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시(詩)에서 유학(幼學) 이민영(李敏英)·윤승필(尹承弼)·김진룡(金振龍)·임필벽(林必璧)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2월 3일 신유
시강원(侍講院)에서, ‘세자(世子)가 입학하여 강론할 책을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게 물어보니, 사(師)인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은, 「《소학(小學)》은 바로 《대학(大學)》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근본이 담겨 있는 책이기에 우리 열성조에서 언제나 이 책으로 서연(書筵)에서 먼저 강론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근자 정축년(1877)에 이미 시행한 전례대로 《소학》으로 정하는 것이 조종의 전통을 계승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하였습니다. 하였다. 부(傅)인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 좌빈객(左賓客) 김병덕(金炳德), 우빈객(右賓客) 조영하(趙寧夏), 좌부빈객(左副賓客) 민태호(閔台鎬), 우부빈객(右副賓客) 정범조(鄭範朝)의 의견도 역시 같았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소학》의 제사(題辭)로 하라."
하였다.
12월 4일 임술
전(前) 부교리(副校理) 이국응(李國應)이 상소를 올려 재물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무예를 연마하게 하는 등 여러 조목을 아뢰니, 비답(批答)하기를,
"진술한 것들은 자못 취할 만한 것이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2월 5일 계해
찬배 죄인(竄配罪人) 이희로(李僖魯)와 이태응(李泰應)을 모두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12월 7일 을축
이정로(李正魯)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경하(李景夏)를 무위 도통사(武衛都統使)로, 김병덕(金炳德)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12월 8일 병인
전교하기를,
"수성 찰방(輸城察訪) 이희영(李熙榮)은 공로를 세운 것이 많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조희겸(趙羲謙)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12월 9일 정묘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세 번 간택하여 빈(嬪)을 정한 뒤, 당일에 별궁(別宮)으로 나아갔습니다. 별궁을 어느 궁으로 정해야겠습니까? 하교를 기다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미리 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안국동(安國洞) 별궁(別宮)으로 하라."
하였다.
이재면(李載冕)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삼았다.
12월 10일 무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호준(李鎬俊)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12월 11일 기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의 죄수 정관민(鄭觀民)이 잡혀온 것은 국청(鞫廳)을 철파한 뒤였으니,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官)들이 개좌(開坐)하여 국안(鞫案)의 여러 조목으로써 엄하게 문목(問目)을 내어 공초를 받아들이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정관민에 대하여 전교와 국안(鞫案)의 여러 조목으로 반복하여 엄하게 신문하니 오로지 꾸며대기만 하면서 끝까지 버티니, 보통으로 신문해서는 자복받기가 어렵습니다.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정관민이 범한 죄의 경중은 유도석(柳道奭)을 천거한 사실이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유도석의 공초 내용에는 이미 실토한 것이 없으니, 다른 죄수들이 지적하여 진술한 말은 비록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참작할 점이 없겠는가? 수감된 정관민을 특별히 석방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아직도 이렇게 교외에서 머무르고 있으니 참으로 무엇 때문인가? 사람들이 더러 추국청(推鞫廳)과 관련된 일처리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말하지만 경과 같이 노성한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토록 지나치게 혐의를 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전날 돈유(敦諭)하여 부른 뒤로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니 섭섭한 나의 마음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더는 망설이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
하였다.
원찬 죄인(遠竄罪人) 이유원(李裕元)을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북청부(北靑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영위(閔泳緯)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기수(金綺秀)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서광정(徐光鼎)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으며, 특별히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구현(金九鉉)을 발탁하여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으로 삼았다.
12월 12일 경오
감제(柑製)를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김승균(金昇均), 진사(進士) 서상조(徐相祖)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할 자격을 받은 김승균(金昇均)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안치 죄인(安置罪人) 조장호(趙章鎬)를 특별히 방송하였다.
