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임진
전교(傳敎)하기를,
"통리아문(統理衙門)을 설치한 것은 바로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위한 것이니 사체(事體)로 볼 때 특별한 점이 있다. 매번 차대(次對)마다 경리 당상(經理堂上)은 다같이 와서 참가하고 만약 긴급한 사무가 있으면 해사(該司)의 당상이 합문(閤門) 밖에 와서 등대(登對)를 청하는 것으로 분명히 정식(定式)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매번 경중(京中)에서 동가(動駕)할 때마다 경리 당상 및 주사(主事)는 스스로 한 반열을 이루어 밖에서 호위하고 안에서 수가(隨駕)할 것이며, 행행(幸行)할 때는 장망(長望) 중에서 수점(受點)하고, 전좌(殿座)할 때는 사진(仕進)한 당상과 낭청(郞廳) 또한 와서 기다리는 것으로 분명하게 정식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한경원(韓敬源)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달 경상도(慶尙道)의 유생(儒生) 이만손(李晩孫)의 상소문으로 미처 치우지 않은 한 소본(疏本)을 신이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흉패한 문구가 많아 그 출처를 들어보건대, 전 참판(前參判) 강진규(姜晉奎)가 상소문을 지어, 향회(鄕會) 자리에서 곧바로 썼다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열 사람이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며 만 개의 입은 가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 이만손은 바로 일개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자로 강진규의 사주를 달갑게 듣고 상소문 내용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태만하여 살펴보지도 않았습니다. 서울에 이르러 세상 사람이 떠들썩하자 비로소 두려운 마음이 생겨 창황히 고치려 하였으나 이미 전파된 글은 가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랜 가문의 후예로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무슨 불평스런 생각이 있기에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빠진 것입니까? 신은 바라건대 소두(疏頭) 이만손과 전 참판 강진규에게 모두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흉패한 문구가 많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미 올라온 상소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마땅히 물의(物議)의 가부(可否)를 들어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대사간(大司諫) 오익영(吳益泳), 집의(執義) 김용규(金容圭), 사간(司諫) 현필제(玄弼齊), 장령(掌令) 정해용(鄭海瑢)·양상기(梁相器), 지평(持平) 서상태(徐相泰)·고경준(高景晙), 헌납(獻納) 홍희린(洪羲麟), 정언(正言) 이학년(李學年)·구성희(具星喜)이다.】 ‘방금 삼가 대사헌(大司憲) 한경원(韓敬源)이 상소를 올려 이만손(李晩孫)과 강진규(姜晉奎)를 논란(論難)한 것을 보건대,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정당하여 간사한 싹을 꺾고 난신(亂臣)을 두렵게 할 만하였습니다. 대체로 참혹하고 사특한 내용과 흉패한 언사에 속한 것이 진실로 효경(梟獍)과 같은 심보로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강진규와 이만손은 그 죄가 같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도헌(都憲)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조희철(趙熙哲)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윤위(尹湋)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4월 2일 계사
태묘(太廟)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조인승(曺寅承), 부응교(副應敎) 조병승(趙秉升), 교리(校理) 박규찬(朴奎燦)·이원중(李源中), 부교리(副校理) 한기동(韓耆東)·서공순(徐公淳), 수찬(修撰) 박종현(朴宗鉉), 부수찬(副修撰) 민병석(閔丙奭)·이우면(李愚冕), 정자(正字) 조석구(趙晳九)이다.】 ‘이만손(李晩孫)과 강진규(姜晉奎)를 엄하게 조사하여 실정을 캐내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사헌(大司憲)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었지만 더욱 물의(物議)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4월 3일 갑오
태묘(太廟)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도통사(都統使) 이경하(李景夏)에게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겸찰(兼察)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재차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의 논의가 이러하니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재차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칙유(勅諭)하였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의 논의가 이러하니 공의(公議)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소본(疏本)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하여 엄히 처리하지 않겠는가? 이만손(李晩孫)과 강진규(姜晉奎)는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형구(刑具)를 채우고 잡아다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4일 을미
안변부(安邊府)의 눈에 압사 당한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4월 5일 병신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상소를 올린 황재현(黃載顯)의 원정(原情)에, ‘「이 놈의 해는 언제나 없어지겠는가?〔是日曷喪〕」라고 운운한 것은 지금 백성들이 수령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이런 말을 하였는데 전하께 주달하면서 감히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눈을 빼서 성문 위에 걸어달라.〔抉目掛門〕」고 한 것은 지금 외국에서 항구를 열 것을 청하기 때문에 이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저는 일개 출신(出身)으로 상소문을 쓰려고 하였으나 누가 기꺼이 서로 논의하려 했겠습니까? 제가 비록 무식하기는 하나 글을 좀 짓고 쓸 수 있습니다. 이밖에는 더 올릴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평문(平問)해서는 자복(自服)을 받기 어려운 만큼 청컨대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캐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7일 무술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중국 황태후(皇太后)가 붕서(崩逝)하였다는 부고(訃告)를 전하기 위한 칙사(勅使) 일행이 우리나라 국경에 들어오는 것이 몇 달 남짓 남았으니, 빈사(儐使)를 차하(差下)하고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당상, 낭청,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는 정사(政事)를 열어 임명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경리사(經理事) 조영하(趙寧夏)를 원접사(遠接使)로 계차(啓差)하였다.
