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양력
【음력 임인년(壬寅年) 3월 24일】 특진관(特進官)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에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웠는데도 중간에 다시 개성(開城)으로 수도를 옮겼던 일은 두 개의 수도를 두자는 뜻이었지만 송경(松京)을 폐지한 지 이제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하여 황극(皇極)을 세우시고 크나큰 계책으로 전대의 업적을 빛내고 후손들을 위한 모책(謨策)을 열었으며 중흥(中興)의 업을 세워 만대의 터전을 닦으셨습니다. 크고 원대한 규모는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는 제도만은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의 형세를 보자면 평양(平壤)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인문(人文)이 열린 고장으로서 세 성인(聖人)이 연이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모두 천여 년이며 지금도 인물(人物)이 번성하고 고을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땅이 연경(燕京), 계주(薊州)와 이어져서 풍속과 기질이 굳세고 질박하며 뱃길로 등주(登州), 내주(萊州)와 교류하므로 물화(物貨)가 폭주합니다. 고려(高麗)의 태조(太祖)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으로 우리나라의 명맥을 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락궁(長樂宮), 대화궁(大和宮)이라는 것은 모두 전 왕조 때의 행궁(行宮)이고 영숭전(永崇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행궁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명(明) 나라 사람 이문통(李文通)은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만년 왕기(王氣)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풍수 보는 사람의 말이기는 하지만 읍지(邑誌)에 전해지고 있으니 역시 거짓은 아닙니다. 또한 이 고장의 사람들은 평소 의기(義氣)를 숭상하며 위급한 시기에 쓸 만하기 때문에 중신(重臣) 권근(權近)은 주(周) 나라의 기(岐) 땅과 풍(豐)땅에 견주었으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경(西京)을 두고 이궁(離宮)을 새로 짓고 군사를 증설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나라의 위엄을 장엄하게 만들고 터전을 공고하게 한다면 그 고장이 더욱 중해지고 백성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할 것이니 단지 보기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멀리 주(周) 나라, 한(漢) 나라, 당(唐) 나라, 명(明) 나라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것이 있었으며 가까이로 고려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조치는 평양(平壤) 관리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는 일이니 모든 기강(紀綱)이 장차 얼마 안가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조정에서 무엇을 망설이고 처분을 내리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신의 이 글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어 널리 물어보고 재결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천년 고도(古都)의 사적(事跡)이 묘연한데 이제 경(卿)이 옛 사적을 자세히 진술한 것이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마땅히 조처해야 할 것이다.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원본】 46책 4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8면
【분류】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특진관(特進官)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에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웠는데도 중간에 다시 개성(開城)으로 수도를 옮겼던 일은 두 개의 수도를 두자는 뜻이었지만 송경(松京)을 폐지한 지 이제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하여 황극(皇極)을 세우시고 크나큰 계책으로 전대의 업적을 빛내고 후손들을 위한 모책(謨策)을 열었으며 중흥(中興)의 업을 세워 만대의 터전을 닦으셨습니다. 크고 원대한 규모는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는 제도만은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의 형세를 보자면 평양(平壤)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인문(人文)이 열린 고장으로서 세 성인(聖人)이 연이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모두 천여 년이며 지금도 인물(人物)이 번성하고 고을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땅이 연경(燕京), 계주(薊州)와 이어져서 풍속과 기질이 굳세고 질박하며 뱃길로 등주(登州), 내주(萊州)와 교류하므로 물화(物貨)가 폭주합니다. 고려(高麗)의 태조(太祖)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으로 우리나라의 명맥을 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락궁(長樂宮), 대화궁(大和宮)이라는 것은 모두 전 왕조 때의 행궁(行宮)이고 영숭전(永崇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행궁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명(明) 나라 사람 이문통(李文通)은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만년 왕기(王氣)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풍수 보는 사람의 말이기는 하지만 읍지(邑誌)에 전해지고 있으니 역시 거짓은 아닙니다. 또한 이 고장의 사람들은 평소 의기(義氣)를 숭상하며 위급한 시기에 쓸 만하기 때문에 중신(重臣) 권근(權近)은 주(周) 나라의 기(岐) 땅과 풍(豐)땅에 견주었으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경(西京)을 두고 이궁(離宮)을 새로 짓고 군사를 증설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나라의 위엄을 장엄하게 만들고 터전을 공고하게 한다면 그 고장이 더욱 중해지고 백성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할 것이니 단지 보기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멀리 주(周) 나라, 한(漢) 나라, 당(唐) 나라, 명(明) 나라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것이 있었으며 가까이로 고려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조치는 평양(平壤) 관리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는 일이니 모든 기강(紀綱)이 장차 얼마 안가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조정에서 무엇을 망설이고 처분을 내리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신의 이 글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어 널리 물어보고 재결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천년 고도(古都)의 사적(事跡)이 묘연한데 이제 경(卿)이 옛 사적을 자세히 진술한 것이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마땅히 조처해야 할 것이다.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종1품 강건(姜湕), 시종원 경(侍從院卿) 송민수(宋敏洙), 종2품 박승언(朴承彦)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는데 강건은 2등에, 송민수는 3등에, 박승언은 4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이용직(李容稙), 의관(議官) 윤웅렬(尹雄烈)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호(趙秉鎬)를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2일 양력
정2품 이용직(李容直)·조동희(趙同熙), 종2품 민정식(閔正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는데, 이용직과 조동희는 3등에, 민정식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3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프랑스인 클레망세〔吉孟世 : Clémencet, E.〕 【클레망쎼】 가 통신원(通信院)의 우체 조사(郵遞調査) 업무를 돕는 일에서 큰 성과를 냈으니 훈4등에 서훈(敍勳)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정2품 이승순(李承純)·조종필(趙鍾弼), 종2품 민영린(閔泳璘)·오장선(吳長善)·조명교(趙命敎)·이명재(李命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는데 이승순, 조종필, 민영린은 3등에, 오장선, 조명교, 이명재는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4일 양력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효전(景孝殿)을 전배(展拜)한 다음 기로소(耆老所)에 가서 영수각(靈壽閣)을 봉심(奉審)하고 기로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어첩(御帖)을 직접 썼다. 황태자도 따라갔고 영왕(英王) 이은(李垠)도 따라 올라갔다. 예식이 끝나자 상의사 제조(尙衣司提調) 이지용(李址鎔)이 궤장(几杖)을 바치자 황제가 직접 받고나서 대신들과 기로소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오늘의 이 일은 우리 황실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어서 조상들의 일을 잇는 의미에서 마지못해 시행하기는 했지만 속으로 개운치 못한 점이 있다."