12월 13일 신미
의금부(義禁府)에서, ‘귀양 보낸 죄인 이유원(李裕元)을 석방시키라는 명이 내렸으나 대계(臺啓)가 한창이므로 거행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즉시 거행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새로 제수된 대간(臺諫)을 패초(牌招)하여 죄인 이유원에 대하여 정계(停啓)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이 상소를 올려 자인(自引)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어제의 유시에서 다 말하였는데 오늘 상소를 보게 되니 이는 너무 지나치다. 중임을 맡은 처지로서 어떻게 이와 같이 하는가? 경은 이 일로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 경에 대한 나의 배려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임신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 어윤중(魚允中)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했기 때문이다. 【이해 정월 중에 비명(祕命)으로 조준영(趙準永)·박정양(朴定陽)·엄세영(嚴世永)·강문형(姜文馨)·조병직(趙秉稷)·민종묵(閔種默)·이헌영(李𨯶永)·심상학(沈相學)·홍영식(洪英植)·어윤중(魚允中) 등이 전에 일본에 가서 시찰하였는데 명칭을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라고 하였기 때문에 국사(國史)에는 다만 ‘복명하였다.’라고만 기록되었다. 그들의 복명에는 각각 문견기(聞見記)를 올린 것이 있으나 번다하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원본】 22책 18권 6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일본(日本)
12월 15일 계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에게 재차 하유(下諭)하기를,
"비답(批答)으로 유시로 일렀으니 경은 응당 이해하였을 것인데 아직도 도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없으니, 매우 염려된다. 허다한 말은 모두 한편으로 제쳐두고라도 반드시 인혐할 필요가 없는 의리를 인혐하여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으니, 도리어 자중(自重)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믿는 것도 아니다. 어찌 경에게 섭섭하지 않겠는가? 경은 깊이 헤아리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
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2월 17일 을해
약원(藥院)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증세는 반점이 겉으로 나오는 증세가 현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때 진찰하고 탕제를 의논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들이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오늘부터 직소를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기고 청(廳)을 설치하여 의약청(議藥廳)이라 부르기로 하고, 의관과 진배(進排)하는 것을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경리사(經理事) 민영익(閔泳翊)을 별입직(別入直)하게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이 재차 상소하여 자인(自引)하니, 비답하기를,
"오래도록 서로 버티고 있는데, 이는 다 나의 말과 뜻이 미진해서 이니 스스로 돌이켜 볼 때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그러나 경의 입장에서 이처럼 제 갈 길만 가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 역시 어찌 비난받을 점이 없겠는가? 나는 여러 말을 하지 않겠으니 경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12월 19일 정축
전교하기를,
"복상(卜相)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 봉조하(奉朝賀) 강로(姜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을 복상(卜相)하였다.
전교하기를,
"가복(加卜)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을 소견(召見)하였다. 가복(加卜)으로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빈청(賓廳)에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 상호군(上護軍) 서당보(徐堂輔)를 가복(加卜)하였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이돈우(李敦宇), 김세호(金世鎬), 민태호(閔台鎬), 송근수(宋近洙)이다.
서당보(徐堂輔)를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배하고, 민태호(閔台鎬)를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간곡히 부른 이후로 날마다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으니, 잊지 못하는 나의 회포는 세월과 더불어 깊어만 간다. 이럴 즈음 올린 상소를 보니 내내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데, 풍부한 경학을 연마한 그대가 어찌 당세의 일을 생각지 않아 그러겠는가. 참으로 내가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즐기는 것이 형식적일 뿐, 실질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생각할 때 부끄럽고 한스러움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세자(世子)의 경사스런 예식이 차례로 가까이 다가오는데 이런 때 기필코 오게 하려는 마음이 어찌 다만 예식을 성대히 꾸미기 위해서일 뿐이겠는가. 그대는 기뻐하고 경축하는 심정으로 반드시 다시 교지가 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빠른 시일 안에 조정에 나와 나의 기다림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20일 무인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백성과 나랏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 가득하여 한량이 없을 정도이다. 그것을 다스리고 조치하는 방도는 오직 훌륭한 재상을 임명하여 임금을 돕고 정사를 돕게 하여 지금의 난국을 잘 타개하는 데 달려 있으니, 삼정승을 갖추는 일이 어찌 가장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이즈음에 여망(輿望)과 실질을 갖춘 자에 대한 지목이 반드시 경에게 쏠리는 것은 단정한 자질과 신중한 지조에다가 문학과 정사의 능력까지 겸비하였기에, 조정에 재직하는 신하들은 낱낱이 꼽아보아도 경과 짝할 만한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에 나의 정승 간택이 결정되었다. 나는 장차 경을 기다려서 경에게 맡기어 태평성대를 이루려고 하니 아무쪼록 사양하지 말고 즉시 명에 응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 관례(冠禮) 때 처음 방에서 나올 때의 복색은 아청색 직령(直領)에 조대(條帶)를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12월 21일 기묘
전교하기를,
"오늘이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다. 좌승지(左承旨)에게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에게 재차 하유(下諭)하였다.
