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무인
유학(幼學) 권종순(權鍾純)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도덕과 학문을 겸비하였다는 것은 책에 실려 있는 것인 만큼 아마도 신들이 하나하나 진술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네 명의 신하들의 문집을 가져다가 그 학문의 조예를 찬찬히 고찰해 보도록 하소서. 그리고 신이 이 네 명의 신하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여 이미 참월한 죄를 범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아!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 문충공 유계(兪棨), 문충공 민진후(閔鎭厚),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도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될 듯한데, 지금 서원(書院)에서 제사지내는 것조차 다 중지시켰으니, 어찌 훌륭한 세상의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화양 서원(華陽書院) 같은 것은 관계된 바가 중하여 더욱 다른 서원과 다릅니다. 지금 황제의 사당은 종전대로 경건하게 받들고 있으나 유독 이 서원만 아직도 복구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서글프게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옳은 것은 발양시키고 나쁜 것은 억누르는 원칙에서 결단을 내리고 어진 것과 어리석은 것을 식별하는 기준을 밝히는 큰 덕을 밝혀서, 오늘날의 일치한 논의에 난감을 표하지 말고 지난날의 모든 서원을 다 복구할 수 있도록 분부한다면 억만년을 빛날 우리나라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옳은 학문을 보위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힘써야 할 일인데, 오늘 이 상소를 보니 매우 탄식하게 된다. 진달한 일은 모두 다 조정에서 처리할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9월 2일 기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장흥 전전 부사(長興前前府使) 윤구(尹), 영광 전 군수(靈光前郡守) 김우균(金羽均)이 범한 장죄(贓罪)에 대해 조사한 장본(狀本)이 이제야 겨우 계하(啓下) 받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두 통의 사계(査啓)를 가져다가 읽어보니, 그것은 암행어사의 서계(書啓)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은데, 장흥(長興)의 경우에는 임용하면서 돈을 받는 것이 비록 관행이라고 하나 청렴하지 못하다는 혐의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일의 대체를 헤아려볼 때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영광(靈光)의 경우에는 백성들에게서 돈을 빌리고 송사(訟事)에서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지적하고 있는 만큼 응당 처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 해부(該府)에서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논한 것이 혼동되어 사실에 어긋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는 실로 있는 것이니, 해당 어사(御史) 박영교(朴泳敎)는 견파(譴罷)하는 처벌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일 경진
건원릉(健元陵), 목릉(穆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예(禮)가 끝나자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전하가 탄 말이 엎어지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고 황송한 일입니다. 해당 사복시(司僕寺)의 관원을 우선 태거(汰去)하고 해부(該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감죄(勘罪)하게 하고, 하속(下屬)들은 해시(該寺)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환궁(還宮) 때 세자(世子)가 흥인문(興仁門) 안에 나아가 지영(祗迎)하였다.
전교하기를,
"동궁(東宮)이 처음으로 도성(都城) 문에서 지영(祗迎)하였으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다. 기쁨을 표시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으니, 배종(陪從)한 춘방(春坊)과 계방(桂坊) 이하를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이라."
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한규직(韓圭稷)을 혜상 공국 당상(惠商公局堂上)에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4일 신사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 친히 제사를 지낼 때와 건원릉(健元陵), 목릉(穆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친히 제사를 지낼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와 세자(世子)가 지영(祗迎)할 때 배종(陪從)한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찬례(贊禮) 윤병정(尹秉鼎), 예방 승지(禮房承旨) 박용대(朴容大), 대축(大祝) 김문제(金文濟), 집례(執禮) 조인승(曺寅承), 집전(執奠) 정기상(鄭璣相), 우빈객(右賓客) 심순택(沈舜澤), 좌부빈객(左副賓客) 민영목(閔泳穆), 우부빈객(右副賓客) 정범조(鄭範朝), 예모관(禮貌官) 김만식(金晩植), 상례(相禮) 정하원(鄭夏源), 총융사(總戎使) 이규원(李奎遠), 좌영 감독(左營監督) 이조연(李祖淵), 총융 중군(總戎中軍) 박정화(朴鼎和)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서상우(徐相雨)를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올린 차자(箚子)의 대략에,
"법가(法駕)가 청량현(淸凉峴)에 이르러 말안장이 앞으로 밀려나가는 바람에 갑자기 재갈이 벗겨지고 수레의 굴대가 부러져 전하께서 놀라고 결국에는 말을 바꾸어 타시기까지 하였으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송구하기만 하고 정신이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신이 병으로 누워 있어 호종(扈從)하지 못하였으나 직책상 사복시(司僕寺)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위엄 있는 벌을 내리시어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경은 그렇게 혐의할 것이 없다. 경은 이것을 헤아리고 안심하여 몸조리를 하라."
하였다.
9월 6일 계미
박제교(朴齊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태호(閔台鎬)를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로, 이헌직(李憲稙)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9월 8일 을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성향곡(城餉穀)을 옮겨가는 문제는 영남(嶺南) 도신(道臣)과 의논하여 거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고에 남아 있는 성향곡은 5만 석(石)이지만 각읍(各邑)의 산성(山城)에 흩어져 있으므로, 먼 포구에 실어 나르자면 그 형세가 곤란합니다. 강 연안의 가까운 고을들에서 사서 운반할 생각이지만, 농사가 흉년이 들었고 갑자기 일찍 내린 서리의 피해를 당하여 추수를 끝내지 못하였으니, 많은 수량을 사들이면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백성들이 황급해 할 것이고, 해도(該道)에서도 구휼할 때에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적당히 견감(蠲減)하여 제때에 편하게 수송하는 절차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향곡 2만 포(包)를 특별히 획급한 것은 실로 경상도(慶尙道) 백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전하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도신의 장계에서 줄여달라고 청한 것도 농사 형편과 백성들의 정황이 부득이한 데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함께 구제하는 의리로 볼 때 억지로 독촉하여 수량대로 싣게 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1만 석을 이송하되 지연되는 탄식이 없도록 하라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0일 정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친군(親軍)을 연조(演操)하였다.
이유승(李裕承)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9월 11일 무자
한장석(韓章錫)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12일 기축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우선(尹宇善)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3일 경인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최근에 편수[邊首]와 공장(工匠)들이 사적으로 구리와 아연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관에서 내는 것을 제외하고 구리와 아연을 마음대로 사들이는 자는 사사로이 주조한 데 대한 형률을 시행하도록 경외(京外)의 주소(鑄所)에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4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5일 임진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영종(永宗)에 방영(防營)을 다시 설치한 것은 해안 방어가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락하여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종전대로 변지과(邊地窠)로 하도록 정식을 삼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보고한 바를 보니, ‘용인현(龍仁縣)에서 경사(京司)에 상납(上納)할 것이 모조리 이전에 축난 것에 들어가고 징수할 곳이 없으므로 수습할 계책이 없으니, 계미조(癸未條)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상정(詳定)하여 대납(代納)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부(正賦)의 법의(法意)는 중한 바가 더욱 각별하여 대납을 무턱대고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해읍(該邑)은 본래 영락한 형국에 공납(公納)이 모두 포흠(逋欠)으로 들어가서 이미 징수할 곳이 없다고 하니, 빈 장부를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제때에 장부를 청산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죽산(竹山)과 양지(陽智)의 원용할 만한 전례가 있으니, 보고한 내용대로 특별히 상정하여 대납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성주목(星州牧) 안핵사(按覈使) 조병호(趙秉浩)가, ‘사변을 일으킨 주동자 정중집(鄭仲執) 등 4명을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은 데에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16일 계사
월식(月食)이 있었다.
9월 17일 갑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서총대(瑞葱臺) 시사(試射)를 설행하고 수가(隨駕)한 군교(軍校)들에게 총(銃)을 시방(試放)하였다.
전교하기를,
"좌우 감독(左右監督)은 친군(親軍)의 중책을 맡고 있어 사체(事體)가 특별하므로 규정된 제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종2품 이상으로 차출하여 제수하고 자리가 비면 장관(將官)이 와서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고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품지(稟旨)하여 비준을 받아 전령(傳令)을 반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친군 감독(親軍監督)은 모두 수어사(守禦使)의 규례대로 하라."
