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3권, 고종3년 1866년 7월

싸라리리 2025. 1. 8.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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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사

동래부(東萊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잠삼(潛蔘) 및 중국 배와 교역하는 폐단을 거듭 금지시키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의주 부윤(義州府尹) 및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의 도백(道伯), 병사(兵使), 수사(水使)로 하여금 그런 사람들이 발각되는 대로 붙잡아 우선 참형(斬刑)에 처한 후 계문(啓聞)하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윤허하였다.

 

7월 2일 무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7월 5일 신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해미현(海美縣) 조금진(調琴津)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 한 척은 영국 배라고 하며, 영인(英人)과 청인(靑人)이 모두 30명입니다. 그 중 영국 상인 대발(戴拔)이라고 하는 자는 일찍이 봄에 와서 교역하기를 청하였던 자인데, 다시 와서 간절히 청하므로 엄히 타일러서 속히 물러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문정 역관(問情譯官)을 내려 보내줄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배는 봄에 와서 정박하였던 배로서 그들이 하는 말은 전의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데 불과합니다. 물화(物貨)를 교역하는 것은 나라의 법에서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엄한 말로 물리쳐 보내는 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해결할 만한 역관 한 사람을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긴급히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작년 농사가 잘 되고 못 된 차이는 있으나, 요컨대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든 뒤인데 도성(都城)에서 쌀값이 등귀하고 있는 것은 모리배가 조종하는 데서 생긴 폐단입니다. 지난번 몇 만 포대의 쌀을 싸전에 내준 것은 나라와 개인들의 이해를 헤아려 낮은 값으로 판매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니, 이는 시민(市民)을 위하려는 지극한 뜻이고 도민(都民)을 위하려는 고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듣건대 한강(漢江) 상류와 하류에 쌀의 시세를 관망하며 머뭇거리는 자들도 있고, 망녕되이 서로 의심하여 마침내 곡식을 매매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저장해 두고 올라오지 않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하려는 뜻을 전혀 모르고 단지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만을 따르는 것이니, 일이 통탄스럽기가 이보다 심한 적이 있겠습니까? 빨리 조사하여 알아내도록 하고 또 경기(京畿)와 호서(湖西) 두 도(道)에 공문을 보내 포구를 낀 고을에 유치되어 있는 곡물 수량과 곡식 주인의 성명을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고,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만약 감추어 두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군문(軍門)에 보내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왕법(王法)은 반드시 실시할 만한 방도가 있을 것이니, 우선 거론하지 말고 앞으로의 형편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6일 임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조 정랑(戶曹正郞) 임면수(林冕洙)가 1년 정도 재임하는 동안에 공화(公貨)를 제 마음대로 써버린 것이 1만 냥 남짓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으로 헤아려 볼 때 몹시 놀랄 만한 일입니다. 이는 파직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니니,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처단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축낸 돈은 가동(家僮)을 잡아 가두고 기한을 정하여 완전히 채워 넣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하찮은 일개 낭관(郞官)이 제멋대로 써버린 것이 이토록 많다니, 무엄하고 거리낌 없는 것이 어찌 이리 심한가? 이 일은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우선 잡아다 남간옥(南間獄)018)  에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임면수(林冕洙)의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일개 낭관(郞官)이 공화(公貨)를 제멋대로 써버린 것이 이토록 많으니 만일 화응하여 같이 범한 원역배(員役輩)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재물을 절약하는 방도와 탐오를 징계하는 방도에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도리어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더욱더 가슴 아프고 한탄스러워 침소에 들어도 편안치 못하다. 축낸 공화를 보충하는 일을 묘당(廟堂)에서 별도로 더 샅샅이 조사하여 기한을 정해 놓고 완전히 채워 넣게 한 다음 즉시 계문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담당한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명을 받들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엄한 전교를 내리시도록 만들었으니, 감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짧은 글로 탄핵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중벌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낭관(郞官)이 공화(公貨)를 마음대로 써버린 것은 참으로 몹시 놀랄 일이다. 그러나 경은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찌 굳이 인혐하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고 나라의 경비에 관한 책임을 다하는데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돈영(李敦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호조에서 근무하였는데, 낭관(郞官)이 저지른 일은 바로 신이 맡았던 관서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지금 처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중벌을 내리소서."
하였다.
하니, 비답하기를,
"낭관(郞官)이 공화(公貨)를 축낸 것이 이처럼 무엄한 것은 진실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경이 어떻게 내막을 다 알아 낼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이렇게 인책(引責)하는 것은 진실로 너무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수군 우후(水軍虞候) 한용승(韓用昇)과 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응집(金膺集)이 연명으로 올린 보고를 방금 받아보니, 「이양선(異樣船)이 어제 출발하여 겨우 7리쯤 가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대로 배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니 배가 곧바로 서해의 대양(大洋)으로 향하여 멀리 가니 아득히 형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배가 비록 멀리 가기는 하였지만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청으로 돌아오지 말고 다시 더 탐지해서 치보(馳報)하라는 뜻을 신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8일 갑자

