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병자
황단(皇壇) 봉실(奉室)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선무사(宣武祠),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에 순조(純祖) 갑신년(1824)의 전례대로 치제(致祭)하고, 무열사(武烈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의주(義州)에 있는 여러 의사(義士)들의 제단과 천장인(泉漳人)의 제단에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는 동시에 본도에서 차관(差官)을 정하여 보내서 함께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윤 충정공(尹忠正公), 오 충렬공(吳忠烈公), 홍 충정공(洪忠正公) 등 세 집안의 자손들에 대하여 해당 조(曹)에서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로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되 이 제독(李提督)의 봉사손(奉祀孫)은 수령(守令)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먼저 검의(檢擬)하라."
하였다.
봉실(奉室)에서 예를 행할 때 배종(陪從)한 춘방(春坊)과 계방(桂坊) 이하 관원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예모관(禮貌官) 김완수(金完秀)와 상례(相禮) 김주현(金疇鉉)은 가자(加資)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참반(參班)한 유생들에게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황종기(黃鍾岐)와 홍종찬(洪鍾燦)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한 황종기(黃鍾岐)는 명(明) 나라 사람의 후손이다. 올해 과거에 뽑히는 영예가 있게 되어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 집안사람이 이번 과거에 합격한 것은 매우 기특하고 기쁜 일이니 직부전시한 홍종찬(洪鍾燦)에게 특별히 사악하고 방방(放榜)하는 날에 의열공(義烈公) 홍명형(洪命亨)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3월 4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기호(李起鎬)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희갑(李熙甲)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이희준(李熙準)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3월 5일 경진
팔도(八道)의 유생 유치항(兪致恒) 등이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문묘에 합향(合享)하는 문제를 쉽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예를 존중해서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에 힘써라."
하였다.
전라도(全羅道) 유생 이동협(李東莢) 등이 여러 서원(書院)을 복구시킬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서원을 다시 설치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 비답에서 여러 차례 말하였으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에 힘쓰라."
하였다.
함경도(咸鏡道) 유생 맹덕연(孟德淵) 등이 고려(高麗) 왕조의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정북사(征北祠), 양열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의 청해사(靑海祠)를 다시 세우기를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철거한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실로 사체(事體)가 아니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에 힘쓰라."
하였다.
3월 6일 신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각종 군량은 부족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 궁색한 형편에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친군영(親軍營)으로 하여금 우선 광물(鑛物) 생산이 가장 풍부한 곳에 가서 적당히 채취하여 비용에 보충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세재(李世宰)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종한(金宗漢)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홍영식(洪英植)을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按撫使)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군량을 보충하게 하기 위해서 채광(採鑛)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몰래 캐거나 빼내어 숨기는 등의 허다한 폐단에 대하여 특별히 단속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니 친군삼영(親軍三營)에서 감독하되, 편리한 대로 교대로 내왕하면서 보고들은 데에 따라 철저하게 살펴서 단속할 것이며, 만약 현장에서 발각되면 설사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라고 하더라도 중벌로 논죄한다는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의 보고를 보니, 충주 목사(忠州牧使) 민응식(閔應植)이 아뢰기를, ‘본 고을에 획정된 강화(江華)의 포량미(砲糧米) 6,000섬을 형편상 장차 도내 각 고을에서 획급하여 가져와야 하는데, 실어오기가 곤란하니 제때에 지출하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본 고을에서 거둔 대동미(大同米), 전세미(田稅米), 결작미(結作米) 가운데 6,000섬을 포량으로 제때에 수용(需用)하고, 원래 포량으로 바칠 것을 바꾸어 바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운수하기 곤란한 것이 과연 도신(道臣)이 보고한 것과 같으니 고을에서 받은 것을 가지고 편리한 대로 포량으로 나누어 쓰고, 포량으로 거두어들인 것은 그 수량만큼 계산하여 바꾸어 바치는 것이 참으로 편리한 방법이니 이대로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3월 7일 임오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물에 빠져죽은 동래부(東萊府) 사람들을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경기(京畿) 연해의 해방 아문(海防衙門)에서 아뢰기를,
"해안방어를 위해서 주둔 지방에 나가 살펴보고 결정할 것에 대하여 이전에 이미 절목을 비준하였습니다. 영방(營房) 건설에 대해서 아직 처리할 것이 있으니 우선 부평부(富平府)에서 나가 주둔하고 방어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인천항(仁川港) 중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규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이 맺어졌다.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제1조
조선에서 인천항(仁川港)이 제물포 해관(濟物浦海關) 서북 지방을 붉은 선으로 도면을 그려 중국 상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설정하고, 이후 중국 상인들이 그 지역에 충만하는 때에 부지를 넓혀 광범히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한다. 중국 상인들도 각국(各國)의 조계지(租界地)에 마음대로 가서 무역하고 거주할 수 있게 한다.