하니,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이런 훌륭한 일은 우리 왕조뿐만 아니라 만고(萬古)에 보기 드문 경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얼핏 보니 경들의 어린 손자들도 따라 들어왔더군."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기로소 신하들의 아들이나 조카들 중 어린 아이가 따라 들어오는 것이 옛 규례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음식을 내릴 것이니 기로소의 당상이 받고 내가 대궐로 돌아갈 때에는 나의 행차를 따르지 마라."
하니, 직접 지은 시(詩)를 내려 보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선대의 법 공손히 따라서 의절(儀節)을 빛냈으니
가상하다 황태자의 여러 차례 청함이여
이 날에 임금과 신하들 함께 모여 즐김은
한 대청에서 친밀하게 깊은 정 통함이라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 함께 즐기는 의도는 상하의 마음을 소통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아뢰게 할 것이니 대궐로 돌아갈 때 기로소(耆老所) 동구 밖으로부터 대안문(大安門)에 이르기까지 상언(上言)을 받으라."
하였다.
종1품 남정철(南廷哲), 종2품 정현영(鄭顯英)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을 주었는데 정철에게는 1등을, 현영에게는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5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가 조령을 내리기를,
"대체로 듣건대 우(虞) 나라, 하(夏) 나라, 은(殷) 나라, 주(周) 나라 때에는 군자의 기로(耆老)와 일반 백성인 기로들은 모두 상서(庠序)에서 봉양하였는데 오제(五帝)는 그들의 덕행을 본받고 삼왕(三王)은 그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를 청한 사실이 역사에 명백히 실려 있으니 성왕(聖王)들이 기로를 공경한 뜻은 대단하였다. 지극히 존엄한 처지를 낮추어 기로들을 벗으로 삼고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선물을 풍족하게 주는 등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옛날에도 없던 일이었다.
우리 태조(太祖)는 하늘의 명을 받고 나라를 다스렸는데 존엄한 처지를 굽혀 기사(耆社)에 참여하여 임금은 60세에, 신하들은 70세에 기로소(耆老所)로 등급을 엄하게 하였으며 어첩(御帖)을 남기고 연회를 열어준 사실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숙종(肅宗)께서 60세에서 1년 앞에 선대의 훌륭한 일을 이은 것은 좋은 일을 앞당기고 물리지는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영조(英祖)가 51세에 미리 기로소에 들어간 것도 덕을 앞세우고 나이를 뒤에 놓는 옛 사람들의 원칙을 본받은 것으로써 엄연히 한 시대의 문헌(文獻)을 이룩했고 후대들이 법도가 되기에 진실로 충분하다.
돌이켜 보건대 짐은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게 장구한 위업을 이어받고 40여 년간 오로지 잘 다스려지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백성들에게 태평성세로 만들지 못했으니 마음속에서 근심을 놓지 못하였다. 더러 나에게 나라의 운수에 대하여 경계하기도 하였는데 백 살도 절반 고개를 넘어 이미 늘그막 나이가 되었으므로 태자가 하루에 세 번씩 문안하니 한편으로는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두렵다. 종친인 신하들이 먼저 상소를 올리고 상신(相臣)들이 뒤에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은 물론 우리 황실의 예법이 그런 것이지만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내가 무슨 덕을 닦아서 선대에 견주겠는가? 업무에 부지런한 것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이지 어찌 태평성대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태자가 규례에 근거하여 강력하게 청하는 형편에서 효성을 끝내 굳이 물리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어첩(御帖)을 쓰는 것으로 말하면 50세 이후에 더러 하는 것으로써 원래 일정한 규례가 없으며 떳떳한 법도는 세 선조 임금의 옛 법도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니 이번이 네 번째의 경사가 된다. 이것은 선대의 일을 이어나가는 것으로써 반드시 지나치게 겸손할 필요가 없겠기에 기로소에 직접 가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이 해 음력 3월 27일 새벽에 하늘과 땅,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삼가 고하고 먼저 진전(眞殿)을 전알(展謁)한 다음 영수각(靈壽閣)을 참배하였다. 궤(櫃)에서 선대의 어첩을 꺼내고 선대의 사적을 본받아 직접 어첩을 썼으며 왼쪽의 궤(几)와 오른쪽의 지팡이는 상의사(尙衣司)에서 무릎을 꿇고 바쳤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임금과 신하의 경사스런 기회이므로 남극성이 빛을 뿌리고 500년 세월을 이어져 오는 일이므로 서루(西樓)가 더욱 찬란하다.
다 같이 경사를 축하하는 이런 때에 응당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니 일체 시행 사항들을 아래에 열거한다. 【이하는 생략한다.】 아! 황태자가 따라와 시좌(侍座)하여 장수를 축하하는 기쁨을 표시하고 기로들이 나와 대청에 함께 참가함으로써 나이든 분들을 숭상하는 뜻을 부여하였는데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원본】 46책 42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9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아! 황태자가 따라와 시좌(侍座)하여 장수를 축하하는 기쁨을 표시하고 기로들이 나와 대청에 함께 참가함으로써 나이든 분들을 숭상하는 뜻을 부여하였는데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덕경당(德慶堂)에 나아갔다. 황태자가 모시고 참가하였다.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을 내려주고 나서 직접 지은 연구시(聯句詩)를 내려 보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태평 성세에 기로소 신하들 모여
모두다 한결같이 장수함을 즐겨라
황태자, 영친왕(英親王)과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각신(閣臣), 시강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의 관리들, 영친왕부(英親王府)의 총판(總辦) 이하가 화답시(和答詩)를 지어 올렸다.
