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양력
【음력 경자년(庚子年) 4월 3일】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서 종묘(宗廟)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고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원본】 44책 4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서 종묘(宗廟)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고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에 나와보니 슬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동궁이 제사를 섭행하려 하니, 짐이 친히 지켜보다가 제사가 끝나면 환궁(還宮)하려고 한다. 시위(侍衛)는 입직군(入直軍)으로 마련하고 그 밖의 의절(儀節)은 모두 그만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내일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영정(影幀)을 본떠 그린 초본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따라가서 참여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 부(府)와 부(部)의 대신과 의장(議長)은 찰석하라."
하였다.
5월 2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5월 3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서 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한 대신(大臣)과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모사도감 제조(摹寫都監提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이다.】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급히 흥덕전(興德殿)에 가서 열성조(列聖朝)의 어진(御眞)을 봉심하니, 안녕하였습니다. 어진을 본떠 그리는 일이 점차 끝나가고 있는데 표제(標題)를 고쳐 쓰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책문(冊文)을 올린 다음에 응당 표제를 고쳐 써야 하였는데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매우 송구스러웠다. 이제 태조(太祖)의 영정을 봉안(奉安)할 때에는 짐(朕)이 직접 쓰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의 제1실과 제6실, 선원전(璿源殿)의 제3실, 제4실, 제5실의 표제(標題)는 지난해 책보(冊寶)와 존호(尊號)를 올린 다음 응당 고쳐서 봉안(奉安)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여 항상 매우 황송하였다. 지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影幀)을 봉안할 때에 짐(朕)이 옛 표제의 오른쪽에다 친히 쓸 것이니, 장소는 따로 설치할 필요 없이 모두 전내(殿內)에다 하고, 도감(都監)은 모사도감(摹寫都監)과 합설(合設)하라. 영희전에 봉안하는 날과 선원전에 이안(移安)하는 날에 거행하겠다."
하였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병석(閔丙奭)에게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를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시강원 일강관 첨사(侍講院日講官詹事) 김만수(金晩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판리공사(辦理公使) 민형식(閔衡植)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불러 올린 평양대(平壤隊)를 훈련할 것이니, 내일 평성문(平成門) 안에 대령하라. 시위(侍衛)와 배위(陪衛), 제반 의절(儀節)은 모두 그만두라."
하였다.
정1품 이재면(李載冕)을 완흥군(完興君)에 봉(封)하였다.
5월 5일 양력
평양 진위대(平壤鎭衛隊)를 불러 올려 훈련할 때의 영관(領官)과 위관(尉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대대장(大隊長) 구연항(具然恒)은 가자(加資)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이어 편수하는 일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친족을 보살펴 주는 훌륭한 뜻입니다. 자손들이 만년토록 내려가게 하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을 한결같이 대하여 은택이 미치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임금 집안의 후손으로 되어 성대하고 훌륭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하며 감격스럽고 칭송하는 마음을 누를 길 없습니다. 종친(宗親)의 고사(古事)를 살펴보건대, 그중에 수백 년 동안 공의(公議)가 막혀 신원(伸寃)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폐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의리에 있어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기에 외람되이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고(故)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은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아들인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아들입니다. 사도병마도통사(四道兵馬都統使)로 임명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자 세조(世祖)께서는 글을 써서 내려 칭찬하기를, ‘충성은 해를 꿰뚫고 기개는 강산도 돌려놓을 만하다.’라고 하시고 ‘정충(精忠)’이란 공신 칭호를 주고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에 제배(除拜)하였는데,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소인 무리들의 모함으로 끝내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 정간공(正簡公) 이선(李選)이 상소를 올려 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였고, 당시의 정승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이단하(李端夏)도 모두 그의 억울한 사정에 대하여 절절하게 아뢰어 마침내 그의 공로와 작위를 회복해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덮을 만한 공로로서도 아직 시호(諡號)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무풍군(茂豐君) 이총(李摠)은 바로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아들인 온녕군(溫寧君)의 손자인데 아비는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 형은 용성군(龍城君) 이원(李援), 아우는 한산 도정(韓山都正) 이정(李挺), 화원 도정(花原都正) 이간(李揀), 금천 도정(錦川都正) 이변(李抃), 청양 도정(靑陽都正) 이건(李揵)입니다. 이들 부자 형제가 모두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배워 모두 유교에서 굉장한 이름을 날렸습니다. 무오년(1498)에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과 여러 사람들이 앙화(殃禍)를 당하였을 때에 무풍군은 청백한 절개와 좋은 인망으로 인하여 간사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아 7부자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사실이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유집(遺集)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중종(中宗)께서 왕위에 오른 다음 무풍군의 7부자에게 모두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우산군과 무풍군이 비록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시호가 덕망에 맞지 않았으며 여러 아들인 용성군·한산 도정·화원 도정·금천 도정·청양 도정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황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억울함을 품은 채 풀지 못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한탄할 뿐만 아니라 실로 조정의 흠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선원보략》을 이어 편수할 때에 구성군 및 무풍군의 7부자 문제에 대한 옛 사적을 널리 모아가지고 그 사실에 따라서 시호를 내리고 위차(位次)를 영구히 옮기지 않는 은전을 시행함으로써 당시의 비통한 원한을 위로하고 백세토록 영원히 명성이 전해지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서 참작하여 재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생각건대, 나라의 긴요한 일은 재정(財政)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 탁지부(度支部)의 문부(文簿)가 여러 해 동안 정리되지 않아서 뒤섞인 것이 많다. 일체 조사하여 말끔히 마감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해부(該部)로 하여금 별도로 위원(委員)을 정하여 갑오년(1894) 이후 각 항목의 문부들을 조목에 따라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5월 7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영정모사도감 영희전영건도감 도제조(影幀摹寫都監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본 도감(都監)에서 경비에 대해서는 되도록 절약하여 쓰도록 이미 아뢰어 재결을 받았으나 지금 영정을 본떠 그리는 일과 토목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탁지부(度支部)에서 이미 획급(劃給)해 준 돈으로는 완공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은화(銀貨) 4만 원(元)을 탁지부에서 더 지출하여 경비에 계속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8일 양력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관찰사(觀察使)가 특별히 포상(褒賞)한 군수(郡守)는 모두 1등을 올려 주어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이미 아뢰어 재결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각도(各道)에서 보고된 치적이 뛰어난 남원 군수(南原郡守) 이태정(李台珽),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범교(李範喬), 연일 군수(延日郡守) 이익호(李翼鎬)는 승등안(陞等案)에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김응수(金應洙)를 내부 회계국장(內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9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삼가 금년 음력 정월 1일에 반포한 조지(詔旨)의 내용을 받들어 읽고, 육범(六犯) 이외의 유배 죄인(流配罪人) 김중렬(金仲烈) 등 3인(人)은 감등(減等)하는 안건입니다. 이를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5월 10일 양력
진전(眞殿) 제4실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모신 다음 고유(告由)하고,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환안(還安)할 때에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나아가라."
