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축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모레는 책례(冊禮)를 하는 날이라 음식을 내리겠으니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승지(承旨)·사관(史官), 각신(閣臣)과 옥당(玉堂)은 오시(午時) 전에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일 을축
전 경상 감사(前慶尙監司) 서헌순(徐憲淳)을 소견(召見)하였다.
4월 1일 을축
예조(禮曹)에서, ‘만동묘(萬東廟)의 방위(榜位)를 봉발(奉發)할 길일을 오는 4월 22일로 받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 2일 병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한 것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 볼 수 있거니와 정령(政令)과 시책이 다 바른 것에서 나와 팔도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복을 받은 것도 이 궁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지금 정부(政府)의 중수(重修)로 인하여 왕조가 번창하던 시기에 백성들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훌륭한 신하들도 많이 등용되었던 것을 늘 생각하면 사모하는 동시에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돌이켜보면, 익종(翼宗)께서 정사를 대리하면서도 여러 번 옛 대궐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개연히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고, 헌종(憲宗)께서도 그 뜻을 이어 여러 번 공사를 하려다가 역시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주상은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옛터로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조종조(祖宗朝)께서 이 궁전을 사용하던 그 당시의 태평한 모습을 그리면서 왜 지금은 옛날처럼 못 되는가 하고 때없이 한탄한다. 이것은 비단 조상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성의(聖意)일 뿐만 아니라 넓고도 큰 도량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 궁전을 다시 지어 중흥의 큰 업적을 이루려면 여러 대신들과 함께 타산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음식을 내린 다음에도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은 머물러서 기다리라."
하였다.
4월 2일 병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수도에서 사는 백성들의 고역이 역시 많다고 한다. 관청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구실아치나 하인들 이외에도 곤궁한 생활을 하는 백성들이 절반도 넘는데 여러 가지의 괴로운 부담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가므로 언제나 가엾은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각처의 밤 수직을 영영 철폐해버려 쪼들린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경조(京兆)의 오부(五部)에 분부하라."
하였다.
4월 2일 병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매우 어질고도 후한 혜택이 거듭거듭 내려 종가(宗家)와 지차(之次) 집들이 백대나 뻗어내릴 경사를 이루었다. 이번에 새로 보인 생원·진사시에서 특전으로 합격된 사람이 100명이나 되니 이야말로 드물게 보는 성대한 일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일가 간에 화목하려고 하는 우리 임금의 훌륭한 뜻에서 나온 일이니 누군들 우러러 칭송하지 않겠는가? 방방(放榜)한 그 이튿날에 특별히 종친부(宗親府)에 음식을 내려주어 백대를 지나도 한 집안이며 서로 잊지 못하는 지극한 뜻을 표시하려고 한다. 매 사람에게 일러주어 모두들 알게 하라."
하였다.
4월 2일 병인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을 수리할 때 공사를 감독한 도신(道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건조(鄭健朝)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4월 2일 병인
전교하기를,
"이번에 선파(璿派)로서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첨지(僉知) 자리를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일 병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우길(洪祐吉)의 보고를 보니 ‘본도(本道)에서 중국 사신(使臣)의 접대 비용으로 매년 들어오는 돈 중에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바치게 되어 있는 모곡(耗穀) 5만여 냥(兩)을 5년 동안에 배분하여 납부하게 하여서 허리를 펴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해놓은 기한에 바쳐야 할 것을 걸핏하면 납부 기일을 미루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 바로 근래의 잘못된 규례이기는 하지만 그 도(道)의 형편으로 말하면 크게 개혁한 직후여서 이것도 옹색하고 저것도 군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조나 선혜청의 경비도 하루하루 더 곤란해지니 3년 동안에 배분하여 납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일 병인
김학성(金學性), 정기세(鄭基世), 김병주(金炳㴤), 남병길(南秉吉)을 실록 교수 당상(實錄校讎堂上)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4월 2일 병인
강난형(姜蘭馨)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재면(李載冕)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서헌순(徐憲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명적(李明迪)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4월 2일 병인
성주 목사(星州牧使) 남희중(南羲重)과 상주 목사(尙州牧使) 조영화(趙永和)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命)하였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서 우수한 업적이 있다는 전 도신(道臣)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4월 3일 정묘
전교하기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입시(入侍)할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도 함께 입시하고 2품 이상은 빈청(賓廳)에 와서 모이게 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묘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소견(召見)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어제 경복궁(景福宮)의 중건 문제를 명령한 바가 있는데 경 등은 들었는가?"
