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8권, 고종18년 1881년 8월

싸라리리 2025. 1. 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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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신

전교하기를,
"소유(疏儒)의 일로써 그 동안 신칙(申飭)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또다시 떼 지어 모여서 소유라 칭하는 것은, 이것이 어떠한 사습(士習)인가? 일이 매우 놀라우니,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 양사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고 교외로 쫓아내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본소는 바로 숙위(宿衛)를 통솔하는 곳이다. 사체(事體)가 자별하니 매양 전좌(殿座)와 동가(動駕) 때에는 도통사(都統使)가 군복 차림으로 별시위(別侍衛)하라. 또 행행할 때에는 경리청 당상(經理廳堂上)은 군복 차림에 검(劍)만 차고 주사(主事)와 부주사(副主事)는 군복을 갖추라."
하였다.

 

8월 2일 신유

경리사(經理事) 김홍집(金弘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후로 유생들이 상소하여 신을 성토하고 신을 무함한 것은 모두 신하로서 극악한 것이고 천하의 큰 치욕입니다. 다만 그 꼬투리를 잡으면 대개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황준헌(黃遵憲)의 글에 대한 일입니다. 대저 사명을 받든 자는 누구나 다 살펴 헤아리고 찾아 묻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초고로 만들어 준다면 다만 문구에 구애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헤아리고 관계되는 것이 긴요한가 긴요하지 않은가는 생각지 않고서 사사로이 물리치고 끝내 받아오지 않는 것이 과연 사명을 받든 자의 도리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은 바로 중국의 사신이고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또 하나는 이동인(李東仁)에 대한 일입니다. 아! 저 이동인은 본래 우리나라의 중으로서 변복(變服)하여 국경을 넘어갔으므로 국법에 비추면 즉시 잡아서 참형(斬刑)에 처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정신병을 앓아 성정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혹시라도 그를 불러들이고 몰래 따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다 살피신 것이고 온 조정에서도 역시 헤아렸을 것입니다.
곽기락(郭基洛)의 한 상소로 말하면 비단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그때는 병으로 지방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또 남보다 뒤에 들었습니다. 요즈음 경기(京畿) 유생이 몰래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신을 배척하여 억측을 부리고 의심하는 것은 더욱 심히 터무니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신을 논한 것이 한 도(道)였으나 지금은 여러 도에서 번갈아 공격하고, 지난번에는 신을 논한 것이 한 가지 일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거론하여 뭇 살촉이 모여들고 쇠뇌를 신속히 쏘아대니, 신의 마음이 위태롭고 두렵습니다. 오직 영원히 벼슬을 사퇴하고 시골에 물러가 은거해야 할 뿐이니, 그런 연후에야 뭇사람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 있고 여생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치욕을 당하면서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아가 지조를 거듭 잃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뜻밖에 당한 말은 인책할 것이 못 된다. 그리고 여러 번 신칙하였으니 즉시 올라와서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민태호(閔台鎬)를 총융사(總戎使)로, 조영하(趙寧夏)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8월 4일 계해

전(前)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근필(李根弼)을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동백(東伯)은 지금 이미 임기가 찼습니다. 이 도신은 참된 마음으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온 도가 힘입어 편안하므로 울연히 명성이 있습니다. 강원 감사 임한수(林翰洙)를 우선 잉임(仍任)하여 성과를 이룩하도록 책임지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원일(李源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8월 5일 갑자

이인명(李寅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부호군(副護軍) 김우휴(金羽休)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선정(先正)의 종계(宗系)는 사체(事體)가 특별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무릇 인가(人家)의 변례(變禮)가 있을 때에는 매양 종중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서 쉽게 문란한 폐단을 초래하곤 했는데, 지금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또 이렇게 상소하여 호소한 것은 종중의 의논이 일치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소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6일 을축

이근필(李根弼)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인장(印章) 조성(造成)할 때의 무위소 제조(武衛所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8월 7일 병인

통신사(通信使) 조병호(趙秉鎬)와 종사관(從事官) 이조연(李祖淵)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8월 8일 정묘

