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해
심순택(沈舜澤)을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으로, 민영목(閔泳穆)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삼았다.
5월 2일 병자
민영익(閔泳翊)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전 장령(掌令) 박형동(朴衡東)과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기홍(金基洪) 등이 각각 상소하여, ‘수원(水原)과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 다시 제사를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전 지평(持平) 한필은(韓必殷)이 상소하여 시폐(時弊)에 대해서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도적을 없애는 문제는 과연 절실하고 시급한 일이다. 묘당(廟堂)에서 해도(該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기어이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라."
하였다.
5월 3일 정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오 제독(吳提督)이 철수하였고 그가 거느리던 세 진(陣)도 차례대로 이어서 출발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월 4일 무인
민영목(閔泳穆)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홍종운(洪鍾雲)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종필(趙鍾弼)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인명(李寅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현익(李玄翼)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조제화(趙濟華)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5월 7일 신사
교섭통상사무협판(交涉通商事務協辦) 변원규(卞元圭)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본 자품을 환수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하비(下批)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성경(盛京)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咨文)을 보니,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모여 의논한 길림(吉林)과 조선 간의 무역 장정(貿易章程) 1통을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시행할 데 대하여 통지한다고 하였습니다. 회답 자문을 전례대로 지어내어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9일 계미
대신과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수차(袖箚) 13조목을 올렸는데,
첫째는, 변원규(卞元圭)를 본 자급대로 시행하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하는 것은 하지 말며, 둘째는 북백(北伯)이 장계(狀啓)에서 청한 대로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을 파출(罷黜)하고 논죄하며, 셋째는 전환국(典圜局)을 없앨 것이며, 넷째는 감역(監役)을 가려 차임하며, 다섯째는 경략사(經略使)를 감하(減下)할 것이며, 여섯째는 감생청(減省廳)을 없앨 것이며, 일곱째는 해외의 여러 나라들에 유람하고 있는 생도(生徒)들을 소환할 것이며, 여덟째는 대간(臺諫)들의 임기를 길게 할 것이며, 아홉째는 모든 일에 옛 규례를 회복할 것이며, 열째는 지방 벼슬을 자주 체차하지 말며, 열한째는 사봉(私捧)을 막을 것이며, 열둘째는 재용을 절약하며, 열셋째는 친군영(親軍營)과 각영(各營)에 차이를 두지 말라는 일이었다.
전권 대신(全權大臣) 민영익(閔泳翊), 종사관(從事官) 서광범(徐光範)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변경 시장 문제에 대하여 모여서 상의하는 일이 이미 끝났고 복명(復命)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호조 참판(戶曹參判) 어윤중(魚允中)이 띠고 있는 서북 경략사(西北經略使)의 직함을 감하(減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심의홍(沈宜弘)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이교응(李敎應)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5월 12일 병술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성생(省牲)하고 성기(省器)하고,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한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먼저 대궐로 돌아갔다.
5월 13일 정해
경모궁(景慕宮)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변원규(卞元圭)에 대하여 본 자급을 환수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하비(下批)하셨습니다. 본 자급 역시 조정에서 준 것인 만큼 그 관직 때문에 이미 준 자급을 낮춘다는 것은 비록 특지(特旨)로 인하여 거행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체로 볼 때 매우 구차스럽습니다. 미관말직인 상역(象譯)이라는 구실로 전식(典式)이 무너져 파괴되는 것을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되니, 변원규의 새 자급을 환수하고 다시 본 자급으로 시행하소서. 반대 의견을 올리지 않은 승지(承旨)와 신중하게 하지 못한 전관(銓官)들은 모두 다 현고(現告)를 받은 다음 파직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승지와 전관은 용서하라."
하였다.
5월 14일 무자
방축향리(放逐鄕里) 죄인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를 특별히 방송하였다.
