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양력
【음력 병오년(丙午年) 7월 13일】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이 아뢰기를,
"육군 보병 정령(陸軍步兵正領) 윤영렬(尹英烈)은 일찍이 삼남집포사령(三南戢捕司令)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순찰하였으며 세운 공적도 이미 많습니다. 권장하는 데 있어서 포상을 시행해야 하겠지만 은전과 관련되는 일이므로 본부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특별히 승서(陞敍)하라."
하였다.
9월 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친왕(義親王)이 일본에서 관병(觀兵)할 때의 접반원(接伴員) 이하에게 기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내천현(神奈川縣) 지사(知事) 스후 고헤〔周布公平〕를 특별히 훈 1등에 서훈(敍勳)하고, 경시청 경시(警視廳警視) 이노우에 다카야〔井上孝哉〕를 특별히 훈 3등에 서훈하며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경시청 경시 다가와 세이사쿠〔田川誠作〕를 특별히 3등에 서훈하고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통감부(統監府) 통역관인 훈 6등 가와카미 다치이치로〔川上立一郞〕를 특별히 훈 5등에 올려 서훈하고 태극장을 하사하라."
하였다.
육군 정령(陸軍正領) 윤영렬(尹英烈)을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하였다.
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査局長) 고영희(高永喜)가 아뢰기를,
"지난날 풍부회사(豐阜會社)의 장부를 심사(審査)하는 일로 심사관 박용규(朴容圭)·김진현(金鎭賢)과 기사(技師) 미국인 코윈〔高仁〕을 평양군(平壤郡)의 본사와 삼등군(三登郡)의 탄광에 파견하여 장부를 사열하고 실상을 적간(摘奸)하게 하였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를 받아 보니, 탄광의 공사 형편과 기계 배치 및 각종 비용은 서로 대조해서 증명할 수 있으므로 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중 낙성(落成) 연회비 1만 9,150냥과 탄광 사무소의 물품값 1,060냥 8전은 장정(章程)에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많은 수량이 턱없이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개탄할 일입니다. 속히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도로 징납하도록 해당 회사에 신칙하여 공사 비용에 보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일 양력
칙령 제45호, 〈학부 직할학교 직원 정원령(學部直轄學校職員定員令)〉, 제46호, 〈한성 재판소 관제(漢城裁判所官制) 중 개정 안건〉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지방 제도 조사소의 2개월 간 연기된 응용비(應用費) 535원, 광무국(鑛務局)과 관선과(管船課)의 경비 524원, 광산 사무국의 경비 2만 2,173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일을 회의를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는 자내(自內)의 예(例)로 직접 행할 것이니, 칙임관(勅任官) 이상, 비서감(祕書監), 규장각(奎章閣)은 참석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경은군(景恩君) 이재성(李載星)은 가까운 종친으로 공로가 또한 기록할 만하고 창산군(昌山君) 이해창(李海昌)은 종실의 반열로서 공로가 뛰어나니 모두 특별히 훈 1등에 서훈(敍勳)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배종 무관장(陪從武官長) 육군 부장(陸軍副將)인 훈 2등 이근호(李根澔)는 숙위(宿衛)하는 직무를 수행하여 그 공로를 기록할 만하니 특별히 훈 1등에 올려 서훈하며, 비서감 경(祕書監卿)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용태(李容泰)는 다년간 복무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훈 2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육군 부장인 훈 3등 이봉의(李鳳儀)는 이미 직임을 맡아 근면하였고 또한 지난 공로도 있었으며, 태의원 경(太醫院卿)인 훈 2등 민영린(閔泳璘)은 외국에 가서 일찍이 공로가 있었으니 모두 특별히 훈 2등에 올려 서훈하라.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 조남익(趙南益)은 직무에 근면하였으니 특별히 훈 4등에 서훈하고,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 박승봉(朴勝鳳)은 직무에 종사함이 근면하고 성실하니 특별히 훈 5등에 서훈하며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라."
9월 5일 양력
정2품 이근홍(李根洪)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에게 광산사무국 총재(磺山事務局總裁)를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가례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삼간택(三揀擇) 뒤에 별궁(別宮)에 나아갈 때 분사(分司)가 배위(陪衛)하는 것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기묘년(1879)과 병인년(1902)의 전례대로 궁내부(宮內府)에서 품지(稟旨)하여 차출(差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아뢰기를,
"피고 신기선(申箕善)의 안건을 심사하니, 현재 함경남도관찰사 겸 해도재판소판사로서 징역 7년 죄수로 선고 한 뒤에 제멋대로 태일백(笞一百)에 방송(放送)한 사실을 명백하게 공초하였습니다. 《형법대전(刑法大全)》 제312조 6항의 고의로 죄수를 석방한 자에 대한 법조문에 비추어, 참작해서 2등을 감하고 징역 2년에 처하도록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참작할 문제가 없지 않으니 특별히 방송하라."
