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8권, 고종18년 1881년 11월

싸라리리 2025. 1. 17. 12:52
반응형

11월 1일 기축

서총대(瑞葱臺) 시사(試射) 때의 선기장(善騎將) 이규원(李奎遠)·원우상(元禹常)·이민고(李敏皐)에게는 모두 방어사(防禦使)의 이력을 허용해 주고, 초관(哨官) 민기영(閔箕泳)은 수령의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첫 번째로 의망(擬望)하여 들이며, 민준호(閔俊鎬), 정학순(鄭學淳), 이종겸(李鍾謙)은 모두 3품 관리의 이력을 허용해 주고, 교련관(敎鍊官) 김흥호(金興浩)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무위소(武衛所)에서 논상(論償)의 문제로 계품(啓稟)했기 때문이다.

 

11월 2일 경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전교하기를,
"내년 10월은 바로 우리 자성(慈聖)께서 관례를 치룬 지 60돌이 되는 때이니, 나 소자(小子)의 만수(萬壽)를 축하하는 마음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정월 초하룻날에 표리(表裏)를 직접 올리겠다. 봄철이 되면 곧 경사에 대한 기쁨을 표현해야 하겠기에 대궐 안에서 여러 차례 여쭈었으나 잔치를 크게 벌이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겸손하게 사양하시는 거룩한 뜻을 그대로 따라서 어김이 없어야 마땅하겠지만, 나 소자의 구구한 성의를 그만둘 수 없으니 진찬(進饌)하는 일을 다음해 가을을 기다려 설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이 동지(冬至)이므로 특별히 경들을 불러 의논하는 것이니,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자성 전하의 보령이 매우 많으셔서 내년이 바로 관례를 치른 지 60돌이 되니, 우리 왕조에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 전하의 끝없는 효성으로서 만수(萬壽)를 간절히 축하해야 마땅합니다. 정월 초하룻날에 경사로운 행사와 기쁜 마음을 크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실로 온 나라 백성들이 같은 심정입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자성 전하께서 관례를 치른 지 60돌이 되는 해가 내년인데 수고강녕(壽考康寧)하신 것은 전하의 효성 때문입니다. 정월 초하룻날 경사를 축하하고 내년 가을에 진찬하는 것은 실로 인정과 예절에 맞는 일이니, 경사를 기뻐하는 심정을 어떻게 형용하여 아뢰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실로 우리 왕실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내년이 바로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 전하께서 관례를 치른 지 60돌이 되는 해이니, 이것은 참으로 우리나라의 더없이 큰 경사이며 끝없는 복이다. 나 소자가 만수를 축하하는 정성에 어찌 한이 있겠는가? 정월 초하룻날에 표리와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직접 올리겠다. 경사를 알리는 일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례대로 마련하게 하라. 봄이 되면 경사를 축하하는 예식을 진행해서 부모의 장수를 기뻐하는 마음을 만 분의 일이라도 펴야 하겠기에 대궐 안에서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잔치를 크게 벌이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겸손하게 사양하는 뜻을 이해하고 응당 순종해야 하지만 자식의 구구한 정성에 또한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진찬 의절을 내년 가을로 물려서 마련하되 각 해당 관청에서는 미리 준비하라."
하였다.

 

11월 3일 신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최응(李最應)이 재차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답(批答)하였다. 이어 하유(下諭)하기를,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린 이후에 경이 성 안으로 속히 들어오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아직도 들어왔다는 소식이 없으니 매우 답답하다. 경의 상소에 대한 나의 비답에 내 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조금도 겉치레하는 형식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여러 날을 서로 버티면서 마치 심정과 언사에서 서로 믿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처럼 하는가? 이는 실로 평상시에 바라던 바가 아니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을 제쳐두고 지금은 경이 교외에 물러가 있을 때가 아니니,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마음을 안심시키라."
하였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재면(李載冕)이 상소하여 체직(遞職)시켜 줄 것을 청하니, 총융사(總戎使) 이경하(李景夏)로 대신하였다.

 

남행 선전관(南行宣傳官) 윤익선(尹翊善)에게 사제(賜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임진

전교하기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각사(各司)의 칭호와 기타 조목에 대하여 응당 변통해야 할 것이 있으니, 다시 절목(節目)을 만들어 들이라."
하였다.

 

이경우(李景宇)를 총융사(總戎使)로 삼았다.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의주(義州)에 급히 도착하여 공도(工徒)들을 더 뽑아 10명의 수를 다 채우고 지금 행장을 정돈해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려고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어지럽기 전에 제압해서 다스려야 하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전해야 한다.〔制治于未亂保邦于未危〕’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제왕들이 수성(守成)을 하는 대요(大要)입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사람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기미를 살피고 미연에 방지합니다. 이미 어지러워졌거나 위태로워졌으면 공력을 배로 들여도 일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형편이 크게 변하여 다른 지역의 딴 종족들이 각기 군사를 강화하고 배를 몰아 합종연횡(合從連橫)하면서 병력을 서로 겨루며, 법률로 서로 버티는 일이 세상에 가득 차서 육로와 해로로 점차 통하게 되니, 이것은 기미가 나타났을 뿐 아니라 형적이 이미 현저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아직도 문을 닫고 보지 않으며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누워 있으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것을 근심하시고 분발하여 일을 도모하셨습니다.
외적을 막으려면 반드시 먼저 군사를 훈련시켜야 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면 날카로운 무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도들을 널리 선발해서 멀리 천진(天津)에 보내되 자금과 식량이 드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방법을 얻기만을 바랐으니, 이것은 참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해 깊이 고심하여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럽혀지기 전에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고는 끝이 없고 재용은 계속 대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반드시 재용을 넉넉하게 하여 위급한 사태에 대처하였으므로 재용이 항상 부족하지 않았고 일도 잘못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재용이 바닥났지만 일은 그만둘 수 없으며, 공사(公私) 비용과 내탕금의 저축은 도처에서 비어있지만 거두어들일 방법이 없습니다. 민생은 날로 피폐해져 가는데 나라에서 무슨 일을 시행하려 해도 걸핏하면 장애가 생겨 절실한 효과는 못보고 힘만 들이는 폐단이 늘어납니다. 이에 지방에서는 뜬소문이 나오고 아래에서는 난이 일어날 싹이 생겨나니, 이것은 또한 형적이 이미 현저하고 기미가 보이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재물을 쓰는 방도는 부득이해서 쓰면 많이 쓴다 해도 원성이 없고,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쓰면 적게 쓰더라도 반드시 비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무익한 비용을 줄여서 다 유익한 비용으로 모두 돌리고, 급하지 않은 비용을 떼어서 당장 급한 일에만 쓴다면 일은 잘될 것이고 백성들의 비방은 사라질 것이며, 난의 싹을 막고 복록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니, 요점은 극기절용(克己節用)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적절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5일 계사

삼척부(三陟府)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 및 압사(壓死)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1월 6일 갑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상현(金尙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순익(李淳翼)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능상 위의 봉분을 개축하는 일을 감동(監董)한 노고 때문이다.

