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7권, 고종43년 1906년 5월

싸라리리 2025. 2. 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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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양력

【음력 병오년(丙午年) 4월 8일】  중건도감(重建都監)에서 주차(奏差)하였다. 대한문 상량문 제술관(大漢門上樑文製述官)은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이근명(李根命), 서사관(書寫官)은 종1품 윤용구(尹用求),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은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이다.


【원본】 51책 4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2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중건도감(重建都監)에서 주차(奏差)하였다. 대한문 상량문 제술관(大漢門上樑文製述官)은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이근명(李根命), 서사관(書寫官)은 종1품 윤용구(尹用求),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은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이다.

 

5월 2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윤갑병(尹甲炳)을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졸서(卒逝)했다고 한다. 왕년에 홀몸으로 나서서 전궁(殿宮)을 보호하는데 공로가 많았으니 오래되어도 공을 잊을 수가 없다. 관판(棺板) 1부(部)를 골라 보내고 돈 1,000냥(兩), 쌀 10석(石), 무명과 베 각각 1동(同)을 특별히 수송(輸送)하라. 성복일(成服日)에는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상궁(尙宮) 안씨는 역대로 누조(屢朝)를 섬기면서 시종일관 정성이 각별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명을 받들어 돌보아주었는데 충성스런 한마음은 노쇠할 때까지 나태하지 않았었다.
평소에 도운 것도 실로 많지만 왕년의 공로를 더욱 잊을 수 없는데 이번에 죽었다고 하니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관판에 대해서는 이미 조령을 받았으니 그대로 하고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품을 되도록 넉넉히 수송하라. 각색(各色) 비단 5단(端), 돈 1,000냥, 쌀 10석, 무명과 베 각각 1동, 전칠(全漆)과 매칠(每漆) 각각 5승(升)을 추가로 보내줄 것이며 성복일에는 봉시를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이규환(李圭桓)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윤치호(尹致昊)를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하였다.

 

5월 5일 양력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 이건호(李建鎬)를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이규환(李圭桓)을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에, 종2품 이용복(李容復)을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참정 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법부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칙령 제22호, 〈육군 무관과 그에 상당(相當)한 관리들의 관등 봉급령(官等俸給令) 개정 안건〉, 제23호, 〈하사(下士), 병졸(兵卒) 급료 개정 안건〉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5월 6일 양력

봉심(奉審)한 대신(大臣) 이근명(李根命)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홍릉(洪陵)의 병풍석(屛風石)이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일을 끝낸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었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엄준원(嚴俊源)을 전선사 장(典膳司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 음력 4월 17일이 바로 수릉(綏陵)의 기신(忌辰)이지만 망곡(望哭)하는 예를 규례대로 행할 수 없으니 정례(情禮)로는 매우 결연(缺然)하다.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를 각별히 택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5월 8일 양력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 남정규(南廷奎)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중추원 부의정(中樞院副議政) 김가진(金嘉鎭)을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9일 양력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 민상호(閔商鎬)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1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영교(令敎)가 있었지만 궁인(宮人) 안씨(安氏)는 보모(保母)에 속하니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장례부경(掌禮副卿) 이중하(李重夏)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직학사(直學士) 민병한(閔丙漢)을 예식원 장례부경(禮式院掌禮副卿)에, 종2품 박승조(朴承祖)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민경식(閔景植)을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에 임명하였다.

 

