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6권, 고종34년 1897년 9월

싸라리리 2025. 1. 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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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丁酉年) 8월 5일】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외부 대신(外部大臣) 민종묵(閔種默)에게는 학부 대신(學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원본】 40책 3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외부 대신(外部大臣) 민종묵(閔種默)에게는 학부 대신(學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법부(法部)에서, ‘흉악한 음모를 은밀하게 꾸민 안규대(安奎大), 변석붕(邊錫鵬), 박준상(朴準相), 국기춘(鞠基春)을 경무청(警務廳)에서 압송하여 넘겨주었기 때문에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9월 4일 양력

러시아 공사〔俄國公使〕 스페예르〔士貝耶 : Speyer, Alexei de〕  【스파야】 를 접견하였다. 폐하(陛下)를 알현한 것이다.

 

9월 5일 양력

보사제(報謝祭)를 날을 받아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장맛비가 멎고 날이 개어 장례원(掌禮院)에서 주품(奏稟)하였기 때문이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인릉(仁陵), 수릉(綏陵), 예릉(睿陵)의 능 위에 사초가 내려앉은 곳을 보수하는 날짜를 음력 8월 22일 묘시(卯時)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진행하는 규례가 있었고 또한 특지(特旨)에 의하여 의정부(議政府) 관리 이하가 능에 나가서 감동(監董)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인릉에는 의정(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장례원 경, 영선사장(營繕司長)이 나아가고, 수릉에는 김 특진관(金特進官),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겸장례(兼掌禮),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이 나가며, 예릉에는 조 특진관(趙特進官),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 겸장례,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이 나아가 모두 감동(監董)하라."
하였다.

 

9월 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 음력 8월 20일은 세상을 떠난 대행왕후(大行王后)의 두 번째 기신제(忌辰祭)이다. 짐의 슬픈 마음을 무엇으로 다 형용하겠으며 동궁(東宮)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이 어떠하겠는가. 그 날 마땅히 직접 별전(別奠)을 지내겠으니 제례에 의거하여 마련하라. 제문과 조상식(朝上食)의 제문은 직접 짓겠으며 주다례(晝茶禮)때의 제문은 동궁(東宮)이 지어서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음력 8월 18일, 19일, 20일의 제사는 모든 관리들이 입참(入參)하되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3품(三品) 이상을 지낸 사람들은 실직(實職)이 없더라도 곡반(哭班)에 입참(入參)하라."
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민응식(閔應植)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從二品)인 김주현(金疇鉉)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9월 8일 양력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김영덕(金永悳)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고,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에게 군부대신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9월 1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9월 12일 양력

칙령(勅令) 제29호와 제30호, 〈지방 제도 중 관제, 봉급, 경비의 개정 건〔地方制度中官制俸給經費改正件〕〉, 제31호, 〈각 개항장의 설치 건 중 동래항아래에 ‘삼화항 무안항’이라는 여섯 자의 첨입 건〔各開港埸設置件中東萊港下三和港務安港六字添入件〕〉, 제32호, 〈각 부와 군에 별순교의 청사 증설 건〔各府郡別巡校廳使增設件〕〉, 제33호, 〈각 개항장 관제 가운데 삼화항 감리와 무안항 감리 첨입 건〔各開港場官制中三和港監理務安港監理添入件〕〉, 제34호, 〈우체사 관제 중 개정 건(郵遞司官制中改正件)〉, 제35호, 〈사금을 캐는 규정 중 개정 건〔砂金開採條例中改正件〕〉, 제37호 〈경기 재판소 설치 건(京畿裁判所設置件)〉 【경기 재판소는 경기(京畿)의 3개 부(府)와 34개 군(郡)에서 불복(不服)하고 상소한 안건들을 심리한다. 수반 판사(首班判事) 1명, 판사 1명, 서기(書記) 4명이다.】 , 제38호, 〈각 재판소 설치 중 경기 재판소 첨입 건(各裁判所設置中京畿裁判所添入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법률 제2호, 〈한성 재판소 관제를 규정 건〔漢城裁判所官制規定件〕〉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한성 재판소 5서(署) 안에 형사 소송 중에 고등 재판소에서 수리한 사건 이외의 사건과 민사 소송을 심리한다. 수반 판사 1명, 판사 2명, 부판사(副判事) 1명, 서기 8명, 정리(廷吏) 8명이다.】


【원본】 40책 36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유학(幼學) 김성동(金性東)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심들이 사는 현풍군(玄風郡)에는 도동 서원(道東書院)이 있는데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유록(儒錄)을 처음 만들고 원임(院任)을 의차(擬差)하였고 제사를 지내는 여가에 학문을 연구하고 떳떳한 도리를 강구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를 두터이 하고 숭상하는 훌륭한 규범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습(士習)이 그릇된 데에 고착되어 어긋난 규례를 지키려 하니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고집하며 신유(新儒)와 구유(舊儒)의 구별이 있어서 제관(祭官)을 차임할 때에 구유로 불리우면 향품(鄕品)을 지낸 한미한 집안이라도 마구 임명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주고받으며 신유로 불리우면 아무리 충성스럽고 현명한 집안의 후손이라도 배척하고 막아서 한 번도 의망을 받지 못하여 심지어 문경공(文敬公)의 본손(本孫)도 ‘신유’로 불리기만 하면 임명되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풍화(風化)가 미치고 윤리를 숭상하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온갖 법도를 고치고 정사를 새롭게 하여 조야(朝野)에서 백성들을 품어 길러주는 덕을 칭송하고 있는데 유독 이 한 군(郡)의 선비들만이 교화가 막히고 임금의 덕이 펴지지 못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한결같지 못하니 어디에 향속(鄕俗)의 선함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향속이 좋지 못한 것은 오늘날의 큰 근심입니다. 빨리 윤음을 내리시어 구습을 영영 없애도록 함으로써 이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폐하(陛下)의 은혜를 골고루 받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관작(官爵)을 다 열어 주었는데 더구나 한 시골 서원(書院)의 원임(院任)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해당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조처토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양력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종건(李鍾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正二品)인 김문현(金文鉉)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다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무안 부윤(務安府尹) 진상언(秦尙彦)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부윤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으며, 삼화 부윤(三和府尹) 정현철(鄭顯哲)은 삼화감리(三和監理) 겸 삼화부윤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미국의 편의행사대신(便宜行事大臣) 겸 총영사(兼總領事)  알렌〔安連 : Allen, Horace Newton〕을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9월 14일 양력