하였다.
9월 6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가을 기후가 갑자기 쌀쌀해졌으니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를 친히 행하겠다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애써 따르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를 보내 나아가서 거행하게 하되 칙임관(勅任官) 이상과 규장각(奎章閣)이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봉의(李鳳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민경호(閔京鎬)를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재극(李載克)에게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9월 9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근상(李根湘)이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살펴보니, 재간택(再揀擇) 뒤에 본가의 호위는 삼영문(三營門)의 장교 각 1인과 군사 10명으로 하여금 삼간택 전까지 본가 근처에서 돌아가며 입직하여 잡인들을 금하도록 한 정식이 일찍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군사제도는 종전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호위국(扈衛局)의 군사 10명씩을 장교가 거느리고 돌아가며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0일 양력
종1품 신기선(申箕善), 정2품 이도재(李道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근상(李根湘)이 아뢰기를,
"방금 주전원 경(主殿院卿) 양성환(梁性煥)의 보고를 받아보니, ‘궁금령(宮禁令) 제6항에 현직 군인이 제복을 착용하고 궁문으로 들어올 때에는 문표(門票)를 요구받지 않는다고 한 것은 직분상 군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김영진(金永桭)은 현직을 맡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갑자기 궁문에 들어와 스스로 죄를 범하였으므로 체포해야 하지만 군인이므로 이에 보고합니다.’ 하였습니다.
금령을 준수하지 않고 어려움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육군 법원에 명하여 체포하여 처벌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아뢰기를,
"지금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이윤용(李允用)의 보고를 받아 열어보니, ‘피고 권직상(權直相)의 안건을 심리하니, 현임 전주 군수(全州郡守)는 누락된 결수(結數)를 국고에 승총(陞總)하지 않았고, 또 정공(正供) 외에 백성들에게 걷어 들이는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면서 즉시 없애지 않았으니, 죄가 실로 피할 수 없다고 명백히 공초하였습니다. 《형법대전》의 좌장률(坐贓律)에 비추어, 참작하여 2등을 감하고 징역 2년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원래 의율(擬律)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참작하여 헤아려야 할 문제가 없지 않으니 특별히 분간(分揀)하여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9월 11일 양력
포달(布達) 제138호, 〈제실 광산 규정 폐지에 관한 안건〔帝室礦山規程廢止件〕〉을 반포하였다.
9월 1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재간택(再揀擇)과 삼간택(三揀擇) 날짜를 다시 물려 정하여 들이라."
하니, 장례원(掌禮院)에서, ‘재간택 날짜는 음력 8월 5일로, 삼간택 날짜는 10월 21일로 추택(推擇)하였다.’라고 아뢰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직 선량한 자가 옥사를 판결해야 중도에 맞지 아님이 없을 것이니, 경중을 따져 알맞게 처리하는 데에는 원래 공정한 기준이 있으니, 진실로 지루하게 심리할 필요가 없다. 적체된 죄수를 빨리 처리하라고 거듭 강조한 것이 두세 번이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전부 깨끗하게 처리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세월을 끌고 있는 것은 법 맡은 관리들이 별 어려움 없이 법을 농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억울한데도 신원 받지 못한 자가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니, 매우 통탄할 만하다. 그리고 무더위와 장마도 백성들이 원망하는 법이거늘 비좁은 감옥에서 근심과 시름, 답답한 심정으로 쉽게 병에 걸리니 또한 가엾은 일이다. 법부와 육군 법원에서 육범(六犯) 및 나라의 재산을 포흠한 죄인 외에는 사실을 정확하게 조사하여 용서할 만한 정적(情跡)이 있거든 기결과 미결을 막론하고 모두 석방하여 죄인을 신중하게 심의하는 지극한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양력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 참정 대신(議政府參政大臣), 각 부 대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의장(議長), 승(丞), 사관(史官), 규장각(奎章閣) 관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관리들을 수옥헌(漱玉軒)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만수 성절(萬壽聖節)에 문안하였기 때문이다.
준명전(濬明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각 국 영사(領事)를 접견하였다.
학부(學部)에서 사범학교 교원 양성소(師範學校敎員養成所) 졸업시험을 행하였다. 이겸성(李謙聖) 등 31인을 뽑았다.
경복궁(景福宮) 내에서 원유회(苑遊會)를 설행하였다. 만수성절(萬壽聖節)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9월 1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이봉의(李鳳儀)를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서상하(徐相夏)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김규희(金奎熙)에게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9월 18일 양력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이, ‘삼가 이달 12일 특사 조칙(特赦詔勅)을 받들고 육군 법원의 기결, 미결 죄수 중에서 석방해야 할 자인 윤대식(尹戴植) 등 23명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19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경호(閔京鎬)를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이도재(李道宰)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비서감 승(祕書監丞) 조경구(趙經九)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이원긍(李源兢)을 비서감 승에, 종2품 고희경(高羲敬)을 궁내부 예식관(宮內府禮式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포달(布達) 제139호, 〈궁내부 관제 중 비서관 2인 증치 및 분과(分課)를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祕書官二人增置及分課改正件〕〉을 반포하였다.
