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유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지난번에 무슨 일로 모임을 가진 기회에 봉조하 직함을 받은데 대해 이미 숙배(肅拜)하였고, 또 어전(御前)에서 유지를 내린 일이 있으므로 경이 석연히 마음을 다 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뒤미처 들으니, 관청에서 물러간 후에 곧바로 시골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미진한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지금 이때는 다른 때와는 다를 뿐 아니라 글을 지어 올리는 데 있어서도 사적인 일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은 모쪼록 이 점을 헤아리고 즉시 서울 집으로 돌아오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공사(公使)가 제물포(濟物浦)에 와서 정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반접관(伴接官)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공사는 인천(仁川) 관부(官府)에 숙소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반접관을 즉시 보내어 위문하는 동시에 현안 문제를 가지고 헤아려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대군주(大君主)’ 인장(印章), ‘대조선 대군주(大朝鮮大君主)’ 인장, ‘대조선국 대군주(大朝鮮國大君主)’ 인장을 조성(造成)하였다.
전교하기를,
"여러 번에 걸쳐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버티고 있다. 비록 정세(情勢)가 그렇다고는 하나 이것이 무슨 신하의 도리인가? 한 명의 중신으로 해서 조정의 명령이 폐지되거나 시행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체를 생각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좌참찬(左參贊) 조병창(趙秉昌)에게 우선 경기(京畿)의 연읍(沿邑)에 투비(投畀)하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7월 2일 병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응조(申應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은혜로운 제수의 명을 사양하였는데 특별히 성상의 윤허를 받으니 감격하여 우러르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추부(中樞府)의 직함에 대해서는 그대로 두었을 뿐 아니라 지니고 있는 제조(提調) 벼슬도 아직 해임시켜 주지 않으셨으니, 삼가 바라건대 모두 개차(改差)시켜 주소서.
지금은 오랑캐들이 곁에서 틈을 엿보고 있고 나라의 창고는 텅 비었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른바 ‘양술(洋術)’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청(淸)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명(明) 나라 말기에 심학(心學)이 성하자 양이(洋夷)가 들어왔다.’고 하였는데, ‘심학’이란 바로 선학(禪學)을 가리킨 것입니다. 선학(禪學)은 본래 오랑캐의 종교이므로 기맥이 서로 맞는 무리들끼리 감응하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명나라 말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이 지나왔는데 양설(洋說)이 성행한 것이 오늘처럼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 오랑캐인 왜(倭)가 양이로 변하였으니 왜놈도 양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와 우리 수도에 뒤섞여 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꾀여 함께 그 종교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교활하고도 지독하다 하겠습니다. 왜놈들은 3백년 이래로 영남(嶺南) 절반 지역의 곡식을 먹고 살아왔으며, 지금은 또 두 개의 군(郡)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군은 영남의 절반 지역과 비교해 보면 열배, 백배도 더 됩니다. 영남의 절반 지역이라면 단지 거기에서 나는 수량만 주면 되지만, 이 두 개의 군을 차지하면 삼남(三南) 지방과 서북(西北) 지방에서 나는 이득을 다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곳은 매우 중요한 요해처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더없이 큰 걱정거리인데 앞으로의 대책을 어떻게 취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자 저하는 자태가 하늘이 내린 듯하며 지식과 사고가 날로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예기(禮記)》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간사한 소리와 난잡한 여색으로 총명을 흐리지 못하게 하며 음탕한 음악과 사특한 예절이 마음에 범접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어려서부터 바른 말과 바른 일로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이 또한 먼 장래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힘쓰셔야 할 방도도 있습니다.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충성스러운 말을 다하게 하고,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돌보아 줌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며, 전형(銓衡)하는 관리를 잘 선발함으로써 관리 임용을 공정하게 하고, 하사하는 것을 절약함으로써 재정을 축적하며, 검소한 덕을 밝힘으로써 사치를 억제하고, 작록(爵祿)을 신중히 주게 함으로써 관직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한 세대의 정사가 훌륭히 이룩되면 전하께서는 높은 대궐에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계실 수 있을 것이며, 태평세월을 누리는 복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진달하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실낱같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을 뿐 정신과 기억력은 모두 없어져 말이 두서가 없고 글줄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거의 죽어가면서 드리는 말씀을 가엾게 여겨 받아들여 주신다면, 신은 설사 오늘 죽어서 땅 속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사임을 하고부터 나의 마음은 몹시 서운하고 허전하다. 방금 사직 상소를 보았는데 진달한 여러 조목들은 모두 현재 병폐의 정곡을 찌르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정수리에 침을 맞고 요령을 깨달은 것 이상이었으니, 마땅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겠다. 이후에도 좋은 의견과 훌륭한 계책이 있으면 제때에 올리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구구한 바람이다.
