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8월

싸라리리 2025. 1. 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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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인

중궁전(中宮殿)이 환어(還御)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 예조(禮曹)의 당상(堂上),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時任閣臣), 그리고 봉영(奉迎)한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한 후 문안을 올렸기 때문이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신은 중궁전을 맞이하는 행차를 배종(陪從)하라는 명을 받고 수백리 길을 다녀왔습니다. 맑고 아름다운 가을 날씨에 왕후 전하께서는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돌아오셨습니다. 위로는 자전(慈殿)의 간절한 걱정과 아래로는 세자궁(世子宮)의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였기에, 역사에 없었던 이러한 큰 경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더없이 기쁜 마음은 중외(中外)가 똑같습니다."
하니, 봉조하                     강로(姜㳣)가 아뢰기를,
"오늘의 경사로 말하면 위로는 경사가 있기를 축수하는 세자궁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기쁜 마음을 위로 하는 것입니다."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오늘의 기쁨이야 어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환성(歡聲)과 화기(和氣)가 온 나라에 차고 넘칩니다."
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비단 신민들의 큰 경사일 뿐 아니라 종사(宗社)가 이로부터 반석같이 안정되게 되었으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중궁전이 돌아온 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걱정을 크게 위로하였고, 다음으로는 세자(世子)의 사모하던 마음을 위로하게 되었으니 매우 기쁘고도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당초에는 근심과 번뇌로 심신(心神)이 산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세자는 매번 중궁전에 대한 말만 비치게 되면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어찌 그러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령에게 고유하고 온 나라에 반포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즉시 명을 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신령에게 고유하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온 나라에 반포하는 것은 거리끼는 바가 있어 지금 망설이고 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같은 큰 경사에 대해 어찌 아래에 반포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습니까?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으니 즉시 하교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화재가 났다.

 

전교하기를,
"오늘 오시(午時)에 육상궁(毓祥宮)에 화재가 났는데 신주(神主)를 받들어 내오지 못하였다고 하니, 너무나 놀랍고 송구스럽다. 제반 의절(儀節)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해 들이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육상궁에 화재가 났을 때 냉천정(冷泉亭)의 어진(御眞)을 임시로 송죽정(松竹亭)에 봉안(奉安)하였다. 환안(還安)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전에 원(園)에 화재가 났을 때 위에서 변복(變服)하고, 정전(正殿)을 피하며,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3일 동안 음악을 중지했던 전례(前例)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당의 신주를 모셔 내오지 못한 것은 원에 화재가 났던 것과는 그 중함이 자별(自別)하니, 위에서 변복하고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응당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처음 있는 일이라서 본조(本曹)에서는 감히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내(大內)에서 거애할 것이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문안하고 입시(入侍)하였을 때,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사우(祠宇)는 공경하고 삼가야 할 중요한 곳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인적도 드문 곳인데, 어찌하여 오늘날 화재가 나는 경보(警報)가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필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궁속(宮屬)들 가운데 응당 문초해야 할 사람들을 형조(刑曹)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내게 한 다음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육상궁(毓祥宮)의 화재 때 살피지 못한 차지 중관(次知中官) 이유정(李裕鼎)은 파직(罷職)하고, 수직관(守直官) 박윤진(朴潤珍)은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구완식(具完植)을 총융사(總戎使)로 삼았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부덕한 탓에 6월의 변고를 초래한 것이다. 의리(義理)가 땅을 쓴듯이 사라지고, 의대(衣襨)가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 그러나 천도(天道)가 다시 밝아지고 나라의 법이 그런대로 펴졌으며 중궁전(中宮殿)도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 있겠는가? 그대는 응당 함께 이것을 기뻐할 것이다.
일본인(日本人)들이 항구와 내지(內地)를 열고 경성(京城)에 군사를 주둔시키게 된 것은 공법(公法)이 통행(通行)되는 데 관계되고, 또한 일의 계기가 그럴 만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학식이 깊고 세상사에 정통하니 또한 잘 알리라 생각한다.
지금 안위(安危)의 계기를 돌아보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 힘써 정력(精力)을 들여 다스리기를 도모하며, 온갖 정사를 새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산림(山林)의 덕망있는 선비가 바른 말을 올려 깨우쳐주고 새로운 정사를 이룩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대는 사임하겠다는 글을 다시는 올리지 말고 마음을 돌려 조정에 나와 옆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8월 2일 을묘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하고 나서 칭경(稱慶) 진하(陳賀)할 때, 왕세자(王世子)가 전문(箋文), 치사(致詞), 표리(表裏)를 올리는 예를 행하는 절차를 규례대로 마련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규례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특별히 경범 죄수들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8월 3일 병진

특별히 이돈우(李敦禹)를 발탁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고, 특별히 박종현(朴宗鉉)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한 것은 바로 나라의 큰 경사이니, 중국(中國)에 자문(咨文)으로 보고하고 이웃 나라에 서계(書契)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추어 자문을 짓게 하고 재자관(齎咨官)은 역관(譯官) 변원규(卞元圭)로 정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우현(金禹鉉)·조상학(趙尙學)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전 충청도충청도 병마절도사(前忠淸道兵馬節度使)                     구완식(具完植)은 우선 겸대(兼帶)하게 하고, 그가 거느리던 병정(兵丁)들은 총융청(摠戎廳)에 유속(留屬)시켜 그대로 성 밖에 주둔하면서 착실히 훈련하게 하고, 그동안 병영(兵營)의 영무(營務)는 우후(虞候)로 하여금 대신 관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방금 해백(海伯)의 장계(狀啓)를 보니, 해주(海州) 등 제읍(諸邑)에서 표호(漂戶)나 퇴호(頹戶)가 된 민가(民家)와 무너져 내린 전묘(田畝)가 이와 같이 많으니, 극심한 재해가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맛있는 음식도 편안치 못하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조석영(趙奭永)을 위유사(慰諭使)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재해 입은 지방에 달려가 하나하나 상세히 살펴서 집을 짓고 안주시킬 방도에 대해 도신(道臣)과 잘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라. 재해 입은 전묘는 모두 전재(全災)로 주고, 물에 빠져죽은 사람은 원래의 휼전(恤典)외에 별도로 더 돌보아 도와주고 생전에 지고 있던 신포(身布)와 환포(還布)는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재해를 구제한 상황을 상세히 등문(登聞)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을 안쓰럽게 여기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분부하라."
하였다.

 

8월 4일 정사

성이호(成彛鎬)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삼가 전교(傳敎)가 내린 것을 보니, 해주(海州) 등의 읍(邑)에서 표호(漂戶)나 퇴호(頹戶)가 매우 많으니, 재령 군수(載寧郡守)                     조석영(趙奭永)을 위유사(慰諭使)로 차하(差下)하라고 명(命)하셨습니다. 해당 수령은 당하(堂下)이니, 위유어사(慰諭御使)로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단부(單付)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호위를 간편하게 하고 달려가서 덕의(德意)를 선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수신 대사(修信大使)를 특명 전권 대신 겸 수신사(特命全權大臣兼修信使)로 다시 하비(下批)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노익동(盧翼東), 이병익(李秉翼), 유긍수(柳肯秀)가 장오(贓汚)를 범한 것이 이와 같이 많은 것은 극히 통탄할 일이다. 노익동과 유긍수는 모두 추조(秋曹)에서 장오한 수량대로 추징하게 한 뒤에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다음 원악도(遠惡島)에 안치(安置)하라. 이병익의 경우에는 장오를 범한 것이 더욱 많으니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도내(道內) 수령 중에서 명사관(明査官)을 따로 정하여 장오한 것을 낱낱이 따져서 모쪼록 확실한 근거가 있으면 감히 사정(私情)을 보지 말고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한규직(韓圭稷)이 장오를 범한 수량이 5만을 넘으니, 놀라움과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즉시 장오한 수량대로 추징하고 극형을 시행해야지만, 지난해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 약간의 노고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추징하는 것은 면해 주고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다음 사형을 감하여 원악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용천 전 부사(龍川前府使)                     홍운섭(洪運燮)이 장오를 범한 것이 이와 같이 낭자하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왕부(王府)로 하여금 형구(刑具)를 채워 나수(拿囚)하여 엄히 조사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은 지 오래인데, 위에 있는 자들이 그대로 둔 채 내용을 묻지 않았기에 아전(衙前)들이 이로 인해 간사한 짓을 하여 피폐하지 않은 고을이 없게 되었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자식의 고통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팔도(八道)의 도신들로 하여금 도내의 폐단을 모두 열거하게 하고, 이어 바로잡아 구제할 방도를 진달하게 하라. 만일 그 대책이 없으면 대책이 없다고 현록(懸錄)하고 먼 도(道)는 5개월, 가까운 도는 3개월 이내에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내게 하라. 만일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여 형식적인 것으로 여겨 왕명을 받들어 행하기를 성실치 못하게 하면 속이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8월 5일 무오

편전(便殿)에 나아가 일본 공사(日本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냉천정(冷泉亭)의 어진(御眞)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영의정(領議政)이 나가 봉심(奉審)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현륭원(顯隆園)을 봉심하는 일은 송 판부사(宋判府事)가 나아가라."
하였다.