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아뢰기를,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의 사적(事蹟)은 역사책에 명백히 실려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논하지 않더라도 임신년(1872)에 족보를 수정할 때 작위와 시호(諡號)를 주고 계후(繼後)를 세운 것은 나라의 체통으로 따져 볼 때 떳떳한 법에 어긋나므로 이제는 모두 시행하지 말고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개정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베푼 은전(恩典)과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신이 함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신년의 《선원보략》 중에서 계후가 문란하게 된 것은 이미 보고하고 재결을 받아서 바로잡았으니 군(君)으로 봉한 작호를 이어받은 것도 자연히 거론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이달 6일에 ‘탁지부(度支部)의 문서가 여러 해 동안 정리되지 않아서 뒤섞인 것이 많으므로 일체 조사하여 말끔히 마감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으니 해부(該部)로 하여금 따로 위원(委員)을 정하여 갑오년(1894) 이후 각 항목의 문서들을 조목대로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이 삼가 조칙(詔勅)에 따라 본부(本部) 및 다른 부와 원(院)의 관원 중에서 문서와 계산에 치밀하고 밝은 자 12인(人)을 따로 위원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서를 조사하는 일은 필시 크고 번다할 것이므로 본부의 주사(主事) 가운데서 8인을 함께 뽑아서 삼가 갖추어 개록(開錄)합니다. 【탁지부 회계국장(度支部會計局長) 이건영(李健榮), 참서관(參書官) 엄주완(嚴柱完), 재무관(財務官) 오보영(吳普泳)·이준상(李濬相)·윤태관(尹泰觀)·염중모(廉仲模),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이규석(李圭錫), 군부 관방장(軍部官房長) 한진창(韓鎭昌), 과장(課長) 신재영(申載永), 법부 회계국장(法部會計局長) 조례석(趙禮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오상규(吳相奎), 참서관(參書官) 김사묵(金思默),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 윤영태(尹榮兌)·송희완(宋熙完)·김희연(金禧演)·고진환(高鎭煥)·김순정(金淳貞)·이규백(李圭白)·김윤주(金潤柱)·이종덕(李鍾德)이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궁내부의 관제 중 비서 승의 정원 4인(人)을 5인으로 증액하는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秘書丞四人以五人增額改正件〕〉을 포달(布達) 제 57호로 반포하였다.
5월 1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御眞)을 모사(摹寫)하고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진을 보완하는 일은 모두 한시 바삐 끝내야겠다. 음력 18일에 대내(大內)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고,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선고사유제(先告事由祭)를 음력 15일에 작헌례와 겸하여 설행하고, 고동가제(告動駕祭)는 친히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제문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준원전의 영정을 도로 봉안할 때는 마땅히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하다가 도성문 밖에서 지송(祗送)겠다."
하였다.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민형식(閔衡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 김재용(金在容)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한(沈相漢)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고(故)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영조(英祖)께서 한창 정사를 빛낼 때 의리를 강조하여 밝힘으로써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하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았으나 끝내 불순한 무리들에게 배척을 받아 흑도(黑島)에 두 번이나 귀양 갔었습니다.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당시의 형편에서 벼슬길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제수될 때마다 벼슬을 사양하고는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당시 김귀주(金龜柱)와 김한록(金漢祿)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내어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었을 때에 낯빛을 바로 하고 바른 말로 간악한 행위를 끝내 물리치니, 흉악한 무리들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들과 조카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지금 죄에 연루되어 죽지만 너희들 중에 뒷날에 가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게 되면 나의 오늘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故)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서연(書筵)에서 강론하고 예문관에서 붓을 잡았으며 그 당시 위급한 순간에서도 직분과 지조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피눈물까지 흘리면서 끝없이 울부짖었습니다. 애타게 간할 때에는 부들 자리에 엎드려 간한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단(史丹)보다도 더 충성스러웠고, 높은 관리를 꾸짖을 때에는 칼로 처단할 것을 청한한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의 의리보다도 더 엄격하였으나 처음에는 흑도로 귀양 갔다가 다음번은 제주도(濟州道)에 귀양 갔습니다. 정유년(1777)의 은혜로운 명령이 쏟아지는 비처럼 내렸으나 계묘년(1783)에 올린 글은 눈서리처럼 삼엄하여 큰 의리를 굳게 지킴으로써 은혜로운 대우가 지난 역사에 없었습니다.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와 같고 서슬 퍼런 칼날 위에도 올라설 만하다.」라는 말은 이미 정조(正祖)께서 직접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에 실려 있습니다. 이 두 신하와 같은 사람은 기강을 부지하고 의리를 드러냈으므로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대 후에 가서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개인 사당에서 영원히 제사지내게 하는 것은 덕을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원칙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내려 보내서 널리 채택하고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에 대해서는 영구히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恩典)은 본원(本院)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上)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만교(李萬敎)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옛날에 영조께서 임금 자리에 있고 장조(莊祖)께서 정사를 대리할 때에 고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무인년(1758) 8월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세자 폐위(廢位)에 관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傳敎)를 받고는 함인정(涵仁亭)에 입시(入侍)하여 임금의 옷자락을 끌면서 받은 전교를 도로 바쳤는데, 울음소리와 눈물이 뒤섞이고 말과 기색이 격렬하니 임금은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임오년(1762) 5월에 그는 모친상을 당했던 까닭에 상복 바람으로 대궐문 밖에서 열흘 동안이나 울부짖었으니,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신묘년(1771)에 또 도승지로서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정성 왕후(貞聖王后) 신위(神位)의 요자리 밑에 감추었다가 정조 계축년(1793)에 영의정으로서 진정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금등명간편이 비로소 반포되었습니다. 영조께서 일찍이 세손(世孫)에게 이르기를, 「채제공은 나에게는 진실한 신하이고 너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께서 그의 뇌문(誄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도승지는 바로 내 앞에서 비 오듯 피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아무 해 의리의 핵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충성과 의리를 다한 데서 가장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彛章)은 영조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장조가 정사를 대리하던 초기에 제일 먼저 강관(講官)으로 뽑혔습니다. 병자년(1756) 5월에 낙선당(樂善堂)에 불이 난 다음날 승지(承旨)로서 입시하여 임금이 깨닫도록 힘껏 아뢰었는데, 「아뢴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는 하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임오년에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무함(誣陷)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힘껏 구핵(鉤覈)헐 것을 청함으로써 끝내 법대로 처형하였습니다. 당일에 이르러서는 도승지로서 입시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간한 결과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군율(軍律)을 시행하라는 명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대궐 밖으로 물러나왔다가 급한 소식을 듣고는 다시 들어가서 어의(御醫)를 불러 청심원(淸心元)을 올리게 하고는, 「만약 이 일 때문에 죄가 된다면 내가 스스로 받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자 울면서 아뢰기를, 「신의 손목을 자를지언정 신의 손으로는 차마 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임금의 마음이 좀 풀려서 이르기를,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이이장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이장이 빈청(賓廳)을 들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기를 쓰고 간한 것이 3가지 문제인데 세자의 위호(位號)를 즉시 회복하자는 것과 상사(喪事)를 유감없이 치르자는 것과 훌륭한 시호(諡號)를 올리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이장이 충성과 절개를 다한 내용이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에 명백히 실려 있는데, 이것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이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곧은 절개는 응당 백 대를 내려가면서도 옮길 수 없는 공정한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글을 유사(攸司)에게 내려 보내어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의정(擬定)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지킨 데 대해서는 영원토록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겠는데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하(奏下)하신 경상북도(慶尙北道) 유학(幼學) 엄주호(嚴柱鎬) 등의 상언(上言)을 방금 보니, ‘신의 선조인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는 단종(端宗) 때에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입니다. 단종 대왕(端宗大王)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死六臣)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문득 깨어나 울면서 매우 슬퍼할 때에 엄흥도가 산마루에서 바라보고 말하기를, 「청령포(淸泠浦)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봐야겠다.」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가서 엎드려서 기침을 하니, 울음을 그치고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戶長)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밤마다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세상을 떠나자 수령(守令)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염(斂)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 바로 울부짖으면서 관(棺)과 이불을 자체로 마련해서 염을 해가지고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 자기 손으로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의 장릉(莊陵)입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그의 충실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추증(追贈)하고 정문(旌門)을 명하였으며, 창절사(彰節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충신단(忠臣壇)에서 제사를 함께 지내게 하였습니다. 