제조의 직함은 직무가 번잡한 것도 아니니 몸조리하는 데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그대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조병창(趙秉昌)을 안산군(安山郡)에 투비(投畀)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3일 정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행 호군(行護軍) 김홍집(金弘集)을 강수관(講修官)으로 차하(差下)하고, 전 군수(前郡守) 이조연(李祖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하여 사무를 헤아려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미국(美國) 배가 우리나라에 일이 있다 하여 제물포(濟物浦)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호(修好)의 우의(友誼)로 볼때 치사(致謝)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행 호군 김홍집이 부관(副官)으로서 현재 그곳에 있는 만큼 그더러 위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이 자인(自引)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어찌 다시 제기하는가? 지난번 연석에서 허심탄회하게 상하(上下)가 이미 품고 있는 생각을 다 털어놓아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뒤미처 들으니 곧바로 시골에 갔다 하므로 경의 마음에 아직도 채 풀리지 못한 것이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전날의 유지(諭旨)는 경에 대한 나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경은 어째서 나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고 또 이런 사직 하는 글로 그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가? 실로 경 때문에 개탄스럽다. 경은 이를 이해하고 즉시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대궐에서 다시 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7월 4일 무자
전교하기를,
"일본 공사(公使)가 다시 왔다. 이번은 전날과 다르다. 행 호군(行護軍) 조병호(趙秉浩)를 보내어 위로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반접관(伴接官)이 보고한 것을 보니, ‘일본 공사(公使)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매우 협소하니 장악원(掌樂院)에 며칠동안 군대를 머물게 하겠다는 뜻으로 누차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만, 공관(公館)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형편이 이와 같다면 군대를 풀어 보내기 전까지 우선 임시로 거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심이택(沈履澤)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승우(李勝宇)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에게 효헌(孝憲)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였다.
7월 5일 기축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수현(金壽鉉)을 빈전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官)으로 추가하여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조병호(趙秉浩)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조병창(趙秉昌)에게 투비(投畀)한 벌을 용서하고, 이어 전직(前職)에 잉임(仍任)하여 올라와서 숙배(肅拜)할 것을 엄하게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7월 7일 신묘
편전(便殿)에 나아가 일본 공사(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접견하였다.
7월 9일 계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使臣)이 내일 서울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우창(洪祐昌)이 경계에 나가 기다리다가 호위하여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반접관(伴接官) 윤성진(尹成鎭)은 실로 병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고 하니, 몸조리를 할 동안 강수관(講修官) 김홍집(金弘集)에게 반접하는 직임을 겸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설 때 행 호군(行護軍) 조준영(趙準永)을 영접관(迎接官)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조병창(趙秉昌)을 계판(啓板) 앞에 불러다가 문계(問啓)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곧이어 좌참찬 조병창에 대한 문계는 그만두고 숙배 단자를 봉입(奉入)하라고 명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조병창(趙秉昌)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관대하게 처리하여 목숨을 살려 주셨으므로 4년 동안 해도(海島)에서 피눈물로 죄과를 반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돌아오게 하라는 명을 갑자기 내리시고는 신에 대한 탄핵을 중지하게 하고 신의 죄를 죄안(罪案)에서 없애 주셨습니다. 지금은 또 좌참찬에 제수하는 전지를 내려주시니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만 같고, 신에게 나와서 숙배하라고 여러 번에 걸쳐 하교하셨으니, 신이 짐승이 아닌 이상 어찌 감격할 줄 모르겠습니까? 아! 신의 죄에 대해서는 신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신을 향리(鄕里)로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나간 일은 남김없이 환히 밝혀졌는데 이제 와서 어찌 다시 제기하여 이렇게 버티고 있는가?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즉시 숙배하라."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병창(趙秉昌)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심동신(沈東臣)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7월 10일 갑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의 서계(書啓)에 대해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침범하여 이 섬의 나무를 베는 것은 그 나라에서 금지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미 서계(書契)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찰사가 가서 그들이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 종전의 내용을 다시 신칙하여 이 폐단을 영원히 막아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서계를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1일 을미
영접관(迎接官)이, ‘중국 사신(使臣) 마건충(馬建忠)이 수원(隨員) 2원(員), 차관 2원, 병대(兵隊) 4명, 통령(統領) 1원, 초관(哨官) 2원, 양창대(洋槍隊) 200명, 화병(火兵) 40명, 도병(挑兵) 20명을 거느리고 오늘 술시(戌時) 쯤에 관소(館所)로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영국 선박이 우리나라에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仁川)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합니다. 위문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니,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호균(金澔均)을 가승지(假承旨)로 차하(差下)하여 속히 그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국의 흠차 제독(欽差提督) 오장경(吳長慶), 부흠차(副欽差) 위윤선(魏綸先)이 지금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와서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우창(洪祐昌)을 영접관(迎接官)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국의 흠차 제독(欽差提督)이 내일 도성(都城)에 들어온다고 하니, 훈련대장(訓練大將)이 표하병(標下兵)만 거느리고 영접하여 오라."
하였다.