하였다.
9월 18일 을미
전교하기를,
"서총대(瑞葱臺) 시험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각 해영(該營)에서 시취(試取)하라."
하였다.
이조연(李祖淵)을 좌영 감독(左營監督)으로, 윤태준(尹泰駿)을 우영 감독(右營監督)으로 삼았다.
9월 19일 병신
민태호(閔台鎬)를 군국사무 독판(軍國事務督辦)으로, 민종묵(閔種默)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한규직(韓圭稷)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석여(曺錫輿)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기석(金箕錫)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20일 정유
관학 유생(館學儒生) 심노정(沈魯正)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아!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 같은 분들은 덕망과 학문이 높았기 때문에 선현(先賢)들이 추숭했고 성조(聖朝)에서 찬양하였던 바입니다. 오늘날 네 명의 신하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서원(書院)을 복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어진 사람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해오던 법이고, 덕을 숭상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도 사림(士林)들의 공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지극히 존숭하였던 것이니, 오늘날 윤허하는 것도 처음 하는 일이 아니라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효(孝)인데, 여기에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춘궁 저하께서 나이와 덕이 점차 자라나고 학문이 날로 성취되고 있으니, 전하께서 선대 임금들의 뜻을 이어 바른 길을 열어주고 가버린 성현들의 끊어진 학문을 계승하여 만대를 내려갈 태평세월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용단을 내려 사림들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말은 선현들을 존중하는 뜻에서 나왔다. 그런데 김 문경공(金文敬公)과 조 문열공(趙文烈公) 같은 두 선정신(先正臣)은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있은 지 오래되었다. 실로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서, 이 역시 그 일을 중시하고 그 예법을 존중하는 의리에서였다."
하였다.
9월 21일 무술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왕석창(王錫鬯)이 상소하여, 먼저 당오전(當五錢)과 상평통보(常平通寶)가 통용되지 않는 폐단을 진달하고 다음으로 진달하기를,
"우리나라의 수천 리 강토는 중국의 중간급의 두 개 성(省)에 미치지 못하고 인구도 또한 그렇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산천초목이 아름답고 물산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꼭 중국보다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물가는 갈수록 비등하고 생산되는 물건은 날이 갈수록 적으며 백성들의 빈곤은 도리어 영락한 중국의 군(郡)보다도 더욱 심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백성들의 기개가 해이하고 게을러서 살림을 넉넉히 할 방도를 찾지 않고 다만 구차하게 기한(飢寒)이나 면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의 일은 마땅히 전국에 신칙(申飭)하여 각도(各道)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알게 하며, 자본을 가지고 장사하러 다니려는 사람들은 전례에 따라 관세를 무는 외에 일체 산과 못 그리고 어장에 대한 금령을 모두 면제해 주며, 또 이장(里長)에게 책임 지워 그들로 하여금 가가호호가 깨닫게 하여 살아갈 길을 넓혀나가게 하소서. 만일 백성들이 그 이해관계를 알지 못하면 관(官)에서 상회(商會)의 자금을 가져다가 유통하는 법을 거행하여 그들의 마음이 향하는 기운을 유인 하여 신기한 것을 지나치게 숭상하지 말게 하고 적은 이득에 탐내지 말게 하며, 고유한 이득을 따라 이익의 방도를 보여준다면 물이 흘러가듯이 쏠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생각하건대, 관리 임명은 오직 어진 사람으로 하고, 죄인에 대하여서는 자식들에게 연좌시키지 않는다면 자손들도 공을 세워서 허물 덮기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이치로서 역시 인정상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문을 보는 기풍과 벼슬길을 막는 규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전하도 단연히 결단을 내려서 이 폐풍(弊風)을 없애버리려고 팔도(八道)에 선유(宣諭)하였으나 오늘까지도 사람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대저 중신(重臣)들의 후손은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고 간신(姦臣)들의 후손은 과거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중신들의 후손이라고 하여 어찌 사람마다 다 등용하고, 간신의 후손이라고 하여 어찌 사람마다 다 등용을 안 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중신의 제사를 받드는 아들이나 손자는 반드시 초사(初仕)에 등용하고, 간신의 대가 먼 후손은 마땅히 속죄시켜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서 공명정대한 정사를 밝히소서. 조정에는 요행수를 바랄 벼슬자리가 없고 시골에는 숨어 있는 어진 사람에 없게 되어 반드시 기뻐하면서 서로 일러주어야 나라의 정사가 잘 되어나갈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상소문에서 논한 시폐(時弊)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절실하고 정사에 도움이 될 문제이므로 매우 탄복하고 좋게 여긴다."
하였다.
홍종운(洪鍾雲)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기정(李基正)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권응선(權膺善)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응식(閔應植)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9월 22일 기해
진전(眞殿)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9월 23일 경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좌도 암행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 유석(柳)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는 ‘지방의 번보(番保)와 속오(束伍)를 충실한 사람들로 정원을 채우고 부대를 다시 정돈하며, 장령(將領) 중에서 방략을 더욱 잘 아는 사람을 선발하여 도내(道內)의 중요한 진(鎭)에 파견하고 별도로 방도를 강구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도모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군사 제도가 허술해진 것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먼저 빈 인원수부터 잘 뽑아서 채우고, 기술에 익숙한 사람을 파견하여 차례로 훈련을 시킬 방도를 도모하게 하소서.
둘째는 ‘요 몇 해 사이의 수해(水害)가 기묘년(1879)보다는 심하지 않지만 영동(永同)과 황간(黃澗) 두 읍의 논밭의 피해는 그때보다 더욱 심합니다. 영동현의 재결(災結) 173결(結) 37부(負) 8속(束)과 황간의 재결 55결 32부 7속에 대해서는 마땅히 조세를 면제하는 혜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 읍의 전답 중 이생지(泥生地)와 신간지(新墾地)로 조세를 물릴 수 있는 논밭이 또한 적지 않은데, 어떤 것은 토호(土豪)가 은루(隱漏)하고 어떤 것은 교활한 아전(衙前)이 장부를 속여 착복하기도 하였으니 속히 정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일군 땅과 다시 일군 땅을 남김없이 장악하고 그전부터 내려오는 묵은 땅과 재해 면적은 사실에 근거하여 조세를 감해야 합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두 읍의 진결(陳結)은 수효가 비록 많지는 않으나 구차한 백성들이 징수에 대하여 원망을 하니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연분(年分)을 보아가면서 수계(修啓)하도록 하소서. 토호(土豪)들과 교활한 아전이 숨기고 기만하여 영영 제 주머니에 넣는 작태는 법이 있는 만큼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감영(監營)과 고을에 신칙하여 올해 가을부터는 빠짐없이 조세를 물리도록 하소서.
셋째는 ‘합록곡(合錄穀)을 오는 가을부터 받아들일 때에 일제히 각면(各面)의 창고에 옮겨 두고 창고 사수(社首)를 뽑아 관할하도록 하고, 마련할 사목(事目)은 한결같이 사창미(社倉米)의 규례대로 하여 절대로 다시는 아전들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체로 주관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별비미(別備米)가 지금 비록 고갈되었지만 사창(社倉)에 대한 규정이 몇 년 동안 시행되어 백성들이 그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번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논의는 편리함의 여부를 깊이 알고 있는 것이니, 본도(本道)에 있는 합록곡(合錄穀)은 사창에 옮겨다 바치고, 여러 가지 조식(條式)은 종전대로 준행하도록 도신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소서.
넷째는 ‘아전들이 포탈한 것이 부지기수이고, 공납(公納)이 지연되는 것은 다 지방 관리들이 자주 교체되는 데서 연유하니 전조(銓曹)에 별도로 신칙하여 큰 사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천개(遷改)시키지 말고 오래도록 맡기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수령이 자주 교체되어 민읍(民邑)에 온갖 폐해가 모이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후로 제기하여 아뢴 것이 또한 여러 차례였습니다. 만료되기 전에 천개시키지 말도록 전조에 따로 신칙하소서.
