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3권, 고종3년 1866년 2월

싸라리리 2025. 1. 8.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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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묘

효문전(孝文殿)에 나아가 담제(禫祭)를 지냈다.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최우형(崔遇亨)을 이조 참판(吏曹參判)로 삼았다.

 

효문전(孝文殿)의 작헌례(酌獻禮)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윤욱(尹堉), 집례(執禮) 이심재(李心宰), 집전(執奠) 이병교(李炳敎), 대축(大祝) 임효직(任孝直) 등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이세익(李世翊)·심상목(心相穆)·조만화(趙晩和)·이유승(李裕承)·엄세영(嚴世永)·김영석(金永奭)·조병숙(趙秉肅)·조항교(趙恒敎)·홍대종(洪大鍾)이다.

 

2월 2일 임진

김대근(金大根)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2월 3일 계사

전교하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이다.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2월 4일 갑오

철종 대왕(哲宗大王)의 어진(御眞)을 천한전(天漢殿)으로 이봉(移奉)할 때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아가 지송(祗送)하였다.

 

양덕현(陽德縣)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박규수(朴珪壽)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5일 을미

효문전(孝文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003)  를 행하고 이어 돈화문(敦化門) 밖에 나아가 신련(神輦)을 지송(祗送)하였다.

 

제주목(濟州牧)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홍종서(洪鍾序)를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로 삼았다.

 

2월 6일 병신

철종 대왕(哲宗大王)의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의 제17실에 들여놓았다.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봄 전알(展謁) 때문이다. 이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진하(進賀)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先王)이 예법을 제정할 때 담제(禫祭)는 대상제(大祥祭)를 지낸 뒤 달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종묘 안에서는 소목(昭穆)의 서열에 따라 차례에 맞추어 부제사(祔祭祀)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거상 기간에 생각했던 바를 가지고 교서(敎書)를 만들어 알리노라.
공손히 생각하건대 철종 희륜 정극 수덕 순성 문현 무성 헌인 영효 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은 중흥(中興)의 운을 만나고 성인의 자질을 가졌으며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큰 계책에서 하늘이 이미 정해놓은 일임을 알고 선조(宣祖) 때의 고사(故事)004)  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은(殷) 나라의 무정(武丁)은 박(亳) 땅에도 가고 황하(黃河)에도 들어가 어렵게 지내야만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았고 한(漢) 나라의 횡경(橫庚)은 점을 쳐서 대(代)에서 위(渭)로 들어가 떠들썩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였다.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4조(四條)의 가르침005)  을 따랐고 대비(大妃)의 침선(寢膳)을 보살핌으로서 임금의 힘을 다하여 기쁨을 드렸다. 극진한 효성으로 사람의 모든 행실의 근원을 이루었고, 지극한 정사는 옛날 중국의 3대 때와 비길 만하였다. 선왕(先王)의 사당에서 조상의 공을 밝혀 선대(先代)를 드날려서 숭상하였고 영왕(寧王)에 대해서는 대대로 세운 업적을 높이면서 계승할 것을 잊지 않았다.
대검(玳檢)으로 제목을 장식한 책문(冊文)을 여러 차례 올림으로써 늙은 신하들과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기를 축원하였으며, 왕실의 계통에 대한 모욕된 기록을 영구히 씻음으로써 대대로 전할 공적을 세웠다. 대비의 능자리를 골라잡기 위해서는 친히 돌아다니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거상을 당해서는 상례(喪禮)를 지키면서 몹시 슬퍼하는 모양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굳건히 조상을 본받아 보고 듣는 것이 때에 맞고 모범이 되었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지내도록 함으로써 하늘의 뜻에 부합되게 하였다.
봄가을로 제사를 정성껏 지냄으로써 모든 예를 흡족히 하였고 가뭄이 들거나 큰물이 지면 지성껏 제사를 지내고 빌어서 하늘까지 감동시켰다. 아무리 아침 저녁으로 정사 보는 데 바쁘더라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은 날을 따라 발전하고 달마다 높아졌다. 시골로 폐백을 보내어 언제나 늙고 덕 있는 분들을 청해오기를 바랐으며 넓은 방 좁은 자리 위에서도 경서(經書)를 펴놓고 때때로 어진 선비들을 만나보았다.
현재의 긴급한 정사 세 가지에 대한 방책을 선비들한테 물은 것들은 시기적절한 조치였고 경계해야 할 열 가지의 문제를 병풍에 써 붙인 것은 날마다 그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보통 서민(庶民)의 지아비와 지어미도 자리를 잡고 제대로 안착되어 살지 못하는 이가 없는 것은 법을 너그럽게 적용하고 형벌을 잘 살펴서 시행한 어진 정사의 보람이며, 한 알의 곡식이나 한 오라기 실도 모두 백성들이 힘들여 일한 데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입거나 음식을 드는 것도 모두 검소하게 하였다. 푸주간으로 들어가는 소를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내의원에서 올리는 우유를 그만두게 하였으며, 마치 자신이 굶주리거나 내 몸이 추위에 떠는 것 같이 생각하여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내탕금(內帑金)을 자주 풀어 보냈다.
진실로 하루 이틀 이어가며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결과 14년 동안 나라를 편안히 다스리니 인자하고 부드러움이 족히 용모에 나타나고 훌륭한 소문이 일찍부터 널리 퍼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다 성품에 맞게 살도록 하여 크나큰 혜택이 온 나라에 널리 미쳤다. 바른말을 올리는 사람들을 위문하여 불러들이고 덕망이 높은 사람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였으며, 어진 사람들을 가까이함으로써 즐겁고 유익한 생활을 누리며 훌륭한 교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누대로 덕화를 펼친 터전 위에서 태평 시대의 표적을 이루는 상서로운 일이 세 차례씩이나 나타났다. 높은 덕을 지닌 분이야 틀림없이 장수하리라 흠송(欽頌)하였는데 갑자기 승하(昇遐)하셨다는 소식을 받으니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아, 하늘에서 우리 집안에 재앙을 내리니 남기신 활과 검을 만져보며 모진 슬픔에 가슴이 미어진다. 이 변변치 못한 내가 그 빛나는 자리를 물려받아 나라의 계통을 이어나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대비의 은덕으로 다행히 이루어 놓으신 공적을 우러러 별 하는 일 없이도 정사가 잘 행해지니, 덕이 부족하고 일에 어두운 내가 어떻게 남기신 큰 일을 감당하여 어려움 속에 뛰어들 수 있었겠는가?
슬픈 마음은 끝이 없고 신위를 합사(合祀)하는 의식은 질서 정연하다. 아로새긴 안석을 영원히 거두니 걷잡을 수 없이 세월은 빨리도 흘러가고, 검은 옷을 모두 차려입으니 분주한 예용(禮容)이 능히 갖춰졌다. 3년상은 벌써 끝나고 슬픈 마음만 가슴 속에 가득하다. 7대의 묘(廟)를 이루어 놓으니 하늘에 있는 신령들도 오르내리고 있다.
올해 2월 6일에 신위를 사당에 합사(合祀)하고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며 규례대로 바르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가지 의식을 잘 진행하였다. 그 자리에 올라 그 의식을 거행하고 제사를 크게 올리니 그 정성은 드러나고 사랑은 남아 있다. 깊고 넓어서 능히 이름 지을 수 없으니 하늘의 구름이 자취를 거두고 쓸쓸하게 다시 보는 것만 같아 젖어든 이슬은 회포를 더할 뿐이다. 드디어 사당에 고하고 난 다음 널리 반포하는 일을 거행하니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은 비단 옛법을 따르는 것뿐만이 아니며, 크나큰 은택을 널리 베푸는 것 역시 세상을 떠난 선대 임금이 남긴 혜택을 미루어 베푸는 것이다. 이달 6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사면하라.
아, 나라 일을 맡아보는 여러 관리들은 반드시 선대를 미루어 현재에 보답함을 생각할 것이며 모든 백성들은 다 함께 영원하기를 도모하여 시초를 바로잡을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세균(金世均)이 지었다.】


【원본】 7책 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0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4] 선조(宣祖) 때의 고사(故事) : 명종이 붕어할 때 병이 너무 위중하여 후계에 대한 말을 못하므로 당시 영의정 이준경이 인순 왕후에게 대계(大計)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미 앞서 명종이 조카들 중에서 미리 하성군, 즉 선조에게 병 시중에 참여하도록 하고 유사(儒士) 중에서 특별히 가려 사·부(師傅)로 삼아 교도(敎導)하도록 하였으므로 그에 따르고자 한다고 하였다는 일을 말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총서 참조.[註 005] 4조(四條)의 가르침 : 하늘의 뜻을 공경하고[敬天], 조선(祖先)의 일을 본받으며[法祖], 학문에 힘쓰고[勤學], 백성을 애휼(愛恤)하는 것[愛民].