제2조
이 지역은 원래 높은 산, 해변의 낮은 지대로서 지난날에는 사는 백성들이 없었다. 해변가에 큰 돌과 석회로 부두를 견고하게 축조하고 터를 돋우며 가까운 곳에 있는 높은 산을 깎아 낮은 곳과 평형으로 한다. 그리고 경계 내의 네 거리, 도랑, 다리 등을 다 견고하게 건설한다. 땅을 고루고 부두를 축조하는 일체 경비는 조선 정부가 마련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하고 일을 처리하며 주재하며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중국 관리 및 간사〔商董〕 1명과 동석(同席)하여 일을 배치하고 제기되는 문제를 조사하고 해명한다. 일체의 건설공사에 드는 비용의 액수와 항목과 부두, 네 거리, 도랑, 다리 건축에 드는 비용이 얼마이며 주택을 건설할 땅값이 얼마인가를 밝혀 날마다 장부에 적어 보존하였다가 이 지역을 경매하는 방법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조차해주고, 값을 받기를 기다린 다음에 곧 본 장부에 의하여 주택을 건설할 땅값과 지대를 정리한 비용을 액수에 따라 회수한다.
제3조
공사를 감독할 조선 관리와 공사를 감독할 중국 간사〔商董〕 1명에게 소요되는 경비는 각각 자체 처리하고 서로 토의해서 줄 필요는 없으며, 중국에 주재하면서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에 대해서도 자기의 경비가 있어 역시 협의할 필요가 없다.
제4조
이 지역을 잘 정리하여 네 거리와 도랑, 다리, 부두를 제외한 주택을 건설할 지역에 대해서는 쌍방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들이 함께 토의, 결정하며, 필지마다 도면을 그리고 규정된 미터자로 재어 도면 내에 필지수, 기호, 미터수를 주를 달아 밝힌다. 이 지역을 정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얼마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토의하여 지대를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고, 어느 갈래 어느 필지로 갈라 매 평방미터당 동전 얼마를 기본가격으로 정한다. 그리하여 경매하는 방법으로 중국 상인들에게 영구히 조차해 주고 얻은 지역의 정리 대금은 조선 정부가 4분의 1을 내놓으면 기본 가격 외에 얻은 나머지 값도 역시 절반을 내놓아 기본가격의 4분의 1과 함께 축적 자금으로 만들고 이후에 조차지(租借地) 내의 일체의 수리비용에 충당한다. 남은 땅을 경매할 경우에는 쌍방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들이 경매된 가격과 대지를 정리한 비용을 토의하여 공정한 가격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영구히 조차해주어 거주하도록 한다.
제5조
대지를 경매하는 기일은 쌍방이 토의하여 결정하되 기일에 앞서 광고하며, 인천(仁川)에 주재하는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중국 관리와 함께 토의하여 시행한다. 그 경매하는 방법은 값을 높이 부른 사람이 차지하는데, 두 사람이 값을 똑같이 부른 경우에는 두 사람에게 다시 경매를 붙인다. 땅을 차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성명을 대장에 올리고, 그날로 그 땅값의 5분의 1을 받아 계약금으로 삼고 나머지 값은 10일 이내에 청산하며, 땅문서를 주고 수속비로 동전 1,000문(文)을 받는다. 10일 이내에 액수대로 땅값을 청산하지 못할 때에는 곧 계약금을 벌금으로 내고 무효로 한다.