 

조희순(趙羲純)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유만주(兪萬柱)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삼았다. 유만주는 남대(南臺)로 제수한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현륭원(顯隆園)의 원 주위의 석물(石物)을 고쳐야 할 길일(吉日)이 다가왔으니, 본부(本府)의 유수(留守)로 하여금 감동(監董)하여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 해부(該府)는 사무가 번잡하여 민력(民力)에 겨를을 낼 수 없으니, 내년 봄으로 물려서 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군민(軍民)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라는 내용으로 방(榜)을 붙여 유시(諭示)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듣자니 난(亂)의 괴수 중에 여전히 법망을 빠져나간 자가 있고, 나머지 잔당들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으며, 도망친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고향을 떠난 유민(流民)들은 아직 모여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어찌 몇몇 사람의 죄 때문에 죄 없는 군민들로 하여금 이런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너희들에게 유시하니, 만일 난의 괴수를 체포해 들이는 자가 있으면 1인(人)당 상으로 100금(金)을 주고 따로 포장(褒獎)하는 은전(恩典)이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 협박에 못 이겨 추종한 무리들은 결단코 죄를 추궁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다시는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속히 고향으로 돌아와 안주하라.’는 내용으로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게시(揭示)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바다의 한 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외국과 교섭한 적이 없으므로 견문이 넓지 못한 채 삼가고 스스로 단속하여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근년 이래로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판이하게 되었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같은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는 정교하고 이로운 기계를 새로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배나 수레를 타고 지구를 두루 돌아다니며 만국(萬國)과 조약을 체결하여, 병력(兵力)으로 서로 견제하고 공법(公法)으로 서로 대치하는 것이 마치 춘추 열국(春秋列國)의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홀로 존귀하다는 중화(中華)도 오히려 평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고, 척양(斥洋)에 엄격하던 일본(日本)도 결국 수호(修好)를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니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참으로 형편상 부득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병자년(1876) 봄에 거듭 일본과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맺고 세 곳의 항구를 열었으며, 이번에 또 미국·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와 새로 화약(和約)을 맺었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너희 사민(士民)들이 의심하고 비방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교제의 예(禮)는 똑같이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니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장애될 것이 없고, 군사를 주둔시키는 의도는 본래 상업 활동을 보호하는 데 있으니, 사세(事勢)를 놓고 참작하더라도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
교린(交隣)에 방도가 있다는 것은 경전(經典)에 나타나 있는데, 우활하고 깨치지 못한 유자(儒者)들은 송(宋) 나라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하였다가 나라를 망친 것만 보고 망령되이 끌어다 비유하면서 번번이 척화(斥和)의 논의에 붙이고 있다. 상대쪽에서 화의를 가지고 왔는데 우리 쪽에서 싸움으로 대한다면 천하가 장차 우리를 어떤 나라라고 할지를 어찌하여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도움 받을 곳 없이 고립되어 있으면서 만국과 틈이 생겨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면 의리에 있어서도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는가? 의론하는 자들은 또 서양 나라들과 수호를 맺는 것을 가지고 점점 사교(邪敎)에 물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을 위해서나 세교(世敎)를 위해서나 깊이 우려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수호를 맺는 것은 수호를 맺는 것이고 사교를 금하는 것은 사교를 금하는 것이다.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다만 공법에 의거할 뿐이고, 애초에 내지(內地)에 전교(傳敎)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너희들은 평소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익혀왔고 오랫동안 예의(禮義)의 풍속에 젖어 왔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도(邪道)를 따를 수 있겠는가? 설사 어리석은 백성들이 몰래 서로 전습(傳習)한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에 그 방도가 없다고 근심하겠는가?
그리고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 것을 본받는 것을 보기만 하면 대뜸 사교에 물든 것으로 지목하는데, 이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종교는 사교이므로 마땅히 음탕한 음악이나 미색(美色)처럼 여겨서 멀리하여야겠지만, 그들의 기계는 이로워서 진실로 이용 후생(利用厚生)할 수 있으니 농기구·의약·병기·배·수레 같은 것을 제조하는데 무엇을 꺼려하며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종교는 배척하고, 기계를 본받는 것은 진실로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약(强弱)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저들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저들의 침략을 막고 저들이 넘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안으로 정교(政敎)를 닦고 밖으로 이웃과 수호를 맺어 우리나라의 예의를 지키면서 부강한 각 나라들과 대등하게 하여 너희 사민들과 함께 태평 성세를 누릴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지난번에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을 익히 보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마침내 6월의 변고가 일어나 이웃 나라에 신의를 잃고 천하에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나라의 형세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배상금은 거만(鉅萬)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언제 우리를 학대하고 모욕하며 화의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나 다만 우리 군민들이 함부로 의심해서 멀리하고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서 이렇게 까닭 없이 먼저 범하는 행동이 있게 되었다.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너희들은 생각해 보라.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일처리가 대강 이루어져서 옛날의 우호관계를 다시 펴게 되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또 뒤이어 와서 조약을 맺고 통상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 만국의 통례(通例)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니, 결코 경악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각기 두려움 없이 편안히 지내면서 선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를 지으며, 다시는 ‘양(洋)’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 각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는 비록 외국인이 한가로이 다니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기고 먼저 시비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저들이 능멸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있다면 응당 조약에 따라 처벌하여 결단코 우리 백성들을 억누르고 외국인을 보호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아! 어리석으면서 제멋대로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이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하면 왕법(王法)에 주벌하는 데 해당한다. 가르쳐주지도 않고 처형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 되므로 이와 같이 나열하여 명백히 유시한다. 그리고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에 관한 비문들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너희 사민들은 각기 이 뜻을 잘 알라.’는 내용으로 의정부로 하여금 게시하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게 하라."
하였다.

 

8월 6일 기미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 제독(中國提督)                     정여창(丁汝昌)을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부터 동가(動駕)할 때,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은 융복(戎服)과 통개(筒箇)는 착용하지 말고 흑단령(黑團領)에 검(劍)을 차게 하며, 병판(兵判)과 별운검(別雲劍)은 군복을 입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달 9일은 바로 우리 익종(翼宗)의 탄신일이고, 연이어 중궁전(中宮殿)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의식이 있으니, 고유제(告由祭)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날에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해야할 것이고, 동궁(東宮)도 따라서 나아가 예를 행해야 할 것이다. 백관(百官)은 참석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수신사(修信使)의 행차가 며칠 내로 있을 것입니다. 부정자(副正字)                     서광범(徐光範)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7일 경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각 전궁(殿宮)에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도(天道)가 도우시어 나라의 운세가 크게 새로워졌고 무녀성(婺女星)이 빛나 상서(祥瑞)를 불러들이니 왕비(王妃)가 환궁(還宮)하게 되었다. 이에 윤음을 선포하여 팔방(八方)의 백성들에게 유시(諭示)하노라.
부덕하고 어리석은 내가 외람되이 어렵고 큰 사업을 계승하였다.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부여해 준 임금의 자리에서 항상 깊은 못 가에 서 있고,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듯한 경계하는 마음을 두고 있으니,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큰 비에 원망하고 탄식하는 백성들을 두고 비단옷을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은들 마음이 어찌 안 할 수 있겠는가? 정사를 위해 걱정하고 애쓰느라 한가할 겨를이 없이 하루에도 만기(萬機)를 처결하고, 휴척(休戚)을 끊임없이 해 온지 지금 19년이 되었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는 의리가 있는데, 일찍부터 현비(賢妃)가 안을 다스린 공(功)이 있었다. 봄가을로 제수(祭需)를 올리는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공경하고 삼가하였으며, 밤낮으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면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풍화(風化)에 근본하였고, 아들을 낳은 경사가 있어 우리 왕가가 백세토록 번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6월 10일에 천고(千古)에 없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 우리 동방 예의의 풍속에서 어찌 이 지경에까지 창궐한단 말인가? 전에 없던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차마 말할 수 없었고, 믿는 것은 신명(神明)이 보호해 주시는 것뿐이었다. 시일이 꽤 지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매우 다행스럽게도 중전은 당일 난을 당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변란에 대처하는 방도를 깊이 진념하여 차분한 태도를 지녔으니, 이는 《주역(周易)》의 험난함을 무릅쓰고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부합되고, 자취를 남 몰래 안정시켰으니 그 의리는 《논어(論語)》의 일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합하게 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이다.
처음에 신료들이 누차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반신반의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야 친척집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는 그지없이 기뻤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이 모두 똑같은 이상 맞이하여 환궁하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달 1일에는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하여 환궁하게 되었다. 겸손한 덕은 사가(私家)에 나가 있으면서도 자주 발로 되어 중전의 덕이 더욱 빛났고 건강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니 하늘이 복을 더욱 돈독히 내려주신 덕이다.
자전(慈殿)의 근심스런 마음이 풀리시자 온화한 목소리로 기쁨을 올렸고, 세자는 애모하는 마음을 펴게 되어 채색 옷을 입고 주변을 감돌며 춤을 추었다. 위기를 전환하여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었으며 밝은 운수를 맞아 아무리 옛것이라도 새로워졌다. 이미 묘(廟)와 궁(宮)에 공경히 고하였으니 조야(朝野)에도 널리 전하고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는 마음을 미루어 은혜를 널리 베풀 것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날로 새로워질 방도를 깨우쳐주니, 구습(舊習)의 때를 다 씻어야 할 것이다.
이달 7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에 해당하는 자를 모두 용서하라.
아!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니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의지하여 큰 기업(基業)을 태산(泰山)이나 반석(磐石) 보다 튼튼히 하고, 우주가 길이 안정되게 하여 백성들이 태평 성세의 아름다움 속에 깃들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정범조(鄭範朝)가 지었다.】


