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0권, 고종37년 1900년 2월

싸라리리 2025. 1. 3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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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양력

【음력 경자년(庚子年) 정월 2일】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태묘(太廟)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하겠다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마지못해 따른다고 비답하였다. 이어 오늘 서계는 섭행(攝行)으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원본】 44책 4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3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태묘(太廟)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하겠다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마지못해 따른다고 비답하였다. 이어 오늘 서계는 섭행(攝行)으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궁내부대신서리 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가 삼가 아뢰기를,
"수경원(綏慶圓) 정조제(正朝祭)의 헌관(獻官)인 농상공부 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 김용순(金容純)은 제때에 대령하지 않아 재관(齋官)이 대신하여 거행하였으니, 사체로 볼 때 너무도 황송합니다. 해당 헌관은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하는데 본부(本府)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피지 않고 채워 차임한 겸장례(兼掌禮)도 경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사전(祀典)은 소중한 일이기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당 제관(祭官)을 우선 면직하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징계하도록 하고 제관을 차임한 겸장례도 면직하라."
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비방이 오는 것은 물론 달갑게 받겠으나 전번에 정부(政府)의 논의는 평소에 생각하던 바가 아닙니다. 그 본래의 일로 말하자면 본부(本部)에서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전후로 청의(請議)한 것은 모두 정부의 논의를 거쳐 상주하여 재가(裁可)를 받은 것이고, 또 청의한 것도 애초에 신이 한 바가 아닌데 근거 없이 없는 허물을 들추어내었으니, 고의적으로 배척하려 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의논을 내놓는 것은 사가(私家)에서 대화하는 것과는 달라서 전혀 몰랐다고 핑계되면서 태연히 벼슬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된 것도 헤아리지 않고 우러러 숭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 살피어 속히 체차하심으로써 직책을 중하게 하고 여론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정부의 논의는 내가 모르는 바이지만 경의 상소를 보고 대략 그 취지를 알았다. 이것은 필시 그 원인을 찾아 바로잡으려는 생각에서였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단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논의를 갑자기 중지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고의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으로 굳이 지목할 필요가 있는가? 경은 개의치 말고 즉시 나와서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일 양력

궁내부대신서리 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가 삼가 아뢰기를,
"어제 종묘(宗廟) 춘향 대제(春享大祭)의 서계(誓戒)할 때 잘못을 저지른 일에 대해 폐하께서 하문하심은 전에 없던 일이라 매우 놀랐습니다. 해당 장례원 여창과 주사(掌禮院臚唱課主事) 이태두(李兌斗)에게 면직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서계(誓戒)할 때의 잘못을 저지른 일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비답하기를,
"제사 의식이 중요한 것은 실로 해원(該員)의 거행에 착오가 있었던 데서 연유하는 것이지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스스로 인혐(引嫌)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일이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대신(大臣)이 장례원(掌禮院) 관원에 대한 처분을 매우 난처하게 여기고 있다. 해당 관원을 면직시킨 것을 특별히 분간(分揀)하고 1개월 봉급을 삭감하라."
하였다.

 

2월 3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차자를 올려, ‘태묘(太廟)에 책보(冊寶)를 추상(追上)하는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친히 행하겠다고 하신 명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잠시 제사를 지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경의 간절함이 이와 같으니, 내일 친히 책보를 올린 후에 궁궐로 돌아오겠다. 춘향 대제는 마땅히 섭행(攝行)하겠으나 인정과 예법상 서운한 일이다."
하였다. 이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대신(大臣)의 차자가 이와 같으니, 내일 책보를 친히 올린 후에 궁궐로 돌아오겠다. 춘향 대제는 대신을 보내어 섭행하되 일체를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마련하며 제관(祭官)도 그대로 쓰며 백관(百官)들도 입참(入參)하라."
하였다.

 

법부(法部)에서 투비(投畀) 죄인 조병식(趙秉式)의 정배소(定配所)의 주본(奏本)과 관련하여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미 대신(大臣)의 계(啓)가 있었으니 특별히 석방하라."
하였다.