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경복궁 중건은 몇백 년을 두고 미처 손대지 못한 일입니다.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생각은 하고 있었고 옛날의 어진 신하들도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받은 명령은 대소 신민들이 항상 바라오던 것입니다. 그런데 궁전을 짓자면 먼저 규모도 정하고 준비도 있어야만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나라에서 공사를 하려고 드는 이상 안 될 리가 있겠는가? 옛날 그 대궐을 사용하던 때에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므로 태평 시대라고 칭송하였다. 그 때문에 주상이 백성을 위하여 이 공사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어제 내린 대왕대비의 명은 말씀이 아주 간절하고도 진지하였습니다. 3백 년 동안이나 미처 손대지 못한 일인데 이제 만일 새롭게 다시 지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오래된 나라를 유신(維新)하는 일이니 누군들 손을 모아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공사가 더없이 크고 재력도 갑자기 마련해낼 만한 것이 아니어서 답답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민력(民力)을 동원할지의 여부는 온 조정의 의견이 귀일되기를 기다린 다음에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이번에 옛 궁전을 중건하는 것은 수백 년 동안 미처 손대지 못한 일을 하는 것으로서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것 가운데서도 큰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나라의 경비로 말하면 큰 공사를 벌이지 않아도 오히려 궁색하여질까봐 우려되니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실로 재물을 마련하자면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길밖에 없어 결국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여야 할 형편인데 절약하는 방도는 유사(有司)들이 어떻게 조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옛 궁궐을 중건하는 일에는 모든 백성들이 제집 일처럼 떨쳐나설 것이고 재정도 유사들이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옛 궁전을 중건하는 것은 나라의 운수를 새롭게 만드는 계기이므로 기쁜 마음에 축원하여 마지않습니다. 대체로 나라에 큰 공사가 있으면 으레 백성의 힘을 빌리는데 이것은 어버이의 일을 도우려고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재정도 유사들이 응당 차례차례 해결해나갈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돈영(李敦榮)이 아뢰기를,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조정에서 의논이 있었습니다. 지금 대왕대비의 명령을 받들고 누군들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의 힘이 펴지게 만들거나 곤란해지게 만든다든가 재력이 넉넉해지게 만들거나 말라붙게 만든다든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자연히 묘당(廟堂)에서 조처해나갈 것입니다. 신으로서는 그것을 받들어 일을 해나가야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게 한 다음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당상(堂上官)과 낭청(郎廳)을 차출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이번의 중건 공사는 순전히 백성들을 위하여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맨먼저 백성들의 힘을 소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옛 제도에도 한 해에 백성들의 품을 3일간 썼습니다. 이런 나라의 공사에 백성들이 품을 들이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뭇사람이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만큼 그 노고를 잊게 될 것입니다. 신은 비용은 오히려 둘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담당한 사람들이 백성의 심정도 살피고 백성의 형편도 요량해가면서 일에 따라 펴나가게 하면 잘될 것입니다."
하고, 조두순이 아뢰기를,
"나라의 큰 공사에 백성들이 부역(赴役)하는 것은 좌의정이 아뢴 바와 같이 아버지의 일에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리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공사에 백성들의 힘을 빈 전례도 많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그러면 백성들의 힘만 빌리겠는가?"
하니, 조두순이 아뢰기를,
"서민(庶民)뿐 아니라 위로는 경재(卿宰)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힘을 내어 돕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말하기를,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大院君)에게 맡겨버렸으니 매사를 꼭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니, 조두순이 아뢰기를,
"꼭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4월 3일 정묘
전교하기를,
"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의견을 물어 승정원(承政院)에 봉입(捧入)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묘
승정원(承政院)에서, ‘2품 이상의 관리들한테 수렴한 의견을 입계(入啓)하였는데 모두들 백성의 힘을 빌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모든 재상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정부(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묘
전교하기를,
"영건도감 도제조(營建都監都提調)는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으로 삼고, 제조(提調)는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좌찬성(左贊成) 김병기(金炳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 겸 호조 판서(兼戶曹判書) 이돈영(李敦榮), 대호군(大護軍) 박규수(朴珪壽), 종정경(宗正卿) 이재원(李載元)으로 차하(差下)하며, 대사성(大司成) 이재면(李載冕), 부호군(副護軍) 조영하(趙寧夏)와 조성하(趙成夏)를 부제조(副提調)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묘
또 전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임태영(任泰瑛),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경하(李景夏), 어영 대장(御營大將) 허계(許棨), 총융사(總戎使) 이현직(李顯稷),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이주철(李周喆)을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로 추가하여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묘