【원본】 23책 19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영접관(迎接官)이, ‘이번에 진하(陳賀)할 때 중국 영관(中國領官)        하증주(何增珠)가 하인 2명(名)을 거느리고 반열을 따라 예(禮)를 행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일본 공사(日本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오늘 출발하여 귀국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희영(李熙榮)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훈춘(琿春) 사람이 공문(公文)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우리나라의 빈민(貧民)들로서 국경을 넘어가 땅을 차지하고 개간한 자에 대해 본국(本國)의 공문을 받아서 세금을 수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의 각 아문(衙門)이 회답을 받아 길림(吉林)과 훈춘에 행회(行會)하였으니, 길림과 훈춘의 관부에서는 세금 수납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답하는 조회(照會)를 지체해서는 안 되므로 일단 결재하여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조사하는 기일을 약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봄에 이미 자문(咨文)을 보내 회답하였으므로 이번에 철저히 조사하는 기일을 약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이 좋은 쪽으로 헤아려 처리한 뒤에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8일 신유

수신 부사(修信副使)는 전권부관 겸 수신부사(全權副官兼修信副使)로 하비(下批)하라고 명하였다.

 

전권 대신 겸 수신사(全權大臣兼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전권부관 겸 수신부사(全權副官兼修信副使)                     김만식(金晩植), 종사관(從事官)                     서광범(徐光範)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조병직(趙秉稷), 예모관(禮貌官)인 보덕(輔德)                     조정희(趙定熙), 선교관(宣敎官)                     이건창(李建昌), 좌통례(左通禮)                     임백언(任百彦), 우통례(右通禮)                     목승석(睦承錫), 상례(相禮)                     윤정구(尹定求)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때 배종(陪從)한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호군(大護軍)                     민영목(閔泳穆), 이조 판서(吏曹判書)                     정범조(鄭範朝), 지종정경(知宗正卿)                     이명응(李明應),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김기석(金箕錫), 병조 참판(兵曹參判)                     오하영(吳夏泳), 행 도승지(行都承旨)                     윤용구(尹用求), 필선(弼善)                     이중칠(李重七)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한 일과 관련한 경과(慶科)는 무슨 과거(科擧)로 설행(設行)하며, 언제쯤으로 택일(擇日)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별시(別試)로 마련하고, 11월 10일경으로 택일해서 들이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                     조병호(趙秉浩)와 영장(營將)                     이병수(李秉洙)는 애초에 나와서 대기하지 않았으니, 사체(事體)의 도리로 보아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중군(前中軍)                     홍재희(洪在羲)는 공로가 많으니,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제수하라."
하였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어윤중(魚允中), 서상조(徐相祖), 정인학(鄭寅學)이다.

 

이응진(李應辰)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어윤중(魚允中)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박제교(朴齊敎)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전 주서(前注書)                     이봉구(李鳳九)가 상소하여, 지세(地稅)를 혁파하고 구전(口錢)을 징수하며, 각읍(各邑)의 이액(吏額)을 정하고, 지방 관리의 녹봉(祿俸)을 줄이며, 급하지 않은 관원은 줄이고, 무익한 경비는 덜어내며, 행상(行商)과 선고(船賈)들이 크게 이득을 보는 물건은 수량에 따라 세를 정하고, 법을 적용함에 있어 친소(親疎)나 귀천(貴賤)의 구별을 두지 말고, 재능 있는 사람을 구해서 특별히 공경(公卿)이나 장수의 직임의 반열에 들도록 제수(除授)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지위를 초월하여 정사를 말하였으니, 그 뜻이 또한 가상하다."
하였다.

 

전 봉상시 정(前奉常寺正)        김동식(金東軾)이 상소하여, 쓸모없는 관원은 태거(汰去)시키고, 궁녀(宮女)는 방출하고, 환관(宦官)은 줄이고, 1만 호(戶)가 차지 않는 소읍(小邑)은 다른 현(縣)과 합치며, 지방 관아의 아전으로 직임이 없는 자는 모두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국가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귀천에 한정하지 말며,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혁파하고, 신식 군사를 훈련시키며, 문무(文武) 과거를 반드시 면시(面試)할 것 등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충직한 말과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계책이 소원한 하급 관료에게서 나왔으니 매우 가상하다. 널리 하문(下問)하여 행하겠다."
하였다.

 

8월 9일 임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듣자니, 세선(稅船)들이 일제히 정박하여 막 창고에 넣을 때, 각궁(各宮)의 궁속들이 신구(新舊) 미수분(未收分)이라고 하면서 뱃머리에서 빼앗아 가고, 심지어 조졸배(漕卒輩)가 도망쳐 흩어지는 폐단까지 발생하여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서는 법에 따라 봉납(捧納)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들이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기강과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이제부터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다 봉납하기 전에 혹시라도 종전의 폐습(弊習)을 다시 자행한다면 해당 차지(次知)는 결단코 별도로 엄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사전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서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                     사인(舍人)                     원세개(袁世凱)를 접견하였다.

 

작헌례(酌獻禮) 때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법성창(法聖倉)의 기묘년(1879)과 경진년(1880)의 세곡(稅穀)에서 허류(虛留)된 채 아직 추쇄(推刷)하지 못한 몫인 8,000여 석(石)은 특별히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본창(本倉)의 사세로서는 실로 전부 추쇄하기는 어렵고, 경사(京司)의 재정이 몹시 군색하여 묘당(廟堂)의 계사(啓辭)가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0일 계해

행 호군(行護軍)                     한장석(韓章錫)과 이응진(李應辰), 부호군(副護軍)                     이건창(李建昌)은 모두 영구히 지제교(知製敎)에 부쳐두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별초군(別抄軍)은 원래 윗사람을 향하는 충심이 있었다. 이제부터 총융청(摠戎廳)에 소속시켜 거기서 훈련하고 통제하게 하라. 교련소(敎鍊所)의 교장(敎長)과 병대(兵隊)도 총융청에 소속시켜 종전대로 착실하게 훈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1일 갑자

중국 제독(中國提督)                     오장경(吳長慶)의 진영(陣營)에 동가(動駕)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중국(中國) 예부(禮部)에서 길림 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이 아뢴 것에 근거하여 길림 변경의 땅을 차지하여 경작하고 있는 조선 함경도(咸鏡道) 빈민들에게 모두 본국의 공문(公文)을 받아서 세금을 바치게 하고, 저들의 판도(版圖)에다 예속시켜 저들의 정교(政敎)를 따르게 하며, 밖으로 드러난 것은 연한을 정해 놓고 옷차림을 바꾸게 하겠다고 자문(咨文)을 보내 왔습니다.
중국이 우리 백성들을 즉시 쫓아내지 않는 것은 대체로 회유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쇄환(刷還)하는 일을 속히 도모하지 않으면 거의 막을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법의(法意)로 볼 때 어찌 빈둥거리며 헛되이 시간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자문을 지어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의 기수(旗手) 박성록(朴聖祿)이 흉도(凶徒)들을 붙잡는 일에 노고한 것이 매우 많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첩가(帖加)하게 하고, 은(銀) 100냥(兩)을 호조(戶曹)에서 내주게 하라고 명하였다.