5월 11일 양력

정3품 송헌빈(宋憲斌)을 농상공부 공무국장(農商工部工務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요청으로 인하여 순명비(純明妃)의 국장비(國葬費) 부족액 5만 4,838원(圓) 7전(錢), 탁지부에서 관할하는 가옥(家屋) 구매비(購買費) 6만 원, 내부(內部)에서 관할하는 지방 제도(地方制度) 조사비(調査費) 1,679원, 학부(學部)에서 관할하는 9년도 각종 부족액 455원 60전,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관할하는 외국인 공급비 1만 1,060원, 한성부 기수(漢城府技手) 봉급(俸給)과 및 제반 비용 1,322원 68전, 학정 참여관(學政參與官) 지방학교(地方學校) 시찰여비(視察旅費) 264원, 의주 감리서(義州監理署)의 임시가옥설치비 및 수리비 1,347원 29전, 강계 주대 참교(江界駐隊參校) 김정성(金鼎聲)의 반장비(返葬費) 50원 30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5월 1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친왕(義親王)이 명령을 받고 출강(出彊)하여 아직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책봉하는 절차는 다시 교지(敎旨)가 내리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 민형식(閔炯植)은 군대의 직임을 거쳤으니 특별히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임용하라."
하였다.

 

종1품 윤용구(尹用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5월 14일 양력

육군 정령(陸軍正領) 이남희(李南熙)·오보영(吳普泳)을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하였으며 종2품 김용호(金龍浩)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동구릉(東九陵)의 동쪽 주맥(主脈)이 사태로 무너진 곳을 보축(補築)할 때 감독한 양주 군수(楊州郡守)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고, 정3품 오석영(吳錫泳)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이남희(李南熙)를 군부 참모국장(軍部參謀局長)에 보임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을 고칠 때 감동(監董)한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종2품 민영선(閔泳璇)·강봉조(姜鳳朝)·오상규(吳相奎), 정3품 이철우(李哲宇)·이휘선(李徽善)·윤영렬(尹英烈)·남정식(南廷植)·서인순(徐寅淳), 6품 송영빈(宋榮彬)·조상철(曺相轍)·김승민(金升旼)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5월 1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육군 참장(陸軍參將)으로서 3등에 서훈(敍勳)된 오보영(吳普泳)에게 태극장(太極章)으로 바꾸어 하사하고, 군부 고문관(軍部顧問官)인 일본인 노즈 쓰네다케〔野津鎭武〕, 경무청 고문관(警務廳顧問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는 모두 공로가 있으니 2등에 올려 서훈하고, 시미즈 야스요시〔淸水泰吉〕도 공로가 많으니 특별히 3등에 올려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을 하사하라."
하였다.

 

종2품 이종수(李宗洙)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17일 양력

태복사 장(太僕司長) 강봉조(姜鳳朝)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영선사 장(營繕司長) 이보영(李輔榮)을 태복사 장(太僕司長)에,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남정규(南廷奎)를 영선사 장(營繕司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18일 양력

종2품 정해로(鄭海魯)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비각(碑閣)을 증축하고 비석(碑石)을 세울 때에 감동(監董)한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정3품 민건식(閔健植)·최석민(崔錫敏)·신태무(申泰茂)·조영규(趙寧奎)·안준옥(安駿玉)·정대위(丁大緯), 6품 김석기(金奭基)·장지연(張志淵)·홍우순(洪祐純)·홍완식(洪完植)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5월 20일 양력

종2품 김준호(金駿昊)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22일 양력

칙령 제24호, 〈육군복장 규칙〉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종2품 오상규(吳相奎)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에서 요청한 것으로 인하여 내부 치도국(內部治道局) 경비(經費) 4만 4,500원(圓), 동래항(東萊港) 상품 박람회비(商品博覽會費) 5,000원, 인쇄국 기사(印刷局技師) 일본인 이시하라 지카쓰구〔石原近次〕가 죽은 후 각 급여금(給與金) 908원 38전(錢), 표민(漂民) 조관수(趙官收) 등 11명을 장기(長崎)로부터 구조해서 데려온 비용 100원 68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비서감 승(祕書監丞) 김승민(金升旼)이 은명(恩命)을 거둘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서로 의사가 통하고 마음이 서로 맞아서 진심으로 구하는 것에서는 아무리 은퇴한 사람이라도 숨어 있을 수 없다. 짐(朕)이 꼭 만나려고 하는 것이 절절하고 진지하였는데 아직도 떠나려는 뜻을 내세우면서 금옥(金玉)과 같은 소리를 숨기니 의혹이 없지 않다. 생각을 고쳐먹고 결단을 내려 조정에 나옴으로써 학수고대하는 뜻에 화답하라. 현직에 붙잡아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5월 23일 양력

포달(布達) 제132호, 〈궁내부 관등 봉급령(宮內府官等俸給令) 중 개정 안건〉을 반포하였다.

