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계해
전교하기를,
"이 해 이달은 바로 효의 왕후(孝懿王后)께서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건릉(健陵)의 작헌례(酌獻禮)는 대신(大臣)을 보내서 섭행(攝行)토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수정전(壽靜殿)의 여러 곳을 중건(重建)하는 것과 영건(營建)하는 것은 본소(本所)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찬배 죄인(竄配罪人) 김기석(金箕錫)과 도배 죄인(島配罪人) 조희복(趙羲復)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신정희(申正熙)를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병석(閔丙奭), 이명재(李命宰), 김문제(金文濟)이고, 민병석(閔丙奭)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
전 전라 감사(前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2일 갑자
특별히 심의원(沈宜元)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정승원(鄭承源), 홍병위(洪秉瑋)를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으로 삼았다.
훈련 도감(訓練都監)에서, ‘본국(本局)에서 나눠주어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산에 보태어 심은 소나무는 7만 5,700그루입니다.’라고 아뢰었다.
3월 3일 을축
전교하기를,
"지난번 비답에서 환히 다 내 마음을 알았을 터인데, 요즘 듣자니 경상도(慶尙道) 선비들이 또다시 상소를 올린다고 하면서 무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머물러 있으면서 관망하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조정의 명령을 엄정하게 하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는 방도에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논의를 주장한 우두머리를 형조(刑曹)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서 체포하여 엄형을 가한 후에 원배(遠配)토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병인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3월 6일 무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를 행하였다. 강(講)에서는 〖거수한〗 유학(幼學) 이주황(李周璜), 제술(製述) 표(表)에서는 〖거수한〗 진사(進士) 홍세섭(洪世燮)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 좌창(左倉)의 조선(漕船)이 홍주(洪州) 등지에 이르러 파선된 일은 의심스런 점이 많기에 각별히 엄중히 조사하라는 뜻으로 호서(湖西)의 도신(道臣)에게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지금 해도(該道)의 장계(狀啓)에 대해 계하한 것을 보니, ‘천자선(天字船)에 실은 쌀은 1,261석(石) 5두(斗)인데 그 중 물에서 건지지 못한 쌀이 1,105석 5두입니다. 건지지 못한 곡식은 농간질 증거는 없다 하더라도 도망간 선주(船主)에 대해서는 스스로 변명하기 곤란한 점이 있으니 잡아가두어 실정을 알아내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체포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申飭)하라는 내용으로 제송(題送)할 것입니다. 지자선(地字船)에 실은 쌀은 1,408석 3두인데 그 중 물에서 건지지 못한 것이 248석 3두 남짓입니다. 표문(標文)을 점검해보니 명백히 근거할 만한 점이 있으니 곧바로 고의로 침몰시킨 것으로 귀결 짓는 것은 아마 공정하지 못할 듯합니다. 여자선(餘字船)에 실은 쌀은 1,363석 3두 9승(升)인데 그 중 건지지 못한 것이 295석 3두 9승입니다. 표문(標文)을 점검해 보아도 뚜렷한 이상이 없는 데다 건져낸 곡식 수량이 또 1,000포(包)가 넘으니 작간한 것으로 대뜸 귀결 짓는 것은 역시 공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 각 배의 사공과 곁꾼〔格軍〕들을 그대로 홍주진(洪州鎭)의 옥에 엄하게 가두게 하고 각기 해당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품처(稟處)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져 조운(漕運)하는 사선(私船)이 연달아 배에 실은 곡물을 썩게 한 것이 근년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 창고에서 파선된 배가 9척에 이르니 작간질이 아니고는 결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영으로 압송해서 각별히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증명할 만한 증거를 잡지 못한다면 전례에 따라 처벌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우니 일을 거행하는 것에서 따져볼 때 진실로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도망간 뱃놈은 기일 내에 체포해서 갇혀 있는 여러 놈들과 함께 모두 엄하게 형신(刑訊)을 가하여 철저히 캐물어서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어 다시 등문(登聞)한 후 품처(稟處)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경리사(經理事) 김홍집(金弘集)을 파직하였다. 유생들의 상소문이 있은 뒤 여러 차례나 패초(牌招)를 어기고 명령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 7일 기사
홍종운(洪鍾雲)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고(故) 좌참찬(左參贊) 조성하(趙成夏)에게는 문헌(文獻)을, 우찬성(右贊成) 이승보에게는 문헌(文憲)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한 김이안(金履安)에게는 문헌(文獻)을, 이조 판서 오취선(吳取善)에게는 문정(文靖)을, 지종정경(知宗正卿) 이승수(李升洙)에게는 효헌(孝憲)을, 이조 판서 김세균(金世均)에게는 문정(文貞)을, 지종정경 이연응(李沇應)에게는 효정(孝靖)을 시호(諡號)로 주었다.
3월 10일 임신
건릉(健陵)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 할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3월 11일 계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신사(信使) 일행에 대한 여러 조항을 마련하여 삼가 절목(節目)으로 써서 들여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국서(國書) 규식이 이전과 다르므로 회답하는 절차에 대한 일도 신중히 해야 하니,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응당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3월 13일 을해
조용호(趙龍鎬)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나이 70이 가깝도록 오래 살다보니 욕되는 일이 많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경우까지 감내하고 있으나 또 곧 죽지도 못하니 참으로 천지 사이의 하나의 질긴 목숨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궁하고 고독한 비통함에 문득 실성한 미치광이처럼 정신이 혼란되고 말도 흐리멍덩하니 어떻게 크고 작은 사무를 결재하며 중외(中外)의 정사를 보겠습니까? 총리(總理)의 임무는, 이는 새로 만든 큰 아문(衙門)이므로 모든 처리와 조치가 긴요해서 더욱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깊이 살피셔서 신이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는 영의정 자리와 새로 겸한 기무(機務)의 직임을 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정리와 병환에 대해서는 내가 간절하게 염두에 두고 있도다. 그러나 지금 백성의 일과 나라의 계책이 과연 어떠한가? 내가 비록 장황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경은 오랜 병으로 몸조리하는 중에도 또한 나라를 위해 분발하고 걱정스런 마음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니 이러한 때에 차마 사직 상소를 계속 올리는 것이 어찌 경에게 두터이 기대했던 것이겠는가? 전석(前席)에서 백성과 나라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경의 고심어린 마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탄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려운 일이 지난날보다 몇 곱절 더 많이 나타나니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 경은 마땅히 더욱 재량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찌 길게 말하겠는가? 경의 몸조리를 위해서 오늘 행하려던 빈대(賓對)를 우선 시일을 물려 거행하도록 하였으니, 경은 그 점을 헤아리라."
