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3권, 고종33년 1896년 10월

싸라리리 2025. 1. 2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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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양력

【음력 병신년(1896) 8월 25일】  개성(開城)의 유학(幼學) 김병원(金秉源)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의 삼정(蔘政)은 국가 재정의 일대 원천입니다. 과거에는 사역원(司譯院)에 넘겨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들의 노고를 보상하는 비용으로 삼았으므로 역원(譯員)들이 큰 이익을 챙겼는데, 갑오년(1894) 이후 사역원이 혁파되면서부터는 다시 역원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혈삼(穴蔘) 1만 5000근(斤) 전수(全數)를 경상(京商)에게 불하하였다고 하니, 신들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경상은 돈 많고 수완 있는 장사치에 불과하지만, 신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씨앗을 뿌리고 요행히 날씨가 맞아 주면 성한 것을 캐서 약간의 이문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피해가 작지 않아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저 경상들은 가만히 앉아서 무한한 이득을 챙기고 본전이 축날 우려가 전혀 없으니, 이 어찌 불로소득이 아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시는 성상이시니, 경상이든 개성 백성이든 차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앞으로는 절반을 신들에게 불하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근(斤) 당 세전(稅錢)은 삼가 경상의 예대로 있는 힘을 다해 바쳐 다소나마 경상(經常) 비용에 보탤 것입니다. 특별히 윤허해 주심으로써 개성부 억만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탁지부(度支部)와 농상공부(農商工部)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본】 38책 34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0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상업-상인(商人)
개성(開城)의 유학(幼學) 김병원(金秉源)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의 삼정(蔘政)은 국가 재정의 일대 원천입니다. 과거에는 사역원(司譯院)에 넘겨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들의 노고를 보상하는 비용으로 삼았으므로 역원(譯員)들이 큰 이익을 챙겼는데, 갑오년(1894) 이후 사역원이 혁파되면서부터는 다시 역원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혈삼(穴蔘) 1만 5000근(斤) 전수(全數)를 경상(京商)에게 불하하였다고 하니, 신들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경상은 돈 많고 수완 있는 장사치에 불과하지만, 신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씨앗을 뿌리고 요행히 날씨가 맞아 주면 성한 것을 캐서 약간의 이문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피해가 작지 않아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저 경상들은 가만히 앉아서 무한한 이득을 챙기고 본전이 축날 우려가 전혀 없으니, 이 어찌 불로소득이 아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시는 성상이시니, 경상이든 개성 백성이든 차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앞으로는 절반을 신들에게 불하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근(斤) 당 세전(稅錢)은 삼가 경상의 예대로 있는 힘을 다해 바쳐 다소나마 경상(經常) 비용에 보탤 것입니다. 특별히 윤허해 주심으로써 개성부 억만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탁지부(度支部)와 농상공부(農商工部)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2일 양력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상호(閔商鎬)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0월 3일 양력

포달(布達) 제17호, 〈궁내부 관제 중 종목과 증설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種牧課增設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종목과는 나무 심기와 짐승 기르는 일에 관한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감독 과원(課員)은 장(長) 1인(人)은 주임관(奏任官)이고 주사(主事) 2명은 판임관(判任官)이다.】


【원본】 38책 34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02면
【분류】농업-축산(畜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종묵(閔種默)을 학부 대신(學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원 경(祕書院卿) 김명규(金明圭)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10월 4일 양력

시종원 경(侍從院卿) 민병석(閔丙奭)을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에 임명하였다. 종1품 김규홍(金奎弘)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6일 양력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김명규(金明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 이채연(李采淵)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원우상(元禹常)을 함경북도 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세 번째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짐이 이런 때에 이러한 직임에 기필코 경을 초치(招致)하고자 하는 것은 짐을 섬기는 경의 마음이 변함없이 충실하고 정성스럽기 때문이다. 경의 충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 번 칙령을 받은 것을 가지고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바삐 서두르며 사직 상소만을 일삼고 있으니,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지금 회의(會議)가 행해지지 않고 속관(屬官)이 차임되지 않아 조정의 거조를 중외(中外)가 눈을 씻고 지켜보고 있는 터에, 유독 경만은 공사(公私)의 경중을 생각지 않으니, 실제에 힘쓰는 뜻이 정녕 어디에 있는가? 짐의 뜻은 작정한 바가 있으니,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9일 양력