부호군(副護軍) 조병우(趙秉友)가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시골에 살면서 무단(武斷)하여 도신(道臣)이 그 죄를 감처(勘處)하기를 청하기까지 했는데, 상소하여 시폐를 논하였으니, 진실로 온당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승오(李承五)가, ‘방금 소근 첨사(所斤僉使) 맹희원(孟喜元)의 첩보(牒報)를 보니, 「이달 12일에 두 개의 돛을 단 이양선(異樣船) 2척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전라도(全羅道) 낙안군(樂安郡)의 대동선(大同船)의 곡식 몇 석(石)을 약탈해 가지고 갔습니다. 13일에 첨사가 해군(該郡)에 급히 가서 대동선이 옮겨 정박해 있는 가야항리(加也項里)에 해당 배의 곡물을 살펴보니, 남아 있는 것이 319석이고 약탈 당한 것이 82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배의 색리(色吏) 이좌영(李佐永), 선주(船主) 김대지(金大之), 사공 김순서(金順瑞) 등을 우선 해당 이임(里任)에게 보수(保授)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배모양이 어떠하고, 저 사람들의 생김새가 어떠한지를 애초에 지적하여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배의 색리와 사공 및 곁꾼〔格軍〕, 호송 감색(護送監色)을 모두 잡아와 엄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뜻으로 지방관인 태안 부사(泰安府使)에게 관문을 띄워 신칙하였습니다. 해당 부사 구석조(具奭祖)의 첩보(牒報) 내에, 「선주(船主)는 약탈당한 후로 놀라고 두려워 한 것이 병이 되어 한창 몹시 앓고 있다고 합니다. 색리와 호송 감관 등이 고한 바 내에 『해군의 대동미(大同米)를 싣고 올라오는 길에 이달 12일 소근진(所斤鎭)의 가야항(加也項)에 도착하니 뜻밖에 저들의 배가 서쪽으로부터 조선(漕船)이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하여 좌우로 포위하고, 이어서 조선을 저들 배 2척 사이에 몰아넣고 쇠밧줄로 단단히 결박하고는 거의 100명이 일제히 뛰어올라 총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미포(米包)를 약탈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형세상 서로 대적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본진의 호송선이 와서 구원하여 색리와 사공 등 9명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약탈당한 쌀이 82석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어느 나라 사람의 배인지는 비록 지적할 수는 없지만, 그 배의 모양을 살펴보면 이물과 고물이 조금 높아서 형태가 마치 가죽신 같은 것이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등지의 오랑캐 배와 비슷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설사 형세가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해당 배의 색리와 사공 및 곁꾼, 호송 감색 등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니 모두 엄하게 과치(科治)해야 합니다. 소근 첨사는 사체(事體)로 볼 때 완전히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신의 영(營)에서 엄히 곤(棍)을 쳐서 징계할 생각입니다. 세곡(稅穀)을 호송하여 운반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변란이 신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나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평상시에 신칙하지 못한 신도 역시 황공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대죄(待罪)합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8월 9일 무진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박영효(朴泳孝)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한규직(韓圭稷)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8월 10일 기사

특별히 이명응(李明應)을 발탁하여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으로 삼았다.

 

8월 11일 경오

전교하기를,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사손(嗣孫)이 지금 바른 대로 돌아갔으니, 유학(幼學) 김의주(金義柱)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영변(寧邊)·창성(昌城)·문경(聞慶)·예산(禮山)·제천(堤川) 등 고을의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 호환(虎患)을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15일 갑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세자(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이기혁(李基赫)을 한 임기 동안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8월 16일 을해

전교하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민겸호(閔謙鎬)와 총융사(總戎使) 민태호(閔台鎬)를 서로 바꾸라고 하라."
하였다.

 

8월 18일 정축

홍철주(洪澈周)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홍만식(洪萬植)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8월 19일 무인

민영목(閔泳穆)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근필(李根弼)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교복(李敎復)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풍천부(豐川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이유형은 서울에 올라와 머물러 있다가 본조(本曹)에 붙잡혔습니다. 그 곡절을 추문(推問)하니, 작년에 말미를 받아 서울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해읍(該邑)에서는 애당초 규례에 비추어 〖말미를 주었다고 아뢴 것이〗 없는데, 그가 방자하게 해를 넘기도록 놔두고 묻지 않았으니, 법과 기강으로 헤아려 볼 때 아주 놀랍습니다. 풍천 전 부사 유기동(柳冀東)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감(拿勘)하게 하고, 죄인 이유형은 원악도(遠惡島)에 종신토록 정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1일 경진

