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양력
【음력 기해년(己亥年) 10월 29일】 포달(布達) 제53호, 〈궁내부(宮內府) 관제 중에서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내장원(內藏院) 종목과(種牧課) 다음에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한다.】
【원본】 43책 39권 8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28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포달(布達) 제53호, 〈궁내부(宮內府) 관제 중에서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내장원(內藏院) 종목과(種牧課) 다음에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한다.】
【원본】 43책 39권 8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28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12월 2일 양력
정1품 이호준(李鎬俊)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장례원 경(掌禮院卿) 남정철(南廷哲)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이종건(李鍾健)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특진관 윤웅렬(尹雄烈)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 민영소(閔泳韶)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에, 종1품 서상우(徐相雨)를 장례원 경에, 특진관 윤정구(尹定求)를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은 원수부 군무국장(元帥府軍務局長)의 사무를 임시 서리(臨時署理)하라고 명하였다. 궁내부 특진관 한광수(韓光洙)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3일 양력
의정(議政)과 대신 이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궁내부대신 임시서리학부대신(宮內府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 이건하(李乾夏), 참정(參政) 이호준(李鎬俊), 찬정(贊政) 민종묵(閔種默)·이윤용(李允用)·이하영(李夏榮),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종건(李鍾健),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 군부 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민영소(閔泳韶), 직학사(直學士) 김영적(金永迪),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 장례원 경(掌禮院卿) 서상우(徐相雨), 겸장례(兼掌禮) 이희익(李憙翼)이다.】 상이 이르기를, "짐(朕)이 천지와 조종(祖宗)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지 이제 3년이 된다. 그런데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선대를 추존(追尊)하는 일을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짐이 일찍이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하건대 주(周) 나라에서는 후직(后稷)을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추존하여 왕으로 높였으며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로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까지 추숭(追崇)하였다. 그런 만큼 이런 규례를 참고하여 앞으로 태조 대왕(太祖大王)을 추존하여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장종 대왕(莊宗大王), 정종 대왕(正宗大王), 순조 대왕(純祖大王), 익종 대왕(翼宗大王)을 추존하는 규례를 시행하려 하는데 전례가 매우 중대하므로 경들에게 알게 하고자 해서 소견(召見)한 것이다." 하니,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칙교(勅敎)를 들으니, 이는 진실로 더없이 중대한 전례인데, 신은 본래 예학(禮學)에 어두워서 아뢸 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조 때에는 등극(登極)한 후 추숭(追崇)하는 예는 3년을 넘기지 않고 올렸지만 그 때에도 즉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3년까지 이른 것은 틀림없이 더없이 공경스럽고 신중히 한 데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유년(1897) 이후로 고례(古禮)를 널리 상고해오다가 3년에 이른 오늘에야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으니, 제신(諸臣)은 각각 의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이호준(李鎬俊) 등이 모두 다시 아뢸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동지(冬至)의 큰 제사 때에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는 고례(古例)가 이미 있으니, 추존하는 의식을 동지 전인 이번 20일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 4일에 선희궁(宣禧宮)에 시책문(諡冊文)과 인장(印章)을 올리는 제사를 직접 지내는 것으로 마련하였는데, 지금 날씨가 좋지 못하고 아침저녁에는 더욱 추운 만큼 이런 때에 수고롭게 거동하는 것은 큰 성인(聖人)이 몸을 돌보는 방도가 아닐 듯 합니다. 바라건대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는 이상 비록 인정과 예절로 보아 섭섭하지만 마지못해 따르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충숙공(忠肅公) 이경직(李耕稙)은 연전에 이미 증직(贈職)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때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있어서 단지 품계(品階)만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이 상설(常設)되었으니 의정을 증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추증하여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비록 전식(典式)에 실려 있는 것이지만 갑오년(1894) 이후로 적체해 두고 허락하지 않은 것은 짐이 오늘의 대전례(大典禮)을 기다리려고 한 것이다. 궁내부(宮內府)에서 별도로 한계를 정하여 하나의 규식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성상의 칙교가 이와 같으니 이제부터 신들은 저 세상에서도 은혜를 입어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다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한계를 새로 어떻게 정할지는 모르겠으나 바라는 대로 의정부(議政府)와 각부(各部)의 벼슬을 품계에 따라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원본】 43책 39권 8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2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상이 이르기를,
"짐(朕)이 천지와 조종(祖宗)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지 이제 3년이 된다. 그런데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선대를 추존(追尊)하는 일을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짐이 일찍이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하건대 주(周) 나라에서는 후직(后稷)을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추존하여 왕으로 높였으며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로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까지 추숭(追崇)하였다.
그런 만큼 이런 규례를 참고하여 앞으로 태조 대왕(太祖大王)을 추존하여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장종 대왕(莊宗大王), 정종 대왕(正宗大王), 순조 대왕(純祖大王), 익종 대왕(翼宗大王)을 추존하는 규례를 시행하려 하는데 전례가 매우 중대하므로 경들에게 알게 하고자 해서 소견(召見)한 것이다."
하니,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칙교(勅敎)를 들으니, 이는 진실로 더없이 중대한 전례인데, 신은 본래 예학(禮學)에 어두워서 아뢸 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조 때에는 등극(登極)한 후 추숭(追崇)하는 예는 3년을 넘기지 않고 올렸지만 그 때에도 즉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3년까지 이른 것은 틀림없이 더없이 공경스럽고 신중히 한 데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유년(1897) 이후로 고례(古禮)를 널리 상고해오다가 3년에 이른 오늘에야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으니, 제신(諸臣)은 각각 의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이호준(李鎬俊) 등이 모두 다시 아뢸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동지(冬至)의 큰 제사 때에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는 고례(古例)가 이미 있으니, 추존하는 의식을 동지 전인 이번 20일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 4일에 선희궁(宣禧宮)에 시책문(諡冊文)과 인장(印章)을 올리는 제사를 직접 지내는 것으로 마련하였는데, 지금 날씨가 좋지 못하고 아침저녁에는 더욱 추운 만큼 이런 때에 수고롭게 거동하는 것은 큰 성인(聖人)이 몸을 돌보는 방도가 아닐 듯 합니다. 바라건대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는 이상 비록 인정과 예절로 보아 섭섭하지만 마지못해 따르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충숙공(忠肅公) 이경직(李耕稙)은 연전에 이미 증직(贈職)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때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있어서 단지 품계(品階)만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이 상설(常設)되었으니 의정을 증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추증하여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비록 전식(典式)에 실려 있는 것이지만 갑오년(1894) 이후로 적체해 두고 허락하지 않은 것은 짐이 오늘의 대전례(大典禮)을 기다리려고 한 것이다. 궁내부(宮內府)에서 별도로 한계를 정하여 하나의 규식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성상의 칙교가 이와 같으니 이제부터 신들은 저 세상에서도 은혜를 입어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다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한계를 새로 어떻게 정할지는 모르겠으나 바라는 대로 의정부(議政府)와 각부(各部)의 벼슬을 품계에 따라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은 부덕한 사람으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움을 받고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마침내 대위(大位)에 오른 지 이제는 3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조상을 추존(追尊)하는 의식을 이제껏 거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더없이 중하고 공경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건대 예조(藝祖)인 조상을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추존하는 것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에 국한하는 것이 원래 공통된 규례이다. 인정으로는 미진한 점이 있지만 예절에는 한도가 있는 만큼 짐의 뜻이 크게 정해졌고 이미 제신(諸臣)에게 선유(宣諭)하였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을 추존하고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는 의식과 장종 대왕(莊宗大王), 정종 대왕(正宗大王), 순조 대왕(純祖大王), 익종 대왕(翼宗大王)을 추존하는 예식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이미 이러하니, 선희궁(宣禧宮)에 시책문(諡冊文)과 인장(印章)을 올리는 제사는 대신을 보내서 섭행(攝行)하되 일체 직접 지낼 때의 규례대로 마련하며 백관이 참석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하늘에 함께 제사지내고 추존할 때 의정(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장례원 경(掌禮院卿),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이 회동(會同)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4일 양력
추존(追尊)하고 배천(配天)할 때 신위판(神位版)을 만드는 곳은 인정전(仁政殿)으로 하고, 추존할 때 옥책문(玉冊文)과 옥인장(玉印章)을 만드는 것은 전례대로 궁내부(宮內府)와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거행하도록 하며, 옥책문은 의정 대신(議政大臣)이 지어 바치고 베껴 쓰라고 명하였다. 장례원(掌禮院)의 서주(書奏)때문이다.
12월 5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서상우(徐相雨)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1품 김재우(金載禹)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윤용구(尹用求)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정우묵(鄭佑默)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6일 양력
선희궁(宣禧宮)에 시책문(諡冊文)과 인장(印章)을 대신 올리고, 중화전(中和殿)에서 진하(陳賀)를 권정례(權停例)로 행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조문(詔文)에,
"짐(朕)은 생각건대 효성은 조상을 높이는 것이 크고, 예는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중하다고 본다. 그래서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들은 누구나 다 조상을 높이는 것을 우선시했으며 또한 조상이 태어난 선조를 융숭하게 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예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짐이 큰 터전을 이어받았으니 공경스럽게 닦아나가면서 감히 늦출 수 있겠는가?
공손히 생각건대 소유 영빈(昭裕暎嬪)은 온화하고 어진 마음과 방정하고 활달한 범절로 여러 조상들을 받들고 착실하게 지내오면서 39년 동안 기쁨은 비록 끝이 없었지만 갖은 어려움도 다 겪었다. 일찍이 아들에게 명하여 정사를 대리한 지 14년 동안 은혜는 물론 깊었고 돌보아준 것도 지금까지 끝이 없다. 이전에는 간절하게 걱정해주고 이후에는 돌보아주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다. 전(殿)과 궁(宮)들 사이가 화기애애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영빈이 공력을 들인 덕이었다.
아! 임오년(1762)간에 천도(天道)가 정해지지 못하여 큰 덕을 지닌 이가 장수하지 못하자 어머니의 심정으로 곧바로 함께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의리로 억제하고 3년을 참고 지내면서 담제(禫祭)를 지내는 달에 이르러서야 조용히 갔으니, 그 마음이 두 가지를 다 보전한 것이다. 후손들이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조상들의 가르침이 그러했던 것으로서 이것이 어찌 부녀자들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또한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하나의 이치는 순환하여 굽혀졌던 것은 반드시 펴이는 법이다. 100대후에 공의(公議)가 비궁(閟宮)의 묘호(廟號)를 정하고 난 곳을 소급하여 높였으니, 원(園)으로 봉하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조치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근본에 보답하는 예인 것이다.
이에 올해 음력 11월 4일에 삼가 옥책문(玉冊文)을 받들어 ‘소유(昭裕)’라는 시호(諡號)와 ‘수경(綏慶)’이라는 원(園) 이름을 올렸다. 때에 맞는 타당함과 인정에 따르는 예절 두 가지가 다 유감없이 제대로 되었다. 의리가 이미 조상에게 멀리 미쳤으니 어짐도 응당 아래에 미쳐야 할 것이다. 일체 시행해야 할 사항들을 아래에 조목별로 열거한다. 【이하는 생략함】 아! 조상이 한 일을 그대로 따르고 저 소영(昭寧)의 옛 규례를 지켜 자손들에게 무궁한 복을 내리고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함을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들어서 알게 하라." 하였다.
