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신
전교하기를,
"6월 22일의 여러 죄인들에 대하여 정계(停啓)한 대간(臺諫)들은 모두 현고(現告)를 받고서 파직(罷職)시킬 것이다."
하였다.
이돈응(李敦應)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제관(朴齊寬)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정기세(鄭基世)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선혜청 별창(宣惠廳別倉)에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전 인릉 영(前仁陵令) 이응하(李應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크게 윤음(綸音)을 선포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시어, 벼슬하지 못한 선비나 군사도 자기의 의견을 다 진술하게 하고 보잘 것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도 선발되어 수용(收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린 말들이 모두 시세의 요구에 부합되거나 수용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꼭 그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데 과연 잘못된 것이 없고, 전하를 위하여 모색을 하는 여러 신하들도 모두 다 시세의 요구에 맞게 조치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전관(銓官)이 관리를 임명할 때 어떤 사람이 무슨 벼슬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청(政廳)에 마주 앉아서는 그저 전관의 말대로 내보내라 들여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조(戶曹)에서는 장부를 확인할 때 재정이 넉넉하고 모자라고 하는 것은 살피지 않고 계사(計士)가 재부의 유무를 말하는 것에만 맡기고 있습니다. 범죄사건을 다루는 관청에서는 패초를 어기는 것을 규례로 삼고, 시정(施政)을 논하고 대책을 마련할 관청에서는 번들거나 직숙(直宿)하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며, 더구나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로 말하면 개인감정을 보복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공패(空牌)를 찍어냄으로써 간사한 아전(衙前)들이 농간을 부리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훈련 도감(訓練都監)과 어영청(御營廳)과 각영(各營)은 그저 초병(哨兵)이나 점검하는 놀음장이며, 건장한 남아들을 배치해 놓고는 어른들의 사환(使喚)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유사(有司)들은 있기는 하나 맡아 지키는 책임을 완전히 망각하다보니 공화(公貨)는 간사한 백성들의 모리대상으로 되고, 관청의 물건은 친지들에게 생색내는 데 쓰이니,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풍속과 관리들의 규례가 이렇게 되고서야 어찌 정사가 잘 다스려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관리의 집안사람들 중에는 공부하는 자식이 없고 자신을 수양하는 사람이 적고, 일반 백성들은 명분과 도리를 버리고 조금도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젊은 사람이 걸핏하면 어른을 모욕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부자를 본 따고 있습니다. 풍속이 이미 이 지경으로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고통을 겪습니다.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노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위기를 태평세월로 전환시킬 방도를 모색하지 않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현재 정사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적임자를 얻어 벼슬을 맡기고, 일에서 성과를 내도록 당부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대신(大臣)들은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책임을 다하고, 낮은 관리들은 나랏일에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전형(銓衡)을 맡은 관리들은 공정한 도리를 널리 발양하고, 대간(臺諫)의 직책에 있는 관리들은 숨김없이 과감하게 의견을 아뢰어야 하며, 재정을 담당한 관리들은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형옥(刑獄)을 주관하는 관리는 처벌을 공정하게 하고 법을 강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방에서 방백(方伯)이 된 사람은 관리들의 업적을 옳게 평가하고, 정사를 펴는 데 있어서는 유익한 것과 폐단에 대해 깊이 따져야 하며, 수령(守令)이 된 사람은 탐오를 청렴한 것으로 바꾸고 가혹한 현상을 어진 것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악한 것을 버리고 착한 것을 따르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날로 성취되고, 예의의 풍속이 때때로 개변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 다음에야 그와 같은 효과를 얻을 것인데 그것은 전하께서 분발하여 사람을 골라서 벼슬을 맡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무(文武)의 재상을 적임자로 얻기 곤란하다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전관, 제학(提學)들, 호조(戶曹)의 관리들, 대간(臺諫)들을 적임자로 얻기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선조(先朝)때부터 모두 벼슬의 임기를 길게 하였는데 근래 와서 술잔 돌리듯이 자주 교체하는 것도 한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적임자를 얻어서 관리로 임명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말을 가지고 사람을 뽑는 것은 진실로 실질을 잃게 되는 것이 많다."
하였다.
충의(忠義) 유순영(柳淳永)이 상소하여,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 문벌만 중요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문벌을 보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참으로 요즘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되었다."
하였다.
9월 2일 을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을 제수(除授)하여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중책을 벗고 한가하게 지낸 지 지금 몇 달이 된다. 생각건대, 왕실을 위하는 마음이야 벼슬자리를 떠났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내가 경에 대하여 바라는 마음은 일을 보고 있을 때보다 더하였다. 내가 경을 뽑게 된 것은 어진 도량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로 되기에 넉넉하고, 세련된 솜씨는 시폐(時弊)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근심과 걱정거리가 많은 이때에 난관을 함께 수습해 나갈 사람이 경 말고 또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이번에 다시 정승으로 임명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바라건대, 경은 사임을 요청하지 말고 속히 조정에 나와 우리 왕조를 돕고 나 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온 나라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건용(李建容)이 상소하여, 사치한 풍습을 억제하고, 과거(科擧)의 규율을 엄하게 세우며, 탐오한자를 징벌하고, 두곡(斗斛)을 통일시킬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 중에 취할 만한 의견이 많으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서상조(徐相祖)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정주응(鄭周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9월 3일 병술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두영(李斗榮)이 상소하여, 경저리(京邸吏)가 돈놀이를 하는 폐해를 금지하며, 군란(軍亂) 때의 통장(統長)과 별입시(別入侍) 이명우(李明宇), 상직현(尙稷鉉)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의논이 간절하고 솔직하여 가상한데 내가 헤아린 점이 없지 않다. 경저리가 돈놀이를 하는 문제는 엄하게 신칙해야 한다."
하였다.
유학(幼學) 정해중(鄭海重)이 상소하여, 바른 마음으로 정사를 실시하고, 대궐을 엄하게 단속하며, 세자(世子)를 가르쳐주고, 문무(文武)의 높은 관리들을 신중히 선발하며, 지방에서 추천하여 인재를 뽑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잘 다스리며, 검박한 덕을 숭상하고, 부역(賦役)을 줄이며 조세를 가볍게 할 것 등 여덟 가지 조항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약석(藥石) 같은 말이 많으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4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가 곧이어 체차(遞差)하고 심순택(沈舜澤)을 임명하였다.
9월 5일 무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영국 사신이 며칠 안으로 온다고 합니다. 화호(和好)하는 의리로 보아 접대하는 절차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행 호군(行護軍) 조병직(趙秉稷)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돈유(敦諭)한 후에 달려오리라고 몹시 기다렸는데, 부주(附奏)가 올라오자 이미 기대를 잃었고, 이제 사임을 요청한 글을 받게 되니 더욱 망연해진다. 아! 경은 오늘날을 어떤 시기로 여기는가? 변란이 겪은 끝에, 백성의 뜻은 정해지지 않고, 모든 업무는 번잡하여 응접할 겨를이 없다. 참으로 백성을 진정시킬 아량과 나라를 운영할 원대한 계책이 없다면 기울어진 그릇과 같은 나라 형편을 바로잡을 수 없고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 경은 이러한 시기에 오히려 누구에게 책임을 미루고 조용히 사임을 요청하는가? 또 병으로 사직한다고 하지만 합(閤)에 누워서 정사를 처리하여도 애초에 모든 관리들이 서두르며 일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경이 나의 이 지극한 뜻을 이해하였다면 틀림없이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선뜻 마음을 바뀌어 조정에 나올 것이다."
하였다.
가선 대부(嘉善大夫) 경한진(慶漢鎭)이 상소하여 전안(田案), 세곡(稅穀), 환곡(還穀), 병든 군사, 군안(軍案), 초료(草料), 도량형(度量衡)에서 오는 폐단을 진달하고, 훈련에 대해 엄칙(嚴飭)하고, 교령(敎令)을 신중하게 하며, 진해현(鎭海縣)을 옮길 일 등 열 가지 문제에 대한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말한 열 가지 문제는 백성들의 피부에 닿는 폐단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살펴서 바로잡겠다."