12월 22일 경진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전교하기를,
"의약청(議藥廳)을 오늘부터 철파(撤罷)하고 본원(本院)에 퇴직(退直)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발진 증세가 빠르게 평상을 회복하시게 되니, 이는 실로 나라의 더 없이 큰 경사인지라 신하와 백성들이 뛸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진하(陳賀)하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으니, 즉시 택일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에게 세 번째로 하유(下諭)하였다.
우의정 서당보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臣)은 매우 변변치 못한 자질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명을 받들었기에 정신이 몽롱해져 마치 술에서 깨어난 듯 바보가 된 듯하였습니다. 낮에는 음식을 마주하고도 먹기를 잊고 밤에는 방안을 서성이며 잠들지 못합니다. 바로잡자는 논의가 직언을 맡은 자리에서 나오기를 바랐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황공하고 부끄러움 속에서도 침묵을 지킬 수 없어 감히 머리를 들고 호소합니다. 신이 듣건대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조정에 재직할 때의 본말(本末)로 말하자면 도움 될 만한 한 마디 말도 한 가지 업적도 없었으니 쓸모없는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젊었을 때도 그러하였으니 노쇠한 지금이야 뻔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발탁하여 삼정승의 반열에 두셨으니 전하께서 신을 알아보시는 데 미진한 점이 있다고는 신이 감히 말씀드릴 수 없겠으나, 이는 신을 너무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은총을 잘못 내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큰 은혜를 입은데 대한 감동이 실로 끝이 없지만 이어 근심되고 두려움이 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직은 다 갖출 필요가 없고 오직 적임자를 앉히는 것이 중요하다.〔官不必備 惟其人〕’ 하였으니 바로 삼공(三公)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른바 적임자란 경륜과 재능이 왕도를 논할 만하고 나라를 다스릴 만하여 임금의 일을 돕고 자연의 공능(功能)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곧 적임자가 아니며 적임자가 못 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차라리 벼슬자리를 비워두는 것만 못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롭다고 하겠습니다. 이번에 정승을 추천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데 신 같은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까. 신은 적임자가 못 됩니다. 경륜은 왕도를 논하기에 부족하니 치도(治道)가 낮아질 것이고, 재능은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니 모든 일이 흐트러질 것입니다. 어찌 몹시 두렵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현재 신의 병은 도저히 억지로 움직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신이 초가을 이후에 왼쪽 다리를 다쳤는데 절기가 바뀌면서 마침내 고질이 되어 다리를 절며 질질 끌면서 촌보(寸步)도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새로 명이 내린 데 대하여 한갓 은총을 탐할 줄만 알고 급히 달려가는 것이 공경스러운 것이라고 함부로 핑계 대면서 병든 몸을 끌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정승 자리를 차지하기를 마치 임무를 정말 수행할 수 있을 듯이 한다면, 조정에서 뛰면서 늙고 병들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한 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명(明) 나라 왕석작(王錫爵)이 병을 이유로 직임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말하기를, ‘만약 폐하께서 임어하시고 조정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계속 이전처럼 넘어지고 자빠져서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면 어찌 조정에 수치를 끼치고 벼슬을 더럽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이 바로 오늘의 신을 위해 준비한 말이라 할 것입니다. 재능이 부족하여 직무에 걸맞지 않고 병이 있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 신이 기필코 사임하는 사유입니다. 이는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지 조금도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간절한 뜻을 잘 살펴 속히 신에게 내린 의정의 직함을 거두시고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가려 임명해서 현재의 난국을 크게 구제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경의 경륜은 왕도를 논할 만하고 경의 재능은 나라를 다스릴 만하기 때문에 정승에 임명하여 팔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고 벼슬은 적임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일체 반대되는 말만 하면서 물러나려고 하니 그 말이 비록 겸손한 덕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자임하고 쉬운 일을 양보한다는 의리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건강이 실로 우려되지만 잘 보호하고 몸조리하면 자연히 곧 회복될 것이니 경은 깊이 생각하라."
하였다.
