을 금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공도(公道)가 없어지고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후에 걸쳐 공로를 말하기위해 글을 올리는 것은 일체 엄금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요즘 수령들이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인하여 수시로 논핵하는 계사를 올리고 있으나 그럴 때마다 매번 서서히 결정하겠다는 전교만 받게 되는 관계로 그 사이에 날짜가 자연히 지연됩니다. 본도에서 조사하는 경우에는 걸핏하면 몇 달이 지나게 되므로 염치없는 무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버젓이 행공(行公)하면서 관고(官庫)의 물건을 전부 실어낼 뿐만 아니라 민간에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서 조세를 가혹하게 받아들여 결국 완전히 바닥이 난 다음에야 그만두니 그 정상이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앞으로는 탄핵을 받은 수령이 조사받는 기간에는 개인(開印)하지 못하게 하고 겸관(兼官)이 살펴서 처리하게 할 것으로 각도의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소서. 가주서 김경후(金慶厚)는 사람됨이 용렬하며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이 옹졸합니다. 대간이 계사를 올릴 때마다 즉시 써서 올리지 못해 날이 저물게 하고 마니, 체차시키고 대임자는 각별히 선발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김경후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말세에 공신(功臣)이 많은 것도 매우 불행한 일인데, 그 사이에서 염치없고 막된 무리들은 요행수를 바라 갖은 방법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혹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서 혹 남을 사주하여 글을 올리는 자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원은 퇴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이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으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처사입니다.
대체로 공신록에 기록되는 사람은 현저한 공로가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감히 한두 사람이 한 말을 가지고 훈록(勳錄)에 참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피를 마시면서 함께 맹세를 하고 옥책(玉冊)에 새겼는데 만일 추후로 기록되는 자가 있게 되면, 완결을 볼 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행수를 바라는 길을 열어주게 되고 실상을 잃게 되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전날 공훈을 감정할 때 자기 집에 있으면서 나랏일을 근심하고 천정을 쳐다보며 한탄한 정도를 가지고 정훈(正勳)에 참여하여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날 이끗을 탐하는 자들이 서로 기대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실지로 공로가 있었다면 온 세상 사람이 어느 누가 그를 모르겠습니까. 실지로 공로가 있었는데 당초에 누락되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설사 녹훈에 참여할 만한데 참여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추후하여 기록하기로 한다면, 국초(國初)에 공신에 참여하지 못한 자의 자손이 자기 조상을 위해서 글을 올려 하소연할 경우에 그것을 청리(聽理)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공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말하는 자는 따져볼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구나 조금도 기록할 만한 일이 없는데 교묘한 말을 꾸며대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요즘 이런 폐단을 금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공도(公道)가 없어지고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후에 걸쳐 공로를 말하기위해 글을 올리는 것은 일체 엄금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요즘 수령들이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인하여 수시로 논핵하는 계사를 올리고 있으나 그럴 때마다 매번 서서히 결정하겠다는 전교만 받게 되는 관계로 그 사이에 날짜가 자연히 지연됩니다. 본도에서 조사하는 경우에는 걸핏하면 몇 달이 지나게 되므로 염치없는 무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버젓이 행공(行公)하면서 관고(官庫)의 물건을 전부 실어낼 뿐만 아니라 민간에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서 조세를 가혹하게 받아들여 결국 완전히 바닥이 난 다음에야 그만두니 그 정상이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앞으로는 탄핵을 받은 수령이 조사받는 기간에는 개인(開印)하지 못하게 하고 겸관(兼官)이 살펴서 처리하게 할 것으로 각도의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소서.
가주서 김경후(金慶厚)는 사람됨이 용렬하며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이 옹졸합니다. 대간이 계사를 올릴 때마다 즉시 써서 올리지 못해 날이 저물게 하고 마니, 체차시키고 대임자는 각별히 선발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서히 결정하겠다. 김경후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8일 기해
좌·우포도 대장이 아뢰기를, "하옥시키라고 명한 죄인 김계남(金季男)을 오늘 저녁 무렵 짐바리를 싣고 자기 집으로 들어갈 때에 군관 최인길(崔仁吉)이 체포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잡아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하옥시키라고 명한 죄인 김계남(金季男)을 오늘 저녁 무렵 짐바리를 싣고 자기 집으로 들어갈 때에 군관 최인길(崔仁吉)이 체포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잡아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김계남 및 사위 오응란(吳應蘭) 등 5명을 잡아다 가두었다.
유학 정총(鄭聰)이 상소하여, 강화(江華)를 행궁(行宮)으로 삼고 진영을 설치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첫 벼슬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시골에서 글공부를 한 선비로서 과거 시험에 여러 번 합격하지 못한 자를 뽑아 가지고 어려서부터 공부한 뜻을 펴서 여러 분야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길이 깨끗하고 공무가 정돈되어 위로는 헛되이 제수하는 잘못이 없고 아래로는 부당하게 받았다는 비난이 없었던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고 선비들은 염치가 없어서 나이가 스무 살도 못 되어 대뜸 녹봉을 바라는 마음을 먹어, 권세있는 관리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풍습이 되었고 뇌물질을 공공연히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행수만 바라고 학문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데, 이런 사람이 관리로 들어오니 어떻게 직책을 수행하겠습니까.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는 시골에서 공부를 한 선비로서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아 합격하지 못한 사람 외에 30세가 못 된 사람은 절대로 관직에 제수하지 말 것이며, 만일 부당하게 받는 사람이 있으면 출신(出身)한 후에 청요직(淸要職)에는 영원히 허락하지 말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국가에서 첫 벼슬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시골에서 글공부를 한 선비로서 과거 시험에 여러 번 합격하지 못한 자를 뽑아 가지고 어려서부터 공부한 뜻을 펴서 여러 분야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길이 깨끗하고 공무가 정돈되어 위로는 헛되이 제수하는 잘못이 없고 아래로는 부당하게 받았다는 비난이 없었던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고 선비들은 염치가 없어서 나이가 스무 살도 못 되어 대뜸 녹봉을 바라는 마음을 먹어, 권세있는 관리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풍습이 되었고 뇌물질을 공공연히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행수만 바라고 학문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데, 이런 사람이 관리로 들어오니 어떻게 직책을 수행하겠습니까.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는 시골에서 공부를 한 선비로서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아 합격하지 못한 사람 외에 30세가 못 된 사람은 절대로 관직에 제수하지 말 것이며, 만일 부당하게 받는 사람이 있으면 출신(出身)한 후에 청요직(淸要職)에는 영원히 허락하지 말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남행(南行)으로 진출한 자는 나이가 64세가 되면 수령에 제수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전(大典)》에 소상하게 실려 있으니, 이것은 바로 금석과 같이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난리가 있은 이후로 사대부들이 서울에 모이지 않아 조정에 있는 사람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법을 무릅쓰고 구차스레 벼슬자리를 채웠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인재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다 보니, 나이가 70에 가까와 기력과 정신이 이미 쇠퇴하고 혼미한 자까지도 복잡하고 바쁜 자리를 맡고 있는 경우가 꽤 많으며, 심지어 70세가 넘은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이들은 일을 보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경계하는 사람은 없고 자신이 앞으로 갈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되도록 자기 집을 부유하게 하여 자손을 위한 계획을 세우려 하는데, 이런 자들을 역역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곤경에 빠지고 온전하던 고을이 텅 비게 된 것은 주로 이 때문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도태시킬 것을 법전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남행(南行)으로 진출한 자는 나이가 64세가 되면 수령에 제수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전(大典)》에 소상하게 실려 있으니, 이것은 바로 금석과 같이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난리가 있은 이후로 사대부들이 서울에 모이지 않아 조정에 있는 사람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법을 무릅쓰고 구차스레 벼슬자리를 채웠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인재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다 보니, 나이가 70에 가까와 기력과 정신이 이미 쇠퇴하고 혼미한 자까지도 복잡하고 바쁜 자리를 맡고 있는 경우가 꽤 많으며, 심지어 70세가 넘은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이들은 일을 보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경계하는 사람은 없고 자신이 앞으로 갈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되도록 자기 집을 부유하게 하여 자손을 위한 계획을 세우려 하는데, 이런 자들을 역역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곤경에 빠지고 온전하던 고을이 텅 비게 된 것은 주로 이 때문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도태시킬 것을 법전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평상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왕자와 대신이 데리고 있는 기생일지라도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들어와 참여하였다. 이번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과 관련하여 궁중에서 예행연습하는 것은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관기(官妓)를 숨겨두고 내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달 7일에 궁중에서 예행연습할 때에 탈이 있다고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던 기생은 그의 집주인을 각별히 추고하고 평상시의 옛 규례대로 재차 예행연습할 때에는 일일이 모두 나와서 참가하도록 하라. 장악원의 담당관리로서 사정에 끌려 숨겨둔 자도 중한 쪽으로 죄를 다스릴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라."
"평상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왕자와 대신이 데리고 있는 기생일지라도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들어와 참여하였다. 이번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과 관련하여 궁중에서 예행연습하는 것은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관기(官妓)를 숨겨두고 내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달 7일에 궁중에서 예행연습할 때에 탈이 있다고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던 기생은 그의 집주인을 각별히 추고하고 평상시의 옛 규례대로 재차 예행연습할 때에는 일일이 모두 나와서 참가하도록 하라. 장악원의 담당관리로서 사정에 끌려 숨겨둔 자도 중한 쪽으로 죄를 다스릴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라."
10월 9일 경자
영건 도감(營建都監)이 아뢰기를, "도감의 각소에서 풀무질을 하여 여러 가지 못이나 장석을 두드려 만들어내는 일은 매우 섬세한 것이어서 성실하고 정밀한 것을 장려하며 태만하고 서투른 것을 징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도감에서는 바닷가의 몇 개 고을에 대하여 물고기와 소금을 특별히 청구하여, 잘 만든 장인(匠人)에게 주려고 하였습니다. 임피 현령(臨陂縣令) 박안례(朴安禮)는 조기와 새우젓을 제때에 마련해 보냈을 뿐 아니라, 조기는 6백 두름, 새우젓은 40독이나 되어 그 수량이 매우 많습니다. 받아서 사용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안례의 일은 매우 가상하다. 승서(陞敘)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감의 각소에서 풀무질을 하여 여러 가지 못이나 장석을 두드려 만들어내는 일은 매우 섬세한 것이어서 성실하고 정밀한 것을 장려하며 태만하고 서투른 것을 징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도감에서는 바닷가의 몇 개 고을에 대하여 물고기와 소금을 특별히 청구하여, 잘 만든 장인(匠人)에게 주려고 하였습니다. 임피 현령(臨陂縣令) 박안례(朴安禮)는 조기와 새우젓을 제때에 마련해 보냈을 뿐 아니라, 조기는 6백 두름, 새우젓은 40독이나 되어 그 수량이 매우 많습니다. 받아서 사용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안례의 일은 매우 가상하다. 승서(陞敘)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방 승지(刑房承旨)가 아뢰기를, "예전 옥사(獄事)를 완전히 마치지 못하였는데 새로 옥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금된 자가 장차 얼어 죽게 되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오늘 김계남 등을 추국할 때 전일에 판결하지 못했던 죄수들도 모두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판의금부사가 병으로 죄수를 추국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까운 전례에 의거하여 자기 집에서 헌의(獻議)하게 하여 옥사를 속히 완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판의금부사를 명초하라." 하였다.
"예전 옥사(獄事)를 완전히 마치지 못하였는데 새로 옥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금된 자가 장차 얼어 죽게 되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오늘 김계남 등을 추국할 때 전일에 판결하지 못했던 죄수들도 모두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판의금부사가 병으로 죄수를 추국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까운 전례에 의거하여 자기 집에서 헌의(獻議)하게 하여 옥사를 속히 완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판의금부사를 명초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판의금부사 박승종(朴承宗)을 명초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명초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 박승종(朴承宗)을 명초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명초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뢴 공로를 말하기 위하여 글을 올리는 것을 일체 엄금하는 일과 남행(南行) 중에서 64세가 되면 수령에 제수하지 말라는 일과, 사간원이 아뢴 첫 벼슬은 30세가 못된 자에게는 절대로 관직을 제수하지 말라는 일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김계남은 바로 김제남의 절친한 얼족(孼族)이다. 오응난(吳應難) 등과 변고의 초기부터 도망쳤고 이번에는 경운궁(慶運宮) 근처 석정동(石井洞)에 숨어 있었으니 형적이 매우 수상하다. 일체의 반역한 내용과 심복, 같은 패거리에 대해서 자세하고 엄격하게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계남은 바로 김제남의 절친한 얼족(孼族)이다. 오응난(吳應難) 등과 변고의 초기부터 도망쳤고 이번에는 경운궁(慶運宮) 근처 석정동(石井洞)에 숨어 있었으니 형적이 매우 수상하다. 일체의 반역한 내용과 심복, 같은 패거리에 대해서 자세하고 엄격하게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청이 【국청에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한효순(韓孝純), 동의금 이경함(李慶涵)·윤수민(尹壽民)·유몽인(柳夢寅), 형방 승지 한찬남(韓纘男)이 참가하였다.】 아뢰기를, "뭇사람들의 의견은 다 평상시 반역 사건을 추국할 때는 반드시 고발한 자의 공초를 먼저 받아가지고 국문하는 근거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계남 등을 고발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입계하는 공사는 모두 정원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차비문(差備門)에다 직접 고발하였으니, 이것은 그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변고를 고발한 자로부터 먼저 공초를 받아야 하겠기에 변고를 고발한 자의 이름을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죄인을 우선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뭇사람들의 의견은 다 평상시 반역 사건을 추국할 때는 반드시 고발한 자의 공초를 먼저 받아가지고 국문하는 근거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계남 등을 고발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입계하는 공사는 모두 정원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차비문(差備門)에다 직접 고발하였으니, 이것은 그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변고를 고발한 자로부터 먼저 공초를 받아야 하겠기에 변고를 고발한 자의 이름을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죄인을 우선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추안(推案)이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공초를 받아야 하겠으나, 익명서(匿名書)를 예사롭게 의논하여 아뢰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의금부 당상관이 전원 참가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판의금부사 박승종이 함께 참가한 다음 추국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계남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바로 김제남과 절친한 얼족(孼族)이다. 나도 처음에 듣고 알았지만 도망친 관계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전 감목관 조경회(趙景淮)가 승전색에게 와서 알렸는데 마침 날이 이미 어두웠다. 혹시 누설되어 도망쳐 숨기라도 할까 염려하여 우선 중종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체포하여 가두라고 하교하였다. 더구나 김계명(金季明)은 당초에 이미 귀양갔으니 계남 등을 국문하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일이 아니다. 이는 반역음모를 고발한 것이 아니고 단지 김제남과 가까운 사람으로서 경운궁 근처에 도망가서 숨었기 때문에 고발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한 것이 아니므로 응당 국문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심하면서 즉시 국문하지 않는다면 저에게는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형벌을 그르치는 처사에 가깝지 않겠는가. 판의금부사가 비록 나와서 참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둘러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추안(推案)이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공초를 받아야 하겠으나, 익명서(匿名書)를 예사롭게 의논하여 아뢰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의금부 당상관이 전원 참가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판의금부사 박승종이 함께 참가한 다음 추국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계남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바로 김제남과 절친한 얼족(孼族)이다. 나도 처음에 듣고 알았지만 도망친 관계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전 감목관 조경회(趙景淮)가 승전색에게 와서 알렸는데 마침 날이 이미 어두웠다. 혹시 누설되어 도망쳐 숨기라도 할까 염려하여 우선 중종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체포하여 가두라고 하교하였다. 더구나 김계명(金季明)은 당초에 이미 귀양갔으니 계남 등을 국문하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일이 아니다. 이는 반역음모를 고발한 것이 아니고 단지 김제남과 가까운 사람으로서 경운궁 근처에 도망가서 숨었기 때문에 고발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한 것이 아니므로 응당 국문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심하면서 즉시 국문하지 않는다면 저에게는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형벌을 그르치는 처사에 가깝지 않겠는가. 판의금부사가 비록 나와서 참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둘러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한옥(韓玉)·황덕부(黃德符)를 이조 좌랑으로, 남이준(南以俊)을 사성(司成)으로, 윤성임(尹聖任)을 문학으로, 정엽(鄭曄)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조정립(曺挺立)을 봉교(奉敎)로, 이대엽(李大燁)을 호조 참의로, 임흥후(任興後)를 겸설서로, 한급(韓昅)을 정언으로, 박자응(朴自凝)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10월 10일 신축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 아뢰기를, "정원을 임금의 후설(喉舌)에 비유하는 것은 의도한 바가 있는 것이니, 이 규범은 2백 년 동안 지켜온 옛 규범입니다. 이 규범이 한번 무너지면 기강을 바로잡을 수가 없고, 이 법이 한번 흔들리면 무엇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예사로운 일에도 규범과 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더구나 역옥(逆獄)은 이 얼마나 큰 문제인데 정원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전하께 진달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2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다만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당시에 화(禍)를 남에게 전가하여 만대에 근심을 끼친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길은 막힌 지 지금 1백 년이나 되었는데 전하의 시대에 또다시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김계남 등의 변고를 고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김계남은 사실 역적 괴수의 잔당입니다. 역적 괴수의 잔당을 정원에다 고발했더라면 명분도 정당하고 말도 자연스러웠을 터인데, 어찌하여 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차비문 밖에 와서 진달함으로써 남곤과 심정의 간사스런 자취를 밟는단 말입니까. 이렇게 고발한 것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일은 남의 자취를 밟는 것보다 쉬운 것이 없으므로 자취를 따라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은 다른 날 남곤·심정의 자취를 따라 남곤·심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연이어 나타나서 화를 전가시키고 근심을 끼치는 짓을 옛날처럼 할까 걱정됩니다. 김계남을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캐낸 다음 후한 상으로 변고를 고발한 사람을 표창하되 엄한 법조문으로 다시 사사로이 고발한 사람을 다스림으로써, 남곤·심정처럼 밤중에 신무문(神武門)에 들어가는 길을 막도록 하소서. 신이 어제 추국청에 들어갔더니, 대신 이하가 변고를 고발한 자가 누구냐고 신에게 물었습니다. 신이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한탄하기를 ‘이것은 2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없던 사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분개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구구하고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여 잘 살피도록 하소서." 하였다.