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엄석관(嚴錫瓘)이 상소하여, 사(士)·역(役)·병(兵)·농(農)·공(工)·상(商)의 여섯 가지 직업에 대한 법을 정하고, 각자가 자기의 직업에 전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정직한 말이 강직하여 시국에 적절하니, 그대의 조상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겠다. 나는 근자에 올라오는 장주(章奏)에서 매번 훌륭한 의견들을 듣고는 그때마다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강홍거(康鴻擧)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중궁 전하(中宮殿下)가 환궁(還宮)할 때 별빛이 땅에 드리웠으니, 지난날의 역사를 상고하여 볼 때 상서로운 일이 못되는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근거 없는 헛소문으로 하여 소란스럽게 술렁대며 마치 화란이 당장 일어날 것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진신(縉紳)의 반열에 있는 사람조차 또한 황급히 낙향하는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으니, 차마 전하로 하여금 빈 수도(首都)에 앉아 지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살 궁리를 하는 데는 지극하다고 할 수 있으나,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6월 이후부터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정고(呈告)한 인원(人員)은 모두 현고(現告)를 받아 파출(罷黜)해서 영원히 금고(禁錮)함으로써 신하로 있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리고 삼군부(三軍府)를 혁파하고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칭호를 다시 설치하며, 인재를 살피게 하여 나라가 영원히 튼튼한 기초 위에 놓이게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하늘의 도리는 까마득하게 멀어서 실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신하로서 의견을 진달하는 사람이 혜성(彗星)을 가지고 상서로운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가? 이런 기풍을 키워주어서는 안 된다. 품고 있는 생각을 전부 쏟아내어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아무리 간절하고 솔직하다 하더라도 충후(忠厚)한 면에서는 흠이 있다."
하였다.
전 사과(前司果) 김노승(金魯昇)이 상소하여, 명분을 바로 세우고, 조세를 바로잡으며, 호포(戶布)를 바르게 하고, 경비를 줄이며, 사치를 금지하고, 필요치 않은 벼슬을 제거하고, 요해지를 튼튼히 다지고,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는 등 여덟 가지 의견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여덟 가지 조목이 모두 다 좋은데 어떻게 하면 실제 효과를 보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다 믿겠는가? 말이나 글로는 깨우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였다.
전적(典籍) 변옥(卞鋈)이 상소하여, 안으로 정사를 잘하고, 밖으로 이웃 나라와 수호(修好)를 맺으며, 재용을 풍족하게 하고, 사람을 등용하는 방책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나라는 재용을 넉넉하게 하는 데 달려있고 재용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달려있다. 그대의 말은 근본을 알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직강(直講) 박기종(朴淇鍾)이 상소하여,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국내의 정사를 엄하게 할 것을 진달하고 또 군정(郡政)과 조운(漕運)의 폐해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절실하고 조리가 정연하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출신(出身) 정영조(鄭暎朝)가 상소하여, 군정(軍政)을 잘 다스리고, 학교를 세우며, 탐오한 자를 징벌하고, 협잡을 처벌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문무(文武)를 모두 쓰는 것은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이다."
하였다.
충주(忠州) 유학(幼學) 권보선(權寶善)이 상소하여, 지방을 잘 무마하고, 권신(權臣)을 경계하고 신칙(申飭)할 것 등의 문제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포의로서 나라를 위한 정성이 있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몇 가지 폐단에 대해서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6일 기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박제인(朴齊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연수(金演壽)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전 주사(前主事) 유완수(柳完秀)가 상소하여, 군정(軍政)에서 장수를 선발하여 오래도록 맡겨두어 장수와 군사가 함께 복무하며, 기고(旗鼓)를 줄이고, 상벌(賞罰)을 명확하게 하며, 향군(鄕軍)을 모집하고, 군량을 넉넉히 마련하며, 윤선(輪船)을 만들고, 어학을 배우며, 마정(馬政)을 잘 다스리며, 공신의 후손을 장려할 것 등 열 가지 의견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열 가지 조항의 의견이 군사를 다스리는 원칙에 매우 합당하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7일 경인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진주사(陳奏使)를 【정사(正使) 조영하(趙寧夏), 부사(副使) 김홍집(金弘集), 종사관(從事官) 이조연(李祖淵)이다.】 소견(召見)하였다.
김상현(金尙鉉)을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으로,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기수(金綺秀)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8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근수(宋近洙)가 비지(批旨)를 내린 것이 몹시 황송하다고 하면서 고을 옥(獄)에 와서 서명(胥命)하고 있다고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의 비답은 딴 생각이 있어서 내린 것이 아니다. 재상에 대한 조정의 공경과 예우는 원래 일반 관리와 달리해야 하기 때문에 거취(去就)를 편리할 대로 하면서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노인을 우대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노숙한 정승이 지나친 이런 행동을 하였다. 듣고서 몹시 놀랐으며 부끄럽기도 하여 한탄까지 하였다. 이는 어찌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자구(字句)를 이해받지 못해서인가? 차자에 대한 비답 중에서 대관(代官) 이하 17자(字)는 지웠으니, 경은 속히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9월 9일 임진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 흠차(欽差) 오장경(吳長慶)을 접견하였다.
김재현(金在顯)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10일 계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요즘 성상(星象)이 경계를 보이니, 매우 두렵습니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어 그 반응이 형체에 대한 그림자나 소리에 대한 메아리보다도 더 빠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에서 진실로 잘못이 없다면 하늘에서 어찌 꾸짖는 경고가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연속되는 소란스러운 사변을 겪은 뒤부터는 오직 근심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밤낮 잘못이 없는 속에서 독실하게 잘못을 찾으며 바른말을 듣기 좋아하였고 사람들의 좋은 점을 취하여 마치 막혔던 강물을 터놓듯이 하려고 생각하였으니, 옛날 어진 임금들의 훌륭한 정사인들 어찌 이보다 능가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훌륭한 임금은 있으나 훌륭한 신하가 없는 탓으로 그 도리를 도와주지 못하여 위로는 큰 교화가 펴지지 못하고 아래로는 지극한 혜택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 정사가 뜻대로 되지 못한 결과 이런 재변이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재변을 없애는 방도로는 어진 신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신처럼 재능이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한 자는 마땅히 속히 내쳐서 벼슬자리가 비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정령(政令)에 관련된 것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도와주며 원대한 계책을 세우는 데 힘쓰고 대궐과 관청이 한 몸이 되어 동요하지도 말며 태산 반석같이 사물을 휘어잡아 사람들의 마음이 성을 이루듯 단합시킨다면, 기강이 절로 서고 풍속이 순박한 곳으로 돌아설 것이며 화기(和氣)가 사방에 들이차 하나로 화합될 것이니, 어찌 형혹성(熒惑星)이 삼사(三舍)만 물러가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경성(景星)과 경사스러운 구름이 나타나 재앙을 상서로운 것으로 전환시키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찰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재변을 막는 방도는 실제 행동으로 응하는 데 있다. 오늘 진달한 의견은 자신을 반성하는 요점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근래 외읍(外邑)의 세정(稅政)이 전혀 법과 기강이 없습니다. 세곡(稅穀)을 경강 선주(京江船主)에게 넘겨주고 확인 문건만 받으면 해당 고을에서는 이미 바친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는 더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해유(解由)를 낼 때를 당해서는 이미 확인 문건을 받은 것으로 해사(該司)에 정장(呈狀)하며 아무 구애하는 바가 없으니, 당초의 법의가 본디 이러했겠습니까? 이런 결과로 하여 선주(船主)들의 농간이 해마다 더 심해져서 이 고을의 곡식을 끌어다가 저 고을의 상납에 채워 넣습니다. 이에 횡령한 것이 산처럼 많아도 그 당장에서는 우선 죄를 면하게 됩니다. 이렇듯 존엄성이 없고 꺼리는 바가 없으니 어찌 몹시 증오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드러나는 대로 법조문을 적용하여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수령(守令)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전날의 그릇된 버릇을 답습하지 않게 하고, 반드시 수량대로 해사에 바치고 확인 문건을 받아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확인하여 돌려보낸 뒤에야 비로소 지장이 없게 해유에 대한 승인 문건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조세를 바치는 고을에 공문으로 신칙하도록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먼저 확인문건을 받은 다음에 자문(尺文)을 확인하는 것은 바로 세정(稅政)의 중요한 규정이다. 진달한 대로 집행하여 꼭 실제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우창(洪祐昌)의 보고를 보니, ‘죽산(竹山)과 양지(陽智)의 결세(結稅)가 점점 체납되고 각종 상납도 모두 포흠(逋欠)이 되었습니다. 신사년(1881) 몫부터 조세와 대동미(大同米)는 4년 동안을 기한하여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게 하되 매해 나눠서 포흠을 보충하게 하고, 전후하여 포흠낸 수괴(首魁)들은 응당 법조문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달포 전에 이 고을 경계를 지날 때 이 두 고을의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 대체로 들었습니다. 그전부터 쌓인 포흠을 청산할 방도가 없어 쇠잔한 형편에서 이리저리 끌어다 메워나가다 보니 고을은 고을의 꼴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공(公)에 아무런 도움도 없는 빈 장부만 안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가벼운 쪽을 따라 마감(磨勘)하여 백성들을 돌보아줄 수 있는 방도가 있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요청한 대로 4년 동안을 기한하여 상정가로 쳐서 대납하게 하되, 매해 나눠서 바치도록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그러운 조치가 취해진 조건에서는 포흠을 낸 놈들은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형률을 시행하게 하여 뒷날의 폐단을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상정가로 대납하게 하되 매해 나눠서 바치게 할 것에 대한 문제는 아뢴 대로 하라. 