 

조영하(趙寧夏)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제천 현감(堤川縣監) 유남규(柳南珪)가 보고한 바를 접하니, ‘죄인 남종삼(南鍾三)의 처 이 조이(李召史)는 창녕현(昌寧縣)에, 9살짜리 딸은 산청현(山淸縣)에, 7살짜리 딸은 영산현(靈山縣)에서 계집종으로 삼고 4살짜리 아들은 의령현(宜寧縣)에서 종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해당 현의 옥에 가두어 놓고 있으므로 형조(刑曹)에서 각 배소(配所)에 압송(押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남상교(南尙敎)는 공주 진영(公州鎭營)에 엄하게 가두어 놓았고, 그의 아들 남명숙(南命淑)은 전주 진영(全州鎭營)에 엄하게 가두어 놓았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그의 두 딸과 아들은 다같이 창녕현에 이송(移送)하여 노비(奴婢)로 삼으라."
하였다.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의 장계(狀啓)를 보니, ‘정족 산성(鼎足山城)의 선원각(璿源閣)이 지은 지 오래되어 썩어서 허물어지고 있으므로 수개(修改)를 조금도 늦출 수 없으나 본 선원각을 열고닫고 하는 문제는 본부(本府)에서 규례상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종친부에서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한 일에 대해 계하(啓下)하였습니다. 본부 낭청(郎廳)을 봉심(奉審)하고 수개하는 것은 이전부터 정식(定式)이 있으나, 이번에는 유수(留守)가 현재 종정경(宗正卿)의 벼슬을 맡고 있는 만큼 그대로 봉심한 뒤 수개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8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파(璿派)의 유생(儒生)과 무사(武士)의 응제(應製)를 설행(設行)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이연응(李沇應)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무(武)에 입격(入格)한 전 병사(前兵使) 이승준(李承駿) 등 10인(人)을 가자(加資)하였으며, 이원협(李元協) 등 49인에 대해서는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성대한 덕업(德業)과 큰 공로는 애초에 이미 뚜렷하게 아로새겨져 전해지고 있고 역사에서 빛나고 있다. 은하수마냥 길게 뻗은 우리 일가 친족은 근원이 멀고 지류가 길어서 오늘과 같이 복을 누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사손(祀孫)이 크게 번창한 것이 선조의 남은 경사로 미루어 된 바임을 더욱 징험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직부(直赴)한 이연응(李沇應)에 대하여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날 대군(大君)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좌변포도청(左邊捕盜廳)과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사학 죄인(邪學罪人) 타블뤼〔安敦伊 : 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안돈니】 ·오백다록〔吳伯多祿〕  【베드로】 ·민유아욱가〔閔유아욱가〕  【프랑스〔法國〕사람이다.】 ·황석두(黃錫斗)·장주기(張周基) 등을 공충도(公忠道) 수영(水營)에 압부(押付)해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10일 경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왕대비전(王大妃殿)·대비전(大妃殿)의 존호(尊號)에 대한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친히 올렸다. 이어 진하(陳賀)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례를 계승하는 것은 선대를 잊지 않으려고 생각함이니 칠묘(七廟)에 신위를 합사(合祀)하는 제사를 거행하였으며 우리 가례(家禮)에 본래 있는 바 삼전(三殿)의 존호가 더욱 높아졌으니, 어찌 나 한 사람의 지극한 정성이겠는가? 너희와 온 나라가 함께 경축할 일이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대왕대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大王大妃) 전하는 우리나라의 태임(太任)이나 태사(太姒)이며 여자들 가운데서 빛나는 공적을 이룩하였다. 성인과 같은 훌륭한 덕을 지니고 존엄있는 성인의 배필로 되어 중궁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태모(太母)의 공적을 계승하여 태모와 같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하루에 온갖 정사를 다 처리하였다. 위험한 속에서도 나라를 안정시켰으니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의 계책을 정하였고 어리석은 나를 도와 밤낮없이 부지런히 걱정하였으니 수렴(垂簾)하고서 정사를 보았다. 배알하는 사이에도 따뜻한 윤음을 자주 내리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고 나를 돌보고 길러주시는 사이에 선왕(先王)의 덕화를 묵묵히 펼쳐 대궐 안에 넓은 은혜가 두루 퍼졌다.
아, 우리 명헌 숙경 예인 정목 왕대비(明憲淑敬睿仁正穆王大妃) 전하는 부드러운 하교로 화목한 기풍을 널리 펴며 조용히 임금을 도우신 숨은 공로는 더없이 크다. 덕은 훌륭한 집안을 받들어 도산(塗山)에서 선(善)함과 경사스러움을 길렀고 길함은 중전에 부합하여 사록(沙麓)에서 복(福)됨과 상서로움을 응하였다. 왕대비로 책봉된 것은 풍속과 교화의 훌륭함에 기초하였으니 노래에 담아 전해지게 되었고 대왕대비에게 언제나 기쁨을 드렸으니 온갖 행동이 도리에 맞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계책은 내칙(內則)의 절도에 맞고 아름다운 칭송은 올바른 의식(儀式)에서 나타났다.
또한 우리 명순 대비(明純大妃) 전하는 훌륭한 덕과 넓은 도량을 타고났고 대대로 문학과 예의를 공부한 집안의 교훈을 이어받았다. 임금의 훌륭한 교화를 도와 10명의 어진 신하들과 함께 일컬어지고 일찍부터 왕실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였기에 모든 행동의 근원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누에를 길러서 길쌈 공적을 이었으니 현담(玄談)을 장식하는데 정성을 바쳤고 왕실에서 직조를 하여 외가(外家)에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역사에 기록되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왕비의 하교가 한창 왕성할 때에 갑자기 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크나큰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못난 내가 외람되이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의 큰 계책에 대해서는 자성 전하의 보살핌을 힘입었다. 언제나 밝고 길하게 명하시니 대왕대비전의 복을 이어서 받았다. 또한 만수무강하시기를 걱정하고 축원하니 선군(先君)을 생각하면 더욱 열심히 힘쓰게 된다. 선군이 돌아가신 슬픔을 위로할 길이 없는데 세월은 흘러가고 높이 드러내어 찬양하려는 성의가 더욱더 깊어가니 자성 전하의 빛이 오래도록 머무른다.
거상(擧喪)이 끝난 오늘날에 이르러 대비전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일은 어버이를 높이는 일보다 큰 것이 없으니 훌륭한 공적을 비길 데가 없고, 제향은 물질보다 의식을 중요시하니 선현의 법을 비춰볼 만하다. 나를 키워준 사랑은 바다의 깊이와 산의 높이에 비길 만한데 어찌 그 사랑에 보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더라도 오히려 정성스러운 마음을 조금만 폈다 할 것이다.
삼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대왕대비전에는 ‘순화(純化)’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전에는 ‘홍성(弘聖)’이라고 존호를 가상하며 대비전에는 ‘휘성(徽聖)’이라는 존호를 더 가상하였다.
뭇 사람들의 마음은 옛 임금들을 생각하여 슬퍼하고 오늘의 경사를 맞아 기뻐하니 나라에서는 큰 의식을 벌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여러 백성들에게 교서(敎書)를 반포한다. 훌륭한 공적과 아름다운 행실을 만 분의 일이나마 표현하려고 하며 대모로 장식한 판에다 책문을 올리는 것은 영원히 그 공적이 빛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즐거워야 이에 큰 혜택이 널리 퍼질 것이며 큰 덕을 일컬어 ‘생(生)’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숨은 덕화를 고루 입은 것이다.
이달 10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사면하라.
아, 봄철을 따라 경사로운 의식을 거행하고 혜택을 널리 베푸니 하늘이 내려준 복에 대응하여 조화로움을 인도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날 것이다. 천 년 만 년 더욱 더 번성해 나가 다같이 장수를 노래하며 즐겁게 지내니 모든 백성들이 그 덕을 입게 되어 영원히 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하여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잘 알도록 하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세균(金世均)이 지었다.】


【원본】 7책 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0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비빈(妃嬪)

 

2월 11일 신축

부묘 도감(祔廟都監)과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하 및 두 차례의 진하 때의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아헌관(亞獻官) 한정교(韓正敎)와 종헌관(終獻官) 이명적(李明迪), 예방 승지(禮房承旨) 윤정선(尹定善), 대거 승지(對擧承旨) 김기찬(金基纘)·김정호(金鼎鎬)·장인원(張仁遠), 대축(大祝) 서경순(徐璟淳), 도청(都廳) 홍긍주(洪兢周)·이교현(李敎鉉), 선교관(宣敎官) 정기면(鄭基勉)·이승고(李承皐), 좌통례(左通禮) 박난수(朴蘭壽), 우통례(右通禮) 곽치섭(郭致燮)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으며, 홍기섭(洪耆燮)·민치구(閔致久)·이시원(李是遠)에게는 백관가(百官加)를 직접 주었다.