9월 20일 양력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 한진창(韓鎭昌)을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에, 법부 협판(法部協辦) 김규희(金奎熙)를 전라북도 관찰사에,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조경구(趙經九)를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특진관(特進官) 남규희(南奎熙)를 봉상사 제조에, 표훈원 참서관(表勳院參書官) 이병목(李秉穆)을 상방사 장(尙方司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감 승 이원긍(李源兢)을 법부 협판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이 아뢰기를,
"금년 가을 장맛비는 전에 없었던 것입니다. 충청 남북도 관하의 각 군이 특히 수재를 많이 입었습니다. 가옥이 물에 떠내려가고 사람이 빠져죽고 토지가 파괴된 수량이 매우 많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듣기에 너무나 놀랍고 참혹하여 위로하고 돌봐주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홍주 군수(洪州郡守) 유맹(劉猛)을 충청남도 위유사(忠淸南道慰諭使)로 차하(差下)하고 진천 군수(鎭川郡守) 이탁응(李鐸應)을 충청북도 위유사(忠淸北道慰諭使)로 차하하여 나누어 가서 위로하고 폐하의 덕의(德意)를 선포하게 하며, 수재를 입은 상황을 개록(開錄)하여 수시로 보고하게 함으로써 조세를 견감하여 구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충청 남북도가 전에 없는 수재로 언덕이 물에 잠기고 고을과 촌락이 물살에 휩쓸린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니, 자리에 누워도 뒤척이며 잠을 잘 수 없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근래 형편이 곤란하여 비록 평년에도 오히려 생업에 안주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구나 이처럼 뜻밖의 재난을 당한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요행히 살아난 것도 열 집에 몇 집 안 되고, 집이 물에 떠내려가 황폐하고 영락한 것이 어느 곳이나 할 것 없이 다 같으며, 논밭이 유실되어 올 가을 수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옥토가 황무지로 된 것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내 아픔과 같아서 비단옷을 입고 쌀밥을 먹어도 편안하지 못하니, 다시 말은 만들어 위유사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재난을 당한 각 군의 상황을 하나하나 철저히 조사해서 시급히 보고하게 하라. 장사를 지내주고 구휼하는 은전과 집을 짓고 안착시키는 방도, 세액을 실정에 따라 견감해 주는 문제를 모두 충분히 상의하여 계획한 다음 두 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여 행여 지체하지 말도록 함으로써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조정의 지극한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1일 양력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13도에 훈령(訓令)을 내렸다. 【지방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지방관들이 각각 직무에 힘을 다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성심으로 보호하고, 덕성과 지식을 점차 계도함에 달려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난 시기에는 옛날 것을 답습하는 것이 폐단으로 되었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버릇으로 되어 설사 쇄신할 뜻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형편상 시행할 수가 없어서 위로는 황제 폐하가 위임하신 성의(聖意)를 위반하고 아래로는 인민들이 기대하는 심정에 부합하지 못하여 정치는 갈수록 부패하고 백성들은 나날이 도탄에 빠졌다. 이것이 밤낮으로 걱정하며 개혁 쇄신을 기도하고 실시하는 까닭이다. 금년 봄에 지방제도조사소(地方制度調査所)를 본부(本部)에 설치하고 부(府)와 군(郡)의 관제를 일신하여 개정해서 본 년 10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이미 상주하여 재가를 받아 오늘 반포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관찰사, 부윤, 군수 등 지방 관헌은 결심하고 각성하여 종전대로 답습해서 궁색하게 지내거나 물끄러미 관망하는 지난날의 폐습은 단칼에 베어버리고 개혁의 취지와 쇄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열심히 맡아 나설 것이다. 폐단과 고질을 제거하고 이용(利用)·후생(厚生)하는 인민에 관한 제반 정책에 대해서는 각각 완급(緩急)에 따라서 힘을 다하여 완성할 것을 도모하여야 한다. 만일 이러한 문제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형편을 상세히 기록하여 의견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라. 지방 관헌이 인민을 보호하는 직무에 관심을 두지 않고 법령을 위배하면서 거리낌 없이 탐오 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며, 인민들은 법령에서 정한 외에는 털끝만한 물건이라도 토색을 받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알고 정치의 득실에 대하여 극력 관심을 가지고 관헌들이 무리하게 침해하는 폐단이 있으면 명확한 증거를 들어 본 부에 와서 제출하면 사리에 따라 처결하여 티끌만큼도 토색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이 훈령을 관하에 신칙하여 각군(各郡)에서는 거리에 방을 내걸어 한 사람도 듣지 못했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원본】 51책 47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41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9월 22일 양력
황태자비(皇太子妃)의 재간택(再揀擇)을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총판(總辦) 윤택영(尹澤榮)의 딸과 교관(敎官) 심종찬(沈鐘燦)의 딸, 부첨사(副詹事) 성건호(成健鎬)의 딸을 삼간택(三揀擇)에 들이고, 그 나머지는 허혼(許婚)하라."