제6조
주택을 건설한 땅의 연간 세금은 세 등급으로 정하되 상등(上等)은 해변 가까이에 있는 땅으로서 매년 매 평방미터 당 세금을 조선 동전으로 40문(文)을 바치고, 중등(中等)은 해변에서 좀 멀리 떨어진 땅으로서 동전 30문을 바치며, 하등(下等)은 산 가까이에 있는 땅으로서 동전 20문을 바친다. 매년 전해 12월 15일에 중국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가 그 땅의 다음해 세금을 징수하여 그 다음해 정월 안으로 그 땅세의 3분의 1을 조선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에게 넘겨주어 받게 한 다음 나머지 3분의 2는 앞서 경매한 나머지 땅값과 지대정리 값의 4분의 1과 함께 모두 축적금에 돌려 저축해둔다. 어찌 저축해둘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영국, 미국, 독일 등 각국에서 축적금을 저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비추어 공동으로 토의하여 저축해서 타당하게 한다. 이 축적금으로 네 거리, 도랑, 다리, 부두, 가로 등을 수리하며, 경찰과 조차지(租借地) 내의 일체의 공공비용에 이용한다. 이 비용을 지출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조차지(租借地) 사무를 관장하는 신동회의(紳董會議)에 용도와 수량을 보고하고, 쌍방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들에 조사하고 해명한 다음에 지출한다. 이 축적금이 부족할 때에는 쌍방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들이 공동으로 토의하여 땅을 조차한 사람들에게 명하여 바치게 한다.
제7조
땅문서〔地契〕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조선 관리 아무〔某〕가 땅문서를 발급함에 대하여 중국 상인 아무〔某〕가 인천항(仁川港)의 중국 상인 조차지(租借地) 내의 어느 거리, 어느 호(號), 어느 지대에 오는 것을 승인한다. 그 필지는 동쪽으로는 어느 곳에 이르고 서쪽·남쪽·북쪽은 어느 곳에 이르는데 모두 몇 평방미터이고, 땅값으로 동전 얼마를 받은 다음 땅문서를 발급해주어 이 문서를 만들어 해당 상인에게 증명서로 하게하고, 그 땅을 영구히 자기의 경영지로 만들어 마음대로 주택을 짓게 한다. 매 평방미터 당 매년 12월 15일 전에 중국 관청에 가서 이듬해의 땅세 몇 십 문(文)을 바쳐 조선 감독 관리에게 넘겨주며 지연시킬 수 없다. 이 문서는 다 같은 세 장에 도장을 찍되 연월일 밑에 호수(號數)를 적고 두 장씩 맞대고 간인을 찍어 양쪽의 반도장을 대조한다. 한 통은 해당 상인에게 지급하여 영구히 증명으로 하고 한 통은 조선 감독자가 보관하고, 한 통은 중국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청에 보관한다. 이 문서가 수재·화재나 도둑을 맞아 잃어버렸을 때에는 그 상인은 호수와 분실 이유를 명확히 적어 중국측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에게 보고하여 조선 정부에 통지해서 공시하거나 신문지상에 내어 광고하도록 한다. 1개월 후에 보통규례에 의해 문서를 발급할 때 내는 수속비로 동전 1,000문(文)과 신문에 낼 때에 든 비용을 바쳐야만 새로운 문서를 보충으로 발급해 줄 수 있다. 그 이전 문서는 이후에 찾아냈더라도 휴지로 한다. 이 땅문서〔書契〕는 광서(光緖) 연월일 인.
어느 호수의 땅문서를 발급하여 중국 상인 아무〔某〕가 영수한다.
조선 감리 사무 아문(監理事務衙門)의 반도장을 찍고 호수를 반도장과 대조한다.
제8조
조계지(租界地)에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쳐나는 등 뜻밖의 자연재해를 입었을 경우 축적금이 넉넉지 못하여 보수하는 데 조선 정부에서 돈을 지출하거나 따로 경비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쌍방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들이 모여 수를 정하고 금액을 헤아려 수리한다.
제9조
인천(仁川)에 주재하여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관청은 조차지(租借地) 내 산 가까이에 있는 하등(下等) 지역에 건설하고, 그 땅값과 연간세액은 천진(天津)의 상업업무를 처리하는 조선 관청에 관한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제10조
제물포(濟物浦)에서 10여 리 이내의 지역에 중국 상인들이 마음대로 좋은 산전(山田) 하나를 골라 공동묘지로 만들되 그 지역에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넓어야 하고 묘지를 지킬 집을 지어야 한다. 그 지역은 조선에서 다른 나라에 준 공동묘지의 규정에 따라 처리하며 아울러 정부로부터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
제11조
이후 규정을 수정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수시로 중국 총판 상무 관리와 조선 정부에서 잘 토의하여 쌍방이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다음에 시행한다.
