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기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추향(秋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7월 5일 계축
이원명(李源命)을 이조 참의로, 홍직필(洪直弼)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6일 갑인
소대(召對)하였다.
7월 7일 을묘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으니, 추알(秋謁)이었다.
7월 8일 병진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죄인(罪人) 이태형(李泰亨)·도유화(都兪和)를 모두 다시 엄중히 형신(刑訊)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남아(南衙)·북시(北寺)는 서로 통하여 알아서는 아니될 금령(禁令)이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보통으로 왕래하면서 정망(政望)을 도점(圖點)하는 계획이 있기에 이르러 전설(傳說)이 낭자하니, 지극히 통탄스러워 한심(寒心)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비안 현감(比安縣監) 조석주(趙錫疇)에 이르러서는 뒷구멍으로 내시(內侍)들과 인연하여 함께 수작(酬酌)한 것은 사부(士夫)로서 행할 일이 아니니, 먼저 태거(汰去)하여 전려(田廬)로 쫓아 보내고, 두 환관은 한 차례 엄중히 형신하여 도배(島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0일 무오
부교리 김영수(金永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잡(閑雜)한 무리가 유음(幽陰)함을 의탁하고, 엄시(閹寺)의 무리가 안팎으로 주무(綢繆)039) 하여 무엄(無嚴)한 일을 제멋대로 헤아려 지극히 공정한 정사를 문란(紊亂)시키니, 일이 놀랍고 한탄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기거 동작(起居動作)하는 사이에 명령하여 지휘(指揮)하는 자는 환첩(宦妾)이고, 남몰래 임금의 뜻을 영합(迎合)하는 자도 환첩이니, 이제부터 이런 무리를 제어(制馭)하여 국법(國法)을 어기지 못하게 한 뒤에야 바야흐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또 종신(宗臣)의 승후(承候)와 같은 것은 스스로 정례(定例)가 있습니다. 비록 고(故)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는 순고(純考)040) 에게 지절(至切)한 의친(懿親)이 되었으나, 시절(時節)의 경하(慶賀) 외에는 무상 출입(無常出入)을 하지 않았는데, 요즈음 한둘의 종신(宗臣)이 일차(日次)마다 문득 기거(起居)를 일삼고 있으니, 곧 또한 어디에 근거하여서 그러한 것입니까? 전자에는 남연군(南延君)이 감히 하지 못하던 바이며, 후자에는 흥인군(興仁君)·흥선군(興宣君)이 하지 못했던 것인데, 한둘의 종신은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환첩(宦妾)은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환첩의 일은 비록 생각 밖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궁(寡躬)을 돌아보건대 부끄러움이 많다. 가까운 종신(宗臣)과 궁첩(宮妾)에 대한 말은 매우 절실하여 지극히 가상하게 여기니, 내가 마땅히 면려하고 경계할 것을 약속한다. 가까운 종신은 나아감과 머무름에 상법(常法)을 두고, 궁첩의 간알(干謁)은 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모두 과오가 적게 할 것을 기약하겠다. 무릇 언책(言責)이 있는 자는 각각 생각을 다 진술함으로써 임금의 과실을 보필한다면 이것도 또한 일언(一言)의 도움이다."
하였다.
