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양력
【음력 병오년(丙午年) 윤4월 10일】 종2품 민건식(閔健植)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원본】 51책 47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3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종2품 민건식(閔健植)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2일 양력
의정대신(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에게 세 번째로 칙유(勅諭)하기를,
"상하가 서로 호응하기를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빨라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없으니 스스로 심중에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미 정중하게 말을 하였으니 다만 마음을 돌려서 빠른 시일 내에 당장 상면(相面)하게 되리라고 여겼는데 또다시 부친 상소를 보니 계속 주장을 견지하면서 가지 않겠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에 경에게 기대했던 바이겠는가?
짐이 경에게 권면하는 것이 특별한 도리는 아니며 지혜가 미칠 수 있고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을 경의 훌륭한 명망을 빌려서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이 부지런히 정무를 보느라 쉴 겨를이 없고 잠자리에 누워도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경은 한가하게 집에서 지내지만 밤새 깊이 근심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나라를 지탱하는 임무를 맡김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래서 조석(朝夕)으로 눈썹이 타듯이 시급한 일을 시급히 도와달라고 재촉하는데 경은 물러나서 버티는 것이 마치 생각해 볼 것이 없어서 나올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짐은 경이 결코 이렇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또 이렇게 거듭 말하니, 속히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을 그만두고 즉시 일어나 받들어서 고대하는 짐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종2품 이민화(李敏和)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3일 양력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가 재차 사직(辭職)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중서(中書)의 전례를 짐(朕)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역시 시의(時宜) 적절하게 조처해야 할 뿐이다.
경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어떤 때인가? 어찌 그럭저럭 지내는 것을 허용하여 하루 이틀 시일을 끌며 겸손히 사양할 때이겠는가?
이 사양하는 글을 보고 크게 실망하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조목별로 논한 것은 자세하여 실로 요체를 얻었다. 이것은 경의 우려가 깊고 생각이 원대하여 한가히 지내는 나날에도 확고한 계획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항간의 보통사람의 경우에도 급한 일로 구원을 구할 때에는 오히려 서로 도와서 힘 있게 분발하는 것이 의리이다. 대체로 나라와 백성들의 만년 대계를 위하여 벼슬을 맡겨준 것은 어려운 형세가 조석으로 급박하여 기대되는 것이 절실하고 의지되는 바가 중하기 때문이니 경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폐단이 극도에 달하여 머리카락까지 모두 병든 것처럼 되어버리면 누구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천하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없는데 정신을 차려서 힘쓰지 않기 때문이다.
묘당이 오래도록 비어 있었는데 정사가 모름지기 경이 한 번 나타난 다음에야 확연히 정돈될 것이다. 그러니 경은 다시는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즉시 등대(登對)하라. 짐은 난간에 기대서 기다리겠다."
하였다.
6월 4일 양력
종2품 김교석(金敎碩)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6일 양력
의정대신(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를 네 번째로 타일렀다.
칙령 제26호, 〈법관양성소 관제(法官養成所官制) 개정 안건〉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예식원 예식과장(禮式院禮式課長) 김조현(金祚鉉)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안기현(安基鉉)을 무안 감리(務安監理)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요청으로 인하여 잠업 과장(科場)(蠶業試驗場)의 각종 비용 증가액 9,000원(圓), 면화(棉花) 재배비 증가액 5만 4,424원, 일본 흥업은행(興業銀行) 차입금(借入金)과 이자(利子) 5만 5,205원, 감옥서(監獄署) 이건비(移建費) 3만 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할 일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6월 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프랑스인 마르텔〔馬太乙 : Martel, E.〕은 우리나라에 주재하여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5등에 서훈(敍勳)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고, 일본 서기관(日本書記官)으로서 5등에 서훈된 후루야 시게쓰나〔古谷重綱〕는 공로가 매우 많았으니 특별히 4등에 서훈하고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종2품 이민하(李敏河)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민경식(閔景植)은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6월 8일 양력
의정부 의정 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를 소견(召見)하였다. 민영규가 아뢰기를,
"신은 사임에 대한 허락을 받지 못해 연석(筵席)에 나왔는데 이것이 어찌 신이 조금이라도 벼슬을 맡아보려는 기대에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하찮은 저의 거취를 가지고 감히 오래도록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폐하를 가까이 뵙는 자리를 빌려서 간절히 아뢰고자 하는 생각뿐입니다.