포흠을 낸 놈들을 엄하게 조사하여 형률을 시행하는 것은 절대로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또 보고하기를, ‘장단(長湍)과 파주(坡州)의 허결(虛結)을 특별히 10년 동안 조세를 중지하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기한이 찼으나 환기(還起)한 곳은 없고 몇 해째 홍수가 나서 도리어 사태(沙汰)가 나 백지(白地)가 더 많아졌기에 차마 책징(責徵)할 수 없습니다. 장단부(長湍府)에서 그전에 사태가 난 답결(畓結) 79결(結) 45부(負) 6속(束)과 새로 사태가 난 답결 9결 65부 6속, 파주목(坡州牧)의 답결 86결 1부 5속에 대해서 모두 10년 동안 더 기한을 늘려 조세를 바치는 것을 중지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지금 이 두 고을의 진결(陳結)에서 생판으로 조세를 징수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되었기 때문에 10년 동안을 기한하여 조세를 중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한은 이미 다 찼지만 아직 개흙땅이 생긴 곳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다시 요청하는 것이니, 이는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백성들의 숨은 고통과 관계되므로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계(狀啓)의 요청대로 다시 5년 동안 더 연기하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남정익(南廷益)의 등보(謄報)에, ‘고성(高城)에 있는 유점사(楡岾寺) 3,000여 간(間)이 몽땅 화재를 당하였으니 공명첩(空名帖)을 전례대로 만들어 주어 수리하는 데 비용에 보태 쓰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천년의 고찰로서 역내(域內)의 아름다운 명산인데 갑자기 화재를 입어 타버린 칸 수가 이렇게도 많습니다. 그런데 중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공사는 방대하고 재력은 딸리는 것만큼 응당 돌보아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공명첩을 500장으로 한정하여 건봉사(乾鳳寺)의 예에 따라 만들어 줌으로써 개건하는데 드는 비용에 보태 쓰게 하는 동시에 본 도에서도 따로 돌보아주어 많은 중들이 흩어져가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기고에서 관할하고 있는 월별 과제로 들어온 총약(銃藥)을 삼남(三南)과 서북(西北) 지방에 나누어 보내는 것이 연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각 해도(該道)에서 미처 찾아가지 못한 것들은 창고에 저축하여 두었던 것인데 지난번 서울의 소요로 몽땅 바닥이 났습니다. 지금의 힘으로서는 마련할 방도가 없으니, 우선은 모두 중지하였다가 내년까지 몫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받아가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감역(前監役) 김병창(金炳昌)·전우(田愚)·유도성(柳道性)·이상필(李象弼)·안종덕(安鍾悳)·유진태(兪鎭泰)는 자신을 수양했으니 등용하는데 적합할 만 합니다. 우선 6품직에 조용(調用)하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신이 오늘 이 벼슬에 다시 등용되어 병을 무릅쓰고 이 연석(宴席)에 나오게 된 것에 대하여 비단 듣는 자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보는 자들이 놀라워할 뿐만 아니라 신 또한 어떻게 깊은 대궐에 달려 나와 전하의 앞에 꿇어앉아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지나친 대우에 감격하고 의리와 명분으로 놓고 보아 겁이 났던 나머지, 이 직책은 전혀 감당할 수 없고 이 병은 참으로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저 단 하루라도 남다른 우대에 보답을 하고 단 하루라도 의리와 명분을 지키려고 한 데서부터 기인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지신 전하께서 이와 같이 놀랍고 괴이해 하는 것을 환히 살펴서 가엽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루도 채 지나가기 전에 체직시키리라 기대하였습니다. 임금을 도울 만한 재능도 없고 시국 형편을 바로잡고 수습해 나갈 재능도 없다는 것에 있어서는 도리어 자임(自任)하는 자처럼 보일 수 있기에 감히 누누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삼가 살려 주시는 은택을 바랄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몹시 기다리던 끝에 선뜻 마음을 바꿔 조정에 나오니,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 병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합(閤)에 누워서 일을 보면서 몸조심을 하면 점차 회복될 것이다. 영의정(領議政)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현행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바로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일전에 신에게 내린 유시(諭示)에,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하늘이 재앙으로 경고를 보이고 있다.’는 말씀이 더할 나위 없이 간곡하였으니, 충분히 백성들을 감동시키고 나아가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므로 신은 참으로 천만번 우러러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아득한 아래에 있고 하늘은 높디높은 위에 있어서 서로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오직 성스러운 임금만은 백성을 하늘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상서(尙書)》에,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데 따라 보고, 우리 백성들이 듣는 데 따라 듣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백성들이 많은 곤경을 겪고 있는 것은 필시 그들이 안주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하늘이 재앙으로 경고를 보이는 것도 필시 절기의 순차가 불안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상서(尙書)》에 또, ‘백성들은 별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백성들에게 경고를 보이는 것은 반드시 별들을 통하여 보여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몹시 걱정하고 두려워하시고 간절한 윤음을 거듭 내리고는 재변을 없앨 방책을 듣고자 하는데 그러한 방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아,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극도에 이르러 근거 없이 소요스러운 소문에 점점 더 빨리 술렁대어 고장을 뜨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응당 위로하며 불러들이고 구원하여 제대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한 사람도 안착하지 못한 사람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백성들이 안정한 생활을 하면 나라도 편안해지고, 나라가 편안해지면 반드시 형혹성(熒惑星)은 사라지고 도리어 경성(景星)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징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지금 사임을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망령되이 딴 문제를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것은 재변을 당하였을 때 서둘러야 할 급선무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것은 백성을 안주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지금 아뢴 의견이 이와 같이 간곡하고 정성스러우니, 가슴에 새겨두고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반접관(伴接官)이, ‘영국 영사관(領事官) 호이(好二)가 함장 1인(人)을 거느리고 오늘 술시(戌時)에 대진(大陣)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사예(司藝) 홍희린(洪羲麟)이 상소하여, 규율을 세우고, 절약과 검박을 장려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달마다 나누어주는 것을 삼가며, 돈놀이하는 것을 징계하고, 녹봉(祿俸)과 요식을 중시하며, 신용과 권위를 세우고, 인재를 얻는 등 8가지 조항에 대한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벌(賞罰)을 명확히 하려하나 믿음이 서지 않고, 인심을 맑게 하려하나 풍속이 개변되지 않는다. 충성스러운 의견이 날마다 제기되지만 실제 효과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참으로 답답하다."
하였다.
9월 11일 갑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덕원 부사(德源府使) 정학묵(鄭學默)의 보고에, ‘개항을 한 이후부터 본부(本府)의 군교(軍校)·포졸(砲卒) 그리고 판찰(辦察)·역학(譯學)·통사(通事)들에게 주는 지방(支放)의 수효는 매해 도합 2만 720냥(兩)인데, 올해에는 정월 이후로 나눠줄 각종 요식을 전혀 지불하지 못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일이 분분이 제기되고 있으니 몹시 안타깝습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여 나누어 줌으로써 들여다 쓰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개항 초창기이므로 아직 일정한 규모가 잡히지 않아 그 지방의 수효에 대해서는 매번 경사(京司)에 보고하여 구획(區劃)하게 하였던 것인데, 거리가 몹시 멀기 때문에 늘 쪼들리는 곤란을 겪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도(道) 안의 서울로 상납하는 물자 중에서 이 수량대로 영원히 획부(劃付)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로 정하고, 그 정상을 치보(馳報)하게 하도록 도신(道臣)과 해부(該府)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2일 을미
특별히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온순(金蘊淳)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13일 병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주전소(鑄錢所)에서, ‘새로 주조한 무자전(武字錢)을 9월 13일부터 행용(行用)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14일 정유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조영하(趙寧夏)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민영목(閔泳穆)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종헌(洪鍾軒)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태관(申泰寬)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조창하(趙昌夏)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근석(李根奭)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김병창(金炳昌)을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전우(田愚)를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유도성(柳道性)을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삼았다. 김병창(金炳昌) 이하는 남행외대(南行外臺)로 제수한 것이다.
유학(幼學) 이경권(李敬權)이 상소하여, 경기(京畿)지방은 여러 달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삼남(三南)지방은 풍년이 들었으니, 얼음이 얼어붙기 전에 그곳의 곡식을 수로로 운반하여 쌓아둠으로써 도하(都下)에 공급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기지방이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으니 실로 염려스럽다. 곡식을 옮기는 방책도 흉년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였다.
