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7월

싸라리리 2025. 1.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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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기묘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에 가둔 죄인 양주현(梁柱顯)을 서간(西間)에 옮겨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삼가 하교하신 대로 당오전(當五錢) 5만 냥 중에서 호조(戶曹)에 2만 5,000냥, 선혜청(宣惠廳)에 1만 8,000냥, 병조(兵曹)에 7,000냥을 배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남간(南間)에 가두어놓은 죄인 윤구(尹)가 횡령한 것이 3만 냥 이상이니, 승전(承傳) 내의 내용으로 네거리에서 곤장을 친 뒤 원악도(遠惡島)에 찬배(竄配)하겠습니다.
현재 갇혀 있는 죄인 양주현(梁柱顯)은 횡령한 돈 3만 1,000냥 가운데 3,600여 냥은 추징하여 감영(監營)으로 보냈고, 나머지 2만 7,000여 냥은 귀속된 곳이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1만 냥 이상의 탐오범으로 시행하는 데 속하므로 엄하게 한 차례 형장을 치고 원악지(遠惡地)에 정배(定配)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일 경진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과 총리의 직함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7월 3일 신사

전교하기를,
"윤성보(尹性普)의 신소(伸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보고와 이렇게까지 모순 되니 어느 것을 믿어야 되겠는가? 시수 죄인(時囚罪人) 윤구(尹)의 범장(犯贓) 유무(有無)는 묘당(廟堂)에서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하여 엄격히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하라."
하였다.

 

7월 4일 임오

민응식(閔應植)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인 정낙용(鄭洛鎔)은 지도(智島)에 배소(配所)를 정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양주현(梁柱顯)은 안주목(安州牧)에 정배(定配)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에 가둔 죄인 윤구(尹)는 우선 서간(西間)에 옮겨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부 안핵사(東萊府按覈使) 조병호(趙秉浩)가, ‘난리를 수창(首唱)한 죄인 정희백(鄭希伯) 등 4명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5일 계미

전교하기를,
"돈을 주조하는 것은 시기에 맞게 한 사례가 많으니 재정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주조 사업을 더욱 널리 진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나라에 달마다 주조한 전례가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임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여서는 허다한 지출을 계속 공급할 수 없다.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여 일상적으로 주전 사업을 진행하여 경비를 보충하게 하라. 설치 절목은 군국아문(軍國衙門)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7월 6일 갑신

민종묵(閔種默)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7월 9일 정해

전교하기를,
"여러 탐오범들에 대한 징벌은 이미 전날에 처분이 있었다. 이재욱(李載旭)으로 말하자면, 그와 같이 영락한 고을과 진(鎭)에서 이르는 곳마다 그렇게 낭자하게 탐욕을 부렸으니, 그 죄상을 따질 때 수량이 좀 줄어들었다고 하여 가볍게 처벌할 수 없다.
전전 상주 영장(前前尙州營將) 이재욱은 금오당상(金吾堂上)이 네거리에서 개좌(開坐)하여 전체 관리들이 늘어선 가운데 엄하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쳐서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며 물간사전(勿揀赦前)하라."
하였다.

 

김병주(金炳㴤)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7월 13일 신묘

전교하기를,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를 전환국 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에 차하(差下)하고,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이중칠(李重七)을 총판(總辦)에 차하하고, 관성장(管城將) 안정옥(安鼎玉), 첨지(僉知) 권용철(權用哲)은 모두 방판(幇辦)에 차하하라."
하였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이용호(李容鎬)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로 인하여 남포 전 현감(藍浦前縣監) 이교원(李敎元), 덕산 전 군수(德山前郡守) 이정규(李廷珪), 결성 전 현감(結城前縣監) 정필현(鄭泌鉉), 노성 전 현감(魯城前縣監) 송희두(宋熙斗) 등에게 죄를 주었다.

 

이건용(李建容)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재령군(載寧郡)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7월 14일 임진