 

2월 4일 양력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서 전알(展謁)하고 인조 대왕(仁祖大王), 인열 왕후(仁烈王后), 장열 왕후(莊烈王后), 효종 대왕(孝宗大王),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데 따른 책보(冊寶)를 친히 올리고 이어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본 후 궁궐로 돌아왔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서 예를 거행하였다.

 

2월 7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의 상소문을 보니, ‘근거없는 허물을 들추어 내고 고의적으로 배척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이 자초한 것으로 어찌 자질구레하게 겨루면서 구차하게 변명하겠습니까? 지난번 외부에서 청의(請議)한 문제를 전적으로 주무자(主務者)를 책망한 것은 일이 전도(顚倒)되어 오늘의 폐단이 되었음을 면치 못합니다. 그 폐단을 막을 대책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습니까?
신이 비록 감히 기회를 따라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나 또한 문제에 따라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여러 동료들과 의논하고 원인을 참작하여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점점 더 직무에 소홀하게 되어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하여 사람들의 비방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이같은 형편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관리들 반열에 있을 수 없으므로 오직 문을 닫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일생동안 조용히 지내기로 마음먹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의 인자한 도량으로 불쌍히 여기어 신속히 신의 본직과 겸직을 체차(遞差)시키고 이어 유사(有司)에 명하여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말소시켜 버림으로써 생성해 주시는 은택을 베풀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이미 외부 대신에게 내린 비답에 다 말하였다. 지금이 참으로 어느 때라고 사직하는 글을 갑자기 바치는가. 반드시 이처럼 심하게 인혐할 필요없으니 즉시 나와서 사무를 봄으로써 짐을 도울 방도에 더욱 힘쓰라."
하였다.

 

