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사
호남(湖南) 고부군(古阜郡)의 대동미(大同米) 401석(石)은 특별히 상정가(詳定價)로 쳐서 돈으로 대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 고을의 조세 운반선이 침몰되었다는 도신(道臣)의 보고와 관련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3월 2일 임오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 본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고(故)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의 봉사손(奉祀孫)이 벼슬에서 떨어진 지 오래되어 향불 올리는 것이 적막하니 그날의 허전한 감회를 생각하면 응당 뜻을 보여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견복(吳甄復)을 우선 검의(檢擬)하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황단(皇壇)에 친히 제사를 지내니 풍천(風泉)의 감회001) 가 절실하다. 선대 임금들이 황조인(皇朝人)의 자손을 등록하고 벼슬을 준 것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최근에 심히 영락하게 되었으니 걱정이다. 그들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알아보고 각별히 수용(收用)하라."
하였다.
3월 3일 계미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참반 유생(參班儒生)의 응제(應製)와 참반 무사(參班武士)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3월 5일 을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나의 걱정을 분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탐욕을 부려 범장(犯贓)한 것이 1만 3,900냥(兩)이나 되니 저 불쌍한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협잡에 걸려들었는가? 생각하면 통분스러우니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는 부류들에게 중률(重律)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규율을 밝힐 수 없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다.
안협 현감(安峽縣監) 이승필(李承弼)은 의금부(義禁府)에서 형구(形具)를 채워 잡아온 다음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병세(趙秉世)는 정사에서 뚜렷한 업적이 있었으나 여러 번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백성들은 그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 통상 사무를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때에 교체하여 생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분간 그대로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구(尹用求)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장두형(張斗衡)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김상래(金尙萊)가 상소하여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 두 도(道)의 대동미(大同米)를 향선(鄕船)으로 조운(漕運)하는 폐해에 대해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3월 7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삼척부(三陟府)의 눈사태로 압사한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3월 8일 무자
전교하기를,
"각영(各營)에 각종 물품을 대어 주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아서 형편을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하다. 양향청(糧餉廳)에 있는 은(銀)이든 돈이든 5만 냥을 우선 떼어 묘당(廟堂)에서 적당히 나누어주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각영(各營)의 각종 물품을 대어 주지 못한 것이 매우 많은 것과 관련하여, 전교대로 양향청(糧餉廳)에 저축되어 있는 은(銀)과 돈을 절반씩 호조(戶曹)에는 1만 2,000냥, 선혜청(宣惠廳)에는 1만 냥, 병조(兵曹)에는 1만 5,000냥,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軍營)에는 각각 5,000냥, 총융청(摠戎廳)에는 3,000냥을 갈라서 획급(劃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3월 10일 경인
병조(兵曹)에서, ‘경희궁(慶熙宮)의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나서 숱한 사람들이 죽었고 민가들이 불길에 휘감겼다. 순식간에 이와 같이 불길이 맹렬하였다니 심히 놀랍고 참혹스러워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친 사람은 치료해 주고 불타 죽은 사람은 묻어 주며 불탄 집은 지어 주어 안착시키기 위한 방도를 취하고,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넉넉하게 물자를 제급(題給)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불에 타 죽은 간역(看役) 이하 여러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특별히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1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유만주(兪萬柱)가 상소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무학청(武學廳)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에 대하여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 장령(前掌令) 안익풍(安翊豐)이 상소하여 대궐 안을 엄숙하게 하고, 민심을 안착시키고, 기강을 엄하게 세우고, 내정을 위임하고, 외교에 신의를 다할 것 등 다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들은 대부분 절실한 문제들이다. 매우 훌륭한 의견이므로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주전(鑄錢)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 당오전(當五錢)을 절반씩 주조하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임진
식년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설행하였다. 윤고섭(尹皞燮)을 비롯한 37인을 뽑았다.
3월 13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4일 갑오
김유연(金有淵)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병정(尹秉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진휼청(賑恤廳)에서,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사람이 타 죽고 집이 불탄 것에 대하여 한성부(漢城府)에서 구별하여 작성한 문서에 따라 치료 대상자 4명에게는 각각 돈 5냥, 매장 대상자 30명 중 27명에게는 각각 돈 7냥과 무명과 베를 각 1필씩, 간역(看役) 등 3명에게는 각각 돈 20냥과 베와 무명을 각 1필씩, 지어야 할 집 55채에는 각각 돈 7냥씩을 본 청의 낭관(郞官)을 파견하여 해부(該府)의 관원과 함께 하나하나 나누어 주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3월 16일 병신
전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사판(祠版)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조경호(趙慶鎬)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고, 김옥균(金玉均)을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로 삼아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였으며, 하직인사는 그만두고 편리한 대로 갔다 오게 하였다.
3월 17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복상(卜相)하였는데, 복상망(卜相望)은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강로(姜㳣),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당보(徐堂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응조(申應朝),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김유연(金有淵)이었다. 가복(加卜)하였는데 가복망(加卜望)은 군국사무 독판(軍國事務督辦) 김병덕(金炳德)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기세(鄭基世)였다.