특별히 변원규(卞元圭)를 제수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홍시형(洪時衡)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중국 사람 세 명이 와서 공문(公文)을 전하기에 그 내용을 보니, 길림(吉林) 돈화현(敦化縣)에서 보낸 공문이었는데, 토문강(土門江) 북쪽 기슭을 차지한 채 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민들을 다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먼저 만들어 보내고 유민을 찾아오는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변경을 조사하는 문제는 종성 부사가 작년에 이미 돈화현에 공문을 보내어 알린 것이 있으니, 도신(道臣)이 다시 이 내용으로 자세히 공문을 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의 장계(狀啓)를 보니, ‘혜산진(惠山鎭)을 내성(內城)에 옮겨 설치해야 하겠는데, 영락한 진영인데다 공사가 커서 형편상 할 길이 없습니다. 진동(鎭東)과 운총(雲寵)을 이미 혁파하여 본 진영에 소속시켰으니 재목, 기와, 돈 같은 것을 모두 이건하는 공사 비용에 넘겨서 공사를 끝내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제 이미 혁파한 보루의 물품과 재물로 진영을 이건하는 공사 비용에 떼주어 보충하여 주도록 하는 일이 매우 편리한 방도이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 임한수와 남병사 윤웅렬의 장계를 보니, ‘진동 등 여섯 진(鎭)을 혁파한 뒤에 각 진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 더러는 영락된 진을 보충하는 데로 돌렸고 몸에 사고가 생겼으며 죽었거나 도망쳐 달아나다 보니 나머지 군사들은 노약자들이라 공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전례대로 부민(府民)을 붙이도록 묘당에서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여러 조목의 조처는 반드시 도신과 수신이 참작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만, 진졸(鎭卒)을 공사에 응하도록 하되 쌍청(雙靑)과 황토(黃土)의 전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 임한수와 전 북병사(北兵使) 구준현(具駿鉉)의 장계를 보니, ‘아오지(阿吾地) 등 다섯 진(鎭)을 혁파한 뒤에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참작하여 일처리를 하였습니다만, 그 가운데 감히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묘당에서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첫번째는 아오지에서 폐단을 바로잡는 데 쓴 본전(本錢) 4,500냥에 대한 10분의 2의 이자 900냥을 조산진(造山鎭)에 이획(移劃)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전(美錢), 영달(永達), 방원(坊垣) 세 진에서 장리(長利)를 놓아 늘어난 이자돈은 각각 해당 합진(合鎭)에 이획해야 마땅합니다. 시행해야 할 여러 가지 조목에 대해서 이렇게 충분히 상의해서 계문(啓聞)한 만큼 모두 장계 내용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에,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은 보답할 것을 도모해야 하는 처지로서 인심을 완전히 잃고 있고, 가령 주구하는 정사를 하면서도 번번이 군사에 소용되는 물품 때문이라고 핑계대고 있습니다. 열 집에 한 명의 군사를 내는 것이 비록 옛 규례에 의거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남북으로 끌고 다니게 되면 어찌 당장에 흩어져 달아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버렸으니,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망령된 짓입니까? 별기군(別技軍)을 재임(齋任)으로 삼은 일은 더욱이 고약하기 그지없습니다. 500년 간 제사를 지내오는 자리가 끝내 하루아침에 총과 포를 훈련하는 마당으로 되게 하였으니, 온 지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여론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그 죄상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때 이 임무는 당장 교체시키기 곤란하니, 우선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5일 기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정국(郵征局)에서, ‘신설할 대략적인 장정과 별단(別單)을 서입(書入)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월 16일 경인
이풍익(李豐翼)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5월 17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8일 임진
이세재(李世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창렴(李昌濂)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민겸호(閔謙鎬)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남계복(南啓宓)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5월 19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이탈리아 흠차 전권 대신(欽差全權大臣) 페르디난도 데 루까〔盧嘉德 : Ferdinando de Luca〕 【늑가】 이 수원(隨員) 6인, 병관(兵官) 15인, 배 인부〔水手〕와 병정 230명을 거느리고 이달 17일에 월미도(月尾島) 뒷바다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월 21일 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가 장계(狀啓)를 올려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의 죄상을 나열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한 일에 대하여 판부(判付)하기를, ‘지금 이 임무는 갑자기 교체시키기 곤란한 만큼 우선 죄명을 지닌 채로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교체시키는 폐단을 깊이 생각하고 심지어 관대하게 용서하여 주는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풀기까지 하였습니다만, 군사 일을 다룬다고 빙자하여 도리어 여러 사람들의 원망을 사서 각 고을에서 꼬리를 물고 소동이 일어나고 빈궁한 백성들이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게 만들었으므로 규탄하는 허다한 논열(論列)이 이처럼 지적하고 있으니, 단 하루도 군사를 통솔하는 직책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남병사 윤웅렬을 먼저 파출한 다음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함으로써 원망하는 관남(關南)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동시에 그 후임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가려 차임하여서 재촉하여 부임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 문제는 참작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경이 양해하기 바란다. 뒤에 직접 만나서 말해 주겠다."