2월 8일 양력

정3품 신응선(申應善)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9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데 따른 책보(冊寶)를 친히 올렸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삼가 듣건대 황태자께서 미령(靡寧)하다고 하니, 청컨대 입진(入診)하여 탕제(湯劑)를 의정(議定)하도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마 체한 것 같다. 탕제는 자내(自內)에서 의정할 것이니 굳이 입시(入侍)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방금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윤승(曺潤承)의 질품서(質稟書)를 보니, ‘피고 박희택(朴喜宅)의 안건을 심리한 결과 피고의 처 5촌 조카 김영진(金英鎭)이 일본에 갈 때 피고가 직접 김영진의 집에 가서 작별하면서 부탁하기를, 「근래 풍문(風聞)에 의하면 박영효(朴泳孝)가 장차 귀국하려고 한다는데 그대가 일본에 가서 만약 박영효가 돌아오는 기일을 알게 되면 먼저 통지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김영진이 일본에 간 후에 7, 8차례 편지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형편을 낱낱이 말한 것은 형적을 숨길 수 없으니, 《대전회통(大典會通)》 금제조(禁制條)의 「나라의 사정을 누설한 자」의 법조문을 적용하여 유삼년(流三年)에 처하고, 피고 강성형(姜成馨)과 윤세용(尹世鏞)은 무술년 10월경에 일본에 도망갔던 이규완(李圭完)과 황철(黃鐵)이 이현(泥峴)에 있는 일본인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강성형은 바로 이규완의 매부로 도망친 강호선(姜浩善)과 함께 여러 번 이규완의 숙소에 가서 만났고 또 고발한 사람 신창희(申昌熙), 이민직(李敏稷)과 함께 가서 만났는데, 이규완과 황철이 신창희, 이민직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두 분을 서로 만난 것이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부하 병정들을 거느리고 대궐문으로 들어가 150명으로 하여금 대궐문을 지키게 하고, 자객(刺客) 30명이 결탁하여 곧바로 들어가 우선 각전(各殿)을 보호하되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사람들 중 항거하는 자는 죽이고 각 전은 경복궁(景福宮)에 옮겨 모실 것이며, 각대(各隊)의 영관(領官)과 위관(尉官)들은 모두 파면시키고 하사(下士)와 병졸로 하여금 승급시켜 준다면 필시 저절로 감복하여 심복이 될 것입니다.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간사한 무리들은 잡아 신문할 것이며 정부를 조직하는 성사(成事) 몇 달 후에 도성을 평양(平壤)으로 옮기면 다른 나라의 침범을 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윤세용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던 무술년 9월경에 도망중인 이규승(李珪承)과 함께 귀국하던 길에 마관(馬關)에서 박영효를 만났고, 우리나라 형편에 대하여 보고 듣는 것마다 암호로 박영효에게 전보를 쳤던 것은 피고 등의 진술과 신창희, 이민직의 고발이 명백합니다.
강성형은 《대전회통》 추단조(推斷條)의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 임금을 배반하여 정리상 매우 유해한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율을 적용하여 종신 유형(流刑)에 처하며, 윤세용은 《대전회통》 금제조의 「나라의 실정을 누설한 자」의 율을 적용하여 유삼년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각각 원래 의률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강성형은 지도(智島)에 유배하고 윤세용은 고금도(古今島)에 유배하고 박희택은 고군산(古群山)에 유배하였다.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오정근(吳正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 이주영(李胄榮)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10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구주(口奏)로 예후(睿候)를 진찰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이 두려운 일인 줄 전혀 모르고 조마조마한 심정을 무릅쓰고 아뢰었는데, 폐하의 비지(批旨)를 받고 보니 지난날 의정부(議政府)의 논의를 반복하여 설명해 주었는데 내용이 간곡하였습니다. 대체로 취지를 알았다고 하유하시고 마음속에 두지 말라고 깨우쳐 주신 것이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듯 하였습니다.
진실로 밝은 해와 달이 구석구석 비추고 하늘과 땅이 유감없음을 아나 돌이켜 보건대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폐하의 전례없는 은택을 입는 단 말입니까? 신은 두 손을 모으고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스럽고 황공하여 참으로 더는 감히 길게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참정(參政) 김성근(金聲根)의 상소를 보니 ‘지난번 외부에서 청의(請議)한 일을 가지고 전적으로 주무자를 책망하여 전도(顚倒)됨을 면치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신의 생각에는 그때의 주무자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고 바로 파면해야 한다는 말을 아뢰어 신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크게 전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미 전적으로 책망한 것을 전도되었다고 하는 그 말투를 보면 한결같이 비방의 실체를 나누려는 것 같지만 오히려 아직도 무엇이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신은 반드시 그것을 판별하여 분명하게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정부의 체면으로 말하면 참으로 원인을 거슬러 궁구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문서를 조사하여 그 전말을 잘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따져서 경계할 만한 것이 있는 곳은 견책하거나 파면시키거나 유배 보내거나 귀양보내면 저절로 공정한 의논이 있게 되므로 해부(該部)에서는 응당 책임지고 반성하면서 모든 관리들은 서로 바로잡아주는 아름다운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사태가 어떠한가는 논하지 않고 마치 숨은 죄인을 적발하듯이 하고, 주무자가 누구인가는 살피지 않고 장가(張哥)의 관(冠)을 이가(李哥)에게 씌우려고 하는데, 사태를 말하면 본래 책망할 것도 없고, 주무자로 말하면 신은 그 사람이 아니니 만약 조금이라도 사리를 분간하는 사람이 본다면 어찌 기가 막혀 웃지 않겠습니까?
신은 원래 수양이 없고 세상에 믿음을 얻지 못하여 경멸하는 말이 서로 공경해야 하는 동료들에게서 나오게 하였으니, 스스로 돌이켜 볼 때 부끄러워 죽고 싶습니다. 차라리 직무에 태만하였다는 죄를 받을지언정 감히 벼슬자리에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 의정부를 따라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려 해도 한계에 막혀서 비록 예의와 염치를 버리고 버젓이 나가려고 해도 형편상 어쩔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일찍이 예사(禮使)의 말석(末席)에 있었는데 만약 오로지 윽박지르기만 하여 마침 품은 뜻을 빼앗는다면 조정에서 신을 대하는 것이 너무도 각박하게 될 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저 곤충이나 짐승처럼 비루해서 염치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진실로 소인들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술책이지만 소와 말을 매어 놓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듯 하는 것도 또한 밝은 세상에서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정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하늘이 비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각각 본성대로 자라듯이 신도 또한 덕화 속의 한 사람이니 어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해주고 길러준 은택을 감축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신을 가엾이 여겨 신속히 내쫓아 파면시키고 버릇없고 기탄없는 신의 죄를 다스리어 법질서를 엄숙히 하고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날 비답에서 이미 나의 심중을 말하였는데 사직하겠다는 글을 다시 올렸으니, 너무하지 않은가? 의정부에서 의논을 거쳐서 아뢰어 결재한 것은 경도 그 규례를 알 것이다. 반드시 의견이 있을 때마다 아뢰고, 아뢸 때마다 윤허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이 문제는 잠시 의견을 채용하였다가 옳지 않아서 그만 둔 것에 불과하다. 하필 이미 잠잠해진 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장황하게 하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직무를 보고 지체된 안건들을 정리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재작년 7월의 옥사 중 도망친 죄인 안경수(安駉壽)가 지금 경무청(警務廳)에 자수하여 잡아 두었습니다. 평리원(平理院)으로 하여금 심리하여 처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2일 양력