 

8월 12일 을축

전 지평(前持平)                     이최영(李㝡榮)이 상소하여,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 대해 속히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경하와 신정희의 일은 이미 참작하여 처분하였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김규한(金圭漢)이 상소하여, 군제(軍制)를 익히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할 것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논한 바 군대를 다스리고 재용을 넉넉히 하는 방도는 참으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급선무이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서 취할 만한 것을 조목별로 보고하게 하겠다."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권종록(權鍾祿)이 상소하여 정사에 대해 말하고, 이어 충주 목사(忠州牧使)                     조병호(趙秉浩), 충주 영장(忠州營將)                     이병수(李秉洙), 죽산 부사(竹山府使)                     유동렬(柳東烈)이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때에 배종(陪從)하지 않고, 어공(御供)도 진상하지 않은 죄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 중에 자못 취할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조병호 등의 일은 엄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오경리(吳慶履)가 상소하여, 무사(武士)를 양성하고 시제(試制)를 고칠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우리의 정치 기구를 정돈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 말은 참으로 근본을 아는 논의이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서 편리할 지의 여부를 상세히 따져본 다음 들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이의용(李儀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현능(賢能)한 자를 등용하고 상벌(賞罰)을 명확히 하며, 세금을 가볍게 하고 사치를 금지하여야 하는 이 몇 가지 문제 중에서 현능한 자를 등용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공정한 마음도 현능한 자를 등용하는 근본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폐흥존망(廢興存亡)은 오직 마음이 공정한가 공정하지 못한가에 달려있다는 이 구절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또 사심(私心)의 폐해에 대하여 말한 것도 구구절절이 준칙에 합당한 말이니, 오늘날의 군신 상하(君臣上下)는 이것을 모두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8월 13일 병인

전교하기를,
"근래에 과거(科擧)의 폐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이번 별시(別試) 초시(初試)는 향공보거법(鄕貢保擧法)에 따라 설행(設行)하라. 그리하여 팔도(八道)의 도신(道臣)들은 열읍(列邑)에서 널리 채집하여 음사(蔭仕), 생원(生員), 진사(進士), 유학(幼學), 한량(閑良) 중에서 재덕(才德)이 평소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되, 문과(文科)는 효렴(孝廉), 학술(學術), 재서(才諝)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무과(武科)는 병학(兵學), 무예(武藝), 용력(勇力)의 세 부분으로 나눈 다음 이름을 열거하여 치계(馳啓)하라. 서울에서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선발하여 아뢰어 모두 경성(京城)에 모아 문무(文武)로 나누어 시취(試取)하게 하되, 문과는 정식(程式)에 구애하지 말고 질문에 따라 대책(對策)을 올리게 하고, 무과도 이름 순서대로 기예를 비교해 능한 자를 뽑게 하라. 만일 잘못하거나 함부로 추천한 일이 있으면 조만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니, 해당 도신과 판윤(判尹)은 중률(重律)로 시행할 것이다. 서울과 지방에서 선발하는 수효는 증광시(增廣試) 초시(初試)의 규례대로 정하되,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적절하게 헤아려 분배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다음 팔도와 한성부에 행회(行會)하게 하라."
하였다.

 

조경하(趙敬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원세정(元世𤋺)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8월 15일 무진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서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혜성(彗星)이 장숙도(張宿度) 안에 나타났는데, 북극성(北極星)과의 거리는 90도(度)이고, 꼬리의 길이는 1장(丈) 남짓 하였고, 빛깔은 창백(蒼白)하였으며, 12월에 가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먼 바다로 지나가는 이양선(異樣船)에 대한 문첩(文牒)이 왕래하는 데 걸핏하면 10일에서 15일까지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매번 배가 까마득하게 멀리 간 뒤에야 문제시되니, 일이 매우 할 말이 없게 된 채 그저 번잡스런 폐단만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배가 정박한 경우가 아니면 해당 지방에서 다시는 치보(馳報)하지 말도록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6일 기사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                     사인(舍人)                     원세개(袁世凱)와 영관(領官)                     하증주(何增珠)를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국가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 다행히도 천도(天道)가 다시 밝아져 중궁전(中宮殿)이 환궁(還宮)하였으니 경사를 함께하게 된 이때에 옛날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內外)의 사판(祠版)과 여성 부원군(麗城府院君) 내외의 사판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충정공(忠正公) 민승호(閔升鎬)의 사판에도 치제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두 부원군(府院君)과 충정공 민승호의 사판에 이미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때에 동궁(東宮)의 정리(情理)는 배나 서글프고 그리울 것이다.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계달(啓達)하여 일체(一體)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7일 경오

전교하기를,
"대원군(大院君)이 행차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나의 정사(情私)는 갈수록 근심스럽고 우울하다. 행 호군(行護軍)                     이재덕(李載德)을 문후관(問候官)으로 차하(差下)하여 빠른 시일 안에 길을 떠나게 하고, 그 까닭을 자문(咨文)에 갖추어 들여보내게 하라. 호행관(護行官)은 이미 제때에 모시고 가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우선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이재원(李載元)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부사과(副司果)                     이원기(李元祺)가 상소하여, 조운(漕運)에서 향(鄕) 선주(船主)가 삯을 주고 빌려 쓰는 여러 폐단에 대해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요즘 조운의 폐단은 과연 향 선주가 수송하는데서 연유하는가? 곳곳에서 농간 부리는 폐단이 경강(京江)의 선주에게만 없겠는가? 그대가 조운의 폐단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거든 의견을 갖추어 대책을 올리라."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구건희(具健喜)가 상소하여, 군비(軍備)를 잘 닦고, 농지세(農地稅)를 경감하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뇌물을 금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그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찌 잠시라도 마음에서 등한히 하겠는가?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니 두렵고 민망하다. 진달한 여러 조항은 시폐(時弊)에 매우 적중한 것으로 그 중에서도 절검을 숭상하고 뇌물을 금지하라는 두 조항은 더욱 절실한 것이니, 명심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이흥우(李興宇)가 상소하여,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기강을 세우며, 탐묵(貪墨)한 자를 징계하고, 삼정(三政)을 잘 다스리며, 궁위(宮闈)를 엄히 하고, 공도(公道)를 널리 펼 것 등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근래에 정사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대부분 시폐(時弊)를 논하였지만 이 상소처럼 절실하고 명백한 것은 없었다. 그대는 시골의 포의(布衣)로서 능히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평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김석렬(金奭烈)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첫째,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하며, 둘째, 군법을 엄격하게 세우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셋째, 탐묵(貪墨)한 자를 징계하고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을 임용하며, 넷째, 호포법(戶布法)을 혁파하고 명분(名分)을 바로 잡으며, 다섯째, 사우(祠宇)를 복구하고 성학(聖學)을 숭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귀향하기에 앞서 진언(進言)을 하였으니, 충후(忠厚)한 뜻을 볼 수 있다. 진달한 여러 가지 조항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8월 18일 신미

황해 감사(黃海監司)                     민치서(閔致序)가, ‘문화(文化) 등 읍(邑)의 민가(民家)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러한 농사철에 민호(民戶)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다니, 듣기에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원래의 휼전(恤典) 외에 별도로 더 돌보아 도와주고 제때에 집을 지어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분부하고, 위유 어사(慰諭御使)로 하여금 일체 효유(曉諭)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훈국(訓局)의 일에 대하여 신사(紳士)가 전후에 걸쳐 봉장(封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여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선 사실대로 점고(點考)하여 노약자와 이름만 허록(虛錄)하고 있는 자들을 태거(汰去)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해영(該營)에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환란을 겪고 나서 나 소자(小子)의 슬픈 마음이야 오히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충성스런 마음은 기쁨과 근심을 왕실(王室)과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런 참혹한 화를 당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대략이나마 애도의 뜻을 표하였으나 정문(情文)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니, 내가 신의를 저버린 것이 많다. 졸(卒)한 영돈녕(領敦寧)                                             【이최응(李最應)】                     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諡號)를 고쳐서 의망(擬望)해 들이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어찌 차마 소급해서 제기하겠는가? 두 중신(重臣)이 근로한 것이 남달랐고 내가 한창 무척이나 의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니, 슬프고 애석한 마음 지극하여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졸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겸호(閔謙鎬)와 김보현(金輔鉉)의 상(喪)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시호(詩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조상학(趙尙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6월의 일은 천지 만고에 없던 큰 변고입니다. 나라에서 대장(大將)을 설치하여 병권(兵權)을 맡기는 것은 병사를 다스려 나라를 보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에 안에서는 중전(中殿)께서 파천(播遷)을 가시고 밖에서는 대신(大臣)들이 상해를 입었으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훼손을 받았는데도, 이른바 대장이라는 자는 한 쪽에서 구차스럽게 태연히 살면서 군부(君父)의 위험을 좌시(坐視)하기를 진(秦) 나라가 월(越) 나라를 보듯이 하였습니다. 변란이 평정된 뒤에도 그 직임을 슬며시 차지하고 태연하게 자처하고 있으니, 그 충의(忠義)도 없고 염치도 없는 것이 어찌 이토록 극심한 지경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화란(禍亂)의 원인을 깊이 살피시고,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는 경계를 엄히 하시어 그 당시의 대장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게 모든 극률(極律)을 시행하여 전형(典刑)을 바로 잡으소서. 그런 다음에야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고 공분(公憤)을 달래어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요사이 항간에 요부(妖婦)가 감히 신령스런 관우(關羽)의 딸이라고 하면서 외람되이 요사한 사당을 지어놓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고 합니다. 속히 금지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은 대간(臺諫)의 체모를 깊이 체득한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이경하와 신정희의 일은 처분하겠다."
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이최영(李㝡榮)이 상소하여,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훈국(訓局)의 일은 사체(事體)에 있어서 당연하니, 처분하겠다."
하였다.