"정원을 임금의 후설(喉舌)에 비유하는 것은 의도한 바가 있는 것이니, 이 규범은 2백 년 동안 지켜온 옛 규범입니다. 이 규범이 한번 무너지면 기강을 바로잡을 수가 없고, 이 법이 한번 흔들리면 무엇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예사로운 일에도 규범과 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더구나 역옥(逆獄)은 이 얼마나 큰 문제인데 정원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전하께 진달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2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다만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당시에 화(禍)를 남에게 전가하여 만대에 근심을 끼친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길은 막힌 지 지금 1백 년이나 되었는데 전하의 시대에 또다시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김계남 등의 변고를 고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김계남은 사실 역적 괴수의 잔당입니다. 역적 괴수의 잔당을 정원에다 고발했더라면 명분도 정당하고 말도 자연스러웠을 터인데, 어찌하여 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차비문 밖에 와서 진달함으로써 남곤과 심정의 간사스런 자취를 밟는단 말입니까. 이렇게 고발한 것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일은 남의 자취를 밟는 것보다 쉬운 것이 없으므로 자취를 따라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은 다른 날 남곤·심정의 자취를 따라 남곤·심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연이어 나타나서 화를 전가시키고 근심을 끼치는 짓을 옛날처럼 할까 걱정됩니다.
김계남을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캐낸 다음 후한 상으로 변고를 고발한 사람을 표창하되 엄한 법조문으로 다시 사사로이 고발한 사람을 다스림으로써, 남곤·심정처럼 밤중에 신무문(神武門)에 들어가는 길을 막도록 하소서.
신이 어제 추국청에 들어갔더니, 대신 이하가 변고를 고발한 자가 누구냐고 신에게 물었습니다. 신이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한탄하기를 ‘이것은 2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없던 사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분개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구구하고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여 잘 살피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궐 뜰에서 추국(推鞫)을 실시하였다.
족친위(族親衛) 김계남(金季男)이 공초하였다. "김제남(金悌男)이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는 이조의 하인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제남이 부원군이 되어 말하기를, ‘배종하는 서리도 오히려 녹공(錄功)할 수 있는데, 더구나 너는 이조의 하인인 데다가 성도 나와 같으니, 바로 친족이다.’라고 하면서 족친위(族親衛)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글을 올려 족친위로 기록된 것을 고쳐 이조에 도로 소속되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제남이 올리려던 글의 초고를 찢어버렸습니다. 갑진·을사년 사이에는 공주방 장무(公主房掌務)로 차정되어, 호조안(戶曺案)에 올라 있는 주인없는 노비와 묵어버린 제언(堤堰)을 수소문하도록 하였습니다. 본래 술이나 마시며 떠돌던 사람으로서 아무런 계려도 없었는데, 이 일을 호조 판서 윤형(尹泂)에게 보고하니, 윤형이 말하기를 ‘공주의 나이는 몇 살인가?’ 하여, 두 살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윤형이 말하기를 ‘두 살 난 공주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즉시 잡아 끌어내게 하였습니다. 용렬하고 무능하여 언문도 알지 못하는 처지여서 즉시 밀려났습니다. 밀려난 뒤로는 도감의 사령으로 있기도 하고 사무를 보기도 하면서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였습니다. 그후 김제남은 신을 미워하여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미워하고 있는데 어찌 함께 반역을 음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김제남이 설사 반역을 음모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사령의 무리들과 함께 공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석정동에 원래부터 살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반역을 음모하기 위해서 이 동리에 살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김제남이 미워하여 심부름도 전혀 시키지 않았으며, 친척이 드나든 사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패거리가 되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이 어찌 이치에 닿는 것이겠습니까."
"김제남(金悌男)이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는 이조의 하인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제남이 부원군이 되어 말하기를, ‘배종하는 서리도 오히려 녹공(錄功)할 수 있는데, 더구나 너는 이조의 하인인 데다가 성도 나와 같으니, 바로 친족이다.’라고 하면서 족친위(族親衛)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글을 올려 족친위로 기록된 것을 고쳐 이조에 도로 소속되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제남이 올리려던 글의 초고를 찢어버렸습니다. 갑진·을사년 사이에는 공주방 장무(公主房掌務)로 차정되어, 호조안(戶曺案)에 올라 있는 주인없는 노비와 묵어버린 제언(堤堰)을 수소문하도록 하였습니다. 본래 술이나 마시며 떠돌던 사람으로서 아무런 계려도 없었는데, 이 일을 호조 판서 윤형(尹泂)에게 보고하니, 윤형이 말하기를 ‘공주의 나이는 몇 살인가?’ 하여, 두 살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윤형이 말하기를 ‘두 살 난 공주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즉시 잡아 끌어내게 하였습니다. 용렬하고 무능하여 언문도 알지 못하는 처지여서 즉시 밀려났습니다. 밀려난 뒤로는 도감의 사령으로 있기도 하고 사무를 보기도 하면서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였습니다.
그후 김제남은 신을 미워하여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미워하고 있는데 어찌 함께 반역을 음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김제남이 설사 반역을 음모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사령의 무리들과 함께 공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석정동에 원래부터 살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반역을 음모하기 위해서 이 동리에 살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김제남이 미워하여 심부름도 전혀 시키지 않았으며, 친척이 드나든 사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패거리가 되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이 어찌 이치에 닿는 것이겠습니까."
군기시 하전(下典) 오응난(吳應難)이 공초하였다. "본래 화살을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원래부터 석정동에 살았습니다. 장인 김계남도 역시 용렬한 사람입니다. 어찌 반역을 음모한 사실이 있었겠습니까. 해마다의 호적을 가져다 상고한다면 도망치지 않은 정상과 원래부터 석정동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화살을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원래부터 석정동에 살았습니다. 장인 김계남도 역시 용렬한 사람입니다. 어찌 반역을 음모한 사실이 있었겠습니까. 해마다의 호적을 가져다 상고한다면 도망치지 않은 정상과 원래부터 석정동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응난의 아들 오충선(吳忠善)이 공초하였다. "이조의 하인이었는데, 좌랑 이위경(李偉卿)의 청지기가 되어 아침에 갔다가 저물면 돌아왔기 때문에 아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족친위 명단에서 제명된 후 여러 곳에서 역(役)을 섰고, 아버지는 화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여 이밖에는 오가면서 한 일이 없습니다."
"이조의 하인이었는데, 좌랑 이위경(李偉卿)의 청지기가 되어 아침에 갔다가 저물면 돌아왔기 때문에 아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족친위 명단에서 제명된 후 여러 곳에서 역(役)을 섰고, 아버지는 화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여 이밖에는 오가면서 한 일이 없습니다."
김계남의 아내인 내수사 여종 애옥(愛玉)이 공초하였다. "본래 내수사의 하전이었는데, 전 남편이 죽은 후에 계남에게 시집갔습니다. 계남은 선조 때부터 원래 석정동에서 살았고 처음에 도망친 것이 아니며, 또 공초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반역음모한 사실과 심복이 되고 잔당이 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본래 내수사의 하전이었는데, 전 남편이 죽은 후에 계남에게 시집갔습니다. 계남은 선조 때부터 원래 석정동에서 살았고 처음에 도망친 것이 아니며, 또 공초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반역음모한 사실과 심복이 되고 잔당이 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전의감 참봉 김진(金軫)이 공초하였다. "우선 출생 신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수진궁(壽進宮)의 종이었는데, 태어난 후 겨우 13일만에 어미가 죽었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동생인 한원(韓元)이 저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아명(兒名)은 진(軫)이었으나, 성장하여서는 한원의 집에서 길러주었다 하여 찬한(纘韓)이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김계남의 모주(謀主)라는 말에 대해서는, 수양아버지의 조카인 홍계한(洪繼韓)도 일찍이 한원의 집에서 데려다 길러주었으므로 신과 함께 서로 수양아들이 되려고 다투었으며, 계한의 누이동생도 수양아버지의 조카딸 이었는데 물건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느라 이런 불측한 말을 조작해낸 것인데, 포도청에서는 뜬소문을 듣고 체포할 것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신은 계남과 본래 서로 친분 관계도 없었고 또 계남의 집에 드나든 일도 없었습니다. 단지 전날 잠시동안 역적 이의(李㼁)의 종노릇한 것을 가지고 대뜸 종지(宗旨)를 삼고 있습니다만, 잇따라 수양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5, 6년 간 전혀 대궐 안에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신(贖身)하려고 하다가 이 때문에 형장을 두세 번 맞고 나서는 그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계축년에는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일보는 사람들 축에 들어 천인 신분을 면제받았으며, 바로 전의감(典醫監)에 소속되어 녹봉까지 받았고, 과거 초시(初試)에 합격되었으므로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항상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김계남과 공모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필시 이것은 서로 다툰 수양아들이 조작해낸 말일 것입니다. 이자들은 역시 일찍이 사헌부에 청탁하여 죄를 받게 하였는데, 지금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이런 말을 지어낸 사람을 서로 대질 신문하게 한다면 애매한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출생 신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수진궁(壽進宮)의 종이었는데, 태어난 후 겨우 13일만에 어미가 죽었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동생인 한원(韓元)이 저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아명(兒名)은 진(軫)이었으나, 성장하여서는 한원의 집에서 길러주었다 하여 찬한(纘韓)이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김계남의 모주(謀主)라는 말에 대해서는, 수양아버지의 조카인 홍계한(洪繼韓)도 일찍이 한원의 집에서 데려다 길러주었으므로 신과 함께 서로 수양아들이 되려고 다투었으며, 계한의 누이동생도 수양아버지의 조카딸 이었는데 물건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느라 이런 불측한 말을 조작해낸 것인데, 포도청에서는 뜬소문을 듣고 체포할 것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신은 계남과 본래 서로 친분 관계도 없었고 또 계남의 집에 드나든 일도 없었습니다. 단지 전날 잠시동안 역적 이의(李㼁)의 종노릇한 것을 가지고 대뜸 종지(宗旨)를 삼고 있습니다만, 잇따라 수양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5, 6년 간 전혀 대궐 안에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신(贖身)하려고 하다가 이 때문에 형장을 두세 번 맞고 나서는 그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계축년에는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일보는 사람들 축에 들어 천인 신분을 면제받았으며, 바로 전의감(典醫監)에 소속되어 녹봉까지 받았고, 과거 초시(初試)에 합격되었으므로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항상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김계남과 공모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필시 이것은 서로 다툰 수양아들이 조작해낸 말일 것입니다. 이자들은 역시 일찍이 사헌부에 청탁하여 죄를 받게 하였는데, 지금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이런 말을 지어낸 사람을 서로 대질 신문하게 한다면 애매한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김계남 등의 공초가 이와 같은데, 김효선(金孝先)은 13세이고, 김계선(金繼先)은 9세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다 ‘전부터 이처럼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은 공초를 받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에 효선과 계선은 진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진(金軫)은 그의 말을 가지고 증빙을 삼을 수 없으니, 김진의 공초에서 말한 홍계한을 붙잡아다 대질 신문시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진은 포도청이 아뢰어 붙잡아 가둔 죄인이기 때문에 신들이 종사관 최택선(崔擇善)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낙천군(洛川君) 김개(金闓)가 그날 이른 아침 대장 한희길(韓希吉)에게 와서 자기 손으로 김계남의 주모자 김진의 이름을 써서 주고 붙잡아다 신문할 것을 제의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김개가 필경 김진의 반역 죄상을 알기 때문에 희길에게 와서 이와 같이 써준 것이다. 김개를 붙잡아다 그 곡절을 신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개는 아직 붙잡아다 신문하지 말라." 하였다.
"김계남 등의 공초가 이와 같은데, 김효선(金孝先)은 13세이고, 김계선(金繼先)은 9세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다 ‘전부터 이처럼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은 공초를 받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에 효선과 계선은 진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진(金軫)은 그의 말을 가지고 증빙을 삼을 수 없으니, 김진의 공초에서 말한 홍계한을 붙잡아다 대질 신문시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진은 포도청이 아뢰어 붙잡아 가둔 죄인이기 때문에 신들이 종사관 최택선(崔擇善)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낙천군(洛川君) 김개(金闓)가 그날 이른 아침 대장 한희길(韓希吉)에게 와서 자기 손으로 김계남의 주모자 김진의 이름을 써서 주고 붙잡아다 신문할 것을 제의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김개가 필경 김진의 반역 죄상을 알기 때문에 희길에게 와서 이와 같이 써준 것이다. 김개를 붙잡아다 그 곡절을 신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개는 아직 붙잡아다 신문하지 말라."
하였다.