하였다.
3월 14일 병자
영춘현(永春縣)의 화재를 당한 집과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3월 15일 정축
전교하기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할 자격을 받은 민영소(閔泳韶)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유생들의 상소문 일로 전후에 걸쳐 엄칙(嚴飭)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군명(君命)에 극력 항거하면서 전혀 두려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또다시 불러 모아가지고 상소를 올린 지 여러 날이 지났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의리이고 무슨 도리인가? 진실로 농사짓고 글공부하는 데 마음을 붙여 몸가짐을 단속하고 지조를 지켰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런 패악스런 무리들은 선비로서 대우할 수 없다.
이른바 소두(疏頭)는 형조(刑曹)에 이송하여 엄형을 가한 후 원배(遠配)하고, 그 나머지는 승정원(承政院)과 한성부 낭청(漢城府郞廳)이 전교(傳敎)에 따라 금예(禁隷)를 많이 보내서 당일 안에 교외로 내쫓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유생 상소의 소두(疏頭) 김조영(金祖永)은 안변부(安邊府)에, 김석규(金碩奎)는 덕천군(德川郡)에 정배(定配)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 장령(前掌令) 박기종(朴淇鍾)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조전(漕轉) 문제가 당장의 급선무입니다. 근래 배를 세내어서 상납하라는 명령이 있어 배를 마련할 때 장리(將吏)들이 뇌물을 받고 조종하여 암암리에 잇속을 취하고 저 상고(商賈)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조운을 모면하려고 하여 물고기와 소금도 유통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역시 하나의 큰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각 고을의 세창(稅倉)이 넘쳐나서 야외에 쌓아놓았으나 운반할 만한 배가 없습니다. 경강(京江)의 배들은 대부분 수리하지 못해서 숫자대로 발송(發送)할 수 없다고 하니 부득이하다면 공전(公錢)이나 공곡(公穀) 중에서 얼마간 마련해서 떼주어 각기 자기 고을에서 배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운반해다 바치게 하고, 이른바 배를 세내는 일은 일체 중지시켜야만 세정(稅政)이 혹시라도 바로 두서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묵은 토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야가 넓기는 호남(湖南)만한 곳이 없으나 연해 고을의 묵혀서 버려진 땅에 대하여 예전처럼 백지(白地)로 징수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으로서는 다시 양전(量田)하여 사실대로 결수를 집계하여 거둔다면 백성들이 억울하게 징수당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정공(正供)만 바치게 되니 어찌 백성들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바로잡아 구제하는 대책은 이 두 가지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문 내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3월 16일 무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7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8일 경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한경원(韓敬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3월 19일 신사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서당보(徐堂輔)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임명하였다가 곧 체직시키고 홍우길(洪祐吉)로 대신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참반 유생(參班儒生)의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명(銘)에서 〖거수(居首)한〗 유학(幼學) 이우면(李愚冕)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3월 20일 임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1일 계미
이경응(李景應)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박제인(朴齊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영목(閔泳穆)을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서당보(徐堂輔)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재차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지금 중국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2통을 보니, 한 통은 작년에 회령(會寧)에서 교역하는 사안인데 이것은 전번에 윤허받은 것과 다르니 회답 자문을 작성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른 한 통은 학도(學徒)들의 빙표(憑票)를 발급하는 문제로 외교관인 이용숙(李容肅)이 영수하였는데 이후에 만일 천진(天津)으로 갈 일이 있으면 장정(章程)에 따라 미리 파견될 관리와 사람 수, 경유하는 도로에 대하여 먼저 예부와 직례 총독(直隷總督)에게 자문을 나눠 보내어 여러 곳에 두루 다니기 편리하게 해서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문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회답 자문을 만들어 의주부(義州府)에 내려 보내서 북경(北京)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3일 을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일내금군(一內禁軍)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시사가 끝나지 않은 자는 내일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중일각(中日閣)에서 시취할 것이며 선기대(善騎隊)의 가전 별초(駕前別抄)는 도통사(都統使)로 하여금 단풍정(丹楓亭)에서 시취토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에게 특별히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경에게 비답을 이미 두 차례나 내려서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으니, 아마도 내 마음을 체득하여 알았을 것이다. 경도 한번 생각해보라. 가령 오늘날 조정이 다스려지고 안정되었다 하더라도 영의정으로 나를 돕는 위치에 있으면서 담당해 나서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릴 방도를 도모하고 나라가 위태롭기 전에 보전할 방도를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당장의 일이 곤란한 것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 이루 다 셀 수 없는 사오항에서 경의 덕량과 경의 지략으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난 공적이 있는데도 지금 갑자기 손을 떼고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저는 병이 있어 불가능하고 재능도 부족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믿을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야(朝野)의 실망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경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이번엔 특별히 타일러 다시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라."
하였다.
남정익(南廷益)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출신(出身) 황재현(黃載顯)·홍시중(洪時中)이 방자하게 상소를 올렸는데 비록 정사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격식에 벗어난 것이니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게다가 홍시중의 상소 내용은 극도로 무엄하고 황재현의 상소문은 문구가 지극히 흉악하기 때문에 원래의 상소문을 모두 다 아직까지 본원에 보류해 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는 용서할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봉입하라."