 

5월 25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아뢰기를,
"대령(待令)한 의관(醫官)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 성상의 체후가 담이 걸려서 불편하다고 하는데, 속히 신들이 입진(入診)하여 자세히 살피고 탕제(湯劑)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리 심하지 않으니 탕제는 자내(自內)에서 의논하여 정하겠다. 경들은 입시(入侍)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주(洪州), 남포(藍浦) 등지에서 많은 백성들이 집결하여 의거를 행사한다는 핑계로 성읍을 점거하였으니 정세는 매우 흉흉합니다. 신임 홍주 군수(洪州郡守) 윤시영(尹始永)을 선유사(宣諭使)로 차하(差下)하고 그로 하여금 미리 가서 효유(曉喩)하여 해산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대소(大小) 민인(民人)들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아, 너희 대소 민인들은 짐(朕)의 명령을 똑똑히 들으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면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다.
돌아보건대 지금 국세(國勢)의 위태로움이 과연 어떠한가? 진실로 충성심을 가지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기 자기의 생업에 힘써서 그 근본을 굳건히 다진 연후에야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붙들고 위태로운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몰려들어 폭동을 일으키고 의리를 제창한다는 핑계로 스스로 죄를 짓고 무기를 휴대하고 성읍(城邑)을 점거하여 관장(官長)을 능멸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침해하는가?
풍성(風聲)이 미치는 곳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준동하여 점차 크게 확대되는 날에는 재앙의 싹을 막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국법이 지극히 엄하니 어찌 요행히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토벌하게 되면 옥석(玉石)이 분별되지 않을 것이고 그 죄를 논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니 그 정상을 살펴보면 어찌 참혹하지 않겠는가?
이에 우선 짐의 극진한 마음을 표명하여 화복(禍福)에 대해서 깨우쳐주니 너희들은 다친 사람을 보호하듯이 하는 짐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즉시 해산하여 각기 자기의 생업에 돌아가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헌종조(憲宗朝)에 승은(承恩)을 입은 궁인(宮人) 김씨(金氏)에 대해서 지난날 이해를 생각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숙의(淑儀)로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종2품 서긍순(徐肯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날 조칙(詔勅)이 내린 것을 보니 학교를 부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으셨으니, 아! 왕언(王言)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오늘날 군신(君臣) 상하가 마음을 밝히고 눈을 넓혀 서둘러 실행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성상의 조칙이 일단 내리자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고무되지 않음이 없고 앞을 다투어 학교를 세우고 자제들을 모집하여 교육시키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이것이 확대된다면 각 도(道), 각 군(郡)으로부터 각방(各坊), 각동(各洞)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가지지 않음이 없고,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상인, 농부의 자제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에 들어가 각기 그 기예를 닦게 될 것이니 국가가 부흥될 가망이 진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성대하지 않으며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그렇지만 유도(儒道)는 우리 한국에서 3,000년 동안 전승해오는 종교(宗敎)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치를 근본으로 하여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행하여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우며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워지니 천하에 이른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라는 교화의 도구가 이 도리에서 나옵니다.
대체로 하늘이 백성을 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백성이 생겨났으니 유도를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나라가 있으니 종교를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천하 만국이 제각기 숭상하는 종교가 없지 않다는 사실은 속일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본조에서 유도의 흥성은 전세(前世)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거의 끊어져서 근근히 유진된다고 하겠으니 신진 후생(新進後生)이 있기는 하지만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어떤 물건인지 모르게 될 것이니 이 어찌 대단히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물론 시무(時務)에 힘써서 공리(功利)의 효과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교를 붙드는 데 백배의 힘을 써서 후생 유학(幼學)으로 하여금 모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의(大義)를 알게 한 연후에야 백성들과 취향이 바른 데로 나가서 부모를 버리거나 임금을 뒷전에 놓는 우환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명주(明主)가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우선 성균관(成均館) 부속의 명칭을 고치고 조금씩 그 녹봉을 후하게 해서 스승을 가려서 세우고 선비를 뽑아서 충원하여 선성(先聖)의 도를 강론하고 선성의 예를 익히게 하며 각 군의 향교(鄕校)까지 모두 이렇게 하도록 하여 신설한 학교와 서로 장애가 없게 되면 시무자(時務者)는 기술을 행하여 부강한 생업을 이룰 수 있고 종교를 숭상하는 사람은 그 학문을 전하여 강상(綱常)의 도를 밝힘으로써 새것과 옛것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하지 않고도 인재를 양성하는 성과는 다른 나라보다 배나 우수하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성상께서는 깊이 유의하시어 속히 조령을 내려 성균관을 태학(太學)으로 만들어 독립시키고 종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부흥시켜 선비를 키우는 일을 해당 관(館)에서 참작하여 찬정(撰定)하여 시행하도록 한다면 세상의 도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종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설치하고 자제들을 모집하여 교육하고 흥성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아뢴 내용을 가납(嘉納)하겠다."
하였다.