출신(出身) 서영구(徐榮九)가 상소하여, 기강을 세우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분별하며,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고, 군율(軍律)을 바로잡으며, 사치한 기풍을 막고, 간특하고 교활한 행동을 징벌할 것 등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또 신의 선조 서익(徐益)은 융성했던 선조(宣祖) 때에 북쪽 변경을 순무(巡撫)하면서 편의책(便宜策) 12조(條)를 올렸습니다. 신도 감히 혈충(血忠)을 올린다고 말하니, 비답하기를,
"선조의 발자취를 이어 아름다운 말을 올리니,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달한 의견에 대해서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출신(出身) 정영조(鄭暎朝)가 상소하여, 이웃 나라의 화폐를 똑같이 통용하면 기차·화차(火車)·기계·전선(電線)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나라의 화폐를 통용하는 것도 원래 이치가 있는 것이니, 경중을 보아가면서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부사맹(副司猛) 김병숙(金炳塾)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군사들의 마음이 산만하여 숙위(宿衛)가 약하고, 높고 낮은 관리들은 태만하여 일을 보지 않으며, 서리(胥吏)와 종들은 관원(官員)들을 모욕하고, 거간꾼과 가마군들은 조정 관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큰 길과 작은 마을들에서는 유언비어에 동요하고, 도적이 성해서 백주에도 약탈을 감행하며, 이웃 나라와 수호(修好)를 맺고 통상하는 것을 의심하여 믿지 않고,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있으며, 조세 운반선들은 스스럼없이 기일을 지체시키고, 싣고 온 알찬 곡식은 배가 닿자마자 환색(換色)되어 집니다. 호구(戶口)와 결총(結總)은 모두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윤음(綸音)과 관칙(關飭)이 널리 반포되지 않으며, 표창하여도 권면이 되지 않고 벌을 주어도 잘못을 고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내탕고(內帑庫)가 고갈되고, 밖으로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습니다. 삼강(三綱)의 윤리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일체 경서(經書)와 예법과 음악이 제 길을 잃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비방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무슨 수로 집집마다 알려주어 풍속을 고치겠습니까? 기강을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논한 의견이 오늘날의 병통을 깊이 잘 지적하였다.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대의 이 상소와 같이 결함에 대하여 지적하여 진달하게 한다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매우 가상하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 사과(前司果) 김노승(金魯昇)이 상소하여, 재정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돈놀이하여 백성들에게서 이자를 받아내는 것은 비단 체면을 훼손시킬 뿐 아니니, 어찌 폐단을 낳게 함이 없겠는가? 나라에 일이 많아서 미처 그 말을 실천할 겨를이 없다. 그대의 말도 후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건용(李建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 중궁전(中宮殿)께서는 문왕(文王)의 비 태사(太姒)와 같은 성인으로서 높고 빛나는 덕을 지니고 17년 동안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하의 정사를 길이 도와 복을 누리도록 하였으며, 대궐에서 나라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빌어 복이 오고 재앙이 물러가게 하였으며, 위험한 나라의 형편을 안전한 데로 돌려세웠습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에서 보지 못한 큰 경사입니다. 그러니 예조 당상(禮曹堂上)으로 하여금 좋은 날을 받아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 예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때가 어찌 존호를 올려 아름다운 덕행을 찬양할 시기겠는가?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면전에서 아첨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정종악(鄭鍾岳)이 상소하여, 화양 서원(華陽書院)을 복구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김긍현(金兢鉉)이 상소하여, 성덕을 쌓기에 힘쓰고, 세자(世子)를 잘 보도(輔導)하며, 어진 관리를 등용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절약과 검박을 장려하고, 탐오한 자를 징벌하며, 과거(科擧)의 규율을 세우고, 전세(田稅)를 정하며, 의리를 밝히고, 군사를 양성할 것 등 10가지 조항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시무(時務) 10조(條)는 체계가 정연하여 옛날 원칙에도 맞고 오늘의 현실에도 부합된다. 참으로 훌륭한 말이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15일 무술
특별히 부사과(副司果) 어윤중(魚允中)을 제수(除授)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부사과(副司果) 김봉기(金俸基)가 상소하여, 인재를 추천하고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서 당색(黨色)을 따지는 폐단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로서는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 선차적인 것은 없다. 위정(爲政)의 도리를 한 마디로 다 말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9월 16일 기해
전 오위장(前五衛將) 조붕근(趙鵬根)이 상소하여, 백성들을 모으고 재정을 늘리는 방도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그대의 생각대로 한다면 백성들을 집결시키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거두어들이면 결국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9월 17일 경자
전교하기를,
"협상할 문제가 있으니,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와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을 하직(下直) 인사는 그만두게 하고 며칠 안으로 길을 떠나 함께 천진(天津)으로 가게 하라. 이런 이유로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지어 들여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18일 신축
전 우후(前虞候) 방기원(方夔源)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늘날 나라의 사세는 재물을 늘린 다음에야 지출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광석을 캐는 한 가지 문제를 놓고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잘 캐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기술자를 초빙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 생긴 진흙땅 논밭과 임금이 준 궁방(宮房)의 전장(田莊), 적몰(籍沒) 토지에 대해서는 모두 엄격히 조사하여 조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는 문벌을 따지지 말 것에 대해 이미 하교를 받은 이상 큰 신임을 밝혀야 합니다. 여러 나라들과 통상을 한 이후로 근거 없는 말들이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이것을 마땅히 엄하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각도(各道)의 화전(火田)들에서 받는 전세(田稅)는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충당하게 하지 말고 나라의 비용에 보태어 쓸 것입니다. 조운(漕運)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폐단을 응당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병덕(金炳德)에 대해서는 온 도의 백성들이 교체될까봐 걱정하고 있으니, 10년 동안 잉임(仍任)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은 시폐(時弊)에 매우 간절하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19일 임인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에 가둔 죄인 백낙관(白樂寬)을 엄하게 추핵(推覈)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현재 나라의 비용이 모자라는 조건에서 경사(京司)에서만 돈을 주조하여서는 아직도 넉넉하지 않으니 또 송도(松都)에다 설치하면 그 성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기무처(機務處)로 하여금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복시(司僕寺)의 하인들이 그 무리 중 한 놈이 억울하게 포도청(捕盜廳)에 갇힌 도적의 공술에 의하여 잡혀서 갇혀있다고 하면서 무리를 지어 해청(該廳)에 뛰어들어 돌을 던지고 소란을 피웠으며 옥문을 부수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놓아주었으니, 이는 규율과 크게 관계되는 것으로서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맨 먼저 발기한 몇 놈을 형조(刑曹)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하여 진상을 밝혀내게 한 다음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0일 계묘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외람되게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은 것만으로도 매우 죄송스러운데, 이번에 또 다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더욱 황송하여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위기를 수습하는 데는 적임자를 얻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신과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직임을 함부로 제수하시면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라에서 형식적인 예절만 숭상하고 실제의 일을 무시하여 폐단에 이르렀는데, 다시 그 잘못을 답습하고 있으니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혜성(彗星)의 변고가 대단히 두렵습니다. 그러나 신이 듣건대, 천명(天命)이 이미 떠나면 재변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은 어질고 사랑스러워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꼭 부지하여 온전하게 해주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나 변고를 내려 보내어 경고하고, 재변을 내어 경고하는 것도 이미 명백한 일인 것입니다. 최근에 천문가(天文家)들은 서양의 추산법(推算法)을 배워 일식(日食)이나 별들의 변화를 다 사전(事前)에 추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의 일과는 관계없다고 합니다.
아! 이러한 주장은 실로 후세에 가서 나라가 패망할 시초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중간급 이하의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 되고 악을 버리게 되자면 반드시 위에서 권고하고 징계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임금보다 더 높은 분이 없는 조건에서 만일 잘못이 있으면 누가 제한시키겠습니까? 존귀하고 두려운 것은 오직 하늘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또 무엇을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장우(張禹)와 왕안석(王安石)이 천고의 죄인을 면치 못한 것은 임금의 잘못을 미봉하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지금 만일 서양 학설을 가지고 전하께 이야기하면서 하늘의 변고가 현행 정사와 관계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중국에는 해당되지만 우리나라와 꼭 관계될 것은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소인(小人)이 전하를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엄하게 배격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하늘에 유구한 국운을 기원하고자 하시면 응당 사람을 등용하고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힘쓰는 일보다 우선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을 등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성탕(成湯)이 어진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편벽되게 치우치지 않은 것처럼 하며 널리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야 합니다.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반드시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연(鳶)을 멈추고 글을 받아들인 것처럼 하여야 하고, 제(濟) 나라 환공(桓公)이 야인(野人)의 구구술(九九術)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인 것과 같이 한 다음에야 하늘의 재앙을 막을 수 있고 나아가서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령(政令)과 조치에서 그저 형식만 갖추고 체면상에서만 강구한다는 것은 이번에 신에게 대간(臺諫)의 벼슬을 맡긴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귀머거리나 소경에게 귀와 눈 노릇을 하는 책임을 지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은 인재등용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전번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면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는데, 받은 비답에서는 정중히 호출하면서 심지어 말을 진달하였으니 몸도 관청에 나와야 한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더욱 송구스러웠습니다.