광서(光緖) 10년 3월 7일
조선 독판 교섭 통상 사무 (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 인
중국 총판 조선 상무(中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樹棠) 인
3월 8일 계미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친군 전영(親軍前營)에서 본영의 병정(兵丁) 신응준(申應俊)이 술에 취하여 칼을 빼들고서 해악스럽게 행동하였으므로 먼저 참형(斬刑)에 처하여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고 아뢰었다.
3월 9일 갑신
천진주재 대원(天津駐在大員) 서기관(書記官)으로 성기운(成岐運)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3월 12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제향(祭享)을 지내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전교하기를,
"이해 이달에 있는 황단(皇壇) 제사가 가까워오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의(肄儀)때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겠다. 세자(世子)도 직접 나와서 볼 것이다."
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일전에 종각(鐘閣)에 글이 걸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포도청(捕盜廳)에서 착실하게 정탐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일하는 것에서 헤아려 볼 때 매우 소홀하였으니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 이봉의(李鳳儀)와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 한규직(韓圭稷)을 다같이 견파(譴罷)하는 처벌을 아울러 시행하고 맡은 동리(洞里)를 잘 살피지 못한 해당 포교(捕校)를 해당 포도청(捕盜廳)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만일 사전에 미리 잘 단속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두 포도 대장에게 간삭(刊削)하는 벌을 시행하도록 하고 해당 동리의 포교(捕校)는 형조(刑曹)에 이송하여 엄하게 형장(刑杖)을 쳐서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3월 13일 무자
김병시(金炳始)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 김윤식(金允植)과 윤태준(尹泰駿)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로, 남일우(南一祐)를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정하원(鄭夏源)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로 삼았다.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윤명섭(尹命燮), 윤용식(尹容植), 정인승(鄭寅昇), 김희수(金喜洙), 박승덕(朴勝悳), 김춘희(金春熙), 민정식(閔正植), 심상찬(沈相瓚)이다.
대교 회권(待敎會圈)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김용균(金用均), 정세원(鄭世源), 조병건(趙秉健)이다. 김용균(金用均)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로 삼았다.
주천(注薦)을 행하였다. 〖천망(薦望)을 받은 사람은〗 민영수(閔泳壽), 송병주(宋秉宙), 권영수(權榮洙), 박영두(朴永斗), 정규섭(鄭圭燮), 정규회(丁奎會), 임대준(任大準), 윤기진(尹起晉)이다.
3월 14일 기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성근(金聲根)의 장계(狀啓)를 보니, 가리포(加里浦) 난민들이 범한 죄상을 나열하여 보고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섬사람들의 풍속이 어리석고 우둔한데, 호소를 빙자하여 감히 위협하고 두렵게 만들 계책을 품은 자는 첫째도 허사겸(許士兼)이고 둘째도 허사겸(許士兼)입니다.
고을과 감영(監營)에서 조사한 것을 다같이 심리하고 조사하였으니 병영(兵營)에 압송하고 효수(梟首)하여 경고시키겠습니다. 문사순(文士巡) 등 다섯 사람은 엄형(嚴刑)하여 멀고 험악한 섬에 정배(定配)하며, 김중거(金仲巨) 등 두 사람은 엄형하여 원지(遠地)에 정배하고, 최여집(崔汝集) 등 세 사람은 형배(刑配)하겠습니다. 박정용(朴正用) 등 여러 죄수들은 석방하겠습니다.
전 첨사(前僉使) 이상돈(李相惇)은 탐오한 죄상이 드러났으니 해당 부(府)에서 잡아다 신문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전교(傳敎)한 대로 포도청(捕盜廳)의 방곡포교(坊曲捕校) 조창식(趙昌植) 등 4명을 모두 엄형(嚴刑)하여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였는데, 그 날로 각 정배소(定配所) 압송하겠습니다."
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인정전(仁政殿)에서 설행하였다. 윤명섭(尹命燮), 김희수(金喜洙), 김춘희(金春熙), 민정식(閔正植)을 뽑았다.