조령을 내리기를,
"노인을 우대해서 품계를 올려주는 일을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 조신(朝臣)들에 대해서는 금일 내에 거행하고 그 밖의 선비들과 서인들에 대해서는 즉시 서울과 지방에 문의해서 보고 되는 대로 거행하도록 궁내부(宮內府)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김 봉조하(金奉朝賀) 【김병국(金炳國)】 와 송 봉조하(宋奉朝賀) 【송근수(宋近洙)】 는 기로소(耆老所)의 노인으로서 이처럼 보기 드문 경사를 만나고도 연석(筵席)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더없이 섭섭한 짐의 심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방관을 시켜 문안하고 옷감과 음식물을 본도에서 후하게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이순익(李淳翼)과 특진관(特進官) 서상우(徐相雨)를 정1품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특진관 이용원(李容元)·엄세영(嚴世永)·정해륜(鄭海崙),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서상조(徐相祖), 종1품 민두호(閔斗鎬), 특진관 정낙용(鄭洛鎔)을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특진관 장석룡(張錫龍)·김석근(金晳根), 의관(議官) 송민수(宋敏洙)를 종1품으로, 특진관 이용직(李容直)·신헌구(申獻求)·최익현(崔益鉉), 의관 한성근(韓聖根), 정2품 이규복(李圭復)·조희승(趙羲升)·정완묵(鄭完默)·홍재정(洪在正)·이교창(李敎昌)을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종2품 이면영(李冕榮)·서신보(徐臣輔)·신단(申檀), 특진관 조명교(趙命敎), 종2품 성대영(成大永)·김주순(金周淳), 의관 이희빈(李熙斌), 통진 군수(通津郡守) 이규중(李槼重), 종2품 정환익(鄭煥翼)·백락훈(白樂薰)·정준교(丁浚敎)·임영준(任永準)·이민중(李敏中)·이장회(李長會)·송원재(宋原載)·정인수(鄭麟洙)를 정2품으로, 특진관 정현영(鄭顯英), 종2품 이용화(李龍和)·박제억(朴齊億)·조장교(趙章敎)·이교응(李敎應)·구연홍(具然泓)·이교준(李敎駿)·서형순(徐珩淳)·이주긍(李周兢)·이병성(李秉性),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태제(金台濟), 종2품 김기인(金基仁)·조병익(趙秉益)·정주묵(鄭周默)·오정선(吳正善)·조준구(趙駿九)를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올렸다. 정3품 민영숙(閔泳肅)·엄석관(嚴錫瓘)·한용교(韓龍敎)·박제경(朴齊璟)·이면주(李冕宙)·송규회(宋奎會)·유남식(柳南植)·정학묵(鄭學默)·이인철(李寅轍)·홍우정(洪祐禎)·신극휴(申克休)·조진만(趙鎭萬)·이대직(李大稙)·신태관(申泰觀)·이종률(李鍾律)·이만유(李晩由)·이재하(李宰夏)·윤태원(尹泰元)·김준근(金寯根)·이연광(李演光)·박이정(朴履定)·이지영(李祉永)·성면호(成冕鎬)·조균하(趙均夏)·이희(李僖)·김오현(金五鉉)·박제순(朴齊恂)·윤승구(尹升求)·정동기(鄭東箕)·황호석(黃浩錫)·이수돈(李秀敦)·심노건(沈魯健)·이병규(李炳珪)·임영호(任榮鎬)·신두선(申斗善)·조필영(趙弼永)·이해만(李海萬)·김병훈(金炳薰)·송종오(宋鍾五)·안염진(安念鎭)·김재형(金在亨)·민치준(閔致駿)·이회원(李會源)·구달조(具達祖)·홍정석(洪鼎錫)·이보인(李輔仁)·윤영구(尹永求)·원세순(元世洵)·조용하(趙庸夏), 자산 군수(慈山郡守) 이돈행(李敦行)을 종2품으로, 종3품 김병창(金炳昌)·김병대(金炳大)·송교희(宋敎熙)·박용진(朴用鎭)·권성수(權聖洙)·송종렴(宋鍾濂)·안익풍(安翊豐)·김봉수(金鳳洙)·송인옥(宋寅玉)·신관조(申觀朝)·홍찬섭(洪贊燮)·이수영(李秀永)·이희성(李羲性)·이휘재(李徽宰)·이만정(李晩正)·강탁(姜鐸), 4품 김요협(金堯莢)·윤홍선(尹弘善)·윤기선(尹夔善)·이현의(李賢儀)·이정재(李鼎宰)·강준수(姜駿秀)·박제경(朴齊敬)·윤병관(尹秉觀)·김주호(金疇鎬)·홍우룡(洪祐龍)·황후연(黃厚淵)·김상현(金商絢)·박선양(朴宣陽)·이순재(李舜宰)·한진태(韓鎭泰)·이교승(李敎承)·정대무(丁大懋)·임백윤(任百潤), 용궁 군수(龍宮郡守) 이인긍(李寅兢), 산청 군수(山淸郡守) 김희원(金熙元), 목천 군수(木川郡守) 안기용(安淇瑢), 적성 군수(積城郡守) 권종철(權鍾哲)을 정3품으로 승급시켰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때에 70세 이상인 4품 이상의 조정 관리들과 80세인 5품 이하의 조정 관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가자(加資)한 것이다.
5월 6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종필(李鍾弼)·이중오(李重五), 비서원 랑(祕書院郞) 이의국(李義國)·박제황(朴齊璜)이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이종필이 앞으로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숙종(肅宗)의 기로소(耆老所) 어첩(御帖) 서문(序文)은 어첩 끝에 이어서 썼는데 영조(英祖)의 어첩 자서문(自敍文)은 별책(別冊)에 썼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승은 빨리 기로소에 가서 영조의 자서문 책자를 용정자(龍亭子)에 모셔오라. 그런데 오늘은 재계하는 날인 만큼 간단한 의장물과 악대는 갖추기만 놓고 연주하지는 마라."
하였다. 이어 기로소 당상(堂上) 1명이 기로소에 와서 기다리다가 함께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종필이 명령을 받고 물러나가자 임금이 비서승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중오가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어첩 서문을 다른 신하를 시켜 지어내게 하면 틀림없이 너무 지나치게 찬양한 것이니 짐이 스스로 지으려고 하니 그대는 쓰라."
하였다. 이어 구두로 불러주기를,
"기로소 어첩 자서문은 다음과 같다.