 

부묘 도감(祔廟都監)과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경과(慶科)를 초시(初試)를 생략하고 정시(庭試)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이명적(李明迪)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재원(李載元)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원명(李源命)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한정교(韓正敎)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강시영(姜時永)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김병기(金炳冀)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2월 13일 계묘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을 기다린 지 오래다. 오늘 경들을 소견한 것은 장차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려고 하므로 경들에게 포유(布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부른 것이다.
후비(后妃)가 수렴청정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큰 불행이지만, 정말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행한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하늘과 조종(祖宗)이 은근히 도와준 덕택으로 주상(主上)의 나이가 혈기 왕성한 때에 이르러 모든 정사를 능히 도맡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렴에서의 교유(敎諭)도 오늘로서 끝마치니 여러 대신들은 꼭 우리 주상을 잘 보필하라."
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계해년(1863) 겨울, 나라의 위기가 눈 앞에 닥쳤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다같이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던 때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나아오시어 발을 늘이고 신들을 불러들여서 큰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맞아들였습니다. 주상에게 바른 길을 계도하고 보익하여 성덕(聖德)이 나날이 높아지고 모든 일에 익숙하게 되셨습니다. 이제는 복잡한 정사를 직접 도맡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 대왕대비가 종묘 사직(宗廟社稷)에 세운 공적과 백성들이 입은 은택으로 말하면 역대의 현명한 왕후들도 이에 비교할만한 분이 없습니다. 오늘 이 하교를 받고 보니 칭송하는 마음 속에서도 연모하는 생각이 맺히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우리 대왕대비가 우리 임금을 도와서 위태롭던 나라의 형세를 편안하게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전하는 연세가 한창 혈기 왕성한 때이고 성학(聖學)에도 빛나는 성과가 이룩되고 있으며 복잡한 정사를 헤아려 결단하고 있고 대왕대비 전하께서 맡기신 일도 더욱 빛나게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들은 그 공로와 은덕을 입고 오직 끝없이 기뻐하며 즐거워할 뿐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지금 우리 전하는 성덕이 나날이 높아지고 성학이 나날이 전진하며 복잡한 모든 정사도 나날이 더욱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대왕대비가 나라의 모든 사무를 맡기고 팔짱을 끼고 조용히 높이 앉아 모든 수고를 다 거두고 장수할 수 있으니 신들은 몹시 칭송하면서 경사로 여기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대왕대비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한 관계로 그 덕화가 널리 미치고 있는 이 때에 이 하교를 받게 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하는 연세가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이므로 앞으로 정사를 도맡아 다스려 대왕대비전의 부탁을 더욱 빛낼 수 있어 종묘사직이 영원히 튼튼히 다져지게 될 것이니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의 연세는 한창 때이고 성인의 학문은 나날이 성취되고 있는 이때 대왕대비의 하교를 받드니 대단히 경축할 일이나 오늘 이후로 연석(筵席)에서 더는 대왕대비의 하교를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실로 서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자성 전하(慈聖殿下)의 공덕은 온 나라에 차고 넘치며 성상께서 정사를 맡으신 일도 공명 정대하게 처리하여 종묘사직이 영원히 힘을 입게 되었으니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여러 차례 말씀을 올렸습니다. 신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식견도 얕고 역량도 짧은데 어떻게 나라의 복잡한 사무를 도맡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린 이 하교를 삼가 바라건대 도로 거두소서."
하니,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대내(大內)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는 사양하지 마라. 오직 바라건대 주상은 성군(聖君)이 되고 여러 대신들은 잘 도와주고 이끌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주상은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말로서는 그 뜻을 모두 나타낼 수 없으니 이제 언교(諺敎)를 내리겠다."
하였다. 교서에,
"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나라의 일을 맡아 다스린 지 어언 오늘까지 4년이 되었다. 예로부터 왕후가 조정의 정사를 직접 맡아 다스리는 것은 바로 나라의 큰 불행이었다. 더구나 나와 같이 덕이 없고 식견도 옅은 사람이 어찌 감히 옛 선대의 현명한 왕후를 방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세상을 뜨게 된 큰 슬픔을 당했을 때에 여러 신하들이 여러 열성조(列聖朝)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고, 나도 또한 종묘사직의 대계(大計) 때문에 애써 허락한 것이다. 근래에 오면서 나라의 형세는 더욱 헝클어지고 백성들의 어렵고 구차한 생활은 날로 심해가고 있지만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앉아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부당하게 앉아있기 때문이다. 위로는 하늘의 의사에 부합되게 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도리를 떨쳐 일으켜 힘쓰게 하지 못함으로써 점점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상의 나이가 이미 혈기 왕성한 때이고 훌륭한 자질을 타고 나서 슬기로운 지혜가 나날이 성숙되어 중요한 공무(公務)는 밝게 익히게 되었고 학문도 독실하게 해서 능히 모든 정사를 총괄할 수 있고 복잡한 사무를 직접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왕업을 계승해 나갈 수 있고 장차 후세에 가서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내가 처한 바에 그냥 계속 앉아있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보존하고 큰 원칙을 바로 세우는 바가 아니므로, 오늘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대소의 모든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하게 하라.
아!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세신(世臣)을 온전히 보존하며 우리 선왕의 가법(家法)을 고수하기 위해 주상은 힘쓰도록 하라.
동료들끼리 서로 협조하고 다같이 공경하며 임금을 잘 이끌어주고 도와주어 우리나라가 끝없이 계속되어 나가도록 튼튼히 다지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깊이 기대하는 바이니 각기 조심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니,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자성 전하께서 하교하신 여섯 조항의 훌륭한 훈계는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는 심법(心法)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체득하고 시행해 나간다면 영원히 태평 시대를 누릴 기초가 오늘부터 마련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의 덕을 찬양하며 대왕대비의 교화를 널리 펴기 위하여 신들이 이어 앙청(仰請)하니, 반교문(頒敎文)을 널리 선포하며 진하(陳賀)하는 절차를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전날이라고 해서 어찌 오늘날과 다르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전하가 맡이 책임과 부담은 더욱 무겁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조(祖宗朝)를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면 우리 열성조의 가법이었으며 또한 우리 자성 전하께서 전수해준 심법입니다. 전하가 이에 대하여 늘 살피고 마음에 새겨둔다면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는 것도 이에서 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철종(哲宗) 때의 궁인(宮人)인 범씨(范氏)가 낳은 딸이 지금 9살이 되었다. 그를 영숙 옹주(永淑翁主)로 봉하고 범씨는 숙의(淑儀)로 봉해줄 것에 대하여 오늘 정사(政事)에 하비(下批)하도록 하라. 그리고 저택을 절수(折受)하거나 공상(供上)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는 해조(該曹)에서 전례를 참조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왕대비(大王大妃)의 하교를 받았으니 귀주(貴主)에 대한 봉작을 ‘영혜(永惠)’로 고쳐 써서 들이라."
하였다.

 

한정교(韓正敎)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석우(曺錫雨)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15일 을사