유치선(兪致善)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4월 4일 무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옛 궁전을 중건하려면 마땅히 사유를 고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니 종묘(宗廟)·사직(社稷)·산천(山川)에 대한 고유제(告由祭)를 택일하여 설행할 것을 예조(禮曹)에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5일 기사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의 중건 날짜를 이달 13일 손시(巽時)로 택일하였는데 이날 이 시각에 공사를 개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5일 기사
생진과(生進科)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4월 5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마련하고 백성들의 노력을 이용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2품 이상의 관리들이 모두 의견을 내었는데 비답에서는 유리한 쪽으로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큰 공사가 있을 때 반드시 백성들을 동원시키고 재물도 징수하는 것은 주(周) 나라 이후부터 규례로 정해져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막대한 공사에 일반 백성들도 아들처럼 달려올 것입니다. 며칠 동안 부역(赴役)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적당하게 헤아려서 다시 아뢰고, 안으로는 경재(卿宰) 이하와 밖으로는 감사(監司)·절도사(節度使)·수령(守令) 이하가 형편에 따라 의연(義捐)하여 돕는 것이 도리입니다. 비록 사서인(士庶人)이라고 하더라도 중앙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자원하여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벼슬로 상을 주는 것 역시 전한(前漢) 때에 이미 시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라에서 억지로 배당하거나 강제로 징수해서는 안 되니 오로지 각자가 나라에 어떻게 보답하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러한 때에 만일 이를 빙자해서 위협 공갈하여 마구 받아내거나 그저 떼어먹는다면 그 피해가 도리어 횡포하고 가혹한 징수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각별히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대왕대비(大王大妃)로부터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4월 5일 기사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번에 옛 궁전을 중건하는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불러오고 나라를 위하여 번창해지게 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공사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드는 일이다. 백성들에게 내게 하자니 정녕 너무나 애처로워 이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어제와 오늘 이틀 사이에 모인 원납전(願納錢)이 10만 냥(兩)에 달하고 선파(璿派)들이 보조한 돈도 몇만 냥이 넘는다고 한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이 공사가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에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나라를 위하는 우리 백성들의 성의도 융성하던 옛날에 비하여 부끄럽지 않다. 더구나 임금의 여러 일가들은 선조들이 처음으로 잡은 터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고락을 함께 나누는 한 집안 사람처럼 처신하였다. 모두 너무나 가상하여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어제 경재(卿宰)들의 수의(收議)를 보니 백성을 공사에 동원시키자고 아뢰었으나 가엾은 저 쪼들린 백성들은 저들의 환곡(還穀)과 군포(軍布)라든지 그런 것을 해마다 마련하여 납부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게다가 며칠씩 부역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백성을 동원시키는 문제는 우선 접어 두라.
도성의 백성들이 원납한 것도 이러하다고 하니 지방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해서 어찌 그와 다를 리 있겠는가?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모든 마을의 부유한 백성들에게 일일이 잘 일러주되 만약 의연금을 내어 크게 돕는 경우에는 응당 특별한 성의를 표시할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일가에 대해서는 종친부(宗親府)에서 통지하여 기꺼이 부역에 나서게 하라. 그러면 큰 공사의 완성을 기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이런 뜻을 시급히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4월 5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 경상 감사(前慶尙監司) 서헌순(徐憲淳)의 보고를 보니, ‘본도(本道) 안에 산재되어 있는 통영(統營)의 곡식이 11만 7,000여 석(石)입니다. 산군(山郡)에서는 상정법(詳定法)에 준하여 돈으로 대납(代納)하고 연읍(沿邑)에서는 본색(本色)으로 실어다 바치는데 수송비가 곡식 값보다 몇 곱절 더 들 뿐 아니라 혹 돈으로 대납하는 경우에도 매 석당 값이 8, 9냥(兩) 이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변 고을 백성들에게 가장 뼈아픈 고통입니다. 이제 만약 산간 고을과 해변 고을을 통틀어 고을의 크기에 따라 미곡의 총량을 고르게 한 다음에 모곡(耗穀)을 매 석당 5냥씩 매겨 일정하게 바치도록 한다면 아마 이해가 현저히 차이 날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조운선(漕運船)을 10년에 한 번 제조하는 것은 법전의 규정이며 1척을 새로 건조하면 감면해 주는 비용이 쌀로 180석이고 돈으로는 300냥입니다. 뱃놈들은 새로 건조하는 비용이 후하다는 것만 생각하고 나라의 비용이 없어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상납하고 와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기어이 배를 관청에 바쳐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엄격히 방지하지 않으면 법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썩었거나 파괴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아는 경우 이외에는 관청에 바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마 간교한 행동을 막고 비용도 절약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 대해,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고 비답하셨습니다.