【원본】 43책 39권 87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29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아! 조상이 한 일을 그대로 따르고 저 소영(昭寧)의 옛 규례를 지켜 자손들에게 무궁한 복을 내리고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함을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들어서 알게 하라."
하였다.
선희궁(宣禧宮)에 시호(諡號)를 올리고 원(園)으로 봉한 뒤 제사를 섭행(攝行)할 때의 초헌관(初獻官) 이하와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모두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비서원승 겸장례(祕書院丞兼掌禮) 이재덕(李載德)에게 가자(加資)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방금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윤승(曺潤承)의 질품서(質稟書)를 보니 그 내용에, ‘피고 민영기(閔泳綺)의 안건을 검사의 공소에 의하여 심리하니, 피고는 김필제(金必濟)의 명성을 윤제보(尹濟普)에게서 충분히 듣고, 작년 음력 3월경에 군사상 높은 직무를 띤 채로 김필제를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난처하게 여겨 윤제보와 함께 저물녘을 타서 몰래 성 밖으로 나와 김필제를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
김필제는 전후의 공초(供招)에서, 「윤제보가 방외(方外)에 나가 있을 때 민영기가 건넌방에 함께 들어와서는 이어 말하기를,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는 문제를 여러 차례 미품(微稟)했는데, 홍릉(洪陵)에 행행(幸行)하였다가 환궁(還宮)할 때 동쪽 대궐로 돌아오려고 장차 수리할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 심복 몇 사람이 있고, 군대에 심복을 각 대대(大隊)·중대(中隊)·소대(小隊)에 나누어 두었다. 유람하는 외국인들이 한 세상을 충분히 개명(開明)시킬 수 있다. 김홍집(金弘集)과 어윤중(魚允中)의 공론을 대궐 내에서 들었다. 시골에 도망가 있는 흉악한 무리들이 개명을 도울 수 있으므로 이병무(李秉武)를 시켜 이현(泥峴)에 내왕하면서 흉악한 무리들을 정탐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피고의 공초에서,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는 문제는 김필제가 먼저 말했기 때문에 나는 현재의 형편으로는 강한 이웃 나라가 성 안에 군사를 주둔시켰고, 러시아 사관(士官)들은 방금 해고되어 믿을 것은 오직 각 공사관(公使館) 조계지(租界地) 구역 안인만큼 수리하는 일은 선뜻 의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공초에서, 「애당초 없었다.」라고 하였고, 두 번째 공초에서, 「작년 음력 9, 10월경에 연회차로 동쪽 대궐의 연경당(演慶堂)을 대충 도배한다는 말을 나는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으로 다시 임용되었을 때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리 대장을 조사해 보니, 피고는 작년 7월 경에 공사를 시작하자고 비밀리에 계품(啓稟)했고, 김필제는 의령원(懿寧園) 참봉(參奉)의 벼슬을 얻었으니 경솔하게 행동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동(麻洞)에 집을 사주고 들어 살도록 함으로써 서로 만나보기 편리하게 하였는데, 작년 5월 그믐 경부터 관계를 끊었습니다. 김필제를 처음 만나보던 날 밤에 나라를 부강하게 할 계책을 묻고, 다음에는 을미년(1895) 일을 복수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서로 울면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실은 피고와 김필제를 대질시킨 내용에 명백히 실려 있습니다.
김필제가 공술한 다섯 가지 말은 밤중에 하였으므로 참가한 증인이 없는데 피고는 모두 다 변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임금이 대궐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김필제의 공술이 있어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피고는 높은 관리의 처지에 그래서는 안 될 사람에게 자기를 낮추었고, 그래서는 안 될 자리에서 논의를 벌인 만큼 누가 먼저 하고 누가 뒤에 했건 간에 한 사람이 제창하고 다른 한 사람이 맞장구를 친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피고 민영기는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의 일체 불온한 말을 한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에 따라 태(笞) 100대와 종신 유형(流刑)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민영기를 원래 의률(擬律)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금 뒤에 참작함이 없지 않은 만큼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해서 유십오년(流十五年)에 처하여 지도군(智島郡) 고군산(古羣山)에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7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용구(尹用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議政)과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 겸장례(兼掌禮) 이희익(李憙翼)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존호(尊號)와 시호(諡號)를 올린 후 존호 가운데서 익모(翼謨)의 ‘익(翼)’자가 서로 걸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경들을 불러서 만나보고 의논하는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익’자를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미 옥책문(玉冊文)에 올린 이상 까닭 없이 고쳐 바로잡는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미 영조(英祖) 정축년(1757)의 전례가 있는 만큼 알리는 글을 직접 지어서 옥조각에 새겨 가지고 옥책문과 인장(印章)을 올릴 때 사전에 고유(告由)하고 그대로 봉안(奉安)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호를 고친 후에 도감(都監)을 설치한다는 것도 역시 일을 벌여놓는 감이 있는데, 지금 경이 영묘(英廟) 때의 고사를 근거로 끌어다 이처럼 주장을 세우니 그것도 혹시 하나의 법이 될 듯하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외에 다른 좋은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되 존호를 의논하는 것을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책문은 영묘 때의 고사대로 마땅히 알리는 글을 직접 지어서 뒤에 첨부하여 새기되, 남은 공간이 있으면 계속해서 새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옥책문에 만약 공간이 있을 것 같으면 계속 쓰는 것이 역시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을 보내서 먼저 봉심(奉審)하고 고유할 것이니, 망제(望祭)를 겸해서 지내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추존(追尊)할 때 경이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장례원 경(掌禮院卿)·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과 함께 거행한다면 도감을 설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옥책문의 알리는 글과 금보(金寶)를 고치는 것도 일체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공의(公議)도 역시 전례에 의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수백 년 역사에 어찌 전례가 없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여러 성조(聖朝)에 이미 이루어진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잊지 않는 것은 사실 억만 년 끝없는 아름다움입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신정 왕후(神貞王后)에게 추존(追尊)할 시호(諡號)를 이제 이미 의정(議定)하였으니, 추존하여 올린 존호(尊號) 가운데서 ‘익(翼)’자는 고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신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을 인견(引見)하고 방금 의견을 나누었다. 존호는 오늘 중으로 의정하고, 옥책문(玉冊文)은 영묘(英廟) 정축년(1757)의 전례대로 알리는 글을 직접 지어서 뒤에 첨부하여 새기며, 금보는 새것대로 고쳐 새기되, 옥책문과 금보를 추존하여 올리는 날에 먼저 거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장묘(莊廟)의 실(室)에 배향(配享)할 공신들을 뽑아서 들이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묘호 망단자(廟號望單子)는 ‘태조(太祖)’ 【천대(千代)에 빛을 뿌린 것을 태(太)라 한다.】 ·원조(元祖) 【인(仁) 체행(體行)하여 백성들의 어른이 된 것을 원(元)이라 한다.】 ·‘예조(藝祖)’ 【시호법에 없다.】 로, 제호 망단자(帝號望單子)는 ‘고황제(高皇帝)’ 【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운 것을 고(高)라 한다.】 ·‘순황제(純皇帝)’ 【덕과 업적이 순수하게 갖추어진 것을 순(純)이라 한다.】 ·‘열황제(烈皇帝)’ 【나라의 터전을 크게 하고 넓힌 것을 열(烈)이라 한다.】 로,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는 ‘고황후(高皇后)’·‘순황후(純皇后)’·‘열황후(烈皇后)’로,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고황후’·‘순황후’·‘열황후’로, 장종 대왕(莊宗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장조(莊祖)’ 【덕이 훌륭하고 예절이 공손한 것을 장(莊)이라 한다.】 ·‘광조(光祖)’ 【선대의 위업을 잘 이어나간 것을 광(光)이라 한다.】 ·‘흥조(興祖)’ 【훌륭한 계책을 크게 떨친 것을 흥(興)이라 한다.】 로, 제호 망단자는 ‘의황제(懿皇帝)’ 【성스럽고 신성하며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懿)라고 한다.】 ·‘소황제(昭皇帝)’ 【덕을 밝히고 공로가 있는 것을 소(昭)라고 한다.】 ·‘철황제(哲皇帝)’ 【밝은 지혜가 깊은 것을 철(哲)이라고 한다.】 로, 헌경 왕후(獻敬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의황후(懿皇后)’·‘소황후(昭皇后)’·‘철황후(哲皇后)’로, 정종 대왕(正宗大王) 묘호 망단자는 ‘정조(正祖)’ 【안팎이 복종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한다.】 ·‘성조(聖祖)’ 【높은 덕으로 계통을 물려준 것을 성(聖)이라고 한다.】 ·‘경조(敬祖)’ 【기미를 경계하고 조심한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로, 제호 망단자는 ‘선황제(宣皇帝)’ 【정사와 교화를 널리 편 것을 선(宣)이라고 한다.】 ·‘유황제(裕皇帝)’ 【어질고 훌륭하여 위업을 이어 나가도록 도운 것을 유(裕)라고 한다.】 ·‘원황제(元皇帝)’ 【인을 체행하여 백성들의 어른이 된 것을 원이라고 한다.】 로, 효의 왕후(孝懿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선황후(宣皇后)’·‘유황후(裕皇后)’·‘원황후(元皇后)’로,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순조(純祖)’ 【덕과 업적이 순수하게 갖추어진 것을 순(純)이라고 한다.】 ·‘희조(熙祖)’ 【덕을 공경하여 빛발을 뿌린 것을 희(熙)라고 한다.】 ·‘숙조(肅祖)’ 【법도가 잘 서고 밝혀진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로, 제호 망단자는 ‘숙황제(肅皇帝)’ 【위와 같다.】 ·‘순황제(淳皇帝)’ 【시호법에 없다.】 ·‘영황제(寧皇帝)’ 【안팎이 귀화한 것을 영(寧)이라고 한다.】 로,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숙황후(肅皇后)’·‘순황후(淳皇后)’·‘영황후(寧皇后)’로,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문조(文祖)’ 【천지를 경륜하고 다스린 것을 문(文)이라고 한다.】 ·‘덕조(德祖)’ 【은덕이 멀리에까지 미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강조(康祖)’ 【온 나라를 편안히 한 것을 강(康)이라고 한다.】 로, 제호 망단자는 ‘익황제(翼皇帝)’ 【백성들을 사랑하고 정사를 잘한 것을 익(翼)이라고 한다.】 ·‘장황제(章皇帝)’ 【법도가 크게 밝혀진 것을 장(章)이라고 한다.】 ·‘간황제(簡皇帝)’ 【정사하는 법이 밝고 엄숙한 것을 간(簡)이라고 한다.】 로,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익황후(翼皇后)’·‘장황후(章皇后)’·‘간황후(簡皇后)’로 의정(議定)하여 상주(上奏)하니, 모두 수망(首望)으로 하라는 칙지(勅旨)를 내렸다. 또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존호 중에서 익모(翼謨)를, 의모(懿謨)로 고쳐 의정하여 상주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장종(莊宗)의 실(室)에 배향(配享)할 공신으로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과 우의정(右議政)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을 회권(會圈)하여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12월 8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이번에 태실(太室)을 추존(追尊)하는 의식 절차를 마땅히 마련해야 하는데, 삼가 역대의 의식 규례를 상고해 보니 책보(冊寶)를 올리고 신주(神主)를 고쳐쓰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종2품 이재덕(李載德)·이교영(李敎榮)·윤조영(尹祖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9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전선(電線)의 사무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데, 교사(敎師)들이 성심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뮤렌스테스〔彌綸斯 : Mühlensteth〕 【뮐련스테드】 에게 특별히 3품 옥훈장(玉勳章)을 주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의정부(議政府) 조회를 받은 데 의하면, 법부 전 서리대신(法部前署理大臣) 조병식(趙秉式)과 전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대한 심판 날짜를 사전에 보고할 데 대한 내용으로 평리원에 훈칙(訓飭)하였습니다.