조영하(趙寧夏)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호조(戶曹)에서, ‘범 숙의(范淑儀)와 영혜 옹주(永惠翁主)의 저택 값으로 은자(銀子) 1,500냥(兩)을 대전(代錢)하여 수송하고, 유토 면세전(有土免稅田) 200결(結)과 원결(元結) 600결을 획송(劃送)하며, 옹주의 공상(供上)으로 매월 초하루에 백미(白米) 8석(石)과 전(錢) 80냥, 숙의의 공상으로 백미 5석과 돈 50냥을 선혜청(宣惠廳)에서 수송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의 훌륭한 덕과 끝없이 착한 마음은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할 말이 없습니다. 하늘을 돕고 해를 떠받들어 올리듯이 우리나라의 억만 년 끝없이 이어갈 복을 크게 열어 놓았습니다. 대왕대비의 공적은 옛날 선대의 현명한 왕후들도 세워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그만두고 장락궁(長樂宮)에서 몸을 보양하며 높이 앉아 손길을 거두고 일체 정사를 그만둔 이 대왕대비의 공적은 역사 기록이 생긴 이후로 기록된 적이 드문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본뜨고 해를 그리며 금으로 수놓고 구슬로 새긴들 그 높은 덕의 만 분의 일도 형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오늘 올리는 청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해온 떳떳한 법이며 온 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간절한 축원입니다.
우리 전하가 효성을 다하여 높이 찬양하는 것도 이에 있으며 은덕에 훌륭히 보답하는 것도 이에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대왕대비의 뜻을 여쭈어 속히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였다.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대왕대비의 덕화 속에서 살며 자라난 지 50년을 내려오면서 나라의 큰 일을 당하여 큰 계책을 정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오늘과 같이 반석처럼 다진 것은 누구의 공이요, 누구의 덕이며, 또한 누가 가져다준 것입니까? 무릇 옛 경전들에는 주(周) 나라의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의 현명함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역사책에는 송(宋) 나라의 선인 왕후(宣仁王后)의 훌륭한 덕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대왕대비께서 선왕을 빛내고 후왕을 빛나게 한 일에 대해 오늘날 높이 찬양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더구나 우리나라의 가례에 원래부터 실려 있는 규례인 만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는 대왕대비의 뜻을 여쭈어 힘써 따르도록 하는 것이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자성 전하가 이룩한 수많은 공적과 거룩한 업적에 대하여 금으로 세기고 구슬로 수놓은들 어찌 그의 만 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가 효성을 다하는 문제도 오직 이에 있으며 조정의 관리들이 축원드리는 것도 오직 이에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성의를 다하여 아뢰어서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자성 전하의 큰 공적과 큰 업적은 옛날 현명한 왕후들에게도 없던 일입니다. 신들이 오늘 올리는 청도 또한 팔도(八道) 신민(臣民)들의 일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대왕대비께 들어가 아뢰어 즉시 유음을 내리소서."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이렇게 등대(登對)한 것은 진실로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하여 따라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대왕대비께 들어가 아뢸 것이니 경들은 머물러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는, 일어나서 내전(內殿)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서 하교하기를,
"여러 차례 간곡히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하니,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대왕대비께서 이와 같이 겸손하게 사양하시니 여러 사람들의 심정은 몹시 답답합니다. 신들은 물러나가서 빈청(賓廳)에서 계사(啓辭)를 올려 성의를 다하여 간절히 청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나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거듭 간청할 터이니 빈청에서 계사를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의 큰 덕과 신비로운 교화는 위로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비길 만하고 멀리는 태임(太任)이나 태사(太姒)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천지(天地)에 뻗치고 해와 달처럼 빛나며 천고(千古) 이전의 먼 옛날이나 그 이후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옛 경전들에 기록되었거나 역사가들이 쓴 서적들에도 이와 같이 큰 덕을 지닌 분은 없었으며 이와 같이 신비로운 교화를 편 분은 없었으니, 참으로 백성이 생겨난 이후 없었던 훌륭한 일입니다.
위험이 눈앞에 닥쳐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임금과 왕비를 올바로 세움으로써 종묘사직을 반석과 같이 다졌으며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잘 살피고 열조(列祖)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거울로 삼았습니다. 가르쳐주고 인도하며 이끌어주는 것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그 뛰어난 슬기와 빛나는 성인의 학문에 대하여 우러러보았으며, 다같이 한품에 안아 보살펴주고 키워준 것으로 말하면 해마다 아름다운 때를 만나게 하였고 모든 백성들이 다같이 편안하게 살도록 다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인이라야 능히 인륜을 다할 수 있고 태상(太上)이 백성들의 부모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지 이제 4년이 되도록 어진 정사와 두터운 은택은 모든 곳에 샅샅이 미쳤으며 많은 공적과 높은 업적으로 상서로운 일들이 다투어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주상을 돕는 일을 과감히 거두어 모든 정사를 놓고 주상의 봉양을 받으니 그 공명 정대한 거조에 대해서는 대쪽이나 비단에 쓴다고 해도 이루 다 쓸 수 없고, 그 두텁고 크며 유구한 공적에 대해서는 악기나 노래에 담아 부르고 또 불러도 이루 다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은 저으기 생각건대 대왕대비가 전하를 도와 모든 정사를 총괄하도록 한 것은 성인의 지극한 사랑이며, 전하가 대왕대비를 칭송하여 존호를 올리는 것은 성인의 지극한 효성입니다. 사랑과 효성이 모두 온전하니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는 근본이 바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땅히 금으로 새기고 옥책(玉冊)에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며 크나큰 공덕을 역사에 기록하여 만 분의 일이나마 형용하게 함으로써 만백성들이 사랑하며 추대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답하는 것이 진실로 예경(禮經)에 부합되고 떳떳한 법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대궐에 나와서는 감히 정성을 다하여 아뢰고 물러가서는 다같이 호소하니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더 안타깝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왕대비께 여쭈고 여러 사람들의 간절한 청원을 잘 말씀드려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도록 하여 전하의 효도가 빛나게 한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모두 한마음으로 올린 계사(啓辭)를 오늘 또 전해 올렸지만 대왕대비께서는 아직도 윤허해주지 않고 계시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계사(啓辭)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정성을 다하여 여쭈었으나 대왕대비(大王大妃)는 더욱 더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심정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3차 계사(啓辭)를 올리니, 비답(批答)하기를,
"여러 차례 간곡히 아뢰었는데도 아직 마음을 돌리겠다는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으로 아뢰기를,
"신들이 우러러 청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이며 다같이 호소하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같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응당 한 번의 계사(啓辭)로 자성 전하(慈聖殿下)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할 것인데 여러 차례 윤허하지 않으시는 비답을 받드니 신들이 성의가 부족하고 아뢰는 말이 시원치 못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넓으신, 우리 자성 전하께서는 옛 어진 임금들처럼 나라를 다시 빛낸 정사를 도왔으며 옛 어진 왕후들처럼 명예를 계승하였습니다. 소리와 말은 비록 안방문을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풍습과 교화는 이미 오래 전에 노래로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위급한 시기에 직면하였으나 나라의 형세를 반석과 같이 다져 놓았으니 억만 년 끝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시초는 바로 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 겪는 것을 보고는 여러 차례 내탕금(內帑金)을 꺼내어 나누어 주었으며, 하늘이 내린 윤리를 두터이 하고 서양의 사학(邪學)을 깨끗이 쓸어버렸습니다. 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화목하게 살도록 하였고 온갖 복이 길이길이 이어질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거상(擧喪) 기간이 끝나자 특별히 주상 전하께 정사를 되돌려 주는 의식을 옛 법대로 거행하여 그 명령이 간절하고 그 조치가 공명 정대하였으므로 온 대궐 뜰에 모였던 사람들이 좋아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비록 성대한 의식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대왕대비 전하의 큰 계책과 훌륭한 공적은 사책(史冊)에 이루 다 쓸 수 없으니, 구슬같이 아름다운 덕의 만 분의 일도 묘사할 수 없지만 이것이 아니고서는 또한 밝게 드러내어 보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들이 자주 시끄럽게 아뢰는 것입니다.
아! 대왕대비의 빛나는 결단과 큰 계책은 순원 성모(純元聖母)와 같았고, 뭇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처결하는 것이 순원 성모와 같았으며 발을 늘이고 보던 정사를 그만두는 거동도 또한 순원 성모와 같았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신들이 몇 해 전에 우리 순원 성모의 덕과 공적을 찬양하도록 청하자, 순원 성모는 이내 윤허하셨으니, 신들이 어찌 순원 성모가 시행했던 문제를 가지고 대왕대비 전하께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침식하는 여가에 아뢴다면 또한 틀림없이 하루 내에 따라 주실 것입니다. 이번에 자성 전하께 윤허를 받는 것은 또한 전하께서 조종조(祖宗朝)를 계승하시는 효성입니다. 신들은 지금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모아잡고 명령을 기다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왕대비께서 지나치게 겸손하시어 여러 사람들의 뜻을 아직도 굳게 받아들이지 않고 계시니 갈수록 더욱 안타깝다."
하였다.

 

2월 16일 병오

정청(庭請)하여 두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가 정성이 매우 간절하니 곧 허락하기를 빌 뿐이다."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지금 힘써 따르겠다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예조 당상(禮曹堂上)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 익종 대왕(翼宗大王)과 헌종 대왕(憲宗大王)과 철종 대왕(哲宗大王)의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은 마치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인데도 나 소자(小子)가 즉위한 이후로 높이 찬양하라는 의식을 아직까지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모하여 따르는 그지없는 정성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마침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의 풍성한 공로와 업적에 대하여 요첩(瑤牒)을 바치고 옥간(玉簡)을 새기게 되었다. 천일(天日)을 본떠 아울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다면 구구한 정례(情禮)도 조금은 펴질 것이다. 익종 대왕의 추상 존호 도감(追上尊號都監),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 헌종 대왕과 효현 왕후(孝顯王后)의 추상존호도감, 왕대비전(王代妃殿)의 가상존호도감, 철종 대왕의 추상존호도감, 대비전(大妃殿)의 가상존호도감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의호(議號)도 당일에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존호를 추상하고 존호를 가상하는 의식을 아울러 거행할 적에는 의호(議號)한 후에 백관(百官)이 대전(大殿)에게 진전(進箋)하였으며 임금은 직접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전문(箋文)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존호의 망(望)을 올렸다. 익종 대왕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은 ‘융덕 순공 독휴 홍경(隆德純功篤休弘慶)’이고, 대왕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의 망은 ‘문광(文光)’이고, 헌종 대왕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은 ‘지성 광덕 홍운 장화(至聖廣德弘運章化)’이고, 효현 왕후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은 수원(粹元)이고, 왕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의 망은 ‘장순(章純)’ 이고, 철종 대왕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은 ‘흠명 광도 돈원 창화(欽命光道敦元彰化)이고, 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의 망은 ‘정원(正元)’이다.

 

김좌근(金左根)과 유후조(柳厚祚)를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영평군(永平君) 이욱(李昱), 김병기(金炳冀)·이돈영(李敦榮)·이의익(李宜翼)·이재원(李載元)·김병필(金炳弼)·홍석종(洪奭鍾)을 제조(提調)로, 이재면(李載冕)과 조영하(趙寧夏)를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이 올리는 전문(箋文)을 친히 받았다.

 

이의익(李宜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남종순(南鍾順)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2월 18일 무신