다섯째는 ‘각사(各司)에서 상납하는 정비(情費)와 지방읍의 저리(邸吏), 계방(契房) 그리고 서리(胥吏)의 인원을 줄일 것을 이미 감생청(減省廳)에서 관문으로 신칙하였으나 지금까지도 봉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제부터 즉시 봉행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죄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줄인다는 명목만 있고 실제로 줄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법이 서지 않고 영(令)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신칙하소서.
여섯째는 ‘옥천(沃川) 유학(幼學) 이면익(李冕翼)은 학문과 기술을 겸비하고 있으니 마땅히 특전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전의 규례에 따라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이용호(李容鎬)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는 ‘각영(各營)에서 받는 이획미(移劃米)와 결작미(結作米)는 이른바 강주인(江主人)이 원곡(元穀)을 압류해 놓고 정비(情費)를 토색질하기 때문에 대부분 원납(元納)이 부족하게 되니, 강주인은 지금부터 영원히 혁파하고 이획미(移劃米)는 석수(石數)를 각 읍에 배정하지 말고 직접 선혜청(宣惠廳)에서 받은 것 중에서 떼어내어 분송(分送)하며, 결작미(結作米)는 읍에서 마땅히 바쳐야 할 총수가 있고 또한 선혜청(宣惠廳)에서 일률적으로 몇 해 전의 정식에 따라 모두 받아서 출급(出給)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는 오직 각 군문(軍門)에서 통제하고 단속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이것으로 감결(甘結)을 받들어 신칙하소서.
둘째는 ‘주사(舟師) 18개의 읍진(邑鎭)의 수토군(搜土軍)은 명색만 있고 그 실제는 전혀 없으니 이제부터는 영원히 혁파하고, 황당선(荒唐船)에 대해서는 다만 각 그곳의 면임(面任)이나 이임(里任)으로 하여금 수시로 살피게 하여 면에서는 관(官)에 보고하고 관에서는 영(營)에 보고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입니다. 수토군이 폐단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금지해야 하지만 혁파할 것인가 남겨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조치를 취하게 하소서.
셋째는 ‘보령(保寧)은 읍을 없애고 영(營)에 소속시킨 이후부터 명령이 두 곳에서 나와 백성들은 양쪽에서 사역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아전들은 분주히 수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영에서 부(府)까지의 거리가 20리 노정이여서 무릇 거행하는 것이 대단히 불편하여 백성들과 아전들이 끊임없이 신소(伸訴)하고 있으니 지금 만약 나누어 설치한다면 백성들은 폐해가 덜어지는 효과가 있고 영은 무게가 실리는 체모가 있게 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영과 부를 나누어 설치하자는 논의는 일찍이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단자(單子)에 있었고, 또 유생(儒生)들의 상소에도 있었는데 지금 또 진달한 것이 이와 같이 구체적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충분히 토의하고 그 의견을 갖추어 등문(登聞)하게 하소서.
넷째는 ‘각 읍 천포(川浦) 중 전혀 형체도 없고 영원히 개간할 수 없는 것이 수백 결이나 되는데, 재해가 없을 때는 모두 백징(白徵)하였기에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 대부분은 주인이 없는 결세(結稅)를 관계없는 해리(該里)에서 마구 받아내고 있으니 특별히 다시 적간(摘奸)하여 사실대로 등문한 뒤에 재난을 당한 수량에 준하여 면제해 주고, 이어 힘껏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개간하는 대로 차례로 다시 등록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관계되는 것이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사형편을 기다려 수계(修啓)하게 하고,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하고, 조사하여 보고한 것과 누락된 결에 대해 일일이 조세를 물리게 하소서.
다섯째는 ‘각 읍에서 사사롭게 짐승을 도살하여 판매하는 것은 곧 순영(巡營)의 영속들이 폐단을 보완한다는 핑계로 뇌물을 주고 결탁한 다음에 영원히 저들의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각 읍의 장포(場庖)에서 관주(官廚)의 용도에 보충해 주는 것 이외에 순영의 영속들이 폐단을 보완한다는 명색으로 하는 것은 일일이 모두 혁파하고, 만일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형배(刑配)의 형전을 시행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도살을 금지하는 것은 소를 경작에 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단을 보완한다고 하면서 허다하게 푸줏간을 만드는 것은 법의(法意)로 헤아려 보면 곧 한심한 일이니 낱낱이 모두 엄하게 방지하고, 청탁하여 푸줏간을 만드는 자는 적발하는 대로 형배에 처하소서.
여섯째는 ‘순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을 각 읍에 분담시켜 본색(本色)으로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 크게 민읍에 폐해가 되어 다시 돈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시가(時價)에 따라 일정하게 정하여 받아들이도록 일찍이 계하(啓下)하여 규식을 정한 것이 있는데, 요 몇 해사이 물가가 오른다고 하면서 두 차례에 6전(錢)씩을 수량 외에 더 받아낸 것이 거의 5,000금(金)이나 됩니다. 잠시 없애버린다고 하고는 곧 다시 설치하였으니 엄하게 관문으로 신칙하고 절목을 작성하여 내려 보내며, 만일 수량 외에 더 쓸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시가로 영(營)에서 사서 취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시가를 일정하게 정하는 것이 이미 정식에 있으니 수량 외에 더 받아들이는 것을 어찌 이와 같이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일률적으로 정식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일곱째 ‘각 읍 관름(官廩)안에 있는 기름, 꿀, 종이, 붓, 먹 등의 물건의 값으로 되어 있는 쌀은 저축해둔 대동미(大同米) 중 오래된 쌀입니다. 매 1석 대신 돈으로 3냥씩 획급(劃給)하면 그 읍의 수령은 마땅히 이것에 의거하여 가져다가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3냥 조(條)로 해읍에 출급하고, 만일 상납한 것을 채우려면 반드시 새 쌀로 석수를 계산하여 납부하도록 요구하기를 마치 원래 규정해놓은 필요한 쌀이 있는 것처럼 하고 있기 때문에 해읍에 포흠을 만들어내고, 혹은 돈으로 대신 민간에 나누어주고서 본색으로 거두어 들여서 원성이 자자하니 별도로 철저히 고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묵은 쌀을 새 쌀로 바꾸면 이득은 어디로 돌아가고 폐해는 누구에게 미치겠습니까? 열읍(列邑)에 엄격히 신칙하여 속히 철저히 혁파하게 하고, 만약 혹시라도 오류를 답습하는 수령이 있으면 본 도에서 계문하여 죄를 논하게 하소서.
여덟째 ‘각 읍의 관용(官用) 물품들은 반드시 시가에 따르라고 몇 해 전에 조정에서 신칙한 적이 있었으나, 고을의 수령들은 읍의 전례를 빙자하여 무절제하게 받아내고 있으며 회계(會計)할 때에는 도리어 깎아버리고, 또 각 창고에서 가하(加下)하는 것이 많게는 수천 금에 이르는데도 보상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엄한 말로 관문을 만들어 신칙하여 우선 순영에서부터 일체 관용 물품은 일률적으로 시가를 따르도록 다시 규정을 정하고 각각 절목을 만들며, 만일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장오(贓汙)의 형률을 시행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위의 조항에서 조목별로 진달한 문제와 일반적으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발각되는 수령도 계문하여 처벌하고, 절목을 만들어 본 부에 보고하고 시행하도록 도신에게 통지하소서.
아홉째 ‘근래 공적인 행차에 역말을 함부로 끌어가고, 하인들의 가렴주구가 거의 한이 없으며, 경포교(京捕校)들이 출몰하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심하여 각역(各驛)에는 사람들이 흩어져, 참(站)이 끊어질 형편이 눈 앞에 닥쳐왔으니 속히 해조로 하여금 별도로 조규(條規)를 세우게 하고 새 법을 반포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각 역의 폐해가 대단히 근심됩니다. 그런데 함부로 역말을 끌어가 가렴주구 하는 것을 어찌하여 철저히 조사하여 통렬히 금지하지 않습니까? 이후부터는 낱낱이 사실대로 지명하여 치보(馳報)하고 법에 따라 징벌하소서.