좌윤 김개(金闓)가 상소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허균이 신에게 서찰을 보내 말하기를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괴수이니 급히 대장에게 통지하여 이를 붙잡아 엄하게 신문한다면 종묘와 사직의 복이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지난일을 징계하여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수 없어서 대장에게 통지는 하였습니다만, 김진의 사람됨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허균이 신에게 서찰을 보내 말하기를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괴수이니 급히 대장에게 통지하여 이를 붙잡아 엄하게 신문한다면 종묘와 사직의 복이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지난일을 징계하여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수 없어서 대장에게 통지는 하였습니다만, 김진의 사람됨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추국청이 회계하기를, "김개의 상소에 대하여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역적사건과 같이 막중한 일을 들었으면 마땅히 정원에 바로 아뢰었어야 하는데 바로 아뢰지 않고 단지 포도청에만 알렸습니다. 대체로 포도청은 바로 일반적인 도적을 체포하는 곳이지 역적을 붙잡아다 문초하는 곳이 아닌데 대장에게만 말하고 만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허균은 이 엄청난 말을 듣고도 직접 아뢰지 않고, 김개를 시켜 대장에게 말하게 하기를 마치 좀도둑이나 절도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옥사(獄事)인데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문초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그 상소 중에 지적한 사람이 있으니, 맨처음 말한 사람으로 지적된 자를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고, 김개와 허균은 우선 붙잡아다 문초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현응민(玄應旻)·차극룡(車克龍)을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여 처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김개의 상소에 대하여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역적사건과 같이 막중한 일을 들었으면 마땅히 정원에 바로 아뢰었어야 하는데 바로 아뢰지 않고 단지 포도청에만 알렸습니다. 대체로 포도청은 바로 일반적인 도적을 체포하는 곳이지 역적을 붙잡아다 문초하는 곳이 아닌데 대장에게만 말하고 만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허균은 이 엄청난 말을 듣고도 직접 아뢰지 않고, 김개를 시켜 대장에게 말하게 하기를 마치 좀도둑이나 절도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옥사(獄事)인데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문초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그 상소 중에 지적한 사람이 있으니, 맨처음 말한 사람으로 지적된 자를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고, 김개와 허균은 우선 붙잡아다 문초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현응민(玄應旻)·차극룡(車克龍)을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여 처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0월 11일 임인
사간원이 아뢰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본원(本院)에서 세 번이나 서경(署經)을 넘겼으니, 체차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눌은 국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무슨 서경을 넘길 만한 죄가 있겠는가. 지난해에는 과거시험의 합격을 취소하기를 청하고, 이번에는 체차시키기를 논의하니, 어찌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본원(本院)에서 세 번이나 서경(署經)을 넘겼으니, 체차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눌은 국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무슨 서경을 넘길 만한 죄가 있겠는가. 지난해에는 과거시험의 합격을 취소하기를 청하고, 이번에는 체차시키기를 논의하니, 어찌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금부가 홍계한(洪繼韓)을 잡아다 가두었다.
형조 판서 허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얼족(孼族) 현응민이 와서 하는 말이 ‘김제남의 친족으로 도망 중에 있는 죄인 김계남이 은밀히 오영난(吳永難)의 집에 오가는데 행동이 수상하다.’고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응민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내가 아는 차극룡(車克龍)이란 자가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차극룡이 신을 보고 말하기를 ‘김제남의 반역 음모는 계남이 필시 모를 리가 없다. 만일 김계남 등이 흉측한 음모가 없었다면 몰라도 반역 음모를 꾀하였다면 김진이 필시 먼저 선동하였을 것이다. 전후하여 발생한 흉칙하고 요사스러운 일은 이 무리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입계하니,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얼족(孼族) 현응민이 와서 하는 말이 ‘김제남의 친족으로 도망 중에 있는 죄인 김계남이 은밀히 오영난(吳永難)의 집에 오가는데 행동이 수상하다.’고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응민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내가 아는 차극룡(車克龍)이란 자가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차극룡이 신을 보고 말하기를 ‘김제남의 반역 음모는 계남이 필시 모를 리가 없다. 만일 김계남 등이 흉측한 음모가 없었다면 몰라도 반역 음모를 꾀하였다면 김진이 필시 먼저 선동하였을 것이다. 전후하여 발생한 흉칙하고 요사스러운 일은 이 무리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입계하니,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오응난에게 형장을 가한 다음 엄하게 국문하라."
"오응난에게 형장을 가한 다음 엄하게 국문하라."
전교하였다. "김계남은 공주(公主)의 장무관(掌務官)이 되어 김제남(金悌男)과 응희(應希)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그가 김제남과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상세하게 국문하라. 그의 동생과 김제남의 절친한 심복들을 낱낱이 다 엄하게 국문해서 사실을 밝혀낸 다음 아뢰도록 하라. 만일 새로 들어온 죄인이 있을 경우 추국청은 지레 끝내지 말고 전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끝내도록 하라."
"김계남은 공주(公主)의 장무관(掌務官)이 되어 김제남(金悌男)과 응희(應希)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그가 김제남과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상세하게 국문하라. 그의 동생과 김제남의 절친한 심복들을 낱낱이 다 엄하게 국문해서 사실을 밝혀낸 다음 아뢰도록 하라. 만일 새로 들어온 죄인이 있을 경우 추국청은 지레 끝내지 말고 전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끝내도록 하라."
한찬남이 아뢰기를, "신이 추국청에 있으면서 추국에 참가했을 때 황연도(黃延道) 우봉현(牛峰縣)의 급창(急唱)인 만복(萬福), 관노인 대복(大福), 형리인 세향(世香), 우봉 현령의 남종인 포수 문덕남(文德男) 등 4명이, 도망간 역적 김제남의 남종 북간(北間)을 붙잡아 와서 고하기를 ‘이달 15일에 우봉 현령 이무림(李茂林)의 지휘를 받아 북간의 용모와 나이를 가지고, 만복 등 4명이 밤새도록 찾아 다니다가 서울 안의 고례조동(古禮曺洞) 앞길에 당도하여 그를 체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보고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서둘러서 붙잡아다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신이 추국청에 있으면서 추국에 참가했을 때 황연도(黃延道) 우봉현(牛峰縣)의 급창(急唱)인 만복(萬福), 관노인 대복(大福), 형리인 세향(世香), 우봉 현령의 남종인 포수 문덕남(文德男) 등 4명이, 도망간 역적 김제남의 남종 북간(北間)을 붙잡아 와서 고하기를 ‘이달 15일에 우봉 현령 이무림(李茂林)의 지휘를 받아 북간의 용모와 나이를 가지고, 만복 등 4명이 밤새도록 찾아 다니다가 서울 안의 고례조동(古禮曺洞) 앞길에 당도하여 그를 체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보고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서둘러서 붙잡아다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충찬위 홍계한(洪繼韓)이 공초하였다. "‘수양아들이 자기 물건이라고 서로 다투었다.’고 말했는데, 신은 바로 그의 형입니다. 그렇다면 형조에 고하거나 한성부에 고하거나 하여 판결하도록 할 것이지 어찌 모함하기 위하여 불측한 말을 조작하였겠습니까. 양아버지의 물건들은 양어머니가 현재 가지고 있으므로 신은 그와 별로 서로 다툴 물건이 없습니다. 한 곳에서 따져 묻는다면 모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진(金軫)이 포도청에 붙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포도청에 물어본다면 김진을 참소했는지의 여부가 또한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니, 그를 놓아보냈다.
"‘수양아들이 자기 물건이라고 서로 다투었다.’고 말했는데, 신은 바로 그의 형입니다. 그렇다면 형조에 고하거나 한성부에 고하거나 하여 판결하도록 할 것이지 어찌 모함하기 위하여 불측한 말을 조작하였겠습니까. 양아버지의 물건들은 양어머니가 현재 가지고 있으므로 신은 그와 별로 서로 다툴 물건이 없습니다. 한 곳에서 따져 묻는다면 모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진(金軫)이 포도청에 붙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포도청에 물어본다면 김진을 참소했는지의 여부가 또한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니, 그를 놓아보냈다.
오응난(吳應難)에게 1 차 형벌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압슬형을 가하였다.
10월 12일 계묘
비변사 낭청이 영의정과 우의정의 뜻으로 아뢰기를,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몽학(李夢鶴)을 붙잡을 때의 토포사(討捕使)는 무관(武官)이 하였고, 정여립(鄭汝立)을 붙잡을 때의 독포사(督捕使)는 문관(文官)이 하였으며, 정숙하(鄭淑夏)는 당하관으로서 기축년 겨울 충청도 독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문관을 독포사로 삼는다면 병조에서 차출하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사에서 문관으로 선출하여 의망하라." 하였다.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몽학(李夢鶴)을 붙잡을 때의 토포사(討捕使)는 무관(武官)이 하였고, 정여립(鄭汝立)을 붙잡을 때의 독포사(督捕使)는 문관(文官)이 하였으며, 정숙하(鄭淑夏)는 당하관으로서 기축년 겨울 충청도 독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문관을 독포사로 삼는다면 병조에서 차출하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사에서 문관으로 선출하여 의망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영천(榮川)의 적변은 이전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군수 조찬한(趙纘韓)은, 이미 수직(守直)을 강화하지 못하여 도적들로 하여금 옥문을 부수고 옥졸을 살해하게 하였으며, 또 제때에 체포하지 못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갇혀 있는 저희 패거리를 빼내어가게 하였으니, 조찬한은 물론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감사 윤훤(尹暄)은 부당하게 찬한을 비호하여 심지어는 ‘도적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비밀에 속한 장계(狀啓)는 응당 별도의 군관(軍官)을 파견하여 성화같이 치계했어야 하는데 예사롭게 파발에게 부쳤다가 중간에서 뜯어보게 하였으니 매우 소홀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영천(榮川)의 적변은 이전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군수 조찬한(趙纘韓)은, 이미 수직(守直)을 강화하지 못하여 도적들로 하여금 옥문을 부수고 옥졸을 살해하게 하였으며, 또 제때에 체포하지 못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갇혀 있는 저희 패거리를 빼내어가게 하였으니, 조찬한은 물론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감사 윤훤(尹暄)은 부당하게 찬한을 비호하여 심지어는 ‘도적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비밀에 속한 장계(狀啓)는 응당 별도의 군관(軍官)을 파견하여 성화같이 치계했어야 하는데 예사롭게 파발에게 부쳤다가 중간에서 뜯어보게 하였으니 매우 소홀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서경(署經)하는 법은, 반드시 그 사람의 문벌과 행동을 보아가지고 내주거나 보류하거나 하는 것이니, 이는 2백 년 동안 내려오는 옛 규례입니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문벌이 미천하고 행동이 막되어서 세 번씩 보류하였는데, 이는 사실 온 나라의 공론에 의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비답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고 하시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선왕의 법이고, 시행해야 할 것도 선왕의 법입니다. 이제 만일 하찮은 심눌 한 사람의 문제로 해서 선대의 영원한 규례를 폐지한다면, 뒷날의 폐단은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나라는 나라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양덕 현감 심눌을 속히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 간원이 날마다 연계하고 헌부도 논집하여 양사가 함께 발론하였는데, 한 달이 넘도록 극력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심눌은 바로 심우공(沈友恭)의 얼자(孽子)로 심우공의 어미는 기생으로서 유씨(兪氏)에게 관계하여 심우공을 낳았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다 유우공(兪友恭) 또는 유눌(兪訥)이라고 불렀다. 심눌(沈訥)은 추잡하고 교활하였는데, 승종(承宗)에게 잘 보여 그 집 종이 된 다음 궁중에 뇌물을 써서 총애를 듬뿍 받아 등용되었다. 지난해 특별히 무과에 급제되었다가 박탈당하였는데, 지금 또 양덕 현감으로 임명한 것이다.
"국가에서 서경(署經)하는 법은, 반드시 그 사람의 문벌과 행동을 보아가지고 내주거나 보류하거나 하는 것이니, 이는 2백 년 동안 내려오는 옛 규례입니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문벌이 미천하고 행동이 막되어서 세 번씩 보류하였는데, 이는 사실 온 나라의 공론에 의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비답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고 하시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선왕의 법이고, 시행해야 할 것도 선왕의 법입니다. 이제 만일 하찮은 심눌 한 사람의 문제로 해서 선대의 영원한 규례를 폐지한다면, 뒷날의 폐단은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나라는 나라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양덕 현감 심눌을 속히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 간원이 날마다 연계하고 헌부도 논집하여 양사가 함께 발론하였는데, 한 달이 넘도록 극력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심눌은 바로 심우공(沈友恭)의 얼자(孽子)로 심우공의 어미는 기생으로서 유씨(兪氏)에게 관계하여 심우공을 낳았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다 유우공(兪友恭) 또는 유눌(兪訥)이라고 불렀다. 심눌(沈訥)은 추잡하고 교활하였는데, 승종(承宗)에게 잘 보여 그 집 종이 된 다음 궁중에 뇌물을 써서 총애를 듬뿍 받아 등용되었다. 지난해 특별히 무과에 급제되었다가 박탈당하였는데, 지금 또 양덕 현감으로 임명한 것이다.
10월 13일 갑진
전교하였다. "두 궁전의 각 전각 상량문(上樑文)을 미처 지어 올리지 않아 군색한 일이 많으니 매우 부당하다. 앞으로는 각 전각의 상량문은 기일보다 7, 8일 전에 미리 계하(啓下)받아 조용히 지어서 올릴 것을 도감에 말하도록 하라."
"두 궁전의 각 전각 상량문(上樑文)을 미처 지어 올리지 않아 군색한 일이 많으니 매우 부당하다. 앞으로는 각 전각의 상량문은 기일보다 7, 8일 전에 미리 계하(啓下)받아 조용히 지어서 올릴 것을 도감에 말하도록 하라."
사간원이 심눌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답하기를, "오늘날 세상에 서파(庶派)로 수령이 된 자가 심눌 한 사람만이 아니다. 대간의 풍채가 심눌을 공격하는 데만 치중하는데,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것이 우습기만 하다." 하였다.
"오늘날 세상에 서파(庶派)로 수령이 된 자가 심눌 한 사람만이 아니다. 대간의 풍채가 심눌을 공격하는 데만 치중하는데,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것이 우습기만 하다."
하였다.
판의금 박승종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절박한 심정을 잘 알았다. 다만 범죄사건을 국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이 누구보다도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알고 있으니, 굳이 사임하지 말고 조리를 잘하여 출사한 다음 범죄사건을 완결짓도록 하라." 하였다.