이현직(李顯稷)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이주철(李周喆)을 총융사(總戎使)로, 박영보(朴永輔)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정호(金鼎鎬)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상호 도감(上號都監)의 익종 대왕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는 조두순(趙斗淳), 서사관(書寫官)은 조득림(趙得林),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은 홍재철(洪在喆), 금보 전문 서사관(金寶箋文書寫官)은 이근우(李根友)이고, 헌종 대왕의 옥책문 제술관은 김병학(金炳學), 서사관은 이우(李㘾), 악장문 제술관에 윤치희(尹致羲), 금보 전문 서사관은 조연창(趙然昌)이고, 효현왕후의 옥책문 제술관은 김흥근(金興根), 서사관은 김세균(金世均), 악장문 제술관은 이돈영(李敦榮), 금보 전문 서사관은 민치구(閔致久)이고, 철종 대왕의 옥책문 제술관은 정원용(鄭元容), 서사관은 이명적(李明迪), 악정문 제술관은 김보근(金輔根), 금보 전문 서사관은 영평군(永平君) 이욱(李昱)을 선정했고, 대왕대비전의 옥책문 제술관은 이경재(李景在), 서사관은 서대순(徐戴淳), 악장문 제술관은 김학성(金學性), 옥보 전문 제술관(玉寶篆文書寫官)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이고, 왕대비전의 옥책문 제술관 윤정현(尹定鉉) 서사관은 임백수(任百秀), 악장문 제술관은 강시영(姜時永), 옥보 전문 서사관은 김현근(金賢根)이고, 대비전의 옥책문 제술관은 김병국(金炳國), 서사관은 조석우(曺錫雨), 악장문 제술관은 홍종응(洪鍾應), 옥보 전문 서사관은 윤의선(尹宜善)이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이달 11일 이양선(異樣船)이 평신진(平薪鎭)의 조도(鳥島) 앞에까지 와서 떠다니다가 12일에는 해미현(海美縣)의 조금진(調琴津)으로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평신 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 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응집(金膺集), 서산 군수(瑞山郡守) 정재기(鄭在箕) 등이 보낸 첩보(牒報) 안에 그 사정을 물으며 필담(筆談)한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배는 영국(英國) 배로  【배의 이름은 로나〔羅那〕이고, 선주(船主)는 영국 런던의 상인(商人)으로 이름은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이었고,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30여 명이었다. 또 예단(禮單)도 있었는데, 큼직한 신경(身鏡) 1면(面), 자명종(自鳴鐘) 2개(箇), 양금(洋琴) 3개, 오색 무늬의 지전(地毡) 3장(張), 오색무늬의 예전(禮毡) 1장, 시신록(時晨錄) 1개, 천리경(千里鏡) 1개를 헌상(獻上)하겠다고 요청하니, 문정관(問情官)이, "감히 멋대로 행할 수 없다."】 또한 청(淸) 나라 사람들도 있었는데 한 통의 편지를 주며 이르기를, 「우리 상인들은 오로지 외국(外國)을 위하여 귀국(貴國)과 무역을 요청하니, 만약 허락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마는, 오직 귀국에 저지를 받을까 염려스럽다. 우리 상인들은 대청(大淸)의 백성이지만 다같이 이 세상에 속해 있으니 성인이신 공자(孔子)께서 모두가 형제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청은 수백 년 동안 통상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정성으로 사귀어 피차간에 이득을 보아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도 많이 늘어났으니, 통상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배의 체류기간을 물으니, 답하기를, 「동양(東洋)의 일본(日本)으로 빨리 가려고 하니 오래 머물 수가 없다.」하였습니다. 아마도 청나라 사람들이 영국 상인들을 소개하는 것은 통상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듯한데, 이미 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법으로 타일러서 속히 물러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는 표류선(漂流船)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음식물을 베풀어 주는 일에 대해서는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문정 역관(問情譯官)을 내려 보내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2월 19일 기유

고령진(高嶺鎭) 제방 300자를 개축(改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고령진(高嶺鎭) 제방 300자를 개축(改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고령진(高嶺鎭) 제방 300자를 개축(改築)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2월 25일 을묘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은 김좌근(金左根),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악장문 제술관은 유후조(柳厚祚), 헌종 대왕(憲宗大王)의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은 신관호(申觀浩), 금보 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은 이도중(李䆃重)으로 바꾸어 차하(差下)하였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은 김좌근(金左根),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악장문 제술관은 유후조(柳厚祚), 헌종 대왕(憲宗大王)의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은 신관호(申觀浩), 금보 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은 이도중(李䆃重)으로 바꾸어 차하(差下)하였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구주원(具胄元)이, ‘이달에 도착한 15일 부산 첨사(釜山僉使) 윤석만(尹錫萬)의 치보(馳報)에서 문정임역(問情任譯) 이주현(李周鉉)의 수본(手本) 내에, 「비직(卑職)들이 배를 타고 이양선(異樣船)이 정박하고 있는 곳까지 쫓아갔는데,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와 보면서 사다리를 내려 주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니, 사람들의 겉모습이 모두 괴상하게 생겼는데 키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으며 더부룩한 머리털은 노랗기도 하고 붉기도 하였습니다. 코는 우뚝하고 수염은 성글었으며 눈알이 노랗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였는데 손목과 팔뚝 사이에는 바늘로 문신(文身)한 것이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전모(氈帽)나 우리나라의 전립(戰笠)같은 것을 쓰기도 하였고, 옷 색깔은 푸르거나 검은 색으로 홑저고리와 홑바지를 입었는데, 모두 모직류였습니다. 옷깃을 여미는 곳에는 단추를 달아 연결하였으며 발에는 다같이 검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모두 8명으로 여자는 없었습니다. 말은 처음부터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필담(筆談)으로 계속해 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고, 글자를 쓰게 했더니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것이 언문(諺文)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었는데, 물어 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은 모습이 그다지 괴이하지 않았고 머리를 땋아서 뒤로 넘겼는데 무언가 이해하는 듯한 기색이 있어 글자를 써서 따로 물어보니, 첫 번째 사람은 풍남산(馮南山)으로 나이는 27세였고, 두 번째 사람은 요제(姚弟)로 나이는 19세였습니다. 풍남산이 쓰기를, 『우리 두 사람은 본래 청나라 광동성(廣東省)의 상해현(上海縣) 사람으로 함풍(咸豐) 5년〔1855〕 9월 10일 이 배에 양창(洋鎗)과 양포(洋砲)와 모전(毛氈) 등의 물품을 싣고 장사를 목적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지난해 10월 일본국(日本國) 장기도(長崎島)로 가서 창과 대포와 모전으로 대모(玳瑁)를 환대(換買)하여 금년 2월에 출범(出帆)하여 본국으로 향해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漂流)하다가 음식물을 사기 위해 이곳에 이르렀다.』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그대들은 광동 사람인데, 무슨 연유로 함께 탔으며, 이 배는 어느 나라 배이고, 배의 이름은 무엇이고, 총과 대포와 모전은 어느 나라 소산이며, 음식물은 어떤 물건을 사려고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는 미국(美國)의 샌프란시스코〔屬金山〕의 배입니다. 우리 대청(大清)은 바로 통상하고 있는 사이이므로 광동성 상해현의 관장(官長)이 우리들을 차출하여 미국 사람들의 전어관(傳語官)을 삼았기 때문에 함께 배를 탄 것이며, 요제는 바로 나의 근역(跟役)입니다. 장사를 하는 외에 별도로 다른 일은 없습니다. 배의 이름은 사불(士佛)이고 포와 총과 모전은 틀림없이 미국산이고, 음식물은 쌀과 설탕으로 사고자 하는 것은 산 닭과 생선입니다.』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미국은 어느 쪽에 있으며, 상해에서 미국까지, 미국에서 장기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로 각각 몇 리나 되며, 광동성 상해현에는 관장이 몇 명이나 있으며, 배 가운데 두령(頭領)은 몇 사람이며, 함께 탄 사람은 몇 명이나 되고, 성명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씩이나 되는가?』하니, 답하기를,『미국은 서쪽에 있고, 광동성 상해로부터 미국까지, 미국에서 장기까지의 거리는 수로로 각각 4만 리인데, 육로는 모두 통하지 않습니다. 광동성에는 72개의 현(縣)이 있는데 현마다 각기 한 사람의 관장이 있습니다. 배를 탄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을 합쳐서 8명이고 두령은 1명인데, 바로 선주(船主)인 라불(羅佛)은 나이가 50세입니다. 화장(火長)은 비림(非林)으로 32세이고, 수수(水手)는 다치(茶治)로 23세이고, 미사(未士)인 반지(班地)는 30세이고, 나륜(羅倫)은 48세이고, 리다(里茶)는 31세입니다. 화장은 음식을 관장하고, 수수는 바로 사공(沙工)이며, 미사는 또한 곁꾼〔格軍〕입니다. 이 배 외에 다시 동행은 없습니다. 포와 총과 모전은 바로 각 나라와 화매(和賣)할 물건이니 귀국의 해삼(海蔘)과 다시마와 절인 생선 등의 물품과 환매(換買)하기를 원합니다.』하였습니다. 물건을 화매하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허락하기는 어렵다고 답하자, 그들이 다시 음식물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과일과 생선과 닭 등을 약간 마련하여 주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고마움을 표시하였습니다. 배의 모양은 매우 정교하고 사치스러웠는데 길이는 13파〔把〕, 너비는 4파, 높이는 5파나 되고, 외면의 윗부분의 절반은 검은 칠을 했고 아랫부분의 절반은 속을 동철(銅鐵)로 만들었습니다. 배 안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의 좌우에는 양포 60병(柄), 양총 50병이 있었고 모양은 우리나라의 조총(鳥銃)이나 단총(短銃)과 같았습니다. 돛은 3개인데 첫째 돛은 길이가 5파, 둘째 돛은 8파, 셋째 돛은 6파였습니다. 화살을 만드는 참대로 1층 간살의 얽이를 만들었는데 숙마(熟麻)로 만든 밧줄로 잡아매고 백목(白木)으로 만든 풍석(風席) 3 건(件)을 각각 칸살 위에 말아서 매달아 놓았습니다. 쇠로 만든 닻이 2개 있었고 쇠고리를 이어 만든 닻줄이 3장(張) 있었는데 각각의 길이가 30파였습니다. 조그마한 급수선(汲水船)이 한 척 있었는데. 길이가 2발, 높이와 넓이가 각각 반 파였는데 큰 배 옆에 매여 있었습니다. 2층에는 칸칸마다 사면을 잘 꾸며 놓았는데 모두 유숙(留宿)하는 장소였습니다. 모전과 대모 등의 물품을 보관해두었는데, 자명종 2좌(坐), 뒤주 2좌, 급수통 5좌가 있었으며 그밖에 사기 그릇, 유리 그릇, 수저 등의 물건들은 이루 다 살펴볼 수가 없었습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선(下船)하겠다는 뜻을 보이니, 그들은 일제히 손을 맞잡으며 마치 인사하면서 헤어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이양선에 대해서 문정(問情)한 것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대체로 그들의 장사하는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인데 원래부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는 말과 글을 통할 수가 없어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여러 가지 집물(什物)의 수효를 개록(開錄)하여 성책(成冊)하고 선체(船體)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올려 보냅니다.’라고 아뢰었다.