의정(議政)과 각부(各部)의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議政府)를 다시 설치하고 첫 회의를 마친 다음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의정(議政) 김병시(金炳始), 찬정(贊政) 윤용구(尹用求)·남정철(南廷哲)·윤용선(尹容善), 참찬(參贊) 김명규(金明圭),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 탁지부 대신 서리(度支部大臣署理) 김재풍(金在豐),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윤용(李允用),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다.】  상(上)이 이르기를,
"의정부를 지금 이미 다시 설치하였고 의정이 또 연석(筵席)에 올랐으니,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더없이 다행스럽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다난(多難) 속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분발하여 이런 개혁을 하였으니, 아마도 정사와 교화가 융성해져서 찬란하게 변모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지금이야말로 군신(君臣)이 함께 힘써야 할 때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더없이 급하고 위태로운 데 대해서는 말씀드릴 것도 없거니와 오직 성상께서 뜻을 확고히 가지고 착한 것과 간사한 것을 구별하고 타당한 조치를 하며, 백성을 통제하고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에서 성의와 믿음을 보인다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부(各部)의 대신(大臣)들도 화목하고 서로 공경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조정을 해와 달보다 높이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이 오늘 위로는 성상께 바라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사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굳이 사직하려 하지 마라. 이제부터는 애써 귀에 거슬리는 말을 올린다 해도 내가 마땅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겠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은 평상시에 감히 아첨하는 말을 성상 앞에 올리지 못했지만 선뜻 받아들여 시행하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외람됨을 무릅쓰고 할 말을 다한다는 것은 매우 황송한 일입니다. 지금 이렇게 연석에 오른 여러 신하들치고 누가 명령을 진심으로 받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혹은 어렵고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여 시행하지 않을까봐 그만두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하늘땅과 같은 도량으로 안색(顔色)을 온화하게 가지고 간(諫)하는 말을 거침없이 따른다면 역시 제각기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그런데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걱정거리가 여전히 많은 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경의 성의로서는 마땅히 쪽잠을 잘 겨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여 나라와 백성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옛날의 의리입니다. 근래에 백성은 백성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나가면서 나라에서는 백성들을 잊은 듯이 괄시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와 백성들의 근심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니, 잠을 자면서도 잊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물론 애초에 아랫사람들이 맡겨준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상께서 전적으로 아랫사람들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마음을 확고히 정하고 확고한 결단을 내려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서울의 군사들이 지방에 나가서 주둔하는 것은 비도(匪徒)들을 치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비도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곤경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창을 집어던지고 보습을 틀어쥐며 더럽게 물든 것을 털어버리고 함께 새로운 길로 나간다면 나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수령(守令)이란 자들 가운데 더러는 백성들을 안착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못살게 굴거나 혹은 구실을 내세워 백성을 약탈하며, 군사를 거느리는 자들은 잘 통제하지 못하고 풀어놓아 마을로 마구 싸다니게 하니, 듣기에 매우 놀랍다. 심지어 포(砲)를 쏘아 백성을 위협하여 인명이 많이 상하는 바람에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에 쌓여있으니 짐은 잠자리에 누워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눈을 붙이지 못한다. 수령들의 실책과 병정(兵丁)들의 폐단이 정말 나라의 기강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더없이 통탄하게 된다. 만일 이전 버릇을 다시 되풀이하면 결단코 특별히 징계할 것이니, 각별히 군부(軍部)와 각 해당 관찰사(觀察使)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비류(匪類)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모두 피폐되어 성읍(城邑)들은 한산하고 마을들도 대부분 텅 비었으니 아! 이 또한 참혹한 광경이다. 저 비류들이 간혹 백이나 천으로 무리를 짓고 있지만 그 중 괴수와 흉악한 자는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밖에는 우둔하고 지각이 없거나 하는 일이 없거나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위협에 끌려들기도 하고 잇속으로 꾀는 데 붙기도 하였으며, 또 더러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나선 것이지만 결국에는 어디에 떨어지겠는가? 우선 회유하여 점점 날뛰게 만들어서 부득이 군사로 위협하게 되었는데 벼락처럼 힘으로 누르다 보면 응당 모두들 씨도 남지 않게 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너희 백성들은 근거 없는 거짓말에 동요하지 말고 각각 안착하라. 소동을 겪은 각도(各道)와 각읍(各邑)에 뜻을 보여주지 않아서는 안 되니, 해당 관찰사로 하여금 크고 작은 형편을 상세히 보고하게 한 다음에 호포(戶布)를 감해 주거나 내탕금(內帑金)을 내어 주는 것에 대하여 적절하게 품주(稟奏)하도록 하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2호, 〈의정부 소속 직원 관제〔議政府所屬職員官制〕〉를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의정부 소속 직원으로는 총무 국장(總務局長) 1명은 칙임관(勅任官)이고 의정 비서관(議政祕書官) 1명과 참서관(參書官) 1명은 주임관(奏任官)이며, 주사(主事) 8명은 판임관(判任官)이다.】


【원본】 38책 34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02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명규(金明圭)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이상재(李商在)를 의정부 총무국장(議政府總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0월 10일 양력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국상(國喪) 때 발인(發引)하기 전에 탄일(誕日)에 표리(表裏)를 살아있을 때처럼 빈전(殯殿)에 봉하여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음력 9월 25일은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탄일이니, 왕태자(王太子)가 자내(自內)의 예로 빈전에 올리는 표리와 모든 관리들이 올리는 표리는 규례대로 봉하여 올리겠습니다. 모든 관리들이 곡림(哭臨)하는 예가 있는데,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유학(幼學) 한승원(韓昇源)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작년 8월의 그지없는 슬픔은 만고에 있어 보지 못한 변고로서 하늘의 도리와 사람의 심정으로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안으로는 조정으로부터 밖으로는 심심산골에 이르기까지 마치 요(堯) 임금의 백성들이 부모의 상사를 당한 것처럼 슬퍼하고 주(周) 나라 백성들이 잊지 못하고 생각하던 것처럼 누구나 다 뛰어다니며 통곡하여 장차 천지와 더불어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것이야 말로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천성으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온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밝게 결단을 내리고 나라의 규율을 엄히 세우시어 천벌을 시원히 내려 잔당들을 쓸어버리는 일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만 같았기에 백성들의 통분이 조금 풀렸는데 이는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빨리도 흘러 대상(大祥) 날짜가 이미 지나갔는데도 관(棺)은 여전히 빈전(殯殿)에 있고 능(陵) 자리는 잡지 못하였습니다. 효성스러운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의 추모하는 마음은 더욱 애틋한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슬퍼하는 생각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이런 때에 신하와 백성들이 상복을 벗는 것은 옛 규례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예법(禮法)이라는 것은 혐의를 판단하고 차이를 구별하며 시비를 명백히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며, 인정(人情)일 따름입니다.
이제 임금이 위에 있는 만큼 사사로운 심정을 감히 풀 수 없다고 한다면 예법의 본의(本意)와 크게 어그러집니다. 공자(孔子)는 은공(隱公)의 장사에 대해서 쓰지 않았는데, 상복을 벗기 전에는 거적을 깔고 창을 베고 자는 일이 끝날 날이 없음을 의미한 것이며, 진(晉) 나라 중종(中宗)은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상복을 벗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인정상 당연한 것으로, 반드시 장사를 지낸 다음에 공제(公除)를 행하는 것은 예법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은 오직 인봉(因封)의 기일을 질질 끄는 데 대하여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상하의 마음이 서로 막히고 중앙과 지방의 논의가 갈라져서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는 도리에 크게 손상을 주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며칠 안으로 장례(葬禮)를 지내게 한다면 위로는 저 세상의 신령을 편안히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경서(經書)의 뜻이 예법에 맞을 듯하다."
하였다.