7월 12일 병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중국 제독(提督) 오장경(吳長慶)이 지금 도성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병호(趙秉鎬)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흠차 제독(欽差提督)이 도성 밖에 머물러 있다 하니,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보내어 어첩(御帖)과 예첩(睿帖)을 가지고 가서 전해준 다음 동정을 탐지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영접관(迎接官)이, ‘중국 사신(使臣) 마건충(馬建忠)이 오늘 사시(巳時)쯤 수원(隨員) 2인(人)과 근역(跟役) 2명(名)을 거느리고 이현(泥峴)에 가서 일본 영사(日本領事)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를 만나본 다음에 관소로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접관(迎接官)이, ‘중국 사신(使臣) 정여창(丁汝昌)이 수원(隨員) 5원(員), 병대(兵隊) 100명(名)을 거느리고 오늘 오시(午時) 쯤에 관소로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흠차 제독(欽差提督) 오장경(吳長慶)의 일행 가운데서 통령(統領) 1원, 차관(差官) 1원, 양창대(洋槍隊) 500명과 기병(旗兵), 도병(挑兵), 화병(火兵) 등 모두 200명이 오늘 미시(未時) 쯤에 동별영(東別營)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중국의 부흠차(副欽差) 위윤선(魏綸先)이 군사와 통역을 거느리고 동별영(東別營)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가 오늘 유시(酉時)쯤에 하도감(下都監)으로 옮겨 가서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13일 정유
영접관(迎接官)이, ‘중국 제독(中國提督) 오장경(吳長慶)이 관원(官員) 7인(人), 수원(隨員) 8인, 병대(兵隊) 100명(名)을 거느리고 오늘 사시(巳時)쯤에 관소로 돌아왔다가 오시(午時)에 정여창(丁汝昌), 마건충(馬建忠)과 함께 운현궁(雲峴宮)으로 나아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대원군(大院君)이 천진(天津)으로 행차(行次)하였다.
【오늘 오후에 대원군(大院君)이 정여창(丁汝昌), 마건충(馬建忠)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둔지미(屯地尾)의 청(淸) 나라 군영(軍營)에 가서 답례 방문을 하고 사의를 표한 다음 병선(兵船)을 타고 중국으로 떠났다. ○황제의 명을 받고 조선의 사변을 처리하는 마건충, 오장경(吳長慶), 정여창, 위윤선(魏綸先)의 효유문(曉諭文)의 대략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서 본래부터 예의를 지켜왔다. 근래 이래로 권신(權臣)들이 실권을 잡아 나라의 정사가 사가(私家)의 문에서 나오더니 마침내 올해 6월의 변고가 있게 되었다. 지난번 이 변고가 황제께 보고되자 황제께서는 장수들에게 명하여 군사를 파견하였다. 먼저 대원군을 중국에 들어오게 하여 일의 진상을 직접 물으시고, 한편으로 죄인들을 잡은 뒤에는 엄하게 징벌하되, 그 수괴는 처단하고 추종한 자는 석방하여 법을 정확히 준수하도록 하였다. 이제 북양(北洋) 수군을 통솔한 정(鄭) 제독이 잠시 대원군과 함께 바다를 건너서 황제께서 계신 곳으로 갔다. 남의 혈육지간의 일에 대하여 은정을 온전하게 하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우리 대황제께서 참작해서 알맞게 잘 처리하실 것이요, 너희 대원군에게는 반드시 대단한 추궁을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행차가 갑자기 있었으므로 혹시 너희들 상하 신민(上下臣民)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원(元) 나라에서 고려의 충선왕(忠宣王)과 충혜왕(忠惠王)을 잡아간 전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황제의 높고 깊은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밖에 지난번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혹시 다시 음모를 꾸민다면, 지금 대군이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출한 것이 벌써 20개 영(營)이나 되니 너희들은 화와 복을 깊이 생각하고 일찌감치 해산할 것이며, 그릇된 악감을 고집하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지 말라. 아! 대국과 너희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므로 정의(情誼)가 한 집안과 같다. 본 제독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으니, 곧 황제의 지극히 어진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군중(軍中)의 규율이다. 이것을 믿을 것이다. 특별히 절절하게 타이른다.’라고 하였다.】
【원본】 23책 19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6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외교-청(淸)
7월 14일 무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지금 인천(仁川)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김병시(金炳始)를 대관(大官)으로 차하(差下)하고,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 서상우(徐相雨)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직인사를 하지말고 가서 헤아려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지금 대신(大臣)과 토의하여 처리하려 하니, 일의 형편이 종전과는 판이하다. 전권 대신(全權大臣)을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으로 삼아 즉시 길을 떠나도록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권 대신(全權大臣)에 대해서는 이미 명이 있었습니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김홍집(金弘集)을 부관(副官)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접관(迎接官) 조병호(趙秉浩)를 병으로 체차(遞差)하고, 엄세영(嚴世永)을 임명하였다.
정범조(鄭範朝)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7월 15일 기해
전교하기를,
"이번 대원군(大院君)이 행차할 때에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병호(趙秉鎬), 도승지(都承旨) 조우희(趙宇熙)를 모두 호행사(護行使)로, 부사과(副司果) 이건창(李建昌)을 호행관(護行官)으로 하비(下批)하되, 하직인사를 하지말고 모시고 가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북양 아문(北洋衙門)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관원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배를 몰고 온 것은 사건 관계자들을 구명하여 징벌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일이 특례(特例)와 관계되는 만큼 마땅히 사례를 표하는 회답 자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접관(迎接官)이, ‘중국의 부흠차(副欽差) 위윤선(魏綸先), 중서(中書) 원세개(袁世凱)가 하인들을 거느리고 둔지미(屯地尾)에서 떠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하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정자각상량문제술관(丁字閣上樑文製述官)에 정기세(鄭基世), 서사관(書寫官)에 이재완(李載完)을 차출하였다.