조연창(趙然昌)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임면수(林冕洙)가 경관직(京官職)에 있으면서 공화(公貨)를 제멋대로 써버린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이 많으니, 만약 이 무리를 지방 먼 고을에 두었더라면 장오죄를 범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 그 과오를 뉘우쳐 삼가게 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하겠지만, 그 집 선세(先世)를 생각해서 특별히 관대히 용서해주는 법을 적용한다.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왕래가 빈번한 길에 개좌(開坐)하여 백관이 차례로 서있는 자리에서 한 차례 엄히 형장을 가하고 향리(鄕里)로 내쫓아 보내라.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는 청환(淸宦)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나는 공화를 제멋대로 써버린 임면수의 일을 통해 각 고을의 수령(守令) 가운데 꽉 막혀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폐단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왕도(王都)에서 한 낭관(郞官)이 일 년 남짓한 동안에 몰래 제멋대로 축낸 것이 거의 한정이 없는데도 이제야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또 열읍(列邑)의 수령 가운데 위로는 공전(公錢)을 제멋대로 써버리고 아래로는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취하기를 이 사람이 한 짓보다 더 심하게 하는 자가 없을 지 또 어찌 알겠는가?
근년 이래로 지방 수령들이 틀림없이 다 한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응당 고쳐질 가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 감히 확실하게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 이 일을 계기로 신칙하는 바이니, 묘당(廟堂)에서 말을 만들어 사도(四都)와 팔도(八道)에 행회(行會)하여 각 해읍(該邑)에 즉시 반포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만약 이렇게 이 법을 무시하는 자에 대한 보고가 들어올 경우 공가(公家)에서 법대로 처리하는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길이 자기 집안을 보전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비록 여러 말을 하지 않더라도 모름지기 모두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 발급을 청하였는데, 총리 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이 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하였기 때문에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니 중간에서 해명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총리 아문에서 해명해 주려는 것과 예부에서 이자(移咨)한 것에 대해 모두 사의를 표해야 하겠으며, 사실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도 상세히 갖추어 말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답 자문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재자관(齎咨官)을 정하여 며칠 이내로 들여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부에 보내는 회답 자문에,
"우리나라에서 작년 겨울부터 흉악한 무리와 도둑의 부류들이 무리를 지어 결탁하고 몰래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마침내 체포해 보니 다른 나라 사람이 8명이나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느 곳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옷차림과 말하는 것은 동국(東國)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간사스러운 여자로 가장하고 자취를 숨기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설령 교리를 전파하고 익히게 하려고 하였다면 어찌 이렇게 비밀리에 하였겠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온 경우에는 모두 보호해주고 돌려보내 주지만, 공적인 증거 문건 없이 몰래 국경을 넘어온 자들의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원래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에 있으므로, 이에 나란히 해당 법률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부당하게 법을 위반하면서, 그릇된 일을 선동하여 그 나라 백성과 그 나라가 피해를 입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반드시 남김없이 모두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그에 대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변경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금법을 엄격히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모두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넓고 큰 바다로 막혀 있어 서계(書契)를 서로 통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오래 전부터 원망을 가진 일이 있거나 혐의스러운 일이 있다고 온전히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차마 이와 같이 사형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이번에 프랑스에서 주장한 말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혀 연락을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여러 대인들이 화해를 시켜주는 혜택을 입었고 깊이 생각하여 만전을 기하는 계책까지 가르쳐 주었으니, 이는 진실로 일반 규례를 벗어나 잘 돌봐주고 도와주려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생각입니다.
앞으로 사행(使行) 때 그 정성에 사례하기를 기다리면서 이에 먼저 자세히 갖추어 회답합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임면수(林冕洙)가 써버린 공화(公貨)의 금전과 무명을 이미 모두 거두어 들였으므로 해조(該曹)로 하여금 원 장부에 다시 채워 넣도록 하였다.’고 아뢰었다.

 

김학성(金學性)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겨우 회답 자문에 관한 일을 계품(啓稟)하여 윤허가 내렸습니다. 다만 그러나 생각하건대 프랑스인이 우리나라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서 저들이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법률을 적용한 것이 또한 프랑스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함께 거론하여 위협하는 것입니까?
또 이 일이 초봄에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몇 만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서로 통하는 것이 이처럼 신속하니, 틀림없이 법망에서 빠져나가 소굴을 잃어버린 나쁜 무리들이 그들과 화응하고 부추겨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변경의 방어가 허술하고 법령이 해이할 데에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이른바 사학(邪學)을 믿는 불순한 무리를 서울에서는 두 포도청(捕盜廳)이, 지방에서는 각 진영(鎭營)이 각별히 조사하여 붙잡아 일일이 법대로 처리하게 하소서. 비록 변방의 금령에 대하여 말하더라도 텅 비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각도(各道)의 도수신(道帥臣)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하여 연해의 각 고을과 진영에서 만약 배를 기다리는 거동이 수상한 자가 있으면 즉시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는 뜻으로 급히 공문을 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0일 병인

명천부(明川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이 내양(內洋)에 출몰하는 것만도 이미 놀랄 만한 일인데, 양서(兩西) 연안의 포구(浦口)에 제멋대로 왕래하는 것은 또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해방(海防)이 허술한 데 대해서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으나, 이러한 때에 단속하는 방도를 허술하고 느슨하게 해서는 더욱 안 되겠습니다.
연해의 각 고을과 진영에서 요망(瞭望)하고 파수(把守)하는 등의 일을 각별히 신칙하여, 혹시라도 안일함을 꾀해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해선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판국에 우리나라 사람이 화응하는 자가 없을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무릇 행동거지가 수상한 무리를 엄하게 기찰하고, 만약 현장에서 붙잡힌 자가 있으면 공초를 받은 뒤에 즉시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시키라는 뜻을 각 도수신(道帥臣)에게 똑같이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2일 무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서양 선박의 출몰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요망(瞭望)하고 방수(防守)하는 일을 소홀한 채로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도(諸道) 연해 고을의 파직하고 미처 차임하지 못한 수령 후임자를 도목정사(都目政事)019)  를 기다릴 것 없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특별히 가려서 차임하게 하여, 아직 하직하지 않은 수령 및 말미를 받아 상경한 수령과 함께 모두 당일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경기 수사(京畿水使) 서상직(徐相稷)이 ‘돛대 2개를 단 이양선(異樣船) 1척이 이 달 10일 영하(營下)의 교동부(喬桐府) 서쪽에 있는 두산리(頭山里) 앞바다를 지나가므로, 그 즉시 군관(軍官)을 데리고 가서 내막을 물어보니, 「영국(英國) 상인인데 물화(物貨)를 교역하기 위하여 지난달에 청국(淸國) 상해현(上海縣)을 떠나 이곳에 왔습니다. 앞으로 경강(京江)으로 가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금법이 지극히 엄하니 여기서 배를 돌리라고 말하자, 응낙하고는 그대로 물을 거슬러 배를 몰아 곧장 강화(江華) 쪽으로 향하는데,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어찌할 수 없었고 물어보려고 해도 겨를이 없었습니다. 신의 감영(監營)이 해문(海門)의 목구멍과 같은 요해처에 처해 있는데도 능히 방어하지 못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황공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의 등보(謄報)를 보니, ‘이양선(異樣船) 1척이 이달 10일 신시(申時)에 인화보(寅火堡)를 통과하여 11일 진시(辰時)에 월곶진(月串鎭)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영국(英國) 상인이라고 하면서 통상 교역을 요구하고 경성(京城)으로 가게 해주기를 요구하면서 또 길을 물었습니다. 내막을 물어볼 때에 말이 통하기 어려우니, 역관(譯官) 한 사람을 내려 보내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영국 사람이라 말하고 통상과 물화(物貨)의 교역을 요구하였다면 이는 해미(海美)에 정박해 있던 배가 방향을 돌려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이를 엄격히 막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일을 잘 아는 역관(譯官) 한 사람을 하직 인사를 생략하고 밤을 새워 내려 보내 그들을 효유(曉諭)하여 물리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7책 3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23면
【분류】외교-영국(英) / 교통-수운(水運)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경상좌도(慶尙左道) 조창(漕倉)의 조선(漕船)이 표류하다가 홍주(洪州) 원산진(元山鎭)의 효자도(孝子島)에 이르러 침몰하였는데, 배에 실은 쌀 1,067석(石) 5두(斗)는 수량에 맞게 내렸으며, 그 수량은 대조 인장(印章)이 찍힌 문서와 별로 어긋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밤을 무릅쓰고 경솔하게 나간 것은 이미 경계하고 조심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배가 암초에 걸리자 각자 자기 살 궁리만 하였으니, 만약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색리(色吏)와 사격(沙格)들에 대하여 다시 엄격히 조사하고 해당 율(律)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인 구산 첨사(龜山僉使) 장원태(張元泰), 원산 별장(元山別將) 서영수(徐榮修),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 최두익(崔斗益)에 대해서는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3일 기사