옛날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전체 관리들에게 현행 정사에 대하여 의견을 아뢰라고 하명하였더니, 마주(馬周)가 상하(常何)를 위하여 대신 수천 마디의 말을 써서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태종(太宗)은 서둘러 마주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송(宋) 나라 태조(太祖)도 동쪽 수도에 행차하자 장제현(張齊賢)이 10개 조항의 대책을 아뢰었습니다. 태조가 아홉 가지 계책은 다 좋지만 한 가지는 좋지 못하다고 하자 장제현은 버티면서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태조는 화가 나서 도끼자루로 그의 이빨을 쳐서 부러뜨렸습니다. 신이 진달한 의견에 대해서는 감히 마주와 같은 처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제현이 당했던 것과 같은 노여움을 당하여 신이 설사 죄를 받게 된다고 한들 신에게야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하교에서 좋다 나쁘다 하는 가름이 없이 예사로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서 미진한 것인데 어떻게 하늘이 영원한 운명을 줄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비지(批旨)에서 형식적인 것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하였는데 그저 성상을 위하여 또 한번 형식적인 말을 첨부하였으니, 성상을 번거롭게 한 죄는 이에 이르러 더욱 무겁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대간의 직임을 체차(遞差)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함부로 의견을 아뢰는 자들을 징계하소서. 신의 강직(講職)과 연함(筵銜)을 태거(汰去)하고 소명(召命)을 영원히 취소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천문 현상으로 경고를 보여주고 있으니 하늘이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한창 자신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는 나로서는 오늘 그대의 상소를 접하고 보니 더욱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워하게 된다. 지난번 상소에 대한 비답은 나의 심중의 생각을 털어놓은 것인데, 그대는 형식적인 것으로 보고 의연히 물러가려고 하니, 이것은 나의 성의가 모자라서인가? 부지런히 패초하여 호출하는 것이나 번거로운 문자 또한 형식이다. 그대가 만일 반드시 오게 하려는 나의 뜻을 이해하였다면 여러 번에 걸친 유시를 기다리지 않고 선뜻 일어나 조정에 나와야 할 것이다. 지금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곁에 자리를 비워놓고 어진 신하가 오기를 기다리며 자나깨나 애타게 생각한다. 그대는 속히 길을 떠나서 훌륭한 계책을 다 진달함으로써 송 나라 태조나 당 나라 태종만 역사에서 훌륭한 이름을 독점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영릉군(瀛陵君) 김응하(金應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하늘의 도가 밝아서 중궁전(中宮殿)께서 환궁(還宮)하셨으며 조정에 있는 숱한 신하들은 자기의 직책을 지키면서 왕정(王庭)에 늘어서 있었는데 한번 소요스러운 사변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각자 처자들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자기의 임금과 나라를 등지고 있습니다. 수령(守令)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조세를 받고 환곡(還穀)을 조적(糶糴)할 때에 배나 더 받아들여 자기 배를 살찌우려고 하고 있으며, 남들을 효도스럽지 못하고 화목하지 못한 죄에 몰아넣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협하고 천만 전(錢)을 탈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지에 빠진 백성들은 거의 모두 변란을 생각하고 나라가 망하기만을 원하고 있으니, 이것을 놓고 볼 때 어찌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고 백성이 백성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석(朝夕)으로 삼가하면서 삼대(三代) 때의 정사를 다시 밝히소서. 현명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려 뽑고 출척(黜陟)을 엄하게 밝히소서. 저궁(儲宮)은 한 나라의 근본이니, 예부터 성왕(聖王)은 항상 교도(敎導)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서늘한 가을날이니 사(師), 부(傅), 강관(講官)을 불러다가 세자(世子)의 학문을 권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출척을 엄하게 밝히는 것은 과연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변응수(卞應洙)가 상소하여, 세곡(稅穀)을 화륜선(火輪船)으로 운반하고, 환곡(還穀) 원곡은 모두 백성들에게 유치해두고 그 이자만 취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화륜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것은 참으로 편리하지만 아직 대신 사용해보지 못하였으니 쉽게 말할 수 없다. 환곡 원곡은 유치해두고 이자만 취하는 것은 규정된 제도는 아니지만 또한 현행 난국을 타개하는 방도이다."
하였다.
유학(幼學) 조문(趙汶)이 상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의학기술을 각국에서 배워 그 정묘한 기술을 취하고, 사치한 기풍을 억제하며, 호포(戶布)를 없애고, 조운(漕運)은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임선(賃船)하여 자체로 바치게 하며, 환곡(還穀)에 대해서는 그 원래의 환자곡[元還上穀]은 눌러두고 단지 이자만 받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이치에 맞고 질박하다만 채택하기에는 부족하다. 폐단에 대해 말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부장(部將) 이용인(李容仁)이 상소하여, 전결(田結)·환곡(還穀)·역토(驛土)의 폐단에 대하여 진달하고, 이어서 백성들을 안정하게 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재정을 운영하는 방도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논의한 일곱 조항은 모두 시폐(時弊)에 간절한 것이고, 역토의 폐단에 대해서는 따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비준(批准)하였다.
9월 21일 갑진
구완식(具完植)을 금위영 대장(禁衛營大將)으로, 정하원(鄭夏源)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9월 22일 을사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특별히 김옥균(金玉均)을 제수하여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민영목(閔泳穆)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범조(鄭範朝)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한조(鄭漢朝)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백낙관(白樂寬)의 문제로 말하면 얼버무리며 끝내 솔직하게 진술하지 않기 때문에 자복을 받기는 곤란합니다. 형추(刑推)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유학(幼學) 김병설(金炳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6월의 변고는 하늘의 원칙에 어그러지고 윤리를 파괴한 것으로서 바로 온 나라에 생을 둔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원통해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삼가 그때 지은 자문(咨文)을 보니, ‘여러 군사가 상신(相臣)을 위협하여 해치고 그 길로 왕궁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 이하의 몇 구절은 신하로서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어서 실로 자세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왕궁을 침범하였다.’라고 하고 끝에 가서는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다.’라고 하였으니 자문을 지은 고약한 자는 무엇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한창 천지가 뒤집힐 위험에 처하여 있을 때 역도(逆徒)의 괴수도 아직 잡아내지 못하고 처단도 하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의 분노도 아직 풀지 못한 형편에서 글을 만들 때에는 의리상 응당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복이라고 귀착시켰으니 그 심보를 구명해 볼 때 흉악한 심보가 이현일(李玄逸) 무리와 꼭 같았으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떳떳한 도리를 파괴하고 임금과 나라를 저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놓고 말하더라도 중궁전(中宮殿)께서 입던 옷을 놓고라도 장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을 때 여러 신하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의견을 올리면서 가슴이 아프고 쓰려 어찌할 줄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심상하게 여기며 대뜸 거행하였습니다. 만일 사람의 도리와 신하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문을 지은 경우와 한 가지이면서 두 개 측면입니다. 이와 같이 딴마음을 품은 무리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두 잡아 죽이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관리들은 잠잠해 있으면서 항장(抗章)하거나 규탄할 것을 청하는 조치가 없으므로 신은 북받치는 울분을 누를 길 없어 이렇게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조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충직한 의견이 대각(臺閣)에서 나오지 않고 벼슬하지 못한 유생에게서 나온 것은 뜻밖이다."
하였다.