하였다. 황재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일개 출신으로서 구중궁궐에 글을 바치는 것은 분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서 감히 용서받기 어려운 죄입니다. 그러나 신이 해변에서 병서(兵書)를 10여 년간 공부하였으니 정밀하고 심오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비록 잘 안다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그 대강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배운 것이 병법에 관한 것이고 말하는 것도 병법에 관한 것이며 맡은 책임도 군사에 관한 것이니, 세상이 위기에 처한 이때에 제 한 목숨을 아껴 충성스런 계책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병법은 잘 쓰면 천하의 패권을 쥐기에 충분하지만 잘못 쓰면 도적을 불러들이고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그 승패는 군사들이 칼을 들고 접전한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묘당(廟堂)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며, 성공과 실패는 성곽이나 군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장수를 선택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장수를 선택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을 어찌 난리가 있게 된 뒤에 하겠습니까? 옛날 봄에 사냥하고 가을에 사냥하며 대오를 정돈하고 무기를 다스린 것은 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방도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대세를 논한다면 중국이 천하를 호령하지 못하는 반면에 변경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齊) 나라와 초(楚) 나라의 옛 지경과 연(燕) 나라의 옛터를 지키기도 하고 잃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는 러시아〔俄羅斯〕, 프랑스〔法國〕, 미국(美國), 영국(英國)과 같은 나라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 무도한 짓을 제멋대로 하고 때때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겨루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성인이 난 지 오래되어 교화가 해이해져서 세상이 어둠 속에 묻힌 것이니, 이는 치세(治世)에서 난세(亂世)로 들어가는 시대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세력이 병력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를 침범한다면 그 환란은 마치 태산으로 계란을 내리누르는 형세보다 심할 것입니다. 또 비슷한 소식으로서는 황준헌(黃遵憲)의 책략이 있고 명백한 사실로서는 일본 사신의 행동이 있었으니, 지금은 참으로 나라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급한 시기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는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밤낮으로 근심하면서 삼천리 강산을 자신의 대에 이르러 혹시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500년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 혹시 망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계십니다. 안으로는 훌륭한 장수가 없고 밖으로는 적의 나라가 많으며 창고는 텅 비고 무기와 군사는 정예롭지 못하므로 계책을 쓸 수 없고 형세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제서야 비상한 계책을 내어 또 세상에 없던 일을 경영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사신을 자주 보내는데, 그 의도는 바로 이웃 나라와 연계를 맺어서 외적을 막고 통상으로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서로 간에 적절하게 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잘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만들 수 있을 듯하지만 잘못하면 도리어 침략을 불러오고 화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그 계책이 이로운가 이롭지 못한가는 미리 따져볼 수 없지만 사신 행차로 연로(沿路)의 물력(物力)이 피폐해지고 다른 나라의 옷차림을 한 자들이 수도 부근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위로는 관리들로부터 아래로는 뭇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은 지혜로운 자가 법을 만들면 어리석은 자가 그것에 구애되고 어진 사람이 예법을 고치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그것의 시비를 따진다는 옛 사람의 말과 같지 않습니까?
신이 수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향(京鄕)의 인심을 헤아려보니, 대뜸 무지하고 우매한 사람들이라 하여 그것을 모른다고 결론짓고 선뜻 실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심(人心)으로 나라를 유지해 가는 것이 마치 썩은 줄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처럼 예나 이제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절실한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혹시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방도가 된다 하더라도 옛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창출하여 할 수 있는 일에 감히 경솔하게 손대지 않은 것은, 나라의 운명이 백성들에게 달려 있으므로 백성들이 한 번 동요하여 흩어지게 되면 이로운 측면에서는 장차 성공을 보장할 수 없게 되고 해로운 측면에서는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위에서는 신뢰가 없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의 정상은 언제나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데 팔도(八道)의 감사(監司)로부터 360개 고을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질고 착한 정사는 모르고 오직 백성들에게서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학정으로 서로들 백성에게서 빼앗으려고만 하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조리 물과 불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 해가 언제나 없어지겠는가? 나와 함께 없어지고 말자.〔是日曷喪及予偕亡〕’라는 말이 오히려 헐후(歇后)한 말이 되었으니, 곤궁해도 호소할 데 없는 그들의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화적떼가 일어나 산골짜기에 모여들고 해적들은 무리지어 무기를 싣고서 대낮에 큰 길에서 길가는 사람을 막고서 돈을 빼앗는데 심지어는 세전(稅錢)과 군목(軍木)까지도 왕왕 탈취당하게 되었습니다. 도적의 수가 혹은 수백 명 혹은 700, 800명에 이르며 그 밖에 시정(市井)과 여항(閭巷)에서 출몰하는 잔당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도성 안에서 도적과 화재의 변고가 자주 일어나니 이것은 실로 깊이 근심하고 길게 걱정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저 사행을 늦추고 이것을 서둘러야 할 일입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한 사내가 들고 일어나서 주먹을 부르쥐고 선동한다면 관서(關西) 이북과 영남(嶺南), 호남(湖南) 이하의 땅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무너지려 하는 때를 당하여 그저 느긋하게 걱정할 줄 모르니, 신은 다만 ‘밤에 파수 보는 누(樓)에 올라 태백성(太白星)을 바라보누나.〔夜上戌樓看太白〕’라는 시를 읊조리면서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크게 한숨을 쉬니 세찬 바람이 쏴 불고 바다를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니 분노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신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황하면서 현실에 대하여 생각해보니, 지금 나라의 운수는 날로 어려워지고 민심은 날로 흩어지며 왜적은 항구를 청하고 도적은 무리지어 일어나며 선비들의 사기는 저하되어 조정을 함부로 비방하며 문관(文官)은 안일에 빠졌고 무관(武官)은 놀기만 하며 고관들의 집에는 청탁하는 일로 분주하고 상하(上下)의 언로가 막혀서 서로 멸망의 길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화는 ‘내 눈을 빼서 동쪽 성문에 걸어 달라.〔吾目掛東門〕’라고 한 오자서(吳子胥)의 말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화가 자기 집안에서부터 일어날 것이므로 북방 오랑캐를 막아도 소용이 없다.〔禍起蕭牆無用防胡者〕’라고 하는 경우와 어찌 맞지 않겠습니까?
지금 가만히 생각건대 군사에 관한 정사는 다섯 가지나 있으니, 장수를 잘 선택하는 것이 첫째이고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것이 둘째이고 군량을 비축하는 것이 셋째이고 병졸을 단련시키는 것이 넷째이고 청야(淸野) 전술이 다섯째입니다.