 

전(前) 지평(持平) 송상순(宋祥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삼가 들어보니 이번에 협박당해서 따랐던 잔당들로서 법망에서 빠져나간 자가 아직도 많으나 탐문해서 체포할 길이 없는데 일은 벌써 끝났다고 하니, 지극히 근심스럽고 분하여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루라도 도적을 풀어두면 몇 대(代)의 근심이 된다.〔一日縱賊數世之患〕’고 하였습니다. 아, 자기 스스로 죄를 지은 저 죄인들은 천지간에 용납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밖으로는 적의 땅으로 달아나고 안으로 비적(匪賊)들에게 붙지 않은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요즘 들으니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산골짜기들에 비적들이 많이 있어, 벌떼나 개미떼처럼 모여서 마을에 횡행하고 무기를 가지고 불을 지르며 상납하는 돈과 무명을 대낮에 빼앗으며 부유한 마을과 잘사는 집들에 격문(檄文)을 띄워 토색질하면서, 자칭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친다고 하고 역적을 가리켜 충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전(衙前)과 백성들은 태연히 보고도 근심하지 않고 수령들은 두려워서 감히 체포하지 못하여, 적들의 기세를 길러주어 드디어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자에서는 이 때문에 대낮에도 문을 닫고 도로는 거의 다 막혀 버렸습니다. 이전에는 화적(火賊)의 명칭을 가졌다 하더라도 좀도적 무리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대중없이 출몰하였지만, 지금은 벌써 험준한 곳을 근거지로 삼아서 어느덧 소굴을 만들어 놓고는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 틈을 타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난리를 선동하니 영남과 호남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비적들은 그래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이 다음부터는 틀림없이 번성해서 뻗어나갈 것인데, 어찌하여 뻗어가기 전에 처리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말한다면 예로부터 도적을 다스리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어진 사람을 뽑아 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삼반(三班) 가운데서 청렴하고 사무처리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영남, 호남의 감사와 수령으로 임명하여 편리한 대로 일하게 하되 먼저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도적을 다스리는 계책을 삼게 해야 합니다.
정공(正供)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일체 과도하게 거두는 것과 잡역을 부당하게 시키는 것, 고질화된 폐단들을 낱낱이 제거하여, 우선 백성들의 환심을 산 다음에야 죽을 힘을 다해서 협력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의 힘을 얻게 된다면 하찮은 도적들을 무엇 때문에 근심하겠습니까? 도적을 체포하는 방법을 말한다면 보오(保伍)를 단결시켜 이웃 마을을 지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집집마다 창과 총을 준비하고 마을에는 고루(鼓樓)를 준비해서 변고가 생기면 북을 쳐서 차례차례 전달하며, 가까운 이웃은 달려가 지원하고 먼 이웃은 망을 보며 혹은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가 적을 만나는 대로 잡아서 죽이면 될 것입니다. 또 많은 상(賞)을 내걸고 적을 찾아내되 도적 괴수를 목 벤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고 도적 무리를 목 벤 사람에게는 많고 적은 것에 따라 나누어 상을 줄 것입니다. 도적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거나 도적을 두려워하면서 체포하지 않아서 도적이 경내를 횡행하게 하여 백성들이 노략질당하는 데도 구원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감사(監司)와 병사(兵使), 수령(守令) 이하에게 중한 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또 수령으로서 관청을 비워두고 본가(本家)에 있는 자와 감사로서 함부로 휴가를 주는 자에게는 모두 중한 죄를 주어 일일이 직무를 소홀히 하지 못하게 하며 상과 벌을 확실히 주어서 법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사람치고 누구든지 상타기를 좋아하고 벌 받기를 두려워하는 법이니 다투어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한다면 비적들도 편히 지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잃고 이단으로 향하는 무리들과 법을 지키지 않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을 경우에는, 철저히 캐고 조사하여 반드시 그 소굴을 알아내고 뿌리를 들춰내서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준엄한 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폭의 윤음(綸音)을 내려서 천하의 대세를 환히 일깨워주고 군국(軍國)의 이해를 명확히 제시하여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여러 도(道)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여 완전히 감화되게 만든다면 비적들도 순한 백성이 되어 정사의 성과가 장차 무궁해질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현재의 폐단을 말한 것 중에서 취할 만한 것이 상당히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7일 을미

전교하기를,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다.】 ‘문형 회권과 관련하여 명령을 받고 나왔는데 다른 대신(大臣)들은 모두 명소패(命召牌)의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대신이 혼자서 권점을 치는 것은 구차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예전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사람이 없으니, 사체를 중히 여기는 도리에서 볼 때 거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런 전례가 많이 있으니 안심하고 권점을 치라." 하였다.


【원본】 22책 18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8면
【분류】인사-관리(管理)
‘문형 회권과 관련하여 명령을 받고 나왔는데 다른 대신(大臣)들은 모두 명소패(命召牌)의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대신이 혼자서 권점을 치는 것은 구차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예전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사람이 없으니, 사체를 중히 여기는 도리에서 볼 때 거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런 전례가 많이 있으니 안심하고 권점을 치라."
하였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이돈우(李敦宇), 김세호(金世鎬), 김상현(金尙鉉)이다.

 

함녕전(咸寧殿)에 화재가 났다.

 

궁성을 호위(扈衛)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궁성을 호위하는 무위소 제조(武衛所提調), 도통사(都統使) 이하와 병조 판서(兵曹判書), 각영(各營)의 장신(將臣), 좌우 포도대장(左右捕盜大將)을 틀별히 성기(省記)하여 입직(入直)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불을 끈 군병들에게 각각의 영(營)에서 건호궤(乾犒饋)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대궐 안에서 화재가 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화재에는 틀림없이 원인이 있을 것이니 철저히 신문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차비문(差備門) 근처의 하속들 가운데 신문할만한 자를 병조에 이송하여 엄하게 신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자내(自內)에서 조사한 뒤에 처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봉조하(奉朝賀)를 인견(引見)하였다. 화경(火警)에 봉위(奉慰)하였기 때문이다.