이흥민(李興敏)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세환(兪世煥)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고 있는 영국 상선에 가서 다시 내막을 물어보니, 지난번에 해미현(海美縣)을 통과해서 온 배와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상인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와 선주 젬스〔詹仕〕가 그 가운데에 있었으며, 그들은 오직 두 나라 간에 교역(交易)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바닷물이 얕기 때문에 승천보(昇天堡) 앞바다에 물러가 있으면서 몇 가지 바칠 물건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다시 닭, 생선, 과일, 채소 등속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마음대로 처리하기 곤란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서양배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히 해괴한 일입니다. 심지어 진헌(進獻)하는 물건의 종류는 일의 체모와 관계되는 만큼, 문정 역관(問情譯官)으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효유(曉諭)하게 하시고, 식량과 반찬 등속은 되도록 후하게 제급(除給)하여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안무(按撫)하는 뜻을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4일 경오

전교하기를,
"요사이 다른 나라 배들이 바다에 출몰(出沒)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듣건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화응하여 그 속에 들어간 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자기 조국을 버리고 무모하게 다른 나라의 배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하여 상정(常情)으로 헤아려본다면 결코 이런 이치가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요사이 감사나 수령(守令) 노릇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가혹한 정사를 실시하면서 포용하여 안정시키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낙담하여 망명한 무리들이 마침내 구차하게 살고자 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죄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모두 변방 방어가 허술한 것에서 초래된 것이다. 이에까지 말이 미치고 보니 참으로 몹시 한심하다. 특별히 잘 탐색하고 살펴 종적이 수상한 무리들이 연해의 여러 곳에서 왕래하며 머뭇거리는 것이 있으면, 나타나는 대로 뒤쫓아가서 체포하여 모두 효수(梟首)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며 다른 풍속을 철저히 막는 뜻을 보여 주어라.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신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용상(李容象)이, ‘방금 용강 현령(龍岡縣令) 유초환(兪初煥)이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이양선(異樣船) 6척이 본 현의 다미면(多美面) 주영포(珠英浦)에 와 있었는데, 그들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보니, 주영포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지난 7일 사시(巳時)에 중선(中船) 3척이 삼화(三和) 지역으로 내려갔고, 대선(大船) 1척은 방향을 돌려 평양 급수문(急水門) 쪽으로 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차 연안을 따라 동진(東津)까지 이르렀는데, 동진의 건너편 쪽은 바로 황주(黃州)의 경계입니다. 이곳은 강물이 매우 넓어 서로 떨어진 거리가 거의 10리나 되고, 또한 본 현의 범위에 속하는 지역도 아니어서 형세상 경계를 넘어가 직접 살피기도 곤란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에 익숙한 장수와 아전(衙前)들만을 시켜 탐색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서양 배에 있던 서양인들이 배에 오르라고 소리쳐 불렀으며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손을 들어 서로 인사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의 서양인은 우리나라 말을 매우 잘 알아들어서 먼저 통성명을 했지만, 그 말이 불분명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서양인이며, 저기 서 있는 사람은 북경인(北京人)이다. 이곳에 잠깐 정박하여 있다가 곧 평양(平壤)으로 가려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 7명이 무슨 일 때문에 당신네 나라 양반들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우리나라의 배 다수가 당신 나라 삼남(三南) 지역의 강으로 보내졌고, 우리들은 평양으로 가기로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물어보고 대답한 것은 이런 것들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서양배가 이미 급수문에까지 들어갔다고 하니, 살피고 탐지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 신태정(申泰鼎)한테 공문을 띄워 엄히 신칙하였으며, 또한 신의 군영에서도 영솔하는 군관(軍官) 박인환(朴麟煥)을 먼저 보내어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선 3척이 삼화 경내로 내려갔다고 하였으니, 응당 해당 부사가 일이 되어가는 경위를 보고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해당 부사 정지현(鄭志鉉)에게 공문으로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박승휘(朴承輝)가 올린 장계(狀啓)에, ‘황주 목사(黃州牧使)        정대식(丁大植)이 올린 보고를 보니,「황주목(黃州牧) 삼전방(三田坊) 밖에 있는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이양선(異樣船)이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8일 인시(寅時)쯤에 곧 이양선(異樣船)이 정박하고 있는 곳까지 가서 형리(刑吏)인 이기로(李耆魯)와 영리(營吏)인 신몽신(辛夢辰) 등으로 하여금 우선 지방관이 사정을 묻는 이유를 말하게 하였더니, 와서 만나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의 배 가까운 곳에 우리 배를 정박시켰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쪽 사람들 수십 명(名)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들 4명은 혹 기대어 앉거나 혹은 배의 고물에 앉은 후에 우리더러 함께 앉자고 하였습니다.
그 후 우리가 글로 써서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더니 서면으로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서양의 세 나라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앉은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호가스〔何噶特〕는 다같이 영국 사람이며, 프레스톤〔普來屯〕은 미국 사람이며, 뻬지〔巴使〕는 덴마크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거의 모두가 움푹 들어간 눈, 높이 솟은 콧마루, 파란 눈, 노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어, 확실히 서양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라는 사람은 중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팔행(李八行)이라는 사람한테 맡겼는데, 배 안의 일에 대해서는 그가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이른바 이팔행(李八行)과 조반량(趙半良)은 중국인들로서 영국인이 데려다가 자기 막료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나머지 24명(名)은 혹 태국인이거나 광동(廣東) 상해현(上海縣) 사람들로서 길안내를 하거나 품팔이를 하거나 뱃사람 일을 하거나 하였는데, 모두가 종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물으려고 하니, 『우리 배 안의 일과 관계되는 것이지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덴마크의 위치를 물어보니, 『서양에 있으며, 두 나라와의 거리는 1,500리이다. 세 나라 사람들은 다같이 장사를 하고 있으며, 이번 7월 1일 산동(山東)에서 출발하여 백령도(白翎島), 초도곶(椒島串), 석도(席島)를 거쳐 방향을 바꾸어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배가 모양은 전선(戰船) 같지만 실은 통상(通商)을 하려고 한다. 