 

함경도(咸鏡道)에서 사사로이 주전(鑄錢)한 죄인 이영운(李永云)과 김문호(金文好)를 효수(梟首)하여 뭇사람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장계(狀啓)를 올렸기 때문이다.

 

조두순(趙斗淳)을 가례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로, 김병기(金炳冀)·이돈영(李敦榮)·이재원(李載元)을 제조(提調)로, 이재면(李載冕)·조영하(趙寧夏)·민승호(閔升鎬)를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서대순(徐戴淳)·조연창(趙然昌)·임백수(任百秀)·한계원(韓啓源)을 모두 가례도감 당상(嘉禮都監堂上)으로 추가하여 차하(差下)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서 초간택(初揀擇)을 행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서 초간택(初揀擇)을 행하였다.

 

2월 26일 병진

가례도감(嘉禮都監)의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은 김병학(金炳學), 서사관(書寫官)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 교명 전문 서사관(敎命文篆文書寫官)은 김좌근(金左根),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은 정원용(鄭元容), 서사관은 홍종응(洪鍾應), 금보 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은 이경재(李景在)이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정 진하(親政陳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 나라의 융숭한 봉양을 받으며 태후께서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고, 처음에 서정(庶政)을 맡아 명당(明堂)에 나와 정사를 보려고 하면서 삼가 이헌(彝獻)에 따라 예를 베푸노라.
삼가 생각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대왕대비 전하(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大王大妃殿下)께서는 유순한 교화(敎化)를 묵묵히 온 나라에 베푸시며 지극한 도리로 40여 년 동안 빛나셨다. 왕실의 의범(懿範)을 받들어 태사(太姒)로서 태임(太任)을 이으셨다. 종묘 사직의 신령들이 도우시어 성인(聖人)의 배필로서 성자(聖子)를 낳으셨다. 고귀하신 몸으로도 부지런했고 넉넉한 살림으로도 검박하시니 아름다운 명성이 갈수록 널리 퍼졌다. 드높은 공덕(功德)에 문장이 빛나 요첩(瑤牒)과 옥간(玉澗)을 바치는 의식을 여러 차례 거행하였다. 두터이 부도(婦道)를 지켜 덕에 합하시고 자애로운 황천(皇天)이 형적(形跡)이 없는 것과 같으셨다. 지난날 나라의 형편이 위태로웠을 적에 주렴을 드리우고서 명령을 내려 대책(對策)을 정하셨다. 파도처럼 요동치며 들끓던 인심을 진정시키니, 이때가 진정 어느 때였던가? 나라의 형세를 태산 반석처럼 굳게 다지시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직 황천과 조종(祖宗)께서 온전히 부촉하시어 무강(無疆)한 대업(大業)을 이어받게 하셨다. 사직과 신민(臣民)을 위해 힘써 따라 명철(明哲)하신 선후(先后)의 고사(故事)를 준수하시어 변변하지 못한 내가 짊어진 큰 책임이 보호해 주신 큰 은혜를 힘입을 수 있었다. 치란과 득실의 방도로부터 사물에 접할 때마다 번번이 가르쳐 주셨고, 기포(饑飽)와 한난(寒煖)에 이르기까지 오직 병이라도 얻을까봐 근심하셨습니다. 무릇 정사를 펴고 인을 베푸시는 데에 있어 오직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기만을 바라셨다. 상벌이 명확해지고 기강이 바로 섰으며 관리들이 도량형을 조심하여 명절(名節)이 높아지고 염유가 펴졌으며, 선비들은 학문에 힘써 연마할 줄을 알게 되었다. 도를 보호함에 있어서는 해와 별처럼 밝게 하였고 사설(邪說)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부월(鈇鉞)처럼 엄하게 하여 큰 계책이 이에 이루어졌다.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보살폈으며 이재민을 구휼하느라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풀었다. 뭇 백성들이 스스로 즐거워하여 만물이 모두 형통하는 오묘함을 드러내어 가는 곳마다 감화되고 마음먹은 것은 신묘하게 이루어져 백관들이 잘 다스려진 공을 아뢰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립되어 한창 성대한 공로로 많은 은혜 널리 퍼지고 있는데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고 분명히 명하셨다. 보수(寶壽)가 아직 일에 싫증을 내기에는 멀었는데 어찌 나랏일을 갑자기 놓으실 수 있는가? 유충(幼沖)한 내 나이 겨우 학문에 뜻을 두는 데 미쳤을 뿐이라, 나라 다스리는 법을 아직 알지 못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육조(六條)로 가르치셨는데 말씀이 온순하고 간곡하여 백 대가 지난다 해도 의혹할 것이 없을 것이며 하시는 것이 광명정대하셨다. 하찮은 정성이 아직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친지(親志)를 따라야 한다. 섬기는 데 무엇이 큰일인가? 하루 세 번 진짓상을 돌보는 정성을 바치니 어느 녹(祿)도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만년에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즐기는 경사를 축하하노라. 하루에 만기(萬幾)를 대신 처리하면서 백성들에게 덕화가 두루 미치게 해야 하는데 군국(軍國)의 사무가 지극히 번거로우니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고 조야의 바람이 간절하니 어찌 군림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처음을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훈(謨訓)을 받들어 두려워할 뿐이다. 그 천명(天命)을 새롭게 하여 큰 복을 받아 널리 펴고 신공(神功)을 우러르며 하늘과 태양 같은 태후의 덕을 기리는 예를 행하려 하는데, 두 가지 경사가 나란히 이르렀으니 먼저 만세를 부르고 장수를 축원하는 의식을 거행하겠다. 때를 씻고 허물을 씻어 버리니 이는 뇌우(雷雨)의 은택이요, 인정(仁政)을 펴고 은혜를 베푸니 모두 춘풍(春風)의 온화함이다. 이달 26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들로 사형죄 이하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라.
아! 대왕대비의 공덕이 높으니 지극한 덕화가 널리 퍼지고 정사가 훌륭하니 큰 천명을 맞아 이을 것이다. 송축하노라. 창성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만세를 불러 바야흐로 성대하게 하늘의 아름다움에 이르게 하고 온 나라가 효와 인에 흥기하도록 하니 풀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진작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조석우(曺錫雨) 가 지었다.】


【원본】 7책 3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1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우참찬(右參贊) 강시영(姜時永), 행 호군(行護軍) 정헌용(鄭憲容)·김동헌(金東獻)·조계승(趙啓昇), 부호군(副護軍) 김병집(金炳潗)에게 백관가(百官加)를 친히 주었다.

 