해당 평리원 재판장 조윤승(曺潤承)의 문의서를 보니, ‘이 안건에 대한 조사는 민영기(閔泳綺)를 다시 잡아들인 것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죄인 신문을 자세히 하지 못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여 들은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해서 방송(放送)하였고, 나중에 또 사건공술에서 나왔다고 해서 보고하고 잡아들였으니, 의정부(議政府)에서 경고한 것은 사체상 당연한 것입니다. 김필제(金必濟)가 민영기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를 처음에는 전혀 공술하지 않아 조사할 길이 없었던 만큼 전전 재판장 백성기(白性基)에 대해서는 심판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민영기가 다시 잡힌 후에 또 죄가 없다고 놓아주었다면 다시 잡아들인 것이 잘못이 아닐 수 없지만, 민영기를 이미 조감(照勘)하였으니, 전 법부 대신 서리 조병식과 전 재판장 이용태(李容泰)에게도 모두 심판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당 세 관리들은 모두 심판할 만한 이유가 없는 만큼 응당 내버려두고 따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정부에서 이미 아뢰어 결재받은 이상 본부(本部)에서도 역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심판하는 문제는 모두 그만두라."
하였다.
12월 10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한(沈相漢)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장종 대왕(莊宗大王)을 높이는 예식을 이미 거행하여 의리가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으며,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높은 칭호를 소급하여 올려 의식 규정이 한껏 갖추어진 결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더욱 든든해지고 온 나라에 경사가 넘쳐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폐하께서는 뛰어나게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고 한껏 좋은 운수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왕조에 예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선대 임금들이 이루어놓은 법을 본받아 먼 조상에게 보답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의식이 오늘 있게 되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명령을 내리는 날에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으로 중외(中外)에 환히 명령하였으며, 계속해서 낱낱이 그 때의 지조있고 잘 보좌하며 충직하고 절의가 있던 신하들을 낱낱이 들어 찬양하고 예절로 제사지내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일전에 재상이 상소를 올려 세 정승의 신주를 영영 들어내지 않게 하자고 진술한 데 대하여 그 청을 윤허하고 그 자손을 등록한 데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고(故)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훌륭한 영묘(英廟) 때에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할 말을 숨김없이 다하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으면서 한 몸을 잊고 충성을 다하였으니 절대로 딴 의도라곤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흉악한 무리들의 배척을 받아서 흑도(黑島)에 다시 찬배(竄配) 되었다가 용서받고 돌아와서는 당시의 형편이 더욱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벼슬에 임용되면 대뜸 사양하면서 문을 닫아매고 발길을 끊는 것을 일생의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귀주와 한록이 흉악한 소리를 들고 나와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을 때에는 정색해서 바른 말을 함으로써 그 간사한 싹을 앞서 꺾어버린 결과 흉한 무리들이 간담이 서늘해 하였습니다.
임종에 이르러 아들과 조카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오늘 죄를 짓고서 죽는다. 너희들 중에 뒷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나의 오늘의 의리를 잊지 마라.’ 하였습니다.
그 손자 고 정승 김이교(金履喬)는 순묘(純廟) 때에 큰 의리가 없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너의 집안의 여러 사람들 덕분이라는 성상의 하교를 받았는데 그 훌륭한 사실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칭찬하였습니다.
고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시강원(侍講院)에서 강론을 하였고, 예문관(藝文館)에서 글을 지었습니다. 경황이 없던 당시에는 분수와 절개를 다하고, 충성과 정성을 한껏 드러내었습니다. 바삐 뛰어다니면서 통곡하였는데 눈물이 다하자 피로 이었으며 오직 한 번 죽기를 맹세하였는데, 애써 간하는 말을 진술한 것은 거적대기에 엎드려 간하는 것보다 더 충성스러웠고, 높은 관리를 꾸짖은 것은 임금 앞에서 칼을 청하는 것보다 의리가 더 엄하였습니다. 한 번 흑도(黑島)에 귀양을 갔다가 제주도(濟州道)에 다시 찬배되었는데, 정유년(1777)에 소낙비 같은 은혜로운 명령을 받았고, 계묘년(1783)에는 서릿발 같은 글을 봉하여 올렸습니다. 굳게 지킨 의리와 전에 없는 은혜는 한겨울의 우뚝 선 소나무 같고 예리한 칼날도 밟을 만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정묘(正廟) 때에 직접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 있는 말입니다.
두 신하와 같이 윤리를 부지하고 명분과 의리를 밝혔으며, 간절한 정성과 애타는 말 깨끗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를 지닌 데 대해서는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심할 것이 없으며 100대 후에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조(聖朝)를 만나 뜻한 일이 다 풀려 떳떳한 의식을 거행하는 때에 이 두 신하들이 모두 신사년(1881)에 세 정승에게 이미 시행한 은전을 입도록 해서 그 사사(私祠)에서 신주(神主)를 영영 들어내지 않도록 한다면 덕을 숭상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성인의 의리에 참으로 부합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건하(李乾夏)를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영찬(閔泳瓚)은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고,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은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김병익(金炳翊)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조동면(趙東冕)을 시종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강우형(姜友馨)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1일 양력
정2품 민영주(閔泳柱)에 대한 징계를 특별히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12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태릉 영(泰陵令) 임백수(林百洙)의 보고를 보니, ‘일전의 비에 본릉(本陵) 동쪽편 가석(駕石)이 상석(裳石) 위에 떨어졌는데 상석도 역시 손상을 입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능 주위의 석물들이 떨어져서 손상을 입힌 이런 재앙이 생겼으니 더없이 놀랍고 송구스럽습니다. 위안제(慰安祭)를 택일하지 말고 음력 11월 12일에 지내되, 축문(祝文)은 시독에게 짓게 하고 정부 관리 이하가 즉시 가서 봉심(奉審)한 뒤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의정(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장례원 경, 영선사장(營繕司長)이 가서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12월 13일 양력
봉심(奉審)하고 온 대신 이하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궁내부대신 임시서리내부대신(宮內府大臣臨時署理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 영선사장(營繕司長) 민강호(閔康鎬)이다.】 를 인견(引見)하였다. 태릉(泰陵)의 가석(駕石)과 상석(裳石)에 탈난 곳을 봉심한 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장례원(掌禮院)에 명하여 즉시 수리하라고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주청(奏請)하여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금보전문 【익모(翼謨)를 의모(懿謨)로 고칠 때】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이승응(李昇應)을 차출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종묘(宗廟)의 규례에서 제주(題主)가 특히 중대하여 각 실(室)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데, 시호(諡號)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존호(尊號)를 쓴 실도 있고, 또 존호를 먼저 쓰고 다음에 시호를 쓴 실도 있는 만큼 한 번 이정(釐正)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항간의 평범한 백성들도 조상을 받드는 데서 미진한 예법이 있으면 널리 상고하여 반드시 이정하는데, 하물며 천자의 나라인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제 큰 의식을 가지고 신주를 고쳐쓰는 때를 당하여 더구나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숙묘(肅廟) 계해년(1683)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문을 올려 종묘의 규례를 논하면서 위판(位版)과 축문(祝文)이 서로 어긋나는 것과 잘못된 곳을 바로잡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호(廟號) 위의 두 글자의 시호는 응당 없애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지만, 일의 체모가 더없이 공경스러우므로 감히 단정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大臣)들과 의논해서 가부(可否)를 정한 다음 결재를 받아서 처리하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의 규례는 더없이 큰 경사이지만 서로 직접 만날 수 없으니 한없이 슬프고 서운하다. 논의한 종묘의 규례로 말하면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는 노숙한 경으로서 숙묘 때에 이미 시행한 규례를 끌어다 이렇게 청한 것이다. 더구나 신주의 글씨를 고쳐 쓰는 일이 박두한 만큼 마땅히 이 때에 삼가 상고하여 이정해야 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문제인 경우에는 경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겨를이 없으니 경은 양해하라."
하였다.
의정(議政)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이 올린 상소를 보니, ‘하나의 종묘(宗廟) 안에서 각 실(室)의 규례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숙묘(肅廟) 계해년(1683)의 전례를 끌어다 묘호(廟號) 위의 시호(諡號)를 없애고 바로잡자고 말하였다. 이 대신은 본래 노숙하고 덕망이 있는 원로로서 몸은 비록 지방에 있지만 이런 전례(典禮)를 당하여 규례를 상고해서 청하였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그래서 경들을 소견하여 이렇게 묻는 것인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예법과 제도는 때에 따라서 변통하는 것이 일반적인 규례입니다. 옛날에는 옛날에 맞는 일의 체모가 있었고, 오늘에는 오늘에 맞는 일의 체모가 있어 그저 타당함만 놓치지 않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심 판부사가 상소를 올려 청한 것이 인정과 예절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박두하였는데 감독하는 일이 지금 어느 정도 되었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미 공사가 끝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비록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각 실의 옥책문(玉冊文) 자행(字行)이 많지 않아서 이렇게 빨리 끝난 것이다. 짐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의 옥책문을 보니 내용은 간단하지만 뜻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대체로 더없이 중요한 글은 간단하면서도 내용이 다 반영되고, 요긴하면서도 복잡하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비단 전례의 문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조정의 사무는 헛되이 형식만을 내세우지 말고 실속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원로 대신이 숙종(肅宗) 계해년(1683)에 이미 시행한 규례를 끌어다 청하였다. 하나의 종묘(宗廟) 안에서 예와 제도가 같지 않은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인 만큼 전례(典禮)를 이제 진행하게 된 형편에서 응당 이정(釐正)해야 할 것이다. 비록 지방에 있는 대신(大臣)들이나 어진 선비들에게는 물어볼 겨를이 없었지만, 의정(議政)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을 인견(引見)하여 물어보니 역시 다른 의견이 없었다.
태묘(太廟) 각 실(室)에 있는 위판(位版)의 묘호(廟號) 위의 여섯 글자는 예관(禮官)에게 삼가 상고해서 고쳐쓰게 하라."