열째 ‘서천(舒川) 지역에는 구씨(丘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수천 인(人)이나 되는데, 몇 해 전에 구진규(丘鎭圭)라고 하는 자가 집안에서 용납되지 못하게 되자 감히 나쁜 감정을 품고 그 성이 대성인의 휘자(諱字)에 저촉된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구(丘)를 구(具)로 고쳐 달라는 뜻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격쟁(擊錚)하여 원하는 대로 하라고 허락받았으나 일개 고약한 후손의 행동 때문에 수천 명의 구씨들이 까닭 없이 성을 바꾸게 되어 도리어 징렴(徵斂)에 시달리게 되어 모두 패망하게 되었으니 특별히 분부하여 예전의 성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사실이 이미 이러하다면 예조(禮曹)로 하여금 본 도에 관문을 보내어 알아본 다음에 품처하게 하소서.
열한 번째 ‘우두법(牛痘法)은 서양 의학에서 창시된 것인데 백번 시험해도 백번 효과가 있으며, 만 번 중 한 번의 실패도 없었습니다. 사징전(査徵錢) 2,900여 냥을 내어 충청 감영(忠淸監營)에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감영(監營)에서 경상도(慶尙道)의 의원(醫員)들로 하여금 그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며, 소용되는 기구와 제반의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헤아려 조치하도록 속히 내의원(內醫院)으로 하여금 해도에 관문을 발송하게 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도록 도모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쓸 때마다 효험이 있다면 권면하지 않아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국(局)을 설치하여 기술을 가르치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 우선 감영과 고을에서 적절하게 권면하고 신칙하소서.
열두 번째 ‘임천(林川)의 유학(幼學) 이명익(李溟翼), 부여(扶餘)의 유학 민영용(閔泳龍), 홍주 전 사과(洪州前司果) 김준근(金寯根), 전 승지(前承旨) 정헌조(鄭憲朝), 덕산(德山)의 유학 민재곤(閔載坤)은 학문과 행실이 가상하니, 부여의 효자 서진문(徐鎭文), 충청 감영(忠淸監營)의 효자 김덕윤(金德潤)과 함께 마땅히 포증(褒贈)의 은전을 시행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전례대로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 박영교(朴泳敎)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는 ‘근래에 각읍(各邑)의 백성들이 어려운 처지이고, 조세(租稅)가 대부분 지연되고 있는 것은 사실상 각 수령(守令)들이 자주 교체되어 관청이 비는 데서 연유한 소치입니다. 이제부터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각별히 가려서 차임하여 5년 동안은 체차시키지 말도록 하며, 휴가를 받는 조항은 다 알고 있는 큰 사고를 제외하고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자주 체차하면 수령을 마중하고 전송하는 하는 폐단이 우려되고, 관청을 오래 비워두면 사무가 처리되지 못하여 걱정되는데 하물며 나태하여 직임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면 민읍(民邑)에 주는 피해는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자리가 비는 대로 가려서 차임하고, 임기가 차기 전에는 옮기지 말며, 휴가는 경솔하게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소서.
둘째 ‘각 읍의 민고(民庫)는 곧 백성을 위해 설치한 것인데, 근래에 와서는 온갖 폐단이 생겨나 경사(京司)에서 요구하고 영문(營門)에서 배정하여 해당 관에 내려 보내야 할 것도 문득 민고에 배정합니다. 이른바 해색(該色)은 연줄을 타고 농간을 부리며 토지와 가호에 배당하여 받아내는 것을 해마다 의무적으로 내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습니다. 각 읍에 있는 민고를 특별히 관고(官庫)로 만들라는 뜻으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다시 거듭 밝혀 알려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민고에서 지나치게 지출하는 것은 참으로 큰 폐단입니다. 이제부터는 별도로 관고를 만들고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을 영원히 엄하게 금지할 것을 일체 암행어사의 절목대로 시행하소서.
셋째 ‘병인년(1866)과 정묘년(1876)의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고 토지가 묵게 된 현상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진결(陳結) 중 아직 개간하지 않은 것은 나주(羅州)가 2,690결, 광주(光州)가 1,210결, 순천(順天)이 660결, 영암(靈巖)이 714결, 만경(萬頃)이 183결, 옥구(沃構)가 515결, 부안(扶安)이 250결, 함평(咸平)이 423결입니다. 다만 나라의 재정만 생각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미 모여든 백성들이 반드시 다시 흩어질 것이고, 이미 개간한 땅도 다시 묵게 될 것입니다. 무망결(無亡結) 중 이웃이나 친족들한테서 백징(白徵)하는 것을 도신에게 관문으로 신칙하여 특별히 조사하여 사실대로 조세를 매겨 5년 동안은 특별히 조세를 면제하였다가 후에 다시 복구해 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근래의 결정(結政)에는 묵는 것만 있고 개간한 것이 없으니 사실 이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각종 숨기고 누락된 것을 도신으로 하여금 엄하게 각 읍에 신칙하여 철저히 조사해서, 일일이 조세를 받아내게 하소서. 그리고 윗 항의 10개 읍의 진결 중 진실로 억울하게 징수하는 것은 연분(年分)을 기다려 사실대로 수계(修啓)하여 적당히 처리하게 하소서.
넷째 ‘나주(羅州)의 결총(結總)이 온 도내에서 으뜸이지만 흉년이 든 이후에 민력이 피폐해지고 고을은 영락하여 해마다 조세는 자연히 지체되고 있습니다. 기묘년(1879)부터 신사년(1881)까지 이미 실어 보냈으나 문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2만 2,814석이고 실어 보내지 않은 것이 8,273석인데, 이것은 사공과 곁꾼〔格軍〕이 농간하고 아전들이 포탈한 것입니다. 그 횡령한 여러 놈 중에 혹 죽거나 혹 도망하였고 또 그들의 친척까지도 마련해 내기 어려워 받아낼 길이 없으니 도망중인데 아직 체포하지 못한 자는 도신에게 관문으로 신칙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쫓아가 체포하여 법에 따라 처단하고, 축난 곡식 8,273석은 특별히 상정가(詳定價)로 대납시키되 연한을 정해 배분하여 납입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정공(正供)이 포흠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도망쳐서 아직 체포하지 못한 포흠 낸 아전은 기한을 정해 붙잡아 형률에 따라 처형하고, 포흠 낸 곡식은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다시 조사 확인한 다음에 장계로 보고하게 하소서.
다섯째 ‘나주(羅州)의 조세와 대동미(大同米) 운반선은 16척입니다. 매년 봄에 비록 경강선(京江船)과 집주선(執籌船)을 가지고 운반하지만, 초운(初運)과 재운(再運)이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재운선(再運船)은 한꺼번에 오지 못하고 가을이나 겨울까지 끌게 되므로 곡물은 자연히 부패하게 되어 번번이 갈등의 소지가 됩니다. 만일 단지 인부를 고용하여 싣는 것만 독촉하고 변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막중한 상납은 갈수록 지체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 읍의 제민창(濟民倉)은 바로 큰 항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능주(綾州)와 남평(南平) 두 읍의 조세 곡식을 받고 실어주는 것을 모두 다 이 포구에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여기에 조창(漕倉)을 설치해야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재물을 마련하여 새로 조창을 설치하고 사공을 가려 차출하며, 조선(漕船) 20척을 특별히 조성하도록 하며, 법성(法聖)과 군산(群山)의 규례대로 별도로 차원(差員)을 두어 나주, 능주, 남평 세 고읍의 세곡(稅穀)을 전적으로 관리하여 받아들여, 3월에 싣고 4월에 상납한다면 아전들의 농간과 고을의 폐단은 절로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이미 설치한 창고도 폐해로 지탱하기 어려운데 새로 설치한 창고가 과연 효과가 있겠습니까? 관문으로 본 도에 문의한 다음에 재결하여 처리하소서.
여섯째 ‘세 군데 조창의 조세를 되질하는 곡(斛)은 원래 규정이 있으나 오랜 세월 사용하다 보니 널판이 온통 손상되어 혹 암암리에 농간을 부려 네 모퉁이를 움직이면 턱없이 들어가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파다합니다. 유두(鍮斗)와 유곡(鍮斛)으로 비교하여 정식 외에 더 들어간 것은 일체 삭감하소서. 부세(賦稅) 상납 중 매년 부족해지는 것은 경기의 각 창고에서 정비(情費)를 지나치게 받아내고, 미곡을 되질하는 곡자(斛子)가 좀 크기 때문입니다. 정비에 대해서는 이미 감생청(減省廳)에서 없애도록 행회(行會)하였고, 곡자도 유곡과 비교하여 바로잡아 법대로 개조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정비에 대한 문제는 이미 위항의 복계(覆啓)에서 다 이야기하였고, 경기 각 창고의 곡자가 좀 큰 것은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자세하게 살펴보고 교정하게 하소서.