 

5월 2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소의(昭儀) 이씨(李氏), 숙원(淑媛) 이씨(李氏),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귀인(貴人)에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민상호(閔商鎬)를 제도국 총재(制度局總裁)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5월 2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 민영규(閔泳奎)에게 특별히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 대부로 하비(下批)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편치 않은 지 이제는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구주(口奏)에 대한 비답에서 연이어 차도가 있다는 전교를 받았는데 통순산(通順散)을 드신 후에 몸이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가슴에 담(痰)이 차서 심히 괴롭고 호흡이 순조롭지 못하더니 지금은 조금씩 차도가 있다. 통순산이 효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리와 옆구리가 아직 약간 결리는데 상부에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 필시 풍화(風火)가 겉으로 발산되는 것일 수 있다."
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이것은 풍화의 징후인데 밖에서 다스리는 약을 써보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섣달에 내린 눈을 녹인 물로 씻고 우황(牛黃)과 웅담(熊膽)을 피부에 발라보았다."
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폐하의 보령(寶齡)이 이미 노쇠해지셨으니 춘추(春秋)가 한창인 때와 다릅니다. 섭양(攝養)과 보호하는 방도에 곱절 유의해야 합니다. 옛사람들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논하여 말하기를,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어리석은 것 같기는 하지만 사실은 절실하고 긴요한 것입니다. 음식을 조절하고 생활을 조심한다든지 생각을 적게 하고 정신을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 모두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1품 민영규(閔泳奎)를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에 제배하였다.

 