우리 황상에 이르러서도 병자년(1876)에 와서는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시어 공로에 보답하는 성조(聖朝)의 융성함을 유감없이 펼치셨으나, 아직 미처 시행하지 못한 은전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고 절개가 뛰어난 데서는 사육신과 동등하지만 사육신의 후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도 성대한 은전을 입는데 신의 선조만은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옛 신하의 충성과 의리의 강직함을 생각하여 속히 신의 선조에게도 영구히 제사지내게 하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중대한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2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이헌영(李𨯶永)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병성(趙秉聖),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강찬(姜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민형식(閔衡植)을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13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망분향(望焚香)을 행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달 음력 19일에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지송(祗送)하고서 곧바로 정릉(貞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며, 그 다음 홍릉(洪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 제문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동궁(東宮)이 홍릉에 나아가 전알할 것인데 이것은 그의 효성스러운 생각과 예의를 숭상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음력 19일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것이며 제문은 동궁이 지어 내릴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행행(幸行) 때 시위(侍衛), 배위(陪衛), 종승(從陞) 외의 배종하는 백관(百官)은 소례복(小禮服)에 칼만 차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첨사(詹事) 김재용(金在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이호성(李鎬性)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이용태(李容泰)를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차자를 올려, ‘영정(影幀)을 모시고 가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접때 조정에 나온 것은 3년 동안 계속 바라던 끝이었으므로 정말 만족하게 여기었는데 갑자기 또 돌아갔으니 매우 섭섭하였다. 이번에 영정을 모시고 가도록 명한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병이 이러하다니 매우 염려스럽고 억지로 먼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은 예절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므로 영정을 모시고 가는 일은 마땅히 변통해야겠다. 그러나 진전(眞殿)에 환안(還安)하는 일과 남전(南殿)에 이봉(移奉)하는 일은 공경하고 삼가하여야 할 처지이므로 오랜 덕망을 지닌 원로가 아니고서는 그 일을 신중히 하여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경은 부디 나의 뜻을 이해하고 몸조리를 잘하여 길을 떠나 전례(典禮)를 마침으로써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5월 14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수릉(綏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환안(還安)할 때에 의정(議政)이 배진(陪進)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준원전의 영정을 본떠 그리는 일이 끝나서 준원전에 도로 봉안할 길일(吉日)을 정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나라에 더없는 경사이다. 그런데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나라를 세우던 거룩한 마음을 추억하면 마땅히 뜻을 보이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다.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해도(該道) 도신(道臣)을 단단히 경계하여 부(府)와 군(郡) 백성들의 고통 중에서 구제할 만한 것을 가려서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달 음력 17일에 자내(自內)의 예로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영정을 장식하는 것을 친히 봉심(奉審)하겠다. 동궁(東宮)이 배참(陪參)하는 일을 규례대로 마련하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및 2품 이상은 입첨(入瞻)하라."
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정희(趙定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법무 국장(法務局長) 윤덕영(尹德榮)을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조한국(趙漢國)은 특별히 징계를 면제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5월 15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수릉(綏陵) 기신제(忌辰祭)의 망곡(望哭)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종1품 민응식(閔應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태의원 경(太醫院卿) 이정로(李正魯)를 궁내부 특진관에, 특진관(特進官) 조정희(趙定熙)를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16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칙령(勅令) 제17호, 〈외부의 관제 중 참서관 3인(人)을 5인으로, 주사 12인을 16인으로 개정하는 데 관한 건〔外部官制中參書官三人以五人主書十二人以十六人改正件〕〉칙령 제18호, 〈함경북도 길성부를 폐지하고 성진부를 복설하는 게 관한 안건〔咸鏡北道吉城府廢止以城津府復設件〕〉칙령 제19호, 〈경상남도 고성군 구역 내의 전 통제영 구역을 진남군으로 설치하는 데 관한 안건〔慶尙南道固城郡區城內前統制營區城以鎭南郡設置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장례원(掌禮院)의 주본(奏本)으로 인하여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문제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칙령(勅令)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 신하는 단종(端宗)께서 ‘자규(子規)’ 시를 읊을 때에 강물을 건너 단종에게 나아갔고 깊은 밤에 홀로 찾아가서 위로하였으며 마침내는 직접 염(斂)을 하고 업고 가서 자기 손으로 장사를 지냈으니,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라고 할 만합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그의 충직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을 세우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게 하는 등 극진히 대우하였지만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여 충성에 보답하지 못한 일은 참으로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미처 하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다행히 장례원의 신하가 논주(論奏)하였으니, 구태여 본부(本府)에서 다시 번거롭게 자세히 진술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영구히 제사지내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례원의 주본으로 인하여 네 신하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문제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고 칙명을 내리셨습니다. 신하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예법은 나랏법에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고(故)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彛章)은 당일(當日)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을 각오로 힘껏 간하였고 급한 소식을 듣고서는 의원을 불러 청심환(淸心丸)을 올리게 하였으며,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였을 때는 자기의 팔을 자를지언정 차마 쓰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고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직분과 지조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애타게 간한 충성은 부들 자리에 엎드려 간한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단(史丹)보다도 더 지나쳤고 높은 관료를 꾸짖은 의리는 칼로 처단할 것을 청한한나라 성제(成帝)때 주운(朱雲)보다도 더 엄격하였으나 처음에는 흑도(黑島)에, 다음 번에는 제주도(濟州道)에 귀양 갔습니다.
고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은 상복 차림으로 대궐문 밖에서 소리 내어 울면서 목숨이 끊어질 뻔하였고 임금의 위엄을 무릅쓰고 피를 토하는 상소를 올려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비로소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의리를 지키고 바른 말을 하다가 흑도에 재차 귀양 갔으며 돌아와서는 문을 닫아 걸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 네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할 것이 없으며 백대 후에 가서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다행히 재상이 상소를 올려 청하고 장례원의 신하가 논주하였으니, 구태여 본부에서 다시 번거롭게 자세히 진술할 것을 기다릴 것 없이 영구히 감동시키고 충성에 보답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제사 지낼 대수가 다하기 전이라도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명한 전례는 많이 있었습니다.
또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의 높은 충성과 진심은 실로 임오년에 절개를 지킨 사람 중에 첫 번째 가는 사람으로서 이미 나라에서 제사지내도록 명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충성에 보답해 주는 때에 모두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특별히 베푸는 은전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다섯 신하가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한 것은 백 대를 내려가도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아뢴 대로 모두 영구히 제사지내는 은전을 베풀고 그 사손(祀孫)은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헌영(李𨯶永)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서상조(徐相祖)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첨사(詹事) 이호성(李鎬性)과 종2품 남규희(南奎熙)를 궁내부 특진관에,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병익(趙秉翊)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경무사(警務使) 서상룡(徐相龍)을 법부 법무국장(法部法務局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이유인(李裕寅)을 경무사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창원 감리(昌原監理) 안길수(安吉壽)를 옥구감리 겸 옥구부윤(沃溝監理兼沃溝府尹)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동래 감리(東萊監理) 이준영(李準榮)을 무안감리 겸 무안부윤(務安監理兼務安府尹)에, 외부 참서관(外部參書官) 한창수(韓昌洙)를 창원감리 겸 창원부윤(昌原監理兼昌原府尹)에 임용하고 모두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탁지부(度支部)에서 통신원(通信院)을 새로 설치하는데 드는 비용 28만 5,983원(元)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해 줄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채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영국인(英國人) 허치슨〔轄治臣 : Hutchison, W. du. F.〕에게 은산(殷山) 금광 채굴권(金鑛採掘權)을 허가하였다. 【마갱 회사(摩賡會社) 대리인(代理人)이다.】
【원본】 44책 40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7면
【분류】외교-영국(英) / 광업-채광(採鑛)
5월 17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도성문(都城門) 밖으로 나아가 지송(祗送)하고 이어 정릉(貞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나서 차례로 홍릉(洪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모두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고, 홍릉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칙령(勅令)을 내렸는데도 잊고서 전하지 않아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위관(尉官) 이해원(李海元)은 우선 면직시키고 5년 동안 귀양 보내라. 또 검사 총장(檢査總長) 조동윤(趙東潤)으로 말하자면 일이 중대한 것은 생각지 않고 일처리를 매우 망측하게 하였으니, 또한 우선 면직시키고 3년 동안 귀양 보내라."