대체로 나라에 재상이 있는 것은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서이니 그 책임이 언제인들 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때를 당하여 신처럼 용렬한 사람이 처하게 한다면 장차 나랏일이 어떤 지경에 놓이겠습니까?
중한 벼슬을 잘못 주면 나라의 체면만 손상시키게 되니 매우 두렵고 안타깝습니다. 오늘이라도 물러날 수 있게 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특별히 제수(除授)한 것은 짐(朕)의 마음속에서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다. 경이 조정에 나온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사양하는 말은 짐이 듣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민영규가 아뢰기를,
"연석의 체모는 더없이 엄하고 칙지(勅旨)를 친히 주는 것도 정식(定式)과 관련되어 있어서 지극히 황송한 마음에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으나 신은 현직에 있지 않으니 조정의 한 가지 사안도 결코 의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잠깐 명에 응한 것을 가지고 당연히 응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특별히 생성(生成)의 은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하고 앉아서 정치의 도를 논하는 것이 대신(大臣)의 일이며, 경에게 업무를 책임지우는 것은 아니니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6월 9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전부터 의거를 행한다 하면서 감히 제멋대로 날뛰는 자는 모두 불량한 무리들이었다. 난동을 생각하고 재난을 좋아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고 꾀어서 지방을 침해하기 때문에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효유(曉諭)하였다. 그러나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여 모두 진압하였고 전철을 밟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근래 듣자니 각 지방에서 의병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의리를 대충 아는 선비들도 그 속에 있다고 하니 짐(朕)은 심히 의혹을 가진다. 진실로 참된 학문에 종사하여 실지의 이치를 강구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선비가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면 구원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물며 짐의 백성들이 함정에 몰려 들어가는데 구휼하지 않겠는가? 아! 너희 무리들은 속히 마음을 고쳐 깨닫고 즉시 해산하여 학업에 더욱 힘쓰라.
짐이 앞서 명백한 조칙을 내려 종교를 부식하였고 또 학교에 관한 법을 널리 만들어 서울과 지방의 선비로 하여금 추세를 알게 할 것이니, 함께 마땅히 장려하여 쓰임에 바탕이 되도록 다들 잘 알게 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하였다.
종2품 이근영(李根永)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1품 이건하(李乾夏)·현석운(玄昔運),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민영선(閔泳璇)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용하고 이건하는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고, 현석운과 민영선은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6월 10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종1품 조병호(趙秉鎬)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이종림(李鍾林)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임명에 응한 지 겨우 이틀이 되었다. 어찌 갑자기 사직하는 글이 올라올 줄을 생각하였겠는가? 짐이 생각하기로는 사리로 보나 의리로 보나 모두 만만 부당한 처사이다.
전후에 걸쳐 내린 비답 및 칙유(勅諭)와 접견에서 주고받은 말을 통하여 속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짐이 경에게 희망을 걸고 경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또한 묵묵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내 벼슬을 내놓고 떠나겠다는 말을 하니 과연 할말이 있는가?
지금은 난국이 극도에 달해서 위태롭게 된 형세가 바둑알을 쌓아놓은 것에 비유해도 부족하다. 그래서 밤낮으로 두려워 서둘러대는 것이 마치 큰 강을 건너다 침몰되어 가는 배 안에서 유능한 사공을 시급히 찾는 것과 같은데, 어찌 강안(江岸)에 나왔다가 뒷걸음질을 쳐서 걱정없이 편안히 앉아 방관할 뿐이겠는가? 이것은 진실로 보통 심정으로는 차마 못할 일인데 경이 차마 하려고 하는가? 경은 깊이 헤아리고 다시는 이런 말을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6월 12일 양력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1품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최익현(崔益鉉)을 해임하였다.
6월 13일 양력
수옥헌(漱玉軒)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군 사령관(日本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접견하였다.