3월 15일 경인
구연홍(具然泓)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를 앞으로 개척하게 되는데 먼저 담당 관리를 둔 다음에야 백성들을 모집해서 토지를 개간하는 일에 대해 차례로 대책을 강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삼척 영장(三陟營將)이 직접 형편을 살피고서 입주(入駐)를 도모하게 하고, 배치에 속하는 문제는 감사(監司)가 좋은 쪽으로 조처(措處)하게 하되 직명(職名)은 울릉도 첨사(鬱陵島僉使) 겸 삼척 영장(三陟營將)으로 하비(下批)한다는 내용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성근(金聲根)이 ‘광주목(廣州牧)에 정배(定配)된 죄인 홍시우(洪時愚)는 불법을 자행하고 못된 짓을 수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지른 여러 가지 죄에 대하여 누차 신문하였으나 끝내 그 죄상을 솔직하게 공초하지 않고 있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그 공초(供招)를 바친 바가 난잡하고 무망하여 아무 거리낌도 없으니 참으로 가증스럽다. 감영(監營)에서 1차 엄형(嚴刑)한 뒤에 범한 죄상을 다시 엄하게 신문하고 보고하라."
하였다.
팔도(八道) 유생 백몽수(白夢洙)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호남(湖南)에 오현(五賢)이 있는데 문경공(文敬公) 이항(李恒), 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 문효공(文孝公) 노진(盧禛),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입니다. 그들의 심오하고 정밀한 도학(道學)과 넓고 방대한 덕업은 참으로 후생(後生)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전의 현인(賢人)들이 지은 글을 가지고 대체적인 것을 들어 대략 진술하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항은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적전(嫡傳)이고, 유희춘은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제자이자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와 도의로서 사귄 사람입니다. 노진은 문헌공(文獻公) 정여창(丁汝昌)의 연원(淵源)을 이은 적전으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과 도의로서 사귄 사람입니다. 박순은 문강공(文康公) 서경덕(徐敬德)의 연원으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도의로서 사귄 사람이며, 기대승은 문순공 이황과 문정공(文正公) 김인후의 연원을 이은 적전입니다.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빨리 이 오현을 문묘에 종향(從享)하는 예를 거행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문제는 중대한 예인데 어떻게 갑자기 시행할 수 있겠는가? 다시 뒷날의 공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팔도(八道) 유생 신학래(申鶴來) 등이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이전 비답에서 말했으니 다시 번거롭게 아뢸 필요 없다."
하였다.
지평(持平) 김헌제(金櫶濟)가 임금께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고 서원(書院)을 복구시킬 것을 청하는 일에 대하여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일에 대하여 마땅히 유념하겠다. 서원을 세우는 일은 이미 전후의 유소(儒疏)에 대한 비답에서 말하였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강규형(姜奎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즘 듣자니 충주(忠州)에서 병력을 갖추고 무기를 수리한다고 하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 사이에 끼여 있으며 조령(鳥嶺)의 요충지를 단독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동쪽은 강원도(江原道)에서 제어하고 서쪽은 충청도(忠淸道)에서 뻗치니 6번 출절해야 쟁취하는 기산(祈山)이나 백번 싸워야 비로소 얻는 하남(河南)처럼 견고한데 형세를 비교해 본다면 아마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이 예전에 안동(安東)의 진장(鎭將)으로 있을 때 마침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의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의 고통과 도적들의 정세에 대해서 상세히 탐지하기 위하여 관할 각 고을을 두루 돌아보다가 문경(聞慶)에 이르러 산천을 살펴보니 이 현(縣)은 큰 고개 밑에 의거하여 삼면이 막혀있고 하나의 길이 통하여 있었는데, 71개 고을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게 되었고 충주와의 거리가 80리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충주를 공고히 하는 것은 문경에 달려있고, 문경을 방비하는 것은 충주에 달려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보(輔)와 거(車)가 서로 의지하고 금대(襟帶)와 같은 요충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충주에서 군사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병사(兵事)에서는 잘 하는 일이지만 정세를 분석하는 방도에서는 소홀한 점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문경은 여러 산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바위가 톱마냥 우뚝우뚝 솟아있고 울창한 나무숲이 성과 같이 되어 있으니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몇백 명의 포병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정비하여 가지고 엄하게 방어하도록 한다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하여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인데,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면 충주는 자연히 근심이 없어집니다.