별전(別奠) 때에 빈전(殯殿)에 내외친(內外親)되는 사람은 내곡반(內哭班)에 입참(入參)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가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선희궁(宣禧宮)을 옮겨 지을 비용 1만 3,000원(元)과 증액한 비용 1만 5,000원, 경운궁(慶運宮)의 공사 비용과 증액한 비용 5만 원, 함흥군(咸興郡)에 제언(堤堰)을 쌓을 비용 463원, 광주군(前廣州郡)에 이전에 줄 그전 돈과 지방군사 겸 순검(巡檢)들을 위한 경비로 미처 주지 못한 급료 1,136원, 지방의 14개 군(郡)에 별순교(別巡校)와 청사(廳使)를 두고 그들에게 줄 급료 4,819원, 군부(軍部)의 여비의 증액분 600원, 내부(內部)의 보좌원인 일본 사람 시오가와 이치타로〔鹽川一太郞〕의 해고(解雇) 급여비 1,000원을 모두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는 사안과 예비금 10만 원을 더 늘여 배정해서 쓰는 사안을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 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1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석곡(夕哭)을 행하였다.

 

9월 1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두 번째 기신제(忌辰祭)의 별전을 지냈다. 태자(太子)도 따라 나가서 의식을 거행하였다. 조곡(朝哭)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茶禮)를 모두 다 직접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니 수릉수개감동대신(綏陵修改監董大臣)을 면직하고, 조병세(趙秉世)로 대신하였다.

 

9월 17일 양력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참정(參政), 찬정(贊政), 궁내 대신(宮內大臣), 각신(閣臣),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원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대행왕후(大行王后)의 두 번째 기신제 후에 문안을 드리러 왔기 때문이다.

 

빈전(殯殿)의 별전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와 향관(享官),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9월 18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소견(召見)하였다. 인릉(仁陵)과 수릉(綏陵)의 수개(修改) 때에 감동(監董)한 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정자(副正字) 김현익(金顯翊)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원통합니다. 을미년(1895)의 변란을 어떻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역적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의 한규설(韓圭卨)처럼 더없이 간악하고 흉악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난 갑신년(1884)의 변란 때 유길준(兪吉濬)을 포도청(捕盜廳)에 잡아들였을 때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서 마땅히 엄히 조사하여 토죄(討罪)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의 간사한 음모에 따라 방면하여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였으니 끝내 왕비(王妃)를 죽이는 변란이 생기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갑오년(1894) 6월에 일본 군대들이 대궐에 침입하였을 때 자신이 군대의 수장으로서 물불이라도 가리지 않고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말을 채찍질하여 멀리 피했으니 두 번째 죄입니다.
작년 10월의 옥사(獄事)에서 그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제 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의 심복인 이세직(李世稙)이 재결(裁決)도 내려지기 전에 처분이 내렸다고 핑계대면서 대신(大臣)을 거치지 않고 옥문을 마음대로 열어 놓아준 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외국인에게 청탁하고 지존(至尊)을 위협하여 억지로 대신이 되려고 한 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법부 회계국장(法部會計局長) 이명윤(李命倫)은 그의 심복으로서 서로 호응하여 공전(公錢)을 농간질하였는데도 덮어둔 채 신문하지 않고 도망가도록 한 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마땅히 신중히 살펴야 하는데 요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도망치는 일이 자주 있으니 그것이 여섯 번째 죄입니다.
더구나 법을 맡은 책임이 더없이 중대한데 이 역적의 무리들로 하여금 법을 농간질하게 한다면 원수를 갚을 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사람에 대하여 원래부터 조금도 원망이 없으니 어찌 털끝만치도 모함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난신(亂臣) 한규설(韓圭卨)을 사형(死刑)에 처하여 빨리 국법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달에 이와 같은 말은 실로 피차 같은 심정에서 나온 말이니, 충심이기는 하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9월 19일 양력

종1품(從一品) 김규홍(金奎弘)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6품(六品)인 강화석(姜華錫)을 인천감리(仁川監理) 겸 인천부윤(仁川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9월 20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소견(召見)하였다 예릉(睿陵)의 수개(修改) 때에 감동(監董)한 후 들어왔기 때문이다.

 

9월 21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천지에 합제(合祭)하는 것은 사전(祀典)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원구단(圜丘壇)의 의제(儀制)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전에는 남쪽 교외에서 단지 풍운(風雲), 뇌우(雷雨)의 신들에게만 제사지냈는데 단유(壇壝)의 계급(階級)이 법도에 맞지 않았으니 밝게 섬기는 의절에서 볼 때 실로 미안합니다. 동지(冬至)절의 제사를 그대로 거행할 수 없으니 앞으로 고쳐 쌓는 등의 절차에 대하여 폐하(陛下)의 재가를 바랍니다. 호천상제황(昊天上帝皇)과 지기신(地祗神)의 위판과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를 만드는 것과 제사에 쓰는 희생, 변두(籩豆) 등의 여러 가지 의식에 관한 글들은 역대의 의례를 널리 상고하여 마땅히 일정한 규례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 원에서는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들,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제사지내는 예절은 어느 것이나 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더구나 천지에 합제하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아뢴 것이 실로 짐의 뜻에 부합되니 경은 영선사장(營繕司長)과 함께 함께 지형을 보고 날짜를 골라서 제단을 쌓을 것이며 제반 예식에 관한 규정은 아뢴 대로 하되 다만 서울에 있는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들에게서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종1품(從一品) 민영규(閔泳奎)를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9월 22일 양력

전 감찰(前監察) 이교필(李敎弼)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왕비(王妃)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서야 어찌 나라에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 날을 당하여 곡하는 날 저녁에 한 번 성토하는 거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며칠씩 귀 기울여 보아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이 의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제신들이 올린 글에서 진술하였으므로 신은 굳이 일일이 말씀드리지는 않겠으나 지금 수치를 씻고 원수를 갚는 일은 명분이 바르고 말은 순리에 맞으며 이치가 곧고 의리가 당당하여 충분히 간흉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없애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괴(逆魁)가 이미 죽기는 하였으나 혼란 속에서 죽었기 때문에 왕법(王法)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고 죄명도 폭로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역한 무리들이 핑계 댈 여지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가 풀리지 않아 나라의 법이 이로부터 해이해질 것이니 간흉한 무리들이 앞으로 무엇이 두려워서 스스로 움츠러들겠습니까? 빨리 법 맡은 관청에 명하여 방헌(邦憲)을 집행하여 법을 위반한 여러 역적들에 대하여 이미 죽었건 혹은 수사망에서 빠졌건간에 따질 것 없이 일체 처결함으로써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 조치를 다한다면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충심과 분노를 격동시킴이 이 글 속에 있도다."
하였다.