 

8월 19일 임신

총융청(摠戎廳)에서, ‘충청 병영(忠淸兵營)의 병정(兵丁) 292명(名)을 착실하게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추수철을 맞아 민정(民情)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40명씩 돌려가면서 훈련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풀어 보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는 지난번에 참작한 것이 있어 도배(島配)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공론이 거세게 제기되고 여론을 막을 수 없으니, 도배한 죄인 이경하와 신정희에게 모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조영하(趙寧夏)를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이용직(李容直)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면영(李冕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심이택(沈履澤)을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로, 이기호(李起鎬)를 부사(副使)로, 조종운(趙鍾雲)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기정(李基正)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가 곧 이어 체차(遞差)하고 장세용(張世容)을 임명하였다. 이상수(李象秀)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유중교(柳重敎)와 박문일(朴文一)을 지평(持平)으로, 이최영(李㝡榮)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이상수(李象秀)·유중교(柳重敎)·박문일(朴文一)은 남대(南臺)로 제수한 것이고, 이최영은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8월 20일 계유

사간원(司諫院)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대사간(大司諫)                           이면영(李冕榮), 헌납(獻納)                           김인식(金寅植), 정언(正言)                           이제승(李濟承)이다.】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 대해 시원스럽게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으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에 대하여 어찌 참작함이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이미 처분하였으니, 다시는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홍세섭(洪世燮), 부응교(副應敎)                           김용규(金容圭), 교리(校理)                           왕성협(王性協), 부교리(副校理)                           민영소(閔泳韶), 수찬(修撰)                           이최영(李㝡榮), 부수찬(副修撰)                           이국응(李國應) 등이다.】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 대해 시원스럽게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으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현재 나라의 형세는 몹시 위태롭고 백성들은 곤궁하기 그지없으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위급한 때입니다. 하늘이 우리 전하를 보살피고 도와주시니, 깊은 근심을 통하여 성덕(聖德)을 계발시키고 많은 어려움을 통하여 나라를 흥기시키려는 뜻일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시려고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시니, 이러한 때에 자신을 반성하여 결함을 드러내고, 인재를 찾아내어 등용하며, 아무리 작은 정령(政令)이라도 지극히 합당하도록 힘써 궁구해야만 그 명을 새롭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안주하면서, 덕화(德化)의 성대하게 이룩되는 것을 보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서울과 지방에서 봉장(封章)이 날마다 전하의 앞에 진달되고 있습니다. 시폐(時弊)를 논한 것이 좋은 말과 훌륭한 계책이 아님이 없으며, 채용하기에 적합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것을 첫째가는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절검이 숭상된 뒤에야 나라의 명맥을 오래가게 할 수 있고, 기강이 확립된 뒤에야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두 가지를 따르고서 법도를 세우고 기강을 편다면 전곡(錢穀), 갑병(甲兵), 예악(禮樂), 형정(刑政)은 차례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근본과 달도(達道) 또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 송(宋) 나라의 신하 사마광(司馬光)은 자기의 임금에게 고하면서, 마음을 닦는 요체에 대하여 인(仁), 명(明), 무(武)를 말하였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하여 임관(任官), 신상(信賞), 필벌(必罰)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실로 마음을 닦는 데로부터 기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인이라는 것은 자애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명정대한 것이고, 명이란 것은 명확하게 살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도 달리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이고, 무라는 것은 굳세고 용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결단을 내리고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늘 익히 듣는 말이기는 하지만, 안에서 나와 밖에 시행하는 것으로 실로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총괄해서 논해보면,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주는 법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주는 법이 없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쳐주는 법이 없습니다. 왕은 세 가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받들어 천하를 위하여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오늘날 기울어져가는 위태로운 나라를 부축하고 지켜서 아름다운 천명을 맞아 이을 수 있는 일대 기회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어렵고 걱정스러운 때를 당하여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갈수록 절실한데, 지금 아뢴 바의 여러 조항을 보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요체가 아님이 없으니 큰 띠에 써서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나를 보필해서 국사를 잘 처리하는 책임을 더욱더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이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면서 진달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서울과 지방에서 그전부터 지금까지 구포(舊逋)를 낸 관리들이 연줄을 대어 간악한 짓을 하여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니, 만약 관장(官長)이 잘못한 것이 없다면 어찌 누적되어 거액에 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랜 세월 쌓여온 고질적인 폐단을 이제 와서 깊이 따질 수 없지만 그 중에 혹 직접 떼어먹은 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지정해서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그저 빈 장부만 끼고 있다가 곧 휴지 더미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니, 이는 공공에 무익하여서 마침 백성을 괴롭히는 계제(階梯)로 되기에 알맞습니다. 안으로는 경사(京司)에서부터 밖으로 영읍(營邑)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데서는 3개월 안으로, 먼 데서는 5개월 안으로 재부(財賦)에 대해 아문(衙門) 및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포흠(逋欠)낸 장부를 조사하여 소상하게 등문(登聞)한 다음에 특별히 탕감해 주고, 새로 포흠 낸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엄히 신칙(申飭)하여 속히 청산하게 하고, 포흠을 낸 수괴(首魁)가 아직 살아있으면서 그의 친족이나 이웃에게 징수하도록 한 자도 치계(馳啓)하게 하여 일률(一律)로 시행해서 영원히 후일의 폐해를 막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빈둥거리며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결단코 엄하게 감처(勘處)하라고 아울러 분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포흠낸 것을 보충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실로 당장의 급선무이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고,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기필코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검찰사(檢察使)가 복명(復命)할 때 울릉도(鬱陵島)의 지도와 서계(書契)를 삼가 이미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섬은 바다 가운데 외딴 곳에 있는 하나의 미개척지로서, 듣자니 땅이 비옥하다고 합니다. 우선 백성들을 모집하여 개간하게 해서 5년 후에 조세를 물리면 절로 점차 취락(聚落)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남(兩南)의 조선(漕船)들이 여기에 가서 재목을 취해다가 배를 만들도록 허락한다면 사람들이 번성하게 모여들 것이니, 이것은 지금 도모해 볼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도맡아 다스릴 사람이 없어 잡다한 폐단을 막기 어렵다면, 성실하게 일을 주관할 만한 사람을 검찰사에게 문의하여 우선 도장(島長)을 차송(差送)하여 창립해서 규모를 제정해 두어 후일에 진(鎭)을 설치할 뜻을 미리 강구하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교관(敎官)                     조유선(趙有善)은 일찍부터 스승을 얻어서 이학(理學)에 전심(傳心)하였으며, 은거하고 있으면서도 혜택을 주는데 뜻을 두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쳐 뛰어난 인재로 성취시켜 선대(先代)의 위업을 실추시키지 않음으로써 후배들이 경앙(景仰)하게 되었습니다. 고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은 먼 변방 시골에서 떨쳐 일어나 사승(師承)을 말미암지 않고 궁리수신(窮理修身)하는 학문을 하고, 교화를 부지하고 세상 풍속을 맑게 한 덕택을 후생(後生)들에게 입혔으므로 심지어 관서(關西)의 공자(孔子)라는 칭호까지 있었습니다. 증 참판(贈參判)                     최신(崔愼)은 먼 변경 시골에서 생장(生長)하였으나 성리학(性理學)을 밝게 제창하였으며, 스승을 힘써 받들어 편파적이고 진실성이 없는 학설을 배척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을 기울여 도리를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찬하고 있습니다. 고 참의(參議)                     이상정(李象靖)은 과목 출신(科目出身)으로서,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학문에 힘써 도(道)를 즐기는 것을 지향하였으며 일생동안 《주서(朱書)》 1부(部)에 힘을 쏟았기에 그 고명한 견해와 독실한 실천력으로 온 영남(嶺南) 사람들이 그를 사도(師道)로 존중하고 있습니다.
이 4명은 모두 사문(斯文)을 발전시키고 풍속을 교화하는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전부터 나라 안에서 공론이 있었으나 포상(褒賞)하고 높일 겨를이 없어 답답하게 여겨 온 지 오랩니다. 모두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시행한다면 아마 유학을 도탑게 하려는 성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우창(洪祐昌)이 풍덕 부사(豐德府使)                     임효준(任孝準)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들면서 말하기를, ‘본부(本府)는 다시 설치된 이래로 고을의 형편이 쇠잔하여 정묘년(1867)부터 경진년(1880) 가을까지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도결(都結) 방식으로 상정법을 실시하다가 신사년(1881)에 다시 본색(本色)으로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읍(民邑)의 물력으로는 채울 방도가 없으니 대동미와 포량(砲糧)은 특별히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고을이 방금 다시 설치되어 규모도 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공납(公納)과 경비(經費)에 관계되는 것을 도결 방식으로 미봉해 왔는데, 이제 다시 본색으로 마련하게 한다면 도저히 채울 방도가 없는 것은 사세가 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공(正供)을 상정법에 따라 대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법전에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달리 변통할 방법이 없으니,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5년을 기한하여 대납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1일 갑술