2월 27일 정사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올라 직접 정사를 보시니 양춘(陽春)이 은택을 베푸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하늘이 복을 내려주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나라의 기반이 영원히 공고하게 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예로부터 임금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며 임금을 위해 축원했던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의 영원한 명령을 받아 국운이 장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통을 잇자 주공(周公)과소공(召公)이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종신(宗臣)으로서 빌되 정성스럽고 간절했던 것은 영원한 천명(天命)이 영구하여 국운이 장구하기를 바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 근본을 말하면 ‘백성들과 화목하라.’고 하고, ‘소인(小人)들이 의지하는 데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하늘의 눈과 귀가 백성들에게 있으므로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이 반드시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백성을 사랑하는 덕이 천심을 잘 받들기만 하면 국운이 무강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 자성(慈聖)께서 국무(國務)를 그만두는 연석(筵席)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는 것으로 전수하는 훌륭한 훈계를 삼으주셨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것은 정사를 행하는 근본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는 것입니다. 부역을 너그럽게 하며 조세를 가벼이 하고 가난을 구제하고 허물을 용서하여 항상 측은한 마음을 가져서 어질다는 소문과 어진 정사가 모든 백성들 사이에 골고루 미친다면 하늘이 굽어보고 기뻐하여 오복을 주고 온갖 길상을 내려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고 자손들은 번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크게 주고 몰래 도와 그 복이 계속해서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의 말을 명심하겠다."
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전(正殿)에 임어(臨御)하시어 모든 정사를 몸소 총괄하시니 이때야말로 정신을 가다듬고 이치를 도모하며 부지런히 근로해야 할 때입니다. 정치를 하는 요점은 학문을 익히는 데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학문을 익히지 않으면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의 일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순(舜) 임금은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방 멀리까지 밝게 보고 사방 멀리까지 밝게 들어 천하의 어진 인재를 오게 하였고, 사방의 보고 듣는 길을 넓혀서 천하의 가리고 막힌 것을 텄습니다. 우(禹) 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하였고 궁실을 낮게 하고 간소하게 하였으며 정사의 목표를 백성을 돌보는 데에 두어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탕(湯) 임금은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재물과 이익을 불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등용하되 자신 몸처럼 생각했고 허물을 고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문왕(文王)은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밝게 섬겼는데 그 덕이 그릇되지 않아 사방 나라를 받았습니다. 한(漢) 나라 문제(文帝)와 송(宋) 나라 인종(仁宗)은 모두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여 특달(特達)한 임금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위로는 순 임금과 우 임금으로부터 문제와 인종에 이르기까지의 큰 덕과 뛰어난 업적, 훌륭한 계책과 선한 정사는 모두 책에 실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순 임금과 우 임금, 탕 임금과 문왕의 법을 체득하시고 문제와 인종의 정치를 본받으소서. 조종이 교화가 융성하고 국운이 길이 뻗어나가는 복을 받은 까닭이 학문을 익힘으로 말미암아 보고 느끼기에 성대했던 것이니, 이를 생각하며 늘 잊지 마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전의 법좌(法座)에 계시자 조정에 백관이 가득 찼음을 고하니, 이는 몸소 총괄하시는 첫 정사로서 비로소 시작을 도모하고 처음을 어떻게 할까 묻는 때입니다. 백관과 만백성이 바라고 향하는 것이 흘러 넘치니 봄 아지랑이가 막 일어나 두루 뻗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나신 분으로 선왕(先王)께서 물려주신 크고 어려운 사업을 잘 어루만지시며 선왕의 자리에 올라 선왕의 예(禮)를 시행한 지 어언 4년이 되었습니다. 온 나라의 아낙네와 어린아이까지도 전하께서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서 성대한 덕화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성께서 지성으로 몹시 걱정하시며 성명(聖明)에게 바라는 것은 요순 같은 임금이 되어 우리 억만 년토록 전해질 왕업의 기반을 공고하게 하는 것인데, 지금 또 번다한 업무를 맡기셨으니 전하의 오늘날 짊어진 것이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장차 어떻게 자전의 충심에 보답하고 군정(郡情)에 부응하시겠습니까? 제왕의 학문은 장구(章句)나 찾고 구절이나 따오는데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금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대해 몸소 겪고 본 것처럼 환하게 알아야 하니, 그러면 일에 임하고 응할 때 자못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궐에서 책상에 앉아 있을 때나 밝은 낮과 긴 밤 사이에 늘 토의하고 체험해야 할 곳이 아닌 게 없으니, 구중궁궐의 깊은 곳에서도 바로 또한 만 리 밖을 계단 앞처럼 환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날마다 덕음(德音)을 내고 사방의 소리를 넓게 들어서 대중의 생각을 모아 장구한 아름다움을 맞이해 소유하고 우리 자전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바다와 같이 넓은 성효(聖孝)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다.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전하의 춘추는 한창 왕성하신데 만기를 총괄하며 뭇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있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영원한 복입니다. 지난번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수렴 청정을 거두겠다는 하교를 내리시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으라고 훈계하시고 학문을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라고 면려하신 것을 보니, 정중하고 간절하여 성모(聖模)가 흘러넘쳤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고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어느 것인들 제왕들의 훌륭한 절목(節目)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그중에서 가장 절실하고 중한 것을 말하면 바로 학문입니다. 학문을 하여 본원(本源)을 닦아 기르면 인욕(人慾)이 없어져서 천리(天理)가 밝게 드러나고, 학문을 하며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면 지려(知慮)가 넓어져서 치란(治亂)을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일을 버리면 아무리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고 백성을 사랑하려 해도 그 방도가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학문을 하면 덕이 진보되고 사업이 높아져서 나라가 편안할 것이요, 학문을 하지 않으면 담을 향해 있고 마음이 꽉 막힌 것과 같아 손발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고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근심이 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고 민첩하게 하여 점차 연마하여 몸에 흠뻑 배게 하면 세상에 어느 물건이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즐기면서부터 피곤하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면 지혜가 더욱 밝아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세워서 성인(聖人)을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 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겉과 속을 한결같이 하여 어두운 곳에 있을 때에도 환히 드러난 곳에 있듯이 하고 홀로 있을 때에도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맑은 하늘에 밝은 해처럼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성학(聖學)의 요점이니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고 백성을 사랑하는 실제가 또한 어찌 여기에 벗어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다.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하늘이 지혜를 주고 복을 주는 때를 만났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빼고 훌륭한 덕화를 입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지나온 4년 동안은 바로 전하께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성공하기를 바라던 때였으나, 지금은 수렴 청정을 거두고 모든 정부를 몸소 총괄하면서 전하께서 호령을 시행하는 것이 금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떻게 위로는 자성 전하의 지중한 부탁을 받들고 아래로는 뭇 백성들의 간절한 기대에 보답하시겠습니까?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조종에서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지켰던 심법(心法)이며 자전께서 우리 성상(聖上)에게 전해 주신 훈계입니다. 엄숙하고 공손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직접 대한 듯이 하는 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은 조종을 본받을 것이고, 시종일관 경전(經典)에 전념하면서 조금도 안일하거나 즐기는 일이 없는 것은 학문을 힘쓰는 것이고, 수고로운 자를 위로하고 오려는 자를 오도록 하며 바르지 못한 자를 바르게 하고 굽은 자를 곱게 하며 자식처럼 사랑하며 품어주고 보호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시 천변만화의 근원에 대하여 독실하게 마음속에 새겨 한 마디 말과 일상적인 행동과 덕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요순 같은 임금이 될 수 있고 조종을 본받을 수 있고 자성 전하의 부탁과 뭇 백성들의 기대를 또한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이 계속해서 번거롭게 아뢸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도(道)가 두 가지 있는데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입니다. 사설(邪說)이 유행하는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한 데에서 연유하니, 정학을 숭상해야만 사설이 없어질 것입니다. 무릇 정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대학(大學)》에서 이른바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일 뿐인데 성현들이 서로 전해준 심법이고 제왕들이 정사를 행했던 대법입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모두 그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동중서가 말하기를, ‘마음을 바로잡아야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을 바로잡고 만민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정학(正學)을 숭상하는 실제입니다. 전하께서는 명덕과 신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우선 큰 뜻을 세우고 날로 강연(講筵)에 나아가소서. 모든 덕을 진보시키고 업을 닦는 일에 반드시 정(正) 자를 좇아 행하셔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모든 신하들이 서로 스승으로 삼아 본받고 백성들의 풍속이 화락하게 될 것이니, 만세를 위해 태평 시대를 여는 것이 실로 이에 기초할 것입니다.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절실하니, 마땅히 가슴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지금 수렴 청정을 거두고 모든 정무를 몸소 총괄하시게 되었는데 전하의 춘추가 한창 왕성하고 온갖 제도가 새로워졌으니, 이는 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때로서 주자(朱子)가 이른바 ‘오늘이 성시(盛時)이다.’라고 한 말이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 합니다. 지금 대소 신료들이 목을 늘이고 우러러보며 간절히 축원하는 것은 성궁(聖躬)을 잘 보호하고 성학을 힘쓰는 것보다 간절한 것이 없습니다. 조종들이 물려 준 막중한 업무와 신민들이 사랑하고 떠받드는 소망이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어찌 자중자애(自重自愛)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기거(起居)하고 수라 드시고 건강을 돌보는 방법에 대해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그래야만 기(氣)가 고루 돌고 몸이 편안해져서 영원히 강녕(康寧)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학문에 종사하는 공은 오직 몸소 행하고 힘써 실천하는 것에 근본하여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여 한 생각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고 한 번 호흡하는 사이일지라도 중단이 없이 힘쓰고 부지런히 한다면 앞으로 성학이 날로 광명(光明)한 지경에 이르게 되어 치도(治道)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지난 겨울 신이 강연(講筵)에서 가까이 모셨을 적에 전하를 우러러보니 글을 읽으면서 묻기를 좋아하는 부지런함이 있었고 말을 들으면서 천근한 말도 살피는 덕이 있었습니다. 매양 민생이 곤궁하고 초췌한 것은 수령(守令)들이 다스리는 것이 소홀해서라고 여겨 누누이 하문(下問)하셨으니 신은 공경하여 우러러 마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여기고 직업에 종사하며 삶을 즐기는 것은 전하께서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재물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 농부들과 길쌈하는 아녀자들이 일년 내내 부지런히 고생한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검약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한다면 절로 백성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음식을 간소하게 하고 의복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9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들에게 재물을 보관한다.’는 것이고, ‘백성들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는가?’라고 한 것 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적당히 넘기거나 고식적인 정사를 하지 마시고 반드시 나라를 여유롭게 하고 백성이 풍족해 하는 계책을 생각하십시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마음에 새기겠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영보(朴永輔)가 아뢰기를,