 

10월 12일 양력

탁지부 대신 서리(度支部大臣署理)인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김재풍(金在豐)이 아뢰기를,
"방금 본 부의 미름과장(米廩課長) 윤호정(尹鎬楨)의 보고를 보니, ‘지난밤 축시(丑時) 쯤에 적도(賊徒) 10여 명이 각각 칼과 검을 가지고 담장을 뛰어넘어 함부로 들어와서는 수직하는 관리와 하인을 묶어서 잡아가둔 다음 열쇠를 빼앗아 멋대로 창고를 열고 쌓아 놓은 은화(銀貨) 7,790원(元) 95전(錢)을 무난히 훔쳐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더없이 중요한 국고에 이런 도적이 들었으니, 듣기에 너무도 놀라워서 급히 달려가서 조사한 결과 과연 보고한 것과 같았습니다. 해당 과장 윤호정과 입직 주사(入直主事) 민용훈(閔容薰)은 신칙하지 못한 죄가 있는 만큼 징계하여 처리해야 하며 그날 밤 수직을 선 하인들은 모두 법부(法部)에서 엄격히 사핵(査覈)하게 하며, 죄를 범한 도적들은 빨리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날짜를 정해 기찰하여 잡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그때 신칙하지 못하였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국고의 재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적질한 것도 오히려 변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무리를 지어 칼을 가지고 관리를 묶어 놓고는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 데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는가? 적도들에 대해서는 경무청에 각별히 신칙하여 기어이 기찰하여 잡게 하라. 정말 평시에 우환을 미리 막을 생각을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대에게도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엄하게 추고(推考)하겠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관직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폐하에 대한 보잘것없는 충정을 밤낮 잊지 않고 있지만, 허수아비처럼 구차스레 자리나 채우고 있으면서 중요한 국정을 전혀 살피지 못하니, 신이 물러가지 않고 무엇을 하겠으며, 폐하께서도 신을 붙잡아둔들 무엇 하시겠습니까? 부디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신을 견척(譴斥)하심으로써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다행스럽게 하소서.
옛사람들이 미진한 내용을 첨부하여 올리던 뜻에 따라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다 털어놓겠습니다. 비록 신을 나오게 하시더라도 진술하려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으니, 폐하께서는 참작하시어 알맞은 것을 채택하소서. 다른 나라 공사관(公使館)으로 처소를 옮긴 것이 비록 급작스런 변란에 대처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해가 지나고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으니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초조함과 근심은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속히 조칙(詔勅)을 내려 사유(事由)를 명백히 알림으로써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고, 경운궁(慶運宮)으로 즉각 이어(移御)하시어 우러러 바라는 중외(中外)의 정성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대행 왕후의 국장(國葬) 길일을 받는 것을 아직까지도 끌고 있어 우제(虞祭), 졸곡(卒哭), 연제(練祭), 상제(祥祭)를 지낼 달도 이미 지나고 보니 모두들 몹시 초조해하고 있는데, 하물며 대소 향사(享祀)를 오랫동안 지내지 않는 것은 더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요즈음 좋은 자리를 다시 가려야 한다는 논의가 더러 있는데, 참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 또한 속히 명을 내려 제반 의식을 빨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작년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이미 처단된 흉악한 역적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즉시 죄안(罪案)을 만들고, 법망(法網)을 빠져나간 여러 역적들에 대해서도 역시 대책을 강구하여 붙잡아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덮어둔 채 해가 지나도록 따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륜(彝倫)이 무너지고 의리(義理)가 막혀 버렸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여러 죄인들의 이름이 이미 환히 드러난 만큼 다른 나라에 도망가 있는 자들은 외부(外部)로 하여금 담판을 지어 일일이 붙잡아 조사하여 나라의 법을 분명하게 바로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 가운데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해당국에서 재판하여 반드시 판결하겠지만 그들 또한 징계하여 처리하도록 한 뒤에 즉시 소환하여 처벌함으로써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시원스레 풀어야 할 것이니, 이 일은 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어느 때인들 대궐을 엄숙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때에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외부에 밝히지 않은 조정의 일들이 벌써 외국의 신문(新聞)에 실려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정사의 요체인데 널리 들으려다가 도리어 현혹되고 있으니, 부디 잘 살피시어 떠돌이 생활을 하며 하는 일이 없는 잡된 무리들이 성상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시어 대궐이 엄하다는 것을 보이소서.
요즈음 본업(本業)을 잃은 사람이 많아서 안으로는 액속(掖屬), 이서(吏胥), 군졸(軍卒), 시민(市民)과 밖으로는 이례(吏隷), 향임(鄕任)으로서 하루아침에 뿔뿔이 흩어져 간 자들이 무려 수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이 걱정하고 원망하며 곤궁하게 지내는 것이 어찌 불쌍하지 않겠으며, 그들에게 항산(恒産)이 없는데 항심(恒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비록 옛날대로 다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중외의 각 관청으로 하여금 점차로 수습해서 빈자리를 채워 나가도록 함으로써 위로하고 보살펴 주는 조정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병환을 짐이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병든 데 대하여 경은 유독 어찌 생각하지 않는가? 연석에서 직접 짐의 심정을 다 털어놓았으니 경은 틀림없이 이해했을 것인데, 어찌하여 사직을 청하는 글이 또 올라오는 것인가? 이번에 조목별로 진술한 데에서 변함없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을 보고 참으로 감탄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앞으로 널리 시행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만나 개혁하는 때에 경은 어찌 차마 떠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며, 짐이 어찌 가도록 허락하겠는가? 상하 간에 번거롭게 글만 주고받을 뿐이니, 경은 다시는 이런 글을 올리지 말고 오로지 직임을 맡아 착실히 도울 생각만 하라. 이것이 경에게 크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10월 13일 양력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윤용(李允用)이 아뢰기를,
"일이 있는 지방에 병참(兵站)을 나누어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이미 아뢰어 재가(裁可)를 받았습니다. 지금 각 처에 병참을 이미 설치한 이상 해당 병참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의 근만(勤慢)과 민폐(民弊)의 유무를 검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부(本部)의 부위(副尉) 박선빈(朴善斌)을 특별히 파견하여 동로(東路)의 각 병참에 가서 일체 순찰하고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친위 제5대대(親衛第五大隊)의 부관(副官) 백남혁(白南爀)은 공적인 돈을 유용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웠으며 해대(該隊)의 장관(長官)이 휴가도 주기 전에 멋대로 지방에 나가서 며칠이 지나도록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해당 관리의 행위는 비단 군기(軍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관(士官)의 체면을 훼손시킨 것입니다. 정직(停職)시키고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0월 1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0월 16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 17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이, ‘고등재판소에서 판결한 무고 죄인(誣告罪人) 윤이병(尹履炳)·김홍제(金弘濟)·이세진(李世鎭) 등은 종신 징역(終身懲役)에 처하고 조연하(趙淵夏)는 징역 2년 6개월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참작할 것이 없지 않으니, 이세진은 유형(流刑) 3년에 처하며, 윤이병과 김홍제는 유형 2년에 처하고, 조연하는 감등(減等)하여 징계한 뒤에 풀어주라."
하였다. 법부에서 모두 지도군(智島郡) 고군산(古羣山)으로 배소(配所)를 정하였다.