귀국(歸國)의 종이, 쌀, 금(金), 삼(蔘), 초피(貂皮) 등의 물품을 우리들이 가지고 온 양포(洋布), 기명(器皿)들과 바꾸면 서로 해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물품 교환이 일찍 끝나면 곧 평양에서부터 뱃머리를 돌리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비록 서울로 가더라도 통상한 뒤에야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묻기를, 『이미 평양에 가서 통상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그에 호응하여 교역을 하는 자가 있는가?』라고 하니,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먼바다에 와서 정박한다면 혹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은 남의 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들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부터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 전진해갈 수 없다.』라고 하였더니,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우리는 곧바로 가려고 한다. 만약 서풍을 만나면 바람을 따라 곧 떠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의 배에 함께 온 사람들이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다.』고 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자세히 말해줄 수 없으며, 또한 이는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랏일과 관계되는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배의 모양과 규격을 보면, 안은 하얗게 칠하고 밖은 검게 칠하였는데 그 위에 옻칠을 하듯이 기름을 발랐으며 위에는 흰 가루가 있었습니다. 사면을 판자로 만든 집이 두 칸 있었는데, 한 곳에는 관인(官人)들이 거주하고 한 곳은 종복들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판옥 벽면에 창문이 있었는데, 모두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두 개의 돛대는 모두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잘 다듬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하였으며, 배의 위에는 백양목의 네모진 깃발을 달아 세웠고, 돛은 흰 색의 올이 굵은 서양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좌우의 두 켠에 각각 대포(大砲) 1문씩을 설치하였으며, 하가(下架)와 목륜(木輪) 위에는 철통을 놓았는데 윗부분은 좁고 밑이 넓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시범적으로 쏘아보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요란한 천둥이 치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몹시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 밖에 또한 밤에 순찰할 때에 메는 장총이 3자루 있었는데, 총구멍 끝머리에 1척(尺)쯤 되는 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조총은 차고 다니는 자그마한 것과 메고 다니는 큼직한 것 등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환도(環刀)는 서양인 4명이 각각 한 자루씩 찼는데, 모두 번쩍번쩍 빛이 났습니다. 방안에는 책과 그림책, 금(琴)과 종(鍾), 고약(膏藥) 등 잡다한 물건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한 번 죽 훑어보아서는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복들이 거처하는 방을 보려고 하자, 예의상 가서 볼 필요가 없다고 하며 막고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배 밑에는 작은 배를 매어 놓았는데, 우리나라의 작은 고깃배 모양이었으며 푸른색이었습니다. 거기에 실은 물품들은 양목(洋木) 등 무역할 물품들이라고 말하였으나, 배 안은 보지 못하게 하여 물품을 실은 실태와 그 수량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에 갑자기 『청하건대 당신들이 사람을 보내서 우리에게 대미(大米), 우육(牛肉), 닭, 청채(菁菜), 시목(柴木) 등의 물품을 준다면 양포(洋布)로 답례하겠다.』라고 글로 써서 주었습니다. 만약 중국인이나 각 국의 사람들이 표류하다가 우리나라에 다다른 경우라면 으레 객관(客館)에 데려다 양식을 제공하겠지만 서양인들이 함부로 우리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들어온 것은 뜻밖의 일이라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이처럼 외진 마을에서 갑자기 그런 물품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고 또 순풍을 기다려서 곧장 출발한다는 것은 더욱 시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성안 얼굴빛을 드러내어 『집어 치우시오. 집어 치우시오. 당신들이 만약 주려는 생각만 있다면, 우리 배가 비록 간다고 해도 또한 당신네 나라 땅 가까운 곳이며 강을 따라 가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니 어찌 이곳이냐 저곳이냐에 구애를 받겠는가?』라고 하면서 문정(問情)을 하던 종잇장을 가져다가 접어 품속에 넣고는 이어 떠나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배에서 곧 마련해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더니, 화를 풀고 기뻐하면서 문정(問情)을 하던 종잇장을 꺼내주고는 다시 『물품을 보내주면 틀림없이 답례하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꼭 답례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하고, 대미 1석, 우육 30근, 계자 60알, 청채 20묶음, 시목 20단을 헤아려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배가 떠나기 전에 앞질러 돌아오기 어렵겠다 싶어 나루터 근처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서양인들의 이름, 연령, 거주지, 옷차림과 배의 크기, 여러 가지 기계들과 물건들에 대하여 다 적어서 문서로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배에 올라 문정할 때에는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글로 써서 보고하는 것이 날짜를 경과하게 되었으니 황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쳐온 신의 감영의 우후(虞候)        신영한(申永翰)이 보고한 것과 역학(譯學)        이용숙(李容肅)이 보내온 수본(手本)의 내용과 황주 목사(黃州牧使)의 보고는 한 마디도 틀림없이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황주 목사        정대식(丁大植)이 9일 신시(申時)에 올린 첩보(牒報)의 내용 중 「문정의 경위는 방금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이 요청한 쌀과 고기 등의 물품은 마련할 때에 약간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날 신시에 그들의 배가 평양으로 떠나갔습니다. 가는 뱃길에 일부러 수리(首吏)로 하여금 쌀과 고기 등 물품을 배에 싣고 그들이 정박해있는 곳까지 따라가게 하고 그들에게 물품을 제공하는 뜻을 신칙하여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동정을 탐지하고 살피려는 의도 때문이라 하더라도 고을에서 멋대로 처리하는 하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하다고 봅니다.
대체로 해당 황주목으로 말하면, 본래 해변에 있는 고을이 아닌데다 갑자기 보기 드문 일에 맞닥뜨리니 생소해서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은 혹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배가 이미 평안도(平安道) 지방을 향해갔다고 하니 필경 돌아올 때에는 황주 등 고을을 거쳐서 올 것입니다. 때문에 바다와 인접한 각 고을은 감시하고 방어하는 일을 각별히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워 엄히 신칙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의 이름과 연령, 용모, 복장, 거주지와 배의 크기, 여러 가지 기계들과 잡다한 물품들에 대해서는 해당 병사(兵使)가 보고한 데 따라 아래에 적어서 함께 치계(馳啓)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토마스는 나이가 36살, 키는 7척(尺) 5촌(寸),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칼은 노란 곱슬머리이고, 수염은 검다. 옷차림은 회색 모자를 썼고, 검은 색과 흰 색의 반점이 있는 융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은 색 가죽 신발(木靴)를 신었다. 허리에 혁대와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다. 그는 문직(文職)의 4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호가스는 나이가 37살, 키는 7척,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랗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다. 옷차림은 흰 서양 천으로 감싼 모자를 썼으며, 누런색의 견사(繭絲)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으며, 맨발에 등(藤) 줄기로 만든 신을 신었다. 혁대에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프레스톤은 나이가 48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란 곱슬머리였으며, 흰 수염이 길게 났다. 옷차림은 검은색의 모자를 썼고, 흰 빛의 서양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누런색의 견사로 만든 홑바지를 입고, 색실로 섞어 짜서 만든 신을 신었다.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 미국 사람이었다.