하였다. 군부(軍部)에서 배소(配所)를 고군산(古羣山)으로 정하였다고 상주하니, 재가(裁可)하였다.
정릉(貞陵)과 홍릉(洪陵)에 친히 제사지낼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와 동궁(東宮)이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 홍릉의 제조(提調) 이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병익(趙秉益), 예모관 첨사(禮貌官詹事) 조병익(趙秉翊), 상례(相禮) 이중오(李重五), 대축(大祝) 한흥교(韓興敎), 별배종(別陪從)인 의관(議官) 이계하(李啓夏)·민영헌(閔泳憲)·민치은(閔致殷)·안기현(安基鉉), 검사(檢事) 한동리(韓東履), 참위(參尉) 민대식(閔大植)·이민식(李敏軾)·백남복(白南福)은 모두 가자(資加)하였다.
5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御眞)과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진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하고 환안(還安)할 때,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영성문(永成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할 것이다. 동궁(東宮)이 배참(陪參)하는 일은 규례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달 음력 24일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선원전 제1실에 봉안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어진을 각실(各室)에 환안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할 것이다.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조병익(趙秉翊)을 궁내부 특진관에, 김만수(金晩秀)를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長) 김영준(金永準)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민철훈(閔哲勳)을 판리공사(辦理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19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에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 종각(鍾閣) 앞길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할 것이다. 봉안한 다음 봉안제(奉安祭)는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이 아뢰기를,
"삼가 광무(光武) 4년 4월 29일에 유학(幼學) 이항선(李恒善) 등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원(本院)에 주하(奏下)하신 것을 받들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선원가현록(璿源加現錄)》을 살펴보았더니,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래에 ‘순성군(順城君) 이개(李𧪚)의 첩(妾)의 맏아들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이 라고 기재되어 있고,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오천군 이사종의 기사 옆에 주석(註釋)을 달기를, ‘어머니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참의(參議) 정종성(鄭宗誠)의 서녀(庶女)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자손들이 억울한 사정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라의 문헌과 개인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보니, 숙종(肅宗)과 영조(英祖)의 두 왕조 때에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한 문의와 변론(辨論)이 있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유(李濡)·김창집(金昌集)·민진원(閔鎭遠)이 모두 이에 대하여 헌의(獻議)하였는데, 그 요지는, ‘정종성의 아들 정보(鄭保)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모두 반역한 법조문에 적용되어 순성군(順城君)의 처는 첩으로 강등(降等)되었는데, 오천군이 정씨의 소생이므로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 《선원록(璿源錄)》에는 순성군은 정씨에게 장가들었으며 또 순성군은 첫 부인 신씨(申氏)와 같은 산기슭에 따로 장사지내고, 후실인 정씨는 순성군과 함께 나란히 쌍무덤으로 장사지냈다고 씌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씨가 순성군의 첩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는 내용입니다. 고 대제학(大提學) 윤봉조(尹鳳朝)가 지은 양녕 대군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이개는 포은(圃隱) 선생의 아들 정종성의 사위인데 포은이 우리 왕조가 창업하던 시기에 목숨을 바쳤는데도 양녕 대군이 그와 사돈을 맺었으므로 선비들이 칭찬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충문공(忠文公) 민진후(閔鎭厚)는 양녕 대군의 묘지명(墓地銘)에 이르기를, ‘순성(順城)은 대군(大君)으로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아들인 정종성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더욱 칭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다섯 사람은 모두 우리 왕조의 이름난 선비이며 재상들인데 그들의 말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정씨가 첩이 아니고 본처라는 데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선원가현록》을 수정한 것은 숙종 5년이었고 정보(鄭保)의 집에서 원통한 사실을 푼 것은 숙종 25년이었으니, 《선원가현록》을 수정할 때에는 정씨가 연좌되어 강등된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특별히 ‘첩’ 자를 쓴 것은 이 때문인 듯합니다만 감히 정확히 답할 수는 없습니다. 《선원속보》의 옆에 쓴 주석에 대해서는 여러 족보에 들어있는 많은 ‘서자(庶子)’를 고찰한 결과 생모(生母)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실려 있지 않았는데 이는 그 체제를 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오천군의 외갓집에 대해서만 이런 그릇된 예(例)가 있어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에게 모두 ‘서(庶)’ 자가 붙었습니다. 그동안 족보를 수정한 것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므로 누가 처음에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며 옛 글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또 정씨가 처인가 첩인가 하는 것은 다만 순성군이 예법을 갖추어 맞아들였는지를 따지면 될 것이고 그가 친정집에서 본처의 딸이었는지 첩의 딸이었는지 하는 문제는 깊이 따질 필요도 없으니, 옆에 쓴 주석에 이른 것은 군더더기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항선(李恒善) 등이 조상을 위하여 억울한 심정을 호소한 것은 매우 가엾은 일이니, 종친을 돈독하게 하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억울한 사정을 풀어 주는 정사를 베풀 것입니다. 지금 이름있는 여러 신하들의 정론(定論)에 근거하여 특별히 《선원보략》과 《선원속보》를 고쳐서 바로잡도록 허락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대군의 사손(祀孫)에 대해서는 이미 선왕(先王) 때에 명이 있었고 또 오천군의 유훈(遺訓)에도, ‘뒷날 자손들이 만약 제사를 지내는 문제로 다툰다면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항선 등이 올린 글에서도 이르기를, ‘신들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해도 조령(朝令)을 준수하고 선조의 훈계를 실추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므로 감히 제사를 지내는 문제에 뜻을 두지 않음은 귀신에게 물어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체(事體)로 따져 보더라도 다시 의논할 것 없이 제사를 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영조 때에 수교(受敎)한 대로 옛날처럼 양녕 대군의 둘째 아들 함양군(咸陽君) 이포(李𧦞)의 집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5월 20일 양력
고군산(古羣山)에 7년 동안 귀양보냈던 죄인 민영기(閔泳綺)를 방축향리(放逐鄕里)하라고 명하였다.