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아뢰기를,
"태묘(太廟) 각 실에 있는 위판(位版)의 묘호(廟號) 위의 여섯 글자를 삼가 상고해서 고쳐쓰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태묘 제1실·제2실·제3실·제4실·제5실·제6실·제7실과 영녕전(永寧殿) 제5실·제6실·제7실·제8실·제9실·제10실·제11실·제12실의 위판은 삼가 고쳐써야 하는 만큼 즉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되, 종묘 제1실은 같은 날 추존(追尊)하여 올리는 책보(冊寶)를 올린 후 고쳐 쓸 때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방금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윤승(曺潤承)의 질품서(質稟書)를 보니, ‘피고 김필제(金必濟)와 윤제보(尹濟普)의 안건을 심리하니, 김필제와 윤제보, 조우식(趙宇植), 강영찬(姜永贊) 등이 모의하기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불을 지르면 근처의 병정(兵丁)과 순검(巡檢)들이 반드시 모두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갈 것이니, 이 때를 틈타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 대황제를 업고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 힘껏 보호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휘두르며 부귀를 누려보자.」는 등의 말을 한껏 논의한 사실은 각각의 공초(供招)에서 명백히 증명되었습니다. 피고 김필제는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의 상(上)에게 저촉되는 불온한 말을 하여 인정과 사리로 볼때 몹시 해로운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하며, 피고 윤제보는 같은 율문에 따라 추종자는 한 등급을 감하여 태(笞) 100대를 쳐서 종신 유형(流刑)을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들을 원래의 의률(擬律)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특별히 각각 한 등급을 감하라."
하였다. 또 ‘종신 유형 죄인 김필제, 유십오년(流十五年) 죄인 윤제보를 모두 완도군(莞島郡) 추자도(楸子島)로 정배(定配) 하소서.’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또 ‘본 년 음력 10월 11일 대사령(大赦令)을 삼가 받들어보니, 평리원(平理院)과 한성부 재판소(漢城府裁判所)의 죄인 가운데서 육범(六犯) 외에 등급을 감해 줄 황만기(黃萬己) 등 21명을 개록(開錄)합니다.’라고 상주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4일 양력
종2품 민영기(閔泳琦)·조신희(趙臣熙)·민영돈(閔泳敦)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민영기를 칙임관(勅任官) 3등에, 조신희와 민영돈을 칙임관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한청 통상 조약(韓淸通商條約)을 비준, 교환하여 체결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만교(李萬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날 영조(英祖)가 보위에 계시고 장묘(莊廟)가 대신 정사를 할 때에는 죽은 영의정(領議政)인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인년(1758) 8월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명령을 받고는 함인정(涵仁亭)에 입시(入侍)하여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도로 바쳤는데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하는 기상이 격렬하자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습니다.
임오년(1762) 5월에 채제공은 마침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해서 상복을 입고 대궐문 밖에 엎드려 열흘 동안 통곡하면서 거의 죽다가 겨우 소생하였습니다.
신묘년(1771)에는 또 도승지로서 몰래 명지(命旨)를 받들고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정성 왕후(貞聖王后) 신위(神位) 욕석(褥席) 밑에 감추었다가 정묘(正廟) 계축년(1793)에 이르러 채제공이 영의정(領議政)으로서 혈소(血疏)를 올린 결과 《금등명간편》이 비로소 반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조정에서 더없이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아름다운 덕이 더욱더 드러났습니다. 영묘는 일찍이 세손(世孫)에게 말하기를, ‘채제공은 나에게 있어서는 순수한 신하이고, 너에게 있어서는 충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정묘는 직접 그의 덕행을 적은 글을 지었는데, ‘도승지는 무릎 아래 자리에서 피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다.’라고 하였고, 또 쓰기를, ‘아무 해에 의리있는 인물 중에 으뜸은 바로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지킨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을 내세운 덕과 업적, 나라를 빛낸 문장 같은 데 대해서는 신이 감히 장황하게 군말을 할 수 없습니다.
또 고(故)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신 이이장(李彛章)과 같은 사람이 있어 영묘의 인정을 받았는데, 장묘가 정사를 대리하던 초기에 맨먼저 강관(講官)으로 뽑혀 서연(書筵)에서 일을 보면서 시종 일관 보호하였습니다.
병자년(1756) 5월 낙선당(樂善堂)에 불이 일어난 다음날에 승지(承旨)로서 입시하여 깨닫도록 힘껏 아뢰었는데 진술이 지성에서 나왔다는 말씀까지 받았습니다.
임오년(1762) 나경언(羅景彦)의 모함 사건 때에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구핵(鉤覈)할 것을 힘껏 청하여 끝내 정법(正法)에 처하였는데, 이런 역적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당일에 이르러서는 도승지로서 입시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한사코 힘껏 간하여 심지어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군법을 실시하겠다는 명령까지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이장이 합문(閤門) 밖에 물러나왔다가 임금의 병이 급하다는 것을 듣고는 다시 들어가 어의(御醫) 방태어(方泰輿)를 불러 청심환(淸心丸)을 올리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 때문에 죄를 주면 내가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자 울면서 아뢰기를, ‘신의 팔을 자를지언정 차마 신의 손으로 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 말하기를, ‘이런 때에 이런 신하가 있으니 이이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이이장이 빈청(賓廳)을 지나가다가 대신에게 말하기를, ‘힘껏 간해야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작위와 명호를 즉시 회복하고, 초상을 잘 치르며, 좋은 시호(諡號)를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이장이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며 전후로 의리를 세운 것은 현융원(顯隆園) 지문(誌文)에 명백히 실려 있는데, 이것이 그 대략입니다.
지금 한창 의리가 펼쳐지고 훌륭한 의식이 갖추어져 그 격려하고 장려하는 모든 일이 차례로 다 거행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천년에 한번 있을 훌륭한 기회입니다. 이와 같은 두 신하들의 깨끗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에 대해서 비록 이미 제사를 지내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백세토록 신주를 들어내지 말자는 공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의 글을 유사(攸司)에 내려 보내어 신주(神主)를 영영 들어내지 않도록 의논하여 정하고, 선대 임금들이 예의로 대우한 뜻을 이어나감으로써 훌륭한 시대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소서. 매우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15일 양력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를 개척한 지 이제는 벌써 여러 해가 되어 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점점 개간되는데, 아직까지 조사하지 못한 것은 그럴 겨를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현재 본부(本部)에서 시찰 위원을 임용하여 해도(該島)에 가서 일체 정형을 자세히 조사하는 동시에 주민들을 안착시키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올린 차자의 대략에,
"삼가 구전 칙교(口傳勅敎)를 받았는데, 요즘 의정(議政) 이하 각 대신, 찬정(贊政)들이 모두 사진(仕進)하지 않아 공의(公議)를 중지시키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사진하지 않아 공의를 중지시킨 것은 바로 신의 하나의 큰 죄목이지만, 신이 스스로 편안하자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 형편상 여느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없어서 여러 차례 하소하면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 고금(古今) 이래로 신과 같이 죄에 걸려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황상께서는 비록 이미 남김없이 석연하게 이해하고 있더라도 조정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보나마나 어물어물 넘겨버리지는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공초에서는 의정부에 심복이 몇 사람 있다고 하였는데, 법관은 자세히 조사하고 명백히 따지지도 않은 채 죄가 있는 것을 죄가 없는 것으로 중외(中外)에 선포함으로써 여전히 신을 애매한 처지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길 가던 사람도 알 것입니다. 묘주(廟奏)에서는 옥체(獄體)가 되지 않는다고 심지어 심리 처결하자고까지 청했으나, 법관이 심리 처결할 만한 까닭이 없는 만큼 애당초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이 처음에 아뢴 것은 참으로 망녕된 것이며, 따라서 신이 폐하를 속인 죄가 또한 큽니다.
대체로 몇 사람이라는 ‘몇’자는 누구누구인지를 모르겠으나, 신의 이름이 처음에는 드러났다가 나중에는 덮어져 버렸으니, 신은 참으로 그 까닭을 알래야 알 수 없습니다. 옥체를 생각할 때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법관이 요량하는 점에서는 그럴 법도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나라의 법이 이 지경으로 전도되었으니 천하 만국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신의 이름이 일단 공초에서 나온 이상 처결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신에게 죄가 있는데도 감처(勘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일편단심의 백발노인은 죽으려야 죽을 곳이 없습니다.
조정의 일을 이미 그르치게 하고 처지는 점점 위태로워지는데, 이제 어떻게 태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시 의정부에 들어가 뻔뻔스레 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지 물러가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고,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 해도 이 생에서는 끝났습니다. 대궐을 쳐다보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뿐입니다. 신과 같이 명령을 어긴 죄에는 산골이나 바닷가에 귀양가고 중벌을 받아야 마땅하기에 땅에 엎드려 공손히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을 불쌍히 여겨 신을 쫓아버리고 신을 해당 형률(刑律)로 감처하여 조정의 규율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번에 모함을 당한 것은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도 의심할 것 없이 명백해졌다. 또한 직접 아뢰거나 소장을 통하여 경의 속생각을 모두 말하였으며, 비답과 유시를 통하여 나의 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국사에 노련하고 국가를 염려하는 경으로서 이와 같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리 처결하는 것으로 말하면 경의 서주는 옥체를 중시하여 그러는 것이고, 법사에서는 심리를 신중히 여겨 그러는 것이다.
경은 대번에 얼음이 녹듯 의심을 풀고 더는 혐의를 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경이 만약 이 문제로 버틴다면 이것이 어찌 평소에 경에게 기대한 것이겠는가? 의정부에서 사진하지 않아 토의를 중지한 데 대해서는 나라의 형편이 위태롭게 된 오늘 반드시 경이 수시로 감독하여 적체된 업무가 풀리도록 하라. 얼마 전에 유시를 전달하였으니, 경은 깊이 이해하라. 당장 서계(誓戒)하는 의식이 박두하였는데 밤이 이미 깊었다. 경이 받들어 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바라건대 경은 빨리 사진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짐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오정근(吳正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를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겸임하도록 하였다.
12월 1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봉심(奉審)한 재상의 보고를 듣건대, ‘전주(全州)에 관왕묘(關王廟)를 둔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향(香)과 축문(祝文)을 봉해서 보내는 절차는 남원(南原)과 강진(康津)의 규례대로 하고, 본 도에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상훈(沈相薰)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청국에 주재하라고 명하였다. 군부 협판(軍部協辦) 김영준(金永準)에게 특명전권공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12월 17일 양력
월식(月食)이 있었다.
궁내부 내대신(宮內府內大臣) 이재완(李載完)을 종묘(宗廟) 각실(各室)의 신주(神主)의 글씨를 고쳐 쓸 때의 제주관(題主官)으로,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민종묵(閔種默)을 영녕전(永寧殿) 각 실의 신주의 글씨를 고쳐 쓸 때의 제주관으로 삼았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올린 차자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변명하고, 이어 사임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본직과 겸직, 임시로 맡은 여러 가지 일은 모두 긴요한 데 관계되는데 어째서 혐의를 피해서는 안 될 일로 갑자기 사임을 청하는가? 지난번에 조정에서 아뢴 것은 옥체(獄體)를 중시해서 그런 것이고, 오늘 심리 처결하는 것은 심리를 신중히 여겨 그런 것이다. 어제 이미 영의정(領議政)에게 내린 비답에서 다 말하였다. 이처럼 어려울 때에는 오직 서로 협력하고 공경하면서 함께 수습해 나가야 하는 법이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사무를 보라."
하였다.