뻬지는 나이가 45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검불고, 수염과 머리칼은 노란 곱슬이었다. 옷차림은 검은색 비단으로 감싼 모자를 쓰고, 자주색 융으로 만든 저고리와 흰 무명으로 만든 홑바지를 입었다. 검은색 가죽신을 신고,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다. 그는 덴마크 사람이었다.
이팔행(李八行)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조반량(趙半良)의 나이는 28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키가 7척이었고,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는 땋아 올렸고, 수염은 없었다. 옷차림은 흰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검푸른 색의 삼승포(三升布)로 만든 신을 신었는데, 그들은 다같이 청나라 사람이었다.
24명의 이름과 나이에 대하여 물어보니 토마스가 하인으로 범칭하면서 자세히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머리칼과 수염은 모두 청나라 사람과 같은 모양이었다.
배의 모양은 길이가 18장(丈), 넓이가 5장, 높이가 3장이었고, 돛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높이가 15장, 하나는 높이가 13장이었으며, 굵기는 세 아름 정도 되었다. 두 개의 큰 돛은 흰색이었으며, 돛대의 밧줄에는 또 작은 돛 두 개를 얽어매었는데 역시 흰색이었고, 숙마(熟麻) 줄을 돛대와 돛 좌우에 각각 12줄씩 늘어뜨려 놓았다. 나머지 배에서 사용하는 잡다한 물건들에 대해서 모두 물어봤으나 저들이 글로 써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 잡다한 물품들과 기계들, 각 사람들의 소지품 외에도 배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으나 보여주지도 않았고 또 자세히 대답해 주지도 않았으므로 그 수량을 맞추어 보기는 어려웠다. 큰 배에 딸려 있는 작은 배는 길이가 3파(把), 넓이는 2파였으며 푸른 색으로 칠하였는데, 돛대와 돛은 없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신석희(申錫禧)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인설(李寅卨)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풍익(李豐翼)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세기(李世器)를 부사(副使)로, 엄세영(嚴世永)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기회(鄭基會)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서원순(徐元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순목(洪淳穆)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7월 16일 임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 등보(謄報)를 보니, ‘승천보(昇天堡)에 와서 정박하고 있는 영국 상선에 서울에서 내려온 역관(譯官)을 보내어 문정(問情)하게 했더니 그들은 통상(通商)의 한 가지 일만을 가지고 거듭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반사로 잘 효유(曉諭) 하였는데도, 아직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다시 잘 타일러서 꼭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영국 사람이 시종 간절히 요구하는 것은 교역하려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지만, 저들이 비록 통상하자고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는 그 나름대로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를 어떻게 갑자기 시행하도록 허가할 수 있겠습니까? 문정하는 것이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정박하고 있는 배는 현재 언제 떠나갈지 알 수 없으니 진실로 잘 타일러 주었다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문정관(問情官)을 해당 관청에서 특별히 뽑아 임명하고 하직인사를 생략하고 밤새워 내려 보내어, 엄중한 말과 친절한 마음으로 효유(曉諭)하기를 반복하여 꼭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8일 갑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보고한 바를 보니, ‘이양선(異樣船)의 사람들과 몰래 내통한 죄인 안춘득(安春得)·장치경(張致京)·이두성(李斗成)에 대하여 방금 일차 신문을 하였는데, 아직 끝까지 조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 강화부에서는 마감(磨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포도청(捕盜廳)에 압송해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양선(異樣船)의 사람들과 은밀히 내통하는 것은 이미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죄인데, 더구나 은밀히 내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끝내 우리나라의 근해에까지 끌어들였으니, 범한 죄를 따진다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즉시 합석시켜서 그의 도당들은 몇이나 되며 주모자가 누구인지 일일이 궁핵(窮覈)하여 등문(登聞)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용상(李容象)이,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이 보고한 내용 중 「이양선(異樣船) 1척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11일 술시(戌時) 쯤에 그들의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 가보니, 이미 본 평양부의 신장 포구(新場浦口)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밤이 깊었기 때문에 12일 진시(辰時)에 그곳에 달려가서 문정(問情)을 하니,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역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지방관이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가 말하기를, 『귀국은 무엇 때문에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지금 우리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종교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익히지 못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프랑스의 큰 배는 이미 수도에 갔는데, 우리 배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큰 배가 수도에 갔다고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언제쯤 철수해 갈 겁니까?』라고 하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황주(黃州)에서 얻은 식량과 찬거리로 겨우 며칠간 살았으니, 쌀과 고기, 계란(鷄卵)과 시목(柴木) 등을 도와주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 도리로서는 냉담하게 대할 수가 없어서 쌀과 고기 등의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2일 유시(酉時)에 그 나라 사람 6명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3일 인시(寅時)에는 배를 출발시켜 본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까지 다다랐는데 그대로 그곳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일의 경위에 대해서는 계속 탐지하여 치보(馳報)를 올리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20일 병자