장수를 진실로 적임자로 얻는다면 복잡한 형세도 손바닥처럼 장악할 수 있고 천리 밖의 형편도 심중에서 따져볼 수 있으므로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이룩하는 묘책이 전쟁을 하기 전에 결정되어 국외의 적과 국내의 도둑으로 하여금 의혹을 가지게 하여 여기에 감히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른바 가장 뛰어난 병법은 적의 모의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진법이 숙련되어 있으면 기법(奇法)과 정법(正法)을 써서 세상에 겨룰 데가 없으며, 설사 갑자기 나타나는 복병과 강한 무기를 만난다 해도 군대의 대오가 태산처럼 안정되어 동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북을 치면 끓는 물과 불 속에라도 뛰어들 듯이 진격하고 징을 울리면 금과 옥도 모두 버리고 멎게 되므로 어떤 군대라도 상대하지 못할 것이니 어떤 적인들 평정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군사들이 굳세고 힘이 있어서 인내성 있고 모질다면 이것은 이른바 초(楚) 나라 6군(郡)의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과 기이한 재주를 갖춘 검객 같은 사람들이니, 절도 있게 제어하고 의리 있게 양성한다면 마치 자제들이 부모를 호위하듯 손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 나라를 보호할 것입니다.
군량을 충분히 쌓아놓고 운반을 잘한다면 적의 형편을 엿보면서 싸우거나 지키면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편안히 앉아 먼 곳에서 지쳐서 오는 적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청야 전술이란 들에 쌓여 있는 백성들의 곡식을 모조리 감추어 적들로 하여금 먹을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적들이 우리의 경내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정말 안다면 꼼짝하지 못하고 온몸을 움츠리고 감히 경솔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또한 다음가는 방법으로 될 만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조리정연하니 비단 《무비지(武備誌)》와 윤씨(尹氏)의 《보약(堡約)》에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지금의 장신 신헌(申櫶)이 초기(草記)하여 각 고을에 포고한 것도 역시 급선무를 안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대개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이후로 송(宋) 나라, 명(明) 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시험해 보았으나 백번 중에 한 번도 실패한 것이 없었으니 분명히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 정사 가운데서 장수를 선택하는 법에 대해서는 지금의 시임 장신(時任將臣)과 원임 장신(原任將臣)들을 보아도 한 가지 방법도 시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 신이 외람되게 이에 대해 경솔히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陳) 치는 법에도 숙련되었는지 여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몇 해 전에 함경도(咸鏡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군영(軍營)에 다니면서 이른바 병교청(兵校廳)의 집사(執事)들에게서 들은 것은 우리나라의 병서(兵書)로서 일반적인 것은 바로 《병학지남(兵學指南)》 1질(帙)인데, 완전히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창졸간에 진 치는 상황에 닥치면 실수하여 격식을 어기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고 합니다. 하물며 평상시에 연습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속오 대오법(束伍隊伍法)과 기법(奇法)과 정법(正法), 북을 울리고 징치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전혀 모르며 전투 동작법, 총 쏘고 활 쏘고 나무와 돌을 내리굴리며 당번을 교대하는 일들을 마치 꿈속에서 말을 더듬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여기에서 팔도의 군(郡), 현(縣), 영(營)과 진(鎭)에는 한 명의 병교(兵校)도 진 치는 법을 대강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기를 마치 임진년(1592)에 적이 천리 길을 단번에 달려와 서울을 곧바로 친 것과 같이 하니 학식 있는 사람들이 어찌 한심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이른바 ‘병교’라는 것은 바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장차 군정(軍正)이 될 사람입니다. 변란이 일어날 때를 예상하고 혹시 천성이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이 자기 직무를 버리지 않고 말을 채찍질하여 입이 마르도록 수십 명의 병졸로 불러 모은 사람 중에서 군무에 능통한 자에게 병교의 임무를 맡기고 능하지 못한 자는 받아들이지 말며 임무를 맡은 자에게는 그 병교청 안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를 준다면 한해를 넘기지 않아 군무에 정통한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식량을 저축하는 방도는, 우리나라는 삼남(三南)에서 배로 운반하는 것에 불과한데 근래 배가 파손되어 잃은 것이 해마다 30, 40척 이상이며 총계가 5, 6만 석(石)이나 되니 백성들에게 독촉해서 징수한다 하더라도 끝내 흐지부지하게 소비하고 맙니다. 신이 바닷가 고을에서 나서 자랐으므로 조운(漕運)의 폐단에 대하여 좀 알고 있습니다.
대체로 경강(京江)의 선주(船主)와 조창(漕倉)의 뱃사공들이 그 선가(船價)를 탐하여 많은 이익을 남겨먹기 위하여 배를 굉장히 크게 만들어서 짐을 싣되 적어도 2,000여 석 이상입니다. 또 혹시 더 실을 쌀이 있으면 일은 적고 값은 곱절로 받는 이익을 탐내어 험한 바닷길을 가면서 요행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뜸 짐을 더 실으니 그 중량은 태산처럼 무겁게 됩니다. 바람을 받은 돛배가 수십 일 물길을 가는 과정에 사나운 파도와 광풍을 만나기라도 하면 바다의 파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는 비단 귀중한 물건을 모두 버리게 될 뿐 아니라 나라의 생계와 군량에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각도(各道)에 엄중하게 공문을 띄워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배에 짐을 싣는 양을 대략 1,000석을 넘지 않도록 한다면 침몰되는 일이 반드시 줄어들 것입니다.
군사들로 말하면 지금 각 고을의 군총(軍總)은 한갓 빈 장부만 끼고 있으며 속오(束伍), 아병(牙兵), 주사(舟師), 기수(旗手)는 모두 거짓 이름일 뿐입니다. 대장에 올라 있는 이름도 모두 죽은 사람이고 훈련에 참가한다는 인원수도 태반이 어린아이들이니 갑자기 변란이 생길 때에는 이 부류들을 내몰아서 정예한 군사를 방어하게 되니 어찌 승리할 수 있는 방도가 되겠습니까? 권세가의 묘촌(墓村)과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에 대하여 과조(課條)를 엄격히 세워 병적(兵籍)에 입적시켜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각 고을의 병교청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훈련시킨다면 충분히 정예병이 될 것입니다. 다만 간사하고 교활한 향리가 뇌물을 받고 빼내려고 하는 것을 엄금해야 합니다.
