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경신
좨주〔祭酒〕 송내희(宋來熙)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로 일찍이 경(卿)을 부르려는 마음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은거하고 있는 곳으로 예물을 보내 불렀으나 소원해진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헛되이 피로에 지친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목이 탈 뿐만이 아니다. 지금 몸소 모든 정부를 총괄하여 정전에서 다스림에 대해 묻게 되었다. 자전(慈殿)께서 부탁하신 막중한 책임과 신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크게 짊어질 것만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감히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때에 경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더욱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체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장차 임금을 높은 경지에 올려놓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고상하게 가지고 다만 자신의 몸만을 착하게 하려는 것으로 말하면, 이것이 어찌 좋아서 그런 것이겠는가? 첫째는 나의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고 둘째는 내 예우(禮遇)가 박해서 그런 것이니, 자신을 반성하건데 부끄러움만 앞서고 계속해서 슬프고 답답한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아! 경의 할아버지인 선정(先正)은 일찍이 성조(聖祖)의 조정에 모범이 되었다. 《서경(書經)》에 이른바, ‘더불어 서로 편안함과 수고로움을 함께 하였다.’는 말과《시경(詩經》에 이른바, ‘그 덕을 사모하여 서술하라.’라는 말이 경의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경은 일찍이 예우를 받았고 나이와 덕이 모두 높다. 학문의 연원이 깊고 실천을 독실히 하여 우뚝이 사림(士林)의 추종을 받아왔다.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장려하고 풍교(風敎)를 돈독히 숭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정의 가법이다. 내가 자나깨나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도 오직 여기에 있다. 경이 아무리 끝내 물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숨어 살기를 고집한다 해도 가슴에 쌓인 포부가 밖으로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 연영전(延英殿)의 물시계 소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는 이때 빈 골짜기의 발자국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경은 빨리 마음을 돌려 길에 오르도록 하라. 강연에 출입하며 나의 공부가 높은 경지에 도달하도록 돕고 나의 교화가 융성해지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구구한 바람이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재면(李載冕)이 지었다. 】
호군(護軍) 김병준(金炳駿)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변변찮은 내가 어린 나이에 어렵고 큰 기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감히 혹시라도 태만히 하지 못하였다. 우러러 우리 자성 전하께서 보살펴주고 키워준 은혜에 힘입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조정 안이 무사하게 지낸 지가 이제 이미 4년이 되었는데, 이제 수렴 청정을 거두고 모든 정사를 직접 총괄하게 되었다. 정전에서 자문함에 잘 다스려지게 하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대궐 안이 깊고 엄숙하기만 하니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좌우에서 인도하여 정치와 교화를 돕는 요점은 진실로 임하(林下)의 숙덕(宿德)이 나를 깨우쳐 주고 나를 도와주어 시종 학문에 힘쓰게 해서 장차 빛나는 광명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데 달려 있다.