대죄(待罪)하고 있는 김승민(金升旼)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세상을 피해 자신을 수양하면서 등용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위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주자(朱子)와 정자(程子)가 말한 성(性)의 연원으로 소급해가고 정암(靜庵)과 퇴계(退溪), 율곡(栗谷)과 사계(沙溪)의 학문 계통을 파악하여 학문의 경계(境界)를 강구하는 동시에 의리(義理)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식견이 좁고 재주가 둔하고 덕업(德業)이 전혀 없어서 위로는 성문(聖門)의 안자(顔子), 증자(曾子) 무리를 보기가 부끄럽고 아래로는 가정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훈계를 저버렸습니다.
보통 문서에 대처하는 일도 제대로 못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분수에 넘치게 비서원의 임무를 받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작록(爵祿)이란 세상 사람들을 면려하고 둔한 사람들을 연마하기 위한 것으로써 덕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 수양해서 이치를 통달하고 의리에 정통하고 대단히 어진 사람이 아니면 담당할 수가 없으며 비상한 재주가 없이는 난국을 타개하면 곤경을 수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근간에 국사(國事)의 어려운 형편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성상께서 근심하고 노고를 하는데도 신하들은 숨어버렸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었으니 도와 덕을 온전히 이루어 성상의 크나큰 위업을 도울 수만 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쉽고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고 정성과 힘을 모두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외람되게 벼슬을 차지한다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오만하게 명을 거스르는 죄는 범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본래 저의 구구한 뜻이었습니다마는 미물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감당해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조정의 사체(事體)에서 결코 궁색하게 벼슬을 주어 자리나 채울 수는 없습니다.
신하의 분의(分義)를 지니고 어찌 요행수로 벼슬을 차지할 기대를 가지겠습니까? 이미 상소에서 지극한 심정을 진달했던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훌륭한 조정에서 신을 후설(喉舌)의 임무에 천거해서는 안 될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시켜보자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세도(世道)의 청백 여부와 국가의 성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존망과 백성들의 고락은 전적으로 어떻게 인재를 선발하여 벼슬에 임용시키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성비(聖批)를 읽어보니 서로 의사가 통하고 뜻이 맞는다고 하니 더욱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명왕(明王)이 현신(賢臣)을 만나는 경우에 위로는 조종(祖宗)의 유업(遺業)을 추세우고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생령들을 구원하였을 때 의사가 통하고 뜻이 맞는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처럼 재주가 없어서 폐하를 돕지도 못하고 덕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할 수도 없는데도 감히 의사가 통하고 뜻이 맞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재를 등용하면서 사람과 벼슬이 걸맞는가 걸맞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문하고 억지로 맡겨서는 안 되는 임무를 강제로 맡긴다면 중한 나라의 체통을 깎게 될 뿐 아니라 지극한 선비들의 기대에도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간절한 심정을 살피고 속히 신의 벼슬을 교체시켜서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주어 저의 분수에 맞게 살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답과 칙유(勅諭)에서 여지없이 털어놓았으므로 뜻이 맞을 것으로 여겼으며 실로 사양하는 글이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학문은 실천하자는 것이다. 훌륭한 재주를 품고 있으면서도 시골에서 한가히 지내며 고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천하가 태평한 시절에는 용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근심거리가 계속 몰려드니 은거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짐(朕)의 갈망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네가 평소에 자신에게 기약한 것도 이것이니 줄곧 버티다가 훌쩍 떠나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러니 너는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고 당일로 입대(入對)하여 기다리는 뜻에 보답하라."
하였다.

 