조용호(趙龍鎬)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홍우창(洪祐昌)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조창영(趙昌永)을 부사(副使)로, 유종식(柳宗植)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우길(洪祐吉)을 영접도감 제조(迎接都監提調)로 삼았다.
4월 8일 기해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임응준(任應準), 부사(副使) 정직조(鄭稷朝), 서장관(書狀官) 홍종영(洪鍾永)이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황재현(黃載顯)에게 엄한 형벌을 가하고 다시 추궁했으나 이 말 저 말 끌어대며 종시 변명만 하고 있으니, 다짐받을 때까지 기다려 다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기어코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9일 경자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嬉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영소묘(永昭廟)와 문희묘(文禧廟)에 도승지(都承旨)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들러 총리대신(總理大臣)과 경리 당상(經理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아문(衙門)은 처음 설치되었기 때문에 지금 지나다 들렀다. 열성조(列聖朝)에서도 공해(公廨)를 지나다가 들른 전례가 있었다."
하니, 총리대신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영묘(英廟)에 지나다가 공해에 들른 적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필(御筆)로 현판(懸板)을 써줄 것이니 잘 걸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홍집(金弘集)이 세 번째로 상소를 올려 면직(免職)시켜 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니 과연 도리에 맞는가? 경에게는 경기(京畿) 연로(沿路)로 투비(投畀)하는 법전(法典)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4월 10일 신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객사(客使)가 경유하는 관우(館宇)에 각항(各項)의 지수(支需)를 포진(鋪陳)하는 것이 폐단으로 되고 있으니 특별히 살펴서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빈사(儐使)와 도신(道臣)의 행차부터 추솔(騶率)을 일체 줄이고 공억(供億)을 충분히 절약할 것이며, 각 차원(差員)들이 겸행(兼行)하는 것과 호행장(護行將)은 정하지 말도록 모두 다 이전대로 행회(行會)하여 거행하게 할 것입니다. 중사(中使)의 행차로 말하자면 액례(掖隷)들이 도처에서 토색질하는 것을 철저히 엄하게 방지하되, 이와 같이 계품(啓稟)한 뒤에 만약 털끝만치라도 민읍(民邑)에 폐단을 끼치는 자가 있으면 보고되는 대로 빈사 이하는 엄하게 논경(論警)하고, 하속(下屬)은 단연코 엄히 형신(刑訊)한 뒤 원배(遠配)하라는 뜻으로 미리 원접사(遠接使)와 경기(京畿)와 양서(兩西)의 감사(監司), 개성 유수(開城留守),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신칙(申飭)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마정(馬政)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각역(各驛)과 각참(各站)에서 원래 정한 필수(匹數)를 일일이 갖추고 보충하여 액수가 빠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보현(金輔鉉)의 보고를 보니, ‘객사가 국경에 이를 날이 멀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소용되는 물력(物力)을 마련할 방도가 없습니다. 도내(道內)의 환미(還米) 중에서 5,000석(石)을 가지고 사환미(社還米)를 작전(作錢)하는 규례에 따라 가져다 쓰고 각읍(各邑)의 유고곡(留庫穀) 몇천 석을 몇 년 안에 가분(加分)해서 모곡(耗穀)을 취하여 그 수량을 도로 채워 넣을 것이니, 사환미 1,398석 남짓은 10년 기한으로 환작(換作)하여 그 모조(耗條)를 바치는 것을 정지하라는 뜻으로 호조(戶曹)에 감결(甘結)을 보내게 해 주소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칙수(勅需)를 정비(整備)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환미를 집전(執錢)하여 가져다 쓰며 유고곡을 가분하여 수량을 충당하는 것은 모두 마련하기에 부득이한 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모두 환작하고 모조를 정지하는 등의 일과 더불어 보고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김홍집(金弘集)을 부평부(富平府)에 투비(投畀)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 12일 계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연초에 민간의 폐단을 물을 때에 각 공인(貢人)들의 생각을 마땅히 참작하여 헤아려서 복계(覆啓)해야 합니다. 삼남(三南)의 대소호지계(大小好紙契)의 공인들이 아뢰기를, ‘근래 지가(紙價)가 뛰어올라 매년 낙본(落本)이 거의 만 냥(兩)에 가깝습니다. 선혜청(宣惠廳)과 영남에서 값을 받는 목(木)과 전(錢) 가운데서 닥나무가 나는 각읍(各邑)에 이획(移劃)하고 대신 대소호지 6,080권(卷)을 정결하게 제조해서 공인들로 하여금 실어다 바치게 해 주소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마다 바치는 공물인 종이는 중하기가 더욱 유별한데 계인(契人)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 과연 호소한 것과 같다면 응당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선혜청으로 하여금 목전(木錢)과 지물(紙物)의 수량을 타산(打算)해서 이것을 가지고 저것으로 바꾸어 기한에 맞추어 부출(浮出)하게 하고, 간검(看檢)하고 실어다 바치는 절목은 공인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며, 또한 영읍(營邑)에서 특별히 감동(監董)하여 신칙(申飭)하게 하라고 해도(該道)에 행회(行會)하여 이로써 규정을 세워 준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자덕(尹滋悳)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김문현(金文鉉)을 직각(直閣)으로 삼았다.