통영의 곡식에 대한 문제는 임술년(1862)에 첫 정리를 할 때 이미 계하(啓下)하여 행회(行會)한 사항입니다. 그때 여러 차례 해영(該營)에 관문(關文)하여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보아서 시행하기로 한 것이었으나 이내 보류해둔 채 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도신(道臣)의 보고는 심원한 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체로 백성이 있고 나서 군영도 있는 법입니다. 이제 만약 본색으로 책임지우면 실로 말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청한 대로 관문을 보내어 규례로 정하게 하소서. 조운선의 연한이 차기 전에 걸핏하면 썩었다거나 파괴되었다는 구실을 붙여 관청에 바치는 자는 각별히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선혜청(宣惠廳)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5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통제사(統制使) 이봉주(李鳳周)의 보고를 보니, ‘본영(本營)은 이미 외등단(外登壇)으로서 시행하는 이상 수교(首校)에 대해서도 경영(京營)의 규례대로 하되 본영에 소속된 진영(鎭營) 중의 변장(邊將) 자리 하나를 영구히 자체 추천하는 자리로 만들어 놓고 보고만 하고 임명함으로써 권장하는 방도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통영(統營)의 지휘 체계가 달라진 후 군교(軍校)를 공로에 따라 등용해 주는 것도 해야 할 일이니 남촌(南村) 별장(別將)의 자리 하나를 영구히 해당 군영에 주어 격려한 효과를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6일 경오
운현궁(雲峴宮)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4월 6일 경오
정주 목사(定州牧使) 서경순(徐經淳)을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잉임(仍任)시키라고 명(命)하였다. 치적(治績)이 우수하다는 감사(監司)로부터의 포계(襃啓)가 있었기 때문이다.
4월 8일 임신
효문전(孝文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8일 날의 별다례(別茶禮)를 겸하여 행하였다.
4월 8일 임신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유장환(兪章煥), 부사(副使) 윤정구(尹正求), 서장관(書狀官) 장석준(張錫駿)이다.】
4월 8일 임신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번에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할 때 돈 10만 냥(兩)을 마땅히 내하(內下)할 것이니 우선 보태어 쓰라고 영건 도감(營建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4월 8일 임신
장기현(張䰇縣)의 익사한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4월 9일 계유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우길(洪祐吉)이 장계(狀啓)를 올려, ‘도(道) 내의 각 고을에서 포흠(逋欠)한 환곡(還穀)을 사실대로 조사하는 일은, 이번 전 도에 걸쳐 크게 변혁을 진행하는 시기와 상치하여 방대한 문서를 낱낱이 훑어보기가 쉽지 않아 지연되어서 특지(特旨)를 여러 번 받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환곡이나 양향곡(糧餉穀)이 거의 바닥이 드러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된 것이어서 매년 배분하여 양향곡을 보탠다는 것이라든가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아 이자를 가볍게 한다는 것들은 태반이 장부상에만 올라 있는 것이며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포흠한 수량은 모두 평양(平壤), 강서(江西) 등의 4, 5개 고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부상에만 올라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전(衙前)이나 하인들이 농간질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군영(軍營)이나 고을에서 변상할 수량을 감해주고 배분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니, 각자가 부담한 수량이 많건 적건 간에 대상을 지적할 수 없는 포흠 사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평양과 강서 등 고을의 경우에는 포흠을 시작한 해가 오래되어 시초의 원인을 밝힐 수 없을 뿐 아니라 혹 고을에서 포흠한 양을 메우기 위하여 변통하는 과정에서 애매한 곳으로 넘겨버리기도 하고 혹 연전에 청사(廳舍)가 화재를 당했을 때에 타버려 더이상 근거할 문건이 없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새로 포흠한 것을 따로 조사관을 보내어 여러 차례 검열해 보았으나 4, 5년 전의 창고 문서가 모두 없어졌고 사망한 자도 많으며 더러 살아 있는 자가 있기는 하나 때리고 상하게 하여도 소용이 없거니와 또 그런 자들이 각기 부담하고 있는 수량도 많아야 수천에 불과합니다. 포흠한 양이 수십 만에 달하는 고을을 문서에 준해서 캐어내면 어찌 몇 명의 큰 괴수가 없겠습니까? 저들은 한낱 부차적인 나부랭이일 뿐입니다.
조사 원칙을 논의해 보면 너무나 사실에 기초하여 진행하지 못하였지만 하는 수 없이 그저 고을의 보고에만 근거하여 따로 성책(成冊)하여 의정부(議政府)에 올려 보냅니다.
이른바 매년 분배하여 양향곡을 보탠다는 것과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아 이자를 가볍게 한다는 것은 그 시초를 따져보면 각각 나름의 규정이 있었으나 나중에 와서 폐단이 되어 서로 엉켜서 몇천만이나 되는 환총(還總)을 다 없애는 동시에 40개 고을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강제로 빼앗게 되었습니다. 백성을 못살게 하고 고을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지금 환곡을 정지해버린 후부터 자뢰(資賴)할 구실이 없어져 폐단의 근원이 자연히 막힌 셈이나 변상할 수량을 감해준 채 아직껏 마감을 하지 못한 것만도 돈으로 치거나 곡식으로 치거나 몇십만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애초에 문건을 받아놓고 기한까지 정해놓은 것으로서 보통의 채권(債券)과는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려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지만 스스로 손댄 것을 자기의 힘으로 마련하여 바칠 수 있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안 되고 거의 무고(無告)한 일가나 친척에게 고통을 넘겨야 할 형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느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허위와 사실을 분간하기 어렵고 어느 것은 취하고 어느 것은 빼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에 한번 조사를 진행하여 애초에 변상할 수량을 감해준 해의 몫과 배당하여 받기로 한 수량, 이미 받아들인 것과 못 받아들인 것 등을 상세히 기입하여 성책하여 올려 보냅니다.