황주(黃州) 등 고을의 표호(漂戶)·퇴호(頹戶)에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7월 16일 경자
전교하기를,
"이번 일에 대하여 황제께 보고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행 병조 판서(行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를 정사(正使)로, 공조 참판(工曹參判) 김홍집(金弘集)을 부사(副使)로, 와서별제(瓦署別提) 이조연(李祖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고 그들에게 며칠 안으로 길을 떠나게 하라."
하였다.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은 대원군과 함께 천진(天津)으로 떠났고, 오장경(吳長慶)은 남아 있으면서 각영(各營)을 통솔하여 역도(逆徒)들을 계속 잡아냈다. 보고하는 자문(咨文)의 사유는, 하나는 군사를 동원하여 원조해 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원군을 속히 환국(還國)하게 해 줄 것을 청한 것이었다.】
【원본】 23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외교-청(淸)
김병시(金炳始)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윤자덕(尹滋悳)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로 삼았다.
7월 17일 신축
전교하기를,
"군법(軍法)이 있는 이상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니, 전 무위 대장(前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 어영 대장(御營大將) 신정희(申正熙)를 모두 기과(記過)하여 대령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전 무위 대장(前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 어영 대장(御營大將) 신정희(申正熙)는 사체(事體)로 보아 그저 기과로 그쳐서는 안 되니, 모두 사형을 감하여 도배(島配)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조일 강화 조약(朝日講和條約) 및 조일 수교 조규(朝日修交條規)의 속약(續約)이 체결되었다.
〈강화 조약(講和條約)〉
일본력(日本曆) 7월 23일, 조선력(朝鮮曆) 6월 9일의 변고 때 조선의 흉도(凶徒)가 일본 공사관(公使館)을 습격하여 사무를 보는 인원들이 많이 난을 당하였고 조선에서 초빙한 일본 육군 교사(陸軍敎師)도 참해입었다.
일본국은 화호(和好)를 타당하게 협의 처리하고, 조선은 아래의 6개 조관 및 따로 정한 속약(續約) 2개 조관을 실행할 것을 약속하여 징벌과 뒷마무리를 잘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양국 전권 대신(全權大臣)은 이름을 기입하고 도장을 찍어서 신용을 밝힌다.
제1관
지금부터 20일을 기한으로 하여 조선국은 흉도들을 잡아 그 수괴를 엄격히 심문하여 엄하게 징벌하고, 일본국이 파견한 인원과 공동으로 조사하여 처리한다. 기한 내에 잡지 못할 경우 일본국에서 처리한다.
제2관
해를 당한 일본 관서(官胥)는 조선국에서 후한 예로 매장하여 장례를 지낸다.
제3관
조선은 5만 원(圓)을 지출하여 해를 당한 일본 관서의 유족들, 부상자에게 특별히 돌보아 준다.
제4관
흉도들의 포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일본국이 입은 손해와 공사(公使)를 호위한 해군과 육군의 비용 중에서 50만 원을 조선국에서 보충한다. 【매년 10만 원씩 지불하여 5개년에 다 청산한다.】 제5관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군사 약간을 두어 경비를 서게 한다. 【병영을 설치하거나 수선하는 일은 조선국이 맡는다.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 규약을 지킨 지 1년이 되어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직접 경비가 필요치 않다고 할 때에는 군사를 철수해도 무방하다.】 제6관 조선국 특파 대관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국에 사과한다.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수호 조규(修好條規) 속약(續約)〉 일본국과 조선국은 앞으로 더욱 친선을 표시하고 무역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속약(續約) 2관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제1관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의 각 항구의 통행(通行) 이정(里程)을 이제부터 사방 각 50리(里)로 넓히고 【조선의 이(里) 거리에 따른다.】 ,2년이 지난 뒤 【조약이 비준된 날부터 계산하여 한 돌을 1년으로 한다.】 다시 각각 100리로 한다. 지금부터 1년 뒤에는 양화진(楊花津)을 개시(開市)로 한다. 제2관 일본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 및 그 수원(隨員)과 가족은 마음대로 조선의 내지 각 곳을 유력(遊歷)할 수 있다 【유력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禮曹)에서는 호조(護照)를 발급하고, 지방관청은 호조를 확인하고 호송한다.】 이상은 양국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이 각각 유지(諭旨)에 의하여 조약을 맺고 도장을 찍고, 다시 비준(批准)을 청하여 2개월 내에 【일본 명치(明治) 15년 10월, 조선 개국 491년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교환한다. 대일본국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원본】 23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6면
【분류】외교-일본(日本)
제5관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군사 약간을 두어 경비를 서게 한다. 【병영을 설치하거나 수선하는 일은 조선국이 맡는다.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 규약을 지킨 지 1년이 되어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직접 경비가 필요치 않다고 할 때에는 군사를 철수해도 무방하다.】 제6관 조선국 특파 대관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국에 사과한다.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수호 조규(修好條規) 속약(續約)〉 일본국과 조선국은 앞으로 더욱 친선을 표시하고 무역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속약(續約) 2관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제1관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의 각 항구의 통행(通行) 이정(里程)을 이제부터 사방 각 50리(里)로 넓히고 【조선의 이(里) 거리에 따른다.】 ,2년이 지난 뒤 【조약이 비준된 날부터 계산하여 한 돌을 1년으로 한다.】 다시 각각 100리로 한다. 지금부터 1년 뒤에는 양화진(楊花津)을 개시(開市)로 한다. 제2관 일본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 및 그 수원(隨員)과 가족은 마음대로 조선의 내지 각 곳을 유력(遊歷)할 수 있다 【유력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禮曹)에서는 호조(護照)를 발급하고, 지방관청은 호조를 확인하고 호송한다.】 이상은 양국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이 각각 유지(諭旨)에 의하여 조약을 맺고 도장을 찍고, 다시 비준(批准)을 청하여 2개월 내에 【일본 명치(明治) 15년 10월, 조선 개국 491년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교환한다. 대일본국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원본】 23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6면
【분류】외교-일본(日本)
제6관
조선국 특파 대관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국에 사과한다.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수호 조규(修好條規) 속약(續約)〉
일본국과 조선국은 앞으로 더욱 친선을 표시하고 무역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속약(續約) 2관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제1관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의 각 항구의 통행(通行) 이정(里程)을 이제부터 사방 각 50리(里)로 넓히고 【조선의 이(里) 거리에 따른다.】 ,2년이 지난 뒤 【조약이 비준된 날부터 계산하여 한 돌을 1년으로 한다.】 다시 각각 100리로 한다. 지금부터 1년 뒤에는 양화진(楊花津)을 개시(開市)로 한다.