 

김상현(金尙鉉)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윤병정(尹秉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영수(金永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원회(李元會)를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1월 8일 병신

본관록(本館錄)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박제빈(朴齊斌), 오병문(吳炳文), 남규희(南奎熙), 윤상익(尹相翊), 김천수(金天洙), 정인흥(鄭寅興), 이중덕(李重德), 김복성(金復性), 유진규(兪鎭奎), 김정균(金定均), 임영상(林永相), 정하원(鄭夏源)이다.

 

영건소(營建所)에서, ‘지난 밤 화재가 났을 때 전당(殿堂)과 행각(行閣) 150칸이 다 타버렸습니다. 순찰을 잘 하지 못한 당일 당직 패장(牌將)과 수직 군사들을 모두 형조(刑曹)에 넘겨 엄하게 형벌을 가한 다음 정배를 보내소서. 신들도 신칙(申飭)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패장(牌將)은 모두 형조(刑曹)에 넘기되 황종우(黃鍾宇)는 엄한 형벌을 가한 후에 원배(遠配)하고 박영춘(朴永春)은 정배를 보내며, 그 밖의 수직 군사들은 다 곤을 쳐서 징계하고 풀어주라. 경들에게도 엄하게 추고하는 법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11월 9일 정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본 아문(衙門)의 각사(各司) 칭호와 조목들 중 응당 변통해야 할 것들을 절목(節目)으로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각사를 동문사(同文司), 군무사(軍務司), 통상사(通商司), 전선사(典選司), 율례사(律例司), 감공사(監工司)로 변경하여 계하(啓下)받았다.】


【원본】 22책 18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8면
【분류】사법-법제(法制)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 해도 저물어가고 그대의 덕을 연모하는 마음이 날로 심해지는데 사임하는 상소가 이때 이르렀다. 줄곧 멀리 떠나려고만 하는데 나의 말이 졸렬하고 예우가 부족해서 비록 그대로 하여금 물러가려는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게 하였으나 그대는 대대로 벼슬해 온 집안의 후손이며 노성한 학문을 지니고서도 그저 혼자만 아름다운 덕을 지키면서 임금과 백성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방도를 그대만이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에 근본을 두지 않았는가? 더구나 지금 세자의 서연(書筵)을 자주 열어서 그대가 등대(登對)하여 강론하기를 더욱 기대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런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 속히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11월 10일 무술

도통사(都統使) 이하 병조 판서(兵曹判書), 각 영(營)의 장신(將臣),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이 별입직(別入直)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요즘 화재가 있은 후에 시어소(時御所)의 숙위(宿衛)에 소홀한 점이 많으니, 특별히 더 경비하지 않을 수 없다. 도통사, 병조 판서와 각 영의 장신들이 윤번(輪番)으로 입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경자

허전(許傳)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으며, 특별히 신태관(申泰寬)을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東副承旨)로 삼았다.

 

11월 13일 신축

김병시(金炳始)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민겸호(閔謙鎬)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범조(鄭範朝)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정양(朴定陽), 조준영(趙準永), 엄세영(嚴世永)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심상학(沈相學), 홍영식(洪英植), 조병직(趙秉稷), 이헌영(李𨯶永), 민종묵(閔種默), 강문형(姜文馨)을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이인귀(李寅龜)를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소휘면(蘇輝冕)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장복추(張福樞)를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유중교(柳重敎)를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 김종선(金鍾善)을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삼았다. 이인귀(李寅龜) 이하는 경학(經學)으로 피천(被薦)된 사람들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재원(李載元)의 보고를 보니, ‘본영(本營) 지출 명목의 세입 중 삼세전(蔘稅錢)이 모두 무위소(武衛所)에 소속되어 마련할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삼남(三南) 각 고을에서 연례로 들어오는 포량목(砲糧木)을 등급을 매기어 돈으로 만들어서 대납(代納)하게 하되 매 필당 2냥씩으로 상정(詳定)하여 덜어내어 본목(本木)의 급대(給代) 비용으로 삼게 하고, 그 나머지를 가져다가 삼세전에서 마련하지 못한 수량에 보충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마다 급료 지출의 비용을 급대하지 않을 수 없으나 달리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으니 소관 포량목을 참작하여 돈으로 만들어 편의대로 끌어다 보충하는 것도 변통하는 방도에서 무방하니, 보고한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삼남의 감사(監司)들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5일 계묘