유학(幼學) 고영문(高穎聞)이 상소하여 시무책(時務策)을 진달 하였는데, 첫째는 서구(西歐)의 기예를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을 널리 구하되 순차를 밟지 말고 승급시켜 등용하는 것이며 셋째는 채광(採鑛)을 하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50호(戶)로 1구(區)를 만들고 매 구마다 구장(區長) 한 사람을 두는 것이며, 다섯째는 상회소(商會所)와 국립은행(國立銀行)을 설치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인천항(仁川港)에 해군을 두는 것이고, 일곱째는 불필요한 직임과 잡공(雜貢)을 없애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7조목은 모두 시무에 절실하고 긴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시행해야지 갑작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기(燕岐)에 사는 유학(幼學) 이민성(李敏性)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이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왕조의 형식적인 폐단과 같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위로는 경제(經濟)의 계책과 아래로는 도필리(刀筆吏)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종이 위의 공문(空文)이 되었으니, 이러고도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온갖 폐단 중에서 사치하는 것이 가장 큰 폐단입니다. 제한된 물건을 제멋대로 한정 없이 소비하고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함을 해치며, 기이한 물건만 귀중히 여기고 쓸모 있는 물건은 천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곤궁에 빠지고 재정은 딸려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일어난 변란도 실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급히 성상부터 대우(大禹)처럼 검소한 음식과 옷차림을 하고 위(衛) 나라 문공(文公)처럼 굵은 베와 굵은 비단으로 옷을 해 입으셔야 합니다. 음사(淫祠)·창희(倡戲)·잡기(雜技) 등 일체 쓸데없이 허비하는 비용은 하루속히 금지하며, 필요치 않은 벼슬은 없애버리고 군현(郡縣)의 아전(衙前) 수를 줄이는 일 또한 순차로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호포(戶布)와 조세를 비롯한 각종 잡색(雜色)·연역(烟役)은 빨리 재감(裁減)하고 10분의 1의 옛 세금제도를 회복하며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이 넉넉지 못한 경우에는 비용을 줄여야지 백성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科擧) 공부만을 하는 습성을 고쳐 한결같이 《주례(周禮)》의 빈흥(賓興)하던 법을 따르고 한(漢) 나라, 당(唐) 나라의 향거(鄕擧)를 참작하여 확고한 법을 정해야 합니다.
관직에 맞는 적임자를 가리고 재능에 따라 직책을 맡기며, 임기를 길게 하여 성과를 책임지도록 하고, 공과(功過)를 고과하여 출척(黜陟)한다면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힘쓸 것입니다. 큰 근본이 서게 되면 온갖 일이 모두 바르게 될 것인데, 성실한 마음으로 실질적인 일을 행한다면 무슨 일을 한들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형벌을 과도하게 하지 않고 상을 참람하게 하지 않으며, 경사가 있다고 해서 사유(赦宥)를 행하지 말고, 관작으로 노고에 보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재정이 많고 넉넉하며 상하(上下)가 서로 미덥게 되면 풍화(風化)가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고 말이 순해질 것이며, 분수가 크게 정해지면 기강(紀綱)이 설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학교에서 선비를 양성하고 사당(祠堂)·서원(書院)을 다시 설치하며, 군액(軍額)·양전(量田)·조적(糶糴)·조운(漕運)·기계(機械)·저축(儲蓄)·연무(鍊武) 등의 정사를 따라서 일일이 닦아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전에 사치를 부리고 탐오하던 기풍과 뇌물을 주고 청탁하던 습성, 세력 있는 자들의 집으로 쫓아다니던 행동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권위가 높아지고 사기(士氣)가 충천할 것이며, 외교를 통하여 외모(外侮)를 막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기응변하여 앉아서 다른 풍속을 제압할 수 있게 되며, 우리 덕교(德敎)의 근본으로 저들의 말엽적인 기예를 막게 될 것이니, 그 경중이 이미 판명된 이상 강약은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하의 총명하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이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는 일을 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아주 쉬울 것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오늘의 변란을 이르게 한 그 과오를 이미 뉘우치신 것은 마치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이 들었다가 다시 밝아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애통한 교서와 포유(布諭)하신 윤음은, 말은 지극하지만 그 실효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경계와 백성들의 원망이 아직도 전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가생(賈生)이 이른바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 그치겠습니까? 경서(經書)에,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기를, ‘먼저 그 말을 행한 후에야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오늘날 일은 말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애써 시행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진부한 유생의 말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원칙을 지키라는 논의와 권도(權道)를 잘하라는 식견은 비록 즉시 그 말을 행할 수는 없지만, 읽고 나니 마음이 매우 석연해진다."
하였다.
순흥(順興)에 사는 유학(幼學) 안창렬(安昌烈)이 상소하여, 강학(講學)에 힘쓰고, 대궐을 엄숙히 지키며, 사부(師傅)를 선발하고, 언로(言路)를 넓히며, 부세(賦稅)를 덜고, 유포(儒布)를 없애며,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을 복구하고, 탐관오리를 징벌하며, 재능 있는 장수를 고르고, 사치한 기풍을 억제하며, 이액(吏額)을 줄일 것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11조목은 적절하고 상세하며, 나라를 위하는 확고한 마음에 대하여 매우 가상(嘉尙)히 여긴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3일 병오
전교하기를,
"이번 증광 감시(增廣監試)는 다른 과거와 다르니 시임 사(時任師)와 시임 부(時任傅), 원임 사(原任師)와 원임 부(原任傅) 및 시임 빈객(時任賓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아들·사위·아우·조카로서 생진시(生進試) 복시(覆試)에 응시하여야 할 사람들은 모두 특별히 복시의 방말(榜末)에 붙이라."
하였다.
민정(民丁)들을 선발하여 집결시키고, 오장경 군문(吳長慶軍門)에 관원을 파견하여 교습(敎習)을 요청하라고 명하였다. 오장경 군문(吳長慶軍門)에서는 곧 경자군영처무(慶字軍營處務)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하고 1개 군영(軍營) 500인(人)을 선발하여 ‘신건친군독(新建親軍督)’이라고 이름하고 총병(總兵) 왕득공(王得功)과 함께 훈련시켰다. 아울러 제독(提督) 주선민(朱先民), 총병 하증주(何增珠)를 계속 파견하여 1개 군영 500인을 보충 선발함으로써 훈련을 진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김영수(金永壽)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윤식(金允植)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김기수(金綺秀)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김연수(金演壽)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운익(鄭雲翼)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양주화(梁柱華)를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판교(判校) 방효린(方孝隣)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6월의 변란에 대해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의대(衣襨)를 가지고 상례(喪禮)를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더라도 예당(禮堂)의 직책에 있는 자로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합당한 예를 고집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경솔하게 거애(擧哀)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소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백관이 복을 입는 것을 그만두라는 하교를 받은 뒤에는 의리상 마땅히 자핵(自劾)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편안히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었으니 명분과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또 삼가 그때 지은 자문(咨文)의 내용을 보니, ‘제군(諸軍)이 상신(相臣)을 위협하여 해치고 그 길로 왕궁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 이하 몇 구절은 신하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었습니다. 이미 ‘왕궁을 침범하였다.’라고 하고 끝에 가서는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한창 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달이 어둡게 된 때를 어떻게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해당 문임(文任)이 윤리(倫理)를 업신여기고 해친 것으로 말하면 끝이 없습니다. 모두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포의(布衣)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대의 상소가 연이어 이르렀으니, 여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9월 24일 정미
양사(兩司)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대사헌(大司憲) 홍종헌(洪鍾軒), 대사간(大司諫) 신봉관(申奉寬), 집의(執義) 조한익(趙漢益), 정언(正言) 조성학(趙性鶴)이다.】 "아! 6월의 변란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없었던 변고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문임(文任)이라는 자가 지은 자문(咨文)의 내용 중에는 더없이 슬퍼하고 가슴아파하는 뜻은 전혀 없고, 도리어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의대(衣襨)를 가지고 권도(權道)로 장례를 지내는 문제에 있어서도, 설사 거행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마땅히 시종 반대의견을 올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일반 관례의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여기며 문득 안을 마련하여 반포함으로써 결국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소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강상(綱常)을 망치고 예법을 그르치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불경(不敬)한 죄에 대하여 처벌하여서 무엄(無嚴)한 죄를 징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때의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임응준(任應準),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회정(李會正)에게 우선 마땅히 다스려야 할 형률을 적용하시어 국법이 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넉 달 동안 잠잠히 있다가 유생의 상소문이 올라와서야 비로소 말하는 것인가? 두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처분하겠다." 하였다.
【원본】 23책 19권 7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 정론-정론(政論)
"아! 6월의 변란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없었던 변고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문임(文任)이라는 자가 지은 자문(咨文)의 내용 중에는 더없이 슬퍼하고 가슴아파하는 뜻은 전혀 없고, 도리어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의대(衣襨)를 가지고 권도(權道)로 장례를 지내는 문제에 있어서도, 설사 거행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마땅히 시종 반대의견을 올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일반 관례의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여기며 문득 안을 마련하여 반포함으로써 결국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소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강상(綱常)을 망치고 예법을 그르치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불경(不敬)한 죄에 대하여 처벌하여서 무엄(無嚴)한 죄를 징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때의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임응준(任應準),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회정(李會正)에게 우선 마땅히 다스려야 할 형률을 적용하시어 국법이 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넉 달 동안 잠잠히 있다가 유생의 상소문이 올라와서야 비로소 말하는 것인가? 두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처분하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람들의 시비가 드세게 일어나는 데에는 어찌 그럴 만한 까닭이 없겠는가? 사체(事體)가 달려있는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당시의 문임(文任) 임응준(任應準)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회정(李會正)에게 도배(島配)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생진시(生進試) 초시(初試) 중에 나이가 80세 이상 되는 사람과 69세 되는 사람은 특별히 회시(會試) 방말(榜末)에 붙여서 널리 경사를 함께 하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유학(幼學) 권기선(權起善)·박희양(朴羲陽)은 모두 대신(大臣)의 손자로서 마침 해액(解額)에 들어있으니 특별히 복시(覆試) 방말(榜末)에 붙이라."