12월 23일 신사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어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병시(金炳始)를 소견(召見)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가례(嘉禮)에 필요한 비용을 묘당(廟堂)에서 본조(本曹)에 획급(劃給)한 전례가 이미 많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수효가 같지 않은 것은 바로 일의 형편에 따라 그런 것입니다. 들어갈 비용을 지금 바로 마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느 아문(衙門)의 돈을 막론하고 12만 냥 정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구획(區劃)하도록 하여 제때에 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약청(議藥廳)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이재완(李載完)과 별입직(別入直) 민영익(閔泳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호조 판서 김병시가 아뢴 것을 보니, 가례에 들 비용 12만 냥(兩)에 한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구획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혜청(宣惠廳)의 돈 9만 냥, 훈련원(訓練院),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3영(營)의 돈 각각 6,000냥, 병조(兵曹)의 돈 5,000냥, 총융청(摠戎廳)의 돈 4,000냥, 사복시(司僕寺)의 돈 3,000냥을 획송(劃送)하여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2월 24일 임오
특별히 김기수(金綺秀)를 발탁하여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으로 삼았다.
김영수(金永壽)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오익영(吳益泳)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김영수(金永壽)는 가망(加望)이다.
12월 25일 계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각영(各營)을 합하여 두 개 영으로 만드는 것을 전교에 따라 신들이 군무사 당상(軍務司堂上官)과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각 영의 군제 변통 절목(軍制變通節目)을 지금 이미 계하(啓下)하였다. 장신(將臣)은 모두 감하(減下)하고, 3영의 도제조(都提調), 호위대장(扈衛大將)도 감하하라."
하였다.
이경하(李景夏)를 무위 대장(武衛大將)으로, 신정희(申正熙)를 장어 대장(壯禦大將)으로 삼았다.
12월 26일 갑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조운(漕運)의 폐단을 바로 잡는 사목(事目)을 반포하여 시행하게 된 것은 실로 선주(船主)의 병폐를 구제해 주고 세납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폐단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여론에 의하면 도리어 그전대로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잡으려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얼음이 풀릴 때가 가까워져 곡물을 수송하는 일이 시급하니, 정비(情費)를 함부로 더 징수하는 문제와 조세 수납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은 속히 세곡 수납을 담당한 당상(堂上官)으로 하여금 적당한 방도를 강구하게 하여 확정해서 계품(啓稟)하거나 행회(行會)하게 하여 조목마다 바로잡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에게 네 번째로 하유(下諭)하였다.
전교하기를,
"무위영 제조(武衛營提調)와 그가 겸하고 있는 여러 직무는 이전대로 하고 대장(大將)의 예겸직(例兼職)은 도통사(都統使)의 사례대로 하며,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장어영 제조(壯禦營提調)를 관례로 겸임하는 것에 대하여 해조(該曹)를 시켜 하비(下批)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세 번째로 상소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2월 27일 을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중궁전(中宮殿)의 발진이 평상을 회복한 것과 관련하여 경사를 진하(陳賀)하고 이어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는데,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기(六氣)가 사람의 몸에 감흥 하는 즈음에 중궁전이 잠시 편찮다고 온갖 복이 모여들어 원기가 빨리 평상을 회복하였다. 궁중에는 기쁨이 넘치고 온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다 기뻐하고 있다.
생각건대 과인은 훌륭한 중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임금의 도리는 풍화(風化)의 근본이 되니, 《시경(詩經)》에서 노래한 후비의 덕과 같이 훌륭했고, 중궁의 다스림은 근검(勤儉)을 우선으로 하니 명주실을 나누어 뽑고, 오곡의 종자를 골라 바쳤다. 대비전을 잘 봉양하여 매일같이 문안드렸고 세자(世子)를 잘 길러 경사와 복을 가져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홍역이 깊숙한 중궁전에까지 미쳤는가. 조용히 조섭한 지 열흘이 못 되는 동안 끊임없이 병문안하였고, 함께 수직한 지 엿새 동안 적절한 처방으로 치료를 잘하였다. 어린 태자가 밤을 지새우며 문안하였고 백관들도 새벽같이 달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행하게도 하늘의 도움을 입어 어느덧 완쾌된 경사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옥같이 윤기가 나 상서롭다고 해도 될 만하더니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걷히듯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마치 신명이 도와주는 듯하여 상하가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현담(玄紞)에 빛을 더하니 건강이 약으로 다시 왕성해지고, 동관(彤管)이 더욱 빛나니 중궁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이에 종묘(宗廟)에 희생과 술을 올리고 대궐에서 온 나라에 교서를 내리노라. 은택이 널리 퍼지니 하늘과 땅의 살리는 덕이고, 만물이 밝게 소생하니 뇌수해괘(雷水解卦)의 풀리는 형상이다.