육군 사계(陸軍司計) 이강하(李康夏)를 사계감(司計監)에 올려 임용하고, 이어 군부 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에 보임하였다. 주전원 경(主殿院卿) 이근호(李根澔)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민병한(閔丙漢)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비서감 승(祕書監丞) 윤갑병(尹甲炳)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15일 양력
주전원 기사(主殿院技士) 방시용(方時容)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16일 양력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과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홍주(洪州), 남포(藍浦) 등 지방의 선유사로 홍주 군수(洪州郡守) 윤시영(尹始永)이 칙명(勅命)을 받들고 갔으나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믿지 않았고 비방이 답지하여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당 선유사(宣諭使)를 우선 해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조병호(趙秉鎬)에게 특별히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 대부로 하비(下批)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우면(李愚冕)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심상한(沈相漢)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종2품 정준민(鄭準民)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사철(金思轍)이 아뢰기를,
"개성 부윤 서리(開城府尹署理)이고 장단 군수(長湍郡守)인 윤종구(尹宗求)의 보고를 연이어받아보니, 고려조 성종(成宗)의 강릉(康陵), 정종(定宗)의 안릉(安陵), 원종(元宗)의 소릉(昭陵), 문종(文宗)의 경릉(景陵)이 모두 도굴당하는 변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곳에서 이처럼 전에 없는 변고가 생긴 것은 듣기에 지극히 놀라운 것입니다. 도굴한 놈을 기한을 정해놓고 체포하여 법에 따라 엄하게 처리하고, 사고가 난 곳을 수리하는 일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전 왕조의 능들에 계속하여 이런 변고가 생겨 놀라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해당 범인들을 며칠 안으로 체포하여 조율(照律)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이며, 수리하는 일은 전례대로 지방관으로 하여금 빨리 거행하게 하고 수리가 끝난 후에 비서감 승(祕書監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죽음을 앞둔 신하 이설(李偰)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젊어서부터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어 겨우 나이 50여 세인데도 쇠약하고 노병 환자와 같이 항상 병상에 있으니 이제는 세상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진달하는 상소를 올린 일은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의리가 있었습니다. 비록 은혜로운 비답을 받지는 못했으나 신하된 명분과 의리를 조금이나마 실현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일본 순사들의 손에 붙들려 경무청(警務廳)에 갇힌 것은 신의 상소문 내용이 너무나 강직하여서 신을 특별히 미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모욕과 고초를 당한 참상은 이미 논할 것이 없으나 이로부터 한 달 동안 찬 밥을 먹고 냉방에서 자면서부터 온갖 병이 번갈아 생겨나 자연히 여위어 죽은 귀신이 되고 말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 석방되어 나온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신은 비록 불초(不肖)하나 당당한 조정의 오랜 신하입니다. 모르기는 하나 가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석방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루를 살면 하루의 욕을 당하고 이틀을 살면 이틀의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신은 이 수치와 원통함으로 인해 실로 낯을 들고 사람들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출옥하는 날은 병세가 극도에 이르렀고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으며 이질과 치질까지 겹쳐 온몸이 모두 아프고 괴이한 증세가 겹쳐 발생하였습니다. 이 다섯 달의 오랜 기간을 이렇게 지내 한 가닥의 숨결마저 끊어지게 되었으므로 죽을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대저 무슨 유감이 더 있겠습니까마는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폐하를 사랑하는 한 가지 생각은 마침내 죽어도 함께 사라질 수 없습니다.
아! 일본은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입니다. 지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목이 아직 붙어 있고 통감(統監)이라는 반역적 이름을 아직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신의 이 걸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은 살아서는 잔렬(殘劣)해서 의리를 내세워 역적을 처단하지 못하였으나 죽으면 반드시 여귀(厲鬼)가 되어 역적을 처단하고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원이며 하늘에 있는 열성조(列聖朝)의 영혼도 장차 말없이 도와주고 따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마음속에 새겨두고 살피소서.