"차자를 보고 경의 절박한 심정을 잘 알았다. 다만 범죄사건을 국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이 누구보다도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알고 있으니, 굳이 사임하지 말고 조리를 잘하여 출사한 다음 범죄사건을 완결짓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을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관리들이 엄하게 제재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혹은 공문을 띄우기도 하고 혹은 전옥서에 직접 가두기도 하는데, 전옥의 관리는 스스로 사정(私情)을 쓰지 않으면 남의 청탁을 인하여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제멋대로 놓아줌으로써 죄를 저지른 자로 하여금 징계할 데가 없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심은 극도로 모질고 교묘하게 모면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계하(啓下)한 중대한 죄수도 다 자기 집에 나가서 자게 하고 있으니, 옥리(獄吏)와 옥졸(獄卒)이 중간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다 관리가 먼저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전옥서(典獄署)에서 오늘 수직한 관리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도적의 무리들이 패거리로 가서 관청의 옥문을 부수고 저희 무리를 빼내가면서 수직(守直)하던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으니, 이보다 더 큰 비상한 변고가 없습니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찬한(趙纘韓)은 평상시에 일처리를 잘하지 못하여 이미 도적떼가 와서 날뛰게 하였고, 변고를 만난 후에도 수색하여 즉시 체포하지 않았으니, 관직에 있으면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예사롭게 보아 줄 수 없습니다. 잡아다 신문하소서. 본도의 감사는, 평상시에 수령을 엄하게 경계하지 못하여 이런 변고를 초래하였다면, 변고가 발생한 후에는 마땅히 먼저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고 도적을 붙잡지 못한 군수에게 죄줄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태연히 범범하게 아뢰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변고를 예사로운 일처럼 보고서 그저 파발로 전송한 결과 도중에서 뜯어보게 하였으니, 그의 실책이 이미 큽니다. 심지어는 죄있는 군수를 부당하게 비호하여 도리어 ‘있는 힘을 다했다.’는 말을 해서 군수가 죄를 면할 수 있는 바탕이 되게 하였으니, 일에 당면하여 전도되게 하고 사정에 끌려 비호한 그의 실책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 윤훤(尹暄)을 파직하소서. 추국하는 규정은 엄격하여 대신과 양사의 관리들이 반드시 다 참가한 다음에 진행하니, 이는 임금이 친히 참가하는 때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조정의 기강이 없어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만 추구할 줄 아는데, 새로 벼슬길에 나선 자들이 더욱 심합니다. 지난번 대궐 뜰에서 죄인 신문이 날마다 계속되었는데 의금부 낭청으로서 집에 편안히 있으면서 공공연하게 출사하지 않은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것이 어느 시절의 습성이란 말입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칩니다. 출사하지 않은 낭청을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소서. 윗자리에 있는 장무관(掌務官)은 매사를 예사롭게 여기는 것이 버릇이 되어 단속할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습성이 점점 자라게 하고 있으니, 잘못이 큽니다. 그를 파직시켜서 추국청의 체면을 무겁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금부 도사는 아울러 추고하라. 조찬한과 윤훤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근래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관리들이 엄하게 제재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혹은 공문을 띄우기도 하고 혹은 전옥서에 직접 가두기도 하는데, 전옥의 관리는 스스로 사정(私情)을 쓰지 않으면 남의 청탁을 인하여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제멋대로 놓아줌으로써 죄를 저지른 자로 하여금 징계할 데가 없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심은 극도로 모질고 교묘하게 모면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계하(啓下)한 중대한 죄수도 다 자기 집에 나가서 자게 하고 있으니, 옥리(獄吏)와 옥졸(獄卒)이 중간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다 관리가 먼저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전옥서(典獄署)에서 오늘 수직한 관리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도적의 무리들이 패거리로 가서 관청의 옥문을 부수고 저희 무리를 빼내가면서 수직(守直)하던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으니, 이보다 더 큰 비상한 변고가 없습니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찬한(趙纘韓)은 평상시에 일처리를 잘하지 못하여 이미 도적떼가 와서 날뛰게 하였고, 변고를 만난 후에도 수색하여 즉시 체포하지 않았으니, 관직에 있으면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예사롭게 보아 줄 수 없습니다. 잡아다 신문하소서.
본도의 감사는, 평상시에 수령을 엄하게 경계하지 못하여 이런 변고를 초래하였다면, 변고가 발생한 후에는 마땅히 먼저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고 도적을 붙잡지 못한 군수에게 죄줄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태연히 범범하게 아뢰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변고를 예사로운 일처럼 보고서 그저 파발로 전송한 결과 도중에서 뜯어보게 하였으니, 그의 실책이 이미 큽니다. 심지어는 죄있는 군수를 부당하게 비호하여 도리어 ‘있는 힘을 다했다.’는 말을 해서 군수가 죄를 면할 수 있는 바탕이 되게 하였으니, 일에 당면하여 전도되게 하고 사정에 끌려 비호한 그의 실책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 윤훤(尹暄)을 파직하소서.
추국하는 규정은 엄격하여 대신과 양사의 관리들이 반드시 다 참가한 다음에 진행하니, 이는 임금이 친히 참가하는 때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조정의 기강이 없어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만 추구할 줄 아는데, 새로 벼슬길에 나선 자들이 더욱 심합니다. 지난번 대궐 뜰에서 죄인 신문이 날마다 계속되었는데 의금부 낭청으로서 집에 편안히 있으면서 공공연하게 출사하지 않은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것이 어느 시절의 습성이란 말입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칩니다. 출사하지 않은 낭청을 먼저 붙잡아다 문초하소서.
윗자리에 있는 장무관(掌務官)은 매사를 예사롭게 여기는 것이 버릇이 되어 단속할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습성이 점점 자라게 하고 있으니, 잘못이 큽니다. 그를 파직시켜서 추국청의 체면을 무겁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금부 도사는 아울러 추고하라. 조찬한과 윤훤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10월 15일 병오
장악 도감(掌樂都監)이 아뢰기를, "이달 7일 궁중에서 예행연습을 할 때 나오지 않은 기생이 있다고 하기에 신들이 적발하여 입계(入啓)해서 죄줄 것을 청하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의식을 연습하는 날 이와 같은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신 이충(李沖)이 대궐문을 열기를 기다려 급히 대궐로 들어갔는데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는 자가 5, 6명이나 되었습니다. 엄하게 독촉하여 나오게 한 결과로 비록 여러 기생들이 대궐 안에 들어올 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모두 대궐 뜰 안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생 해어화(解語花)는 두세 번이나 나오기를 재촉하였는데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실로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대궐 안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기생은 본 장악원에서 엄중하게 다스리겠습니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해어화는 유사로 하여금 가두게 하고 율문에 의하여 엄중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오도록 독촉하여 대례에 참여하게 하고, 아직은 감금하여 죄를 부과하지 말라. 앞으로 또 거절하고 참가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중한 법으로 다스리고 가장은 파직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신칙해서 거행하라." 하였다.
"이달 7일 궁중에서 예행연습을 할 때 나오지 않은 기생이 있다고 하기에 신들이 적발하여 입계(入啓)해서 죄줄 것을 청하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의식을 연습하는 날 이와 같은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신 이충(李沖)이 대궐문을 열기를 기다려 급히 대궐로 들어갔는데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는 자가 5, 6명이나 되었습니다. 엄하게 독촉하여 나오게 한 결과로 비록 여러 기생들이 대궐 안에 들어올 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모두 대궐 뜰 안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생 해어화(解語花)는 두세 번이나 나오기를 재촉하였는데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실로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대궐 안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기생은 본 장악원에서 엄중하게 다스리겠습니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해어화는 유사로 하여금 가두게 하고 율문에 의하여 엄중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오도록 독촉하여 대례에 참여하게 하고, 아직은 감금하여 죄를 부과하지 말라. 앞으로 또 거절하고 참가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중한 법으로 다스리고 가장은 파직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신칙해서 거행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요즘의 폐단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 고식적으로만 처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리들이 직무에 태만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멸시하고 새로 등용된 관리가 오랜 관리를 하찮게 여기는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추국하는 날 미관말직인 금부의 낭청이 버젓이 집에 있었으니, 이와 같은 죄는 예사로운 죄와는 다릅니다. 만일 추고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런 죄보다 가벼운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문책하지도 않겠다는 것입니까. 추고로 인하여 파직된 사람을 요즘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털끝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지나치게 옹호해주는 잘못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속히 잡아다 문초하소서. 윗자리에 있는 장무관은 단속하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굴게 하였으니, 또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추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 하였다.
"요즘의 폐단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 고식적으로만 처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리들이 직무에 태만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멸시하고 새로 등용된 관리가 오랜 관리를 하찮게 여기는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추국하는 날 미관말직인 금부의 낭청이 버젓이 집에 있었으니, 이와 같은 죄는 예사로운 죄와는 다릅니다. 만일 추고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런 죄보다 가벼운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문책하지도 않겠다는 것입니까. 추고로 인하여 파직된 사람을 요즘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털끝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지나치게 옹호해주는 잘못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속히 잡아다 문초하소서.
윗자리에 있는 장무관은 단속하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굴게 하였으니, 또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추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
하였다.
대궐 뜰에서 죄인을 추국하였다. 가설주부(加設主簿) 현응민(玄應旻)을 추국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 미천한 사람인데, 난리를 겪은 후에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을 얻게 되었으므로 마음속에 늘 감격하여 나라를 배반한 역적이 있기만 하면 꼭 붙잡겠노라고 다짐해 왔습니다. 9월 20일 경에 모전(毛前) 근처에서 알고 지내던 차극룡(車克龍)이 말하기를 ‘오늘 군기시 앞에서 김계남이 얼굴을 가리고 동구로 들어갔다. 계남은 바로 김제남의 친족으로서 처음에 도망하여 붙잡지 못한 사람이다. 그대와 함께 협력해서 붙잡았으면 한다.’ 하기에, 답하기를 ‘그가 머무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고 하니, 극룡이 말하기를 ‘군기시의 근처에 있는 김계남의 사위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8촌인 허 판서(許判書)에게 가서 말하니, 판서는 말하기를 ‘네가 자세히 알아보고 붙잡아서 고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6일 허 판서가 작은 종이 쪽지에 글을 써 주면서 낙천군(洛川君)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7일에 낙천군이 허 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김계남은 이미 승전(承傳)에 의하여 붙잡혔기 때문에 우리들은 공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차극룡이 허 판서에게 와서 김진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김진은 전에 임해군 시학청 별감(侍學廳別監)의 행수(行首)로서 처음에 도망쳤다가 요사이 서울에 들어와서 이름을 찬한(纘韓)으로 고치고 의관이 되었다. 이 사람은 글에 능숙하고 약싹빠른데 이놈의 죄는 김계남과 차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허 판서가 작은 종이 쪽지에 편지를 써서 낙천군에게 보내는 것을 곁에서 보았을 뿐이고, 김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였다.
"신은 본래 미천한 사람인데, 난리를 겪은 후에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을 얻게 되었으므로 마음속에 늘 감격하여 나라를 배반한 역적이 있기만 하면 꼭 붙잡겠노라고 다짐해 왔습니다.
9월 20일 경에 모전(毛前) 근처에서 알고 지내던 차극룡(車克龍)이 말하기를 ‘오늘 군기시 앞에서 김계남이 얼굴을 가리고 동구로 들어갔다. 계남은 바로 김제남의 친족으로서 처음에 도망하여 붙잡지 못한 사람이다. 그대와 함께 협력해서 붙잡았으면 한다.’ 하기에, 답하기를 ‘그가 머무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고 하니, 극룡이 말하기를 ‘군기시의 근처에 있는 김계남의 사위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8촌인 허 판서(許判書)에게 가서 말하니, 판서는 말하기를 ‘네가 자세히 알아보고 붙잡아서 고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6일 허 판서가 작은 종이 쪽지에 글을 써 주면서 낙천군(洛川君)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7일에 낙천군이 허 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김계남은 이미 승전(承傳)에 의하여 붙잡혔기 때문에 우리들은 공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차극룡이 허 판서에게 와서 김진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김진은 전에 임해군 시학청 별감(侍學廳別監)의 행수(行首)로서 처음에 도망쳤다가 요사이 서울에 들어와서 이름을 찬한(纘韓)으로 고치고 의관이 되었다. 이 사람은 글에 능숙하고 약싹빠른데 이놈의 죄는 김계남과 차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허 판서가 작은 종이 쪽지에 편지를 써서 낙천군에게 보내는 것을 곁에서 보았을 뿐이고, 김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였다.
차극룡을 추국하였다. 차극룡이 공초하기를, "지난 9월 20일 경에 군기시 앞에서 김계남을 만났습니다. 가는 곳을 살펴보니 그의 사위인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현응민을 보고 말하기를 ‘방금 계남을 보았는데, 네가 붙잡아서 고발해 가지고 당상관 벼슬을 얻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현응민에게 이르기를 ‘김진이라는 자는 처음에 역적 이진(李珒)의 집 유모의 사위로서 그때 아주 잘 살았다. 아내가 죽은 후 그 반열에 속한 대군의 궁비(宮婢)와 혼인하여 살았으며 또 대군 시학청의 행수 별감으로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김찬한이라고 고치고 삼의사(三醫司)에 소속되어 대궐안에 드나들기까지 하지만 나라의 법이 해이되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다. 만일 김계남을 김진과 비교한다면 김계남은 늙고 학식이 없는 반면에 김진은 글에 능숙하고 말을 잘하며 용맹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니, 그의 죄는 김계남보다 더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고 서로 헤어져 갔습니다. 이달 초에 허 판서가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김계남을 보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군기시의 앞길에서 보았는데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였습니다. 허 판서가 말하기를 ‘너는 다시 더 찾아보도록 하라. 나도 이미 현응민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김계남이 갇힌 날 저녁 허 판서가 또 신을 불러서 말하기를 ‘김계남은 벌써 붙잡혀 갇히었다. 나도 사람을 보내어 김진을 붙잡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후의 곡절은 이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진이 반역을 음모한 일을 어떻게 알 리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근본을 따져보면 역적 진의 집에 있는 유모의 사위이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밖에는 다른 말을 품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지난 9월 20일 경에 군기시 앞에서 김계남을 만났습니다. 가는 곳을 살펴보니 그의 사위인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현응민을 보고 말하기를 ‘방금 계남을 보았는데, 네가 붙잡아서 고발해 가지고 당상관 벼슬을 얻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현응민에게 이르기를 ‘김진이라는 자는 처음에 역적 이진(李珒)의 집 유모의 사위로서 그때 아주 잘 살았다. 아내가 죽은 후 그 반열에 속한 대군의 궁비(宮婢)와 혼인하여 살았으며 또 대군 시학청의 행수 별감으로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김찬한이라고 고치고 삼의사(三醫司)에 소속되어 대궐안에 드나들기까지 하지만 나라의 법이 해이되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다. 만일 김계남을 김진과 비교한다면 김계남은 늙고 학식이 없는 반면에 김진은 글에 능숙하고 말을 잘하며 용맹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니, 그의 죄는 김계남보다 더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고 서로 헤어져 갔습니다.
이달 초에 허 판서가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김계남을 보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군기시의 앞길에서 보았는데 오응난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였습니다. 허 판서가 말하기를 ‘너는 다시 더 찾아보도록 하라. 나도 이미 현응민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김계남이 갇힌 날 저녁 허 판서가 또 신을 불러서 말하기를 ‘김계남은 벌써 붙잡혀 갇히었다. 나도 사람을 보내어 김진을 붙잡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후의 곡절은 이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진이 반역을 음모한 일을 어떻게 알 리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근본을 따져보면 역적 진의 집에 있는 유모의 사위이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밖에는 다른 말을 품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16일 정미
이조가 아뢰기를, "사은사(謝恩使) 신식(申湜)이 나이가 이미 많은 데다가 마비증이 재발하였으므로, 사은사의 직책을 체면해 달라고 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전부터 중국에 가는 사신은 신병을 이유로 교체시켜 달라고 청하는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이 전해 오는 옛 규례입니다만, 지금 신식은 노병이 이러하니 출발한 후에 다시 낭패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체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상께서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표문을 보낼 날이 아직도 멀었으니, 그동안 잘 조리하였다가 출발하게 하라." 하였다.
"사은사(謝恩使) 신식(申湜)이 나이가 이미 많은 데다가 마비증이 재발하였으므로, 사은사의 직책을 체면해 달라고 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전부터 중국에 가는 사신은 신병을 이유로 교체시켜 달라고 청하는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이 전해 오는 옛 규례입니다만, 지금 신식은 노병이 이러하니 출발한 후에 다시 낭패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체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상께서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표문을 보낼 날이 아직도 멀었으니, 그동안 잘 조리하였다가 출발하게 하라."
하였다.
북간(北間)을 국문하였다. 북간이 공초하기를, "본래 김제남의 종이 아니었고, 바로 김제남의 3촌 숙모인 김인(金仁)의 처가 종이었습니다. 주인이 죽은 후 신역(身役)을 면제받고 토산(兎山)에서 살았습니다. 이번에 본현의 분양마(分養馬)를 받아서 사복시에 바치려 하였는데, 뜻밖에 길에서 붙잡혔습니다. 김제남의 흉측한 음모를 참여하여 알 리가 만무합니다." 하니, 왕이 명하여, 엄하게 국문하도록 하고 여러 차례 형장을 치면서 신문하게 하였다. 낙형과 압슬형까지 가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본래 김제남의 종이 아니었고, 바로 김제남의 3촌 숙모인 김인(金仁)의 처가 종이었습니다. 주인이 죽은 후 신역(身役)을 면제받고 토산(兎山)에서 살았습니다. 이번에 본현의 분양마(分養馬)를 받아서 사복시에 바치려 하였는데, 뜻밖에 길에서 붙잡혔습니다. 김제남의 흉측한 음모를 참여하여 알 리가 만무합니다."