고황제(高皇帝)는 천명(天命)을 받고 늙은이를 봉양하는 예절을 먼저 실시하여 나라를 세운 지 3년 후인 갑술년, 춘추 60세 때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고 70세 이상의 정2품 문관들에게 들어와 참석하도록 명령하고는 지극히 존엄한 입장을 굽혀 그들과 함께 참석하였으니 ‘3대’ 이래로 이처럼 성대한 일은 없었으니 서루(西樓)에 대한 고사(故事)가 근거할 만한 문헌에 실려 있다.
숙종(肅宗)은 60세를 바라보던 기해년(1719)에 경종(景宗)이 세자(世子)로 있고 영조(英祖)가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고황제의 옛 규례를 시행하려고 여러 번 청하자 그것을 따랐는데 이 사실은 발문(跋文)에 기록되어 있다. 두 임금의 어첩은 경종이 명령을 받고 대신 썼다.
영조(英祖)는 51세인 갑자년(1744)에 종신(宗臣)들과 조정 관리들의 간청에 의하여 영수각(靈壽閣)을 참배하고 어첩을 직접 쓰는 동시에 서문(敍文)을 직접 지었으며 그 후 여러 번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으니, 아! 훌륭하다.
소자(小子)인 짐은 올해에 51세가 되는데 종신(宗臣)들이 영조가 이미 시행한 규례를 끌어대면서 청하고 황태자도 부모가 장수하는 것을 기뻐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효성으로 또 굳게 청하였다. 효성은 더없이 간절하였지만 내가 어떻게 세 훌륭한 선대 임금들의 거룩한 덕에다 짐을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대의 법은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선대의 일을 이어 나가는데도 애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사양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영조의 훌륭한 규범에 따라 좋은 날을 받아 영수각을 참배하고 어첩을 썼는데 고황제로 추존한 대호(大號)를 지금 감히 고쳐 써서 봉안(奉安)하지 못하였다.
나라가 창건된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간에 이런 일은 네 번째로 있는 것으로 천 년에도 보기 드문 일로 다행히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어찌 짐에게 덕이 있기 때문이겠는가? 조정에 늙은 신하들이 많고 백성들 속에 모두 다 장수하는 노인이 많은 것은 황천에 계신 조종이 만년 장구할 복을 내려준 덕분이다. 이 자리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똑같이 함께 즐기므로 온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로서 이 의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도 기뻐서 춤을 추리라는 사실을 역시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거사는 한갓 선대의 훌륭한 일을 이어 나가는 것을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기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리로는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노인을 편안하게 해야 백성들이 편안하고 백성들이 편안해야 나라가 안정된다. 천하를 거느려 인심이 귀의하게 하려면 이 방법을 써야 한다. 고황제는 크고 원대한 계책을 가지고 자손만대로 하여금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나라의 명맥을 장구하게 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였으니 이 소자(小子)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서문을 써서 경계하는 뜻을 표시함으로써 후대에 훈계하는 바이다.
광무(光武) 6년 임인년(1902) 3월 27일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3일 후인 경인일에 삼가 쓴다."
하였다. 이중오가 엎드려 쓰기를 마치자 임금이 읽으라고 명하였다. 이중오가 엎드려 다 읽은 다음 이종필이 영조(英祖)의 어첩(御帖)인 자서문(自敍文) 책(冊)을 배봉(陪奉)하니 임금이 읽어보고 나서 이종필에게 기로소에 배봉하여 다시 안치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이 자서문 부본(副本)은 으레 승지(承旨)가 쓰니, 인찰지(印札紙)로 장책(粧冊)하여 정서한 다음 내일 승전색(承傳色)에게 청해서 바치되 기로소 당상(堂上) 1명과 장례원 경(掌禮院卿)은 내일 신시(申時)쯤에 기로소에서 대령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내일 역시 영수각(靈壽閣) 문 밖에서 대령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정한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옛 도읍으로서 예법과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비록 사람의 일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고장의 신령스러움도 것도 역시 논할 수 있다. 주(周) 나라에는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이 있었고 명(明) 나라에는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이 있었으며 요즘에 이르러서는 외국의 경우에도 역시 두 개의 수도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고려 때의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특별히 평양에 서경을 두고 송경(松京)과 함께 두 수도로 삼았는데 이것은 모두 나라를 공고히 만들어 반석같이 크게 다지려는 것이다.
짐은 벌써부터 이에 대하여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중신(重臣)이 상소를 올려 논하였으니, 이제 평양에다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 더구나 이것은 그 곳 백성들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 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것은 매우 중대한 공사이니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해당 도신(道臣)과 자세히 의논해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때의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이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기로소를 수리할 때와 은인(銀印)을 만들 때, 영수각(靈壽閣)에서 어첩(御帖)을 표구할 때의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하, 기로소의 비서장(祕書長) 이하, 궤장을 만들 때의 상의사 제조(尙衣司提調) 이하, 축하를 올리고 황태자가 축하를 올릴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비서원 승(祕書院丞)인 겸장례(兼掌禮) 이종필(李鍾弼), 선조관(宣詔官) 겸 상례(兼相禮) 송준헌(宋準憲), 예모관(禮貌官)인 김병옥(金秉玉), 선전관(宣箋官)인 김용악(金容岳), 검사 총장(檢査總長) 조동윤(趙東潤), 경위원 총관(警衛院總管) 이근택(李根澤), 총무국장(總務局長) 김영진(金永桭), 시종(侍從) 민준호(閔濬鎬), 영친왕부 찬위(英親王府贊尉) 심상익(沈相翊), 참령(參領) 이정규(李廷珪)·홍창걸(洪昌杰)·길영수(吉永洙)·박유태(朴有泰), 정위(正尉) 박호선(朴浩善)·심상련(沈相璉)·한봉호(韓鳳鎬), 부위(副尉) 유기원(柳冀元), 참위(參尉) 양보환(梁普煥)·서병태(徐丙台)·이유익(李裕翼)·신우영(申宇永)·이용재(李容宰)·임철재(任哲宰), 별군직(別軍職) 이창용(李昌鎔)·최학재(崔學載)·이재직(李載稷)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대리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흥양군(興陽郡)의 통정 대부(通政大夫) 박보득(朴普得)은 지금 나이가 105세이고 유학(幼學) 김두선(金斗善)은 102세이며 고산군(高山郡)의 가선 대부(嘉善大夫) 김제상(金濟相)은 106세인데 모두 미처 보고하지 못해서 은전을 받는 데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내부(內部)에서 도(道)의 보고에 근거하여 조회(照會)해서 아뢰었습니다. 폐하의 결재를 바랍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이처럼 늙은이를 우대하는 좋은 기회에 100세가 넘은 사람이 3명이나 되는 것은 태평성대에 장수하는 기이하고 상서로운 것이니 특별한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모두 특별히 종1품으로 올려주라."