 

전 시어(前侍御) 송수만(宋秀晩)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을미년(1895) 8월의 대란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사건입니다. 신도 나라의 화육(化育)을 받은 한 사람으로, 떳떳한 마음이 격동되어 은밀히 동지(同志)들을 집결해서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함께 의논한 사람 가운데서 군부(軍部)의 정위(正尉) 이승익(李承益)이 몰래 김홍집(金弘集) 등에게 고발하였기 때문에 그 때 몇 사람이 모두 잡혀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승익은 점점 흉악한 무리들과 내통하여 작년 10월에 이근용(李根)의 옥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통을 참지 못하여 사유를 적어 폐하(陛下)에게 밝혀 진술함으로써 은전(恩典)을 베푸는 비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억울한 사정은 씻어내지 못하였고 이승익은 바로 백방(白放)되었으며 이근용은 도배(島配)가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신은 더욱 한스러워 분통이 터집니다.
듣건대 이근용은 죄에 대해서 두 등급을 감하하고, 유회준(兪會濬)은 징역을 면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회준(兪會濬)은 바로 도망간 역적인 유길준(兪吉濬)의 형이니 국법으로 응당 처단해야 할 것이고 이근용은 그 때의 공안(供案)을 살펴보면 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도배(島配)만 보냈으니 그 자신에게서는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도 그 옥사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칙령(勅令)이 있었다고 하면서 갑자기 석방하였습니다. 대신이 사사로이 스스로 법을 농간하여 두 등급을 감하한 것은 이근용과 장인 사위 사이의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랬을 뿐 아니라 옥사에 동참한 과오를 덮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가 법을 왜곡한 것이 어떠합니까?
대체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 형법(刑法)은 바로 폐하의 큰 권한인데 한규설은 몰래 사정을 썼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김홍집이나 정병하(鄭秉夏)에게 신원(伸寃)해 주고 벼슬을 회복해 주자는 의논과 유길준, 조희연(趙羲淵)의 무리들의 죄를 면해주고 천거해서 등용하자는 의논까지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 위에서 말한 죄의 등급을 낮추어준 두 사람을 즉시 전안(前案)대로 환부(還付)하고 이근용에 대해서는 다시 더 끝까지 신문하여 육형(肉刑)을 적용하며, 이승익에 대해서는 나라를 배반한 악당들과 패거리를 지은 죄로 다스릴 것이며, 한규설에 대해서는 법을 왜곡하고 역적을 비호한 죄로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격히 하고 변란의 싹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비답하기를,
"이와 같이 논단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
하였다.

 

전 주서(前注書) 안형진(安衡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인군(人君)은 한 몸으로 수많은 잡한 정사를 감당하니 의견들을 널리 받아들이고 물으며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놓지 않는다면 듣고 보고 생각하는 데 미치는 범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반드시 거울처럼 밝고 물이 스며들 듯이 깨끗한 마음으로 정사를 하고 허심하게 받아들여서 아래에 있는 신민(臣民)들이 진심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게 해야만 상이 널리 보고 널리 들을 수 있으며 정사를 좀먹고 백성들을 해치는 것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모두 잘 살펴 혁신(革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나라가 융성하느냐 쇠퇴하느냐, 다스려지느냐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은 오직 사람을 쓰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를 운영하는 데 충직한 관리들은 인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도신(道臣)과 수신(守臣)들은 인재를 끌어들이고 추천하는 일을 하지 않으니 재주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니고 있는 재주를 스스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명분(名分)이라는 것은 나라가 유지되는 바탕이고 백성들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정사와 교화가 잘 되어 가는 것은 실로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잡는 데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하들을 예우하는 도리를 지극히 하되 벼슬아치가 혹시 법을 어기게 되면 경중을 논하여 처벌하는 것이 정말로 바꿀 수 없는 양법(良法)이 되었습니다.
아, 순안 군수(順安郡守) 심종순(沈鍾舜)은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대리로 있을 때 불법 행위를 자행하면서 비리(非理)에 관련된 송사(訟事)에 연줄로 사사로이 청탁받아 도내(道內)의 전 정언(前正言) 김진모(金鎭謨), 전 장령(前掌令) 전건하(田健夏), 전 주서(前注書) 조기영(曺基永)을 사리의 곡직(曲直)을 가리지 않고 관노(官奴)를 시켜 잡아서 결박하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심히 명분을 무너뜨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을 무시하고 욕보인 일은 실로 500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괴이한 일이니 빨리 법부(法部)로 하여금 잡아서 처벌하여 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경계가 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조항들이 다 가상하도다. 특히 아래 조항의 사안이 사실이라면 매우 잘못된 일이다. 내부(內部)로 하여금 해당 관찰사에게 훈령(訓令)으로 물어서 사실을 품주(稟奏)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3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산릉의 표석(表石)을 떠내는 공사는 더없이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국장도감(國葬都監)의 감조관(監造官) 조병철(趙秉哲)은 소홀히 집행하였으니 단속을 잘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사체(事體)상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본관(本官)에서 파면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능역(陵役)에서 돌을 떠내는 일은 얼마나 중대한가? 그런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지 않아 이처럼 낭패를 보게 되었으니 본래 해당되는 법이 있다. 우선 대죄한 채로 하송(下送)하여 다시 좋은 것으로 골라서 돌을 떠서 밤낮으로 배로 운반하여 기어이 들여다 쓸 수 있도록 하라. 이 일을 가지고 각 도감(都監)이 거행하는 상황을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정성과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갑절이나 더 공경하고 명심하고 힘써서 일을 유감없이 끝내라는 뜻으로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종2품(從二品) 성기운(成岐運)을 주차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관 1등참서관〔駐箚英德俄義法墺公使館一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6품(六品) 고영진(高永鎭)은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관 3등참서관〔英德俄義法墺公使館三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9월 2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인산(因山)과 관련한 각 항목의 날짜를 명령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택하여 들이라."
하였다.