김병덕(金炳德)을 의정부우의정 겸 군국사무총리(議政府右議政兼軍國事務總理)로 삼았다.
윤치담(尹致聃)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영하(趙寧夏)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박영효(朴泳孝)를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정기택(鄭騏澤)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윤웅렬(尹雄烈)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양주성(梁柱星)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김만식(金晩植)을 교섭통상사무 참의(交涉通商事務參議)로 삼았다.
3월 18일 무술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하기를,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의 여부는 정승을 적임자로 뽑는 데 달려 있다. 뜻밖에도 적임자를 얻었으니 내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사람들이 기뻐서 서로 축하하니 오늘 경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경은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대대로 물려받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안팎의 직책을 역임하며 뚜렷한 업적이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때가 이러하고 일이 이와 같으니 나라의 계책을 어찌 경에게 기대하지 않겠으며, 경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이에 대해 마땅히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관례적인 사양은 그만두고 즉시 하명에 응하여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과 함께 서로 협력하여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응제(應製)나 절제(節製)의 명(命)을 내린 뒤 세자(世子)가 따라가는 절차에 대하여 해조(該曹)에서 규례대로 취품(取稟)하라."
하였다.
3월 19일 기해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이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참반 유생(參班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권영수(權榮洙)와 왕제긍(王濟肯)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집안사람이 이번 과거에 입격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직부(直赴)한 권영수(權榮洙)에게는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방방(放榜)하는 날에 충렬공(忠烈公) 권순장(權順長)의 사판(祠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직부한 왕제긍(王濟肯)은 바로 황조인(皇朝人)의 후예이다. 이날의 과거에 입격하였다는 소리가 있으니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이세재(李世宰)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태관(申泰寬)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정범조(鄭範朝)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3월 20일 경자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화적(火賊) 장지한(張之汗) 등 3명을 효수(梟首)하여 경계(警戒)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중국 제독(提督) 오장경(吳長慶)을 접견(接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재차 하유(下諭)하였다.
3월 21일 신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2일 임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경조(京兆)의 직무에 대하여 길을 닦는 일은 본래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아니고 바로 유사(有司)의 직분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길을 침범한 임시가옥들은 다 철거시키고, 길가의 집들은 설사 가깝게 지었더라도 헐지 않은 것은 백성들이 살던 곳을 옮겨 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이고 지고 흩어져서 도성 안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이 만들어낸 뜬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큰 개혁을 할 때 비방과 원망을 초래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신이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죄과를 저지르고서도 요행히 천벌을 면하였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광주 유수(廣州留守) 직임을 체직(遞職)하시고 해당 법조문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특별히 유수를 제수한 데는 내가 뜻한 바가 있으니 다시는 망설이지 말고 즉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성상의 유지(諭旨)에서 ‘나라의 정사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정승을 얻는 데 달려있다. 현재 정사에 어려운 일들이 많고 널리 구제할 일이 급하다.’ 라고 하셨는데, 정승의 중책에 대하여 깊이 걱정하시는 성상의 생각을 우러러 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정사를 널리 구제하는 데 있어서는 의지할 만한 사람에게 책임 지워야 올바른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과 같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중대한 직책을 맡기셨으니 사람들의 놀라움과 의혹을 면할 수 없고, 국사가 낭패되는 것을 면할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감히 공순히 받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분패할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 새로 제수한 정승의 직임과 총리(總理)의 직함을 빨리 도로 거두시고 다시 어진 정승을 선발하시어 중요한 벼슬자리에 훼손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기대하던 차에 사임을 요청하는 글이 문득 날아드니 섭섭한 생각을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이 직책을 맡게 된 경이 형식적인 규례를 갖추어 물러서서 나오지 않으려 하는가? 세 번 읍하고 한 번 사양하는 것이002) 비록 군자의 행동 규범이라고 하지만, 허다한 일들이 매우 급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규범대로 걸음을 걷는 것은 시급히 수습해야 하는 오늘의 형편에 부합되지 않는다. 더구나 재간과 명망이 있고 가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경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급한 병을 물리치는 데는 필시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편안히 지낼 생각을 하면서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경에게 기대하던 바이겠는가?
경은 의지하는 나를 저버려서는 안 되고, 조야의 두터운 신망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나를 도와주고 나라의 일을 수습하는 것은 평소 쌓아 온 경륜을 펴는 일이니, 경은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경은 나의 이 지극한 뜻을 체득하라."
하였다.
3월 24일 갑진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세 번째로 하유(下諭)하였다.