 

10월 18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에게 진전(眞殿)에 나가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9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진전(眞殿)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경소전(景昭殿)을 새로 지을 때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은 특별히 종1품으로 올려 주고, 탁지부 고문관(度支部顧問官) 브라운 〔柏卓安 : J. McLeavy Brown〕은 특별히 종2품 금장(金章)을 하사하며, 별감동(別監董) 강건(姜湕)·이인우(李寅祐)·김규희(金奎熙)·이용구(李容九)·한재진(韓在鎭)·신태긍(申泰兢)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6품 이용석(李容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나라는 매우 어렵고, 인산(因山)은 아직 능(陵) 자리도 잡지 못했으며, 대가(大駕)는 여전히 외국 공사관(公使館)에 계십니다. 신자(臣子)된 자는 애통하고 황송하여 문제를 논의할 겨를도 없어야 하겠지만 절박하여 늦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어찌 감히 성상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나라의 안위(安危)는 적임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데에 달려 있고, 사람의 현부(賢否)는 정도(正道)로 선발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옛 선비는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당대의 인재를 내어 당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타고난 천성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든 차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인재를 쓰는 방법에서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은 관서(關西) 사람입니다. 관서 사람들은 한 나라에서 길러낸 몸으로 여러 차례 열성조(列聖朝)에서 맑은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나 끝내 다른 지방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지가 지금 거의 3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인재를 널리 등용하라는 조서(詔書)를 삼가 받들고는 우리 지방 사람들은 서로 축하하고 손뼉을 치면서, ‘지금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 쌓인 원한을 풀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학술이 있고 재주가 있으며 충성과 신의가 있는 사람들치고 누군들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추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산을 지고 짚신을 신고 먼 길을 떠나 서로 이끌면서 서울에 올라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낮은 품계나 하찮은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팔도(八道)는, 비유하면 한 가정의 여덟 아들과 같습니다. 일곱 아들은 편안히 잘 살지만 한 아들은 병들어 이리저리 구걸을 할 경우, 부모야 불쌍하고 측은히 여기지만, 유독 형제들에게서 동정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해 통곡한다면 어찌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이건만 여러 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똑같은 신민(臣民)이 거주하는 도이건만 여러 도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하니, 비록 하늘까지 통하는 효성과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더는 등용될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사실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어서 조정에서는 관서를 다른 지방과 심하게 차별하는 것입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지역 때문에 사람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기산(岐山)과 풍주(豐州)로 말하면 땅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주(周)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어질고 순후한 교화를 일으킨 반면, 진(秦)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날쌔고 사나운 기운을 일으켰으니,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인도하는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은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등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소서.
옛날 우리나라에는 원래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단군(檀君)이 처음 나오자 예의로 사양하는 풍속이 이루어졌고, 기자(箕子)가 교육을 하자 인자하고 어진 교화가 일어났지만, 일찍이 인재를 빌려서 쓰거나 백성을 바꾸어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관서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모범이 되는 지역으로, 사람 때문에 지역을 폐해서도 안 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폐한단 말입니까? 경남(梗楠)이나 여장(橡樟)과 같은 좋지 않은 재목이라도 장석(匠石)은 그 나무들을 베었고, 기기(騏驥)나 화류(驊騮)와 같은 준마(駿馬)는 기주(冀州)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백락(伯樂)은 알아보았으니, 물건도 그러한데 어찌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아! 양주(涼州)를 버리려고 한 것은 등즐(鄧騭)의 그릇된 논의에 해당되지만, 유독 관서에서 인재를 빌리는 것은 사실 우후(虞詡)의 바른 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열 집 밖에 안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당당한 40여 개 주(州)에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신은 이전의 인재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하늘의 뜻에 응하여 일어나신 분입니다. 태조 대왕께서 의로운 선비를 불러 모으자 스스로 그 휘하에 들어가 마침내 좌명(佐命)의 공훈을 세운 사람은 의주(義州)의 장사길(張士吉)이었습니다. 선묘(宣廟)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평양(平壤)은 이미 적들에게 점령되어 창고의 재물과 곡식이 죄다 적들의 손에 들어간 결과 남녀가 이고 지고 도로에 늘어서서 굶주림을 참고 일하면서도 배반하고 달아난 사람은 끝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랑이처럼 앞장서서 장수를 죽이고 깃발을 뽑아버림으로써 삼군(三軍)의 사기를 열 배나 높여 중흥(中興)의 공을 이룩한 것은 용강(龍岡)의 김경서(金景瑞)였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깊이 들어와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피난할 때 일행 모두가 굶주려서 걷지 못하자, 개천(价川)의 이춘란(李春蘭)은 정미(精米) 300석(石)을 스스로 마련하여 중도에 실어오고 그 길로 대가를 호위하여 도보로 의주(義州)까지 따라갔습니다. 만일 충의(忠義)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갑자년(1624)에 역신(逆臣 :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사직(社稷)이 자못 위태롭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서서 선봉으로 적의 칼날을 맞받아 그 대세를 꺾어놓고 승세를 타서 적을 쓸어버린 사람은 평양의 김태흘(金泰屹)이었습니다. 병자년(1636)과 정묘년(1627)에 오랑캐의 강한 기병(騎兵)이 몰려들어 바람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경내(境內)에 가득 찼을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한 다음 충의를 불러일으켜 여러 차례 적군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를 수없이 벰으로써 서쪽 관문을 지켜낸 사람은 철산(鐵山)의 정봉수(鄭鳳壽)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다짐한 다음 적들을 안주성(安州城)으로 유인하고 화살이 떨어져 죽을 때까지 힘껏 싸운 것은 평양의 김양언(金良彦)입니다. 병자년(1636)에 김화(金化)에서 이긴 것은 전적으로 본 도의 장교와 사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운 결과였는데, 충성을 다하여 애쓴 사람은 안주(安州)의 함응수(咸應秀)였습니다. 그 밖에 의주의 을파소(乙巴素), 평양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강서(江西)의 김반(金泮), 태천(泰川)의 선우협(鮮于浹), 순안(順安)의 한우신(韓禹臣), 영유(永柔)의 김우범(金禹範), 용강(龍岡)의 김정국(金正國) 형제, 선천(宣川)의 차예량(車禮亮) 형제는 모두 세상에 드문 인물들입니다. 더구나 수(隋) 나라 양제(煬帝)의 군사가 물러간 것과 당(唐) 나라 태종(太宗)의 군사가 패배한 사실이 옛날의 역사책에 실려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관서 사람들의 충의를 대체로 짐작할 만합니다.