 

9월 25일 양력

외부 협판(外部協辦) 고영희(高永喜)를 학부 협판(學部協辦)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유기환(兪箕煥)을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원구단(圜丘壇)의 여러 의식 절차에 대하여 서울에 있는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들에게서 의견을 수렴하는 것에 대하여 명령하였습니다. 당하(堂下)을 보내서 의견을 물었더니 의정 심순택(沈舜澤)이 말하기를,
‘삼가 《예기(禮記)》를 상고하여 보건대, 「천자는 천지에 제사지낸다.〔天子祭天地〕」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천자의 예로는 하늘을 섬겨 근본에 보답하며 처음을 돌이켜보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땅을 쓸고 제사를 지내는 데서 질그릇, 바가지, 짚, 햇송아지를 쓰는 것은 그 바탕을 숭상하고 정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관천(觀天)하는 도리를 의식 절차의 법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단유(壇壝)의 계급(階級)은 반드시 그 형상을 살피고 만들었습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 지기지신(地祗之神) 신주와 대명(大明) 야명(夜明), 오성(五星), 28수, 주천성신(周天星辰), 풍운뇌우, 오악(五嶽), 오진(五鎭), 사해사독(四海四瀆) 신들의 신주, 변두(籩豆)의 수와 의식 규정의 정도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 이후로 제도가 각각 다른데 예가 미비한 것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습니다.
사체상 옛날대로 하여서는 안 되니 조성(造成)하는 절차나 진설(陳設)하는 도식은 모두 장례원으로 하여금 고례(古禮)를 참고하여 거행토록 하며 성단(星壇)을 설치하는 경우는 분야(分野)의 별들에게 제사지내는 의리에서 나왔으므로 이제 제사지낼 수 없습니다. 그 밖의 산천단(山川壇)이나 성황당(城隍堂)처럼 사전(祀典)을 상고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모두 바로잡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은 원래 예학(禮學)에 어둡다 보니 감히 하나씩 지적하여 대답하지 못하겠으니, 널리 물어서 처리하시옵소서.’고 하였습니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와 조병세(趙秉世)는 병으로 의견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폐하께서 처결하여 주기 바랍니다."
하니, 조령을 내리기를,
"의정들의 의견이 이와 같다면 장례원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재가를 받은 다음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 권재형(權在衡)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전날 관리들과 유생(儒生)들이 올린 상소의 원본을 보니 칭호를 더 올리자고 한 것이 있었습니다. 신은 거듭 감탄하면서 선견지명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적이 생각하여 보건대 ‘황(皇)’, ‘제(帝)’, ‘왕(王)’이라고 하는 것이 글자는 다르지만 한 개 나라를 주관하고 한 나라가 독립하여 외국에 의존하지 않으며 기준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표준을 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세 임금보다 더 높이지 않았고 세 임금이 자처하는 것도 황제보다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황’의 덕(德)과 ‘제’의 공(功)을 합쳐서 황제의 호칭으로 썼는데 한(漢) 나라, 진(晉) 나라, 수(隋) 나라, 당(唐) 나라, 송(宋) 나라, 원(元) 나라, 명(明) 나라, 청(淸) 나라 이래로 그대로 썼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오늘날 임금들의 가장 높은 존호(尊號)는 오직 ‘황제(皇帝)’라는 것뿐입니다.
오직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이래로 자강(自强)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제후국을 면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대왕은 영특한 자질로써 문무(文武)의 덕을 겸비하고 천명을 받아 왕업을 열었습니다. 또한 세월이 지난 뒤 우리 인조(仁祖) 대왕과 효종(孝宗) 대왕 같은 훌륭하고 비상한 임금들이 서로 이어서 복록을 베풀게 되었지만 대체로 사대하는 예절은 한결같이 성규(成規)를 따랐으니 주자(朱子)의 이른바 ‘통분을 참으며 원한을 품으면서도 일이 절박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한 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는데 오직 우리 폐하(陛下)는 하늘이 낸 큰 성인으로서 세상에 드문 큰 위업을 이룩하여 옛날의 수치를 씻고 우리 조상들이 성취하지 못한 뜻있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나라가 생겨난 이후에 처음으로 있는 경사스러운 기회이니 억만년 끝없이 이어질 나라의 복이 장차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대체로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높이는 것은 사람의 천성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 폐하(陛下)의 신민(臣民)으로서 누군들 춤추며 기뻐하면서 우리 폐하에게 빛나는 극존(極尊)의 칭호를 올리려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가 사양하여 즉시 받아들이지 않지만 신은 이 문제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왕을 황제로 올리는 것이 공법(公法)상 어렵다.’고 하신다면 신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근거하여 조목별로 명백히 밝히려고 합니다.
신은 예전에 정위량(丁韙良)이 번역한 《공법회통(公法會通)》을 읽었습니다. 그 제86장에는 ‘임금이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가져야만 제국(帝國)이라고 부르는 나라들과 나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주(自主)의 왕국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자주의 왕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낡은 견해를 미련스럽게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갑오 경장(甲午更張)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색은 있으나 독립의 실상은 없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백성들의 의혹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문약(文弱)한 것이 습성이 되고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멀게는 2,000년, 가깝게는 500년간 중국을 섬겨오면서 그것을 달게 여겨 고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번 자주를 가지고 논하는 사람을 보면 대뜸 눈이 휘둥그레져서 혀를 빼물고 깜짝 놀라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옛날에만 그랬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거리에 모여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의 좁은 소견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당장 정사를 바로잡는 방도는 진실로 위의(威儀)를 바로잡고 지위를 높여서, 민심(民心)이 움직여서 추세를 따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만국공법》85장에는 ‘관할하는 지역이 한 개 나라나 본 국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이 넓은 경우에는 황제로 불러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를 통하여 황제의 칭호란 원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를 겸하여 관할하고 있는 사실로 말하면 영국만한 나라가 없고 영토가 넓은 것으로 말하면 러시아만한 나라가 없는데 이런 나라들을 논함에서도 오히려 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혹시 가능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라고 한 것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같다.’라는 것 역시 단정하지 않은 말입니다. 주거나 빼앗는 경우에 모두 정해졌다는 말이 없으니 불러도 좋고 부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터키〔土耳其〕가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영토가 넓어서가 아니며 일본이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유구국(琉球國)을 병합하기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될 수 있다는 것과 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정하지 않은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그 제84장에는 ‘여러 나라들이 일률적으로 존칭을 쓸 수 없으며 명분과 실제가 부합되어야 어울릴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 주석(註釋)에는 ‘140년 전 러시아의 임금이 황제라고 칭호를 고쳤는데 처음에는 각 나라에서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여 년이 지나서 인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것으로 미루어서 보건대 각 나라가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도 따질 것이 못되며 오직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신은 이 몇 장 외에 따로 어떤 공법(公法)이 있어서 이와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공법에는 구애될 만한 내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폐하(陛下)는 신이 보잘것없다고 해서 신이 말한 말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시고 즉시 정부에서 의논하여 빨리 중대한 계책을 결정지어 빨리 최상의 칭호를 올리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는 마음에 부합되게 해주며 한편으로는 문약하고 외국에 의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혹을 깨뜨리고 다시 굳은 결의로 앞으로 나아가고 정성을 들여 나랏일이 잘되게 하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되 한결같이 하시며 간사한 사람을 제거하되 의혹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래된 나라에서 새로운 천명(天命)을 받아 명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게 한다면 선조의 공덕을 빛내고 후손에게 좋은 덕화를 남겨줄 수 있으며 또 먼 나라와 가까운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이것을 가지고 논할 때이겠는가? 실로 그것이 합당한 지는 잘 모르겠다."
하였다.