이달 27일 이른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雜犯)으로서 사형 죄 이하의 죄인은 모두 사면한다. 아, 중궁의 덕이 풍화의 기반이 되어 오복(五福)이 차례를 펴도다. 대개 한 나라가 인(仁)에 흥기하여 규문(閨門)과 향당(鄕黨)에 미루어 가 우리 백성들과 함께 일용(日用)하고 수복(壽福)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교서를 내리니 다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태호(閔台鎬)가 지었다.】
【원본】 22책 18권 6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규홍(金奎弘), 선교관(宣敎官) 이교하(李敎夏), 좌통례(左通禮) 권인성(權仁成), 우통례(右通禮) 이병고(李秉皐)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중궁전의 발진 증세가 평상을 회복하신 것은 실로 나라에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이미 종묘사직(宗廟社稷)에 고하였고 온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으니,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는 일도 응당 행할 일에 속합니다. 이번 경과(慶科)는 어떤 과거로 설행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별시(別試)로 마련하라."
하였다.
진하하려고 입시(入侍)하였을 때 우의정(右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앞에 나가서 문안하고 이어 사임할 것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지금 경을 보게 되니 참으로 나라를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이다. 건강은 저절로 회복될 것이니 아무쪼록 사양하지 말고 좋은 생각과 계책을 내어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고 과인을 보필하라."
하였다.
12월 28일 병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라 전 감사(全羅前監司) 심이택(沈履澤)의 보고를 보니, ‘군산창(群山倉)의 허류곡(虛留穀)이 4,809석(石)인데 날마다 엄하게 독촉하여 그동안 받아들인 것이 겨우 150석입니다. 몇 명의 조졸(漕卒)이 제대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한 번 체납 분을 거둬들인 뒤로 모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채주(債主)들이 미봉책으로 처리해 오던 빚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하여 도리어 포흠(逋欠)이 나고 말아 마침내 파산할 지경입니다. 지금 만약 규례대로 독촉하여 추징하게 되면 세곡은 다 받아들일 기약이 없고 창고는 소생할 가망이 없게 되니, 위의 채주와 사공 등이 납부할 것을 특별히 대납하게 하고 10년에 한하여 분납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특별히 4년에 한하여 돈으로 대신 분납하게 하되 매년 거두어들인 상황을 그때그때 치보(馳報)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9일 정해
무위영(武衛營)에서, ‘삼가 계하(啓下)한 절목(節目)에 의하여 본영(本營) 낭청(郞廳)을 1원(員)은 이전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전례대로 문신(文臣)으로 갖추어 의망(擬望)하여 군색 종사관(軍色從事官)이라 부르고 1원은 전처럼 음관(蔭官)으로 갖추어 의망하여 향색 종사관(餉色從事官)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전(前) 무위소 종사관(武衛所從事官), 선기 별장(善騎別將)과 금군 별장(禁軍別將), 전(前)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좌우 별장(左右別將)은 모두 감하(減下)하고, 본영의 중군(中軍)은 전에 포도대장(捕盜大將)이나 장어영 중군(壯禦營中軍)을 지낸 사람으로 갖추어 의망하고 좌별장(左別將)은 전에 선기 별장(善騎別將)이나 장어영 별장(壯禦營別將)을 지낸 사람으로 갖추어 의망하여 금군별장(禁軍別將)이라고 부르고 우별장(右別將)은 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서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사람으로 갖추어 의망하여 선기 별장(善騎別將)이라 부르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각 도의 금년 재결(災結) 8,779결을 특별히 준획(準劃)을 허락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태복시(太僕寺)에서, ‘각도(各道) 목장의 말이 5,034필(匹)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 통천(高宗統天)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18권 끝】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2월 (0) | 2025.01.18 |
---|---|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1월 (0) | 2025.01.18 |
고종실록18권, 고종18년 1881년 11월 (0) | 2025.01.17 |
고종실록18권, 고종18년 1881년 10월 (1) | 2025.01.17 |
고종실록18권, 고종18년 1881년 9월 (0) | 2025.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