5월 21일 양력
비서 승(祕書丞) 정은조(鄭誾朝)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2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한 다음 이어 선원전(璿源殿)에 모시고 나아가 봉안(奉安)하고 환안(還安)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御眞)은 지금 이미 봉안(奉安)하고 작헌례(酌獻禮)도 치렀으니 매우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은 비록 시어소(時御所)와는 다르지만 선원전(璿源殿) 제1실을 증건(增建)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증건도감(增建都監)을 영희전영건도감(永禧殿營建都監)과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의 신본(新本) 어진을 지금 이미 선원전에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수백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우러러 볼 어진이 있으니 한없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 마땅히 뜻을 보이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니, 모사도감 도제조(摹寫都監都提調) 이하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5월 23일 양력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병성(趙秉聖)과 종2품 홍승목(洪承穆)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4일 양력
경무사(警務使) 이유인(李裕寅)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양력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방금 함경남도(咸鏡南道)의 진신(縉神)과 유생(儒生) 이과영(李果英) 등의 상언(上言)에 대한 계하 장본(啓下狀本)을 보니, ‘삼가 아룁니다. 본도(本道) 각군(各郡)의 향규(鄕規)는 옛날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함흥(咸興)에 머물렀을 때 향헌목(鄕憲目) 41조(條)를 직접 지으셨고 뒤이어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명을 받들어 계속하여 풍패 향록안(豐沛鄕錄案)과 향헌 56조를 지었으며, 또 향헌비(鄕憲碑)를 세우고 직접 쓴 것이 오늘까지 전하고 있으며, 이어 전후의 책자들을 도내의 열군(列郡)에 반포하였습니다. 시골 사람들 중에서 재능과 인망이 있는 자는 향장(鄕長)으로 차출하고 문예에 우수한 자는 교장(校長)과 양감(養監)으로 차출하고 무예에 익숙한 자는 훈청(訓廳)의 수석 무관으로 차출하였는데, 온 도내 사람들이 500년 동안 받들어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는 향임(鄕任)의 네 자리를 향장(鄕長) 한 자리로 바꾸고 장교(將校) 다섯 자리를 순교(巡校) 네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아! 저 장교와 교생(校生)의 무리들이 훈청(訓廳)의 수석 무관의 자리를 빼앗고 장의(掌議)의 명목을 더 설치하였으며 또 양감과 교장의 자리도 빼앗았으니, 500년 동안 내려오던 나라의 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새로 만든 규정에 있는 「양반과 평민에 구애받지 말라.」고 한 한 마디 말과 관련됩니다. 이것을 구실로 삼지만 양반과 평민이라는 말이 바로 지방 양반과 지방 평민 중에 지식이 많아서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가리킨 것인 줄도 모르고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에 거짓말로 호소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뢰한 하일청(河逸淸) 등은 향청(鄕廳)과 경의재(經義齋)를 부수는 행위까지 하였으니, 이런 자들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향읍(鄕邑)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들이 구실로 삼는 단서를 따져보면, 「양반과 평민에 구애되지 말라.」고 한 한 마디 말에 기인할 뿐입니다. 이에 감히 폐하 앞에서 상소를 올려 일제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위로 태조 고황제의 향헌을 만드신 뜻을 이어받으시고 아래로는 태조의 고향의 향규를 살피시어 장교와 교생들이 향임(鄕任)을 침범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키고, 내부(內部)에 명하여 「양반과 평민에 구애되지 말라.」고 한 한 마디 말을 삭제해 버리고 다시 규정을 만들게 함으로써 이 옛 고향의 선비들과 무인들이 그전에 하던 소임을 회복할 수 있도록 속히 은혜로운 명을 내려 보냄으로써 일제히 호소하는 뜻에 부응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교장은 풍속과 교화에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며 향임은 정무를 돕는 사람이니, 그 소임을 보면 신중하고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도(道)로 말하면 태조 고황제께서 직접 지은 향헌목을 준수하여 온 지 500년이나 되므로 더욱 특별히 그것을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방 제도 가운데 「양반과 평민에 구애되지 말라.」는 한 마디 말은 칙령에 실려 있으므로 선뜻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본부(本部)에서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순교나 교생의 무리들이 침범하고 핍박하는 것을 엄금하는 내용의 합의된 절목(節目)을 특별히 만들어 보냄으로써 한 군(郡)의 규범으로 삼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5월 26일 양력
첨사(詹事) 김만수(金晩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홍승목(洪承穆)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3품 윤필은(尹弼殷)을 동래감리 겸 동래부윤(東萊監理兼東萊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고황제(高皇帝)의 어진(御眞)을 선원전(璿源殿)에 새로 봉안(奉安)하고 익황제(翼皇帝)의 영정(影幀)을 보완하여 환안(還安)하고, 작헌례(酌獻禮)를 마침으로써 폐하의 효성이 크게 빛나니 신하와 백성들이 찬양하고 축하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은 외람되게도 중추원 의장의 자리에 올라 정사를 의논하는 직책을 맡은 처지로서 마침 본원(本院)에서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대해 비지(批旨)를 받지 못한 때를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칙임(勅任), 주임(奏任)의 여러 동료들이 감히 일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회의를 열 사람이 없어서 중추원의 문은 종일 닫혀 있습니다. 신 또한 작은 계책 하나 펴보지 못한 채 자리만 지키고 녹봉만 축낸 지 지금까지 몇 달째 되니, 어찌 감히 백성과 나라의 일에 대한 의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충역(忠逆)에 대한 중대한 법과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한 계기에 대해서는 국론(國論)이 일제히 분개하고 모든 사람의 말이 일치하고 있으므로 신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권형진(權瀅鎭)에 대한 일입니다.
아! 저 권형진은 바로 을미년(1895) 8월의 극악한 역적 중의 한 놈입니다. 안으로는 조희연(趙羲淵)의 모주(謀主)가 되고 밖으로는 정부(政府)에 있는 여러 역적들과 결탁하였으니, 반역한 죄상이 모두 드러났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성토할 수 있고, 죄악이 가득 찼으므로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광명한 세상이 다시 온 다음에는 외국으로 도망쳤으므로 나라의 법을 적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면서 그 놈의 살점을 도려내고 가죽을 벗길 생각을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이 그 놈의 마음을 깨우쳐주어 스스로 와서 자복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재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잠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저자에 내다놓고 처단함으로써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어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날 귀를 기울여도 법에 따라 처리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평범한 개인도 원망이 있으면 응당 원수를 갚는 법인데 더구나 을미년의 사건은 얼마나 큰 변란이었습니까? 홍릉(洪陵)의 풀과 나무도 슬픔을 머금고 태자의 옷깃은 눈물로 젖었습니다. 저 반역한 자들에 대해서는 한 번 붙잡기만 하면 가죽을 벗기고 마디마디 잘라서 죽인다 해도 사람들에게 맺힌 울분의 만 분의 일도 씻을 수 없는데, 지금 이미 붙잡아 놓고도 아직 며칠 동안 살려두고 있으니 당당한 대한(大韓)이 결국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로 되고 만단 말입니까? 또 권형진이 나타난 지 며칠 안 되지만 항간의 논의가 떠들썩하고 의혹과 울분이 뒤섞이는 것은 안경수(安駉壽)에 대한 사건을 질질 끈 그 전날의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경수의 사건은 신이 신문한 것이며 무술년(1898)의 계책은 바로 싹을 잘라버리는 조치였습니다. 그가 비록 도망갔어도 공초(供招)에서 증거가 명백하고 범죄 흔적이 수두룩한데 다만 음모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벼운 법조문을 적용하고 난언죄(亂言罪)로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난폭한 발언으로 해독을 많이 끼친 자에 대해서는 목을 벤다는 명백한 율문(律文)이 있고 수종(隨從)한 자나 지정불고(知情不告)한 자에 대해서도 모두 종신토록 유형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 우두머리로 된 자에 대해서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은 다시 심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사실과 맞지 않게 조사하였거나 이치에 어긋나게 논의하였다면 신이 응당 법을 잘못 적용한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넉 달이 지나도록 끌면서 처리하지 않고 잠잠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본원 전 의장 정낙용(鄭洛鎔) 등이 올린 연명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르기를, ‘말한 것이 충성과 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의리는 원래 끝없는 법이지만, 사법부에도 사람이 있으며 율례(律例)도 매우 엄하므로, 응당 법조문에 따라 재판하여 법과 기강을 밝힐 것이니 의논하여 결정하기 전에는 아직 이와 같이 번거롭게 청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므로 감히 다시 번거롭게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났는데도 끝내 결재하지 않으시니 공의(公議)가 어찌 격분하지 않으며 신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송사(訟事)도 오히려 지체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난폭한 역적의 범죄 정형이 명백한데도 지연시키면서 처결하지 않으시니,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고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임금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자를 보면 매가 참새를 쫓듯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매가 참새를 쫓을 때에 어찌 생각해 보거나 머뭇거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무례한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반역 음모를 꾸미고 무도하게 행동하여 무례할 뿐만이 아닌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안경수에 대한 사건 처리가 이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권형진에 대한 사건 처리도 장차 그러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사람들이 의심하고 여론이 들끓고 있으며 신사(紳士)들의 긴 상소가 날마다 의정부와 중추원에 들어오고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소곤거리는 말까지 항간에 퍼져서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황후를 죽인 역적이 있더라도 외국에 갔다 오기만 하면 법을 적용할 수 없게 되므로 반드시 도망치고야 만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 황후를 죽였는데도 역적에 대한 법조문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군신 간의 윤리가 영원히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짐승으로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는데 나라는 나라 제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망하는 화(禍)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신이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모두 한 목소리로 폐하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시어 신의 글을 법부의 신하에게 내려 보내어 속히 두 범죄자에게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함으로써 인륜을 펴시고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옥사를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진실로 법무와 중추원의 의견이 서로 맞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제 곧 거행할 것이니 번거롭게 청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해서는 사람으로서 강론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의 원수에 대해서는 신하로서 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이 세상에 난폭한 역적이 끝없이 많았지만 어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근년의 사건과 같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95) 8월의 변란은 아! 통탄스럽습니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가 닫히고 인륜이 허물어졌으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치고 누군들 뼈에 사무친 원한이 없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폐하의 세신(世臣)으로서 이 그지없는 변란을 만나 그 날에 죽지 않고 구차스레 이 세상에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이 역적들과 더불어 한 하늘을 이고 살고 있으니, 살아서는 태자 전하를 모시는 날에 무슨 낯으로 만나며 죽어서는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신령을 만나 무슨 말로 사죄하겠습니까?