일곱째 ‘고을의 잡역미(雜役米)는 곧 녹봉(祿俸)과 읍속(邑屬)에게 지급되는 것인데, 근래 각 읍에서는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번번이 높은 가격을 요구하여,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정공(正供)보다 더 급합니다. 따라서 서로 비교하고 절충하여 매 석에 9냥씩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절목을 성급(成給)하여 해도에 관문을 발송하여 영원히 준수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미 암행어사가 참작한 절목이 있으니, 이대로 시행하도록 본 도에 통지하소서.
여덟째 ‘각 진영은 이미 분수껏 남길 것은 남기고 없앨 것은 없앴는데, 전주(全州)는 영(營)이 있는 고을이어서 폐해가 좀 적지만, 나주는 감영과 거리가 매우 멀어 전후로 폐단이 생겨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니 나주 진영을 전주진(全州鎭)에 이설(移設)해 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섬과 육지 사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심하게 된 것은 영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의 단자대로 이설하고, 지금 영장(營將)은 해조로 하여금 다시 하비(下批)하게 하소서.
아홉째 ‘이임(吏任)과 향임(鄕任)을 뇌물을 받고 임명하는 것이 곧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근래 고을의 수령들은 응당한 관례로 인정하고 교임(校任)과 향임(鄕任)을 오직 뇌물만 보고 아침에 차임했다가 저녁에 고치며, 심지어 아전들을 차역(差役)할 즈음에 혹 이방을 시켜서 전원을 흥정하게 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폐해가 미치고 상납이 포흠났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른바 이임과 향임을 뇌물에 의해서 차임하는 것은 과연 대단히 청렴하지 못한 짓입니다. 발견되면 장율(贓律)보다 배나 엄한 처벌을 하라는 뜻으로 규정을 만들어 준행하게 하소서.
열째 ‘산성향곡(山城餉穀)은 전부 모자라고 군기(軍器)는 쓸만한 것이 없는데, 이른바 진장(鎭將)은 한갓 자신만 영화롭게 하느라 녹봉을 허비하고 있으니 각 산성 별장(山城別將)을 모조리 혁파하고 해당 수령에게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겸하여 관할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성만 쌓아놓고 사람이 없으면 내버린 것과 같습니다. 군향을 공급하고 무기를 갖추는 것은 오직 어떻게 수행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별장이 단속하는 것도 관할 지역에 달려 있으니 이런 내용으로 관문을 만들어 신칙하게 하소서.
열한 번째 ‘좌수영(左水營)의 휴번전(休番錢)은 매년 남아있는 몫이 1,200여 냥이고, 병고(兵庫)에 이속시킨 것이 모두 6만 1,600여 냥인데, 혹 곤수(閫帥)가 가하(加下)하기도 하고, 혹 이노(吏奴)에게 뜯기기도 하여 한갓 빈 장부만 가지고 있어 귀록(鬼錄)이 되어버렸습니다. 비록 찾아내어 채우려고 하여도 전연 길이 없으니 포흠을 낸 괴수로서 살아있는 자는 형률대로 처형하고, 오래된 포흠은 특별히 탕감해 주고, 내년부터 휴번전으로 남아있는 몫 1,200냥을 특별히 해영에 주어 지방(支放)으로 쓰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많은 수효의 번전(番錢)이 횡령된 것은 법의(法意)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포흠을 낸 자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고, 가하한 곤수도 장부대로 보고하여서 독촉하여 받아내며, 그 중에 근거가 없는 귀록이라서 탕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체 부(府)에 보고하게 하소서.
열두 번째 ‘해남(海南)의 유학 이희면(李熙冕), 전주(全州)의 유학 고용진(高龍鎭)과 장문일(張文逸)은 학문과 행실이 모두 월등하니, 효자인 태인(泰仁)의 정승용(鄭昇容)과 열녀인 전주(全州) 유준근(柳俊根)의 처 김씨(金氏)와 함께 마땅히 작설(綽楔)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임형국(林馨國)과 김제(金堤)의 김영곤(金永坤)에게는 마땅히 증직(贈職)의 은전을 시행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열세 번째 ‘전주의 문관 이봉구(李鳳九)는 지난해 군사들의 반란이 있은 이후에 흥덕(興德)의 이복영(李復榮)과 함께 수만 냥의 돈을 뿌려 수많은 사람들을 모집하고 의리를 제창하였으며, 지휘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궁전(中宮殿)이 돌아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철수하여 돌아갔으니 이와 같이 충성과 의리를 지닌 사람은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전주의 문관인 김창석(金昌錫)은 서울과 시골에 출몰하면서 요언을 퍼뜨리고 비방을 하여 온 도내에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엄하게 징벌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겠지만, 조정 관리이므로 유사(攸司)로 하여금 형률에 따라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앞의 두 사람의 충성과 의리는 깊고도 훌륭합니다. 이봉구는 가자하고, 이복영은 상당직의 초사(初仕)와 대등한 자리에 조용하고, 김창석은 암행어사의 단자에서 나열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해부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좌도 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이도재(李道宰)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 ‘본도(本道)의 환곡(還穀) 폐해는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심합니다. 그런데 이무(移貿)하는 것을 이미 혁파하였으니 속히 뒷 마무리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내의 신구(新舊) 횡령 환곡에 대하여 별도로 조사해서 받아낼 수 없는 것은 탕감해주고, 받아낼 수 있는 것은 독촉하여 받아내서 실제 수량을 채우고 각 읍에 고르게 나누어 주고, 명색이 사환(社還)인 만큼 봄에 나누어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것을 전부 사창(社倉)의 규례대로 하여 영원히 민곡(民穀)으로 삼고, 약간의 이자만 거두어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 급대(給代)한 것은 원래 환곡과 이자를 돈으로 만든 것이 21만 6,000여 냥입니다. 이제 임오년(1882)부터 시작하여 기결(起結)에 따라 배분하여 거둔다면 매 결당 1냥 8, 9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은결(隱結)을 찾아내어 일체 배분하여 거둔다면 많아도 8, 9전에 지나지 않아 환곡의 폐해를 없앨 수 있으니 축난 것을 탕척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사창의 환곡을 설치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무(移貿)라는 명색은 원래부터 환곡을 타가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겨울에 영원히 혁파하라는 특교(特敎)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허위로 남겨 놓거나 백징(白徵)하는 일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만약 시일만 끌면서 미루게 되면 장차 수습할 방도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무릇 환곡의 탕감을 명백히 하고, 면적에 배분하는 것을 고르고 정확하게 하며, 숨기고 누락된 것을 샅샅이 조사하고, 사창은 규정대로 운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엄하게 독촉하여 축난 것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도신으로 하여금 충분히 토의하여 방법을 강구하고 구체적으로 논의하여 등문하게 하여 좋은 편을 따라서 품처하게 하소서.
둘째 ‘군안(軍案)을 마감하는 것은 이제 이미 혁파하였으니 읍에 소속된 군보(軍保) 중 쓸데없이 많은 것 또한 역시 조항에 따라 삭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읍리(邑吏)는 사적인 감정에 따라 놓아두거나 빼 버리고, 촌민(村民)들은 신역을 피하려고 숨기거나 누락시키니 다시 조사하여 호구 수에 따라 고르게 신역을 배분하고, 별포군(別砲軍)은 일일이 엄하게 신칙하여 빈자리를 채워 넣게 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이며 삭료(朔料)를 지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특별히 단속하지 않으면 어물거리는 폐단이 다시 줄지어 생길 수 있으니 아울러 도신에게 신칙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호포(戶布)의 역을 지운 것은 신역을 고르게 하려는 것이었고, 군안을 혁파한 것은 그 비용이 걱정해서입니다. 그 속이고 숨긴 것을 찾아내고 결원된 것을 채워 넣고 기예를 익히고 월봉(月俸)을 주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이미 철저하게 신칙하였으나 이대로 준행하고 감히 다시는 해이해지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도신에게 관문을 보내소서.