대신과 의정부(議政府), 경리사 당상(經理事堂上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동궁 저하께서는 타고난 슬기로운 자질로서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억만년 종묘사직(宗廟社稷)에 더없이 큰 경사이며 끝없는 행복입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받들고 경하하면서 반교(泮橋)를 둘러싸고 그 모습을 보고 들을 것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제 때에 아뢰지 못했으니 지극히 황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조(禮曹)로 하여금 선대 때 이미 행한 예식을 상고해서 길일을 택하고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즉시 품처(稟處)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내년 봄에 거행하되 날짜는 정월에 택일하여 들이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정월은 바로 세수(歲首)이자 길월(吉月)이니, 장차 관례(冠禮)를 거행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수령은 바로 백성들을 가까이하는 관리이므로 적임자를 얻으면 백성과 고을이 복을 받게 되고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백성과 고을이 폐해를 받습니다. 혹시 적임자를 얻은 경우에도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둔다면 도리어 적임자를 얻지 못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직임이 이처럼 가볍지 않기 때문에 선발을 매우 신중히 해야 하고,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이처럼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에 결원이 생기면 즉시 임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수령 자리가 세 자리 비게 되면 으레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실시할 것을 아뢰며, 일이 있어서 결원이 나면 그때마다 구전(口傳)을 청하여 임명을 지연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도목 정사에 임해서도 빈자리를 그대로 두고 시일을 끌면서 제때에 후임을 임명하지 않아서 고을일이 극도로 민망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정사를 열 때 빈 자리가 즉시 임명하게 함으로써 지체시키지 말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고을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수령을 오래도록 결원시킨 데서 대부분 연유하니, 이런 뜻으로 전조에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낭관(郎官)들이 대면하여 당직을 교체하는 것은 법으로 규정한 뜻이 있는데, 근래에 모든 것이 해이해지고 태만한 것이 습성이 되어 당직을 인계하는 자는 새벽에 나가고 당직을 교대하는 자는 저녁에 들어오므로 당일 날은 당직을 비워두게 됩니다. 편한 것만 추구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어서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소급하여 따질 필요가 없고 전해들은 말도 꼭 믿기는 어려우니, 우선 먼저 신칙하는 뜻에서 감결(甘結)을 받아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사의 낭관들이 이처럼 직무를 비우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듣기에도 매우 놀랍다. 우선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世子)의 관례(冠禮)를 내년 봄에 거행할 것이다. 대신(大臣)과 예조(禮曹) 당상은 역대 임금들이 이미 진행한 예식 절차를 자세히 상고하여 계품할 것이며, 날짜는 정월달의 길일(吉日)을 택하여 들이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예조(禮曹)의 당상(堂上官)을 데리고 와서 청대(請對)하니, 전교하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 이사(貳師), 빈객(賓客),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는 함께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오늘 세자궁(世子宮)의 입학에 관한 훌륭한 예식과 관례에 대한 성대한 절차에 대하여 바야흐로 날짜를 택하여 진행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억만년의 끝없는 경사입니다.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며 밤낮으로 크게 바라던 것이니, 기쁘고 경사스런 신들의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강로(姜㳣)가 아뢰기를,
"입학과 관례(冠禮)에 좋은 날을 택하였으니, 대소 신료들이 축하하므로 신들은 밖에서 소문을 듣고 송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입학과 관례에 좋은 날을 택하였으니 경축하는 심정을 형용하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좋은 날짜를 선택하여 이미 계하(啓下)받았으니 더욱 기쁩니다. 예식절차에 대하여 품정(稟定)할 문제가 많이 있어서 예조의 당상을 데리고 등대(登對)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겸호(閔謙鎬)가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가 입학하실 좋은 날을 방금 택하여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보니 위에 고유(告由)하고 아래에 공포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경모궁(景慕宮)에는 당일에 앞서 고하고 입학한 익일(翌日)에 교서(敎書)를 반포하며, 진하(陳賀)할 때는 대전(大殿)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왕대비전(王大妃殿), 중궁전(中宮殿)에 중앙과 지방에서 전문(箋文)을 바치도록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의 길일을 이제 벌써 택하여 들여보내서 윤허한다는 명이 내려왔는데, 삼가 예조의 《등록》을 상고해 보니 선대 때가 오래되어 의식 절차 가운데에 자세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묘조(顯廟朝) 때의 관례는 신묘년(1651) 8월에 거행하였고 숙묘조(肅廟祖) 때의 관례는 경술년(1670) 3월에 거행하였으며, 정묘조(正廟祖) 때의 관례는 신사년(1761) 3월에 거행하였고 익묘조(翼廟祖) 때의 관례는 기묘년(1819) 3월에 거행하였으니, 이번 왕세자의 관례 때의 의식 절차는 신묘년(1651), 경술년(1670), 신사년(1761), 기묘년(1819)에 이미 진행한 전례를 참고해서 마련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의 자(字)를 정하기 위한 길일(吉日)을 택해서 들여야 할 것입니다. 계하를 기다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議政府)의 동서벽(東西壁), 관각(館閣)의 당상(堂上官), 6조(六曹)의 참판(參判) 이상을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명소패(命召牌)로 불러다가 모여서 의논하여 결과를 들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 때에는 위에 고하고 아래에 공포하는 예가 있습니다.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경모궁(景慕宮)은 당일에 앞서 고유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에 문무(文武)의 백관(百官)들이 대전(大殿) 및 각전(各殿)에 진하(陳賀)하고 전문과 치사(致詞)를 올리며 표리(表裏)를 바치는 것을 전례대로 거행하며, 지방에도 전문과 토산물을 진상하도록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통지하소서. 왕세자가 당(堂)에 앉아서 진하를 받는 것도 역시 같은 날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입학과 관례의 길일을 정하였으니, 가례도 내년 봄에 거행해야 하므로 장차 금혼령을 내리겠다."
하니, 홍순목 등이 아뢰기를,
"좋은 경사가 이처럼 한꺼번에 겹쳤으니 참으로 우리 왕조에 드문 일입니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더없이 큰 경사는 바로 오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世子)의 가례를 내년 봄에 거행하겠다. 7살부터 11살까지에 해당하는 처자들의 혼인을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경범 죄수들을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복상(卜相)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 봉조하(奉朝賀) 강로(姜㳣),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계원(韓啓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최응(李最應)을 복상(卜相)하였다.

 

이최응(李最應)을 제배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삼았다.

 

민태호(閔台鎬)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조녕하(趙寧夏)를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으로, 윤자덕(尹滋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의 관례(冠禮)를 거행한 뒤에는 예문(禮文)에 근거하여 대전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왕대비전(王大妃殿), 중궁전을 찾아뵙는 예를 행해야 하는데 신묘년(1651), 경술년(1670), 신사년(1761)에는 모두 익일에 예를 거행하였고, 기묘년(1819)에는 당일에 예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해의 전례대로 거행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당일에 아울러 예를 거행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갑진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내 마음이 망연자실하였는데, 경이 다시 들어오니 내 마음이 매우 만족스럽다. 나의 마음이 바로 조정과 재야의 마음이다. 경이 늘그막에 몸조리하는 때에 한가한 것과 바쁜 것, 수고스러운 것과 편안한 것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찌 나의 마음이 조정과 재야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지금 백성의 일과 나라의 계책이 황급해서 수습할 수가 없으니, 더욱 형식적인 상소를 올려서 사직을 애써 청할 수 없는 시기이다. 경은 깊이 이해하고 즉시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이전부터 동궁(東宮)이 입학하기에 앞서 먼저 종묘(宗廟)에 전알(展謁)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왕세자(王世子)께서 입학하시기 전에 전례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종묘에 전알하는 날을 오는 정월 열흘 전으로 택일해서 들이고 세자의 전알도 일체 준비하라. 경모궁(景慕宮)의 전알도 역시 같은 날에 마련하라."
하였다.