"지금은 진실로 탕(湯) 임금이 덕을 새롭게 하고 주(周) 나라가 천명을 새롭게 받은 것과 같은 일대 기회입니다. 급한 일은 무엇보다도 성학을 힘쓰고 언로(言路)를 열고 절검(節儉)을 숭상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학문이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서 옛날 제왕들의 큰 공훈과 업적이 모두 이로부터 나왔습니다. 옛날 우리 부자(夫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지금 전하의 춘추가 공성(孔聖)과 서로 같습니다.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한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신다면 조정 신하들이 면려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절로 광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나라에 언로가 있는 것은 땅에 강하(江河)가 있고 사람에게 맥락(脈絡)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루도 막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법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인(聖人)이 된다.’ 하였습니다. 정사는 백성을 사랑하는 데 있는데, 절검이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입니다. 절용(節用)하지 않으면 그 폐해가 절로 백성에게 미치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옥식(玉食)을 대할 때에 여름에 밭 일하는 수고를 가엾게 여기고 명주옷을 구하심에 추위에 베를 짜는 고통을 불쌍히 여겨 늘 우리 백성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완연히 바로 앞에 있는 듯이 여기셔야 할 것이니, 비용을 어찌 절약하지 않을 수 있으며 검약을 어찌 숭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을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정호(金鼎鎬)가 아뢰기를,
"오늘날 많고 많은 일 가운데 성학을 부지런히 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게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이 낸 덕이 있더라도 이것이 아니면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주 경연(經筵)을 열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토론하십시오. 어진 인재를 구하여 천직(天職)을 함께 하고, 언로를 열어 총명을 넓히고, 재용을 절약해서 백성들의 산업을 후하게 하고, 벼슬과 상을 신중히 하여 공기(公器)를 중히 하며, 사치를 억제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는 데 이르러서는 순서대로 시행해야 할 일이지만, 그 근본은 성학을 힘쓰는 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깊이 마음을 맑게 하여 살피십시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조영하(趙寧夏)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정치를 행하는 방도는 반드시 학문을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열(傅說)은 은(殷) 나라 고종(高宗)에게 하기를, ‘시종 학문에 힘쓰소서.’라고 하였고, 범조우(范祖禹)는 송(宋) 나라 철종(哲宗)에게 고하기를, ‘요(堯) 순(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을 본받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학문에 부지런히 하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열성조(列聖朝)가 전수한 심법(心法)입니다. 전하께서는 조종조에서 일찍이 행했던 것을 마음의 규범(規範)으로 삼는다면 영원히 태평 성대의 아름다움이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좋다.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돈영(李敦榮)이 아뢰기를,
"신은 외람되이 생각건대, 팔도의 조세는 백관을 풀어 긁어 모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재정이 고갈되어 비용을 대 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일찍이 안으로는 어공(御供)을 특별히 줄이고 공물(貢物)의 수요를 줄이도록 허락하고 밖으로는 환곡(還穀)의 총수량을 탕감하고 재결(災結)을 돌보아 주도록 한 적이 있어 훌륭한 덕과 지극한 은혜를 공경하며 칭송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경비가 다 떨어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내하(內下)한 표지(標紙)는 규례를 살피지 않는 것이 아닌데 9승(升)명주 1필(疋)이 18냥(兩)이고 초주지(草注紙) 1권(券)은 미(米)로 3석(石)이나 되니 누가 세금을 따져 보건대 이와 같은 줄을 알겠습니까? 전지를 받들어 수개(修改)하는 일이 어찌 큰 공사가 되겠습니까마는, 방을 대청으로 바꾸고 담벽을 장지와 병풍(屛風)으로 고치는 것이 비록 조금 변경하는 것 같아도 목재와 석재를 모두 갖추어야 하고 공장(工匠)들도 모두 급료(給料)를 받아야 하니 그 허비하는 것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내탕고(內帑庫)와 창름(倉廩)에 축적된 것이 농사 짓는 사내와 길쌈하는 여인네의 피와 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 어찌 차마 재물을 소상하여 백성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를 여유롭게 하는 방도는 세금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절약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당(唐) 나라의 육지(陸贄)가 말하기를, ‘절약을 잘하면 비록 창고가 비었더라도 반드시 채워질 것이고, 절약하지 않으면 아무리 창고가 찼더라도 반드시 비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또 아뢰기를,
"정학(正學)을 숭상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기(人紀)를 맑게 하며 세교(世敎)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운 규모도 여기에 있고 열성(列聖)들이 이어받아 지킨 가법(家法)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예의의 나라라고 칭찬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사설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림자와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그 동안 내린 징계가 모두 엄정했지만 요망한 잔도들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고, 서쪽 오랑캐가 성 안에서 잠복해 있은 지 자그마치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진실로 그 병을 얻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도 정학이 밝지 못해서이고, 둘째도 정학이 밝지 못해서입니다. 대체로 정학이 밝아지면 사설은 절로 없어질 것이니,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원기가 충만하면 사특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에 있어 정학은 바로 사람에게 원기와 같은 것이니, 이에 증상에 대한 처방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정학을 장려하고 흥기시키며 부추기고 인도하는 일과 같은 것은 조정이 어떻게 조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고 행위가 올바른 사람을 중앙과 지방에서 추천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뜻입니다. 안으로 정부의 좌찬성(左贊成)        과 우찬성(左右贊成), 구경(九卿)으로부터 밖으로는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이르기까지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되 반드시 행실이 독실해서 고을에서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을 위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화려한 글재주만을 구하고 덕이 속에 쌓여 있지 않은 자라면 절대로 빈 명예만을 취하여 실용(實用)을 해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시 문벌(門閥)에 얽매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준수한 인재를 부르는 것으로 하늘의 뜻을 선양하는 방도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이를 행회(行會)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초야에는 숙덕(宿德)들이 지금 매우 많습니다. 부지런히 그들을 불러들여 등용하시고 계시니, 성상께서 그것 때문에 잊지 못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 사방에서 조회 오는 때를 당하여 여러 유현(儒賢)들이 전하를 한 번 뵙고자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감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빨리 마음을 펼치신 하유를 내려 숨어 살려는 생각을 돌리려고 하신다면 초야에서 숨어 살려는 것이 처음부터 작정한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틀림없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돈유(敦諭)를 여러 승지로 하여금 나누어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공씨(孔氏)가 우리나라에 온 후로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가운데 지금 사적(仕籍)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삼가 정조(正祖)께서 내린 특교(特敎)를 따라 고 대사헌(大司憲)        공서린(孔瑞麟)과 고 참봉(參奉)        공덕일(孔德一) 두 파 중에서 음직(蔭職)에 조용(調用)하여 중국 연성(衍聖)의 예를 본뜨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헌공(景獻公) 조상경(趙尙絅)은 영묘조(英廟朝) 때의 충신입니다. 지조가 엄격하고 두루 다스린 공로가 있었는데도 많은 노여움과 원망을 입었고 여러 차례 배척을 받았지만 시종 굳건하여 사우(士友)들이 남긴 칭송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의리가 쇠퇴해 가는 때를 당하여 이렇듯 바르고 신실한 분에게 부조(不祧)의 은전을 시행하여 날로 독실히 하는 뜻을 나타내십시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전에서 처음하는 정사를 어떻게 할까 물으시니 성대한 일입니다. 인재를 등용해 쓰는 정사는 위계가 높은 벼슬아치가 많다고 해서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 호군(行護軍)        김익문(金益文),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승보(李承輔), 행 보군 이풍익(李豐翼)·송정화(宋廷和)·조귀하(趙龜夏)를 다같이 정경(正卿)에 승진 발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한정교(韓正敎)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나는 어린 나이로 외람되이 어렵고 큰 책임을 이어받게 되었으니 믿는 것은 안으로는 대신들과 많은 신하들이고 밖으로는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다. 풍속은 날로 바뀌고 기강이 날로 무너지는 것은 모두 법이 미덥지 못하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삼정(三政)은 바로 나라의 중요한 기틀인데, 요사이 삼정이 문란해지고 있으니 비단 방백과 수령이 살피지 못한 잘못일 뿐만 아니라 경재(卿宰)·명사(名士)·사족(士族), 고을 사는 읍속(邑屬)·이민(吏民)의 수령이 마치 객관(客官)인 것처럼 해서 그런 것이다. 고을에 사는 토호(土豪)들은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굴러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한 고을의 삼정과 크고 작은 공사(公事)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어 수령은 좌지우지하기가 어렵고 아전이나 백성들은 그들의 요구를 쫓는 데 지쳐서 장차 고을이 없어지고야 말 지경이니, 백성이 없는데 관직은 무슨 관직이며 국가는 무슨 국가이겠는가? 당장의 급선무는 단지 두 가지 일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안으로 묘당(廟堂)에서 안면을 두고 생기는 사정을 보지 말고 법령을 엄격하게 세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밖으로 고을에 사는 토호들이 악습을 거두고 평안히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것이다. 조정의 법령이 엄정하면 기강이 세워질 것이요, 고을에 사는 토호들이 악습을 거두면 풍속이 바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토호들이 힘을 믿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내가 세자 때부터 익히 듣고 알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어느 고을, 누구라고 비록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만 리나 떨어진 먼 곳도 발밑 계단처럼 내다보니 아무리 먼 곳도 환히 알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에 대해 침전의 벽에 써 놓았으니, 이는 스스로 짐작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나라의 안위가 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의정부에서 글을 만들어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도록 하되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베껴 써서 방방곡곡에 붙여 모두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평군(永平君) 이욱(李昱),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을 가례 도감 당상(嘉禮都監堂上)으로 추가하여 차하(差下)하였다.

 

2월 28일 무오

남종순(南鍾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병덕(金炳德)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연창(趙然昌)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강시영(姜時永)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이경재(李景在)를 가례 정사(嘉禮正使)로, 민치구(閔致久)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이지겸(李志謙)을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이세기(李世器)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2월 29일 기미

중희당(重熙堂)에서 재간택(再揀擇)을 거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삼간택(三揀擇)에 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라."
하였다.

 

중궁전(中宮殿)에 공상(供上)하는 물종(物種)들은 삼간택(三揀擇)하는 날부터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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