대체로 갑신년(1884) 이후로부터 역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아! 저 안경수(安駉壽)는 바로 을미년의 역적 중의 한 놈입니다. 그는 그 때에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서 나라 안의 모든 군사의 행동이 그의 조종에 달렸었는데 그가 과연 알지 못하여 막지 못하였다면 이는 불명죄(不明罪)에 해당하고,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면 이는 불충죄(不忠罪)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여도 이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바야흐로 변란이 일어나던 밤에 훈련대(訓練隊)의 병정(兵丁)들이 열 명씩 백 명씩 무리를 지어 그의 집에 모였다가 마침내 곧바로 대궐 문으로 들어가자 궁중에서 변란이 일어났으니, 그가 군사를 풀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해 10월 마침 의로운 거사가 있었는데 그가 스스로 여기에 참여한 것은 한 때의 명의(名義)를 빌어서 8월의 죄상을 가리고자 한 것이니, 그의 심보를 따져 보면 교활하고도 음흉합니다. 또 무술년(1898) 5월에는 신하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제창하고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하다가 사람들의 눈초리가 번뜩이고 대중의 입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몰래 빠져나가 해외로 도망쳤습니다. 그가 만 리 밖에서 무슨 음모를 하였는지, 3년 동안에 누구와 결탁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번에 갑자기 태연하게 나타났습니다. 왕법(王法)이 있는 이상 마땅히 때를 기다리지 말고 처벌해야 할 것인데 어물어물 지체시켜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습니다. 법망이 서지 않은 것이 이미 말할 나위 없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역적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어떤 화근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역적 권형진(權瀅鎭)이 과연 근심하던 바와 같이 그 뒤를 이어 또 나타났으니 다른 역적이 계속하여 다시 나타날 날이 또한 멀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한 놈의 역적이 오고 내일 또 한 놈의 역적이 온다면 저들이 과연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오겠습니까? 아니면 처단을 받기 위해서 오겠습니까? 권형진의 흉악한 범죄가 어찌 우리나라에서만 드러나겠습니까? 이는 천하 각국에서 모두 알고 있는 것이며 모두들 말하기를,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으며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자입니다. 그는 미천한 자로서 권세 있고 중요한 자리를 가로채어 가지고 마침내 여러 흉악한 무리들과 더불어 한 통속이 되어 뱀처럼 사리고 지렁이처럼 엉켜 여러 가지 흉계를 꾸며 가지고 그 날의 변란을 빚어냈던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만고에 없는 극악한 대역적입니다. 전날에 자취를 감춘 것은 얼마나 음흉하며 오늘날 나타난 몰골은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그 전날의 심보를 가지고 오늘날의 종적을 본다면 행위가 못하는 짓이 없고 생각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 기회를 엿본 자가 어찌 안경수 한 놈뿐이겠습니까? 중간 다리를 타고 권세를 잡는 자가 장차 100명의 권형진으로 될 것입니다. 대체로 형법이라는 것은 천하에 공정한 것입니다. 있는 법을 가지고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법을 가지고도 적용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나라답게 하지 못하여 역적의 화근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은 외람되게 의정부에 있으면서 충성의 의분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어 감히 폐하께 다급한 목소리로 일제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안경수와 권형진을 속히 법부에 넘겨 시원스럽게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음으로써 이미 지나간 죄를 징계하고 닥쳐올 화근을 막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연명으로 진술한 것이 비록 공적인 분노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으나, 옛날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짐(朕) 또한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지금 범죄 사건에 대하여 한창 논의하고 있으니, 결론이 나기 전에 이와 같이 시끄럽게 청할 것 없다."
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 군부 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종2품 김중환(金重煥)이 꼬리를 물고 상소를 올려 안경수와 권형진을 죽여야 한다고 청하니,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5월 27일 양력
종2품 조한국(趙漢國)을 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평리원(平理院)에서 권형진(權瀅鎭)과 안경수(安駉壽)의 사건을 심리하였다. 선고문(宣告文)에,
"피고 권형진과 안경수의 안건(案件)을 검사(檢事)의 공소(公訴)를 거쳐서 심리하였다. 피고 권형진은 갑오년(1894) 7월에 이준용(李埈鎔)의 초청을 받고 가서 만나니 이준용이 피고에게 말하기를, ‘중궁 전하(中宮殿下)가 만약 세력 잃은 민씨(閔氏)들을 시켜 내란을 일으킨다면 기무처(機務處) 사람들은 반드시 일망타진되고 말 것이니 풀을 베되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피고가 그 뿌리를 물으니 이준용이 말하기를, ‘중궁 전하가 아닌가? 중궁 전하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리 개혁하려 하여도 반드시 성과가 없을 것이며, 그 뿌리를 없앤다 해도 또 다른 뿌리가 남아 있으면 결국 후환이 된다. 동궁 전하(東宮殿下)와 의화군(義和君)을 모두 제거한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피고는 그가 만고에 없었던 역적이라는 사실을 이 말을 듣고서 알았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 을미년 8월 사변의 하루 전에 피고가 조희연(趙羲淵),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일본인 삼촌준(杉村濬)의 초청을 받고 가서 그 이튿날 일어날 일에 대하여 듣고 그의 아우 이동진(李東鎭)과 조희연의 사촌 동생 조희문(趙羲聞)을 일본인을 따라 궐내에 따라 들어가게 하였으며 그 후 일본에 가서 숨었으나 그 죄를 모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돌아와서 처벌을 청했다고 한다.