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강우형(姜友馨), 종2품 김병옥(金秉玉)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정인승(鄭寅昇)을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7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 승(祕書丞) 【이종필(李鍾弼)】 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종필이 임금 앞으로 나서니 옆에 오라고 명령하고는 기로소(耆老所) 어첩(御帖) 자서문(自敍文) 원본 책자를 비서 승에게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종필에게 부본(副本) 책을 바꿔주면서 이르기를,
"틀린 부분이 없는가를 검열 대조하려고 하니 다시 읽어라."
하였다. 이종필이 또 무릎을 꿇고 부본을 읽고 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이 기로소 어첩 자서문을 함에 넣고 기로소의 기영관(耆英館)에 봉안(奉安)하되 간단한 의장(儀仗)과 악대는 규례대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어첩(御帖) 자서문(自敍文)을 오늘 겸장례(兼掌禮)인 비서 승(祕書丞)이 함에 넣어가지고 기영관(耆英館)에 봉안(奉安)하되 책을 장정할 때 겸장례인 비서승은 예관(禮官)들과 함께 거행하라. 오늘 봉안하러 갈 때 용정자(龍亭子)와 간단한 의장과 악대를 세워야 하겠으니 즉시 대령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 서리(法部大臣署理) 이지용(李址鎔)이 음력 정월 초하룻날 대사령(大赦令)의 명을 받들어 평리원(平理院)과 각 재판소(裁判所)의 죄수들 중 6가지 중죄 외에 등급을 감해주어야 할 부류인 신성근(申性根) 등 83명을 차례대로 적어서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5월 10일 양력
칙령(勅令) 제8호, 〈흡곡, 안변 두 군의 구역을 개정에 관한 안건〔歙谷安邊兩郡區域改正件〕〉, 제9호, 〈낭천군을 화천군으로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狼川郡華川郡改正件〕〉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칙(詔勅)을 받고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민영철(閔泳喆)과 충분히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나라에 두 개의 수도가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평양(平壤)은 바로 기자(箕子)의 옛 도읍으로서 산천이 수려해서 문화의 기운이 있고 풍속이 굳세어 충성스러운 기풍이 많으며 왕기(王氣)가 모이고 땅의 영험이 드러났으니 그 곳이 나라의 튼튼한 터전으로 되는 것이 명백하다. 행궁(行宮)을 설치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의 결재를 바랍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서경(西京)을 설치하는 문제를 의논에 붙여보니 모두들 동의하기 때문에 이미 주본(奏本)에 재결하였다. 공사 시작 날짜는 오는 음력 6월 10일전으로 택하여 들여오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민영철(閔泳喆)을 서경(西京) 공사를 감독하는 당상(堂上)으로 차하(差下)하여 전적으로 맡아서 집행하게 하되 감독 등은 아뢰어 등문(登聞)하게 하고 차정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희일(趙熙一)이 상소를 올려 성균관(成均館)을 고쳐 벽옹(辟雍)을 세울 것에 대하여 청하니, 비답하기를,
"원칙에 근거한 말이니 물론 옳은 것이지만 아직도 겨를이 없고 또한 선뜻 논의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5월 11일 양력
정3품 엄주익(嚴柱益)을 군부 포공국장(軍部砲工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5월 12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이제 법전(法殿)을 지으면 전호(殿號)를 중화전(中和殿)이라 하고 이전 중화전(中和殿)은 도로 즉조당(卽祚堂)이라 부르라."
하였다.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아뢰기를,
"법전(法殿)의 상량문(上樑文)으로 말하면 갑자년(1744)에 인정전(仁政殿)을 지을 때는 대제학(大提學)이 지어 바쳤고 정묘년(1867)에 근정전(勤政殿)을 지을 때는 판부사(判府事)가 지어 바쳤는데 이번 중화전(中和殿)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도감(都監)에서 차출(差出)하게 하라."
하였다. 도감에서 아뢰어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차하(差下)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이순익(李淳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는데 이순익은 2등에, 김학진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14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나라에 두 개의 수도를 두는 것은 고금의 예를 참작해 보아도 역시 건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번 서경(西京) 공사는 사체(事體)상 중대한 문제이다. 당장 경비가 궁색하다고 해서 구태의연하게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50만 냥을 내려 보내어 운영하게 하라. 일체 물력을 마련하고 재력을 획정하는 것은 해당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좋은 편으로 합당하게 헤아려서 공사를 끝내도록 하고 주문(奏聞)해야 할 방도들은 주문하고서 시행하도록 거듭 신칙하라."
하였다.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주청(奏請)하여 중화전(中和殿) 상량문 서사관(上樑文書寫官)에 김영목(金永穆)을,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에 김성근(金聲根)을, 중화문(中和門)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이순익(李淳翼)을, 서사관(書寫官)에 오정근(吳正根)을, 현판 서사관에 윤용구(尹用求)를 차출하였다.
일본 공사관(公使館)의 서기관(書記官)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를 3등에 서훈(敍勳)하고 태극장(太極章)을 주라고 명하였다. 오랫동안 주재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5월 15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어진(御眞)과 예진(睿眞)을 서경(西京)에 봉안(奉安)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연석(筵席)에서 다 말하였다. 시행해야 할 의식 절차는 심도(沁都)의 옛날 영정을 봉안하는 전각에 모시던 때의 전례와 똑같이 도사도감(圖寫都監)에서 참작 마련하게 하되 날짜는 가을 동안에 받아서 들여오라. 전각을 짓기 전에 임시로 봉안할 곳은 장례원(掌禮院)에서 해당 도신(道臣)에게 알려 자세히 돌아보고 보고하게 한 다음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들,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 부(府)와 부(部)의 대신들, 의장(議長),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시강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의 관리들을 함녕전(咸寧殿)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도사(圖寫) 초본이 완성되었으므로 우러러보기 위해서였다.