하였다.
정2품 서신보(徐臣輔)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의 선조인 충숙공(忠肅公) 신(臣) 서성(徐渻)의 옛집이 안동군(安東郡) 소호리(蘇湖里)에 있는데, 국내(局內)의 사산(四山)이 옛집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영조(英祖) 정축년(1757)에 이 집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는데, 정성 성모(貞聖聖母)께서 그 말을 듣고서 이르기를, ‘선조의 태실(胎室)은 다른 곳과는 다르다.’고 하시고 내탕고(內帑庫)의 은을 특별히 하사하여 즉시 값을 치르고 되찾게 하였습니다. 또 수호군(守護軍)을 두어서 사산을 금양(禁養)하라고 명하고 사패(賜牌)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때 값을 치르고 되찾은 문서는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유실되어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故) 부사 신 서병순(徐秉淳)이 옛집에 걸어놓은 현판에 이르기를, ‘정성 성모가 특령으로 내탕고에서 은전을 하사하시어 즉시 값을 치르고 되찾게 하였고, 또 수호군을 두라고 명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본군(本郡)에서 기재한 수호군에 관한 문서는 지금도 옛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순조(純租) 신사년(1821)에 본 군의 운산역(雲山驛)을 옛집이 있는 안산(案山) 오봉(烏峰) 아래에 옮겨 설치하였는데, 그때 겸영사(兼營使)가 완문(完文)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글에 ‘소호리의 소호당(蘇湖堂)은 바로 약봉 선생(藥峰先生)의 태실이며 정성 성모께서 지키라고 명한 곳이다. 국내의 산기슭의 한 치 한 자의 땅도 모두 본당의 차지가 아닌 것이 없은 지 수백 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명확한 증거이고 온 경내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산(韓山) 이달규(李達珪) 무리가 오봉을 저희 집과 마주앉은 산이라 하면서 그 족속인 이용직(李容稙)에게 거짓으로 청탁하여 내부(內部)에 연명으로 소송하여 목은 영당(牧隱影堂)의 뒷산 기슭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부(府)와 군(郡)에서 조사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해당 군수가 부에 보고하기를, ‘이 산에 대한 수호는 서가(徐哥) 성을 가진 백성이 전적으로 관장하였고 또 상고할 수 있는 문서가 있으며, 해당 산의 지형을 직접 조사하니 오봉의 남쪽은 남가(南哥) 성을 가진 백성이 수호하는데 이 남가 백성이 수호하는 남쪽에 목은 영당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씨가 오봉을 목은 영당의 주룡(主龍)이라고 하면서 소송한 곳은 그들이 수호하는 경계 밖입니다. 또 동리 백성에게 사질(査質)하니, 원래 서씨 가문에서 나무꾼과 목동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부(部)에 보고하기를, ‘보고와 발문은 참으로 조리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네 백성들의 논의가 지침이 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송사의 시비는 동네 백성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한 말에서 모두 알았고 부(府)와 군의 보고와 발문에서 종합하여 자세히 밝혔으나, 군에서는 부에 미루고 부에서는 부에 미루고 부에서는 또 부에 미루면서 끝내 처결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잡힐 날이 없습니다. 심지어 성모께서 보호를 명한 땅을 남이 엿보아 차지하려고 하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아! 저 이달규 무리들은 신의 가문에서 값을 치르고 되찾은 문서를 잃어버린 틈을 엿보고서 사패를 상고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것을 구실로 소송을 걸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습니까? 신 등이 아무리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모의 명령은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어찌 감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까?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재결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패의 소중함은 다른 것과 자별하니, 상소의 내용은 법부에서 엄격히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3일 양력
종2품 윤진우(尹鎭佑)를 상방사장(尙房司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9월 2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는 마땅히 자내(自內)의 예(例)로 친히 행할 것이니, 칙임관(勅任官) 이상, 비서감(祕書監), 규장각(奎章閣)의 관리들이 참석하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47호, 〈각 항시의 감리를 없애고 그 사무를 부윤에게 넘기며 제주 목사를 없애고 그 사무는 평양시의 사무와 함께 모두 각각 당해 관찰사에게 소속시키는데 관한 안건〔各港市監理廢止其事務屬于府尹濟州牧使廢止其事務與平壤市事務竝屬于各該觀察使件〕〉, 칙령 제48호, 〈광주, 강화, 개성을 군수로 개칭하며 인천, 옥구, 무안, 창원, 동래, 덕원, 성진, 삼화, 경흥, 의주, 용천을 부윤으로 개칭하는데 관한 안건〔各港市監理廢止其事務屬于府尹濟州牧使廢止其事務與平壤市事務竝屬于各該觀察使件〕〉, 칙령 제49호, 〈지방구역 정리에 관한 안건〔地方區域整理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칙령(勅令) 제50호, 〈지방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官官制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지방관 관제〉
제1조
도(道)에는 아래와 같은 직원을 둔다.