김병주(金炳㴤)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귀하(趙龜夏)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대근(金大根)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7월 22일 무인

조봉하(趙鳳夏)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방금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큰 이양선(異樣船) 1척이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어제 유시(酉時) 쯤에는 그들 6명(鳴)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 중군(巡營中軍)은 그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갑자기 오더니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어갔고 중군을 그들의 배 안에 억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윤(庶尹)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날 사시(巳時) 쯤에 그들의 배가 또 출발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와 조총을 마구 쏘아댔으며 황강정(黃江亭) 앞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 5명은 작은 푸른빛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하여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온 성안의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이에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쯤에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의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가지고 돌아왔는데, 중군이 찼던 인장이 물에 떨어져 분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군이 잡혀갈 때 따라간 시종 유순원(兪淳遠)과 통인(通引) 박치영(朴致永)은 그들이 배에서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군이 자기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치를 끼친 데 대해서는 더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파출(罷黜)시키고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중군(中軍)이 그들 배에 붙잡혀가 곤욕을 당한 것은 그 잘못한 바를 논하여 마땅히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밖에 벌어져 미처 손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우직하고 지략이 부족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수치를 끼친 것은 크니, 그 벼슬에서 체차시키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양주태(梁柱台)를 차하(差下)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되, 조정에 사직하는 것은 그만두고 역마(驛馬)를 주어 밤을 새워 내려가게 하라.
퇴직 장교 박춘권이 앞장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배에 뛰어들어가 중군을 구출해서 돌아온 것으로 말하면, 그 공로가 가볍지 않으며 매우 가상(嘉尙)한 일이다. 그런 만큼 은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어서 특별히 상가(賞加)하니 오위장(五衛將)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 기묘

전교하기를,
"어제 평양 감영(平壤監營)의 퇴직 장교 박춘권(朴春權)의 일에 처분을 내리고서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다. 생사를 가리지 않고 위험 속에 뛰어든 것은 실로 충성과 용맹이 북받친 데서 나온 것인데, 어찌 단지 자급으로 표창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으로 임명하되 우선 자리가 나면 차송(差送)하도록 하라. 그리고 궐내에서 동개 1부(部)와 활 1장(張)을 주어 조정에서 표창하며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외국에서 온 상선(商船)이 갑자기 왔다가는 갑자기 달아나니 비록 사리에 닿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나, 강화부(江華府)의 문정(問情) 역관(譯官) 이응인(李應寅)이 누차 저들의 배에 들어간 것은 공로가 없지 않습니다. 해원(該院)에서 시상(施賞)하게 하소서. 그리고 의주(義州)의 통사(通事) 박삼흥(朴三興)과 김윤흠(金胤欽)은 자원하여 내려가서 그들의 배에 드나들면서 효유(曉諭)하여 그들의 속사정을 대략이나마 알게 하였으니 이것 역시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모두 상가(賞加)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4일 경진

전교하기를,
"《삼반예식(三班禮式)》 1,000건(件)을 지방은 팔도(八道)와 사도(四都),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읍(邑)과 진(鎭)에, 중앙은 대신 이하의 모든 관리들과 각 관청에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5일 신사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봉조하(奉朝賀), 종친(宗親), 의빈(儀賓), 종정경(宗正卿)들과 각신(閣臣), 유신(儒臣), 2품 이상의 관리들과 6조(六曹)의 장관(長官), 대사간(大司諫), 승사(承史)들에게 사찬(賜饌)하였다. 탄신(誕辰)이기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오위장(五衛將) 박춘권(朴春權)을 평안 병영(平安兵營)의 우후(虞候)로 제수하되 하직 인사를 그만두고 부임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평양 방수성(防水城)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는 통에 우리 사람 7인(人)이 피살되었고 부상자 또한 5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영(監營)과 평양부(平壤府)에 신칙하여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게 해서 곧 소멸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의리로써 좋은 뜻으로 타이르고 식량을 넉넉히 주어 그들을 도왔는데, 도리어 갈수록 더욱더 포악한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군(中軍)을 잡아다가 억류하였고, 나중에는 또 백성들에게 까지 상해를 입혔으니 어떻게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군사(軍事)와 관련된 모든 일은 도신(道臣)에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좋을 대로 처리하게 하여 모두 무찔려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조운선이 만경(萬頃)의 야미도(夜味島)에서 파손되었는데 쌀 827석(石)과 콩 10석은 이미 건져내어 지방관이 팔아서 상납하였습니다.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 대해서는 해부(該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게 하고, 호송하는 일을 맡았던 감색(監色)은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6일 임오

조채(趙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과 몰래 내통한 죄인 안춘득(安春得)은 강화영에 보내어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하고, 장치경(張致京)과 이두성(李斗成)은 엄히 형신(刑訊)한 뒤 방송(放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올린 보고를 보니, ‘해미현(海美縣)에 사는 조영인(趙永寅)은 어사(御使)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사칭하고 마패를 위조한 것에 대해 이미 자복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도신(道臣)에게 그를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7일 계미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이양선(異樣船)이 경내에 침입하였을 때 이미 방어를 잘하지 못하여 심지어 부장(副將)까지 잡혀가 억류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한 데다 끝에 가서는 서로 싸우고 죽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멀리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待罪)할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안도로 말하면 기자(箕子)의 옛 도읍지로써 《범금팔조(犯禁八條)》를 대대로 계승해오고 충성과 의리를 서로 권면하는 곳이라 조정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도보다 특별하게 대해 왔다.
이번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대동강(大洞江)에 몰래 침입하여 부장(副將)을 잡아다가 억류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못된 놈들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본래 피 흘리며 싸움할 것까지는 못되지만 대체로 그들이 죄악을 쌓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스스로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다.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기율(紀律)을 철저히 세워서 제때에 적들을 제압하여 이미 온전하게 공을 세웠고 군사들과 장교들, 아전(衙前)들과 백성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용감하게 나아가 적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였으니, 이는 충성심과 의분에 격동된 것이므로 그 기개와 의리가 아주 가상히 여길 만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에게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맡은 벼슬에 한번 더 연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감사(監司)와 중군(中軍), 서윤(庶尹)에게는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주는 특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전 중군 이현익(李玄益)에게는 이미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수고롭게 뛰어다니며 일한 공로가 없지 않으니 변지(邊地)에서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 외 교리(校吏)들에 대해서는 본 감영에서 후하게 시상하고, 공곡(公穀)도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감사는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패강에서 전사(戰死)한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후하게 시행하며, 도(道)에서 보이는 문무과(文武科)를 설행(設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9일 을유