아! 변란이 있을 때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반면, 평상시에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계신 폐하께서 관서 백성들의 원통한 심정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왕왕 충성과 신의가 있고 재주와 덕망이 있는 선비들이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변별하여 한 고을의 기대를 받고 있더라도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지 못하고 자사(刺史)가 천거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작록(爵祿)이 미치지 않고 명성이 알려지지 못한 채 성대(聖代)의 버림받은 처지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정사와 먼 데 사람이나 가까운 데 사람이나 다 같이 돌보는 의리로 볼 때 과연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이 지역은 바로 3,000년 전의 옛 도읍지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500년 동안 교화를 받은 백성이며, 이 지역은 바로 이 나라의 땅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의 사람들인데, 애당초 무슨 다른 것이 있다고 이처럼 천하고 구차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까? 만약 변두리 지역이라서 하늘에서 인재를 내려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주(周) 나라의 여상(呂尙), 한(漢) 나라의 구순(寇恂),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은 모두 변두리 출신이며, 만일 사람이 본래 한미(寒微)하니 어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상(商) 나라의 부열(傅說), 당(唐) 나라의 배도(裴度), 송(宋) 나라의 적청(狄靑)은 모두 한미한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 가운데 지역을 제한해서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역은 중요하고 하찮은 차이가 없고 사람은 오랑캐와 중국의 구별이 없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버림받는단 말입니까? 관서 지방의 신민(臣民)은 성인(聖人)의 세상에 태어나 만물과 나란히 서서 한 하늘이 내려 주는 은택을 함께 받건만, 유독 햇빛과 달빛만은 비치지 않고 있습니다. 형체를 부여받은 처음에는 본성이 비록 같지만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그 몸이 천하게 되어 대대손손 영원히 온 나라의 버림을 받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관서에는 등용할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다면 시험 삼아 근래 관서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사(經史)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 나라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고,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도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쇠사슬에 묶여 앞으로 나갈 방도가 없을 뿐입니다. 그중에서 뛰어나 구속되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워 나가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혹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하며, 마음대로 행동하여 구애받지 않는 사람은 슬프고 분해서 죽고 싶은 마음에 대개는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결국 인재가 되지 못하고 마니, 이는 본래 천지가 인재를 낸 뜻이 아니며, 조정에서 인재를 기르는 성과에도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아! 한 사람이라도 제 살길을 얻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한때라도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으면 재변을 불러오는데, 하물며 수만 명의 남자가 살길을 얻지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원망을 품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나가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봉지(封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존경하며 예우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단군의 고향 사람이고 기자의 봉지 사람인데도 도리어 나라 안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심합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땅은 긴 것을 잘라서 짧은 데다 붙이더라도 불과 수천 리에 지나지 않는데, 사방 천여 리나 되는 한 도(道)의 44주(州)를 다 버리는 것 또한 이웃 나라에 소문이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관서의 모든 사람들은 다들 근심하고 울분에 차 있으며 모두들 살고 싶지 않는 듯한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 이후에 더욱더 심해진 것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천지처럼 큰 도량을 가지신 성상께 유감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모든 사물은 불공정하면 우는 것이 그 본성인데, 사람의 경우에는 남이 말하면 공론(公論)이 되고 자기가 말하면 하소연하는 것이 됩니다. 신은 관서 사람으로 관서의 문제를 진술하였으니, 정말 스스로 하소연한 혐의를 면할 수 없지만, 그 실상을 따져 보면 바로 지극히 공명정대한 공론입니다. 생각건대, 억울한 것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풀어 주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고,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호소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신은 털어버릴 수 없는 억울함과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목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외람됨을 피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구구한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몸은 기혈(氣血)이 막히면 마지막에는 종기가 나고 혹이 생기는 법인데, 더구나 한 도 사람들의 심정이 울분에 차 있는데도 풀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어 신의 상소를 특별히 정부(政府)에 내려 일체 등용하심으로써 몇 백 년 쌓이고 쌓인 억울함을 통쾌하게 풀어 주어 천 리(千里)에 가득한 고통을 위로해 주신다면, 천지처럼 길러 주는 공이 여기에서 커질 것이며, 귀신과 사람이 화응(和應)하는 상서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 주사(前主事) 김익로(金益魯)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작년 10월에 두 통의 상소를 올렸는데, 하나는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지위를 회복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수를 갚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날의 각료(閣僚)들에게 제지를 당하는 바람에 중도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신들은 걱정스럽고 원통한 마음을 더욱 참을 수가 없어 다시 감히 정성을 다 털어놓아 재차 하소연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고 통렬히 살피소서.
지금 저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나라는 멀리로는 임진년(1592)에 원통하게도 침범을 당하고, 가까이로는 을미년(1895)에 통분하게도 왕후가 시해되어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신민(臣民)들은 통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장상(將相)과 대신(大臣)들은 원한을 품고 통분을 참은 채 앞뒤로 재고 꺼리면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오늘까지 지내왔으니,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춘추(春秋)》의 법에서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그 역적을 치지 않으면 장사(葬事)에 대해 쓰지 않는데, 이것은 바로 복수하는 큰 의리를 중시하고 초상과 장례와 같은 상례(常禮)는 도리어 경시함으로써 만 대의 신하들에게 이런 심상치 않은 변고를 당하면 반드시 역적을 토벌하여 복수한 후에야 임금과 아버지를 장사 지낸다는 뜻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명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장례를 지낼 달이 이미 지났으나 인봉(因封)을 하지 못하였고, 소상(小祥) 기일이 이미 지나갔지만 복(服)을 벗을 기약이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고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복수하는 큰일은 한시가 급한데도 형편이 궁하고 힘이 약하여 스스로 분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 원통합니다. 연(燕) 나라에서는 선왕(先王)의 수치를 씻고도 오히려 늦었다고 하였으며, 제(齊) 나라에서는 9대의 원수를 갚았으니,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무릇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며 해와 달이 비추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정말 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가진 자라면 누가 그 부모의 원수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국(萬國)이 바둑판처럼 퍼져 있어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나란히 서고, 강하고 약한 나라들이 대등하게 나서서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법(公法)으로 유지해 나가기 때문에 가능할 뿐입니다. 정말 공법이 아니라면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세상에 어찌 하루라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만국의 풍속은 비록 다르지만 천지의 타고난 성품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나라의 내정(內政)에 간섭하는 것은 이미 공법에서 허락하지 않는 바인데, 더구나 함부로 흉악한 짓을 행하여 우리 국모(國母)를 시해하였으니, 이것을 공법이 용서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째서 각국(各國)과 널리 의논하지 않으십니까? 한 목소리로 의리를 같이하여 공법에 따라 토벌함으로써 영원토록 오주 동맹(五洲同盟)에 끼지 못하게 한다면 300년 묵은 원수와 새로 받은 수치를 하루아침에 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신민과 사졸(士卒)들은 의분과 적개심으로 약국(弱國)을 강국(强國)으로 변모시킬 것이며, 자주 독립(自主獨立)의 권한이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반역의 무리들이 다른 나라에 도망가서 숨는 데 대해서도 공법에서는 역시 숨겨두거나 보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금 망명하여 법망을 빠져나가 일본(日本)을 소굴로 삼고 있는 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화(禍)를 길러내고 재앙을 만들어 화근의 기미가 은연중에 숨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또한 누구를 꺼려서 엄히 조사하여 소환하심으로써 신속하게 나라의 법을 바로 세우고 훗날의 끝없는 근심을 막지 않으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우레와 같은 위엄을 빨리 떨치시고 해와 달과 같은 밝음을 환히 드러내시어 의로운 목소리를 한 번 떨쳐 천하를 뒤흔드신다면 조종(祖宗)의 영령께서는 장차 기뻐하며 저세상에서 감격하여 말없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중흥하여 다시 억만 년토록 복이 이어질 것이니, 신하와 백성들이 춤추며 기뻐할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실로 충분(忠憤)이 격발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10월 21일 양력