형조(刑曹)에서, ‘안성(安城)에 사는 정윤영(鄭胤永), 정산(定山)에 사는 배정로(裵鼎魯) 등이 경향(京鄕)에 출몰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죄는 너무나 몹시 통악합니다. 그러므로 본조에서 잡아다가 각각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후에 정윤영은 이원현(利原縣)에, 배정로는 위원군(渭原郡)에 모두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하여 압송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정기원(鄭岐源)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으며, 특별히 한규직(韓圭稷)을 발탁하여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8월 22일 신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추자도(楸子島)는 바로 좁은 땅에 불과하고 영암(靈巖)과 수영(水營)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백성도 드물고 물산도 적어 단지 어채(漁採)에만 의지하여 사는데도 원래 응해야 하는 요역(徭役) 외에 영읍(營邑)의 이교(吏校)들의 허다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해마다 증가하였으므로 이속(移屬)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또 이웃 섬에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부터는 특별히 제주목(濟州牧)에 붙여서 전적으로 관할하여 검찰하게 하라는 뜻으로 해당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의주부(義州府)의 관세청(管稅廳)은 최근에 더욱 심하게 쇠약해져 허다한 응하(應下)를 채워 갈 수 없으므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포삼(元包蔘) 외에 3,000근(斤)만 특별히 더 정하여 주어서 채워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3일 임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자리를 비워 두고 그대를 기다린 지가 지금 몇 년이 된다. 내 정성이 부족하고 예가 박하기 때문에 믿음을 주지 못하니 실로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그대는 어찌 내가 덕이 적다하여 드디어 초야에 영구히 있으려고 하는가? 아!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선비를 숭상하는 것은 비단 우리 왕가에서 전수해온 심법(心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 거짓을 그치게 하고 소요를 진정시키는 데에 급하고 절실한 일이기도 하다. 그대는 선정(先正)의 손자로서 스승과 벗의 연원(淵源)이 되고 사림(士林)이 의지하여 성대하게 유종(儒宗)이 된 지 오래되었다. 다만 자신만 선하게 하려 한다면 그뿐이지만, 만약 이 세상을 잘 다스려지게 하려고 한다면 어찌 자리를 비워놓고 목마른 듯이 기다리는 생각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요즈음 신선한 가을이 되어 강연(講筵)과 서연(書筵)이 장차 열릴 것이니, 모름지기 즉시 분명히 등대(登對)하여 훈도(薰陶)의 보탬과 보도(輔導)의 보람이 있게 한다면 어찌 단지 나 한 사람에게만 다행이 되겠는가?"
하였다.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어진 선비들을 초빙하여 보좌할 책임을 맡기고자 하는 것을 대저 어찌 잠시라도 마음속에서 잊겠는가? 여러 번 맞이하는 뜻을 도타이 하였으나 사양하기를 더욱더 절실히 하니, 이것이 내가 조정에서 탄식하고 또한 그대에게 유감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내 정성이 부족하고 덕이 박해서 멀리 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줄 알고 있지만, 세신(世臣)의 의리와 본분과 어진 이를 맞이하려는 희망을 생각지 않는가? 지금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이 눈앞의 급선무이고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지키는 요체는 바로 유학을 숭상하는 도(道)를 존중하는 것이다. 더구나 가을철이 이미 깊어서 강연(講筵)과 서연(書筵)을 장차 열 것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서 즉시 조정에 나와 보도(輔導)하고 훈적(訓迪)하는 방도에 대해 포부를 펼칠 것을 간절히 바란다."
하였다.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그대를 정초(旌招)하고부터 하루도 반드시 오게 하려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다. 전현(前賢)을 두루 손꼽아 볼때 또한 세상에 나와서 세상의 쓰임이 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참으로 백성에게 은택을 베푸는 방도가 본디 초야에 있을 때에 정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대의 집안은 세신(世臣)의 의리가 고상하여 벼슬하지 않는 자와 본래 차이가 있는데, 어찌하여 은둔을 굳이 지키고서 그 포부를 펼쳐 그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단정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말과 덕을 바로 세워 사도(斯道)를 부지하고 돕는 것을 눈앞의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또 가을이 되어 강연과 서연이 장차 열릴 것이니 그대는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며칠 안으로 조정에 나와서 이 목마른 듯이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경연관(經筵官) 이상수(李象秀)에게 하유하기를,
"널리 뛰어난 인재를 불러들여 초야에 어진 이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내가 밤낮으로 하는 한결같은 생각이며, 선비가 독서하고 궁리(窮理)하는 것은 장차 임금을 성군이 되게 하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반드시 불러오려는 것과 그대가 반드시 응해야 하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결정되었다. 그대는 숙유(宿儒)요 석학(碩學)으로서 초야에서 덕을 쌓았으니, 어찌 다만 그 뜻을 고상하게 하고 그 몸만을 착하게 하고 말려고 하는가? 또한 장차 그 포부로 내 광명한 공부와 태평한 정치를 크게 도울 것이니, 내가 그대를 부르고 그대가 내 뜻을 따르는 것은 더욱 매우 급한 것이다. 가을의 신선한 날씨가 벌써 깊어져서 강연과 서연이 장차 열릴 것이니, 그대는 멀리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서 속히 길에 올라 나를 계옥(啓沃)하고 보필하는 책무를 스스로 자신의 임무로 삼을 것을 간절히 바란다."
하였다.