박정양(朴定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정희(趙定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창희(金昌熙)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교영(李敎榮)을 교섭통상사무 참의(交涉通商事務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장흥 전 부사(長興前府使) 윤구(尹)에 대해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논한 장죄(贓罪)를 범한 바가 있는지 없는지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등문(登聞)하도록 특교(特敎)에 따라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해도(該道) 도신(道臣)과 4촌 남매간의 응피(應避)의 혐의가 있다고 하니, 형편상 거행할 수 없습니다. 김제 군수(金堤郡守) 조필영(趙弼永)을 사정관(査正官)으로 차하하여 그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치계(馳啓)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8일 병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윤치성(尹致聖)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아! 지난해 6월의 사변은 흉악한 자들이 군사들의 마음을 혼란시킨 결과로 일어난 것으로 천지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변란이었습니다. 우리 곤성(坤聖)께서 다급하고 절박한 가운데 뜻밖의 재난을 입었으나 천지 일월과 같은 도량으로 상도(常道)에서 벗어나 권도(權道)에 맞는 덕을 행하여 우리나라 수천리 강토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살 수 있게 하셨으니, 이것은 우리 중궁 전하께서 처음 행하신 은택입니다. 비록 삼대(三代) 성인(聖人)들의 현명한 후비(后妃)로서 유신(有莘), 강원(姜媛), 태사(太姒), 태강(太姜) 같은 덕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변란에 대처한 적은 드물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옛날처럼 여전히 보존되고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세월이 빨리 흘러 어느덧 1주기가 되었습니다. 작년을 지금과 비교해보면 울음은 웃음으로 변하고 재앙은 경사로 바뀌었으니, 실로 가슴 속에 절절한 감흥을 가지게 됩니다. 마땅히 축하의 의식을 거행하고 훌륭한 존호를 올려 성덕의 만 분의 일이라도 찬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자의 효성으로 칭송하는 덕을 보이고, 온 조정 관리들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는 정승들도 응당 대궐 뜰에서 청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신처럼 보잘 것 없는 의견을 기다릴 것은 없습니다만, 정성을 조금이나마 나타내어 전하께서 살펴보시도록 하는 바입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성심을 헤아리시어 1주기를 맞은 이때에 주저 없이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그러하지만 나는 취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이희봉(李羲鳳)과 이순범(李舜範), 예조 좌랑(禮曹佐郞) 한긍열(韓兢烈), 원외랑(員外郞) 최수광(崔壽光)이 모두 상소를 올려 곤전(坤殿)에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다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7월 19일 정유

충청좌도 암행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 유석(柳)을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로 인하여 제천 전 현감(堤川前縣監) 정재범(鄭在範), 온양 전 군수(溫陽前郡守) 조진억(曺鎭億), 연기 전 현감(燕岐前縣監) 이수원(李秀元) 등에게 죄를 주었다.

 

7월 20일 무술

대신(大臣)들이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마침 지난해의 이맘때를 만나서 온 나라의 백성들이 위기를 안전으로 전환시킨 성상(聖上)의 덕과 공적을 더욱 칭송하고 있으므로 서로 이끌고 나와서 두 전하께 존호를 의상(擬上)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칭송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아뢰기를,
"지금 경사가 1주기가 되었으며, 마땅히 큰 성대한 행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기회(鄭基會), 참판(參判) 엄세영(嚴世永), 참의(參議) 강찬(姜𧄽)이 모두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나는 사실 부끄러운 일이 많으니, 따를 수 없다."