 

9월 2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종2품(從二品) 조민희(趙民熙)를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능역(陵役)에 대한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위로하고 면려하는 비답을 내렸다.

 

외부 협판(外部協辦) 유기환(兪箕煥)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제(五帝) 때에는 ‘황(皇)’보다 더 높은 칭호가 없었고 하, 은, 주 삼대(三代) 때에는 ‘왕(王)’보다 더 높은 칭호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역시 왕이고 왕은 곧 황제입니다. 한(漢) 나라, 당(唐) 나라, 송(宋) 나라, 명(明) 나라에서 왕의 칭호를 한결같이 황제로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하된 사람치고 누가 자신의 왕으로 하여금 가장 높은 자리에 있게 하려고 하지 않겠으며 극존의 칭호를 정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구라파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게르만과 오스트리아는 로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독일은 게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모두 명(明) 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폐하는 유신(維新)의 명에 응하여 독립의 권리를 마련하였고 연호(年號)를 세우는 등 여러 가지 업적이 다 빛나니 급히 칭호를 정함으로써 조종(祖宗)의 큰 위업을 빛내고 만백성의 소원에 부합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부당한 일이니 굳이 이처럼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유학(幼學) 심노문(沈魯文) 등이 상소하여, 황제라고 칭호를 높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청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9월 28일 양력