편전(便殿)에 나아가 중국 제독(中國提督)                     황사림(黃仕林)과 유격(游擊) 하립조(何立朝)를 접견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용천(龍川) 같이 조그만 고을에서 홍운섭(洪運燮)이 장오(贓汚)를 범한 것이 이처럼 많으니, 몹시 놀랍고 한탄스럽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즉시 등문(登聞)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부사과(副司果)                     이재만(李載晩), 오위장(五衛將)                     권재두(權在斗)는 타고난 성품이 패려(悖戾)하고, 처신하는 것도 난잡하게 하니,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여 세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고,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법을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울산(蔚山)의 유학(幼學) 이경주(李敬柱)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훈국(訓局)의 영호(營號)를 바꾸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재덕(才德)을 우선하며, 검소함을 숭상하여서 재물을 절약하여야 할 것입니다.
계속하여 진달하기를, 경사(京司)에서 지방에 떼 넘기는 문제, 각읍(各邑)에서 체납(滯納)하는 문제, 목(木) 값이 배나 높아지는 문제, 조적(鑃糴)이 법에 어긋난 문제, 재결(災結)이 균등치 못한 문제, 토호(土豪)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문제 등 여러 가지 폐단도 헤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군영(軍營)을 변통할 것을 논한 일은 시의(時宜)에 매우 적합하다. 그 밖의 서울과 지방의 각종 폐단도 조목별로 분명하게 진달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소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속히 폐단을 바로잡아 구제할 방도를 도모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김재봉(金在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백낙관(白樂寬)의 범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로 잡으소서. 군상배(軍商輩)의 이른바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는 것은 도당(徒黨)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서 패악(悖惡)한 짓을 하고 난을 일으키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니, 앞으로는 엄히 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백낙관의 일은 처분하겠다. 그런데 이른바 사발통문’이란 것은 비도(匪徒)들이 난을 일으키기 위한 습속이니, 법사(法司)로 하여금 행회(行會)하여 법을 만들어서 엄히 금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이희봉(李羲鳳)이 상소하여, 학문을 숭상하고, 군제(軍制)를 다스리며, 인재를 선발하고, 사치를 금하며, 상벌을 명확하게 할 것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시폐(時弊)에 대해 누차 진달한 것으로 보아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알 수 있다. 다섯 가지 일은 모두 현재 절실한 급선무이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8월 22일 을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을 인견(引見)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심순택(沈舜澤)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가 곧바로 체차(遞差)하고, 민영목(閔泳穆)을 임명하였다.

 

통제사(統制使)의 외등단(外登壇)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포청(捕廳)에 수감 중인 죄인 김장손(金長孫)·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홍천석(洪千石)·유복만(柳卜萬)·허씨동(許氏同)·윤상룡(尹尙龍)·정쌍길(鄭雙吉)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와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이어 정국(庭鞫)을 하고, 위관(委官)은 영의정(領議政)이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백낙관(白樂寬)은 상소를 올린 내용이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여 무엄하기 짝이 없는데, 더구나 난리로 인하여 요행히 처벌을 모면한 것을 죄가 없는 듯이 여기고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임금의 기강이 달려 있는 바이니, 끝내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왕부(王府)로 하여금 형구(刑具)를 채워 잡아와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와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게 속히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의 일은 처분하겠다."
하였다.

 

8월 23일 병자

전교하기를,
"일전의 처분이 참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대간(臺諫)의 논의가 아직도 이와 같이 비등하니 여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위리안치 죄인(圍籬安置罪人)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게 가극(加棘)의 형률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전에 빈대(賓對)하였을 때 논하였던 관리 정원수와 비용을 줄일 것에 대한 일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대신(大臣)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열성조(列聖朝) 때부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경비를 쓰기 어려울 때마다 이러한 조치가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안팎으로 쓸데없이 나가는 비용이 끝이 없는 상황에서 변통이 없어서는 안 된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당상(堂上)과 회동하여 충분히 의논하고 헤아려서 어용(御用)의 선복(膳服)과 궁액(宮掖)의 인원수로부터 서울과 지방의 쓸모없는 관원과 이례(吏隷)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원을 넘는 인원과 쓸데없는 비용들을 적절히 재감(裁減)하도록 품처(稟處)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인명(李寅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민영목(閔泳穆)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원우상(元禹常)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금위영(禁衛營)의 초관(哨官)                     임기상(林琦相)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기강(紀綱)을 확립하여 쓸모없는 병사(兵士)를 태거(汰去)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세 납부를 지체한 고을을 조사하여 포흠(逋欠)낸 자를 엄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군전(軍錢)은 파군(疤軍)을 침탈하지 말고 대민(大民)으로 하여금 간략하게 수납(收納)하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포흠낸 환곡(還穀)을 엄하게 추쇄(推刷)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곡(斛)을 쓰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세자궁(世子宮)께서 강연(講筵)을 열어 학문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재용을 절약하며 다른 나라의 기호품을 금지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관직에 제수하는 것을 엄하고 공명하게 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뇌물을 엄히 금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상납(上納)하는 것 외에 더 분담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열째는 방백(方伯)·곤수(梱帥)·수령(守令)의 녹봉(祿俸)에서 5분의 1을 으레 호조(戶曹)에 바치게 하는 것이고, 열한째는 각궁(各宮)·각영(各營)·각사(各司)에서 거두어들인 것을 호조에 납입하게 하는 것이고, 열둘째는 각사에서 더 차출한 직임은 영구히 혁파하는 것이고, 열셋째는 주전(鑄錢)을 각별히 신칙하여 나라의 경비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열세 가지 일은 모두 다 절실하게 행해야 할 것들이다. 그대가 무신(武臣)으로서 능히 시무(時務)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서 품처(稟處)하게 하여 기필코 실효를 거두게 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지석영(池錫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현재의 대정(大政)으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 우선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이제까지 외교(外交)라곤 해본 적이 없기에 견문이 넓지 못하여 시국(時局)에 어둡습니다. 나아가서 교린(交隣)하거나 연약(聯約)하는 것이 모두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외무(外務)에 마음을 쓰는 자를 보기만 하면 대뜸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고 지목하며 비방하고 침을 뱉으며 욕합니다. 백성들이 서로 동요하면서 의심하고 시기하는 것은 시세(時勢)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안주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잘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삼가 생각건대, 각국(各國)의 인사들이 저작한 《만국공법(萬國公法)》, 《조선책략(朝鮮策略)》, 《보법전기(普法戰紀)》, 《박물신편(博物新編)》, 《격물입문(格物入門)》, 《격치휘편(格致彙編)》 등의 책 및 우리나라 교리(校理)        김옥균(金玉均)이 편집한 《기화근사(箕和近事)》, 전 승지(前承旨)        박영교(朴泳敎)가 편찬한 《지구도경(地球圖經)》, 진사(進士) 안종수(安宗洙)가 번역한 《농정신편(農政新編)》, 전 현령(前縣令)        김경수(金景遂)가 기록한 《공보초략(公報抄略)》 등의 책은 모두 막힌 소견을 열어주고 시무(時務)를 환히 알 수 있게 하는 책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원(院)을 하나 설치하여 이상의 책들을 수집하고 또 근래 각국의 수차(水車), 농기(農器), 직조기(織組機), 화륜기(火輪機), 병기(兵器) 등을 구매하여 쌓아놓게 하소서. 이어 각도(各道)의 고을마다 관문(關文)을 보내도록 명하여 한 고을에서 학문과 명망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 유생과 관리를 각각 1명씩 뽑아 해원(該院)에 보내서 그로 하여금 그 서적들을 보고 그 기계들을 익히 다루게 하소서. 그리고 원에 머무는 기간은 2개월로 하여 기한이 차면 다시 한 사람을 교체시켜 보내게 하고, 관(館)에 머물러있는 동안의 비용은 해읍(該邑)에서 헤아려 지급하게 하소서. 서적들을 정밀히 연구하여 세무(世務)를 깊이 알거나, 기계를 본떠서 만들어 그 깊고 신비한 기술을 모두 터득한 자가 있으면, 그 재능을 평가하여 수용(收用)하소서. 또 기계를 만드는 자는 전매권(專賣權)을 허가하고 책을 간행하는 자는 번각(飜刻)을 금하게 한다면 모든 원에 들어간 자들은 우선적으로 기계의 이치를 이해하고 시국의 적절한 대응책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려는 자가 없어 너나없이 빠른 시일 안에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번 깨우치면 이 사람의 아들이나 손자 및 이웃으로서 평소 그를 존경하여 심복하던 자들도 따라서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교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첩경(捷徑)이 아니겠으며, 이용 후생(利用厚生)하기 위한 좋은 법이 아니겠습니까? 백성들이 의혹을 풀고 안주하게 되면 나라의 힘을 강화하고 적을 막아내는 대책에 대해서는 모두 중국 사람의 저서인 《이언(易言)》 1부(部)에 실려 있으니, 신은 감히 덧붙여 진언(進言)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시무에 대해 말한 것이 명료하게 조리가 있어 일에 적용할 수 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서 재품(裁稟)하여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8월 24일 정축