5월 29일 양력

비서감 승(祕書監丞) 김승민(金升旼)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그대는 덕업(德業)이 높고 재주와 식견이 고명하다 하여 한번 만나보자고 한 것인데 지금 만나보게 되니 짐(朕)의 마음은 기쁘다."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어리고 학식이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은유(恩諭)를 입었으나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게 나이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겠는가?"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맹자(孟子)로 말하자면 하늘이 낸 성인인데도 나이가 40살이 되어서야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게 되었는데 더구나 신처럼 용렬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공명(孔明)과 등우(鄧禹)는 40살이 되기 전에 한(漢)나라의 보필이 되었으니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가지고 너무 겸손하게 사양하지 말라. 너의 학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어려운 때를 만나 공적을 이루어주기를 실로 바라는 바이다."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소지(召旨)가 몹시 간곡하기 때문에 신은 학식이 부족하지만 할 수 없이 올라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나랏일에 대해서는 군신 상하가 기어이 함께 거행해 나가려고 하니 겸양하지 말라."
하였다. 김승민이 아뢰기를,
"신이 궁벽한 시골에 가서 자취를 감추더라도 성상의 나라에서 폐하의 혜택 속에 자라난 몸으로써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생령(生靈)들이 도탄에 빠져있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어려운 이때에 마땅히 나를 도와서 나라를 구제하기 위한 계책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김승민이 아뢰기를,
"신은 성정(性情)이 편벽되어 변통(變通)하기가 어렵고 재주와 식견도 적기 때문에 진작(振作)시킬 수 없는데 어떻게 감히 폐하를 도와 나라를 구제할 계책을 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 예의의 근본이지만 지금 나랏일은 날로 잘못되는 판에 너무 겸양할 필요가 없다. 떠나갈 마음을 돌려세우고 나라를 구제할 계책을 짜서 올리라. 옛날에 공자(孔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깊이 우려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폐하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천하를 구제하는 것인데, 대경(大經)과 대법(大法)도 ‘마음’이라는 한 글자를 넘어서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안위(安危)는 오직 ‘마음’이라는 글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네 말은 약석(藥石)이라고 하겠다. 북쪽 지방에서 예전에 현자(賢者)가 많이 나왔다."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미천한 저를 어떻게 여러 현인들에게 비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금에 개명(開明)한 의리(義理)에 대해서 듣고 싶다."
하니, 김승민이 아뢰기를,
"수구(守舊)에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있으며 개화(開化)에도 취할 것이 있고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수구에서 채용할 것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융성이고 개화에서 취해야 할 것은 기계(器械)와 농사의 편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악과 법도(法度)는 우리나라에 구비되어 있으니 기계를 외국에서 가져다 쓰는 것은 역시 중도(中道)라고 할 수 있다. 고금을 절충하고 시세(時勢)를 절충하면 나라가 번영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승민이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홍주(洪州) 등지에 의병(義兵)이 일어나 소란을 피운다고 합니다. 속히 선유사(宣諭使)를 차임(差任)하여 효유(曉諭)해 해산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병은 의리를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소멸해서는 안 되고 그저 효유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민영규(閔泳奎)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경은 중앙과 지방 벼슬을 두루 지내면서 의젓하고 바른 태도로 시종일관 일을 처리하여 특출한 공적을 세웠고 일찍이 성망(聲望)이 있었기 때문에 짐(朕)이 마음을 둔 지 오래다.