 

무위소(武衛所)를 새로 세울 때의 감동 제조(監董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서당보(徐堂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상현(金尙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세재(李世宰)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8월 24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였다.

 

이재면(李載冕)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8월 25일 갑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사(京司)의 경비가 매우 군색한 것이 진실로 오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기내(畿內)의 여러 고을의 공세(貢稅)를 몇 해째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한 것은 비록 고을 형세와 백성들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만부득이해서 그러한 것이기는 하나, 상부(常賦)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이미 기한이 찬 고을은 올 가을부터 본색(本色)으로 내도록 요구하고 기한이 차지 않은 고을은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규례대로 수납하되 다시는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아직 기한이 차지 않은 고을도 일체 수납하라."
하였다.

 

임응준(任應準)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주영(李胄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8월 26일 을유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추알(秋謁)이었다.

 

8월 27일 병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교련 병대(敎鍊兵隊)를 친히 관찰하였다.

 

이범승(李範升)을 태인현(泰仁縣)에, 김병조(金炳祖)를 경주부(慶州府)에, 성문호(成文鎬)를 풍기군(豐基郡)에 정배하였다. 칠석제(七夕製)를 시취(試取)할 때에 시권(試券)을 이중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창호(李昌鎬)를 잡아다 감죄(勘罪)하고, 청주 영장(淸州營將) 박종병(朴宗秉)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들어 지방에 출사(出使)한 별선군관(別選軍官)을 가칭(假稱)이라 하여 서슴없이 악형(惡刑)을 가하였기 때문이다. 무위소(武衛所)에서 계품(啓稟)함으로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8월 29일 무자

명릉(明陵)과 예릉(睿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낸 다음 익릉(翼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전교하기를,
"거둥할 길은 이미 경계하였고 판엄(辦嚴)이 곧 있을 것인데, 시위(侍衛)가 종승(從陞)의 반열에 있는 자가 상소를 올리고서 지레 나가고 부표(付標)하여 병을 핑계대니, 분의(分義)와 도리로 볼 때 옳은가 옳지 않은가? 경리사(經理事) 이재원(李載元), 별운검(別雲劍) 이재면(李載冕), 도승지(都承旨) 이재완(李載完)을 모두 정원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수가(隨駕)하게 하라."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김성근(金聲根)은 희릉(禧陵)·효릉(孝陵)·소경원(昭慶園)으로 달려가고, 검교 직각(檢校直閣) 김흥규(金興圭)는 경릉(敬陵)·창릉(昌陵)·홍릉(弘陵)·순창원(順昌園)으로 달려가며, 대교(待敎) 민영소(閔泳韶)는 추모동 비각(追慕洞碑閣)으로 달려가고, 검교 대교(檢校待敎) 김영덕(金永悳)은 남관왕묘(南關王廟)로 달려가서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올해 이달에 능침에 공경히 전알(展謁)하고 옛일을 생각하니 슬프고 그리운 마음이 매우 절실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서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니, 명릉(明陵)의 능 위를 봉심(奉審)할 때에 여양 부원군의 자손은 들어와 참여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소견(召見)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계원(韓啓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홍종운(洪鍾雲),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순익(李淳翼)·윤태형(尹泰亨)이다.】  시급히 여쭐 일이 있다고 하면서 청대(請對)하였다.
안기영(安驥泳)·권정호(權鼎鎬)·채동술(蔡東述)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 형구(刑具)를 채워 잡아와 남간(南間)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8월 30일 기축

명릉(明陵)과 예릉(睿陵)에서 친히 제사 지낼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찬례(贊禮) 민영목(閔泳穆), 집례(執禮) 윤조영(尹祖榮), 대축(大祝) 김학수(金學洙),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창희(金昌熙)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교하기를,
"추국(推鞫)하되 위관(委官)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계원(韓啓源)으로 하라."
하였다.

 

이명응(李明應)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세재(李世宰)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심상목(沈相穆)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윤자덕(尹滋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 박정양(朴定陽), 조준영(趙準永), 강문형(姜文馨), 심상학(沈相學), 이헌영(李𨯶永), 엄세영(嚴世永)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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