그 가운데 삼마청(三馬廳)은 큰길 가여서 번잡한 역무(役務)가 많으므로 나라의 재산이 축난 채로 내려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래서 벌써 그 무리들의 생활 밑천인 위토(位土)와 복결(復結), 매달의 돈과 요미(料米) 등은 전부 배정하여 바치는 것에 들어갑니다. 게다가 형편이 더욱 군색해지고 중국 사신의 행차까지 박두하게 되면 배정하여 바치는 기한을 미루어주고 그것을 우선 빌려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 치고 그렇지 않은 해가 없다 보니 처음에 10년으로 기한을 배정하여 채워넣도록 한 일이 지금 7, 80 년이나 밀려왔습니다. 이후에도 줄곧 그렇게 내려가면서 끝장이 나지 않았던 것은 단지 그 무리들의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재산이 중대하기는 하나 큰 일이 급하니 비록 기한 연기를 허락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한을 미루어 준 해의 수량도 성책 중에 구별해 놓았습니다.
이른바 본 감영(監營)의 각 창고에서 매년에 배당한다는 한 가지 문제를 말해 보겠습니다. 그 포흠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공적인 비용이 원래 방대한 데다가 물건값까지 몇 배로 올라가는 바람에 각 창고에서 공급할 적에 자연히 손해보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떼어먹은 사람이 없이 축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그 무리들에게만 죄를 모두 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흠을 방지하기 위한 예비곡(豫備穀)을 매년 배당하여 요행수를 바라는 길을 터놓는데 매년 배당해 놓는 데에서 그 무리들 자신이 마련하는 것은 얼마 안 됩니다. 환곡이나 양향곡 이외에 축나는 데 대처하기 위한 예비곡이라는 명색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것에서 떼어내어 축난 것을 약간 보상하고 그 나머지 곡식은 해를 미루어 장리를 놓아 이자를 만들어 환곡의 본전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매년 물어야 하는 것들을 배정한 기한을 미루어나가다가는 다 채울 기약이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환곡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다시 더 논할 것도 없지만 을묘년(1855)부터 갑자년(1864)에 이르는 10년 동안에 각 창고에서 포흠한 것에 대처하기 위한 예비곡으로 매년마다 배당해놓은 수량을 철저히 조사하여 각자 포흠한 수량과 성명을 성책하여 올립니다.
그런데 포흠죄를 범한 자들 중 수량이 많은 자는 애초에 고장을 떠났을 뿐 아니라 거기서 또 다른 고장으로 떠나갔으며 이미 사망한 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살아 있는 자라고 해도 직업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는 자입니다. 따라서 포흠한 수량이 많고 적고 간에 지금 내라고 하는 것은 생억지를 쓰는 일이며 이번에 약간 바친 것도 그들이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수를 다 쓴 것입니다. 사실대로 대략 진술하오며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지금 기백(箕伯)의 사계(査啓)를 보니 환곡과 향식고(餉殖庫)에서 포흠한 것이 이렇게 문란하다. 앞서 두 번씩이나 특별히 하교하여 철저하게 검열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조사한 성책을 통해서 알지 못하던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환곡에 대해서 말해보더라도 장부에 올려놓고 팔아치운 것이 장부에 회록(會錄)한 총량의 반수를 차지하고 창고의 장부를 분실하여 조사할 근거조차 없어졌으며 포흠죄를 범한 우두머리들은 거의 다 죽고 더러 살아있는 자는 부차적인 나부랭이들이다. 그러니 이것을 환곡의 출납이 법대로 되었고 보관도 옳게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창고에서 포흠한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무절제하게 가져다 쓰고는 제때에 보상하지도 않으니 창고의 관계자들이 공적인 비용이라 핑계대고 떼어먹은 사람도 없이 포흠으로 만드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하지만 포흠한 것에 대처하기 위한 예비곡을 배당하는 것을 허락하자 작은 것을 핑계로 크게 만들어 도리어 맡아 보는 무리들이 점점 물들게 된다. 그렇다면 각 창고에서 포흠한 것이 매 회기의 가하(加下)와 같게 되니, 감사(監司)의 장계에서, ‘꼭 그 무리들에게만 죄를 모두 돌릴 수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실정에 들어맞는 말이다. 먼저 조사해낸 10년분이 이미 이와 같다면 아직 조사하지 못한 몇 년 분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포흠한 두 가지를 참빗으로 훑듯 다 받아들일 방도가 없지는 않으나 환곡 포흠의 참과 거짓이 뒤섞여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창고 곡식의 포흠도 모두 그들 자신이 포흠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가 있으니 하나의 법을 적용하면 공정하게 해야 하는 도리에 어긋날 것이다. 더구나 그 도는 크게 개혁한 다음에 거의 숨을 돌리게 될 희망이 보이는 형편에서 이제 만일 포흠당한 거액을 징수하도록 독촉한다면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번져서 소란을 피우고 고장을 떠나는 우환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임금이 왕위에 오른 첫 시기의 정사에서는 마땅히 쓰다듬고 보존해 주는 정책을 앞세워야 할 것이니 차라리 전부 분명하지 못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앞서 이 도에서 환곡을 포흠당한 것과 감영의 각 창고에서 포흠한 몫을 전부 탕감하여 새로운 교화를 다시 편다는 뜻을 보일 것이다. 포흠죄를 범한 매 사람들에 대하여 등급을 나누어 감률(勘律)하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양향곡을 늘린다는 것 중에 삼마청에서 정지시킨 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일찍이 바로잡았더라면 적은 것이 쌓여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내버려두고 지내왔으니 누구에게 그 책임을 지우겠는가? 큰길 가의 번잡한 역무로 장차 역참(驛站)이 끊어져버릴 우려도 있으니 배정하여 바치는 몫 중에서 3분의 2는 탕감하고 3분의 1은 이자 없이 10년에 배분하여 바치게 하라."