이번에 제수(除授)한 것은 전적으로 마음으로 뽑은 데서 나온 것이니 몽복(夢卜)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는 이때에 반드시 경이 나라를 운영하는 일을 맡아보아야 하는데 조야(朝野)의 관심도 경에게 쏠리고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즉시 일어나 명에 응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간택(揀擇) 날짜를 택하여 들이도록 하였으나 수도와 지방에서 처자 단자(處子單子)를 거둔 것이 지금까지도 얼마 안 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후로 신칙(申飭)한 것이 아주 엄했는데도 줄곧 모르는 것처럼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여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다. 즉시 내부(內部)에서 특별히 제칙(提飭)하여 기어이 간택 날짜 안으로 일제히 받아들이게 하라. 그래도 지체하는 일이 있다면 그 죄가 어떤 정도이겠는가? 명심해서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서울과 지방에서 처자 단자를 도착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초간택(初揀擇), 재간택(再揀擇), 삼간택(三揀擇) 날짜는 음력 5월 보름경부터 7월 20일경으로 택하여 들여올 것이며 처자가 궁중에 들어올 때의 의복은 명주와 모시를 넘어서지 말라는 내용으로 일체 분부하라."
하였다. 예식원(禮式院)에서 초간택은 음력 5월 13일로, 재간택은 7월 14일로, 삼간택은 같은 달 22일로 택하여 주하(奏下)받았다.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심상훈(沈相薰)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정2품 주석면(朱錫冕)을 함경남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민병석(閔丙奭)을 표훈원 총재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듣건대 영남의 안동(安東) 등지에 추악한 백성들이 집결하여 의리를 제창한다는 핑계를 대고 무기를 휴대하였는데 창궐한 기세가 아주 성하다고 합니다. 청송 군수(靑松郡守) 안종덕(安鐘悳)을 경상북도 선유사(慶尙北道宣諭使)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급히 가서 효유(曉諭)하여 해산시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30일 양력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에게 다시 칙유(勅諭)하기를,
"재상이 나라와 안위(安危)를 함께 하는 것은 마치 기둥이나 대들보가 큰 건물을 떠받치고 노 젓는 배가 큰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언제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마는 하물며 이 어려운 때를 당하였으니 그것이 더욱 급하고도 절실하다. 마치 무너지려는 집을 놓고 지탱할 것을 찾고 물 새는 둑을 두고 급히 보수하는 것과 같으니 서둘러 찾아야 하며 잠시라도 지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경은 원래 높은 명망을 지녔고 온 나라가 경의 뛰어난 풍채를 우러러는 것도 오래되었다.
이번의 천거에 대해 말하면 짐의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여론에도 부합되니 경이 명을 듣고서는 재빨리 뛰쳐나오리라 생각하였는데 겸손하게 사양하고 여유를 부리면서 정승에 대한 고사를 인용하여 갑자기 이렇게 거부하는 상소를 부쳐왔으니 뜻밖이라 놀랍고 실망스럽다.
경이 시종(侍從)의 벼슬로 좌우에서 도운 지도 오래되었으니 경을 아는 사람으로는 짐만 한 사람이 없다. 평소에 경에게 관심을 쏟은 것에 대해서 경도 마땅히 그에 맞게 부합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장황하게 많은 말을 하겠는가? 경은 마땅히 재량(裁量)하여 번거롭게 글을 왕복하게 하지 말고 즉시 등대(登對)하여 밤낮없이 고대하는 짐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장례부경(掌禮副卿) 민병한(閔丙漢)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태복사 장(太僕司長) 이보영(李輔榮)을 예식원 장례부경(禮式院掌禮副卿)에, 비서감 승(祕書監丞) 조남익(趙南益)을 태복사 장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주전원 경(主殿院卿) 이근호(李根澔), 특진관(特進官) 민병한(閔丙漢)·이중하(李重夏),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민경식(閔景植), 경리원 감독(經理院監督) 유신혁(劉臣赫), 예식원 부경(禮式院副卿) 고희경(高羲敬)에게 제도국 의정관(制度局議政官)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5월 31일 양력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 윤태흥(尹泰興)을 영희전 제조(永禧殿提調)에, 종2품 김덕한(金德漢)을 종묘서 제조에, 종2품 정대위(丁大緯)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에게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칙령 제25호, 〈농사과장(科場) 관제(農事試驗場官制) 폐지 안건〉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요청으로 인하여 영관(領官), 위관(尉官)의 봉급과 하사(下士), 병졸(兵卒)의 급료 증가액 6만 6,528원(圓), 도량형기(度量衡器) 제조비(製造費) 5만 2,415원, 제중원(濟衆院) 찬성금(贊成金) 3,000원, 샌프란시스코〔桑港〕에 거류하는 본국 백성들의 재해 구휼금 4,000원, 광제원(廣濟院) 확장비 2만 7,805원, 지방에 나가 주둔하는 비용 1,768원, 학부(學部) 경비 증가액 1만 9,618원, 경성공원(京城公園) 지표석비 183원, 황해도 관찰부(黃海道觀察府) 경관(警官) 처소 수리비 187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사안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 민영규(閔泳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은명(恩命)을 받은 후부터 한밤중에도 깨어나서 탄식하며 밥맛마저 잃은 지 여러 날입니다. 참으로 걱정하며 속을 태운 것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도 가도 해안이 나오지 않을 때처럼 막연하기만 한데 신 한 몸이 총애를 받은 것에 대한 놀라움이나 복이 지나친 것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체로 보상(輔相)을 뽑는 데에 귀중하게 여기는 바는 세 가지이니, 덕망이 첫째이고 식견과 도량이 다음이고 재주와 계책이 또 그 다음입니다. 