하였다.
5월 22일 병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임명한 다음 군국사무(軍國事務)를 총괄적으로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중국 제독(提督) 주광전(朱光前)이 병대(兵隊)를 거느리고 오늘 남양(南陽)을 떠나 귀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민종묵(閔種默)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유행(金裕行)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백성과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황급한 것이 허다하고 곤란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우선 논의할 것 없다. 경이 의정(議政) 자리를 내놓은 이후에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들 말하는 것을 들으니, ‘아래에서 사직을 하고 위에서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은 모두 때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니 지금 영의정을 다시 임명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은 상태에서 한가하게 몸조리를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백성들과 나라의 병을 고치는 것이 경의 한 몸을 고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다. 나라를 근본으로 생각하는 경의 꿋꿋한 마음으로 또한 어찌 공(公)과 사(私)의 경중에 대하여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간절하게 하유하는 것이니, 형식을 갖춰 으레 사양하는 데에 매이지 말고 즉시 나와서 명을 받들고서 어렵게 이룩한 위업을 수습해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3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4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5일 기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유학(幼學) 이흔(李俒), 엄익조(嚴益祚), 심원하(沈遠河)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 이근용(李根)에게 사제(賜第)하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경자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경을 조정에 나오게 하고자 한 지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초야에 묻히려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멀어져가는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나의 성의가 부족하기 때문이지만, 어려서 배워서 커서 행하고자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끝내 과감하게 세상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소대(召對)와 서연(書筵)이 날마다 열리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임금을 보좌하고 인도하는 방도로는 바로 큰 덕을 지닌 사람이 곁에 드나들며 임금과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를 선정(先正)의 옛일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경은 선정(先正)의 자손으로서 만약 이때에 쌓은 지식을 펼쳐놓지 않는다면, 비단 내 마음이 섭섭할 뿐 아니라 경에게 있어서도 또한 조상의 미덕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은 반드시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마음을 돌려서 길에 올라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나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연관(書筵官) 김낙현(金洛鉉)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그대를 기어코 오게 하자고 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아직 한 번도 그대를 만나보지 못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나의 성의가 부족하고 말이 졸렬해서 그런 것이므로 몹시 개탄하는 바이다. 대체로 선비가 학문을 하는 것은 어진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인데, 어진 사람이 어질게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시골에 은거하면서 나와서 세상일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어진 사람을 사모하는 뜻이겠는가? 대궐이 조금 서늘하여 소대(召對)와 주연(冑筵)을 자주 열고 있으니, 바로잡아 보도하고 마음을 열어 임금에게 바치며 훈도하고 권장하는 일은 산림의 숙덕(宿德)인 그대를 버리고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지금 근심스런 만 가지 일 중에서 이것이 가장 급한 일이므로, 이에 속을 털어놓고 하유하는 것이니 그대는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빨리 길을 떠나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서연관(書筵官) 박성양(朴性陽)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여러 번 부르고 자리를 비워 두고 그대를 기다린 지 몇 해가 되는데, 정성과 예가 부족하여 아직 그대를 조정에 나오게 하지 못하였다. 그대를 나오게 하려는 나의 뜻을 따져보면 참으로 조정에서 물러가 있는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그대에게 사적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체로 선비가 경서 공부에 힘쓰고 학문을 독실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세상을 돕고 임금을 돕자는 것이지 자기 자신만을 훌륭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오랜 명망을 지니고 있는 연장자로서 은거하려는 마음을 굳게 지키면서 쌓은 지식을 펼쳐놓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그대에게 기대하였던 것이겠는가? 지금 소대(召對)와 서연(書筵)을 날마다 하고 있으니 바로잡아 보좌하는 책임과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오직 그대가 마음을 돌리기만 기다릴 뿐이다. 그대 빛나는 모습으로 조만간 나와서 아침저녁으로 곁에 있어 준다면 비단 나 한 사람의 행운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빨리 지극한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재경(李在敬)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중국 길림(吉林)과 조선 간의 무역규정이 체결되었다.