4월 13일 갑진
황해 감사(黃海監司) 남정익(南廷益)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영소(閔泳韶), 김조균(金祚均), 윤상연(尹相衍)이다. 민영소(閔泳韶)를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로 삼았다.
임백현(林百鉉)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부평부(富平府)의 투비 죄인(投畀罪人) 김홍집(金弘集)을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다.
4월 14일 을사
조희일(趙熙一)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4월 15일 병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호조(戶曹)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칙수(勅需)에 드는 물력(物力)을 지금 곧 구획(區劃)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농(大農)의 경비가 근래 더욱 고갈되었는데 게다가 칙행(勅行)이 있을 것이니 마련할 방법이 없습니다.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사환미(社還米) 각 7,000석(石)과 호서(湖西)의 사환미 6,000석을 집전(執錢)하도록 허락해서 수용(需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동수(金東壽)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4월 18일 기유
황학수(黃學秀)·홍병일(洪炳一)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홍종협(洪鍾協)·정인학(鄭寅學)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세섭(洪世燮)·장석조(張錫祚)를 수찬(修撰)으로, 임백언(任百彦)·남정호(南廷皓)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왕덕홍(王德洪)을 김해부(金海府)에 정배(定配)하였다. 고려(高麗)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해릉(該陵)의 수목(樹木)을 베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강진규(姜晉奎)를 형구(形具)를 채워 잡아와서 남간(南間)에 가두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 19일 경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21일 임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추국(推鞫)하되, 위관(委官)은 영부사(領府事) 한계원(韓啓源)으로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보현(金輔鉉)을 임기가 차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한 임기 동안 잉임(仍任)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정순조(鄭順朝)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종한(金宗漢)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황재현(黃載顯)을 다시 추국(推鞫)하니 원정(原情)에, ‘제가 어리석고 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백성의 말로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바른 대로 고한 것은 수령을 선택하여 민심을 감복시키고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주소(奏疏)는 정말 상의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차례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고 장(杖) 30도(度)를 치면서 다시 끝까지 신문(訊問)했으나 죄를 범한 실정을 한 마디로 감추면서 불지 않으니 더욱 극도로 통분합니다. 다짐받을 때까지 다시 엄하게 형신을 가하여 기어코 실정을 캐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2일 계축
이인명(李寅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4월 23일 갑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일차 유생 (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비교하고 편전(便殿)에서 제술(製述)로 강(講)을 대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강(殿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경리사(經理事) 민겸호(閔謙鎬)가 아뢰기를,
"요사이 일본 사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신(臣)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우창(洪祐昌)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들을 뽑아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다. 육군 소위(陸軍少尉)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를 추천하여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스승으로 삼고, 또한 교장(敎場)을 선정하여 군사 훈련에 종사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두터운 우의(友誼)에서 나온 말이므로 그의 뜻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각영(各營)의 건장한 병사를 뽑아서 일일이 조사하여 취하고, 따로 장령(將領)을 지정하여 통솔하고 연습하게 하며, 교장으로 적합한 곳도 역시 편할 대로 선정하라는 뜻으로 신과 예조 판서가 총리대신(總理大臣) 및 경리청(經理廳)의 여러 당상(堂上)에게 상의하여 확정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군사를 뽑아 조련(操鍊)시키는 등의 일은 절목(節目)을 마련하고 장령의 직임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에 구애하지 말고 가려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일차 유생 (日次儒生)의 전강(殿講)에서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다. 율시(律詩)에서 유학(幼學) 임희상(林羲相)과 민종식(閔宗植)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4월 24일 을묘