그러하니 청야 전술을 실시한다 하더라도 군사들이 없으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고 군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비축하지 않으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으며 군량을 저축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진법대로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고 진법대로 한다 해도 훌륭한 장수가 없으면 결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있어야 정사가 거행되고 사람이 없으면 정사가 폐해진다는 것입니다. 정승의 묘지에 있는 잣나무에도 학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충무공(忠武公)의 무덤에도 석린(石獜)만이 쓸쓸하게 있으니 어찌 전하께서 오늘날 자신을 돌아보면 길이 탄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의 형세는 우선 수성(守成)하고 뒤에 싸우지 않을 수 없는데 먼저 지키는 방도는 민보(民堡)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법은 위로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방어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생업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니 간단하면서도 세상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그밖에 병정(兵政)의 요령과 일의 임기응변에 대해서는 글로 낱낱이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심한 우려를 금할 수 없어서 이렇게 부족한 계책을 올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사람이 천하다 하여 말까지 천하게 여기지 말고 쓸 만한 말이면 취해 쓰시고 쓸만하지 않으면 망녕되게 말한 신의 죄를 다스려서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홍시중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일개 하찮은 무사(武士)로서 어떻게 감히 나라의 큰 계책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왜인(倭人)들이 우리나라의 화근으로 된 지 오래되었으니 임진년(1592)과 같은 변란에 대해서는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아름다운 풍속이 점차 변해지고 좋은 제도에도 폐단이 생겨 문관(文官)들은 안일해지고 무관(武官)들은 유흥에만 빠져 점점 더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총애와 녹봉(祿俸)을 탐내는 사람들은 팔짱끼고 바라보기만 하고 모험하면서 요행수를 바라는 무리들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사설(邪說)을 멋대로 의논하여 군부(君父)의 뜻을 바꾸고 은밀한 뇌물과 진기한 물건으로 임금의 물욕을 이끌어서 관소(館所)를 청소하고 음식 대접을 성대하게 해주게 하며 땅을 떼 주고 항구를 열어주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의 바른 사람들이 금수같은 무리로 변했고 행적이 개돼지 같은 무리와 교류하게 되니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되고 나라가 나라구실을 못하게 되었으니 이런 무리의 죄에 대해서는 주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들은 왜놈들에게 속임을 당했고 전하께서는 이런 무리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속았다는 사실을 분별해 드리겠습니다. 이 무리들은 말하기를, ‘왜인(倭人)들과 화친하는 것은 그전부터 있던 제도이지 오늘 처음으로 만든 일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옛날의 화친의 경우에 동래부(東萊府)의 한 구석에 관시(關市)를 설치했다 하더라도 한 발자국이라도 경계를 넘는 것을 엄격하게 방지하였으니 이것은 왜인들이 우리에게 제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화친은 이와 반대로 지역을 형편대로 골라서 요충지를 차지할 뿐 아니라 수도 부근의 연안(沿岸)까지 진출하여 해금(海禁)을 무너뜨리고 수도 안으로 마구 들어오는 바람에 국경의 기찰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우리가 왜인에게 제재를 받는 격입니다. 또 말하기를, ‘우리가 화친하는 것은 왜인이고 서양 사람이 아니므로 해롭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크게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옛날의 왜인은 미욱한 풍속과 습관이 그 나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천하는 외국의 문물에 관심둘 겨를이 없었지만, 오늘의 왜인은 이와는 반대로 서양옷을 입고 서양기구를 쓰고 서양배를 타고 서양물건을 실어 나르며 서로 통상하는 대상이 모두 대양 서쪽의 다른 종족들입니다. 심정이 서로 통하고 머리모양도 바꿨으니 왜인이 서양 사람이고 서양 사람이 왜인이라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항구를 열고 시장을 설치하더라도 규정을 세워 세금을 받으며 아편이나 예수교 책 같은 것은 모두 조사하고 적발해서 극형에 처한다면 우리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교묘한 술책을 써서 잇속의 미끼로 백성들을 유인하고 예수 교리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면 우매한 자들은 맛을 들여 좋아하고 건방진 자들은 책을 보고 미혹되어 말세의 폐습에 모든 사람들이 아편을 먹고 예수교에 물들여지게 될 것이니, 앞에서 수색하고 적발해서 극형을 가한다는 것도 결국 헛된 문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왜인이나 여러 나라들과 화친하는 것은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한 급선무이며 또 왜인이 우리와 화친하려는 것은 역시 러시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만일 왜인들이 정말 러시아를 두려워하여 우리와 화친을 하자고 한다면 왜인이 약하다는 것을 알 만한데 지금 약한 왜인의 힘을 빌어서 러시아의 침략을 늦추어 보자는 것이 역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지금의 무기는 새로 나올수록 더욱 기묘한 까닭에 저편이 가지고 이편이 못 가지면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은 벌써 결판이 나는 것이니 각 나라에 가서 제조법을 배워온 다음에야 변란을 당해낼 수 있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헌원씨(軒轅氏) 이후로 병법(兵法)을 말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지극히 정밀하고 기묘해서 헤아릴 수 없는 한 가지는 임금의 마음에 있는 ‘일(一)’ 자에 간직되어 있을 뿐입니다. 임금이 이 일심(一心)으로 장수를 임명하고 장수가 이 일심으로 군사들을 통솔하며 군사들이 이 일심으로 상부에 복종한다면 전 부대가 승리하리라는 것은 접전하지 않고도 결정될 것입니다. 지금 외적을 방어하려고 하면서도 적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병법을 배워다가 이길 수 있다고 하니, 미욱한 사람도 그것을 승산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불행히도 왜인과 화친하여 수로와 육로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잇달아서 보고 들어 우리나라의 실정을 이미 알게 되었으니, 갑자기 왜인을 준엄하게 배척한다면 그것은 왜인에게 트집잡힐 구실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당면한 계책으로서는 따로 조규(條規)를 세워서 10년에 한 번씩 신사(信使)가 가면 다음해에는 그들이 오며 그 9년 사이의 사무는 모두 동래부(東萊府)에서 제기하는 대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신이 일본에 가서는 10일 이상을 객관(客館)에 머물지 않고 또 객관 밖에 나가서 놀지도 말 것이고 일본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할 것이며, 사행(使行)의 수원(隨員)은 10명으로 정하여 피차 동일한 인원수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국서(國書)’란 것은 그 임금이 새로 들어선 때가 아니라면 사신(使臣)의 배를 보내지 말며 그들의 배를 대기시켜 항구를 열어준 대가를 요구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항구를 세 군데나 이미 허락해 준 것에 대해서는 되찾을 수 없지만 그중의 한 군데는 우리나라의 목구멍과 같은 지역이니 단단히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계선을 명확하게 그어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엄하게 방지하며 인천(仁川)을 수영(水營)으로 승격시키고 부평(富平)을 병영(兵營)으로 승격시켜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방어하게 할 것이며 목책 밖으로 또 몇 개의 진영을 설치하고 군정(軍政)에 지략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두어야 합니다. 항구에는 따로 봉화를 설치하여 저들의 배가 정박하는 것을 봉화로써 알리며 저들의 상선(商船)은 많아도 2, 3척을 거느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시장을 여는 것은 해일(亥日)로 정하여 한 달에 두 차례 사고팔되 교역하는 물건이 서양사람의 손을 거친 것은 일체 엄금하고, 잠상(潛商)도 적발하는 대로 예수교에 대한 형률에 의거하여 즉시 효수시켜 경고시킬 것입니다.