하였다.
4월 9일 계유
전교하기를,
"관서 지방의 각종 포흠에 대해, 어느 것은 그대로 두고 어느 것은 탕감(蕩減)하는 일과 관련하여 막 동조(東朝)의 하교가 계셨다. 조정에서 방백과 수령을 설치한 까닭은 그 자신을 영광되게 하거나 그 가정을 살찌우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임금을 대신하여 분담받은 지역을 보살피라는 것인데, 그 직임에 있는 자들로서 이를 잘 시행하는 사람이 드물다. 비록 이 도로 말하더라도 감영이나 고을 중에 평소 넉넉하고 충실하다고 일컬어졌던 곳들도 모두 피폐하고, 창고가 옛날에는 가득 찼다고 했던 것들도 모두 텅텅 비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지방관에게 막료(幕僚)를 둔 것은 진실된 마음으로 보좌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일찍이 조관(朝官)이나 수령을 역임한 자들도 많으니, 역시 국법의 두려움과 공사(公事)의 막중함을 알 것이다. 소위 첨향(添餉) 납부를 늦추어 주고 사례비를 제멋대로 받기 시작하고, 가벼운 이자로 빌려 주고는 사례비를 받기 시작하는 따위는 일시적인 사리(私利)를 도모하여 마침내는 국가와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 아닌 게 없다. 한 차례 징계함이 없다면 어떻게 막료들이 주장(主將)을 기만하고 눈을 가리는 습속을 막료들이 경계할 수 있겠는가?
정미년(1847) 이후 평안 감영의 호방(戶房)과 비장(裨將)의 명단을 빠짐없이 보고하고, 일찍이 정직(正職)을 역임한 사람은 으레 왕부(王府)에서 잡아다 심문할 것이지만 한산인(閑散人)은 형조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라. 호방의 회계(會計)와 두 창고의 각 년(各年) 담당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철저히 사실을 조사해서 포정문(布正門)에서 개좌(開坐)하여 곤(棍) 30도(度)를 엄하게 쳐서 원지정배(遠地定配)하라."
하였다.
4월 10일 갑술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개장(改張)할 때의 감동(監董)이었던 종정경(宗正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규철(李圭徹), 감인 당상(監印堂上) 이경순(李景純), 《국조어첩(國朝御牒)》의 서사관(書寫官) 이승보(李承輔)를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4월 10일 갑술
가리포진(加里浦鎭)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 【원본】 6책 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84면
- 【분류】
구휼(救恤)
4월 11일 을해
이도중(李檤重)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경순(李景純)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박규수(朴珪壽)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4월 11일 을해
공충 병사(公忠兵使) 이동현(李東鉉)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관찰사(觀察使)가 포계(褒啓)를 올렸기 때문이다.
4월 12일 병자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 친히 대궐 터를 살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이 궁궐은 왕업이 처음 일어난 터전이고, 임금이 남면(南面)하고서 정사를 하던 정궁(正宮)입니다. 중건의 명이 내려 길일(吉日)을 잡아 역사(役事)를 시작하자 뭇사람들이 축하를 하니, 장차 태평성대의 기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옛 대궐을 중건하는 일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시는 성상의 진념(軫念)에서 나온 것이니, 모든 백성 부리는 일을 형세를 따라 그 힘을 펴도록 해서 백성들이 즐거워한다면, 어버이의 유업(遺業)을 아들이 계승하는 공업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유념할 것이다. 들으니, 궁궐 담장 밖에 백성들이 지은 집들이 많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형세상 앞으로 모두 이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사정이 불쌍하니, 분수(分數)를 정하여 돈을 지급하는 것은 어떠한가?"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궁궐 담장 근처에 집을 짓고 거처하는 것은 법으로 금하는 것입니다. 이제 궁궐의 역사를 시작하면 스스로 철거할 것이니 어찌 별도의 은전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성저(城底)의 민가는 비록 불법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전례에 따라 지급하는 것이 과연 좋을 것입니다."