대체로 둔전(屯田)의 유리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방어준비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둘째 운반하는 수고를 덜 수 있으며, 셋째 나라의 비용을 풍족하게 할 수 있으며, 넷째 군사들의 몸을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 있으며, 다섯째 한가하게 노는 군사들을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 몇 백 명의 포병들에 대하여 농사짓는 기간에 반드시 군법으로 단속하여 근면한지 태만한지의 여부에 따라 상벌(賞罰)을 행하면 아무리 넓은 밭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각도에 흩어져 있는 충훈부(忠勳府)나 각 군영(軍營)·아문(衙門)의 둔전(屯田)과 같은 것은 모두 다 도장(導掌)이나 해당 감관(監官)의 개인주머니에 들어가고 있으니, 어찌 그런 각 둔전(屯田)을 조사해서 수입을 헤아려 포병이 있는 곳으로 이둔(移屯)하고 그 나머지 둔전(屯田)을 취해서 본 아문(衙門)에 넘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문경에 빨리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적임자를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막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3월 16일 신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황단(皇壇) 제향(祭享)의 이의(肄儀)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갔다.
전교하기를,
"이미 신칙(申飭)하였으니 전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 이봉의(李鳳儀)와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 한규직(韓圭稷)을 분간(分揀)하여 전직(前職)을 잉임(仍任)하게 하라."
하였다.
한장석(韓章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조연(李祖淵)을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 겸 안무사(按撫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의 보고를 보니, ‘충주목(忠州牧)에서 서울 각사(各司)의 군목(軍木)을 수납(收納)해야 하는데 본 고을이 마침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정상이 딱하여 받아낼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병조(兵曹)의 계미년(1883) 몫의 해당 각 무명 26동 23필, 금위영(禁衛營)의 별파목(別破木) 7필, 친군영(親軍營)의 포보목(砲保木) 9동 42필을 특별히 순전(純錢)으로 대납(代納)하는 것은 허락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군포(軍布)를 상납하는 것은 본래 중대한 일이니 대납(代納)을 허락하는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각하건대 본 고을이 연이어 흉년을 만나 사력(事力)이 곤궁하므로 특별히 돌봐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조(兵曹)와 금위영(禁衛營)에 바치는 군포(軍布)를 모두 돈으로 대납(代納)하도록 빨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포보(砲保)는 다른 것과 다른 만큼 이것은 본색(本色)으로 올려 보내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략사(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를 보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쪽 나라 사람들이 침범하여 노략질하고 우리 백성들이 몰래 넘어가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그래서 혜산진 첨사(惠山鎭僉使) 신홍균(申鴻均)을 파견하여 전 인차외권관(仁遮外權管) 이봉재(李鳳在)와 함께 군마(軍馬)를 정비하여 두 고을을 안행(按行)하게 하니 연변의 유민들을 쇄환(刷還)한 것이 1,115명이고, 목두(木頭) 비적무리를 쫓아 보낸 것이 6∼7천 명입니다. 국경 연안이 이에 힘입어 깨끗해지고 변경 백성들이 안정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해당 첨사(僉使)와 권관(權管) 등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처리를 잘했으므로 마땅히 포상을 해야 하니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품처(稟處)하게 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민들은 불러들여서 무마시키고, 비적 무리들은 쫓아내고 금지시켰으니 참으로 애쓴 점이 있습니다. 매우 가상하니 혜산진 첨사 신홍균은 한 번의 임기를 특별히 잉임(仍任)하게 하고, 전 권관(前權管) 이봉재는 6품 벼슬에 조용(調用)하는 내용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7일 임진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제향을 지내기 위하여 재숙(齋宿)하였다.
주진 대원(駐津大員) 남정철(南廷哲), 종사관(從事官) 박제순(朴齊純), 서기관(書記官) 성기운(成岐運)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3월 18일 계사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고 황단(皇壇)의 제문에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니 내일 봉실(奉室)에서 예식을 행할 때에 백관(百官)은 들어와 참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갑오
황단(皇壇) 봉실(奉室)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성생(省牲)과 절차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배참(陪參)하였다.