12월 18일 양력
종1품 심상훈(沈相薰)을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부여 군수(扶餘郡守) 이강하(李康夏)를 내부 판적 국장(內部版籍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19일 양력
종묘(宗廟)에 나아가 추존(追尊)하는 책보(冊寶)를 올린 후 특별히 대제(大祭)를 지낸 다음 원구단(圜丘壇)에 나가 전알(展謁)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12월 20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원구단(圜丘壇) 대제의 축문판(祝文版)을 친히 썼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장적(帳籍)의 본의는 얼마나 신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올해에 각부(各府)와 각군(各郡)에서 보고한 호적 대장을 조사해 본 결과, 거의 다 사실과 어긋나며 또한 거짓 등록도 많습니다. 본 부에서 전후로 신칙한 것이 한두 번정도가 아니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세월만 보내며 형식만 같게 하니 사체로 볼 때 매우 놀랍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심하게 호구(戶口)가 줄어들었거나 틀리게 등록한 각 해당 지방관에 대하여 우선 본 벼슬을 파면시키고, 잘 신칙하지 못한 각 해당 관찰사(觀察使)에 대해서도 똑같이 논경(論警)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고려할 점이 없지 않다. 수령(守令)은 한달 분 녹봉을 감하고, 관찰사는 견책하여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12월 21일 양력
원구단(圜丘壇)에 나아가 전알하고 이어 제사에 쓸 희생(犧牲)과 제기를 돌아본 후 경숙(經宿)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배참(陪參)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이면상(李冕相)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 심상훈(沈相薰)를 봉상사 제조에 겸임시켰으며, 종2품 정익용(鄭益鎔)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2일 양력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추존(追尊)하여 배천(配天)하고, 이어 원구단(圜丘壇)에서 배천대제 겸 동지대제(配天大祭兼冬至大祭)를 지냈다. 황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명(李根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민영준(閔泳駿)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議政)과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준(閔泳駿), 겸장례(兼掌禮) 윤교영(尹喬榮)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을 소견한 것은 전례(典禮)를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높은 공로와 큰 업적, 인렬(仁烈), 장렬(莊烈) 두 왕후(王后)의 아름다운 덕,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훌륭한 모범에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백 대를 내려가면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건만, 존호를 올려 찬양한 적이 없었으니 실로 미처 겨를이 없어 시행하지 못한 전례이다. 짐 소자가 추모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금보와 옥책으로 공덕을 드러내면 인정과 예절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섭섭함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인조 대왕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나라의 장구한 운수를 전하였으며 큰 계책과 큰 업적으로 오늘의 경사를 빛나게 열어놓았으며, 두 왕후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처럼 시초를 바로잡아 도운 것이 큽니다. 아! 우리 효종 대왕은 훌륭한 공로와 큰 업적을 이루었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할 줄 알도록 한 것은 모두 효묘의 덕입니다. 인선 왕후의 아름다운 규범과 명철한 범절은 태평 성대를 이루도록 도와 백대토록 백성들이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존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성효(聖孝)가 있으니 길이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우러러 흠모하고 칭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을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보령이 칠순이 된 데 대하여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것은 상하가 같은 심정이다. 경사를 축하하는 데는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니 존호(尊號)도 가상(加上)하게 될 것이다. 정월 초하루에 먼저 고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정(議定)하려고 한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명헌 태후의 보령이 칠순이 된 데 대해서 상하가 모두 경축하는데 신들도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지금 폐하의 하문(下問)을 받고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을 내려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 소자가 크나큰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 임금들이 이룩한 법을 따르고 어긴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높은 공로와 큰 업적을 이룩하고, 인렬(仁烈)·장렬(莊烈) 두 왕후는 맑은 덕으로 임금을 잘 도왔으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을 지니고, 인선 왕후(仁宣王后)는 아름다운 모범으로 백 대를 내려가도록 도운 것이 커서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도록 잊지 못하건만 아직도 공로와 덕을 드러내어 금과 옥에 새기는 일을 못하였다. 이것은 사실 미처 거행하지 못한 예절로서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하다. 소급하여 높이는 절차를 대신과 예의를 맡은 신하에게 하문(下問)하고 의논한 결과 모두가 찬성하였다. 옥책문(玉冊文)을 올리는 것이 비록 공로와 덕의 만 분의 일도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변변치 못한 정성이나마 조금 펼 수 있을 것이다.
인조 대왕, 인렬 왕후, 장렬 왕후, 효종 대왕, 인선 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의절(儀節)을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명년은 바로 우리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보령이 칠순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이다. 기뻐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정성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오늘 동지(冬至)날을 당하여 대신(大臣)들과 예의를 맡은 신하를 인견(引見)하여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법을 하문하였더니 똑같은 말로 경사를 축하하자고 하였다. 명헌 태후의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을 설치하고 거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명헌 태후의 보령이 칠순이 되는 만큼 우리 왕조의 규례를 따라 앞으로 존호를 올리고 경축하려고 한다. 내년 정월 초하룻날에 우선 고하고 선포하며, 의절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추상존호도감과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을 합쳐 설치하여 거행하되 ‘상호도감(上號都監)’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준(閔泳駿), 특진관(特進官) 서상우(徐相雨)와 조정희(趙定熙)를 제조(提調)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황태자가 올린 상소에,
"삼가 생각건대 우리 아버지 황제 폐하의 큰 덕과 높은 공훈은 하(夏)·은(殷)·주(周) 3대 때에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것입니다.
대체로 조상들의 위업을 이어받은 후 나라는 옛날 그대로이지만 법도를 새롭게 하였으며, 큰 업적을 넓혀 하늘의 명령을 받아 안았고, 오묘(五廟)를 추존(追尊)하여 온갖 예절을 충분히 갖추었으니, 옛날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던 첫 시기에 비하여도 일이 더 간고하였지만 공적은 그보다 더한 것입니다. 소자가 하·은·주 3대 때에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부하고 사정(私情)을 두어 자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돌보아주고 도와주어 복록과 장수를 준 것은 응당 억만 년토록 무궁할 것입니다.
명년은 바로 우리 아버지 황제 폐하의 보령이 오순(五旬)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주역(周易)》의 ‘태연수(太衍數)’가 49를 연장하여 천년 만년에 이를 것이니 폐하의 만년 장수는 사실 여기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 해의 경사는 곧 만 년을 내려갈 경사입니다. 나라의 경사치고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버지 황제 폐하의 덕과 공훈은 크고 커서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습니다. 금보와 옥책으로 남긴들 어찌 폐하의 덕을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이 해의 경사에 설사 달마다 성대한 연회를 차리고 날마다 만세를 부르며 장수를 빈들 어찌 능히 소자의 보잘 것 없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덕을 그려내어 드러내고 경사를 당하여 성대히 축하하는 것은 나라의 바꿀 수 없는 규례이며, 열성조(列聖朝) 때에 그대로 지켜오면서 혹시라도 그만두지 않았던 일입니다. 소자는 변변치 못한 몸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일체 자식된 도리를 원래 조금도 다하지 못하였는데, 부모를 높이고 부모의 덕을 드러내는 일에서 훌륭한 규범을 삼가 지키고 그르치지 않는다면 혹시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는 그 덕이 태임(太姙)이나 태사(太姒)와 맞먹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존한 공로가 있건만, 어려운 때를 만나서 의절(儀節)을 빠뜨린 결과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못했으니 소자의 하늘에 사무치는 한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더없이 큰 경사를 만나 장차 의식을 함께 거행하게 되었으니, 소자는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가운데서 역시 감격과 다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지(冬至)날에 감히 간절한 속마음을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열성조의 아름다운 규례를 따라 소자의 지극히 절절한 청을 굽어 따라 주시어 위로는 하늘에 고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고 연회를 차려 경축하는 등 명년에 응당 시행해야 할 절차에 대하여 모두 빨리 명을 내림으로써 구구한 사정을 펴도록 해 주소서. 매우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생각건대 부덕한 짐은 천지와 조상들의 도움을 받고 나라를 새롭게 할 데 대한 명령을 받은 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언제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러니 나에게 무슨 내세울 만한 덕이 있다고 이런 말을 하는가? 마땅히 사실대로 하기에 힘쓰고 한갓 형식을 숭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효전(景孝殿)에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자는 것은 자식의 심정은 비록 그렇지만 어찌 적당한 때가 없겠는가? 너는 잘 헤아리고 다시는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12월 23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조문(詔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법에서는 주 나라를 본받아야 하는데, 주 나라의 도리는 높일 사람을 높이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직(后稷)을 배천(配天)한 것은 그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추존(追尊)하여 왕으로 봉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높일 사람을 높이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의(義)를 다하고 인(仁)을 다한 것이니, 어찌 후세에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 하늘과 조상들이 우리나라를 말없이 도운 결과 부덕하고 암둔한 짐이 여러 사람들의 의사에 몰려서 외람되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지가 오늘까지 3년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덕이 있어서 하늘의 명령을 크게 받을 수 있었겠는가? 실상은 우리 조상들이 쌓은 공적과 인자함이 경사를 내리고 복을 물려준 것이 오늘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이 나에게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늘을 공경할 도리를 생각하다가 이에 남쪽 교외에 원구단(圜丘壇)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건대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사람은 조상에게 근본을 두는 만큼 근본에 보답하려면 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높이려면 하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는 하늘과 사람의 의사에 순응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그것을 선대 임금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열성(列聖)은 전대의 업적을 두터이 하여 위업을 이어받고, 그것을 후세에 굳건히 지켜낸 결과 업적을 거듭 빛내고 하늘의 의사를 잘 받들었다. 그러니 감히 주(周) 나라에서 배천하고 추존한 예법을 따라 우리 열성조가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으로 보살펴 준 하늘의 명령에 우러러 보답한 것을 드러냄으로써 보잘 것 없는 이 몸은 관계없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번 음력 11월 17일에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고 종묘(宗廟)에 나아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태조 지인 계운 응천 조통 광훈 영명 성문 신무 정의 광덕 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로,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皇后)는 고황후(高皇后)로,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皇后)도 고황후(高皇后)로, 고조 할아버지 장종 대왕(莊宗大王)은 장조 신문 환무 장헌 광효 의황제(莊祖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로, 고조 할머니 헌경 왕후(獻敬王后)는 의황후(懿皇后)로, 증조 할아버지 정종 대왕(正宗大王)은 정조 경천 명도 홍덕 현모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로, 증조 할머니인 장휘 예경 자수 효의 왕후(莊徽睿敬慈粹孝懿王后)는 선황후(宣皇后)로 높였다.
할아버지 순조 대왕(純祖大王)은 순조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체성 응명 흠광 석경 계천 배극 융원 돈휴 의행 소륜 희화 준열 대중 지정 홍훈 철모 건시 태형 창운 홍기 고명 박후 강건 수정 계통 수력 건공 유범 문안 무정 영경 성효 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로, 할머니인 명경 문인 광성 융희 정열 선휘 영덕 자헌 현륜 홍화 신운 수목 예성 홍정 순원 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는 숙황후(肅皇后)로 높였다.
아버지 익종 대왕(翼宗大王)은 문조 체원 찬화 석극 정명 성헌 영철 예성 연경 융덕 순공 독휴 홍경 홍운 성열 선광 준상 요흠 순공 우근 탕정 계천 건통 신훈 숙모 건대 곤후 광업 영조 장의 장륜 행건 배녕 기태 수유 희범 창희 입경 형도 성헌 소장 치중 달화 계력 협기 돈문 현무 인의 효명 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統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어머니인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흠륜 홍경 태운 창복 희상 의모 경훈 철범 신정 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景勳哲範神貞王后)는 익황후(翼皇后)로 높였다.