〈길림과 조선상민 수시무역 장정〔吉林朝鮮商民隨時貿易章程〕〉
조선은 오랫동안 번국(藩國)으로 있으면서 힘써 조공을 바쳐 왔다. 이제 두 나라의 변경에서 진행하던 무역의 옛 규례를 수시로 진행하는 무역으로 고친다. 이는 중국이 속국(屬國)을 우대하는 의미와 관련된다. 길림과 조선간의 무역규정을 세우는 것은 각국 통상규정과는 상관이 없다. 각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두 나라의 변경은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한다. 토문강(土門江) 북안(北岸)과 동안(東岸)은 길림(吉林)에 속한 땅으로서 태반(太半)이 황폐해서 지난날 마을이 없었고 돈화현성(敦化縣城)은 강안(江岸)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이로부터 회령(會寧)과 강을 사이에 둔 화룡골[和龍峪]의 연강(沿江) 일대에 세무국(稅務局)을 설치하고 길림(吉林) 상인들이 집을 짓고 화물을 보관하게 하고 회령(會寧)과 강을 사이에 두고 상인들이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도록 왕래에 편리하게 해준다. 길림(吉林)에서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할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불량행위를 하는 자들을 조사해내게 한다. 혼춘(琿春)과 경원부(慶源府)는 거리가 비교적 가까우므로 혼춘에서 관할하는 서보강(西步江) 나루터에 분국(分局)을 설치하고 따로 위원(委員)을 보내 세금을 징수하면서 조사하는 일까지 맡아보게 한다.
제2조
상인이 내륙으로 들어가 토산물을 사려고 하거나 유람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천진(天津)에서 제정한 규정 제4조에 따라 처리한다. 서쪽으로 봉천성(奉天省)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 선대의 능침(陵寢)에 가까운 중요한 곳과 동쪽으로 러시아 변경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국 지방에서 사사로이 다른 나라 상인들과 연계를 갖고 시장이 있는 지방에 같이 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징벌한다.
제3조
종전 영고탑(寧古塔)과 회령(會寧) 사이에 진행하던 무역, 고이객(庫爾喀)과 경원(慶源) 사이에 진행하던 무역에 관한 일체의 옛 규정은 모두 폐지한다. 이후 진행하는 무역은 다 새 규정에 따라서 처리한다. 길림 위원(委員)이 공적 사업으로 회령부(會寧府)와 경원부(慶源府) 등지에 가는 경우에 이전의 규정을 인용하여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제4조
길림(吉林)과 조선 상인들이 수시로 왕래하며 무역함에 있어 일체의 새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할 관리를 파견하되 길림 장군(吉林將軍)이 북양 대신(北洋大臣)과 협의하고 참작해서 파견하며 황제의 뜻을 물어 결정한다. 황제의 재결을 받은 뒤 다시 기일을 정해서 시장을 연다. 혼춘의 서보강(西步江) 나루터에 설치한 분국(分局)은 길림 장군이 위원(委員)을 특파하여 운영하게 한다. 조선의 각 도시에 시장을 열고 초소를 설치하는 문제는 가까운 조선 지방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간편하게 한다.