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은 물건은 사고파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물건을 사고파는 법(法)도 공문으로 통지해 오지 않은 것은 몰수하며, 미곡이나 포목과 같은 물건은 세 곳의 항구에서 모두 무역하지 못하게 하며, 또 현물과 현물을 맞바꾸기만 하고 동화폐(銅貨幣)의 사용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본국의 상고세(商賈稅)는 10분의 5를 정식으로 만들어 우리 사람들은 잇속이 적다고 하여 잘 가지 않고 저 왜인(倭人)들은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하여 잘 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몇 해 안 가서 항구에서 생기는 폐단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중서문견(中西聞見)》, 《만국공법(萬國公法)》, 《공사지구(公史地球)》, 《영환신보(瀛環申報)》,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속금일초공업육학(續今日抄工業六學)》 등의 책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등 허다한 책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종로 거리에서 불태우고 윤음을 내려서 지난날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뉘우침을 진술하게 하고 예수교를 배척하는 뜻을 널리 알려서 만백성들이 명확히 듣고 잘 따르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재난을 없애며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 성벽처럼 된다면 어찌 왜인(倭人)이나 서양 사람, 러시아 사람이 강대한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말까지 천시하지 말고 쓸 만한 말이거든 채용하고 쓸 수 없는 말이라면 임금을 기만한 신의 죄를 다스려주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황재현(黃載顯), 홍시중(洪時中)의 상소문을 보니 이것이 과연 시사(時事)에 대한 말인가? 대수롭지 않게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원래의 상소문을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3월 24일 병술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에게 다시 하유(下諭)하기를,
"일전에 속마음을 터놓고 타일렀으므로 경이 틀림없이 체득하고 헤아렸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편지에서 또 병을 가지고 말한 것을 보니 걱정스럽고 거듭 부끄럽고 답답하다. 다만 나의 정성이 부족하고 말이 졸렬했기 때문에 경의 마음을 감동시켜 즉시 돌려세우지 못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금 국계(國計)와 민사(民事)를 보면 수습할 방법이 없다. 일을 도모하고 이루는 것이 오직 정승에게 달려 있는데 한 번 두 번 상소를 올리며 착수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고만 말하겠는가? 역시 천만 뜻밖의 일이니, 어찌 답답하고 딱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조급한 심정에 마치 목이 타는 듯하고 굶주린 듯하다. 그래서 이 편지를 직접 써서 다시 속마음을 펼쳐 보이니, 경은 모름지기 달려와서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정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내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다.】 "지금 전교(傳敎)를 보니, 황재현(黃載顯)과 홍시중(洪時中)이 상소를 올린 일을 가지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토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을 상세히 보니 그 지극히 흉악하고 패악스런 문구는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수와 기강을 범한 것이 이렇듯 극도에 이르렀으니 나랏법을 엄히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왕법(王法)을 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려 황재현은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엄핵(嚴覈)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고, 홍시중으로 말한다면 그 언사가 극도로 무엄하니 형조(刑曹)에 넘겨 엄형을 가한 후 원배(遠配)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올려 정사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애당초 저 무리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더구나 언사가 아주 무엄하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감처(勘處)하는 일은 마땅히 차자의 내용대로 하겠다." 하였다.
【원본】 22책 18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지금 전교(傳敎)를 보니, 황재현(黃載顯)과 홍시중(洪時中)이 상소를 올린 일을 가지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토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을 상세히 보니 그 지극히 흉악하고 패악스런 문구는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수와 기강을 범한 것이 이렇듯 극도에 이르렀으니 나랏법을 엄히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왕법(王法)을 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려 황재현은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엄핵(嚴覈)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고, 홍시중으로 말한다면 그 언사가 극도로 무엄하니 형조(刑曹)에 넘겨 엄형을 가한 후 원배(遠配)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올려 정사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애당초 저 무리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더구나 언사가 아주 무엄하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감처(勘處)하는 일은 마땅히 차자의 내용대로 하겠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대사헌(大司憲) 한경원(韓敬源), 대사간(大司諫) 오익영(吳益泳), 집의(執義) 김용규(金容圭), 사간(司諫) 현필제(玄弼齊), 장령(掌令) 정해용(鄭海瑢), 지평(持平) 고경준(高景駿), 헌납(獻納) 홍희린(洪羲麟), 정언(正言) 이학년(李學年)이다.】 황재현(黃載顯)과 홍시중(洪時中)에 대해서 빨리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저 놈들이 한 짓은 참으로 몹시 무엄하다.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상소를 올린 홍시중(洪時中)은 형조(刑曹)를 시켜 엄형을 두 차례 가한 다음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하고, 황재현(黃載顯)은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와서 엄히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응교(應敎) 조인승(曺寅承), 부응교(副應敎) 조병승(趙秉升), 교리(校理) 박규찬(朴奎燦)·신태관(申泰寬), 부교리(副校理) 한기동(韓耆東)·김주현(金疇鉉), 수찬(修撰) 목승석(睦承錫), 부수찬(副修撰) 민병석(閔丙奭)·이필용(李弼鎔), 정자(正字) 조석구(趙晳九)이다.】 "홍시중(洪時中)과 황재현(黃載顯)은 모두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와서 국문(鞠問)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상소문 내용이 과연 극도로 무엄하여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더는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원본】 22책 18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홍시중(洪時中)과 황재현(黃載顯)은 모두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와서 국문(鞠問)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상소문 내용이 과연 극도로 무엄하여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더는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장련(長連)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킨 문제를 가지고 그 사이 도신(道臣)이 여러 차례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 있었다. 먼 곳의 우매한 백성들이 함부로 법과 기강을 위반한 것은 과연 극도로 해괴하다. 두령 노릇을 한 여러 놈들은 본도의 감영(監營)을 시켜 철저하게 엄핵하여 중죄로 처벌하라. 해당 수령으로 말한다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책임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불법을 자행하여 이런 소요를 초래하였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 이미 죄를 받았다고 하여 논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장련 전 현감(長連前縣監) 원준상(元俊常)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형(嚴刑)을 한 차례 가한 다음 원악지(遠惡地)로 찬배(竄配)토록 하라."