슬기로운 제왕의 덕에 순응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조정에 앉아서 관리들을 다스리는 것을 은연중에 맹호 같은 위청(偉靑)이나 곽거병(藿去病) 같은 것을 덕망이라고 하며, 경술(經術)을 근원으로 하여 고금을 훤히 통달하며 큰일에 임해서 단호한 결단을 내리기를 마치 막을 수 없는 강처럼 하는 것을 식견이라고 하며, 힘든 일 쉬운 일 가리지 않고 감격하여 어려운 일을 조정하고 주선(周旋)하여 미봉(彌縫)하며 여러 가지 정사에서 거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해내지 못하는 없는 것을 재주와 계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에게는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없습니다. 신이 폐하를 섬긴 것은 오래되었으며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벼슬살이에서 이렇다 할 좋은 명성을 들은 것이 없으니 덕망은 헤아릴 것이 못 되고, 자잘한 계책과 식견은 조금도 펼치지 못하였으니 식견과 도량도 물을 것이 없으며, 재주가 적고 성품이 졸렬하여 일에 부닥치면 흐지부지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가정을 다스리기에도 부족하고 과오를 시정하기에도 부족하였으니 재주와 계책 또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폐하께서 신에게서 어떤 점을 취하여 대뜸 삼사(三事)의 위에 등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까?
송(宋)나라 신하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천하가 잘 다스려지는가 어지러운가는 재상에게 책임이 있다.’ 하였습니다. 융성하는 태평한 때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비유컨대, 만 섬들이 용양선(龍驤船)이 저 바다에 떠서 바람을 맞으면서 물결을 가르며 나가다가 사나운 파도를 만나 침몰되고 말 것 같은 때에 유능한 사공에게 노와 삿대를 주고 그물과 헌 옷감을 마련하도록 맡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물에 익숙하지 않은 하찮고 용렬한 선원에게 맡기는 격이니 아! 두렵습니다.
그리고 신은 폐하에게 의리상으로는 임금과 신하이지만 은혜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으니 신하를 알아주는 것은 임금이며 아들을 알아주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신이 조정에 선 이래로 어떠한 공로도 세우지 못하였음은 폐하께서 해와 달처럼 분명하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 조용하고 정직하였다고 하여 내세워주면서 나라를 운영할 책임을 맡겼습니다. 신은 물론 폐하께서 유능하게 키워주려는 인자한 마음과 훌륭하게 만들어주려는 마음으로, 우선 이처럼 신을 위로하고 방조하며 신을 이렇게나 내세워줌으로써 신이 애써 기대하던 대로 미치게 하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선발에 결함이 있고 여론이 부합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은 비록 무능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유(四維)003)  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은총이 탐나서 요행수로 임명된 것을 복으로 여기고 외람되게 임금을 보필하는 반열에 응하여 뻔뻔스럽게 일을 도모하고 결론을 내리는 자리에 나선다면 동중서(董仲舒)가 말한 절개가 없고 염치없는 자이니 사유에서 하나라도 잃는다면 신이 장차 무엇을 가지고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이에 감히 실정을 호소하며 성상께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하니, 황상(皇上)께서는 난국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꾸밈없는 신의 말을 살펴 철회하는 명령을 내려서 천직(天職)을 중하게 만들고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번에 걸친 칙유에서 마음속의 생각을 털어놓고 하고자 한 말을 남김없이 다 말했기 때문에 어느 때이건 마음을 돌려서 조정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뜻밖에 사양하는 글이 온 것을 보게 되었다.
경의 고가(古家)에 대해서 말하면 대대로 충정(忠貞)을 두터이 간직하고 나라와 고락을 같이해 왔다. 나라의 안녕과 위험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쉬운 일이든 험한 일이든 간에 지금까지 한결같이 의리에 맞게 살아왔으니 짐은 경에 대해 모르는 일이 거의 없다.
사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응당 이런 명이 있지도 않았겠지만 이미 명령하였으니 경은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을 마치 격식을 갖추는 것처럼 굴지 말아야 한다.
탐오하고 염치없는 어지러운 풍속을 경의 청렴으로 바로잡을 수 있고, 타락하고 무너진 온갖 법도도 경의 규범이 있어야만 진작시킬 수 있으며, 백성의 소요와 변경의 난리도 조정에서 띠를 드리우고 정무를 보는 한 경의 확고부동한 위엄이 있어야만 역시 편안하게 정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에게 부탁하는 일이 이러하니 경은 시국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다시는 번거롭게 굴지 말고, 즉시 일어나 연석(筵席)에 나와서 내가 간곡하게 갈망하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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