제5조
길림(吉林)에는 토문강(土門江) 가의 화룡골[和龍峪]과 서보강 나루터 두 곳에 세무국(稅務局)과 분국(分局)을 설치하였다. 조선 종성(鍾城)의 맞은편 강안(江岸)에도 이전부터 무역으로 상인들이 통행하는 길이므로 분초소를 설치하고 총국(總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불량행위를 하는 자들과 화물을 몰래 내가는 등의 폐단을 조사하게 한다.
제6조
길림(吉林)에서는 조선과 접경한 가까운 곳에 시장을 열고 상인들의 무역에 편리를 도모하여 준다. 그런데 조선 사람은 길림에서 설치한 시장 지역에 집을 짓거나 창고를 설치하지 못하며, 또 화물을 내지로 실어 들여 팔지도 못한다. 증명서를 신청하고 중국 경내에 들어가 중국의 토산물을 구매한 상인은 중국 경내에 돌아다니며 팔지 못한다. 길림 상인도 조선 지방에서 이 규정을 적용한다. 그러나 방을 세내고 화물을 보관한 경우에는 편리를 들어준다.
제7조
세금의 징수는 홍삼(紅蔘)을 제외하고 모두 가격의 100분의 5로 하며 정식세금 한 번만 내고 부가세를 거듭 징수하지 않는다. 세관(稅關)에 보고 된 화물에 대해서는 규정대로 세금을 받고 액수 외에 요구할 수 없다. 상인들이 드나들 때에는 증명서를 검열하고 통과시키며 조금이라도 말썽을 부리거나 지체시킬 수 없다.
제8조
상인들이 무역할 때에 쓰는 금과 은과 몸에 딸린 의복, 여행도구, 붓, 먹, 서적과 타고 다니는 말은 모두 세금을 면제한다. 다만 사금(沙金)이나 은(銀)광석을 시장에 들여 파는 경우 본래 화물과 같고 납작하게 만든 금, 가락으로 만든 금, 금장식품, 은전(銀錢), 덩어리 은, 부스러기 은 등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예로 세금을 면제하여 주는 경우와 다르므로 가격에 따라 100분의 5로 규정에 따라 세금을 바쳐야 한다. 길림성(吉林省)에서도 봉천성(奉天省)의 경우와 같이 처리한다. 혼춘(琿春)과 경원(慶源) 각 도시의 민간에서 구매하는 물건값과 품팔이꾼을 고용하는 데는 흔히 돈을 쓰지 않고 베를 사용하는데 이를 「소포(小布)」라고 한다. 역시 시장에서 통용되므로 돈과 다름이 없다. 수레나 낙타로 100필을 한 묶음으로 하여 나르는 것이 아닌 경우는 세금을 면제해 주어 옛 풍습을 보존한다. 요즘에는 서양기계로 짠 천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예로 인용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제9조
불량행위를 하는 자들을 조사하고 단속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등의 일은 모두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파견되어 일을 맡아보는 무관(武官)이 수시로 사실에 확인하고 처리한다. 돈과 재물에 관계되는 범죄안건들은 혼춘(琿春)과 경원(慶源)에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지방관청에 돌려주어 신문하고 처리하되 각 안건은 규정에 따라 처리하며 서로 통지한다. 상업업무와 관련이 되는 경우 그대로 세무사(稅務司)에 통지하여 조사하게 한다. 다만 영고탑(寧古塔)과 돈화현(敦化縣)은 회령(會寧)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비교적 가까운 안동(安東), 의주(義州), 혼춘(琿春), 경원(慶源)의 거리와 대비할 수 없다. 길림성(吉林省)의 사람이 조선에서 사건을 일으켰거나 사사로이 도망쳐 조선 영토 내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회령(會寧) 등의 지방관청에서 체포하여 상업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에게 넘겨주어 심의안건에 넣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죄가 칼만 씌우거나 형장만 칠 경우와 예사로운 송사(訟事)에 대해서는 해당 관리가 심리하여 결정해서 복잡함을 던다. 그러나 도죄(徒罪) 이상에 대해서는 구분해서 지방관청에 넘겨주어 심의하고 처결한다. 조선 백성으로서 길림성(吉林省)에서 사건을 일으켰거나 사사로이 도망하여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자에 대해서도 다같이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지방관청에 체포하도록 하여 세무국(稅務局)을 통해서 원래 통보가 있는 조선 지방관청에 넘겨주어 죄를 다스리게 한다. 국경에 관한 중대한 사건으로서 조선의 지방관청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세무국 위원(稅務局委員)이 조사하고 처리할 일이 아닌 경우 그 위원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양 대신(北洋大臣), 독판 대신(督辦大臣), 길림 장군(吉林將軍)】 보고하여 비시(批示)를 받아 상업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조선의 해당 각 지방관청에 통보하고 비시에 따라 처리하며, 조선 관리도 조선 정부에 보고하고 명령에 따를 수 있다.