경은 경의 집안 사람으로서 일찍이 시(詩)와 예(禮)를 익혀서 사림(士林)들이 귀의하였고 사문(斯文)의 추대를 받아 우뚝이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집안에 있어서는 선조(先祖)의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고 벼슬길에 나와서는 조정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선조(先朝) 때에는 여러 차례 불러들였고 내가 기다려 온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빈 골짜기로 예물을 보냈는데도 아주 가버리려는 뜻을 돌리지 못하고 저 건너편에 보이는 듯한 그리움만 더 간절하게 한단 말인가! 이는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한 탓이니 일찍이 스스로 반성하며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선비가 크게 일을 해 볼 만한 세상에 태어나 성인(聖人)의 글을 읽고 성인의 도(道)를 배우는 것이 어찌 단지 자기의 뜻을 고상하게 하고 홀로 자기의 몸만 착하게 하려는 데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어려서 공부하여 성인이 되어 실천함으로써 임금을 도와 성명(聖明)한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게 하고 나라의 형세를 태산과 반석에 올리고 세도(世道)를 교화와 다스림으로 끌어 올리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현철(賢哲)의 바꿀 수 없는 의리였다. 내가 어찌 이러한 것으로 경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겠으며, 경이 어찌 이러한 것으로 나에게 보답하려 하지 않겠는가? 경이 만약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아마도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선뜻 마음을 돌려 조정으로 나올 듯하다. 지금 해가 점점 길어지는 봄날에 강연(講筵)을 열려 하니 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해진다. 경은 숨어 살려는 뜻을 빨리 돌려 대궐에서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황종현(黃鍾顯)이 지었다. 】
호군(護軍) 조병덕(趙秉悳)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왕업을 이어받은 이후로 경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언제인들 간절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수렴 청정을 거두고 기무(機務)를 직접 총괄하게 되어 대궐 뜰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정전에 나와 정사를 보니, 이때야말로 진실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성대한 때이다. 유현(儒賢)들을 돈소(敦召)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기에 이렇게 마음을 열어 유시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기다리듯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것은 열조(列朝)의 유훈(遺訓)인데 나의 정성과 예가 부족하여 은둔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군자들이 축적한 바인데 나의 학문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궐에서의 대면이 늦어지고 있으니,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다만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경은 시(詩)와 예(禮)를 전수해 온 가문의 자손으로서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시골에서 덕을 길러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숨어 살고 있어도 조야에서 그 풍도(風度)를 생각하고 있었다. 선조(先朝) 때에 어진 선비를 초빙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돈면(敦勉)하는 은전을 입었고, 지난 봄에는 작질(爵秩)을 올려준 조치도 융숭히 예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와서 모범을 보일 때가 지금이고 임금을 보필하고 이끌어줄 때가 지금이다. 지금 만약 생각을 고쳐먹고 즉시 일어나 조정으로 나와서 나의 성명(聲明)과 문물의 교화를 장식하고 나와 밝고 융성한 정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어찌 나라에 믿을 곳이 있고 신하와 임금이 모두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지금 해가 점점 길어지는 때에 강연도 열릴 것이니, 이렇게 윤음(綸音)을 내려 하루에 세 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빨리 오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송희정(宋熙正)이 지었다. 】
부호군(副護軍) 임헌회(任憲晦)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는 학문도 얕고 견문도 적은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받아 대유(大儒)와 숙덕(宿德)을 얻어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받아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충하려고 생각하고, 우리 자성(慈聖) 전하의 의리로써 가르치신 덕과 도움을 구하는 생각을 체득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유시를 내린 것이 이미 여러 차례였다. 그런데도 숨어 살려는 뜻을 돌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연영전(延英殿)에서 대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내가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대에게 개탄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지금 대왕대비께서 수렴 청정을 거두고 모든 일을 직접 총괄하게 되었는데, 덕이 없는 내가 부하된 중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다. 날마다 처리해야 할 온갖 공무를 앞으로 어떻게 다 처리하겠으며,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다 품어 주고 보호해 주겠는가? 만약 산림에서 경서(經書)를 많이 읽은 어진 선비가 있어서 자기가 쌓아온 학문을 펼쳐 곁에서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며 은(殷) 나라의 법과 주(周) 나라의 제도에 대하여 강론하고 당요(唐堯)와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우순(禹舜)의 백성과 같은 백성이 되게 하는 방도를 전하여 학문은 광명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정사는 화목하고 흡족하게 되도록 한다면, 나라는 영원히 의지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신하와 임금은 다같이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대는 학문이 깊고 실천이 독실하여 선조(先朝) 때부터 이미 경연관(經筵官)의 반열에 올랐고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우뚝이 사림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그대가 어찌 선왕(先王)을 추모하여 지금의 임금에게 보답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뜻한 봄날이 막 펼쳐져 경연(經筵)을 열려고 하니 그대는 얼른 생각을 고쳐 되도록 빨리 연석(筵席)에 나와 목 마른 듯이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정기회(鄭基會)가 지었다. 】
부호군(副護軍) 이민덕(李敏德)에게 하유하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자성(慈聖) 전하께서 수렴 청정을 거두고 나에게 나라의 모든 일을 모두 맡기면서 여섯 조목의 훌륭한 훈계를 거듭 간곡하게 내리셨다.