그리고 동지(冬至) 날인 20일에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삼가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함께 제사지냈으니, 높일 사람을 높이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짐의 정성을 표시하고, 우리 태조의 큰 업적과 왕업의 터전을 닦은 것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는 여섯 가지 기운에 회복되기 시작하는 때로, 크게 보답하는 의식을 대번에 거행하니 하늘의 도리에 비추어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인정을 참작해 보아도 부합되는 것이다. 짐의 기쁜 마음을 무어라고 형용하겠는가? 신하와 백성들이 다같은 심정인 만큼 감히 하늘의 은혜를 헤아려 큰 은전이 미치게 하고,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덕을 골고루 펴는데 사령(赦令) 조항을 아래에 열거한다.
【이하는 생략함】 아! 옥책문(玉冊文)을 올리는 것으로 네 임금을 높인 것은 사랑을 다하고 융숭함을 다한 것이며, 태조를 하늘에 함께 제사지낸 것은 공로에 보답하고 덕에 보답한 것이다. 의식을 지내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으니 경사가 온 나라에 차 넘친다. 온 나라에 공포하니 모두 듣고서 알도록 하라." 하였다.
【원본】 43책 39권 9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33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아! 옥책문(玉冊文)을 올리는 것으로 네 임금을 높인 것은 사랑을 다하고 융숭함을 다한 것이며, 태조를 하늘에 함께 제사지낸 것은 공로에 보답하고 덕에 보답한 것이다. 의식을 지내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으니 경사가 온 나라에 차 넘친다. 온 나라에 공포하니 모두 듣고서 알도록 하라."
하였다.
황태자가 재차 올린 상소문에,
"삼가 아룁니다. 소자(小子)가 우러러 청하는 것은 당연한 전례(典禮)에서 나온 것이고, 온 나라 사람들의 일치한 소원에서 나온 것이지 애당초 소자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의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석연히 받아들이리라고 기대했었는데 막상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윤허하지 않는 폐하의 비답을 받고 보니, 소자는 어리둥절하고 답답하여 섭섭한 생각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하늘땅 같은 큰 도량에 대해서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덕이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칭호를 얻는 만큼 성인도 사양할 수 없는 것이고,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축하하는 만큼 떳떳한 의식을 역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아버지 황제 폐하의 큰 공로와 훌륭한 덕은 역사를 두루 상고해도 그처럼 대단한 것이 드물었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경사를 보이고 끝없는 복을 내린 결과, 우리 폐하는 왕위에 오른 지 34년에 500년마다 만나는 반드시 흥하는 운수를 당하여 큰 위업을 넓혔고,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선대의 조상들을 추존(追尊)하는 예절을 한껏 갖추었습니다. 우리 폐하의 효성은 더없이 커서 천고에 없던 것이니, 그 사적을 기록한 책이 집안에 차 넘쳐도 이루 다 적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효성으로 다스리는 정사는 멀리 미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주는 인자함은 마땅히 소자의 소원까지 알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소자의 소원은 바로 드러난 공로와 덕을 형용하고, 모처럼 만난 경사스러운 때에 기쁨을 표시하자는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조종(祖宗) 이래로 이미 시행한 규례입니다. 소자는 감히 물려준 규례를 이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만일 정성이 부족해서 감동시키지 못하고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못한다면 소자는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효성으로 다스리는 폐하의 정사에도 부족한 점이 될 듯합니다.
또한 예법은 혹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정이 미치는 데는 예법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만일 그 예법은 꼭 그렇게 되는 것인데도 인정이 혹 펴이지 못한다면 이것은 인정과 예법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폐하는 마음을 이렇게 가지지 말고 소자의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처지에 대해서 응당 이해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아뢰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인정과 예절에 대해 깊이 살피시고 소자의 청을 윤허해 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이 일치한 소원을 풀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시행한 전례라고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실속이 있으면 이런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럴 만한 실속이 없으면 그런 전례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데 지금은 근심 걱정이 가셔지지 않고 여러 가지 사무가 복잡하니, 무슨 겨를에 급하지 않고 한가한 일을 논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들어줄 수 없으니, 너는 이해하라."
하였다.
황태자가 세 번째로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소자(小子)가 우러러 청한 것이 이미 두 번씩이나 되었지만 더없이 애타하다 보니 말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부자간에는 정성이 더욱 감동시키지 못해 소자의 말은 한갓 빈말이 되고 끝내 윤허하지 않습니다. 소자는 이에 두렵고 답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릇 오늘 이 나라에서 태평세월을 보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폐하의 신하들입니다. 하늘이 준 착한 마음을 가져 사람들의 본성이 한결같으니 억만 백성들이 추대하기를 바라고, 폐하의 은택 속에 살면서 밤낮으로 큰 계책을 찬양하고 큰 위업을 빛내기를 바라니, 경사를 맞이하여 기쁨을 표시하여 즐거워하는 정성을 표시하려는 것은 마땅히 소자와 같은 것입니다. 기쁨에 찬 함성과 기운은 세상에 차 넘치고 그것이 모여 소자가 오늘 아뢰는 말이 되었으니 소자의 말은 바로 억만 백성들의 말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겸양하면서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셔도 억만 백성들의 말은 저버려서는 안 될 듯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덕이 있으면 반드시 내세워 금과 옥에 글을 새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종고(鐘鼓)와 경관(磬管)으로 아송(雅頌)을 지은 것도 여러 편이었으니, 이것은 우리 왕조에서 전해오는 아름다운 규범입니다. 더구나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지혜는 하늘에서 타고났고 공로는 만세에 우뚝하며, 내년은 또 우리나라에 드물게 있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폐하가 장차 윤허하시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소자의 말은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되고 백성들의 소원은 돌아볼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것으로서 우리 왕조에서 전해오는 아름다운 규범이 폐하로부터 훼손되게 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책하여 살펴야 할 것이며, 소자도 허락받지 못하고서는 감히 그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상소를 올리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다시 재삼 생각하시어 소자의 청을 특별히 윤허하시어, 위로는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따르시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두 번에 걸쳐서 이미 속마음을 낱낱이 일러 준 만큼 마땅히 이해했을 터인데도 이처럼 다시 번거롭게 청하니 이것은 짐이 너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설사 내세울 만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때가 못 된다. 그러나 너의 간곡한 정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점이 있으므로 내년 정월 초하루에 단지 치사(致詞)와 고포(告布)만을 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凋零)을 내리기를,
"연이은 경사에 여러 차례 사전(赦典)을 내렸지만 마침 혹독한 추위를 만났으니 죄수들을 더 잘 돌봐주어야 할 것이다. 육범(六犯) 이외의 징역 죄인을 모두 방송(放送)하며, 육범 내의 징역 죄인들과 육범 내의 유형(流刑) 죄인은 정적(情跡)을 참고하여 각 해당 재판소에서 다시 심리하게 하여 방송할 만한 자들은 방송하고 감등(減等)할 만한 자들은 감등하라. 미결수(未決囚)는 판결이 난 다음 일체 시행하여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배천(配天)의 고유제(告由祭)를 친히 지낼 때의 종헌관(終獻官)과 종묘 제조(宗廟提調) 이하, 영녕전(永寧殿) 섭행제(攝行祭) 때의 초헌관(初獻官) 이하, 배천 위판(位版)에 글씨를 쓸 때와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위판을 고쳐 쓸 때의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 이하, 책보(冊寶)를 올릴 때와 책보를 조성(造成)할 때의 의정(議政) 이하,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함께 지내는 제사를 직접 지낼 때의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와 여러 향관(享官), 원구단 제조(圜丘壇提調)와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배천 때 시위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이하, 진하(陳賀)할 때와 당(堂)에 앉아서 축하를 받을 때의 각 차비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독옥책관(讀玉冊官) 및 독옥보관(讀玉寶官) 한광수(韓光洙)·민영국(閔泳國)·성기운(成岐運)·정일영(鄭日永)·서공순(徐公淳), 예의사(禮儀使) 이근명(李根命), 전사관(典祀官) 이탁(李倬), 제주관(題主官) 이재완(李載完)·민종묵(閔種默),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심상훈(沈相薰), 궁내부대신 임시서리 내부대신(宮內府大臣臨時署理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종건(李鍾健), 비서승 겸장례(祕書丞兼掌禮) 박제빈(朴齊斌)·김영적(金永迪)·이원규(李源珪), 선조관(宣詔官) 이종완(李種完), 예모관(禮貌官) 윤정구(尹定求), 상례(相禮) 민영적(閔泳迪), 선전관(宣箋官) 강호(姜濩), 원임 별군직(原任別軍職) 윤웅렬(尹雄烈), 배천 군수(白川郡守) 강건(姜湕)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2월 24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을 홍문관 학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5일 양력
황태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자의 간절한 심정을 한 번 하소하고 두 번 하소하고 세 번씩이나 말씀드렸지만 성지(聖旨)는 갈수록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윤허를 내리지 않고 단지 고포(告布)의 의식만을 윤허하였습니다. 소자가 변변치 못하여 폐하의 뜻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조정의 논의가 답답해하고 백성들이 실망하는 것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부황 폐하의 훌륭한 덕과 큰 공로는 천고의 제왕들을 두루 지나도록 없던 것입니다. 대체로 세상이 생긴 후에 큰 터전을 처음으로 닦고 나라를 세워 계통을 물려준 임금들이 역사책에 꼬리를 물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종(祖宗)의 위업을 이어받아 용맹과 지혜를 크게 발휘하여 분발하고 떨쳐 일어나 큰 위업을 넓히고, 천명(天命)을 받아 황제가 되어 임금을 추존(追尊)하고 고황제를 배천(配天)하는 모든 전례(典禮)를 흡족히 마련하여 만세(萬世)의 공을 세운 것은 우리 부황 폐하뿐입니다. 성대한 공덕과 제왕의 효성은 비단 지난 천고(千古)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년 후에도 필적할 자가 없을 것이니, 만약 그 만 분의 일이라도 그려내자면 금책(金冊)과 옥책(玉冊)에 이루다 적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천명이 덕이 있는 이에게 내리더니 또다시 끝없는 장수와 복을 내리니,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 폐하의 보령이 오순(五旬)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오순에 경사를 축하하고 존호를 올리는 것은 원래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해 온 전례로서 금석과 같이 떳떳한 규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건대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도 공덕이 융성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부지하였으며 혜택을 크게 베풀어 이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황후의 훌륭함은 비길 데가 없건만 미덕을 드러내는 일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나라의 흠전(欠典)입니다. 어찌 단지 소자만이 사사로운 정으로 원통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밤낮으로 우러러 고대하는 것입니다.
적이 생각건대, 일컬을 만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대뜸 성대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우리 열성조에서 준수하여 시행하던 것으로서 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부황 폐하의 공덕이 일컬을 만한 것이 어찌 한두 가지뿐이겠습니까? 내년의 경사는 신자(臣子)로서 폐하께 바라는 것으로 기뻐 춤추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 소자가 지극히 원통해하고 지극히 한스러워하는 것은 우리 명성 황후가 오늘날 소자가 색동 옷차림으로 기쁨을 드리는 때에 보책(寶冊)을 받들어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황 폐하께서도 응당 슬픈 감회가 있을 것이니 소자의 말을 깊이 생각해 주소서.