관찰사(觀察使) 1인은 칙임관(勅任官)이다. 참서관(參書官) 1인과 경무관(警務官) 1인은 모두 주임관(奏任官)이다. 주사(主事)는 5인 이하, 총순(總巡)은 4인 이하로 모두 판임관(判任官)이다.
제2조
관찰사는 내부 대신(內部大臣)의 지휘 감독을 받으며 탁지부(度支部), 군부(軍部), 법부(法部), 학부(學部),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주관하는 사무에 관해서는 해부(該部)의 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률과 명령을 집행하고 관하 행정사무를 관리한다.
제3조
관찰사는 외국과 외국인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해도(該道)에 주재하는 일본국(日本國)의 이사관(理事官)과 직접 교섭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해당 사유를 관할하는 부(府)나 부(部)에 즉각 보고한다.
제4조
관찰사는 행정사무에 관하여 그 직권범위 내에서 도령(道令)을 발포(發布)한다.
제5조
관찰사는 관하 부윤(府尹)이나 군수(郡守)의 정령조치가 규정에 어긋나 공익을 침해하고 권한을 침범하는 경우에는 철폐 또는 정지할 수 있다.
제6조
관찰사는 외국과 외국인에 관한 사항의 일부를 부윤에게 위탁하여 처리할 수 있다.
제7조
관찰사는 아래에 열거한 사무를 맡아서 처리한다.
1. 관하 부와 군의 치적(治績)을 평가하는 사항이다.
1. 소속된 관리의 등용, 해임 및 신분에 관한 사항이다.
1. 문서의 왕복에 관한 사항이다.
1. 관인(官印)과 관장(官章)의 보관에 관한 사항이다.
1. 외국과 외국인에 관한 사항이다.
1. 회계, 제사, 병사, 민적, 토지대장, 세납, 구제, 경찰, 위생, 토목, 교육, 광산, 도량형 및 농업, 상업, 공업, 삼림, 천택(川澤), 수산 등에 관한 사항이다.
제8조
관찰사는 내부, 탁지부의 결정에 근거하여 지방세를 부과하고 징수할 수 있다.
제9조
참서관은 관찰사를 보좌하며 관찰사에게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서리(署理)한다.
제10조
경무관은 관찰사의 명령을 받아 경찰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제11조
주사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서무(庶務)에 종사한다.
제12조
총순은 상관의 지휘를 받아 경찰사무에 종사한다.
제13조
도의 서기, 순검 및 고용인에 관한 규정은 내부 대신(內部大臣)이 결정한다.
제14조
부에는 아래와 같은 직원을 둔다.
부윤(府尹) 1인, 칙임관이거나 혹은 주임관이다. 참서관 1인, 주임관이다. 주사 3인 이하, 총순 1인은 모두 판임관이다.
제15조
부윤은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률과 명령을 집행하고 관할지역내의 행정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제16조
부윤은 관찰사의 위탁을 받아 일본국의 이사관과 교섭하고 외국과 외국인에 관한 사항을 처리하며 관계 군수에 대하여 지휘할 수 있다.
제17조
부윤은 관할지역 내의 행정사무에 관하여 그 직권범위 내에서 부령(府令)을 발포할 수 있다.
제18조
참서관은 부윤을 보좌하며 부윤에게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서리한다.
제19조
주사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한다.
제20조
총순은 상관의 지휘를 받아 경찰사무에 종사한다.
제21조
내부 대신이 필요 없다고 인정하는 부(府)에는 참서관을 두지 않을 수 있다.
제22조
부의 서기, 순검 및 고용인에 관한 규정은 내부 대신이 정한다.
제23조
군(郡)에는 아래와 같은 직원을 둔다.
군수 1인은 주임관이며, 주사 1인은 판임관이다.
제24조
군수는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률과 명령을 집행하며 관할지역 내의 행정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제25조
군수는 행정사무에 관하여 자기의 직권범위 내에서 군령(郡令)을 발포한다.
제26조
군수는 관찰사의 명령으로 다른 군의 사무를 서리할 수 있다.
제27조
주사는 군수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하며 군수에게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서리한다.
제28조
군의 서기, 순검 이하 고용인의 규정은 내부 대신이 정한다.
제29조
내부 대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도(道)와 부(府), 군(郡)에는 통역관 【주임관이다.】 , 통역관보를 【판임관이다.】 둔다.