제10조
길림(吉林)과 조선 변경 백성들 간의 무역은 봉천(奉天)과 그 실정이 비슷하다. 조선 상인이 길림성(吉林省)에 들어가 토산물을 구매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지방관청에서 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증명서를 검열한 다음 반도장을 찍고 다시 여권을 발급하여 준다. 길림 상인들이 조선에 들어가 토산물을 구매하려고 할 때에도 이 규정을 적용한다. 증명서 안에는 먼저 어느 곳 어떤 화물인가를 밝힌다. 어떤 화물인지 예정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 구매하고 돌아오다가 세관(稅關)이 있는 지역에 이르러 실제의 화물을 보고하고 원래 받았던 증명서를 바치면 화물을 조사하고 세금을 받은 근거로 세금납부 영수증을 발급한다. 세관을 드나들 때에 목록을 바쳐 조사하는 데에 오류로 기록되거나 드나들면서 휴대한 개인의 물건이 있음에도 보고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고의로 몰래 누락시킨 것으로 간주하고 화물을 조사하여 관청에 몰수한다. 예사롭게 수시로 왕래하면서 무역시장에 와서 무역하는 자도 지방관청이나 세무국(稅務局)에서 반도장을 찍은 증명서를 발급해주는데 상인의 성명과 화물, 가축의 수량을 정확히 적어 넣어야 한다. 증명서가 없으면 통과시켜주지 않는다. 길은 다만 두 나라의 무역시장이 있는 지역의 정규 도로로 다니는 것만을 인정하고 제 마음대로 사이 길로 다니면서 백성들의 집을 빌어 묵을 수 없다. 갈림길에서 질러가거나 돌아가는 자들에 대해서는 각 초소의 군사들이 잡아 관청에 보내 정식세금의 두 곱을 물려 징수한다.
제11조
길림과 조선은 도문강(圖們江)을 경계로 하여 길게 땅이 연결되어 있다. 두 나라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시장의 대안(對岸) 나루터에 관에서 나룻배를 만들어 놓고 날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화물을 조사하며, 상인들이 다른 곳에 건너다니는 배를 마련하고 길을 돌아 몰래 빠져나가는 폐단이 없게 한다. 강이 얼어붙는 시기에는 곳곳에서 길을 질러갈 수 있어 더욱더 엄격하게 순찰하고 단속해야 하며 상업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수시로 그 정형을 살펴 군사를 보내달라고 청구하여 중요한 곳을 택하여 주재시켜 순찰하며 단속하게 한다.
제12조
서양 아편과 본국에서 생산된 아편, 그리고 제조한 무기(武器)를 운반해다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천진(天津)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조선의 홍삼(紅蔘)은 규례에 따라 중국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길림성(吉林省)의 민간에서 심은 인삼(人蔘)은 본성에서 약재로 보고하였으므로, 다른 약재와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하고 다른 곳에 옮겨 파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인삼을 국외로 내가 팔 때에는 홍삼의 경우와 같이 처리하며, 가격에 따라 다같이 100분의 15로 세금을 통일하여 징수한다. 담비와 시라소니 등의 가죽은 길림(吉林)과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므로 옛 규례에는 무역이 금지되어 있다. 이런 가죽의 무역을 현재는 옛 규례를 폐지하였으므로 금령을 해제하고 일시에 유무를 상통할 것이며, 그밖의 채소, 오이, 과일, 닭, 오리, 거위, 물고기 및 기와, 목재와 작은 그릇 및 민간의 일용필수품은 봉천의 의정(議定)에 따라 일률적으로 세금을 면제한다.