셋째 ‘본도(本道)에서 양전(量田)한 지 100여 년이 되어 자호(字號)도 문란해지고 복수(卜數)도 모호해졌습니다. 이번에 만약 탈이 났다고 속인 것을 조사하여 찾아낸다면 충분히 백징을 채워 보충할 수 있습니다. 도 전체를 개량(改量)하는 것은 별도로 재력이 어느 정도 생긴 다음에 의논할 수 있으나 각읍(各邑)의 은결(隱結)은 비록 임술년(1862)과 경오년(1870) 두 차례의 자수(自首)를 거쳤는데도 은루(隱漏)된 것이 많습니다. 강바닥이 되었다고 하면서 조세상납을 면하려고 도모하거나 전토(田土)를 개간하고 기한이 지나도록 조세를 내지 않는 자가 없는 읍이 없으니, 먼저 은결부터 도처에서 자수하게 하고, 탈을 구실대고 면세한 것도 찾아내어 일반 연도의 세액을 부과하고, 양전(量田) 비용이 부족한 몫은 비록 면적에 따라 징수하여도 백성들은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니 양전한 다음에 경영(京營)의 감정(勘情)은 일체 논하지 말고 은결과 탈결(頉結)을 실결(實結)로 취급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20년에 한 번씩 개량(改量)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데 경자년(1840) 이후에는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6등의 전품(田品)이 그 사이에 오르고 내린 것이 없지 않고, 사표(四標)도 많이 변해서 아전(衙前)들의 작간(作奸)이 이로 말미암아 점차 심해지고 백성들의 은닉도 이로부터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도 전체를 일시에 다 개량(改量)하는 것은 비록 갑자기 의논할 수 없으나, 올해와 내년에 차례로 한다면 어찌 편리하게 조처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런 내용으로 감영(監營)과 고을에 신칙하소서. 은결에 대해서 말하면 임술년(1862)과 경오년(1870) 두 해에 자수한 것은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책임을 메우는데 그쳤습니다. 토호(土豪)와 읍속(邑屬)들이 숨기거나 탈이 났다고 하는 것은 사실 종전과 다름이 없으니 일의 놀랍고 한탄스러움이 어떤 것이 이것보다 심하겠습니까? 도신을 엄하게 신칙하여 남김없이 조사해서 경비와 양전 비용에 충하게 하고, 이미 양전한 다음에는 서울이나 지방 사람들의 정비(情費)를 모두 엄격히 방지하도록 분부하소서.
넷째 ‘본 도의 조운(漕運)에 관한 법이 오래되어 폐해가 생겨 몇 해째 임선(賃船)으로 운반하고 있습니다. 배를 만드는 것보다는 비록 폐단이 줄었다고 하지만, 겨우 1년이 지나자마자 폐단은 다시 여전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관소(館所)에서 풍범선(風帆船)을 세내어 싣는 예가 있어 그 적재량을 알아보고 그 빌리는 값을 계산해보니 1,000석을 싣는데 빌리는 값이 300석도 안 되고, 신속하게 왕래하는 것이 조선(漕船)이나 임선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몇 척의 사선(使船)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함장에게 포장해서 조운하게 하고는 그저 일을 주관하는 색리(色吏)를 시켜서 그 자물쇠를 관장하게 하고 약속한 날짜에 정박하도록 한다면 허다한 폐단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도신과 동래 부사(東萊府使)에게 관문으로 신칙하여 값을 정해 빌려 싣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최근에 와서 조세 운반의 폐해가 극도에 달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번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논의에는 좋은 의견이 없지 않으나 처음 하는 일인 만큼 도신으로 하여금 동래부(東萊府)에 편리 여부를 자세히 알아보게 하여서 운반하는 방도를 도모하게 하소서.
다섯째 ‘동해 연안 각 읍의 바다와 포구의 폐해는 육지보다 심합니다. 겨울철에 월령(月令)으로 진헌하는 물종에는 본래 정해진 제도가 있는데 예조(禮曹)의 관리 외에 또 해감(海監)이라는 명색을 가진 자가 있어서 공무를 빙자해 사적으로 운영하면서 몇 배나 요구하여 받아내고 있으므로 영락한 백성들은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안 읍의 해감은 모조리 혁파하고, 진상하는 물종은 등록(謄錄)에 따라 바로잡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읍의 신역은 간단하고도 정밀하게 마련하되, 만약 별도로 신칙이 없으면 종전의 폐습을 답습하는 현상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도신에게 행회하여 엄하게 뒷날의 폐단을 방지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바닷가의 민호(民戶)는 육지의 백성과는 달리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감영과 고을의 하속들이 이를 빙자해서 가렴주구하는 것이 한정이 없습니다. 하소할 데 없는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각 항의 폐막에 대해서는 암행어사가 이미 다 바로잡아 고쳤으니 이대로 시행하고 만일 폐해를 끼친다고 탄식하는 일이 있게 되면 논책(論責)이 어느 감영과 고을이든 똑같이 미친다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신칙하소서.
여섯째 ‘각 역(驛)이 영락하여 거의 참(站)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크고 작은 공무를 행한다고 말을 무절제하게 함부로 부리고 있으며, 각영(各營)의 하속들마저 초료(草料)도 없이 왕래하며 탈 것을 요구하고 먹을 것을 찾는 실정입니다. 이른바 외역 도장(外驛都長)이란 본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방(吏房)이나 병방(兵房)들은 필채(筆債)라고 하면서 많은 수량을 받아내고 공물(公物)을 다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역마(驛馬)로 세울 때 뇌물을 주면 배나 되는 값으로 팔 수 있고, 건네주는 것이 없으면 1전(錢)도 쳐주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각 역에 엄격히 신칙하여 종전의 나쁜 폐습을 철저히 혁파하게 하며, 이런 폐단이 다시 생기면 해당 찰방(察訪)을 적발해서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암행어사의 별단에서 남김없이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습니다. 만일 다시 이러한 폐단이 있으면 해당 찰방을 즉시 계문하여 파면시키고 처벌하며, 함부로 쓰고 토색질한 하속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행회하고 별도로 신칙하소서.
일곱째 ‘각 고을 수령들이 하속을 임명하면서 뇌물을 받고 아전 중 뇌물을 주고 차임되기를 도모하는 자들이 공전(公錢)을 포흠내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때문에 상납이 적체되고 읍의 폐단이 극심합니다. 각영(各營)과 각진(各鎭)의 수령이나 찰방을 막론하고 만약 뇌물을 받고 아전을 임명하는 자가 있으면 나타나는 대로 도신이 계문하여 처벌하되, 장률보다 배나 엄중하게 처벌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속을 임명하면서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종전에 들어본 적이 없으니, 수치를 끼치고 염치를 훼손시킴이 실로 이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일로 발각되는 자가 있으면 장률보다 배나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의금부(義禁府)와 해도(該道)에 분부하소서.
여덟째 ‘각 읍의 관수미(官需米)와 기름, 꿀, 종이 값으로 내는 쌀을 본색(本色)으로 내는 읍도 있고, 돈으로 대신 내는 읍도 있는데, 매번 지나치게 받아내기 때문에 백성들의 신역이 고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세히 조사해서 줄여서 정해 주었으나 오래 시행되리라고 기필할 수 없을 듯하니, 풍년과 흉년을 참작하여 일정한 값을 정하고 절목을 성급(成給)해 주라는 뜻으로 관문으로 신칙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도 또한 백성들의 폐해와 크게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금칙하는 조령(朝令)이 있었지만 암행어사의 조치가 깊이 적중하였으니 이대로 절목을 만들어 준행하고, 간혹 위반하는 수령이 있으면 도신이 낱낱이 살피고 나타나는 대로 보고를 하여 논감하소서.