하였다.
김기석(金箕錫)을 총융사(總戎使)로, 이규원(李奎遠)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김윤식(金允植)을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잉대(仍帶)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호조 좌랑(戶曹佐郞) 김정균(金禎均)을 영선사(領選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차하(差下)하고, 하직인사를 하지 말고 며칠 안으로 길을 떠나게 하라."
하였다.
9월 25일 무신
전교하기를,
"이번 별시(別試)의 한성부(漢城府) 문천(文薦)은 일찍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지낸 사람과 반당(泮堂)·경조 당상(京兆堂上)이 분배하여 각기 천거하게 하고, 무천(武薦)은 각영(各營)의 장신(將臣)이 분배하여 각기 천거하되, 천거 단자(薦擧單子)를 만들어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에 보내게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재차 차자를 올려, 두 죄인(罪人)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실정을 밝혀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에 대한 처분은 진실로 인정과 법에 합당하니, 더는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행 부제학(行副提學) 김윤식(金允植), 응교(應敎) 김사철(金思轍), 부응교(副應敎) 정인학(鄭寅學), 교리(校理) 유진옥(兪鎭沃)과 박제빈(朴齊斌), 수찬(修撰) 홍학주(洪學周)와 임영상(林永相), 부수찬(副修撰) 윤영식(尹榮植)과 조상학(趙尙學)이다.】 "6월의 변란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의대(衣襨)의 일에 대해서는 일이 급박하여 권도(權道)에 따라 예법을 변통하였다고 핑계 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과연 얼마나 신중해야 할 일이었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명백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백번 반대의견을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의리상 봉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몇 차례 상소(上疏)와 계사(啓辭)를 올린 것을 가지고 책임을 때운 듯이 여기고는 경솔하게 포고(布告)하여 중외(中外)에서 상복을 입게 하였으니, 신민(臣民)의 마음이라면 누군들 분하고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자문(咨文)을 지은 문임(文任)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없는 슬픔 속에 있던 그때를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말하여 말을 신중히 골라서 하지 않고 화단을 일으킬 마음을 드러냈으니, 어찌 어구(語句)를 우연히 잘못 고른 것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기강을 범하고 예법을 그르치며, 불경하고 무엄한 그 죄는 그저 도배(島配)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더 형률을 적용하여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주고 법을 바루기를 다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원본】 23책 19권 7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6월의 변란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의대(衣襨)의 일에 대해서는 일이 급박하여 권도(權道)에 따라 예법을 변통하였다고 핑계 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과연 얼마나 신중해야 할 일이었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명백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백번 반대의견을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의리상 봉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몇 차례 상소(上疏)와 계사(啓辭)를 올린 것을 가지고 책임을 때운 듯이 여기고는 경솔하게 포고(布告)하여 중외(中外)에서 상복을 입게 하였으니, 신민(臣民)의 마음이라면 누군들 분하고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자문(咨文)을 지은 문임(文任)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없는 슬픔 속에 있던 그때를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말하여 말을 신중히 골라서 하지 않고 화단을 일으킬 마음을 드러냈으니, 어찌 어구(語句)를 우연히 잘못 고른 것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기강을 범하고 예법을 그르치며, 불경하고 무엄한 그 죄는 그저 도배(島配)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더 형률을 적용하여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주고 법을 바루기를 다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9월 26일 기유
문후관(問候官) 이재덕(李載德)과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재덕은 사폐(辭陛)하였고, 어윤중은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어윤중에게 하교하기를,
"대원군(大院君)의 행차가 언제쯤 환국(還國)할 수 있겠는가?"
하니, 어윤중이 아뢰기를,
"신이 대원군을 위해서 돌려보내 줄 것을 이 중당(李中堂)에게 청하였더니 중당이 말하기를 ‘한 1∼2년이 지난 뒤에 천천히 해 보자. 지금은 황제께 번거롭게 청하기 곤란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재덕에게 하교하기를,
"이번 행차에서 이홍장(李鴻章)과 장수성(張樹聲)에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여 될수록 가까운 기일 안에 기필코 돌아오시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듣자니 원납(願納) 문제로 백성들이 많이 갇히고 이미 여러 달이 지났다고 하니, 정상이 매우 불쌍하다. 원납 문제와 관련한 죄는 모두 논하지 말고 당일로 방송(放送)하도록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 분부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3차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회정(李會正)에 대해서는 참작하여 용서할 단서가 없지 않으니, 더는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임응준(任應準)의 문제는 처분하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대(事大)를 하는 문자(文字)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한데도 화(禍)를 복(福)이라고 하여 어의가 정반대로 되었다. 대간(臺諫)들의 글이 날마다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여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배(島配)한 죄인 임응준(任應準)에게 안치(安置)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유중교(柳重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사람은 그 중간에 위치하여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천지를 주관하고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은 하나의 도(道)일 뿐입니다. 도란 펼치면 삼강(三綱)이 되고 세우면 오상(五常)이 되는데, 중국에서 이를 행하여 만대(萬代)에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제대로 시행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단지 이적(夷狄)의 풍속이 그 정사와 교화를 어지럽히고 이단의 음사(淫邪)한 설들이 사람의 양심을 망치면서 서로 승부를 겨루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온 세계를 휩쓸고 다니는 양이(洋夷)들은 음사가 극에 달해 귀매(鬼魅)가 된 자들입니다. 대개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지는 서쪽 수만리 밖에 위치하여 천지의 극히 편벽된 기운만을 얻어 그 하찮고 사사로운 지혜가 원래 기타 이적과는 또 달라서 상도(常道)에 반하고 정도(正道)에 어긋남이 더욱 심합니다.
천지를 모욕하고 오행(五行)을 난잡하게 만들며 인귀(人鬼)를 분별할 수 없게 혼란시키고, 이륜(彛倫)을 멸절시키며, 화색(貨色)으로 사람을 어지럽히니, 온갖 악이 여기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재예(才藝)의 민첩함과 술수의 정교함으로 마치 신기루의 환상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니, 그 때문에 세상에서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즐기며 정학(正學)에 싫증이 난 자들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워서 책상을 치며 좋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해독은 독화살이 사람의 몸에 박힌 것과 같고 용솟음치는 홍수와 같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니, 아! 차마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 바른 말로 배척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입장을 바꾸어 머뭇거리고 있으며, 아침에 정체를 감추고 돌아보기조차 꺼려하던 사람들이 저녁에는 얼굴을 드러내놓고 그 유익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으니, 두 태도 모두 천지개벽 이후 일대의 큰 변고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으로 반드시 서양 기술자들을 맞아들여 기술을 전수받아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고, 밖으로는 반드시 서양 나라들과 연합하여야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조석(朝夕)으로 화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학문에 대해서만 경계하면서 배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합니다. 아! 이 또한 대단히 생각 없는 말입니다.
신은 전 감역(前監役) 김평묵(金平默)과 더불어 고(故) 참판(參判) 이항로(李恒老)를 함께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김평묵으로 말하면 신에게 있어서는 동문(同門)이면서도 선배이기 때문에 신 또한 일찍이 채찍을 잡고서 그를 섬겼습니다. 이항로는 평생에 도를 강론하고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는 것을 첫 번째 의리로 삼았으며, 임종에 처하여 그가 간곡하게 가르친 것도 이 문제였습니다. 신과 김평묵은 삼가 이 뜻을 지키고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론(士論)으로 사정(邪正)의 소장(消長)과 관계된 것에서는 번번이 형적(形迹)에 구애되지 않았고, 유교를 부지하고 예수교를 억누르면서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여러 도에서 유소(儒疏)가 일어날 때 연명으로 투서하여 선비들의 기개를 격려하였으니 신 두 사람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때에 대간(臺諫)이 말하기를, ‘요즘 뜬소문이 떠돌아 민심이 동요되는 것은 사실 이 무리들이 조성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이 무리들 이란 바로 신 두 사람을 가리킨 것이고, 조성하였다는 지목과 선동했다고 한 것은 모두 이른바 사실을 말한 것이지 무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김평묵은 형벌을 받고 원찬(遠竄)되었고, 신은 옥에 나아가 자수하여 실토하며 같은 처벌을 줄 것을 청한 것인데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받고 함께 폐인이 되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김평묵은 풀려나왔으나 그 사전(赦典)은 매우 명분이 없으니 그의 몸은 비록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은 일찍이 세상에 명백히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서로 마주하기만 하면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마음이 편안치 못합니다.