하고, 도제조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판도 소견이 있으면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호조 판서 이돈영(李敦榮)이 아뢰기를,
"성상의 진념이 여기에까지 미치시니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미천한 백성들이 성저에 집을 지은 것은 본디부터 법으로 금한 것이니 유사(有司)의 입장으로서는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고, 정원용이 아뢰기를,
"호판의 말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상주(上奏)가 비록 동일하기는 하나 미천한 백성들이 이미 집을 짓고 살고 있으니 지금 비록 부득이하여 철거하기는 하지만 그 거처를 잃어버리는 정상은 실로 가련하다. 비록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해조(該曹)에서 특별히 후하게 지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이것은 어가(御駕)가 거둥하시는 길에 있어서 훼손된 백성들의 전답이나 집에 대해 유사가 헤아려 값을 지급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돌보시는 마음과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할까 하는 염려에서 누누이 하교하시어 특별히 파격적인 은전을 시행하라고 하시니, 이는 진실로 어진 마음의 발로로서 어진 정사가 이로부터 시행될 것인바 신들은 흠송(欽誦)하는 마음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유사는 오직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아랫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성덕이 여기에까지 이르시니 진실로 흠앙하는 마음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돈영이 아뢰기를,
"누차 하교를 받들게 되니 기뻐 송축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성대한 뜻을 선포하는 일을 다른 예(例)에 따라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4월 13일 정축
김수현(金壽鉉)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4월 14일 무인
홍우건(洪祐健)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오취선(吳取善)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4월 15일 기묘
권강(勸講)하였다.
4월 15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16일 경진
권강(勸講)하였다.
4월 16일 경진
전교하기를,
"방민(坊民)들 중에 부역을 자원하는 자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하니, 소식을 듣건대 매우 가상하다.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일일이 위문하고 장려하는 뜻으로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적당량의 곡식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신사
권강(勸講)하였다.
4월 17일 신사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번 궁궐의 역사를 할 때에 성안과 성밖을 논할 것 없이 자원하여 역사(役事)에 나오는 자들이 마치 자식이 아비의 일에 달려오는 것처럼 하여 자기의 수고로움을 잊고 일을 하니, 사람들의 뜻을 볼 수 있으며 가상하기 그지없다. 다만 지금 한창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을 맞이하여 백성들이 이 일로 인하여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다면, 이는 왕도 정치에서 백성들의 농사지을 때를 빼앗지 않는 도리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부모를 섬기고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겠는가?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치면 참으로 걱정스럽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한산인(閑散人)을 제외한 근교의 농민은 각자 돌아가서 먼저 농사일에 힘쓰도록 경조(京兆)의 낭관을 파견하여 일일이 전유(傳諭)하도록 하고, 다시 위문한 뒤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신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18일 임오
권강(勸講)하였다.
4월 19일 계미
권강(勸講)하였다.
4월 19일 계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그저께 근교의 농민들에게 제각기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라는 뜻으로 전유(傳諭)한 것이 있는데, 모두 공적인 일을 앞세우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의리를 알아 그만두고 돌아가려 하지 않고 그대로 기꺼이 부역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에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부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다만 거주지가 조금 멀리 있는 사람들은 종일 일을 하다가 저물녘에 돌아가게 되면 피곤한 나머지 병이 들기 쉬우니, 백성들의 위에 있는 자로서 가장 염려스러운 바이다. 지금부터는 교외에 사는 백성들로서 당일 일을 마친 뒤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는, 양반집이건 상민집이건 논할 것 없이 제각기 분배하여 숙박할 수 있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묵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경조(京兆)에서 집집마다 통지하라. 그리고 또 이 뜻으로 역사에 나온 백성들에게도 일일이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4월 19일 계미
홍우건(洪祐健)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4월 20일 갑신
권강(勸講)하였다.
4월 20일 갑신
전교하기를,
"경복궁 궁장(宮墻) 아래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는 일은 형세상 당연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애처롭다. 서궁(西宮)의 함춘원(含春苑) 안 담장 밖에 생활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들도록 경조(京兆)에 분부하라."
하였다.
4월 21일 을유
권강(勸講)하였다.