변변치 못한 내가 오직 부하된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애써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정전(正殿)에 앉아서 정사를 듣는 것은 역시 문왕(文王)이 첫 정사에서 신하들에게 물었던 뜻이다.
생각하건대 옛날의 명철한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다스릴 때에는 자기 뜻대로 다스려 한 세상을 어질고 장수하는 경지에 올려놓고 국가의 형세를 태산과 반석에 두었으니, 그 방도가 무엇을 말미암은 것인가? 아마도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의 선비가 임금의 곁에서 때에 맞게 도와주고 이끌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군자(士君子)가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도 공적을 이루기를 힘쓰고 세속을 정화시키려는 것이지 어찌 진실로 보배를 품고 숨어 지내며 세속을 초탈하여 자기 몸만 좋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배워 성인이 되어 행하려는 뜻을 가지고 정령(政令)과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써서 우리 임금을 요(堯) 순(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면 국가가 태평하게 되고 신하와 임금이 모두 영화롭게 될 것이니, 이는 진실로 학문을 하는 큰 근본이며 세상에서 필요하는 큰 쓰임이 될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거기에 모든 힘을 기울인지가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자기를 완성하고 남을 완성시키는 공부가 이미 널리 통하고 환하게 꿰뚫어 밝고 넓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니 명철한 임금과 현량한 신하가 부합하여 서로 힘껏 돕고 백성들과 나라가 그대를 힘입어 편안해지고 다스려지는 것들을 어찌 익숙히 강구하고 깊고 멀리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오로지 나의 덕을 높이고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믿음을 주지 못하여 전후로 돈소(敦召)한 것이 문득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려 골짜기에 숨어 지내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옆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어려운 세상을 피하여 험한 시골에 숨어 살면서 비록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기로 맹세하였다고 하더라도 대궐을 그리워하는 정성이 어찌 없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화창한 날이 차차 길어져 강연(講筵)을 장차 열려고 하니, 하루에 세 번씩 접견하여 강론에 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대가 즉시 일어나 조정으로 나오기를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성교(趙性敎)가 지었다. 】
3월 2일 신유
송정화(宋廷和)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익문(金益文)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학주(李鶴周)를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3월 3일 임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이신국(李愼國), 제술(製述) 부(賦)에서 유학 홍만식(洪萬植)을 모두 직부전시(直賦殿試)하도록 하였다.
이재면(李載冕)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전한 권점(典翰圈點)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조강하(趙康夏)·김규홍(金奎弘)·이창호(李昌鎬)·남상룡(南商龍)·채동술(蔡東述)이다. 조강하를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삼았다.
3월 5일 갑자
통제사(統制使) 김건(金鍵)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조병협(趙秉協)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오취선(吳取善)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어재연(魚在淵)을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조귀하(趙龜夏)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서상직(徐相稷)을 경기 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삼았다.
3월 6일 을축
중희당(重熙堂)에서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빈청(賓廳)에 전교하기를,
"대혼(大婚)을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정하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삼가 자전의 하교를 받드니 실로 신령과 사람의 바람에 딱 들어맞습니다. 이는 종묘사직과 신민들의 무궁한 복이니, 신들은 기쁨에 겨워 경하드리는 정성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예조 당상(禮曹堂上), 종신(宗臣)·각신(閣臣)·유신(儒臣)을 소견(召견見)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이름난 가문에 경사가 나 맑은 덕을 지닌 분이 선발되어 삼간택(三揀擇)을 이미 행하고 육례(六禮)의 길일을 잡게 되었으니, 실로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입니다. 기쁘고 송축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자전께서 기뻐하시니 더욱 기쁘고 경사스럽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권강(勸講)과 소대(召對)는 사체로 보아 지금이전의 칭호를 그대로 쓸 수 없으니, 진강(進講)으로 고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주청사(奏請使)를 차출(差出)해야 하는데 사신(使臣)의 호칭을 진하사 겸 주청사(進賀謝恩兼奏請使)로 하비(下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아뢰기를, "동십자각(東十字閣)에 있는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가건물에 불이 나서 가건물 800여 칸과 목재가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해당 입직 당상을 견파(譴罷)하고, 원역(員役) 및 수직 군병(守直軍兵)을 엄하게 형신(刑訊)하고서 정배(定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입직 당상인 훈련대장(訓鍊大將) 임태영(任泰瑛)을 파직하였다가 얼마 뒤에 용서하였다.