 

11월 18일 병오

이재면(李載冕)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재상이 나라의 중임이라는 사실을 경의 상소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 임무가 매우 중하기 때문에 경에게 마음을 쏟고 경에게 의지하여 정승의 중책을 맡긴 것이니, 어찌 내가 경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실로 지위와 명망이 높고 업적이 많아서 나를 보좌하여 현재의 난국을 크게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니, 경이 이런 중책을 맡는 데에 반드시 나의 간곡한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금 백성과 나라의 일에 허다한 난관이 있어 마치 불과 물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같으니, 절대로 시일을 끌면서 서로 버틸 때가 아니다. 경은 빨리 올 것을 결정하고 즉시 명을 받들라."
하였다.

 

11월 19일 정미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에게 재차 유시(諭示)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본 아문(衙門)의 교린사(交隣司)를 동문사(同文司)로 개칭하였습니다. 이런 뜻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동래 왜관(東萊倭館)에 내려 보내어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0일 무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에게 별유(別諭)하기를,
"내가 기필코 그대를 오게 하려고 고심한 것은 이미 전후의 유시(諭示)와 비답에서 다 말했는데, 한갓 형식이 되고 말아서 굳은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스스로 돌이켜보면 한없이 부끄럽다. 그대는 그대의 집안사람으로서 학문은 연원이 있고 뜻은 세상을 경영하고 구제하는 데 있어, 사림에서는 모범으로 삼고 조야(朝野)에서는 기대한 것이 오래되었다. 비록 동강(東岡)을 고수(固守)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거(居)하지 않으려고 하나 은연중에 날로 드러나는 덕을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경연(經筵)의 직함은 바로 당대의 어진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이기에 내가 그대를 붙잡아 두려는 것은 잘 꾸며 좋은 볼거리로 삼고자 해서가 아니라 장차 세자(世子)를 보좌하고 가르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자의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학문이 날로 향상되어 입학하는 예식과 관례(冠禮)의 의식에 대하여 이미 명을 내렸으니, 그대는 반드시 선뜻 마음을 돌려 즉시 조정에 나와서 애타게 바라는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그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로부터 속마음을 털어 놓은 것이 또한 이미 여러 번이었는데 내가 그대를 오게 하려는 생각은 날로 더욱 간절해진다. 생각건대, 지금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며 백성에게 은택을 입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모름지기 경서에 힘쓰고 행실을 닦는 선비가 필요한데, 만약 적임자를 구하려면 산림에서 오래도록 학문을 쌓은 그대를 버려두고 누구를 쓰겠는가. 반드시 세상을 등지고 영영 물러가서 자신의 몸만을 깨끗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성명(聲明)의 밝고 융성한 정치를 세상에 펴고자 한다면 오로지 떠나가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서연(書筵)에 출입하여 세자를 훈도하고 보익하여 지혜와 공부를 날로 향상시키는 것을 어찌 그대에게 크게 바라지 않겠는가. 입학 의식과 관례는 이미 길일(吉日)을 정하였으니, 즉시 올라와서 자리를 비워두고 고대하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하유하기를,
"어진 사람을 구하고 준걸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이고 포부를 펴서 쓰임새가 있게 하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사람들이 행한 것이다. 그대는 독서로써 이치를 궁구하여 몸소 독실하게 행하였으니 마땅히 스스로 중임(重任)을 맡아야 할 것인데, 도리어 영영 시골에서 살기를 맹세하여 마치 은둔한 선비가 자신의 곧음만 보전하려는 것처럼 하고 나아가 세상에 쓰임이 되어 애타게 도움을 구하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 않고 있다. 비록 나의 정성이 부족하고 예가 박하여 믿음이 차지 않아서이겠지만 이것이 어찌 오래전부터 그대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세자의 입학과 관례는 이미 내년 정월로 길일을 정했다. 세자의 학문이 성취되고 예식이 성대히 진행되는 것은 그대가 조정에 나오는 데에 달렸다. 나의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 속히 길에 오르라."
하였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에게 하유하기를,
"부르는 예(禮)와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정성이 오히려 지극하지 않아서인가? 예로부터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조정에 나와 속에 쌓인 것을 펼치려 하지 않으니, 나는 그대에게 유감이 없을 수 없다. 수양을 쌓은 훌륭한 소문이 이미 하늘까지 들였으나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그대를 내 곁에 붙들어 두지 못하니 자나깨나 만나고 싶은 생각을 어찌 하루인들 마음속에서 잊었겠는가. 지금 동지(冬至)가 지나고 해가 길어지므로 경연과 서연을 자주 열고 있다. 또 더구나 세자의 입학과 관례를 차례대로 내년 정월에 행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선뜻 마음을 돌려 보좌하는 방도를 다하고 경사스런 의식을 함께 거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마음을 터놓고 타이르면서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노라."
하였다.

 

11월 21일 기유

전교하기를,
"행 호군(行護軍) 조희순(趙羲純)과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원회(李元會)를 경리 당상(經理堂上官)으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이어 경리 당상은 각사(各司)를 분장(分掌)하라고 명하였다. 【경리사(經理事) 이재면(李載冕)·조영하(趙寧夏), 부경리사(副經理事) 심상학(沈相學)은 동문사(同文司)를, 경리사(經理事) 이재원(李載元)·신정희(申正熙)·민영익(閔泳翊)·조희순(趙羲純)·이원회(李元會), 부경리사(副經理事) 홍영식(洪英植)은 군무사(軍務司)를, 경리사(經理事) 김보현(金輔鉉)·김홍집(金弘集), 부경리사(副經理事) 조병직(趙秉稷)·이헌영(李𨯶永)·민종묵(閔種默)은 통상사(通商司)를, 경리사(經理事) 김병덕(金炳德)·윤자덕(尹滋悳)·조준영(趙準永)은 전선사(典選司)를, 경리사(經理事) 심순택(沈舜澤)·엄세영(嚴世永)은 율례사(律例司)를, 경리사(經理事) 민태호(閔台鎬)·정범조(鄭範朝), 부경리사(副經理事) 강문형(姜文馨)은 감공사(監工司)를 맡았다.】


【원본】 22책 18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전교하기를,
"이번의 주전(鑄錢)은 감공사(監工司)에게 본소를 분설하여 주전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1월 22일 경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을 세 번째로 하유(下諭)하였다.