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용원(李容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세상에 쓰일 만한 학문이 없고 재주도 남들보다 못하여, 동료들에게 배척을 받은 바 있고, 조정에서도 쓸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충성에서는 남들만 못하지 않으며, 비록 격렬한 논쟁으로 간쟁(諫諍)을 벌린 일은 없지만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 속에 다짐한 구구한 마음은 저 푸른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삼가 근일에 신료들이 올린 글을 보건대, 모두 전하의 덕을 찬양할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또 조정의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나 빈계(賓啓)를 올리려 하고,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신에게 그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신은 나아가서 남들을 따르자니 평소의 다짐을 어기게 되고, 물러가 침묵을 지키자니 행동이 또한 역시 스스로를 얽어놓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진달하는 바이니, 성명(聖明)께서 밝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지난해 여름의 변란을 겪은 사람들이 오늘날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신하들치고 그 누군들 기뻐서 춤을 추며 우리 전하께서 세운 공적을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존호를 올리는 조치는 당(唐)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강목(綱目)》에서는 이것을 낮추어 평가하였으니, 이것은 어진 임금들이 답습하여 오류를 범할 바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옛날 한(漢) 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임금 앞에서 성인(聖人)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의 공덕은 그대로여서 후세에 명철한 임금이라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신하로서 그 임금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동한(東漢) 이상의 임금들에게 있는 것이니, 당(唐) 나라 이하의 임금들과 같이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을 돌이켜 보면, 방향이 없으며 법과 기강은 무너지고 간사한 자들이 날로 성하고 있으며 재정이 바닥나서 지출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이런 결과로 군사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다행히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에 의하여 반란이 겨우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정사를 하기 위하여 마땅히 모든 신료들이 분발하여야 하며 근본을 견고하게 하지 않았을 때의 두려움을 잊지 말고서 수습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는 힘쓰지 않고 도리어 평화로운 나라에 아무 걱정이 없는 것처럼 겉치레를 하는 형식에 매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실질에 힘쓰는 도리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연세가 한창이시니, 하고많은 세월에 축하할 날이 없지 않을 것인데, 하필 이때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은 외람되게 하찮은 견해를 가지고 온 조정의 의견을 반대하여 나섰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신은 단지 전하를 생각할 뿐이고 신의 생사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바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애당초 그렇게 크게 논할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사람들의 비난을 당하였다 하여 대단히 두려워하면서 성 밖으로 나가버렸으며, 이어 명소(命召)를 바치니, 하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어 명소를 다시 전하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7월 21일 기해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과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재차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과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세 번째로 하유하기를,
"설사 혐의를 피해야 할 일이 있어도 내가 여러 번에 걸쳐 경에게 유시하였으니, 고집하던 바를 돌려세울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줄곧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없는 것처럼 하니, 명분과 의리에 흠이 있지 않겠는가? 나 자신이 도리어 부끄럽고 한탄스러울 뿐이니, 어찌할 계책이 없다.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백성과 나라 일에 대하여 경이 책임지고 있는 것이 혐의를 피해야 할 의리와 비교할 때 공사(公私)의 경중(輕重)이 과연 어떠한가? 경은 이에 대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바가 있을 것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많이 말하겠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세 번째로 하유하기를,
"현재 백성들과 나라의 일들에 대한 계책이 황급하다는 것은 경도 우려하는 바인데, 지금 혐의를 피할 필요가 없는 남의 말을 가지고 이와 같이 버티고 있는 것은 혐의를 피하는 일이 도리어 우려하는 것보다 더 중해서인가? 또한 나는 벌써 여러 번 경에게 유시하였는데, 줄곧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아무 변동이 없는 것처럼 하니, 명분과 의리에 있어서 논의할 만한 것이 없어서인가?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러운데, 경도 마땅히 헤아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2일 경자