그리고 요즘 정세를 보면 저들에게는 꼭 망하게 될 형세가 있고 우리에게는 반드시 보존될 도리가 있으니 불을 밝히고 점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신이 죽음을 앞두고 붓을 갈아대며 장황하게 조목별로 진달할 겨를이 없으나 우리 성명께서는 지극히 밝은 견문을 가지고 이미 마음속으로 환히 꿰뚫어보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대의를 견지하고 더욱더 원대한 도모에 힘쓰면서 완고하고 둔하고 염치없는 논의에 동요하지 말고 간사하고 교활한 계책에 속지 말며 위협하고 공갈하는 소리에 끄떡하지 말고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착실한 마음으로 해나가고 우리를 위해서 마땅한 것만 시행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형세는 자연히 높아지고 저들의 형세는 제풀에 꺾여 바로잡을 수 있는 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의 천성은 총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폐하의 덕은 슬기롭지 않은 것이 아니며 폐하의 자품(姿稟)도 신무(神武)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재물과 잇속에 그것을 쓰시고 학문에는 쓰시지 않았기 때문에 즉위하신 지 40여 년 동안에 칭송할 만한 일이 한 가지도 없고 기록할 만한 정사가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지내면서 타락하고 안일하게 보내셨고 어물어물하면서 어둡게 막혀서 조종(祖宗)이 이룩한 법이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만년에 오늘날 망국의 임금이 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은 항상 한탄하였습니다.
아!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학문을 좋아한 것이 50세 때였고 한제(漢帝)는 후회하는 마음이 70세 때였지만 오히려 어질고 명철한 임금이 되어 후세에 칭송되었으니 이것은 성명께서 마땅히 법 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으면 은(殷)의 탕왕(湯王)과 우(虞)의 순(舜)을 폐하께서 잇는 것이고 많은 고난 끝에 나라가 융성하게 될 것이니 어찌 이것이 종묘와 사직의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신처럼 불행한 무리들은 비록 죽는 날에도 살아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새겨두고 경계하소서.
신은 지금 죽어가는 지경에서 신하된 충성심이 곱절이나 처절합니다.
옛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간한 의리에 의거하여 이 짧은 글을 써놓고 기회를 보아 올리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슬기로운 폐하께서는 가엾게 여겨 한번 살펴주소서. 옛 글에 이르기를,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 하였으니 어찌 살피지 않겠습니까? 신은 극도로 감격과 울분이 솟구치고 원한과 통탄을 누를 길이 없어 삼가 죽음을 앞두고 아룁니다."
하였다.
6월 18일 양력
정1품 조병호(趙秉鎬)를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에 임용하였다.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경이 나라의 정사에 참가한 때부터 짐이 이 벼슬을 주려고 한 것이 몇 해가 되었고 정승 선발에 추천되고 여러 사람들도 기대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경의 청렴한 정성과 강하고 과감한 지조는 오랜 기간에 두루 시험하여 진실로 더없는 것을 알고 있는 바이다. 지금 위급함은 백천(百川)이 비껴 흘러 제방을 거치지 않는 것과 같아 정사는 반드시 경이 맡아서 타개해야 할 것이다. 조석으로 급하니 경은 전례를 지켜 겸손하게 사양하지 말고 즉시 올라와서 내가 몸을 기울이고 앉아 갈망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양력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심상한(沈相漢)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경무사(警務使) 서상대(徐相大)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였으며, 종2품 윤우선(尹寓善)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박승조(朴承祖)를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이용태(李容泰)는 임시로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칙령 제27호, 〈내부 관제(內部官制) 중 개정 건〉 제28호, 〈지방제도(地方制度) 중 관찰사(觀察使) 다음에 경무관(警務官) 1인을 더 두는 건〉, 제29호, 〈지방관리 직제(地方官吏職制) 중 개정 건〉, 제30호, 〈각 도(道) 관찰부에 경무서(警務署)와 분서(分署)를 설치하는 건〉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아뢰기를,
"삼가 올해 3월 2일 사전(赦典)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들고 지방의 각 도 재판소 죄수 중에서 석방할 대상자 이갑이(李甲伊) 등 29인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한다."
하였다.
6월 20일 양력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에게 재차 칙유(勅諭)하기를,
"경은 이 직임이 진실로 어떤 직임이고 이때가 과연 어떤 때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때에 이 직임을 주는 것은 거기에 기대되는 것이 깊고 진지하며 바라는 것이 급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짐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경은 스스로 마음에 이해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부독(附牘)을 보니 처음 의혹을 가진 것은 마치 돌아볼 것이 없다는 듯, 애당초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데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였으며 이어 한탄한 것은 마치 매우 한가한 때인 것처럼 놀면서 의정부(議政府)의 고사를 가지고 거절해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으니, 이쪽저쪽으로 헤아려보아도 실로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저 경은 높은 명망을 지녀서 온 나라가 우러러보고 있으니 의정부(議政府)에 앉아있으면 모든 관리들이 고무되고 온갖 일이 잘 되어나갈 것이다.