4월 22일 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22일 병술
조영하(趙寧夏)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김대근(金大根)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4월 22일 병술
"《철종대왕어제(哲宗大王御製)》와 《열성어제(列聖御製)》 합부본(合附本)을 삼가 인쇄할 때 인쇄를 감독한 각신(閣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4월 23일 정해
권강(勸講)하였다.
4월 23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24일 무자
권강(勸講)하였다.
4월 24일 무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25일 기축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경향(京鄕)의 많은 백성들이 부역(赴役)을 자원하여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이 궁궐을 건축하는 것에 대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축원하였기 때문에 즐거이 부역을 하게 된 것이니, 옛날에 이른바 서민들이 자식처럼 와서 수고로움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민심은 바로 천심(天心)입니다."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신이 이 궁궐에 들어와 본 것이 이미 50여 년이 되었습니다. 터가 존엄하고 정대하여 전부터 매우 길하다고 일컬었는데, 중건하라는 명이 내려 이제 역사(役事)를 시작하게 되니, 참으로 경사스럽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선량한 백성들을 근자에 어찌하여 도탄 속에 빠지게 하였단 말인가?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시기를, ‘현재 백성들의 마음이 옛날 문왕(文王)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잘 인도한다면 어찌 주 나라와 더불어 융성함을 견줄 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자교를 지극히 흠앙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은 3대(三代)부터 올바른 도리를 행해 온 그 백성들입니다. 근자에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였던 것은 모두 신들과 해당 고을의 목민관들이 일마다 전하의 뜻을 잘 선양하지 못한 죄입니다."
하고,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현재 많은 백성들이 부역을 하는 것을 보니, 신은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선량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역사(役事)를 하는 곳을 직접 시찰하겠다. 대신 이하는 수행하라. 모든 대신들은 다 부역을 하는 백성들의 실상을 보았는가?"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과연 진심으로 기뻐하며 공사에 동원된 것을 더없이 줄거워하는 것을 통하여 백성들의 심정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선량한 마음이 참으로 본래 이러한 것임을 오늘에 더욱 볼 수 있었다."
하였다.
4월 26일 경인
식년 문과 복시(式年文科覆試)에서 진사(進士) 조재원(趙在元) 등 33인을 뽑았다.
4월 26일 경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내리신 전교를 보니, ‘관서(關西)의 환곡으로서 포흠(逋欠)된 것과 감영 각 창고의 곡식으로서 포흠이 된 것을 모두 탕감(蕩減)하고, 포흠을 한 자들은 분등(分等)하여 감률(勘律)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분등하여 감률하라는 명을 내리니, 이는 바로 형벌로 가지런하게 하는 정사입니다. 감영 각 창고를 가지고 말하면 3만 냥 이하에서 6,000여 냥(兩)에 이르는 자로서 6명(名)은 도망하였고 1명은 사망하였으며 1명은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된 종 행정(行正)이 포흠한 9,000여 냥과 최양화(崔陽化), 종 지화(之化) 등이 포흠한 8,000여 냥은 그 죄가 요행으로 피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법의(法意)가 더할 수 없이 준엄합니다. 종 행정, 최양화와 종 지화는 기영(箕營)으로 하여금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시키고, 5,000여 냥을 포흠한 강윤호(姜允浩) 등 5명은 엄히 형신(刑訊)하고 원배(遠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읍(各邑)의 포흠된 환곡을 가지고 말하면 2,000석(石) 이하에서 1,000석까지 포흠한 자 중에서 8명은 모두 사망하였고 3명은 도망하였는데, 이른바 도망자들은 감영 창고 소속이거나 고을 소속이거나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기한을 엄수하여 체포하도록 한 뒤에 그 처리 결과를 속히 본부(本府)로 보고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8일 임진
영건 도감(營建都監)에서, ‘경복궁(景福宮) 축성(築城)의 길일 【같은 해 6월 20일】 과 교태전(交泰殿) 영건(營建)의 길일 【정초(定礎)는 같은 해 6월 20일, 입주(立柱)는 같은 해 10월 9일, 상량(上樑)은 같은 해 10월 11일】 을 가려 택하였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4월 28일 임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식년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양상기(梁相器) 등 43인(人)을, 무과에서 이덕순(李德純) 등 28인을 뽑았다.
4월 29일 계사
권강(勸講)하였다.
4월 29일 계사
이우(李㘾)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정신(李鼎信)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4월 30일 갑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경호(李京鎬)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교현(李敎鉉)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삼았다. 이교현은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휘복(李徽復)을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윤수(李潤壽)를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실록2권, 고종2년 1865년 6월 (0) | 2025.01.07 |
---|---|
고종실록2권, 고종2년 1865년 5월 (0) | 2025.01.07 |
고종실록 2권 고종2년 1865년 3월 (0) | 2025.01.07 |
고종실록 2권 고종2년 1865년 2월 21일~29일 (1) | 2025.01.06 |
고종실록 2권 고종2년 1865년 2월 11일~20일 (1) | 2025.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