정2품 김석근(金晳根), 종2품 한기동(韓耆東), 이중하(李重夏)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되, 한기동은 칙임관(勅任官) 1등에, 김석근과 이중하는 칙임관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14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일본 원양 어업 회사(日本遠洋漁業會社) 사람인 카와기타칸시치〔河北勘七〕에게 포경(捕鯨)을 허락하였다. 【전라(全羅) 한 도(道)를 제외하고 경상(慶尙), 강원(江原), 함경(咸鏡) 3개 도는 바닷가에서 3리 이내에 포경 구역을 긍정(肯定)하였다.】


【원본】 44책 4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41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수산업-어업(漁業)

 

군부 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에게 경무사(警務使)를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가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과 정전(正殿)을 이건(移建)하는 공사를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각실(各室)의 이안(移安)과 고유(告由)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이안은 음력 3월 11일로 좋은 날을 가려서 거행하되 먼저 고유제(告由祭)를 같은 달 초6일에 청명절(淸明節) 제사와 함께 지내면서 축문(祝文) 중 이 내용을 글로 만들어 첨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제문은 마땅히 내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2월 16일 양력

철도 국장(鐵道局長) 이인영(李寅榮)을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에, 종2품 장봉환(張鳳煥)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17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가서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 데 따른 책보(冊寶)를 받았다. 황태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였다.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았다. 황태자도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에 와보니 슬픔이 더욱 배가 된다. 태자가 친히 책보(冊寶)를 올리는 예를 행할 것이니, 짐은 친히 보고 예가 끝나기를 기다려 재전(齋殿)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였다.

 

황태자가 존호를 추상(追上)하는데 따른 책보(冊寶)를 경효전(景孝殿)에 올렸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조동면(趙東冕)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 김학진(金鶴鎭)을 시종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농상공부 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 오상규(吳相奎)를 철도 국장(鐵道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2월 18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서 친히 제사를 지내고 황태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별다례(別茶禮)를 행할 때 황태자가 배참(排站)하여 예를 행하였다.

 