관동(關東)에서 상소문을 올린 주모자로서 극형을 받은 자는 바로 신 두 사람에 대해서 모두 문도(門徒)로 자처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올린 이단을 배척하는 소장도 주된 뜻과 문맥이 모두 신들이 평소에 강론을 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으며, 시종 마음을 둔 바를 따져보면 모두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히 공정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딴마음이 없었음은 천지 귀신이 굽어 살펴보는 바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때문에 도리어 임금을 범하며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한 죄로 지목될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 사람을 죽게 만든 근본 원인은 실로 신 두 사람인데, 김평묵은 그래도 한 번 죄를 받았으나 신은 편안한 가운데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므로,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보기조차 부끄러워 꿈속에서도 놀라 깨어날 뿐 아니라 때때로 한밤중에 통곡을 하면서 자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심중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우러러 호소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고 유사(有司)에게 특명을 내리시어 사적(仕籍)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국론과는 다른 이론(異論)을 세우고 유생들을 격동시켜 상소를 올리게 하며, 조정의 명을 어긴 것 등 신이 전후로 범한 여러 가지 죄목을 사패(司敗)에 부쳐 해당 형률(刑律)로 감죄(勘罪)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고 사사로운 분수에 편안하게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스스로를 서구(西歐)의 호걸(豪傑)에 비교하고자 하는가? 독서한 사람도 이러할진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근거 없는 말에 동요하는 것이야 무슨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학(幼學) 조문(趙汶)이 상소하여,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개편하고, 호포(戶布)를 없애며, 군안(軍案)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이근만(李根萬)이 상소하여, 군포(軍布)·조세·환곡(還穀)·병기와 관련한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시폐(時弊)에 자못 절실하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괴산(槐山)에 사는 유학(幼學) 박준구(朴準龜)가 상소하여, 속히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혁파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어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김상호(金商浩)가 상소하여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군영(軍營) 칭호를 없앨 것에 대하여 진달하고, 또 전 정언(前正言) 안종면(安鍾冕)은 바로 맹인을 데리고 점을 친 자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비가 맹인과 한 짝이 되어 임금을 속이고 재물을 취하였으니 저 천한 자의 자식을 조적(朝籍)에 올라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처분한 뒤에 무고(巫瞽)는 이미 내쫓았다. 그대의 말은 자못 충성스럽고 곧으니 높일 만하다."
하였다.
9월 27일 경술
의금부(義禁府)에서, ‘이재만(李載晩)은 흥양현(興陽縣) 녹도(鹿島)에, 권재두(權在斗)는 영광군(靈光郡) 임자도(荏子島)에 모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춘당대(春塘臺)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다.
전 수찬(前修撰) 이최영(李㝡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자니, 요즘 감시(監試) 복시(覆試)를 보이는 과장(科場)에서 진시장(陳試狀)을 거짓으로 제출한 자가 100명(名)쯤 되고, 시권(試券)을 이중으로 바친 자가 100명쯤 되며, 초시(初試)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응시한 자도 많다고 합니다. 법과 기강이 전혀 없고 선비들의 기풍이 더할 나위 없이 방탕해졌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만일 차례대로 묶은 다음에 낙제를 맞은 시권을 가져다가 검토해 보면 시험지를 이중으로 바친 것과 초시를 거치지 않은 자와 가짜 진시장(陳試狀)을 제출한 자는 일일이 드러날 것이니, 그 죄에 따라 징벌한다면 이런 폐단은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또 초시인(初試人)으로서 나이가 80세 이상 되는 사람과 69세 되는 사람은 모두 방말(榜末)에 붙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노인을 우대하며 경사를 널리 함께 하려는 성대한 덕과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70세 이상 되는 사람들만 유독 은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땅히 하나로 보아 은혜를 널리 베푸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가짜 진시장을 제출하거나 이중으로 답안지를 바치거나 함부로 응시하는 폐단은 엄격히 신칙하고 징벌해야 한다. 그리고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은 또한 짐작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9월 28일 신해
전교하기를,
"금년 봄의 감시(監試) 복시(覆試) 때 사(師)와 부(傅),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아들·손자·조카로서 방(榜)에 특별히 붙여주기로 한 자들은 이번 증광시(增廣試)에 일체 방방(放榜)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진사(進士) 김유균(金有均)과 김정균(金定均)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강준영(姜濬永), 제술(製述)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윤태준(尹泰駿)과 진사(進士) 이조연(李祖淵)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할 자격을 받은 윤태준(尹泰駿)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9월 29일 임자
부수찬(副修撰) 조상학(趙尙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 문임(前文任)의 상도(常道)에 어긋난 음흉한 말과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예법을 그르친 불경스러운 죄는 그저 안치(安置)시키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속히 왕부(王府)를 시켜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밝혀내도록 하소서.
이달 10일에 있었던 차대(次對)에서 진달한 조항들을 보니 동백(東伯)의 보고와 관련하여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에 공명첩(空名帖)을 500장(張)을 한정해서 만들어 줄 것에 대한 문제를 진달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위에서는 하늘의 재변이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잘못된 소문이 떠돌고 있으며 백성들은 의구심을 품고 있어 진정시키고 무마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시기이며, 나라의 창고는 바닥이 드러나고 나라의 일은 미처 경황이 없는 때입니다. 그리고 육상궁(毓祥宮)이 화재를 당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아직 재건하지 못했고, 경복궁(景福宮)에 이어(移御)할 것에 대한 명은 경비를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철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 차마 부처를 섬기는 것을 일로 삼고 절간을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보고하고 올리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 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공명첩에 대한 하교는 즉시 거두어주시고 속히 육상궁과 사당을 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의 문제는 이미 처분이 있었다. 그리고 상소 중의 문구에는 난잡하고 애매한 말들이 많으니 그대에게 파직(罷職)의 형전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형편이 황송하다면서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어 명소(命召)를 바쳤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경에게 의지하는 바와 경이 나라를 근본으로 삼는 바가 과연 어떠한가? 그런데 갑자기 난잡하고 애매한 말을 끌어들이고는 성 밖으로 뛰쳐나가 도리어 사체(事體)를 훼손시키는가? 그리고 지금은 백성들의 근심과 나라의 형편이 위급하기가 참으로 어떠한 때인가? 묘당(廟堂)에서 하루 동안만 일을 보지 않아도 매우 근심할 만하므로 이에 하유하여 명소(命召)를 돌려보내니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
하였다.
성이호(成彛鎬)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윤용구(尹用求)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대호군(大護軍) 윤병정(尹秉鼎)이 상소하여,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늙은 어미를 모시고 있기에 형편상 향리를 떠나기 곤란하다는 것을 진달하고, 이어서 호포(戶布)를 혁파하고 서원(書院)을 복구하며 이번에 중궁전이 은신해 있던 충주(忠州)에 행궁을 세워 그 사적을 기념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정리로 보아 참으로 그러하겠다. 경은 편할 대로 왕래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김달홍(金達弘)이 상소하여, 이번에 중궁전이 은신하였던 충주(忠州) 일대에, 인조(仁祖) 때 공주(公州)의 쌍수정(雙樹亭)에 대한 전례에 따라 궁을 세우고 비석을 세움으로써 경의를 표할 것을 청하고, 또 호포(戶布)는 혁파하고 서원(書院)을 복구하여야 한다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가지 조목 중에 취할 만한 것이 많으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강윤수(姜允秀)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벼슬은 안팎에 관계없이 오직 적임자여야 하고, 장차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치(內治)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안으로 정사와 교화를 잘하는 것은 과연 법을 다스리는 요점이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심양택(沈亮澤)이 상소하여, 군오(軍伍)·병기(兵器)·향곡(餉穀)의 폐단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30일 계축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재차 하유(下諭)하기를,
"조금 전에 별유(別諭)를 내려 나의 속마음을 다 이야기하였으므로 경이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릴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덧붙여 보내온 글을 보니 인혐하지 않아도 될 의리를 억지로 끌어대었으니, 노숙한 사람이 어찌하여 이렇듯 사리에 지나친 행동을 하는가? 사람들의 말에는 참으로 망녕된 것이 많은 터라 이미 처분을 하였으니, 경에게 더욱 무슨 편안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겠는가?
지금 추운 계절을 맞아 교외에 기거하면서 방황하는 것은 실로 걱정스럽다. 그리고 평소에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던 경으로서 어떻게 차마 이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 사적인 일을 말할 수 있으며 헛되이 날을 보내면서 서로 버티는 것 또한 어찌 사체(事體)이겠는가? 그래서 또 거듭 하유하는 바이니, 이 지극한 뜻을 이해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목말라 하듯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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