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양력
【음력 경술년(庚戌年) 3월 22일】 남대문 시장에서 화재가 났다. 화재 피해를 당한 상민(商民)에게 특별히 구휼금 300원(圓)을 내렸다.
【원본】 5책 4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49면
【분류】구휼(救恤) / 군사-금화(禁火)
남대문 시장에서 화재가 났다. 화재 피해를 당한 상민(商民)에게 특별히 구휼금 300원(圓)을 내렸다.
5월 5일 양력
동적전(東耤田)에 나아가 친경(親耕)하였다. 【 돈화문(敦化門)으로 나가서 동적전에 이르렀다. 친행할 때가 되자 헌가(軒架)가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장전관(掌典官)이 앞에서 인도하여 친경대(親耕臺)에 이르러 남쪽을 향하여 서자 음악이 멎었다. 예의사(禮儀使)가 ‘보습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주청하자 임금이 보습을 받았으며 음악이 연주되었다. 시종(侍從)이 보습을 함께 잡고 주마 과장(主馬課長)이 고삐를 잡은 가운데 친히 쟁기를 미는 의식을 진행하자 음악이 멎었다. 예의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에 가서 자리에 올랐다. 음악이 연주되자 의왕(義王) 이강(李堈),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창산군(昌山君) 이해창(李海昌),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제순(朴齊純),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고영희(高永喜), 경적사(耕籍使)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용직(李容稙),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병석(閔丙奭),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윤식(金允植), 궁중 고문관(宮中顧問官) 이윤용(李允用),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하영(李夏榮), 친위부 장관(親衛府長官) 이병무(李秉武), 승녕부 총관(承寧府總管) 조민희(趙民熙), 시종원 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 장례원 경(掌禮院卿) 성기운(成岐運),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조희연(趙羲淵), 감사원 경(監査院卿) 장석주(張錫周), 규장각 경(奎章閣卿) 조동희(趙同熙), 수학원장(修學院長) 민상호(閔商鎬), 궁내부 차관(宮內府次官)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내장원 경(內藏院卿) 최석민(崔錫敏), 한성 부윤(漢城府尹) 장헌식(張憲植), 주전원 경(主殿院卿) 이겸제(李謙濟), 적전 영(耤田令) 농무 국장(農務局長)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봉책관(奉策官) 전사(典祀) 이원승(李源昇), 집비관(執轡官) 주마 과장(主馬課長) 이기홍(李起泓), 봉청상관(奉靑箱官) 장전관(掌典官) 이강주(李康周), 봉춘관(奉春官)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 유시찬(劉時燦), 봉호관(奉鎬官) 장례원 주사(掌禮院主事) 윤재병(尹載炳)이 뒤따라 밭갈이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음악이 멎자 노인들과 백성들이 차례로 밭이랑을 갈았다. 밭갈이가 끝나자 관경대 밑에 가서 네 번 절을 하였다. 장전관이 조령(詔令)을 선포하기를 ‘기민(耆民)의 노고를 치하한다.’ 하였다. 적전 영이 올벼와 늦벼 종자를 심고 관경대 밑에 이르러 ‘행사가 끝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친왕(親王) 이하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네 번 절을 하였다. 전선사장(典膳司長)이 술을 부어 첫 잔을 올리니 가창대가 노래를 불렀으며 임금이 술을 들었다. 친왕 이하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가 잔을 받았다. 뒤이어 두 번째 잔과 셋째 잔도 위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친왕 이하가 모두 네 번 절을 하자 음악이 멎었다. 장전관이 ‘의식이 끝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을 인견(引見)하고 칙유(勅諭)하기를,
"짐이 지난해에 친경식(親耕式)을 거행하고 올해에 다시 행하는 지극한 뜻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경은 이 뜻을 본받아 온 나라의 신민들에게 농업에 더 부지런히 힘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배관(陪觀)한 농림 학교 직원(農林學校職員) 및 생도(生徒)에게 칙유하기를,
"그대들은 친경하는 뜻을 본받아 더욱더 농업과 임업에 대한 학업을 부지런히 성취하여 앞으로 농업과 임업을 발전시키는 일에 이바지하도록 힘써라."
하였다.
홍릉(洪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농상공부 산림국장(農商工部山林局長) 최상돈(崔相敦), 기사(技師)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등을 소견(召見)하고 각릉(各陵), 원(園), 묘(墓)의 산림 상태에 대하여 하문(下問)하였다. 칙유하기를,
"그대들은 짐의 뜻을 본받아 각릉, 원, 묘의 산림을 보호하고 정리함으로서 능, 원, 묘의 존엄을 더욱더 공경히 보존하는 데에 힘쓰라."
하였다.
5월 7일 양력
전 비서감 승(前祕書監丞) 이병륜(李秉綸)의 어미 김씨(金氏)를 특별히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하라고 명하였다. 나이가 97세이니 우로(優老)한 때문이다.