경이 비록 물러나려 해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짐의 뜻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니, 글을 가지고 여러 날 지루하게 보내지 말고 즉시 일어나 올라와서 아침 저녁으로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오보영(吳普泳)을 시종 무관(侍從武官)에 임용하였으며, 예식관(禮式官) 백시용(白時鏞)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21일 양력
종2품 이용식(李容軾)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2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일본 육해군 장관 이하 일행이 우리나라에 계속 건너오는데 표시하는 뜻이 없을 수 없다.
육군 대장(陸軍大將) 백작(伯爵)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해군 대장(海軍大將) 자작(子爵) 이토 유코〔伊東祐亨〕, 해군 대장(海軍大將) 남작(男爵)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를 모두 대훈(大勳)에 특별히 서훈하고 각각 이화장(李花章)을 하사하라. 추밀원 고문관(樞密院顧問官) 남작(男爵) 다카사키 마사카제〔高崎正風〕, 해군 중장(海軍中將) 우에무라 히코노스케〔上村彦之丞〕를 모두 훈 1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해군 중좌(海軍中佐) 고야마다 나카노스케〔小山田仲之丞〕를 훈 3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육군 소좌(陸軍少佐) 센다 요시히라〔千田嘉平〕, 해군 소좌(海軍少佐) 사사키 다카시〔佐佐木高志〕를 모두 훈 3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종1품 이주영(李胄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조경구(趙經九)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종2품 박용주(朴龍柱)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2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훈 2등에 서훈(敍勳)한 특진관(特進官) 민영규(閔泳奎)는 조용하고 바르며 규범을 지켰고 계책이 대단하고 명망이 뛰어나게 높으니, 특별히 훈 1등에 올려 서훈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훈 2등에 서훈한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은 벼슬길에서 충성을 다하였고 공로가 특이하며, 훈 2등에 서훈한 평리원(平理院) 재판장 이윤용(李允用)은 이미 공로가 뛰어나고 명성도 높으니 특별히 훈 1등에 올려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주전원 경위국장(主殿院警衛局長) 엄하영(嚴夏永)은 직무에 근면한 공로가 있으니 훈 4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팔괘장을 하사할 것이며, 부장 오진섬(吳鎭暹), 경무관 유영렬(劉永烈)도 공로가 있으니 모두 훈 5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라. 예식원 예식관(禮式院禮式官) 조재승(趙在升)·조재영(趙在榮)·이윤영(李胤榮)·윤기익(尹基益)은 자못 열심히 일하였으니 모두 훈 5등에 특별히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을 하사하라."
하였다.
종2품 서상대(徐相大)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장례부경(掌禮副卿) 이보영(李輔榮)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며, 종2품 정은조(鄭誾朝)를 예식원 장례부경(禮式院掌禮副卿)에 임용하고, 종2품 윤갑병(尹甲炳)을 비서감 승(祕書監丞)으로 임용하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국량(局量)이 매우 적고 재주가 볼 것 없으며 나이는 갯버들처럼 일찍 노쇠하였고 병이 불치의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시골에 물러나 지내는 것을 분수에 달게 여기고 있으며 오직 폐하의 은덕을 노래하면서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답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갑자기 정승으로 임용하는 칙명(勅命)이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두렵고 놀라워 정신을 잃고 허둥지둥하며 감히 글을 만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뒤이어 은혜로운 칙유(勅諭)를 거듭 내려 간곡하고 진지하게 벼슬을 맡기셨으며, 마침내 의정부(議政府)에 의젓하게 앉아 백관(百官)을 고무하고 모든 일을 빛내라는 간절한 하교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명망 높은 사람들도 주저하며 사양하던 것인데 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이에 감히 이 벼슬을 감당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지난 역사에 어두우나 또한 정승이 된 사람들에 대하여 들었으니 어떤 사람은 재주와 덕으로, 어떤 사람은 명망으로, 어떤 사람은 공로와 업적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삼대(三代)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내려와서도 소하(蕭何)는 매사에 계책을 잘 세우고, 조참(曹參)은 지켜가기를 잘했으며, 위징(魏徵)은 엄격하였고, 병길(丙吉)은 관후했으며, 요숭(姚崇)은 막히는 일이 없었고, 송경(宋璟)은 법대로만 잘 지켰으며, 방현령(房玄齡)은 지략이 있었고, 두여회(杜如晦)는 결단성이 있었는데 그들은 재주나 덕망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한기(韓琦), 