2월 19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조서(詔書)와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의 조서(詔書)에,
"예로부터 제왕가(帝王家)에서 공렬(功烈)이 있고 장수를 누리면 반드시 존호를 올려 영원히 후대에 전하는 것은 단지 옛 전적(典籍)에서만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열성조의 성헌(成憲)에도 있었다.
삼가 생각건대 인조 헌문 열무 명숙 순효 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은 영무(英武)한 자질로 큰 운수를 타고 나서 나라를 넓히고 윤리를 다시 바로잡았다. 나쁜 운수를 물리치고 곤경을 수습한 결과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다.
명덕 정순 인열 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는 숨은 공로로 궁중을 다스리고 남모르게 대책(大策)를 도왔으므로 교화는 궁중에 퍼졌고 경사는 자손들에게 미치었다. 자의 공신 휘헌 강인 정숙 은덕 장열 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德莊烈王后)는 지극히 어질고 공경스러우며 매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웃어른에 대한 봉양이 융숭하였고 온 나라에 덕화가 널리 퍼지었다.
또한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명의 정덕 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은 용맹과 지혜를 타고 났으며 예법을 회복하는 데에 뜻을 두었고 한 질의 《춘추(春秋)》를 빛나는 해와 별처럼 여기었다. 조정에서 현준(賢俊)한 이들과 은밀히 꾀하여 화살대와 쇠막대처럼 하였으나 대의(大義)를 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더없이 열렬한 뜻은 영원한 후세에 자랑 할만 하다.
효숙 경열 명헌 인선 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는 중궁전(中宮殿)으로 계실 때는 나라 원수를 갚는 일을 도왔고 왕대비로 계실 때는 자손들을 거느리는 즐거움을 누리었으며 곧고 조용한 자태는 부드러우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아, 짐은 선조들의 덕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였으며 간고함을 다 겪으면서 나라를 일으키기에 다난(多難)하였는데 천명(天命)을 새롭게 받아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두 성조(聖朝)의 남긴 뜻과 일을 추억하자니 감격과 사모가 더욱 더해진다. 그리하여 모든 관리들에게 물어보고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여 위로는 하늘에 있는 조상 신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려 하였다.
지난번 태자가 상소하여 짐의 올해 나이가 쉰 고개에 오르게 되었다 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고 경축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왕업을 일으켜 자손에게 전한 그 공적과 덕행은 3대(三代)에서 찾아보아도 이처럼 큰 적이 없습니다. 4대의 선조를 추존하여 하늘에 배향하였으며 모든 예절이 구비되어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잘 살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과장하여 칭송한 것이 역시 지나쳤다. 설령 말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늘과 조종(祖宗)이 보살펴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짐이 무슨 공로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백성들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으로 보아 형식만 일삼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두 번 세 번 사절하고 다만 포고할 것만 허락하였더니 태자가 또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고 여론이 다같이 더욱더 간절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였으나 명분과 의리를 생각해볼 때 짐은 실로 부끄럽다.
아, 명헌 숙경 예인 정목 홍성 장순 정휘 장소 단희 수현 의헌 태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端禧粹顯懿獻太后)는 보령이 칠순(七旬)이 되었으므로 우리 왕가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따라 잔치를 차려 자그마한 정성이나마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 깨끗한 풍도와 아름다운 덕화는 금자로 찍고 옥돌에 새겨 전한다 해도 만 분의 일도 찬양할 수 없다.
또한 생각건대 효자 원성 정화 합천 명성 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明成皇后)는 국모 지위에 30년 동안 있으면서 만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꽃다운 생각과 예의 범절은 옛날의 어진 왕비처럼 아름다워서 좋은 운수와 경사가 집중되었으나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짐의 마음은 더욱더 슬프고 태자의 사모하는 마음이 갈수록 간절하므로 이번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할 때 아울러 추숭하려 하니 이 역시 옛법을 따르는 것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음력으로 올해 정월 초6일에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인조 대왕(仁祖大王)에게는 ‘개천 조운 정기 선덕(開天肇運正紀宣德)’이라는 존호를, 인렬 왕후(仁烈王后)에게는 ‘정유(正裕)’라는 존호를, 장렬 왕후(莊烈王后)에게는 ‘숙목(淑穆)’이라는 존호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에게는 ‘흠천 달도 광의 홍열(欽天達道光毅弘烈)’이라는 존호를, 인선 왕후(仁宣王后)에게는 ‘정범(貞範)’이라는 존호를 추상(追上)하였다.
같은 달 초10일에는 삼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책보를 받들어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는 ‘강수(康綏)’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였다.
같은 달 18일에는 태자가 책보를 받들어 짐에게 ‘외훈 홍업 계기 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고, 이어 19일에는 명성 황후(明成皇后)에게 ‘홍공(洪功)’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대체로 짐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만백성이 힘입게 되는 법이니, 모든 백성들은 골고루 혜택을 입을 것이다. 이에 혜택을 특별히 은혜를 널리 베풀어 반포하는 사항을 아래에 조목별로 알린다. 【이하는 생략함】 아, 종묘에서 제례악을 연주하니 마치 덕음(德音)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고, 넓은 궁중에서는 무궁한 복록을 누리며 오래 살게 되리라. 이에 온 세상에 조령을 고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원본】 44책 4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4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아, 종묘에서 제례악을 연주하니 마치 덕음(德音)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고, 넓은 궁중에서는 무궁한 복록을 누리며 오래 살게 되리라. 