승정원(承政院)에서,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과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의금부(義禁府) 문 밖에서 서명(胥命)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오늘 이 서명도 뜻밖의 일이다. 여러 번 마음속의 뜻을 가지고 타일렀으므로 경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기다렸으나, 막연하여 보고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유시한 말이 본래 지나쳤던 듯하다. 어제 돈유(敦諭)한 말 가운데 ‘줄곧’이라고 한 이하의 19자를 이제 환수(還收)하니, 경은 안심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는 뜻으로 좌의정에게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경이 마음을 바꾸도록 하기 위한 나의 마음이 조급하였기 때문에 유시한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서명하는 일이 있으니, 어째서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미 돈유한 말 가운데 ‘줄곧’이라고 한 이하의 23자를 이제 환수하니, 경은 이를 헤아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우의정에게 전유하라."
하였다.

 

7월 23일 신축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지난해의 그때를 당하고 보니 온 나라의 백성들은 위기를 안전으로 전환시킨 성상(聖上)의 덕과 공적을 더한층 칭송하고 있으므로, 신도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 이끌고 나와서 청대(請對)하여 양전(兩殿)께 훌륭한 칭호를 의상(擬上)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찬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성인(聖人)으로 자처하지 않으시고 결국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겸허한 덕에 대하여 먼저 칭송해야 하고 아래로는 순응하는 도리가 신의 본분에 마땅한 바여서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마침 재신(宰臣)의 상소에, ‘한(漢) 나라에서 금지하고 당(唐) 나라에서는 폄하하였다.’라고 반복해 이야기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의 계책을 종잡을 수 없는데 도리어 아름다운 말로써 형식을 숭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직분은 보필할 책임을 지는 것이고 신의 일은 임금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고 한 사람과 비교할 때 어찌 가증스럽게 아첨하고 부끄러움 없이 비루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보니 조정에서 서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일이므로, 신은 많은 변명을 하고자 하지 않으며 오직 비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인정할 뿐입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이런 말이 여러 사람의 상소가 올라온 뒤에 나오지 않고 청대한 때에 있게 된 것으로서, 신으로 하여금 이른바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한다.’는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자신의 명예가 이미 손상되면 회복하기 어렵고 전하의 비호가 비록 간곡하다 하더라도 관직에 나아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무슨 면목으로 백관(百官)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성 밖으로 물러나갔지만 벌을 주지 않았고, 서명(胥命)하였으나 또 용서하여 주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신의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황송한 심정을 무릅쓰고 애원하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의정(議政)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신에게 적용할 법조문을 의논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하게 하고 아첨하는 습속이 두려워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덕 없는 내가 어려운 사업을 계승하고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칭호를 올려 찬양하는 것은 애당초 의논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경이 앞에서 진청(陳請)한 것은 비록 임금을 아끼고 높이려는 심정에서 나오기는 하였겠으나, 내 마음이 굳게 정해진 것은 경도 헤아려서 따라야 하며, 그렇게 되어야 상하(上下)의 마음이 서로 들어맞게 된다. 이제 만약 경의 건의를 가지고 아첨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 이해한 것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으로서는 이렇게까지 혐의를 피할 것은 없으며, 또한 조정의 논의가 서로 왈가왈부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경은 이것을 충분히 헤아리고 다시는 사양하지 말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재주도 없고 학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정에 들어가는 것을 헤아려보라는 경계에 어두웠고, 나중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비난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가 쌓였으니, 견책을 어찌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며칠 전에 재신(宰臣)의 상소가 나오게 된 것에 이르러서는 큰 죄과에서 더욱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전에 없는 경사의 1주기를 맞이하여 응당 큰 행사가 있어야 하고 칭송이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다는 것만 알고 임금을 보좌하는 것이 마땅한 직분이라는 것을 잊고서 서로 이끌고 나와서 청대하였으며, 전하께서 겸허하게 사양하시어 덕이 더욱 빛나자 청한 바가 비준되지 못한 것을 감히 송구스럽게 여기지 않고 서로 흠앙하면서 순종하고 물러나왔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옛날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오늘날을 증명하였는데 그 말의 뜻이 매우 엄중하여 아첨하였다고 질책하였으니, 신이 무슨 말을 가지고 해명하겠습니까? 신하가 되어 도리로 자기의 임금을 섬기지 못하였고 직책은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었지만 아첨을 일삼았으니, 이른바 차마 아첨할 수 없다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어찌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인(小人)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비록 은택에 감사하고 엄한 명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심정으로나 사실로 보아 다시는 감히 현직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역시 예법과 염치에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속히 신의 적당하지 못한 벼슬을 교체시키고 처벌하지 않은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나라의 체면을 존중하고 신하의 명분을 격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변변치 못한 내가 큰 기틀을 계승하였는데 백성들의 일과 나라에 대한 계책은 막막하다. 경이 청대하고 앞에서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진정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로서는 사실 부끄러운 일이 많으므로 따를 수 없었다. 경도 순순히 따라서 물러갔으니, 이것이 어찌 상하(上下) 간에 자기의 심정을 다 털어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제 경이 아뢴 바를 아첨한 죄에 비기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고 이치상 부당한 것이니, 경은 혐의를 피하는 것을 의롭게 생각할 필요 없다. 더구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으로서 이렇게 물러서는 것은 또한 경의 아량에 의문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경은 사임을 청하는 상소를 올릴 생각을 단념하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5일 계묘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 시임 빈객(時任賓客),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시임 세자시강원(時任世子侍講院)과 시임 세자익위사(時任世子翊衛司), 내외 아문(衙門)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종친(宗親), 의빈(儀賓), 홍문관(弘文館), 종정경(宗正卿), 2품 이상,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양사(兩司)의 장관,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들에게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다. 탄일(誕日)이기 때문이다.

 

7월 27일 을사

이호준(李鎬俊)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박제인(朴齊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지금 중국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니, ‘강어귀에 개장(開場)을 한 지방과 개장을 하지 않은 지방에 만일 두 나라의 상인들 가운데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고 몰래 다니면서 무역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피차의 위원(委員)들이 압송하도록 황제의 하교를 받아 통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통지를 받았다는 뜻으로 회답 자문을 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8일 병오

특별히 민종묵(閔種默)을 발탁하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삼았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포삼(包蔘)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것은 실로 때에 따라 마땅하게 통제하는 정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현재 재정이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서 원래의 포삼 2만 200근(斤) 외에 신사년(1881)의 전례대로 5,000근을 더 정하여 마련할 것입니다. 밀수를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말을 만들어 각도(各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들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서 각 읍을 단속하고 더욱 살피게 하여, 위반하는 놈들이 나타나는 대로 잡아서 법대로 시행할 것이며, 제대로 규찰하지 못한 도신과 수신 및 해당 지방관은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내용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9일 정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개수(改修)할 때의 찬수 당상(纂修堂上) 지종정경(知宗正卿) 이인응(李寅應), 종정경(宗正卿) 이태응(李泰應), 감인 정(監印正) 홍종운(洪鍾雲)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조석여(曺錫輿)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태준(尹泰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종묵(閔種默)을 동지 겸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이원일(李源逸)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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