러시아〔俄國〕에 갔던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대관례(大冠禮)에는 제 날짜에 참가하였으며 잘 다녀왔는가?"
하니, 민영환이 아뢰기를,
"왕령(王靈)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 제도와 배치하는 일은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민영환이 아뢰기를,
"군사 제도는 일체 서양 나라들과 같은데 온 나라가 군무(軍務)에 전력하여 강한 나라를 이룩하였습니다. 또한 각종 남녀 학교가 있어 인재를 교육하여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풍속이 다른 서양법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군무와 학교에 관한 정치의 본보기에 대해서는 본받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 22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인봉(因封) 지내지 못하였으니, 몹시 애통해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잠깐 사이에 또 10월이 되어 뒤늦게 장사 지낼 때를 당했는데, 원칙대로 할 것인지 변통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상복(喪服)을 벗느냐 벗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니, 고금의 예법을 참작하여 미리 강구해서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춘추(春秋)》에서는, 장례에 대한 기록을 쓰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은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장례에 대한 기록을 쓴 시대도 있었습니다. 자사자(子思子)는 상복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삼년상(三年喪)에서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면 상복은 그대로 입어야 하니, 어떻게 벗을 수 있는가? 기년복(朞年服)이나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상사(喪事)에서는 벗었던 복을 다시 입고 장사를 지내며, 장사를 지낸 다음에 상복을 벗되, 우제(虞祭)는 길복(吉服)을 입고 지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옛 성인의 극진한 교훈입니다.
한(漢) 나라 대씨(戴氏)의 《예기(禮記)》 〈상복소기편(喪服小記篇)〉에는, ‘오랫동안 장사를 지내지 못했을 경우 단지 그 상례를 주관하는 사람만이 상복을 벗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삼베옷을 입고 상복의 규정에서 정해진 달수를 채운 다음에 상복을 벗으면 그만이다.’라고 하고, 《석거예의(石渠禮議)》에는, ‘이미 상복을 벗었다가 장사 때에는 모두 도로 입는데, 서인(庶人)들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晉) 나라의 중종(中宗) 때인 건무(建武) 원년에는 명하기를, ‘오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오직 그 상주(喪主)만 상복을 벗지 못한다. 다른 사고로 인해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면 자식 된 정리로 빈소(殯所)에서 지내면서 상복을 벗을 수 있는 것이니, 멀고 가까운 것은 따질 것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하후성(夏侯盛)은, ‘아내의 상사(喪事)에 1년이 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면 상복을 벗어도 되는가?’라고 물음을 던지고는, ‘아내의 상사에서는 그 남편이 상주인데 상례를 주관하는 사람은 상복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는 것이 예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송(宋) 나라 뇌차종(雷次宗)은 논하기를, ‘빈소에 관(棺)이 그대로 있는데 어찌 평상시의 옷차림으로 전(奠)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남편이 아내의 상례를 주관하는 것은 근본이 중요하기 때문이니, 그래서 상복을 벗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복소기편〉의 주석(註釋)에서 유울지(庾蔚之)는 논하기를,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의 상례를 주관할 때는 오랫동안 줄곧 마질(麻絰) 차림을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복제(服制)를 고치는가 고치지 않는가에 대한 예론(禮論)입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아내의 상사에 1년이 넘어서 장사를 지내고 연제(練祭)를 지낸다.’는 조목을 가지고 ‘어머니의 상사에 1년이 넘도록 장사 지내지 못하였다면 아들은 응당 장사를 지낸 뒤에 연제를 지내지만, 남편은 장사를 지내기 전이라도 상복을 벗을 수 있는가?’라고 물어온 데 대해서 대답하기를, ‘남편도 아내에게 역시 3년을 지켜야 할 의리가 있는 만큼 그 아들의 경우와 같이 행동해야 할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상복을 벗지 않는다는 정론(定論)입니다.
《춘추》와 예(禮)에 관련된 주장들을 참고해 보았지만 끌어댈 만한 전례가 있다고 하여 감히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복제(服制)나 동궁(東宮)의 최제(衰制)는 삼가 〈상복소기편〉에 의거하여 벗지 말아야 하겠지만, 조정 신하들의 기제(朞制)나 서인(庶人)들의 변제(變制)에 대해서는 벗든 벗지 않든지 간에 장차 의문(儀文)에다가 조항별로 주(註)를 달되 우리 왕조의 변례(變禮)를 더욱 신중히 해야 하니, 신의 이 글을 의정(議政)을 역임(歷任)한 대신(大臣)들과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보내 널리 의견을 물어서 알맞게 처리하도록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의심스러운 예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것은 형편상 당연하다. 청한 대로 수의(收議)하겠다."
하였다.