 

11월 24일 임자

대신(大臣), 정부 당상(政府堂上), 경리 당상(經理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예기(禮記)》에서 집 안을 바르게 하는 법을 말하기를, ‘집 안의 말을 집 밖에 내지 말며, 집 밖의 말을 집 안으로 들이지 말라.〔內言不出於外 外言不入於內〕’ 하였습니다. 비록 여항(閭巷)의 사대부(士大夫)의 집일지라도 조금의 법도와 기강이 있는 집안이라면 반드시 먼저 안팎의 분별을 엄하게 하여 난잡한 무리들로 하여금 감히 대문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삼청(三淸 : 해, 달 , 별)처럼 우러러보는 궁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궁금(宮禁)을 엄밀하게 하는 것은 열성조(列聖朝)가 서로 전해온 성법(成法)입니다. 궁금이 엄밀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안으로 말미암아 밖에 이르러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여 변화하게 하겠습니까? 근래 나인〔內人〕의 족속, 액례(掖隷), 군졸 및 잡다한 무리들이 한계를 두지 않고 거리낌 없이 대내(大內)와 가까운 곳을 드나들며 전파하지 않는 것이 없고, 견강부회하지 않는 것이 없어 원근에서 듣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니, 정말 매우 놀랍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병조(兵曹)에 특별히 신칙(申飭)하여 먼저 궁액에 소속된 자들부터 그들의 신표(信標)를 살펴 혹 행동 구역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시고 전하께서도 철저히 살펴보고 거듭 단속하시어 궁궐을 엄숙하게 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궁궐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에 있어서 원래 법률이 있는데 멋대로 하고 구애받지 않는다면 어디에 깊고 엄한 뜻이 있겠는가? 아뢴 대로 병조에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관청 재물을 맡아 지키는 것은 극히 엄한 규범이 있습니다. 횡령한 자나 횡령한 자를 숨겨주는 자에 대해서는 해당 법률이 있는데도 근래 법의 기강이 무너져 돌아보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장부상의 비축은 곳곳이 비어있고 응당 바쳐야 할 것으로 기한이 정해졌는데 매번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실로 횡령하는 구멍 속에 빠지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통분스러워집니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첫째도 도신(道臣)의 책임이고 둘째도 도신의 허물입니다. 한 도(道)를 살피는 지위에 있으면서 마땅히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텐데 숨은 것을 적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정사를 쓸모없는 물건처럼 내버려 두었으니, 이것이 어찌 걱정을 나누고 직무를 거행하는 지방관의 도리이겠습니까? 이후로 관하 수령 가운데 횡령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사적인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실상에 의거하여 보고하게 하며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법대로 다스려 죄에 따라 처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아전(衙前)들로 말한다면 횡령죄를 범한 자들이 많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그 관장(官長)인 사람들이 일체 내버려 두고 조사하여 밝혀내려고 하지 않으니 또한 무엇을 비호해 줄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까? 정말 개탄할 일입니다. 이런 뜻으로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철저하게 조사하며 법률에 근거하여 처리하고 조금일지라도 용서하지 않은 뒤에야 관청 창고의 자물쇠를 견고하게 할 수 있고 부정 행위를 징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령으로서 애초에 횡령한 자나 횡령한 자를 숨겨준 자에 대해서는 해당 법률이 있다. 직접 공화(公貨)를 횡령하는 죄를 범했는데도 도신이 창고를 실사(實査)해서 등문(登聞)하는 것은 형식적인 것에 그치니,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겠는가? 무엇을 꺼려 적발하지 못하고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가? 참으로 놀랍고 통탄스럽다. 아뢴 대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생각건대 지금 나라의 기강이 땅을 쓸어버린 듯 무너지고 백성들의 목숨이 위기에 직면하였건만 백 가지 근심만 있을 뿐 한 가지 믿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란해진 것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을 말한다면 도적을 잡는 정사가 그것입니다. 무릇 나라에서 포도청(捕盜廳)을 설치하고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도적을 잡기 위한 것입니다. 도적을 잡지 못한다면 도적들은 반드시 꺼릴 것이 없어 점점 많아질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나쁜 것을 없애고 철저하게 처리하는 정사를 장차 어느 곳에서 강구하겠습니까? 근래 들으니 안으로는 도성에서부터 밖으로는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무리를 짓고 당을 결성하여 공공연히 칼을 휘두르며 맹수처럼 포효하며 마구 약탈하여 부유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이나 다 같이 피해를 당한다고 합니다. 시장은 이 때문에 스산해지고 행상(行商)들과 나그네들은 이로 인해 길이 막힙니다. 지금과 같이 좀 안정된 때에 이와 같은 변괴가 일어난 것은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너무도 놀랍고 한탄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좌우포도대장(左右捕盜大將)에게 우선 월봉(越俸)하는 법률을 시행하고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방략(方略)을 행하여 기일 안에 체포하도록 해서 다시는 직무를 태만히 하는 죄를 범하지 말게 하며, 지방에는 이전의 조정명령에 근거하여 포군(砲軍)을 조발(調發)하여 기필코 소굴을 소멸하고 형편을 수시로 보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영장(營將)으로서 나약하여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장계를 올려 파직을 요청하게 하되, 이렇게 신칙한 뒤에 도신과 수신들이 만일 한결같이 태만하면서 시일을 지연시킨다면 중한 추궁을 면치 못한다는 뜻으로 삼현령(三懸鈴)으로 행회(行會)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중앙과 지방에서 힘을 다하는 장교, 군졸과 지적하여 보고하는 동민(洞民)들에게 모두 전례보다 더한 상을 주어 격려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을 것에 대해 일체 칙문을 반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중앙에서는 포도청에서, 지방에서는 각 도의 진영에서 만약 철저히 기찰하고 체포하였다면 요즘 도적 무리들이 노략질한다는 말이 어찌 이와 같이 많겠는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되 중앙과 지방에서 명화적(明火賊)들을 체포한 장교와 군졸들의 성명을 즉시 묘당(廟堂)에 보고하라는 뜻으로 일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유교를 숭상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정의 법이기 때문에 선비를 대우하는 방도는 더욱 특별합니다. 사림의 입장에서 만약 유교에 관계되어 그만 둘 수 없는 의리가 있다면 글을 올려 상소하는 것은 물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선비의 논의는 본래 신중해서 경솔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은 응당 조정에 달려 있는 것이고 선비들의 의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의리에 관계된다고 말하며 떼로 모여 호소함으로써 우러러 수응을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다만 기괴하고 패역스런 무리들이 그 속에 끼어들어 비용을 빙자하여 돈과 재물을 거두며 곤궁한 백성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서, 저리(邸吏)와 고을 아전(衙前)들이 조사하여 체포하는 일이 꼬리를 물어 놀라운 소문이 종종 들리고 선비들에게 수치를 끼치니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전의 조정 신칙이 준절하고 엄하였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팔도와 사도에 관문을 보내 다시 만약 이러한 재물을 거두는 폐단이 있다면 낱낱이 적발하여 즉시 형신(刑訊)을 가하고 귀양을 보내겠다고 하여 협잡질하는 풍속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신이 아뢴 것을 가지고 방리(坊里)에 게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부잡한 무리들이 상소를 올린다는 핑계로 각읍에서 재물을 거두는 것은 모두 속여서 재물을 거두려는 술수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각 도에 관문으로 신칙하여 철저히 금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 군문(軍門)을 보존하고 고치며 줄이고 늘리는 것은 대부분 때에 따라 적합하게 하는 데서 말미암는 것이지 애초에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지금 각 군영(軍營)을 합하여 두 군영으로 만들어 무기와 기계를 잘 수리하고 군졸을 훈련하는 것이 통솔자의 도라 할 수 있으니, 군무사 당상(軍務司堂上)은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의논하여 변통 절목(變通節目)을 마련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계축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왕세자빈(王世子嬪) 간택 단자(揀擇單子)를 봉입하는 날짜가 도성에서는 오늘이 기한입니다. 이미 입계(入啓)한 단자가 겨우 9장입니다. 사대부(士大夫) 집에 나이가 합당한 처자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데 봉입한 단자는 이처럼 적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듯 합니다. 한성부 당상(漢城府堂上官)을 먼저 추고(推考)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각부(各府)에서 추후(追後)로 단자(單子)를 계속 입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도성 안에서 처자의 단자를 거두는 데 대해 정해진 날짜가 이미 지났는데도 봉입한 단자가 10장도 되지 않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우선 추고하고 처자가 있으면서 단자를 바치지 않은 사람은 탐문하여 가장(家長)을 논죄하라. 각부 관리에게는 엄하게 신칙하여 낱낱이 단자를 봉입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갑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7일 을묘