5월 1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지냈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2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서경(西京)의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정문(正門)의 전각 이름과 문 명칭을 의정부(議政府), 궁내부(宮內府), 홍문관(弘文館)에서 의논하여 정해서 들이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81호, 〈궁내부 소속 직원 중에 수륜원의 과장 1명과 기사 1명을 증치하는 것에 관한 안건〔宮內府所屬職員中水輪院課長一人技師一人增置件〕〉을 반포하였다.
5월 24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직임을 사직하려 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시켜 주었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정1품 윤용선(尹容善)을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5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에 연회를 차려줄 때 영왕(英王)이 배참(陪參)하는 절차를 마련하라."
하였다.
외진연(外進宴) 연회 때 술잔을 올릴 재신(宰臣)으로 반수(班首)인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영소(閔泳韶), 참정(參政) 김성근(金聲根),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특진관(特進官) 김영목(金永穆)을 점하(點下)하였다.
5월 26일 양력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심순택이 이어 사임시켜 달라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들은 나이가 80세가 되도록 정승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와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도 모두 80여 세에 영의정(領議政)을 하였다. 경(卿)은 지금 나이는 많지만 정신과 식견은 10년 전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경처럼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위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내가 홀로 정사에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는 번거롭게 굴지 말고 더욱 바로잡고 보필하는 책임에 힘써라."
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재극(李載克)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용직(李容稙)을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이규복(李圭復)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27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서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들에게 연회를 차려주었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황룡포(黃龍袍) 차림으로 임시 처소에서 나오자 좌장례(左掌禮)가 무릎을 꿇고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자리에 올랐으며 장례원 주사(掌禮院主事)가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을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들어가고 앞에서 인도하는 관리가 영왕(英王)을 인도하여 배위에 들어갔으며 상례(相禮)는 황태자를 인도하여 배위에 들어갔는데 이 때 헌가(軒架)에서 ‘보허자령(步虛子令)’을 연주하였다. 찬의(贊儀)가 외치기를 ‘국궁사배(鞠躬四拜), 흥(興), 평신(平身)’ 이라고 하니 황태자가 사배례(四拜禮)를 하고 친왕(親王)과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사배례를 진행하니 음악이 멎었다. 상례(相禮)는 황태자를 인도하여 제자리에 나아가고, 앞에서 인도하는 관리는 영왕(英王)을, 주사(主事)는 기로소 여러 신하들을 인도하여 제자리에 가니 이때 헌가는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 이지용(李址鎔)이 술그릇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다. 헌가가 ‘여민락’ 령(令)을 연주하니 따라 이지용이 수건함을 받들고 자리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봉시(奉侍)가 무릎을 꿇고 받아 올린 다음 접시를 올렸으며 전선사 부제조(典膳司副提調) 윤헌(尹)이 수건함을 받들고 황태자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봉시가 무릎을 꿇고 받아 올리고 접시를 올리니 이 때 음악이 멎었다. 등가(登歌)에서 ‘순천개운곡(順天開運曲)’을 부르고 노래하는 아이들이 들어와 ‘제수창(帝壽昌)’ 노래를 부르니 그에 맞추어 따라 이지용이 음식상을 올리고 특별히 차린 과일을 올렸고 윤헌은 황태자에게 음식상을 올리고 특별히 차린 과일을 올렸으며 찬위(贊尉) 심상익(沈相翊)은 친왕(親王)에게 음식상을 차려놓고 특별히 차린 과일을 차려놓았고 집사(執事)가 기로소 신하들에게 음식상을 차려놓자 음악이 멎었다. 동가가 ‘장춘불로곡(長春不老曲)’을 부르는데 따라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용직(李容稙)이 화반(花盤)을 받들고 자리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봉시(奉侍)가 무릎을 꿇고 받아올리고 부첨사(副詹事) 이상설(李相卨)이 화반을 받들고 황태자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봉시가 무릎을 꿇고 받아 올렸으며 심상익이 영왕(英王)에게 꽃을 나누어주고 집사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꽃을 뿌려주자 음악이 멎었다. 이지용이 소금물을 올리고 윤헌이 소금물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으며 등가에서 ‘천년만세지곡(千年萬歲之曲)’을 부르고 춤추는 아이들이 들어와 ‘몽금척(夢金尺)’ 춤을 추는데 따라 이지용이 작은 반찬을 올리고 윤헌이 작은 반찬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다. 두 사람이 전각 앞에 나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 북쪽을 향해 서서 ‘광운락(廣運樂)’을 부르는데 따라 첫 번째 술잔을 올렸는데 이지용(址鎔)이 술잔을 들어 무릎을 꿇고 올리자 봉시(奉侍)가 받아서 무릎을 꿇고 자리 앞에 놓았다. 이때 등가는 ‘화봉삼축지곡(華封三祝之曲)’을 부르고 춤추는 아이들은 들어와 ‘봉래의(鳳來儀)’ 춤을 추었다. 폐하가 술잔을 들자 이지용이 술잔을 받아서 다시 받침대 위에 놓고 이어 탕을 올리니 음악이 멎었다. 윤헌이 술을 부어 무릎을 꿇고 올리니 봉시가 받아서 무릎을 꿇고 황태자 앞에 놓았는데 이 때 등가에서 ‘수요남극지곡(壽曜南極之曲)’을 부르고 무동(舞童)들이 들어와 ‘헌선도(獻仙桃)’ 춤을 추었다. 황태자가 잔을 받아 마시자 윤헌이 나서서 빈 술잔을 받아 술그릇상에 도로 놓은 다음 탕을 올리니 음악이 멎었다. 심상익이 영왕(英王)에게 술잔을 돌리고 집사(執事)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돌린 다음 등가에서 ‘만수영무강(萬壽永無疆)’ 인(引)을 부르는데 따라 지용이 만두를 올리고 윤헌이 만두를 올리자 음악이 멎었고 등가에서 ‘천세귀유지곡(千歲龜遊之曲)’을 부르는데 따라 이지용이 탕을 올리고 윤헌이 탕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으며 등가가 ‘수여제천지곡(壽與齊天之曲)’에 따라서 따라 이지용이 차를 올리고 윤헌이 차를 올리자 음악이 멎었다. 