이에 온 세상에 조령을 고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에 책보(冊寶)를 태자가 친히 올리고 강신제(降神祭)의 예를 마치고 나니 감회가 더욱 깊다. 마땅히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니, 제조(提調) 이하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 경사는 참으로 태자의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짐의 마음이 기쁘다. 마땅히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정월 초하룻날에 축하드릴 때와 전당에 앉아서 축하를 받았을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이하, 태실(太室)에 책보(冊寶)를 직접 올릴 때의 예의사(禮儀使) 이하,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데 따른 책보를 올릴 때의 정사(正使) 이하, 태묘(太廟)에서 대제(大祭)를 섭행(攝行)할 때의 초헌관(初獻官) 이하, 경효전(景孝殿)에 책보를 올릴 때의 예의사 이하, 직접 제사를 지낼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 경사를 경축하고 축하를 드릴 때의 각 차비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겸장례(兼掌禮) 비서승(祕書丞) 윤창섭(尹昌燮), 대거(對擧) 비서승(祕書丞) 김갑규(金甲圭)·이남규(李南珪), 도감 제조(都監提調) 서상우(徐相雨), 예의사(禮儀使) 조정희(趙定熙), 도청(都廳) 이의로(李義魯)·조성재(趙性載), 독옥책관(讀玉冊官) 이용직(李容稙)·김사철(金思轍), 독옥책관(讀玉冊官) 권응선(權膺善)·정우묵(鄭佑默), 선전관(宣箋官) 민상현(閔象鉉), 계상 집례(階上執禮) 민형식(閔衡植), 예모관 첨사(禮貌官詹事) 이주영(李胄榮), 대거(對擧) 부첨사(副詹事) 이용태(李容泰)·윤달영(尹達榮)·이호성(李鎬性), 상례(相禮) 조동완(趙東完), 별간역(別看役) 강건(姜湕)·김효익(金孝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매번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너그러운 은전을 베풀게 되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과 경사를 함께 누리고자 함이며, 미심스러운 죄에 대해서 가벼운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에게 은택이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공평하게 하지 않고 도리어 요행수를 열어 놓게 되면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유사(有司)의 관리들은 다 모여서 정확히 처리하되 육범(六犯)외에는 실정을 참작하고 형적을 살펴서 석방할만한 자는 놓아주고 죄의 등급을 감해 줄만한 자는 감해주어 참작하여 집행하여 한편으로는 원한을 풀어주고 한편으로는 화기(和氣)를 인도하라."
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김규홍(金奎弘)은 학부 대신(學部大臣)에, 부장(副將) 민병석(閔丙奭)은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부장 민영환(閔泳煥)은 원수부 회계국장(元帥府會計局長)에, 참장(參將) 이학균(李學均)은 원수부 기록국장(元帥府記錄局長)에, 부장 조동윤(趙東潤)은 원수부 검사국장(元帥府檢査局長)에, 부장 이종건(李鐘健)은 원수부 군무국장(元帥府軍務局長)에 임용하고 동시에 임시서리(臨時署理) 농상공부 대신의 사무를 보도록 명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영규(閔泳奎)는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이용직(李容稙)은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비서승(祕書丞) 이용태(李容泰)는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이주영(李胄榮)·김학수(金鶴洙)·이원규(李源珪)·박제빈(朴齊斌)은 궁내부 특진관에, 부첨사(副詹事) 이호성(李鎬性)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2월 20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민병한(閔丙漢)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오장선(吳長善)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2월 21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윤용구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은 임시서리 법부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보도록 명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정낙용(鄭洛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갑오년(1894) 이래로 기강이 퇴패해지고 역적들이 거리낌 없이 일어나더니 심지어는 을미년(1895) 8월 변란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참으로 천하 만고(天下萬古)에 없었던 일이며 나라의 운명이 극도로 위태로워진 것입니다. 이는 법률이 해이해져서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이 없는 소치 때문입니다.
아, 저 안경수(安駉壽)는 그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이었는데, 관여하여 아는 것이 없는데 군란이 일어났다면 이는 규율이 없는 것이고 관여하여 알고 있는데도 대궐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면 이는 음모를 일으킨 것입니다. 규율이 없거나 음모를 일으킨 것은 모두 법에 따라 죽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가 비록 스스로 해명한다 해도 반드시 이 중의 어느 하나에 해당할 것인데, 아직도 천지사이에서 용서되고 있는 것은 또한 법이 엄하지 못한 탓입니다.
게다가 그는 고약한 말과 나쁜 성질을 고치지 않고 반역할 생각을 몰래 품고서 신하로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꾸며냄으로써 폐하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도록 꾀하였고 태자까지도 무함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품고 있는 속마음을 밝혀낸다면 그 죄는 전보다 더할 것인데, 그 죄가 드러나게 되자 국외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요즘 흉악한 무리들은 걸핏하면 망명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제 또 버젓이 얼굴을 들고 거만하게 스스로 나타났으니 그가 만약 죄가 없다면 어째서 그 당시에 재판하여 사실을 밝혀 죄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3년만에야 감히 나타났겠습니까. 그의 속마음에는 또한 필시 추측하지 못할 흉모가 있을 것이니 잘 살피소서.
법관은 마땅히 법에 근거하여 용서 없이 명확히 처단하여야 하는데도 도리어 서로 비호하고 혹은 보석(保釋)을 허락하기도 하고 혹은 술판을 벌려 모든 사람들을 분개하게 하고 심지어는 백성들이 의견을 올리게까지 하였으니, 오늘날의 법관과 같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명철하게 판단을 내리시고 위엄을 떨쳐 안경수라는 자에게 신속히 반역한 자를 다스리는 법조문을 시행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시고, 마땅히 해당 법관은 엄격히 밝혀내어 징계하여서 조정의 규율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말은 충성스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의리란 본래 무궁한 것이고 법을 맡은 사람이 있고 법조문도 매우 엄격하다. 자연히 법에 의거하여 판결하여 법의 기강을 밝힐 것이니 의결(議結)하기 전에 아직 이처럼 번거롭게 아뢸 필요가 없다."
하였다.