떠돌며 구걸하는 백성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경리사(經理事) 민영익(閔泳翊), 부경리사(副經理事) 홍영식(洪英植)은 총무국(總務局)을, 경리사 신정희(申正熙)·조희순(趙羲純)은 참모국(參謀局)을, 경리사 이재원(李載元)·이원회(李元會)는 교련국(敎鍊局)을 맡으라고 명하였다. 통리기무아문군무사(統理機務衙門軍務司)의 분국(分局) 사무와 관련하여 해당 아문(衙門)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박제빈(朴齊斌), 오병문(吳炳文), 남규희(南奎熙), 윤상익(尹相翊), 김천수(金天洙), 정인흥(鄭寅興), 이중덕(李重德), 김복성(金復性), 유진규(兪鎭奎), 김정균(金定均), 임영상(林永相), 정하원(鄭夏源), 유치일(兪致一), 이준연(李晙淵), 김명기(金命基), 박형동(朴衡東), 유면호(柳冕鎬), 양상기(梁相器), 조남식(趙南軾), 정준교(丁浚敎), 이기동(李基東)이다.

 

11월 28일 병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처자의 단자(單子)를 거두는 일에 대해서 이미 신칙(申飭)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바친 것이 없다. 해당 당상(堂上官)과 낭관(郞官)이 각별하게 신칙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일의 사체로 논하자면 참으로 개탄스럽고, 처자가 있는 양반집으로 말하자면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이는 꺼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습관에서 나온 것이니 더욱더 놀라운 일이다. 한성부 당상(漢城府堂上官)은 다시 엄하게 신칙하여 며칠 안으로 일일이 단자를 바치게 하라."
하였다.

 

구완식(具完植)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1월 29일 정사

수신사(修信使) 조병호(趙秉鎬), 종사관(從事官) 이조연(李祖淵)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도성의 단자(單子)는 이미 다 바쳤다. 지방의 단자는 도착하는 대로 수시로 아뢰라.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날짜를 내년 정월 초순부터 그믐사이로 가려서 봉입하라. 처자들이 입궐할 때의 의복은 명주옷과 모시옷 정도를 넘지 않도록 일체 분부하라."
하였다.

 