위상(魏相)이 정승으로 등용되자 사방의 외적들까지도 그 풍채를 그리워했다고 하며, 사마광(司馬光)이 등용되자 서하국(西夏國)에서는 변방에 있는 관리들에게 주의하라고 이르기까지 하였다는데 그것은 그들이 명망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향민중(向敏中)은 벼슬자리에 오래 있었고 곽자의(郭子儀)는 중서(中書)란 벼슬에서 24년간의 업적평가를 치른 바 그것은 그만큼 공적을 쌓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이런 사람을 선발하고 이렇지 아니하면 함부로 벼슬을 주지 않았으며 아래에서는 역량을 헤아려보고 그런 장점이 없으면 벼슬을 함부로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고 크기 때문에 그 적임자를 천거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고 신중하였던 것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반생을 그럭저럭 지내면서 어리석고 못나서 좋은 평판을 들어보지 못하였고 하나를 안다 해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며 조그마한 계책과 능력도 없고 일찍이 크나큰 위업을 도와 당대에 나타낸 것이 없는 것은 재주와 덕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성이 소졸(疏拙)하고 세상을 겪는 방도에 어두워 이전에 귀양살이로 훼손이 있었을 뿐 명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정승으로 발탁하였으니 사람들이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조롱할 것이며 이런 사람도 참가하였다는 비방이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를 것이며 명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무능함은 신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년 이래로 임용이 있을 때마다 문득 사양하였으며 아직까지 시일을 끌어본 일이 없었고 일에서 공로도 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저 그러한 업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직책을 준다는데 대해서는 신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얼마나 위태롭고 시국은 얼마나 결렬되어 있습니까? 마치 천 칸의 큰 집이 당장 무너지는 듯 위태롭고 만 섬들이 용양선(龍驤船)이 뒤집히는 듯 위험한데 훌륭한 목수나 유능한 사공에게 맡기지 않고 용렬한 목수에게 도끼질을 시키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키를 맡기니 신은 또한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 신이 폐하를 섬긴 것이 41년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처럼 높고도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며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은혜와 인정이 깊어졌습니다. 온몸을 갈아서라도 보답하려는 것이 평소의 소원이니 물이나 불속에 뛰어든다 해도 달갑게 하겠습니다. 하물며 훌륭한 임금을 만나 더없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신하된 사람의 원하는 바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기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신이 홀로 무슨 마음으로 궁벽한 산간 오지에서 그럭저럭 지낼 것만 생각하고 충성을 다 바쳐 덕과 의리를 만분의 일이나마 받들어나갈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 어쩔 수 없는 병상이 있습니다. 신은 지난해에 참정(參政) 벼슬에 있다가 사임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마지못해 한번 나섰는데 평지에서 풍파를 일으켜 순식간에 기관이 변하여, 위로는 훌륭한 조정의 누(累)가 되었고 아래로는 당세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창황히 돌아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조용히 허물을 생각하니 곧 신은 흰 머리로 손에는 손가락이 있으나 드러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데 거듭 정승의 지위에 들어가 수석 대신의 벼슬을 차지한다면 심히 염치가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이 넘을 수 없는 한계입니다.
지금 신은 발과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수족이 마비되었습니다. 걸을 때는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붓을 잡으면 글씨가 바람에 날리듯 비가 몰아치듯 하는 것은 사지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매미소리 같은 것이 귓속에 들리고 눈앞이 어른거리며 잇몸이 몽땅 드러나고 콧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은 오관(五管)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손님과 담화를 할 때는 앞뒤의 말을 혼돈하고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어제 기억한 것을 오늘 망각하니 이것은 정신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력은 더욱 지탱할 수 없어 방문을 넘는데도 반드시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하니 분주히 뛰어다니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신의 병든 모습입니다.