인묘(仁廟)와 효묘(孝廟)을 추론하여 〖공렬을〗 밝히는 예식에 대해서는 이미 명이 있었으니 조상들을 그리워하는 부황 폐하의 효성은 지극하고도 극진합니다. 소자가 태평세대를 만나 직접 보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게다가 더없는 한을 품은 채 이루지 못한다면 소자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부황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헤아려 주소서. 그래서 감히 조정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어리석음을 무릅쓴 채 번거롭게 청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앞에서 청한 대로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추상(追上)하는 일에 대해 허락하는 명을 속히 내리시어 위로는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규범을 따르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의 기대에 부응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로 내린 비답에서 남김없이 다 말하였기에 이해했으리라 여겼는데 어째서 또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가? 너의 정성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때 꼭 서둘러야 할 일이 이 일뿐이겠는가? 조정 관료들의 의견도 짐과 같을 것이니 너는 빨리 중지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자가 조종(祖宗)이 이미 시행한 규례를 끌어대고 신하와 백성들의 일치한 심정을 따라 대궐 뜰에 서서 간절한 심정을 진술하고 서로 이끌고 나와 애타게 비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윤리로 보아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예법과 제도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답을 받들고 보니 더욱더 겸손하게 사양하시면서 윤허할 기미가 아득하므로 더없이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호(昊)’라 하고, ‘민(旻)’이라 하는 것은 그 덕을 형상해서 일컬은 것입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덕은 하늘을 본받아서 ‘방훈(放勳)’과 ‘중화(重華)’라는 이름으로 형상하였으며 문왕(文王)의 덕은 하늘의 이치를 순수하게 따른 것이니 이것이 문왕이 문왕으로 된 까닭으로, 이 모두가 경전에 실려 있고 예나 지금이나 딴 의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그에 맞는 이름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부황 폐하의 더없이 인자하고 더없이 큰 덕은 하늘과 차이가 없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돌보는 데서 높고 높은 공로를 이룩한 것은 요와 순에 견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나라를 하늘의 새로운 명을 받고 역대 조상들을 높여 존호를 올려 우리가 억만 년 무궁할 복을 받게 된 것은 문왕과 무왕(武王)에 부합됩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의 뜻에 부합하여 큰 복을 두루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폐하의 보령이 점점 높아져 장차 오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수하는 것을 기뻐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소자의 정성과 높이 받들려는 억만 백성들의 심정이 어찌 하늘과 같은 성인의 칭호를 우리 폐하에게 올림으로써 경사를 기뻐하는 성의를 조금이나마 펴려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 명성 황후는 후비의 자질을 갖추어 군주의 배필이 되었는데 안으로는 내조의 성대한 공렬이 있고 밖으로는 남모르는 공덕이 전하여졌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여자로서 요와 순과 같고, 미덕은 주 나라의 태임(太妊)과 태사(太姒)에 견줄 수 있습니다. 아!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교화가 황후로 인하여 그 터전이 되었으나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만나 큰 예식이 이루어지고 큰 공적이 한 몸에 모여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소자는 신민들과 더불어 하늘에 사무친 더없는 슬픔을 풀 길이 없지만, 나라의 이런 경사를 만나서 아름다운 칭호를 올려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소자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겠습니까? 반드시 시행해야 할 예를 시행하지 못하면 예가 소략하게 되고 마음에 반드시 펴야 할 정을 펴지 못하면 마음이 답답하게 되는 것이기에, 예가 소략하면 시행하여 밝히기를 바라고 마음이 답답하면 시원하게 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에 소자는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위엄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시끄럽게 청하면서 윤허 받지 못하면 그만두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헤아리시어 부디 겸양하는 마음을 돌리시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히 윤허하셔서 성대한 의식을 속히 거행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도 올리고 정청에서 아뢰기도 하면서 계속 간절히 청하는 너의 정성과 효성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짐이 너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과 다르다. 나에게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일로 권면하여 온 나라를 편안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높이는 지극한 일인 것이다. 급하지 않은 일을 앞세우고 급한 일을 뒤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여러 날 서로 버티면서 그만둘 기약이 없으니 조정에 있는 신료들도 아마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는가?’하고 생각할 것이니, 매우 개탄스럽다. 나는 속으로 반성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겠다. 너는 잘 헤아리라."
하였다.
의정(議政)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준(閔泳駿), 겸장례(兼掌禮) 윤교영(尹喬榮)이다.】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전하가 부모가 장수하는 것을 기뻐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상소로 호소하고 정청(庭請)을 하기까지 하자 겸양하는 마음을 애써 돌려 이 명을 내리시니, 우리 폐하의 큰 덕과 큰 업적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며 금과 옥에 새김으로써 떳떳한 규례를 그대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국모다운 덕과 깊이 도운 공로는 후세에 길이 말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때를 겪다가 세상을 떠나 오늘의 훌륭한 의식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동궁 전하의 더없는 슬픔과 원통함은 풀래야 풀 길이 없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칭호를 추상(追上)하여 끝없이 전하게 되었으니, 동궁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납니다. 간절히 바라던 끝에 더없이 경사스럽고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이 간절히 청한 것은 실로 정성과 효성에서 나온 것인데, 여러 날 서로 버티어 도리어 지루한 감이 있었다. 비록 부득이 해서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였지만 짐은 실로 스스로 부끄럽다. 경효전(景孝殿)에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자는 청은 남들과 다른 동궁의 정리(情理)로 보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폐하의 명이 내리기 바쁘게 온 나라가 춤을 춥니다. 도감(都監)을 설치하되 이름은 상호도감(上號都監)으로 하고 당상과 낭청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差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43책 39권 9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3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전하가 부모가 장수하는 것을 기뻐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상소로 호소하고 정청(庭請)을 하기까지 하자 겸양하는 마음을 애써 돌려 이 명을 내리시니, 우리 폐하의 큰 덕과 큰 업적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며 금과 옥에 새김으로써 떳떳한 규례를 그대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국모다운 덕과 깊이 도운 공로는 후세에 길이 말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때를 겪다가 세상을 떠나 오늘의 훌륭한 의식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동궁 전하의 더없는 슬픔과 원통함은 풀래야 풀 길이 없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칭호를 추상(追上)하여 끝없이 전하게 되었으니, 동궁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납니다. 간절히 바라던 끝에 더없이 경사스럽고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이 간절히 청한 것은 실로 정성과 효성에서 나온 것인데, 여러 날 서로 버티어 도리어 지루한 감이 있었다. 비록 부득이 해서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였지만 짐은 실로 스스로 부끄럽다. 경효전(景孝殿)에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자는 청은 남들과 다른 동궁의 정리(情理)로 보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폐하의 명이 내리기 바쁘게 온 나라가 춤을 춥니다. 도감(都監)을 설치하되 이름은 상호도감(上號都監)으로 하고 당상과 낭청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差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과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을 이번 상호도감(上號都監)에 합쳐 설치하라."
하였다.
태릉(泰陵) 능 위의 석물(石物)을 수리할 때 의정(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장례원 경(掌禮院卿), 영선사장(營繕司長)이 나아가 감동(監董)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예압(睿押)의 일을 내일 회의하라."
하였다.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에서 아뢰기를,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김성근(金聲根)을, 서사관(書寫官)에 박정양(朴定陽)을,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김영목(金永穆)을, 금보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김병국(金炳國)을,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옥책문 제술관에 서정순(徐正淳)을, 서사관에 이유승(李裕承)을, 악장문 제술관에 민영규(閔泳奎)를, 금보전문 서사관에 이경응(李景應)을,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옥책문 제술관에 윤우선(尹宇善)을, 서사관에 조병필(趙秉弼)을, 악장문 제술관에 남정철(南廷哲)을, 금보전문 서사관에 이호준(李鎬俊)을,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옥책문 제술관에 김학진(金鶴鎭)을, 서사관에 이건하(李乾夏)를, 악장문 제술관에 윤용구(尹用求)를, 금보전문 서사관으로 송근수(宋近洙)를,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옥책문 제술관에 이순익(李淳翼)을, 서사관에 박용대(朴容大)를, 악장문 제술관에 민종묵(閔種默)을, 금보전문 서사관에 민영상(閔泳商)을, 명성 왕후(明成皇后)의 옥책문 제술관에 민영준(閔泳駿)을, 서사관에 김규홍(金奎弘)을, 악장문 제술관에 민영환(閔泳煥)을, 옥보전문 서사관(玉寶箋文書寫官)에 조병세(趙秉世)를 차출하였습니다."
하니,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에서 아뢰기를,
"황제의 옥책문 제술관에 심순택(沈舜澤)을, 서사관에 심상훈(沈相薰)을, 악장문 제술관에 이근명(李根命)을, 옥보전문 서사관에 민영소(閔泳韶)를,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옥책문 제술관에 신기선(申箕善)을, 서사관에 홍순형(洪淳馨)을, 악장문 제술관에 조동면(趙東冕)을, 옥보전문 서사관에 이승응(李昇應)을 차출하였습니다."
하였다.
종1품 한문규(韓文奎)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영적(金永迪)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7일 양력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예압(睿押) 문제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로 와서 모였으나 감히 바로 써서 들일 수 없으므로 삼가 칙지(勅旨)가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마땅히 대내(大內)에서 써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12월 28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신희(趙臣熙)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9일 양력
정1품 민영준(閔泳駿)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김석진(金奭鎭)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30일 양력
의정부(議政府)에서 인조 대왕(仁祖大王)에게 추상(追上)할 존호(尊號)의 망단자(望單子)를 개천 조운 정기 선덕(開天肇運正紀宣德)으로, 인열 왕후(仁烈王后)에게 추상할 올린 존호의 망단자를 정유(正裕)로, 장렬 왕후(莊烈王后)에게 추상할 올릴 존호의 망단자를 숙목(淑穆)으로, 효종 대왕(孝宗大王)에게 추상할 올릴 존호의 망단자를 흠천 달도 광의 홍렬(欽天達道光毅弘烈)로, 인선 왕후(仁宣王后)에게 추상할 올릴 존호의 망단자를 정범(貞範)으로 의정(議定)하여 상주(上奏)한 데 대해,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또 명성 황후(明成皇后)에게 추상할 올릴 존호의 망단자를 홍공(洪功)으로 의정하여 상주한 데 대해, 아뢴 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 또 황제에게 가상(加上)할 존호의 망단자를 외훈 홍업 계기 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으로 의정하여 상주한 데 대해,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또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가상할 존호의 망단자를 강수(康綏)로 의정하여 상주한 데 대해, 아뢴 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
예압(睿押)을 만들 때의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12월 31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이근명(李根命)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선원전(璿源殿)에 여섯 성인의 어진(御眞)을 모시면서도 제1실은 비운 채 열성조(列聖朝) 때에 미처 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오늘을 기다렸던 듯합니다. 영희전(永禧殿)의 제1실을 비운 것은 효종조(孝宗朝)의 은미한 뜻으로, 선원전의 제1실에 고황제(高皇帝)의 어진을 추봉(推奉)한다면 그 뜻은 한가지이고 신이 말한, ‘아마도 오늘을 기다렸던 듯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상고해 보아 설사 끌어댈 만한 규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폐하는 인정을 따르고 의리를 들어 첫 규례를 정함으로써 영원히 내려가게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끌어댈 만한 전례가 있고 또 그것을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는 만큼 마땅히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밤낮으로 살피고 이에 대하여 염려하실 것입니다.