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임한수(林翰洙)가, ‘철원(鐵原)에 사는 전 선전관(前宣傳官) 김흥구(金興求)가 조관(朝官)이라 칭하고 제멋대로 불법을 행하면서 평민들을 침학(侵虐)하고 관장(官長)을 능멸하였으니 풍속과 교화에 관련됩니다. 그 죄상을 유사(有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전함(前銜)이 조관이라 칭하고 시골에 살면서 못하는 짓이 없이 행패를 저질렀으며, 심지어는 관장을 능멸하고 평민을 침학하였으니 어찌 이런 완악한 버릇이 있단 말인가? 김흥구를 순영(巡營)에서 잡아 올려다가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고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하라."
하였다.
3월 26일 무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영선사(領選使)의 일행으로 관변(官弁) 2원(員)을 본 아문(衙門)에서 가려 보내는 일로 절목(節目)을 계하(啓下)하였습니다. 훈련원 정(訓鍊院正) 백낙륜(白樂倫),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 서광태(徐光泰)를 모두 그들과 함께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삼가 전교(傳敎)에 따라 죄인 홍시중(洪時中)은 두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고 전라도(全羅道)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배소(配所)를 정하여 압송(押送)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3월 27일 기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 문무과(庭試文武科)를 행하였다. 문과(文科)에서는 서공순(徐公淳) 등 3인(人)을 뽑았고 무과(武科)에서는 유석형(柳錫衡) 등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서공순(徐公淳)은 바로 계방(桂坊)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영선사(領選使) 일행의 비상시에 대비한 은자(銀子) 1,000냥(兩)은 절별사(節別使)의 전례에 따르되 만부(灣府) 운향고(運餉庫)의 저축 중에서 가지고 가게 할 것입니다. 만약 들여 쓰지 않을 경우에는 해당 창고에 환록(還錄)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렇게 하는 것을 규례로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8일 경인
성균관(成均館)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였다.
새로 급제한 이원중(李源中)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서공순(徐公淳)을 부교리(副校理)로, 박영교(朴泳敎)를 수찬(修撰)으로, 이우면(李愚冕)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김병시(金炳始)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3월 29일 신묘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경리사(經理事),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일본국(日本國) 국서(國書)에 대하여 장차 회답(回答)을 하려는데 의정(議定)해야 하겠으므로 이렇게 소견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번 이 일본국의 국서는 처음 있는 일이니 회답을 쓸 때 마땅히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본래 이웃 나라고 우호적인 나라이니 평등한 예의로써 모두 보내온 글의 규식대로 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큰 절목(節目)인 만큼 하문(下問)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 통리기무아문 경리사(統理機務衙門經理事) 김보현(金輔鉉),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우창(洪祐昌) 등이 아뢴 것도 대략 같았다.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관백(關白)이 있을 때 이미 그런 전례가 있었습니다. 지금 국서에는 원래 저들의 칭호가 있으니 반드시 우리가 고쳐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청(淸) 나라도 이대로 부르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과 재상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통신사(通信使)가 들어갈 때에 절목을 써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국서의 형식은 통리기무아문 및 예조(禮曹)에서 모두 정식(定式)을 만들어야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오례의(五禮儀)》에도 역시 국서의(國書儀)가 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절목을 《오례의》에 주석(註釋)으로 보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의절(儀節)을 조금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의 병이 문득 심하게 앓고 있는 중에 삼가 듣자니, 소대의 명령이 오랫동안 중지되었다가 연이어 내리고 또 동궁(東宮)이 서연(書筵)에 시좌(侍坐)하고 날마다 서연을 열도록 명하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전하가 몸소 가르치는 참된 마음이며 중요한 도리입니다.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하하며 칭송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대개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정사를 부지런히 하기 위한 것이니, 바로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서로 전해오는 심법(心法)입니다.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조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순과 같은 자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 있는 품성을 기르고 어떻게 지혜로운 생각을 계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옛날과 오늘날의 정사가 잘 되고 못 된 것을 토론할 수 있고 어떻게 중요한 정무(政務)의 옳고 그른 것을 의논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도리를 찾고 정사에 전심하는 경지에 날마다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옛날 부열(傅說)은 말하기를, ‘시종 일관 학문에 힘쓸 것만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덕이 수양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것이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말이란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동궁 저하(東宮邸下)가 대내(大內)에서 때때로 글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신은 물론 알고 있으나, 서연에서 강독하는 것은 한 번 훑어보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지금부터 몇 차례씩 과정을 정하여 형식만 갖추지 말고 허례(虛禮)만 차리지 말며 고식적인 애정으로 하지 말고 인도하는 방도를 늦추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가 한 번 보고 한 번 듣고 한 번 말하고 한 번 행동하는 것은 모두 다 동궁 저하가 보고 감동해서 모범으로 삼을 것이니,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것은 더욱 바른 마음을 배양고 복을 아끼는 근본이 됩니다.