 

10월 23일 양력

전 장령(前掌令) 박인환(朴寅煥)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을미년(1895) 8월의 변고는 천지가 생긴 이래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사를 지낼 달이 지나갔건만 아직도 장사를 지내지 못하여 신하들은 정성과 예를 펴지 못하였고, 종묘사직에는 제사 음식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통곡할 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말씀드린다면 일본(日本)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거적을 깔고 창을 베고 자며 칼날을 갈아 원수를 갚아야 하는 놈들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춘추(春秋)》의 법에서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그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례에 대한 기록을 쓰지 않는데, 이것은 바로 만세의 신하들에게 반드시 역적을 토벌해서 복수한 후에야 임금과 아버지를 장사지낸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노(魯) 나라 은공(隱公)의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 장례에 대한 기록을 쓰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체로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나온 것으로서 옛 규례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변고는 역사상 없던 일이기 때문에 역시 의거할 데도 없지만, 이들은 바로 나라의 원수이고 신하와 백성들이 원망하는 자들입니다. 삼가 폐하께서는 빨리 우레와 같은 위엄을 떨치고 해와 달과 같은 밝음을 환하게 드러내시어 각국(各國)과 널리 의논하고 공법(公法)에 의거하여 원수를 토벌하심으로써 300년 묵은 원수를 갚고 새로 받은 수치를 씻어내소서.
그리고 예제(禮制)로 말씀드리면,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상복을 벗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복소기편(喪服小記篇)〉에서는, ‘3년 만에 장사를 지내면 반드시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장사를 지내지 못했으면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을 지내지 않으므로 상복도 벗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여러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보시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지 않는다는 《춘추》의 법을 시행하소서.
그리고 우리나라는 예의로 사양하는 풍속과 효성으로 정사를 하는 원칙에서 거상(居喪) 중인 사람은 출사(出仕)하지 못하는 것이 500년 동안 이루어진 규례입니다. 근래에 잇속을 노리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기복(起復)을 청탁하여 공무를 행하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으며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버이에게 효성스럽지 못하면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숙묘조(肅廟朝) 이래로 국장(國葬) 전에는 신민의 집에서 장사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벼슬하는 자들은 선왕의 법을 돌아보지 않고 단지 녹(祿)과 벼슬만을 탐내어 상제(祥祭)를 서둘러 끝내고는 머리를 숙이고 관직에 나오니, 이것은 모두 이익 때문에 임금을 섬기는 것이지 의리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 의리가 어디에서 생겨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탐욕스럽고 염치없는 무리들을 빨리 제거하심으로써 의리를 밝히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두 가지 문제는 사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바른 논의이다."
하였다.

 

10월 25일 양력

영국 총영사(英國總領事) 조르단〔朱邇典 : Jordan, J. N.〕  【조르단】 을 접견하였다.