김병필(金炳弼)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주청사(奏請使)가 특별히 먼저 보내온 장계를 보니 청나라에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이미 파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득림(趙得林)을 원접사(遠接使)로, 김학성(金學性)을 관반사(館伴使)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30일 병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전하를 뵈온 자리에서 일찍이 올바른 학문을 밝힐 것에 대하여 대체로 아뢴 바 있습니다. 올바른 학문은 나라에 원기(元氣)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원기가 충만하면, 온갖 간사한 것들이 틈을 타서 제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학문을 밝히는 근본은 전하께서 당면한 일을 민첩하게 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고 날로 새로워지는 덕을 크게 닦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습니다.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모두 바른 데서 나와 천리(天理)를 따르고 인욕(人欲)을 막는 데까지 이른다면 이것 역시 올바른 학문을 밝히고 원기를 배양하는 요체입니다. 안으로 정사를 잘 다스리고 밖으로 나쁜 것들을 물리치는 일은 진실로 높고 아득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겠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유교를 숭상하여 열조(列朝)가 서로 전수한 것은 분명히 계승할 만한 일입니다. 태학(太學)은 가장 모범이 되는 곳으로서 경서(經書)를 존중하고 유교를 보위하여 선성(先聖)들의 교훈을 익히니 선비들 가운데는 예의를 지키는 풍속이 많고 조정에는 빛나는 문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배우는 규율이 날마다 문란해지고 선비들의 취향이 예스럽지 못하여 태학(太學)이나 사학(四學)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경서(經書)에 관한 학문이 이 시대에 밝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순한 학설이 함부로 유행하는 것은 미상불 우리의 유학을 강론하지 않는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행실을 바르게 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시키십시오. 이와 함께 매달 과강(課講)을 시험하는 법을 다시 시행하고 엄하게 과정을 만들어서 1년 동안의 성적을 통틀어 계산하여 거수(居首)한 사람은 상을 주어 장려하고 거말(居末)한 사람은 벌을 주어 징계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솔선수범하여 선비들을 면려한다면, 반드시 큰 변화를 가져오는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태학(太學)과 4부 학당(四部學堂)에 특별히 신칙하여 옛 규례를 거듭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군사 방비가 해이해지고 해안 방어가 허술한 것은 요즘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외국의 상선과 양이(洋夷)들이 근해에 침입해 들어왔으나 막아내지 못한 이 문제는 이웃 나라에 알려지도록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연해에 고을을 설치하고 진영을 둔 것은 불우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목전에 무사한 것을 구차하게 다행으로 여기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니, 이 어찌 편안할 때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는 도리이겠습니까?
감시하고 방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번에 신칙한 바 있습니다. 군사 수가 모자라거나 빈 자리에는 일일이 다 보충해 놓도록 하며, 무기들이 녹슬었거나 무딘 것들은 있는 대로 다 수선하도록 하며 때때로 군사 훈련을 하여 늘 적과 맞설 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있는 전선(戰船)도 역시 폐기해둘 수 없는 만큼 날짜를 정하여 수리하여서 조금이라도 허술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리들의 근만(勤慢)을 고핵(考覈)하여 사실대로 장계로 보고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신칙한 후에도 그전과 같이 태만하는 현상들이 본부(本府)의 적간(摘奸)에 나타난다면 수령(守令)들과 변장(邊將)들은 응당 원 법령보다 갑절이나 더한 율(律)을 적용해야 할 것이며, 그들을 잘 신칙하지 못한 죄 역시 책임을 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 이러한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각 도의 도신과 수신에게 행회(行會)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포구(浦口)의 염부(鹽釜)와 어장(漁場)의 세금은 본래 균역청(均役廳)에서 관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모리배(謀利輩)들이 각 궁방(宮房)과 각 관청, 시골의 양반들과 토호들을 사주하여 새로 조세 명목을 만들고, 찾아다니며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전후에 걸쳐 이를 금지시키도록 여러 차례 신칙하였으나, 지방 고을들에서는 그저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강이 서 있는데 어찌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법령을 엄격히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해의 포구들이 있는 여러 고을들에 만약 균역청(均役廳)에서 알지 못하는 사사로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있다면, 모두 해읍(該邑)에 획부(劃付)하여 군수(軍需)에 보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뢴 법률을 명백히 게시한 다음, 만약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서울과 지방의 관리들을 부당하게 사주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적발하여 율을 시행한다는 내용으로 각 궁방과 관청에 봉감(捧甘)을 보내며, 또한 각 도의 도신들에게도 관문(關文)을 띄워 신칙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계(陳啓)한 것이 매우 좋다. 꼭 실효가 있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포백(布帛)이 훌륭하여 본디 다른 나라에서 구할 필요가 없으며, 이 밖에 완호(玩好)하는 물건은 나라의 재산을 축내고 백성들의 마음을 해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서양 물품들이 온 나라에 거의 다 퍼지고 있으니, 이미 식견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고 한탄합니다. 외국의 상선들이 와서 무역하자고 청하는 것은 미상불 자기들이 좋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선 역서(曆書)를 비롯한 일체 서양 물건들은 철저히 단속할 것이며, 삼강(三江) 주변을 수색하여 검열한 뒤에도 만약 법을 위반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즉시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에게 경계시키겠다는 내용으로 알려서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다. 각별히 철저하게 금지시킬 것이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봄 사이에 불순한 학문을 하는 자들을 처결한 사건은 엄하게 징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법망에서 빠져나가 저들의 소굴로 도망쳐 간 자들이 꼭 없다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양이(洋夷)들이 제멋대로 위협하며 날뛰는 것은 오직 이러한 무리들이 성색(聲色)으로 은밀히 내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세(事勢)를 보면, 더욱 엄격히 조사하여 체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우 포장(左右捕將)에게 특별히 신칙하여 샅샅이 다 수색하고 끝까지 다스려 남김없이 소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까지도 각자가 경계하고 조심하여 끝까지 적발함으로써 꼭 소탕해 버리고야 말게 할 것입니다.