하니, 왕이 명하여, 엄하게 국문하도록 하고 여러 차례 형장을 치면서 신문하게 하였다. 낙형과 압슬형까지 가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현응민(玄應旻)과 차끗룡[車末叱龍]의 문제를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오늘 김계남과 오응난을 형문할 때에 물으니, 김계남은 말하기를 「김진(金軫)과 서로 안다는 일에 대해서는 김진의 이름을 전후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진의 이름도 이미 듣지 못하였는데 모주(謀主)라는 말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오응난은 말하기를 「김진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허균(許筠)의 상소에 의거하여 본다면, 허균이 「김제남의 반역 음모를 김계남이 반드시 모를 리가 없으며 김계남이 그 음모에 가담했다면 김진도 모를 리가 없다. 만일 김계남에게 흉측한 음모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그가 반역을 음모하였다면 김진이 필시 앞장섰을 것이다.」 했고, 또 「전후하여 나타난 흉측하고 요사스러운 일은 이 무리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했는데, 바로 지적하지 못하고 억측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앞장섰을 것이라고 한 허균의 말은 근거가 없는 말이니, 큰 범죄 사건을 어떻게 필시(必是)란 말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미필비(未必非) 세 글자는 옛날의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와 우연히 똑같습니다. 다시 문초할 일이 없을 듯하니, 석방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김개(金闓)의 상소에는 ‘허균이 글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괴수는 마땅히 김진이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진(李珒)의 사람으로서 김제남에게 빌붙은 자인데, 시(詩)에 능하고 약싹빠르다. 계축년에 도망가서 이름을 김찬한(金纘韓)이라고 바꾸었고 행동이 수상하다. 김계남 등도 다 그가 지휘하였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엄하게 신문한다면 종묘와 사직의 복이 될 것이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허균의 상소에 ‘이른바 차끗룡이라고 하는 자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직접 계남의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고 하였으며, 차끗룡은 공초하기를 ‘이달 초에 허 판서가 신을 부르기에 신이 나가니, 허 판서가 말하기를 「네가 김계남을 보았는가?」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포도청 계사에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모주입니다.’고 하였으므로 포도청 종사관을 불러 김개의 서찰을 확인해 보니, 그 글에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모주입니다. 즉시 체포하여 입계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차끗룡은 공초하기를 ‘김계남과 서로 친밀하기로는 김진이 최고로 김계남과 공모하고 서로 친하게 지낸 사실은 신이 알고 있다. 김진이 모주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이 말하지 않았고 다만 그 죄로 보아 모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옥사(獄事)의 원칙을 가지고 말한다면 차끗룡은 ‘허 판서(許判書)가 불러서 갔습니다.’고 했고, 허균은 ‘차끗룡이가 찾아와서 만나보았습니다.’고 하여 그 말이 서로 같지 않으니, 서로 어긋난 부분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대질 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묘와 사직에 복이 있을 것이다.’는 말은 김진이 살아 있으면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고 김진이 죽으면 종묘와 사직이 편안하다는 뜻이며, 주모자에 대한 말도 극히 흉참합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말을 예사롭게 처리해서는 안 되고 엄하게 국문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상의 재가에 달려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직은 형신(刑訊)을 가하지 말고 다만 이런 뜻으로 차끗룡에게 자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현응민(玄應旻)과 차끗룡[車末叱龍]의 문제를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오늘 김계남과 오응난을 형문할 때에 물으니, 김계남은 말하기를 「김진(金軫)과 서로 안다는 일에 대해서는 김진의 이름을 전후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진의 이름도 이미 듣지 못하였는데 모주(謀主)라는 말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오응난은 말하기를 「김진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허균(許筠)의 상소에 의거하여 본다면, 허균이 「김제남의 반역 음모를 김계남이 반드시 모를 리가 없으며 김계남이 그 음모에 가담했다면 김진도 모를 리가 없다. 만일 김계남에게 흉측한 음모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그가 반역을 음모하였다면 김진이 필시 앞장섰을 것이다.」 했고, 또 「전후하여 나타난 흉측하고 요사스러운 일은 이 무리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했는데, 바로 지적하지 못하고 억측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앞장섰을 것이라고 한 허균의 말은 근거가 없는 말이니, 큰 범죄 사건을 어떻게 필시(必是)란 말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미필비(未必非) 세 글자는 옛날의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와 우연히 똑같습니다. 다시 문초할 일이 없을 듯하니, 석방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김개(金闓)의 상소에는 ‘허균이 글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괴수는 마땅히 김진이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진(李珒)의 사람으로서 김제남에게 빌붙은 자인데, 시(詩)에 능하고 약싹빠르다. 계축년에 도망가서 이름을 김찬한(金纘韓)이라고 바꾸었고 행동이 수상하다. 김계남 등도 다 그가 지휘하였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엄하게 신문한다면 종묘와 사직의 복이 될 것이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허균의 상소에 ‘이른바 차끗룡이라고 하는 자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직접 계남의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고 하였으며, 차끗룡은 공초하기를 ‘이달 초에 허 판서가 신을 부르기에 신이 나가니, 허 판서가 말하기를 「네가 김계남을 보았는가?」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포도청 계사에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모주입니다.’고 하였으므로 포도청 종사관을 불러 김개의 서찰을 확인해 보니, 그 글에 ‘김진은 바로 김계남의 모주입니다. 즉시 체포하여 입계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차끗룡은 공초하기를 ‘김계남과 서로 친밀하기로는 김진이 최고로 김계남과 공모하고 서로 친하게 지낸 사실은 신이 알고 있다. 김진이 모주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이 말하지 않았고 다만 그 죄로 보아 모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옥사(獄事)의 원칙을 가지고 말한다면 차끗룡은 ‘허 판서(許判書)가 불러서 갔습니다.’고 했고, 허균은 ‘차끗룡이가 찾아와서 만나보았습니다.’고 하여 그 말이 서로 같지 않으니, 서로 어긋난 부분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대질 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묘와 사직에 복이 있을 것이다.’는 말은 김진이 살아 있으면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고 김진이 죽으면 종묘와 사직이 편안하다는 뜻이며, 주모자에 대한 말도 극히 흉참합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말을 예사롭게 처리해서는 안 되고 엄하게 국문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상의 재가에 달려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직은 형신(刑訊)을 가하지 말고 다만 이런 뜻으로 차끗룡에게 자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광경(鄭廣敬)을 응교로, 이명한(李明漢)을 공조 좌랑으로삼았다.
10월 17일 무신
전교하였다. "무릇 연례(宴禮)를, 공사(公事)가 쏟아져 들어오고 대간의 계사도 계속 이르러 오는가 하면 또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품계(稟啓)하는 까닭에, 날이 늦도록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밤에까지 연장하는 사태를 면하지 못하니 매우 부당하다. 이번 수연(壽宴)에는 잡다한 공무는 모두 정원에 보류해 두게 하라. 그리고 대간의 계사일지라도 연회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역시 잠정적으로 중지하게 하고,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그때에 가서 병을 핑계대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설령 사고가 있더라도 미리 처리하여 대궐문을 열자마자 일찍 거행하게 할 것을 다시 강조하여 실시하도록 하라."
"무릇 연례(宴禮)를, 공사(公事)가 쏟아져 들어오고 대간의 계사도 계속 이르러 오는가 하면 또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품계(稟啓)하는 까닭에, 날이 늦도록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밤에까지 연장하는 사태를 면하지 못하니 매우 부당하다. 이번 수연(壽宴)에는 잡다한 공무는 모두 정원에 보류해 두게 하라. 그리고 대간의 계사일지라도 연회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역시 잠정적으로 중지하게 하고,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그때에 가서 병을 핑계대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설령 사고가 있더라도 미리 처리하여 대궐문을 열자마자 일찍 거행하게 할 것을 다시 강조하여 실시하도록 하라."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전 부사 홍걸(洪傑)은 정철(正鐵) 3백 근을, 절충박덕린(朴德麟)은 정철 4백 근을, 평창 부수(平昌副守) 이만수(李萬壽)는 정철 4백 근을, 전 수문장 윤운로(尹雲老)는 정철 5백 근을, 신역을 면제받은 정주(定州)의 고을 아전 석응탁(石應卓)은 정철 4백 근을 도감에 바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철물을 이어대기 어려운 이때에 성상의 하교가 누차 내려왔으므로 부득이 서계합니다. 바친 수량의 다소가 서로 다르니 이것도 돌을 바친 전례에 의거하여 규정을 정하고 받아서 이용하는 것이 타당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윤운로 이상에게는 품계를 더해주고, 평창 부수에게는 도정(都正)을 제수하고, 신역을 면제받은 아전에게는 알맞는 직책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 부사 홍걸(洪傑)은 정철(正鐵) 3백 근을, 절충박덕린(朴德麟)은 정철 4백 근을, 평창 부수(平昌副守) 이만수(李萬壽)는 정철 4백 근을, 전 수문장 윤운로(尹雲老)는 정철 5백 근을, 신역을 면제받은 정주(定州)의 고을 아전 석응탁(石應卓)은 정철 4백 근을 도감에 바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철물을 이어대기 어려운 이때에 성상의 하교가 누차 내려왔으므로 부득이 서계합니다. 바친 수량의 다소가 서로 다르니 이것도 돌을 바친 전례에 의거하여 규정을 정하고 받아서 이용하는 것이 타당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윤운로 이상에게는 품계를 더해주고, 평창 부수에게는 도정(都正)을 제수하고, 신역을 면제받은 아전에게는 알맞는 직책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질정관에 관한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이 의논 드리기를 ‘요즘 듣자니 아버지는 사신이 되고 아들은 질정관이 된 일이 있으며, 우리 나라 사람의 문집(文集)에도 실려 있어서 대신들도 그들의 이름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비록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다시 차송(差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대간의 계사에 의거하여 시행함으로써 약간의 폐단이나마 없애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식(申湜)은 늙었으니 그의 아들 신득연(申得淵)을 자제(子弟)로 데리고 가게 하라." 하였다.
"질정관에 관한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이 의논 드리기를 ‘요즘 듣자니 아버지는 사신이 되고 아들은 질정관이 된 일이 있으며, 우리 나라 사람의 문집(文集)에도 실려 있어서 대신들도 그들의 이름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비록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다시 차송(差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대간의 계사에 의거하여 시행함으로써 약간의 폐단이나마 없애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식(申湜)은 늙었으니 그의 아들 신득연(申得淵)을 자제(子弟)로 데리고 가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윤인(尹訒), 사간 정도(鄭道), 헌납 조정립(曺挺立), 정언 한급(韓昅)·박종주(朴宗胄)가 아뢰기를, "심눌(沈訥)은 매우 천한 얼자로서 간사하고 교활하여 매사에 함부로 하기 때문에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경(署經)할 때 헌부에서는 재차 보류하였고 본원에서는 세 번이나 보류하였으니, 이것은 사실 공정한 논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상의 비답에는 ‘대간의 풍채가 심눌을 공격하는 데 치우쳐 있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이 마땅히 인피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으나 하찮은 심눌 한 사람 때문에 임금을 귀찮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인 듯하여 예사롭게 연계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비난하고 있다 하니, 버젓이 버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심눌(沈訥)은 매우 천한 얼자로서 간사하고 교활하여 매사에 함부로 하기 때문에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경(署經)할 때 헌부에서는 재차 보류하였고 본원에서는 세 번이나 보류하였으니, 이것은 사실 공정한 논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상의 비답에는 ‘대간의 풍채가 심눌을 공격하는 데 치우쳐 있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이 마땅히 인피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으나 하찮은 심눌 한 사람 때문에 임금을 귀찮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인 듯하여 예사롭게 연계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비난하고 있다 하니, 버젓이 버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0월 18일 기유
전교하였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권여경(權餘慶)을 속히 올려보낼 일을 전라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권여경은 숙의(淑儀) 권씨(權氏)의 아비이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권여경(權餘慶)을 속히 올려보낼 일을 전라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권여경은 숙의(淑儀) 권씨(權氏)의 아비이다.】
사헌부가, 대사간 윤인 이하 관원들을 아울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비변사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조찬한은 잡아다 추문하고 윤훤은 추고할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뜻을 사헌부 성상소(城上所)를 불러서 말하소서. 또 윤훤은 대간이 파직으로 논계하였기 때문에 추고하라는 승전(承傳)은 받들 수 없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비변사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조찬한은 잡아다 추문하고 윤훤은 추고할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뜻을 사헌부 성상소(城上所)를 불러서 말하소서. 또 윤훤은 대간이 파직으로 논계하였기 때문에 추고하라는 승전(承傳)은 받들 수 없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시에 태백이 남방에 나타났다.
10월 19일 경술
정원이 아뢰기를, "호남은 인심이 고약하고 선비들의 습성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과거장에서 소란을 피운 것만도 이미 그지없이 한심한 일인데 울타리에다 불을 질러서 무기고(武器庫)에까지 번져가게 하였으니, 실로 종전에 없던 아주 큰 변고입니다. 그러므로 시관(試官)인 자가 앞장선 자를 적발하여 가두고 계문한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마땅히 태도를 고치고 처분을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패거리를 거느리고 선비라는 이름을 핑계대어 부당하게 상소문을 올려 시관을 턱없이 비방함으로써 임금을 속이고 자신을 발뺌하려고 하였는데, 말이 몹시 고약하여 보기에 매우 놀라웠습니다. 감사 이홍주(李弘胄)는 엄격하게 배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소문을 버젓이 받아서 올렸으니, 무뢰한 자를 부추기고 국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죄상이 너무도 큽니다. 각별히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호남은 인심이 고약하고 선비들의 습성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과거장에서 소란을 피운 것만도 이미 그지없이 한심한 일인데 울타리에다 불을 질러서 무기고(武器庫)에까지 번져가게 하였으니, 실로 종전에 없던 아주 큰 변고입니다. 그러므로 시관(試官)인 자가 앞장선 자를 적발하여 가두고 계문한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마땅히 태도를 고치고 처분을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패거리를 거느리고 선비라는 이름을 핑계대어 부당하게 상소문을 올려 시관을 턱없이 비방함으로써 임금을 속이고 자신을 발뺌하려고 하였는데, 말이 몹시 고약하여 보기에 매우 놀라웠습니다. 감사 이홍주(李弘胄)는 엄격하게 배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소문을 버젓이 받아서 올렸으니, 무뢰한 자를 부추기고 국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죄상이 너무도 큽니다. 각별히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사대부들 사이에 염치가 모두 사라진 통에 수령(守令)의 자리를 이속을 채우는 자리로 삼아서 진실로 자기에게 이롭기만 하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얻지 못했을 적에는 밤중에까지 분주하게 청탁하고 다니고, 이미 얻고 나면 척박한 고을은 회피하고 풍요로운 고을로 가기 위하여 별짓을 다합니다. 법전에 ‘토지 15결과 노비 15명이 있는 고을에는 부임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을 근거로 새로 제수된 수령이 풍요로운 고을과 바꾸고 싶으면 한 명의 노비와 한 결의 토지가 없어도 거짓으로 토지 15결, 노비 15명이라는 수량을 꾸며대어 해조에 장문(狀文)을 내어 기어이 바꾸고야 맙니다. 그리고 만일 풍요로운 고을이면 노비와 토지가 실지로 그 수량에 차더라도 법을 위반하게 된다는 이유로 장문을 내고 부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밝은 해가 위에 있으므로 저들도 할 말은 없을 것입니다만, 탐내는 풍습이 날로 치성하고 속이는 습성은 고질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장문을 내고 부임하지 않는 자에게는 서로 바꾸지 못하도록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근래에 사대부들 사이에 염치가 모두 사라진 통에 수령(守令)의 자리를 이속을 채우는 자리로 삼아서 진실로 자기에게 이롭기만 하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얻지 못했을 적에는 밤중에까지 분주하게 청탁하고 다니고, 이미 얻고 나면 척박한 고을은 회피하고 풍요로운 고을로 가기 위하여 별짓을 다합니다.