 

10월 26일 양력

행재소(行在所)에서 일본국(日本國) 요리히토친왕〔依仁親王〕을 접견(接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 27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에게 진전(眞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8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진전(眞殿)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조령을 내리기를,
"대행 왕후(大行王后)가 탄신한 달이 또다시 왔으니, 슬픈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음력 25일에 빈전(殯殿)에서 별전(別奠)을 친히 행할 것이며 제문(祭文)을 직접 지어서 내릴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동궁(東宮)의 정성과 효성으로서 어느 때인들 슬퍼하고 그리워하지 않겠는가마는, 이 달에 탄신일이 가까워오자 원통해하고 슬퍼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예법이란 인정에 의한 것이지만 오히려 의리를 내세울 수 있다. 이번 음력 25일에 전(奠)을 한 번 친히 행하여 지극한 정을 펴도록 하며, 제문은 동궁이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친히 지내는 별전은 전작례(奠酌禮)대로 하고, 동궁이 직접 지내는 별전은 작헌례(酌獻禮)대로 마련하되 백관은 참석하라."
하였다.

 

10월 29일 양력

포달(布達) 제18호, 〈궁내부 관제 중 비서원 승 3인을 4인으로, 장례원 장례 5인을 6인으로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秘書院丞三人以四人掌禮院掌禮五人以六人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정1품 민영준(閔泳駿)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김덕규(金德圭)·윤길구(尹吉求)·민경호(閔京鎬)를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정2품 이희로(李僖魯)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0월 30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빈전(殯殿)에 지내는 별전(別奠)의 제문(祭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빈전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종1품 조병식(趙秉式)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이규안(李奎顔)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윤용식(尹容植)·민영주(閔泳柱)·이정규(李廷珪)를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0월 3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가졌으며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지내고 석상식(夕上食)도 직접 올렸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서 의식을 가지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가졌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총호사(總護使)와 의정(議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김병시(金炳始),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희로(李僖魯)이다.】  상(上)이 이르기를,
"산릉(山陵)에 관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다시 상지관(相地官)을 여러 곳에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려고 한다. 그래서 경들을 불러서 만나보는 것이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인봉(因封) 기일이 지나 중앙과 지방에서 근심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데, 지금 하교를 받들어 보니 더욱더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방도로는 좋은 자리를 다시 잡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이전에 봉표(封標)한 곳이 몇 군데나 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군데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모든 술업(術業)은 정통한 사람이 드물고, 풍수 보는 법은 땅 속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의견이 많습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미 서로 다른 논의가 있는 이상 다시 여러 곳을 잘 간심하여 좋은 자리를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전날 연석(筵席)에서 이미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제 갑절 더 잘 살피어 좋은 자리를 잡은 다음 인봉하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전(眞殿)과 빈전(殯殿)을 이미 이봉(移奉)한 만큼 짐(朕)도 이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먼저 경운궁으로 이어하시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것은 바로 환어(還御)하시는 한 가지 문제인데, 지금 하교를 받들고 보니 너무도 기뻐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단지 빨리 수리하고 좋은 날을 받아서 이어하시기를 더없이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환어하시는 것을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고 답답해하였는데 이제 이어하신다는 조칙(詔勅)을 내린 후에는 안타깝게 바라던 마음을 아마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각(殿閣)이 완공되면 이어하겠지만, 진전의 처소가 좁아서 매우 송구스럽고 답답하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전각이 완공되면 진전을 새로 세운 처소에 옮기고, 시어소(時御所)는 즉조당(卽祚堂)으로 정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터가 매우 좁아서 불편한 점이 많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요즘 예절이란 없고 단지 제례(祭禮)만 있을 뿐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예법이란 나라가 있으면 있고 집이 있으면 있는 법이니, 어찌 예법을 없애버린 나라와 집이 있겠습니까? 신이 마음속으로 몹시 의심스럽고 괴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복(起復)입니다. 고약한 무리들과 상천(常賤)들도 모두 부모상(父母喪)에 27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제도를 아는데, 지금은 기복을 항식(恒式)으로 여겨 벼슬길에 나서는 길로 삼으니, 어찌 효성을 미루어 충성을 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습관을 빨리 없애 윤리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옳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형정(刑政)을 가지고 말하면 연좌(緣坐)시키는 형률은 나라의 큰 법인데 지금은 연좌법을 적용하지 않으므로, 반역 음모가 드러난 역적들도 단지 몸이나 피할 궁리를 하고 그 지속(支屬)들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히 지내게 하니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도 역시 옛 법을 거듭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국한문(國漢文)을 섞어 쓰는 규정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맡고 있는 모든 보고는 마땅히 옛 규정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지방에서 장계나 첩보로 계문(啓聞)하는 일이 없는 것은 나라가 생긴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계문하는 일이 없으면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기근(饑饉)에 대해서 어떻게 환히 알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형편이 위에 알려지지 않으면 그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더구나 어떠하겠습니까? 계문하는 일은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렇다. 지방의 형편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사체상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어와 인봉에 대하여 이미 명령이 있었는데, 심하게 추워지기 전에 빨리 했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하여는 신이 모두 잘 알지 못하므로 지금 연석에서 위아래가 서로 주고받은 말이 많지만 하나도 귀담아 듣지 못했으니 더없이 황송합니다. 옛날에, 말하기는 쉬워도 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또한 밝게 살펴야 합니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진전(眞殿)과 빈전(殯殿)을 이제는 이봉(移奉)하였으니,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는 것은 짐과 동궁(東宮)의 정리(情理)로 볼 때 당연하므로 당우(堂宇)의 수리를 조속히 끝내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인봉(因封)을 아직까지 지체하고 있는 것이 물론 형편 때문이기는 하지만 새로 정한 산릉(山陵)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다른 만큼 마땅히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다. 여러 곳을 다시 잘 간심(看審)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산릉 제조(山陵提調) 이재완(李載完)과 빈전 제조(殯殿提調) 민병석(閔丙奭)을 서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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