 

2월 2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명헌 태후전(明憲太后殿)께 진작(進爵)할 때 조금이나마 정리와 예절을 펼 것이니, 날짜는 음력 5월 10일 전으로 택하여 들이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진작할 때에 궁내부(宮內府)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고, 명헌태후궁 대부(明憲太后宮大夫)가 일체를 맡아보게 하라."
하였다.

 

2월 2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홍릉(洪陵)에 석물(石物)을 배설(排設)하는 일은 명령이 내릴 때까지 다시 기다릴 것이며 병풍석(屛風石)이 떨어져 나간 곳을 우선 먼저 보수하도록 도감(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부첨사(副詹事) 김만수(金晩秀)와 종2품 김갑규(金甲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2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진작(進爵)하는 경축을 이미 명하였으나 지금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근심 때문에 풍성하게 거행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을 자내(自內)에서 여러 차례 하교가 있었다. 정리와 예에 있어서는 비록 대단히 섭섭한 일이지만 겸손하게 사양하는 태후의 뜻을 우러러 헤아려서 부득이 진작하는 일을 물려서 하려 하니 명령을 기다렸다가 거행하라."
하였다.

 

외부대신 임시서리 의정부찬정(外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 민종묵(閔種默)이 아뢰기를,
"본부(本部)의 사무는 매우 번잡한데 고문 노릇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궁내부 찬의관(宮內府贊議官) 미국인 샌즈〔山島 : Sands, W.〕에게 서리로 그 사무를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2월 26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용구(尹用求)는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 조동면(趙東冕)은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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