법전에 ‘토지 15결과 노비 15명이 있는 고을에는 부임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을 근거로 새로 제수된 수령이 풍요로운 고을과 바꾸고 싶으면 한 명의 노비와 한 결의 토지가 없어도 거짓으로 토지 15결, 노비 15명이라는 수량을 꾸며대어 해조에 장문(狀文)을 내어 기어이 바꾸고야 맙니다. 그리고 만일 풍요로운 고을이면 노비와 토지가 실지로 그 수량에 차더라도 법을 위반하게 된다는 이유로 장문을 내고 부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밝은 해가 위에 있으므로 저들도 할 말은 없을 것입니다만, 탐내는 풍습이 날로 치성하고 속이는 습성은 고질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장문을 내고 부임하지 않는 자에게는 서로 바꾸지 못하도록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대궐 뜰에서 추국을 실시하였다. 죄인 김계남과 오응난은 압사형(壓沙刑)을 가하고, 북간은 형문을 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이익엽(李益燁)을 사인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신해
독서당(讀書堂) 관원이 대제학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처음에는 독서당에 뽑힌 12명 중에서 매번 1년을 6개월씩 반으로 나누어 각각 6명이 좌우의 번이 되었습니다. 그후에 사임하여 교체되기도 하고 당상관으로 승급되기도 하고 거상 중에 있기도 하고 외직에 보임되기도 하여, 좌번에는 좌랑 유약(柳瀹)만이 있을 뿐이고 우번에는 부교리 정준(鄭遵)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양이 매우 좋지 않으니, 합쳐서 한 개의 번으로 만들어 성과를 올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처음에는 독서당에 뽑힌 12명 중에서 매번 1년을 6개월씩 반으로 나누어 각각 6명이 좌우의 번이 되었습니다. 그후에 사임하여 교체되기도 하고 당상관으로 승급되기도 하고 거상 중에 있기도 하고 외직에 보임되기도 하여, 좌번에는 좌랑 유약(柳瀹)만이 있을 뿐이고 우번에는 부교리 정준(鄭遵)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양이 매우 좋지 않으니, 합쳐서 한 개의 번으로 만들어 성과를 올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존호(尊號)를 추가로 올리기 위하여 영의정 기자헌 이하가 책보(冊寶)를 받들고 대궐에 나아갔는데, 이날 비가 조금 내렸다. 전교하기를, "비가 이렇게 오니 대례를 형편상 강행하기가 어렵다. 날을 다시 받아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비가 이렇게 오니 대례를 형편상 강행하기가 어렵다. 날을 다시 받아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임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수령과 변장들이, 임기가 장차 만료되려 할 때 혹시 파직되거나 교체되면 그대로 유임하여 자리를 보전할 계책을 세워, 유생(儒生)·품관(品官)·관하 군사의 우두머리들과 단단히 결탁한 다음 사실이 없는 칭찬을 허위로 꾸며 가지고 감사에게 장문을 올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마부와 말, 식량과 말먹이를 주어 서울로 올려보내 비변사에 아뢰거나 승정원에 품달하게 하여 결국 자기의 계획대로 이루어 내는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침학을 자행하여 자신을 이롭게 하고 공적인 일은 병들게 합니다. 이런 폐단이 날로 늘어나 염치가 모두 없어지고 있는데, 백성들이 못견디는 것과 군사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것은 모두 이것과 관련됩니다. 앞으로는 일체 실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습성을 단절시키게 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임기가 장차 만료되려 할 때 혹시 파직되거나 교체되면 그대로 유임하여 자리를 보전할 계책을 세워, 유생(儒生)·품관(品官)·관하 군사의 우두머리들과 단단히 결탁한 다음 사실이 없는 칭찬을 허위로 꾸며 가지고 감사에게 장문을 올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마부와 말, 식량과 말먹이를 주어 서울로 올려보내 비변사에 아뢰거나 승정원에 품달하게 하여 결국 자기의 계획대로 이루어 내는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침학을 자행하여 자신을 이롭게 하고 공적인 일은 병들게 합니다. 이런 폐단이 날로 늘어나 염치가 모두 없어지고 있는데, 백성들이 못견디는 것과 군사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것은 모두 이것과 관련됩니다. 앞으로는 일체 실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습성을 단절시키게 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동지(同知) 정지산(鄭之産)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정지산은 마땅히 계축년의 공신록에 기록되었어야 할 사람이니, 그전 규례에 의하여 예장(禮葬)을 치루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지산은 바로 정사룡(鄭士龍)의 얼손자이고 숙원(淑媛) 정씨(鄭氏)의 오라비이다. 그의 병이 심하자, 왕이 급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려주어 결원된 동지 자리에 임명하였는데, 명이 하달되었을 때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다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정지산은 마땅히 계축년의 공신록에 기록되었어야 할 사람이니, 그전 규례에 의하여 예장(禮葬)을 치루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지산은 바로 정사룡(鄭士龍)의 얼손자이고 숙원(淑媛) 정씨(鄭氏)의 오라비이다. 그의 병이 심하자, 왕이 급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려주어 결원된 동지 자리에 임명하였는데, 명이 하달되었을 때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다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정지산에게 예장을 내리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공훈을 등록하여 공신이 된 다음 예장하는 것이 바로 2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옛 규례입니다. 정지산에게 공훈을 등록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아직 공훈을 감정하지 못하였고, 군(君)으로 봉하는 칭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공훈을 감정하기 전에 지레 예장부터 치루어 주는 것은 원래 전례가 없으니, 공훈을 감정한 후에 전례에 의하여 예장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임자년에 익사 공신(翼社功臣) 허성(許筬)과 방준호(方俊豪)의 전례가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예장을 치루어 주도록 하라."였다.
"정지산에게 예장을 내리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공훈을 등록하여 공신이 된 다음 예장하는 것이 바로 2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옛 규례입니다. 정지산에게 공훈을 등록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아직 공훈을 감정하지 못하였고, 군(君)으로 봉하는 칭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공훈을 감정하기 전에 지레 예장부터 치루어 주는 것은 원래 전례가 없으니, 공훈을 감정한 후에 전례에 의하여 예장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임자년에 익사 공신(翼社功臣) 허성(許筬)과 방준호(方俊豪)의 전례가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예장을 치루어 주도록 하라."였다.
헌부가 아뢴 새로 제수된 수령이 장문을 올리고 부임하지 않은 자를 서로 바꾸어주지 말라는 것으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이 아뢴 내용을 가지고 해조로 하여금 법전을 상고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아뢴 내용을 가지고 해조로 하여금 법전을 상고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대궐 뜰에서 추국을 실시하였다. 김계남과 오응난에게는 형벌을 가하고, 북간에게는 압슬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례일(大禮日)을 만약 늦춘다면 옥책(玉冊)의 날짜는 정식 날짜를 따라 고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늦춘 기일은 하루를 늦추었을 뿐이기 때문에 본조에서는 이미 새긴 날짜를 그대로 쓰려고 하며 도감 도제조의 의견도 이와 같으므로 어제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도감의 당상관이 옥책의 날짜를 고치지 않는 것은 큰 결함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말도 사실은 다른 뜻은 없고 일을 꼭 완전무결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옥책을 올리는 날을 만일 24일로 늦춘다면 날짜를 고쳐 새기는 일을 제때에 마칠 수 있겠지만, 만약 오는 22일을 그대로 쓸 경우 밤새워가며 작업을 하더라도 일을 해낼 수가 없어서 아주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 참작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날짜를 고쳐 새기는 문제도 있고 하니 24일로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대례일(大禮日)을 만약 늦춘다면 옥책(玉冊)의 날짜는 정식 날짜를 따라 고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늦춘 기일은 하루를 늦추었을 뿐이기 때문에 본조에서는 이미 새긴 날짜를 그대로 쓰려고 하며 도감 도제조의 의견도 이와 같으므로 어제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도감의 당상관이 옥책의 날짜를 고치지 않는 것은 큰 결함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말도 사실은 다른 뜻은 없고 일을 꼭 완전무결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옥책을 올리는 날을 만일 24일로 늦춘다면 날짜를 고쳐 새기는 일을 제때에 마칠 수 있겠지만, 만약 오는 22일을 그대로 쓸 경우 밤새워가며 작업을 하더라도 일을 해낼 수가 없어서 아주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상께서 참작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날짜를 고쳐 새기는 문제도 있고 하니 24일로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계축
사간원이 아뢰기를, "옥책을 올리기 위한 의물(儀物)을 완성해 놓은 지 해가 지났는데 예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비 때문에 늦추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장(儀仗)과 옥책(玉冊), 인보(印寶)를 이미 대궐에 받들어 올렸으니 옥책에 새겨넣은 날짜를 고쳐 새기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도감이 처음 아뢴 말이 참으로 일처리를 잘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다른 의견이 또 도감에서 나와 예조로 하여금 다시 어제와 같은 내용으로 아뢰게 한단 말입니까. 옥책을 개조하는 문제는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24일 안에 완성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날짜를 늦춘다면 좋은 날이 많지 않아서 다음달로 넘어가는 문제가 생기게 되고, 옥책의 장수도 전부 고쳐야 할 것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전에 계하한 날짜에 의하여 즉시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책에 새긴 날짜를 고쳐 새겨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옥책을 올리기 위한 의물(儀物)을 완성해 놓은 지 해가 지났는데 예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비 때문에 늦추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장(儀仗)과 옥책(玉冊), 인보(印寶)를 이미 대궐에 받들어 올렸으니 옥책에 새겨넣은 날짜를 고쳐 새기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도감이 처음 아뢴 말이 참으로 일처리를 잘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다른 의견이 또 도감에서 나와 예조로 하여금 다시 어제와 같은 내용으로 아뢰게 한단 말입니까. 옥책을 개조하는 문제는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24일 안에 완성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날짜를 늦춘다면 좋은 날이 많지 않아서 다음달로 넘어가는 문제가 생기게 되고, 옥책의 장수도 전부 고쳐야 할 것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전에 계하한 날짜에 의하여 즉시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책에 새긴 날짜를 고쳐 새겨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실록청 낭청이 총재관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도청의 낭청으로는 편수관 박정길(朴鼎吉)만 있어서 본청의 일을 지금까지 주관해 왔는데, 이번에 승지로 승급되어 이 일을 맡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실록을 봉안하기 전에 교대자를 마땅히 차출하여야 하겠으나, 본청이 파국할 날도 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지는 으레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게 되니, 박정길에게 본청의 일을 그대로 살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도청의 낭청으로는 편수관 박정길(朴鼎吉)만 있어서 본청의 일을 지금까지 주관해 왔는데, 이번에 승지로 승급되어 이 일을 맡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실록을 봉안하기 전에 교대자를 마땅히 차출하여야 하겠으나, 본청이 파국할 날도 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지는 으레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게 되니, 박정길에게 본청의 일을 그대로 살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옥책을 올리는 대례를 두고 해를 넘겨왔으니, 지금 사람들의 심정은 애태우며 기다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저께 비 때문에 늦추게 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의장과 옥책, 인보를 이미 대궐에 받들어 올렸으니, 옥책에 새겨 넣은 날짜는 고쳐 새길 수 없는 형편입니다. 도감의 처음 계사는 정말 일처리를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의견이 또 도감에서 나와 예조로 하여금 다시 어제와 같이 아뢰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책을 고쳐 새기는 일은 작업하기가 쉽지 않은데, 24일에 미처 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또 늦추시겠습니까. 좋은 날이 많지 않아서 다음 달로 넘어가게 되면 옥책의 장수까지 모두 고쳐야 한다고 하니 매우 걱정됩니다. 전에 계하한 택일에 의거하여 즉시 서둘러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책을 고쳐 새기고 날짜를 늦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옥책을 올리는 대례를 두고 해를 넘겨왔으니, 지금 사람들의 심정은 애태우며 기다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저께 비 때문에 늦추게 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의장과 옥책, 인보를 이미 대궐에 받들어 올렸으니, 옥책에 새겨 넣은 날짜는 고쳐 새길 수 없는 형편입니다. 도감의 처음 계사는 정말 일처리를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의견이 또 도감에서 나와 예조로 하여금 다시 어제와 같이 아뢰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책을 고쳐 새기는 일은 작업하기가 쉽지 않은데, 24일에 미처 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또 늦추시겠습니까. 좋은 날이 많지 않아서 다음 달로 넘어가게 되면 옥책의 장수까지 모두 고쳐야 한다고 하니 매우 걱정됩니다. 전에 계하한 택일에 의거하여 즉시 서둘러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책을 고쳐 새기고 날짜를 늦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0월 23일 갑인
예조가 아뢰기를, "며칠전 판서 이이첨이 도감의 옥책을 맡은 낭청의 색리 및 정사륜(鄭思倫) 등을 불러서 옥책을 고쳐 새기자면 며칠이 필요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낭청이 답하기를 ‘지금 도감이 바친 옥덩이를 다시 켜서 새기자면 공사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공조에 쌓아둔 옥덩이 가운데는 이미 켜서 쪼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 16개가 있으니 이것으로 충당해 쓸 경우 대례의 길일을 오는 24일 이나 25일로 물려 정한다면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 정사륜도 와서 24일이 적당한 날이라고 하므로 본조에서 이러한 연유를 가지고 감히 성상의 재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도감의 낭청이 또 와서 말하기를 ‘공조에 있는 옥조각으로 보충해 쓸 수 있다고 하기에 아침에는 24일을 공사 기한으로 정하여 당상관의 물음에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듣자니 이 옥쪼각은 공조에서 보관해 둔 지 이미 오래된 것으로 무슨 일에 쓰고 남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기 때문에, 와서 보고합니다.’고 하므로, 이이첨은 즉시 이 옥을 쓸 수 없다는 뜻으로 도감의 도제조에게 통지하였습니다. 지금 도감에 남은 옥덩이를 다시 가져다가 켜서 쓴다면 공사가 아주 힘들어서 다음달 보름 사이에야 완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24일로 늦추어 쓰지 않는다면 다시 다음달 보름 사이로 늦추지 않을 수 없고, 다음달로 늦춘다면 옥책의 전편을 거의 다 고쳐 새기게 된다는 뜻으로 아울러 취품(取稟)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의논하여 처리하다 보면 날짜만 지연되고 만다. 다음달 초승이거나 열흘, 보름 사이에 공사를 완성할 수 있는 기일을 참작하여 예를 행할 날짜를 늦추고, 도감에 남아 있는 옥덩이를 켜서 정밀하게 만듦으로써 구차스러움이 없게 하라." 하였다.