종1품(從一品) 신기선(申箕善)을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종1품 이순익(李淳翼)·윤우선(尹宇善)과 정2품(正二品) 임상준(任商準)·이봉의(李鳳儀)·남정순(南廷順)·이현익(李玄翼)·이승순(李承純)·김구현(金九鉉)·김세기(金世基)·신헌구(申獻求)·조종필(趙鍾弼)과 종2품(從二品) 이완용(李完用)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그리고 종2품 윤성진(尹成鎭)·김석근(金晳根)·김재용(金在容)·서상조(徐相祖)를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전 시독(前侍讀) 김두병(金斗秉)이 상소하여, 황제로 높여 부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상소에 대한 비답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9월 29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원구단(圜丘壇)을 설치할 장소는 택정(擇定)해야 하므로 신이 영선사장(營繕司長)과 함께 상지관(相地官)을 데리고 다음날 가서 간심(看審)하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김재현(金在顯) 등 관원 716명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의 대략에,
"신 등이 생각하건대, ‘우리 폐하(陛下)께서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과 중흥(中興)의 운수를 타고 왕위에 오른 이후 34년 동안 총명한 지혜로 정사에 임하였고 신무(神武)를 발휘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정력을 기울여 나랏일이 잘되게 하려고 애썼으며 변란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는 형벌을 쓰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크나큰 공렬은 천고(千古)에 으뜸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주권을 잡고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여 드디어 연호(年號)를 세우고 조칙(詔勅)을 시행하며 모든 제도가 눈부시게 바뀌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명(天命)이나 인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어찌 지혜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주(周) 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오히려 새롭다.’는 것이니 아! 거룩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는 오직 황제의 큰 칭호를 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신들이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황(皇)’이라고 불렀고 요(堯)나 순(舜)은 ‘제(帝)’라고 불렀으며 하우(夏禹)나 성탕(成湯), 주 문왕(周文王)이나 무왕(武王)은 ‘왕(王)’이라고 불렀습니다. 역대의 변천은 비록 다르지만 가장 높인 것은 한결같았습니다.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이후로 ‘황’과 ‘제’를 합쳐 ‘황제(皇帝)’로 불렀으며 ‘왕’의 지위는 드디어 오작(五爵)의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구라파의 각 나라는 우리와 문화나 제도가 같지 않지만 ‘황’과 ‘왕’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처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썼는데 게르만이 로마의 계통을 이어 그 칭호를 답습하여 썼고 오스트리아〔奧國〕는 로마의 옛 땅에 들기 때문에 역시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독일〔德國〕은 게르만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극존의 칭호를 받았으며 러시아〔俄國〕, 터키〔土耳其〕는 모두 자주의 나라이므로 다 가장 높은 칭호를 썼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역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있고 나라가 나누어지고 통합된 것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세 나라는 각각 그 땅의 주인으로 다같이 왕의 칭호가 있었으며 심지어 송양(松讓), 가야(伽倻), 예맥(濊貊), 여진(女眞), 탐라(耽羅) 등의 작은 나라들도 각기 왕으로 불렀습니다. 고려 때 통합하여 다만 묘호(廟號)만 썼으며 본조(本朝)에서는 옛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 그 나라들이 멀리서 존호(尊號)를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폐하(陛下)께서는 성덕(聖德)이 날로 새로워져 문교(文敎)가 멀리 미치고 머나먼 외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만국(萬國)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옛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실로 천심(天心)을 받들고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적이 살펴보건대, 구라파와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다 평등하게 왕래하고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는데 아시아의 풍속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 칭호를 보고 혹 불평등하게 대우한다면 교류함에 있어서 지장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밤낮으로 분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빨리 황제의 칭호를 올려 여러 나라에 공포한다면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이 날로 없어지고 우의(友誼)가 더욱 돈독해져 앞으로 길이 천하 만대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나라와 당(唐) 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 나라나 명(明) 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 등이 《공법(公法)》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거기에 쓰여 있기를, ‘나라의 임금이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가져야만 칭제(稱帝)하는 나라들과 평등하게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신들은 이 말이 황제를 칭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갑오 경장(甲午更張)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분은 있으나 자주(自主)의 실체는 없으며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으니 백성들의 의혹이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위의를 바로세우고 존호를 높임으로써 백성들 마음이 추향(趨向)하는 방향이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 그 공법의 주석(註釋)에 ‘러시아의 임금이 칭호를 고쳐 황제로 하였는데 각 나라들에서 좋아하지 않다가 20년을 지나서야 인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에서 보건대 우리가 우리나라의 일을 행하고 우리가 우리나라의 예(禮)를 쓰는 것은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인을 빨리 받는가 늦게 받는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미리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 「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셔서 높은 칭호를 받아들여 만국에 공표하여 천하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세우신다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에게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짐에게 무슨 일인들 권하지 못하겠는가마는 전연 당치 않는 칭호로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실로 경들에게서 기대하던 바가 아니니, 시국을 바로잡을 계책이나 강구하고 다시는 이에 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30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서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이하를 소견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참정(參政)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 찬정(贊政)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찬정 외부대신(外部大臣) 민종묵(閔種默), 찬정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 찬정 박정양(朴定陽)·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 참찬(參贊) 민병석(閔丙奭)이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무슨 일로 청대하였는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제(帝)’와 ‘왕(王)’의 칭호가 다른 것은 그 공업(功業)이 같지 않으며 제도와 문물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제’의 공업이라는 것은 대일통(大一統)을 말하는 것인데 일통(一統)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제’와 ‘왕’이 예악, 정교(正敎)를 계승하고 전하여 주는 것이니 이 공업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지위를 얻고 그 지위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에 바꿀 수 없는 일정한 원칙이며 자연의 이치이니 억지로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사양해서 물리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당요(唐堯)와 우순(禹舜)을 따라서 답습하다가 본조에 이르러서야 찬란하게 하(夏), 은(殷), 주(周) 3대(三代) 시기와 풍속이 같아졌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업을 열어서 덕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하여 500년만에 크게 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나 처음으로 성인(聖人)을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 폐하(陛下)께서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을 타고나 반드시 융성하는 운수를 열어 놓음으로써 옛 나라를 거듭 넓히고 천명(天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사악한 기운이 사라지고 임금의 계책은 거듭 원만해졌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응하여 화기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하였습니다. 한(漢) 나라, 당(唐) 나라, 송(宋) 나라, 명(明) 나라의 법전(法典)들과 제도들이 영원히 국고(國庫)에 보관되어 각 나라가 그 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천하의 문명(文明)이 우리에게 있고 황제의 계통이 실로 우리에게 있으니 하늘이 명한 것과 사람들이 귀의하는 것은 시기로 보아 당연하고 예(禮)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조상 때에 없는 것을 지금 갑자기 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주 무왕(周武王)과 상탕(商湯)의 시대에도 후직(后稷)과 설(卨)의 시대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명위(名位)를 받고 나라의 복록을 받음에 있어 옛날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서 지금에도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여 뒤에도 꼭 할 수 없다는 법은 아닙니다.