7월 11일 기미
소대(召對)하였다.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소견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홍열모(洪說謨)가 안동 영장(安東營將) 김재휘(金在徽)의 비보(秘報)를 가지고 밀계(密啓)하기를,
"영양현(英陽縣)에 거주하는 정우룡(鄭禹龍)과 그의 아들 정자성(鄭自性), 이상우(李尙友)와 그의 아들 이윤경(李允慶), 박평양(朴平陽)의 손자 박밀양(朴密陽) 등이 작당(作黨)하여 서로 왕래하며 허황된 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하고, 무뢰(無賴)한 무리를 불러 모으니, 경전(耕田)하는 자는 걷어치우고 집을 짓는 자는 중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급히 장차(將差)041) 를 보내어 여러 놈을 잡아 와서 근인(根因)을 끝까지 핵실하였던 바, 정우룡(鄭禹龍)은 본시 남해(南海) 사람으로서 연전에 새로 본현(本縣)에 우거(寓居)하였고, 그의 아들 정자성(鄭自性)은 성품이 본시 완악하여 스스로 환술(幻術)을 믿고는 감히 부도(不道)한 흉계(凶計)를 내어 도당(徒黨)을 이웃 고을에서 불러 모으고, 새로 우거(寓居)한 어리석은 백성과 체결(締結)하여, 이달 초7일에 본현(本縣)의 검마산(劍麻山) 속에 모여서 그대로 거사(擧事)할 것을 기약하였으며, 또 울릉도(鬱陵島)의 도적들과 이달 초10일에 모이기로 기약하였다고 하였으니, 단서(端緖)가 죄다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괴수(魁首) 정자성(鄭自性)의 초사(招辭)에 나온 잡지 못한 자들은 기일을 정하여 염탐해 잡으라는 뜻을 영양(英陽) 등의 고을에 관칙(關飭)하였습니다. 이 뒤의 형지(形止)는 수시로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7월 12일 경신
조강(朝講)하였다.
7월 13일 신유
주강(晝講)하였다.
7월 14일 임술
주강하였다.
7월 15일 계해
주강하였다.
이규팽(李圭祊)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16일 갑자
주강하였다.
7월 17일 을축
집의 이승보(李承輔)가 상소하여 조석주(趙錫疇)에게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양조(兩造)042) 로 하여금 서로 변정(卞正)하여 과연 모두 사실을 자백하게 할 수 있겠는가? 경중(輕重)의 사이에 알맞도록 이미 처분(處分)이 있었으니, 다시 어찌 그 일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8일 병인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좨주(祭酒) 홍직필(洪直弼)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장석(丈席)043)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어찌 슬픔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 유현(儒賢)은 선조(先朝)에서 정초(旌招)한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이르러서는 나이가 더욱 높고 덕이 더욱 높아져서 내가 특별히 정경(正卿)으로 탁용하였었다. 여러 차례 돈소(敦召)하고 한번 경석(經席)에 초치(招致)하여 풍채(風采)를 보고자 하였더니, 이제는 끝났도다. 졸(卒)한 홍 좨주(洪祭酒)의 집에 조제(助祭)하는 일과 상장(喪葬)과 조묘군(造墓軍)·담지군(擔持軍) 등의 절차를 전례에 비추어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은 음동돈녕(蔭同敦寧) 홍이간(洪履簡)의 아들인데, 용감하게 정도(正道)를 호위하고 엄격하게 사도(邪道)를 물리쳤다. 곤궁한 시골의 한사(寒士)로 있으면서도 그 근심하는 모양을 보이지 않았고, 영달하여 밝은 조정의 빈사(賓師)가 되어서도 그 교만함을 보이지 않았으며, 문학(文學)이 심오하고 의리(義理)가 정미하여 뛰어난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기유년044) 의 의례(議禮)의 실수를 바로 자기의 잘못으로 즉시 인책하여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사림(士林)이 매우 다행하게 여기었다.
7월 19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다.
7월 20일 무진
조병덕(趙秉悳)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삼았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김병준(金炳駿)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7월 21일 기사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7월 22일 경오
김병준(金炳駿)을 사헌부 장령으로, 송달수(宋達洙)·조병덕(趙秉悳)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7월 23일 신미
부사직 송내희(宋來熙), 장령 김병준(金炳駿), 지평 송달수(宋達洙)·조병덕(趙秉悳)에게 별유(別諭)하였다.
7월 25일 계유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7월 26일 갑술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추도기(秋到記)045) 를 행하고, 강(講)에 입격한 유학(幼學) 김수간(金壽侃)과 부(賦)에 입격한 진사(進士) 이근필(李根弼)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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