"며칠전 판서 이이첨이 도감의 옥책을 맡은 낭청의 색리 및 정사륜(鄭思倫) 등을 불러서 옥책을 고쳐 새기자면 며칠이 필요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낭청이 답하기를 ‘지금 도감이 바친 옥덩이를 다시 켜서 새기자면 공사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공조에 쌓아둔 옥덩이 가운데는 이미 켜서 쪼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 16개가 있으니 이것으로 충당해 쓸 경우 대례의 길일을 오는 24일 이나 25일로 물려 정한다면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 정사륜도 와서 24일이 적당한 날이라고 하므로 본조에서 이러한 연유를 가지고 감히 성상의 재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도감의 낭청이 또 와서 말하기를 ‘공조에 있는 옥조각으로 보충해 쓸 수 있다고 하기에 아침에는 24일을 공사 기한으로 정하여 당상관의 물음에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듣자니 이 옥쪼각은 공조에서 보관해 둔 지 이미 오래된 것으로 무슨 일에 쓰고 남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기 때문에, 와서 보고합니다.’고 하므로, 이이첨은 즉시 이 옥을 쓸 수 없다는 뜻으로 도감의 도제조에게 통지하였습니다. 지금 도감에 남은 옥덩이를 다시 가져다가 켜서 쓴다면 공사가 아주 힘들어서 다음달 보름 사이에야 완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24일로 늦추어 쓰지 않는다면 다시 다음달 보름 사이로 늦추지 않을 수 없고, 다음달로 늦춘다면 옥책의 전편을 거의 다 고쳐 새기게 된다는 뜻으로 아울러 취품(取稟)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의논하여 처리하다 보면 날짜만 지연되고 만다. 다음달 초승이거나 열흘, 보름 사이에 공사를 완성할 수 있는 기일을 참작하여 예를 행할 날짜를 늦추고, 도감에 남아 있는 옥덩이를 켜서 정밀하게 만듦으로써 구차스러움이 없게 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옥책을 고치지도 말고 24일로 늦추지도 말아서 대례를 속히 완결시킴으로써 귀신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기를 청하자, 이미 예관에게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20일에 실시하려던 대례를 비로 인하여 잠시 늦추었습니다만, 옥책과 인보를 도감에서 받들어 올림으로부터 여러 관리들이 정성껏 맞이하여 모든 일이 다 진행되었으니, 성상께서 미처 친림하시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대례를 행한 것은 실로 이날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설사 행사를 끝마치는 기일을 오래도록 늦춘다 하더라도 응당 처음 진행한 날짜를 옥책에다 써넣음으로써 막대한 행사를 소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2, 3일 정도 늦추는 것 때문에 날짜를 고치려 하여 이미 올린 옥책을 다시 뽑아내 개조하겠다고 하니, 이보다 더 구차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큰 경사를 방해하는 한 마귀입니다. 대신 이하가 목욕재계하고 바라던 끝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는 상태이니, 성상께서 통찰하여 통쾌하게 처리하시기를, 기다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예관으로 하여금 당초에 윤허하셨던 전교에 의하여 전에 결정한 대로 24일에 속히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여, 여러 신하들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내 뜻은 이미 예관에게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20일에 실시하려던 대례를 비로 인하여 잠시 늦추었습니다만, 옥책과 인보를 도감에서 받들어 올림으로부터 여러 관리들이 정성껏 맞이하여 모든 일이 다 진행되었으니, 성상께서 미처 친림하시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대례를 행한 것은 실로 이날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설사 행사를 끝마치는 기일을 오래도록 늦춘다 하더라도 응당 처음 진행한 날짜를 옥책에다 써넣음으로써 막대한 행사를 소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2, 3일 정도 늦추는 것 때문에 날짜를 고치려 하여 이미 올린 옥책을 다시 뽑아내 개조하겠다고 하니, 이보다 더 구차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큰 경사를 방해하는 한 마귀입니다. 대신 이하가 목욕재계하고 바라던 끝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는 상태이니, 성상께서 통찰하여 통쾌하게 처리하시기를, 기다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예관으로 하여금 당초에 윤허하셨던 전교에 의하여 전에 결정한 대로 24일에 속히 거행함으로써 대례를 완결짓도록 하여, 여러 신하들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내 뜻은 이미 예관에게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어 임기가 찬 수령이 장차 파면되거나 교체될 시기가 다가오면 더러 비변사 등처에 장문을 올려 감히 잉임할 계책을 쓰는 것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승전을 받아 시행하게 한 일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헌부가 올린 계사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가 올린 계사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충훈부가 아뢰기를, "공신(功臣)을 추록(追錄)하는 문제를 공신들 중의 늙은 재상에게 자세히 물어가지고 아뢰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부원군(府院君)인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다 공신을 추록하는 문제에 관한 예전 관례를 모른다고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공신(功臣)을 추록(追錄)하는 문제를 공신들 중의 늙은 재상에게 자세히 물어가지고 아뢰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부원군(府院君)인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다 공신을 추록하는 문제에 관한 예전 관례를 모른다고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존숭 도감이 아뢰기를, "옥책의 날짜를 지금 고쳐 새겨야 하겠는데 이미 궐 안에다 봉안해 놓았으므로 응당 고쳐야 할 부분을 부득이 뽑아내서 다시 도감으로 내려보내 고쳐 새긴 다음, 궐 안 봉안해 놓은 곳에 들어가서 합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구차스럽고 온당치 못하다. 다시 도감에 옮겨놓고 존호를 올리는 정식 날짜에 다시 의물(儀物)을 갖추어 올릴 것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옥책의 날짜를 지금 고쳐 새겨야 하겠는데 이미 궐 안에다 봉안해 놓았으므로 응당 고쳐야 할 부분을 부득이 뽑아내서 다시 도감으로 내려보내 고쳐 새긴 다음, 궐 안 봉안해 놓은 곳에 들어가서 합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구차스럽고 온당치 못하다. 다시 도감에 옮겨놓고 존호를 올리는 정식 날짜에 다시 의물(儀物)을 갖추어 올릴 것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었다. "예장(禮葬)에 관한 일이 법전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니, 반드시 품계가 높은 재상(宰相)이나 공신(功臣)이라야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정지산의 일을 예장으로 하라고 특별히 명하시면서, 마땅히 계축년의 공신에 참여시켜야 할 것이므로 허성(許筬)·방준호(方俊豪)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전교하셨다고 합니다. 정지산의 이름이 공훈록에 참여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논할 겨를이 없거니와, 허성과 방준호는 공훈을 등록하는 국(局)을 설치한 뒤일 뿐 아니라 1, 2, 3등급을 정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군호(君號)를 지었었으니, 비록 모여서 맹세를 다지기 전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공신이라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곡절이 오늘의 정지산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예장을 치르는 규례는 훈적(勳籍)의 등급이 높고 낮은 데 따라서 높이거나 낮추는 절차가 있는 만큼 설사 정지산이 꼭 공신에 참여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국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어느 등급의 공신에 있어야 할지 모르며, 훈호(勳號)도 정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근거로 감히 예장을 치러 준단 말입니까. 이 길이 한번 열리면 공훈 등록이 명백하지 않은 채 죽은 허다한 사람들의 자손이 모두다 예장을 희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일이 근거없는 데에만 관련되겠습니까. 뒷날의 폐단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속히 성명을 다시 거두소서. 경관(京官)으로서 청요직에 있는 자와 당하관인 수령을 서경(署經)하는 법은, 그 목적이 전적으로 문벌이 어떠하며 경력과 인품이 어떠한가를 알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지난번 사간원에서 세 번씩이나 서경하지 않았는데 교체시키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훌륭한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선대 임금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서경하는 법을 소중히 하소서."
"예장(禮葬)에 관한 일이 법전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니, 반드시 품계가 높은 재상(宰相)이나 공신(功臣)이라야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정지산의 일을 예장으로 하라고 특별히 명하시면서, 마땅히 계축년의 공신에 참여시켜야 할 것이므로 허성(許筬)·방준호(方俊豪)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전교하셨다고 합니다. 정지산의 이름이 공훈록에 참여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논할 겨를이 없거니와, 허성과 방준호는 공훈을 등록하는 국(局)을 설치한 뒤일 뿐 아니라 1, 2, 3등급을 정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군호(君號)를 지었었으니, 비록 모여서 맹세를 다지기 전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공신이라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곡절이 오늘의 정지산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예장을 치르는 규례는 훈적(勳籍)의 등급이 높고 낮은 데 따라서 높이거나 낮추는 절차가 있는 만큼 설사 정지산이 꼭 공신에 참여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국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어느 등급의 공신에 있어야 할지 모르며, 훈호(勳號)도 정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근거로 감히 예장을 치러 준단 말입니까. 이 길이 한번 열리면 공훈 등록이 명백하지 않은 채 죽은 허다한 사람들의 자손이 모두다 예장을 희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일이 근거없는 데에만 관련되겠습니까. 뒷날의 폐단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속히 성명을 다시 거두소서.
경관(京官)으로서 청요직에 있는 자와 당하관인 수령을 서경(署經)하는 법은, 그 목적이 전적으로 문벌이 어떠하며 경력과 인품이 어떠한가를 알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눌(沈訥)은 지난번 사간원에서 세 번씩이나 서경하지 않았는데 교체시키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훌륭한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선대 임금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서경하는 법을 소중히 하소서."
사간원이 아뢰기를, "대체로 예장을 지내주는 규정은 반드시 공훈을 등록한 이후에 실시하며, 공훈을 등록하기도 전에 지레 먼저 예장을 지내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번에 정지산에게 예장을 지내주라고 명한 것은 사실 공로를 생각한 뜻이기는 합니다만, 정지산은 현재 공훈을 감정하지 않았고 군으로 봉하는 칭호도 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공신(功臣)인 것입니다. 장차 무엇을 근거로 하여 예에 입각한 장사를 치루어 주겠습니까. 지난 임자년에 허성은 원훈 단자(元勳單子)를 입계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었고 방준호의 죽음은 그 후에 있었으니, 지금 정지산의 죽음은 허성, 방준호와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어찌 오늘날 전례로 끌어대어 전에 없던 규정을 새로 만들어 내서야 되겠습니까. 정지산에게 예장을 지내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성과 방준호는 국(局)을 설치하지도 않고 군(君)으로 봉하기도 전에 예장을 지내 주었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에 답하기를, "심눌은 교체시킬 만한 죄가 없으니,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고, 예장에 관한 일은 간원에 답한 것과 같이 하였다.
"대체로 예장을 지내주는 규정은 반드시 공훈을 등록한 이후에 실시하며, 공훈을 등록하기도 전에 지레 먼저 예장을 지내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번에 정지산에게 예장을 지내주라고 명한 것은 사실 공로를 생각한 뜻이기는 합니다만, 정지산은 현재 공훈을 감정하지 않았고 군으로 봉하는 칭호도 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공신(功臣)인 것입니다. 장차 무엇을 근거로 하여 예에 입각한 장사를 치루어 주겠습니까. 지난 임자년에 허성은 원훈 단자(元勳單子)를 입계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었고 방준호의 죽음은 그 후에 있었으니, 지금 정지산의 죽음은 허성, 방준호와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어찌 오늘날 전례로 끌어대어 전에 없던 규정을 새로 만들어 내서야 되겠습니까. 정지산에게 예장을 지내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성과 방준호는 국(局)을 설치하지도 않고 군(君)으로 봉하기도 전에 예장을 지내 주었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에 답하기를,
"심눌은 교체시킬 만한 죄가 없으니,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고, 예장에 관한 일은 간원에 답한 것과 같이 하였다.
대궐 뜰에서 죄인을 신문하였다. 북간(北間)에게 압슬형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10월 24일 을묘
이조가 아뢰기를, "사헌부가 아뢰었던 것을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이번에 대간이 논의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폐단을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노비와 토지의 있고 없는 여부를 상고할 만한 자료가 본조에는 없습니다. 장문을 낸 사람이 실지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호적과 토지대장을 자세히 조사한 후에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헌부가 아뢰었던 것을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이번에 대간이 논의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폐단을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노비와 토지의 있고 없는 여부를 상고할 만한 자료가 본조에는 없습니다. 장문을 낸 사람이 실지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호적과 토지대장을 자세히 조사한 후에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박승종을 치료해 수연(壽宴)에 참가하게 하라."
"박승종을 치료해 수연(壽宴)에 참가하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도감에 물었더니, 존호를 올리는 정식날을 돌아오는 30일로 정하였고 양전(兩殿)의 옥책은 네 조각만 고치면 되므로 공역을 제날짜에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30일로 고쳐서 부표하되, 각도에서 보내온 전문(箋文)은 날짜를 전부 고칠 필요가 없으니 전례에 따라 그대로 사용하고, 각도의 차사원들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대례를 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도감에 물었더니, 존호를 올리는 정식날을 돌아오는 30일로 정하였고 양전(兩殿)의 옥책은 네 조각만 고치면 되므로 공역을 제날짜에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30일로 고쳐서 부표하되, 각도에서 보내온 전문(箋文)은 날짜를 전부 고칠 필요가 없으니 전례에 따라 그대로 사용하고, 각도의 차사원들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대례를 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헌부가 연계하여, 속히 심눌을 체직시켜서 선왕이 제도화한 서경(署經)의 법을 소중히 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서자의 자손을 수령으로 제수한 것은 심눌 한 사람 뿐만이 아니다. 심눌은 나랏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니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후로 양사가 날마다 연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서자의 자손을 수령으로 제수한 것은 심눌 한 사람 뿐만이 아니다. 심눌은 나랏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니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후로 양사가 날마다 연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존숭 도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고 날마다 와서 모여가지고 반복하여 상의하였습니다만, 옥책을 이미 궐 안에 모셔 봉안하였으므로 결코 도감으로 다시 내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례를 30일로 늦추었고 고쳐야 할 옥책도 많지 않아서 공역이 매우 쉬울 것이니,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신들이 명을 받고 날마다 와서 모여가지고 반복하여 상의하였습니다만, 옥책을 이미 궐 안에 모셔 봉안하였으므로 결코 도감으로 다시 내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례를 30일로 늦추었고 고쳐야 할 옥책도 많지 않아서 공역이 매우 쉬울 것이니,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외명부(外命婦)가 임시(臨時)하여 탈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많다. 6승지, 3사 장관의 부인들에게 다시 통보하여 알려서 궁중의 연회에 들어와 참가하도록 하라."
"외명부(外命婦)가 임시(臨時)하여 탈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많다. 6승지, 3사 장관의 부인들에게 다시 통보하여 알려서 궁중의 연회에 들어와 참가하도록 하라."
10월 25일 병진
046) 정원이 아뢰기를, "선대임금의 영정(影幀)을 받들어 옮기는 일은 대례가 지나간 후에 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대례가 이미 지났습니다만 형편상 11월 4일에 전주(全州)를 출발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호위하는 군사와 사신에게 공급하는 것이 오래 계속되는 관계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통과하는 길에 이런 것을 우선 중지하게 하고, 물려서 정한 정식날을 기다려 즉시 지시를 내리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註 046]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7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선대임금의 영정(影幀)을 받들어 옮기는 일은 대례가 지나간 후에 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대례가 이미 지났습니다만 형편상 11월 4일에 전주(全州)를 출발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호위하는 군사와 사신에게 공급하는 것이 오래 계속되는 관계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통과하는 길에 이런 것을 우선 중지하게 하고, 물려서 정한 정식날을 기다려 즉시 지시를 내리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註 046]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7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선대임금의 영정(影幀)을 받들어 옮기는 일은 대례가 지나간 후에 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대례가 이미 지났습니다만 형편상 11월 4일에 전주(全州)를 출발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호위하는 군사와 사신에게 공급하는 것이 오래 계속되는 관계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통과하는 길에 이런 것을 우선 중지하게 하고, 물려서 정한 정식날을 기다려 즉시 지시를 내리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047) 예조가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정지산(鄭之産)의 예장을 허성과 방준호의 전례에 따를 것을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듣거나 본 것만 가지고 사실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자년에 공로를 기록한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5월 7일에 무신년의 역옥(逆獄)을 담당했던 대신 이하 추관들을 감정해서 공훈을 책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9일에는 빈청의 대신이 원훈 공신을 먼저 정하라고 청하였는데, 19일에 상께서 최유원(崔有源)의 상소에 의하여 허성을 원훈으로 삼고 24일에 서용(敘用)하였으며, 같은 날 원훈 단자(元勳單子)를 입계하였습니다. 7월 10일에는 허성이 상소하여 공로를 사양하였습니다. 13일에는 도감 사목(都監事目)을 계하하였고 14일에는 훈호 단자(勳號單子)를 입계하였으며, 20일에는 추관인 대신 이하에게 줄 표창 규정에 대하여 명을 내렸습니다. 8월 7일에 본조에서 허성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조회와 저자를 중지할 일로 입계하자 ‘허성은 공신 칭호를 받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예장을 치루어 주라.’고 전교하였습니다. 같은 날 방준호를 조문하고 제사지내 줄 일로 입계하자, 역시 별치부(別置簿)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습니다. 9월 10일 비망기를 내려 ‘방준호도 공훈을 기록하는 데 참여시키되 정예남(鄭禮男)이 공신에 참여하였는데도 미쳐 비답을 내리지 못한 전례에 근거하여 조문하여 제사지내고 예장을 치루어 주라.’는 일로 전교하였습니다. 이상을 가지고 본다면 허성과 방준호는 작위(爵位)를 봉하기 전에 죽었지만 다 예장을 치러주었습니다. 지금 정지산의 문제는 이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명(恩命)에서 나온 것이므로 해조에서 마음대로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상께서 처결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공훈을 등록하도록 결정하였으니, 전에 전교한 대로 예장을 치러 주도록 하라." 하였다.