유후조(柳厚祚)를 진하 사은 겸 주청사(進賀謝恩兼奏請使)으로, 서당보(徐堂輔)를 부사(副使)로, 홍순학(洪淳學)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고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에게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을 추증(追贈)하고, 숙인(淑人) 오씨(吳氏)에게 해령 부부인(海寧府夫人)을 추증하고, 이씨(李氏)에게 한창 부부인(韓昌府夫人)을 봉하였다. 【삼간택(三揀擇) 후에 봉작(封爵)한 것이다. 】
3월 7일 병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능섭(李能燮)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3월 8일 정묘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재문(李在聞)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익문(金益文)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풍익(李豐翼)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훈련 대장(訓練大將)을 분간(分揀)하여 이송하였으니, 추조(秋曹)영교(營校)와 영속(營屬)들도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3월 9일 무진
인정전에 나아가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0일 기사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3월 11일 경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데 대해 사은(謝恩)하는 것을 직접 받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2일 신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정기세(鄭基世)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호군(護軍) 김병준(金炳駿)이 부주(附奏)하기를,
"신은 대대로 녹(祿)을 받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치우치게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으니 어찌 한번 전하를 뵙고 조금이라도 그 은혜를 갚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만,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담(風痰)이 문득 고질병이 되어 달려가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부르시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민덕(李敏德)이 부주(附奏)하기를,
"신이 그 동안 제 스스로 논열(論列)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정성이 부족하고 말이 비루하여 이해를 받지 못한 채 격례 밖의 융숭한 은혜만 거듭 내리시니 두렵고 감격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명을 어긴 죄를 공손히 기다립니다."
하였다.
3월 13일 임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4일 계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풍익(李豐翼)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헌용(鄭憲容)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3월 15일 갑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정기원(鄭岐源)이, ‘평사(評事) 김병익(金炳翊)이 말미를 받고 돌아오던 길에 부임하던 신과 마주쳤는데, 애당초 와서 보지도 않고 그대로 즉시 떠났습니다. 부득이 파출(罷黜)해야 하니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장수와 막하(幕下)의 체통(體統)은 서울이나 지방이 똑같은데, 이번 평사의 행동은 몹시 놀랍다. 그 죄상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처벌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6일 을해
전교하기를,
"북병사(北兵使)가 평사(評事)를 관할하는 체통은 바로 영묘(英廟) 때에 정해진 규정이다. 그리고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군현(郡縣) 수령(守令)에게 상관(上官)과 하관(下官)으로서의 체통을 갖는 것도 전해 내려오는 옛 법규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규례에 어두운 문관(文官)이 조정의 체통이 엄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문관은 귀하고 무관은 천하다는 차별로써 자기는 높고 상대는 낮다고 여겨 절제를 받지 않는 자가 왕왕 있다고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몹시 개탄스럽다. 이제부터는 절제하는 체통을 옛 규례를 회복하여 시행해서 감히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병조(兵曹)에서 말을 만들어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3월 17일 병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고기례(告期禮)를 행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조병덕(趙秉悳)이 부주(附奏)하기를,
"신은 종전에 임금을 기만한 죄도 이미 속죄하기 어려운데 성상께서 등극(登極)하신 초에 또 돈소(敦召)를 입었고, 심지어 작년 봄에는 품계를 올려주는 명까지 받았으니 더욱 분수 밖의 일이라 우러러 살펴주시기를 바랐으나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성상의 유시는 어찌하여 또 내건 것입니까? 지금 신의 나이가 이미 70살에 가까워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운데, 어떻게 감히 친정(親政)을 고문(顧問)하는 반열에 참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을 관리의 선발 대장에서 간삭(刊削)하여 영원히 부르는 유지(有旨)를 끊으소서. 신의 정세에 대해서는 다시 진달할 것이 없으니 다만 사실(私室)에서 석고(席藁)하고 감죄(勘罪)하시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3월 20일 기묘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책비례(冊妃禮)를 행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임헌회(任憲晦)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은 오랫동안 전하의 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여 엎드려 견책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수령(守令)이 와서 별유(別諭)를 선포하였습니다. 열 줄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이 정녕하고 돈독하시니 더욱 두려웠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수렴 청정을 거두고 서무를 몸소 총괄하시면서 성상의 근심이 이처럼 절실하니 신이 진실로 조금이라도 새로운 교화를 도울 수 있다면 어찌 달려가지 않고 스스로 고집만 부리고 있겠습니까? 지금 위명(威命)이 내려지니 더욱 명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엄한 처벌을 내려주소서."