공적인 것이 그렇고 사적인 것이 이렇기 때문에 폐하의 명을 공경히 받들고 태만을 두렵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가만히 헤아려 보면 절대로 공무를 시행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이처럼 감히 사실에 의거하여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병이 강박할 수 없음을 가엾게 여기시고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신의 몸을 염려하시어 빨리 신에게 새로 제수하신 벼슬을 거두소서. 그리하여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게 하거나 사람들이 놀라운 여론을 야기하지 않도록 하신다면 더없는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날의 칙유(勅諭)는 오직 경으로 하여금 불속이나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듯 의정부(議政府)의 일을 서둘러 수습하게 하려던 것인데 갑자기 사양하는 글이 온 것을 보고 대단히 실망하여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오직 경은 중앙과 지방 벼슬을 지내면서 공로가 뛰어났고 명성도 높았으며 고향집에서 한가히 지내면서 몸조리를 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짐은 경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며 나라와 백성의 곤란을 구제해줄 우러러볼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정사가 무너졌으니 어떻게 진작(振作)할 것이며 백성들의 소란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벼슬아치들을 각성시키고 생업에 안착하지 못하는 궁한 백성들을 돌봐줄 계책, 이 모두를 경은 말없이 속으로 타산하였을 것이다.
짐이 경을 권면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또한 말을 신중하게 하라. 그리고 경의 몸은 당초에 심히 쇠퇴한 정도에 이른 것도 아니고 또 근력을 쓰면서 분주히 뛰어다녀야 할 일을 맡기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가지고 벼슬을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은 번거롭게 글을 주고받지 말고 당일로 서둘러 올라와 몹시 갈망하는 나의 뜻에 보답하라."
하였다.
6월 24일 양력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에게 세 번째로 칙유하기를,
"정승 벼슬은 중하고 온갖 책임이 크므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결정할 때에는 진실로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되며, 머뭇거리고 사양하는 것은 애초에 의정부(議政府)에 내려오는 규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기가 극도로 심하여 조석을 기약할 수 없고 구제해야 할 급무로 시각을 다투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태연하게 들은 것이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편히 앉아서 남의 일을 보듯 한다면 이것이 어찌 변통에 부합되는 처사이고 의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경의 나라를 걱정하고 나를 아끼는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보자면 절대로 이럴 리가 없다. 또한 큰집은 한 그루의 나무로 지탱해낼 수 없고 패하게 된 장기는 한 수로 풀 수 없지 않겠는가? 세상의 모든 우환은 손을 대지 않는 데 있을 뿐이지 원래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행하지 않고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지금 온갖 법도가 해이해지고 모든 일이 헝클어져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오직 정신을 가다듬고 통솔하는 데 달려 있으며, 각성시켜 깨우치고 고무하여 불러일으키는 것도 잠깐 사이의 일일 뿐이다.
짐의 말은 간단하고 쉽지만 그 마음은 몹시 급하고 경사로운 모임도 가까워졌으니 꾸물대는 것은 더욱 합당치 못하다. 절대로 다시는 시일을 허비하지 말고 즉시 올라와 밤낮으로 고대하는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 음력 5월 6일은 바로 익종(翼宗)의 기신일(忌辰日)인데 망곡(望哭)하는 예를 행할 수 없으니 정례(情禮)로는 결연(缺然)하다.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를 각별히 택하여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7일 양력
학부 협판(學部協辦) 김규희(金奎熙)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6월 28일 양력
수옥헌(漱玉軒)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통감(統監)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하였다.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에게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임하도록 하고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이보영(李輔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였다,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서상대(徐相大)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평안북도 관찰사 이근풍(李根豐)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29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민영규(閔泳奎)를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로 임용하고,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申泰休)를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용하였다. 예식 경(禮式卿) 이근상(李根湘)을 경상북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종2품 남규희(南奎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이용태(李容泰)를 예식원 예식경(禮式院禮式卿)에 임용하고, 특진관(特進官) 조병식(趙秉式)을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奎章閣學士兼侍講院日講官)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고영희(高永喜)를 제실 회계 심사 국장(帝室會計審査局長)에 임용하고, 종2품 민형식(閔衡植)을 학부 협판(學府協辦)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정3품 유성준(兪星濬)을 내부 경무국장(內部警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기로소의 경비 부족액 1,000원, 부인회의 잠업(蠶業) 보조비 3,000원, 중앙과 지방 군대의 동복, 하복을 구매할 때의 해관세(海關稅) 8,536원 52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할 것을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한다."