모든 의복과 음식과 기물(器物) 중에 사치하고 기이한 것들은 금지하여 배척하고 힘쓰도록 경계하여 자연히 습성화되면 어린 나이에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여 항상 먼저 마음속에 간직하는 주장으로 삼아 요순처럼 될 것이니, 하늘에 기원하여 나라의 운명을 영원히 하는 기반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만약 학문이 없다면 무엇으로 실현하겠는가? 동궁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더욱이 자신이 먼저 솔선하여야 할 것이다. 진술한 여러 가지 조목을 삼가 마음에 두고 어기지 않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전 장령(前掌令) 박기종(朴淇鍾)이 올린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상소의 내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첫째는 배를 삯 내어 세곡(稅穀)을 싣는 것을 일체 정파(停罷)하고 공전(公錢)과 공곡(公穀) 중에서 구획(區劃)하여 덜어 주어서 각기 자기 고을로 하여금 배를 가각 몇 척(隻)씩 만들도록 하여 그 배로 실어다 바치게 하는 사인입니다. 요즘 집주선(執籌船)의 액수가 전에 비해서 크게 줄었으므로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에서 배를 삯 내어 바치도록 허락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조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허다한 조운(漕運)의 폐막을 한창 바로잡고 있으며 경외(京外)의 배도 차츰 증가되고 있으니, 무엇 때문에 반드시 강제로 배를 빌리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삯배를 마련할 때에 군교(軍校)와 하인들이 뇌물을 받고 조종하는 것은 오직 영읍(營邑)에서 각별히 살펴 금지시키는 데 달려 있으니 이로써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행회(行會)할 것입니다.
둘째는 호남(湖南)의 연읍(沿邑)이 진폐(陳廢)된 정도가 우심(尤甚)하니, 실제에 따라 다시 양전(量田)하는 사안입니다. 땅이 넓기로는 호남이 첫째인데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의 큰 흉년 이후에 연변 고을이 이따금 진폐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니, 해도(該道)의 영읍(營邑)으로 하여금 상세히 헤아리고 시험해보아 타당하게 바로잡는 방도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남(三南)에서 오랫동안 거두지 못한 세곡(稅穀)과 네 도(道)의 창고에 남아 있는 사창미(社倉米)를 참작하고 헤아려 수량을 집전(執錢)하도록 허락한 것은 공가(貢價)가 계속 막히는 것을 염려하고 또 급료를 주지 못한 것을 염려하면서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돈과 곡식을 취급하는 아문(衙門)의 형편이 완전히 거덜나서 비록 계책을 취할 방도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것을 나누어주는 와중에 추이(推移)하여 서로 바꾸어서 다른 데다 쓴다면 허다한 공인(貢人)과 군졸들이 그날의 먹을 것도 없는 형편에서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간곡하게 내린 특지(特旨)의 덕의(德意)가 막혀서 실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정이 신의를 잃는 것은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위에서 말한 공가와 급료로 위아래로 배정(排定)된 것은 절대로 다른 지조(支調)에 섞어 넣지 말라고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세곡 및 사환미(社還米)를 집전하는 것은 오로지 공가와 급료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어떻게 다른 지출에 섞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호조와 선혜청에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세곡을 주사 당상(舟司堂上)으로 하여금 감봉(監捧)하도록 특별히 법식을 반포한 것은 진실로 폐단을 제거하고 간사(奸邪)를 막기 위한 지극한 뜻에서 말미암았으니, 무릇 구관(句管)하여 감동(監董)하고 신칙(申飭)하는 절목에 관계되는 것은 해당 당상이 스스로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우러러 체득하여 크게 성과가 드러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창고에 받아들이고 곡식을 거둘 때에 본사(本司)의 영장(領將) 및 아전(衙前)과 하인들이 옆에서 교활하게 엿보다가 몰래 토색질하는 것도 반드시 그 폐단이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려우니, 먼저 거조(擧條)를 내어 해당 아문(衙門)에 신칙하고 그로 하여금 더욱 엄하게 살펴서 털끝만큼도 가로채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주사(舟司)에서 조세를 받는 것은 새로 실시한 규정이다. 받아들일 때 하속(下屬)들이 폐단을 일으키고 간사한 짓을 저지르는 일이 꼭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해당 아문에 엄하게 신칙하고 그로 하여금 철저히 규찰하게 하여 기어코 실효가 있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요즈음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동요하고 근심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법이 집행되지 않고 명령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도적을 없애는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에 대한 특교(特敎)가 어떠했으며 아뢰고 신칙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소소한 도적 사건 외에 놀랄 만한 사건을 날마다 듣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엄숙히 다스려서 깨끗이 한 서울에서 화적(火賊)의 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밤이 없고 인가가 조밀한 고을과 촌락 안에서 집을 습격당하는 근심이 없을 때가 없습니다. 공납(公納)이 간혹 이 때문에 지체되고 길 가는 사람들이 간혹 이 때문에 막힙니다. 하물며 이렇게 풍년 든 해에도 어찌 감히 두려움도 없이 무엄한 짓을 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포도청(捕盜廳)에서는 포도청으로서의 직무를 거행하지 않고 진영(鎭營)에서는 진영으로서의 사업을 실행하지 않고 있으면서 오히려 나라에 법이 있고 나라에 명령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 및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엄하게 신칙하여 조사하여 살피는 절차와 방책을 특별히 강구하며 포군(砲軍)을 조발(調發)해서 제때에 바로바로 소멸한 뒤에 전말을 치계(馳啓)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전처럼 해이하게 한다면 엄하게 감처(勘處)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두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교졸(校卒) 중 잘 살펴 체포하는 일에 유념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으면 각별히 논상(論賞)하라는 뜻으로 모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먼저 엄하게 신칙하고, 만약 혹시라도 줄곧 태만하면 특별하게 취급하여 엄중히 조사하라는 뜻으로 일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고 상신(故相臣) 문간공(文簡公) 이천보(李天輔), 정익공(定翼公) 이후(李),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은 영묘(英廟) 때의 재상으로 의리를 잡고 당시의 난국을 크게 구제하였으므로 엄연히 가릴 수 없는 실적이 있었고 신사년(1761)의 일은 더욱 감동하여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정묘(正廟) 때 을묘년(1795)의 처분에서 발휘하신 성념(聖念)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제 그 해가 다시 돌아왔으니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돈독히 잊지 않는 의리를 떳떳이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문간공(李文簡公)의 집은 요즘 몹시 영락되어 제사도 지내기 어렵다고 하니, 그 사손(祀孫)을 이조(吏曹)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서 조용(調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김경균(金敬均)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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