슬프게도 불쌍하고 어리석은 저 백성들이 미혹되어 그것에 깊숙이 빠져 들어간 것은 사실 그들의 상정(常情)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역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척사 윤음(斥邪綸音)을 문임(文任)에게 지어 올리도록 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함으로써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성과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使臣)이 온다는 기별은 이미 나왔는데, 연로(沿路)에서 영송(迎送)하기 위한 준비를 어떻게 거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銀)을 예물로 줄 때에는 그들이 언제나 퇴짜를 놓으며 힐난하는 폐단이 있었으니 수치를 당함이 모욕을 당하니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심지어 객관(客館)을 세심하게 잘 정돈하고 접대와 공급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일의 체모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런 내용을 경기(京畿)·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 세 도에 특별히 신칙하고 일일이 대조 검열하게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나라를 놓고 말하더라도 사성(使星)이 내왕하거나 차원(差員)을 맞이하는 일에서 쓸데없이 비용을 낭비하는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는 그것을 빙자하여 턱없이 내려보내고, 여러 역참(驛站)들에서는 많은 수량으로 대접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폐를 끼치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백성들을 해치고 말게 됩니다. 각 해당 도신들에게 일에 따라 잘 살펴서 한결같이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위주로 삼도록 똑같이 분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즘 명성과 공적이 공이 있는 음당(蔭堂)들에게 품계를 올려준 것은 처음에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조(銓曹)에서 그들을 등용함에 보잘것없는 고을의 빈자리에 관리로 임명하여 채워 넣은 것에 불과하였으니, 권면하고 장려하는 뜻과는 매우 어긋납니다. 참판(參判)이나 승지(承旨)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 있사오니, 이번에도 역시 구애됨 없이 시험 삼아 등용하심이 좋을 듯 하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신사(知申使)는 으레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겸임하는 만큼 지제교(知製敎)도 원래 겸임해야 하건만, 듣건대 이조(吏曹)에서는 고신(告身)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규례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니, 삼자함(三字銜)은 규례에 따라 겸임시킨다는 내용으로 이조와 승정원(承政院)에 분부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음관(蔭官)인 승지(承旨)나 무관(武官)인 승지나 다같이 엄격히 선발한 것인데, 음관은 좌이(佐貳)로 직접 추천할 수 있으나 무관은 그렇지 못하니 서로 같지 않음이 매우 큽니다. 무관 승지로서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지낸 사람은 해당한 품계가 병조 좌이(兵曹佐貳)와 같으며, 품계를 올려주는 경우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나 우윤(右尹)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직접 추천하는 데 구애되지 않도록 하되, 이조나 병조의 장관이 아닌 경우에는 마음대로 추천할 수 없다는 내용을 알려서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기가 찬 경우에 후임 관리를 임명해 보내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7품 이하의 관리로서 전최(殿最)에서 ‘중(中)’을 맞은 자는 전 10달 동안의 출근 일수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7품관인 찰방(察訪)에 대해서도 역시 이 규례를 적용하니 임기가 비록 찼다고 하더라도 후임 관리를 임명해 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이전부터 전해오는 규례라고 하지만 치밀한 정사는 아닌 듯합니다. 이후부터는 찰방(察訪)으로서 전최(殿最)에서 중(中)을 맞은 사람이라도 임기가 차면 규례대로 후임 관리를 임명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매번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할 때,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과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임기가 찬 사람들 중에서 각각 한 사람씩 등급을 뛰어넘어 이조(吏曹)에 올려보내곤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네 관청의 말임(末任)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매번 빈 벼슬자리가 적은 관계로 일단 사과(司果)에 임명한 다음에는 다시 더 변통하여 처리해 줄 가망이 없게 되며, 끝내는 그 벼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미 본직(本職)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일했는데, 또 이렇게 빈 명함만 있는 자리에 부당하게 머물고 있는 것은 출근 일수를 계산하며 반열의 차례에 따라 등용하는 뜻과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조에서 미처 변통하여 처리하지 못한 것들은 병조에 도로 넘겨주어 한결같이 6품에 올려주는 규례를 따른 다음에, 먼저 차례를 따라 벼슬에 임명해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임(末任)에는 다시 등급을 뛰어넘어 올려보낼 수 없다는 내용으로 영원히 정식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참판(參判) 김익훈(金益勳)으로 말하면 기사년(1689) 변란 때에 가장 참혹하게 화를 당한 사람입니다. 숙종조(肅宗朝)에 성상이 하교하셨는데 그 대략에, ‘이미 원통하고 억울하게 되었거니와 또한 몹시 참혹하게 화를 입었다.’라고 하였으며, 경종조(景宗朝)에는 고 참찬(參贊) 김진상(金鎭商)이 올린 글에 대해 비답(批答)을 내리셨는데 그 대략에, ‘임술년(1682) 옥사(獄事)와 관련하여 일찍이 성상이 간곡하게 내린 하교를 들었다. 때문에 네 할아비의 충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선왕들이 전후하여 내린 은혜로운 윤음은 해와 별처럼 빛났습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이어 시호(諡號)를 주는 은전을 베푸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승지(承旨) 윤상열(尹相說)은 권부의 순진무구한 성품과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독실한 효행으로 오래 전부터 고향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선비들의 논의가 한결같이 일어나고 조정의 의론들도 모두 같으니, 작설(綽楔)과 정문(旌門)을 세우고 편액을 내려 표창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뜻을 전하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가, ‘이달 12일에 내린 큰비 인해 박천(博川)·정주(定州)·안주(安州) 등의 고을에서 485호(戶)의 민가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으며, 33명(名)의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위급한 일에 잘 대비해야 하거늘, 물에 빠져죽고 깔려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슬픈 마음만 가득하여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바야흐로 성난 물결이 범람하여 전답은 다 떨어져나가고 집들은 무너졌으며 이미 입에 풀칠조차 할 수도 없이 식량은 떨어진 데다, 또 몸을 가릴 것도 없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 나가겠는가?
영변 부사(寧邊府使) 박제인(朴齊寅)을 위유사(慰諭使)로 차하(差下)하여 각 고을들에 급히 가서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불러다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위로해 주어서 고향을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감영과 고을에서 도와주는 것 외에 경사(京司)에 바치는 것 중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상황의 경중을 헤아려 분등(分等)하여 구제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미처 보고하지 못한 여러 고을에 대해서도 적간(摘奸)을 기다려 똑같이 거행할 것이며, 집을 짓고 안정되게 살림을 꾸리게 한 다음 그 형편에 대하여 치계(馳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취선(吳取善)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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