[註 047]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8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정지산(鄭之産)의 예장을 허성과 방준호의 전례에 따를 것을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듣거나 본 것만 가지고 사실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자년에 공로를 기록한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5월 7일에 무신년의 역옥(逆獄)을 담당했던 대신 이하 추관들을 감정해서 공훈을 책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9일에는 빈청의 대신이 원훈 공신을 먼저 정하라고 청하였는데, 19일에 상께서 최유원(崔有源)의 상소에 의하여 허성을 원훈으로 삼고 24일에 서용(敘用)하였으며, 같은 날 원훈 단자(元勳單子)를 입계하였습니다. 7월 10일에는 허성이 상소하여 공로를 사양하였습니다. 13일에는 도감 사목(都監事目)을 계하하였고 14일에는 훈호 단자(勳號單子)를 입계하였으며, 20일에는 추관인 대신 이하에게 줄 표창 규정에 대하여 명을 내렸습니다. 8월 7일에 본조에서 허성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조회와 저자를 중지할 일로 입계하자 ‘허성은 공신 칭호를 받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예장을 치루어 주라.’고 전교하였습니다. 같은 날 방준호를 조문하고 제사지내 줄 일로 입계하자, 역시 별치부(別置簿)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습니다. 9월 10일 비망기를 내려 ‘방준호도 공훈을 기록하는 데 참여시키되 정예남(鄭禮男)이 공신에 참여하였는데도 미쳐 비답을 내리지 못한 전례에 근거하여 조문하여 제사지내고 예장을 치루어 주라.’는 일로 전교하였습니다. 이상을 가지고 본다면 허성과 방준호는 작위(爵位)를 봉하기 전에 죽었지만 다 예장을 치러주었습니다. 지금 정지산의 문제는 이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명(恩命)에서 나온 것이므로 해조에서 마음대로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상께서 처결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공훈을 등록하도록 결정하였으니, 전에 전교한 대로 예장을 치러 주도록 하라." 하였다.
[註 047]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8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정지산(鄭之産)의 예장을 허성과 방준호의 전례에 따를 것을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듣거나 본 것만 가지고 사실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자년에 공로를 기록한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5월 7일에 무신년의 역옥(逆獄)을 담당했던 대신 이하 추관들을 감정해서 공훈을 책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9일에는 빈청의 대신이 원훈 공신을 먼저 정하라고 청하였는데, 19일에 상께서 최유원(崔有源)의 상소에 의하여 허성을 원훈으로 삼고 24일에 서용(敘用)하였으며, 같은 날 원훈 단자(元勳單子)를 입계하였습니다. 7월 10일에는 허성이 상소하여 공로를 사양하였습니다. 13일에는 도감 사목(都監事目)을 계하하였고 14일에는 훈호 단자(勳號單子)를 입계하였으며, 20일에는 추관인 대신 이하에게 줄 표창 규정에 대하여 명을 내렸습니다. 8월 7일에 본조에서 허성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조회와 저자를 중지할 일로 입계하자 ‘허성은 공신 칭호를 받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예장을 치루어 주라.’고 전교하였습니다. 같은 날 방준호를 조문하고 제사지내 줄 일로 입계하자, 역시 별치부(別置簿)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습니다. 9월 10일 비망기를 내려 ‘방준호도 공훈을 기록하는 데 참여시키되 정예남(鄭禮男)이 공신에 참여하였는데도 미쳐 비답을 내리지 못한 전례에 근거하여 조문하여 제사지내고 예장을 치루어 주라.’는 일로 전교하였습니다.
이상을 가지고 본다면 허성과 방준호는 작위(爵位)를 봉하기 전에 죽었지만 다 예장을 치러주었습니다. 지금 정지산의 문제는 이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명(恩命)에서 나온 것이므로 해조에서 마음대로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상께서 처결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공훈을 등록하도록 결정하였으니, 전에 전교한 대로 예장을 치러 주도록 하라."
하였다.
048) 경상도 생원 유진정(柳震楨)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을 문묘(文廟)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어진이를 높이는 뜻은 내가 이미 알았다.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는 법은 마땅히 조정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지, 진실로 유생들이 독촉할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註 048]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9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경상도 생원 유진정(柳震楨)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을 문묘(文廟)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어진이를 높이는 뜻은 내가 이미 알았다.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는 법은 마땅히 조정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지, 진실로 유생들이 독촉할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註 048] : 이 기사는 정초본에 10월24일 9번째 기사로 편집되어 있으나 중초본에 따라 10월 25일 기사로 바로 잡았다.
"그대들이 어진이를 높이는 뜻은 내가 이미 알았다.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는 법은 마땅히 조정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지, 진실로 유생들이 독촉할 일이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정사
전교하였다. "요동 도사가 보낸 공문을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요동 도사가 보낸 공문을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정원이 아뢰기를, "의금부 낭청이 대신의 의견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전날 판의금이 없더라도 그대로 추국하라는 일로 엄한 분부를 내리셨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추국하였습니다. 요즘 신들만이 추국하다보니 죄인 3명이 잇따라 죽어 진상을 캐내지 못하였고, 의논하여 아뢸 때에도 신들만이 하게 되니, 구차하기 그지없고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판의금 박승종을 불러서 함께 참여한 후에 실시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의금부 낭청이 대신의 의견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전날 판의금이 없더라도 그대로 추국하라는 일로 엄한 분부를 내리셨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추국하였습니다. 요즘 신들만이 추국하다보니 죄인 3명이 잇따라 죽어 진상을 캐내지 못하였고, 의논하여 아뢸 때에도 신들만이 하게 되니, 구차하기 그지없고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판의금 박승종을 불러서 함께 참여한 후에 실시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판의금 박승종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자,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잘 알았다만, 옥사(獄事)를 완결짓지 못하고 있는데 경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으니, 병조리를 잘 한 다음 출사하여 속히 국문을 완결짓도록 하라." 하였다.
"차자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잘 알았다만, 옥사(獄事)를 완결짓지 못하고 있는데 경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으니, 병조리를 잘 한 다음 출사하여 속히 국문을 완결짓도록 하라."
하였다.
회답하러 갔던 사신이 장계(狀啓)를 올렸다. "일행이 이달 4일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고, 18일 인시에 완이포(完伊浦)를 떠났으며, 술시에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였습니다. 데려오는, 붙잡혀갔던 남녀는 모두 3백 21명입니다."
"일행이 이달 4일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고, 18일 인시에 완이포(完伊浦)를 떠났으며, 술시에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였습니다. 데려오는, 붙잡혀갔던 남녀는 모두 3백 21명입니다."
10월 27일 무오
전교하였다. "각도에서 토산물을 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에게 식량을 아직 지급하지 않음으로 해서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으로 연명하는 것을 면치 못하게 하였다 하니, 듣기에 거북스럽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는가. 해조의 낭청을 추고하고 속히 나누어 주도록 하라."
"각도에서 토산물을 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에게 식량을 아직 지급하지 않음으로 해서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으로 연명하는 것을 면치 못하게 하였다 하니, 듣기에 거북스럽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는가. 해조의 낭청을 추고하고 속히 나누어 주도록 하라."
나주(羅州)에 사는 유학 정란(鄭瀾)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조식을 문묘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고, 또 나덕봉(羅德鳳)의 어진이를 헐뜯고 선비 대장을 불사르며 임금을 속인 죄와 강진 현감(康津縣監) 조응휴(曺應休)의 서원 건립을 저지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정지산에게 예장을 치르는 일을 전날 대간이 논계하였습니다만, 이번에 예조에서 회계한 공사에 대하여 전에 전교한 대로 예장을 치르라는 것으로 판하(判下)하였습니다. 이런 뜻으로 양사의 성상소(城上所)를 명초하여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당초에 이미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비답하였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양사가 마땅히 이 점을 알 것이니, 명초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지산에게 예장을 치르는 일을 전날 대간이 논계하였습니다만, 이번에 예조에서 회계한 공사에 대하여 전에 전교한 대로 예장을 치르라는 것으로 판하(判下)하였습니다. 이런 뜻으로 양사의 성상소(城上所)를 명초하여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당초에 이미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비답하였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양사가 마땅히 이 점을 알 것이니, 명초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기미
지평 허경(許儆)이 글을 올렸다. 그 대개는 병이 심하여 사직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간원이 연계하여, 정지산을 예장으로 장사지내 주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공훈을 등록하기로 결정한 이상 아직 감정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은 것과 훈국을 설치하지 않은 것, 등급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굳이 간쟁할 일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니, 나는 괴이한 생각이 든다." 하였다.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공훈을 등록하기로 결정한 이상 아직 감정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은 것과 훈국을 설치하지 않은 것, 등급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굳이 간쟁할 일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니, 나는 괴이한 생각이 든다."
하였다.
공홍도(公洪道)의 유생 유형춘(柳馨春) 등이 상소하여, 조식을 문묘에 모셔 제사지낼 것을 청하였다.
10월 29일 경신
사헌부가 연계하여, 정지산에게 예장을 치러 주라는 분부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환적(喚賊)을 고발하여 체포한 공로에 대하여 이미 논의를 거쳐 그 공훈을 등록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이것은 원훈으로 감정한 공로가 아니다. 더구나 가까운 시일에 공훈을 감정할 것이니,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 사헌부와 사간원이 날마다 논집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따르지 않았다.】
"환적(喚賊)을 고발하여 체포한 공로에 대하여 이미 논의를 거쳐 그 공훈을 등록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이것은 원훈으로 감정한 공로가 아니다. 더구나 가까운 시일에 공훈을 감정할 것이니,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 사헌부와 사간원이 날마다 논집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따르지 않았다.】
10월 30일 신유
영의정 기자헌 이하가 옥책과 인보을 받들고 가서 서륜입기 명성광렬(敘倫立紀明誠光烈)이라는 【세 가지 무고를 변론하여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존호(尊號)를 추가하여 올렸다. 앞서 올린 존호인 체천흥운 준덕홍공(體天興運俊德弘功), 【임자년 10월에 올렸는데 임진 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이다.】 신성영숙 흠문인무(神聖英肅欽文仁武)와 【병진년 10월에 올렸는데 임해(臨海)·영창(永昌)·진릉(晉陵)·능창(綾昌)을 죽인 공로이다.】 이번에 더 올린 것을 합하면 모두 24자이다. 【무오년 9월에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신 공로에 대해, 민인백(閔仁伯)의 상소로 인하여, 융봉현보 무정중희(隆奉顯保懋定重熙)라는 존호를 더 올렸고, 경신년 4월에는 허균(許筠)을 주벌한 공으로 예철장의 장헌순정(睿哲莊毅章憲順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므로 모두 합하면 40자이다. 그후 또 황제의 칙서가 내려온 것으로 인하여 건의수정 창도숭업(建義守正彰道崇業)이란 호를 더 올렸다.】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받으니,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축하를 올렸다. 전국에 교서를 반포하여, 잡범으로서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백관에게 품계를 올려주되, 더 올라갈 품계가 없는 자에게는 대신 올려주었다.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 "어찌 능히 효도를 했다고 하겠는가마는 마지못해 큰 칭호를 받았으니, 다같이 새로운 길로 나가기 위해 대사령을 선포하노라. 큰 경사를 함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바이다. 멀리 생각건대, 선왕이신 태조(太祖)께서 교활한 참소와 추악한 비방을 받았었다. 왕실 계보가 잘못되었으니 비록 《회전(會典)》을 반포하였으나, 떠도는 허튼소리를 여러 책에 함부로 기록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왜적을 불러다가 땅을 회복하려했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사무친 원한을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교묘한 비방이라 해명하기 어려웠으니, 언제나 내가 통찰하기를 바래었고, 나쁜 이름이 씻어지지 않았으니 큰 수치를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황제께 호소하는 글을 올린 결과 원통한 심정을 알아주는 은혜를 특별히 입었다. 사사로운 책이 수정되어 깊이 보관한 큰 책을 빛내었고, 완성된 글을 널리 반포하여 먼 나라에도 다같이 보도록 하였다. 황제의 지시로 은혜를 베풀어 돌아간 아버지의 큰 공적을 찬양하였고, 옥책을 빛나게 마련하여 성대한 의식을 대비에게 올렸다. 윤리가 바루어지니 나라의 기강이 서고, 백성들이 소생하여 마침내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신령이 은연중 도와준 것이니, 어찌 황제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덕이 없는데도 이름을 얻었으므로 자신을 돌이켜볼 때 부끄러우니, 더욱 겸손히 경계를 더하여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면서 분수에 넘는 일을 조심하겠다. 이제 옥책을 와서 진열하였으니, 어떻게 대사령을 내리지 않겠는가. 아, 두터운 무고를 바로잡았으니 평소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며, 지극한 혜택이 널리 미쳤으니 큰 은혜를 다른 날에 보답하리라. 이에 이렇게 교서를 내리는 바이니, 잘 알았을 줄로 믿는다."
"어찌 능히 효도를 했다고 하겠는가마는 마지못해 큰 칭호를 받았으니, 다같이 새로운 길로 나가기 위해 대사령을 선포하노라. 큰 경사를 함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바이다.
멀리 생각건대, 선왕이신 태조(太祖)께서 교활한 참소와 추악한 비방을 받았었다. 왕실 계보가 잘못되었으니 비록 《회전(會典)》을 반포하였으나, 떠도는 허튼소리를 여러 책에 함부로 기록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왜적을 불러다가 땅을 회복하려했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사무친 원한을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교묘한 비방이라 해명하기 어려웠으니, 언제나 내가 통찰하기를 바래었고, 나쁜 이름이 씻어지지 않았으니 큰 수치를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황제께 호소하는 글을 올린 결과 원통한 심정을 알아주는 은혜를 특별히 입었다. 사사로운 책이 수정되어 깊이 보관한 큰 책을 빛내었고, 완성된 글을 널리 반포하여 먼 나라에도 다같이 보도록 하였다.
황제의 지시로 은혜를 베풀어 돌아간 아버지의 큰 공적을 찬양하였고, 옥책을 빛나게 마련하여 성대한 의식을 대비에게 올렸다. 윤리가 바루어지니 나라의 기강이 서고, 백성들이 소생하여 마침내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신령이 은연중 도와준 것이니, 어찌 황제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덕이 없는데도 이름을 얻었으므로 자신을 돌이켜볼 때 부끄러우니, 더욱 겸손히 경계를 더하여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면서 분수에 넘는 일을 조심하겠다.
이제 옥책을 와서 진열하였으니, 어떻게 대사령을 내리지 않겠는가. 아, 두터운 무고를 바로잡았으니 평소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며, 지극한 혜택이 널리 미쳤으니 큰 은혜를 다른 날에 보답하리라. 이에 이렇게 교서를 내리는 바이니, 잘 알았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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