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에 있어 오직 순리에 맞게 응대할 뿐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셔서 위로는 하늘과 조종(祖宗)들의 뜻에 응하며 아래로는 높고 낮은 모든 신민(臣民)들의 소망을 풀어주소서. 신들은 지극하게 축원하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나이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하늘이 내려 준 지혜와 예지를 타고난 우리 폐하(陛下)는 신묘한 문(文)과 성스러운 무(武)를 지나셨으며 성대한 공덕은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보다 더 높습니다. 처음으로 왕업의 터전이 닦여진 이래로 500년 만에 융성할 좋은 운수를 만나서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대업(大業)을 거듭 밝혀서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하니 이는 우리 폐하가 천명을 받은 때입니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은 임금은 반드시 위호(位號)를 얻는데 자리라는 것은 대보(大寶)를 말하며 칭호라는 것은 황제(皇帝)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써 이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높은 공훈과 큰 업적이 선대보다 앞서니 반드시 위호(位號)가 있어야 합니다. 위로는 천심(天心)에 응하며 명당(明堂), 구연(九筵)의 장소, 염폐(簾陛) 등이 다 갖추어진 후에야 여러 국가의 제도에 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라의 예악(禮樂)과 법도(法度)에서 한 나라, 당 나라, 송 나라, 명나라의 것을 가감하여 썼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당요와 우순의 뜻을 이어 그 계통을 받들어 나가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만이 그렇게 합니다.
대체로 그 계통을 받들었다면 반드시 그 명위(名位)를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 정하여야 한다.〔必也正名乎〕’라고 하였으니 명위가 정하여지지 않으면 그 계통을 이어받고 그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성철(聖哲) 중에는 예의를 다하여 사양하면서도 물리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폐하가 아무리 겸손하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려고 하지만 높고 낮은 신민(臣民)들의 여론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명을 듣고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에게서 시작되니 사람들의 마음을 알면 천심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급히 유음을 내림으로써 하늘과 사람들의 뜻을 따르소서. 신 등은 기쁜 마음으로 축원하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나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합당한 자리를 얻고 반드시 합당한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큰 덕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짐처럼 변변치 못한 덕으로 어떻게 그런 자리를 감당하겠는가? 경들의 말 역시 지나치다. 지금 국민의 일로 이보다 급한 것이 한 둘로 셀 수 없으니 경들은 마땅히 그것을 바로잡고 구제할 계책이나 생각하여 짐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는 것이 좋겠다. 이처럼 한가한 의논은 짐이 듣고 싶지 않도다."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황제의 공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간혹 초매(草昧)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간혹 국가를 바꾸어놓기도 하였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차례로 따져보면 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은(殷) 나라의 고종(高宗)과 주(周) 나라의 선왕(宣王)의 공업에 칭찬할 만한 것은 대개 선대를 훌륭하게 계승하는 임금으로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여러 가지 법도를 일신하고 쇠퇴한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웠기 때문인데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 폐하(陛下)는 문무(文武)가 침체되어 점점 해이해지고 있는 시기에 용맹과 슬기를 발휘하여 크게 공로를 이루었으니 큰 업적은 선대보다 빛나고 높은 위세는 온 세상에 가해졌습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업적이 오늘과 같이 융성한 때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삼황 오제라고 부르는 것이 오랜 옛적부터 숭상된 것은 역시 명위(名位)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시에 이름을 바로잡지 않았더라면 후대에 무엇을 이어받았겠습니까?
《한사(漢史)》에 이르기를, ‘천자의 수레가 방에서 나왔다.〔天子輦出房〕’라고 하였으니 한 나라 황제가 귀하고 한 나라 관리들이 위의(威儀)가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한 나라의 도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위엄스러운 거동이 갖추어지지 않아도 오히려 황제의 업적으로 부를 수 없는데 더구나 그 명호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必也正名乎〕’라고 하였는데 이름을 바로잡아야만 높고 낮은 벼슬의 체계가 명백해지고 여러 가지 사무가 바로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사를 하는 도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해야 할 일 중에서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깊이 잘 살피고 빨리 유음을 내리시어 황제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대업(大業)을 빛내소서. 신들은 간절한 소원을 누를 길이 없나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은 천명이며 억눌러서 막아버릴 수 없는 것이 인심(人心)입니다. 천명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때를 보면 말할 수 있습니다. 인심은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여론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 폐하가 큰 위업을 성취하고 쇠퇴한 나라를 다시 회복한 것은 절대로 천명이며 인력(人力)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릇 우리의 신민들이 황제의 칭호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역시 천명이며 곧 인심인 것입니다. 천명과 인심이 이처럼 서로 부합되니 폐하께서 아무리 겸손하게 거절하더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대군주(大君主)라는 칭호는 각 나라의 황제의 칭호와 서로 평등하여 구별이 없으며 폐하라는 칭호는 곧 황제국가에서 부르는 칭호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제국(帝國)이라고 부르는 나라들과 평등한 예의로 대하여 왔으니 우리나라 역시 칭제(稱帝)하는 나라입니다. 대체로 황제의 계통이라는 것은 그 예악과 법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夏), 은(殷), 주(周) 3대(三代)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예악과 법도를 지키면서 문명한 교화를 만대토록 이어 나가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뿐입니다. 황제의 계통이 우리에게 있고 역수(曆數)도 우리에게 있는데 세상이 크게 바뀌는 기회를 만나 황제의 칭호를 바로 정하지 않는다면 그 전통을 이어받아 그 계통을 이어 나가는 것을 밝힐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돌리시고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시어 황제의 계통을 중하게 여기고 천위(天位)를 이어 나가소서. 신들은 간절한 축원을 누를 길이 없나이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체로 이미 황제의 예법이나 제도에 비슷한 것만도 각 나라와 교섭하는 데 지장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꼭 그 칭호가 있어야만 되겠는가? 짐의 생각에는 경들의 말에 타당치 못한 점이 있다고 본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각 나라의 약장(約章)에는 각 나라 황제의 칭호를 인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라가 작고 군사가 약하여 나란히 나갈 수 없는 나라나 상스럽고 속되며 추하고 고루하여 개명(開明)한 세계로 진보(進步)할 수 없는 나라인 경우에도 각 나라가 반드시 인정하여 함께 교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예악과 문물이 세상에 표준이 됩니다.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호칭은 애초에 우리 자신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사람들이 추대한 것입니다. 황제로 불리는 나라들과 평등하게 교제를 한다면 처음에 황제의 호칭이 없더라도 역시 제국(帝國)인 것입니다. 각 나라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우리나라가 시국에 밝지 못한 바가 있어서 옛 견해를 고수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폐하가 신들의 요청을 힘써 따라서 세상에 공표한다면 세상에서 흔연히 인정할 것은 애당초 논의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황제로 불리는 나라들은 앞으로 우리를 비교하면서 모두 와서 법도를 취할 것입니다. 폐하가 이 조치를 한 번 취하여 세상의 환심을 얻게 되면 세상 어느 곳이든 위엄이 더하여지지 않는 곳이 없으며 황제의 업적은 더욱 광대해질 것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며 무엇을 염려하여 황제의 자리에 않지 않습니까? 천명은 어길 수 없으며 인심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폐하는 다시 더 깊이 생각하여 빨리 신들의 요청을 재가하여 주소서. 신들의 말은 신들만의 말인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신민들의 말을 가지고 이구동성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럴만한 덕이 있고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알맞은 자리가 있고 반드시 그에 알맞은 칭호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이런 공덕이 있고 그 일을 세상에서 하였으므로 반석 같은 터전이 공고화되었고 독립을 해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으며 위엄이 더욱 빛나고 자주를 하고 권리를 잡았으니 이는 조종(祖宗)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을 황제의 업적으로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칭호가 아직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세계의 각 나라들이 반드시 논의하면서 결함이 있는 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폐하의 훌륭한 지혜와 밝은 견해를 결코 신들과 같이 어리석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폐하가 이렇게 거절하시는 것이 폐하께서 어찌 하늘과 사람 사이와 오늘 세상의 형편을 살피지 못해서 그러하겠습니까? 