하였다.
3월 21일 경진
별궁(別宮)에 나아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였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저택에서 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서 동뢰연(同牢宴)을 행하였다.
3월 22일 신사
대왕대비(大王大妃)·왕대비(王大妃)·대비(大妃)가 왕비의 조현례(朝見禮)를 받았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비가 집안을 잘 다스려야 집안에 도덕이 바르게 서고 천하가 안정된다. 예의에서 배필을 중히 여김은 그것이 백성들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필을 맞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니 나라의 기초가 반석같이 영원히 공고해졌고, 온 나라 사람들의 간절한 기대에 보답하니 노래와 칭송하는 소리가 온 강산에 퍼짐을 볼 수 있다.
대개 임금의 정사는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꾸리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기초로 삼고 있는 만큼 반드시 명철하고 어진 왕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늘과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배필을 직접 맞아들이는 예식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안으로부터 고향 마을, 나라 안에서의 교화는 이로부터 시행되게 된다.
태임(太任)은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운 훌륭한 덕을 후대에 많이 물려주었기 때문에 800년 동안이나 되는 오랜 기간 나라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유신(有莘)은 순서 차례를 명백히 밝힌 높은 공적으로 하여 6, 7명의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 훌륭히 계승해나갈 수 있게 하였다. 실을 잣고 천을 짜며 직접 길쌈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제사 그릇들을 직접 받들어 제상에 올려놓는 것은 선조(先祖)를 받들며 효도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건대, 나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4년 동안 동조(東朝)에 의탁해왔다. 대왕대비로 말하면 우리 왕실의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빛나는 덕행을 계승하여 나라를 유지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에서 높고 훌륭한 공업(功業)을 쌓았으며, 나로 하여금 돌아간 익종(翼宗)의 뜻과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며 보호하고 도와주고 가르쳐주시니, 그 덕은 크고 그 은혜는 지극하였다.
제사지내는 달이 이르게 되니 이에 대왕대비의 공덕을 찬양하도록 하명하였다. 세 전하는 대왕대비의 모범을 생각하며 높이 칭찬하고 온 대궐 안의 여인들은 주부로서의 도리를 다하던 대왕대비를 형상하여 노래하였다.
왕비 민씨(閔氏)로 말하면 대대로 충성스럽고 곧은 명문(名門) 집안이며,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근친으로서 어질고 덕 있는 품성을 타고났다. 선친에게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아서 어린 나이에 벌써 모든 행동이 날마다 성취되어 책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좋은 명성을 일찌감치 드러냈으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행실은 마치 외갓집에 있을 때나 다름없었다. 길몽(吉夢)은 여러 대에 걸친 조상들의 덕에서 기인한 것이니 우(禹) 임금이 도산씨(塗山氏)에게 장가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점을 치니 모든 경사(卿士)가 다같이 좋다고 하므로 왕비로 책봉하였고 좋은 날을 택하여 복장을 갖추고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미 올해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책(冊)과 보(寶)를 주어 왕비로 책봉하였고 21일 경진(庚辰)일에는 대혼례(大婚禮)가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덕을 마음에 간직하니 왕비로 책봉하고 떳떳한 의식 절차대로 금보(金寶)를 올린다. 왕비로서의 큰 명을 받으니 아름다운 덕이 부합되고 성장(盛裝)한 아름다운 자태는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맞았다. 후손들을 번성시키고 여러 비빈들을 거느리는데 음덕(陰德)을 펴면 그들이 부덕(婦德)을 각각 다할 것이다.