제30조
통역관과 통역관보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번역, 통역에 종사한다.
제31조
본 칙령은 올해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32조
본 칙령에 저촉되는 종전의 제반 규정은 모두 폐지한다.
칙령(勅令) 제51호, 〈지방관 관등 봉급령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官官制改正件〕〉, 칙령 제52호, 〈지방관 전고 규정(地方官銓考規定)〉, 칙령 제53호 〈문관 임용령(文官任用令)〉, 칙령 제54호, 〈관세관 관제(管稅官官制)〉, 칙령 제55호 〈건축소 관제(建築所官制)〉, 칙령 제56호 〈각 공립학교 직원봉급에 관한 안건〔各公立學校職員俸給件〕〉, 칙령 제57호, 〈위수 조례(衛戍條例)〉, 칙령 제58호, 〈경성 위수 사령부 조례(京城衛戍司令部條例)〉를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법률(法律) 제5호, 〈이식 규칙(利息規則)〉을 【계약상 이자는 1년에 10분의 4이며 무계약 이자는 1년에 10분의 2이다. 이자의 총액은 원본액(元本額)을 넘을 수 없으며 이자를 원본액으로 만들 수 없다. 계약 이자가 본 규례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무효이다. 음식료, 고용금, 수고비 및 일용물품의 댓가로서 50원(圓) 미만인 것은 이자가 없다.】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용구(尹用求)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에 임용하고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심상훈(沈相薰)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평안남도 관찰사 이용선(李容善)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탁지부(度支部)에서 원예 모범장(園藝模範場)의 경비 4,726원, 사립 학교 보조비의 부족분과 영어학교 교사 핼리팩스〔奚來百士 : Hallifax, T.E.〕 【해ᄉᆞ】 와 프랑스어학교 교사 마르텔〔馬太乙 : Martel, E.〕의 사택료로 더 지급할 몫 1,108원, 지방 학교를 시찰하기 위한 여비 188원, 각 도 경무서(警務署)의 비용과 경무 정리비(警務整理費)의 증가액 27만 4,492원, 표류민 정명선(鄭明善) 등을 구제하여 돌아오게 한 비용 32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일과 경부철도(京釜鐵道)에 들어간 토지 결수를 감하는 일, 동래군(東萊郡)의 천번(川反) 결수를 견감(蠲減)하는 일을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울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이 아뢰기를,
"충청 남북도에 위유사(慰諭使)를 차하(差下)하도록 이미 주하(奏下)하셨습니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여산(礪山) 등지도 수재를 입었는데, 해당 지방은 충청남도와 접경입니다. 해도(該道)의 위유사인 유맹(劉猛)으로 하여금 부근에 달려가서 일체 위유(慰諭)하고 수재를 입은 정형을 함께 수보(修報)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호(趙秉鎬)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한(漢) 나라의 신하 위상(魏相)은 매번 사방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거나 도적과 수재, 한재가 있을 때마다 기록하여 아뢰었는데, 당시에 훌륭한 의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전혀 옛사람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라를 우려하는 충성심은 가의(賈誼)의 통곡보다 더하고 원안(袁安)의 눈물보다 더한 만큼, 견문이 미치는 바를 들어서 위상의 보고를 본받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형세의 위태로움이 어떠하고, 백성들의 생활의 고통스러움이 어떠하며, 사방의 이상한 소문은 어떠하고, 도적의 횡행이 어떠하며, 수재와 한재가 거듭 이른 것이 어떠합니까? 보고 듣기에 놀랍고 해괴한 것들이니, 폐하께서 해와 달과 같은 밝음으로 거의 말없이 환히 꿰뚫어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몇 달 전에 차자를 올려 진달한 여러 조목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하교를 받았으나 아직 널리 시행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신은 사람이 하찮고 말이 경솔하여 진실로 폐하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구한 저의 마음에도 황송하고 답답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이처럼 번거롭게 진달하면서 감히 그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나라를 우려하고 임금을 아끼는 마음을 앞세우고 두렵고 부끄러운 사사로운 마음을 뒤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것에 대해서 말하면, 대체로 크고 작은 시행 조치와 크고 작은 이익이 외국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은 것이 없어서 점차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나라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멸시를 초래한 것입니다. 화폐의 통용은 줄곧 막히고 물가가 폭등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곤경에 처하니, 나라의 형편이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적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서 말하면, 수령(守令)이 탈취하고 군사들이 침탈하며 기근이 연이어 닥쳤기 때문입니다. 살 곳이 없고 곤궁에 빠진 백성들이 전혀 살아나갈 방도가 없는데도 혹은 의병이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위협하고 약탈을 합니다. 