아홉째 ‘대구(大邱)에서 호조(戶曹)에 납입할 병자년(1876) 조 쌀의 대전(代錢) 3만 1,000여 냥은 혹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유리(流離)되어 거두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떼먹은 아전이 사망하여 받기 어렵기도 하고, 혹은 발송하였으나 차인(差人)이 가로채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다 친척이 없어 받아낼 곳이 없어 7, 8년 동안 처리방법을 찾지 못하였으니, 관문으로 도신에게 신칙하여 충분히 토의해서 조치를 취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도신이 진계(陳啓)하는 대로 마땅히 편리한 방법을 강구하여 품복(稟覆)하겠습니다.
열 번째 ‘동래부(東萊府)의 획급미(劃給米) 9,000석을 나누어 획급할 즈음에 매번 거리가 좀 먼 읍에서는 수송하는 도중에 허비되는 것이 적지 않으며, 대부분 월당(月當)을 어기고 해를 넘기도록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해부(該府)의 부근 몇 개 읍에 수량을 나누어 배분해 획급하는 것을 해마다 일정하게 정하고, 월당은 이전에 하납(下納)하던 규례대로 4월을 기한으로 하고 기한을 넘긴 지난 수령은 동래부에서 적발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곧바로 논감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변방 중요한 지역의 모든 수요가 전적으로 여기에 의탁하고 있는데, 이것이 횡령되면 어떻게 손을 쓰겠습니까? 이렇게 기한을 정했는데도 만약 지연시키며 어긴다면 해당 수령은 동래부에서 직접 논계(論啓)하고 처벌을 요청하도록 분부하소서.
열한 번째 ‘대구(大邱)의 진사(進士) 서찬규(徐贊奎)는 행실이 독실하고, 효성스럽고 아우에 대하여서는 우애가 깊으니 마땅히 발탁해서 등용하고, 영덕(盈德)의 고(故) 의사(義士) 신규년(申虬年)은 충성과 의리가 높았으니 마땅히 정이(旌貤)를 시행해야 하고, 풍기(豐基)의 유학 도시복(都始復)은 성실함과 효성이 평소 드러났으니 마땅히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각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우도 암행어사(慶尙右道暗行御史) 이헌영(李𨯶永)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 ‘조운(漕運)하는 20개 읍에 세 개의 창고를 나누어 짓고, 창원(昌原), 진주(晉州), 밀양(密陽) 등 세 읍을 도차읍(都差邑)으로 정하여 그 소속된 읍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근래에 도창(都倉)의 폐해로 인해 창고를 나누는 조치까지 있었으나, 창고를 나눈 뒤의 폐단은 도리어 읍속(邑屬)들의 농간과 선주(船主)들의 포흠보다 심하니 마땅히 도창을 설치하고 거듭 옛 규례를 밝히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창고를 나누면 창고를 나눈 폐단이 있고, 도창에는 도창의 폐해가 있으므로 알아보고 의논하여 경장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또한 이 별단의 내용에 따라 관문으로 도신에게 편의 여부를 물어 처결하소서.
둘째 ‘도내(道內) 연해 각 읍의 어염세(魚鹽稅), 곽세(藿稅), 선척세(船隻稅) 등의 세금은 바로 균역청(均役廳)에 상납하는 것인데, 근래에 와서 해산물과 관련한 폐해가 점차 심해져 고기를 잡는 가호들이 영락하고 있으며, 억울하게 징수당하고 이중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새로 개업하면서 숨기거나 누락된 것, 파산하였거나 폐업한 것을 백징(白徵)하는 현상이 더 나타나고 있으니 도신과 읍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운영 실태를 철저히 조사하여 세납이 고르지 못한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어선이나 소금가마가 더 나타나면 세금을 물리고, 진폐(陳廢)된 것은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이 원래 법의 규례입니다. 별도로 열읍에 신칙하여 사실대로 철저히 조사하여 누락되거나 억울하게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셋째 ‘각 포구의 백일세(百一稅)라는 명색은 경오년(1870) 이후에 실시한 것인데, 포료(砲料)를 보충하는 몫인 7,300 냥 외에는 모두 쓸데없는 잡비입니다. 근래 대부분 이중으로 세금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른바 백일세는 영원히 혁파하고 해영(該營)의 포료는 다른 데서 변통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몇 해 전에 암행어사의 논계에 따라 금지하라는 뜻으로 이미 행회를 하였는데도 줄곧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망을 자심하게 하였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모든 것을 철저히 혁파하고, 포료는 다른 데서 조처하도록 행회하여 엄하게 신칙하소서.
넷째 ‘통영(統營)의 환곡(還穀)과 향곡(餉穀)으로 영남(嶺南)에 산재해 있는 것이 쌀로 환산하면 10만 석이 됩니다. 산간 읍은 상정가(詳定價)로 작전(作錢)하는데, 해안의 읍에서는 본색으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색의 값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한도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니 통영의 환곡 모미(耗米) 중에서 본색을 작전하는 수량은 조미(漕米)의 시가(時價) 안에서 줄여 정해서 연해의 백성들이 고르게 혜택을 입도록 하고 통영의 편분전을 빚지고 있는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죽었는데도 이웃과 친척들에게 마구 받아내어 갈수록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니 특별히 탕감해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해곤(該閫)의 양향곡(糧餉穀) 모미와 편분전(便分錢)은 백성들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된 지 오랩니다. 이번에 진달한 것은 충분히 논의된 것이니 후에는 작전하는 것은 제반의 조미 시가와 비교하여 반드시 줄여 정하고, 편분전을 마구 받아들이거나 받아내기 어려운 것은 장부를 조사하여 탕감하되, 그 정형을 모두 즉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도록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소서.
다섯째 ‘대구부(大邱府)는 한차례 병자년(1876)의 큰 흉년을 겪은 후에 유망(流亡)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서 병자년 몫으로 호조에 상납할 것을 청산하지 못한 돈이 2만 7,490여 냥인데 모두 받아낼 곳이 없습니다. 구환미(舊穀米) 8,700여 석도 이전부터 포흠으로 축이 났던 것인데, 전 도신이 실태를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한 수효입니다. 이 문제를 잘 처리할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 일은 이미 도신이 장계로 보고한 것인데 돈의 수가 도신의 계사와 차이가 나니, 다만 마땅히 품복(稟覆)하여 행회하게 하소서.
여섯째 ‘성주(星州)는 강가에 위치하여 예전부터 포락(浦落)하였는데도 재해 면적으로 인정받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으며, 매 결당 3부(負)씩 해마다 더 배정하여 모자라는 수효를 보충하였습니다. 결세(結稅)로 매겨진 것 외에 더 거두어들이는 것은 사실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되니 윗 항의 더 거두어들이는 면적 207결(結) 10부(負) 5속(束)과 재해 면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각 면의 97결 99부 4속에 대해 특별히 면제하여 구휼해 주는 정사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관계되는 것이니 구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연분(年分)을 수계(修啓)할 때, 상세하게 조사하여 등문하게 하소서.
일곱째 ‘진주(晉州) 창선 목장(昌善牧場)의 둔세(屯稅)는 매 결당 받아들이는 것이 정공(正供)과 비교해 보면 거의 서너배가 넘어 장차 경작하려는 백성들이 없을 것입니다. 거제부(巨濟府)에 있는 목장 각지에서 지나치게 받아내는 조세와 함께 아울러 면제하고 쓸데없는 잡비를 혁파해 주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태복시(太僕寺)와 관계된 문제이니, 해시(該寺)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소서.
여덟째 ‘본 도 각 역(驛)의 조락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위토(位土)가 모래에 묻히고, 강바닥이 된 것은 다시 개간할 수 없으니, 역속(驛屬)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데다가 말의 수효가 빈 것이 많은데, 크고 작은 공무를 행하는데 더 끌어가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부하들이 함부로 타는 것이 거의 한도가 없어서, 백성들은 흩어지고 참(站)이 끊어지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새로 규정을 정한 후에는 노문(路文)마저 모두 그만두었으며 근래에 간혹 각 역이 사사로이 내통하여 지공(支供)을 요구하고 있으니 모두 관문으로 신칙하여 금지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각 역이 도처에서 조락되는 것이 근래 더욱 심합니다. 더 끌어가고, 함부로 타고, 토색질하는 각항의 폐단에 대하여 별도로 살펴 금지하고 발각되는 대로 일체 법대로 처리하도록 본 도에 신칙하소서.