제2관
일본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 및 그 수원(隨員)과 가족은 마음대로 조선의 내지 각 곳을 유력(遊歷)할 수 있다 【유력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禮曹)에서는 호조(護照)를 발급하고, 지방관청은 호조를 확인하고 호송한다.】 이상은 양국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이 각각 유지(諭旨)에 의하여 조약을 맺고 도장을 찍고, 다시 비준(批准)을 청하여 2개월 내에 【일본 명치(明治) 15년 10월, 조선 개국 491년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교환한다. 대일본국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원본】 23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6면
【분류】외교-일본(日本)
이상은 양국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이 각각 유지(諭旨)에 의하여 조약을 맺고 도장을 찍고, 다시 비준(批准)을 청하여 2개월 내에 【일본 명치(明治) 15년 10월, 조선 개국 491년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교환한다.
대일본국 명치(明治) 15년 8월 30일
대조선국 개국 491년 7월 17일
일본국 변리 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인(印)
조선국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인(印)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인(印)
7월 18일 임인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 군민(軍民), 한량인(閑良人)들에게 전교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올해 6월에 있었던 사건은 바로 천고(千古)에 없던 변고였다. 창황(倉皇)한 나머지 미처 징벌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들이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죄를 범한 무리들도 반드시 죽을 날이 있다는 것을 알라. 다행히도 상국(上國)에서 군사를 풀어 원조하여 난을 일으킨 군사 10명(名)을 잡아서 극형에 처하였다. 천토(天討)가 이미 가해지니 대의(大義)가 이제야 밝아졌다. 만일 끝까지 조사하고 엄히 징벌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면 도리어 죄 없는 사람들이 뜻밖에 걸려들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큰 덕이 어그러지게 될까 염려스럽다.
무릇 임금으로서 백성이 없고 군사가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하겠는가? 이에 특별히 죄를 용서하는 전교를 내려 뭇사람과 함께 새로 시작하려는 것이다. 지금 이후로 변란과 관계된 모든 문제는 일체 따지지 않으며 참수형(斬首刑) 이하에 해당하는 자를 용서한다. 너희 대소 군민(大小軍民)들은 제각기 안심하고 편안히 살면서 뜬소문에 동요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망령되게 행동하지 말며, 나 한사람을 도와서 종사(宗社)를 보위하라.
아! 내가 진심으로 고하는 것이지 결코 빈 말로 너희 백성들과 군사들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나라에서 겉으로는 안심시켜 무마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라고 말들을 하는데 이것은 필부(匹夫)가 남을 속이는 술책이다. 임금의 말은 일단 나가면 다시 변경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너희들 군민들은 각기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이경하(李景夏)는 고금도(古今島)에, 신정희(申正熙)는 임자도(荏子島)에 배소(配所)를 정하여 압송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19일 계묘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에 가둔 죄인을 우선 모두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이 차자를 올려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임명한 유지(諭旨)를 거두어줄 것을 청하고, 이어 하사한 절반 녹봉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조약을 의논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지위와 명망이 높고 시무(時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이 직임을 맡을 수 없다. 그래서 경의 높은 명망에 의뢰한 것인데 다행히 조약을 체결하는 일은 벌써 끝났으므로 전권 대신으로 임명한 유지는 거두어들인다. 절반 녹봉을 주는 것은 노신(老臣)을 예우하기 위한 것이니 경은 사양할 필요 없다. 바다 건너 오가는 과정에 몸에 병이 생겼으니 몹시 걱정스럽다. 경은 안심하고 몸조리를 하라."
하였다.