강릉(江陵), 이원(利原) 등 고을의 화재를 당한 집과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4월 25일 병진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무신(武臣) 허사과(虛司果)가 적체(積滯)된 것이 200여 인(人)이나 됩니다. 만약 특별히 바로잡는 대책이 없이 고식적인 정사를 한다면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의 섶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이나 거의 다름없을 것입니다. 모든 수령과 변장(邊將)들 중 구전(舊典)을 도로 회복해야 할 사람과 제사(諸司)의 낭관(郞官), 각영(各營)의 초관(哨官)으로서 임시변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전관(銓官)과 충분히 논의하여 별단(別單)에 조목조목 열거하여 넣고 계하(啓下)하거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성의껏 시행하게 하여 침체된 것을 소통시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무신 허사과의 적체가 과연 정말로 걱정스럽다. 아뢴 대로 이리저리 상의하여 변통하되 별단에 조목별로 따로 적어서 아뢰어 침체된 것을 소통시키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는 이전 인조(仁祖) 병자년(1636)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했을 때 독전 어사(督戰御使)가 되어 용맹을 떨치고 계책을 세워 한 명의 장수를 죽이고 화의(和議)를 극력 배척해서 기어이 대의(大義)를 펴고 나라의 수치를 씻도록 하였습니다. 신사년(1641)에 이르자 그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었으니 그의 충성과 절개는 참으로 후세에 자랑할 만합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높이고 장려하는 은전(恩典)은 이미 남김없이 실시하였으나 오늘 구갑(舊甲)이 돌아왔으니 특별히 은혜를 펴고 공적을 평가해서 조정에서 크게 감축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련 전 현감(長連前縣監) 원준상(元俊常)은 지난 번 특지(特旨)로 견책을 행하였으니 지금 다시 더 논란(論難)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명색이 없는 돈을 강제로 빼앗고 구폐전(捄弊錢)을 횡령한 금액이 7,600금(金)이나 된다는 것이 도계(道啓)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장물(贓物)을 도로 징수하는 것은 정식(定式)이 매우 엄하니, 형조(刑曹)로 하여금 가동(家僮)을 가두고 기일을 정해서 독촉하여 받아서 본읍(本邑)에 내려 보내되 백성들의 재물이면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공화(公貨)면 공고(公庫)를 도로 채운 뒤에 전말을 등문(登聞)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해녕 부부인(海寧府夫人), 한창 부부인(韓昌府夫人)의 면례(緬禮)에 동원 부기(東園副器)를 골라서 보내주고 안장(安葬)하는 날에는 각신(閣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릴 것이다."
하였다.
오준영(吳俊泳)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근필(李根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장세용(張世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서당보(徐堂輔)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민중(李敏中)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이동연(李東淵)·권인성(權仁成)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서의순(徐誼淳)·정인석(鄭寅奭)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이동연(李東淵) 이하는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군무변정기연사 당상(軍務邊政畿沿司堂上官) 윤자덕(尹滋悳)과 군물기계선함사 당상(軍物機械船艦司堂上官) 신정희(申正熙)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4월 26일 정사
전교하기를,
"방금 북백(北伯)의 장계(狀啓)를 보니 남곤수(南梱帥)의 일이 매우 놀랍다. 곤수의 임무를 띠고서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불법을 행하여 횡령과 가렴주구가 이와 같이 낭자하니 장률(贓律)이 더없이 엄한데 어떻게 심상하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남병사(南兵使) 이태현(李泰鉉)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어 형구(刑具)를 채우고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7일 무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저 놈들이 상소문으로 시사(時事)를 논한 것 자체가 이미 극도로 완악하고 외람한데 더구나 상소문의 어구가 흉악하고 고약한 것이 많았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본성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해당 형률(刑律)로 처단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특별히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역시 꾸짖을 만한 것도 못 되기 때문이다. 시수 죄인(時囚罪人) 황재현(黃載顯)은 원악도 위리안치(遠惡島圍籬安置)하고 홍시중(洪時中)은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하라."
하였다.
서상악(徐相岳)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4월 28일 기미
김병덕(金炳德)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이재면(李載冕)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4월 29일 경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원접사(遠接使) 조영하(趙寧夏)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윤자덕(尹滋悳)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상현(金尙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강수 겸 반접관(講修兼伴接官) 김홍집(金弘集)을 체직(遞職)시키고 윤성진(尹成鎭)으로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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