국청(鞫廳)에서, ‘죄인 김장손(金長孫), 정의길(鄭義吉), 강명준(姜命俊), 홍천석(洪千石), 유복만(柳卜萬), 허씨동(許氏同), 윤상룡(尹尙龍), 정쌍길(鄭雙吉) 등을 모두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로 결안(結案)하고 법대로 처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올해 6월 10일에 대궐을 침범한 죄인들이다.】


【원본】 23책 19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4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정국(庭鞠)을 철파(撤罷)하라고 명하였다.

 

교서 판교(校書判校)                     방효린(方孝隣)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우리 조정에서 내외(內外)에 관직을 둔 것은 옛날의 법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관료들의 녹봉(祿俸)을 보면 내직은 박하고 외직은 후하니 마땅히 증손(增損)하여 균등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쓸모없는 관원은 없애고, 아전(衙前)의 액수(額數)를 줄이며, 낭관(郞官)이 된 자는 모두 조례(條例)를 익히게 하여 일마다 아전들의 말을 들어서 권한이 하급 관리에게 옮겨가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윤대(輪對)를 자주 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통하게 하며, 문신(文臣)들이 한학(漢學)을 강습(講習)하도록 신칙(申飭)하여 이웃 나라와 교섭이 있을 때 역원(譯員)에게 일임시켜 일이 소홀해질 염려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논한 것은 이미 정사의 요체를 알고 한 것이며, 또 시기에 적절한 것으로써 결코 무익한 말이 아니니, 매우 가상하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 재품(裁稟)하여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8월 26일 기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홍순형(洪淳馨)이, ‘본영(本營)이 구관(句管)하는 관서(關西)의 소미(小米) 2만 석(石)에 대한 올해의 모조(耗條) 2,000석을 규례대로 획급(劃給)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지방(支放)을 급대(給代)하는 것이 곧 연례(年例)로 되었으니, 해서(海西)에 있는 병인년(1866) 별비곡(別備穀)의 모조를 이 수량에 맞추어 획송(劃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경하(趙敬夏)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제관(朴齊寬)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조희일(趙熙一)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종의(尹宗儀)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                     이기호(李起鎬)를 병으로 체차(遞差)하고 민종묵(閔種默)을 임명하였다.

 

정언(正言)                     이의용(李儀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천하의 일은 ‘의리(義理)’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명분이 바르면 말이 이치에 순하고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나라에 큰 경사가 있고 나서 대사령(大赦令)이 있는 것은 천하의 공공(公共)된 의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후(母后)께서 변란을 당한 날에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경사를 널리 함께 한다는 것이 무슨 의리이며 대사령을 시행한다는 것이 무슨 명분이기에 도배(島配) 이하의 죄인들을 모두 사전(赦典)에 들일 수 있습니까? 이것을 명분이 바르면 말이 이치에 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명(聖明)의 정사라 하더라도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석방시킨 죄인들을 모두 다시 배소(配所)로 보내고 큰 경사를 치른 다음에 대사령을 시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전 죽산 부사(前竹山府使)                     유동렬(柳東烈)은 모후를 맞이할 때 일부러 피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며 어공(御供)도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말투가 불손하여 신하로서의 체모가 전혀 없었으니, 왕부(王府)에서 잡아와 속히 국법을 바로잡게 하소서.
돌아보건대, 지금의 가장 큰 급선무는 종사(宗社)와 백성들이 의탁하는 것인데, 이 일이 우리 저사(儲嗣)에게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히 신칙하고 금하여 살피시어 창우(倡優)가 공연하는 것이나 완호(玩好)하는 물건같은 것이 감히 저사의 앞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산림(山林)의 덕망 있는 선비 중에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자를 불러들여 곁에다 두고 날마다 연석(筵席)을 열어 정사(正事)를 보게 하고 정언(正言)을 듣게 하고 정도(正道)를 걷게 하여 하루속히 덕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화목하게 할 근본으로 삼게 함으로써 억만년토록 무궁할 유구한 국운을 기원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논의한 두 가지 일은 처분하겠다. 그리고 동궁(東宮)에게 학문을 권하는 방도는 더구나 급선무에 해당되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전함(前銜) 대신(臺臣)의 상소를 보니, 지난날 명분 없이 큰 혜택을 베푼 것은 참으로 지나친 것이었다. 변란 때문에 대사령(大赦令)을 행한다면 죄를 진 자들이 앞으로 요행으로 죄에서 벗어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니, 어찌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도리이겠는가? 6월 11일에 석방시킨 도배(島配) 이하의 죄인은 모두 다시 배소(配所)로 보내라. 유동렬(柳東烈)의 일에 대해서는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해서 법에 따라 엄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의 병환이 염려스럽다. 대관(大官)이 떠나거나 머무는 것은 진실로 자기 편할 대로 할 일이니,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신칙(申飭)한 것은 구애할 것이 없다. 정성스럽게 경계의 말을 진달한 데서 노성(老成)한 그대가 나랏일을 염려하는 지극한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그대의 목소리가 더욱 멀어질 것이니, 내가 이 때문에 몹시 서운하다. 경은 고향에 돌아가 조섭하고, 조금이라도 회복되거든 즉시 다시 조정에 나옴으로써 나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사직한 것 가운데 어영청 제조(御營廳提調)의 직임은 지금 우선 그대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겠다. 경은 이를 양해하라."
하였다.

 

호군(護軍)                     서경순(徐璟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외국과 통상하여 우호를 맺은 것은 시세의 추이에 따라서 허락한 것이고 저들의 욕망이 통상을 하자는 데 있는 만큼 그저 항구에서 장사만 하게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뒤섞이는 것만 금하면 그만입니다. 사적으로 바치는 것은 사양하여 받지 않고 예의로 대하는 것을 오래갈수록 더욱 후하게 한다면, 우리로서는 잃을 것이 없고 저들은 저절로 공경하고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민정(民情)에 몹시 고민되는 점이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고착된 마음이 없으므로 근거 없는 헛소문에 술렁거려 온 도(道)가 거의 비어 있고 시골에서는 바람이 부는 대로 고장을 떠나 흩어져가고 있어 허다한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며 어진 정사와 혜택을 풍족히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고무시킨다면, 모두 우러러 추대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보루가 되어 위급한 재난을 당한 경우에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서울과 지방의 군사제도에 더러 소루한 점들이 있으므로 외람되이 변변치 못한 의견을 대략 몇 조항 진달하겠습니다. 사전대책을 강구하는 데 별로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상소를 올리는 김에 함께 바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모두 살펴보고 헤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잘못을 힘써 지적하고 훌륭한 계책을 진달하였으니,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독실해짐을 알 수가 있다. 올린 책자(冊子)는 사변을 미리 방비하는 데 도움이 있으니, 안에 놓아두고 상세히 살펴보겠다."
하였다.