7월 20일 갑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의 늙은이들과 백성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왕위에 오른 지 19년 동안에 덕을 밝히지 못하여 정사는 그릇되었고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위로는 죄가 쌓이고 몸에는 재앙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나로 말미암아 불러들인 것이니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래로 토목공사를 크게 벌였고 백성들의 재물을 억지로 긁어 들여 가난한 사람이나 잘 사는 사람이나 다같이 곤궁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나의 죄이다. 자주 화폐를 고치고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것도 나의 죄이다. 사당과 서원(書院)을 허물고 철폐하여 충현(忠賢)에게 제사지내지 않은 것도 나의 죄이며, 기호품을 구하고 상 내리기를 절도 없이 한 것도 나의 죄이다. 신명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비는 제사를 지나치게 믿고 내탕고(內帑庫)의 제물을 허비한 것도 나의 죄이다. 사람을 널리 등용하지 못하고 종친(宗親)과 척신(戚臣)을 높인 것도 나의 죄이다. 대궐에 대한 단속이 엄하지 못하여 궁녀(宮女)와 내시(內侍)들이 은택을 바라게만 한 것도 나의 죄이다. 뇌물이 공공연히 성행하며, 탐오하는 자들이 징계 받지 않고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정상이 위에 보고 되지 않은 것도 나의 죄이다. 저축이 오랫동안 텅 비었으며 군사와 아전(衙前)들을 먹여주지 못하고, 공가(貢價)를 오랫동안 주지 못하여 시정(市井)이 폐업한 것도 나의 죄이다. 여러 나라들과 우호관계를 가지는 것은 바로 시세(時勢)의 요구인데 조치가 방도를 잃어 한갓 백성들의 의혹만 더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나의 죄이다. 이뿐만 아니라 귀신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여 온갖 변고가 쏟아져 나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재변이 육친(六親)에까지 미치게 됨으로써, 멀리 중국에까지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이웃 나라에 신의를 잃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죄인 것이다.
아! 나의 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을 다시 대하겠는가? 슬프고 부끄럽고 두려워서 실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이 없다. 너희 대소 인민(大小人民)들은 내가 종전의 과오를 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내 이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전날의 교훈을 살려 앞으로는 조심하겠다. 백성들에게 불편했던 종전의 정령(政令)들은 다 없애버리고 어진 관리들을 골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실효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너희들도 마땅히 제각기 노력할 것이며 훌륭한 계책을 많이 고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설사 부합되지 않더라도 호되게 책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약 종전의 과오를 고치고 함께 나라의 기초를 지킨다면 종사(宗社)의 다행이 될 것이다.
이번에 난(亂)을 일으킨 역도(逆徒)들을 토벌함에 있어서 극단적인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나머지 무리들을 용서하였으며, 이제 대사령(大赦令)을 나라에 실시하여 다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 형편에 무슨 여가로 남을 책망하겠는가? 아! 나라가 흥하는 것도 언제나 여기에 있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언제나 여기에 있다. 안위(安危)의 기미는 터럭 하나처럼 작은 데 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마음을 터놓고 고하는 바이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임상준(任商準)을 훈련 대장(訓練大將)으로, 김기석(金箕錫)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이도재(李道宰)를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삼았다. 이도재(李道宰)는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7월 21일 을사
한규직(韓圭稷)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강하(趙康夏)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반접관(伴接官) 윤성진(尹成鎭)을 병으로 체차(遞差)하고 행 좌승지(行左承旨) 박정양(朴定陽)을 임명하였다.
7월 22일 병오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문벌을 숭상하는 것은 참으로 천리(天理)의 공평한 이치가 아니다. 나라에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어찌 귀천으로 제한을 둔단 말인가? 이제 경장(更張)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사람을 등용하는 길을 넓혀야 할 것이다.
서북인(西北人), 송도인(松都人), 서얼(庶孽), 의원(醫院), 역관(譯官), 서리(胥吏), 군오(軍伍)들도 일체 현직(顯職)에 통용하라. 오직 재주에 따라 추천하되 만일 특이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중앙에서는 공경(公卿)과 백관(百官)들이, 지방에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이 각기 아는 사람들을 천거하여 전조(詮曹)에 보내면 내가 선발하여 등용하겠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탐오한 관리는 나라의 좀도둑으로서 관청 창고에 저장한 재물을 훔쳐내고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끝없는 욕심을 채움으로써 임금의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고 아래의 사정이 위에 전달되지 못하게 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가난한 백성들만 울부짖으며 쓰러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어른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의리를 망각한 채 관리들을 원수처럼 여기고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민심이 옛날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종전에도 탐관오리를 한두 번 징벌한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벌을 주고는 곧바로 용서하였으므로 여전히 부귀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탐오로 인해 이득을 얻는 것만 보고 탐오로 인해 폐해를 입는 것은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징벌을 알겠는가? 이제부터 탐오하여 벼슬에서 쫓겨난 자가 있으면 일체 등문(登聞)하고 사핵(査覈)해서 실정을 캐낸 다음 분등(分等)해서 죄를 주고, 탐오한 수량대로 추징하도록 하며, 비록 용서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것이다. 특이한 재주나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공로를 세워 충성을 다한 자가 아니면 전조에서 검의(檢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겠다. 그리고 탐오의 근원은 조정이 깨끗하지 못한 데 있다. 뇌물을 받아먹고 청탁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구실을 주고 있으니, 마땅히 위로 조정에서부터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내외(內外)의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게 하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박하여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나 또한 이로써 스스로 노력할 것이다. 훗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이 잘 살며 다같이 태평세월을 누릴 때에 가서도 반드시 지금의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3일 정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한규직(韓圭稷)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에 제수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이렇게 등용하십니까? 해부(該府)로 하여금 장률(贓律)에 따라 정죄(定罪)하게 하고, 그 나머지 탐오한 수령(守令)인 이병익(李秉翼), 유긍수(柳肯秀)도 일체 논감(論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대신(大臣)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진실로 잘못을 알겠다.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한규직(韓圭稷)에게 우선 파직의 형전을 시행하고, 노익동(盧翼東), 이병익(李秉翼), 유긍수(柳肯秀)도 일체 다시 가두어놓고 형률대로 정죄(定罪)하라."