제13조
두 나라 변경에서 사람과 가축을 유인해갔거나 화물을 도둑질해 갔을 때 범인을 명확히 지적해서 잡았을 경우에는 즉시로 그 물품을 돌려준다. 원래의 물품이 없을 때에는 그 범인에게 보상을 요구하고, 그 범인이 보상해줄 힘이 없으면 지방관청에서 대신해서 보상하지 않고 그 범인을 각각 본국의 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린다. 범인의 이름을 명확히 지적하지 못했거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을 때에는 모두 보상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사사로이 와서 재산을 수색하거나 무기를 휴대하고 와서 강탈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다 엄격하게 징벌한다.
제14조
상인들의 야시(夜市)는 금지해야 하고 설립 경영도 허가하지 않는다. 중개인을 두어 물건값을 정하는 것도 승인하지 않고, 상인들이 값을 정하는 것을 들어준다. 길림(吉林)과 조선에 지난날 무역하는 데 이런 폐단이 없었다 하더라도 봉천성(奉天省)에서 의정한 규정에 따라 미리 토의하여 금지하는 규정을 세워놓아야 한다. 시장에서 쓰는 도량형기(度量衡器)도 지방의 실정에 맞게 참작하여 법으로 정하되 파견한 상업에 관한 업무를 감독처리하는 관리가 조선 지방관과 모여서 제때에 토의하고 결정한다.
제15조
교섭하는 일로 오가는 문서는 봉천(奉天)의 의정에 따라 체제와 격식을 지켜야 한다. 조선에서는 존칭을 써서 ‘천조(天朝)’ 혹은 ‘상국(上國)’이라는 글자를 쓰며, 보통공문에서도 ‘중동(中東)’·‘중조(中朝)’ 등 글자와 《대청회전(大淸會典)》에 따라 ‘중외(中外)’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쉽고 간편하게 해서도 안 된다. 길림성(吉林省) 변경의 관리들은 ‘조선국(朝鮮國)’ 혹은 ‘귀국(貴國)’이라는 글자를 써서 우대하는 뜻을 표한다. 공문을 교환할 때에는 공식문건의 격식을 적용하되 다 천진(天津)에서 토의하고 결정한 규정대로 한다. 직무가 없는 두 나라의 관리들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돈과 재물에 관한 작은 문제를 가지고 두 나라의 지방관청에 문건을 내어 소송을 제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뢴다〔稟〕’, ‘올린다〔呈〕’는 용어를 쓴다.
제16조
길림(吉林)과 조선의 무역은 처음 창설된 것이다. 이번에 정한 규정에 있어 앞으로 두 나라에서 수정하려고 하는 곳이 있을 때에는 수시로 상의해서 고치되, 상업에 관한 사무를 감독처리하는 관리가 【북양 대신(北洋大臣), 독판 대신(督辦大臣), 길림 장군(吉林將軍)이다.】 청하여 지시에 따라 준수해서 모두 알맞게 되도록 한다.
부기(附記)
본 규정은 전 형부낭중(刑部郞中) 팽광예(彭光譽)와 서북 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검토 승인하였다. 월일(月日). 자문(咨文)에 의하여 이 날 인정한다.