두 번째 술잔부터 일곱째 술잔을 올리기까지 위와 같은 절차대로 하였다.】 황태자와 영왕(英王),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의식을 마치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기로소의 당상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조병식(趙秉式)·이순익(李淳翼)·서상우(徐相雨)·이용원(李容元)·엄세영(嚴世永)·정해륜(鄭海崙)·김석근(金晳根)·서상조(徐相祖)·송민수(宋敏洙)·한성근(韓聖根)이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직접 전(殿)에 나와 잔치를 열었으니 이것은 천고에 드문 경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연 뒤에 규례대로 음식을 내리고 음악을 내려주는 법이다. 처용(處容)춤을 추는 사람들과 무동(舞童)들이 앞에서 인도하는 것도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지금도 규례를 지켜야 한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어느 임금 때에 있었던 전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두 임금 때에 모두 시행하였다. 오늘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기로소에 모여 연회를 할 때 차려준 잔칫상이 앞에 서되 악대가 앞에서 인도하고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이 거느리고 가며 궁내부 대신(內部大臣)들과 장례원 경(掌禮院卿),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의 뒤에 서되 처용춤을 추는 사람들과 무동들이 앞에서 가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의 연회는 원래 훌륭한 일이거니와 백발의 기로들이 반열에 가득하니 더욱더 훌륭한 일이다. 옛날에는 잔치를 열고 즐길 때 반드시 바른 말과 도움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회란 상하의 마음을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노숙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들의 소회(所懷)에 대해서는 폐하도 먼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원본】 46책 4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1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황태자와 영왕(英王),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의식을 마치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기로소의 당상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조병식(趙秉式)·이순익(李淳翼)·서상우(徐相雨)·이용원(李容元)·엄세영(嚴世永)·정해륜(鄭海崙)·김석근(金晳根)·서상조(徐相祖)·송민수(宋敏洙)·한성근(韓聖根)이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직접 전(殿)에 나와 잔치를 열었으니 이것은 천고에 드문 경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연 뒤에 규례대로 음식을 내리고 음악을 내려주는 법이다. 처용(處容)춤을 추는 사람들과 무동(舞童)들이 앞에서 인도하는 것도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지금도 규례를 지켜야 한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어느 임금 때에 있었던 전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두 임금 때에 모두 시행하였다. 오늘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기로소에 모여 연회를 할 때 차려준 잔칫상이 앞에 서되 악대가 앞에서 인도하고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이 거느리고 가며 궁내부 대신(內部大臣)들과 장례원 경(掌禮院卿),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의 뒤에 서되 처용춤을 추는 사람들과 무동들이 앞에서 가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의 연회는 원래 훌륭한 일이거니와 백발의 기로들이 반열에 가득하니 더욱더 훌륭한 일이다. 옛날에는 잔치를 열고 즐길 때 반드시 바른 말과 도움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회란 상하의 마음을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노숙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들의 소회(所懷)에 대해서는 폐하도 먼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의 연회는 사실 옛 규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고 연회 후에 전각 앞에서 연주하던 악공(樂工)들을 기로소(耆老所)에 보내주는 것도 역시 시행한 규례인데 이것은 선대의 일을 이어나가기 위한 것이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머지 음식을 가지고 가서 기로소에서 연회를 벌이게 하라."
하였다.
연회를 차려줄 때의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 이하와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전 의관(議官) 김우용(金禹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은 훌륭한 지세에 의거하여 나라의 터전을 공고히 만드는 일이니 참으로 만대를 두고 끝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본 도(道)에는 여느 부류들과 구별하여 유향안(儒鄕案)이 있는데 선조 대왕(宣祖大王)이 서도로 피난 갔을 때 친필로 향대부(鄕大夫)라는 세 글자를 쓴 것이 지금도 의주부(義州府)의 어필각(御筆閣)에 있습니다. 그러니 전란에 없어진 유향안을 이런 때에 어찌 다시 만들지 않겠습니까?
이 명단에다 옛 사람들을 그대로 쓰고 새 사람들은 택하여 들여서 시골의 규율을 진작시키고 특별히 의정부(議政府)에서 그 규정을 밝혀 많은 선비들에게 환유(渙諭)함으로써 이 일을 중시한다면 서도 사람들이 대대손손 그 영광을 골고루 입게 될 것입니다. 널리 물어서 결재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선대의 일을 이어나가는 원칙에서 훌륭한 조상의 유적을 응당 직접 써서 내려 보내겠다. 유향안을 다시 만드는 일은 의정부에서 자세히 헤아려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28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이정로(李正魯)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벽옹(辟廱)을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학궁(學宮)이란 교화가 퍼져나가는 곳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서 앞세워야 할 것이건만 그 제도가 아직까지 완비되지 못하였다. 공정한 논의가 한결같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조병호(趙秉鎬)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 태의원 경(太醫院卿) 이근수(李根秀), 정2품 이면영(李冕榮), 첨사(詹事) 민형식(閔衡植)을 궁내부 특진관에, 정2품 정준교(丁浚敎)를 시종원 경에, 정2품 성대영(成大永)을 장례원 경에, 특진관(特進官) 조명교(趙命敎)를 태의원 경에, 특진관 조동완(趙東完)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29일 양력