하였다.
호군(護軍) 김창희(金昌熙)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무신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의 흠차(欽差) 오장경(吳長慶)을 접견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과거에 동래부(東萊府)에 하납(下納)하던 몫 중에 각종 미(米), 태(太), 목(木)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본부(本府)에서 구관(句管)하여 경상 비용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박주양(朴周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7월 25일 기유
전교하기를,
"국가에 일이 많은 이런 때에는 문제를 의논하는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 기무처(機務處)를 합문(閤門) 안에 두되, 응당 갖추어야 할 절목(節目)은 와서 모이는 신하들이 마련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병시(金炳始), 행 호군(行護軍) 김홍집(金弘集)·김윤식(金允植), 부호군(副護軍) 홍영식(洪英植), 부사과(副司果) 어윤중(魚允中), 교리(校理) 신기선(申箕善)을 며칠 안으로 기무처에 모이게 해서 일마다 영의정(領議政)에게 가서 의논하게 함으로써 품지(稟旨)하여 재결(裁決)하는데 대비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보부상(褓負商)들은 본래 군오(軍伍)에 합당하지 않으니, 향리(鄕里)로 돌려보내서 각기 하던 일을 다시 하게 하라."
하였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서상조(徐相祖)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 6월에 있었던 군사들의 난(亂)은 천고(千古)의 큰 변고입니다.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급히 화를 피하실 적에 호위하는 반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나아가신 곳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망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근래 듣자니 매우 다행스럽게도 중궁 전하께서 조용히 변란에 대처하시어 누추한 곳에 은신해 계신다고 하니, 삼가 바라건대, 거처하고 계신 곳을 널리 수소문하여 의장(儀裝)을 갖추고 예법에 따라 왕후의 자리로 맞아들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근자의 변고는 지난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본래 확실한 근거가 없는 법이지만, 오늘 그대의 상소를 보고 소문이 까닭 없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널리 찾아서 맞아들이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지종정경(知宗正卿) 이인응(李寅應)이 상소하여, 중궁 전하(中宮殿下)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천도(天道)는 밝게 돌아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가릴 수가 없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는 시기에 기쁨과 슬픔도 서로 갈마든다."
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송상순(宋祥淳)이 상소하여, 중궁 전하(中宮殿下)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서상조(徐相祖)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이최영(李㝡榮)이 상소하여, 중궁 전하(中宮殿下)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윤리가 막히고 끊어졌다.’는 내용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상심이 되고 탄식이 나온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이 지금 은신해 있으니 백관(百官)들이 복(服)을 입는 일은 그만둘 것이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세 도감(都監)을 철파(撤罷)하라."
하였다. 【6월 10일 난병(亂兵)들이 대궐에 침범하자 중궁전(中宮殿)은 피하여 사어(司禦) 윤태준(尹泰駿)의 화개동(花開洞) 집에 은신해 있었다. 무감(武監) 홍재희(洪在羲)가 배종(陪從)하였다. 이어 익찬(翊贊) 민응식(閔應植)의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의 시골집에 은신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 전교가 있었다.】
【원본】 23책 19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8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의절(儀節)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영의정(領議政)이 나아가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제학(提學) 김병시(金炳始),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정범조(鄭範朝), 원임 직각(直閣) 민영목(閔泳穆), 도승지(都承旨) 윤용구(尹用求), 우승지(右承旨) 윤상만(尹相萬), 우부승지(右副承旨) 김학수(金學洙), 홍문관(弘文館)의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병조(兵曹)의 도총관(都摠管) 그리고 삼군부(三軍府)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각각 1원(員)씩 중궁전의 행차를 배종(陪從)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가 입시(入侍)하였을 때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돈을 주조하는 일을 혁파(革罷)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이미 채취한 동(銅)이 적지 않은데,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합니다. 지금은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 형편이니 우선 이것을 가지고 탁지부(度支部)에서 다시 돈을 주조하게 하되, 호조 판서에 명하여 이를 관할하고 검찰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폐는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돈입니다. 지금 여러 나라들과 통상하고 있는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동전만 쓰기 때문에 군색한 일들이 많습니다. 금전(金錢), 은전(銀錢), 문전(紋錢)을 서울과 지방에서 장애 없이 통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대원군 문후 겸 호행사(大院君問候兼護行使) 일행이 마땅히 즉시 길을 떠나야 하겠는데, 사유를 갖추어 쓴 자문(咨文)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한 다음 그들에게 주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일본 공사(日本公使)와 의논한 조약 가운데 높은 관리를 파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신의 칭호는 ‘수신 대사(修信大使)’라 부르고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를 차하(差下)하며, 부사(副使)로는 부호군(副護軍) 김만식(金晩植)을 차하하고 국서는 문임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속히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김익룡(金益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리신 윤음(綸音)을 몇 번 읽어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으며, 과오를 뉘우치고 자신을 책망하신다는 내용을 읽기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기뻤습니다. 이미 백성들에게 바른말을 진언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드립니다.