아홉째 ‘상주(尙州)의 유학(幼學) 조동좌(趙東佐), 진사(進士) 김근연(金近淵), 안의(安義)의 유학 신돈구(愼敦九)는 학행을 갖추었고 효성스러우니 마땅히 가상히 여겨 장려해야 하고. 집의(執義)에 추증된 지례(知禮) 이윤적(李胤績)은 학문과 행실이 특출하였으니 마땅히 이증(貤贈)을 시행해야 하며, 거창(居昌)의 학생 신성열(愼性烈)은 효성이 지극하고 행실이 독실하니 마땅히 정포(旌褒)를 시행해야 하고, 진주(晉州)의 한량(閑良) 송지수(宋芝壽)의 모친 정씨(鄭氏), 선산(善山)의 학생 심상한(沈相翰)의 처 황씨(黃氏)는 효성과 정절이 겉으로 드러났으니 정려(旌閭)를 시행하소서.’라고 한 일입니다. 이것은 전례대로 각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강하(趙康夏)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도에서 지금까지 포흠한 관원 중에 당사자가 죽었거나 도망을 친 것이 확실하여 의심 없는 자들을 뽑아 전곡(錢穀)의 수효와 성명, 연조(年條)를 읍(邑) 별로 기록하여 별도로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냅니다. 축이 난 환곡(還穀)을 쌀로 환산하면 13만 석이나 되는 많은 양입니다. 만일 탕감해 준다면 모곡(耗穀)도 탕감한 수량을 따르니 급대(給代)하는 것도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구(大邱)는 폐해가 누적된 읍으로서 상납을 마감하지 못한 것이 2만 9,100여 냥이 되는데, 한갓 빈 장부만 안고 있으면서 청산할 기약이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도(本道)의 환곡 폐해는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만일 별도로 경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누락을 보충하겠습니까? 축이 난 환곡을 탕감하여 없앤다면 모곡도 따라서 줄어들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방금 암행어사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폐단을 수습할 제반 계책을 도신으로 하여금 충분히 토의하고 논계(論啓)하게 하라는 뜻으로 품복(稟覆)하여 행회하였으니 속히 구체적인 의견을 등문하게 하소서. 대구에서 호조(戶曹)에 바치지 못한 돈이 이렇게 많으니 공화(公貨)의 중요성으로 헤아려 볼 때 실로 성급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받아낼 곳이 없다면 마땅히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면제를 허용하고 기타 세미(稅米)와 돈은 더 독촉해서 받아내어 꼭 결속을 지으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4일 신축
박정양(朴定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주영(李胄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9월 25일 임인
각국 공사(公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세우는 북관왕묘(北關王廟)가 지금 이미 준공되었으니 제식(祭式)과 절차는 동남묘(東南廟)의 규례대로 하라. 관서(關西)에 묘를 세운 것도 몇 해가 되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봉송(封送)하는 절차를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의 규례대로 하고,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9월 27일 갑진
인정전(仁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현명호(玄明昊)를 제술(製述)에서는 시(詩)에서 진사(進士) 김명균(金明均)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진찬(進饌)하는 절차는 이미 해당 각사(各司)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였으나, 올해 흉년이 들었으니 성대하게 거행하지 말라는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었다. 산처럼 장수하시기를 축원(祝願)하는 나 소자(小子)의 심정은 비록 끝이 없지만 겸허한 성덕(盛德) 또한 우러러 체득하여 받들지 않을 수 없다. 올 가을에 동조(東朝)의 진찬례(進饌禮)를 행하는 것은 다시 하교를 기다리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직부(直赴)하도록 한 김명균(金明均)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조석여(曺錫輿)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9월 28일 을사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이어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宣嬉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9월 29일 병오
신태관(申泰寬)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심순택(沈舜澤)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순조(鄭順朝)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민영목(閔泳穆)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한규직(韓圭稷)과 구완식(具完植)을 군국사무 협판(軍國事務協辦)으로 삼았다. 특별히 이봉구(李鳳九)를 제수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삼았다.
지방에 있는 유생(儒生) 정혼(鄭混)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은 큰 덕과 깊은 학문을 지녔고, 뛰어난 절개와 큰 의리로 사문(斯文)에 공이 있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청이 여러 차례 유생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신들은 다시 진달하니, 윤허를 받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는 윤리와 양심을 힘껏 부지하여 과거를 계승하고 현재를 열어 준 공이 있으니 덕과 도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제향하는 반열에 올리는 것은 비단 신들의 사적인 의론이 아니라 실로 백대를 내려갈 공의(公議)입니다. 신(들은 지난날에도 상소를 올려 함께 배향(配享)할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또 성균관(成均館)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상소에서도 서로 의논하지 않았는데 동일하였습니다. 이번에 재결하여 처분하실 때에 만약 함께 배향하는 은전을 받지 못한다면 신들의 억울한 생각이 어떻게 끝이 있겠습니까? 서원(書院)을 다시 설치하는 문제 또한 조정에서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덕을 숭상하던 미풍(美風)이며, 더욱 나라의 성대한 거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열성조(列聖朝)에서 미처 실현하지 못한 뜻을 체득하여 모두 처분하여 세도(世道)를 맑게 하고 사문(斯文)에 다행한 일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선정신(先正臣)을 문묘에 배향하는 일은 이미 지난날에 비답한 것이 있다. 서원을 다시 설치하는 문제 또한 성급하게 의논하기 어려우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유생(儒生) 김영년(金永年)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근래 지방과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로 강하게 아뢰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삼가 읽어보니 ‘김 문경공(金文敬公), 조 문열공(趙文烈公), 두 선정신을 문묘에 배향할 것에 대한 논의는 사실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한 의전이고 또한 그 일을 중시하고 그 예를 존중하는 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은혜로운 전교(傳敎) 반포하여 곡진하게 깨우쳐 주시니, 누군들 대성인의 보통을 뛰어넘는 대중지정(大中至正)한 견해에 대하여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어진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훌륭한 의절이고, 문묘에 함께 배향하는 것은 대례(大禮)입니다. 성대한 의절로 대례를 거행하여 세도(世道)를 면려하고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대기(大機)이니 특별히 유사(攸司)에 명을 내려 김집과 조헌을 문묘에 배향하는 의전을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선정신을 종향(從享)하는 일을 이 상소에서 또 보게 되었으니 사실 대동(大同)의 논의임을 알겠다. 마땅히 조정에서 재결하여 처분이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9월 30일 정미
전교하기를.
"독판(督辦) 김병시(金炳始)는 이용사(利用司)와 군무사(軍務司)를 겸하여 관장하고, 독판 조영하(趙寧夏)는 농상사(農商司)를, 독판 정범조(鄭範朝)는 감공사(監工司)를, 독판 김유연(金有淵)은 전선사(典選司)를 모두 구관(句管)하며, 협판(協辦) 윤태준(尹泰駿)은 농상사와 군무사를 겸해서 관장하고, 협판 민종묵(閔種默)과 구완식(具完植)은 농상사를, 협판 김윤식(金允植)과 박정양(朴定陽)은 감공사를, 협판 한규직(韓圭稷)은 군무사를, 협판 이교익(李喬翼)과 조준영(趙準永)은 이용사를, 협판 한장석(韓章錫)과 어윤중(魚允中)은 전선사를 모두 구관하고, 참의(參議) 조동희(趙同熙)는 농상사와 군무사를, 참의 신기선(申箕善)은 전선사와 농상사를, 참의 민응식(閔應植)은 농상사와 이용사를 모두 겸관하고, 참의 이중칠(李重七)은 감공사를, 참의 왕석창(王錫鬯)은 농상사를 모두 구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사(內司)와 여러 사(司)에 대한 사무는 일체 독판이 구검(句檢)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조연(李祖淵)이 비록 외아문(外衙門)의 협판이나 이미 군사를 거느리는 책임이 있으니 내 아문(內衙門)의 군무사(軍務司) 사무를 일체 겸하여 관장하라."
하였다.
특별히 이호준(李鎬俊)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선근(金善根)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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