피고 안경수는 갑오년 7월경에 이준용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찾아갔더니 이준용이 박준양(朴準陽),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앉아 있었다. 이준용이 피고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장차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 피고가 말하기를,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준용이 말하기를, ‘중궁 전하가 너희들을 죽이려 하니 풀을 베되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자 피고가 말하기를, ‘죄가 있으면 죽을 뿐이지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고 하였다. 이준용이 말하기를, ‘화근을 아주 없애는 일은 일본 공관(日本公館)에 가서 의논하라.’ 하니 피고는 거절할 수 없어서 거짓 승낙하고는 그 다음 날 일본 공관에 가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이준용이 말한 것은 끝내 의논하지 않고 돌아와서 이준용에게 말하기를, ‘일본 공관에 가서 의논하니 온당치 않다는 뜻으로 배척당하고 왔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피고는 흉악한 시해 역모에 대하여 즉시 고발하지 않고 재차 말함으로써 흉악한 역모가 끝내 실현되게 하였으니 중한 형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 피고는 무술년(1898) 4월에 황태자(皇太子)가 황제를 대리하는 사건을 주모하고, 군대와 결탁하여 러시아 공관〔俄館〕으로 통하는 뒷문을 굳게 지킨 다음 의견을 아뢰어서 윤허 받지 못하게 되면 황제를 위협해서라도 대리시키는 일을 기어이 성사시키려고 하였다가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죽던 살던 간에 본국의 법률에 의하여 처분 받으려고 지금 와서 자수하였다고 한다. 그 일에 대한 실제 증거는 피고 등이 진술한 자백이 명백하다.
권형진은 《대명률(大明律)》 〈적도편(賊盜編)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의 모반(謀反) 및 대역과 공모한 자는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지 않는 데 관한 율(律)에 따르고, 피고 안경수는 같은 조의 같은 율과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의 임금에게 불온한 말을 하여 정상으로나 사리로나 몹시 해로운 자에 관한 율에 따라 한 가지 죄목으로 판결하여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되, 선고한 즉시 집행한다."
하였다. 이는 법부 대신(法部大臣)이 추후에 상주(上奏)하였다.
하였다.
5월 28일 양력
일식(日食)이 있었다.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 경무사(平理院裁判長臨時署理警務使) 이유인(李裕寅) 등의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바라건대, 신들은 듣건대 옛말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사람들 누구나 죽일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춘추(春秋) 시대 이후로 역적 무리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아! 애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을미년(1895)의 변란은 천지가 열린 이후 만고(萬古)에 없었던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한 일입니다. 우리 대한(大韓)의 신민(臣民)으로 당일에 같이 죽지 못하고 질긴 목숨이 구차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홍릉(洪陵)을 쳐다볼 때면 피눈물이 눈앞을 가리며 초목도 슬퍼하고 하늘의 태양도 빛을 잃었습니다. 신들이 울분을 참고 원통함을 품은 채 울음소리를 삼키면서 가슴을 끓이며 밤낮으로 고대한 것은 기어이 흉악한 역적을 붙잡아 머리를 자르고 간을 도려내어 함께 통곡하면서 위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황후의 밝은 영혼에 고하고 아래로는 전국 동포들의 망극한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 조종(祖宗)의 영령과 천지의 신명께서 크게 분노하여 날뛰던 물고기가 결국 통발 속에 들어오는 날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은 자수한다고 핑계대고 태연히 귀국하였으니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들은 모두 잡아들이고 신문하는 직임과 사법(司法)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절치부심하면서도 규례에 구애되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죄인을 심리하기 시작하자 하루를 보내는 것이 한 해 같았습니다. 지금 두 역적들이 전후로 공모한 죄상이 자수하여 공초한 데서 모두 드러났으니 실정을 이미 알아냈고 죄안도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세상 천하에 어찌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절차를 기다려서 복수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분통이 터져서 미처 아뢰지 못하고 마음대로 교형(絞刑)에 처하는 경솔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제 손으로 복수한다면 죽더라도 광영이라고 여겨서 외람됨을 가리지 않고 거행하였으니, 법의 처분을 받기 위해 서로 와서 대죄(待罪)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상께서는 신들이 격식을 위반한 것과 관련하여 속히 죄를 다스리시어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법관(法官)이 법을 위반하였으니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 경무사(平理院裁判長臨時署理警務使) 이유인(李裕寅)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보니,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 두 역적이 그동안 공모한 흉악한 역적행위가 자수하여 진술한 내용에서 모두 드러났으니, 실정을 이미 알아냈고 죄안도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분통이 터져서 미처 아뢰지 못하고 마음대로 교형(絞刑)에 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두 사람이 범한 죄의 진상이 모두 드러났다면 법대로 선고하고 재가를 받아서 실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지레 먼저 처형하고는 방자하게 상소를 올리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도 나라에 제대로 된 법률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유인은 우선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유형(流刑) 10년에 처할 것이며, 판사(判事) 이인영(李寅榮)과 검사(檢事) 장봉환(張鳳煥)은 모두 수반(首班)으로서 직무를 그르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유형 3년에 처할 것이며, 검사(檢事) 태명식(太明軾)과 한동리(韓東履)도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1개월 감봉(減俸)하라.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으로 말하자면 관할하여 감독하는 지위에 있으니 만약 평소에 잘 통제하고 법도 있게 방비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또한 본관을 면직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내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법가(法駕)가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진(陪進)하고서 봉안(奉安)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행하겠다.’라는 명이 이미 있었으니 선대 임금을 추모하는 폐하의 한없는 효성에 대하여 심히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즘 날씨가 고르지 않아 무더위가 오고 폭풍이 부는데 이런 때에 수고롭게 거동하시는 것은 대성인(大聖人)께서 몸을 보호하시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숙종(肅宗) 무진년(1688)에 제1실의 어진(御眞)을 봉안할 때에 대신(大臣)만 보내어 섭행(攝行)하였으니 우리 왕조에서 이미 거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옛 전례대로 따르셔야 하겠기에 이에 감히 짧은 상소를 올려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로 조종(祖宗)의 떳떳한 규례를 헤아리시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시어 속히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이봉하는 의식은 사채(事體)가 신중히 해야 할 일이기에 짐(朕)이 반드시 직접 거행하여 나의 정성을 펴려고 하였으나 경이 이처럼 간절히 아뢰고 또 선대에 이미 진행한 전례를 끌어다 말하므로 마지못하여 따르기는 하겠지만 정리(情理)와 예절에 있어 매우 섭섭하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지영(祗迎)하고 배봉(陪奉)하는 절차는 대신(大臣)이 차자를 올려 간절하게 아뢰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겠다. 봉안(奉安)한 후에 봉안제(奉安祭)는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영정을 이봉한 다음 조 특진관(趙特進官) 조병세(趙秉世)와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이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오라."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방금 삼가 내리신 조칙(詔勅)을 보니,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 경무사(平理院裁判長臨時署理警務使) 이유인(李裕寅) 등이 미처 아뢰지 않고 적신(賊臣)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을 마음대로 교형(絞刑)에 처한 일로 하여 직임을 면직시키고 귀양 보내라는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신들은 생각건대, 안경수와 권형진 두 역적은 고금천지(古今天地)에 없었던 극악한 대역(大逆)이니 이른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도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며 사람마다 모두 죽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후에 걸쳐 공모하여 흉악한 짓을 감행한 실상이 자수하여 공초(供招)한 내용에서 모두 드러났으므로 충성스런 의분이 격동되어 참으로 잠시도 이 세상에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법관이 임금께 아뢰기 전에 먼저 처단한 것은 또한 떳떳한 본성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두 역적이 앞서 도망쳤다가 이제야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 태도의 변화무쌍한 것을 예측할 수 없으니 뜻밖의 변란이라도 생기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형률명례(刑律名例)》 제8조를 상고하면 죄인이 도주하거나 탈옥할 우려가 있으면 임금께 아뢰지 않고 바로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성헌(成憲)입니다. 그러므로 법관이 실로 법을 어긴 일이 없으니 폐하께서는 깊이 살펴보시고 여러 법관을 면직시키고 유형을 보낸 조칙을 환수(還收)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끌어댈 만한 율문(律文)이 있다 할지라도 죄수를 신중히 대해야 할 지위에서 경솔하게 행동한 잘못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겠다."