5월 8일 양력
황태자(皇太子)가 나고야〔名古屋〕에 행계(行啓)하여 공진회(共進會)를 관람(觀覽)하였다.
5월 9일 양력
일본국(日本國) 아사카노미야비〔朝香宮妃〕, 키타시라카와노미야비〔北白川宮妃〕, 다케다노미야비〔竹田宮妃〕 등 세 전하에게 1등 서봉장(一等瑞鳳勳章)을 증여(贈與)하였다.
칙령(勅令) 제31호, 〈외국 선박을 차입(借入)하여 불개항간(不開港間) 항행(航行)의 특허 수수료에 관한 안건〉, 칙령 제32호, 〈지방관의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官官制中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5월 10일 양력
황태자(皇太子)가 나고야〔名古屋〕에서 동경(東京) 저택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일본 우선 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 사장 곤도 야스히라〔近藤廉平〕 외 10인(人)을 접견하였다.
규장각 경(奎章閣卿) 조동희(趙同熙)에게 일본국(日本國) 동경(東京)에 출장(出張)을 명하였다. 내친왕(內親王)과 세 전하의 훈장(勳章)을 보내기 때문이다.
5월 14일 양력
법률(法律) 제5호, 〈국고 채권 조례(國庫債券條例)〉를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5월 16일 양력
탁지부(度支部)에서 수산지(水産誌) 인쇄비 5,000환(圜), 통신서(通信署) 관원들의 조난 위자금(慰藉金) 2,600환, 국유지 조사비 4만 4,914환, 폭도를 소탕 진압하는 비용 2만환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해 줄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내각(內閣)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5월 18일 양력
일본국(日本國) 육군 군의 총감(陸軍軍醫總監) 남작(男爵) 이시쿠로 다다토쿠〔石黑忠悳〕, 삼등 군의(三等軍醫) 마사키 나이샨주〔正木內三丑〕를 접견하였다.
5월 19일 양력
일본국(日本國) 육군 군의 총감(陸軍軍醫總監) 남작(男爵) 이시쿠로 다다토쿠〔石黑忠悳〕를 특별히 대훈(大勳)을 서훈(敍勳)하고 이화 대수장(李花大綏章)을 하사하였다.
5월 20일 양력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몸조리를 하는 것과 관련하여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을 내각 총리대신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5월 21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황후(皇后)도 따라 나아갔다.
5월 23일 양력
일본주차 독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닥터 푸라이헬펀쉬발첸시타인 남작(男爵)과 문무 수원(隨員), 대사관 소속 무관인 해군 대좌(海軍大佐) 랑꺼, 대사관 번역관 닥터 메이렌 푸루이, 경성(京城) 주재 독일 총영사(總領事) 닥터 크뤼거를 접견하였다.
5월 26일 양력
오스트리아〔墺國〕 기병(騎兵) 프란쓰 안도안또루에 안뿌란깐쓰 전하(殿下)를 접견하였다.
5월 29일 양력
임시 통감부 총무장관(統監府總務長官) 사무 취급 통감부 참여관(統監府參與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를 접견하였다.
5월 3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증 학부 협판(贈學部協辦) 이봉환(李鳳煥)이 옛날 자신을 잊고 항의(抗義)한 큰 절개에 대하여 선왕조 때부터 일찍이 정충(旌忠)의 유교(遺敎)가 있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그동안 벼슬을 추증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의 우뚝한 충성을 돌이켜 생각하면 신명(神明)에 질정할 만하다. 조정에서 그의 충성을 표창하는 것이 마땅히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니 특별히 정2품으로 올리고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諡號)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자작(子爵)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어 이르기를,
"듣자니 귀 자작이 이번에 갑자기 통감(統監)의 직책을 사임하였다고 하는데, 귀 자작은 이전에 부통감(副統監)으로 와서 주재하였고, 그 다음에는 통감으로서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이 시작한 일을 계승하여 짐(朕)의 부족한 점을 바로 잡아주고 짐의 나라 정사를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기강이 점차로 서고 모든 일들이 점차 이루어 진 것은 오직 귀 자작의 수고에 기인한 것입니다. 올봄 귀 자작이 앓는 몸으로 본국에 돌아간 뒤에 짐은 되도록 빨리 완치되어 다시 올 것을 간절히 빌었는데 앓는 몸을 돌보지 않아 끝내 외국에 주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짐은 이에 귀 자작이 직책에 있는 동안 보좌하고 인도하여 준 지극한 우의에 대하여 감사하고 아울러 귀 자작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또 신임 통감인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어 이르기를,
"듣자니 귀 자작이 새로 통감의 직무를 겸하게 되었다고 하니 기쁜 마음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비록 모든 일이 점차로 자리가 잡혀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귀 자작의 보좌와 인도를 기대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에 마땅히 귀 자작이 새로 임명된 것을 짐은 진심으로 축하하고 아울러 건강하기를 축원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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