신은 학식이 부족하니 국가의 고사(故事)와 전례(典禮)에 대해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논에 끼어들겠습니까마는, 지금 신이 말하는 것은 바로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고대하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생각하지 않고 호소하니, 선원전 제1실에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빨리 명을 내리시어 열성조 때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거행함으로써 조상을 생각하고 보답하는 뜻이 더없이 아름답고 훌륭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영전(影殿)에 추봉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어 짐이 일찍부터 생각을 하면서도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경의 상소를 보고나니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청한 것은 삼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태릉(泰陵)의 석물(石物)을 수리할 때에 나갔던 대신(大臣) 이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궁내부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이건하(李乾夏),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진(金奭鎭), 영선사장(營繕司長) 민강호(閔康鎬)이다.】 상이 이르기를, "근심하던 끝에 이제 공사가 준공되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겨울이어서 유회(油灰)가 굳지 않고 사초(莎草)가 쉽게 마를 것이니, 이것이 또한 근심스럽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한 겨울의 공사에는 과연 성상의 말씀처럼 근심스러운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관(齋官)들을 신칙하여 언 땅이 녹은 다음에 유회를 바른 것과 사초를 입힌 것을 편리한 대로 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이 올린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합문(閤門) 밖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원전(璿源殿) 제1실에 빈 방이 있는데, 짐의 생각으로는 과연 숙종(肅宗) 무진년(1688) 남전(南殿)의 전례를 원용하여 고황제(高皇帝)의 어진(御眞)을 모사하여 봉안(奉安)하려고 하는데, 대신과 장례원 당상 의견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선원전에 고황제의 어진을 미처 모시지 못한 것은 사실 역대 임금들의 미처 시행하지 못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선대의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려는 것은 조상들을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생각에서 나온 것인 만큼 신은 천만 번 우러러 흠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진은 어느 본을 옮겨 모사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희전(永禧殿), 경기전(慶基殿), 준원전에 모신 본(本) 가운데 준원전본이 제일 처음으로 옮겨 그린 것 같으므로 이 본을 옮겨 그리려고 한다. 선원전에 봉안한 익황제(翼皇帝)의 경인본(庚寅本) 어진 상축(上軸)에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번에 고황제의 영정(影幀)을 모사할 때 보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완하여 봉안한다면 폐하의 효성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宗廟)에는 다섯 번의 대제(大祭)가 있는데 추존한 이후에 역대의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해 본 결과 세모제(歲暮祭)는 있으나 납향(臘享)은 없었다. 추존하는 예를 진행한 후 마땅히 세모제를 지내야 할 것이나, 납향을 지낸지가 오래 된 만큼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데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천자는 천자의 예법을 쓰는 만큼 세모제는 지내지 않을 수 없지만, 납향까지 합쳐서 말한다면 여섯 번의 대제가 있게 되므로 이것은 예가 번거롭게 될 걱정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전(祀典)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감히 분명히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납향을 납향이라 하는 것은 납향에 종묘에 천신(薦新)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납향에는 단지 천신하는 예만 행하고 세모에 대제를 지낸다면 1년에 다섯 번의 대제를 지내기는 마찬가지니, 폐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청명제(淸明祭)는 있으나 한식제(寒食祭)는 없다. 이제부터 종묘, 전(殿), 능(陵), 궁(宮), 원(園)에 지내는 한식제는 청명제로 고쳐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성인이 예법을 정하면서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신은 더없이 우러르게 됩니다. 한식제를 청명일에 지내는 것은 역대의 전례에 부합될 듯 합니다." 하였다. 이어 장례원 경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상이 이르기를, "명빈(䄙嬪)의 사판(祠版)과 숙빈(肅嬪)의 사우(祠宇)는 대(代)가 다한 만큼 신주를 들어내야 하겠지만 영영 들어 내지 않는다는 뜻을 본 가에 통지하라." 하였다.
【원본】 43책 39권 10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3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상이 이르기를,
"근심하던 끝에 이제 공사가 준공되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겨울이어서 유회(油灰)가 굳지 않고 사초(莎草)가 쉽게 마를 것이니, 이것이 또한 근심스럽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한 겨울의 공사에는 과연 성상의 말씀처럼 근심스러운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관(齋官)들을 신칙하여 언 땅이 녹은 다음에 유회를 바른 것과 사초를 입힌 것을 편리한 대로 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이 올린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합문(閤門) 밖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원전(璿源殿) 제1실에 빈 방이 있는데, 짐의 생각으로는 과연 숙종(肅宗) 무진년(1688) 남전(南殿)의 전례를 원용하여 고황제(高皇帝)의 어진(御眞)을 모사하여 봉안(奉安)하려고 하는데, 대신과 장례원 당상 의견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선원전에 고황제의 어진을 미처 모시지 못한 것은 사실 역대 임금들의 미처 시행하지 못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선대의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려는 것은 조상들을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생각에서 나온 것인 만큼 신은 천만 번 우러러 흠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진은 어느 본을 옮겨 모사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희전(永禧殿), 경기전(慶基殿), 준원전에 모신 본(本) 가운데 준원전본이 제일 처음으로 옮겨 그린 것 같으므로 이 본을 옮겨 그리려고 한다. 선원전에 봉안한 익황제(翼皇帝)의 경인본(庚寅本) 어진 상축(上軸)에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번에 고황제의 영정(影幀)을 모사할 때 보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완하여 봉안한다면 폐하의 효성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宗廟)에는 다섯 번의 대제(大祭)가 있는데 추존한 이후에 역대의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해 본 결과 세모제(歲暮祭)는 있으나 납향(臘享)은 없었다. 추존하는 예를 진행한 후 마땅히 세모제를 지내야 할 것이나, 납향을 지낸지가 오래 된 만큼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데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천자는 천자의 예법을 쓰는 만큼 세모제는 지내지 않을 수 없지만, 납향까지 합쳐서 말한다면 여섯 번의 대제가 있게 되므로 이것은 예가 번거롭게 될 걱정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전(祀典)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감히 분명히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납향을 납향이라 하는 것은 납향에 종묘에 천신(薦新)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납향에는 단지 천신하는 예만 행하고 세모에 대제를 지낸다면 1년에 다섯 번의 대제를 지내기는 마찬가지니, 폐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청명제(淸明祭)는 있으나 한식제(寒食祭)는 없다. 이제부터 종묘, 전(殿), 능(陵), 궁(宮), 원(園)에 지내는 한식제는 청명제로 고쳐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성인이 예법을 정하면서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신은 더없이 우러르게 됩니다. 한식제를 청명일에 지내는 것은 역대의 전례에 부합될 듯 합니다."
하였다. 이어 장례원 경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상이 이르기를,
"명빈(䄙嬪)의 사판(祠版)과 숙빈(肅嬪)의 사우(祠宇)는 대(代)가 다한 만큼 신주를 들어내야 하겠지만 영영 들어 내지 않는다는 뜻을 본 가에 통지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중신(重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렸는데 고황제(高皇帝)의 어진(御眞)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할 것이니, 의절(儀節)은 장례원(掌禮院)에서 마련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고황제의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할 때 준원전의 어진본(御眞本)을 옮겨 그릴 것이다. 받들어 오는 의절은 장례원에서 마련하여 거행하되 날짜는 음력 3월 10일 경으로 택하여 들이라. 사체가 중대한 만큼 도감은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이라고 부르고 당상과 낭청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선원전에 모신 익황제(翼皇帝) 경인본(庚寅本) 어진 상축(上軸)에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번에 영정을 모사할 때 함께 보완하도록 도감에서 잘 알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영희전 영건도감(永禧殿營建都監)을 영정모사도감에 합설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방금 대신과 장례원 당상에게 물어보았지만 태묘(太廟)를 추존한 뒤의 사체가 더없이 중요한 만큼 이제부터 세모 대제(歲暮大祭)를 지내며 납일(臘日)에는 단지 천신(薦新)의 예만 거행하라. 그리고 종묘와 전(殿), 능(陵), 궁(宮), 원(園)의 한식제(寒食祭)도 역대의 전례(典禮)대로 청명일(淸明日)에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영희전 영건도감 도제조(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에, 특진관(特進官) 민영환(閔泳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진(金奭鎭), 정3품 이헌영(李𨯶永)을 제조(提調)에 임용하였다. 특진관 오정근(吳正根)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였으며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장석룡(張錫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즈음 들리는 말에, 신의 이름이 다섯 유생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의 첫 번째에 나왔으며 심지어 후원(喉院)에서 봉입하였다고 하므로 저도 모르게 놀랍고 두려워 심골(心骨)이 다 섬뜩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세상일에 어두워 조정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령 한두 가지의 어리석은 의견을 올릴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10년 동안 국가의 경조사에 달려 나간 적이 없는데다가 지금은 또 지은 죄를 해명하느라 겨를이 없으니, 어떻게 감히 분수에 넘게 문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성상의 총명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한다면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명색이 재상 반열에 있는 만큼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단독으로 상소를 봉진(封進)했어야 할 것이지, 어떻게 꼭 서울에서 노니는 고약한 젊은 것들에게 손을 빌리고 이름을 빌려주어 연명으로 된 상소를 곧바로 올리게 하겠습니까? 신은 먼 지방에 있어서 소본(疏本)을 보지 못한 만큼 진술한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야기한 것이 옳아도 신이 한 말이 아니고 이야기한 것이 그르다 하더라도 신이 한 말이 아니며 그것은 경박하고 잡된 무리들이 칙임관(勅任官)의 이름을 빌려 미친 소리를 허투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근래에 인심이 흉측해져서 글을 위조하는 일이 종종 나타납니다. 시사를 논의하는 상소는 더없이 신중한 것인데 여든이 된 늙은 신의 이름까지 거리낌 없이 빌려다 제멋대로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엄한 곳에 올리니, 어찌 옛날도 없었던 처음으로 보는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들의 죄를 따지면 자연히 해당하는 형률이 있으므로 신이 구태여 누누이 시비를 가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늙은 몸으로 죽지 않고 구차스럽게 세상에 이름을 두어 한갓 무뢰배들의 도적질과 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의 이름이 제 자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지만 조정에서는 재상의 반열에 속해 있는데 신이 변변하지 못한 탓으로 조정 관리들에게 큰 수치를 끼쳤으므로 땅에 엎드려 두려워하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감히 사실에 근거해서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굽어 살피시어 위조한 앞의 상소를 속히 물리치시고 경하하는 반열에 나가지 못한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말 경의 말과 같다면 또한 한 세대의 변고이다. 사람이 무엄하고 거리낌 없는 것이 어쩌면 이런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여섯 명의 선비들은 법부(法部)로 하여금 사유를 엄히 따지고 조율(照律)하여 처벌하도록 할 것이다. 경하하는 반열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형편상 그렇게 된 것이니, 경은 이처럼 인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39권 끝】
【원본】 43책 39권 10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36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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