영의정(領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정승의 벼슬을 사임시켜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돈유(敦諭)하기는 했지만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믿음을 주지 못하여 사직하는 글이 이처럼 이르렀으니, 그지없이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경은 한 번 생각해보라. 지금 나라의 형세와 백성들의 근심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간 것과 같아서 만회할 기약이 없다. 이 난국을 유리하게 수습해 나갈 책임이 오직 경에게 지워져 있는데 이제 한때 병을 앓는 것으로 인해서 이처럼 망설이니, 이것이 어찌 내가 경에게 크게 기대하던 것이겠는가? 몸조리를 잘하면 자연히 평상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경은 며칠 안에 조정에 나와서 고대하는 이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7일 신축
이재원(李載元)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사복시(司僕寺)에서, ‘경기(京畿) 연해의 해방영(海防營) 둔전(屯田) 에 대한 일은 의정부(議政府)의 회계(回啓)로 인하여 남양(南陽), 장봉(長峯), 인천(仁川) 세 곳에 있는 목장 개간지를 해당 아문(衙門)에 획부(劃付)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죽산부(竹山府)의 화적 김인규(金寅圭) 등 3명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월 28일 임인
영의정(領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재차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정승의 자리를 내놓았을 때에는 마치 무엇을 잃은 것처럼 서운했다가 경을 거듭 임명하였을 때에는 무엇을 얻은 것처럼 만족하였는데, 내가 어찌 경에게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기우는 그릇과 새는 배라는 말은 바로 나라를 걱정할 때 으레 비유해서 쓰는 말인데, 현재의 일을 놓고 생각하면 기운다는 것은 엎어질 우려가 있는 것이고 샌다는 것은 침몰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경을 번거롭게 하여 다시 나와서 엎어지는 것을 부지하고 위태롭게 된 것을 건지라고 책임지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강이 무너진 것은 경의 명망으로 엄숙하게 바로잡히게 되고, 재정이 고갈된 것은 경의 훌륭한 계책으로 넉넉하게 되며, 소요가 날로 심해지는 것은 경의 기량과 재간으로 진정될 것이니, 이것은 나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동일하게 하는 말이다. 경이 설사 핑계를 대고 물러가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시험하고 이미 증험하여 가리지 못하게 된 업적이 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나라밖에 모르고 공적인 것밖에 모르는 경의 마음으로 더 권고하기 전에 반드시 응당 서둘러 달려 나올 것이니, 내가 어떻게 많을 말을 하겠는가? 경은 헤아리라."
하였다.
민영목(閔泳穆)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상소하여 치사(致仕)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비록 오래도록 시골집에 거처하고 있지만 명망으로 보든지 도량으로 보든지 옛날에 이른바 ‘가만히 앉아서 고상하고 비속한 사람들을 다 진정시킨다.’고 하는 경우이다. 더구나 나라를 근본으로 삼는 높은 관리는 애초에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의 구별을 두지 않는 것이,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떠한데 치사하는 상소가 이처럼 자주 오는 것인가? 참으로 뜻밖이다.
아! 경의 선조인 선정(先正)은 임금의 밝은 안목과 부합되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쳤으니, 늘그막에 물러간 것도 또한 훌륭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려운 일이 허다하니 과연 어떤 때인가? 경의 재능과 계책으로 아직 속에 쌓인 것을 펴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옛일을 끌어다 마침내 전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경은 잘 헤아리고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持平) 한필은(韓必殷)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번에 북백(北伯)의 장계(狀啓)에,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이 헌비(憲碑)의 비문을 깎아버리고 군대를 재임(齋任)으로 삼았으니 모두 임금을 잊고 성인을 저버리는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는데, 법과 기강으로 볼 때 실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윤웅렬이 바다를 뛰어넘는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임오년(1882) 유월(六月)의 군사 변란 때에 저 불의(不義)한 무리들처럼 혼자서 도망쳤으니, 실로 위급한 때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게다가 기예를 조련하는 문제로 말하면 서북은 별부료(別付料), 동남은 승호군(陞戶軍)을 가지고 재력을 낭비하지 않고 나누어 방어할 수 있는데, 어째서 반드시 특별히 뽑아서 옷을 바꾸어 입혀서 공로를 세우게 하여 폐단을 생기게 하겠습니까? 윤웅렬에 대해서 법대로 논죄(論罪)하는 것은 의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법은 법으로 처리하고 벌은 반드시 벌을 주어 충성과 의리를 격려하고 기강을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하였다.
5월 29일 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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