전교하기를,
"윤 충정공(尹忠正公)의 봉사손(奉祀孫)인 전 도정(前都正) 윤병준(尹秉準)에게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하고, 홍 충정공(洪忠正公)의 봉사손인 참봉(參奉) 홍사필(洪思弼)은 6품에 올리고 6품 벼슬자리가 난 다음에 먼저 검의(檢擬)하도록 하며, 오 충렬공(吳忠烈公)의 봉사손인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오건영(吳健泳)은 수령(守令)자리가 난 다음에 비의(備擬)하여 들이고, 석 상서(石尙書)의 봉사손인 전 오위장(五衛將) 석태동(石泰東)은 수령 자리가 난 다음에 먼저 검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병정(尹秉鼎)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3월 20일 을미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부사과(副司果) 왕제긍(王濟肯)은 명(明) 나라 사람의 후손이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임명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호군(大護軍) 윤병정(尹秉鼎), 행 호군(行護軍) 홍훈(洪坃)은 모두 품계를 올려주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석여(曺錫輿)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임명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정공(忠正公) 정뢰경(鄭雷卿)의 종손(宗孫)을 해당 조(曹)에서 이름을 물어서 자리를 만들어 초사(初仕)로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의 봉사손(奉祀孫) 영(令) 황호직(黃浩直)을 수령(守令)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우선으로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규홍(金奎弘)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참반(參班)한 유생들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시(詩)에서 입격한 유학(幼學) 오철모(吳喆模)와 김학수(金學洙)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해 이달에 이 집안에서 과거의 영예가 있게 되었으니 매우 기이하고 기쁜 일이다. 직부전시(直赴殿試)한 오철모(吳喆模)에게 특별히 악공(樂工)을 보내주고, 방방(放榜)하는 날에 오 충렬공(吳忠烈公)의 사당에 승지(承旨)를 보내서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직부전시한 김학수(金學洙)에게 특별히 악공(樂工)을 보내주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진사(進士) 송은성(宋殷成)이 시무(時務) 7가지를 상소하였는데, 균전(均田)을 근본으로 삼을 것, 입교(立敎)를 밝힐 것, 환곡(還穀)을 공평히 할 것, 화폐 유통을 정지시킬 것, 변방을 굳건히 지킬 것, 방어시설을 설치할 것, 도적을 막는 일을 위엄있게 할 것 등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에 대하여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충청도(忠淸道)의 출신(出身) 서영구(徐榮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재작년 임오년(1882)에 시폐(時弊) 6가지를 상소한 것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조상의 업적을 계승할 것을 생각하여 감히 좋은 말을 올렸으니 더 보탤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진술한 문제에 대하여 마땅히 유념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너무도 황송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몰랐는데 이에 번거롭게 군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행 정사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6가지 문제를 헤아려보고 한 편의 글로 엮어 장황하게 진술하오니 전하께서는 특별히 채납(採納)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바친 책자의 내용에 대해서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3월 21일 병신
총리대신(總理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좌영 감독(左營監督) 이조연(李祖淵)을 북병사(北兵使)에 이배(移拜)하였는데 본영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업무가 복잡다단하므로 문득 교체하기 곤란한 것이 있으니 북병사(北兵使)의 직임을 개차(改差)하고 감독(監督)을 잉임(仍任)하게 하여 관할하는 책임을 도맡아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주달한 말을 들으니 사세(事勢)가 실로 그렇다. 마땅히 하교를 내리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이조연(李祖淵)을 개차하고 좌영 감독(左營監督)을 잉임하게 하라."
하였다.
조병직(趙秉稷)을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兼按撫使)로, 박봉빈(朴鳳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3월 22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친군 감독(親軍監督)이 규례대로 군무사 당상(軍務司堂上)의 일을 겸관(兼管)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3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현재 옥에 갇혀있는 죄인 이상돈(李相惇)을 형구를 채워서 남간(南間)에 가두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죄인 윤상화(尹相和)를 흑산도(黑山島)에 이배(移配)하여 위리안치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임명하여 보내는 것은 바로 탐오하는 실상을 조사하여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자는 뜻에서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자신이 그런 죄를 범하고 불법을 자행하였으니 직지사(直指使)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의 일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미 소문이 난 것을 덮을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선비들이 상소하여 성토하고 도에서 조사하여 지적한 것이 이처럼 낭자하다. 여러 고을에 해를 끼치고 탐오한 물품이 수 만에 이르니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임금을 섬기는 우리 조정 관리들을 경계시키고 격려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충청우도(忠淸右道)의 백성들에게 사죄하지 못하게 된다.
전 충청우도 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를 해당 의금부에서 형구를 채워 잡아다가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들이 네거리에 개좌(開坐)하여 모든 관리들이 쭉 늘어서서 한 차례 엄형한 다음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되 대사령이 내려도 분간하지 말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가리포(加里浦)는 바로 하나의 탄환처럼 조그마한 곳으로 첨사(僉使)가 또한 고을의 관장(官長)이다. 그런데 불법을 자행하면서 오로지 가렴주구만 일삼아 이 진(鎭)의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하다가 스스로 규율을 어기고 분수없는 짓을 하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죄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매우 통탄스럽다.