하였다.
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하고 온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이다.】 조병세(趙秉世)가 문안하였다. 이어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에 영정을 봉안(奉安)한 후에 봉심한 결과 안녕(安寧)하였다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비단 날씨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경의 차자로 인하여 마침내 명을 취소하기는 하였으나 정리(情理)나 예절로 보면 매우 섭섭하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미 숙종(肅宗) 때의 전례가 있으니, 직접 행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황자(皇子)를 돌아보며 아뢰기를,
"이 분이 황자이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들으니, 황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참으로 총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자가 약간 글자를 알고 또 묻는 말에 대답도 꽤 할 줄 아는데, 다만 낯설고 수줍어하기 때문에 이처럼 잠자코 있는 것이다. 또 태자를 공경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것보다 더하며 태자의 말은 한 마디라도 어기지 않고 따르는 것이 어릴 적부터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고시(告示)한 내용을 보고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 두 흉적이 이미 왕법(王法)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가 풀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조금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 반역죄에 대하여 능히 나라의 형벌을 바로 잡았으니 시원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법관은 마음대로 거행한 실책을 면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무술년(1898)의 조칙을 읽어보니, ‘다른 나라에 몰래 도망친 자에 대해서는 나라에 떳떳한 법으로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끌어다 시행하고 나라의 법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극악한 원흉에 대하여 어찌 잠시나마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도 그렇게 여긴다. 그들의 정상을 따져 볼 때 참으로 지극히 통분스럽다."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민종묵(閔鍾默)에게 법부 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5월 29일 양력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영희전영건도감 도제조(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 이하와 세 차례에 걸쳐 흥덕전(興德殿) 작헌례(酌獻禮)와 선원전(璿源殿) 작헌례 때의 찬례(贊禮) 이하, 영정(影幀)을 배진(陪進)한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提調) 민영환(閔泳煥)·이헌영(李𨯶永)·이용직(李容稙), 도청(都廳) 김덕한(金德漢)·신양균(申養均),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병성(趙秉聖)·정은조(鄭誾朝)·김태제(金台濟)·임영상(林永相), 대축(大祝) 윤찬(尹)·송태헌(宋台憲)·민광식(閔廣植)·서병선(徐丙宣)·이중태(李中泰), 예모관(禮貌官)인 첨사(詹事) 김만수(金晩秀)·이호성(李鎬性), 상례(相禮) 김영직(金永直)·한상학(韓相鶴), 별간역(別看役) 강건(姜湕)·장호진(張浩鎭)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아뢰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은 임진년(1892)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황실의 전례(典禮)에 써넣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직까지 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황송합니다. 지금 이어서 수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전에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에는 관청을 설치한 한 예도 있고 본원(本院)에서 거행한 예도 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본원에서 거행하되, 《선원보략》 교정 당상(校正堂上)과 교정 낭청(敎正郞廳)이 함께 맡아서 살피라."
하였다.
종1품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민응식(閔應植)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김학진(金鶴鎭)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학부 협판(學部協辦) 이재곤(李載崐)을 선원보략 수정 국조어첩 서사관(璿源譜略修正國朝御牒書寫官)에, 종2품 이면상(李冕相)을 선원보략 수정 감인 당상(璿源譜略修正監印堂上)에 임명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 등이 재차 상소하여 여러 법관(法官)을 귀양 보내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전번 비답에서 나의 뜻을 말하였는데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는 것이 날마다 이르니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경들은 이해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정우묵(鄭佑默), 종2품 김중환(金重煥)이 계속 상소하여 법관들을 귀양 보내라는 명을 취소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5월 3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소묘(懿昭廟)와 문희묘(文禧廟)를 영희전(永禧殿) 옛 터 자리에 이건(移建)하는 일을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을 겸임 태의원 도제조(兼任太醫院都提調)에 임명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민응식(閔應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조윤승(曺潤承)을 경무사(警務使)에, 법부 사리국장(法部司理局長) 홍종우(洪鍾宇)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고맙게도 도착하였으므로 짐(朕)의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아서 사직을 청하는 상소가 갑자기 닥칠 줄이야 어찌 생각했겠는가? 경이 이처럼 간절히 청하는데 예우해야 할 입장에서 또한 윤허하지 않고 버텨서는 안 될 것이다. 사직한 것 가운데 약원(藥院)의 직임에 대해서는 우선 경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겠다. 경은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 등이 세 번째로 상소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네 번째로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어려운 때에 의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날마다 상소를 올리는 것을 일삼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명을 받들어 거행하는 도리이겠는가? 법관에 대한 처분은 뒷날의 폐단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조칙 선포를 여러 날 지연시킨 것은 나와 겨루자는 것인가? 신하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즉시 반포하고 다시는 지연시키지 말라. 짐(朕)이 다시 말하지 않겠으니, 경들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신기선(申箕善)이 상소하여 여러 법관(法官)을 유형(流刑)에 처한 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낸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5월 3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육군(陸軍) 제도를 만든 지 여러 해 되었으니, 이를 통제하는 방도에 대해서도 응당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헌병(憲兵)을 아직까지 설치하지 않았으니 군제(軍制)의 흠이다. 원수부(元帥府)로 하여금 헌병대(憲兵隊)를 편제(編制)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난리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것은 귀신을 위안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다. 갑오년(1894) 이후로 전사한 사졸(士卒)들에게 미처 제사를 지내주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생각건대, 원한 맺힌 혼령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슬프게 통곡하는 소리가 구천에 떠돌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짐(朕)의 가슴이 아프다. 제사지내는 일을 원수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정우묵(鄭佑默) 등의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어제의 처분을 보니, 흉악한 역적이 죽자마자 법관(法官)이 곧 견책을 당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어리석지만 폐하의 생각이 법관이 지켜야 할 도리를 살피고 특별히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음에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극악한 역적을 잠시도 용서하지 말고 먼저 교수형에 처한 다음 보고하는 것은 율문(律文)에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법관에게 죄를 주면 성세(聖世)에 역적을 치는 법과 신하로서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는 의리에 어긋날 듯하므로 본분을 벗어난다는 혐의도 고려하지 않고 감히 송구함을 무릅쓰고 연명으로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의가 부족하고 글이 졸렬하여 폐하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였으니 신들은 답답합니다. 성명(聖明)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어찌하여 윤허하지 않는지 참으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저 흉악한 역적들의 죄상이 이미 드러난 이상 사람마다 모두 천만 번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법관이 지레 교형(絞刑)에 처한 것이 설사 법조문에 없더라도 또한 심히 꾸짖기에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외국으로 탈출하거나 탈옥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엄연히 율문에 있으니, 바로 이런 역적들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지금 외국으로 도망간 역적들이 매우 많은데 그들은 현재 눈을 크게 뜨고 엿보면서 두 역적들에 대한 처벌이 가벼운가 무거운가, 급하게 시행하는가 천천히 시행하는가를 가지고 흉악한 짓을 행할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명이 한 번 반포되기만 하면 장차 여러 역적들이 살아날 길이 열리게 되어 후일의 무궁한 재앙이 오늘날보다 곱절이나 생기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속히 명쾌한 칙지(勅旨)를 내리시어 옥사를 다스린 신하들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시는 한편 명을 널리 알리고 위와 아래에 포고하는 법을 행하시고, 이어 팔도(八道)의 신민들로 하여금 역적들의 드러난 실상은 사람들이 역적의 사지를 찢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라야 나라의 기강을 떨칠 수 있고 난적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온 나라의 공론이니, 옥사를 다스리는 신하들과 사사로운 관계가 있어서 이처럼 거듭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명께서는 재가하시고 이어서 신들이 번거롭게 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낸 비답에서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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