하였다.
법률 제2호, 〈이민보호법(移民保護法)〉 【노동에 종사할 목적으로 이전에 외국에 간 사람은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의 인가를 받아 시행한다. 그 세칙은 생략한다.】, 제3호, 〈광업법(鑛業法)〉을 【광물 채굴과 부속 사업은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의 인가를 받아 시행한다. 그 세칙은 생략한다.】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6월 30일 양력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조병호(趙秉鎬)를 소견(召見)하였다. 조병호가 아뢰기를,
"친히 내리신 칙지(勅旨)를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어 더욱 황송한 마음이 솟구칩니다. 신이 오늘 등대(登對)하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응할 만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폐하의 큰 복을 우러러 감동한 바가 있고 미천한 저를 굽어 헤아려 주시니 감히 구구하게 거취의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폐하를 번거롭게 할 수 없어서 다만 지척에 있는 기회에 사적인 심정을 아뢰려는 것일 뿐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위난의 극심함이 어떠하며 정승 벼슬이 중하기가 어떠합니까? 그런데 신이 재주 없고 무능하기가 또 어떠합니까? 이런 때에 이런 직임을 신에게 주시니, 신이 난처하고 창피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능한 자가 그만두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교훈입니다. 신이 여러 번 간곡하게 아뢴 것은 실로 충성심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전부 으레 하는 사양으로 돌려버리시니 신은 참으로 민망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백성과 나라의 일을 염려하시어 신이 잠깐 나온 것을 명에 응한다고 여기지 마시고 빨리 명을 철회하여 주소서. 기축(祈祝)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이 벼슬을 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기대가 있고 짐이 마음속으로 선택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지금 나라와 백성의 만년 대계를 놓고 경이 우려하는 바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이것을 가지고 아뢰지 말라."
하였다. 조병호가 아뢰기를,
"신이 연석(筵席)에 나온 초기에 많은 정성을 들여 간곡히 빌며 허락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였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가 또한 극히 정중하여 신은 진실로 더욱더 황공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신의 불초함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옛 정승의 도리를 가지고 신에게 책하지 않으실 것을 신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밝은 조정의 한 가지 정사를 힘쓰는데 진실로 함께 관여할 수 없다면 곧 이것은 쓸데없는 관리입니다. 폐하께서 어찌하여 쓸데없는 관리를 등용하여 빈이름만 걸게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은 할 수 없이 부축을 받아 병든 몸을 이끌고 죽음을 무릅쓰며 올라온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뜻을 얻지 못했으나 신은 사실 낯을 들고 사람들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폐하의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크나큰 은택을 베풀어 이것을 가지고 신에게 죄를 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여론이 허용하지 않는 것과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좌우에서 짐이 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잇따라 생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을 내리시어 벼슬을 교체시켜 주소서. 그렇게 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승의 직책은 큰 원칙을 쥐고 모든 관리를 통솔하는 것이니, 경을 세세한 사무에 골몰하도록 번거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의 위풍을 빌려 결재석에 앉아서 관리들을 진압하는 것이니 경은 물러갈 필요가 없다."
하였다. 조병호가 아뢰기를,
"신은 이미 현직의 자리에 있을 수가 없고 또 감히 옛 대신들의 규범을 본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쌓인 구구한 저의 충정을 지금 폐하의 앞에서 감히 한결같이 줄곧 금묵(噤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략 몇 줄 써서 올려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습니다. 이 말이 비록 한만(汗漫)하여 거리가 먼 것 같으나 정사의 근본에 힘쓰는 실질은 이에 지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다 읽고 나서 이르기를,
"조목별로 진술한 것이 절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리 오른쪽에 두고 늘 보면서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정2품 박용화(朴鏞和)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8월 (0) | 2025.02.03 |
---|---|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7월 (0) | 2025.02.03 |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5월 (0) | 2025.02.03 |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4월 (0) | 2025.02.03 |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3월 (0) | 2025.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