태의원 경(太醫院卿) 조명교(趙命敎), 장례원 경(掌禮院卿) 성대영(成大永), 시종원 경(侍從院卿) 정준교(丁浚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이근수(李根秀)를 태의원 경에, 정2품 이유인(李裕寅)을 시종원 경에, 정2품 서신보(徐臣輔)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30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외진연(外進宴)을 받았다. 【상(上)이 익선관(翼善冠)에 황포(黃袍)를 갖추고 어좌(御座)에 오르자, 헌가(軒架)가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다. 황태자(皇太子) 이하 종친과 문무 관리 3품 이상으로 자리에 있던 자들이 국궁(鞫躬)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가 주기(酒器)를 올리자, 헌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시접(匙楪)을 올리자, 등가(登歌)가 ‘순천개운지곡(順天開運之曲)’을 연주하고 무동(舞童)이 들어와 ‘제수창(帝壽昌)’ 을 추었다. 전선사 제조가 대탁(大卓)을 올리고 또 찬안(饌案)을 올린 다음 또 별행과(別行果)를 올리자, 등가가 ‘천보구여지곡(天保九如之曲)’을 연주하였다. 근시(近侍)가 화반(花盤)을 봉진(奉進)하니, 등가가 ‘천자만년지곡(天子萬年之曲)’을 연주하였다. 염수(鹽水)를 올리자, 등가가 ‘구오강녕지곡(九五康寧之曲)’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봉래의(鳳來儀)’를 추었다. 소선(小膳)을 올리자 황태자 이하가 국궁하고 사배하였다. 악사(樂師)가 ‘천향(天香)’ 악장(樂章)을 부르자, 황태자가 제1작(第一爵)을 올리고 이어 사배하였으며 종친과 문무의 관리들이 국궁하고 사배하였다. 치사관(致詞官)이 치사문(致詞文) 읽기를 마치자 승제관(承制官)이 제명(制名)을 선포하기를, "술잔을 들어 축하하는 때이니 황태자와 이 경사를 함께 하리라." 하니, 등가가 ‘수요남극지곡(壽曜南極之曲)’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헌선도(獻仙桃)’ 를 추었다. 탕(湯)을 올리자, 등가가 ‘만년장춘지곡(萬年長春之曲)’을 연주하였다. 만두를 올리자, 등가가 ‘천록영창지곡(天籙永昌之曲)’을 연주하였다. 탕을 올리자, 등가가 ‘표정만방지곡(表正萬邦之曲)’을 연주하였다. 차를 올린 다음 황태자 이하가 국궁하고 사배하였다. 반수(班首)인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제2작을 올리자, 심순택 이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국궁하고 사배하였다. 승제관(承制官)이 제명을 선포하기를, "경들의 술잔을 공경히 들라."하자, 등가가 ‘풍운경회지악(風雲慶會之樂)’을 연주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제3작을,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제4작을,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이 제5작을,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영소(閔泳韶)가 제6작을, 참정(參政) 김성근(金聲根)이 제7작을,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제8작을, 특진관(特進官) 김영목(金永穆)이 제9작을 올렸는데, 모두 위와 같은 의식으로 하였다. 등가가 ‘오만사년지곡(於萬斯年之曲)’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몽금척(夢金尺)’을 추었다. 황태자 이하 종친들과 문무관이 국궁하고 사배하니, 등가가 ‘만수무강지곡(萬壽無疆之曲)’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를 추었다. 찬의(贊儀)가 ‘산호(山呼)’를 창(唱)하니 황태자 이하가 공수(拱手)하여 이마 위에 올리고는 ‘만세, 만세’를 외치고 다시 산호하니 "만만세"를 외쳤다.】 치사문에,
"황제의 덕이 매우 밝고 업적이 빛나니 기나긴 운수를 내려주었으며 하늘의 도움으로 좋은 상서가 모여 해와 달처럼 끝없이 장수하고 태산 반석처럼 운수가 장구합니다. 천 년 만에 있는 훌륭한 거사는 선대의 경사를 더욱 빛내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헌수의(獻壽儀)를 올립니다."
하였다. 악장문(樂章文)에,
"황제의 덕은 밝고 밝아
큰 위업을 거듭 빛내었어라
오랜 나라를 새로 물려받아
정사의 업적은 삼대 때처럼 높아라
문명하고 용감한
거룩한 임금들이 대를 이어
장수의 복을 내렸으니
만년을 내려갈 경사로다
남극성이 대궐 앞에 나타나
봉래전 앞에 빛을 뿌리는데
서루에서는 옛일을 따라
경사를 축하하려 거듭 청을 올렸더라
크나큰 덕화는 술 마냥 무르녹아
온 누리가 젖어들었구나
성인의 시대에 위엄과 은혜를 베푸니
이 나라에 태평성세가 펼쳐졌거니
울긋불긋 옷차림으로 함께 즐기며
칭송하는 송가(頌歌) 소리 훌륭하여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서신보(徐臣輔)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조병호(趙秉鎬)를 장례원 경에, 정2품 정환익(鄭煥翼)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이인철(李寅轍), 종2품 박제경(朴齊璟)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31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서 내진연(內進宴) 행하였다. 제1작(第一爵)은 황태자(皇太子)가, 제2작은 황태자비(皇太子妃)가, 제3작은 영왕(英王)이, 제4작은 연원 군부인(延原郡夫人)이, 제5작은 정경 부인(貞敬夫人) 한씨(韓氏)가, 제6작은 정부인(貞夫人) 홍씨(洪氏)가, 제7작은 정부인 이씨(李氏)가, 제8작은 종친의 반수(班首)인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이, 제9작은 척신(戚臣)의 반수인 특진관(特進官) 김석진(金奭鎭)이 올렸다. 【의주(儀註)는 생략한다.】 이어 야진연(夜進宴)을 행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제 덴마크〔大丹國〕와 통상 조약(通商條約)을 체결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하여 외부 대신 임시 서리(外部大臣臨時署理)로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유기환(兪箕煥)을 특별히 선발하여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삼아서 덴마크국 대군주가 파견한 전권 대신과 회동(會同)하여 마음을 다하여 의논하고 합당하게 체결함으로써 두 나라가 영구히 우호 관계를 누리도록 노력하라. 특별히 이 칙지(勅旨)을 내려 친필로 화압(畵押)하고 국새(國璽)를 찍음으로써 신빙성을 보이니 삼가 시행하라."
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하령(下令)하기를,
"나라에 흔치 않은 큰 경사를 만났으니 마땅히 성의를 보이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갇혀 있는 여러 죄인들 중 육범(六犯)외에 경범 죄수(輕犯罪囚)들을 모두 참작하여 석방할 것에 대해 대조(大朝)에 아뢰어 이미 처분을 받았으니, 법부(法部)와 원수부 검사국(元帥府檢事局)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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