전 첨사(前僉使) 이상돈(李相惇)을 의금부 당상들이 네거리에 개좌(開坐)하고 모든 관리들이 차례로 쭉 늘어서서 한 차례 엄형한 뒤에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고 대사령(大赦令)이 내려도 분간하지 말 것이며 탐오한 돈을 형조(刑曹)에서 낱낱이 거두어 들이라."
하였다.
3월 24일 기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내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특별히 전 도정(前都正) 민덕호(閔德鎬)를 발탁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전 도정(前都正) 윤속(尹涑)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안무사 겸 북병사(按撫使兼北兵使)를 특별히 차임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함경도(咸鏡道) 백성들을 생각하는 전하의 마음에서 연교(筵敎)를 내리기에 이르렀으니 우러러 받드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체(事體)가 특별하고 책임이 매우 무거우니 수령이 잘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 마땅히 출척(黜陟)해야 합니다. 함경도(咸鏡道) 10고을 수령에 대하여 6월과 12월의 전최(殿最)를 전적으로 주관해서 제목(題目)을 갖추어 계문(啓聞)한다는 내용으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5일 경자
한철우(韓喆愚)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3월 26일 신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이계호(李啓鎬) 등이 호남(湖南)의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고,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을 모신 동강 서원(桐崗書院)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고암 서원(考巖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문묘에 배향하고, 서원을 다시 세우는 일은 모두 갑자기 의논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이해하고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김해윤(金海潤) 등이 옥구(沃溝) 북면(北面)의 땅을 떼어서 군산(群山)에 붙인 곳을 돌려줄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재처(裁處)한 일이니, 그대들은 물러들 가라."
하였다.
팔도(八道) 유학(幼學) 서승순(徐昇淳) 등이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어째서 이와 같이 여러 번 상소하여 공연히 번거롭게 하는가? 잘 알고서 물러가라."
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우선(尹宇善)이, ‘안악 군수(安岳郡守) 김문현(金文鉉)이 이향(吏鄕)을 잘 단속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만들었으니 먼저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아뢰었다.
3월 27일 임인
전교하기를,
"각국과 통상을 한 이후로 안팎으로 관계되는 일이 날로 증가하고 관청과 상인들이 주고받는 통신이 그에 따라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체전(遞傳)을 합당하게 하지 못하면 원근의 소식을 모두 연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정 총국(郵征總局)을 설립하도록 명하니 우선 연해 각 항구에 오가는 신함(信函)을 맡아서 처리하고 내륙의 우편에 대해서도 점차 확장하여 공사(公私)에 이롭게 하라.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영식(洪英植)을 우정 총판(郵征總辦)으로 차하(差下)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며, 해당 총국(總局)의 시행 장정(章程)과 써야 할 인원도 모두 다 해당 총판이 품지해서 시행하라는 내용으로 군국아문(軍國衙門)과 통신아문(通信衙門)에 분부하라."
하였다.
주진 대원(駐津大員) 남정철(南廷哲)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올린 진면(陳勉)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두 가지가 있는데 내치(內治)와 외교하는 것입니다. 내치는 외교의 근본이고, 외교는 내치 이후의 일이니 전하는 어진 정치를 더 하고 재정을 더 절약하소서. 신이 천진(天津)에 있을 때 중국의 사대부(士大夫)들과 서로 만나게 되어 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다 말하였습니다. 신이 수원(水原)의 여사(旅舍)에 이르러 초소(草疏)를 써서 올렸으니 살펴보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면한 내용이 절실하니 나랏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 명심하겠다."
하였다.
3월 28일 계묘
홍영식(洪英植)을 군국사무 협판(軍國事務協辦)으로, 이조연(李祖淵)을 군국사무협판 겸 기기국총판(軍國事務協辦機器局總辦)으로, 한규직(韓圭稷)을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으로, 변원규(卞元圭)를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으로, 심상훈(沈相薰)을 군국사무 참의(軍國事務參議)로 삼았다.
안정옥(安鼎玉)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3월 29일 갑진
군국사무 협판(軍國事務協辦) 이조연(李祖淵)을 전원국 총판(典園局總辦)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를 제수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춘도기(春到記)를 인정전(仁政殿)에서 설행(設行)하고,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오태은(吳泰殷),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민철훈(閔哲勳)과 진사(進士) 김만수(金晩秀)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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