정사가 잘못되고 백성들이 흩어져가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권신(權臣)들에게 정사를 맡기기 때문입니다. 권신들이 지방에서부터 권력을 가지고 농간을 하기 때문에 뇌물이 있게 되며, 나아가서는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들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할 때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으고 여러 번 화폐를 바꾼 것으로 해서 백성들의 고통은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 궁궐에서는 기호품만을 구하여 들어오는 허다한 왜(倭)와 서양의 물건치고 기호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금부처가 대궐로 들어가고 원숭이가 궁으로 들어가는 일까지 있습니다.
6월에 있었던 변고는 왕조를 세운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는데, 바로 그때에 조정에 있던 수많은 문무(文武) 백관들은 모두 수수방관하였으니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우선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혁파하소서.
지금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계책으로는 아래와 같은 20개 조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며, 둘째는 사치한 기풍을 막고 검박한 덕을 숭상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비(武備)를 튼튼히 하여 뜻밖의 사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인재를 골라 적당한 직책을 맡기는 것이고, 다섯째는 탐관오리를 징벌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서원(書院)과 사우(祀宇)를 복구하여 의리를 밝히는 것이고, 일곱째는 늙은이와 어린이는 줄여 군오(軍伍)를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유민(遊民)을 금지하고 농상(農商)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아홉째는 뇌물을 막고 관리들을 청렴하게 하는 것이며, 열째는 시골에서 인재를 추천하게 하여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히는 것입니다. 열한째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며, 열두째는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근심을 없애는 것이며, 열셋째는 백성들을 속이지 말고 법령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며, 열넷째는 정학(正學)을 장려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이며, 열다섯째는 과거 제도를 엄하게 하여 선비를 공정하게 뽑는 것입니다. 열여섯째는 대궐을 엄격히 단속하여 명령이 새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열일곱째는 재정을 절약하고 각각 자신의 직업에 안착하게 하는 것이며, 열여덟째는 무당을 금지하고 액막이를 없애는 것이며, 열아홉째는 사찰(寺刹)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귀농(歸農)시키는 것이며, 스무째는 궁녀(宮女)와 내시(內侍)를 줄이고 궁궐에 폐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것을 명심하고 자책하여 폐단의 근원을 구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들은 현재의 폐단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며, 20개 조항의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들은 모두 오늘날 듣고 싶던 바였다. 그대는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과감히 의견을 제시하였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7월 26일 경술
중궁전(中宮殿)을 대궐에 맞아들일 때 왕세자(王世子)의 지영(祗迎)은 대궐문 안에서 하는 것으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의 계품(啓稟)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 대궐에 맞아들일 때 판종정경(判宗正卿) 이재원(李載元)과 이재면(李載冕), 종정경(宗正卿) 이재완(李載完)이 나아가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때 겸찰총융사(兼察總戎使)가 해영(該營)의 군사 60명(名)을 거느리고 나아가 시위(侍衛)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이 복명(復命)하기 전에는 내외(內外)의 사무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하여금 품결(稟決)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접관(迎接官)이, ‘중국 총병(總兵) 2원(員)이 군대(軍隊) 100명(名)을 거느리고 앞서 충주(忠州)로 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김기석(金箕錫)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김윤식(金允植)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진무사(鎭撫使)는 종전대로 유수(留守)로 하비(下批)하라."
하였다.
판종정경(判宗正卿) 이재면(李載冕)이, 충청도(忠淸道) 유생 김익룡(金益龍)이 올린 상소의 말들에서 자신을 핍박한 일로 상소하여 실제로 겸임하고 있는 여러 직함을 모두 체차(遞差)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변고를 경과 더불어 슬퍼하였고 오늘날의 경사를 경과 더불어 기뻐하고 있다. 말이 근거가 없으므로 인혐(引嫌)할 것이 못되니 경은 사임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7월 27일 신해
판종정경(判宗正卿) 이재면(李載冕)이 재차 올린 상소에,
"아! 지금이 어떤 때이며 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처한 사정(私情)은 어떠하며 남에게 시비를 당한 것은 또한 어떠합니까? 바라건대, 속히 신이 지니고 있는 여러 직함을 체차(遞差)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그 사람이 말한 것은 정사에 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너그럽게 비답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사실과 어긋나는 문구들이 없지 않았으니, 시골 사람으로서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전혀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는 일을 가지고 이처럼 누차 간청하니 사체(事體)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 괴롭게 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괴로우면 경이 어찌 혼자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의주부(義州府)의 표호(漂戶)·퇴호(頹戶)에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7월 28일 임자
이회정(李會正)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규원(李奎遠)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7월 29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관소(館所)에 침입하여 일본인들을 살해한 여러 놈들을 붙잡아 가지고 끝까지 신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공초한 것을 참고해 보면 손순길(孫順吉), 최봉규(崔奉圭), 공치원(孔致元)의 패악(悖惡)한 정상들이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모두 군문(軍門)에 넘겨 크게 군민(軍民)들을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뭇 사람들을 경계하게 할 것이며, 기타 이진학(李辰學)·조응순(趙應順)·안흥준(安興俊)은 모두 형조(刑曹)에 이송하여 엄히 형신(刑訊)하고 원배(遠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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