11월 30일 무오

윤병정(尹秉鼎)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초망신(草莽臣) 송병선(宋秉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오래도록 선적(選籍)에 올라 있어 지난번에 진심을 호소했다가 도리어 과분한 비답(批答)을 입게 되어 신은 몹시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사임하겠다는 심정을 진술한 이외에 아직 일언반구도 성의를 표시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감히 여덟 가지 일을 조목별로 써서 진술합니다. 살펴보시고 혹시 사람이 하찮다고 해서 그 말을 버리지 않고 채용하신다면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거짓말을 그치게 하고 떠들썩한 것을 진정시키는 방도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첫째는, 성학(聖學)에 힘써서 심지(心志)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주자(朱子)가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큰 근본으로 삼았고, 또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천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했으니, 사리와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바르게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견문을 넓혀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막으며 다스림을 따르고 혼란을 버려야 하니,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둘째는, 언로(言路)를 열어서 과실을 듣는 것입니다. 명철한 임금은 언로를 여는 것을 가장 급선무로 여기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 우리 조종의 영조 대왕(英祖大王)은 성균관 유생 정유(鄭楺)의 상소에 대하여 화를 내시고서 불러들여 크게 책망하고 손수 상소의 원본을 찢어버리기까지 하셨으나 정유가 대항하여 말하며 굽히지 않자 영조께서 도리어 즉시 온유한 말로 칭찬한 일이 역사책에 빛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스승으로 삼고 모범으로 삼으소서.
셋째는, 세자(世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맏아들을 가르치는 절차는 세 가지가 있으니, 교훈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덕과 의리로 보좌하는 것이며 신체를 보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말로 가르치는 경우는 송사하게 되고 몸으로 가르치면 따른다.〔以言敎者訟以身敎者從〕’ 하였으니, 모든 것을 가르칠 때 전하께서 솔선수범하여 항상 보여주시는 것을 연익(燕翼)의 계책으로 삼으소서.
넷째는, 상과 벌을 미덥게 하여 기강을 세우는 것입니다. 주자가 기강을 논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공로와 죄를 조사하여 상과 벌을 공평하게 실시해야 한다.〔核功罪 以公賞罰之施〕’ 하였습니다. 요즘 한두 가지 사실로 말한다면, 장리(贓吏)들이 무거운 죄를 졌는데도 주륙하는 형벌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뒤를 이은 자들이 꼬리를 물고 거리낌 없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니, 형벌을 느슨하게 한 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잡기와 하찮은 공로로 함부로 고을의 수령으로 올려주기 때문에 틈을 엿보는 자들이 분수가 아닌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니, 이것은 상을 함부로 주는 데 잘못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먼저 전하의 마음부터 사사로운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린 다음에야 형벌이 잘못 나오지 않고 요행으로 상을 바라는 일이 없어져 기강이 절로 세워질 것입니다.
다섯째는, 검소한 덕을 밝혀서 재용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나라의 저축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매우 절박한 근심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씀씀이가 지나치게 사치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정의 숙종(肅宗)께서 물억새로 만든 발을 공주(公主)의 집에 하사하고, 정조(正祖)께서 종이조각으로 침전(寢殿)의 문을 발랐던 일은 사람들이 보고 들은 사실입니다. 지금은 각 관청의 저축을 다 써버려서 지방(支放)을 걸핏하면 수개월씩 주지 않아 군졸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큰 제향의 어공(御貢)도 간혹 기인(其人)들이 사사로이 거두어 들이는 것에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나라 경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대궐 안의 일을 전해들은 것에 의하면 진기하고 교묘한 서양 물건과 왜국(倭國) 물건들을 의복과 노리갯감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신은 우선 전하부터 검소한 덕을 밝히는데 힘써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배격하고 궁중을 거듭 단속하면 조정과 여항(閭巷)에는 명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듣건대 액속(掖屬)들이 세자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핑계로 사찰을 드나들고 혹은 사찰을 짓기도 하며 심지어는 중들이 연줄로 대고 제멋대로 관장(官長)을 위협 공갈하여 마을을 토색질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엄하게 금지시키소서.
여섯째는, 명기(名器)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관작(官爵)이라는 것은 덕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도구입니다. 잘 다스려진 세상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관직이 그의 덕에 걸맞고 등급을 뛰어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안정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30년 전의 정목(政目)을 기억하는데, 의금부 판서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 후보자를 갖추어 의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음관(蔭官)의 도정(都正)과 무관(武官)의 승지(承旨)는 겨우 두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지금은 높은 품계의 후보자가 10배가 넘는 정도가 아니니 어쩌면 그리도 많습니까? 또 듣건대 요즘 전조(銓曹)의 후보자 추천이 모두 임금의 특지(特旨)에서 나온다고 하니 권한을 위임하고서 성공을 요구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또 전조의 관리가 직책을 잘못 수행한 지가 오래됩니다. 공정에 가깝다고 하는 것도 단지 한 해 동안의 과거 합격자 수를 계산하여 당파들을 고르게 쓰는 것일 뿐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훌륭한 인재에 대해서는 생각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폐단의 근원을 깊이 통촉하시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찾아 철저히 고침으로써 명기가 저절로 중하게 되게 하소서. 또 무위소(武衛所)의 아전(衙前)들을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처럼 보고 은혜를 지나치게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각영(各營)의 군졸들은 요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더욱 원망하고 있으니, 이는 대성인(大聖人)의 삼무(三無)의 뜻이 아닙니다. 깊이 헤아려 주소서.
일곱째는, 공물(貢物)의 진상을 정지하여 일의 체모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사적으로 바치는 것은 공경치 못하며 임금이 사적으로 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당(唐) 나라 덕종(德宗) 때 진봉(進奉)이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결국은 봉천(奉天)의 난을 초래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궁궐에서 각도(各道)의 감영과 고을에 복정(卜定)하기 때문에 감사와 수령들이 관리들의 녹봉을 뜯어내어 뜻밖의 비용에 충당하고 있으니, 결국 백성들에게서 가렴주구하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이런 길을 끊어버리소서.
여덟째는, 왜국과의 화의를 배척해서 사교(邪敎)를 단절해야 합니다. 이웃 나라와의 교류는 나라의 큰일이지만 지금 말하는 이웃 나라란 바로 오랑캐일 뿐입니다. 우호를 맺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살피지 않는다면 한갓 스스로 어리석은 데 귀결되어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됩니다. 송(宋) 나라가 남쪽으로 쫓겨 간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으로 논한다면 서양 배가 겨우 끊어지자 왜국 사신이 갑자기 이르니, 이것은 그들이 저희들끼리 내통하여 얼굴만 서로 바꾼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왜국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서양과 단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듣건대 요즘 일종의 시무(時務)를 안다고 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 문제를 시대의 운수와 일의 추세로 귀착시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대개 ‘만국공보(萬國公報)’와 ‘황서(黃書)’ 등 신문지상의 글을 근거로 지금 시대의 상황을 지적하여 진술하기를 거의 이업(李鄴)의 장황한 글과 같으니 신은 괴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크게 분발하고 힘써서 예수교의 남은 무리들은 베어죽여 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아 굳은 뜻을 보이소서. 요즘 새로 설치한 기무아문(機務衙門)에서는 통상(通商)하는 말을 배우므로 나라 사람치고 놀라고 의혹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다시 살펴보시고 빨리 이런 명목을 폐지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번에 벼슬을 사양하는 글은 지난번 간곡히 부르기 전에 나온 것이니, 그동안에 이미 마음이 변하여 길을 떠났는지 몰라서 불안한 이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곱절이나 더 간절하다. 진술한 조목들을 여러 번 엄숙히 읽어 보았는데 정성스럽게 경계한 뜻이 문장에 가득 넘쳐나고 있다. 만약 경서와 역사를 두루 섭렵하여 충분히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들에게 고루 혜택을 입히는 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절절할 수 있겠는가. 내가 반드시 그대를 부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다급해진다.
현재의 병폐를 일일이 논한 것은 모두 다 걸맞는 처방이지만 이 가운데는 잘못 전해졌거나 사실이 아닌 민간의 말이 있다. 잘못 전해졌건 사실이 아니든 간에 바로잡아 돌이켜 구제할 방도는 오직 재야의 학덕이 높은 학자가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주선하여 물과 불 속에 든 사람을 급히 구원하듯이 도와주는 데 달려 있다. 그대는 깊이 살펴 다시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말고 즉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