오직 겸손하시어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자의 높은 신분으로도 하늘이 주고 사람이 바라는 것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빨리 명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들은 저으기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견해 역시 혹 타당한 점이 있고 역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도 있다. 그러나 급하지 않은 일이고 짐이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시기로 보아도 불가하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한 번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들의 말이 뜻을 다 전달하지 못하고 성의가 임금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연(經筵)의 체모는 엄하여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뢸 수 없으니 신들은 장차 물러가 조정의 동료들과 함께 주청(奏請)하여 기어이 윤허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들이 두세 번씩 말하여 더없이 황송하나 조정에 차고 넘치게 된 논의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신들은 장차 더욱 성의를 다하고 간절히 호소하여 폐하의 마음을 돌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과 같이 노숙한 사람의 견해로 꼭 이렇게 확대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정1품(正一品)인 이호준(李鎬俊)을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正二品)인 김만식(金晩植)과 종2품(從二品)인 민영찬(閔泳瓚)·김흥규(金興圭)·조동만(趙東萬)·정한조(鄭漢朝)·이근수(李根秀)·이명재(李命宰)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에 서임하였는데 김만식은 2등에, 민영찬은 3등에, 김흥규 이하는 4등에 서임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인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생각건대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어질고 의로운 데서 사람의 표준〔人極〕이 서고, 엄숙하고 밝으며 뛰어나고 슬기로운 데서 황극(皇極)이 서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의 표준은 도통(道統)이 나오게 되는 바탕이며 황극은 제통(帝統)이 생겨나게 되는 바탕입니다. 대체로 당요(唐堯), 우순(虞舜), 송(宋) 나라, 명(命) 나라는 하늘을 이어 표준을 세웠으니, 제통과 도통이 전해진 것에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와서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며 기자(箕子)의 도(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번 변화하여 중화(中華)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우리 조종(祖宗)의 성학(聖學)은 장횡거(張橫渠),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학문을 직접 이어받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높이 숭상하였습니다.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길 수 있게 된 지가 지금까지 4,000년에 이르렀는데 오직 그 황통(皇統)의 호칭만은 옛날에도 미처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거룩한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왔는데, 우리나라가 명을 받고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의 왜란(倭亂)을 당해서는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셨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은혜로는 실로 아버지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천리강토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황제의 덕에 젖었습니다.
아! 천명(天命)이 일정하지 않아서 명나라의 사직이 망하고 황통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오직 대보단(大報壇) 한 곳이 황통의 일맥(一脈)이 붙어있는 곳으로, 효종(孝宗)이 내정을 닦고 외적을 물리친 의리와 높이고 사모하는 정성은 우주에 있는 해와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폐하는 하늘이 낸 슬기롭고 지혜로운 성인으로서 조종께서 넘겨준 중책을 걸머지고 왕위에 올라 정사를 행하여 잘 다스리려고 한 지가 지금 34년이 되었습니다. 폐하는 천하의 대세를 환히 꿰뚫어 보고 고금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모든 제도와 문물을 개혁하고 조정하시되 오직 천심(天心)을 따르고 국운(國運)을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와 칭호만은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았으니 조정과 민간의 여론이 거의 모두 추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삼황(三皇)은 덕으로써, 오제(五帝)는 공(功)으로써, 삼왕(三王)은 인으로써 정사를 하였으니, 왕이란 천하를 차지했다는 칭호입니다. 옛날에는 황제와 왕이 원래 높고 낮은 등급이 없었는데, 진(秦) 나라가 주(周) 나라를 계승한 뒤로 황제를 겸칭하여 가장 높고 가장 귀한 칭호가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제왕의 계통을 계승한 자는 진실로 그 지위를 갖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이름을 갖게 되는데 폐하만이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군주(君主)라는 칭호는 비록 높이 부르는 칭호이기는 하지만 중국에는 역사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각 나라의 글이 같지 않아서 마침내 참뜻을 잃어서 그런 것인지는 신들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땅이 좁고 작다고 하더라도 긴 것을 덜어 짧은 것을 보충한다면 충분히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폐하의 뛰어난 덕과 큰 업적은 명나라의 계통을 계승할 만한데, 오늘날 어찌 당당한 천자의 나라로서 군주의 칭호만 가지겠습니까? 설사 땅이 천자의 나라가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해도 오직 의리가 존재하는 데에 달렸으니, 소강(少康)은 1려(㠟)의 무리를 가지고도 하(夏) 나라를 일으켜 세웠고, 숙종(肅宗)은 필마(匹馬)로써 당(唐) 나라를 참성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계통을 잇는 일은 전적으로 영토가 넓은가 좁은가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오늘 고칙(誥勅), 명령, 전장(典章), 연호(年號)는 모두 천자의 예를 쓰면서 오직 이 대호(大號)만 올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훌륭한 시대의 흠전(欠典)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높이 받들려는 정성이 간절하여 모두 목을 빼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던 차에 뭇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듯이 관리와 유생들의 상소가 잇달아 일제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명과 하늘의 의사나 인심이 모여들어 합쳐지는 때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리를 깊이 체득하고 나라를 중흥할 뜻을 크게 발휘하여 빨리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고 빨리 대호를 받음으로써 천명을 따르고 민심에 응할 것이며 명나라의 계통을 이어서 끝없는 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대명(大名)이 이미 정해졌고 대위(大位)에 이미 나아갔으니 대덕(大德)은 베푸는 정사에 더욱 힘써 특별히 대업의 실제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위로는 하늘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조종의 보답하고 아래로는 온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우러러보는 데 부응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조처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신은 그 실상을 대략 들어서 성상께서 판단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직 시행하지 못한 전례(典禮)는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펴지지 않은《춘추(春秋)》의 의리는 회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노성하고 어질고 유능한 신하는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사문(斯文)의 공명정대한 학문은 숭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전례(典禮)가 시행해지지 않으면 대행왕후의 국상(國喪)이 늦추어져서 신민들이 의혹을 가지면 선왕(先王)의 예에 흠이 될 것이고, 와신상담하여 원수를 설욕하지 못하면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춘추》의 의리가 무너지고 말 것이며 노성한 사람을 쓰지 않으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벼슬에 나오게 되어 기강이 문란해질 것이며, 정학(正學)을 숭상하지 않으면 사설(邪說)이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훌륭한 일을 하겠다는 뜻을 분발하여 결단코 천년 만년토록 오래갈 정사를 다스리는 요체를 삼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이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춘추》의 의리입니다. 도통(道統)이 여기에 있으며 황통(皇統)도 여기에서 세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크게 변화되어 만방에 화합하고 국운이 끝없이 뻗어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많은 선비들의 의논이 대체로 같다고 하더라도 당치 않는 칭호를 가지고 이처럼 말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다시 번거롭게 굴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탁지부(度支部)가 선희궁(宣禧宮)을 옮겨 짓는 비용으로 증액(增額)된 6,000원(元), 경운궁(慶運宮)의 공사 비용으로 증액된 20만 원, 의화군(義和君)의 학비로 증액된 7,000원, 주차미국 공사관(駐箚美國公使館) 참서관(參書官) 박승봉(朴勝鳳)이 돌아오는 데 쓸 비용 800원, 강계군(江界郡)의 비적(匪賊)을 잡아서 바친 사람에게 줄 상금 30원, 동래(東萊)의 뱃사람들이 일본 등지에 표류하여 간 것을 구휼하기 위한 돈 152원 남짓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도록 청의(請議)하는 사안을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친 뒤 상주(上奏)하였는데, 재가(裁可)하는 제칙(制勅)을 내렸다.

 

학부(學部)에서 성균관(成均館) 경학 유생 시험(經學儒生試驗)의 출방(出榜)을 행하였다. 윤용식(尹容植) 등 20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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