 

전 부사과(前副司果)                     이건용(李建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결가(結價)를 과도하게 징수하는 것은 백성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논밭을 일군 곳들에서 은결(隱結)을 찾아내고, 보(堡)와 제언(堤堰)으로 논을 만든 곳에 대한 수세(水稅)의 정식(定式)은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하나의 방도로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참(驛站)의 논을 도로 되찾아 폐단을 바로잡고, 아전(衙前)의 수를 감하(減下)함으로써 폐해를 제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결가의 폐해와 아전의 수에 관한 문제는 참으로 백성들을 몹시 괴롭히는 것들이다. 바로 잡을 방책을 강구해야 하니,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적절히 헤아려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직강(直講)                     유학수(劉學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일찍이 훌륭한 계책을 내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만한 뜻을 지닌 선비도 없지 않습니다. 현 시기의 정세와 관련하여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더욱 채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6월의 변고 때에 훈교(訓校) 양덕주(梁德周)가 떨쳐나서서 난적을 꾸짖다가 결국 그들의 칼날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럽고 열렬한 것에 대해서는 장려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극(加棘)한 죄인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게 속히 나라의 형률을 바로하여 공분(公憤)을 풀게 하소서. 숙위(宿衛)한 친병(親兵)에 대하여 말한다면 평소 받은 은택이 어떠하였는데도 적에게 맞서서 죽음으로 섬기는 의리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변복을 하고 숨었다가 도리어 추종배로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들을 다는 죽일 수 없지만 또한 그냥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명백하게 조사하여 형률을 시행해서 국법을 바루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가난하고 한미한 선비 가운데 훌륭한 계책을 내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만한 뜻을 지녀 시험해 볼 만한 자가 있겠지만,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 등용할 수 있겠는가? 양덕주의 일은 비록 비명(非命)에 죽기는 하였으나 그대가 들은 것과는 다르다. 말단에서 논한 일은 말한 것이 또한 일리가 있다."
하였다.
전 도사(前都事)                     최성환(崔瑆煥)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고, 또 《효경(孝經)》 장구(章句)의 아래에 경서와 사서(史書)의 요긴한 말마디와 옛사람들의 훌륭한 행실에 대한 글을 첨부하여 《효경대의(孝經大義)》라고 이름하였고, 또 고래(古來) 군신(君臣)의 선악(善惡) 중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을 모아 《고감(古鑑)》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중외(中外)에 널리 보임으로써 교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편찬한 《효경대의》와 《고감》 등 책에서 그대의 학술에 경위(經緯)가 있음을 알겠다. 속히 올려 보냄으로써 참고하여 볼 자료로 삼게 하라. 기타 진달한 여러 가지 조목은 말이 대부분 절실하니,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어 토의한 다음 품의해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27일 경진

심이택(沈履澤)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윤영신(尹榮信)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김흥낙(金興洛)과 소휘면(蘇輝冕)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삼았다. 김흥낙과 소휘면은 남대(南臺)로 제수한 것이다.

 

고(故) 영돈녕(領敦寧)                     이최응(李最應)에게 충익(忠翼)이라는 시호(諡號)를 주었고,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고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겸호(閔謙鎬)에게는 충숙(忠肅), 이조 판서                     김보현(金輔鉉)에게는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송관옥(宋琯玉)이 상소하여,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군사를 충실하게 하는 계책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논의한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도는 진실로 듣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요체는 어진 인재를 얻는 데 있는데, 어렵고 근심스러운 일들이 하도 많으니, 날이 갈수록 인재를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한탄하게 된다."
하였다.

 

출신(出身) 이현식(李賢植)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는 무지개가 나타나고 올가을에는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하늘이 경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정을 바루고 대궐을 엄숙히 통제하며 죄인을 엄하게 징토(懲討)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며 재용을 절약하고 명절(名節)을 숭상하며 검약하기에 힘쓰고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돌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하늘이 재변으로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수양하면 재앙을 화기로운 것으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연관된 것이 실로 두렵다."
하였다.

 

8월 28일 신사

전교하기를,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군총(軍摠)을 사열하겠다. 각영(各營)도 일체 점고(點考)할 것이니, 젊고 건장한 사람을 골라 군적(軍籍)에 올려두고, 그 나머지 노약자와 병이 있는 자들은 모두 재감(裁減)하라. 각 영의 장신(將臣)과 중군(中軍)은 모여 충분히 토의하여 기필코 실효를 거두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각 해영(該營)에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정응철(鄭應哲)이 상소하여,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에게 모두 속히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고,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서둘러 화를 피할 적에 궁녀(宮女) 중에서 호위하여 따라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때 입직(入直)하였던 중관(中官)과 궁인(宮人)들에게 모두 해당 형률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경하와 신정희의 일은 대신(臺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그리고 황급할 때에 미처 호위하여 따라가지 못한 것을 어떻게 일일이 심하게 주벌하겠는가?"
하였다.

 

전 충의(前忠義) 신홍집(辛鴻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우리나라가 여러 나라들과 통상을 하는 것은 형편상 부득이한 일입니다. 저들이 좋게 관계를 가지려고 오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약만을 고수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면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개항(開港)하고 공관(公館)에 머물지만 우리가 옷차림을 고치지 않고 예의와 교화를 예전처럼 하면 무슨 혐의쩍을 것이 있겠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과 뒤섞여 살게 되어 어리석은 백성들은 식견이 없어 의심과 비방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주저하지 마시고 온통 교린(交隣)의 방책에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사이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를 맺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실제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니, 반복하여 명백히 밝혔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심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8월 29일 임오

길주(吉州) 등 고을의 표호(漂戶)·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전 충주 목사(前忠州牧使)                     조병호(趙秉浩)가 원정(原情)에 운운(云云)하였는데, 공초할 때 범범하게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으니, 형추(刑推)하여 실상을 밝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엄하게 처분하여야 하겠지만 참작할 문제가 없지 않으니, 원지 정배(遠地定配)하라."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정종악(鄭鍾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6월의 변고는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도배(島配) 죄인들을 다 놓아주라는 명이 갑자기 이때 내렸기 때문에 이름이 죄적(罪籍)에 올라있는 사람이 발탁되어 등용되고 교외에 내쫓겼던 사람이 등용되어 나아갔습니다. 흉악한 역적의 인척이 먼저 홍문관(弘文館)의 장관으로 올랐고, 이어서 승정원(承政院)의 벼슬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역적의 친속들이 수령(守令)의 직임에 제수되기도 하고 혹은 낭관(郞官)으로 제수되기도 하는 등 마치 경사를 만났을 때 특별히 용서하고 공로가 있어서 꼭 보답해 주어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신은 이에 대해서 몹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시 의금부(義禁府)와 형조(刑曹)로 하여금 죄안(罪案)을 가져다 조사하여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도로 배소(配所)에 보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흉악한 역적과 연좌된 사람으로서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재변을 그치게 하고 재용을 절약하며, 문(文)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는 것은 실로 근본을 아는 논의이다. 그런데 6월의 사전(赦典)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한 바가 있다."
하였다.

 

 

 

8월 30일 계미

민영위(閔泳緯)를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유학(幼學) 이종석(李鍾奭) 등이 상소하여 《황명실록(皇明實錄)》을 간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황명실록》은 과연 희귀한 책이다. 물력(物力)이 좀 풀린 다음에 간행하는 문제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생원(生員) 최규집(崔圭輯)이 상소하여, 서원(書院)을 복구하고, 군복(軍服)을 고치고, 이웃 나라와 개통(開通)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학문을 강론하여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은 근본이고, 군복을 고쳐서 외모를 바꾸는 것은 말단적인 일이다. 수호(修好)를 맺어서 난을 평정한다는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유학(幼學) 신필균(申駜均)이 상소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고, 문학을 숭상하며,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들을 등용하며, 절약하고 검박한 기풍을 숭상하고 간사한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며,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고 사치품을 금지하며, 대궐 안을 엄하게 단속하고 부당한 길을 뚫는 문을 막을 것 등 여러 가지 조항들을 진달하고, 또 신은 함흥(咸興) 사람인데, 본군(本郡)에 환곡(還穀)의 폐단과 결세(結稅)의 폐단이 근래 들어 더욱 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등환(等還)을 혁파하여 결환(結還)으로 고치고, 본전은 놓아두고 이자만 취하는 것을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왕조가 일어난 고장의 백성들에게 입히는 폐해가 이와 같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폐해가 극도에 달하였으니 소생시킬 방도가 없어야 되겠는가? 기타 진달한 문제들도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장문일(張文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첫째는 국옥(鞫獄)의 체모를 엄하게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세자(世子)가 공부에 힘쓰도록 권면하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박한 것을 숭상하는 것이고, 넷째는 탐오를 징벌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을 선발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과거(科擧)의 규율을 엄하게 세우는 것이고, 일곱째는 군율(軍律)을 엄하게 세우는 것이고, 여덟째는 혜택이 반드시 아래에 미치게 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관리들이 포흠(逋欠)낸 것에 대해 족징(族徵)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열째는 위에 바치는 것을 바꾸어 바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열한째는 채벌(採伐)을 엄금한 산에서 나무를 찍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열두째는 두(斗)와 곡(斛)의 기준을 통일시키는 것이고, 열셋째는 무단(武斷)을 엄하게 단속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가지 조목은 정직하고 간이(簡易)하여 시폐(時弊) 중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닌 것이 없다. 그대의 말은 나를 일으켜 세울 만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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