그런 다음 며칠 안 되어 또 어떤 무뢰배들이 몰려와서 의병과 호응했다고 하면서 묶어놓고 때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재물까지 거의 다 가져가 버려도 이 불쌍한 시골백성들은 호소할 곳이 없으니, 백성들의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괴이한 소문에 대해서 말하면, 타고난 떳떳한 성품이 없어지고 풍속이 무너졌으니, 교회(敎會)라는 명목으로 각자 무리를 지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행하므로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사방의 괴이한 소문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도적에 대해서 말하면,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열 명 백 명이 떼를 지어 밤에는 약탈하고 낮에는 강탈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모두 폐하의 백성들로서 그 양심을 잃은 자들인데, 도적의 횡행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수재와 한재에 대해서 말하면, 하늘에서 경고를 보낸 것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어서 절기가 순서를 잃어 언덕과 골짜기가 바뀌고 먼저는 가물다가 뒤이어 장마가 들면서 모든 것이 잘 갖추어졌다가 다 없어졌는데, 수재와 한재가 거듭 이른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광부들의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무뢰배입니다. 조정의 신칙도 아랑곳하지 않고 규정을 무시하면서 민간의 토지를 제멋대로 파헤치고 주점의 술과 촌락의 밥은 응당 자신들이 먹어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심지어 닭, 개,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까지 제 것으로 만들고 있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두려워서 관청에 감히 신고하지 못합니다. 관리가 혹시 들어가서 금지하면 그들은 도리어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서 관례(官隷)를 쫓아버리고 있으니, 이것이 나라가 있고 법이 있는 세상이라고 하겠습니까?
위에서 조목별로 진술한 것은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큰 폐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의 비는 마치 대야로 퍼붓듯이 하여 하룻밤 사이에 문득 물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결이 끝없이 일어 하늘에까지 닿을 기세였고 산이 무너지니 우레와 같은 굉음이 났습니다. 허다한 논밭이 모래로 덮이고 하천이 되는 변고가 곳곳에 많이 일어났으니, 백성들은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나가며 나라는 어떻게 지탱해 나가겠습니까?
나라와 백성들의 일에 대한 계책이 극도로 걱정이 되는 판에 더구나 백성들의 집이 물에 떠내려간 것과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은 백, 천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부르면서 울고, 어떤 사람들은 형제를 부르며 울고, 어떤 사람들은 처자를 잃고서 울고, 어떤 사람들은 시체를 찾으며 울고, 어떤 사람들은 무덤과 초빈(草殯)한 시체를 잃고 우니,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슬피 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각 도의 정형을 일일이 자세하게 보고할 수는 없지만, 신이 직접 본 호서(湖西) 한 도로써 말하더라도 눈앞의 비참한 정상을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접한 지역의 백성들이 신이 서울에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눈물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불쌍한 정상으로 인하여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고 뼛속까지 아팠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잔인하고 혹독한 것입니까? 눈으로 보면 머리털이 몽땅 곤두서고 귀로 들으면 정신이 멍해지는데, 사람이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마음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오직 안심하고 지내면 조정에서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효유(曉諭)하기는 하였으나 신에게는 나올 계책이 없으므로, 이 정형을 가지고 우러러 성상께 보고하여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혜택을 베풀어 주시기만을 공손히 기다릴 뿐입니다.
구중궁궐에 거처하고 있는 폐하께서 어떻게 지극히 불쌍하고 매우 참담한 이 정상을 전부 알겠습니까? 옛날 송(宋) 나라의 신하 정협(鄭俠)은 유민도소(流民圖疏)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이번에 만일 파도치는 격랑 속에서 울부짖고 언덕이나 도당 사이에서 쓰러져 있는 자들에 대한 이런 광경을 한 폭의 그림에 일목요연하게 그려서 올린다면, 신의 생각에는 폐하께서 아마 차마 볼 수 없다고 여기시어 음식을 마주하면 수저를 내던지고 밤이 되면 침구를 내동댕이치고 서둘러 구제할 대책을 도모 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하는 일념으로 밤낮 정사에 근면하신 것은 신 등이 일찍이 흠앙(欽仰)한 바입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해석하기를, ‘나의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성인의 지극한 공이지만, 임금의 마음도 사실 천지와 상응하는 것이니, 더욱 어찌 맹렬히 반성하고 깊이 체득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홍수에 나를 경계시킨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는데,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고서 나라가 편안하게 된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근본은 농사에 있는데 한번 크게 수해를 당한 후부터 추수할 가망이 없으니 남아 있는 백성들도 또한 구렁텅이에 빠지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고 측은하게 여기는 윤음(綸音)을 특별히 내려 의정부(議政府)에서 어루만져 편안히 살게 할 방도를 충분히 상의하게 하고, 또 품계와 명망이 높은 사람을 파견하여 열군(列郡)과 동리를 순행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은 은혜로운 유시(諭示)로 머물러 살 곳을 정해 주고 죽은 사람은 위로하고 돌봐주어 후하게 장사 지내 준다면 죽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 모두 성상의 덕에 감읍(感泣)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릇 이러한 백성들의 황급한 정상에 대해서 부(府)와 군(郡)에서 수도에 보고한 것이 있는 듯하지만 집재(執災)하는 한 조항은 매번 허위와 실제가 뒤섞이는 폐단이 있는 만큼 미리 명백하게 거듭 강조함으로써 각각 정확하고 꼼꼼하게 뽑아 보고하게 하고, 그 실상에 따라 전 수량을 면제하여 주며 죽은 사람이 바쳐야 할 신포(身布)도 탕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각 군의 수령(守令)들에 대하여 말하면, 어느 때인들 각별히 선발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런 때에는 더욱 잘 선발해야 할 것입니다. 