온갖 덕과 모든 품행을 온전하게 갖추니 그 은혜로운 교화를 받아서 백성들의 풍속도 아울러 아름다워지리라. 검소하고 검박한 생활을 하는데 솔선수범하고 사치는 경계하여 서로 이루어지는 도를 실천하고 온갖 복을 널리 펴면 집안과 나라가 함께 복을 받고 온갖 만물을 키워 모두가 살아나가게 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덕과 같고 온 나라에 공덕이 해와 달처럼 밝게 드러나니 혜택을 널리 펴서 사령(赦令)을 베풀겠다.
이달 22일 날 밝기 이전의 잡범들로서 사형죄 이하의 죄인들은 다같이 용서해 주라. 아! 왕비로서 훌륭한 덕을 다 갖추고 있으니 좋은 자손들이 틀림없이 번성하리라. 대대로 복이 뻗어 내려가서 왕가가 삼대(三代)처럼 장구해질 것이며 왕비의 지극히 훌륭한 덕행을 여사(女史)들이 영원히 자손들의 번성을 노래하는 시에 쓸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지어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정기세(鄭基世)가 지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봉조하(奉朝賀)006) 김흥근(金興根),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 등이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혼례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전하께서 대궐에 나오셔서 하례를 받으셨으니 여러 사람들은 경사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배필을 삼는 혼례는 종사(螽斯)의 경사007) 이며 복록(福祿)의 근원입니다. 《역경(易經)》에는 먼저 건도(乾道)와 곤도(坤道)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우서(虞書)》에서도 역시 요(堯) 임금의 두 따님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하여 썼으며 《모시(毛詩)》에서도 관저장(關雎章)을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전하의 왕실과 나라에 있어서 상서로움의 단서를 만드는 시초이며 복록을 맞아들이는 때입니다. 예로부터 가례(嘉禮)에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를 높이 칭송한 것은 그의 훌륭한 덕이 천지(天地)와 부합하여 복이 자손들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종사(螽斯) 편을 노래하고 인지(麟趾) 편을 송축하니 억만 년을 내려가도록 아름다운 소문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하늘의 덕을 체득하고 《역경(易經)》첫 장의 뜻을 깊이 살피시어 문왕처럼 높은 덕을 닦으신다면, 훌륭한 자손들이 번성하는 경사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충성스럽고 절개가 곧은 훌륭한 집안이니 바로 이 집 가문에서 대대로 아름다운 기풍을 물려왔고, 의리와 원칙을 굳게 지켜 나라와 고락을 같이하였다. 대례(大禮)가 이미 이루어졌고 또 대왕대비(大王大妃)의 하교도 받았으니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의 사당과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과 해령 부부인(海寧府夫人)의 사당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3일 임오
가례 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제조(提調) 서대순(徐戴淳)·조연창(趙然昌)·임백수(任百秀)·한계원(韓啓源)·이재원(李載元), 도청(都廳) 남상룡(南商龍)·이면광(李冕光), 문낭청(文郞廳) 이명응(李明應)·신도희(申道熙), 부사(副使) 민치구(閔致久), 좌통례(左通禮) 장석준(張錫駿), 우통례(右通禮) 김우휴(金羽休), 사옹원 정(司饔院正) 홍종학(洪鍾學), 선교관(宣敎官) 조강하(趙康夏), 진규 승지(進圭承旨) 조석원(曺錫元), 전교관(傳敎官) 남종순(南鍾順)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이정재(李鼎在), 종정경(宗正卿) 이경하(李景夏),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휘중(李彙重)에게 백관가(百官加)를 직접 주었다.