양주성(梁柱星)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이희선(李熙善)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3월 25일 을사
이응진(李應辰)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정순조(鄭順朝)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허전(許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조병필(趙秉弼)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26일 병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렸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심동신(沈東臣)의 장계(狀啓)를 보니, ‘수사(水使) 양주현(梁柱顯)이 전하의 명을 잘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토색질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군영(軍營)의 차사(差使)들에게 잘못 걸려든 사람치고 가산을 탕진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군영의 문건을 거의 모든 지역에 돌려 넉넉하게 사는 사람에게 뇌물을 요구하며, 봉표(封標)해 둔 소나무를 남벌하고 섬의 백성들을 침해한 것이 이미 폭로되었으니, 그 허다한 범행을 내버려 둔 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전후에 걸쳐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는데 자신이 곤수(閫帥)로서 이와 같이 침학하였으니, 만일 법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였더라면 어찌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수사를 우선 파출(罷黜)하고 해부(該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7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규학(李奎鶴)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3월 28일 무신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동지사(冬至使)인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심이택(沈履澤), 부사(副使) 민종묵(閔種默), 서장관(書狀官) 정하원(鄭夏源)이다.】
【원본】 24책 20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전교하기를,
"안협(安峽)에서 벌어진 탐오 사건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다. 저 궁벽한 곳에 사는 영락한 백성들이 이처럼 참혹한 수탈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울부짖으면서 쓰러지는 참상이 눈앞에 선하며, 통분스러운 생각은 더할 나위 없어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극형에 처한들 무슨 아까울 게 있겠는가?
남간(南間)에 갇혀 있는 죄인 이승필(李承弼)은 금오 당상(金吾堂上)들이 개좌(開坐)하여 거리에서 우선 엄하게 한번 형장(刑杖)을 가한 다음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더할 수 없이 엄한 것은 장률(贓律)이다.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도적질하고 토색질하면서 법을 위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장물(贓物)의 수를 따져 처벌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매번 죄상을 논의할 때에는 도리어 가벼운 법조문을 적용하여 귀양을 보내고 섬에 안치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워 거리낌 없이 죄를 범하지 않겠는가? 백성을 안착시키는 것이 나라의 급선무인 만큼 나라에 바치는 물건과 백성들의 재물에는 경중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형률을 가볍게 적용할 것인가, 무겁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에 맞게 하여야 한다. 이제부터 탐오와 범장(犯贓)이 매우 많은 자에 대해서는 의당 극형(極刑)에 처하도록 법칙을 정하고, 이 내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으로 신칙(申飭)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네 번째로 하유(下諭)하기를,
"붙여 보낸 글을 보니 줄곧 외면하고 있구나! 이것은 나의 성의가 얕아서 마음을 돌지지 못한 탓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대체로 일정한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실제가 있다고 하는 경의 말은 참으로 옳다. 뚜렷한 업적이 있고 온 나라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것은 경의 이름이며, 청렴하고 검박한 생활을 일상적으로 하여 온 것은 경의 실제인 것이다. 이름과 실제를 경 자신이 지니고 있으면서 아무리 물러서려고 한들 그게 될 일인가?
더구나 오늘날은 매사가 위태롭고 우려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거짓은 날로 성하고, 기강은 날이 갈수록 무너지며, 재정은 나날이 바닥나고 있다.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으니 지탱해 낼 수 없을 것 같다.
경과 같은 계책과 학식과 도량을 가지고 정돈하며 엄숙하게 진작시키고, 좋은 계책으로 넉넉하게 해서 나의 백성과 나라로 하여금 경에게 의뢰하게 하는 것이 어찌 가장 급한 일이 아니겠으며 더없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이 나와서 받아들이기를 나는 대청에 나앉아 기다릴 것이다."
하였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정인석(鄭寅奭), 이헌경(李軒卿), 남규희(南奎熙)이다.
민영목(閔泳穆)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남규희(南奎熙)를 직각(直閣)으로 삼았다.
3월 29일 기유
민영위(閔泳緯)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3월 30일 경술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세 번째로 상소를 올려 사임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사임을 청하는 글이 어째서 또 왔는가? 아! 경의 선대는 정승의 직책을 받아 안고 훌륭한 계책과 명망으로 조야를 빛냈다. 이것은 아마도 대대로 독실하게 충성을 다한 의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안의 명예를 계승하여 난국을 타개하는 것이 바로 선대가 경에게 남겨준 뜻이겠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무엇에 기대겠습니까?’라고 한단 말인가? 병은 고려하여야 하지만 경의 사고와 정력은 아직 쇠퇴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도리를 논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또한 분주하게 다니는 직책은 아닌 만큼,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경으로서는 물러설 구실이 없다. 이렇게까지 관심을 쏟고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해하여 며칠 안으로 연석(筵席)에 나옴으로써 나의 큰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감생청(減省廳)에서 아뢰기를,
"각종 공계(貢契)를 바로잡고 없앨 것에 대하여 전번에 별단(別單)을 올려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충분히 토의하여 보니 제대로 풀리지 않는 곳이 많고, 또 값을 받지 못하여 적체된 것이 있으므로 갑자기 없애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폐해가 특히 심한 것은 좀 바로잡고, 별로 관계없는 것은 역시 없애 버릴 것입니다. 따로 별단을 만들어 바치니 이대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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