현임 수령으로서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속히 태거(汰去)하고 품계와 지위를 따지지 말고 반드시 청렴하고 공정하여 명성과 공적이 있는 사람으로 각별히 차송(差送)함으로써 위급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전후로 내린 성상의 조칙은 비록 지극히 간곡하고 측은하지만 혜택이 실지로 시행되지 않아서 끝내 형식적인 것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면서 오늘날의 재난을 심상하고 하찮은 일로 방치하지 말고 비용을 절약하고 검약을 숭상하여 성의와 신의를 밝히는데 힘씀으로써 위로는 하늘의 견책에 답한다면 하늘의 뜻에 믿음을 얻어 수재나 한재에 대한 근심이 없을 것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감화되어 역시 사방에서 생겨나는 괴이한 소문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로부터 끝없는 위업이 계승되고 반석 같은 기반에 올라서게 될 것이니, 나라와 백성들에게 다행일 뿐 아니라 실로 종묘 사직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벼슬자리에 나오고 물러난 것 역시 백성과 나라를 깊이 우려하는 충정에 있으니, 간절한 말뜻이 글 밖에 넘쳐흐른다. 진달한 여러 조목을 읽어보고서 두려워하면서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충청 남북도에 홍수가 범람한 재해는 더욱 놀랍고 참혹하다. 백성들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여 열 집에서 한 집이 남아 있고 언덕과 골짜기가 바뀌고 토지와 곡식이 물속에 들어가 버려서 수확할 가망이 없으니, 다행히 홍수 속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어디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겠는가? 불쌍한 죄 없는 이 백성들에게 하늘은 어찌하여 이리 잔인하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시도 편안히 있을 수 없다. 방금 의정부에서 위유사(慰諭使)를 파견하여 불쌍히 여겨 돌봐주고 구제할 방도를 역시 충분히 상의하여 강구하게 하였는데, 또 마땅히 신칙하여 별도로 조처하도록 해야 하겠다. 여러 가지 폐단도 별도로 계책을 세워 철저히 없애도록 해야 할 것이니, 경은 헤아리라."
하였다.
9월 25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규(閔泳奎)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였다.
9월 26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아뢰기를,
"가을이 이미 깊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하니,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를 친히 행하겠다고 한 명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하니, 애써 따르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민 특진관(閔特進官 : 민영규(閔泳奎))이 나아가서 거행하되 칙임관(勅任官) 이상과 규장각(奎章閣) 관리들이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9월 27일 양력
정3품 이시영(李始榮)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부안 군수(扶安郡守) 권익상(權益相)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9월 29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신기선(申箕善)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김기조(金基肇)를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유정수(柳正秀), 법부 협판(法部協辦) 이원긍(李源兢),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형식(閔衡植), 외사국장(外事局長) 한창수(韓昌洙)를 내부 지방관 전고위원(銓考委員)에 임명하고,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 이규환(李圭桓)에게 재판장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탁지부(度支部)에서 가례(嘉禮) 때의 각종 비용 50만 원, 각도(各道), 각부(各府), 각군(各郡)의 경비 증가액 8만 6,477원, 농림학교 건축비 5만 5,940원, 삼림 및 면화재배 시찰 여비 139원, 농상공학교 교사 아까가베 지로〔赤壁次郞〕의 수로금(酬勞金) 1,000원, 무예청(武藝廳)의 급료 부족액 2,133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해 줄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삼가 이달 12일에 내린 특사 조칙을 받들어 평리원(平理院), 한성 재판소(漢城裁判所)에서 관할하는 죄수들 중 육범(六犯) 이외에 기결과 미결 죄수로서 석방하기 합당한 자인 육사명(陸四明) 등 134명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9월 3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를 자내(自內)의 예(例)로 친히 행할 것이다. 칙임관(勅任官) 이상, 비서감(祕書監), 규장각(奎章閣) 관리들이 참석하라."
하였다.
의친왕부 총판(義親王府總辦) 민철훈(閔哲勳)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육군 참장(陸軍參將) 양성환(梁性煥)에게 경성 위수 사령관(京城衛戍司令官)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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