3월 24일 계미
유장환(兪章煥)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규홍(金奎弘)을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삼았다.
3월 25일 갑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행하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함흥부(咸興府)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무과에 회방(回榜)한 신석원(申錫元)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정건조(鄭健朝)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지영(柳芝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경하(李景夏)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동헌(金東獻)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제소(朴齊韶)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3월 26일 을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 문무과(庭試文武科)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황익수(黃益秀) 등 10인을, 무과에서 정영택(鄭永澤) 등 109인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듣건대, 도성 안에서 쌀값이 점점 뛰어올라 백성들의 형편이 급박하다고 한다. 비록 평년이라고 해도 이때가 되면 오히려 식량이 떨어져 곤란을 당하는 폐단이 있곤 하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이 흉년이 든 춘궁기(春窮期)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고 근심스러운 생각으로 비단옷과 쌀밥도 모두 맛이 없다.
조세를 바칠 때에 본미(本米)로 운반하여 바친다면 반드시 쌀값이 떨어지게 된다. 조정에서 방납(防納)을 금칙(禁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저 모리배들이 높은 가격으로 집전(執錢)하여 경강(京江)에서 쌀을 사다가 대납하는 자들이 전후에 계속 있다고 하는데 나라에 기강이 서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운반에 대해서는 물이 얼어붙었다고 핑계대면서 거리낌 없이 해를 넘기니 이것은 주사(舟司)의 영장(領將)과 담당 아전(衙前)들이 한통속이 되어 농간을 부리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러므로 묘당(廟堂)에서 두 포도청(捕盜廳)에 엄하게 신칙하여 소위 방납하는 놈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체포해서 즉시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게 하라. 그리고 집주읍(執籌邑 : 집주선이 있는 고을)에서 첫 번째 운반과 두 번째 운반 시일을 넘겨 지체시키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각 해당 영장(領將)과 집리(執吏)에게도 일률(一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7일 병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전좌(殿座)와 동가(動駕)할 때에 선전관(宣傳官)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는 군복을 입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서상악(徐相岳)을 공충도 수군절도사(公忠道水軍節度使)로, 조득림(趙得林)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3월 28일 정해
좨주(祭酒) 송내희(宋來熙)가 부주(附奏)하기를,
"동조(東朝)에서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전하께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였으며 또한 왕비를 맞아들이는 혼례를 함으로써 모든 일의 시초를 열어 놓고 온갖 복의 터전을 쌓았으니, 그 경사를 축하드리는 마음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뜻밖에도 너그럽게 타일러주시는 명을 받았으니 윤음의 간곡함은 마치 지척에서 전하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곧 마음을 돌리고 올라와서 경연(經筵)에 출입하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새로 왕위에 올라 하늘이 준 명을 시행하는 때인 만큼 응당 마음을 가다듬고 분발하여 책을 읽고 이치를 밝히는 공부에 더욱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연관들이 강론하고 토론하는 경연에 직접 나가서 조용히 물어보기도 하고 허심하게 받아들이신다면, 날로 더욱 총명해질 뿐만 아니라 성상의 학문도 날로 새롭게 발전할 것입니다.
신은 젊어서는 학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늙어서는 더욱 거칠고 변변치 못한 형편인데 어떻게 경연에 나가 의논(擬論)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병이 온몸에 엄습하여 몸을 움직일 가망도 없으니 헤아려 주소서."
하였다.
3월 29일 무자
전교하기를,
"홍주(洪州)는 바닷가에 있는 큰 고을이다. 그런데 온갖 폐단이 몰려들어 더는 잘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백성들이 관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나라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 탓이다. 고을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고을이 있는 이상 어떻게 모든 것을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부호군(副護軍) 김학근(金鶴根)을 특별히 제수하니 그에게 모든 폐단을 철저히 바로잡게 하여 이 고을을 완전히 복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조연창(趙然昌)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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